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11:18
믿음
1981. 2. 21. 새벽 (토)
본문:마태복음 13장 18절∼23절 그런즉 씨뿌리는 비유를 들으라 아무나 천국 말씀을 듣고 깨닫지 못할 때는 악한 자가 와서 그 마음에 뿌리운 것을 빼앗나니 이는 곧 길가에 뿌리운 자요 돌밭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요 가시떨기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들으나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말씀이 막혀 결실치 못하는 자요 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마태복음 13장 11절∼13절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무릇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느니라 그러므로 내가 저희에게 비유로 말하기는 저희가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우리가 기본구원을 얻는 것은 순전히 객관 역사요, 건설구원을 이루는 것은 객관 역사를 주관 역사가 받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인데 이 구원은 순전히 믿음으로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 기쁨이 된 그 구원은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입니다.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라는 것은, 믿음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도를 통해서, 영감 도리를 통해서 인정하는 것과 행하는 것 이 두 가지가 믿음입니다.
우리의 모든 승리도 믿음으로 승리합니다. 세상을 이길 자가 누구뇨? 믿음으로 이깁니다. 마귀와 죄를 이길 자가 누구뇨? 믿음으로 이깁니다. 자기를 이길 자가 누구뇨? 믿음으로만 이깁니다. 믿음이 아니면 이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누가 의인이 되느냐? 믿음으로 의인 됩니다. 누가 성자와 성녀가 되느냐? 믿음으로 성자 성녀 됩니다. 누가 일생을 순생을 할 수 있느냐? 바울이 말하기를 ‘단언코 말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는다’ 했습니다. 누가 순생 생활을 할 수 있느냐? 세상에 살면서 죽는 날까지 날뛰다가 죽고 망하고 마는 것이 인간인데 어떻게 자기는 죽고 주님은 자기에게 사는 이 순생 생활이 이루어지느냐? 믿음으로만 이루어집니다. 어떻게 순교 생활이 이루어지느냐? 순교 생활도 믿음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데 이 믿음은 누가 들어서 손해를 보이느냐? 본문의 해석에는 「깨닫지 못함으로」 했습니다. 이것을 믿음 없는 아는 것으로만 생각합니다. 이래서 ‘깨닫지 못하니까 다 이 말씀을 잊어버렸다. 말씀이 없어진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이러니까 아마 여기 있는 교역자들은 다 자기는 깨달은 사람이라고 인정을 하고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 깨닫는다는 말씀이 논리적으로 아는 걸 말하는 것인가? 논리적으로는 세상 학문이 많고 세상 말을 많이 들은 사람들이, 나이 어린 사람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더 잘 알 수 있을 것입니다.
말귀를 알아듣는 것은 어린아이보다 어른들이 말귀를 더 잘 알아들을 것입니다.
무식한 사람보다 유식한 사람이 말귀를 더 잘 알아들을 것이오. 경험이 없는 사람보다 경험이 있는 사람이 말귀를 더 잘 알아들을 것입니다. 하지마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인정은 나이가 많아 갈수록 인정이 덜 됩니다. 유식해 갈수록 인정이 덜 됩니다. 세상 말로 수양이 많을수록 인정이 덜 됩니다.
예를 들어 영생이란 말에 대해서 말한다면, 영생이란 말은 글자 그대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산다는 말이지요. 영생이란 말을 그것만 알면 다 깨닫는 것입니까? 영생이라는 이 영생을 자기가 인정하느냐 안 하느냐 그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인정을 하느냐 안 하느냐? 영생을 가진 자가 죽음을 두려워할 게 뭐 있습니까? 영생 가진 자는 영생을 더 영광스럽게 하고, 영생을 더 존귀케 하고, 영생을 더 가치 있게, 영생할 때에 빈곤하고 가련한 자로 영생하는 게 아니고 영생할 때에 존귀한 자로 영생하기 위해서 세상에서 영생 없는 사람들이 죽는다는 것 같은 그런 것을 닥치는 것 아닙니까? 영생을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 하나님을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 하는 그것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생활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한 모든 것들과, 또 하나님이 우리와의 관련된 모든 것, 우리가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과의 관련된 모든 것을 어느 정도 인정하느냐 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느 정도 인정을 하며 또 어느 정도 그것들과 이 말씀대로 관계를 맺었느냐 하는 이것 둘뿐입니다. 우리의 성공은 이것 둘뿐이오.
