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1:1-18 강해

2007.05.31 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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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1:1-18 강해 (예수님에 대한 四對觀)
선지자선교회
- 백영희목회설교록으로 김반석 목사 정리  2007 2차교정본


■ 예수님에 대한 四對觀 (요1:1-18) - 공과

<서론>

요1:1-18은 예수님께 대한 네 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첫째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 어떤 일을 하고 오신 것과 둘째는 오시기 전 어떤 분으로 계시다가 오신 것과 셋째는 오실 때에 무엇을 하시려고 오신 것과 넷째는 성도 된 우리들의 할 일은 무엇인가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본론>

1. 오시기 전 영계와 물질계와 그 가운데 있는 크고 작은 모든 것을 홀로 다 지으셨습니다. 오늘까지 재창조의 모든 역사도 주님이 하십니다. 또 세상을 그가 지으시고 지금도 계속 운영하고 계십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모든 것은 그의 땅이요 그의 것들입니다. 이것이 오시기 전 에 하신 일입니다.

2. 오시기 전 그분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이시요 이름은 '말씀'이라는 이름을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영원 전 하나님께서 일을 시작할 때부터 시작하신 모든 일을 같이 하시고 계속하신 삼위일체 중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3. 생명을 가지고 오셨으니 이 생명은 하나님의 본체가 가지신 모든 능력을 가리키심입니다. 이 생명에 접하면 사람들은 비로소 빛이 되고 빛으로 영원히 살게 됩니다. 어두움이라 함은 인생의 사망과 모든 불행을 가리키고, 빛은 생명과 행복의 것들을 빛이라 칭합니다. 그러므로 어두움이 된 인생을 빛 되게 하시려고 오셨습니다.

4. 지극히 크심의 대상인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가?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나 우리는 그를 알았고 우리가 믿기만 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이루어가게 됩니다. 믿는다는 말은 우리의 지식으로 하나님의 지식을 영접하고, 우리의 능력은 그의 무한한 능력을 영접하는 이 일을 계속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는 것은 하나님의 온갖 충만을 상속받고 그 무한 상속을 감당할 만한 하나님 같은 자로 성화 되어져 가는 것을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우리의 할 일은 어디서나 지체말고 믿음에서 믿음으로 달려 종착을 향하여야 합니다.

<첨부>

■ 요1:1-18 강해 (예수님에 대한 四對觀) - 김반석 정리

●(요1:1)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는 이 '말씀'과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신구약 성경 같은 그런 '말씀'을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여기 '말씀'이라고 나타낸 것은 제 이위 성자의 이름을 '말씀'이라고 나타내신 것입니다.

여기 '태초'라는 말은 인간의 말로 표현하려고 하면 인간에게 너무 거리가 멀어서 따라오지 못할 것이기 때문에 '태초'라고 말씀을 하셨지만, 영원 전과 이 구원에 자존하신 당신이 역사하기를 시작하신 것을 합해서 '태초'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는 이 '태초'는 창세기 1장에 있는 태초와 다릅니다. 창세기 1장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는 그 '태초'는 시공 세계를 창조하실 때의 '태초'이며, 요한복음 1장 1절에 있는 '태초'는 '영원 전'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알파와 오메가(계22:13)'라 하신 말씀 중에 '알파'입니다. '영원 전'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는 이 '태초'은 천지 창조의 그 태초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 전 태초를 말씀하신 것인데, 그러면 말씀이신 제 이위 성자 하나님께서 계신 때가 있었다는 말이 아니고 창세 전에 하나님께서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을 위해서 역사 하신 그 목적을 정하신 그때를 가르쳐서 '태초'라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 '태초'는 제 이위 하나님께서 역사로 나타나신 그때를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이고, 하나님께서 계신 그 시간은 유한 된 우리가 정하지 못하는 영원 전에 계셨습니다.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여기에 '말씀'은 예수님을 가르쳐서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신성의 이름이 '말씀'이라고도 나타내셨고, 또 예수님의 그 신성을 '그리스도'라고도 나타내셨고, 또 '영존하신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고도 나타내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신성으로서,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오시기 전 하나님으로 역사 하실 때 그때 이름을 '말씀'이라고 하는데 1절에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본체는 하나이신데 삼위일체 하나님의 삼위 중에 한 위로 계신 것을 나타내어서 말씀합니다. 이 '말씀으로 말미암아 만물이 지은바 되었으니 영계의 것이나 물질계의 것이나 모든 것은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오시기 전에 모든 것을 지어 놓으시고 오셨습니다.

