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

 

1984. 3. 14. 수새벽

 

본문: 베드로후서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선지자선교회  계속 이 말씀을 이제 사흘 아침째 우리가 생각합니다. 그동안 증거한 것이 다가  아니고 다만 여기에 대한 내용의 그 뜻을 마치, 비유컨댄 코끼리 한 마리를  가르칠 때에 코끼리의 어느 한 부분 다리를 가르치든지 또 그 발가락을  가르치든지 귀를 하나 가르치든지 한 거와 같이 그렇게 소개한 것이고 증거한  것이지 그것이 다가 아닙니다.

 그러기에, 코끼리의 발을 하나 소개받은 사람이 그게 다인 줄 알면 잘 못 아는  지식이 되겠습니다. 왜? 코끼리는 다리 하나만이 다가 아닙니다. 누가 묻기를  코끼리가 어떻게 생겼느냐 하면 그 사람이 그게 다인 줄 알고 코끼리는 기둥같이  생겼다 그렇게 말을 하면 그 사람은 거기에 대해서 무식한 사람입니다. 배운  사람이지마는 무식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그렇게 코끼리의 어느 부분을  말을 했든지 말한 그 부분을 실지로 가지고 찾아 들어가서 그 코끼리를 만난다면  그 사람은 코끼리에 대한 것을 외모는 다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외모를 알고  난 다음에는 좀 더 마음을 써서 연구를 하면 그 코끼리의 행동을 또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좀 더 연구하면 코끼리의 성질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또 좀  연구하면 코끼리가 무엇을 식물 중에 잘 먹고 무엇은 안 먹는다 그런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차차 차차 코끼리에 대한 온갖 지식을 구비하게 가질 수가 있는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의 도리를 어느 일부분을 자기가 증거받을 때에 그 증거  그것만으로 전부인 줄로 알면 헛일입니다. 이것은 그저 어느 한 부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다는, 한목은 말 못하고 이러니까, 안다 할지라도, 코끼리를 잘  아는 사람이 증거한다 할지라도 그걸 한목 다는 말하지 못하니까 코끼리를 말할  때는 이 부분을 들어서 말하고 저 부분을 들어서 말하고 그렇게 말을 할 수밖에  없겠습니다.

 그러면, 그것을 공부하는 사람이 어느 한 부분 그것을 전부로 생각 하지 말고,  그 코끼리를 그저 이렇게 가르치되 저게 코끼리가 있다 하는 그 정도로 가르치는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이니까 가르침을 받아 가지고 받은 그 지식을 가지고 자기가  자꾸 이렇게 마음을 들이고 소욕을 가지고 자꾸 거기에 대해서 연구를 하려고  하면 그 사람은 코끼리를 만날수 있는 그런 기회가 있을 것이고, 또 만나면 인제  다 됐다 하면 그것으로 끝날 것이고 만나 가지고 '이 코끼리에 대한 지식을 좀 더  구비하게 가져야 되겠다 하면 더 구비하게 연구할 수 있는 그런 기회도 있을  것이고 그런 순서도 있을 것이고, 또 그렇게 연구할 수 있는 지능도 자기에게  있고, 또 연구의 대상이 되어 있는 코끼리도 단순히 일부분, 또 눈으로 보이는  그것만 가지고서 코끼리를 다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에 차차 차차 거기다  마음을 두고 심각한 마음을 가지고 연구를 한다고 하면 코끼리에 대한 모든  면으로 잘 알아서 코끼리를 얼마든지 기를 수도 있겠고 그를 어떤 면으로 가치  있게 이용할 줄도 알 것이고, 심지어 코끼리를 살아서 이용할 뿐만 아니라 잡아서  이용하는 것까지 거기에 대해 전체의 지식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도리를 어떤 사람이 세밀히 거기에 대해서  증거를 한다고 해서 그만하면 다가 아닙니다. 마치 이 코끼리의 한다리를 손을  대면서 이 다리가 '이게 코끼리다.' 귀를 가리키면서 '이게 코끼리다.' 그러면  그러니까 그걸 가지고서, 자꾸 '이게 코끼리다' 저게 코끼리냐 이게 코끼리냐?  집이 코끼리냐 산이 코끼리냐 뭐이냐 이랬는데, 예를 들면 작지로 가지고  가리키면서, 코끼리 꼬리를 가리키든지 어디든지 가리키면서 '이게 코끼리다' 하면  그 코끼리를 제가 지적을 받았으니까 자꾸 연구한데 따라서 코끼리에 대한  구비하고 원만하고 충분한 그런 지식을 자기가 가질 수 있는 거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도를 가르친다는 것이 그만하면 다가 아니고 온 세상에 둬도 다 두지  못할 만한 그 내용에 구비하고 온전하고 무한하다고 할 수 있는 그 내용을  신구약 성경에 가르쳐 놨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이 그렇게 구비 하지 못합니다.

그저 신구약 성경은 대충 윤곽을 가르쳐서 이래놓은 것이 신구약 성경인데,  천하에 둬도 다 두지 못할 그만한 그 실상을 이렇게 아주 축소해서 신구약  조그만한 이 성경이라는, 육십 육 권이라는 작은 양이 아주 적은 책에 여기에다가  기록을 해 놨기 때문에 이게 다가 아니라 그 말이오. 또 그것을 사람이 어느  성구를 들어서 해석을 해 준다고 해서 그 해석이 다가 아니라 그거요. 마치  코끼리 가르치는 거와 같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듣고 살게 되는 고 부분을 가지고 자꾸 차차 차차 자기가  연구를 하면 세상에 둬도 둘 수 없을 만한 그만한 다량의, 양이 많은 그 내용을  알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누가 다 알았다고. 이제는 나는 다  알았다고 그렇게 말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모르는 사람입니다. 자꾸 알아 나가고  그렇게 연구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연구하는 데는 어떻게 해서 연구를 할 수 있는가? 그 말씀을 자기가  마음에 간직하고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기억하고 지켜  회개하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들은 것은 기억을. 놓지 안하고 자꾸  기억하고 있어야 되겠고, 받은 것은 자기가 실지로 지켜 가지고 행해 보면 이제  알아진다 하는 그런 것을 말씀했고,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또 '이미 믿은 유대인들에게'하는 말씀은 하나님의 도리를  다 자기의 구원 도리로 알고 상대하는 사람들이라 그말입니다. 자들에게  이르시기를 '네가 내 말에 거하면' 이미 믿으면 주님의 말씀을 믿는 사람들인데,  또 참 아이들 말로 곷감 겹말한다 하더마는 이렇게 '내 말에 거하면' 그 말은 내  말대로 살면, 또 그라면 '참 내 제자가 되고' 내가 사는 것 만침 내 자신이 변화가  되어지고, '진리를 알지니' 또 그 진리를 또 새로 안다 말이오. 제가 들어서 그저  버려, 들어 가지고서 버려서, 들어 가지고 버릴 때의 아는 것과 들어 가지고  자기가 계속할 때에 알아지는 거와 또 기억할 때에 알아지는 것과 자기가 그대로  행 해 볼 때 알아지는 것과 자기가 또 행해볼 때에, 행할 때 그때 알아지는 것과  행할 때에 자신이 변화가 되어진 후에 알아지는 것이 다르다 그거요. 그렇게 하면  그게 무엇을 하는 것인고 하니, 이 문서 계시로 기록한 그 문서에 그 한 가지에  대해서는 이 면만을 말씀을 했지마는 그 한 가지를 말하는 데에 다른 또  성경에서는 저 면을 말할 때에, 저 면을 말하고 이 면을 말하고, 저것을 말 하고  이것을 말할 때에 모든 가르친 그 모든 것을 종합해 가지고서 갖다가 끌어다가  붙이니까 문서가 증거하는 것이 한 가지 증거했으면 한 가지만 아는게 아니라  문서가 요 면만, 요 성구는 보면 요 한 가지로만 증거했지마는서도 저 성구를  보니까 두 가지로 증거한 것을 알 수가 있겠고, 또 다른 또 성구를 보니까 다른  것을 하나님이 가르치실 때에 그때에 보니까 또 그 성구가 이것도 가르치고 있고,  이래서 나중에 보니까 이 신구약 성경은 전부 한 덩어리요 하나로구나 하는 것을  사람들이 그거 깨달아서 성경은 하나라 진리는 하나라 그렇게 결론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알아지고, 또 그러면, 자기가 마음을 기울이고 모든 성품을 기울이고  뜻을 기울이고 참 소망을 다른 데 두지 안하고 거기에 소망을 두고 기울이는  것이 또 다르다 그거요. 자기가 무슨 품꾼으로 일하는 거와 거기에 욕망을  가지고, 소욕을 가지고 일하는 것과 또 소욕만 가지고 일하는 것과 그것이  이루어지면은 그 결과에 자기에게 어떤 그 필요와 유익이 있다는 용도까지를  생각하고 노력하는 것과 또 용도만이 아니고 만일 그게 아니라면 어떻게 화가  된다는, 쓸모있는 것만 아니라 그게 없으면 낭파된다는 그 면도 또 생각해 보고  하는 것과 이제 거기에 대해서 생각하는 생각이 한 가지 두 가지 많아져 갈수록  자기의 노력은 더 구비하게 되겠고 강하게 되겠고 또 피곤치 않게 되겠고 자꾸  이를 때에 기쁘고 즐거움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것이 인제 거기에 대해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은, 비유컨댄 어떤 사람이, 병에  대해서 참 유명한 분이 기록한 의서가 있는데, 단방문이라서 거기에 대해서는  고만 고 하나만 쓰면은 뭐 수십 명의 의사가 들이대도 못 낫울 그것을 그 사람은  그 약 하나만 써도, 뭐 어데 하나만 해도 딱 낫울수 있는 단방 치료하는 그런  것이 기록돼 있는 것이니까 그것은 참 가치를 말하면 요새로 말하면 몇억만  원이라도 값이 정할 수 없는 그런 보배로운 의서라 할지라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저거 집에 방바닥이 떨어지니까 그 책을 째 가지고 방바닥을 바를 것이고  또 그 사람은 그것을 째 가지고 화장실에 갈 때에 휴지로 쓸 것이고 그렇지요.

