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11:20
믿음
1981. 2. 28. 새벽 (토)
본문:히브리서 12장 2절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이 말씀은 특별히 세 가지를 우리에게 강하게 해 주시고 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은 믿는 사람의 주가 될 수 있다 하는 말입니다. 주라는 말은 책임을 지고 구원하시는 것을 가리켜서 주라 이러는데, 택함을 입고 부르심을 입은 사람들이 주님이 책임을 지시고 구원해 주시는 그 구원을 받는 법칙이 무엇이냐? 택함을 입었고 중생을 입어 부름을 입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면 다 예수님께서 책임지는 구주로 역사할 수가 있느냐? 아닙니다. 책임을 지시고 구원의 주로 역사하실 수 있는 길은 믿어야 됩니다. 믿지 않으면 안 됩니다.
“너희들이 나를 주여 주여 하면서 내가 하는 말을 너희들이 듣지 아니하니 내가 너희들에게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느냐” 말씀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요한계시 17장 10절 이하는 “부르심을 입고 빼심을 얻고” 그다음에 “진실한 자들은 이기리로다” 거기는 또 진실이라는 말로 표시했습니다.
“믿음의 주요” 믿는 사람이 전능하신 주님이 전지하신 주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지금도 영원도 있는 것이 다 당신의 것입니다. 또 당신이 모든 것을 지극히 작은 것까지 다 섭리하고 계시는 주님이신데 다만 믿는 자에게 제한된 자유지마는 자유를 줬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이 섭리와 얼핏 보면 모순된 것 같은 그런 것을 이해 못 하기 쉽습니다. 그러면 모순된 것같이 보여지는 것은 그 범위를 측량하는 데 있어서 잘못 측정한 것입니다. 그 범위를 바로 측정하면 다 맞는 말이 됩니다.
그런고로 믿는 사람은 이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고, 알지 못하심이 없으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셨고, 모든 것을 당신의 것으로 가지고 계시고, 또 당신이 홀로의 그 능력을 가지고 이렇게 하실 때 아무도 항거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의 자유는 항거를 합니다. 하나님이 아무리 하고 싶어도 믿는 사람이 이 자유를 가지고 반대를 하면은 안 됩니다. 그것은 궁극적인 자유는 아닙니다. 그러나 어느 한계로 제한해 놓고는 우리가 마다 하면 안 됩니다.
마치 어른이 어린아이를 기를 때에 철이 없으나 그것을 강제하면 병들고 죽을 것이기 때문에 어린것이 고집을 부리고 원하면 온 가족이 그 아이를 항거 못 합니다, 저 하자 하는 대로 해야 되지. 이래도 실은 그 아이는 부모네들이 이사가면 이사 따라가고 이러면 이러고 저러면 저러지 뭐 제가 부모를 능가할 만한 그런 주권을 가진 것은 아니지마는 어느 범위 내에서는 그것이 아주 권세가 제일 있는 것같이 보입니다.
그 모양으로 주님의 사랑의 이 구속에서 제한된 자유를 줘서 하나님이 이 자유를 가지고 이 자유를 살려서 구원하려고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거기는 좀 안 되는 것같이 그렇게 보여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외에는 당신은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원할 때에는 하나님도 원하고 우리도 원하고 둘이 마주 원하는 그 일은 피조물로서는 아무도 항거를 못 합니다. 그 일은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믿는 사람에게 이 전능하시고 전지하시고 우리를 사랑하시되 생명을 주시기까지 사랑하시는 이 주님 앞에서 무엇 때문에 성경에 기록한 이 소원이 이루어지지를 않는가? 왜 주님이 우리 주가 되셔 가지고 역사하시지를 못하는가? 그것은 믿음의 주이기 때문에, 믿음의 주님이신데 우리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음이 없는 것은 막바로 하나님을 대항하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에게 주가 되시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믿음의 주라” 믿음이 있을 때에만 주님은 우리를 책임질 수 있고 믿음으로 된 그 일에만 책임질 수 있지 믿음과 연결이 없는 그런 일은 주님은 책임을 지지 않습니다.
