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04 21:54
양심
1987. 4. 15. 밤 <수>
본문:마태복음 6장 22절∼23절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뇨
여게 “눈은 몸의 등불이니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눈이 나쁘면 온 몸이 어두울 것이니 그러므로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하겠느냐” 하는 이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곧 눈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마음의 눈.
그걸 어데다가 근거하고 마음의 눈이라고 하는고 하니 “보물 있는 그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하시고 그다음에 연해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래서 여게 눈을 인용해서 말한 것은 마음의 눈을 가르치기 위해서 인용하신 것입니다.
눈은 온 몸을 밝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눈이라는 그 지체를 두셨는데 만일 눈이 병신되면 온 몸은 다 더듬고 어둡습니다. 눈이 밝으면 손이 눈을 가지지 안해도 손도 밝고 발도 밝고 자기 모든 행동은 다 밝은 행동을 할 수 있고 눈이 병신되면은 전신은 다 어두운 행동을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마음에는 여게 빛이라고 “그 빛이 어두우면 얼마나 어둡겠느냐” 이렇게 빛으로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타락한 사람들의 빛을 가리켜 말합니다.
타락한 사람들에게는 영은 죽어서 시체가 되어 있기 때문에 아무 기능이 없고 다만 그 사람에게는 빛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의 눈 곧 양심임을 가리킵니다.
양심은 마음의 눈이요 그 사람의 빛이 되기 때문에 영이 중생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 마음이 자기의 전 움직임을 통치할 때에 그 움직임은 제대로 제 구실을 할 수가 있고 만일 그 양심을 쓰지 안하면은, 마음의 눈 그 양심을 쓰지 안하면 그 사람의 생활은 전부가 다 삐뚤어지고 흐리게 됩니다.
그래서 양심은 마음의 눈이라, 또 자기에게 있는 빛이라 그래 여게 이렇게 두 가지로 말했습니다. 양심은 마음의 눈인데 곧 심신의 눈이라, 양심은 심신의 눈이라, 또 양심은 그 사람의 빛이라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육체의 눈이 어두우면 온 몸이 어둡고 육체의 눈이 밝으면 온 몸이 밝은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처럼 그 사람의 양심이 밝으면 제대로는 밝은 생활 할 수 있고 또 양심이 병들었으면 그 생활은 다 어둡게 됩니다.
이래서 안 믿는 사람은 안 믿는 사람대로의 양심을 쓸 때에 그 사람의 모든 행위가 안 믿는 사람으로서는 밝은 행위를 할 수가 있고 또 믿는 사람은 신앙 양심을 쓸 때에 믿는 사람으로서의 밝은 행동을 할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오늘 밤에는 양심에 대해서 좀 생각해 볼라고 합니다. 첫째로 {디모데후서 1장 3절에 보면 바울이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때부터 섬겨오는 하나님이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는 것은, 하나님을 우리가 섬기는 것은 양심으로 섬기지 안하면 하나님은 섬길 수 없습니다.
사람이 아무리 구속받은 이 은혜를 인해서 하나님을 마음으로 행동으로 모든 물질로 이렇게 아무리 섬긴다고 해도 양심을 빼놔 버리면 그것은 다 헛되고 하나님 섬기는 일은 안 됩니다. 요걸 기억합시다. 믿는 사람이 어떤 그 신앙 행위를 해도 양심을 써야 자기가 하나님을 섬길 수 있지 양심 쓰지 안하면 하나님 섬긴다는 것은 다 거짓부리가 되고 맙니다.
자기가 전도를 하든지, 무슨 물질을 바치든지, 기도를 하든지, 성경 연구를 하든지, 무슨 일을 하든지 양심을 써서 양심으로 하지 안하면은 다 그 일은 헛일이 됩니다. 양심으로 안 하면 다 헛일이 됩니다.
사랑하는 것도 양심으로 하지 안하면 그 사랑도 다 거짓부리요. 다 외식이요 또 자기가 말을 하는 데도 양심으로 말을 하지 안하는 말은 사람 듣기에는 그 말이 쓸모 있는 말 같지마는 아무리 성경 말씀을 한다고 해도 양심으로 하지 안하면은 그건 소용 없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봉사한다 할지라도 양심으로 봉사하지 안하면 그 봉사는 다 외식이요, 속이는 것이요, 가증스러운 것이요, 다 그것은 믿음에는 나아가지 못합니다. 사람은 속이고 꼬우고 할지라도 하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무엇이든지 양심으로 해야 되지 자기 그저 사람이라는 것은 이성 비판으로도 할 수가 있고, 욕심으로도 할 수가 있고, 또 습성으로도 할 수가 있고, 자기는 어떤 뭐 계획이나 동기나 뭐 그런 걸 가지고 얼마든지 선한 일을 할 수가 있고 신앙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해도 양심으로 안 하면 헛일입니다.