모르니까 그와 같이 그 사람이 거기에 대한 태도가 달라질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이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이 기록해 준 것도 그렇게  다가 아니고, 천하에 둬도 두지 못할 그 많은 양을 조그만한 육십 육 권이라는  신구약 성경에다가 기록해 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신구약 성경을 다라고 생각을  말고 그 속에 성령님이 알지 못하심이 하나도 없으신 전지하신 성령님이 그 안에  계셔 가지고, 이 신구약 성경 안에 성령님의 감동의 역사가 계셔 가지고 그  사람을, 이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알라고 하는 자에게는 요 신구약 성경을 통해서  알려고 하는 자가 성령의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그 순서와 모든 구비가 되어  실상을 성령이 가르쳐 줘도 배울 수 있고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참 가르침을  원하는 그것이 이 세상 천한 과학이라는 것도 이치에 맞지 안하면 안 되는데  하물며 하늘에서 내려 온 완전한 것인데 이치에 맞지 안하면 안 됩니다. 고  이치에 맞도록. 성령님이 주실 수 가르쳐 주실 수 있고 자기는 가르침을 받을 수  있고 또 가르침을 원하고 하는 그런 모든 것이 실상으로 구비 해질때에 성령님의  감동으로 가르쳐 주심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볼 때도 이렇게 생각하고 봐야 되고, 또 성경은 그렇게,  그래도 이 육십 육 권이라면, 신구약 성경 이만침 뚜꺼운 이 책을 가지고서 책에  기록됐지마는 설교한다는 것은 거기에다 비해도 얼마나 뭐 몇 천분지 일도 안될  만한 그런 소량을 말하고 적은 양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그 설교가  다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거요.

 그러니까, 설교는 성경을 소개하고 성경은 성령님을 소개하고, 이래서 성령의  감화를 이렇게 받아서 해야 그 사람이 진리를 깨달을 수가 있고 자기 구원  도리로 쓸 수가 있으니 그렇게 하는 데에는 우리가 지혜와 총명. 지식, 자기의  민첩, 또 자기의 아주 날쌘 그런 예민 그런 것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되고, 제일 중요한 것이 뭐이냐? 하나님은 우리에게 신성으로  대하십니다. 신성. 신성으로 대한다 그 말은 신의 인격으로 대한다 말이오. 신의  인격이 우리를 대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신성을 모형한 인성의 그 인격을 가지고  그분을 대해서, 내가 인격을 가지고 신격을 상대해서 그 신격과 인식이 교제해서  서로 교제할려는 이런 그 방편과 욕심에서라야 돼지지, 자기가 인격이라는 것은  자기의 그 인격을 가리켜서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다른 데는 또 '성품을 다하고' 이랬으니까, 다시 말하면 자기의 전부를 다  기울인, 다한 인격이라는 것은 자기의 전부가 다 되어 똘똘 뭉쳐있는 그것이 자기  인격인데 요것을 기울일 때에 하나님께서도 인격의 원형인 신격인 그 신성을  대해서 인성과 신성이 이렇게 서로 교제가 되는거라. 서로 사귀는 것이라. 이거는  뭐 강제로, 이런 무슨 노끈을 대고 짜매듯이 그런게 아니고 또 강제로 이 무슨  짐승을 목을 훌가다가 코를 끼어다가 이래 한테 이래 당글어 매어 놓은그런 것이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언제나 유기적인 교제입니다. 유기적인 교제  자유 의사를 다 활용하도록 해 가지고서 이렇게 교제하는 그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의 그것을 원하신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무식하고  그 인격도 인격도 아주 그 인격이 장성한 사람 있고 어린 사람 있고, 또 그  인격이 아주 구비한 사람 있고, 아주 구비하지 못하고 미구비된 사람도 있고  그렇습니다. 같은 것 아니오. 그 인격 인격과 지식이 하나돼서 지식이 있는 대로  자기가 갖추고 자기에게 있는 대로 지식과 합하고 이럴 때에 그 인격이  되어지니까 인격도 저울로 단다면은 뭐 한 근짜리도 있고 만 근짜리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많든지 적든지 자기의 인격을 다 기울이는 자에게는 주님께서  그만침 상대해 줄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만침 상대를 할 수가 있지마는서도  아무리 자기가 무엇이 어떻게 다른 사람보다, 이 사람은 한 냥쭝짜리라도 주님을  한 냥쭝 면으로는 교제할 수가 있지마는서도 이 사람은 백 냥쭝이 있다 할지라도  주님에게 대해서 하나도 상관이 없고 주님이 보실 때는 '이 외식하는 자야 네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되 마음으로 나를 멀리하도다' 하면서 '화 있을진저, 이  외식하는 자야 화 있을진저. 네가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고 마음으로는 멀리했다.'  이러니까, 뭐 구약 말기에 그때에 이 성경 지식이라든지 신약 성경은 나지 안할  때이지마는서도 성경 지식이라든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나 인생관이나  사물관이나 세상관이나 만물관아나 그때 구약으로서는 최고 발달 된 때가  예수님이 탄생하실 그때라 그 말이오. 구약시대로 말하면. 이랬지마는 주님이  그들을 화 있을 것이라고 책망 했습니다. 그거는 뭐이냐? 그거는 그들이  '입술로만 나를 공경하고 마음으로 멀리하도다' 그들이 그저 입만 가지고 이와  같이 할 줄로 알고. 입만하면 될 줄로 이렇게 알았고 또 어떤 사람은 십일조를  아주 나물 한 조각을 먹으면서도 십일조를 내고 또 곡식을 심으지 말라고  이랬으니까 그 계명을 지키기 위해서 닭 모이도 안 줬대요. 닭 사료도 안 줬소,  만일 줬다가 그게 다 주워 먹지 못하고 혹 그게 튀어 나가 가지고서 움이 트면은  씨를 심은 것이 되어지기 때문에, 아, 그렇게 같이 그래 첩첩이 또 지키고 또  지키고 또 지키고 아주 첩첩으로 단단히 자키고 이렇게 했지마는 주님은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화 있을진저' 마태복음 23장애 보면 그 행위들을 다 해서  일곱 번이 나 화 있을지어다 화 있을지어다 그렇게 참, 그게 저주한 말이 아시고  '너희들이 지금 이렇게 모두가 다 화 받을 행동을 하고 있으니 여기에서  돌이키라' 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시다. 그러기에, 유식하다고 되는 것이  아닌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신앙생활하는 일이 예배당에 와서만 신앙생활하는  일이 되면 되는게 아니고 그 신앙생활하는 일은 밥 먹을 때도 밥 먹는 그게  신앙생활이어야 되겠고. 또 자기가 자는 것도 신앙생활 하는 것이어야 되겠고  자기가 무슨 노는 것도. 어데 가서 이렇게 관광하면서 무슨 구경을 하는 구경하는  그것도 신앙생활이 되어야 되겠고, 또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 것도, 직장에서 뭐  하는 것도 대인 관계를 하는 것도 모두가 다 전부가 신앙생활이, 신앙이 되어야  될 것이라 그거요.

