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4 21:56
양심
본문 : 요한일서 3장 21절∼22절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마음에 책망할 것이 없다 하는 이 말씀은 양심을 써서 양심으로 살았다 하는 말입니다. 양심을 써서 양심으로 살아야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도 얻고 또 모든 구하는 바를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양심을 쓰지 안하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을 수 없고 또 기도하는 바가 다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양심은 무엇이 양심인가? 양심은 자기가 인정하는, 옳다 인정하는 그 지식에 지배를 받는 것이 양심입니다. 만일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라면, 공산주의의 지식을, 공산주의의 그 사상 지식을 다 확실히 인정한다면 그 사람이 공산주의 지식이 가르치는 대로 그대로 하는 사람이라야 공산주의의 양심을 가진 사람이 됩니다.
또 기독자는 신구약 성경 말씀을 참되다 다 인정하고 믿습니다. 성경 말씀은 틀림이 없다. 성경 말씀은 바르다. 옳다. 이렇게 인정하는 것이 기독자이기 때문에 제가 기독자라면 제가 인정하는 성경 말씀대로 행하는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 기독자의 양심을 가진 것입니다.
양심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옳다 인정하고 있는 그 지식에 지배를 받아서 그 지식대로 하는 그 사람이 자기 양심을 쓰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은 기독자 양심이 따로 있고 불교 양심이, 양심은 뭐 이래 수백 종류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이 옳다 인정하는 지식이 수백도 수천도 많습니다. 이 사람은 이 지식이 옳다. 저 사람은 저 지식이 옳다. 이래서 사람이 지식이 종류가 많기 때문에 지식 따라서 자기가 아는 지식대로는 그 지식대로 옳게 바로 할라 하는 것이 양심이기 때문에 지식의 종류가 않으니까 양심의 종류도 많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자는 신앙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신앙양심이라 말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하나님의 이 법도를 순종하는 양심이라 그 말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따라서 법도대로 행하는 것을 가리켜서 신앙양심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마태복음 5장 8절에 보면 '마음이 청결한 자는 하나님을 만나본다' 그러면 하나님을 자기가 만나는 것도 정결한 마음이 아니면 양심이 아니면 만나지 못합니다.
자기대로는 하나님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할라고 하는,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할라고 하는 그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 만날 수 있지 그 마음 가지지 안한 사람은 하나님 만나지 못합니다.
자기가 어떻게 일을 역사를 많이 하고 또 역사의 공로가 많고 자기가 열심하고 충성하고 아무리 한다고 해도 거기는 양심을 안 쓸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래 한 그 일은 일대로의 일한 공적의 대가는 공평되게 받을 수 있지만 양심을 쓰지 안하다 보면 자기가 아는대로는 성경 말씀대로 옳게 바르게 해 볼라고 하는 그것을 쓰지 안하는 사람이라면 온갖 일을 충성되게 해 놨다 할지라도 나중에 조사해 보면 전부 거짓부리고 별로 자기에게 수입될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 만나는 것도 양심을 씨야 하나님 만날 수 있다 하는 것이오.
또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 보면 '양심으로라야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그랬어.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걸음도,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걸음도 제가 양심 안 쓰면 가다 보면 욕심 따라 하나님 찾아가기 쉽고, 감정 따라 하나님 찾아가기 쉽고, 또 사람은 여러 가지 정서가 있기 때문에 정서 따라 하나님 따라가기 쉽고, 또 자기 그 재미 따라서 하나님 찾아가기 쉽고, 뭐 별별 그 탈선이 한정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꼭 양심을 써야 됩니다. 양심으로, 이거 참 보배, 중요합니다.