또 그다음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러면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에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주님이 우리를 책임을 지시면 어느 정도 책임을 지시느냐? 온전에까지 책임을 지십니다.
목회자로는 온전한 목회자가 되게 하시고, 사업가로는 온전한 사업가가 되게 하시고, 무슨 시작한 일이면 그 시작을 온전히 성공을 하도록 그렇게 하십니다.
애초에 안 될 일은 시작시키지를 아니합니다. 왜? 당신을 따라 움직이니까 당신이 시작하고 뒤에 후회하는 그런 일을 하시지 안하기 때문에 시작부터 헛된 일은 시작을 안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책임을 지면, 믿을 때에 책임을 지시면 어느 정도 지시느냐? 온전을 이루기까지 책임을 지신다. 그다음에 하나 더 말하는 것은 주님이 책임을 지시고 이루어 주시는 데에 자기가 참고 견디기는 어느 정도 참고 견뎌야 되느냐? “그 앞에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 앉으셨다” 그말은 승리하고 하나님이 베푸시는 그 영광의 보좌에 앉았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이것은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내게 주셨다” 마태복음 28장 17절 이하에 보면 말씀해 놨습니다. 하늘에 있는 권세와 땅에 있는 권세를 다 내게 주셨다 하는 이것이 아버지 우편에 앉았다는 말입니다.
이래서 이 십자가의 고난이라 이 말은 자기가 무엇을 믿든지 믿는 데는 자기로나 어떤 피조물로서나 이루어지는 그 일이 완전히 끝장나 버려야 됩니다.
자기가 그 일을 자기를 통해서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자기가 하는 그 일이 완전히 빠사져 버려야 됩니다.
자기가 하는 그 일이 자기가 남아 있을 때에는 ‘이는 하나님이 해 주시지 내가 할 수 없고 내가 해서는 안 된다. 나는 할 수 없다.’ 말로는 그렇지마는 자기가 완전히 빠사지기 전에는 거게다가 소망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만 전적 믿는 일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다니엘을 꼭 사자구덩이 넣어야 그 원수를 멸할 수가 있고 다니엘의 생명을 구출해 가지고 총총리가 되도록 그렇게 하실 권능이 없었더냐? 그는 하나님은 권능이 있지마는 다니엘이 믿는 데에는 사자구덩이 들어갔을 때에 비로소 인간의 할 공작은 하나도 없어졌다는 것이 이제 확인되고 완전히 빠사져 버렸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나왔으니까 하나님이 하셨다고 인정을 하지, 만일 그러고 난 다음에 어떤 방편을 써 가지고 사자구덩이 들어가지도 안하고 어떤 방편을 써 가지고 했다고 하면 ‘전적 그것은 하나님이 하신 것 아니고 인간도 그렇게 혹 그렇게 할 수 있는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지 않느냐?’ 이러기 때문에 피조물에 대한 그 소망 그것이 완전히 끊어지지 아니했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이루어지지를 안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의 관련된 그 일은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뭐 그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런 것이 그 중량대로는 완전히 절단이 나서 거게서 절망이 돼져야 됩니다.