 그러면 그 신앙이 되어야 된다는 말은 무슨 말인가? 신앙이 되어야 된다는 말은  그 모든 것이 내가 일은 하고 있는데 그 일 하는 그것이 목적이 아니고 일하는  그것이 그 일하는 그 일 함을 통해 가지고 주님과 나와의 인격 교제를 지금 하고  있다 그 말이오. 그러면, 밥 먹는 것도 지금 인격 교제하고 있고 길 가는 것도  인격 교제하고 당신과 나와의, 그분은 인격의 원형이 되는, 인격을 창조하신,  인격의 원형이 되는 그 신격이신 하나님의 그 신격과 사람인 고 인격과 둘이  인격 교제가 되고 하는 요 인격 교제 되는 것 인격 교제를 해 가지고서 고 일을  통해서 인격 교제가 되고, 고 일을 통해서 인격 교제가 시작하고 고 인격 교제가  그 신격과 인격이 둘이 딱 들어맞는, 인격에 결합이 되어지는 이것이 되어지는  그것이 신앙생활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이런 저런 생활하는 그 전부는 주님과 인격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이라 하는 것을 그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인격  교제를 하고 있는 것이라. 만일 주님을 위해서 자기가 어떤 역경에서 순교를  당한다고 하면, 순교를 당한다고 할 때에 그 순교하는 그 순교가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다, 목숨을 바친다는 목숨 바치는 그것이 그이의 본위라면. 주를  위해서 목숨을 바치는 그것이 본위라면 그는 순교가 껍데기 순교요 주님에게는  탄식이 되어졌지 아무 가치 없는 것입니다. 목숨을, 생명을 바치는. 그게 본위가  아니라 그 말이오. 그게 근본이 아니라 그 말이오. 생명을 바치기까지 나는  당신을 잊어버리지 못하고 당신을 버리지 못하고 당신을 사모하고 당신을  바라보고, 나는 당신을 좋아하고 나는 당신에게 속하고. 당신이 나에게 대해서  어떻게 어떻게 당신의 그 신격이, 참 완전자요 대주재자신데 그분이 그 모든 것을  기울여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에 나는 그분의 사랑에 감격해서 그분을 사랑함으로  이렇게 하는 그것이, 그 인격 교제인 그것이 중요합니다. 인격 교제인 고게  중요하지 그거 없으면, 그거 없으면 그것은 마치 짐승을 잡는 거와같이 잡는  것이지 아무 가치가 없다 그 말이오. 그거는, 그저 짐승이 잡혀서 목숨 끊어지는  것 모양으로 죽는 것뿐이지 아무 가치 없어. 그 속에 '주님이 어떠한 그  신격으로서 내게 어떻게 했으니 나도 어떠한 그 인격으로 내가 그분에게  상대하겠다.' 인격과 인격이 서로 상대해서 교제하고, 그 인격을 내 인격과 아래  서로 대해서 그분의 인격과 내 인격이 둘이 서로 이렇게 대화 하고 이래 교제해  가지고서 그 교제함을 통해서 나는 그분과 더 친밀해지고 그분은 나와 더  친밀해져서 나는 그분의 것이 되어지고 그분은 나의 것이 되어지는, 이 결합이  되어지는 이 결과가 되지 안하면 생명 바쳐도 아무 소용이 없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모든 생활을 할 때에 그 생활이 주님과  나와에 지금 교제하는 생활입니다. 일은 그 일 하지마는서도 이 일 하는 것이  주님 사랑함으로 합시다. 이 일을 하는 것이 주님을 사랑함으로 해.

 예를 들면은, 만일 간단한 것이지마는서도. 자기의 남편이 지금 출근할 때가  됐는데 그 아내가, 남편은 다른 준비가 분주하느라고, 준비에 분주하게 지금  분주하고 있는데 자기는 여기에서, 신고 갈 신을 닦습니다. 구두를 닦으면서 이  닦는 것이 그저 그 구두만, 구두만 보고서 '구두가 빤들 빤들하이 아름답게  닦였다.' 이렇게 구두를 닦을 수도 있고, 또 그거 닦으면서 '이것 또 구두 안  닦으면 야단 만내지. 에이 밉상스러운 것' 이라면서 구두를 닦을 수도 있겠고, 또  '이거 구두를 또 잘 닦아 줘야 기분이 좋아서 내가 또 뒤에 가서 또 한번 홀가  가지고서 지금 단추를 눌러서 짤아내는, 또 한번 짤아내는 그게 될 수 있겠지.'  오만 맘 다 가지고, 또 '이래야, 기분 좋게 나가 버려야 날 잊어버리고 나가기  때문에 나는 그동안 간부하고서 한번 또 교제하고 재미있게 사귀겠다.' 그 구두를  닦으면서도 별별 마음을 자질 수 있다 그 말이오. 별별 마음을 가지고, 별별  목적을 가지고, 별별 소망을 가지고, 별별 정신을 가지고서 닦을 수 있다 그  말이오. 있으면서. '아, 이제 오늘 주인이 가서 거석할 때 실수를 안 해야 될  터인데, 어쩌든지 오늘 가 가지고서 뭐 할 때 공연히 신경질이나 내서 이런 실수  하지 안해야 될 터인데, 또 벌로 덤비다가 실수하지 안해야 될 터인데, 뭐  누구에게 또 미혹을 받지 안해야 될 터인데, 또 자기 하는 일에 게을하지 안 해야  될 터인데, 다른 사람에게, 일하다 보면 덕 못 세우기 쉬우니까 일만 보다 보면  실덕하기 쉬우니 또 덕을 전해야 되겠는데.' 오만 걸 그 남편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이렇게 할 때에, 실은 구두 하나 닦아 놨지만 사람이 몰라 그렇지 그  속에 구두 닦으면서의 그의 사랑하는 아내가 사랑하는 남편을 사랑하는 그  내용인즉 그거 형언하지 못할 만침 기록할려면 참 얼마나 믿이 기록할 수 있는  그것이 속에 되어질 수가 있다 그거요.

