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25 22:57
한상동 출옥 70주년, 역사적 의미와 과제
순교정신 계승하는 후예로 살아야 한다.
김영수 | kys7054@hanmail.net
코람데오닷컴 승인 2015.08.20 06:21:35
한상동의 환난 노정
한상동 목사가 평양신학교를 졸업할 시쯤에는 이미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할 때였다. 초량교회 100년사 문헌에 의하면 한상동 목사가 신사참배를 반대한다는 의지가 담긴 글은 1936년 10월 24일로 알려졌다. 이인재 목사 전기 등을 참작해 보면 부산 경남지방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한상동 목사가 중심이 되어 전개되었다.
부산지방은 한상동, 조수옥, 손명복, 배학수 등이, 마산지방은 최덕지, 염애나, 이찬수 등이, 거창지방은 주남선, 함안지방은 이현속, 진주지방은 황철도, 통영지방은 최덕지, 김영숙, 남해지방은 최상림 목사가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주기철 목사가 반대 운동을 하게 되면 성도들에게 엄청난 피해가 돌아오게 되므로 교역자 중심으로 반대를 하자고 제안한 반면, 한상동 목사는 조직적으로 세력화하여 동지들을 규합하고 범 교회적으로 적극 반대운동을 펼쳐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런 증언은 이인재 목사 전기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 이인재 목사는 한상동 목사를 가장 존경하는 동지로 지칭하였다. 이인재 목사는 밀양 마산교회를 사임하고 평양으로 가셨다. 문창교회에서 신사참배 문제로 쫓겨난 한상동 목사에게 교회를 맡기면서, 침묵의 종이라고 하셨다.
한상동 목사와 삼일교회 부목사로 사역한 수제자 신현국 美 에반겔리아 대학 총장과 심군식 고신교단 총회 총무도 그렇게 증언하였다. 이렇게 경남 지방에서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은 조직화되었다.
한상동 목사는 1940년 7월 3일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순사에게 채포되어 경남도 경찰부 유치장에 1년간 구금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다. 이듬해 1941년 7월 10일 평양형무소로 압송되어 5년간 옥고를 치렀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을 섬길 수 없다는 불굴의 신앙으로 인간의 우상화를 거부한 것이다.
당시는 조선 땅에 기독교가 전래된 지가 얼마 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조선 땅에는 예수를 잘 믿는 목사와 성도들이 많았다. 환난이 닥쳐왔을 때,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키는 일이 있자 대다수가 무너졌다. 불굴의 신앙으로 믿음을 지키면서 신사에 참배하지 아니한 성도나 교역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해방이 되자, 평양 산정현 교회에는 출옥 성도들과 수많은 인파의 성도들이 모여들었다.
우리 고려파 교회는 출옥 성도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이인재 손명복 조수옥에 의해 설립된 교파이다.
교회사가 박용규 교수는 해방 당시 평양의 상황을 이렇게 설명한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은 꿈에도 그리던 잊지 못할 감격의 날이었다. 거짓말만 같았으나 설레는 가슴은 억제할 수가 없었다.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면서 흥분의 도가니에 푹 빠져 온 밤을 지세우기도 했다. 평양 시내는 감격과 환희의 도가니 속에서 들끓고 있었고, 여기저기에서 숨어 지내던 성도들과 교역자 목사들이 모여 들었다. 갑자기 도적같이 찾아온 꿈과 같은 해방의 날을 맞이하였다. 해방 이틀이 지난 8월17일 금요일 오전 9시 평양형무소는 죄수들의 옥문이 활짝 열렸다. 옥중에 있던 성도들이 모두 풀려났다.
서울의 서대문 형무소는 400명의 항일 투사가 풀려났다. 청주, 대구, 부산, 광주 등지에서 애국 투사 내지는 신앙인들이 모두 풀려났다. 꿈이 아닌가 싶어 살을 꼬집어보는 이들도 있었다. 특히 평양의 성도들은 “시온의 영광이 빛나는 아침 매였던 종들이 돌아오네.”이 찬송을 우렁차게 목청을 높여 부르며,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주의 종들을 맞이했다.