(빌2: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오시기 전에 영계의 것도 물질계의 것도 다 예수님의 신성이 지어놓으시고 오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만물을 지으셨다' 이렇게는 말을 못 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인성을 입고 나타나셨을 때에 그때 이름을 예수님이라고 성경에 나타내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라는 이름은 신성과 인성 신인양성일위로 나타나신 그 후에 이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다고는 말을 못 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인성이 천지만물을 창조했다는 말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는 말을 못하나 예수님의 신성이 천지 만물을 창조해 놓으시고 육신이 되어 우리를 구원하려고 오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창세기 1장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하시고 '하나님께서 물위에 운행하셨다' 또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인도하시고' 또 '숲 속에 숨은 것을 찾아 만나시고' 이렇게 하신 그 하나님이 곧 도성인신 하신 예수님의 신성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또 그 후 계속해서 노아 때에 홍수 심판하신 분도 예수님의 신성이시요. 모든 인류가 다 멸망 받는 가운데 노아의 여덟 식구를 구원으로 인도하신 하나님도 예수님의 신성이 인도 하셨습니다.

그것을 가르쳐서 10절에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하신 것이니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말씀은, 이 시공세계 역사세계를 주님이 지으셨습니다. 도성인신 하시기 전에 신성이 이 세상 모든 것을 지으셨고 또 그 후 세상이 오늘에 이른 이 세상도 예수님의 신성이 다 지으신 것입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는 이 '말씀'은 영원 자존하신 삼위일체 하나님 중에 제 이위 성자 하나님을 말합니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당신이 목적을 정하시고 이 도(道:구원의 역사)를 시작하신 그 하나님의 이름을 가리켜서 '말씀'이라고 하셨는데 그분이 곧 하나님이라.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니까 이 '말씀'은 원어로는 '로고스'라 하는데 성경에 '로고스'라고 대문자로 쓴 것은 '제 이위 하나님'을 가리키고, 소문자로 쓴 것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말씀'을 가리킵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러면 '말씀'이라는 하나님 곧 제 이위 성자가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하는 이 말씀은 하나님은 삼위일체이신데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되시기 전 신성만으로 계실 때는 '그리스도'라 또 '말씀'이라 하고, 신성과 인성이 일위가 되어 있을 때는 '예수님'이라 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에 거하실 때에 그때 이름을 '예수님'이라 했고,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오시기전 하나님으로 계실 때는 '말씀'이라 또 '그리스도'라 또 '성자'라 하셨습니다.

그러면 '말씀은 하나님이시라 하나님과 같이 계셨다' 그 말은 삼위일체의 하나님은 그 위가 성부라고 좀 더하고, 성자라고 조금 덜하고, 성령이라고 덜하고 이런 것이 아니라 위는 셋이지만 본체는 하나입니다. 본체는 한 분이신데 위는 셋입니다.

이는 무한한 분이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그 무엇을 가지고 비유는 할 수 없지만, 한 사람이 그 가정에 호주도 되고 아버지도 되고 남편도 되는 것은, 남편이라고 다른 사람, 아버지라고 다른 사람, 호주라고 다른 사람이 아니라, 한 사람이지만 이름이 각각 다른 것은 직명입니다. 직위 직책의 이름입니다. 직명 직책의 이름이 호주라면 호주의 직책이 따로 있고, 아버지라면 아버지 직책이 따로 있고, 남편이라면 남편의 직책이 따로 있는 것처럼,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위가 셋입니다. 한 사람이 그 자체의 변질 없이 직책은 이것도 저것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형을 모형으로 비유한 것이라서 다 맞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인데 우리 인간의 유한한 존재로 나타내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그 말씀은 삼위일체 중에 한 분이라는 것을 표현해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 하셨습니다. 그분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는데 그분이 창조하지 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요1:2)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가(말씀=영원자존 하신 분=예수님의 신성=그리스도=제 이위 성자 하나님), 태초에(영원 전 역사 하실 그때),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삼위일체 하나님으로 계셨고) 하는 말씀입니다.