 그래 그것을 가리켜서 주님이 '나의 사랑 나의 신부야 너는 어여쁘도다 너의  뺨은 석류 한 조각 같다' 하는 것을 이렇게 표시를 했더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모든 생활 하는 것이 그것이, 당신이 노동력이 모자라 가지고서 그런 것  우리 시키는 것 아닙니다. 또 우리가 그 일 하니까, 이 일을 도와 주니까, 아주  일을 도와 주니, 노동력이 모자라는데 도와 주니까 좋아하는 그것 아니오.

그러기에, 우리가 모든 일 하는 것이 그 일을 잘 해놔야 된다고 일을 보고서 일만  잘 하겠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는 그 사람은 주님과 관계가 없을 것이고. 이 일을  잘 해야 주님에게 영광이 되어지기 때문에 이 일을 잘 해야 되겠다 고렇게만  생각해서 속에 마음의 작용이 토막나무 하나 끌어다가 놓은 것 모양으로 일을 잘  해야 주님이 이거 기뻐하시겠다 하는 고거 있는 것 그런 것. 또 그것만 아니라고  일을 하면서, 고 일을 하면서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이, 고 일을 하면서 고게서  주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고게서 주님의 성품을 하나씩 둘씩 되새겨 가면서  요래야 주님이 기뻐하시겠지. 또 요라면 주님에게 뭣이 거석이 되겠지 요것도 또  주님이 기뻐하시겠지.'  그러기 때문에, 아가서에 말하기를 '나의 사랑하는 자가' 신부가 말한다 말이오.

성도가 말해. '나의 사랑하는 자가 창살 틈에서 나를 엿보고 있다.' 그러면, 자기가  일 하나 하면서도, 일 하나 하면서도, 예를들면, 비유컨댄 손을 놀리는 것이든지  뭐 하나 태도하는 것이든지 할 때에 이제 '이제는 사랑 하는 남편이 어데 가고  없으니까 이제는 맘대로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옆에 사람하고 농담해도  되겠고 뭐 어째도 되겠고' 이런게 아니라, 지금 조게서, 창살 틈에서, 나는 보이지  안하지마는 조 어느 창 구멍에서 나를 가만히 엿보고 있다, 엿보고 있으니까  자기의 손 하나 놀리는 것도 주님이 지금 보고 있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서  하나를 놀리고. 마음 하나 작용하는 것도 마음의 움직이는 것도 생각의 움직이는  것도 그 정신의 움직이는 것도 주님이 창살 틈으로 나를 보고 있다, 그렇게 보고  있는 것으로 알고 보고있는 줄 아니까 요렇게 하는데 당신의 사랑하는 자가 보고  있으니, 같이 있고 보고 있으니까 요 실수 안하고, 보고 있으면 '요래 하면 좋아할  거나. 내가 손을 요래 놀리는 거 요거 주님이, 사랑하는 자가 좋아 할 거다' 요래  놀리면서 사랑하는 자가 보고 좋아할 것이라는 것을 자기가 느끼고 쾌감을  느끼고 기쁨을 느끼고 요렇게, 요것이 인격 교제라 말이으. 그래서, '나의  사랑하는 자가 창살틈으로 나를 보고 계신다'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한 말로 말하면 외식하지 말라 그 말이오. 외식하는 외식 이거는  주님이 제일 미워합니다. 외식, 껍데기뿐인 것.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나와의, 이 세상에 사는데 일 본위인 그런 만난  것이요 교제하는 처소를 만난 것이요 또 교제하기 위해서 이런 작용 저런 작용의  일을 만난 것이지, 그중심이 주님과 나와의 교제하는 그것이지 그 일 중심이  아니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과 나와의, 이 세상에 사는데 일 본위인 그런 생활도  있을 수 있고, 또 물질 본위의 생활도 있을 수 있고 자기는 주를 위해서 산다  하지마는 주님이 보니까 속에 알맹이인 즉 제 지위가 한 지위라도 올라갈라고  고거 지금 고 속에, 그 속에 그걸 생각하고 겉으머리는 주를 위하는 척 하지만  속에는 지금 딴 야심을 가지고 있다 그말이오. 그것을 가리켜서 안 믿는 사람들도  '동상 이몽'이라 누워 자는 침대는 같은 침대에 같이 누워 자면서 꿈은 딴 꿈꾸고  있다. 딴 꿈 꾸고 있다. 아주 자기로 더불어 어떻게 지금 뭐 좋은 듯이 부부  이렇게 아주 참한 침대에 같이 누워가지고서 같이 자면서도 속에 마음은 딴 마음  가지고 있다.

 이러기 때문에 대개 부부간이 이혼이 되고 멀어지고 하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영물이기 때문에 사람은 그것을 대략 짐작을 한다 말이오 짐작하기 때문에, 겉은  이렇지마는서도, 아무 겉으머리는 보이지 안하고 민첩하고 다 이렇게 아주  훌륭하게 하지마는서도 속에 그 마음인즉 지금 딴 마음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짐작한다 그거요. 그래 가지고서 부부간도 나눠지고 친구간도 뭐 가면은 물질  대접도 잘 하지마는서도 인간이라 하는 것은 물질 대접을 받고서 족하게  여기는게 아니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집에 가면 아주 참 뭐 쑥버무리나 그렇지 않으면 개떡 지비를  끓여서 이래 주는데 또 이집에는 아주 굉장한 고등 요리를 이렇게 해 줍니다. 해  주지마는서도 인격이라는 것은 다르다 그 말이오. 그런데 그 개떡지비는 해주는  그 개떡지비는 마음에 감격이 되고 거기에 대해서는 참 흐믓하고 만족하고  개떡지비가 아니라 개떡지비 속에 그가 서로 인격을 사모하는 그 인격이 그 속에  들어 있고, 이 아주 고등 요리 속에는 나를 무슨 짐승처럼 이 식물로 꼬울라 하는  것, '이만하면 족할 것이다', 이래 가지고 껍데기 이런 것 가지고 있는 걸 게워  내트린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사람도 그렇습니다. 어떤거 가지고 온 거는  어떤데 어떤 거는 좋은 요리 가져와도 다 실은 말하지마는 다 부어 내버리고 못  먹는다 말이오. 부어 내버리고 못 먹는다 말이오. 사람도 이런데 하물며  하나님이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외식하면 안 됩니다.

 여기에 베드로는 '예수, 또 그리스도의 종. 또 사도, 시몬, 베드로.' 그 '시몬'  할때는 아마 자기가 닭 울기 전에 세 번 모른다고 한 그것을 지금 연상했을  것이고. 또 '주여 이런 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옵소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이렇게 말씀한 그런 걸 다 연상할 거라 말이오. 내가  옛사람으로서 주님을 상대한 그 모든 것을 연상해 가지고서 그것을 연상해서  이렇게 다 생각하면서 그 말을 안할 수가 없어서, '베드로' 이 말만 말할 수  없어서 '시몬', 이 시몬을 말한다 그 말이오. 주님을 배반하고 디베랴 바다에  고기를 잡으러 간 일이라든지 또 이런 것 저런 것, 그물을 던지라 할 때에 속으로  삐쭉 거리면서 '잡히는 이치가 아니지마는 선생님이 말하니까 던져 보겠습니다.'  하는 그것을 그때 던져 고기 잡고 난 다음에 양심에 어떻게 가책이 됐는지 그  앞에서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주님을 모실 수 없는 더러운 죄인입니다.'하면서 죽는  자와 같이 그렇게 너무 기가 막혀서 기절하여 엎어지니까 주님이 위로를  하시면서 네가 요 마음을 가지고 요 깨달음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사람 수입을  하리라' 그렇게 말씀했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과 사는데, 연보를 해도 뭐 돈 꿔 주는 자 있습니다.

