2015.12.10 20:48
예수 그리스도
1984. 3. 13. 화새벽
본문: 베드로후서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그것이 무엇을 나타낸 말씀인가? 다 그것이 해석하는 영감 받아서 해석하는 사람들의 해석이 다 거의 공통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석류가 외모는 보기에 아름답지 안하고 그렇게 참 못났지마는 겉으로는 보면 과일 한 개 같이 그렇게 보이지지마는 그것을 반 쪼가리로 쪼개서보면 그 안에는 수많은 열매가 들어 있습니다. 열매 한 개 속에 수 많은 열매가 들어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 석류입니다. 또 겉은 그저 푸르고 약간 붉은 미가 있는게 그렇게 아름답지 않는데 그 속은 열어 보면 아주 자잔한 열매가 꽉 배겨서 빈틈 없이 너무 많이 서로 밀착되게 배겨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일이 견디다 못 해서 세모배기도 있고 네모배기도 있고 마구 졸려서 이렇게 꽉 다져 가지고 있는데 그 색깔이 아주 아름다운 혈색입니다. 다른 무슨 물을 들이서 물도 그 참 아름답게 염색하면 아름다운 것이 있고 이런데 그 염색가가 염색으로 들이 가지고는 그렇게 깨끗하고 아름다운 그런 색깔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아주 깨끗한 그 피색입니다.
피색. 피색으로 그 피색이 그 사이를, 그 열매는 또 하얀데 열매는 흰데, 그 열매를 연결시킨 그 연결은 꼭 피색의 그 핏줄이 꽉 연결돼 가지고서 핏줄 연결로 그 흰 열매를 얽어서 가운데 가득히 찬 그런 형태를 가지고 있어서, 아무래도 쪼개보면 참 아름답다, 대단히 깨끗하다 그런 감을 느낄 만침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석류를 실제로 쪼개서 반쪽을 채워 보면 '아, 석류 한 쪽과 같다하는 여기에 대한 해석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덕이라는 것은, 겉은 하나인데 속은 보니까, 한 가지 어려운 일을 했다면 겉은 그 어려운 일로 하나가 나타났지마는, 그 내용을 인간들이 볼 수 없고 인간들이 알 수 없는 그 속에 내용인즉, 아주 그 열매를 하나 맺은, 그 좋은 행위의 결과를 맺운, 그 결과 맺은 그 행위와 같은 그 행위 작용이 그 속에는 수없이 가득히 차 있더라 하는 그런 표시입니다.
사람이 겉은 아주 그 행위가 훌륭하나 그것을 시간적으로 일시 볼 때는 훌륭한데, 사람이 볼 수 없는 그 시간이 지나고 지나고 시간이 지나면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게 시간적으로 외식입니다. 시간적으로 일시에는 아름다운 그 결과를 가지고 있으나 그 속에 겪어 보고 겪어 보고 하니까 차차 차차 속에 허무하다 그 말입니다. 그러나 그 반대로 일시에 보기에는 아주 허무한 것 같으나 시간적으로 한 시간 지나, 하루 지나, 일 년 지나, 십 년 지나 자꾸 겪어 볼수록이, 사람이 볼 수 없었던 그 속에 그런 그 어려운 행위라면, 그 행위를 차차 차차 두고 볼수록이 발견해 볼수록 이 세월이 갈수록 그 속에는 굉장한 충실한 내부가 있더라, 그게 시간적 진실인데, 또 공간적으로 보니까 이 자리에서는 아주 그 사람이 그 면에 대해서 어려웠었는데 고만 그 공간이 바꿔져서 저 자리에 가 보니까 허무합니다. 여기에서는 성자 노릇하더니마는서도 저 자리 가 보니까 깡패입니다. 또 여기에서는 아주 성자 노릇했는데 저 곳에 가서 보니까 아주 사기꾼입니다. 그렇게 그거는 공간적으로 외식하는 자요, 겉은 열매 같은데 속에 보니까, 열매, 아무 것도 아닌 흙 뭉티기 모양으로 그렇게 속이 허무합니다. 또 그 사람을 종류적으로 보니까 한 면은 보니 훌륭한데, 그 속에 들어 있는 이 면 저 면을 보니까 그 속에는 한 면 그것뿐이지 그 속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 사람은 종류적으로 허무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어서, 그 사람이 철야 기도를. 그렇게 늘 다 자기 침소가 있는데 늘 와서 철야 기도를 그렇게 계속해서. 그저 일 년 열 두 달 계속하고, 일 면 이 년, 삼 년 계속하니까 그 사람이 그 면만 보니 참 그럴 신앙가가 없을 만침 그랬는데, 다른 면을 보니까 다른 면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수 믿는 행위가 다른 면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게 종류적으로 외식자요 알맹이가 없는 자인데, 이 석류 한 조각은, 그 사람이 그저 철야 기도하는 줄 알았더니마는서도 그 속에 다른 면을 보니까 이 면 저 면을 보니 참 놀랠 만치 그 내부가 충실하고 모든 종류면마 다 다 놀랠 만치 되어서 그 사람이 도무지 어떤 사람인지 하나로 단정하지 못하겠더라. 