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사참배 거부한 한국교회의 보루 : 뿌리 깊은 믿음의 역사
선지자선교회
허순길 (전 고려신학대학원 원장)
한국 장로교 중에서 가장 순수한 신앙을 고수하는 고신파.일제의 신사참배 압력을 거부한 이후 기독교의 고난과 분열의 역사 속에서 꿋꿋하게 보수적인 신앙 자세를 견지해왔다. 47년의 역사를 가진 고신파는 현재 1천4백여 교회, 40만 교인의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으며, 해외선교와 군선교에 특별한 지원을 하고 있다.
개혁주의 신학, 순종의 신앙, 생활의 성결을 금과옥조로 지키는 고신파는 하지만 경남·부산 지역의 교세 편중을 타파하고 전국적 교세확장을 위해 수도권과 충청·강원 지역 등의 전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일제시대 한국교회는 일제의 압력에 못이겨 신사참배할 것을 결의하고 만다. 그러나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한 주남선·한상동 목사 등을 중심으로 고신파가 탄생하게 된다. 신학의 선명성 유지로 인해 합동과 환원의 과정을 거친 고신파는 63년 이후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 순교적인 순종의 신앙, 생활의 성결을 금과옥조로 지키고 있다.
해방 후 1950년까지만 해도 한국에는 하나의 장로교회만 있었지만 현재는 수많은 분파가 생겨났다. 이렇게 여럿으로 분파된 현실을 사람들은 의아하게 여길지 모른다. 그러나 교회라는 공동체의 본질적 속성을 아는 사람은 이러한 상황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할 수도 있다.
교회는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에 민감하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분파가 생기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모든 분파가 정당화될 수는 없다. 분파의 이유가 진리 때문이라고 교회 내외로부터 인정받게 될 때만 정당성을 갖는다.
고신 장로교회는 한국장로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분리된 교회로 분파에 대한 떳떳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그것은 무너진 한국교회의 개혁과 재건을 위해 싸우다 나뉘게 된 때문이다.
교회는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다른 신을 섬겨서는 안된다. 교회는 창조자요 구속자이신 하나님만을 섬길 의무를 지고 있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일제시대 이에 대한 큰 시련을 맞게 됐다.
일제는 조선을 정치적으로 합병(1910)한 후 정신적으로도 예속시키기 위해 갖은 수단을 동원했다. 이들은 가장 효과 있는 방편으로 그들 민족종교인 신도(神道)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했다. 그들이 국조(國組)라고 믿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섬기게 하고, 왕을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신으로 믿고 경배하도록 강요한 것이다. 조선과 일본이 참으로 하나 되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이상을 이루려 했다.
그런데 이 정책은 기독교의 진리와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이에 가장 크게 저항한 것이 기독교였다. 이때 일제는 신사(神社) 참배는 종교가 아니고 애국을 나타내는 국민의식이라고 둘러댔다. 시간이 지나면서 여러 교회들은 일제의 회유와 박해를 못이겨 정절을 굽히고 신사참배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여러 교파 가운데 장로교회가 가장 오랫동안 이에 저항했다.
그러나 이 장로교회 안에도 차츰 일제와 타협하는 지도자들이 생겨나게 됐다. 그 결과 1938년 제27회 총회는 신사참배를 국민의 애국의식으로 받아들이고 신사에 참배할 것을 공적으로 결의하게 됐다.
이제 한국 장로교회는 하나님이 명하신 제일계명을 공적으로 범함으로써 무너지게 된 것이다. 이러한 결의에 의해 한국교회가 무너졌지만 교회 안에는 신앙적 정조를 굽히지 않고 싸운 상당수의 교회지도자들과 신자들이 있었다. 이들은 순교를 각오하고 은밀하게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했으며, 드디어 일경에 붙들려 감옥에 들어가게도 됐다. 고신교회의 뿌리는 이들에게서 찾게 된다.
주남선·한상동 목사가 고신파 터 닦아
45년 8월15일 드디어 해방의 날이 왔다. 평양을 비롯해 여러 감옥에서 5~6년간 옥고를 치렀던 교회지도자들이 풀려났다. 이들은 모두 일제 때 무너져버린 한국교회를 재건해야 한다는 신앙적 열정으로 가득차 있었다. 이들 가운데 대부분이 주로 평안도와 경상도 출신 지도자들이었다. 이 가운데 특히 경남 출신인 주남선·한상동 목사가 고신파 교회의 터를 놓아준 사람들이다. 이들은 옥중에서 해방의 날을 내다보고, 한국교회의 재건을 설계했다.