완전히 절단나 가지고서, 뒤에 되고 난 다음이라도 그것 때문에 됐다고 할 만한 그런 아무 그 마귀란 놈이 아무리 불한당 마귀가 ‘야, 하나님이 해 주신 게 아니라 이것 이것 때문에 이리 이리 해서 됐다.’ 이렇게 말을 하는 그런 말을 하려고 해도 걸터리가 없으니까 그렇게 마귀란 놈이 꾀울 수 없는 그런 단계를 통과해 가지고 비로소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성공해 주시는 것은 인간 성공이 완전히 뿌숴질 때에, 뿌숴지면 뭣이 됩니까? 마귀는 성공했고 실패는 성공했습니다. ‘이제는 실패됐다. 이제는 안 된다.’ 완전 실패, 실패가 완전히 성공을 했고 멸망이 성공해서 ‘이제는 뭐 완전히 멸망 다 됐으니까 뭐 바라볼 뭉텅이도 없다. 뭐 생각할 것도 없다.’ 완전히 멸망이 되고 완전히 절단이 되고 마귀가 완전 승리를 하고 이제는 바라볼 모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이야 죽은 자가 죽어서 송장된 것이 살아나는 것처럼 이는 다시 바라볼 아무것도 없었고 이것은 다른 무엇은 될 수 없다고 되는 그 단계를 하나님이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왜 기다리느냐? 그건 온전한 믿음 되도록 하기 위해서 기다리십니다.
그랬을 때에 완전히 절단났을 때에 하나님이 그 사람이 믿을 때에는 하나님만 믿는 것이지, 조건이 될 상하니까, 환경이 배경이 그럴듯 하니까, 희망이 있는 것같이 보여지니까, 이 피조물 무엇으로 말미암아 뭣 될 것같이 좀 보여지니까 그만치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그것이 없어지고 피조물 무엇으로도 아무것으로도 아니다. 이제는 희망 없다.’ 이제는 완전 절망될 때에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불쌍한 과부의 기도의 그 비유를 우리에게 말씀했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낙망을 통과한 그다음의, 낙망을 초월한 그 신앙을 소망을 말합니다. 낙망을 초월한 그 소망일 때에 하나님은 일할 수 있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당신이 구출하시는 것은 십자가에 당신이 완전히 십자가 못박혀 죽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그 역사는 인간이 볼 때에는, 인간이 볼 때는 예수님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이제는 죽어서 사흘이나 됐으니까 완전 실패 아닙니까? 완전 실패.
완전 실패가 된 그다음에 아버지 우편에 앉으신 성공이 있었다. 예수님은 완전 실패 후에 아버지 우편에 앉으실 이것을 소망했다. 피조물로서의 어떤 희망도 완전히 깨어지고 끊어지는 그다음 하나님 아버지로 말미암이 이루어질 그것을 소망했다.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인하여” 아버지 우편에 앉으실 그것을 인하여 “십자가의 고난을 개의치 아니하셨다” 하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도 완전히 마귀가 승리를 했습니다. 마귀가 완전히 승리했고 또 마귀의 법으로 인간법으로 볼 때 예수님은 완전히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서는 성공인 것입니다.
절망이 완전히 소망이 됐고 완전 실패가 완전 성공이 됐습니다.
그것이 뭣이냐? 피조물에 대한 소망이 완전히 절망이 되고 피조물의 그 능력이 완전히 절단이 돼 버리고 ‘이제는 피조물 무엇으로도 할 수 없다. 이것은 완전 실패다. 이것은 이제는 완전히 절단났다. 이는 하나님만이나 하지 다른 것은 할 수가 없다.’ 하는 그 단계가 하나님이 일할 수 있는 것입니다.