그러기에 믿은 지가 며칠 안 돼도 수십 년 믿은 사람보다 여러 천 배 만 배 앞설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주일학교 학생들은 그들이 어른들보다 무슨 이해하는 그것이 앞선 것은 아니지마는 하나님 말씀을 인정하는 것은 앞서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어린아이와 같지 아니하면’ 하는 그 말씀은 다른 면도 있지마는 인정하는 것이 아이들 같은 그런 인정이 안 되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가 된다」 백이니 육십이니 삼십이니 그것은 각각 자기대로의 해석을 가질 것입니다. 세상은 어쨌든지 하나님의 도를 가로막는 세상이기 때문에 그것을 선포는 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자기대로는 다 해석을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 알 것은 배가 된다는 것, 말씀대로 한 배 된다, 두 배 된다, 백 배 된다, 몇십 배 된다. 말씀대로 자기 한 사람 되면, 자기 한 사람 되면 백 배 되고, 백 사람이면 얼마 됩니까? 하나가 백 배 되면 백은 몇 배 돼야 됩니까? 하나가 백 배 되면 백은 백 배가 돼야 되지요. 만은 만 배가 돼야 될 터이니까 그러면 어찌 됩니까? 나 한 사람으로 인해서 이렇게 되어지고 또 그 다음에 그리 되어지고 이것이 복음의 성질이요 권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성질이요 권능입니다.
자기가 진정 지극히 작은 것 하나를 결실하게 되면, 하나가 결실하게 되면 하나로 말미암아 몇십 배, 백 배, 몇백 배가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구원은 실행만 하면 가속도로 성화되는데 이것은 전부 믿음으로써 성공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적이 누구뇨? 믿음의 적을 여기 셋으로 비유했습니다.
믿음의 적이 첫째 무엇입니까? 여기 「깨닫지 못하므로」 했습니다. 깨닫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에누리해 버렸는지 모릅니다. 깨닫는다는 것은 아는 걸 말하는 것 아닙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권능을 깨닫지 못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이 말씀이 얼마나 권능 있는 말씀인지? 이 말씀이 백분지 일이 이루어지겠느냐? 만분지 일이 이루어지겠느냐? 그대로 다 이루어지느냐? 다 이루어진다는 걸 우리가 인정합니까? 참으로 깨닫는 것은 행함과 하나입니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얼마나 필요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지? 영생 하나만 인정한다 해도… 백 년 사는 약이 있는데, 그 약은 먹기만 하면 틀림없이 백 년을 사는데 약값은 빈부간에 자기 살림살이 있는 걸 다 털어서 한 푼도 안 남기고 전부 다 내면 백 년 산다 하면 아마 이 가운데 있는 여러분들도 살림 다 털어서 그 약 사지 안 살 사람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런데 이것은 믿지 않습니까, 믿지 않기를!! 이래도 우리가 에누리하는 줄 모릅니까? 이래도 우리가 에누리하는 것 아닙니까? 우리가 인정합니까? 하나님이 알지 못하심이 없는데, 보지 못함이 없는데 왜 우리가 강퍅하고 이렇게 교만하고 이렇습니까? 하나님이 알지 못함이 없는 전지자인 것을 우리가 인정합니까? 인정이 됩니까? 아니오. 만에 일도 인정을 안 하고 있습니다. 인정이 안 돼요. 이게 제일 큰 문제입니다. 세 가지 중에 첫째 적이 이것입니다. 이것이 제일 큰 문제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 말씀이 인정이 안 돼요. 이것이 깨달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인정 안 되는 것이오.
성경의 권위를 말씀했는데 그 권위를 모른다는 말입니다. 그게 깨닫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 권위를 몰라요. 이 말씀이 나에게 얼마나 필요하다는 그 필요를 말했는데 몰라요. 영생을 말했는데 영생을 몰라요.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이 다 우리 것이 될 수 있다는 이 사실을 모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돈 몇 푼에도, 목사들이 교회에서 사례 좀 더 받고 덜 받고, 좀 큰 교회 작은 교회 그것을 노려서 하나님에게 거슬리는 일을 하고 하나님이 섭섭한 일을 하고, 하나님이 원하는데도 ‘나는 거기 안 간다.’ 나는 거기 안 간다 하는데, 그까짓 것 몇 푼 됩니까?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 모든 것이 우리 것이 될 수 있다는 이것이 인정이 되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그 권위성이나, 우리에게 필요성이나 가치성이나 신실성이나 보응성이나 절대성이라는 이 사실을 아는 것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것을 인식하고 이것을 고치기 위해서 애를 써야 됩니다.