양심으로라야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아는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이대로 나는 해 볼란다, 요 성경 말씀대로 됐다 안됐다. 요라면 성경 말씀대로 바로 되나 안되나?' 이것을 우리가 가지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몸에 수지가 마음이오. 마음에 진짜, 마음에 제일 머리되고 그 수지가 뭐이냐? 마음의 수지가 곧 양심입니다. 영은, 안 믿는 사람으로 말하면 영은 죽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제일 옳고 바른 빛이라고 참 지혜라고 한다면 뭐인가? 양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양심을 하나님께서 "너희 빛이 어두우면" 너희 빛이라, 인간 빛, 인간에게 있는 광명이라는 것은 뭐이냐? 광명이라는 것은 양심이라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둡고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은 것처럼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네 양심이 흐려버리면 네 모든 전 마음의 움직임은 다 깜깜 어두워지게 된다. 마음이 어두워지면 몸뚱이는 마음 따라 행동하는 것인데 그 자연히, 어두워질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고 또 베드로전서 3장 16절에는 "양심을 쓰면 모든 비방거리에서 우리가 벗어날 수 있다" 했습니다. 양심을 써야 다른 사람이 비방하고 조롱하는 데서 벗어나지, 또 다른 사람이 욕하는 데서 벗어나지, 다른 사람이 나를 욕하고 비방하고 하는 데에서는 내가 양심을 써야 거게서, 양심 써서 자꾸 생활하면 자연히 벗어나게 되고 아무리 다른 사람이 뭐라고 말한다 해도 그것이 나에게 복이나 되지 화될 거는 하나도 없습니다.
이래서 "거짓 걸로 핍박하면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 너희 상이 큼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실은 기독자들은 후회는 없어야 합니다. 후회는 없어야 된다 말은 잘못된 일이 없어야 된다 그말 아닙니다. 후회는 없어야 된다는 말과 잘못된 일이 없어야 된다는 말과 아주 다릅니다. 잘못된 일이 없이 살아야 하지만 사람으로서는 잘못된 일이 없이 살 수 없는 것이 사람입니다. 인간이 다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후회할 일은 없어야 된다.
후회할 일은 없어야 된다 그말은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가 무엇을 할 때에는 꼭 양심을 써서 자기로서는 그게 옳다 해서 했기 때문에 뒤에 가서 보면 잘못된 게 많다 그거요. 뒤에 가서는 잘못된 게 많아. 잘못된 게 많을 때에 그때에 자기는 '나로서는 그때 내가 내대로는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를 썼는데 나로서는 그 이상, 내가 그때에 벌써 내가 내게 있는 빛이 그 정도 밖에 안됐기 때문에 나는 옳게 바르게 할라고 애를 써도 그 이상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내가 어두워서 그거 그렇게 내가 그때 마음에 `요래 하는 게 좋다 하는 옳은, 그보다 좀 더 옳은 것이 있었는데 내가 옳은 것을 버리고 그렇게 하지는 안했다.' 자기 있는 대로는 다해서 옳다고 최선을 다해서 선택한 그대로이기 때문에 '이거는 내가 무지하고 부족해서 이렇지 내가 알고 후회된 일을 하지는 안했다'하기 때문에 후회는 없어야 되고 실수는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참 다 삐뚤어진 거는 죄지만 여러가지로써 사람이 요때는 이렇게 요걸 해야만 요 사람을 붙들겠다. 또 요 사람과 이 일이 낭파되지 안하겠다.' 이렇게 하는 그런 데에서 어두워지면 실수합니다. 어짜든지 그저 자기 지식과 비판과 평가에서 어떻게 뭐 틀렸다 할지라도 그만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그대로만 할라고 하고 해 보면 그게 얼마 지나가고 나면 그게 잘했습니다.