또 연보를 하면서도 아주 고리 대금으로 이자 놓는 사람 있습니다. '요것 적은  연보하면 하나님이 큰 것 이익을 붙여서 줄 것이라'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 고대로는 하나님이 약속을 했기 때문에 갚아 줍니다. 그러나  알맹이는 없습니다. 알맹이는 그것이 많고 적고 그것이 '주님이 내게 하신 신성의  신격이 내게 대해서 어떻게 했나?'고 신격을 대하면서 내 인격이 그분에게 대해서  어떻게 한다는 그것이 속에 알맹이가 있어야 고게 됩니다. 알맹이가 있어야 모든  인격 교제로 모든 일을 하되 일을 하면서 나는 이 인격 교제, 지금 물질로만,  주님이 물질 없으니까 내가 물질만 주고, 물질 본위로서, 물질만으로서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그 모든 노동력으로만 지금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무슨  그렇지 않으면 무슨 사건적으로만 관계를 가지고 있는지, 다 썩은 것이요, 다  소용없는 것. 다 땅의 것이요. 그 땅에 있는 그 모든 것은 형체요, 외모요, 그속에  이제 자기가 주님과 자기와의 인격 교제,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모든  역사를 자기가 생각함으로 나도 내가 그 사랑을 받아 내 인격을 그분에게  기울여서 그 사랑에 감격해 인겨에 기울여지는 이 인격과 인격이 교제하고  결합하는 것 교제하는 것.

 이런 일 저런 일 하는 모든 땅 위에 있는 모든 일이 그 일을 통하여서 당신은  나를 알고 그 일을 통해서 나는 당신을 사랑할 수 있고, 그 일을 통해서 나는  당신과 친근하고 당신은 나와 친근해지고. 이러니까, 땅 위의 모든 일이 그것을  통해서 주님으로 더불어 교제하는 일이기 때문에, 외모의 그 일이 세상적으로  말하면 가치 없는 일도 있고 흉한 일도 있고 모든 사람이 싫어하는 징그러운  일도 하고 있는데 그 징그럽고 흉한 거기에서 당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은 더  강하게 역사할 수 있고 당신을 높일 수 있는 높임은 더 역사 할 수 있기 때문에  산다씽이 말하기를 '나는 하늘나라에 가서 십자가 없으면 내가 주님앞에 기도하고  십자가 있는 곳에 보내 달라고 하겠다.' 왜 십자가 있는 곳으로 그러면, 주님을  사랑함으로서의 자기가 희생 되어지는 그 희생 되어지는 것. 사람은 다 십자가의  원수가 되어 가지고서 싫어하지마는서도 그 생활 끝에 주님과 자기와  만나짐으로서의 그 신격과 인격이 결합되어 그 결합의 재미가 심히 자기로서는  무상의 재미가 있었기 때문에 '십자가에 없는 곳이면 십자가 있는 곳에 보내  달라고, 나는 기도하겠다', 그렇게 자기 전기에 기록해 놨어요. 그 기록해  놓은것을 제가 읽어 봤다 그 말이오.

 그러므로 우리는 어쩌든지, 주님은 우리의 인격의 근본 바탕입니다.

근본이십니다. 우리의 인격을 지으신 분이 그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  이런 환경 저런 환경 모든 환경을 주는 것은 이 환경에서도 당신을 사랑하는지  당신을 멀리 하는지, 이 현실 저 현실 모든 현실에서 내 외식이 다 드러나고,  이런 저런 모든 현실에서 내 진실함이 드러나고 이런 저런 현실에 당신을, 당신을  참 섬기고 당신을 사랑하는 일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고 당신을  외식으로서 그렇게 꼬울 수 있는 자 모양으로 그렇게 아주 무가치하게 멸시하는  그런 일도 그 현실에 드러날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현실은  귀중한 것입니다. 그것을 깨닫고 여러분들이 힘을 다 씁시다 우리가.

 과학이라는 것은, 과학이라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과학이라는 것은 신앙  아닙니다. 과학을 초월한 신앙이라야 된다는 것 아주 죽이는 소리입니다. 아주  죽이는 소리라 말이오. 과학을 초월하는 신앙이라는 것, 과학이라는 것은 어떤  것이 과학인고 하니, 과학이라는 것은 이 물질면을 주도로 삼아 가지고서, 땅에  있는 물질면을 근거로 삼아 가지고서 이 물질에서. 이 물질에서 한 물질로  초월하고 초월하고. 자꾸 물질을 포개서 자꾸 그 면으로 발달되고 자꾸 올라가기  때문에 땅에서 커 올라가는 것입니다. 과학은 땅에서 커 올라가는 것이요.

철학이라 하는 것은, 철학은 물질을 근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것을  근본으로 삼아 가지고서 이렇게 자꾸 사람을 사람이 연구하고 생각하고 생각하고  자꾸 이렇게 커 올라가는 그것이 암만 올라가 봤자 뿌리는 땅에 있습니다. 과학이  암만 올라 봤자 뿌리는 땅에 있고 철학이 암만 올라가 봤자 뿌리는 땅에  있습니다. 도덕이 암만 올라가 봤자 뿌리는 땅에 있습니다. 신앙이라 하는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오. 하늘에서 내려온 것. 이러기 때문에, 이걸 혼돈 시켰다  말이오. 양성원 학생들 내가 보니까 강의하는데 들어야 다 죽었다 그말이오.

여러분들이 하나도 지식을 바로 가져 있지를 못해 이러니까, 이래 가르치면 이래  되고 저래 가르치면 저래 될 사람들이지, 거기에 대해서 자기네들이 아는 지식과  다르면은 거기에서 다르다는 것을 말해서 반문이 날 건데 반문이 없다 그말이오.

 나는 ○○신학교 다실 때에 배우지마는서도 언제든지 거석하면 그냥 안 넘어가  왜? 그걸 내가 반문한다는 그게 무슨 뭐 뭘 일으키기 위해서 반문 하는게 아니고  내속에는 많은 학생들이 지금 듣고 배우고 있는데 이렇게 잘 못 배워 안 되겠다.

그걸 반드시 반문해 가지고 내가 '안 그렇습니다.'이 소리는 못 하고 고게 나올 수  있도록 묻는다 말이오. 거기에 대해서 질문을 해. 질문해도 좋으냐고. 질문을  하면, 그러니까, 가르치는 교수들이 제가 질문하면 떨어요. 뭘 말할지 모르니까.

내가 졸업 논문을 써 가지고서 졸업 논문을 반쯤 읽으니까, ○○○목사님이 논문  그거 발표를 하라고 해서 모두 이래 발표를 하는데 논문 한 반이 아니라 삼분지  일쯤 읽으니까 고만 고만 중단하라 하며 막 벌벌 벌벌 떨어. 왜? 이제까지 모르는  말 했기 때문에 죄를 하나님 만들어 냈다 했으니까, 그래 놨으니까 기가 찰 것  아닙니까? 그라며 중단을 시키면서 이거 큰일났다고서. 큰일 난게 아니라 이거 좀  다 읽어 봐야 되지 그라느냐고서. 아, 읽으면 안된라고서. 그래 인제 당신이 그걸  가지고 가 가지고서 다 읽어 보고서 이렇기는 이렇지마는서도 어린 학생들이  발표해 놓으면 안 되니까 고만 하라고. 죄는 하나님이 죄를 만들어 내지 안  했다면 누가 만들어 냈느냐 그말이오. 그러면 다른게 만들어 냈으면 이원론이지.