이것은 다른 걸로 안 됩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고 아버지의 성령으로만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성령만이 와서 할 수 있다는 것이 이것 모르는 걸 말합니까? 세계에 성자들이 깨닫고 말한 그대로 씨뿌리는 데 대해서 말하려 하면 한 시간이면 다 알 것이요 외울 것입니다. 그렇지마는 이 사실을 인정하는 그것은 안 됩니다.
세상에 머리 좋은 사람들이 신구약 성경 외우려 하면, 어학자들이 그 단어 외운 걸 생각하면 아마 성경 몇십 권 될 것입니다. 그걸 마구 외워 가지고 말을 하는데 신구약 성경이야 예수 믿는 우리들이 못 외우지 세상의 어학자들이, 그 학자들이, 머리 좋은 사람들이 이것 외우라 하면 마구 뭐 대통같이 다 외울 것입니다.
이렇게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됩니다. 되는데 왜 힘으로도 능으로도 안 된다 합니까? 인간의 힘으로 됩니다. 이런데 이 사실이 나에게 인정이 되어져서 이 말씀에게 내가 붙들리고, 천하에 있는 모든 인간이 나를 보호하는 것보다도 이 말씀의 보호를 더 크게 여겨서, 이 말씀 나래 아래서 이 말씀 모시고 있으면 저주도 사망도 죄도 악령도 해하지 못한다는 이것이 믿어져서 이 말씀을 모시게 되는 이것은 성령으로만 됩니다. 성령의 감동이 아니면 안 됩니다. 성령의 감화가 아니면 이것은 깨달아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령이 안 오면 못 하는 것이오.
이런데 우리의 제일 큰 적이 무엇이냐? 길가에 뿌린 씨 이것이 우리에게 제일 큰 손해보이는 것입니다. 이것만 해결되면 그 다음은 다 됩니다. 이것만 되면 다 돼요.
이것이 무엇 때문에 안 되느냐? ‘땅이 여물어서 여문 땅에 뿌려지니 새들이 와서 주워 먹었다.’ 앞으로 이런 번역이 나올는지 모릅니다. 왜? 마귀란 놈이 사로잡은 자들은 성경 하나님의 지식에는 관심이 없고 인간 대가리에서 나온 이런 지식만 크게 여깁니다. 그게 마귀 지식인데 그것만 크게 여깁니다. 불신자의 마음을 주관하는 자가 누굽니까? 악령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이 악령을 잡아 부리기 때문에 쓰지마는 그것은 다 죽은 지식입니다. 죽은 자들에게 필요합니다. 우리는 죽은 자들의 지식을 공부할 때에 ‘어떤 지식으로 인간이 죽고 어떤 지식에서 인간이 죽으면서 만족하고 있느냐? 인간을 죽이는 지식이 무엇이냐?’ 그것을 알기 위해서 공부하고, 예수님의 도는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것이 예수님의 도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지식을 살릴 수가 있다. 죽은 지식을 살릴 수 있는 것은 죽은 지식이 산 지식의 것이 되어지면 이것은 살아난다.’ 이걸 알아야 합니다. 죽은 지식도 살아나면 돼요.
여기 지식 가지고 죽은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국민학교 졸업보다도 중학교 졸업한 사람은 그만큼 그 지식이 자기를 죽였지 살리는 데 도움이 되는 것 없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자들도 그만큼 죽였지 살리는 게 없어요. 세상에 대학자가 됨으로 그 학자의 학이 부활을 하면 없는 것보다 참 좋지마는 그 학자의 학이 예수님의 도로 말미암아 살아나지를 못하고 죽었으니까 죽은 무더기가 크니까 썩히는 힘이 더 셉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 안에 학벌 좋은 사람이 많지 않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부자가 믿음이 없어 멸망당하고 가난한 자에게 믿음이 더해져 가지고 구원에 이른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 믿음의 적은 어떤 게 적이냐? 이 세상으로 말미암아 속화된 것입니다.
본문에 길가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이 많이 지나다녀서 다져졌다는 것을 비유했는데 앞으로는 ‘길가라 하는 것은 단단한 땅이라는 말이다.’ 이래 가지고 아마, 나는 어학을 모르는데 어학에 길가라는 것은 단단한 것을 말하기 때문에 길가라는 걸 빼 버리고 ‘단단한 땅에 뿌리움을 받은 자는 새들이 와서 주워 먹는다.’ 그렇게 나올지 모릅니다. 길이라는 건 빼고, 길이라 하는 것을 빼 버리고 단단하다는 것으로 번역이 될는지 모르는 것입니다.
