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7 15:53
열처녀.영감의 진리 마련순서
본문 : 마25:1-13 그 때에 천국은 마치 등을 들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 그 중에 다섯은 미련하고 다섯은 슬기 있는지라 미련한 자들은 등을 가지되 기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슬기 있는 자들은 그릇에 기름을 담아 등과 함께 가져갔더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밤중에 소리가 나되 보라 신랑이로다 맞으러 나오라 하매 이에 그 처녀들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새 미련한 자들이 슬기 있는 자들에게 이르되 우리 등불이 꺼져가니 너희 기름을 좀 나눠 달라 하거늘 슬기 있는 자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우리와 너희의 쓰기에 다 부족할까 하노니 차라리 파는 자들에게 가서 너희 쓸 것을 사라 하니 저희가 사러 간 동안에 신랑이 오므로 예비하였던 자들은 함께 혼인 잔치에 들어가고 문은 닫힌지라 그 후에 남은 처녀들이 와서 가로되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 주소서 대답하여 가로되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하였느니라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기도> 평생 처음 만나는 이날 첫시간 주님 앞에 경배하며 은총을 입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이 시간에도 우리에게는 영감만이 필요합니다. 주의 구속이 얼마나 크시며 사랑이 어떠하며, 이 부름의 소망이 어떠하며, 모든 존재와 주님과의 관계가 어떠한 이 사실을 이 시간도 영감으로 깨닫게 하여 주사 참 한없는 감사와 찬송과 경배와 영광을 주께 돌리며 주님이 허락하신 이 지극히 큰 소망을 향하여 날마다 이 소욕에서 단마음으로 순생 순교로 걸어갈 수 있는 슬기로운 저희들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영감이 올 때에 모든 것이 정평 정가하게 되고 올바른 소욕을 가지나 영감이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이 질팡갈팡으로 전부 헛되어 다 곁길을 걷는 것인 것을 얼마든지 체험했습니다. 주께서 순간도 우리를 붙들지 아니하시면 일보도 생명길은 걸을 수가 없음을 압니다. 모든 존재는 우리의 생명길 걷는 것을 탄식으로 고대하고 있는, 만물이 염려하는 길이오며, 환영하는 길이오며, 만물이 살고 죽을 수 있는 이 일보 일보의 길인 이 영광의 위치를 밝히 깨닫고 삼가 걸어가는 깬 저희들되게 하여 주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리나이다. 아멘.
우리의 구원이라고 하면 범위가 넓기도 하고 또 구비합니다. 우리 자체가 하나님과 관계가 바로 되어지는 것이요 또 우리 행동이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거게는 사랑도 있고, 소욕도 있고, 비판도 평가도 있고, 경영도 있고, 모든 계획도 있고, 있는 것인데 그 종류를 우리는 다 세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떤 면과의 지금 어떤 면의 그 문제를 가지고 그것을 잘 해서 바른 관계가 맺어지도록 그렇게 하는 것인지 너무 그 수가 많아서 수도 잘 모릅니다. 또 잘 되었는지 안 되었는지 그것도 모릅니다. 그것은 다만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전지 전능자만이 알 수 있는 그런 범위의 것들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것이 하나도 흠이나 점이나 주름잡힘이 없이 되어지는 것이 그것이 잘 되는 것이요 그것이 백분지 일은 됐으나 백분지 구십구는 안 될 수 있고, 또 백분지 구십구는 되고 백분지 일이 안 된 것도 있고, 예를 들면 그렇게 차이 있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의 온전함과, 또 우리를 등용하심에 온전함과, 모든 만물이 우리를 찬양함에 온전함과, 환영함에 온전함과, 또 우리가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들과의 관계에 중보 역할을 온전케 하는 것들입니다.
우리를 부르셔서 구속하신 것은 거룩한 제사장, 또 선지, 왕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제사장직이 제일 귀한 직책인데 그는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을 책임지신 그 그리스도가 책임졌다 말은 기름 부으심이 우리를 책임졌다 말인데 기름 부음이 무엇인가? 그것은 성경에 해석이 나와 있지를 않습니다.
그러나 기름 부음은 하나님께서 신정 국가로 이스라엘을 통치하실 때에 기름 부음의 행사를 하셨습니다. 그때 기름 부음의 행사를 하실 때에 제사장에게 기름을 부어서 제사장 되게 하고, 또 선지자가 될 때에 기름을 부어서 선지자 되게 하고, 또 왕을 세울 때에 기름 부어서 왕 되게 했습니다. 그래서 기름 부음 직책이라 하는 것은 신정 국가에서 제사장 선지 왕 그 세 가지 직책에만 기름을 부었다.
우리는 우리의 구원이라면 그게 이것이 우리의 구원인데 간단하게 말하면 자체의 온전과 행위 온전이라, 자체가 하나님과 피조물과의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요 행위가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이라, 그 모든 이루어 놓은 행사들이 다 하나님이 기뻐하고 만물이 기뻐하는 것이니까 그것이 세마포 읏이라. '세마포 옷을 입었으니 세마포 옷은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라' 그렇게 요한계시록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 구원을 이루는 것은 유일로 영감인 진리, 영감의 진리 영감의 진리만이 우리의 구원을 이룰 수가 있습니다. 영감의 진리는 무한한 지혜요 무한한 능력인데 우리의 믿음을 연단한다 하는 그 말씀은 무슨 말씀인고 하니 우리가 신앙 행위를 하는 그 행위 중에는 영감의 진리가 와 가지고 우리를 붙들고 건설한 건설이 있고, 또 자기의 주관이 건설한 건설이 있고, 어떤 피조물의 그 능동에 피동돼 가지고 건설된 건설이 있기 때문에 영감과 진리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건설한 것만 남겨 두려고 하는 그 모든 시련이 연단인 것입니다.