그게 전부 외식입니다. 눈먼 사람들이 볼 때에는 그것이 다 그럴듯 한 것 같지마는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전부 속이는 일이요 다 가증스러운 일이 됩니다.
그러기에 “청결한 마음으로 조상 때부터 섬겨오는 하나님이라” 그러면 하나님 섬기는 것도 양심으로 섬겨야 되지 양심 빼놓고는 하나님을 섬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디모데전서 1장 19절에는 보면은 “양심을 버린 사람은 그 믿음이 파선한 믿음이라” 이랬습니다. 양심을 버린 사람은 그 신앙은 파선이라, 파선한 것이 됐다, 배가 깨졌다 말입니다. 배는 있지마는 배가 깨졌으니까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양심이 없는 양심으로 하지 않는 그런 모든 신앙 행위는 다 그것은 모두가 다 실패라 그말입니다. 양심 없는 신앙, 양심으로 안 하는 신앙 생활은 헛일이라, 양심을 버린 믿음은 파선한 배라, 깨어진 배라.
그러기에 사도행전 24장 16절에 하나님의 심판과 부활을 소망하는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양심에 거리낄 것이 없도록 하려고 애를 쓴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물론 다른 사람의 눈도 봐야 하고, 다른 사람의 귀도 봐야 하고, 또 다른 사람의 입도 생각하지 안하면 그 처세하는 일이 매우 어리석은 일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보다 자기 양심에게 정죄받지 안할라고, 양심에 책망받지 안할라고, 양심에게 인정받을라고 하는 이것이 없으면, 양심에 인정받고 양심에게 찬성받고 양심에 거리끼지 안하도록 할라고 애를 쓰지 않는 사람이면 다 외식하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인간의 비밀을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는 죄인이 의인을 감옥에 가두고 죄인이 의인을 심판하고 의인이 애매하게 정죄받는 일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법은 어두운 줄 알기 때문에 그저 나타난 결과만 보고 동기가 암만 좋았든지 나빴든지 방편이 좋았든지 나빴든지 결과가 나쁘면 나쁘다고 판정하고 결과가 좋으면 좋은 것으로 이렇게 판정하기 때문에 인간의 하는 것은 다 껍데기 보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과 부활 영생의 나라를 바라보는 사람들은 많은 사람들의 눈이나 귀나 입보다도 자기 속에 있는 양심에 거리끼지 안할라고, 양심에 책망받지 안할라고, 양심에 인정을 받을라고 애를 쓰는 것이 그것이 믿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모든 사람들의 중론을 매우 적은 것으로 여긴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기에 우리는 신앙 표준을 어떻게 할 건가? 물론 신구약 성경 말씀의 법도대로 우리는 신앙 생활 합니다. 그러나 이 법도로 지키는 것도 하나의 껍데기 윤곽이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대로 지키는 그 속에 수많은 죄악의 더러운 것이 가뜩 채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말씀대로 행하는 이 모든 신앙 행위에는 성령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다 믿음이 안 됩니다. 성령이 인정하지 않는 것은 다 멸망이요 구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성령님께 인정을 받을라고 하면 먼저 그 양심에 인정받은 것이라야 성령에게 인정받을 수 있습니다.
양심에 인정받은 것 중에 성령의 인정을 받는 것도 있고 못 받는 것도 있고 하나 양심에 인정받지 않는 것은 전부 그것은 다 멸망이지 성령님에게는 가지를 못합니다. 그래서 일단 양심에 인정받은 후에 성령님의 인정을 받고 그라면 그것이 믿음이 돼서 다 영생이 돼 버립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누구의 무슨 눈 귀 입 그런 중론보다도 자기 속에 하나님이 인생의 빛으로 지어 주셨고 마음의 눈으로 지어 주신 양심이 있기 때문에 양심을 표준해서, 신앙 양심을 표준해서 신앙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성공이 되면 영감 행위가 됩니다.
그러기에 영감 행위에 나아가는 데는 양심 행위를 통과한 후에 영감 행위에 접하게 되는 것이지 양심 행위 없는 데는 영감은 천리 만리 멉니다. 거기는 상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심의 인정받지 못한 그것을 성령님 앞에 가면은 소멸되기 때문에 성령님은 만나지 못합니다. 자기 양심에 거리낀 것을 가지고 아무리 성령을 맞이할라 해도 성령이 오면 자기는 소멸해야 되기 때문에, 자기는 죽여야 되기 때문에 성령님은 피하시고 오시지를 않습니다.
