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7 14:17
연보-십일조와 헌물
1984. 10. 28. 주일오후
본문 : 고린도후서 9장 6절-10절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 기록한바 저가 흩어 가난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육체의 이스라엘 때에는 다 십일조를 하나님의 제사장들에게 드려서 하나님 성전 창고에 간직을 했습니다. 우리도 십일조를 드려야 되는데 우리는 어디다 드려야 될까? 그때는 물질로 만든 그것을 하나님의 집이라고 성전이라고 하셨지마는 신령한 신약 시대 와서는 이 예배당 이것도 성전이 아니고 우리 믿는 사람들이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십일조를 어데 갖다가 드릴 것인가? 또, 과거에 육체의 이스라엘 때에 여러 가지 제사가 있었는데 그 모든 제사는 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 또 하나님께서 그것을 다 받아 잡수셨다. 하나님이 그것을 다 받으셨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면, 말라기 3장에 있는 말씀 '곧 너희들이 온전한 십일조를 내 집에 들여서 내 곡간에 먹을 양식이 있게 하라' 이렇게 말씀하신 그 양식이 무엇이며 그 창고가 무엇인가, 누구의 양식이며 누구의 창고인가 그것을 좀 각각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구약 때에는 그것을 레위 사람들이 다 양식을 했는데 레위 사람들의 기업으로 했는데, 레위 사람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운 족속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중보되는 족속을 레위 족속으로 정하셨습니다.
말라기의 십일조와 헌물에 대해서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것을 들여서 내 창고에 먹을 양식이 있게 하라 이랬으니까 아마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에 그 성전 보존이나 유지나 하기에 경제난이 돼 경제적으로 어려워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닌가?' 또 오늘도 우리에게 이 말씀을 신약 교회에도 줬습니다. 같이 줬습니다. 구약으로 끝나지 안하고 그 말씀을 신약 교회 우리들에게 다 주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들도 이렇게 말라기 3장에 잊는 이 연보에 대한 십일조나 연보에 대한 이 설교는 다 교회 운영하기가 어려우니까 운영 방침을 그렇게 하나님깨서 정해서 주시고 또 그렇게 다 입법을 세웠는가 보다 그렇게 해서 여기에 대해서 뭐 별별 각자의 의견대로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깊이 생각하고 따져보면 모든 성경에서 사람들이 아무리 하나님을 상대해서 신앙 생활 한다고 해도 그 신앙 생활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된다고해서 하나님이 그 신앙 생활을 인정하지를 안 했습니다. 하나님 말씀에는 조금도 어김 없이 말씀대로 됐다 할지라도 거기에 영감의 동의가 없을 때에는 그 생활이 다 외식이요 다 불탄다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오늘도 이렇게 구별하시고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교회 운영이 어려우니까 어쩌든지 이 성구를 인용해 가지고 설교를해서 연보가 많이 나도록 그렇게해서 교회 운영을 하라. 만일 그랗게 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다른 성경들과 다 모순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그 본질도 깨끗하고 또 동기도 깨끗하고 목적도 깨끗하고 방편도 다 깨끗해야 하나님 앞에 제물이 되어지지 그 사람이 동기가 좋다 해도 목적이 틀렸으면 동기와 목적이 좋다 할지라도 방편이 틀렸으면, 또 동기와 목적과 방편이 됐다 할지라도 그 결과가 미달되면 다 그런 것을 다 정죄했습니다.
그렇게 이 모든 면을 봐서 '온전한 십일조와 헌물을 드려서 하나님의 곡간에 양식이 있게 해라. 그러면 내가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주겠다 너희들이 한번 못 믿거든 한번 시험해봐라.' 이렇게 말씀하신 이 모든 말씀을 종합할 때에 그저 사람이 단순히 생각하는 대로 아무나따나 연보나 하면은. 그 연보를 가지고 얼마든지 유지할 수 있으니까 그 연보나 돈이나 내라 하는 그런 것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도무지 타당치를 않습니다. 다른 모든데 봐서.
또, 하나님이 참 그렇게 한다면 하나님은 거지 하나님으로서 구걸하시는 하나님이 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온전한 행위가 아닐 때에 그 행위를 하나님은 취급하지 안하시고 물리쳤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뭘 한다 할지라도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서 우리의 남은 성심 성의가 없이 다 기울였을때에 그것을 하나님이 받으시지 그런 외식의 것을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신다고 마태복음 23장을 보면 거기에 많은 것들을 예를 들어서 드러내 놓은 일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여기에서 지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양식이 있게 하라 하는 이 양식은 저 지난 주일에도 말한 거와같이 양식은 다만 이 물질을 가리켜서 물질이 있게 하라 하는 그런 말씀은 아닌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연보할 때에 많은 부자들이 낸 연보보다도 그 과부의 푼돈 연보가 더 많다고 이렇게 말씀하신 거기에서 하나님이 우리들의 그 헌물에 대해서 무엇을 요구하고 계시는가 하는 그런 것을 우리는 의심없이 확정을 지울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있는 양식은 곧 하나님이 흠향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양식을 말씀하신 것이고, 여기에 곡간을 말하는 것은 비유로 '곡간에 들여' '알곡은 곡간에 들여' 말씀하신 거와 같이 그는 일차 창조에 속한 것이 아닌 이차 창조에 속한 이런 모든 저주와 화와 모든 멸망을 다 벗어난 온전에 나간 그 위치에 있는 것들을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나님의 집이요 또 하나님의 곡간이요 하나님이 잡수실 양식을 재어 놓은 창고입니다. 그러면, 그 창고는 뭐일까? 그 창고는 곧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이 창고 요 우리 안에 하나님이 잡수실수 있는 양식이 우리 안에 저축되어야 합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에게 얼마든지 뭐 복을 빌어 주시고 하나님의 충만은 그의 것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양식, 하나님을 대접하는 거, 요한복음 4장에도 보면은 '너희들이 알지 못하는 양식이 네게 있다. 이것이 나 먹을 양식이다.' 그러면 그 양식이 뭐인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온전히 행하는 것이 양식이라 그렇게 주님이 해석을 해 주시지 안했다면은 그때 그 양식은 제자들이 생각하는 대로 '아마 사마리아 여인이 그 주님에게 무슨 식물을 대접 했는가 보다' 이렇게 생각할 것이지마는, 예수님의 그때 그것은 해석을 해 주셨습니다. '내가 말하는 양식은 너희들이 아는 대로의 그 양식이 아니고 너희들이 모르는 양식인데 곧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과 온전히 이루는 그것이 나의 양식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고. 라오디게아 교회도 보면은 문을 열라 그러면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거기에도 양식을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그 십일조. 온전한 십일조라든지 온전한 헌물 이라든지 그것을 말씀하신 것은 다만물질만이가 아니고 물질 안에 하나님이 잡수 실수 있는 우리의 그 인격으로 되어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이라 그렇게 우리는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물론 구약 때도 그렇게 물질을 드려서 물질도 보이는 그 성전에 유지하는 데에 유지비로 유용하게 썼습니다. 또 신약 교회도 성도들이 연보하는 그 연보를 가지고 교회에 운영하는 데에 유지비로 씁니다. 그러나 그것만이는 아니고, 사람은 그 몸과 마음이 분명히 둘입니다. 몸은 따로 있고 마음은 따로 있고 몸과 마음은 분명히 둘이지마는 그 몸과 마음은 나눌 수 없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있다가 다만 그게 나눠질 때에는 그 죽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나눠질 때는 그때는 죽을 때에 마음과 몸이 나눠지지 그전에는 나눠지지를 못합니다. 그러기에 이런 것을 그 외부의 물질적인 것과 신령한 것을 우리가 이렇게 중복적으로 생각지 않으면 안 됩니다.
물론 연보해서 교회 운영하는 데에 교회서 일하는 일군들도 그 물질을 먹고 마시는 이것도 있지마는 그것으로서 다라. 그 속에는 없고 그것만이가 다라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이것은 어데 까지나 외부의 것이고 그 안에는 하나님이 대접 받을 수 있는 하나님이 잡수실수 있는 것이 그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 교회의 성도들이 섬기는 것도 껍데기는 제사장이 먹고 껍데기는 또 그것이 뭐 불사뤄지는 것도 있고 또 그렇게 제물을 제사장들이 그렇게 먹고 하는 일도 있었지마는 그것이 제사장들이 사용하는 동시에 그것이 또 하나님 앞에 기뻐 흠향할 수 있는 향기로운 제사라, 하나님이 잡수실수 있는 그런 하나님의 그 식물이라 그렇게까지도 말씀을 한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연보를 많이해서 그 교회에 돈이 많은 부자 교회가 됐으면 그것으로 다인가? 그것은 어데 까지든지 외부인 사람과의 관계지 그 속에 하나님과의 관계는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외부 속에 참 하나님이 잡수실수 있는 하나님의 식물이 되는 하나님이 잡수실수 있는 하나님의 떡이라.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 옳은 성도들을 가리켜서 하나님의 떡이라 그렇게 말씀도 했습니다.