'금을 불로 연단한 것보다도 더 귀하다' 그말은 연단받온 믿음이 금보다 가치가 크다 하는 그말이 아니고 금을 불로 연단하면 잡철이 다 제거되고 순금만 남는 그것보다도, 그것도 다 잡것 제해지고 순금만 남는 그것보다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해서 인본의 피조물로 인해서 되어진 그것을 다 제하고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인 영감의 진리의 그 능력이 와 가지고서 우리를 만든 그 만든 것만 남게 하는 그 정선이, 깨끗하게 선별한 그 정선이 불로 금을 연단한 그것보다도 더 뛰어나게 더 깨끗하게 하신다 그말입니다. 잡것이 없게 더 깨끗하게 하신다. 그것은 영원히 칭찬과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게 되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영감의 진리만이 우리 구원을 이룰 수 있습니다.
성령을 받아라 하는 말은 성령을 우리가 무슨 소유물같이 받아 가지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알아듣도록 하기 위해 가지고서 그런 정도로 말씀하신 것인데 성령을 받으라는 것은 성령을 내것을 삼으라는 그말이 아니고 내가 성령의 것이 되라 하는 말입니다. 내가 성령님의 것이 되라.
영감의 진리가 언제부터 시작해서 무슨 일을 해서 계속해 나왔다 하는 것을 내치 중거를 해서 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 영감의 진리가 와 가지고 우리의 이 구원이 참 광대한 구원입니다. 광대한 구원이고 세밀한 구원이고 이러기 때문에 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기 때문에 이 구원을 이루는 데에 힘을 쓴 사람은 불교에 나가는 사람 모양으로 그저 멍하게 모든 것을 추론 추측 추상 이것온 실상이 없는 그런 확정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은 항상 의문 속에 있고 그저 그러기 때문에 하나의 명상 속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도 실상을 잡지 못하기 때문에 그 인품이나 모두 인성들이 요거라 하는 그 구별이 없습니다. 하나에 딱 도착돼서 그 진실이라는 그게 없고 그저 멍한 하나의 도덕 그런 윤리 또 사회성, 불교는 특별히-산골짝에 있는 같지마는-정치성을 많이 띠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자는 아예 구원 이루는 것이 이러기 때문에 자기와 자기 아닌 객관인 모든 피조물과 자기와 자기 아닌 객관인 창조주 하나님과의 이 관계를 바로 맺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 아는 것이 자기 아닌 것을 아는 것이요, 자기 아닌 것을 아는 것이 자기 아는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범위가 넓어 자꾸 이것이 자기 구원 이루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생각하면 범위 넓게 모든 존재와 관계를 올바른 관계를 생각해서 자기라는 자기가, 왜 자기를 애끼고 자기를 키우느냐? 자기라는 자기가 자기 아닌 모든 존재에 소원대로의 것이 되어지고 모든 존재가 환영하고 기뻐하고 필요한, 모든 존재에게 필요한 것이 되어지는 그 양을 채우기 위해서 자기를 위해서 자기가 온전해지기를 노력하는 것이지 땅에 속한 것과 같이 모든 존재를 다 착취하고 다 정복해서 그것을 다 이렇게 정복해 가지고서 자기에게 모아서 자기를 키우는 그런 것이 세상이요 그게 사망인데 이는 자기를 홑어서 모든 이에게 다 살려 주는 이 역활을 가리켜서 '너희들은 세상의 소금이라'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그 자체가 있는 것을 헐면 없어질 터인데 뭣이 남아 있겠느냐? 그는, 자체의 모든 것을 헐고 자체는 받는 것이 무엇을 받느냐! 자존자이신 창조주이신 그분 한 분에게 받아 가지고서 모든 것을 다 모든 존재들에게 주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제사장 실력이 점점 성장돼 나가는 것이요 그것이 중보, 주님이 중보되신, 우리의 중보되심 같이 주님으로 인한 중보의 그 자격이 점점 실력있게 되어져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차차 믿어가면서 자기는 알고 다른 이를 생각지 못하고 현재만 알고 과거 미래를 생각지 못하고, 또 공간적으로는 현 장소만 알고 현장 외에 다른 수많은 공간을 생각지 못하는 사람은 그 사람은 믿는다 하지마는 기독교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역연 사망 속에 있는 그 사망으로 자꾸 짙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망으로 그 힘으로서 더 성장해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독자는 이타주의도 아니요 이기주의도 아닙니다. 이기주의가 없이 이타주의가 안 되고 이타주의가 없이 이기주의가 안 되기 때문에 자기는 모든 존재를 위해서 위할 수 있는 자가 되어지기를 그것으로서 자라가는 것이 기독자가 자라가는 것이요 또, 자기는 모든 자를 위하는 것으로 자라가는 것이 자기가 자라가는 것이요 모든 존재는 자기를 위하는 것으로서 그렇게 되어져 가는 것이 자기가 자라 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불교나 다른 이종교와는 아주 다른 것입니다.