왜 그러냐? 그것은 사람들이 그렇기 전에는 그래도 땅의 것을 바라보고 의지하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이 믿음이 순진하지를 안하고 온전한 믿음이 되지 안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일을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능력이 차이가 뭣이냐? 어떤 사람은 없어져야 믿는 것, 없어지지 안해도 믿는 것, 없어지지 안해도 완전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그를 통해서 역사를 하실 수가 있고, 반 없어져야 이제 세상에 대해서는 절망 가지고 하나님께 소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하면 그 사람에게는 반이 없어져야 됩니다. 이것은 다 없어지기 전에는, 다 없어지고 백분지 일이라도 남아 있으면 백분지 일 그 끄트머리를 가지고서 거게 소망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뒤에 되면은 백분지 일은 벌써 제게 피조물로 될 수 있다는 그것이 보여지기 때문에 마귀란 놈이 와 가지고 백분지 일 요놈을 들고서 자꾸 요렇게 미혹을 시키면은 ‘이거야 참 하나님으로 말미암아만 된 게 아니라 혹 그렇게도 될 수 있지 않느냐? 세상에도 그런 일도 되지 않느냐?’ 이러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그것 없어지는 것을 기다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믿는 사람이 믿음이 없는 데에 실패하지 믿음 있는 데는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 있는 데는 능치 못할 그말은 무슨 말인가 하니 믿음은 그 일을 할 때에 하는 일이 하나님이 하게 하시는 그 일을 하는 그것 첫째 믿음입니다, 선택이. 하나님이 그것 하면 우리 멸망해 죽을 것을 우리가 선택할 때 하나님이 그 일을 해 주십니까? 개별 사건을 선택할 때에 하나님이 ‘이것은 네가 해도 된다’ 하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너 이것 해 봐라. 장사 저것 해 봐라. 이 일 해 봐라, 저 일 해 봐라.’ 하나님이 시키시는 그 일을 선택을 하는 것이 믿음이요, 그 일을 선택할 때에 해서 자기가 할 때에 하나님이 자기의 모자라는 것을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믿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요, 하나님이 그 일을 선택해 주시고 이루게 하실 때에 이루는 그 방편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실 때 그것 또 방편을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쓰는 것이 그것이 순종이요, 하나님이 도와주실 것을 인정하는 그것이 순종이요, 그러면 하나님의 의사에 따르는 것이요 하나님의 선포한 계약을 따르는 것이라 그거요. 이래야 이루어지는데 이것이 없어서 안 됩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안 되는 것은 하는 일이 하는 일 그 종류가 믿음이 아니오.
하는 일 종류가 믿음이 아니라. 이 일 하라면 저 일 합니다. 종류가 믿음이 아니요, 또 종류를 바로 택했다 합시다. 종류를 바로 택했으면 이 종류를 하는 데에는 ‘네가 이 일을 이루어지게 하려고 하면 그 무엇을 치워버려라. 유교병을 치워라. 유월절에 유교병 치우면 능력 오고 유교병 안 치우면 너거 직사한다.
유교병을 치워라. 네가 이 선택은 바로 했는데 이 일을 하는 데는 네가 어떤 것을 제거해라. 어떤 것을 버리라. 어떤 회개를 해라.’ 하는데 그것 안 하니까 또 믿음이 아니오.
그러면 그것도 다 했습니다. 했는데 그 일이 안 됩니다. 안 되는 것은 네게 있는 네 힘 보고 낙망하기 때문에 안 된다. 네게 있는 힘을 다해서 하면 모자라는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보충하셔서 이루어 주실 터이니까 네가 이것을 믿어라.
하나님 은혜를 믿어라.
그러면 종별 선택의 믿음이 안 돼서 안 되는 사람, 종별 선택의 믿음은 가졌지마는 그 역사를 일으키는 데에 자기에게 거리낌이 있는 그것을 버리라 하는데 거리낌이 있는 그것을 버리지 안하니까 회개하는 믿음이 없어서 안 되는 것, 또 선택 믿음이 있어 회개하는 믿음이 있어 이랬으니까 이루어질 터인데 또 믿음 하나가 없어서 안 이루어집니다. 이것만 있으면 이루어지는데.
믿음 하나가 무슨 믿음이겠습니까? 그다음은 그것은 무슨 믿음이겠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그 믿음은 “죽도록 충성하라 승리의 면류관을 네게 주겠다” 그다음에 하나 믿음이 모자라는 것은 자기 힘으로 할 게 아니라 자기 힘껏 있는 대로 다하면 모자라는 것은 어떻게 큰 것이라도 하나님이 다 당신이 책임을 인계해 가지고서 보강하고 보충해서 이루어지는 이 하나님의 돕는 은혜를 이것을 믿지 않기 때문에 이 일이 안 이루어진다 그말이오.