그런고로 여기에서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을 잡수시게 하고 하나님을 대접하고 하나님을 잡수시도록 하나님의 잡수실 그 대접할 그 식물을 예비하라는 것이 그것이 구약 성경에는 구약 교회에는 그게 전부고 신약 교회에 와 가지고도 우리에게 전하시기를 그 구약 교회에 있는 그 성경을 우리 신약 교회에서 전해 주시면서 양식이 있게 하라 했으니까 하나님을 대접할 수 있는 그 양식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대접 해야만 또 하나님은 무슨 양식을 당신이 자시고 기뻐하시고 우리에게 복을 주실 건가? 이삭이 말하기를 '네가 맛있는 그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오라. 그러면 내 그 음식을 먹고 내가 너에게 축복하겠다.' 하는 그것이 결코 이삭이 뭐 고기가 먹고 싶어서 그런 것 아니고 그것이 다 우리에게 계시된 것입니다. 계시된 거. 맛있는 것을 마련해 가지고 오라 했는데 우리는 볼 때에 이삭이 그와 같이 맛있는 음식을 해 가지고 와서 나를 대접하면 내가 모든 축복을 빌어 주겠다 이랬는데, 과연 그 야곱이 맛있는 음식을 가져다가 아버지를 대접을 하고 축복을 받았는데 그 축복이 그대로 이루어졌고 그 축복 후에 에서가 와 가지고서 축복을 해달라고 했지마는 너에게 빌어줄 복이 없다. 있다는 것은 그저 이 세상에서 세상에서 잘되는 복을 빌어 줄 수 있다. 이래서 세상에서 모두 다 싸우면 승리하고 모든 것을 많이 취해서 부자가 되고 그런 썩을 축복을 에서에게 빌어줬습니다.
그러면 이와 같이 오늘 우리도 하나님을 대접하는 이 대접하는 것이 어떤 건가 하는 것을 이 연보에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연보하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라. 마치 겨자씨 비유에 말씀하시기를 '밭을 갈든지 양을 먹이든지 하다가 돌아오면 주인이 앉아 먹으라 하더냐? 먹을 것을 예비하고 다 먹을 동안에 수종들고 난 뒤에 먹으라고 하지 않겠느냐?' 말씀하신 그 먹을 것을 마련하고 대접해라 하는 그것이 뭐일까? 그것이 그라면 어떤 그 물질일까? 그런 것은 다 물질이 아니고 신앙의 그 인격이라는 것인 것은 틀림없이 우리가 그렇게 해석해야 되지 물질로만 해석해 가지고는 안 됩니다.
그래서, 오후에는 하나님이 잡수실 수 있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을 대접하는 하나님이 내 집에다가 양식을 두어서 먹을 것이 있게 하라.
이 양식은 누구의 양식일까? 네, 그 양식은 하나님의 대리자 레위 족속들의 양식이면서 곧 또 그 양식 속에는 하나님의 양식이 되겠습니다. 오늘도 모든 우리 신앙 생활이 외부에는 사람을 대접하는 그 대접의 꺼풀을 가지고 속에는 하나님을 대접하는 그 알맹이를 가져야만 되는 것이지 아무리 하나님을 대접하는 알맹이를 가졌다 할지라도 꺼풀 인간과의 관계가 없으면 그것이 다 헛됩니다.
헛일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껍데기 사람에게까지 나와서 이루어져야만 그게 완성이 되고, 또 인간과의 관계되는 이런 관계들이 하나님에게까지 도달해 가야 올라가야 비로소 양식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작한 것이 사람에게까지 뻗쳐 내려와서 그 사람과의 관계에 꺼풀이 있어야 되어지고, 또 사람과의 꺼풀에 관계 이것이 시작된 것이 차차차 올라가서 하나님과의 직접 관련되는 이 알맹이가 있어야 되지 이 알맹이가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여기에서 하나님을 대접하는 양식. 또 하나님을 대접할 것을 재어놓은 창고 그 창고는 뭐이겠는가? 과연 이 양식은 구약 시대는 레위 사람들의 먹을 양식을 하나님께서 염려해서 말씀하신 것인가? 또 신약 교회에서 그 성경을 우리에게도 줬기 때문에 신약 교회에서 또 양식을 염려하는 것은 신약 교회 교역자들 그 교회 유지비나 그런 것이 없는 그런 것을 염려해서 말씀하신 것인가? 그것도 있지마는 그것은 껍데기요 알맹이는 하나님에게 대한 것인 것을 압니다.
그러면 하나님에게 대접할 것이 있으면 인간에게는 절로 있는 것이고, 인간에게 대접할 것이 있어도 하나님에게 대접할 것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여계 양식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양식이 있게 하라' 얼핏 보면은 '아마 이거 유지를 못 하니까 모금 운동으로 이와 같은 방편을 취했는갑다. 이거 모금 운동이다. 돈을 모으는 모금 운동으로 이와 같이 이 방편을 정했는가 보다.' 과연 그 곡간에 쌓이는 것이 십일조나 헌물을 드려서 그것을 다 그때에 레위 사람들이 먹고 먹는 그런 양식이 아닌게 아니라 양식이 됐었습니다. 그들의 양식이 됐었습니다.
그러나 양식이 되는 동시에 구약에 보면은 그 드리는 모든것이 다 그 하나님에게 드려서 그것이 다 향기로운 제사가 되었다. 하나님이 기뻐 받으셨다.
그라고 난 나머지기 있는 그 찌끼, 나머지기 있는 그 찌끼는 레위 사람들이 그것을 먹었습니다. 또 요제를 드릴 때도 하나님에게 있어 요제를 드렸는데 이 요제는 하나님이 기뻐 흠향하신다, 기뻐 받으신다, 기뻐 잡수신다 그러나 하나님이 잡수신다 하는데 그 물질은 하나도 감소 되지 안하고 그 물질은 고대로 순종이 남아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뭘 잡수셨는가? 우리나라에는 참 일찍부터 모든 이종교, 미신, 또 중국에서 그 모든 문화들이 내려와 가지고서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방언으로서는 아주 민활한 그런 방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말이 있습니다. 다른 나라에는 그게 없어요. 우리나라 말로는 발표를 잘 할 수 있는 그런 단어가 저 다른 나라 말로서는 발표를 할라 해야 발표를 할 수가 없어서 그 나라에는 그 근방에 비슷하게 가는 말 했지마는 우리나라에는 아주 정확하게 발표할 수 있는 그런 단어들이 생겨졌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 미신을 섬길 때에, 내가 어릴 때에 손비비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점쟁이가 손을 빌면서 '그 밥을 먹고 떡을 가져 오너라.' 말하기를 '맛으로 짐으로 운감 하십시오.' 그렇게 비는 소리를 맛으로 짐으로 운감하십시오' 먹지는 안하는데 '맛으로 진감으로 운감하십시오.' 그라고 또 말하기를 '제사밥은 양분이 없다' 그래요. '제사밥은 양분이 없다.' 왜? 맛으로 맛과 그 모든 색깔은 다 귀신이 먹었기 때문에 진짜는 귀신이 먹고 껍데기만 찌꺼기만 남았기 때문에 영양이 없다 그렇게 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런 거는 다 이 하나님 섬기는 데에 아주 표현하기에 좋은 말들입니다.
