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0 20:47
예수 그리스도
1984. 3. 15. 목새벽
본문: 베드로후서 1장 1절 예수 그리스도의 종과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여기에서 베드로가 이렇게 발표한 것은 베드로가 발표하기는 했지마는 베드로 자기 혼자 생각으로 이렇게 발표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신 성령님께서 그에게 감동되어 그의 의사를 순전히 하나님의 의사와 같이 만들어 가지고 그래 발표하도록 해서 발표한 발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베드로의 발표이나 하나님의 의사의 발표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들도 베드로와 같은 성령의 감화를 받으면 이 베드로와 같은 이런 발표를 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 그것이 정상입니다. 우리가 발표를 할 때에 베드로와 같은 이런 발표가 되지 안하고, 그저 껍데기로 말 한 마디로 주님이라고 부르든지, 그저 예수님이라고 부르든지. 또 자기를 무슨 시몬이라고 부르든지, 또 그리 안 하면 새사람이라고 부르든지 이렇게 주님에게 대해서, 자기에게 대해서, 또 주님의 주신 그 은혜에 대해서 이렇게 우리가 발표할 때에 겉은 발표가 한 마디가 됐을지라도 그 한 마디 속에 내용인즉, 자기의 마음에 생각하고 뜻으로나 또 깨달음으로나 각오로나 그 마음에 온갖 그 많은 것을 마음에 가지고 있으면서 그 발표는 한 마디로 할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그것이 영감으로 된 사람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있고. 또 마음을 가지고 있고, 또 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을 대우하는 그 일에 있어서 하나 말로 이렇게 하는 그 섬김도 좋지마는 그 섬김보다 나은 섬김은 그 사람의 행위요.
말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이고 행위도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우리를 섬기는 데에 말로 섬기고 또 행위로 이렇게 섬기는 이것은 사람들이 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말로 섬기는 그것보다 행위로 섬기는 것이 좀 더 진실하다 할 수 있고 또 말과 행위로 섬기는 이것은 다른 사람이 볼 수 있는 섬김인데. 이것뿐이고 속에 마음에는 하나도 없이 마음은 딴 마음을 가지고 그저 행동만 그렇게 할 수도 있겠고. 행동도 안하고 말로만 그렇게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것이 다 외식이겠습니다. 주님이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말씀 하신 것은. '너희들이 입으로만 나를 존경하고 마음으로는 멀리 했도다.' 하는 것은 입술 공경만 있지 마음 공경은 없는 것을 지적해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입술 그 공경도 발표요, 입술로 말하는 그것도 발표요, 또 자기가 행동하는 그것도 발표요, 다른 사람이 볼 수 있게 발표하지 못 하고 다른 사람이 볼 수 없는 그것은 자기 속에 가진 마음입니다.
그러면,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섬기는 그 일이 마음 속에 있어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사람은 보지 못하지마는서도. 하나님은 그것을 더 귀하게 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은 사람의 신장이나 용모의 아름다운 것이나 그 외모를 보지마는 나는 그 중심을 본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또 마음도 그 마음이라는 것이 굉장히 요소들이 많습니다. 마음 속에 여러가지 그 요소를, 참 측량 못할 만치 많습니다. 우리의 몸 하면 몸에는 그저 머리, 몸.
팔다리, 또 내장 그저 이렇게 간단하게 말하지마는 그 몸에 대해서도 연구하는 그 의학계에서는 그 몸이 몇 가지 지체나 되며,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으며, 몇 가지 요소가 되어 있느냐 하는 것을 그들은 우리보다 더 많이 있는데, 아마 그 수가 몇천으로 그렇게 수를 셀 수 없을 만치 많을 것입니다. 그것은 많지마는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사람의 육체라 하는 그 한 마디로 표시할 수 있지마는 그 속에 내용인즉 그 수가 많고 복잡하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마음은 더욱 더 그러합니다. 마음이라는 것은 몸보다 수도 많고 또 능력이 있습니다. 능력이 있어서 마음이 몸을 지배합니다. 말로 하는 그 행동하는 것은 다 몸이 하는 것이지마는서도 그 몸은 마음의 지배를 받고 마음은 그 몸을 지배하는 것이 보통 사람입니다. 그러면, 그 마음은 심히 복잡하고, 수가 많고, 또 능력이 몸보다 더 크고, 강하고, 날래고 또 민첩하기가 비교 못할 만치 민첩합니다. 그 마음 중에도 최고의 고귀한 마음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그 마음보다 영은 헬 수 없을 만치 복잡합니다. 영은, 지난번에 여기에 양성원에서 영에 대해서 말을 하는데, 영이라는 말을 이렇게 번역하고 저렇게 번역해서 영이라고 번역한 것은 수가 적고, 영혼이라 번역한 것이 많고 또 마음이니 이런 것으로 번역된 것도 많다. 그것은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번역은 사람들이 번역을 한 것이기 때문에 사람들은 영을 모릅니다. 왜 모르는고 하니. 영은 벌써 죄와 허물로 죽었기 때문에 속에 있지마는 기능적으로는 그것이 죽어서 없는 거와 같이 그렇게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 뭐이 들어서 살고 있는가? 육이라고 하는 마음과 이 고기덩어리 마음과 몸 이것이 둘이 합작을 해 가지고서, 어떨 때는. 대개는 마음이 위에 있어 가지고서 몸을 다스리고, 몸은 거기에 복종해서 마음시키는 대로 그렇게 하지마는 사람이 아주 타락하면 마음이 그 몸을 다스리지 못하고 몸 하자 하는 대로 갑니다.