여기 길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으로 인해서 다져진 걸 말합니다, 많은 사람으로 인해서. 20세기의 문화로 인해서, 수많은 이종교로 인해서, 요새 라디오 들어보면 불경도 말하고 세상에 무슨 철학도 말하고 심리학도 말하고 별별 걸 말하는데 말하는 그것이 사이비해요. 그것으로 인해서 어떤 자는 성경 말씀이 더 믿어지는 자 있고 어떤 자는 그것으로 인해서 성경 말씀도 그와 같이 된 것같이 여겨서 에누리가 더 되는 그런 자들도 있습니다.
길가라는 비유는 수많은 인간들이 오고 가고, 인간들이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한, 인간들이 움직인 많은 것이 우리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고 우리의 마음을 완패케 해서 하나님 말씀이 그대로 들려지지를 않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영생이라 하는데 영생으로 들리지 않아요. 주님은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셔서 다 주님이 만드신 것이라고 말씀하는데 그대로 들리지를 않아요. 인정이 안 돼요.
‘지금도 그분의 것이고 그분이 주권자라, 그분이 주재라, 모든 것의 주인이라, 그분이 창조주라, 그분이 알지 못하심이 없다, 지극히 작은 것 개미 한 마리 움직이는 것도 그분의 섭리로 되어진다.’ 이것이 입으로는 많이 하지만 인정이 되느냐 말입니다. 왜 인정이 안 되느냐? 인정 안 되는 것은 이 세상의 많은 인간들이 우리의 마음을 다져서 그로 말미암아 강퍅해져서 안 된다 그말입니다.
우리의 구원이 첫째로 절단 난 것은 세상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에누리되지 아니하고 그대로 인정되는 요것이 우리에게 반사가 안 됩니다. 우리의 마음은 마치 거울은 거울인데 거울 위에다 흙을 한 치나 한 자나 칠해 놓은 것과 같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거울이 보입니까? 이걸 닦아서 없애야 될 터인데.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한 배나 에누리한 줄 압니까? 천 배 만 배도 에누리 더 합니다. 이 에누리하는 데서 우리에게 능력이 안 나옵니다. 여기서 기쁨이 안 나옵니다. 우리 믿는 신자에게 어디서 이 기쁨이 안 나오느냐? 기쁨을 누구에게 뺏겼느냐? 말씀을 에누리하고 믿어지지 않는 데서 뺏겼습니다.
우리의 담력은, 능력은, 우리의 소망은, 세상에 조그만 나라를 차지한 사람도 영광인 줄 알면서 우리는 그보다 나은 영광을 왜 차지 못 했느냐 말이오. 왜 가지고 있는데 모르느냐? 우리가 앞으로 차지할 사람입니까? 아니오.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다 우리 것이 돼 가지고 있는데 이것을 어느 정도 자기가 활용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팔이 있어도 팔을 못 쓰면 병신이지요. 팔이 없는 게 아니라 못 쓰면 병신이지요. 그것은 없는 것보다 짐덩이지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이 다 이루어져 있는데 그것이 내 주관으로 나로 하여금 어느 정도 효력 있게 내가 감당을 하고 누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그것을 효력 있게 누리는 것입니다. 팔은 있는데 이 팔이 어느 정도 사용이 되느냐 그말이오.
사용이 돼야 내게 효력 있지요. 사용 안 되면 병신이지요. 사용 안 되면 짐 덩어리지요.
이렇게 우리의 마음이 강퍅해져서 하나님 말씀이 깨달아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깨달아지지 않는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 녹음기가 정확하지마는 녹음기가 깨달음이 있습니까? 만 번 돌려도 거기 깨달음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을 녹음기가 깨닫고 있습니까? 인정하고 있습니까? 인정하면 녹음기가 날아갈 터인데. 인정하면 세계를 그 녹음기가 점령할 터인데. 깨달음이 있습니까? 인정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성령으로만 되는 것이니 우리는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뭣 때문에 성경을 읽습니까? 성경을 읽는 것은 그 안에 있는 그 모든 종류를 알려고 하는 것이요, 또 성경 안에 살아 계시는 성신의 역사를 만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성령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오. 우리를 중생시킨 성령이 내 안에 계시니 성경을 읽을 때에 내 속에 계시는 성령을 내가 영접해 가지고 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성경 안에 있는 성령과 내 안에 있는 성령이 진리로 나와 일치돼 가지고 하나가 되려는 것입니다. 기도로 깨달음이 되려고, 또 행함에서 체험하고 느껴서 깨달음이 되려고, 알려고, 인정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모든 생활은 말씀이 인정되도록 하려는 것입니다. 그대로 살 수 있는 그 능력을 마련하려고 하는 것이오. 이것이 기초입니다. 하늘나라에 가면 이 세상에서 인정된 것만큼,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실행해 본 것만큼 실행합니다. 많이 해 봐야 한 번 하고 마는 것도 있고 또 두 번 하는 것 같지마는 두 번 하는 그게 두 번 아니오. 한 번뿐입니다. 단번에 준 도입니다. 한 번밖에는 실행 안 해 봅니다. 그런데 실행해 본 그것은 무궁세계에서는 영원 무궁토록 억억억만 번도 더 실행합니다. 그것이 우리 영생입니다.