구약에 이스라엘 백성들도 보면 그 드리는 모든 헌물이나 제사가 하나님이 받으셔서 당신이 양식 삼아서 당신이 기뻐 받으셨다. 기뻐 흠향하셨다. 잡수셨다 이렇게 말씀했는데. 그 하나님이 잡수시고 하나님이 받아서 흠향하시고 나서 나머지기 있는, 그 참 우리말로 말하면 그 정기 그 아주 신이 운감하는 그 아주 속에 있는 정기는 다 뽑혀 나가고, 나머지기 남은 거 있는 것은 그 점쟁이들이 먹고, 또 사람들이 먹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렇게 모든 구약을 보면은 그런 일이 우리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은 잡수시고 또 사람 먹고 하나님이 운감하시고 기뻐 받으시고 또 사람은 그 나머지기를 제사장들이 먹고, 이렇게 하나를 가지고서 거기에서 하나님 자시는 것이 있고 사람 먹는 것이 있고 하나님이 운감하시는 것이 있고 사람이 먹는 것이 있고 이렇게 있다 하는 것을 양질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과연 그것이 옳은 표현입니다. 하나님은 그때에도 물질을 당신이 거석 하는게 아니라 물질은 없는 가운데 엿새 동안에 모든 걸 만드셨기 때문에 그 물질에 대해서는 그렇게 하나님께서 그렇게 고귀하게 취급하지를 안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 물질 만드신. 그것 가지고는 당신이 식물이 되지 안했고 당신이 받으시는 그 흠향할 것이 되지를 안 했습니다. 다만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백성들의 그 마음과 정신과 생각과 성심과 성의, 그것이 작용되는 그 작용, 그 물질이 아니면 안 된 물질을 통해서 작용되는 작용 자기가 참 아까와서 이것은 도무지 아무도 줄 수 없는 그 없는 것인데 그것을 하나님께 바쳤다면 그 물질은 또 다른, 하나님께 얼마든지 있습니다. 있지마는 다만 자기가 어떤 사람은 참 만 원짜리도 만 원 짜리 자기 반지라도 생명만치 아끼는 그런 사람이 있고, 뭐 억만 원짜리 바지라도 돈 많은 사람이야 그까짓 거 얘사로 여길 수 있는데. 그러면 어쨌든지 자기가 귀중히 여기고 아껴 여기고 좋아 여기고 보배로 여기고 그걸 참 사랑하고 좋아해서 이거는 아무도 줄 수 없는 그런 것인데 이것을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을 위해서 그것을 바쳤을 때에 하나님이 물질 가지는 거 아니라고 자기가 그렇게 애착하는 그것을 주를 위해서 바친다는 고 마음, 바친다는 고 성의, 바친다는 고 정신 그 자기의 보배를 하나님깨 바치는 고 인격과 고 정성과 성의 고것이 하나님 앞에 양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이 당신에게 양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그런 기도를 합니다. 어떤 집에 가서 기도할 때에 '주님이여 주님이 이 집을 찾아 오실 때에 이 집에서 주님을 빈 입으로 돌려 보내지 말고 주님에게 참 귀한 그 대접을 해서 그 대접을 하는 그런 가정이 되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우리가 기도를 하고 또 가정을 제가 목회자로서 살펴 봅니다. 가만히 살펴 보면은 그 가정에는 주님이 가셔야 골탕만 쥐어먹지 쫄쫄 곯고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고 간다. 그 가정에는 쫄쫄 아주 곯고 가지 그 가정은 세상에 있는 무슨 이 뭐 고관 대작이나 재벌가나 아주 세상적으로 부강하는 그런 사람들은 대접할 줄 알지마는 주님은 전혀 대접하지 못하는 집이다, 이렇게 우리가 판정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 뭐 그러면 뭐 대접이 뭐이냐? 검은 걸 하느냐, 흰 걸로 하느냐? 또 어떤 붉은 걸로 하느냐? 뭐로 만든 거 기름이냐 떡이냐? 이렇게 하면 말할 수 없는 무형의 존재로 무형의 존재로서 그 심신이라는 심신이라는 육의 작용으로서 만들어진 떡이 있다 말이오. 육의 작용으로서 만들어진 떡, 이러기 때문에 우리를 하나님이 잡수시는 하나님의 떡이라 이랬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잡수실수 있는 떡이라. 우리를 하나님이 잡수실 수 있는 떡이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렇게 그런 집이 있고, 어떤 집은 아, 그 집은 참 가난하지마는 우리 교회에서 주님이 가실 때마다 시장을 면하시기는 그 집에 가면 시장을 제일 면하실 것이다. 주님이 그 집에 가시면 제일 따뜻한 대접을 받으신다. 우리 교회 가운데에 아무 것이 그 집이 주님을 제일 알뜰히 대접하고 주님이 목 마르면 거기 가서 음료수 대접을 받고, 또 주님이 시장하시면 거기 가 가지고서 음식 대접을 받고. 주님이 또 피곤하시면 거기에 가셔 가지고서 또 좀 쉼을 받고 그 참 아무 그 집이 주님을 대접을 잘한다. 그 어떤 집에는 주님에 대해서 가야 주님이 골탕만 쥐어먹지 대접하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렇게 여러분들이 상상할 수 있다 말이오.
그러면, 이 말을 여러 말로 하면은 양심을 써서 생각하면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 무엇이며 주님을 대접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짐작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내 집에 들여서 곡간에 먹을 양식이 있게 하라'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은 십일조는 무슨 법규의 세금같이 드렸습니다.
세금같이 드렸고 또 헌물들도 드렸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 성전 창고에 헌물이 없어서 하나님이 이스라앨 백성들에게 이 축복을 못 하신 것 아니고 또 하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신 것 아닌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때 뭐 이 제사장, 레위 제사장들 먹을 거 그런 거는 너무 많았습니다. 너무 많고 했지마는 참 하나님이 잡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양식은 없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시장해 돌아가시고 시장하셔서 시장해 돌아가시고 이라다가 마지막에 말라기 선지자로 끝을 맺어 버리고 말라기 선지자 그 이후에 하나님께서 뭐 한 삼사백 년 동안 선지자가 없었습니다. 없다가 비로소 예수님이 오실 그때에 세례 요한이라는 선지자가 그때 하나 와 가지고 이스라엘에게 말할 때 배암과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그렇게 말 하고, 아주 그들은 하나님과의 거리가 영 아주 멀어져서 대대로 고대하던 메시야가 왔지마는 메시야를 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지 메시야를 저들이 메시야로 영접하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도 우리가 여기에서 이 말씀을 볼 때에 양식이 있게 하라 하는 이 말씀을 외식자들이 들을 때에는 이거는 교회 운영하기 위해서 그 연보하는 그런 모금 운동이라 그렇게 하겠습니다. 우리 한국 나라로 말해도 교회의 연보는 너무 많습니다. 연보 가지고 죄 짓는 일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얼마나 많이 하는지. 꾀가 있어 가지고서 이 종류를 붙여 가지고 연보, 저 종류를 붙여 가지고 연보해 가지고 전부 연보한 그거는 뭐이냐 하면은 자기 올라갈 사다리를 만들고 있어. 자기 올라갈 사다리를 만들고 있어. 그것도 뭐하면 그 아름다워서 아주 자세히 보면 자세히 보면 저 위해서 저 올라갈 사다리 만들어 가지고 그 사다리 올라가서 떡 앉으면 모든 사람 위에 올라갑니다. 이래서 전체가 사다리 만드는 운동이오. 그래서, 언제 그와 같은 종류로서 이거 뭐 아무런 공로 없으니까 명예 박사도 명예 박사 학위도 얻을 수 없고, 또 아무런 배운 것이 없으니까 논문 박사 학위도 얻을 수 없는데 이거 돈을 가지고서 다 사 가지고서 박사 학위를 얻어 가지고 그때 우리나라에 제법 큰 교회서 돈 있는 목사들은 전부이 돈 주고 이 박사 학위를 다 샀습니다. 샀는데 그것이 나중에 조사해 보니까 학교도 없는, 학교도 그 학교에서 뭐 돈을 주고 샀든지 학교나 있으면 그거는 그래도 뭐 괜찮은 건데 학교도 없는 가짜로 학교 없는 것을 유령 학교를 학교 있다고 이래 가지고서 그때에 그 돈을 주고 학위를 모두 샀다가 그것이 폭로되니까 그 폭로되고 난 다음에 가만히 있으면 더 음침한 엉큼한 그 추태가 될 터이니까 그때 뭐 신문에 냈습니다. '내가 이렇고 이렇고 이래 했디마는 이거 내가 속혀서 내가 지금 이렇습니다. 모든 교계에 사과를 합니다.' 그라면서 그때 그렇게 했습니다.
