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선교하는 이유 (2)

2007.05.14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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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선교하는 이유 (2)
선지자선교회
이름 : 중선     번호 : 22
게시일 : 2002/03/07 (목) AM 01:59:21  (수정 2002/03/07 (목) PM 11:08:57)    조회 : 65  

■ 우리가 선교하는 이유 (2)


중국교회는 가정교회와 삼자교회가 있습니다,
삼자교회는 1949년 중국이 공산화된 후 생겨진 교회입니다.
중국이 공산화되고 5년 뒤인 1954년에 공산당에 굴복한 교회 대표자들이 224명이 모여서 "중국기독교 삼자 애국 운동위원회" 곧 "삼자회"를 건립하였습니다.
이 삼자회에 가입한 교회를 통상적으로 삼자교회라 부릅니다.


"삼자"라는 말은 자전, 자양, 자치, 이 셋을 한말로 "삼자"라고 말하는데
자전은 중국 교회가 스스로 복음을 전하자 하는 것이고
자양은 중국 교회가 스스로 양성을 하자는 것이고
자치는 중국 교회가 스스로 다스리자고 하는 것입니다.


본래 이 "삼자주의"는 중국에 처음 복음을 들고 들어온 선교사들이 중국의 교회들에게 강조한 부분입니다. 언제 까지 선교사들에게 의지하지 말고 중국 교회가 자라서 자전, 자양, 자치,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중국 공산주의 무신론 정부는 이 삼자주의를 악용하여서,
교회들에게
공산주의식 대로 복음을 전하고,
공산주의식 대로 교역자를 양성시키고,
공산주의 정치에 다스림을 받아서 공산주의 교회가 되라는 것입니다.

"삼자회" 라는 말의 뜻대로 교회를 중국 공산당 문화부 종교국 산하 "삼자애국 운동회"의 지도를 받아 교회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어야 하는데 공산당 정부가 머리가 되어 교회를 애국 운동하는 단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우리나라도 일제 신사 참배 때처럼 중국 교회도 이름 있는 교회 지도자들, 총회장, 노회장, 등이 앞장서서 주님이 피 흘려 구속한 교회를 "삼자 애국 운동회" 라는 세상 정치에 이용되는 제물로 내어놓게 된 것입니다. 삼자교회 예배당에 가서 보면 "애국애교(愛國愛敎)라는 표어가 걸려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삼자회"는 기독교적 교회 단체가 아니라 중국 정부의 하수인으로서 양의 탈을 쓰고 교회를 삼키는 이리인 것입니다.


이렇게 중국이 공산화되고 나서 교회 지도자들을 앞세워 교회를 단번에 삼켜 버렸고,
1950년도 중반부터는 "삼자 애국 운동"과 "정부의 정치"와 "사회주의 운동"에 적극 찬동하지 않는 주님의 종들을 탄압적인 박해를 하여 강제적으로 참여하도록 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교회와 목회자들이 변질되고 공산 무신론에 굴복하여 우상종교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박해에도 불구하고 많은 주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중국 정부에 굴복하지 않고 "삼자회"에 가입하지 않음으로서 자연히 예배는 은밀하게 되었고 장소는 지하적으로 되었습니다.


이렇게 "지하교회"가 중국 전역에 생겨지게 되었고 그에 따라 중국 정부는 "지하교회"를 반 정부단체로 간주하여 정부의 공안기관들이 삼자교회를 앞세워 고발하게 함으로 많은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감옥이나 노동 수용소에 갇히기도 하고 또 다른 지하교회의 정보를 자백하라 하면서 온갖 고문과 고형을 당함으로서 순교하는 종들도 많았습니다.


이 박해가 성도 개인적일 때도 있었지만, 한 마을 전체가 이런 박해를 당하였느냐 하면, 한 지역 전체가 당하였고 더 나아가 중국 전지역에서 박해를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교회는 더욱더 지하적이 되었으며 믿을 수 있는 가족 중심으로 모여 예배를 드리는 은밀한 "가정교회"가 생겨지게 된 것입니다.