예를 들면은, 어떤 사람은, 이것은 뭐 이것도 저것도 아무것도 없고, 그저 자기에게 욕이 되든지 수치가 되든지 낭파가 되든지 천하게 되든지 먹는 것만 좋아하는 그러면 먹는데 끌려서 온 마음이 끌려 가는 그런 사람은 몸이 그 마음을 지배하는 그 사람이니 그 사람은 아주 많이 타락한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가 모든 것보다도 육체의 그 신경, 신경 그것은 정신이 아니고, 감정에 속한 것이 아니고 심령에 속한 것이니까 그거는 육에 속한 것입니다. 육에 속한 것. 남녀 이성 관계인 성교의 성감, 지금은 모두 성감이라 이렇게 말했는데, 그 성교의 신경 그거는 신경 작용이지 그거는 감에 가지 못하는 것입니다. 신경 작용 거기에 아마 그 사람이 발달되고 그 면에 취미를 붙여서. 이것은 아무것도 모르고 자기 성교 신경 그것이 들어서 그 사람의 전 생활을 지배합니다. 그러면, 뭐 그 사람이 사업도 모르고. 또 자기 명예도 모르고, 지위도 모르고, 공부도 모르고. 고만 거기에 눈을 떠 가지고서 그 성신경의 주장하는 대로 해서. 학교도 그만 낙제할 것, 입학하지 못할 것, 또 직장에서 쫓겨날 것, 가정이 절단날 것, 그런 것도 다 모르고, 또 거기에만 끌려 가지고서 사는 그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그런 사람은, 예를 들면 다 육에 끌려 가지고서 육이 그 마음을 다스리는 그런 사람입니다.
또 마음 중에도 여러 층어리가 있어 가지고 수많은 계급이 있습니다. 마음에도 아주 저급에 있는 위치의 마음도 있고, 또 세력이 약한 것도 있고 강한 것도 있고 하는데 그 마음의 요소의 위치 중에는 양심이라는 것이 제일 높은 지위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강한 마음은 어떤게 강한 마음이냐 하면 마음 중에도 욕심이라는 그 마음이 아주 강합니다. 그래서 뭐 물질 이 욕심이라든지 지위 권세 욕심이라든지 안일욕이라든지 무슨 욕심 그놈이 세력이 커 가지고서 그것이 세력을 가지고서 몸도 제 마음대로 지배하고, 또 모든 사물을 제 마음대로 지배하는 그렇게 되어있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그런 욕심보다도 자기 마음 중에 제일 고급의 마음인 이 양심이 그 사람에게는 세력이 강해 가지고서 아무리 자기 욕심이 또 어떨 때는 자기 감정이, 자기의 그 성격이, 자기의 그 복수성이 자기의 무슨 사모성이 이런게 있어서 강하게 역사한다고 해도 양심이 그것을 '그라면 안 된다' 이러면, 양심이 최고의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서 양심이 반대하는 것은 하지 못하고, 양심이 인도하는 대로 그대로 따라가는 그 사람이 마음으로서는 최고로 발달된 사람이요, 그 사람이 바로 된 사람입니다.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자기를 죽일라고 하는데 거기에 갈라고 하니까 모든 자기 시무하던 교회에서 가지 말라고 울면서 이렇게 말할 때에 '나는 아무리 거기에서 나를 죽일라고 기다리고 있지마는서도 내가 마음에 매여서, 마음에 매여서.
마음에 끌려서 나는 거기를 안 갈 수가 없다'하는 그 마음은 바울의 양심을 가리켜 말합니다. 그 양심에게 불려서 아무리 손해가 가도 양심이 하지 마라 하면 못 하고, 아무리 하고 싶어도 양심이 하지 말라 하면 못 하고, 아무리 가고 싶어도 양심이 가지 말라 하면 못 하고, 아무리 취하고 싶어도 양심이 취하지 말라 하면 취하지 못 하는 이것이 양심이 강건한 사람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양심을 우리가 자꾸 길러야 됩니다. 양심을 길러서, 양심을 차차 차차 세력을 더 주어서, 양심 권위를 더 점점 높여서, 양심을 권위 높여 양심이 자기 마음을 다 다스릴 수 있도록 이렇게 노력을 하는 사람이라고 하면 그 사람은 마음이 그래도 바로 통일이 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바로 마음 통일이 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마음 통일이 무슨 욕심이 그 사람에게 강해 가지고서 욕심이 마음을 다 사로 잡아서 욕심으로 마음 통일은 되지 않습니다.
아무리 무슨 욕심을 가지고 이래 한다 할지라도 양심은 못 견뎌서 거기에 눌려 가지고서 꺾어져서 이렇게 세력을 부리지 못하고 주장을 하지 못해 그렇지 양심이 거기에 끌려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 통일은 양심이 주장이 돼 가지고 통일하는 사람은 마음 통일이 가능하지마는서도 그 마음이 양심이 주장되지 안하고 마음에 다른 요소, 자기 뜻이나 의지나 감각이나 정서나 뭐 어떤 그런 것이 주장이 돼 가지고 마음 통일을 하는 것은 통일하지 못합니다.
통일할라 할 때 안 됩니다.