이래 보면 이 사람이요, 저 면을 보니까 저 사람은 그것만 하는 사람 같고, 또 그 면을 보니까 그 사람은 전부 그것만 하는것 같고, 이래서 이모 저모 모든 면을 보니 그 사람은 겉보다 속이 충실하고 구비하고 온전 하더라. 그와 같이 그 사람이 고렇게 하나님에게 대해서만 그런 줄 알았는데 그 사람이 사람에게 대해서 어떻게 철저하게 꼭 성경대로인지, 그 사람이 하나님과 사람만 아는 줄 알았는데 또 그 사람이 하는 모든 일들을 보니까 이 일 저 일 어떻게 그 모든 일이 참 철저해서 그 일만 꼭 전공하는 전문가 같은데, 하나님에게 대해서, 사람에게 대해서, 일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러니까 저 사람은 저리 치우쳤으니까 아마 물질면에 대해서는 허무할 것이라 이래 생각했는데, 아, 물질면에 보니까 그 사람이 너무 철두철미합니다. 그 물질면에 보니까. 이러니 그 사람이 석류 한 쪽같은 그 인격이다. 성도를 주님이 아름답게 보시는 그 미 중에 이 볼과 같은 이 뺨 말이요, 이 뺨이 잘 생기면 그것도 아주 아름답지 않습니까? 전 안면에 좀 거석해도 뺨이 좀 잘 생기면 거기에 묻히고 귀하다 그말이오. 그 뺨 잘 생긴 것, 그와 같이 성도들의 미는, 요 면의 요 미가 또 주님이 미로 보는 미 중에 하나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여러가지 미를 가리켜서 말씀해 놨는데 그랬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어제 그와 같은 종류의 것을 하나 말했습니다. 어제 아침에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은 베드로가 말을 해서 베드로의 자기 자유 의사로 이렇게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유 의사로 말을 해서 자유 의사를 용납했고.
자유 의사로 했지마는 성령님의 감화 감동으로, 베드로의 그 자유 의사를 옳게 바르게, 이렇게 성령의 감동으로, 이런 자유 의사에 자기가 생각하고 원하는대로의 발표를 한 것이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님의 의를 합입어 동일 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 하노니' 이렇게 말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기록을 기계적 영감이라고도 하고, 축자적 영감이라도 하고.
그저 감화적 영감이라고도 그렇게 하고 별별 그 말이 많이 있는데 제일 바른 해석은 유기적 영감입니다. 유기적 영감이라는 것은 인간의 그 자유 의사를 다 인정을 하고 용납을 해서, 자유 의사의 전부를 성령이 감화 감동시켜서 자기의 그 자유 의사가 되도록. 그렇게 옳고 바른 것을 감동시켜 가지고 성경을 기록하게 한 것이, 유기적 영감인데 그게 제일 옳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에게 이렇게 영감시켜서 베드로가 이런 영감을 가지고 이런 사상, 신앙 사상을 가지고 이런 발표를 하도록 이렇게 하신 것은 베드로만이 아니고 우리들에게도 베드로와 같은 그 성령님이 오시면 우리도 이와 같은 자유 의사를 가지고 이런 신앙 사상을 가지고 이렇게 말 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그말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령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베드로가 이렇게 발표한 것과 같은 이런 발표하는 사람이 되는 것을 원하시고 또 우리에게 와서 성령이 내주하셔 가지고 역사하시면 차차 차차 단번에는 안 돼도 이 베드로가 여기에 발표한 거와 같은 이런 사람이 되기를 원하셔서 역사하신다.
그러면 이 베드로가 이렇게 발표한 이 발표에 베드로의 그 사상이 어떤 사상인가? 그이의 정신이 어떠하며. 그이의 안팎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여기에 발표해 놨습니다. 안팎이 어떠한가? 그저 예수님이면 예수님. 또 그리스도면 그리스도, 사도면 사도, 종이면 종, 또 시몬이면 시몬, 베드로면 베드로 이 하나만 하면 될 터인데 이 하나를 발표하지 안하고 이렇게 복잡한 많은 부분을 발표한 것을 보면, 베드로는 하나를 말하려고 할 때에 그 하나만이 자기가 말할 수 없고, 자기 속에 하나를 말하는 그 속에는 많은 것이 이 한 마디로 발표된다, 속에 수많은 그 많은 것이 외부는 하나로 발표된다. 하나로 발표돼도 하나로 발표하는 그 속에 속인즉 발표한 그와 관련된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하나를 발표하는데 발표한 그 발표와 관련된 그 속에 알맹이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한 마디 할 때에는 그 속에 열이고 스물이고 가지고 있으면서 발표는 하나로 하고 있다. 그 사람이 겉에 발표할 때에는 아주 속에 많이 들어 있는 것같이 그렇게 발표를 했는데, 안에 보니까 겉에 발표한 것보다 안이 허무합니다.