양심으로 아무런 흠점이 없도록 양심이 책망할 것이 없도록 양심에 인정을 받은 그것이라야 비로소 성령이 와서 살펴볼 수 있고 성령이 거게 착수할 수 있고 인계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또 베드로전서 3장 16절에는 보면 양심을 쓰지 안하면 사람들에게 비방받고 욕 얻어먹는 그런 것을 벗어나지를 못합니다. 우리가 양심을 써서 양심에 가책될 것이 없이 양심이 우리를 인도하는 그 인도를 따라서 행동하는 그 행동에서만 우리는 이 세상에 빛을 나타낼 수가 있고 다른 사람에게 덕을 세울 수가 있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모든 훼방과 비방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양심을 찾지 안할 때에는 우리는 완전히 비정상으로 비정상의 사람이 되기 때문에 생각하는 것도 듣는 것도 보는 것도 전부가 다 아주 판이하게 삐뚤어져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안 쓰면 우리는 세상에서 빛 생활은 못 합니다.
히브리 9장 14절에는 보면 양심을 써야, 양심을 써서 양심의 인도를 받아야, 양심의 인도를 받아야 죽은 행실을 깨끗게 할 수가 있고 또 하나님을 섬길 수가 있지 양심의 인도를 받지 안하면 죽은 행실은 살려낼 도리는 없습니다.
예수 믿는 것은 양심으로 믿어야 되지 양심으로 믿지 않는 것은 다 헛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회개도 양심에서 나옵니다. 양심을 써야 회개가 돼지지 양심 쓰지 안하면 그 회개가 나오지를 아니합니다.
또 양심으로 섬겨야 하나님이 그 섬김을 받지 양심으로 섬기지 안하는 섬긴 것은 다 찌꺼기 가지고 섬기는 것입니다.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는 섬기는 것은 다 찌끼 가지고 하나님 섬기는 것. 찌끼. 찌꺼기. 쓰지 못할 찌끼 그런 것 가지고 하나님 섬기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양심을 빼버리면, 양심을 빼버리면 우리 육에게 제일 참 제일 진이 되는 속에 제일 귀한 알맹이는 다 빼버리는 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 빼고 하나님 섬기는 것은 다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고 가증스럽게 하는 것이고 하나님 앞에서 교만하고 참람한 짓이지 양심으로 하지 않는 그것은 하나님을 모욕 주는 것이요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 됩니다.
우리 이 영과 육이 있는데 영은 그는 딴것이고 우리의 육이라는 것은 심신을 가리켜서 육이라 하는데 이 심신 육에게 여러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정신도 있고, 또 모든 속성도 있고, 총명도 있고, 이성도 있고, 모든 기억성도 있고, 정서도 있고, 욕심도 있고, 의지도 있고, 뭐 별별 것이 마음의 요소도 우리 몸의 요소가 성경에 백체라고 말했는데 그것도 백체도 더 되지마는 그래 말한 것처럼 우리 마음의 요소는 몸의 요소보다 훨씬 많습니다. 그런데 그중에 제일 진짜가 뭐이냐? 제일 진짜가, 제일 진짜가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을 빼놓은 그 모든 마음이나, 뜻이나, 성품이나, 정성이나, 힘이나, 또 자기의 이성이나, 뭐 감정이나 어떤 걸 다 이걸 폭발시켜 가지고 하나님을 섬긴다 할지라도 양심을 빼버리면, 생명 없는 몸은 시체입니다. 생명 없는 몸은 시체와 마찬가지로 양심을 빼버리면 그 마음과 몸에 오는 모든 행동은 다 찌끼요, 더러운 찌끼지 하나님은 받지를 못합니다.
사람에게 대접한다 하고 사람에게 먹고 나머지기 찌끄러기 썩은 것 똥오줌을 가지고 대접하면은 누가 그 대접받겠습니까? 찌끼 똥오줌을 가지고 어른 대접하는 거와 꼭 같은 것입니다.
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양심 빼놓고 하는 그런 것은 다 가증스러운 것이요, 외식이요,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요, 등신 어두은 것들에게 속여서 그래 해도 아무도 모르고 하니까 다 그렇게 그저 통과할지라도 그거는 마귀 역사가 통과되지 성령의 사람들도 그래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심신에게는 제일 중요한 것이 양심입니다. 이 육에게는 제일 중요한 게 양심입니다. 제일 진짜가 양심입니다. 제일 수지가 양심입니다. 제일 머리가 양심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람의 심신이 양심을 왕으로 삼고, 양심을 지도자로 삼고, 양심을 어른으로 삼고, 양심을 대장으로 삼고, 양심을 심신의 주인으로 삼고 이렇게 양심 통치하에 있는 그 마음과 몸은 그것이 불신자라도 불신자로의 가치 있는 생활 할 수 있고 믿는 사람이면 믿는 사람으로서의 가치 있는 생활 할 수 있습니다.