오늘도 이 말라기에 있는 이 성경 연보에 대한 성경이나 오늘 오후에 본 연보에 대한 성경이나 꼭 한가지입니다. 꼭 연관성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는 하나님의 교회에 그 유지 비용이 없어 이 비용 모금 하려고서 그렇게 하나님이 이 성경을 이 성구를 놓은 거는 아닙니다. 만일 이 성구를 사람들이 연구해 가지고서 교회 유지비가 많게 하기 위해서 이 성구는 하나님이 주셨고 있는 것이다, 만일 이렇게 생각한다고 하면 그거는 참 천부당 만부당의 말입니다. 왜? 사람들은 신구약 성경을 보고 믿는 것은 제 마음대로 제 욕심대로 믿지마는 그 믿는 것이 하나님의 성경을 파고 들어가 보면은 전부이 배치되고 하나님에게 적이 되기 때문에 '내가 올 때 믿는 자를 보겠느냐? 또 성전 밖 마당은 측량하지 말아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저는 여기에 기록된 양식은 이 교역자들이 먹을 양식을 말한게 아니고 하나님이 잡수실수 있는 양식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거기에 십일조에 대해서 모든 뜻을 해석을 하면은 그것은 하나님만이 그걸 잡수실수 있지 하나님만이 잡수실수 있고 그 나머지기 꺼끄러기 껍데기 그림자와 같이 되어 있는 그것은 하나님의 종들이 먹지마는 그 알맹이는 하나님의 종들이 먹을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종들이 그렇게. 오전에 내치 설교를 했지마는 십일조에 대한 그 세 가지 이 성의, 이 세 가지 사상 세 가지 성의, 이 성의를 어떻게 교역자가 어떻게 먹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교역자가 이것을 받을 수 있어요? 어림도 없어요. 받지 못합니다. 이는 자존자시요 조물주시요 구속자이신 하나님만이 대우를 받을 수 있는 대우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 있는 그 곡간은 그것이 곧 우리의 인격입니다. 우리의 인격 안에 하나님 잡수실수 있는 이 양식이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 인격 안에 하나님이 잡수실 수 있는 양식이 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축복을 해 주십니다. 또 얼마든지 축복해도 그 사람은 실수가 없이 잘 감당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심령 속에 그 사람 마음 속에 몸 속에 영 속에 그 사람의 인격 속에 그 사람의 영육은 하나입니다. 영이 실쭉하면 마음이 실쭉합니다. 마음이 실쭉하면 이 몸이 실쭉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몸을 고기 덩어리를 봐서 고기 덩어리를 봐서 그 마음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이 안 보이는 거 아니라 마음을 볼 수 없는데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 모형인 고기덩어리를 봐서 그 사람의 마음이 지금 뭣인가? 횡재수를 닥쳤다. 뭐 기쁘다, 뭐인가 지금 그 남한테 숨기는 은밀한 무슨 그런 비밀을 하고 있다, 그 사람이 뭣인가 양심의 가책을 받고 있다, 그 사람이 뭐이 두려운게 있다, 그 사람이 뭐이 좀 배짱이 있다, 환하게 그 얼굴에 피부에 다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잡수시는 이 양식이 그것이 하나님의 종들이 먹는 그 먹음이 되나 그것은 외부요 그거는 외부요 그거는 물질이요, 하나님이 잡수실수 있는 그거는 물질이 아니고 그 속에 신령한 것이니 곧 인격이라 우리 사람의 모든 그 성심 성의의 믿음이라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잡수실 수 있는 하나님이 쓸 수 있는 이 양식이 우리 안에 저축돼 있어야 하겠습니다. 우리 안에는 이게 없으면 하나님이 오셔서. 하나님시 물론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 안에 계시나 우리가 또 역사적으로 말할 때에는 우리가 하나님을 배척해 버릴 수도 있고, 하나님을 환영할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을 초대할 수도 있고. 또 하나님을 아주 그렇게 섭섭하게 해서 돌려 보낼 수도 있고, 이것은 모두 다 이 건설 구원에 있는 우리들의 그 활동 작용에 대해서 작용 위치의 것을 대해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들이 하나님은 내게 오셨다가 오늘 참 섭섭한 꼴을 보고 돌아가셨다 이것을 우리가 구별해야 되겠고, 또 이때 하나님이 오셨으면 좀 하나님을 좀 대접할 것이 있겠는데, 우리가 집에다가 좋은 무슨 음식을 마련함에 있으면은 그때는 자기가 참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 생각이 납니다. 그 어른이라든지 그 사람이라든지 그분이 왔으면 지금 이것을 좀 대접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이 나고, 또 어떤때 그 사람이 왔는데 아무것도 대접을 못 하고 보면은 '아, 그 왔다가 빈 입으로 보내면서 참 안 됐네 또, 참 섭섭했네, 또 그분이 올 때사 말고 하필 그렇게 좋지 못한 일이 있어서 왔다가 크게 참 욕을 보고 아주 섭섭해서 돌아갔네.' 이렇게 그게 인격입니다. 그게 인격이오.
그게 인격인 거와 마찬가지로 주님은 인격을 만드신 원형적 인격입니다. 각양의 인격을 만드신 그분이시요, 그러기 때문에 그분은 그 다양의 무한한 그 각도의 무한한 그런 성별의 그런 인격을 구비해 가지고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을 사람을 대접하는 거같이 생각하면 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하는 것을 사람에 대해서 하는 거 같이 생각하면 딱 들어 맞는 거는 아니지마는 대충 맞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오시면 하나님이 우리 가정에 오시면 지금 참 기뻐 '야, 내가 피곤하지마는 너거 집에 오니까 그만 피곤이 다 풀려서 참 기쁘다.' 또 주님이 우리 가정에 오셔 가지고서 고만 큰 근심 걱정을 한 짐 짊어지시고 크게 고민과 고통 하라고 지금 주님이 떠나셨다. 지금 오시면 주님을 대접할 것이 있겠는데, 오늘은 주님 오셨는데 아무것도 대접할 것이 없다.
이렇게, 그 활동적으로서는 주님이 우리 안에 문을 열라 하면 문을 열어 주지 안 했고 문을 열어 줬고, 들어왔고 나갔고 이렇게 활동하는 이 주님과의 실상의 교제가 우리에게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라는 그 목사님은 그 내가 전기를 잠깐 봤는데 그분을 모두 이단이라고 말하는데 그분이 이단이 아닙니다. 이단이라고 말하는 거는 그때의 교계들이 미비해서 그분이 깨달은 것은 지금 사람들이 알 수 있는 것인데 그때 미개할 때애 뭘 깨닫습니까? 옛날 사도들이면 다 아는 줄 아요? 아니요, 사도들도 다 아는 거 아니오.
속사도 교부라 하면 다 알았습니까? 우리 보담은 깜깜한 무식입니다. 녜? 과거에 이사야 선지 같은 그런 위대한 선지가 위대한 선지가 오늘 이 신약 교회 주일 학교 학생만치 모릅니다. 주일 학교 학생들이 오히려 예수님에게 대해서 아는 지식은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이사야 그런 이는 동정녀 마리아에게 난다 또 뭘 대속을 한다 이랬지마는, 지금 주일 학교 학생이야 예수님은 동정녀 마리아에게 베들레헴에서 나셨고, 또 그 목수 요셉의 정혼한 아내에게 났고. 또 거기서 십자가에 못 박혀 삼 일만에 부활하고 지금 부활 승천했고 환하이 다 알고 있지 않습니까? 구약 시대에 어데 요렇게 예수님에게 대해서 에언한 선지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천국에서는이 세례 요한을 말 하기를 천국에서는 제일 작은 자라도 이 세례 요한보다 더 크다 그 말은 예수님의 대한 지식은 더 장성한 지식을 가진다 하는 그 말입니다.
그러기에 이 세대가 가면서 자꾸 우리는 발전되고 성장돼 나가야 되겠는데 우리가 여기에서 하나님을 대접할 수 있는 양식이 내게 있나? 자, 하나님이 오늘이라도 오시면 내가 뭣 대접할게 있나? 또 하나님이 오늘 오시면 섭섭할게 있느냐? 그 하나님이 오실 것도 우리가 생각하면 알고 오셨다가 가시는 것도 생각하면 알고, 또 하나님을 우리가 초대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기뻐 또 찾아 오시는 것도 알 수 있고. 우리가 이 심령이라 하는 것이 물론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 안에 계심으로 우리 영 안에 계십니다. 계시지마는 이 활동과 작용적으로서는 하나님과 동행할 수도 있고 이별할 수도 있고 대접할 수도 있고 초청할 수도 있고 또 섭섭하게 할 수도 있고 하나님이 참 그 마음에 섭섭해서 참 한숨을 쉬고 돌아 가셨다. 지금 내게 오신 주님이 우리 집에 와 가지고 한숨 쉬고 돌아가셨다. 내게 오셔 가지고서 한숨을 쉬고 돌아가셨다. 오늘은 주님이 내게 오셔 가지고서 만족을 하시고 기뻐하셔서 기뻐하셔서 주님이 떠나기를 싫어하시고 좀 좀 자꾸 멈춤거리고 자꾸 떠나지 안하시고 멈춤거리시고 그 오랫 동안 나와 같이 있기를 원하시는 때도 우리가 볼 수 있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살아 계시는 하나님으로서 꼭 죄만 없으시지 우리와 꼭 같은 사람의 인성을 가졌습니다. 그 인성과 신성을 가지신 하나님이신데 주님은 우리와 교제하는 것을 꼭 사람과 교제하는 이 교제로서 이 교제를 당신이 원하십니다.