이들은 해방이 되면 진리에 따라 살고 죽을 수 있는 목회자를 양성할 신학교를 세우고자 했다. 이들은 출옥하자마자 서로 만나 뜻을 맞추고 46년 9월20일 부산에서 고려신학교를 설립, 개교했다.
이 학교는 곧 경남노회의 인준과 협력을 받고, 교회 재건을 위한 사역자 양성에 들어갔다. 이 학교에는 전도사로 봉사하다 5년 이상 옥고를 치르고 나온 손명복·이인재 같은 분들이 학생으로 등록해 학내는 순교적 신앙 분위기가 형성돼 있었다.
하지만 이 학교의 길은 그렇게 평탄하지 않았다. 지난날 일제와 타협하고 신사참배를 해온 분들이 이 학교를 바라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이 학교를 무너뜨리기 위해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으며, 이 학교를 지원하는 경남노회에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해방이 되자 일제에 타협하고 신사참배했던 교회지도자들이 속속 자기 자리를 확보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기민하게 움직였다. 당시 평안도와 경상도 지역에서는 출옥한 지도자들을 중심으로 일제 때 범한 죄과를 회개하고 교회를 재건하자는 신앙운동이 일었다.
그러나 서울을 중심으로 한 중부지역에서는 옥고를 치른 분들이 별로 없고, 일제와 타협하며 살아온 분들이 주동되었기 때문에 단지 제도면에서의 교회 재건과 교권 확립을 위한 운동을 전개할 뿐이었다. 이들은 지난날 총회가 공적으로 신사참배를 결정한 일에 대하여 공적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지 않았다. 46년 6월 소위 ‘대한예수교 장로회 남부총회’를 열어 42년 이후 해체됐던 총회를 재건함으로써 제도적인 재정비를 꾀할 뿐이었다.
개혁주의 신학과 자유주의 신학의 대립
이로써 당시 한국에는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생활의 재건을 위해 세운 부산의 고려신학교와 자유주의 신학을 가르치는 서울의 조선신학교로 양립돼 있었다. 총회의 교권을 쥐고 조선신학교를 지지하던 사람들은 고려신학교와 이 학교를 지원하는 경남노회를 좋아할 리 없었다.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가 공적인 회개를 부르짖고, 교회의 재건을 외치는 등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결과적으로 총회는 교권을 동원해 고려신학교를 무너뜨리기 위해 고려신학교와 경남노회의 관계를 단절시키려 노력했다.
6·25 전쟁이 일어나 수많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몰려와 국난이 극에 달한 때였다. 51년 5월, 제36회 총회 속회가 부산 중앙교회에서 모였다. 이 총회는 고려신학교를 지원하는 경남노회 총대(총회대의원)를 거절하고 경남노회 안에 교권주의자들과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중심으로 새로 조직된 노회의 총대를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경남(법통)노회는 교권자들의 횡포로 한국장로교회로부터 축출당하게 됐다. 당시 경남노회를 축출한 총회가 진리 문제는 외면하고 교권에만 집착한 혼합집단이었다는 사실이 곧 드러나게 된다.
경남노회를 축출한 지 2년 후인 53년 총회가 다시 둘로 분열하게 된 것이다. 분열의 이유는 단순했다. 중도보수 노선을 표방하는 쪽과 순수한 자유주의 신학노선을 걷는 조선신학교 지지자들은 일시적으로 공동의 적에 대항하기 위해 규합했지만 같이 살아갈 수 없는 상황이었다. 후자에 속한 분들이 갈려나와 소위 ‘대한기독교 장로회’를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경남노회의 축출은 보수를 말하나 중도를 걷는 무리들과 자유주의자들의 교권이 함께 이루어낸 합작품이었다. 이제 축출당한 경남노회는 고려신학교의 순수한 개혁주의 신학의 지원을 받으며 한국교회 재건과 개혁주의 참교회 건설을 위해 새로운 길을 걷게 됐다.
51년 축출당한 경남노회는 52년 총회에 다시 총대를 파송해 불법을 시정해 주기를 바랐으나 무위로 끝나고 말았다. 경남노회는 이제 조직을 재정비하고 독립적으로 새로이 출발해야 했다.
52년 9월21일 진주 성남교회에서 경남노회가 모여 총노회로 조직할 것을 결의했다. 총노회에서는 이약신 목사가 회장이 되고 한상동 목사가 부회장이 됐다.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모인 교회지도자들은 한국 기독교계에서 교권의 장애를 받지 않고 교회 재건에 나설 수 있는 때를 맞은 것이다. 지난날 공적 회개와 교회 재건을 계속 외쳐왔으나 교권주의자들은 교권에만 집착한 나머지 이 부르짖음을 신성파(神聖派)의 소리로 비하시키며 조롱해왔다.