평양형무소는 신사참배 반대로 투옥된 자 14명이 출옥했다. 이기선, 방계선, 오윤선, 한상동, 주남선, 손명복, 고흥봉, 김화춘, 서정환, 이인재, 최덕지, 조수옥, 안이숙, 박근신이다. 안이숙 박근신을 제외한 12명이 주기철 목사 모친이 살고 있는 신양리 셋집에 인사차 들려 기념사진을 촬영했다.
다음날 18일 오전 11시 한상동 목사 부인이 전세로 살고 있는 집 뜰에서 1천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방 감사 및 출옥성도 환영 예배”를 드렸다. 이날 예배는 한상동 목사가 인도하였다. 감격과 눈물바다를 이룬 예배였다. 한상동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고 또한 그 가족을 위해 통성기도를 드리자고 제안하였다. 모인 청중들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해방을 맞기도 이전에 주기철 목사(원초적 고신인 웅동교회 출신), 최봉석 목사, 최상림 목사, 박관준 장로는 먼저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산정현 교회는 신속하게 당회 기능을 회복하여 한상동 목사를 후임 담임 목사로 청빙하기로 가결 하였다. 또한 방계성 전도사, 주영진 전도사를 산정현교회 전도사로 시무하도록 결정했다. 한상동 목사의 설교는 영적 감화력과 은혜가 충만한 메시지였다. 많은 성도들에게엄청난 큰 감동을 안겨 주었다.
산정현 교회는 새벽 기도회를 열심히 드렸고, 10시에는 주일 성경공부를 하고, 11시에 주일 오전예배를 드렸으며, 2시에 오후예배, 7시에 저녁예배를 드렸다. 예배 시간마다 은혜가 풍성하고 충만했다. 한상동 목사의 영적 지도력과 영향력 아래 해방 후 한동안 산정현 교회는 평양 전역에서 놀라운 영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끼쳤다. 과거 평양대부흥 기간에 길선주 목사가 시무하는 장대현교회가 가졌던 위상을 대신하기도 했다. 산정현 교회는 이기선, 채정민, 김의창, 방계성 등 출옥성도들이 모여 들었다.
이 시점에 필요한 중요한 질문, 고신교회의 미래와 과제는 무엇인가?
역사가의 평가 기준
여타 교파에서는 찾아 볼 수가 없는 특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 고신교회 내부에서 선진들에 대한 비판은 이제 그 도를 넘어섰다고 말한다. 그 원인이나 뿌리를 분석해 보면 상당한 이유가 있다. 손성은 목사가 우려하고 지적한 대로이다. 고려파가 태동할 시점에 섞여서 들어온 무리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한번 뿌려진 씨앗은 여기저기로 번진다. 콩 심은데 콩이 나고, 팥을 심은 데는 팥이 난다.
일제 강점기 수인 돌봄이 김차숙 여사는 새롭게 평가되어야 한다.
한상동 목사의 부인 김차숙 여사는 일제 강점기 때, 수인 신세가 된 주의 종들을 돌보신 분으로 유일하다. 김차숙 여사는 평양에서 셋방을 얻어 살면서 평양 형무소 수인 신세가 된 주의 종들을 보살폈다. 그는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종들을 접하셨고, 남북한을 오가면서 얻은 정보, 소문들은 너무도 정확하다. 평양은 물론, 황해도, 신의주, 등지와 심지어는 만주 땅에서 일어나는 진리투쟁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김차숙 여사는 일제에 동화하여 누가 친일 반민족적 배교자이며, 불신앙자이며, 일제의 앞잡이 노릇을 한 자라는 것을 가장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파 교회를 함께 할 수가 없는 자를 정확하게 지목한 것이다. 이런 사실은 이번에 필자가 발굴한 중요한 교회사적 자료이다.