이래서, 우리 사람들이 그 사람이 뭐 뭣을 주는 거 뭣 보다도 그 사람하고 자기하고 통하는 것을 제일로 좋아합니다. 천하에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아무라도 저와 통하는 사람을 제일 좋아합니다. 저와 통하는 사람을 제일 좋아합니다. 저와 모든 의견이나 소망이나 비판이나 평가나 모든 것이 서로 이질적으로 배치되지 안 하고 자기와 꼭 하나인 그런 사람을 원합니다. 또 우리가 더 원하는 것은 내게만 속해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내게만 속해 있는 사람을 원합니다. 또 나만 따라서 움직이는 사람을 원합니다. 또 나만 믿는 사람을 원합니다. 내가 독약을 컵에 풀어 가지고서 줘도 날 믿고 안심하고 이거 먹어라 하니까 '아, 예 감사합니다.' 하고 받아 먹을 수 있는 그 사람을 원한다 그말이오. 우리 사람이나 주님이나 꼭 같으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여기에 '먹을 양식이 있게 하라 그러면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네게 황충을 제해서 네 하는 모든 일에 파멸을 하지 못하게 할 것이고 또 네 토지에 포도나무에 그 열매가 기한 전에 떨어지지 않게 하리니 이렇게 하므로 모든 사람들이 너와 네 처소를 보고서 다 복되다해서 너를 존귀히 여길 것이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은 이 십일조와 헌물에 이 물질로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물질에서 배운 이것으로 하나님을 우리가 대접해야 합니다. 제가 그것을 좀 생각해봤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우리가 대접하고 하나님이 대접을 받으시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와서 참 양식을 잡수시는 하나님이 잡수실수 있는 양식이 무엇인가? 여기에 말씀하시기를 이 천하에 있는 뭐 우주나 영계나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것이다 하는 이 주님의 것임을 인정하는 여기에서 주님은 다 배가 불룩합니다. 만족.
만복이 됩니다. '아, 오늘 잘 먹었다, 오늘 참 배가 부르다.' 주님은 이것을 자십니다. 이것을 자십니다. 내게 있는 것 뿐만 아니라 모든 그 전부는 다 우리 주님이 지으셨고 지금도 영원도 주님의 것이다.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믿는 그 사람의 마음을 먹고 주님은 삽니다. 주님의 것이라는 것을 믿는 인정하는 그 사람의, 그 인정, 그 사람의 그 지식. 그 사람의 믿음 그것을 하나님은 먹고 사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은 첫째로 이 대접이 중요한 대접입니다. 이것이 없는 사람은 언제든지 주님이 오셨을 때에 섭섭해 가지고 돌아갈 것입니다.
둘째로 대접하는 것운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인데 당신이 특별히 내게 주신 것이 있다 내게 주신 것이 있다. 내게 이 몸도 주셨고 눈도 주셨고 귀도 주셨고 이 모든 마음도 주셨고 내라는 것도 주셨고 내게 속한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내게 주셨다. 내게 있는 모든 것이 다 이것이 주님인데 주님이 내게 주셨다. 나와 내게 있는 모든 것은 다 주님의 것인데 주님이 내게 주신 이것은 내게 주신 주님의 것이다. 요것을 자기가 믿는 요것을 하나님은 식물로 삼으십니다. 요것을 하나님은 대접 받습니다. 요거 잡수시고 당신은 삽니다. 당신은 물질 잡수시지 안하고 요것을 당신이 식물로 삼으십니다. 그러기에 라오디게아 교회에 대해서 하나님이 대책망을 하셨습니다. 하나님 대접하는 거 요것이 둘째로 하나님이 참 기뻐 받으시는 제사요 또 하나님의 흠향 할 수 있는 향기요, 하나님이 잡수실수 있는 좋은 대접입니다. 좋은 식물입니다.
셋째로는 내 밖에 있는 것은 내가 상관할 것이 없고 그저 하나님의 것인 줄 알면 됩니다. 하나님의 것인 줄 알고 내 밖에 있는 무슨, 누구에게 있는 원수에게 있는지 공산주의에게 있는지 누구에게 있든지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것인 것을 자기가 깨닫고 여기에 대해서는 조심하면 됩니다. 거기에 대해서 이랄까 저랄까 아무 책임 없습니다. 아무 책임 없어. 다만 거기에 대해서는 내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만유의 대주재의 것이요 나의 사랑하시는 주님의 것이요 창조주의 것이요 지극히 지존하신 분의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벌로이 손 대서 경솔히 하지 말고 이것을 하나님의 것이니 해서 내가 주인공 주인이 되시는 그분을 생각하면서 그것을 귀중히 조심 있게 취급하면 거기에 대해서는 나 할 일은 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내게 주셔서 내가 가지고 있는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의무와 책임이 다 있습니다. 있으니까. 내게 주셔서 내가 가지고 있는 여기에 대해뉘는 어럽게 하는 것이 당신의 대접인가? 이것은 이 건강도 이 눈도 주님이 내게 주신 눈이다, 이 총명도 주님이 내게 주시는 총명이다, 이 구변도 주님이 내게 주신 구변이다, 이 입술도 주님이 내게 주신 입술이다, 내 모든 전 지체가 다 주님이 내게 주신 선물이요 내게 주신 주님의 것이요 내게 주셔서 내것 되었다.
그런데, 그 셋째로. 그러나 여개 대해서 주님이 우리에게 그 규범을 주셨기 때문에 범위와 규례를 주셨기 때문에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하나도 자유 하지 못한다. 하나도 자유하지 못한다. 내가 쓰나 내가 쓸 수 있으나 하나도 자유로 쓰지는 못한다. 자유하지 못한다. 주님이 나에게 인도하시는 대로 나는 그것을 사용할 수 있지 이것을 내 마음대로 이렇게 사용차지 못한다. 왜? 이것을 만물보다 거짓된 이 거짓말 침노쟁이 이 악령이 가득 차 가지고 있는 여기에서 나는 일 분도 그 악령에게 미혹 받지 안할 수 없는 이것인데 내가 이 보배를 내 마음대로 이것은 줘야 되겠다, 안 줘야 되겠다. 이건 놔야 되겠다 써야 되겠다, 감춰야 되겠다, 저축해야 되겠다 이렇게 내 마음대로 여기에서 취급하지 못하니 전능하신 이것을 나에게 선물로 주신 당신이 나를 여기에 지도해 주십시오. 나는 이것을 하나도 내 자유대로는 하지 못합니다. 내 자유를 내가 믿지를 못합니다.
내 자유를 내가 믿지 못하고 내 의사를 내가 믿지 못하고 내 판단을 내가 믿지 못하면 나를 믿지 못합니다. 내가 믿는 거는 당신뿐입니다. 나도 못 믿고 아무도 못 믿습니다. 당신만 믿습니다. 내가 누구에게 지도를 받습니까? 땅 위에 어떤 사람이라도 나는 지도를 못 받겠습니다. 지도 받을 만한 그렇게 내가 믿는 분이 없습니다. 당신만이 나를 지도할 수 있고 나는 당신에게만 지도를 받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당신이 내게 주신 이 선물을 내가 잘 쓸 수 있도록 나를 세밀히 구체적으로 나를 지도해 주십시오 하시고, 여기에 자유 없으니 당신이 나를 여기에 지도해서 이것을 아무 후회 없이 주님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만물에게나 내 자체에게나 해가 되지 안하고 참 잘 썼다 할 수 있도록 이렇게 잘 사용할 수 있도록 주님이 지도해 주십시오 하시는 그 지도를 기다리는 거, 지도를 기다리고 그 지도에 따라서 움직이는 거 요 세 가지가 주님을 대접하는 일 호 이호 삼 호의 대접하는 양식입니다.
곡간에 있으라 그 말은 이것이 우리 속에 없는 걸 말하는 것이지 그때 양식이 없어서 말하는 것 아닙니다. 말라기 선지 있을 그때에 이스라엘에게 무슨 그때 헌물이 없어서 그게 없어 가지고서 뭐 유지에 곤란해 그런 것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곡간에 아무리 재였어도 이게 없습니다. 곡간에 아무리 재였지마는 요것이 없습니다. 온전한 십일조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것인 증표로, 하나님이 내게 주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그 증표로. 이거는 하나님의 주권 범위 내에서 사용하겠습니다. 하는 고 약속하는 고 증표로 요 증표라는 내용 요것만이 하나님이 잡수실 수 있는데 요 증표라는 내용이 있는 곡물은 하나도 없고 전부 죽은 곡물입니다. 죽은 헌물이오.