이런데 이렇게 되지 아니하고 세상으로 말미암아 내 마음이 강퍅해지고 완패해져서 이 말씀이 에누리가 되고 이대로 믿어지지 않는 여기 대해서 탄식을 하고, 이것이 제일 일대 문제이기 때문에 이 문제가 문제인 줄 알고 이 문제를 없애서 성경이 말씀한 그것을 하나님이 인정한 그대로 나도 인정하는 것, 모세는 일생 동안 노력하기를 하나님을 두려워하여야 할 대로 두려워함이 없는 그것을 탄식했습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이 말씀이 사실대로 인정 안 되는 그것을 탄식을 했다 그 말입니다.
우리는 여기 대해서 원수가 무엇인지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깨닫지 못하는 것은 길가 때문에 깨닫지 못합니다. 깨닫지 못하는 것은 길가 때문에 깨닫지 못해요.
모든 인간사 때문에 내가 깨닫지 못합니다. 인간사 때문에 내가 속화되고 강퍅해지고 완패해지고 낡아집니다.
‘인간의 말은 거짓말이지마는 이 말씀은 참말이라.’ 이렇게 우리가 말로는 하지마는 믿어집니까? ‘전능하신 하나님이 너와 함께 있다. 전능자의 나래 아래에 있다. 우리 택한 자는 전능자의 나래 아래 있다.’ ‘믿사옵나이다.
믿사옵나이다. 믿사옵나이다.’ 하는데 공산주의가 와 가지고 죽이려 할 때에 믿는 것이 나타나는지? 왜 두려운지? 왜 염려가 되는지? 왜 다니엘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했는지? 왜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와 같은 신앙을 가지지 못했는지? 우리가 에누리하면서, 안 믿으면서 믿는 줄로 아는 이것이 우리 죽이는 것입니다.
더웁지 않으면서 더운 줄 알고, 차면서 차지 않는 줄 알고, 더웁지도 않고 차지도 않는다는 이것이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님이 탄식하신 것인데 우리가 이것입니다.
이게 제일 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사실대로 나에게 인정되지 않는 것. 내 딴에는 된다 하는 그것도 속았습니다. 내가 내게 속았다 말이오. 인정이 되는지 안 되는지 사실을 당해보면 아는데, 내 욕심을 보면 아는데… 그만 못한 세상 지식도 그것을 얻으려고 대가리를 싸매고 일 년이고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평생을 날뛰는데, 이 말씀이 인정되면 그 사람이 여기 주력하고 달려들지 왜 딴데 달려들겠느냐 그말이오.
우리가 인정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내 기분 보면 알지요. 내가 욕심을 품는 것 보면 알지요. 인정이 되는지 안 되는지 내 주관의 모든 면을 보면 알 수가 있지요.
인정이 정말 되는가 내가 판단할 수가 있지요. 내가 모든 상대방 객관을 대할 때, 인정이 되는지 안 되는지, 인정하고 있는지 안 하고 있는지 객관을 상대해 볼 때 알 수가 있지요.
그러나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실지로 하나님이 현실을 줘 가지고 너는 안 믿는 자다, 너는 믿음이 없다 하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인정될 때에는 바다 위로 걸어갔는데 걸어가다가 물 속에 빠진 것을 두고 주님이 뭐라고 말했습니까? ‘믿음이 적은 자야 왜 의심하였느냐’ 했어요. 믿음이 적어서 빠져 들어갔습니다. 믿음은 능치 못할 것이 없다 했는데.