불신자의 양심이 다르기 때문에 그 양심은 영원한 것은 이루지 못하지마는 세상에 썩을 것은 이루어 나갈 수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신앙 양심을 써서 신앙 양심이 그 모든 마음의 정성이고, 욕심이고, 감정이고, 이성이고, 총명이고, 명철이고, 지혜고 자기의 모든 것을 다 이 양심이 통치해서 양심 통치 아래에서 복종하는 것으로 해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그 생활은 다 엉망이요 다 멸망입니다.
이제 양심 통치를 받는 그것이 영감 통치를 받으면 이제 그것이 믿음이 되고 구원이 돼 버리고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태복음 6장 22절에 “양심은 마음의 눈이라 빛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양심은 마음의 눈이요, 마음의 빛이요, 양심은 육의 생명입니다. 육의 힘이오. 생명입니다.
모든 과거에 각국에 있는 모든 충렬사들, 충렬사들 그들의 그 충렬의 힘이 어데서 나왔는가? 또 사상가들이 그 사상에 자기 생명을 애낌 없이 바치는 게 어데 나왔는가? 그것 다 양심의 힘입니다. 그 사람들의 양심의 힘이오.
우리 기독자들이 순교당하는 것도 다 인적 요소로서는 신앙 양심의 힘입니다.
양심의 힘이 아니면 다 흔들립니다. 양심의 힘이라야 가도 가도 강해지지 흔들리지 안하지 양심의 힘이 아닌 것은 서로 자가당착으로 마음의 요소 몸의 요소 저거끼리 싸워서, 저거끼리 싸워서 마지막에는 다 내란 나 가지고 실패하지 결단코 순교나 순생이나 하지를 못합니다.
양심의 통치하에서 양심으로, 자기 양심이 맞고, 자기 양심에 맞고 양심이 인정하고 양심이 찬성하고 양심에 조그매라도 거리낌이 없는, 이렇게 양심적인 그 모든 신앙 행위라야 순생도 하고 순교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마음의 눈이라, 몸의 눈이라, 양심은 육의 눈이라, 양심은 이 육에 있는 하나님이 주신 빛이라, 양심은 육의 생명이라, 양심은 육의 힘이라, 양심은 육의 모든 통치하는 그 정권자요 통솔자요 머리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어떤 행동해도 양심 빼놓고 행동하는 것은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여깁니다. 양심으로 하지 않는 거, 모두가 다 합해 가지고 양심이 찬동하고 양심과 함께, 양심이 통솔하고 양심이 그 일에 같이 해서 양심이 머리가 돼 가지고 한 그것이라야 하나님이 받으시지 그렇지 안하면 받지 않습니다.
제가 오층에서 두꺼비를 그때 길러봤는데, 두꺼비를 몇 마리 길러봤는데 두꺼비는 뭣 먹고 사느냐 하면은 지렁이 먹고 삽니다. 지렁이를 먹고 사는데 오층에 나무를 기르니까 지렁이가 많이 있어서 그걸 먹는데, 제가 지렁이를 죽은 지렁이를 줘 봅니다. 죽은 지렁이는 암만 있어도 안 먹습니다. 굶어죽지 죽은 지렁이는 안 먹습니다. 산 것이라야 먹지 죽은 거는 먹지 안해.
그래 내가 그걸 보고, ‘이런 것도 이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과 몸을 바친다고 할지라도 생명이 없는, 양심이 없는, 양심으로 하지 않는 그 헌신, 그 충성, 양심으로 하지 않는 그 기도, 양심으로 하지 않는 그 모든 희생 봉사, 양심으로 하지 않는 연보, 양심을 빼놓은 것은 하나님은 받으실 수가 없다 하는 것을 제가 그것을 그때 보고 혼자 군담으로 생각하고 말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조상 때부터 양심으로 섬겨오는 하나님” 말했습니다.