그런데 이 모든 성공이 어떤 때 되느냐 하면 그 시기와 장소는 언제든지 지금 닥친 이 시간, 이 자리, 이 때에서만 구원을 이룹니다. 그 자리를 벗어나서는 못 이룹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가 지금 예배 보면 예배 보는 이 시간, 이 자리, 모든 지금 접촉하고 있는 이런 것들, 여게서 우리는 오늘 예배를 보고 이래 설교 듣고 또 설교하고 이러니까 요 우리의 현실, 지금 이 시간 이 자리에 이런 모든 여건들이 갖추어 가지고 있는 요 현실. 요것만이 우리 시간이요, 우리 장소요, 또 우리의 소유요, 우리의 모든 성패 생 사가 다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게서 영감의 진리대로 우리가 움직이는 것이 그것이 우리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영감의 진리는 마련하는 그 순서가 우리가 요 현실에서, 현실에서는 반드시 우리가 그 현실을 어떻게 행동하든지 행동해서 통과해야 되는데, 그 현실은 어떻게 우리가 행동하든지 행동해서 통과를 해야 되기 때문에 거게는 비판이 필요하고 평가가 필요하고 또 우리 행동이 필요합니다.
필요하는데, 우리가 어떤 자리에 살았던 사람이냐 하면 그저 아무 비판 평가 없이 짐승이 사는 것처럼 본능적으로 살았던 우리들입니다. 본능적으로. 자기 마음에 쓰여지는 대로 생각되는 대로 그 원하는 대로 그래 살은 것이 그것이 본능적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만 자기 몸, 자기 마음 그것이 원하는 대로 그대로 산 것이 그것이 본능적으로 살았던 것입니다.
거게서 조금 장성해 가지고서 수양을 받고 조금 장성됐다고 하는 위치가 어떤 위치인고 하니 자기 현실을 만날 때에 자기가 좀 생각을 가지고서 '내가 뭣이 필요하다' 이래서 어떤 사람은 자기 현실이라는 현실을 돈을 위주로 해 가지고서 돈 본위로 전부 자기 현실을 다 비판하고 평가하고 이래 가지고서 돈 본위로, 또 어떤 사람은 자기 지위나, 직장이나, 자기의 사회나, 가정이나, 조부라운 그것 하나를 상대에서 그렇게 움직이고 사는 사람들이 세상에서는 제 발등에 불을 끌 수 있는 그런 좀 슬기 있는 사람이라 그렇게 봅니다. 그 사람이 그래도 자기 실속을 차리는 사람이라 그러는데 그것도 차려도 내나 사망 속에 든 것입니다.
우리가 거게서 나가서 우리는 성경대로 살아야 되는 사람이니까 성경대로 살아야 되는 사람이니 성경 지식을 가지고서 성경 지식대로 살아야 되는 것이요, 성경 지식은 우리의 생의 법칙이니까 성경 지식 대로 살아야 되니 성경대로 하면 어떻게 되느냐 하는 그것이 우리가 이성 비판으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의 이성, 성경적 이성을 가지고서 우리가 현실을 판단해서 결정지워 가지고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성적 판단으로 현실을 살아나가서 이성적 생애로 현실을 살다가 거게서 이제 좀 더 힘을 쓰면 신앙 양심적 비판으로 살게 됩니다. 신앙 양심적 비판이라 그말은, 신앙 양심이라고 말하는 것은 양심대로 살면 되는 것 아닙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가진 지식의 지배를 받습니다.
양심은 지식의 지배를 받는 것이기 때문에 그 사람이 불교적인 지식을 가졌으면 불교적인 양심이 되고, 공산 그 사상의 지식을 가졌으면 공산주의적인 양심이 됩니다. 또 유교의 지식을 가졌으면 유교적인 양심이 됩니다. 그런 것 다 필요 없고, 그것 다 잡것이요 아무리 양심대로 한다 해도 그건 다 죽은 것이요 다 썩은 것입니다.
신앙 양심이라 말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감 도리의 문서계시를 육십육 권을 우리에게 줬습니다. 이 문서계시를 준 성경 지식을 바탕으로 삼아 가지고서 성경 지식을 가지고서 '이리 해야 되나 저리 해야 되나?' 성경 지식을 가지고 가장 올바른 길, 양심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사를 두지 않습니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원수에게 그렇게 선입적 관념을 두지 않습니다. 원수나 자기나 모든 것에게 하나도 사가 없이 공평을 가지고서 옳게 바르게 판단하는 것을 가리켜서 양심이라 그렇게 신앙 양심이라 말합니다.
그러기에 제가, 한국에 나와 가지고 있는 선교사를 다 제가 접촉은 못 해 봤지마는 설교를 하는데 제일 신앙에 깊게 올바르게 깨닫고 있는 그 선교사를 말하면 스톡 박사라 하겠습니다. 스톡 박사라고서 칼빈 신학에 윤리과를 맡고 있는 선교사인데 그분이 와서 강의를 할 때에 그때에 양심을 말하는데 그분은 보니까 양심을 하나님의 사자로 그렇게 말합디다 하나님의 사자로. 인간에게 속한 인적 요소가 아니고 신적 요소인데 신적 요소를 인간에게 보내 가지고서 인간을 다스리고 살펴보라 하는 그런 것으로서 그렇게 양심의 정의를 그렇세 합디다. 대단히 그 양심에 대해서 냉정스럽게 비판해 본 사람의 말입니다.
그러나 양심이라는 것은 인적 요소지 신적 요소는 아닙니다.
인적 요소로서 인간에게-영은 죽었으니까-영은 죽었으니 영 죽은 사람에게는 제일 그 사람에게 올바른 빛이 되어 있는 것이 그것이 양심입니다. '너에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하는 그 빛은 자기 양심을 가리키는 것이요 또 자기가 영감과 진리대로 성화된 그것을 가리켜서 빛이라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적 현실로 이렇게 비판하고 펑가하는 그 자리에서, 그 자리에서, 자기가,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양심에 자잭할 것을 찾지 못했으나 그러면 양심에 자책될 것 하나도 없이 다 했다 그말이오.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으나 내가 내 양심이 어둡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을 만한 그런 실력이 없다.