이제 총노회는 3주간 교회 공예배를 인도하지 않고 공적으로 일제 때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하기로 결의했다. 이로써 한국교계 안에 참된 개혁주의 신학, 신앙, 생활을 재건하기 위한 새 교회공동체가 생겨나게 됐다. 이 교회공동체는 오랫동안 장로교회 고려파라 불렸다. 이는 고려신학교를 중심으로 생긴 교회라는 뜻이었다. 지금 사용되고 있는 ‘고신’이라는 별명은 고려신학교파의 준말이다. 총노회가 출발할 당시 약 3백교회가 가담했다. 이 총노회는 56년 총회로 조직을 재정비했는데, 당시 교회수는 6백여개로 출발 때보다 배로 증가된 셈이다.
고려신학교파가 ‘고신’으로 불림
교회의 분열은 언제나 성경이 가르치는 진리대로 살지 않는 편에 책임이 있다. 성경의 말씀에 따라 살지 않는 교회는 언제나 분열의 비극을 다시 겪게 마련이다. 경남노회를 축출한 소위 장로회 총회는 53년 조선신학교측과 분열했다. 이 총회는 59년 다시 큰 분열을 겪게 된다.
일찍부터 이들 내부에 심각한 분열현상이 자리잡아온 것이다. 이들은 여러해 동안 세계기독교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계열과 복음주의 계열(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sts)로 내분돼 싸우던 중 대전에 모인 총회에서 분열하게 됐다. 당시 WCC를 따르는 측(통합)은 총회에 그대로 남고, 반대하는 측(승동)이 고신과 합동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들은 원 총회에서 분리해 나오는 명분을 찾기 위해 고신파와 합동을 주장했다. 합동 추진위원회가 양쪽에서 발족돼 계속 접촉하며 의견을 좁혀오다가 60년 12월13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전격적인 합동총회가 열리게 됐다. 합동은 쉽게 이뤄졌다.
그러나 신학교 문제로 난관에 부닥쳤다. 고려신학교를 명칭도 없애고 총회 분교로 운영했던 것이다. 고신파 지도자들은 고신파의 정신이 완전히 질식하기 전 고려파 교회를 구해내야겠다는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이에 따라 고려신학교의 설립자 중 한 사람인 한상동 목사를 중심으로 ‘고려신학교 복교선언’을 했다. 이것은 누구와도 의논하지 않은 하나의 폭탄선언이었다. 그러기에 이에 대한 이론도 많았다. 하지만 이 선언이 있은 후 지난날의 고신파 교회 안에는 교회도 옛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환원운동이 일어났다.
여러 지역의 노회들이 속속 복구되고 드디어 63년 9월17일 부산남교회당에서 대한예수교 장로회(고신) 환원 총회가 모여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다.
이때 지난날 합동을 주도한 지도자들이 합동으로 교회를 오도하게 된 잘못을 하나님과 교회 앞에 공적으로 사과하고 모든 목사와 장로들은 63년 9월23일부터 29일까지 1주일간 자숙하기로 했다. 고신교회는 합동과 환원의 과정에서 교회 3분의 1을 잃게 돼 합동시 6백여 교회였던 것이 환원 후에는 4백50여개로 줄었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고신교회는 가장 귀한 것을 되찾았다. 신학과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는 참된 교회를 건설하려는 이상을 되찾은 것이다. 진리에는 양보 없이 순교적 자세로 살아가자는 신앙의 전통도 되찾았다.
현재 고신파 장로교회는 1천4백여 교회, 40만 교인을 가진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이 교회는 보편교회를 믿으며 세계 개혁주의 교회들과의 제휴도 활발하게 전개하고 있다. 현재 “국제개혁교회협의회”(International Conference of Reformed Churches)의 회원 교회로 세계에 산재한 20여 신실한 개혁주의 교파 교회들과 친교를 나누고 있다. 고신파 교회는 한국의 교파 교회들 가운데 가장 뚜렷한 정체성을 가진 교회라 할 수 있다.
출발부터 전통적인 개혁주의 신학, 순교적인 순종의 신앙, 생활의 성결을 주장해 온 것이다. 물론 땅에 있는 교회인지라 결함도 많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CORAM DEO)라는 표어 아래 모두 성실하게 살려는 노력이 돋보이는 교회라 할 수 있다.
오늘 우리 주변에서 교회들의 화해와 일치를 외치고, 교회의 합동을 위한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고신 장로교회는 세상 끝날 때까지 주변의 흐름을 타지 않고 복음 진리를 파수하고 전하며 정체성을 지켜감으로써 참교회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줘 온 누리에 복이 오기를 기대한다. <고신역사기념관> (2009.7.21.고신사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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