그 후 1966년부터 1976년 "문화혁명" 시기에 홍위병들은 "삼자회"와 삼자회에 가입한 "삼자교회" 까지도 해체를 하였고 집을 수색하여서 단지 기독자라는 것과 성경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 가지고 죽이기까지 하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공산당 산하의 삼자교회 지도자들까지 계급적, 사상적으로 개조한다고 하여  "처음에는 감옥에 가두었다가 몇 년이 지나면 노동 수용소에 보내지며 거기에서 몇 년이 지나면서 사상 성분이 좋아 졌다고 판단이 되면 공장으로 옮겨 일하게 하였다"고 그 당시를 회고하는 목회자를 만나 보았습니다.


이렇게 극심한 박해 가운데에서 성도들을 지도해줄 목회자들은 없고 신앙 생활은 하여야 되고 하니 성도들의 영육의 생활은 어떻게 되었겠는가? 생각해 보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에서도 가정교회의 평신도들에 의하여 한 가정, 두 가정 이렇게 같이 모여 예배를 드렸는데 이런 곳을 "처소교회"라고 합니다.
처소교회의 평신도 중에서 신앙이 앞선 분이 처소교회의 맡아 예배를 인도하는데 이런 분들을 "처소교회 사역자"라고 합니다.

처소교회 사역자는 성경지식, "신학"은 부족하지만 "신앙"은 일당백(一當百)이어서 한국의 목회자들은  성경지식, 신학을 가르치러 갔다가 오히려 그 분들에게 신앙을 배우고 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가정교회와 처소교회는 중국 정부의 박해와 감시 속에서도 주님의 지극한 보호하심으로 지금 까지 굳게 서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삼자교회는 문화혁명으로 완전히 해체되었다가 1980년 중국 정부의 공산당 청책 전환으로 삼자회와 삼자교회의 활동을 다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삼자교회는 삼자회적 교회 지도자를 배출하기 위하여 각 성(省)마다 신학교를 하나씩 세워서 전도사, 목사를 양성한다고 하지만 중국 정부에 애국하는 종교 지도자를 만들기 위해 가르치고 있어서 신신학으로 급속히 변질되어 갈 뿐 아니라 심지어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는 신학교수들도 있는 실정입니다.

모 선교사에 의하면 2000년 6월 1일에 종교국에서 각 지역의 삼자교회에 다음과 같은 지침을 내렸다고 한다.

1, 구원에 대해 전하지 말 것.
2, 예수의 죽으심, 부활, 재림에 대해 전하지 말 것.
3, 세례, 성찬식을 할 때는 허락을 받아서 할 것.
4, 선행을 하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강조할 것.
5, 18세 이하는 절대 종교를 가질 수 없고, 복음을 전하지도 말 것.


진택민의 신사상의 목적

1, 모든 종교와 모든 민족의 신은 같은 하나님이다. 다만 다르게 이름을 부르고 있을 뿐이다.
    (종교 다원주의)
2,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함은 정치상의 반동이며 신학상의 잘못된 관념이다.
3, 종교 신앙의 전부는 믿음이 아니고 도덕이다.
4, 믿지 않는 자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


삼자신학의 대표자인 정광훈의 사상 건설은 바로 철저한 신앙개조이며 사회주의에 부적합한 신앙을 버리자는 것이다.

정광훈의 신사상은
1, 하나님의 최고의 속성은 공의가 아니고 사랑이다.
2, 하나님의 최고의 일은 창조이지 구원이 아니다.
3, 성도가 부활을 믿는 것은 신앙의 세계관이 아니다. 우리는 영원히 사는 문제는 더 사고할 필요가 없다.
4, 성경의 일은 치료하는 것이 아니고 먹어 보지 못한 것을 먹는 것이며, 생각하지 못했던 많은 것을 생각하는 것이며 해보지 못한 많은 것을 해보는 것이다.