우리의 첫째 적은 이 세상의 모든 인간들이 짓밟아 온, 인간들이 오고 가고, 이 사람은 이렇게 말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말하고, 이 사람은 이렇게 살고 저 사람은 저렇게 살고 한 이런 것들이 들어서, 6천 년 역사라는 이 역사가 들어서, 우리도 별수 없이 그 역사의 사람이 됐기 때문에 이 역사가 들어서 절대성인 천지는 없어질지라도 획 하나도 없어지지 않는 권위 있고 진실하고 신실하고 가감 없는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이렇게 들리지 않는 이것이 우리의 적입니다.
이것이 첫째 적입니다.
이 역사를 이길 자가 누구입니까?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이 역사를 부인할 자가 누구입니까? 이것은 성령의 권능으로만 되지 인간의 힘으로는 안 됩니다.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확신을 얻기 위해서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되겠고, 또 실지로 이것을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현실에 실행하는 것은 믿음이 없기 때문에 믿음을 만들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전 현실 생활은 믿음 만들려고 하는 것이오.
현실에서 믿음 없는 것을 자기가 깨닫고 조금씩이라도 믿음을 만들어 죽는 날까지 믿음을 바로 만들었다면 그 사람은 성공입니다. 우리는 믿음 만드는 이것 외에는 딴 것 하는 게 없어요.
그런고로, 우리 신앙의 첫째 적은 많은 사람들의 움직임이 적입니다. 둘째 적은 말씀대로 실행하려고 할 때에 있는 적입니다. 실행에 대해서 적은 내가 적입니다.
내가 실행하려고 할 때 나의 적은 막 바로 내가 적입니다.
왜 실행하지 못하게 되느냐? 자기 아닌 옛사람이 들어 있습니다. 자기 사욕이 들어 있고, 주관이 들어 있고, 옛사람이 들어 있어 실행을 못하게 합니다. 즉 자기가 들어서 실행하지 못하게 합니다. 실행에는 자기가 적이요, 깨달음에는 역사가 적입니다.
또 이렇게 실행하다가 마지막에 결말을 지워서 완성할, 완성할 결말을 지을, 마지막에 완성을 할 그 단계에는 세상이 적입니다. 세상이 들어서 성공을 못 하게 합니다.
6천년사의 인간 역사가 내 신앙의 적입니다. 이게 첫째 적이오. 인정에 적이라 말입니다. 이것이 인정에 적이요, 행함에는 내가 적이요, 마지막 결말을 지울 때에는 세상이 나의 적입니다.
이 세 가지 적을 알고 이것으로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벌써 우리가 이것에게 삼켜져 있을 때가 많이 있습니다. 적이 들어서 예수를 믿습니다. 행함의 적인 원수 내가 들어 예수를 믿습니다. 이것이 들어서 목사 노릇도 하고 이것이 들어서 설교를 합니다. 내 결실을 망치는 세상이 내것이 되어 있고 내가 세상의 것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어 세상을 천국 위해서 투자하려 하는 일이 아니고 예수 믿는 것도 세상 위해서 믿습니다. 예수 밖에서 명예스러운 것보다 예수 안에서 명예스럽고, 예수 밖에서 권위스러운 것보다 예수 안에서 권위스럽고, 예수 밖에서 부요하게 되는 것보다 예수 안에서 부요해지려고 합니다. 내나 세상입니다. 이것도 저것도 내나 세상 세상입니다.
세상이 들어서 예수 믿고, 행함에 방해되는 자기가 들어서 예수 믿고, 인정에 방해되는 세상 소망 가지고 예수 믿는데 무슨 옥토가 됩니까? 옥토는 쉽게 말해서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을 진리가 다 삼킬 수 있는 그것이 옥토입니다.
그러면 한 사람을 통해서 천 사람 만 사람도 믿을 수가 있고, 한 성화로써 수많은 성화가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이 성화가 시발이 안 되고 있습니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은 하나도 남은 것 없이 다 탔습니다. 건설구원이 없다는 말입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남은 것이 없이 다 떠내려갔어요. 이것도 내나 건설구원이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 세 가지 적을 적인 줄 알고 싸워야 되겠습니다.
세 가지 적 중에 제일 큰 적이 내 마음을 길바닥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내 마음을 길바닥 만들어 놓은 것. 내라는 인격을 길바닥으로 만들어 놓은 이것이 제일 적이오. 이것은 힘으로도 안 됩니다. 성령이라야 됩니다. 성령이 오셔서 길바닥을 옥토로 만들어 줘야 되지 다른 이는 할 수 없어요. 내 결심이나 내 회개나 내 노력으로는 안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밖에 할 것이 없어요. 이것이 없이는 헛일입니다. 우리는 참 기도해야 됩니다.