양심대로는 내가 찾아서 가졌지마는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알지 못하심이 없고 모든 것을 아시는 그분 앞에 가서 심판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그분 앞에 가서 심판받을 걸 생각할 때에 아직까지도 심히 협착되어 있는 내 양심 가지고 양심에 이제 아무 자책할 것이 없으니까 이는 완전이라 내놓을 수가 없다. 내놓을 수가 없고, 이제 그분 앞에 갈 것이기 때문에 양심적으로는 자책할 것이 없이 이게 선정됐지마는, 선정됐지마는 이것이 참 때묻은 옷 정도로, 때묻은 옷 정도로 깨끗한 것이지 이것이 아주 깨끗한 것은 당신만이 가지고 있고 알고 있는데 그 깨끗에는 도달을 뭇 했으니 양심에 자책할 것 없는 것 가지고서는 도무지 안심되지 못하고 이것은 그저 하나의 발버둥치는 것이지 이것 가지고는 안심이 되지 않는다 하면서 구하는 그것이 뭣이냐? 영감 진리를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거게서 지금 자기가 가져 나온 것은 뭘 가지고 나왔느냐? 아무 생각 없이 질팡갈팡으로 살던 그 자리에서 헤치고 나왔고, 또 자기가 무슨 이런-그게 양심이 화인 맞았다 하는 것인데-물질이면 물질 위주로, 지위면 지위 위주로, 자기 어떤 사욕의, 어떤 욕심의, 어떤 부분의 그 위주로 그래 나가는 그 자리에서, 양심을 꺾고 그 자리 있다가 그것도 또 헤쳐 나왔다 말이오.
그것도 헤쳐 나와 가지고서 성경 말씀의 지식을 가지고서 자기 이성으로 비판을 해서 이새야 옳으나 저래야 옳으나 이성으로 힘껏 이성껏 비판해 가지고서 찾은 그 자리에서, 또 거게서 그만 머물러 있지 안하고 거게서 서서 있지 안하고 거게서 또 나와 가지고서, 그 이성 비판적 이성적인 생활에 거게서 한 걸음 또 헤치고 나와 가지고 그걸 뚫고 나와 가지고서 양심의 그 위치에서 양심적 생활을 하려고 이와 같이 뚫고 나와 가지고서 양심에 나와 가지고도 마음에 만족이 되지 안해서 거게서 이제 바울이 말하는 대로 양심으로서는 요 자리지마는 이게 맞은지 안 맞은지 모르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발버둥치면서 영감의 진리가 와 가지고서 나에게 알려 주시기를 고대하고 있는, 고대하고 갈급하고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지혜가 부족하거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그러나 믿음으로 구하고 의심하지 말아라' 어제 그걸 어제 아침에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거게서 양심 생활에서 만족이 되지 안하고 양심 생활에서 하나님의 심판에 정죄받을 것과 거게서 사형받을 것 이런 것을, 사망받을 것을 걱정을 해 가지고서 애를 쓰는 그것이 최종으로 이제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 영감이 그 진리를 '네가 요 현실에서는 이렇게 해라' 가르쳐 주시는 그것이 영감인 것입니다.
이스라벌 백성들을 인도할 때에 낮으로는 구름기둥이 밤으로는 불 기둥이 인도해 가지고서 구름기둥과 불기둥대로만 가서 뭐 홍해바다 라도 어데라도 불기둥과 구름기둥대로 이와같이 간 것 모양으로 그것이 이제 영감 진리가 우리를 인도하는 것입니다.
인도하는, 그러면 그것은 다 음고 참되고 온전한 이제 거게까지, 양심으로 나와 가지고서 거게서 지금 영감 진리의 인도를 우리가 갈망하고, 양심에까지 도달해 가지고 안심되지 안하고 안심하지 안하고 거게서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이 최고의 최후로 하나님에게 간구하는 그 간구요 그럴 때에 성령의 진리가 와 가지고서 우리베게 알려 주면서 우리로 하여금 그대로 행하게 합니다.
그러면 영감 진리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영감이 오면 벌써 우리에게 행할 수 있는, 그 영감은 뭣이 영감이냐? 바로 깨닫게 되고 할 욕망을 가지고 할 용기를 가지고 달라들어 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영감인 것입니다. 영감이 와 가지고서 우리에게 역사할 때에 그때에 우리는 올바른 현실을 돋파나가게 됩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 말하면 이렇게 복잡하지마는 이것이 인제 대번 쉽게는 안 되는 것이고 자꾸 연습을 자꾸 이렇게 하고 하고 하면 그 영감의 진리가 와서,나를 붙들고 역사하도록 하는 그 일이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이거 연습으로 되어지는 것이지 이것을 지식으로 되어지지 않는 것은 지식으로 될라 하면은 이것이 논리가 많기 때문에 그 현실온 벌써 지나가 버렸다 말이오. 현실이 오랫 동안 지나가지 안하고 많은 시일을 걸치는 그런 현실도 있지마는 퍼뜩 지나가는 현실이 있으니까 그 현실에 언제 논리할라 하면 적어도 시간이 몇 분 지나야 되는 것인데 언제 논리 현실 하다가 그만 안 된다 그말이오. 그러나 자꾸 연습을 하면 그것이 간단 간단 되어지는 것.