양심이 아니면 하나님 섬기는 게 헛일입니다. 그러기에 기도하는 것도 그렇고, 전도하는 것도 그렇고, 연보하는 것도 그렇고,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도, 그 읽는 것도 읽지마는 양심으로 읽지 안하면은 성경에는 자기는 한 지식으로 교만할 정도지 복음으로는 받지 못합니다. 꼭 양심을 써서 읽어야 그 성경에 자기는 다스림받고 성경이 그를 인정하시고 은혜를 주십니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3장 21절에는 “착한 양심은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그렇게 말씀했어. 착한 양심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그러면 하나님 만나러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양심이 찾아가고 양심의 인솔을 받으면 양심의 인솔을 받는 그 마음도 하나님 만날 수 있고, 생각도 만날 수 있고, 모든 감정도 만날 수 있고, 속성들도 만날 수 있고, 이성들도 만날 수 있지마는 이 양심을 앞잡이 세우지 않고는 하나님 만나는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데에는 양심을 앞잡이 세워 놓고 양심의 인도를 받아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마태복음 5장 8절에는 “마음이 정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양심으로라야 하나님 만나지 그 양심에 통치받는 그 마음이라야 하나님에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양심에 통치받는 그 언행심사의 행동이라야 자기의 인격의 수지가 거게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지, 예를 들어서 만일 부부끼리 사랑한다 할지라도, 생각해 보십시오. 부부끼리 사랑해도 양심을 빼놓은 사랑이면 그는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어리석어서 받고 있지 양심이 함께 하지 안하고 양심은 외면하고 양심이 동원되지 안하는 그 남편의 사랑을 아내의 사랑을 속아서 받기는 받지마는 그것이 언젠가 나타날 때에는 큰 수치가 되고 욕이 되지 그거 받을 리가 없습니다.
친구간도 그래. 친구간도 양심 빼놓은 사귐은, 양심 빼놓은 사귐은 그 사귐은 다 외식이요 그 상대방을 말할 수 없는 푸대접으로 멸시하고 천대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지 이 양심이 없는, 양심으로 하지 않는, 양심으로 하지 않는 교제, 양심으로 하지 않는 존경 그거 다 놀리는 것이오. 양심으로 높이지 안하는 그거 다 놀리는 것입니다.
양심으로 대접하지 않는 것 그것 그저 다 외식으로 그저 속이는 것이고 하나의 꾀우는 것이지 양심이 들어 있지 않는 그 행위, 사람들이 만일 그 사람의 양심을 안다고 하면은 양심은 따로 두고 그 양심이 하지 않는, 자기 양심이 하지 않는 그 행동을 우리 사람이 안다면 누가 받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양심은 자기 몸에 진짜가, 몸에 진짜가 마음이요, 몸의 진수가 마음이요, 마음의 진수가 양심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몸으로 뭐 어떻게 한다고 해도 마음없는 그 몸의 행동 몰라 그렇지 그보다 더 더러운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마음은 없으면서, 마음은 없으면서 그저 이와같이 입술과 모든 행동과 태도를 가지고 그와 같이 하는 그것을 알고야 누가 그걸 상대하겠습니까? 그 사람이 얘기를 해도 서로 의논을 해도 마음은, 마음은 딴데 두고, 마음없이 겉어머리 고기덩어리만 가지고 자꾸 이와같이 상대한다면 그게 얼마나 멸시하고 얼마나 모욕을 주는 일이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마음의 진수는 또 양심입니다. 그 마음으로 이렇게 어떤 걸 한다 해도 양심이 거기 들지 안했으면 전부 말하자면 알맹이는 없는 찌끼입니다, 찌꺼기요.
사람도 이런데 하물며 하나님이 어떻겠습니까? 그래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모든 어떤 행동이든지 행동할 때에 자기가 양심껏, 양심으로, 양심으로, 양심껏, 양심으로 하나님을 대하지 안한 것이면 하나님을 모욕시키는 것이요 하나님은 상대할 수가 없고 하나님과는 관계를 맺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으로 하지 않는, 양심이 들지 안한, 양심으로 하지 않는 뭐 하나님께 대한 연보라든지, 기도라든지, 또 전도라든지, 봉사라든지, 희생이라든지, 충성이라든지 어쨌든지 양심으로 하지 않는 하나님에 대접은 전부 그거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가 다 되는 것이지 그것이 의되는 것 하나도 아닙니다.
또 인간도 보통 인간을 초월해 가지고 서로 부부간이라든지 부자간이라든지 참 친구간이라든지 그럴 때에 양심은 빼놓고 사귀는 친함, 양심을 빼놓고 그 접촉하는 접촉, 양심으로 하지 않는 그런 인인 관계를 우리가 알면 받겠습니까? 알아도 ‘이놈아, 너도 양심으로 하지 않는 거 나도 양심으로 하지 않는다. 너 양심으로 하지 않는 거 나도 양심으로 하지 않는다.’ 이라지 양심으로 하지 않는 거게 대해서 이 사람은 양심을 가지고 그걸 대해서 한다면은 얼마나 그게 참 모욕된 것이며 얼마나 속은 것이며 얼마나 놀림이 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 섬기는 데에 양심으로 하지 않는 것은 다 헛일이라.