죄는 다른 것이 만들어 죄에 대한 원인이 따로 있고 하나님이 원인이 되고, 한  분, 혼자가 존재해 가지고서 한 하나님 한 분으로 일원론과 그라면 이거 모순  되지 않느냐 이러니까 '맞기는 맞지마는' 이랬다 말이오. 이래야 뭘 알 건데. 내가,  본과 학생들이 지금, 그때 본과 학생들이 영어 헬라어 하고 저거는 본과 유식한  학생이라. 해 가지고 우린 별과 학생이니까 별과 학생은 무시합니다. 아주 뭐  무시하고 조롱하는데 뭐 이렇게 날뛰는데 이거 하도 애가 터져서 하나 물었다  말이오. '아, 이거 조사님 이거 뭡니까?' '이거 뭐입니까?' 이러니까 죽 말하는데,  말하는데 얼토 당토 안한 껍데기 외식을 말합니다. 그 사람이 내나  ○○○조사님이라고 아주 ○○교파에 유력한 조사님으로 그 뒤에 목사님으로 저  ○○교회 제천○○교회도 갔고 저를, 뒤에 따라 다녔습니다. 따라 다니며 그때는  좀 ○○교파에서 이렇다고 했었는데 그 뒤에 어찌 고만 변질이 돼 버렸어. 변질이  돼 가지고 그 사람이 나중에 가서 날 대항을 해요. 욕을 하고 이란다 해요.

이라디마는 세상 버렸어. 젊은 사람인데 세상 떠 버렸어요. 내가 조직 신학 때  '이게 뭐입니까?' 이래 물으니까 엉뚱이 대답을 해 내가 있다가 '조사님, 혹  이런것 아닙니까?' 내가 이리 이리 말하면서 '이런 것은 아닙니까?' 이래 말하니까  처음에 잘못 알아들어 또 내가 또 다른 면으로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까 이런  것이 혹 아니겠습니까?' 이러니까 '아, 예, 그겁니다. 아 참 나는 거기까지  몰랐습니다.' 몇 번 그라고 난 다음에 그 사람은 절 따라다녔습니다. 따라다니고  늘 배우고 이라기 때문에 그 사람이 그래도 진리를 좀 바로 깨달았다 싶어서  ○○교회에 그 사람을 후임으로 보냈었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양성원에서 배우면 뭘 진리를 알 건데 바보들이라. 아무  말 못해.

 어떻게 신앙이 과학에서 초월한 것이 신앙인고? 초과학적 이라야지 초월이라  하는 것은 어떤게 초월이냐 하면 밑에 밑절미가 있어야 초월입니다. 초절이라  하는 것은 뚝 떨어진게 초절이고, 초월이라 하는 것은 돌덩이하나 놓고 또 고  위에 하나 놓고 또 고 위에 하나 놓고 고 위에 하나 놓고 이게 초월이오.

초절이라 하는 것은 밑에와 연결 없이 공중에 들려 가지고 밑에서 올라가는 것에  끊겨 가지고 있는 것이 초절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 지식을 잘못 알고 있으면은 큰 낭파가 된다 말이오. 이 신앙이라  하는 것은 땅에서 올라온 것 아니오. 계시, 계시의 도입니다. 계시의 도. 계시의  도.

 따라해요. 계시의 도! 계시의 도! 계시의 도라 말은 하나님이, 자존하신 하나님이  인간이 몰랐는데 하나님이 하늘에서 열어 보여서 아는 것이 이 계시의 도요. 세상  과학이니 철학이니 하는 것은 인간들이 발버둥 쳐 가지고서 이렇게 날뛰 가지고,  발버둥 쳐서 이래 가지고 지금 자꾸 이거 거기에 거기에서 자꾸 돌로 포개 올려  가지고서 기어 올라가는 것이 암만 올라가 봤자 뿌럭지가 땅에 있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땅을 헐면 다 헐어져 버려요. 이러니까, 모든 지식은 폐해질  것이라 하지 안했습니까? 고린도전서 13장에 하다 하다 못해서 내가 나중에  전화로 불러내 가지고 내가 그걸 말했다 말이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양성원에 오면은 이제 배운 걸 알았으니까, 이 배운, 이  배운 그 성경이. 성경의 진리가 틀렸는가 맞았는가. 꼭 백 목사 가르치는게  맞다는 그말 아니오. 틀렸는가 아닌가 거기에서 거석해 가지고서 '보자. 맞는가 안  맞은가 보자' 우리가 아는 지식이 맞은가 안 맞은가 그것을 대조할 것이고, 또  만일 틀린걸 말하면. 자기 아는 거와 틀렸으면 그냥 '아, 이라는 것같다.' 틀린 걸  말해도 '그런 것같다' 이렇게 말 해도 '이런 것같다' 그거는 팔방미인의 아주  잡성스러운, 잡성스러운 인격입니다. 인품입니다. 진실이 없는 인간이라. 이거면  이거고 저거면 저거지 어떻게 이러면 이떻고 저러면 저렇고 그런 인품을  가졌느냐 그말이오. 내가 볼 때에 참 너무 한심하다 그거요. 양성원? 생들 너무  한심해. 그게 뭐 그래 가지고서 뭐 앞으로 불덩이가 될까 뭐 모르겠다 이거요.

 내가 여북하고 먼저 ○○○ 선생이 설교 한번 할 때에 고 뭣을 좀 혹 하나님이  이거라도 써 가지고서 뭘 어떻게 할란가 싶어서 요번에 목사를 시킬라고 자꾸  이래 강조했더마는 본인이 전도사 좀 하다가 한다해서 안 하고 그래 제가 세워  가지고서 개척 교회, 저게 뭐꼬? 무슨 교회지? ○○ 교회에서 가는, ○○, ○○  교회에 전도사로 그랬는데 엊저녁에 내가 전화를 했었는데 자기 부인이 지금  연탄 까스를 마셔 가지고서 아주 뭐 죽다 살아나 버렸어. 이제 그게 회복이 아마  오랫동안 걸릴 것 같애. 그래서, 3 월 31일날 거석해 가지고 4월 1일부터  부임하기로 그렇게 그 동안에 치료를 급속히 해 보겠다고서 그래 말했습니다.

 또 어떤, 여기 ○○○ 조사님 여기 왔소? 뭐 얄궂이 와 가지고 이렇게 하는  사람인데 행여나 뭐 저 사람이라도 뭐이 좀 될까 싶어서 그 사람을 제가 지금  공회원들에게 이야기도 안 하고 어데 비어 있는 교회에 보낼라고 그렇게 지금  말을 했다 그거요. 왜? 여기에나 저게나 뭐 하나님의 쓸모있는 사람이 있는가, 참  진심으로 자기의 인격을 다 기울여서 하나님의 그 신격이 어떤 신격이며 그분에  내게 어떻게 했으며 내가 그분에게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는가, 요 면을 생각해서  인격과 인격의 교제 하는 이 교제를 가지고 그 분을 차차 알아가는, 모두가 다  그분 아는 거요, 그분과 사귀는 것이요, 그분을 섬기는 것이요, 그분이 나에게  이래 해 주었으니 나도 그분에게, 이렇게 날 사랑했으니 나도 그분 이렇게 사랑  해야겠고, 그분이 나 위해서 이렇게 했으니 해 준 내가 이 일을 나도 이 일을  이렇게 이 일을 보수하겠다 하는 그게 전부 신앙의 전부입니다. 이 신앙이라 하는  것은 전부 인격 교제, 신격과 인격에 교제하는 이 교제입니다. 인격 교제의  결합이오. 이런데, 뭐 이런 순 잡탱이, 아주 음행. 간부가 와도 영접 이래도 영접  그런 인격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러기에, 내가 ○○○ 선생의. 그사람에게 제일  잘 보는 것은 하나야. 거룩과 구별 거룩과 구별 그걸, 제가 따진다는 말 하는게,  그 사람은 따진다는게 속에 박혀 가지고 있어. '따져야 됩니다. 따져야 돼요.' 고게  속에 박혀 가지고 있다 말이오. 그 가르침 받은 고게 속에 박혀 가지고 있어  따져야 된다, 따지야 된다는 것이 그 속에 강하게 있어서 모든 생각이나 말이나  대인관계나 사물 관계에 따져야 된다. 뭘 기준해서? 성경 말씀을 기준해 가지고  따져야 된다. 따져야 된다. 따져야 된다는 것을 강하게 느끼면 된다 그거요.