그러면 이 세 가지가 다 됐습니다. 이 세 가지가 다 됐으면 이루어진 것 한가지입니다. 다 이루어져 놨소. 놨는데 그 사람이 망령을 부리는 것은 효력을 누리지 못하는 것은 뭣이냐? 이 세 가지가 이루어지기 때문에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지는데 이루어질 것을 제가 인정하고 하나님께서 가장 좋은 시기에 이루어 주실 것이니까 나는 지금 되었으면 좋겠다 싶으지마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지금보다 내일이, 내일보다 명년에, 좋은, 제일 좋은 때를 기다려서 이루어 주시려고 하나님이 하시는 것이라는 것을 바라면 자기 마음이 푸근하고 평안할 터인데, 자기는 이 세 가지를 다 했어. 세 가지를 다 했는데 당장 제 욕심대로의 시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불안을 가졌습니다. 불안 가졌으면 그게 제 믿지 않는 벌입니다. 고통입니다.
이랬는데 안 되는 줄 알았는데 그 뒤에 보니까 그게 이루어져 버립니다.
이루어집니다. 때가 되니까 이루어집니다. 이루어지면 그때사 ‘그때 그랬더니만 하나님이 나는 안 된다 했더니마는 지금 이루어 주시네.’ 그것이 망령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신실히 이루었지마는 그 일은 이루어졌지마는 그 일로 인해서 자기는 온유할 수 있는 평강을 누리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믿음만 있으면 능치 못할 것이 없습니다.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믿음만 있으면 택한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 없습니다. 그런데 첫째 믿음이 없어서 안 됩니다. 첫째 믿음은 뭣이요? 뭣입니까? 선택의 믿음.
그다음에 둘째 믿음은 무엇입니까? 회개의 믿음이지요? 그게 있으면 안 되니까.
화약을 짊어지고 있는 자가 자꾸 불 달라 하면 어쩝니까? 화약을 짊어지고 있는 자에게 불을 갖다대면은 타 죽어버리지 않습니까? 회개할 것을 가지고 있는데 빛이신 하나님의 권능이 오면 저부터 먼저 멸해야 되지 뭣이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회개의 믿음을 가져야 될 터인데 회개의 믿음을 가지지 않는다 그말이오.
회개의 믿음을 가졌습니다. 믿음 둘은 가졌습니다. 또 왜 안 됩니까, 그 사람은? 충성의 믿음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안 됩니다.
충성의 믿음을 가졌소. 그 일에 대해서는 충성을 다 했습니다. 이제 다 됐소.
완성됐소. 완성됐으면 하나님께서 가장 적절한 필요한 시기에 그것을 이루어 줄 것을 자기가 기다리면, 아무리 배가 고파도 호주머니에 돈이 한 호주머니 들어 가지고 있고 시장에 음식이 꽉 찼으면 자기가 배가 고파도 든든합니다. 왜? 내가 먹고 싶으면 돈 뭐 이렇게 꽉 찼는데 주고 어떻게라도 사 먹을 수 있는데. 그 든든합니다.
이렇지마는 호주머니 돈 있는 것을 이렇게 들어 있어도 돈이 전연히 없는 줄 알고 아는 안면도 없고 이러니까 배는 고프지 음식은 있지마는 남한테 얻어먹을 수는 없고 돈이 없으니 자기 배고픈 것이 더 배고플 것 아니겠습니까? 배가 고파도 호주머니에 돈이 있고 음식 많이 있으니까 내가 먹기 싫어 안 먹지 일 때문에 바빠서 안 먹지 먹으려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배가 고파도 돈 없어 배가 고픈 것과 돈을 두고 지금 제가 먹지 안해서 배고픈 것과 다릅니다.
이런 누림을 가지지 못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없는 자가 온유가 없는 자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땅을 차지할 것이요” 이 온유한 마음이 있으면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을 이룹니다.