한상동 목사는 김차숙 여사의 정중한 건의를 전해 듣고, 상당한 시간을 두고 깊이 생각을 하셨다. 이후 한상동 목사는 “회개한 자는 받아들이고 함께 가야 한다.”는 말로서 부인 김차숙 여사를 오히려 설득했다고 한다. 김차숙 여사는 자기주장을 접고 너무 빨리 순종했다고 증언자 는 전해 주었다. 증언자 조영진 사모는 이근삼 박사가 유학하던 시절 7년간 한상동 목사 댁에서 함께 기거했다.
공인의 과오는 공개적이며 공식적인 회개가 있어야 한다.
동시대에 선진들의 제자로 살아온 우리는 “미소기바라이”를 한 자라고 할지라도 최소한 한경직 목사처럼 그래도 신앙양심을 가지고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야 한다고 여긴다. 해방 후 김길창은 경남노회에서 “미소기바라이”가 뭐냐? 고 돼 묻기까지 했다. 어처구니가 없는 너무도 뻔뻔스러움이다. 그런 그도 한 교회를 목회하였으며 사학을 잘 운영했다. 세상적인 기준과 잣대는 성경적 기준과 규범과는 거리가 멀다.
뜻있는 대부분의 고신인은 1952년 대한예수교 장로회 고려파 총노회가 창설된 이래, 10년의 세월이 지나기도 전에 고려파는 교권 정치에 휘말려 들었다고 분석 하고 있다.
기록과 통계 근거 자료는 역사에 그대로 남는다.
법통 경남노회사 자료를 살펴보았다. 1949년 이래 1974년 까지 노회장 역임자 횟수는 이약신 5회, 박손혁 4회, 한상동 6회, 송상석 22회, 이성옥 2회, 전성도 1회, 손명복 3회, 권성문 1회, 이기진 2회, 서방문 2회, 심상동 2회라는 통계가 나와 있었다.
이 통계 자료에 의하면 법통 경남노회는 교권자 1인의 지배하에 독재가 횡행했다. 하나님의 공의가 실현되어야 할 공교회적 “노회 교회”에서 상상할 수 없는 1인의 영도 하에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힘 든다. 한번 쳐 놓은 거물에 걸려들기만 하면, 누구도 살아남을 수가 없도록 정치력을 행사하였기 때문에 독제정치는 20년 이상 지속되었다고 본다. 교회사적으로는 처음 있는 사례가 아닌가 싶다.
부산 서부교회 백영희 목사 관련 사이트 자료에 의하면, 백영희 목사는 교권자의 방해와 황포로 청빙이 좌절되어서 결국 총공회를 설립하게 되었다고 주장한다.
존경할 자를 존경하고 사랑할 자를 사랑하는 자가 올바른 신앙인이다.
합동 측 서울 예서교회 원로 목사이신 박이천 목사는 “한상동 목사의 목회 철학” 이라는 저서를 “생명의 말씀사”를 통해 출간했다. 박이천 목사는 고려파 초기에 삼일교회 전도사로 2년 7개월간 사역을 하셨고, 결혼 전 한상동 목사 가정에서 7개월간 기거하면서 숙식을 같이 하기도 했다. 필자와의 통화에서 박이천 목사는 “내가 한상동 목사님이 어떤 분이신가를 기록으로 남겨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 출판을 하게 되었다.”고 솔직한 심정을 전해 주었다.
한상동 목사의 대다수 후학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주의 종으로 기억하고 있으며, 그 분의 신앙을 기리고 간직하고 있다. 전임 고신대 신학과 교수이며 선교사 이신 김형규 목사는 “왜 다시 한상동 인가?”를 반문한다. 김재현(한국고등신학 연구원장)은 “그분의 삶과 신앙 사상은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모범이 되어 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고신인을 비롯한 한국교회는 믿음의 유산을 남긴 선진으로 한상동 목사를 지목하고 기억하고 있다.
우리 후학들은 한상동 목사님을 생존하신 순교자로 부른다. 그 때 그분께서 그 자리에 계시지 않았다면, 오늘 우리는 지금 여기에 없다. 자랑스러운 고신 인으로서 살아가고 있지 못하였을 것임이 분명하다. 우리 모두가 다른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 것인지는 상상해 보고 싶지가 않다.