여러면으로 보니까 속이 텅 비었다 그거요. 그런데 이 베드로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면 예수님이지. 예수님하면 뭐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또 그리스도가 예수님이요, 또 내나 예수님이 하나님이시요, 하나님이 그리스도시요.
하나님이 예수님의 신성이시요. 또 여호와시요 이런데 이래 왜 베드로가 이렇게 발표할 때 이렇게 했는가? 그렇게 발표한 것은 그가 그만 '예수님' 하려고 하니 예수님만 가지고는 안 되고 그리스도라고 또 말하고. 또, 자기를 말할 때에 그저 종이면 종이지 그만, 종이라, 사도라, 시몬이라. 베드로라 대단히 그 속에 복잡하고 아주 많은 양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발표하는 사람이라. 그러면 표시보다 속에 내부가 많다 하는 그것을 여기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어제 아침에 말한 대로, 그 후란시스 제자들이 산에 기도하러 가 가지고서 그 선생님은 어떻게 기도하는고 보자 하고서 엿들어서 한 달 동안인가 엿들으니까, 늘 기도하는 것이 항상 같은 기도를 하더라고서. 무슨 아주 구비한 무슨 기도를 할 줄 알았는데, 단지 기도하는 것이 이날 아침에도 들어 보니까 그 기도, 낮에도 들어보니까 그 기도, 밤에도 들어보니까 그 기도, 내일도 들어보니까 그 기도, 무슨 기도?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이렇게 말해 놓고 난 다음에는, 그저 한나절도 지내고 하루도 지내고. 그라면서 자꾸 이래 눈물만 흘리고 그라고 있으니, 저게 무슨 기도인가? 제자들이 그것을 이해를 못 했다 그거요. 못 하고 그 전기를 기록할 때에 '그렇게 기도하더라' 이렇게 기록했는데, 그것을 많은 신앙가들이 그 전기를 읽는 가운데서 다 깨닫기를, 그는 '예수님' 할 때에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요 참 사람이시다. 예수님이, 예수님이 근본 어떤 분이시다하는 것을, 이렇게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해 놓고, 예수님이 근본 영원 자존하심에서부터 그가 어떠하신 분이라 하는 그분의 지극히 크고 영광스러움을 자기가 이렇게 명상하니, 거기에는 두려움이 나올 수 밖에 없고, 또 그분이 모든 것을 희생해서 사람되어 창조주가 사람되어, 우리가 아무리 해도 우리 손으로 만든 것, 우리가 만들어 놓은 것 그거와 같이 제가 되어진다는 것은 그게 얼마나 천해지는지, 여러분들이 부인들로 말하면 요리를 만들지 않습니까? 요리 만든 식물 그와 같은 그와 같은 가치의 것이 되어진다는 거는 얼마나 그게 천해 지고, 얼마나 낮아지고 얼마나 아주 그렇게 무가치하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되어 오셨다' 그분의 사랑이 어데까지, 넓이가 어데까지 며,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데까지인가? 그분의 사랑의 그 광대하심을 자기가 십자가에 대속했다. 뭣 때문에 하나님이면 하나님이지, 또 인성을 입어 신성. 인성, 신인 양성이 꼭 언제든지 너는 피조물이고, 나는 창조주고 이래 가지고서 신성은 신성으로, 인성은 인성으로 이렇게 계실 수 있고 행동 할 수 있는데 신성 인성이 한 겨위를 이루었는가? 뭣 때문에 그렇게 하나님이 사람되셨는가? 또 사람이면서 또 하나님이셨는가? 여기에서 하나님과 원수되어 끊어진 인간을 대속해서 하나님과 인간이 결합되는 그 결합을 하나님과 사람이 그저 친밀해지는, 또 화합해지는 여기에서 그치지 안하고. 한 격위를 이루는 거기까지에 그 결합을 원하셔서, 양성 일위를 가지신 것, 또 대속하신 것 영원한 창조주가 피조물로 부활하신 것. 이렇게 후란시스 자기를 위해 역사하신 그 주님을 하루 생각해도 모자라고, 이틀 생각해도 모자라고, 그 분을 생각하니 그분을 위해서 죽어도 모자라고, 그 분을 위해서 여생을 살아도 모자라고 이러니까 그 분을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하고는 그 한마디 하고는 아무 말도 안하고 그저 눈물만 줄줄 흘리고, 또 벌벌 떨고 또 나도 주를 위해서 어떻게 죽어 영광스럽게 된다면은 죽어 영광스럽게 하겠고 살아 영광스럽다면 살아 영광스럽게 하겠고, 이런 일.