아브라함은 온유가 있었습니다. 죽음에서도 삼대에 예언한 가나안을 주지 안했지마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그는 가나안을 주시지 안하시니까 하나님은 거짓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니 이보다 더 좋은 터가 있는 가나안, 영원 불변 부동, 움직이지 않는, 진동치 않는 영원한 가나안을 아브라함에게 줄 것을 예언하고 갔습니다. “그가 터가 있는 가나안 하늘나라를 그가 바라보고 갔다” 이랬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믿음이 있으면 능치 못할 게 없습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그러면 이렇게 선택의 믿음이 어떻게 하면 이 선택의 믿음이 이것이 이루어지느냐? 그것은 첫째는 문서계시를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문서계시를 인정하는 믿음.
그러면 문서계시를 인정하는 믿음을 가진 인정은 하나님이 문서계시에 이렇다고 문서를 이렇게 발표했는데 그것을 자기가 인정하면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입니다.
문서계시를 인정하는 믿음이 있으면 이 믿음은 무엇을 낳느냐 하면 문서계시대로 실행하는 그 실행을 낳습니다.
실행 믿음을 낳습니다. 문서계시대로 실행 믿음을 낳으면 그다음에는 무슨 믿음을 낳느냐? 영감 믿음, 예언적 믿음, 미래적 영감, 미래의 영감, 예언 영감, 이제 문서에 기록하지 아니한 것 ‘어느 것 할까요?’ 하는 그 선택 믿음이 생겨집니다. 자기 앞으로 어떤 일을 해야 되겠느냐? 어떻게 나아가야 되겠느냐 하는 선택 믿음이 생겨집니다. 선택 믿음. 그게 무엇입니까? 미래적 영감이오.
“노아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한 일에 증거를 받아 방주 모았다” 이랬소. 그 나타나지 안했는데 다른 사람들은 돈벌이 하고 모두 천하 인간들이 다 성공 여러 수백 종류를 성공하면서 우쭐하고 야단인데 그 사람들은 앞으로 저거 할 일을 택하지를 못했소. 저거가 해야 될 종류를 바로 택하지 못햇으니까 홍수 속에 매장할 일을 택했지.
“노아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아니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하나님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해서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의 후사가 됐다” 말씀했어. 그는 자기가 모르는 앞으로 무엇 해야 됩니까 하는 거게 대한 하나님의 지시를 받았다 말이오.
하나님의 경고를 받아서 ‘네가 이리 이리 해라.’ 그것이 무슨 믿음이지요? 그 믿음이 무슨 믿음입니까? 똑똑히 말해, 뭐? 선택 믿음이라, 그게 선택 믿음. 그게 선택 믿음 아니요? 우리가 믿음이 있으면 다 된다 했는데 ‘첫째는 선택 믿음이 있어야 되고’ 하지 안했소? 내나 그게 선택 믿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계시를 인정하는 믿음 가지고 계시대로 문서계시를 인정하는 믿음을 가져야 되고 문서계시를 인정하는 대로 실행을 하는 믿음을 가지고 이 두 가지 믿음을 가지면 그다음에 선택 믿음이 온다. 나타나지 안한 일을 하나님이 바로 그렇게 지시해 주고 영감해 주신다. 이것이 미래적 영감이라.
그러면 선택 믿음이 이것이 문서계시를 인정하는 믿음과 문서계시대로 실행하는 믿음과 이 두 가지 믿음을 가졌을 때에 선택 믿음이 나오는 것입니다.
선택 믿음이 나오고 난 다음에는 또 거게서 자기에게 거리끼는 걸 회개해.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가기 전까지는 그가 가책될 게 하나도 없었는데 밧모섬에 주일날 예수님 만나고 보니까 기절을 해 버렸어. 주님의 안면이 부셔서 견디지를 못하겠어. 죽은 자와 같이 꺼꾸러지지 안했소? 회개라는 것은 하나님의 빛이 오는 데 따라서 회개가 달라집니다. 빛이 없으면 모든 게 보이지 안하지마는 빛이 가까이 오면은 큰 것만 보이고 작은 것은 보이지 안하고, 빛이 더 가까이 오면은 작은 것도 보여지고 차차 빛이 밝음에 따라서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이는 것처럼 사람도 그렇게 선택 믿음을 벌써 가지게 됐으면 그 사람은 영감받은 사람인데 선택 믿음 가지고 보면은 그다음에 새로 회개할 것이 생겨집니다. 또 그 성공을 하는 데에 거기에 관련되고 구비하는 회개가 있어. 그전에 회개한 것과 또 달라.