이러니까, 불교인은 불교인대로 마음 통일이 돼 가지고 있고, 또 그 유교자는 유교자대로 마음 통일이 돼 가지고 있고, 또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자대로 마음 통일이 돼 가지고 있는 그런 사람은 공산주의에도 양심이 있고. 불교에도 양심이 있고. 양심이라 하는 것은 절대성 가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을 다 활용해 가지고서 제일 옳고 바른 것을 취하자 하는 그 주장을 가진 것이 그것이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그 사람의 지식이 다른 데 따라서 양심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어느 종교를 가지든지 그 사람의 양심이 그 마음에 최고의 주장을 하고 있다면은, 그 사람은 마음 통일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면에서는 그 사람이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사람이 타락 후에 영은 작용하는 기능이 전혀 없고, 영은 작용하는 기능이 전혀 없고. 이 마음과 몸 둘이 합동해 가지고서 작용해서 살기 때문에 그 사람을 가리켜 말하기를 '육체라' 그렇게 말합니다. 영을 빼 놓은 육체라, 그러면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요, 고기 덩어리는 생각이 없어요. 고기 덩어리는 물질이요, 고기 덩어리는 소 잡아 가지고서 소고기 이래 갖다 놓은 그 고기덩어리나 꼭 같습니다. 아무 그거는 생각은 없고, 이성 비판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육체의 생각이라고 말하는 것은 마음이 그것이 육에 속했다는 그것을 붙여, 육에 붙여 가지고서 말하는 그말입니다. 사람이 창세기 6 장에 '사람이 육신이 되었으니 하나님이 영원히 그와 함께 하지 못한다' 그 하나님은 영으로 더불어 함께 하고, 영은 자기의 부하인 마음을 다스리고, 마음은 몸을 다스리고 이래야 되었는데 영이 죽어 버렸으니까 하나님이 그와 같이 할 수가 없어서, '사람이 육체가 되었으니'하는 그 말은 영이 완전히 죽어 버렸기 때문에 이제는 하나님이 같이 할 수가 없다 하는 그말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있는 수많은 심리학자, 뭐 좋교 어떤 창설자, 어떤 자들이 그 말하는 그 말은 다 끝이 없습니다. 불교에서도 팔만 대장경을 아는 사람이 없다, 끝이 없다. 사람이 자기 생각나는 대로 자꾸 이렇다 저렇다 기록해 놨으니까 그 기록한 그것이야 끝이 없이 얼마든지 말할 수가 있지요. 그러나 그것은 영이 죽고 순전히 식신만으로서 주장해서 한 말이기 때문에 영의 작용이 없이 한 말이라, 그 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영은 하나님과 연결돼 가지고 하나님으로 피동이 되어서만 작용할 수 있지, 하나님과 연결되지 안하면 그거는 죽은 거와 같이 기능적으로는 전연히 활동하지 못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은 하나님만이 쓰실 수 있는 것이지 타락한 사람의 영이라고 그 영을 마귀가 쓰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만이 쓰도록 돼 가지고 있는 것이 영입니다. 하나님의 모형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마귀는 쓰지 못합니다. 하나님만 쓸 수 있는데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졌기 때문에 그 영은 그만 전연히 작용이 없습니다. 작용이 없고, 작용이 없지 그 존재가 없어지는 것 아닙니다. 존재가 없어지는 것 아니고, 작용으로. 지능적으로는 전혀 없는 거와 같이 그렇게 죽어 있는 그것이 심신 속에 있기 때문에 그 심신 저거 마음대로 하지 영은 하나도 작용하지 못합니다.
이렇게, 이 심신이 들어서 영을 죽였습니다. 해와가 영이 범죄해 죽은게 아니고 하와의 그 마음과 고기덩어리 육이 들어서 범죄했기 때문에. 영은 선악과 먹은 것 아니지마는 육이 범죄해서 그 범죄를 주인 책임으로서 영이 책임지고 죽게 돼 버렸던 것입니다.
그렇게, 영이 살아 있을 때에도 이 심신으로 되어 있는 육 이놈이 영을 영 모르게 저 혼자 움직이고 이래 가지고서 죽었는데 영이 죽은 후의 자가 그 영의 말을 못 합니다. 하나님과 연결이 없는데 영의 말이 안 됩니다. 영의 작용이 전혀 없습니다. 없는데, 이 심신 이것들이 들어 가지고서 작용해서 세상 학문이라는 것을 만들어낸 것입니다. 만들어낸 것인데 저거 말대로, 저거 마음대로, 이 성경 기록은 정확무오라, 털끝 만치도 틀린게 없는 정확무오라 하는 이 정확무오라 말은 번역 성경이 정확무오란 말 아닙니다. 번역 성경은 얼마든지 틀린게 있을 수 있습니다. 왜? 그거는 하나님이 성경을 구약은 히브리어로 신약은 헬라어로 기록을 해 주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확무오하게 기록해 주셔서 정확무오하지마는 기록함을 사람이 그걸 보고서 이렇게 깨달은 사람은 이렇게 번역하고 저렇게 깨달은 사람은 저렇게 번역하고,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 이렇게 번역하고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저렇게 번역을 했기 때문에 번역문은 바른 것도 있고 틀린 것도 많이 있다 그 말이오. 그러면, 그 헬라어니 히브리어라 하는 그 말이 그 원어를 아는 사람들은 그걸 가지고서 세력을 부리려고 합니다. 그러면 그 원어가 어떤 원어냐 하면, 원어가 어떤 말이냐 하면 지금 같은 이 발달된 말이 돼 가지고서 성경을 기록했더라면 우리에게 좀 더 알기 쉽도록 그것을 구분해서 기록했을 터이니까 좋았겠는데, 그때는 옛날, 옛날 말입니다. 옛날 고전어, 아주 옛날 말이기 때문에 말 한마디 속에 많은 말이 들어 있다 말이오.