인터넷 사이트에는 오만하고 방자한 글들이 난무하지만, 그런 것은 예수님의 수난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여겨진다. “천국에 까지 따라 오지 않으니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그분의 말씀에 오히려 위안이 된다.
우리는 영적 안목을 가지고 지혜를 모아야 한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선진들의 신앙과 개혁주의 신학과 정체성이 명확한 역사관을 지키고, 보존해야 된다. 그리고 선진들의 신앙과 사상을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나아가 우리는 고려파 교회를 부흥, 성장시키는 일과 고려파 교회와 고신대학을 비롯한 고려학원을 시대의 조류와 세속의 물결에서 지키고, 보존하는 일에 더욱 힘쓰고 매진해야 된다는 시대적 소명이 있음을 자각하고 천명할 수 있어야 한다.
1950년 대 초 고려파 교회의 중심 한상동 주남선 손양원
이약신 박윤선 오종덕 목사와 한부선 선교사 관련 사진
▲ 1952년 고려신학교 교수와 학생 일동
▲ 1952년 고려신학교 교수일동 갈부이트 목사(미 정통장로교 선교부 총무 내한)뒷줄 좌로 함일돈, 갈부이트, 오종덕, 한명동 앞줄 좌로 한부선, 박손혁, 이상근, 박윤선, 장석인, 한상동
▲ 1952년 고려신학교 교수 강사 11명좌로- 한명동(성경신학) 장석인(교양과정) 이상근(신학)한상동(신학) 최의손(선교사 의사 자연과학) 오종덕(성경신학) 한부선(신학) 박손현(신학) 박윤선(신학) 마두원(선교사 음악담당 베토벤의 6대손) 함일돈(자연과학
▲ 1954년 완공한 고려신학교를 배경으로 만족해하는 한부선 선교사
▲ 1948년 7월 제2회 졸업식 졸업생, 교수, 학생일동앞줄 ①-주남선 목사 ②-이약신 목사 ③-손양원 목사
한상동 목사 약력
1901년 07월 01일: 경남 김해군 명지면에서 염전을 경영하는 한재훈 씨와 배봉애 여사의 8남 매(4남 4녀)중 네 번째로 출생, 2남으로 태어났다.
1906년 03월: 당숙 한금출의 양자로 입적
1907년~1910년: 다대포 서당에서 한문 수학
1910년: 다대포 실용학교 입학. 김성권 교사에게 애국심과 독립사상을 교육받음
1913년 03월 20일: 다대포 실용학교 졸업
1916년 03월: 동래보고 입학
1918년 03월 20일: 동래보고 중퇴
1918년 04월 01일: 다대포 실용학교 교사로 부임
1919년 03월 01일: 다대포에서 3.1 만세운동을 계획하였으나 경찰 감시로 뜻을 이루지 못함
1921년 05월 31일: 동래군 기장면 출신 김차숙 여사와 결혼
1924년 02월: 다대포교회 박창근 전도사의 전도로 예수님을 영접함
1925년: 세례를 받다
1926년 02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한씨 34명이 모인 문중회의에서 파양 선고를 내린 후 양부모 집에서 쫓겨 남
1927년: 진주 광림학교 교사로 부임
1928년: 진주 광림학교 교사 사임
1928년: 피어선 고등성경학교 입학
1929년: 피어선 고등성경학교를 폐결핵으로 중퇴
1929년: 고성군 학림리에 전도사로 부임
1929년~1933년: 경남 고성읍 학동교회, 하동군 진교교회, 삼랑진 교회 등에서 교회 창립
1933년: 평양 신학교 입학
1937년 03월 20일: 평양신학교 졸업
1937년: 초량교회 전도사로 부임
1937년: 경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문창교회 목사로 부임
1939년: 신사참배 반대로 문창교회를 사면함
1939년: 한상동, 윤용술, 이인재, 조수옥, 박인순, 백영옥, 임두연, 백금옥, 배학수 등 10여명이 수영 해수욕장에서 수양회 후 경남지역에서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시작함
1939년: 밀양 마산리 교회 목사로 부임하다. 이 시기부터 신앙을 같이 하는 동지를 규합하여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함
1940년 07월 03일: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일제 순사에 채포됨. 경남도 경찰부 유치장에 1년 간 구금되어 심한 고문을 당함
1941년 07월 10일: 평양형무소로 압송되어, 옥고를 치름
1945년 08월 17일: 평양형무소에서 해방과 함께 출옥함. 금요일 오전 9시