또 언제든지 대립은 뭐 자기 나라이기 때문에, 자기 가족이기 때문에 해도 자기입니다. 그거 자꾸 추려 들어가면 결국은 그 주인은 자기요.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위하느냐 하나님을 위하느냐 그 둘에서 모든 것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을 위해서 한다고 이렇게 한 그것이 후회 없이, 나는 그것은 하나님을 위한다고 맘껏, 하나님 위하는 것이 요게 제일이다 하고 했는데 뒤에 보면 잘못됐다 할지라도 그런 것을 하나님께서 "이전 알지 못했을 때에 하는 것을 허물치 안한다"하는 그 성구가 그 율법이 해당이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바울이 말하기를 내가 과거에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을 잡아 많이 죽여버렸고 이렇게 했지만, 과거에 내가 폭행자다. 내가 폭행자이었지만 그때 내가 알지 못해서 그렇게 했던 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고 나를 허물치 안하고 용서하셨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로서의 그 양심을 써서 이렇게 하는 데에는 하나님이 준 것이 그만치 밖에 안 줬기 때문에. 사람이 어떻게 광명 생활을 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먼저 광명 생활 하도록 주셔 가지고 받은 광명가지고 제가 광명 생활하는 것이지 제가 무슨 광명을 만들어 가지고 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많이 주면 큰 성자되고 적게 주면 적은 성자되고 하나님이 강퍅하게 또 버려두면 그 사람이 악인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의인되는 것도 악인되는 것도, 또 멸망을 하는 것도 구원을 받는 것도 그 순전히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자기로 말미암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으로 말미암고 자기로 말미암은 게 아니라는 요 사실이 뭐이냐 하면 하나님의 주권에 맡기는 것이오. 하나님의 주권의지 주권 능력의 성취라 이라는데, 꼭 한 자리에서도 요 성경을 보고 요 말씀을 듣고도 하나님이 뭐 그렇게 예정대로 되니까 누가 뭐 의인이 되며 악인이 될 것이냐 ? 이래서 또 그 들을 때 나는 책임이 없다. 뭐. 하나님이 악인 되게 해놨으면 내가 어떻게 악인 안 되고 어떻게 될 것이고? 또 하나님이 의인되게 했으니까 의인된 게 뭐 자랑할 게 뭐 있나? 이렇게 되는 사람도 있고, 들을 때에 '만일 나를 하나님이 악인 되도록 정해 놨으면 어찌 되며 이제 하나님께서 만일 버리셨으면 내가 어찌 되나 ?' 이 걱정이 되어지는 그것이 뭐 이냐 하면 벌써 하나님 앞에서 복되게 예정됐다는 발표입니다.
그게 자기로서 그래 생각한 것이니까 이것은 자기 주관으로 생각한 줄 알아도 그것이 벌써 복되게 예정이기 때문에 그 말씀을 들을 때에 그렇게 생각이 들고 그 말씀을 들을 때에 '모두 다 하나님의 예정이니까 우리에게 무슨 책임이 있나? ' 또 이렇게 들려지는 그것이 벌써 하나님께 화되게 예정되고 복되게 예정돼 가지고 있는 그 표시인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어디까지 의릅게 나아갔다 할지라도, 저 뒤에는 왜 불 안 켜 놨습니까, 저 신관에는? 그 누가 불 좀 켤 줄 아는 사람 불 좀 켜지. 여기 OO선생, 어디 갔어? 불 좀 켜지, 새 신관에 깜깜하게 어두워 놓으니까 어두운 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자꾸 어두워 놓으니까 더 어두워지면 어짤 거라? 그런 거는 전기 아끼지 말고 불을 켜 놔요. 쓸 데 쓰는 거는 자꾸 복을 주시고 안 쓸 데 쓰면 하나님이 복을 안주셔 이러니까 실은 사람이 자기는 이만치 했는데 다른 사람은 저렇다.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 멸시한 것은 전부 그거는 자살 행위입니다.
나중에 보면 전부 회개해야 되고 다 그 값을 내놔야 될 일이고 또 자기 겸손해진 것은 다 그것은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의롭고 다른 사람이 실수했으면 `어떻게 저렇게 실수하고 저럴까? 사람이 저럴까?' 이렇게 말을 하면 그 사람은 나중에 거게 대해서 배상을 물어야 됩니다. `저 사람 저래 되고 나는 이래 된 것은 하나님이 나에게는 이렇게 많이 주셨고 저 사람에게는 적게 줘서 저런 것이니까 하나님이 저 사람도 나와 같이 주시면 나와 같이 되고 나보다 많이 주시면 나보다 더 커지고 많아질 터인데,' 하고 그 사람을 위해서 '저 사람도 나와 같이 주셔서 같이 이 보배로운 것을 가지도록 해 주십시오.' 하는 그 사람이 후회가 없고 복이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모든 면에 양심 안 쓰면 헛일입니다. 양심을 써야, 다른 사람이 비방하는 것도 '왜 네가 나를 비방하노?'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헛일입니다.
비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비방받을 수 있는 그런 행동하는 줄 알고 네가 비방에서 벗어나도록 하기 위해서 고치기 위해서 그렇게 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모든 비방과 모든 욕을 면하는 것은 욕하는 사람과 비방하는 사람하고 서로 대립되면 자꾸 자살 행위입니다. 그럴 때에는 네가 양심을 써서 양심으로 살면 그 모든 욕하고 비방하는 것이 다 녹아져 버리고 빛이 거기서 환하게 들나서 빛과 같이 나타나게 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또 디모데후서 1장 3절에는 보면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때부터 섬겨오는 하나님이라 이랬습니다."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때부터 섬겨오는 하나님이라 하나님은 양심으로 섬겨야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 양심 빼놓고는 암만 섬겨도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입니다.