예를 들면, 하나 비유컨댄 옛날은 '문' 처음에는 '문'하는 그말 하나 뿐이었다 말이오. 그런데 '문'하면, 지금 '문' 하는 거는 닫으란 말이 다. 또 '문'하니까 열라는 말이다. 아, 닫아 놨는데 '문'하니까 열라는 말이다. 열어 놨는데 또 '문'하니까 닫으란 말인 것같다. 닫으니까 또 '문' 합니다. 확 다 열어 놨는데 '문'하기 때문에 딱 닫으니까, 또 '문' 하니까 '아, 이것은 다 열라 말이 아니고 조금 열라 말인가?' 그래 가지고서 이제 조금 이래 여니까 '응 됐다'고 인제 이러고, 인제 이러니까 문이란 말 한마디 가지고 다 통과를 하는, 비유컨댄 그와 마찬가지 기 때문에, 그 한 마디 속에는 수많은 그 부분이 안에 내포 되어 있기 때문에 내포되어 있는데, 예를 들면 열 가지 그 뜻이 안에 포함되어 있는데 열 가지 뜻 중에 하나님께서는 어느 뜻을 사용했는지 모른다 그 말이오. 어느 뜻을 사용했는지 모르기 때문에 그 안의 것을 어떤 사람은 '이것을 사용했다, 이것을 말씀한 것이라' 이렇게 번역하고, 어떤 사람은 '저걸 말한 것이라' 저렇게 번역하고, 이래 가지고. 한 마디를, 같은 마디를 번역을 많이 이렇게 여러 가지로 했다 그말이오. 예를 들면은 지금도 그런 것 안 있습니까? 배라 하면 우리가진 이 배 도 배요 타고 다니는 그 배도 배 아닙니까? 또 먹는 그 과일 그 배도 배 아니요? 이와 마찬가지로 고전어는 옛날 말이기 때문에 아주 옛날 말이니까 열 가지로 말할 것을 한 마디로 말해 놨기 때문에 그것의 어느 것을 말 했는지 그거 모른다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번역 성경은 사람이 자기가 깨달은 대로 생각한 대로 번역했기 때문에 번역 성경은 정확무오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번역을, 영이라는 말은 다른 말로 번역한 거는 많고. 영이라고 번역한 것은 없지는 안하고 있기는 있지마는서도 극소수다, 그러기 때문에 다수 가결하는 사람들은 이 마음이나 영이나 같다, 또 영혼이나 마음이나 같다. 이렇게 말하는 그게 누가 말하느냐? 하나님이 말한 것이냐 그 사람이 날한 것이냐? 사람이 말한 것이라 말이오. 이래 가지고 그 복잡한 말들을 해서 사람을 혼돈시킨다 그거요.
이러니까 교파가 많지마는서도 안식교 그런 교파는 영을 부정합니다. 영을 '없다'이랍니다. 영을 '없다'이라고, 또 그 영을 '생기라' 그렇게 번역한 사람도 있고, 영을 '영혼이라' 그렇게 번역한 사람도 있고, 영을 '마음이라' 이래 번역한 사람도 있기 때문에, 그것 때문에 그 사람이 자기가 성령의 감화를 받는 것이 중요하다 그말이오. 지난밤에. ○조사님이 설교를 잘했는데 그 설교를 그래하면 교회가 부흥이 될 거라 그말이오. 사람이 알래야 알 수 없어. 성신의 감동이 알린다 말이오. 성신의 감동이 알려 주는데 성신의 감동이 알려 주는 그 감동이 없으면 안 돼. 성신의 감동이 알려 주는 그 감동으로 아는게 아니면 자기가 알 수 없다 그거요, 그러니까, 다같이 원어를 써줬지마는서도 어떤 사람은 이렇게 번역하고 저렇게 번역하는데. 어떤 사람은 원어 한 마디도 모르고 번역 성경 그것만 가지고도 그 전체를 성경을 연구할 때에 거기에 대해서 귀하고 천한 것, 무엇이 모자란 것. 똑똑히 말을 해서 구별해서 아는 것은 성령이 그 사람에게 감동시켜 주면 바로 알아서 바로 깨닫고, 번역을 잘못해 놔도 그걸 바로 깨달을 수가 있고, 성령의 감화가 없으면, 성령 감화가 없으면 순전히 뭐입니까? 성령 감화가 없으면 사람에게는 뭐 뿐입니까? 성령 감화가 없을 때에는 무엇이 감화시킵니까? 악령이 감화시킨다 말이오. 성령의 감화가 없을 때에는 악령이 감화시키고, 악령의 감화가 없을 때에는 성령이 감화시키고 무슨 감화든지 감화를 받는 것이지 (저 ○○○씨 왜 졸아, 졸기를? 뭐 하는데 빨간 옷은 뭐 하려고 입고? 아이들 모양으로 추접하구로) 그 성령의 감화가 아니면 악령의 감화고, 이것도 저것도 아닐 때는 없다 그거요.
이러니까 악령의 감화를 받으면 그 사람의 마음을 악령이 지배하든지 성령이 지배하든지, 그 사람의 양심도 마음이라는 전부를, 이 악령이 사람의 영만 지배하지 못하지. 영만 지배하지 못하지 마음의 요소는 양심도 지배할 수가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령의 지배가 없을 때에는 악령의 지배가 그 마음을 붙들고 제게 유리하도록만 자꾸 감동시키기 때문에 그 말을 들을 수가 없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한 말로 말하면 그것이 다 없어질 것들이라. 배암의 지식이라.
배암의 지식도 그것을 잘 활용하면 된다 이거야. 배암의 지식도 잘 활용하면 돼.
그러기 때문에, 배암의 지식도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가 얻는 데에 이용을 하면 유익이 되고, 배암의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 대용품이 되는 줄 알고 또 하면 그 사람은 그 지식으로 죽고, 배암의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보다 낫다고 이래 가지고서 강의를 하면, 배암의 지식을 이것을 강조하고 배암의 지식 이게 귀하다, 배암의 지식을 주장하고, 자꾸 이것을 주장을 해 가지고서 하나님의 지식을 까뭉캐고 배암의 지식을 높이는 이런 일을 한다 이거요.