1945년 08월 18일: 평양 소재 김차숙 여사가 셋집으로 살았던 집 뜰에서 오전 11시 한상동 목사 인도 하에 1천명이 참석한 가운데 “해방 감사 및 출옥성도 환영 예 배”를 드렸다. 이날 예배는 감격의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한상동 목사는 “주기철 목사의 신앙을 본받아야 하고, 또한 그 가족을 위해 통성기도를 드리자”고 제안하자 청중은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1945년 09월: 평양 산정현 교회에 부임하다
1946년 04월: 남하(모친의 별세 소식을 듣고 남쪽으로 내려옴)
1946년 07월 09일: 경남노회 제47회 임시노회에 참석 고려신학교 설립 의지를 표명
1946년 07월 30일: 초량교회 위임 목사로 부임
1946년 09월 20일: 평양신학교를 계승하는 신학교를 설립하고자, 고려신학교를 주남선 목사와 함께 설립함. 손양원 목사(고려신학교 초대 총무), 이약신 목사(초대총회장), 한명동 목사(한상동의 實弟), 한부선 선교사, 박윤선 박사, 윤봉기 전도사, 황철도 전도사가 협력 동참함
1948년 09월: 미국 Faith 신학교에서 명예신학박사학위 취득
1951년 10월: 초량교회를 사임
1951년 10월 14일: 삼일교회를 설립
1952년~1962년: 고려학원 이사장
1952년 09월 11일: 신사참배 반대자들이 중심이 되어 고려파 총노회를 구성함
1953년~1956년: 경남노회장(제59~64회기)
1955년,1956년: 제4,5대 총회장
1956년~1958년: 부산노회장(1,2,3,6회기)
1957년,1961년: 제7,11대 총회장
1962년,1968년: 제12,18대 총회장
1969년 09월 25일: 고려신학교 교장
1970년 06월 10일: 저서 “신앙세계와 천국” 출판
1971년 01월 01일: 고려신학대학 초대학장 취임, 1972년 03월 화란 캄펜 신학교과 화란 31조파 개혁교회(De Gereformeerde Kerken in Nederland, 'Vrigemaakt'또는 Art. 31) 방문. 고려신학교 건축비로 화란 화폐 900,000 길더(미화 25만 불)을 지원 받아 전국교회 성도들의 모금으로 부산시 서구 암남동 34번지에 교사 1,700평 5층 건물을 신축함
1972년: 삼일교회 목사 은퇴
1974년 01월: 고려신학대학 학장 퇴임 및 명예학장으로 추대
1976년 01월 06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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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 2021.02.23-70 | 김반석 | 2019.05.26 |
71 | 초량교회 기도회와 인천상륙작전 | 선지자 | 2021.12.23 |
70 | 교파명 앞에 있는 국가명에 대하여 | 김반석 | 2019.07.23 |
69 | 한국교계 각 교파들의 분열사 | 김반석 | 2019.07.22 |
68 | 부산서부교회 백영희 목사님이 고신에서 제명된 사유 | 김반석 | 2019.07.22 |
67 | ‘교단’이란 용어는 일제가 한국교회를 탄압할 때 사용한 일제의 잔재적인 용어 | 김반석 | 2019.07.20 |
66 | 조용기 목사의 오순절교회의 뿌리는 1906년 아주사가(街)부흥 | 김반석 | 2018.05.19 |
65 | 1906년 ‘아주사가(街)부흥’의 실체 | 선지자 | 2018.05.1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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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 | 간추린 한국 교회사 연표 (선교사 활동을 중심으로) | 김반석 | 2016.0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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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 1906' 아주사거리부흥운동 | 선지자 | 2015.01.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