자기로서는 옳게 바르게 이렇게 어쩌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노를 풀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징계받지 않기 위해서 자기 힘껏 옳게 바르게 이렇게 할라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모든 걸 아시니 자기대로는 이렇게 옳게 바르게 이렇게 할라고 하는 그것이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오.
자기도 자기를 살필 때에 잘못됐다는 걸 알 수 있는데, 자기도 자기를 살필 때에 이거는 잘못 다 하는 것을 알 수 있는 그걸 가지고 하나님을 섬겼다는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멸시하고 욕보이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만홀히 여긴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도, 하나님을 만나는 것도, 하나님 섬기는 것도, 모든 이 세상에서 나를 해하는 모든 해하는 데에서 벗어나는, 모든 나를 해하는 그 함정에서 벗어나는 것도 전부 양심이오. 양심 생활하지 안하면 헛일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하고 무릇 구하는 바를 다 하나님께 얻게 된다 그러니까 양심 빼놓으면 우리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전부 탈선입니다. 우리로서 탈선되지 않게 할 수 있는 그게 뭐이냐? 우리에게 있는 자연의 빛입니다.
자연의 빛. 너희에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너희 빛이 어두우면 너에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사람의 빛이라 말이오. 사람의 빛이라 말은 사람마다 가지고 있는 양심을 말합니다. 그 양심을 쓰면 되는데 양심 안 쓰면 그 어두운 것이 얼마나 어두워지겠느냐 그렇게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고 자기 힘대로 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그 은혜대로 맘껏 힘껏 바로 옳게 할라고 애를 써서 했으면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삐뚤어져도 옳다 인정은 하지 안해도 정죄하지 않습니다. 이전 알지 못했을때에 한 것을 하나님께서 정죄하지 안하셨다 너희들이 이 법이 없을때는 어떤 일을 해도 그 일이 정죄받지 안하지만 법이 오고 난 다음에 법을 알고 난 다음에 잘못된 것은 법이 너를 정죄하게 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또 금 맡긴 비유에 닷 냥중 두 냥중 한 냥중을 맡겼는데 그 사람이자기 맡은 대로 두 냥중짜리는 넉 냥중 만들었고 닷 냥중짜리는 열냥중 만들었지만 하나님께서 대접하고 칭찬하고 상을 주는 거는 꼭같았습니다. 그렇지 안했습니까? "주인의 즐거움에 와서 참여해라."네가 착하고 신실한 종이라.네가 충성했다. 뭐 이렇게 대우하는 것이나 인정하는 것이나 꼭 같았소.
왜? 그는 닷 냥중 줬기 때문에 그 힘 쓰면 닷 냥중 남길 수 있고, 두 냥중 줬으니까 힘쓰면 두 냥중 남길 수 있지 두 냥중 받은 사람이 암만 힘을 써 봤자 닷 냥중 못 만든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뭣을 의로 보는가? 지극히 작은 데 충성된 자는 큰 데도 충청되고 지극히 작은 데 불의한 자는 큰 데도 불의하다 충성과 불의를 마주 딱 쳐 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의 의는 뭐이 의인가? 사람의 의는 충성이 의입니다. 충성이 의.
이러기 때문에 작은 충성이 작은 의요 큰 충성이 큰 의라. 작은 불의가 그것이 내나 작은 죄요 큰 불의가 큰 죄라. 그러면 사람의 의라는 것은 충성이라 이렇게 발표해 놨습니다. 왜? 충성이라 말은 무슨 말이냐? 충성이라 말은 자기 마음껏 다해 가지고 `여기 옳다' 양심을 써서 한 그것이 충성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 데 양심 빼 버리면 수지는 딴데 두고, 이거 사람이야 그렇지 않소? 사람이야 뭐 속은 저 딴데 두고도 겉어머리로 얼마든지 그렇게 굽신거릴수가 있어. 굽신거릴 수가 있어. 이렇지만 굽신거릴 수가 있지만 사람은 그걸 몰라.
사람은 몰라. 그러기 때문에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 이래 놨다 말이오.