과학, 우리 양성원에서도 세 가지 과학을 공부를 하는데, 이 과학을 공부하는 사람은, 과학 강사들은 자기가 '이 과학이 이것이 하나님의 이 지식을 배격하고 하나님의 지식을 까뭉캔다' 하는 그것을 깨닫고, 이 세상에 사람의 지식이 하나님의 지식을 까뭉개는 이놈을 내가 다시 수정해서 하나님의 지식을 까뭉개지 못하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자기 일인 것을 알고, 또 이것은 언제든지 이 사람의, 배암의 지식은 정확무오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면 맞은 것 같지마는서도 그것이 전지자가 말한 지식이 아니고 그저 그날 맞은 대로 말하고 또 그다음 사람은 어제까지 통계를 해가지고 보니까 '아, 이거다' 역사의 통계 통계를 자꾸 주워 합해 가지고 통계를 해 보니까 다르다고 해 가지고 나가는 것이 인간의 지식이라 말이오. 이 말을 알아 듣겠어요? 이 말을 알아 듣겠느냐고? 여기에 양성원 학생들이 말 알아 들어? 세상 지식은 자꾸 통계입니다. 통계. 둘을 합해 보니까 둘을 합해 보니까 검은게 되지마는서도, 셋을 합해 보니까 또 노르끄름한게 됐다 또 다섯을 합해 보니까 또 딴거 된다. 자꾸 많이 합해 가지고서 합계해 보니까 딴게 된다는 그것이 인간의 지식이 자꾸 올라간다 발달된다 하는 것인데 암만 해 봤자 하나님의 정확무오의 지식에는 맞지 않는다 그거요.
이러니까, 기독교의 진리는 계시 진리요, 비과학적이요, 비합리적이라 말은 인간이 알고 있는 이치에 합당치 않다 그말이오. 이치에 맞지 않다 그말이오.
이런메, 자꾸 이 과학의 가치성을 높이는 거는 좋은데 그것이 가치성이 있는 것만침 높이고, 그 가치가 하나님의 절대성인 이 진리 지식 영감 지식의 이 가치성과 비슷하게 해 가지고서, 이 영감 지식의 이 가치성과 비슷하다, 어떤 자는 '이거보다 이게 높다' 이래 이게 이거보다 높다 하는 자들이 과학자라 그말이오. 이자들이 철학자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공부할 때도 그걸 잘 구별해서 그렇게 해야 됩니다. 기독교의 이 진리는 과학을 초월한 것이 기독교가 아닙니다. 그 위에, 초월이란 말은 그 위에 있다 말이 아니고, 요것이고 위에 돌담 쌓듯이 하나 놓으니까 고 위에 또 고 위에 올라갔고 올라가고 올라가고 자꾸, 이것을 가리켜서 자꾸 초월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기독교는 이 초월이라고 이렇게 하는데 그것이, 기독교는 초월이 아니고 위에서 내려왔습니다.
위에서 내려왔어요. 내려왔는데, 기독교를, 또 기독교는 초월적이라야 되지 초절적이면 안 된다 그 말은 하늘에서부터 내려왔는데 내려온 순서가 있어서 술술 내려 와야 되지, 내려온 순서가 순서가 연결되지 안하고 뚝 끊어져 가지고 있으면 그거 안 된다 그말입니다. 위에서 내려온 초절과 밑에서 올라간 초절이 다르다 그거야.
이래서, 우리 마음은 굉장히 복잡한 것으로서 아주 복잡하고, 예민하고. 권위 있고, 실력있고, 또 몸뚱이 보담은 아주 슬기롭고, 또 그 마음보다 그 영은 하나님의 모형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무한한 무한의 모형이라 그말이라. 무한과 같은 무한의 모형이라 그말이라.
이런데, 영을 요새 인정하는 신학자가 몇 사람 없습니다. 나는 지금 듣들 못했어.
그런 자꾸 신학자들이 사람이 말한 그 말만 듣고 자꾸 이라고서 영감을 받지 안하기 때문에, 사람이 말한 말만 자꾸하고 영감받은 사람이 말한 것도 영감은 전하지 못해. 영감은 문서에 전달되지 안했습니다. 제가 설교한 것을 여러분들이 암만 읽고 외우고 통달해도 성령은 거기에 전달되지 않습니다. 성령은 전달되지 안해요. 성령은 직접 설교할 때에 전달 되고, 또 그 설교를 보고 영감받아 설교한 그 사람이 영감받은 것 만침 그 설교를 보고 그만침 자기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자기 전부를 다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노력과 단계에 가면 영감이 와 가지고서 그 설교를 알게 될 터이니까 그 설교를 알 때에는 또 딴 설교가 될 거라 그거요. 이러니까, 그와 마찬가지로 영감받은 사람들이 말했지마는서도 영감은 전하지 못하고 그 말의 형태만 전했기 때문에 그 형태 전한 그 말만 가지고 다라고 이렇게 하고, 영감은 밭을 요랑 안하니까 틀린다 그거요.