나를 강퍅하게 만든 것, 나를 완패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냐? 수많은 인간들입니다. 그걸 접촉하는 가운데서 내가 이제까지 자라면서 거기서 내 마음이 강퍅해졌어요. 완패해졌어요. 옥토와 같은 심령이 안 되었어요. 이것을 돌이키는 데는 기도밖에는 없습니다. 기도해서 성령이 와서 고쳐 줘야 됩니다.
내가 실행할 때에 방해하는 원수는 나입니다. 순교를 왜 못 하느냐? 생명을 바치면 복인데 왜 못 바치게 되느냐? 자기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도 때문에, 하나님 때문에 깨어지는 그것이 살아나는 것인데 왜 깨어지지 못하게 되느냐? 자기 때문입니다.
이 자기가 원수인데 원수를 원수인 줄도 알지 못하고 원수를 추켜올리면 좋아합니다. 여러분들의 단체가 무엇이오? 원수 단체지요. 정말 우리를 살리는 단체인가! 살리는 친구인가! 살리는 벗인가! 살리는 다방에 모이는 것인가!! 생각해 보라 그말이오! 비참하고 가련한 사람들입니다! 구원을 이루는 자에게 손해갈까 싶어 말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에서 하는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죽기까지 하셔서 우리를 살렸어요. 이러기 때문에 욕을 얻어먹어도 대항이 돼도 말하다가 말하다가 마지막에 미움받아 공격당해 죽었습니다. 저들이 죽여서 시체를 길가에 내놓고 장사지내지 못하게 하고 저희들은 잔치했어요. 그럴 때에 위에서부터 생명이 와 가지고 살아서 올라간 것이 선지자들입니다.
원수의 놀음이 있으면 얼마나 있을 것이오? 얼마나 강합니까? 하나님의 사람들 앞에서는 그것은 두려운 것 아닙니다. 불빛 앞에 어두움은 많거나 크거나 당장 녹아져 버리는 것입니다. 불을 이기는 어두움이 있습니까? 빛을 이기는 어두움은 없습니다.
우리가 이 적을 깨달아야 됩니다. ‘허, 내가 그래도 대학 졸업인데.’ 그게 자기의 마음을 강퍅하게 했더라 그말이오. 자기의 마음을 강퍅하게 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 에누리하게 한 그 적을 알아야지요. 자기의 실행을 방해하는 그 적을 알아야지요. 마지막에 결실하려 할 때 방해하는 그걸 알아야지요.
옥토는 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 다 삼켜야 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도만이 나에게 자유하고 온 세상도 나에게 자유할 수 없는 그것이 옥토입니다.
세상도 내게 대해 권리가 없어요. 나도 내게 권리가 없어요. 하나님과 하나님의 진리만이 내 소유도 몸도 마음도 내 생명도 그것만이 자유할 수 있는 이것이 옥토입니다.
이게 그리 쉽게 됩니까? 이것은 힘으로도 능으로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결심이나 각오 가지고 안 됩니다. 아버지의 성령으로만 됩니다. 이러기 때문에 성령님이 오셔서 이 일을 이루어 달라는 것을 우리가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최상림목사님은 내가 만나 가지고 하도 간청해 물으니까 말했습니다. 그분은 옥토에 뿌린 씨 되기를 일생 동안 소원했습니다. 그러니까 그분이 순교했습니다.
왜정 말년에 순교했어요.
제가 진주성경학원에 가니까 전국 각처에서 학생들이 모였는데 내 눈에 봐도 다 썩었어요. 다 죽었어요. 생기가 없어요. 어쩌다가 생기 있는 학생이 있어서 그 학생을 살살 친해 가지고 물으면 최상림목사님 밑에서 온 사람, 박영기조사님 밑에서 온 사람 두 군데 사람들뿐입니다. 그 밑에 있는 사람들은 대개 다 그렇게 신앙으로 살고 그분은 순교했습니다.
길가를 파 뒤집어서 옥토가 되도록 해야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말씀이 인정 안 되는 이게 큰 사고입니다. 이것이 그만 첫째 실패입니다. 이것만 되면 그 다음에는 다 되는 것이오. 왜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인정이 안 되는지? 요것이 멸망의 원인입니다. 이것만 되면 그 다음 자기도 세상도 문제가 없는 것이오. 왜? 인정만 되면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이 안 되는 여기서 다 절단입니다.