5, 사람의 본성이 악한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 죄가 없다.
    유일한 하나님을 말하는 것, 영원무궁의 세계가 있다는 것, 사람에게 죄가 있다는 것, 들은 말하는 것은 잘못된 주장이며 이것은 기독교가 아니고 복음이 아니다.

6) 예수가 와서 하신 말씀 중에 말세의 소식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 이것은 군중을 기만하고 우롱한 것이기에 사회주의는 친근감이 없다.
    그는 최후의 심판 때 하나님이 묻는 것은 하나님을 믿었느냐? 안 믿었느냐? 가 아니고 약하고 굶주린 자에 대한 태도를 보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7) 교회의 사명은 전도나 간증이 아니고 윤리도덕을 높이는 것이다.
    우리가 전도를 강조하고 간증해서 사람이 많아지면 소질만 점점 낙후될 뿐이다.

8)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의는 도덕의 무용론을 부축이는 것이다.
    그래서 당연히 이애청의(以愛稱義)로 바꿔야 한다.

9) 기독교는 회개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각종 종교와 중국의 민간종교도 같은 내용이다. 그것을 배워보면 천당지옥, 신선, 귀신 등이 없고 인간을 인도할 피안의 세계가 없으며 믿고 안 믿는 것을 논하지 않으며 귀신이 병마를 준다고 하지 않는다.

10) 기독교는 믿음을 높일 것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널리 강의 해야한다.
    신앙개조 운동은 삼자교회에서만 가속화 될 것이고, 진정한 신앙이 있는 사람들은 분별하여 나올 것이다.



이렇게 가르침으로 신학생들은 "신앙의 불이 붙어 입학했다가 졸업할 때에는 불이 꺼진 재가 되어 나온다"고 하는 고백을 들었으며 "신학교 교수들에게는 배울 것이 없고 학생들끼리 모여서 신앙 간증을 하거나 선교사들의 교훈을 새김질함으로 은혜를 받고 눈물을 흘린다"고 하는 간증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가정교회는 삼자교회에 비하여 교인 수와 처소 교회의 수는 월등히 많습니다. 많은 만큼 신학교도 많아야 하지만 지하적으로 하여야 하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고 또한 좀 가르칠 만한 교수들은 세상 따라 삼자 신학교로 가버리고 또 참 주님의 종들은 있지만 극소수 이어서 그 많은 처소교회의 사역자들을 가르칠 수도 없는 실정인 것입니다.


처소교회 사역자들을 모아서 신학공부 한다 하여도 공안기관의 감시로 인하여서 20명 이상 할 수가 없고 지하적으로 은밀하게 하여야 하기 때문에 우리가 보통 "지하 신학교" 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1980년 중반부터 중국이 개방됨으로서 특히 조선족 처소교회는 한국의 선교사들의 왕래도 정기적으로나 비정기적으로 지하신학을 하게 되어 전도사를 많이 배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의 서부지역이나 남부 지역은 사역자 양성을 위한 지하신학이 전혀 안된 곳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리하여 지하신학을 한다고 하면 그 분들은 기차로 20시간은 보통이고 사흘을 타고 와서도 피곤한 기색이 전혀 없이 감사함으로 은혜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선교하는 지역은 AA입니다.
이 지역은 조선족이 많아 사는 지역인데 앞에 언급한대로 우리 한국의 선교사의 영향을 많이 받은 지역입니다.

과거에는 한국 교회의 도움으로 보이는 예배당도 많이 짓고 지하신학도 하였는데 이것만 배우고 이것만 있으면 목회를 잘하고 교회도 바로 성장할 줄 알았는데 어느 정도 지나보니 이것만 가지고는 교회가 안되고 목회가 안되니 이 지역의 사역자들이 요구하는 것은 목회에 참 도움이 되는 신앙을 전하여 달라고 요청하고 있습니다.