양심은 왜? 우리 몸의 진수는, 몸의 진수는 마음이요, 몸의 진수는 마음이요, 이 말 알겠습니까? 몸의 진수는 마음입니다. 마음없이 몸의 행동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속담에 그런 말 있습니다. 동상이몽이라. 둘이 부부 침대에 누워서 얘기하고 하나마 꿈은 딴꿈 꾸고 있다. 겉어머리 같이 한 자리에 눕고 이라지마는 지금 마음은 딴데 가 있다 말이오. 그러면 그것이 안다면 얼마나 모욕일 것이며 얼마나 또 모르고 대하는 자에게 얼마나 천대 주고 멸시하는 그런 냉대하는 일이 되겠습니까? 몸의 진수는 마음이요 마음없는 몸의 행동은 그것은 그것이 참된 결합은 되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 마음의 진수는 양심입니다. 마음의 진수는 양심이오.
아무리 마음을 들여서 마음을 뭐, 마음을 기울이고 마음에 움직이고 마음도 같이 하고 했다 할지라도 마음 속에 양심을 기울이지 안했으면 다 가짜입니다.
헛일이오. 인인 관계도 그러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밤에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하는 일에 양심을 뽑아버리고 양심으로 하지 않으면, 양심으로, 양심으로 한다 말은 모든 것이 양심과 일치돼 가지고 양심이 통솔해 가지고 양심이 그 모든 선봉장이 되고 모든 주격자가 돼 가지고 양심에게 통솔되어 양심의 인솔 통솔하에서, 양심이라는 이 중보 아래서 양심을 통해서 하나님을 섬길 때에 하나님은 그 섬김을 받는 것이지 뭐 양심을 버리고 빼놓고는 아무리 마음 해 봤자 소용 없습니다.
마음을 다한다 그말은, 마음을 다한다는 것은 네가 양심으로 하라 그말입니다.
마음을 다한다 말은 양심으로 하라 말이요, 양심으로. 마음의 진수는 양심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을 상대할 때에 양심으로 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을 모욕 주는 것이며 업수이 여기는 것입니다. 사람도 압니다. 부모가 뭐라 해도 양심으로 대답지 안하고 양심으로 인정치 안하고 그저 껍데기 입술로만 말만 하는 거 그까짓 거 무슨 소용 있습니까? 자기가 아무리 사랑으로 부모를 섬긴다 할지라도 양심 빼버리면 가치 없습니다.
인간도, 인간도 원하는 것은 양심입니다. 아무리 형제간에 사랑한다 해도 양심으로 사랑치 안하고 양심 빼놓은 그거는 전부 도둑놈이오.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섬길 때에 양심으로 하지 안하면 헛일이라 하는 요것을 단단히 기억을 하고,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나와의 접선되는 데에는, 하나님과 나와 접선되는 데에는 양심이 그 사이에 접선을 시키지 양심 없이는 접선을 못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무한한 충만하심,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나와의 결합이 될 때에 하나님의 그 충만이 내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충만이 내것이 돼요.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는 것은 우리에게 있는 요소 가지고 됩니까? 하나님의 요소와 나와의 연결이 돼 가지고, 마치 수도관에는 물 하나도 없지마는 저수지에 물 있는 것이 수도관으로 다 뽑혀 나오는 거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그 무한하고 충만하심이 우리에게 연결된 그 연결 믿음 가지고 이렇게 뽑혀 나오는 것인데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 연결이 돼야 전지도 되고 전능도 되고 됩니다.
모든 선지 사도 모든 성자 성녀들이 기적과 축복의 결과가 나타나 가지고 보이지 안하는 하나님을 이 땅위에 충만하게 보이게 한 것은 다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나님의 능력이 그들을 통해서 나타났기 때문에 그것 보고 과연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다 보고 찬양한 것입니다.
그러면 그런 사람들이 하나님의 충만이 그 사람을 통해서 나타나는 데에는 하나님하고 연결이 돼야 되는데, 우리의 성공은 하나님과 연결입니다. 우리의 성공은 하나님과 연결이요, 두말 할 것 없이.
신구약 성경은 뭘 가르치느냐? 사람과 하나님과 연결되기를 하나님은 머리요 우리는 몸이요, 그는 주인이요 우리는 성전으로 이렇게 하나님과 우리와 연결되는 이것이 우리의 성공인데, 그러면 우리가 기도하는 것도, 우리가 뭐 회개하는 것도, 또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도, 새벽기도 나오는 것도, 신앙 생활 열심히 할라 하는 것도 다 그 목적이 어데 있느냐? 하나님과 우리와의 결합되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 신앙 전생활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서로 이 연결되기 위해서 하는 것 아닙니까? 연결되는 데에는 하나님 편에서는, 하나님 편에서는 성령이 오십니다. 하나님 편에서 성령이 오시요. 우리 편에서는 양심이 갑니다. 양심과 성령이 둘이 대할 때에 서로 마주칠 수 있습니다. 우리 인적 요소의 양심과 신적 요소의 성령이 서로 이렇게 접선돼 가지고 연결되는데 이 접선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이리 되어지는 것인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인해서 이 접선될 수 있습니다.