하나님이야 모를 리가 있습니까? 이러니까 하나님이 다 알고 계시니 자기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자기가 잘못다고 생각하는 그것은 하나님은 더 잘못된 줄알고 있을 것이고 자기도 '요거는 참 똑 바르지 옳다. 이것은 바르다.' 자기가 생각으로서도 바르다고 확정짓지 안하는 그 일은 하나님 앞에 어떻게 담대히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양심 안 쓰는 사람은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사람이요 또 그것이 탈선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신앙생활 하는 데 제일 중요하요.
양심은, 양심을 써서 이렇게 하면 다른 사람이 자기를 욕하고 비방하고 훼방할 때에 그때에 마음에 분개함이 나는 것은, 자기를 비방하고 훼방하고 자기를 해치고 이렇게 할 때에 그 사람이 마음에 섭섭함이 오는 것은 그것은 옛사람입니까 새사람입니까? 새사람이요 옛사람이요? 그것은 옛사람이오.
왜? 양심대로 살았으면, 양심대로 살았으면 다른 사람이 훼방할 때에 내대로는 옳다 바르다 하는 그걸 살았는데 그렇게 하면 거기 대해서 자기가 생각할라면 `내가 혹 잘못된 게 있나?' 그거나 살펴볼 것이고, 암만 생각해 봐도 잘못된 게 없으면 어찌 됩니까? 잘못된 게 없으면 그런 말 할 때에 걱정은 어디가 있습니까? 상대방에게 대해서 걱정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이거 모르고 이라니 이 사람이 참 이거 복이 없다. 나 때문에 이거 죄를 짓고 복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고 또 그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뭣을 징계 줄까 이러니까 도로 그 사람을 위하게 되고, 자기로서는 `아무리 말해도 이 거짓 것 이거는 내게는 복이 있다.' 그 말은, 그 말은 대개 보면은 신앙가들이 자기보다 신앙이 어린 사람에게는 그 말 하지만 큰 사람에게는 그말 안 합니다. 자기는 그래 못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네가 거짓 걸로 핍박하고 억울한 소리 들었으면 참고 견뎌라 복 있다' 하는 그 말은 다른 사람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위로로, 약하기 때문에 그 사람을 `네가 견뎌라'위로를 해 주는 것이고 자기로서는, 자기로서는 그렇게 되지를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돼? 억울하면 '내야 괜찮지만 저 사람이 안다.' 자기 복 있는 데에, 요래 억울하게 들으면 자기 복되다 하는 거게 자기 마음이 머물지를 못하고 상대방이 하나님 앞에 이거 노를 끼치니까 그 사람에게 대해서 염려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의 사람들이라. 시편에 다윗이 자기의 원수가 천천이요 만만으로 이렇게 되어질 때에 `이 천천 만만이 되니까 내가 이거 절단나니까 이거 큰일 났다'고 생각을 안 가졌소. 또 `그 사람들이 나한테 이래 대적하니까 그거 분하다' 이거 가지지 안했어.
다윗은 뭣 가졌습니까? 하나님께서 그 상대방들을 뺨을 때리고 뼈를 꺾을까 싶어서 염려해 가지고 그렇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했습니다.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복수심이 없었고 또 자기가 어찌되느냐 염려하는 거 없었고 다만 그 사람들이 이 잘못으니까 하나님 앞에 징계받겠다 해서 그 사람들 위해서 기도한 그것이 자기 양심생활한 증거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가 이제까지 많은, 말씀을 배웠는데 그 말씀은 뭐할라고 배웠습니까? 우리 마음이 그게 옳다 인정하고는 옳다 인정하는 그대로 살라고 하는 그 마음이 있어야 되지 아무리 교훈을 많이 배웠고 성경을 아무리 알고 한다 해도 양심 빼버리면 그 사람은 생명 없는 시체와 같습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는 아무 소용이 없고 지식에 대해서 아무 소용 없어.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옳게 바르게 해 보자.
요 말씀대로 바로 해 보자.'요거 없으면 다 사망이요 그거 없으면 전부 자살 행위입니다.
교회 주변을 종전과 같이 그렇게 깨끗이 해서 봉사합시다. 내가 새벽으로 혹 이래 가 보면 요새 좋은 거 가르치요. 학생들이 나와 가지고 국민학생들도 나와 가지고 혹 자기 주변에 있는 걸 자꾸 쓸고 이렇게 이래 하는데 그것이 뭐이냐? 그거 참, 박 대통령 죽었지만 나는 박대통령 인정한다고 조롱을 많이 받았어요.