저런 일 어떤 일을 해서라도 그분을 위함이 된다면 나도 모든 것 애낌없이 다 기울여서 하겠다는 자꾸 그 사람으로서 자기 주관이 변화되고 변화 되고하는 그 일을 생각하고 명상을 한 것이 후란시스였습니다.
그라다가 며칠 후에는 또 가 보니까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하고서 또 그렇게 못 견디어 하는 그런 것 같다가 '그랍니다.' 이라다가 '주님이 나 위해서 십자가에 못을 박혔었으니 그 고통이 어떠합니까?' 이라고 나서 얼마동안 있었는데. 보니까 아무 것도 창으로 찌르지도 안했는데, 보니, 나무에 이렇게 걸쳐 가지고 나무에 걸쳐 가지고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어떠합니까?' 이라고 얼마동안 있다가서.
나중에 그 나무에서 내려 왔는데 가 보니까 양쪽 손에 구멍이 뚫려서 상처가 생겼고, 다리에 상처가 생겨서 그 후란시스는 양 손에 주님이 못 박히신 그 자리에 못 자욱이 있고, 다리에 그 못 자욱이 있다고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그분이 얼마나 주님의 그 십자가의 고난을 명상하고 명상하고, 느끼고 느끼기 때문에 그것이 실제로 와 가지고 자기에게 구멍이 뚫려서 못 자욱이 됐고, 그렇게 됐을까? 그가 얼마나 그 주님의 고난에 대해서 실감 실감으로서, 그것은 자기의 그 정신의 사모의 힘으로도 그런 것이 되어지는 그런 성질의 역사가 있을 수 있고, 또 주님이 그에게 하도 원하시니까 당신의 그 십자가의 아픔을 그이에게 알려주시는 그 하나님의 능력의 알려 주심으로서. 실제로 그와 같이 못 자욱이 있기까지 그렇게 되었던 것이라고 다 생각을 합니다. '정신일도 금석가토'라고서 '사람의 정신으로 가지고서 바위를 뚫는다'하는 것 그런 말과 같이 그렇게 주님에게 대해서 허술하게 그렇게 생각지를 아니하고, 이렇게 깊이 생각하고 느끼고 느끼는 가운데서 자신은 자신도 모르게 고만 거기에 합당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와 여호와 아버지 하나님에게 합당한 사람으로 자체는 변화될 수 밖에 없는 이것이 기독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교는 수많은 사람들이 발표해 놓은 그 수많은 발표들이 있지마는서도 그 발표를 우리가 열람하는 것도 그들은 주님에계 대해서 어떻게 생각했는가 그것을 열람하는 것입니다. 뭐하려고? 나도 그걸 참고로 삼아서 주님에게 대해서 바른 사상, 바른 명상, 바른 사모. 바른지식, 바른 소망, 바른 내 자체의 행위 이것을 가질라고서 그 모든 것을 참고하고 열람하고 그와 같이 하는 것이지 그리 안하면 그런 것을 뭐 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이 말해 놓은 그것은 인간이 말해 놓은것은 껍데기 뿐이기 때문에 알기가 쉽고, 성경은 온 세상에 둬도 둘 곳이 없는, 온 세상에 둬도 둘 곳이 없는 그런 내용의 세밀하고 복잡한 것을 신구약 육 십 육 권에다가 딱 기록해서 놨으니, 겉보다 알맹이가 큽니다. 참 석류 한 조각으로 비할 수 없이 겉은 육 십 육 권인데 그 속은 온 세상에 둬도 둘 곳이 없을만한 그 내용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이래서 성경 안에는 내재적 영감, 안에 계시는 내재적 영감이 살아 계셔 가지고서 그 유한한 이 성경 육 십 육 권 안에 무한의 그 하나님을 가르치고 있고, 영원의 시간에 대한 모든 미래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 성경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모든 어릴 때는 어릴 때는 사람의, 이 사람이 경험한 것, 저 사람이 경험한 것 그런 것이라도 더듬어서 보나. 그것은 다 사람들 와 말로 기록하고, 기록한 그 인간 문서 안에는 그 문서 뿐이지 문서 안에 내재적 영감이 내재해 있지를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겉에 발표한것 그거 뿐이지 그 속에 알이 없으니 인간의 발표 그것만 가지고는 그 속에 알지를 못한다 보지 못 하겠다.