저 우리 ○○○목사님은 스케이트에 동양 선수입니다. 동양 선수가 아니라 동양 참표를 그때 땄습니다. 땄는데, 그래 내가 물어봤어. '스케이트를 타면 획 돌기도 하고 이러기도 하고 저러기도 하는데 그럴라 하면 거게서 그걸 어떻게 어떻게 논리적으로 순서를 하면 순서를 꾸밀하고 하면, 논리적으로 그걸 순서를 말하려면 이렇고 저렇고 논리적으로 순서 꾸미는 데 시간이 상당히 걸리고 그거 글을 써도 아주 몇 페이지를 써야 되고 이럴 건데 그것이 스케이트를 탈 때에는 그런 논리 순서를 자기는 요럴 때는 요렇고 요렇고 요렇고 요런 순서 요런 순서 요런 순서 요런 순서 해 가지고 몸을 요리요리 해 가지고서 그래 타야 된다 그런 논리 순서를 생각합니까 생각도 않고 그만 그대로 그만 이래 해 버리면 그게 돼집니까?' 물으니까 해 버리면 돼진대요.
그래 내가 그거 물으면서, 해 버리면 된다고. 그와 마찬가지로 처음에 배울 때는 그래 배워야 됩니다. 배울 때는 요때는 요럴 때는 몸을 요래 조금 요래야 되고 또 요래 재껴야 되고 앞으로 숙여야 되고 어째 또 중심을 취해서 요리 조리 하는 그절 논리적으로는 복잡한 것을 배워서 그대로 연습을 하지마는 그것 가지고는 폭이 안 된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자꾸 연습하는 가운데서는 그만 일 초 동안에, 일 초 동안에 그런 뭐 수십 가지의 순서가 쫙 다 돼 가지고서 되는 이와 같이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연습이 필요하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슬기 있는 다섯 처녀는 미리 기름을 준비했고 슬기 없는 다섯 처녀는 그때 임시 기름을 준비하려고 하니까 헛일입니다. 그러면 기름 준비 그 기름이 뭐이냐? 영감 진리의 은총입니다. 기름이라는 것이 영감, 진리의 은총이오.
그러니까 이 평소에 자기가, 자기가 그만 아무나따나 사는 그 자리를 머물면 죽습니다. 거게서, 거게서 억지로 뚫고 나오고 헤고 나와 가지고서 이제 거게서 모든 사물의 사욕적인, 사욕을 본위로 해 가지고서 사욕적인 현실로 사는 그 자리도 사망이기 때문에 그 자리도 헤쳐 나오고 그래 가지고 자기가, 그러면 성경을 근거한 성경적 이성 비판에 생애에 나와 가지고 거게서도, 살면 안 돼.
그것도 혜쳐버리고, 이제 거게서 성경 양심 신앙 양심, 성경 양심에 그 자리에 나와 가지고도 거게까지밖에 이상은 못 갑니다. 우리는 거게 이상은 못 갑니다.
거게까지 와 가지고도 마음에 안심이 안 돼 가지고서 고민하고 고민 하면서 '내가 여게서 이렇기 때문에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한다. 왜 모든 것을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와 가지고서 요렇다 해 줘야 되지 그리 안 하면 안 된다는 그분의 그 인도를 바라고 그분의 도움을 바라는 것이 영감 진리의 인도를 기다리고 바라는 것입니다.
그걸 평소에 이렇게 해 가지고 자꾸 연습을 해서 이리 되면, 밤중이라는 것은 자기로서 그 종류에 대해서는 최고로 어려운 때요 최고고 깜깜한 때요. 최고로 어려운 그때도, 최고로 급한 때요, 최고로 어려운 때요 최고로 마찰이 많은 때요, 최고로 희생이 많은 때요, 최고의 절정기인 그때도 평소에 미리 준비해 놓은 영감 실력 가지고 그때 빛을 낼 수 있다. 그때 환경과 주위 어두운 세상에 묻혀서 세상적의 것이 되지 안하고 어두운 세상을 반대하는 하나님과 일치된 그 빛을 나타낼 수가 있다. 그것이 거게서 주님으로 더불어 계혼한 자리다. 그것이 주님으로 더불어 일체되는 그 자리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기름을 미리 준비했다. 평소에 이 영감 진리의 인도와 도움을 받는 이것을 평소에 자기가 연습해 가지고서 숙달이 돼야 되는 것이지 논리적으로는 번연히 알기는 알지마는 연습 안 한 사람은 그때 헛일이라 그말이오.
암만 책을 가지고서 '여러분들 스케이트를 타는 데에는 이렇게 이렇게 이래 돌려고 하면 이리 몸을 이래야 되고 저래야 되고' 수십 가지를 이래 논리로 한 그 책을 외워서, 외워서 거게서 스케이트 교수 노릇을 합니다. 하면서 이렇게 다 말한다 해도 연습 안 한 사람은 헛일이라 그말이오.
자기 논리적으로는 쭉 이래 가르쳤치마는 얼음판에 갖다 놓으니까 '이렇게 돌아갈 때는 이래야 된다' 언제 그 순서 하기 전에 툭 떨어져 박이 깨졌는데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안 된다 그거요. 자꾸 연습이 필요하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연습이 필요하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미리 기름을 준비했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연습 하는 것이, 그러면 이 일이 어찌 되느냐? 이 일이 아무나따나 하는 데에서 자기 사욕으로 하는 그 세계를 벗어 나왔어야 되고, 성경적 이성 판단 가지고 한 것이고, 양심적 이성 판단 가지고 한 것이고, 또 영감 진리의 판단의 도움으로 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신앙 생활에 이 성공이라 하는 것이 무식한 생활이 아닙니다. 이것이 무지한 생활이 아니오.