어제 내가 어떤 신문을 하나 보니까, 이게 뭐 영과 육이 동시에 구원이라 하는 이게 어떻게 이 말쟁이들이 말은 꾸며 놨는지 말은 어떻게 높은 어려운 술어를 쓰든지 이리 저리 해 가지고서 그 속에 술어 그것도 만들어 낸 사람은 알았지만 배워 가지고는 그 술어의 뜻이 뭐인지도 모르고 자꾸 이래 주워 가지고 이래 놔서. 보니까 아주 뭐 사람들 보면 그럴듯 한데 순 거석이라. 내가 요래 요래 찢어 버렸어. 이놈의 자식 이놈의 새끼 사람 죽이는 놈이로구나, 이놈이. 뭐인지 기독교를 모르고. 또 그게 명예를 어떻게 명예를 낼라 하느냐 하면, 책을, 그 사람이 저서를 몇 권이나 내 놨는고, 그 사람이 책을 한 권 냈다, 두 권 냈다. 열 권 냈다. 이러니까 책 많이 낸것이 그 사람이 실력있는 사람이라고 이래 또 마귀들이 이렇게 말해 가지고, 쓸데 없는 책을 자꾸 내게 해 가지고서 어쨌든 간에 아무 소용없는, 여기에 뭐고, 청도에서 온. 청도에서 왔다 간 사람 그 집사님 이름이 뭐이지? ○○○청도에서 왔다 간, 아. ○집사, ○집사가 자꾸 저서를 했는데 그 뭘 해 가지고서 한번 나는 몰랐는데 '이거 한번 보시이소' 제 딴에는 자랑하려고 보이는데, 보니까. 일 페이지, 한 페이지가, 한 페이지도, 보니 전부 사람 죽이는 거라. 내가 그래 '네가 이러면 이게 결과가 이리 되는데 이거 어찌 되느냐? 이거 사람이 죽이는 것이 되겠느냐 사는 것이 되겠느냐?' 자꾸 이러니까 모두 다 죽이는 것이니 한 페이지도 쓸 것이 없는데 자꾸 그런 말 엮어 놔. 아마 그 말을 엮어서 참 설사하는 말이라. 나한테 배운 것, 목사님한테 배운게 좋아서 그랬다고 가끔 가다 끼워 놨으니 이 말을 이용하는 거니까 악용하고 만다 말이오. 자기의 그 사상이 아 말을 악용해 버리니까. 그 띄엄 띄엄한 그런 걸 보고서 '아이구야 이거 무슨 깨닫고 이 안에 뭐이 있는가보다' 이래 생각하지마는 전체를 파악해 보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이렇게 마귀는 마귀 저 할 대로 저 할 일을 해서 말세에 이러기 때문에 인간을 죽이는 것은, 말세에 인간 지식이 들어서 인간을 죽이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입니다. 이거는 틀림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인간의 지식은 전부 타락한 후에 영은 죽었고 육덩이만 있는 그것이 들어 했기 때문에, 영에 대한 것을 번역을 옳게 할 리가 없다 말이오. 성신의 감화를 받지 안하면 옳게 할 리가 없어. 저 먼저 우리가 총공회 할 때도 무엇을 그래 말하기 때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 왜? 바로 깨달은 사람은 숫자가 적고 잘못 깨달은 사람이 숫자가 많기 때문에, 수를 투표해 가지고 숫자에 따라서 가결을 이래 하면 자꾸 잘못 깨달은 그 숫자가 많기 때문에 그 숫자대로 나가고 마니까 결국은 타락되고 만다, 그것도 쉬운 말이 아니라 그말이오. 그게 쉬운 말이 아니라 그거 굉장히 어려운 말입니다.
이러니까, 오늘 아침에도 여러가지 널리 이렇게 좀 말했는데 한 말로 말하면 마음은 이렇게 몸보다 작용이 강하고, 민활하고. 또 세밀하고 권위 있고. 세력 있어서 몸을 다해서 주를 섬긴다는 것이, 요 꿀밤 한 개 만하면 마음을 다해서 주님을 섬기는 것은 이 집채 만 합니다. 이만침 많습니다. 양이. 또 마음을 다해서 주를 섬기는 것보다 영을 다해서 주를 섬기는 것은 비유컨댄 이 우주와 같이 큽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영을 요구하시고 마음을 요구하시고, 마음을 요구한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보일 수 있기까지 나타나기 위해서 몸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이런데, 자기가 말로는 이렇게 하나 행동도 되지 안하고 말로, 말로 하는 것은, 말이 어데서 나옵니까? 마음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말은 몸뚱이 아니요? 마음은 고기덩어리 아니요? 이 고기덩어리 작용으로 마음의 기능이 나오는데, 마음의 수많은 것이 억억만 분의 일도 마음에는 없고, 마음은 지금 딴데 다 가 있고, 그것이 고때 주위 환경을 봐서 요 말 해야 되겠다 하니까 말로만 딱 나와서 하는 그 가증스러운 것을 주님이 어떻게 받겠습니까? 알아 듣겠습니까? 마음 속에는 한없는 그런데 그 마음은 전부 딴 데 지금, 마음은 돈에 가 있고, 마음은 권세에 있고, 마음은 다 어떤 인간에 가 있고, 마음은 제 취미에 있고, 제 사업에 있고, 다 가 있고, 다 가 있고 이러다가 턱 닥치니까 '아, 이때는 이 말을 해야 되는구나, 예수 믿는 말을 해야 되는구나.' 그때에 이것들이 '예수 믿는 것 안하면 이거 우리가 지금 낭파되니까 우리가 지금 몰릴 터이니까 이때는 예수 믿는다고 말을 해라.' 속에 있는 그놈을, 전부 그 마음을 다 차지한 그놈들이 뭉쳐 가지고서 '이때는 예수 믿는 말을 해라.' 말로 표시했는데. 우리는 모르니까 그 말로 표시해서 아주 잘 믿는 체로 설교를 하고 이라고 그만 이래 증거를 하니까 잘 믿는 것같이 이래 알았는데, 주님 보실 때에는, 그 억만분의 일도 안 되는 그것으로써, 마음에는 억만분의 일도 없는 그것이 한번 있어 가지고서 말로 표시하고 속에는 순전히 딴 것이라 말이오. 이러니까 주님이 마태복음 23장에.