또 더 세밀한 회개를 해. 거게 따른 회개가 또 있어. 거게 따른 회개 하면은 그다음에 할 것은 뭣입니까? 충성의 믿음뿐이라. 충성의 믿음 가지면 그것은 벌써 이루어졌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문서계시에 {계시에,} 계시를 믿는다고 하는 그것이 뭣이냐? 믿음의 표시는 뭣입니까? 믿은 증거는 뭣입니까? 문서계시를 믿는 표적이 뭣이지요? 문서계시를 인정하는 표적이 뭣입니까? 실행이요, 실행. 실행 없는 것은 안 믿는다는 증거입니다. 문서계시를 인정하는 표적이 실행이오.
그러면 자기가 실행을 바로 했는지 안 했는지 거게 대한 표적은 뭣입니까? 선택의 믿음이오. 제 미래사에 대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바로 받지 못하는 그것은 행하지 않는다는 증거입니다. 자기 망할 길을 뿍뿍 가는데, 자기 망할 길을 뿍뿍 가는데, 순전히 육신주의로 자기 망할 길을 가고 자기 망할 길을 생각하는데 그 사람은 성경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증거요 또 실행하지 않는 증거요.
우리는 뭘 바라고 있습니까? 선택 믿음을 바랍니다. 자기 개별에 대해서 성신의 감화가 자기 할 일을 노아와 같이, 다른 인간들은 다 모르는데 노아에게는 ‘얘, 지금 내가 홍수로 멸할 터인데 네가 어떻게 해? 네가 방주를 예비하면 홍수 멸망을 피하지마는 그렇지 않으면 안된다.’ 할 때에 다른 사람은 그 말이 들어도 들리지 안해. 노아가 날마다 그말 해도 다른 사람은 비웃고 조롱해. 안 들려.
“보아도 알지 못하고 들어도 깨닫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하셨다” 하는 저주를 받은 것이라 그말이오.
그 저주받는 해결은 어데서 해결합니까? 자기는 밑에 두 다리는 하지 안하고 위에서 ‘주여, 내 미래에 뭣이 됩니까? 어찌됩니까? 알려주옵소서.’ 하나님이 저한테 매수를 당할 자입니까 이용을 당할 자입니까? 당신도 당신의 법을 세운 것을 어기지 못하는 당신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문서계시를 인정하고 그대로 실행을 해야 자기 미래에 대해서 옳은 생각이 나오지, 옳은 소원이 나오지, 옳은 욕심이 나오지, 이 가운데 망할 욕심을 가진 사람들 꽉 찼다 그말이요, 교역자 가운데서도! 그 욕심대로 해 보지, 안 망하는가? 망할 욕심 망할 생각을 가지니까 항상 생각은 그 생각뿐이고 하나님의 도를 제가 이용을 하면은 뭐 일시 다른 사람이 은혜를 받는다고 해 가지고 그것은 이용만 당하는 것입니다. 이용만 당하는 것이오. 막대기, 모세의 막대기로 큰 기적을 행했습니다. 당나귀로도 하나님이 예언을 했습니다.
누가 농사 짓는 농부가 필요 있고 편리한 농구를 저거 아들이라고 하는 그런 미친 자가 어데 있겠소, 있기를? 아들보다 이용이야 많이 했지. 이용만 되는 불쌍한 자 되면 안 됩니다. 미래적 영감을 받는 데는 제게 옳은 생각이 나고, 옳은 마음이 나고, 옳은 소원이 되는 이것이 선택의 믿음이오. 망할 생각만 나옵니다.