속에 이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탄식을 하시고 그들에게 저주를해서 그 저주 받은 것이 한 삼백 몇십 년 이래 계속하다가 세례 요한이 마지막으로 한번 경고하고 난 다음에 그들은 한 이천 년 동안 저주 받았습니다. 약 이천 년 동안 저주 받다가서 얼마 전에 유대 나라가 독립을 했지마는 아직도 그들은 메시야를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저 형체로 독립은 했지마는 참으로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모든 피조물들이 부러워할 수 있는 하나님의 백성의 그 위치는 아직까지 찾지 못했습니다. 캄캄합니다.
그런고로, 이것을 기억합시다.
네째로 하나님이 대접 받는 이 대접이 뭐이냐? 헌물 중에 헌물 중에 감사하는 그 사은의 제사가 있습니다. 사은의 제자가 있는데 껍데기로 사은의 제사를 드리는 그것은 껍데기요 사은의 제사를 드리는 껍데기는 하나님의 대리자 그 레위 사람들이 먹고 사은의 제사를 드리는 그 속의 알맹이 하나님에게 진정 사은하는 진정 감사하는 고것은 하나님이 받아서 흠향하십니다. 고것이 이스라엘에게 없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든 것을 주시는 것이 뭐이냐? 그것으로 인해서 이것 주시니까 '아, 주님 감사합니다.' 뭘 주실 때에는 당신이 요구하는 건 뭐이냐? 당신을 대접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거기서 그 낙헌제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것을 당신이 원하셔서 그거 주시기 때문에 '주님 감사합니다.' 반드시 주님이 우리에게 주실 때에 위에는 세 가지를 떼어 놓고 난 다음에 세 가지 순서가 지나왔고, 이제는 나머지기 그러면 십분지 구가 되겠습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무엇이든지 하나님이 첫째 원하시는 것이 감사의 양식이 있게 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잡수실 수 있는 감사의 양식이 있게 하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을 다 감사하고. 우리가 좋은 것이 올 때도 감사하고 나쁜 것이 올 때도 감사하고 무조건 감사하라 하더라 하는 그 감사는 썩은 감사기 때문에 그런 봉사 놀음, 그런 마귀 놀음을 하나님이 듣지 안합니다.
그저 그냥 감사 아니요 자기에게 좋은 뭐 돈이 왔는데 돈이 왔는 데도 감사하고 돈이 없어진 데도 감사하고 이거는 그저 감사만 하라 그거는 인간이 아니요 기계요, 인간이 아니요 기계라. 어디든지 그거는 감사하는 그 입에서 감사 감사 나오면 기계지 그게 인격이 아니라 그말이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돈을 주셨는데 돈을 주셨는데 하나님에게 감사 하지를 못하고 '주님이여 이것에 대해서 걱정이 됩니다. 이거 어째야 됩니까? 여기에 대해서 큰 염려가 옵니다.' 그 염려를 가지고 이 무슨 염려냐 그거 갖다가 쓰면 되지. 이게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이렇고 하면 이게 돈이 오면 아이들은 돈 안 준다고 그렇지 저 놈은 공부 안 시켜 준다고 저렇지 저거는 또 다른 사람은 돈 빌려 달라고 하고 있지 뭐 예를 들면 그런 것도 많이 있으니까 이거 참 큰 걱정입니다. 큰 걱정이 근심이 옵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께서 '그러면 그것은 네가 이렇게 저렇게 해라' 거기에서 올바른 그 방편을 자기가 깨달을 때에 이제 방편은 내가 요대로만 하면 됩니다. 고것을 바로 처리할 수 있는, 고 물질이 있고 가는게 문제가 아니라 고게 대해서 하나님이 지도 대로 바로 처리하는고 처리안을 딱 알고 난 다음에 '아, 내가 그만 요렇게만 하겠습니다.' 하고서 감사하면 그 감사를 받으시지, 그냥 또 어떨 때는 우리에게 큰 환난이 왔습니다. 있던 것이 없어졌습니다.
없어졌을 때에 없으졌으니 실쭉하는게 아니라 거기에 대해서 이거 뭐 하려고 줬느냐? 대충 말하기를 모든 거 주는 것은 단 거나 쓴 거는 전부 감사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셨다고 하니까 여기에 대해서 감사할게 뭐이냐? 거기서 감사할 것을 발견을 합니다. 아, 여기에서 나를 연단시켜서 이렇게 어려움을 닥쳐도 거기에서 이 어려움보다 이 어려움은 주먹덩이 만한 어려움 인데 주먹덩이 만한 이 어려움을 인해서 이 지구 땅덩어리보다 큰 하나님의 능력을 내가 붙들고 믿어서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가 있으니 이까짓 거 어려운 난제 문제가 없다.
이것으로 인해서 더 크신 당신의 구속의 은총을 발견하게 됐으니 감사 합니다.
이거 아니면 발견 못 할 터인데 이로 인해서 내가 좋아졌고 이로 인해서 깨달아졌고 이로 인해서 고쳐졌고 이로 인해서 큰 것을 잡았고 이런 것을 인해서 큰 그 은혜를 입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이래서 감사하는 그 감사를 하나님이 받으시지 그런 소경적인 감사, 무지적인 감사를 하나님이 받지 안하십니다.
이래서 우리에게 온 것, 사람들이 오면 뭐 귀한 거 천한 거 오만 거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오는 것은 다 주님이 내게 주신 것이니 하나도 감사 안 할 것이 없고 하나도 해될 것은 없고 잘못 이용하면 잘못 이용 하면 돈을 줘도 잘못 이용하면 화가 되고 화라도 잘 이용하면은 복이 되고 이러니까 이제 모든 것은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인데 이것에 대한 그 참을 깨닫고 거기에서 '감사합니다.' 여기에 대해서 감사할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그것을 취급하는 이것을 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일에서 진정 감사할 것을 연구하고 발견해 가지고 그거는 거짓부리 감사가 아니고 참 진정 감사, 요만한 범위 내에서는 불평 할 수 있는데 조금 범위를 넓게 잡으니까 감사가 됩니다. 조금 넓게 잡으면 또 '아이구 이거 어짠 은혜입니까?' 우리는 좁기 때문에 좁은 자기 주관대로 해석하고 관대하신 하나님 대로 해석하지 안하기 때문에 여기에서 다 오산이 되고 여기에서 다 착오가 되어지는 것이지, 그러기 때문에 이 오산 되는 것을 다 이것을 말소하고 당신을 따라서 모든 것이 감사한데. 이거는 뭐 어떻게 감사하느냐? 이거 뭐 감사하느냐? 분명히 모든 거 감사 하라고 내게 주다 하는데 이걸 어데 이거는 뭐로 감사하겠느냐? 자꾸 연구하면 '아, 감사합니다.' 참 진정 감사할 것이 나 와서 감사할 때에 그것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대접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에게는 감사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인데 감사는 무지 감사가 있고 지성의 감사가 있으니 알고 감사하는 그 감사는 하나님이 참 대접을 받으십니다.