분해서 거기에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서기관들은 성경 잘 아는 사람들이 서기관이요, 바리새 교인들은 열심있게 믿는 사람들이 바리새 교인들입니다.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 교인들이여' '화 있을 진저' 일곱 번이나 '화 있을 진저'하는 말을 걸쳐서 마태복음 23장에 말씀을 했습니다.
이렇게 그 외식. 속으로 마음은 전부 다 거석하면서 껍데기 입술로는 이렇게 하는 그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분개해서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물건 그런 것을 차지하시는 것보다도 우리의 몸을 차지하는 것을 좋아하십니다. 우리의 몸을 차지 하는 것.
자기가 있는 재산을 다 하나님에게 복음에 드린 것보다도 자기 이 손 하나를. 이 손 하나를 주님에게 바쳐서 이 손 하나는 주님만 쓰지 아무도 쓸 수 없다고 돼 가지고 있으면은 그것을 원한다 그말이오. 손 하나 차지하는 것을 원하셔요. 손 하나 차지하는 것, 손 차지하는 것 이것보다도 주님이 원하시는 것은 우리의 마음을 차지하시는 걸 원한다 그말이오. 마음 바치는 걸 원해, 우리의 마음을 바치는 것보다 우리의 영이 하나님에게 바쳐지는 것을 원합니다.
이러니까, 영은 죽은 걸 살렸기 때문에, 영은 하나님에게 다 바쳐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역사한다고 이랬습니다. 성령과 우리 영은 붙어 한 덩어리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을 증거한다, 아바 아버지라 하는 아들이 됐다, 다시는 그 종의. 종의 그 형상을 가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을 가지게 된다.' 이만하면 영을 알 수 있는데 자꾸 영을 부인할라 한다 그말이오. 영을 부인하려고 이래 가지고서 영을 부인하지, 영혼이라 뭐이라 자꾸 이래 말하는데 이 혼이라는 말이나 영혼이라는 말이나 같은 말인데. 혼 하면 혼뿐이요, 영 하면 영을 생각하고 영에 관련된, 그 영을 생각하고, 영에 관련성을 가지고서 지금 영혼이라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 번역가들이 알지 못하고 번역했기 때문에 그 번역을 참말로 상대할 것이 못 된다 그말이오. 이걸 알고 세상 지식을 이만침 평가하고 공부해야 된다.
이러니까, 고만 이 세상 공부하면 전부 신앙은 다 없애 버리고. 제 딴에는 내가 제일 권위 있고, 잘 알고 역사한다고서 이렇게 말을 해 쌓는데 교인들의 심령은 안 자란다 그말이오.
어제도 어데 보니까. 저는 반드시 목회하면 지금 교회가 제 딴에는 많이 써 쌓는데 교인들이 안 올 거라 말이오, 다 떨어질 거라. 그런게 뭐. ○○○교회는 이렇고, 뭐이십 세기의 교회는 이렇고 논평하면 제까짓게 억만분의 일도 모르는게 제 주관대로 이렇다 저렇다 떠들어 쌓는 것이 참 얼마나 가증스러운지. 여기에 저 시청에서 모두 기독교 모두 목사 장로들 다 청해 가지고서 기독교 연구에 대해서 조사한 결과가 그렇다 이래 가지고 조사한 결과를 제대로 푹 내니까 어리석은 자는 그 말 듣고서 '아 그렇다.' 그게 순전히 인간 노름이요, 기독교 박멸 역사지 기독교를 바로 말한게 아니라 그말이오.
그런고로, 여러분들이 외식하면 안 됩니다. 오늘 아침에 내가 증거할라 하는 것은 그것이오. 마음을 하나님에게 드리라. 마음을 드리라. 그러기 때문에, 옥토에 뿌린 씨가 뭐입니까? 옥토에 뿌린 씨는 마음을 다 하나님의 진리 말씀이 마음을 다 차지하면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맺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진리를 들은 그 진리를, 진리를 들어 가지고서 버려 버리고. 진리를 듣기는 들었지마는서도 그 진리가 내 마음은 들을 때만, 들을때 총명만, 들을 때 그 기억과 총명만 먹었지 기억도 안 먹소. 기억도 그 기억이 마음을 쫓아내 버리기 때문에 그 기억은 이거 뭐 딴것만 기억하고, 그 마음은 딴 것만 생각하고, 그 말씀은 들어 왔다가 쫓겨 나가 버렸어. 쫓겨 나갔는데 어데 쫓겨 나갔느냐? 길바닥에 쫓겨 나갔어.
사람들이 사람들이 밟아 버렸다 그말이오. 또 그 돌작 밭에, 돌 때문에 그만 툭 튀어나가 버렸다. 또 덤불 때문에 다 튀어 나가 버렸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그 말을 듣고 난 다음에 남은 시간은 전부 일주간 내 세상이 다 먹었는데 그 말씀이 어떻게 결실을 맺을 수가 있겠느냐 그말이오.