다른 사람들은 '뭐 예수 잘 믿으면 그 사람이 예수 믿는 거나 알지' 하는 말인데 예수 믿는 것만 아는 게 아니라 예수 믿는 생활은 자기가 벌써 정신 없이 살던 자리에서 거기서 탁월했고, 거기서 또 자기 개인 욕심으로만 사는 그까짓 것도 버리고 거기서 탁월했고, 거기서 성경적으로 모든걸 다 생각했고 하나님도 생각했고 피조물도 생각했고 모든 걸 다 생각할 대로 자기 양심대로 다 생각해 가지고 걸림이 없는 그 자리를 택한 그것도 합격이 안 돼서 거기서 기다리면서 호소할 때에 성령이 와 가지고서 가르쳐 준 것이기 때문에 이는 모든 존재에게 다 옳고 바르고 참된 그 관계를 맺어져 가지고 되어지는 이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생활은 치우친 생활이 아니요 이것은 무지한 생활이 아니오. 이 생활 바로 하면 인간 머리에서 나온 그까짓 것을 배우지 안한다 할지라도 다 되는데 사람이 그렇게 힘쓰기가 어려우니까 인간 머리에서 나온 그것을 구경을, 세상 구경, 세상이 이렇다는 구경하는, 구경하면서 잘못하면 구경하다가 환경의 소산이 돼 버려 가지고 멸망당할 것이기 때문에 구경하면서 그때에 자기가 믿음으로서 하나님께 피동되는 것으로서 이래 가지고 언제든지 거룩을 가지고 '하나님이 제일 크다' 그다음에 '피조물 있다' 그다음에는 또 '하나님이 운영해서 구속이 있다' 구속이 있고 나가서는 '모든 존재는 이를 위해서 대기하고 있다. 여게는 하나님의 법칙이 있다. 법칙에 그때그때의 법칙리 영감 도리가 와 가지고서 인도하고 돕는 그것이 있어 그대로 돼야 된다.' 이렇게 해 나가서, 이것이 비판이요 비판적이요 비판적이요 평가적이요 펑가적이요, 논리적이요 논리적이요 이렇게 마구 논리로 걸어 나가고, 비판으로 걸어나가고, 평가로 걸어나가 가지고서, 평가의 절정이요, 또 비판의 절정이요, 논리의 절정이요, 자기로서는 선별의 정절이요, 이 선별의 절정으로서 인간으로서 절정에 도달하는 그 절정 도달이 뭐냐 하면 신앙 양심 생활입니다.
거게서도, 거게서도 아직까지 이것이 불완전하기 때문에 영감의 인도를 원하는 그 길이기 때문에 비판 비판해서 나갔었기 때문에 그 생애가 어둡지 안하고, 치우치지 안하고, 무지한 생활이 아니라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모든 존재의 중보가 될 수 있는 그런 실력을 갖추어 가는 그런 신앙 생활입니다.
신앙 생활을 사람들은 뭐 똑 최면술 모양으로 예수 믿는 데 도취돼 가지고 하는 그리 되느냐? 그게 예수 미치괭이라고 하는 사람들 그거 희망은 있지마는 예수 믿는 사람은 모든 일에 대해서 원만하게 동글동글하게, 이렇게 길쭉하지도 안하고 동글동글하게 자라가는 것이 예수 믿는 사람이 성장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조그매 깊은 데가 있으면 그 깊은 데가 채워지기 전에는 그 깊은 데와 꼭 같이 돼 가지고 있지 한 군데 깊으고 다른 데만 자라가지 않는다 그말이오. 그거는 자라가야 그 헛되지 그거 바로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꼭 동글동글하게 자라가서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과 자기와의 모든 원만원만 원만원만으로서만 자라가는 것이 기독자의 성장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독자의 성장을 가져가면서 이 길을 하면 '뭐 세상 지식을 모르면 안 된다.' 그런, 그것은, 물론 일반적 방편은 그렇지마는 요 신앙적으로 하는 방편 하면 인간의, 인간을 만든 그 인간의 머리에 인간의 마음의 구조라 하는 것은 형언할 수 없는 마음의 뭐, 한 사람의 마음도 요랬다 조랬다 한없는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그것을 다 연구해 가지고서 그런 데에 다 관계를 바로 가지도록 하는 그것이 영감의 이치인데 그거 안 사람이 거게서 나온 흘러나온 지식 그까짓 거야 문제될 게 뭐 있습니까? 내가 아레, 반사가 하기아동 성경학교 공과를 와서 읽어보라고 이러니까 읽는데 내가 보고서 '이것은 이 글씨가 아무것도 아니지?' 내가 이러니까, ○○목사가 공과를 만든 것이기 때문에 '이 글씨가 그 사람은 기역자도 잘 못 쓰는데'이러니까 '이거는 아마 자녀나 무슨, 자녀들에게 시켰는갑습니다.' 기역자도 옳게 못 써. 국민학교 이학년 들었다가 말았어요. 들었다가 말았으니까 이뭐 글씨 쓰는 것 보면 기역자도 옳게 못 씁니다.
이런데 그 사람의 지혜는 우리 진영에서는 뛰어났습니다. 제일이라고 할 수 있어. 나는 그 사람 따라가지 못해요. 뭐 이래 집 짓는 것, 생전 안 봤지만 집 짓는 이런 것도 이래 보면 그 의견이 탁월하다 그거요. 진리는 나한테 배우지마는.
그러니까 대구 있을 때도 뭐 도청에나 어데든지 관서에 그만 그 사람이 가면은 그만 해결이라. 그 사람이 가서 말 몇 마디 안 하면 그만 다 해결이고 그 사람들도 안심하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그러니까, 서울에 가 가지고서도 그 사람이 '여게 세우면 좋겠다' 해 가지고 잠실동에 세웠는데, '여게가 인제 앞으로 발전됩니다.' 하며 교회를 세웠는데 서울에서 우리 전국에서 잠실동 거기가 폭등입니다. 집값 폭등이 거기가 폭등이라. 그래 놓으니까 거기 조그매 돈 주고 산 게 어떻게 많았는지? 그라면서 자꾸 빚을 내도 이래 사. 사 가지고 예배당 터를 굉장히 넓히 장만했습니다.