이것은 아버지의 성령이 와서 해 주셔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가 기도해야 됩니다.
산에도 가고 기도도 하고 이래서 적어도 모든 사람이 ‘그 사람은 기도의 사람이라. 그 사람은 단식기도, 산기도의 사람이라.’ 하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조용기목사 교회도 말 들으니까 기도하는 목사가 하나 있어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되어진다고 하는데 그분이 보니까 단식기도, 철야기도, 산기도를 많이 하는데 그분을 인해서 어떻게 기도의 열이 일어나는지. 그분이 기도해서 그 교회에 내적으로는 그렇게 부흥을 시키는 것이고 껍데기는 조용기목사를 통해서 한다 이러는데, 그 목사가 나중에 말 들어보니까 자기 장모라고 합디다. 남자인 줄 알았더니마는 여목사랍니다. 조용기목사의 장모랍니다, 그 최자실목사가. 내가 언제 한 군데 신문에 보니까 그분이 그렇게 기도를 많이 한다고 합디다.
다 기도 많이 한 사람들이 자기 마음의 강퍅이 변화됩니다. 우리 마음이 얼마나 강퍅한지 모릅니다. 세상 것은 자꾸 우리 마음을 강퍅케 합니다. 지식은 강퍅케 하는 것이오. 인간들 말은 강퍅케 하는 것이오. 사람들의 말은 자꾸 우리 마음을 강퍅케 만들어요. 성령은 와서 우리 마음을 슬기롭게 만들고 예민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세상 일에 대해서는 예민하면서 하나님 말씀에 대해서는 예민치를 못해요.
성경은 세상 말은 무시하고 아주 멸시하게 합니다. 하나님 말씀만 경외하게 해요.
우리가 기도해야 됩니다. 아무래도 교역자들 기도하러 좀 가야 됩니다. 보따리 싸 가지고 산으로 가요. 여럿이 가지 말고 혼자 가요. 혼자 무인지경에 맹수 있는 곳으로 가 가지고 기도하고 오고 또 좀 있다 또 기도하러 가고, 어쨌든지 몇십 번 가야 됩니다. 그러면 자기 마음에 강퍅해진 게 없어집니다. 또 단식기도도 해야 됩니다. 이래야 되는 것이지 그냥 살 띵띵 쪄 가지고 평안하게 앉아서 요런 꾀 조런 꾀 꾀만 써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면 자기 죽고 남 죽습니다.
어쨌든지 기도하러 가십시오.
여기 OOO목사는 저기 천왕산에 가서 기도하는데 방에 있으니까 밖에 뭣이 깩깩거리는데 보니까 늑대가 와 가지고, 늑대인지 다른 짐승인지 몰랐을 것이오.
그래 가지고 막 깩깩거리는데 거기 들어오면 죽겠다고 영 죽을 지경이었더래요.
그게 뭐이냐? 안 믿는다는 말이오. 안 믿는다 그거요.
평소에는 믿는 줄 알았는데 그때 그 짐승만 와 가지고도 믿음이 없다는 증거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거야 암만 많아도 사람이 고함 지르면 다 달아날 것입니다.
고함도 못 지르고 질겁을 해서 들어오면 어쩔까 싶어서 죽을 지경으로 오그라지니까 그것이 믿음이 없다 그말이오. 믿음 없는 걸 알리기 위해서 한 것이오. 그러니까 믿음 없는 줄 아니까 믿음이 생겨질 것 아니겠습니까? 어쨌든지 교역자들 보따리 싸 짊어지고 기도하러 가십시오. 핏기나 있을 때에 가야 되지 나이 많으면 가지 못해요. 아무것도 없이 가면, 옳은 기도 하다가 굶어죽은 사람 없습니다. 죽게 되면 다른 사람을 보내서 짊어지고 와도 오지 그대로 죽도록 던져버리지 않아요. 또 짐승에게 물려가 죽은 일이 없어요. 참사람 되기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벌써 사람이 있는데, 성경에 보면 모든 짐승으로 사람을 두렵게 여겼습니다. 사람 손에 붙여 놨어요. 그런데. 그게 사람을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뭉쳐 가지 말고 혼자 좀 가 봐요. 혼자 못 가면 뭉쳐라도 가 가지고 우리의 마음이 강퍅한 마음을, 길가 밭 같은 강퍅한 마음을 변화를 시켜야 되지 이래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 죽고 남 죽이는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