나는 지금도 그를 존경합니다.
`새마을 운동이 뭐 담배꽁초 줍는 게 새마을 운동이라, 또 자기 집에 쓰는 게 새마을 운동이라. 그까짓 걸 새마을 운동이라, 시시하다.' 시시한 거게서 사람의 마음이 고쳐지요. 거기서 사람의 마음이 고쳐져. 그거 새벽 일찍 나와 가지고 이래 아이들 소제하는 거기에서 마음이 고쳐져. 그분은 심리학을 공부를 안했을 건데 심리학자들이 많아 그런지 어쨌는지 어쨌든지 그는 위대한 일 했습니다.
그래 가지고 뭐 나하고 원수된 사람 많소. '저거 박정희 지지한다' 이래 가지고 원수된 사람 많아.
어제는 또 O대통령에 대해서 그래, 뭐 별 소리 다 있지. 박 정권도 그거 그때 내가 듣기에는 `독일에 돈을 얼마를 쌓아놨다. 뭐 불란서에다 쌓아놨다. 또 뭐 집에다가 쌓아놨다. 그 돈 굉장히 많이 쌓아놨다. 또 일본에도 저축해 놨다. 또 무슨 회사 큰 회사 지금 무슨 회사 그 회사는 내나 영부인 회사다.' 이 떠들어 쌓았지만 그분 딱 죽고 난 다음에 그 자녀들 지금 돈 한푼도 없습니다. 꼭 우리와 같은 서민으로 살고있어. 돈 한푼도 없어. 다 그렇게 거짓말을 듣는 그 자가 망하는 것입니다. 이 귀 이것이 참 그거 망하고 흥하는 것이오. 그 말을 같은 한 자리에 들어도 옳게 듣는 사람은 복이 있고 꼭 망할 놈은 거짓말 하는 거 꼬우는 거 남 훼방할 그것만 잘 듣습니다.
그랬는데 뭐 그래 죽고 났으니까 그거 저축한 것 있으면 다 알 것 아니겠습니까? 없어. 깨끗이 살았어. 그게 단점은 뭐이냐 하면 자격이 있어도 자기 친척을 사람을 쓰면 이거는 거석하다고 오해할까 싶어서 자기 친척, 박 대통령으로 인해서 자기 친척들이 출세한 사람이 하나도 없어.
지금 O대통령도 그 처음에 정권을 잡을 때에 자기 처남이 들어서 그 배후에 다 이래 가지고 역사했지만 그 사람이 지금 도무지 나타나지를 안하고 있어. 그 뭐 자기 아내가 자꾸 하는 거야 어쩌겠소? 교역자 쳐놓고 아내의 사람 안 되는 사람 하나도 없어. 안 되는 사람 없어, 다 아내가 갈강거려 가지고, 성자들도 다 아내의 사람이 돼 가지고 그런데 아내가 들어서 그렇고 또 저거가 알고 벌써 알고 기어서 이거 해 주는 그걸 어떻게 할 것이요? 그거는 어짤 수가 없는 거라.
그래도 언제든지 우리가 모든 걸 정평 정가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뭐 그 사람이야 이번에 얼마 열 달 남았다 하던가, 열 달 남았는데 열달 뭐 장기 정권을, 열 달 넘고 나서 그 사람이 이양을 안 하면 그것은 그때 가서 우리가 좀 이상하게 볼 수밖에 없지. 그러나 열 달 이양만 하면 그이 할 일 다 하고 간다 말이오. 또 뭐 지금 여당이 정권 잡는거야 그것이야 뭐 누가 그렇게 안 할 사람 누가 있겠소? 또 그래야 자기 신변도 보호가 되지.
이러니까 우리가 뭣이든지 속에, 속에 그 사욕이라는 것이 없어야 들을 때도 바로 들리고 볼 때도 바로 보고 이제 또 말도 바로 할 수가 있지 속에 자기라는 사욕이 있으면 안 돼. 하나님을 자기 속에 모셔서 아무 그것 없이, 하나님 첫째 사랑하고 둘째로는 진리 방편 사랑하고 이라면 모든 게 다 바로 돼져요.
예수 믿는 사람이 바로 믿으면은 이 바로 믿는 사람을 누가 해하겠소? 천하가 달라들어도 해하지 못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