이래 장만했는데 '야, 너 간 크게 자꾸이라면 어짜노?' '괜찮습니다.' 지금은 그걸, 그래 가지고 조그매 팔았어. 귀때기 조그매 팔았는데 그뭐 조그매 팔아 '또 남은 걸 팔 것 있나?' 그것만 팔면 다 돼요. 예배당 다 지었어.
이래 보면 지혜가 있습니다. 그게 뭐이냐? 그 사람은 믿은 이후로 부터는 예수 믿는 데에 전공을 했어. 군에 가 가지고도 이 국기를 보고서 '받들어 총' 하는 '그것도 국기에 대한 경례라고 받들어 총도 안 했다 그거요. 안 하니까 자기가 박해를 많이 당했는데, 당하면서 그 사람이 와서 말하는데 '박해를 많이 당했지마는 뒤에 판단해 보면 뭘 잘못해 가지고 박해를 당했지 핑계는 주를 위했다 하지마는 실은 주를 위해도 서투르게 주를 위해 했지 꼭 주님만 위해서 주를 위해서 매 맞은 것은 한 번밖에는 못 맞았습니다.' 이래, 한 번 밖에는 못 맞았다. 그거 심령이 밝은 사람이라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가 주를 위한다고 뭐, 가정에서 '우리 가정 싸움이 났습니다.' 이래 가지고서 이혼을 하니 어짜니 하며 이래 왔는데 이래 보면 어뜩 판단하기를 '그거 주를 위한 십자가니까 그저 참고 견디시오' 이러기 쉽지마는 그게 아니라 말이오. 전부 자기를 죽이지 못해 가지고서 환난이 일어난 것이지 실은 주님의 십자가의 원수로 그 어려움을 환난을 당한 것이지 주님의 십자가의 군병이 돼 가지고 어려움 당한 것은 없더라 그말이요, 별로 없어 그것 모양으로, 우리가 어짜든지 가리고 가리고 해서, 구별이 없으면 안 돼.
가리고 가리고 해 가지고서, 우리 노력은 어데까지 하느냐? 신앙 양심의 위치에까지는 우리가 해야 된다. 그것이 간구다. 그것이 간구 거게는 두 마음이 없습니다. 거게까지 간구하면 그다음에 영감 진리가 우리를 가르쳐서 인도해 주시는데 영감 진리가 와 가지고 깨달아질 때에는, 그거 여러분들 많이 체험했을 건데요? 영감 진리가, 자기가 할까 말까 할까 말까 한 그런 일도, 또 두려워서 하지 못할 일도 영감 진리가 와 가지고서 깨달아질 그때에는 그것이 뭐 물씬물씬해 보이는 것이 안 될 게 없고 모든 것이 다 될 것 같고 쉽고 수월하고 평안하고 웃으면서 걸어갈 수 있습니다. 그렇게 걸어갈 때는 그 일이 형통하고 아무도 막는 일이 없다 그거요.
제가 지금은 이 부산 와 가지고서 신앙을 나는 버렸다고 생각해요. 부산 오니까 복잡해서, 일정 때에 신사참배 할 때도 그뭐 뭣도 모르고 일본 부장이 와 가지고서, 매일 한 번씩 올라옵니다. '신사참배 어짭니까?' 올라와도 그 예사로, 방안에 오라 소리 들어오라 소리도 안 했어. 그때 일정 때 그 사람들 밑에는 우리 사람은 뭐 죽은 사람들 아닙니까? 이래도 그만 방안에 들어오라 소리도 안 했어. 왔으면, 문 앞에 영창문 옆에 서서 이러면 왔느냐?'고. '신사참배 어짤 거냐?' '그거 나는 아직까지 이해가 안 된다.' 또 가고. 그래 가지고 끝까지 그런 그것도 그때도 뭐 그거 그렇거나, '이 신사참배 안 하는 거야 하나님 하는 건데 무슨 문제가 있느냐?' 쉽다 그말이오.
쉽고, 6·25때도 아주 두 달 동안은 쉽게 지내 왔어. 그 사람들 그렇게 지금 죽인다 어짠다 하는데 두 달 동안은 거게서 하루 세 번씩 종치고 집회를 하면서, 그러니까 거창 합천 함양에서 은혜받은 사람들은 '백 조사님한테 가야 피난한다' 이래 가지고 얼마나 주 모았든지 한 사백 명 그 시골에 모았어. 모아 가지고 자꾸 들씬거리면서 거기서 밤낮 집회 하는데, 이래 놓으니까 이 교인들이 있다가 '뭐 인민군은 무섭지 안하지마는' 폭탄이 무서운 줄 알았다 말이오. 그거 다 무서운 줄 알아. 폭탄 그거 뭐 그거야 피하면 되지 무섭겠습니까? 이래 가지고서 예배당 위에 처어치라 쓰라 하는 그걸 그거 쓰라고 허락을 했다가 그만 그 삐뚤어져. 하나님 믿는 것이 그만 삐뚤어졌다 말이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면 될 터인데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미국이 폭격 안 하도록 하려는 그게 마귀란 놈이 준 그만 실책을 해서, 여호수아가 기도하지 안하고 해 가지고서 눈에 가시가 되고 옆구리에 창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그만 그래 돼 버렸다 말이오. 그래 가지고 한 달 동안은 참 신앙은 지키기는 지켰지마는 죽으며 지켰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것도 참 좋았어.