따지는 데서 죄를, 이기고, 따지는 데서 회개가 되고, 따지는 데서 담력도 평강도  얻고 욕망도 얻는 것이지, 따짐 없이 이 사람이 말하니까 거기 피동해서 그  사람이 말하니까 그래 들리고, 저 사람이 말하니까 그래 들리고 이게 뭐이냐 하면  창기라 그말이오, 창기. 창기적인 그런 인격성을 버려요. 그 더러운 인격성을.

밉다 그말이오. 추접하다 그말이오. 창기적인 인격성.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쩌든지 외식하면 안 됩니다. 거기서 가르치면서 똑똑히. 이 세상과학을  가르치면 이거는,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과학은 이런 것인데 이 과학은 이렇고  이렇고 하니까 이것이 정죄함을 받는 것이고 이게 어데까지는 도달하지 못합니다.

이 과학은 그게 멸망받을 과학이요, 그것은 사람을 살리지 못하는 것이 과학이요,  그 과학은, 신앙생활하는 사람이 신앙생활을 그 과학에서 합니다. 신앙생활을  과학이라는 무대에서 합니다. 신앙생활을 과학이라는 그 장소에서 합니다. 그  과학을 신앙생활이 이용을 합니다. 사용을 하는 것이고, 신앙이라 하는 것은 절대  그분의 말씀에게 복종하는 것이요.

 그런고로, 우리가 받은 이 신앙은 그분에게 절대 복종하는 것이고, 그분에게  복종을 할 때에 어데서 복종을 하느냐? 과학이라는 무대에서 복종하고,  과학이라는 장소에서 복종을 하고. 과학이라는 그 사건을 통해서 그분에게  복종하는, 그거는 언제든지 이용하기 때문에 그거는 다 없어질 것이요. 주님과  나와의 교제인 결합인 이것은 그는 영원히 살 것이라 그말이오. 그걸 모르만 안  돼요.

 그래 가지고, 요새 마귀란 놈들이 자꾸 하나님 말씀을 자꾸 이용해 가지고서  이제는, 과학은 그게 백 번 말해도 물질을 근본으로 생각해 가지고 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무신론자에게 과학이 있습니다. 무신론자로서 하나님 없다고서,  무신론자로서 물질이 제일이라고 하는 그 사람들이 과학의 주인입니다.

알겠습니까? 그런데, 인제 고만 과학이라 하면 과학은 신앙도 과학적이야 된다  과학적인 신앙이어야 된다. 이 과학이라 하는 것이 무슨 뭐 목적을 두고서 고  이치를 다 깨달아서 이래 하는 그러면 신앙의 이치도 과학이라고 붙여 가지고서  그만 그래 놓으니까 사람들이 혼돈된다 그말이오. 내가 먼저 한번 말했는데. '요거  요래 가르치지 마라. 요거는 안된다' 이랬는데 요번에 보니까 또 그래 가르치고  있어. 그런데 죽은 학생들 모양으로 아무 뭐 거기 대해서 반응이 없어. 어떻게  신앙이 과학을 초월한게 신앙인가 말입니까? 과학 위에 있는게 아니오. 초월이라  말은 자꾸 과학이. 요 과학보다 또 위에 또 그 위에 또 그 위에 그 위에 그 위에  놓이는 이게 초월이라는 말입니다. 과학 초월이 아니라. 과학은 땅에서 돋아 올라  가는 것인데 암만 커 올라가 봤자 땅에 올라가지 때문에 땅 무너지면 다 무너져.

이 신앙이라 하는 것은 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하늘에는 커다란 하고 끝이 자꾸 가늘어요. 자꾸 내려 오는 끄트머리는 가늘어요.

이래 가지고서 자꾸 밑으로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 이것이 신앙입니다.

 그러고, 내가 엊저녁에 ○○○ 목사를 만낼라고 전화를 이리 저리 해 봐도 있는  데를 못 찾아서 말 못했는데 공부를 가르칠 때에 자꾸 그렇게 구경만 시키는 것,  또 그 사람에게 결과적으로 어떤 유익을 주느냐 하는 그걸 생각해야 되는데.

주력하기를. 이 지금 법을 공부하는 것은 그 법에 대한 이치를 가르치는 그런  그것을 하려고 하지 말고, 그거는 약간 하고, 먼저 보니까 그 법에 대해서 일곱  가지를 기록해서 내놨는데 고게 아주 요긴한 것입니다. 법이란 종류는 다 들어  놨는데 보니까. 그것을 고 기록한 대로 그 종류를 간단하게 설명하면서 외워  두십시오. 외워서 이제 그만 시험은 다른게 아니라 그만 나이많은 사람은 좀 힘이  들어도 외우도록, 외우도록 하는, 외우는 것을 오십 점을 잡고 거기에 대한 뜻을  해석하는 것을 오십 점을 잡으면. 나이 많은 사람은 해석에 대해서 벌써 머리가  연구 두뇌가 됐기 때문에 해석을 하는 데에는 나이 많은 사람이 유리하고 외우는  데는 젊은 사람이 유익하기 때문에 외워 가지고서 그것을 해석하도록 요렇게  해서 공부를 시켜서 그만 많이 해서 그거 다 외우면 백 점, 반 외우면 오십 점.

외워 쓰라 해요. 그래 가지고 좀 공부를 시켜요. 그냥 뭐 시간 내에 해석하는  그런 것 하지마. 해석하는 그런 거는 하나도 몰라도 그저, 말만 들어서 이래  가지고서 이래 해서 하지 말고. 공부를 시켜서 그만 이 양성원에 졸업해 나오면은  어쩌든지 실력 있는 사람 그러면 일곱가지 기록한 그것만 강령적으로 그 이름만  알아도 누구 만 내면 무슨 법 무슨 법에는 무슨 조건 무슨 조건, 고  간단하지마는서도 고것만 알면은 거의 다 되어 가지고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도 법을 알아야 됩니다. 신학교에서 법을 가르치지  안하는데 일반 신학교에서 법을 안 가르칩니다. 내가 알기로는, ○○신학교에  제가 다닐 때는 법을 안 가르쳤습니다. 지금은 가르치는지 모르겠소. 여기에서는  법을 가르치고 사학을 가르치고 이래 하는 그게 중요하기 때문에 제 밑에 복음을  받아 가지고서 하는 사람들은 얼추 보면 법대 갔고 또 사학과에 갔고 그렇게  갔어요. 뭣 때문에 가는지는 모르지마는서도 자기는 크면 알아질 거라 말이오.

 이러니까 그래 가지고서 외우도록. 그냥 보는 것하고 외우는 것하고 다릅니다.

외우도록. 다 외워요. 뭐 시간 자꾸 많이 걸리지만 자꾸 외울 수 있는 그 시간을.