이리하여
처음에는 백영희 목사님의 "목회 설교록"과 "공과공부"를 전하였고,
다음에는 처소교회에서 설교를 하게 되었고,
다음에는 비정기적으로 한 주간씩 지하신학을 하게 되었고
지금은 총공회 교훈으로 공부하는 사역자들이 은혜가 된다고 소문을 내어서 다른 지역의 처소교회 사역자들이 찾아와서 공부할 사역자들을 모아 놓을 터이니 와서 가르쳐만 달라고 요청을 하고 있습니다.
또 삼자회 소속의 BB신학교 신학생들도 가르쳐 달라고 찾아왔습니다.

그것은
북한에는 목숨을 내어놓아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고,
중국에는 세상 소망을 내어놓아야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에
백 영희 목사님이 우리에게 세워주신 근본 총공회의 교리와 신조는 하나님 중심, 천국중심임으로 중국 교회들에게는 이질적인 것이 하나도 없고 동질적이며 신앙생활의 능력이 되기 때문에 가뭄에 단비를 만나는 것 같다고 너무나 기뻐하고 감사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이들에게 전하는 교훈은 우리가 별도로 만든 것이 아니라
이제껏 배운 백 영희 목사님의 교훈의 말씀을 그대로 전한다는 것입니다.

백영희 목사님이 일제신사 참배와 한국전쟁 때에 무신론 공산주의를 이긴 그 순생, 순교의 신앙을 전하는 것입니다.
중국의 가정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신앙을 중국의 사역자들에게 잘 전하여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학을 가르칠 때에,
그 신학으로 성경 말씀을 가르치고,
성경 말씀을 가르칠 때에는 성경 말씀 속에 나타난 우리 주님을 만나게하여,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우리 주님만이 구주이심을 전한 것 같이 우리도 이 복음을 그대로 전하여야 할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이 사도성을 계대 받아 바로 전하는 것이 우리 사역자들의 본분이며 사명인 것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작년 여름에는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 지역인 운남성의 소수 민족인 묘족 사역자를 위하여 한 주간 말씀을 전하였는데 외모적으로 키도 작고, 볼품도 없고 교육, 수준도 낮고 하여 이 말씀을 전하면 감당하겠나? 하고 의문을 가지고 전하였는데 한 시간, 두 시간 지나고 나면 성령의 감화 감동으로 은혜를 충만히받는 것을 확실히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지역에서도 첫 시간에 사역자를 만나 보면 외모만 보고 판단하는 일이 몇 번 더 있었는데,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시기를 "너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볼 것 있나, 내가 함께 하지 않느냐" 하는 음성을 들려주심으로 회개하고 그 후로는 그런 선입감을 가지지 않고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지난 2월에도 CC지역
청년, 사역자들을 총공회 교훈으로 한 주간 가르쳤는데 많은 은혜를 받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청년 사역자들이 본 교회에 돌아가서 교역자에게 말하기를 "전도사님! 말씀을 가르칠 때에는 가르치는 자가 먼저 믿고 가르쳐야 된답니다"하여 그 소리를 듣고 부끄러웠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이렇게 가르치고 심기만 하면 열매가 맺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또 조선족 사역자들의 소망과 기도는 "중국 13억 인구와 특히 북한 동포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하는 것이었습니다.
탈북자들에게도 많은 관심과 도움을 주고 있다는 소문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북한의 성도들을 위하여 얼마나 기도하고 있습니까?

또, 한 주간 공부를 끝내고 공부하던 사역자들이 각자 처소교회로 돌아가고 토요일에 좀 쉬고 있으니까 그 지역 사역자가 간청하기를 *** 에 가서 주일 예배를 인도하여 달라고 간청을 여러번 하였습니다.
이리하여 주일날 그 장소에 가서 모인 그들에게 우리 주님이 참 피난처이심을 증거하였습니다. 예배를 다 마치고 문을 나설려고 하니까 가지 말고 더 말씀을 전해 달라고 간청을 합니다.

그래서 "받은 말씀을 꼭 붙잡아라" 고 하였더니 "붙잡아라"는 말만 들렸는지 더 듣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서 그랬는지 "붙잡으면 참 말로 더 가르쳐 주실랍니까?" 하고 팔을 꼭 붙들고 놓지를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편들이
우리가 중국에 선교하는 이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