이러니까 여러분들 뭘 이래 하다가 영감 진리가 왔을 때에는 '아, 된다.' 그때까지 안 되고 그렇츰 어렵던 일이 영감 진리가 와 가지고 우리에게 깨닫게 해 주실 때에는 '된다' 옆에서 말하는 사람이 '그것 왜 안 되느냐?' '그거 안 됩니다. 이러면 안 됩니다.' 안 된다는 소리가 그 답답하고 문제가 없이 '된다!' 하는 그만 그러니까 영감 진리가 올 때에는 안 되는 게 없어. 마음에 '이게 안 된다', 그게 왜 안돼? 왜 그게 안 돼? 안 될 게 하나도 없다 그말이오.
이렇게 벌써 마음부터 그분이 와 가지고 변화시켰기 때문에 모든 일에 확신이 생겨지고 확실한 벌써 승리를 보고 있고 담대하게 평안 하게 놀면서 수월하게 해 가는 것이 그것이 주님의 인도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그 모든 수고와 무거운 짐을 다 벗어버려 버려라. 내게로 오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해 주겠다' 하는, 자기가 짊어진 그 모든 짐을 벗어버리고 '내 짐은 가볍다. 내가 너한테 책임지운 내 멍에는 쉬우니까 내 멍에를 메고 나를 배워라.' 주님이 '너는 영감 진려 이대로만 하는 요것 하나만 짐을 져라. 다른 것 필요 다 없다. 요것을 계속해 가라 하는 것을 한 것이니까 이 계속해 가면 '생사는 어째?' '생사도 문제 없다.' '경제는?' '경제도 문제 없다. 모든 것 요거 하나만 하라' 하는 그것이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고 그것 다 벗어버리라. 내가 너를 편히 쉬게 하겠다.' 는 인간이 네가 무엇을 책임지고 인간 방법대로 하는 그 모든 것을 버려서, 신앙 양심 생활도 인간 요소의 인간 생활이라 말이그것도 버리고 거게서 영감 진리의 인도 단계에 올라가 가지고 거기서 살아라. 살면 평안하다. 그게 시온의 대로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아침에는 미리 준비해야 된다는 것 미리 평소 쉬운 데서 그 연습을 자꾸 해 가지고서 숙달돼야 되는 것이지 논리적으로는 아는 것 가지고는 소용 없어.
그 사람이 암만 스케이트 타는 데에 운동 교수라 할지라도 '스케이트를 탈 때 요럴 때는 요래 하시요' 강의는 잘했습니다. 이렇지만 현실 당할 때 언제 요럴 때는 요래조래 하려고 요럴라 하니까 쿵 자빠져서 박이 깨졌는데 무슨 소용 있습니까? 박이 깨졌는데 소용 없거든.
연습을 많이 하면 논리 순서는 그렇지마는 연습을 하니 그게 생각을 못하게 이래 돼 버리니까 그 순서는 다 그런 순서가 통과됐더라 그거요. 그러니까 우리는 연습을 해야되지 연습 안 하면 안 됩니다. 그 연습을 가리켜서 '미리 기름 준비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자꾸 다른 사람들 말해 줘요. 모르면, 저거가 모르면, 별수 있습니까? 모르면 왜정 말년에 이긴 사람 없습니다. 별로 없습니다.
선천 고을은, 선천 고을은 넷 집 남구고 난 다음에는 전부 예수 믿는 사람이라서 시장이 주일날은 안 돼요. 아예 주일날은 시장이 없어요. 없는데 그렇게 많이 믿는 선천 고을에서 왜정 말년 신사참배가 왔을 때에 이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선천 고을에서 나온 목사 두 분에게 내가 물었어요. 물으니까 '선천 고을에서는 이긴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 소문이 났기 때문에 그거 내가 참말로 그런가 물으니까 선천고을에 신사참배 안 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서 그 알맹이가 하나도 없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앞으로도, 그거 그런 시련이 오나 안 오나 가서 보면 다 쭉정이라 그말이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었지 건설구원이 안 된다 그거요. 모르면 제가 어찌 됩니까? 이걸 논리로 말해도 이해가 안 되는데.
논리로 말해도 이해가 안 되다가 차차 차차 자꾸 여러번 들으면 논리 이해가 되고, 논리 이해가 되고 난 다음에는 자기 속에 들어가 있으면 그말 할 때 딱딱 들어맞습니다. '아멘. 아멘. 아멘.' 그거는 벌써 자기 속에 진리나 설교하는 사람의 진리나 둘이 서로 맞아떨어졌다 그거요.
처음에는 들어갈 때는 '헤이구, 듣기도 싫다. 반대.반대. 반대.'반대라 하면서도 아 말씀이 총이니까, 칼이니까, 찔렀으니까 속에 들어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차차 차차 성화가 돼서 나가는 것이라 그거요.
이러니까 연습해요. 평소에 연습 안 하면 헛일입니다.
벌써 인민군들 내려오기 전에 수천 번 연습합니다. 기도로써 수천 번, '인민군 만나면 무슨 소리 할 거다. 그때는 내가 어떻게 성경으로 대답해야 되겠다.
그때는 뭐 어떻게 해야 되겠다. 어떻게 해야 되겠다' 그 수천 번 수만 번 자꾸 연습을 했는데 연습 많이 한 사람은 인민군 와서 하는 것이 연습한 것보다 오히려 양이 적고 도수가 낮으니? 웃으며 지나간다 그거요. 연습 안 하고 갑자기 닥치면 그 일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