접선될 수 있는데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접선시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는 접선할 수만 있게 돼 가지고 있는데 실지로 접선은 뭐이 되느냐 하면은 성령과 우리 양심이 접선됩니다. 그래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양심은 하나님을 볼 수 있다” 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의 대속이 있지마는 실상으로 하나님이 우리하고 연결이 돼야 되는데 연결이 안 되면 안 됩니다. 연결이 돼야 되는데 그 연결이 뭘로 되느냐? 그 연결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이 진리 말씀 가지고 연결되고 그 속에는 영감으로 연결이 되는 것인데 말씀으로 연결되는 것은 이것은 뭐이냐? 우리의 양심을 신앙적 양심으로, 신앙 양심으로 만든다 말이오. 진리 양심으로 만든다.
그러면 불교인의 양심이 따로 있고 기독자 양심이 따로 있기 때문에 기독자의 양심은 신구약 성경 지식에 지배를 받는 것이 양심입니다. 이러니까 이 성경 말씀으로 성경 말씀에게 지배받는 양심이 돼 가지고 이 양심은 자기 심신을 다 통솔해 가지고 대장이 돼 가지고, 앞서 대장이 돼 가지고 이 양심이 성령 만나러 갑니다. 이 양심이 성령 만나러 가 가지고 이 양심이 성령하고 만나 가지고 결합이 됩니다. 하나가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양심이 신앙 양심이 되지 안하고 불교인의 양심 가지고는 성령을 만나지 못합니다. 신앙 양심이라야 이 성령을 만날 수 있는데 신앙 양심은 어떤 게 신앙 양심이냐 하면은 신구약 성경 계시에 복종하는, 계시에 피동되는, 계시에 복종하는 그 양심이 신앙 양심입니다. 신구약 성경에 복종하는 양심, 복종한다고 해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복종해 가지고 복종하는 그 신앙 양심이 될 때에 그 양심 가지고 내나 성령님을 맞이해 가지고, 성령님은 하나님의 본체시요 이 성경 말씀은 하나의 진리입니다. 무인격의 존재인 진리요, 이치요.
이러기 때문에 이런 지식인데 이 지식으로써 우리의 양심이 신앙 양심이 돼 가지고 비로소 성령을 접해 가지고 만날 때에 그때에 하나님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 저녁에 또 한 가지 기억할 것은 어짜든지 우리가 하나님과 무슨 일로 연결되는 것, 회개에 대해서, 회개에 대해서 연결되는 것, 또 우리가 무슨 기도에 연결되는 것, 또 우리가 무슨 행동에 연결되는 것, 우리의 모든 하는 모든 일에 하나님과 연결돼 가지고 하나님과 나와 연결돼 가지고 내가 회사를 경영하는 데 내 회사에 하나님이 오셔 가지고 이 회사를 같이 경영하시고 내가 직장을 가지고 내 언행심사 하는 데 성령님이 나와 함께 하셔 가지고 이 일을 하나님이 성령님이 나와 동행해 가지고 이래 하는 것, 요셉이가 그러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지마는 그 대국에 총리대신 노릇할 때에 하나님과 연결되기 때문에 요셉이 하는 일에 하나님이 항상 함께 했어. 보디발 집에도 함께 했고, 그러기 때문에 안 믿는 사람들도 요셉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 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그렇게 다 연결됐습니다.
연결돼 가지고 했는데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와의 모든 면으로 우리가 연결을 해야 성공이 되겠는데 하나님과 연결되는 데에는 양심을 앞잡이로 내세우고 양심을 인도자로 내세워 가지고 양심의 인도를 따르고 양심의 통솔을 따라서 거게 통솔이 돼 가지고 비로소 하나님과 연결이 되어지는 것이지 양심 빼버리면 하나님과는 절대 연결을 못 합니다.
이래서 오늘 밤에, 하나님과 연결에는 양심을 통해서 양심에게 심신이 주권을 맡기지 안하면은 성령과 연결을 못 한다. 인간이 하나님과 결합할라 하는 데에는 몸은 마음이 통솔하고 또 마음은 양심이 통솔하고 할 때에 양심이 통솔한 그 모든 심신은 성령이 통솔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 결합이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내가 섬기는 데도 양심 빼놓으면 하나님이 그 섬김을 받을 수 없는 것, 양심으로 섬기지 안하면 헛일인 것, 그러기에 양심으로 기도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양심이 또 아니면 하나님과 결합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은 뭐인가? 양심은 뭐 그거는, 양심이라 하는 것은 무형의 존재이면서도 아주 견고한 것입니다. 그러면 양심은 어떤 것인가? 양심은 우리에게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식,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지식, 그 지식에 지배를 받아 가지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지식대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그 지식대로 옳게 바르게 할라 하는 그것이 양심입니다. 옳게 바르게 할라 하는 거, 이거 별 뭐 형체 가진 게 아니오.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이제는 받아서 우리가 알게 됐고, 성경을 많이 알든지 적게 알든지 그러기 때문에 성경을 많이 안 사람의 양심은 장성하고 또 성경을 적게 안 사람의 양심은 어립니다. 그 범위가 좁습니다. 성경을 많이 아는 사람의 양심은 범위도 넓고 장성합니다.