망할 생각만 나오고 망할 꾀만 나옵니다. 망할 소원만 나옵니다. 망할 방편만 택하요. 모르는 사람은 몰라도 아는 사람은 압니다. ‘저 참 불쌍하고 가련하다.
불쌍하고 가련하다.’ 하나님은 안 속습니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살아야 돼요.
미래에 대해서 자기가 첫째가 뭣이냐? 옳은 생각이 돼야 돼. 옳은 소원이 돼야 돼. 옳은 마음이 돼야 돼. 이게 뭣이냐? 미래적 영감, 예언적 영감, 아직까지 나타나지 안한 일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이렇게 하라’ 경고하심을 받는 이 종별 선택의 믿음 이것은 문서로 똑똑히 기록한 이 문서계시도 인정을 안 하고 제 주장을 세우고 이대로 실행을 하지 안하는데, 이 무한하신 분이 계시니까 이분이 선포해 놓은 문서를 그대로 인정하고 그대로 실행하면 당신이 책임을 지겠다 했는데. 이것을 인정치 않는 자를 주님께서 어떻게 제 주가 돼 주겠습니까?
그런고로 이번에 성찬에서도 하나님과 상관 없는 사람을 제가 만드는 길이 하나 있겠고, 하나는 하나님을 무시하다가 벌을 받는 자가 있겠고, 하나는 하나님의 축복, 이분과 연결되면은 그 이상이 어데 있소? 없어질 그 정권자와도 연결이 되면은 복이 있다 하는데 이분과 연결이 되면은 그 이상 탐낼 게 뭐 있습니까? 이분의 피와 내 피가 연결되고 이분의 살과 내 살이 연결되어 이분의 육과 내 육이 연결이 되면 전능자고 전지자고 완성자지 그 이상 더 바랄 게 뭐 있습니까? 대성공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 안 하면 이분과 상관이 없는 것이고, 상관이 없는 것은 알고 자기에게는 이 성찬을 먹을 수 없는 일이 있는데 그 일 때문에 먹으면 하나님 앞에 도로 정죄를 받을 터이니까 안 먹으련다 그러면 주님과 자기와 상관을 끊는 것이지. 왜? 자기에게 무엇인가 자기에게 필요한 그 사건 어려운 사건 그것을 내놓지 못해서 주님을 내놓는 것이지. 주님과 상관을 끊는 것이지.
그것을 두고 속여서 하나님을 업수이 여겨서 먹으면 하나님을 업신여기니까 상당한 그에게 보응이 오겠지.
또 자기가 과거에서 어떤 일이 있었다 할지라도, 아이 낳을 때에 병든 그 병은 아이를 새로 낳아야 치료가 되지 다른 만약 가지고 치료해야 헛일입니다.
이것처럼 성찬 때에 자기가 받은 모든 징계는 성찬 때에 회개하면 다 영육의 약한 자가 강건해질 것이고, 병든 자가 나을 것이고, 신앙 죽은 자 살아날 것이고, 육이 죽은 자야 그것은 성찬 못 먹는 것이고.
그런고로 우리는 단계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됩니다. 과거사를 자기가 후회를 해서 회개한다 하면은 그것은 현재에 행하는 것이 증거입니다. 표적이오.
과거를 정말로 제가 후회를 하느냐? 그것은 현재 행함이 증거요.
현재 제가 행할 대로 바로 행했느냐? 그것은 미래에 대한 것을 하나님 앞에 영감 받는 것입니다. 준비할 수 있는 그게 있어야 현재 행하는 것이오.
준비가 그에게 없는 것은 현재 행하는 것이 아직까지 합격이 안 됐습니다.
현재에 행해지지 않는 것은 과거를 후회하는 회개라는 그것이 바로 되지 않는 것이요 합격이 안 된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해서 자기가 속이는 자가 되지 말아야 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