이러니까 인간의 기록한 것은 어는 정도 까지 처음에 어릴 때는 봤지마는서도, 그 다음에는 봐야 아무런, 더 좀 똑똑히 알면 싶은데 어느 한계점에 가 가지고 그 이상을 알려 주지 못하기 때문에, 이제 그것봐 가지고는 안 되겠고, 이러니까 마지막은, 이렇게 알고자 하는 사람들은, 마지막에는 인간이 기록해 놓은 인간 저서를 다 뒤로 두고서 이제 신구약 성경 한 권으로서 집중해서 그리 들어 가게 됩니다. 그러면 성경 한 권에 들어 가서, 성경에 발표한 그 한 마디 한 마디 속에, 영감이 그 안에 있는 그 은밀한 하나님의 무한함이 들어 있는 그것을 알기 위해서 하나님에게 알려 달라고 가르쳐 달라고 이렇게 간구하면서, 성경 한 권을 가지고서 우리가 알아서 필요한 모든 것을 알라고 그렇게 노력하는 것이 그것이 모든 진실한 성도들이 마지막에 찾는 지식이요, 마지막에, 볼 수 없는 그분을 문서로 나타내 놓은이 문서라는 이 관을 통해 가지고서, 문서를 통해서 그분을 볼라고 그분을 알라고 하는 것이 모든 성도들의 결말이었습니다.
그와 같이 여기에도, 이 베드로도 예수 그리스도라고 이렇게 하고 많이 복잡하게 말한 것은, 그분이 말을 할라 하니 속에, 아, 자기는 그리스도라고만 이렇게 발표를 해도 자기 속에는 만족이 없으니까, 또 예수님으로 이렇게 발표한 것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들도 그저 입으로만, 소리로만, 속에 아무 감각없이 소리로만 '예수님'이라는 사람도 있겠고, 또 '예수님' 하면서 '예수님은 우리 구주시다' 말은.
예수님, 다 말은 꼭 같은 말이지마는서도, 녹음기로 하면 녹음기에 녹음을 하면 이 사람이 '예수님'하고 저 사람도 '예수님'했는데 녹음 된 거는 꼭 같은 '예수님' 했지마는서도 이 사람은 그저 소리만 '예수님' 그 다음 사람은 '구주' 말은 안 해도 '구주인 예수님, 구주 예수님' 또 그 다음에 또 한 사람은 '하나님이신 예수님' 또 그 한 사람은 영원 자존하신 분이 이렇게 당신이 목적을 정하시고 목적대로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예정을 하시고 모든 창조를 하시고 당신이 친히 사람되어 오신 예수님, 또 그 한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다 하고 하늘에서 하나님이 사람 되어 오신 예수님' '이 십자가 상에서 대속하신 예수님' 그것으로서 만족이 안 돼서 '다시 하나님이 사람되어 영원히 대속하시려고 부활하신 예수님,' 그러면 겉은 꼭 같은데 예수님을 부르면서 그 속에 생각하는 것은 알맹이가 한 개 들어. 예수님이라는 그 소리 속에 하나 들어 있는 사람, 둘 들어 있는 사람, 열이 들어 있는 사람, 백이 들어 있는 사람, 또 조금 넓은 사람. 더 넓은 사람, 이렇게 많이 같은 말하지마는 속에 알맹이는 다를 수 있다 뭐이든지 다 그렇습니다. 사랑도 그 겉은 다 같지마는 그 속에 내용적인 즉 수많이 차이 있고, 층하가 있고, 양으로도 수 많은 차이가 있고, 질로도 수많은 차이가 있고.
능력으로도 수많은 차이가 있고. 지혜도 수많은 차이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가지신 사랑은 피조물은 가지지 못 했다, 그 사랑은 하나님 한 분만 가지고 계시지 다른 것들은 그 사랑을 가지지 못 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 한 분만 가진 것이지. 인간이 지글거리는 수많은 사랑은 그 사랑이 아니다. 겉은 꼭 같은데 속에 알맹이가 다르다, 내용이 다르다, 실력이 다르다, 지능이 다르다, 또 실용적으로 다르다, 질적으로 다르다, 양적으로 다르다. 이렇게 그러기 때문에, 그는 전능한 사랑인데 인간은 전능이 못 왔기 때문에 그 하나만 해도 인간은 하나님의 가진 사랑을 가지지를 못한다 그말입니다.