그 다니엘이 사자 구덩이 앞에 있을 때에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기뻐 기도를 했던 그 다니엘의 깨달음의 그 감사는 참으로 하나님이 대접 받으실 아주 고급 요리입니다. 고급 요리. 하나님은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이 많았지만 다니엘이 고렇게 감사하는 고 감사 고것을 다니엘에게 찾아 와 가지고서 당신이 잡수시고 허기를 면하시고 기뻐하셨다 그말이오. 감사 다섯째로는 다섯째로는 하나님을 대접할 것은 뭐이냐? 우리가 하나님이 제일 크신 분이요 제일 큰 어른이요 우리 부모 형제 자매 아무도 해 줄수 없는 일을 해 주신 분이요 또 내게 대해서 지극히 큰 영원한 희생을 하신 분이요. 이러니까 그분이 자체의 능력으로도 제일 크고, 또 부자로도 제일 큰 부자고. 또 내게 대해서 하신 일도 제일 크고, 앞으로 내게 제일 필요 하기도 제일 필요하고 모든 것에 이분인 줄 알고 이분인 줄 알고 이분을 내가 머리 떼서 섬기고 제일 높은 것으로 섬기고 수지로 섬기고 뭐이든지 자기가 무슨 일 할 때도 이 뭐 이 무슨 일을 하면은 하나님에게 대한 일 있고 뭐가 있으면은 일 하다가 아, 이것부터 할게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이 일부터 하고. 또 바쁘지마는 바쁘지마는 아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부터 하고 기도부터 하고, 하나님을 모든 현실에서 어떤 사물에서나 어떤 존재에 대해서나 하나님을 그 모든 것보다 먼저 당신을 대접하고 당신을 섬기고 당산을 이해하고 당신을 상대하고 먼저 그분 부터 찾고 그분부터 상대하고 그분부터 이 대접을 하고 그분부터 그 관계를 하고, 암만 손이 수십 명이 왔다 할지라도 제일 문제는 대사집이면은 신랑 문제가 이 신랑 상객부터 대접을 해 놓고 다른 손님 대접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이분을 모든 것 중에 제일 높은 분으로 제일 크신 분으로 제일 필요한 분으로 내가 내가 그분을 제일 필요한 분으로 여기는 요것이 당신의 대접이요, 제일 크신 분으로 인정하게 되기 때문에 그분보다 더 큰 분이 없어. 제일 높은 분으로 알기 때문세 내가 제일 좋은 거 제일 큰 거 제일 귀한 거 제일 높은 거 제일 성심 성의, 내 마음도 제일 수지 내 생각도 제일 수지 내 총명도 제일 수지. 또 내가 예를 들면 뭐 작은 거지마는 내가 월급을 받아도 제일 수지 내가 하루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천하를 만나도 이 날 첫날 제일 첫시간 제일 첫시간, 제일 수지 모든 수지, 모든 위의 것, 제일 귀한 것 이것으로서 당신을 당신으로 알아서 섬기는 요것이 머리를 떼서 섬기는 요거 하나로 발표했는데 요것이 당신을 대접하는 대접입니다. 요것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요것이 있는 사람 얼핏 생각하면 이것이 똑 미신같이 미신 같지만 아니요 이 미신은 응답이 없습니다. 그분은 당장 하면 응답이 있습니다. 당장 하면 응답이 있소. 내가 그러할 때 '주님이 아, 기뻐하다, 너 잘 했다, 만족하다.' 당신이 기뻐하시니 내가 기쁩니다. 당신이 만족하시니 내가 만족 합니다. 당신이 흐뭇해 하시니 내게 그만 모든 것이 흐뭇한 것이 모든 거 졸급이나 갈급이나 뭐 당황이나 이런 거 없고 그저 든든하이 그분이 어떻게 우리를 흐뭇하게 해 주시는지.
주님은 이렇게 살아 계시는 주님으로, 똑똑히 코와 눈과 그것을 모르거든 그저 성경에 기록한 대로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신데 그 인성의 인성의 원형을 가진 그 신성을 가지신 분이니 그분은 전지전능 높으신 분이시요 대주권자시요 성경이 말해 놓은 성경 중 인물로 생각합니다. 성경 가운데 있는 인물로 생각하면 됩니다. 성경 가운데 나타난 그 인물 그대로의 주님인 줄 알고 이 주님을 이런 실존하신 분인 줄 알고 이분으로 더불어 교제하고 서로 대화하고 의논하고 이것을 당신은 원하십니다. 그것이 우리에게 다섯째로 당신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또, 이것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대접하는 것이요 그 다음애 오늘 오후에 본 말씀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대해서 대접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받는 것이며 하나님에게 받는 것이며 모든 피조물을 대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대접하고 하나님은 위에 다섯 가지 말한 이 다섯 가지로 하나님을 대접하고, 이제 오늘 오후에 고린도후서 9장 7절 이하에 봉독한 이 말씀에는 우리가 간접적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행위. 직접 하나님에게 관련된 건 아니지마는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좋아하셔서 우리 하는 일을 보고 당신이 감화 감동을 받을 수 있도록 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곧 뭐이냐? 인간을 대우하는 일, 인간을 대접하는 일 그것을 여기에 말씀해 놨습니다. 인간을 대접하는 것은 어떻게 인간을 대접하는 것이냐? 인간을 대접하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때에 씨와 양식 두 가지로 구별해서 주셨기 때문에 씨와 양식 두 가지로 구별해 주셨으니까 씨는 씨로 심고 양식은 양식으로 먹는 거, 심는 것은 써로 심는 것은 모두 다 이 피조물을 대접하는 것이요 양식은 자기가 사용하는 거.
그러기 때문에, 나머지기 십일조 드리고 난 다음에 십의 구 조는 십의 구 조는 뭐하느냐? 십의 구 조는 헌물제를 드리고 이제 십일조로 속하고, 여러분들이 가서 연구를 하면은 똑똑히 알 것입니다. 십일조로 일차 속하고 십일조로 속하고 나머지기 십의 구 조가 남았습니다. 십의 구 조를 그 사은제로 그것을 속하고, 또 머리로 하나님을 섬기는 그 약속과 그 서약과 그 약속과 그 표현으로서 머리를 떼서 바치는 것으로서 속하고 이러면 이 하나님 대접은 다 했습니다.
하나님 대접은 이 다섯 가지로서 하나님 대접 할 것을 다 대접했습니다.
하나님 대접할 것을 다 대접 했는데, 이제는 그 나머지기 다섯 가지를 들여서 속하고 난 나머지기 그것은 내게 주셔서 내가 쓸 수 있는 것인데 하나님이 법대로 써라 하는 그것은 간단하게 말해서 두 가지로 써야 됩니다. 씨와 양식 둘로 나눠 있기 때문에 씨와 양식 둘로 나눴기 때문에 씨는 심고 양식은 먹는 것이라.
이 두 가지로 해서 씨는 무궁한 하늘나라를 준비하는 데에 투자하는 것이 씨인데 무한한 하늘나라를 준비하기 위해서 쓰는게 씨인데, 무궁한 하늘나라를 위해서 투자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게 무궁한 하늘나라에서 투자하는 것이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니라. 배고파 헐벗고 굶주릴 때에 병 들었을 때에 나그네 됐을 때에 환난 당했을 때에 그를 도와주는 그것이 곧 내게 드림이라.' 이것은, 우리는 하늘나라의 저축을, 뭐이냐? 처음에 다섯 가지로서는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을 하니까 하나님이 내게 얼마든지 주시는데 주신 그것을 또 이와 같이 다섯 가지로 속하고 난 다음에 남은 것은 하늘나라를 위해서 준비하는 것이니 하늘나라를 위해서 준비하는 것은 다른 길이 없다. '네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동록 쓸고 좀 먹고 도적이 구멍 뚫어서 도적질 한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거기는 동록도 좀도 도적도 없다. 하늘에 쌓아 두라.' 그러면, 하늘에 쌓아 두는 건 어떤 것이냐? '소자 하나에게 행한 것이 곧 나에게 행한 것이니라' 이거는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일 인간 대접하는 것이 이것이 그 신약에 있는 고린도후서 9장에 있는 연보 제도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여기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우리 마음대로 하는데 당신이 우리에게 규정을 주시는 것은 씨와 양식이 구별되어 있으니까 씨는 심고 양식은 네가 먹어라. 요 구별을 우리가 잘 할 때에 우리에게는 어두움이 없어지고 요것을 통해서 우리에게 옵니다.
그래 하고 난 다음에는, '그러면 씨는 심었고 양식은 먹었습니다.' '얼른 먹고 얼른 심어라' '심고 먹고 했습니다.' '보자 다 심고 먹었느냐?' '예, 다 심고 먹었습니다.' '아나 또 줄 터이니까 또 심고 먹어라' 또 주니까 받아 가지고 얼른 심고 또 먹었습니다. '또 다 심고 먹었느냐?' '예, 다 심고 다 먹었습니다.' '또 줄께 또 해라' 이래 가지고서 그 회수가 많을 수록 당신은 기뻐하십니다. 이래서 이것도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해보면 압니다.
그러기에, 이 고린도후서 9장에 기록한 이 연보 제도는 무슨 목적으로 연보 제도를 내셨느냐? 저 지난 주일에 가르치는 대로 이는 하나님의 그 충만을 우리에게 많이 주시기 위해서 이 제도를 내 놨습니다. 많이 주시기 위해서. 많이 줘 가지고 뭐 하려고? 많이 줘 가지고 이 나그네 이사 갈 세상에서 여기에서 심어 가지고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서 추수를 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이 제도를 주셨습니다. 그러면 이 연보 제도가 아니라면 우리는 하늘나라에 추수할 것이 없습니다. 연보 제도를 허락하지 안했으면 우리에게는 아무 투자할라 해야 투자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당신은 많은 투자를 주시고저 원해서 이 제도를 내셨고 당신이 원하는 것은 이 많은 투자를 당신이 주시는 것은 또 심고 양식은 먹고 해서 일 차에 하니까 또 이 차에는 좀 더 많이 주고 삼 차에는 더많이 주고 사 차에는 더 많이 주고 열 차에는 더 많이 주고 자꾸 자꾸 많이 줘서 얼마든지 하나님의 무한한 것을 주는 방법은 요것입니다. 더 많게 해 주는 방법은 심으면 또 씨 주시고, 또 심으면 또 씨 주시고, 또 심으면 또 씨와 양식 주시고 요 방편만이 당신의 있는 모든 거 우리에게 주시는 방편이지 그외에 당신의 충만을 우리에게 주시는 방편은 없습니다.