고 간단하게, 간단 명료하게, 너무 깊이 가르치면 몰라 버려요. 그러니까, 무슨  형법이면 형법, 민법이면 민법, 상법이면 상법 그런 면을 간단하게 요렇게 해서  요거는 무슨 말이라 어떤 것이라 그래 간단하게 가르쳐서 이번 학기에 짧은  날짜인데 고게 대한 뜻을 간단하게 요런 것을 가르칠 수 있도록 잡고서 그라고  난 다음에 시험을 당장 치지 말아요. 시험을 치지 말고 숙제를 내 줘요. '요 다음  학기 시작할 때에 시험을 칠 터이니까 외워 가지고 다 오너라. 그때 와서 다 외워  써야 된다.' 그래서 그걸 알면 어데 누가 졸업하고 떡 할 때에 무슨 신학 무슨  신학 어떤 신학을 다 했다 할지라도 만내 가지고 예기를 할 때 보면 그만 얘기할  때 그 상식적으로 법에 대해서는 그 사람 상대방이 말을 무슨 말인고 모르는데  거기 대해서, 거기 대해서는 형법 몇 조에 이렇고 또 뭐 상법 민법 뭐 소송법 뭐  어쩌고 이걸 쭉 이래 말하면 '아. 이 사람이' 그라면 그래 얼마 말 한 시간 할 때  말하기를 '아, 그 사람이 법과 나왔나?' 이랄 거라 말이오. '법과 나왔나?' 법과 안  나왔지마는 알아야 된다 그거요. 그 뭐 알아야 됩니다.

 그러기에 제가 언제 법원에 있는 사람에게 말해 가지고, 아따 그 뭐꼬 그게?  등기법이, 아, 저 ○목사님, 그 무슨 등기요? 가등기? 가둥기하는 그 법이  틀렸어요. '이런 입법을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거 뭐이런 입법하고  있느냐? 이 법이 틀렸다. 내가 보니까. 법이 이런데 와 이 일이 이래 됐느냐? 이  틀렸다.' 이라니까 그 사람 말하기를 '네, 그 법에 대해서 말이 있습니다.' '이게  틀렸다. 이걸 안 고치고 백성들 죽일라고 이런 법을 내 놨느냐?' 내가 이랬다  말이오. 이랬더만 그 뒤에 한 서 너 달인가 두 달인가 지내고 나니까 신문에  나기를 그 법을 개정했다 하는, 개정해 나왔더라 그말이오. 법을 안 봐도, 법을 안  봐도 법에 대해서 법을 판단할 수 있어야 이래 말하면 '그 틀렸다 안 된다.' 다  알수가 있다 그거요. 그거 뭐이냐 하면 법의 원리의 법 철학을 알고 나면은 그거  뭐 조문 조문 외울 것 없이 다 알아진다 말이오.

 그러니까. 요 간단하게 해서 공부를 요번에 그래 가르치도록 그렇게 목사님  노력하이소. 그리고 시험을 치지마. 꼭 숙제로 내 줘서 꼭 외워 가지고 오도록.

그러면 뭐라고 쌓아도 자기에게 외워져 가지고 있는, 기억 돼 있는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이 됩니다. 네, 그라고 학생들은 공부하다가 성경적이 아니면 그걸  말해. 그러면 이걸 혹 그럴 수 있어 이거는 성경적이 아닙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들 하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인 줄을 아십시오.

그러니까, '지혜는 배암같이 하고' 세상 세상 사람들이 뭐라 하느냐 그걸 알아야  내가 거기 빠지지 안하지. 그렇기 때문에, 지혜는 배암같이 하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는 그 말씀을 많이 했지마는서도 거기에까지 도달해서 그 범위의 지식을  자기가 맛보고 거기서 사색하는 그 눈이 열 리지 안하면 그런 소리 암만 해 봤자,  '지혜는 배암같이 하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암만 들어 봤자 모른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것을 널리 앎으로서 자기도 알아진다 그거요.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틀리면 틀린 것을 항의를 해요. 그냥 무조건 배울게 아니라. '아, 이거는  틀렸습니다.' 그라고 또 여러분들이, '아, 이 공부를 하니까. 이 공부를 하니  하나님이 멀어진다. 뭐 흠잡고 책임잡을 거는 없는데 이 공부를 하니 하나님이  멀어진다. 이 공부를 하니까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자꾸 이 공부를 하니 이제  인간이 자꾸 커지고 높아진다. 하나님은 까뭉캐지고 가리워진다. 이 공부를  하니까 인간은 자꾸 적어지고 하나님이 커진다.' 그 결과를 여러분들이 알거라.

자기가 그 공부를 함으로서 뭐이 되는가 알 거라 그말이오. 거기에서 내가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을 판정할 수 있기 때문에 그렇게 눈을 뜨고 공부를 해야 되지.

기드온 군병 군대 삼백 명이 뭐입니까? 기드온의 군대 삼백 명을 뭣 보고  뽑았소? 고만 목 마를 때 물 마시라 하니까 막 엎드려 가지고 물에 입을 대고  꿀떡 꿀떡 넘어 삼키는 사람도 있고, 막 이래 가지고서 막 퍼 먹는 자도 있고,  어떤 자는 딱 이래 가지고 암만 배가 고프지만 그것을 억제하면서 눈을 뜨고서  양 사방 적이 오는가. 양 사방 이래 살피면서 손으로 떠 가지고 입으로 이래  마시고 하는 고 사람만 가려 내라. 고 사람만 가려 놓은 사람이 삼백 명입니다.

그거 뭣 때문에, 고게 한 성경에 형식 계시한데에 형식으로 사용 했는데. 계시할  때에 형식 계시로, 형식으로 사용한 것인데 뭐 그것 뺄라고 그랬습니까? 그게  우리를 가르친 거라 그말이오. 아무리 지식을 받아도, 아무리 물질을 받아도, 뭐  이런 관광을 해서 이런 모든 사물을 구경을 해도 그게 다 먹는 것이라 말이오.

그거 돈이 모자래서 돈 없을 때에는 돈이 오면은 갈급할 때 내나 물 닥친 거와  한가지 아닙니까? 직장이 없어 실직돼 가지고 곤란하다가 직장 척 생기면 내나  배 고를 때, 목 마를 때 물 닥친 것 한가지 아니요, 한 가지가? 그럴 때에  거기에만 도취되면 가치 없고 못 쓴다 그말이오. 그러면서도 자. 그것 먹는  것보다도, 내 적이 있는 것이 더 문제기 때문에, 먹을 때 적이 탁 쳐 버리면  뒈진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래 자꾸 보면서 물을 이래 먹는 것처럼 자, 어떻게  내가 뭐 곤란을 당했을 때 무엇이 왔다 할지라도 '내가 이리 되면 어찌 되느냐?  내 신앙생활이 어찌 되느냐? 어데 홀겨 가느냐?' 많은 생각을 해서, 그냥 단순히  이래도 그 생각은 벌써 몇 십리를 이래 가고 널리 범위해서 이 면 저 면을  생각하는, 그 속이, 하나 말 할 때에 그속이 요만한 범위를 생각하는 사람 있고,  이런 범위 생각하는 사람 있고, 그게 벌써 시간으로 말하면 천 년 만 년 후까지를  생각하는 사람 있고 그것이 넓고 커지는 그것이 뭐이냐 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이루어져가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래 살아야 됩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외식해서는 안 되겠다.' 어쩌든지 껍데기 보다는 알맹이가 많아야 되고 복잡하고  세밀해야 된다, 철저해야 된다, 요거 우리가 가져야 됩니다. 뭐 새벽으로 나오도록  좀 권면해요, 권찰님들. 새벽으로. 안 나오면 자기네들이 뭐, 안 배우면 압니까?  배워도 모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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