그런고로 이 하나면 다 아는데 그게 예수님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 말 해 놓고, 그리스도란 해석을 어제 아침에 했습니다. 인제 그 다음에 다른 것은 다 할 것 없고, 그 예수님, 예수님이 나 위해서 예수님 되셨다. 예수님이 나 위해서 무엇을 했으며 나는 거기에서 받을 것이 무엇인가? 그리스도가 또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리스도가 나에게 뭘 주시며, 나는 그리스도에게 받을 것이 무엇인가? 그러면 나는 어쩔 건가? 나는 그 분의 종이다 그 분의 종이다. 그 분 의 종이다 할 때 그 분의 대사다, 그 분의 대청지기다. 마치 그 왕 밑에 정승 모양으로 나는 그런 밑에 수종자다 이랬는지, 종도 이제 아침에 말할 때에, 생명 말하고 말하는 종이 있고, 말은 못 하고 생명으로 움직이기만 하는 종이 있고. 말도 움직이지도 못 하고 그저 쓰여지기만 할 수 있는 종, 그 무엇 말 못하는 무생의 그 도구, 도구 같은 종, 소 같은 종, 사람 같은 종 아마 이 베드로는 '종'할 때도 그냥 입에 발려서 '종'이라지를 안했을 것이고 '종'할 때에 '나는 내가 어느 정도의 종인가? 나는 말하는 정도의 종인가? 나는 무슨 그 주인의 종인 가 그 같은 나는 그런 종인가? 나는 주인의 도구로써 쓰다가 뭐 십 년 집어 던지 놔도 아무 말도 안 하고 주인만 바라보고, 또 그 도구를 불에 넣어서 태워 버려도 아무 말도 않고 타고 그럴 수 있는 나는 종인가?' 이 종에 대해서도 그는 생각이 깊으고 넓어서 그렇게 느끼면서, '종' 할 때도 그렇게 경솔히 입에 발리는 그것으로써 하지를 못 했던 이 베드로다 하는 것을 그분이 요 말한데서 깨달을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사도' 사도는 그 분이 직접 맡기면서 맡기신 일이 있으니 이 일을, 교회 세우는 것, 성경을 기록하는 이것을 자기에게 맡겼는데 주님이 도성 인신하신 그 모든, 수많은 다량의 그 모든 것을 자기에게 맡기는 그 심부름꾼으로 이랬는데. 이러기 때문에 바울도 말하기를 '내가 모든 사람에게 빚진 자다. 이렇게 수많은 것을 맡겨 놨는데 수 많은 맡긴 그것을 바로 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빚진 자라 이 사도. 또 '시몬이라' 주님이 나를 '시몬아 시몬아 내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사랑하느냐?' 세번 말씀할 뿐 아니라 너를 다시는 시몬이라 하지 말고 베드로라 하라 했으니, 그 '시몬' 할 때는 '나는 아직도 옛사람이 들어 있다' 나는 아직도 옛사람 들어 있는 그것을 깊이 느껴 느껴 '나는 정말 시몬이다' 다시는 시몬이라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나는 시몬이다' 나는, 시몬 이가 언제 내가 시몬으로 나타났었다, 닭 울기 전에 세번 나를 알지 못한다고 못 하리라고 부인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는데, 나는 죽어도 감옥에 갇히는 거 어디까지 같이 가리라고 이렇게 호언장담을 했는데, 주님은 나를 보시고 오늘 '네가 닭 울기 전에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 말씀하신 그것을 생각하고서 '나는 이렇게 참 외식자다. 나는 이렇게 외식자다 모든 면이 너무 외식자다, 너무 변화되지 못한 나는 시몬이다 그 시몬이라고 생각할 때에, 그가 얼마나 자기를 느끼기 때문에, 전설에 의하면 그는 죽을 때까지, 닭 소리를 들을 때마다 닭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는 견디지 못하는 그런 참 눈물을 흘리는 그런 일을 평생 계속해. 닭 소리를 들을 때마다 그럴 때마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시몬이라는 것을 잊지 안하고 '시몬' 그러면 거기에서 낙심하고 마는게 아니라 '시몬 베드로라' 이런 자를 주님이 미쁘시게 여겨서 반석 같은 당신의 공로로 인해서 영원 불변의 것을 주셨으니. 내가 이것을 놓칠까 하는 거기에서 마지막에 결론을 지운 이것을, 우리가 그의 신앙이 어떠하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래서 주 기철 목사님은 성경 중에 이 베드로서를 제일 많이 읽었는데, 그 기도실에 그 분이 가서 보면, 베드로서를 읽으면서 가만히 옆에서 엿 보면 그저 베드로서 읽다가 눈물을 또 흘리고, 베드로서를 또 읽다가 또 기뻐서 또 웃고, 그저 성경을 보다가 웃고 웃고, 쪼려서 못 견디고, 또 뭐 외칠 만침 견디지 못해 고함을 지를 만침 담대하고, 이렇게 그는 실지로 이 성경을 외식적으로 대하지 안하고 이 성경 안에 있는 성령을 상대했고, 하나님의 직접 대화의 말씀으로 그가 심각하게 듣고 상대했기 때문에 그분은 온 전국이 신사참배는 국가 의식이라 할 때에 그는 그는 우상 숭배라고 고함을 외쳤던 것입니다. 