이러니까, 요것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 아니라 요것은 요 피조물울 대접하는 것입니다. 인간으로부터 인간 이하에 있는 모든 것을 대접하는 것이요 요 다섯은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대접하실 때에 하나님께서는그 무한한 것을 주시고 무한한 것을 주시고 이 다섯 가지 하나님 대접할 때 무한한 것을 주시고, 그 무한한 걸 주시면 그게 뭣 되느냐? 무한한 거 주시는 그게 뭣 되느냐? 무한한 거 주셨는데 이 다섯 가지 속량을 하고 나니까, 무한함을 주셔서 가지고 있는 것에서 다섯 가지 속량을 하고 나니까 나머지기 그것은 뭐이냐? 그것은 나머지기 그것은 다 두 가지가 한테 싸여 있다. 뭐로 싸여 있느냐? 씨와 양식 그 두 가지로만 되어 있다.
그러면 씨와 양식 두 가지 되어 있는 것을 이것을 씨는 먹고 양식은 심는 이 일을 하면 또 줍니다. 또 주십니다. 또 주시면 그러면 우리가 자기의 가진 것을 이 영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마련하는, 심고 추수하는, 심고 추수하는, 이 농사 짓는 영원을 위해서 농사짓는 그 법칙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는데 씨를 이것을 하나도 애낌 없이 잘 심고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당장 많이 주십니다. 많이 주십니다. 많이 주시면 그것도 또 씨와 양식으로 구별돼 있습니다.
그러면, 많이 주시면 그렇게 씨는 심고 양식은 먹고 이렇게 하니까 하나님이 많이 주셨으니 이 주신 것이 그러면 양식은 먹고 씨는 심었으니까 잘 했다 하고서 그 대가로 그 값으로 네가 잘 했으니까 내가 그 대가로 주겠다. 대가로 주시는 것입니까?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상으로 주시는 것입니까? 자, 대가로 주시는 것으로 자기가 하나님 앞에 이것을 씨와 양식을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잘 심고 자기 양식은 자기가 소비하고 사용하고 이랬으니까 하나님 거 그 뒤에는 많이 줬습니다. 점점 더 많이 줘. 자꾸 많이 줘. 많이 주는 데 많이 주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이 잘 했으니까 심는 거 심고 이래 하라 했으니까 내가 그 품삯으로 대가를 주겠다. 대가로서 그 심은 값으로 우리에게 주십니까, 심은 값은 무궁 세계에 있고 주시는 것은 또 새 자본으로 당신이 새로 주시는 것입니까? 자, 새 자본으로 주신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네, 이거는 잘 알았습니다. 새 자본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한 것은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한 것은 다 진리에 속했고 영감에 속했고 완전에 속했고 생명에 속했기 때문에 다시는 썩지 않습니다. 왜 썩지 안한 일을 했는데 썩지 안한 것의 대가를 썩을 것으로 어째 줄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그것으로 주는 것이 아니고 새 자본으로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요 뭐 얼마나 좀 범위가 넓은지 모릅니다. 하나님의 충만을 하나님께서 아낌없이 나에게 주시게 하는 데에는 쌓을 곳이 없을 만치 주시게 하는 데에는 요 다섯 가지 하나님 대접하는 일이 있어야 하고, 또 그러면 대접하는 일이 있으면 무한한 것을 주는데, 그 받은 것을 받은 거보다 또 더 많게 많게 자꾸 더 많이 받는 그 방식은 무엇인가? 그 방식은 일차 것을 한 되 씨와 한 되 양식을 줬는데 심고 먹고 했더니마는 그 다음에는 새자본으로서 두 되와 양식 두 되를 준다. 그 다음에 또 심고 나니까 백 되와 또 양식 백 되를 주신다. 그 다음에는 만 석을 주는데 만 석을 심고 만 석 씨와 양식을 주니까 만 석을 사용해 가지고서 비용을 해 가지고 만 석을 심고 나니까 그 다음에는 억만 석을 준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더 주고 더 주시는 방식은 요 방식 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받은 거보다 더 받고 더 받고 더 충만히 받는 방식은 요 방식 밖에 없다는 것을 계약에다 딱 요렇게 선포해 놨고, 하나님의 무한한 것을 우리가 받는 데에는 요 온전한 십일조 온전한 헌물인 요 다섯 가지 요 다섯 가지로 하나님을 대접하는 거 외에는 하나님께서 이 축복을 받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걸 잘 기억하고. 이거 뭐 십일조 하지마는 사람들이 십일조에 대한 도리든지 헌물에 대한 것이든지 여기에 대해서 전혀 무식입니다. 전혀 모릅니다. 모르고 하기 때문에 이것은 이 모처럼 하는 것을 명예로 하기 위해서 아, 아무것이가 얼마했다 하고서 이 명예를 떡 거석해 놓고서 이 손뼉을 치면 또 좋다고 그래 하는 데는 하지마는 은밀히 하는 것은 하지를 안한다 말이오.
이 도무지 연보에 대한 이 연보라는 것은 연보라는 것은 물질이요 우리는 사람이요 우리의 구원은 둘입니다. 물질에 대한 구원, 사람에 대한 구원 그러기 때문에 물질 실패는 신앙 실패입니다. 신앙 성공하면은 물질 성공입니다.
그러니까 물질을 말하기를 주인이 둘이 있는데 한 주인은 물질을 말했고. 한 주인은 하나님을 가리켜 말씀했습니다. 이만치 우리에게 권리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물질에 대한 도리는 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대로 원리 원칙대로 바로 이 물질을 인해서 하나님이 목적하신 대로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져지는 이것은 십일조와 헌물, 씨와 양식 이 두 가지 방식으로만 이 일이 달성되어 있는 것이지 다른 길로는 없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요 도리를 밝히 깨닫고 이제 집에 가서 찾읍시다. 우리 집에는 이제까지 예수 믿은지 몇십 년 됐지마는 주님이 오시면 굶고 돌아가시고 목 말라 돌아 가지고 한숨을 쉬시고 탄식을 하시고 돌아가셨는지 참 기뻐 즐거워 편히 좀 한숨 쉬고 가셨는지. 또 좋은 대접을 받고 가셨는지. 내가 대접할 거 이 다섯 가지 중에 뭣 뭣이 있는지, 이것이 이삭이 '좋은 음식을 대접해라. 내가 온갖 축복을 주겠다.' 하는 것이 이삭이 고기 먹고 싶어 그런게 아니고 다 계시의 기관이오. 계시의 도구로 하나님이 쓰셨는데 이삭이 왜 그런 말을 했느냐? 우리에게 우리에게 하나님 대접하면은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는 그것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하나의 계시 기관으로 한 것이지 이삭이 나이가 많으니까 그 음식이 먹고 싶어서 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영원전부터 그거는 우리의 특별 계시의 한 형식 그 순서로 해 가지고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생명의 구원의 도리입니다.
도리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되지 하나의 그 노인이 음식 먹고 싶어 했는갑다 그런 걸로서 알면은 신구약 성경은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주님이 이 말씀을 선포해 놓으시고 이제 각 집에 갔을 것입니다. 각 집에 개인의 가정에 개인의 교회에 찾아 가셨을 때에 과연 주님을 대접할 수 있는 이 다섯 가지가 마련돼 가지고 있든지 네 가지가 마련돼 가지고 있든지 한 가지가 마련돼 가지고 있든지 마련돼 가지고 있을 때에는 당신이 그것을 대접을 받으시고 큰 축복을 베푸시고 떠나실 것입니다.
우리가 약속하신 약속을 받은 대로 재빨리 심는 일을 재빨리 하면은 또 새 자본 나옵니다. 새 써 나옵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사람 평생 하 번도 못 하는데 열 번도 하는 사람 있고 백 번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거는 재빨리 많이 하는 것을 주님이 기뻐하십니다. 왜? 당신은 얼마든지 있기 때문에 주기를 원하셔서 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인색하지 않습니다. 인색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는 창조주요 무한의 대주재이기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