이러기에 양심은 뭐이 양심이냐? 자기가 알고 있는 성경 요 말씀을 알고 있기 때문에 요 성경 말씀을 알고 있는 요 말씀대로 요대로 어떻게 하면 요 말씀대로 하겠느냐? 요 말씀대로 하겠느냐? 요 말씀과 일치하겠느냐? 요 말씀대로 자기가 그대로 이 말씀대로, 말씀과 일치된 그 행동을 할라고 하는, 하고자 하는, 그걸 하지 안하고는 견디지 못하고 그걸 할라고 애를 쓰는 그것이 양심입니다. 신앙 양심입니다. 그거 없으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이 어짜든지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내가 거리낌 없이 하겠다. 내 마음에 가책 없이 내 마음에 요게 옳다, 요 성경 말씀 요게 옳다. 요게 옳다 하는 그게 양심입니다. 요게 옳다 하는 그대로 하면 양심이 자라고 양심이 권세를 얻게 되고, 요게 옳다 하는 그것을 만일 그 사람이 그대로 하지 안하면 양심은 거게서 권위가 떨어지고 양심은 병듭니다.
이런데 만일 그거 성경에 보면은 양심이 화인을 맞았다 하는 그말은 있는데 화인 맞았다 말은 요 성경 말씀은 요렇게 해야 되겠는데 할 때에 ‘야, 네가 이렇게 하면은 지금 물질이 큰 낭파당한다. 이러면 돈을 수많은 돈을 네가 손해를 봐야 된다.’ 요럴 때에 돈 손해보기 싫어서 그때에 양심으로 말하면 요렇게 꼭 할 수 있고 자기에게 관련된 일이 아니고 남의 일 같으면은 요런 일은 어떻게 해야 되나 요런 일은 요렇게 판단해야 된다 이럴 건데 자기에게 떡 들어붙여 놓으니까 물질 문제가 있으니까 그대로 하지 못하고 그때에 자기 양심을 꺾고 물질 위주로서 행동하게 됩니다.
그것이 뭐이냐? 그 양심이 물질에 화인을 맞았습니다. 그 양심은 물질의 양심이 돼 버렸어. 이러니까 그라고 난 다음에 나중에 그게 마비가 돼 놓으면 그 사람의 양심은 물질 위주로 움직입니다. 권세 위주로 움직입니다. 그 양심이 자기 위주 자기 중심, 자기 중심 자기 위주로 움직이면 자기에 화인을 맞은 것입니다.
자기라는 화인을 맞았습니다.
양심이라는 것은 그 사람의 가지고 있는 그 지식을 활용해서 자기 가진 지식대로 옳게 바르게 할라 하는 그것이 양심입니다. 불교인은 불경, 자기가 불경 지식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꼭 불경대로 틀림 없이 불경과 꼭 들어맞게 불경대로 할라 하는 그것이 불교인의 양심이요. 기독자의 양심은 신구약 성경 지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 지식대로 요대로 할려고 하는 그것이 신앙 양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요 양심으로라야 하나님을 섬길 때에 섬김을 받고 또 요 양심으로라야 하나님과 결합을 가질 수 있다. 요것은 마음의 진수요, 마음의 진수요 다른 것은 그 마음에게 모두 다 소속한 것들이라.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데도 양심을 뽑고 섬기는 것은 진수를 뽑고 섬기기 때문에 하나님을 찌끼 가지고 대접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런 더러운 대접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우리가 사귀는 데에도 양심을 뽑고 사귀는 데에는 하나님이 가증스럽게 자기 진수도, 자기 진수도 바치지 안하고 이 껍데기 가지고, 껍데기 가지고 하나님을 상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는 가증스러운 일을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 사람에 대해서 그걸 갚으면 즉시 소멸해 죽여야 되기 때문에 하나님은 멀리 피해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양심으로 신앙 행위를 하지 안한 행위에는 하나님은 보지 못합니다. 만나지 못해. 보지 못합니다. 양심으로 할 때에 하나님은 상대할 수가 있고 하나님은 만나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