그 분이 성경 읽으면서 '주여' 이라다가, 그 속에 주님이 이러하신 주님을, 수많은 그 주님을 명상하는 그 자리도 명상 속에서 나오니까, 이까짓게 뭐이라서. 일본 정권이 두려워서 내가 이 정권 앞에서 이렇게 말하는, 모든 종들이 뻘뻘 떨면서 그저 그들이 무기들고 이라니까 뻘뻘 떨면서, 거기에서 말하지 못 하고 있는 거기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신사참배는 우상 숭배라고 고함을 질렀던 것입니다. 그 속에서. 주님 명상 속에서 그렇게 나온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설교를 해서 그 자리에서 고함을 질러도, 고함 소리에도 우리가 감동을 받고, 거기에서 아주 정서적인 모든 수사학에도 감동을 받고 하지마는서도, 제가 일찍부터, 벌써 수십 년 전부터 그런 말 했습니다. '어데든지 집회 가거든 감동을 받거들랑 감동은 그 자리헤서 다 버려 버리라, 감동은 다 버려라. 소리에 감동받은 것도 버리고, 또 정서적인 그런 유창한 말에 감동받은 것도 버리고 또 높은 지식이라고 하는 이 세상에 사탄은 깊은 것 그 모든 지식에서 이렇게 저렇게 감동받은 것도 다 버리라 버리고 그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은 그것만 불끈 거머쥐고. 다 버리고 나서 내가 고요히 가서 명상함으로 그 말씀을 명상함으로 거기에서 주님에 대한 두려움도 사랑도 바람도 의지함도 믿음도 강함도 담대함에서도 거기에서 명상 속에서. 거기에서 나오는 그것을 가지도록 해라' 왜? 우리의 신앙의 열매를 맺을 때에는 밤중이다. 거기에는 무슨 유창한 무슨 좋은 공기가 있거나 무슨 공명이 뭐 있거나 아무 것도 없고 그저 짓밟히고 짓밟히고 천한 소와 같은 그런 것에, 거기에서 참 열매를 맺어야 되는 그런 일이 있으니. 그럴 때는 무슨 누가 고함 질러 주는 고함을 질러서 '담대하라' 고함 질러 주는 그런 이가 없다. 또 거기에서 유창하게 말하는 것도 없다. 다만 그럴 때에 내가 자유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성경 말씀을 뺨을 맞으면서도 성경 말씀을 명상할 수 있는 그 자유 있다. 눈을 뜨라 하면 눈을 뜨고도 그 말씀을 사모하고 명상할 수 있다. 그 명상 가운데 명상하고 주의 도리를 사모하고, 주님이 누군신 분을 '주님이 누구십니까' 이렇게 주님을 사모하고 깨닫는 거기에서 '주여! 주님 나 위했으니 나도 주님 위해서 내가 죽고 또 죽고 다 죽어도 나는 주님에게 대해서 무익한 종입니다.' 하는 이 발표 밖에는 발표할 것이 없습니다. 하는 데에서 아무것도 보이지 안하고, 강하고. 담대하고, 세상을 이기고 나오는. 그 신앙이 거기에 나온다. 그러기 때문에 네가 껍데기만 받지를 말고, 또 속에 알맹이를 받아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그 진실한 신앙을 갖추어 가지라 하는 것으로써 모든 것 다 버리고 거기에서 네가 도리를 깨달은 것 그것만 가지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듣다가 내가 듣다가, 과거에 다 들어 깨닫고 깨닫고, 들은 그것 뿐이라면 너는 새로 받은 것은 없다. 새로 받은 거는 없는데 과거에 받은 것을 네가 어떻게 들었는 것을 잊어버렸고. 어떻게 받은 것을 다 버렸고 했으니까 네가 그 죄를 지었으니까 '내가 과거에 이런 것을 깨달았는데' 버린 죄를 회개하고, 과거에 깨달은 것을 버렸다는 그 죄를 회개해야 되지, 또 그때 깨달은 거를 또 지금 말하니 또 깨달으고 '주여 감사합니다.' 자꾸 자꾸 새로만 하니까, 이거는 항상 새로 받기만 하는 자이지, 받은 것을 보관할 줄을 모르고 받은 대로 복종할 줄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외식자는 안 된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과거에 깨닫고 안 것이 있으면은, '내가 지금 들어 깨달으니까 내게 이렇게 마음에 힘이 나오는데 버렸다, 과거에 내가 다, 그거 모르는게 아닌데, 버렸으니까 버린 죄를 내가 회개 해야 되겠다' 해야 될 것이고, 과거에 알지 못하던 것, 깨닫지 못하 던 것을 새로 한 마디를 깨달았으면 '이는 내가 과거에 알지 못하던 새것을 받았으니 참 새걸 받았으니' 그래 내 이용도 목사를 모두 이단자라고 말하는데 그의 글을 쓴것보니까 모든 학자들이 글 쓴 거는 아무 속에 먹을라 해야 아무 먹을자 하나도 없는데 그분 글 써 놓은 데는 먹을 것이 있더라고서, 몇 마디 몇 마디 양식을 내가 먹었어. 뭐 먹었느냐 하면, '육신의 사람은 세상 지위나 권세나 재물이나 얻어서 기뻐하지마는서도 영의 사람은 하나님의 진리를 깨달은 한 마디 깨달음에 무상의 기쁨과 무상의 취득의 느낌에서 기뻐하는 것이 그게 영의 사람이라' 옳습니다. 천천 금은보다 자기가 몰랐던 진리를 깨닫는 그거는 천천 금은보다 수 많은 재벌로 비교 할 수 없는 그게 하나님의 사람이요, 그게 영의 사람입니다.