이러니까, 여기 베드로는 자기가 말할 때에 '예수님' '그리스도' 자꾸 그러니까, 우리 마음에는 그저 자꾸 이 주님에게 관련된 그 모든 것을 자꾸 자기가 생각하고 생각함으로 생각함으로 거기에서 나온 힘 가지고 하는 것이라야 하나님이 받으시지 거기에서 나오지 안한 힘 가지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 말을 표시하기를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로다.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그 속에 영생이 있다. 마지막에 다시 산다.'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라' 그 말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우리가 다 먹습니까? 그 하나 의식으로 해 가지고서 거기에서 미루어 깨닫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나를 하나님 위치에서, 하나님 위치에서부터 십자가 못박혀 죽어 장사되기까지의 쭉 내려오신. 쭉 내려오신 그 내려오심을 자기가 생각합니다. 내려오심을 내려와 가지고 십자가에 못박혀 음부까지 내려가시고 매장된 거기까지를 생각하는 그 생각으로 인하여 나는 그 힘이, 나는 그 힘이 생명을 이루는 힘입니다. 그말 있지 안해요? 사람은 밥 힘이다. 젊은 사람들은 또 안 그러지만, 젊은 사람도 그렇습니다. 밥 힘이요. 그까짓거 암만 장사라도 며칠만 굶겨 놓으면 그까짓 뭐 아무리 약골이 쥐 박아도 꼼짝 못 합니다. 아, 장정이라도 한 열흘만 굶겨 놓으면 턱 퍼들어져 가지고서 아무것도 힘 없어. 모르요. 사람은 밥 힘이라, 밥 힘이라, 다시 말하면 양식 힘이라. 그러기 때문에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라 그 말은 주님의 피와 살이 어데서부텀 시작해 가지고서 어떻게 죽으셨느냐? 거기에 까지를 생각하고 연구함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힘이 나오고. '내가, 나도 죽겠다.
나도 이 일하겠다. 내 있는 것 다 기울여서 하겠다. 나는 죄라 하는 것 죽어도 안 짓겠다.' 거기에서 나온 그 힘 가지고 하는 것이 생명의 힘이기 때문에 '참된 양식이라.' 그로 인해서 난 힘이라야 된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우리 마음에 자꾸 생각해야 됩니다. '아, 주님이' 주님에 대해서 생각하고, 그리스도에 대해서 생각하고, 또 나는 주님의 종에 대해서 생각하고, 나는 사도라 이거 생각하고, 나는 시몬이라, 나는 과거에도 주님이 뭐 나에게 대해서 이럴 때에 나는 주님을 배반했다. 옛사람으로 돌아 갔다 시몬도 생각하고, 또 주님이 나에게 이렇게 할 때에는 날 베드로라는 이름을 줬다. 이래 가지고 기독자는 어쨌든지 그 마음 속에, 예를 들면은 한 가지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 열 가지 생각하는 사람 있고. 백 가지 생각하는 사람 있고 기독자는 그 마음 가운데에 굉장한 것을. 복잡한 것을 생각해 가지고서 이면 저면 모든 걸 생각하기 때문에 이리도 치우치지 안하고, 저리도 치우치지 안하고, 이러니까, 그 모든 것이, 여기에 백 가지를, 백 면을 생각해 가지고서 행동하니까 그만침 그래도 구비하고 온전해지겠고, 천 가지 면을 생각해 가지고 하면 그만치 거석하고, 한 가지 면만 생각해 가지고 하니까 그 사람은 치우쳐서 안 된다 이거요.
그래 기독자들은 마음 가운데에 번개같이 움직인다 이랬습니다. 번개같이.
이러니까 마음 가운데에 복잡하게 되어지지, 불교에는 그렇소. 불교는, 그러니까 불교자와 기독자가 다릅니다. 불교자는 그 얼굴 보면, 꼭 뭐 환 그려 놓은것 모양으로 '멍' 속에 아무것도 생각 안 하는 것이 불교자요. 불교 참신은 아무것도 생각지 않는 것이 참신이라. 그래 아무것도 생각지 안하고 '음' 이래 떡 용모만 점잔하게 이래 가자고 '음'이라니까 보면 불교인은 보면 표난다 말이오. 속예 아무것도 없는 바보라 그말이오. 아무것도 없어 그 불교인도 진짜 불교 아닌, 그 불교인이 아니고 불교를 하나의 자기의 수양으로 생각하고 하는 사람들은 다르지마는서도 참 불교 인은 바보가 돼요. '멍' '음' 이래 가지고 있는 것 모양으로. 기독자는 그 속에 복잡한 것 자존자로부터 영원 무궁의 지옥까지 모든 전부를 다 생각하기 때문에 기독자는 밤송이같은 기독자라. 밤송이 같은 요모조모 요모조모 꽉 이래 가지고 그러기 때문에, 사람을 보면 기독자가 기독 신앙을 바로 한 사람은 뭐 악기가 없어도 굉장히 세밀하고, 철저하고, 보면 투철하고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 대로 되어지니까. 생각하는 대로 그 용모가 되어진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기독자들이 마음을 딴 데 뺏기지 말고, 자꾸 마음을 먹이십시오. '예수' 예수라면 저 하나님이 사람되어 땅위에 오셔 가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음부까지 당하신 그 모든 대속하신 그것과 자기의 죄를 담당하신 것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라 생각하면, 이렇게 이런 것을 만물의 제사장으로, 하나님의 모든 복을 갖다 전달해 주는 선지자로, 모든 피조물들을 하나님이 단일 통치하시는 그 통치를 전달해 가자고서 그 단일 통치에다 복종해서 통치가 되어지도록 하려는 자꾸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복잡해져야 된다 말이오. 그렇게 단순히 쉽게 그라면 안 됩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런데, 이 기독자들은 자꾸 복잡한 것을 싫어하고, 복잡하는 것 좋아 하는 것은 또 세상 망할 복잡을 자꾸 줘 가지고, 그거는 소용없어 신구약 성경이 가르친 이것으로 복잡하십니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한 이것만 자꾸 사모하여 그것만이 우리를 살리는 것이지, 세상에 도서실에 여러 수 만 권의 책이 있어도 그거 사람 죽이는 것이지 살리는 것은 하나도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