성경 말씀이 암만 한다 해도 뭐 그거야 뭐 들어서 접어 던져 버리고, 어데 돈이 있으면은 눈을 확 달라드는 그거는 땅에 속한 자요, 예수 믿어서 이 세상에 뭐이 잘 된다 하면 눈이 휘떡 해가지고 기운이 나고, 주여! 주여 이라지마는 예수님을 믿어서 십자가 죽어 살고, 낮아져 높아지고, 버려 부유해지는 이 십자가의 도를 말하면 고만 응큼하게 이래 가지고 하는 그게 다 땅에 속한 자요, 땅의 복음과 하늘의 복음이 있다 그말이오. 세상에서 장생불사한다 해봤자 뭐 천 년 살겠소? 만일 이백 년 산다고 하는 약이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굉장할 겁니다. 이백 년 산다는 약이 있으면 굉장할 것이라 그말이라. 이런데 영생하는 것이 여기에 있지, 또 세상에 부자되지 이러니까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라면 얼마든지, 어떤 사람이 나한테 와서 말해, 서울에 있는 목사인데 어떤 목사가 말하기를 '내가 서울의 인구의 삼분의 일을 모아 들일 수가 있다, 모아 들일 수가 있다' 모아 들일 수 있는 모아 들일 수 있는 그런 장담을 하고 내가 모아 들일 수 있다.
그런데 모아 들이는 그 방편은 뭐이냐? 그 사람이 요구하는 것을 요구하는 것을 주니까, 사람이 요구가 있는데 요구하러 왔다가 뭐이 암만 돌아 다니야 요구가 안돼서 요구 못 하다가 요구를 채워 주면은 그 사람이 다 온다. 그럴 것 아니겠소? 돈 원하는 자에게는 돈 주면 올 것이고, 권세 원하는 자에게 권세 주면 올 것이고, 또 병 낫기를 원하는 자는 병 낫게 해 주면 올 것이고 이러니까 그것이 실지로 결과적으로 주어지나 안 주어지나 그거는 모르지만서도, 인간들은 그 오기를 말 들으러 왔으니까 요구하는 대로 주면 된다 말이오, 요구하는 대로 주어.
기독교는, 그게 아니오. '내가 온 것은 화평을 일으킬라고 온 것이 아니라 검을 줄라고 왔다 친밀한 가족들이 원수되게 하기 위해서 내가 왔다.'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했어. 그들이 원하는 만물보다 거짓된 살인 강도 같은 그 인간들이 원하는 그걸 주면 좋아 하지마는서도 그놈을 죽이고 원하는 것의 정반대요. 원하는 것을 죽이고, 그들이 원치도 안하고, 꿈에도 생각지 안하는 그걸 자꾸 가지라고 하기 때문에 왔다가는 다 달아나 버려요.
언제 이 서부 교회에서 ○○○목사님이 한번 집회할 때에 나 여기에 오기 전이요. 와 가지고 집회 하니까 저 ○○교회 어떤 장로 부인이 와 가지고서 하더니마는 나가면서, 강사도 더러운 놈의 강사를 청해 놓고 와 가지고 지금 집회 한다고, 이까짓 그런 놈의 강사가 어데 있노? 와? 세상에 예수 믿어서 부자가 돼 가지고서 아주 일류 자가용 차가 교회에 꽉 밀리고 그렇게 예수 믿도록 해야 되지. 여기에 예수 믿으면서 예수 밑으면서 예수님으로 인해서 거지 될 사람 있습니까? 예수님으로 인해서 거지 될 사람 있습니까? 거지 되고자 하는 사람있습니까? 손 들어보이소 하니까 누가 거 지 될 사람 있겠소, 이라면서 반대하고 가더라고. 그게 옳은 복음이요. 주님이 나 위해서 하나님의 부요로 가난하게 됐었으니 나도 주를 위해서 부요하게 될 것이라도 주님 대접하기 위해서 가난해지고, 내가 이 복음을 형제에게 전하는 데는 내가 이런 부자가 이런 부자가 나도 가난해져야 거기에 복음이 전해지지, 아무리 나는 하루 생활비를 그 밥 한 끼에 만 원짜리를 먹을 수 있는데 내가 그 형제에게 전할려면은 만 원 짜리를 먹을 수 있는데 천 원짜리를 먹어야 전해지지 만 원짜리를 먹으면은 전해지지 안하고. 만 원짜리를 먹는데 이만원짜리를 먹을라고서 하면 살인 강도 노릇을 안 하고는 안 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귀가 없으니까 꺼꾸로 들어. 그러니 오늘 아침에도 여러분들이 외식하는 이것을 버립시다. 그저 그러기에, 성경에 주님이 어떤 분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주님 앞에서 입을 벌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