●(요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만물이라고 말하면 영계의 것과 물질계의 것 전부를 가리켜서 만물이라고 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영계와 물질계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제 이위 성자 '말씀'이신 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영계나 물질계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도 그분이 짓지 아니한 것이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주님께서 짓지 아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만물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라고 말하면 잘 알아야 됩니다. 예수님이라고 말하면 하나님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온 그 사람까지를 합해서 예수님이라 이름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오시기전 '말씀'이라 또 '그리스도'라 또 '성자'라 이렇게 이름을 나타내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오셨을 때는 곧 하나님이시며 사람이신 신인양성일위가 된 그때부터는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렇게 예수님이 나시기 전에 천사가 와서 알려 줌으로 '예수'라 이름을 지었습니다.

천지만물을 예수님께서 지었다 하면 예수님의 인성까지 다 포함되기 때문에 혼동(混同)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지으셨는데 예수님의 인성이 아닌 예수님의 신성이 지으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오셨는데 그 사람은 피조물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인성은 우리와 꼭 같은 피조물입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우리와 꼭 같다는 것은 피조물성(被造物性)이 꼭 같다는 것이지 우리 사람의 인성이 가진 본질, 본성, 능력과 꼭 같다는 말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성령으로 잉태되셨고 우리 사람은 부정모혈로 잉태되었기 때문입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러면 영계나 물질계에 있어서 보이는 것, 보이지 않는 것, 작은 것, 큰 것, 어떤 것이든지 예수님의 신성이 짓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예수님의 신성이 지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신성은 이런 분이신 것을 우리가 알고 믿어야 됩니다.

예수님은 영원전 자존하신 하나님이신데 이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의 모양(빌2:8)을 입고 오셨습니다. 이렇게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오셨지만 실은 하나님이십니다. 이분이 언제부터 계셨느냐하면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에 공자나 맹자나 석가모니 보다 후에 나타나셨으니까 그때 생긴 분으로 여기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시기 전 목적을 정하시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하신 때인 영원 전부터 계셨습니다.

●(요1:4)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영원 자존하신 하나님께서 홀로 계시면서 목적을 정하시고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보존하시고 운영하시는 하나님의 본체에 있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그 능력을 가지고 왔다는 말입니다.

자존하신 하나님의 본체가 계시고 그 본체에게 온갖 능력이 있었으니 사랑의 능력, 은혜의 능력, 창조의 능력, 주관의 능력, 심판의 능력, 통치의 능력, 등 하나님의 능력이 있는데 그 능력을 가리켜서 생명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무엇으로 창조하셨습니까? 생명이 창조했습니다. 이 생명은 하나님의 힘이라 말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말씀'이 사람을 입고 오셨지만 그 속에는 자존하신 하나님의 그 무한하신 능력이 그분 속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이 생명이 무엇 하려고 오셨습니까?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접하게 되면 사람들의 빛이 됩니다. 여기 빛이라 말은 어두움과 빛 두 가지로 발표하기 위해서 하는 것인데 전기 빛 같은 그런 빛이 아니고 여기 빛이라고 말하는 것은 사람들이 알기 쉽게 하기 위해서 하나의 표현 방편입니다.

죽음은 어두움 사는 것은 빛, 슬픈 것은 어두움 기쁜 것은 빛, 실패는 어두움 성공은 빛. 바른 것은 빛 삐뚤어진 것은 어두움. 사랑은 빛 미움은 어두움. 파괴는 어두움 건설은 빛입니다. 이렇게 도덕의 빛, 활동의 빛, 모든 사람들의 복에 대한 빛. 지능에 대한 빛, 모든 역사에 대한 빛, 이렇게 빛이라 말한 것은 전부 좋은 것, 사는 것, 지혜 있는 것, 능력 있는 것, 옳은 것, 기쁜 것, 즐거운 것, 평안한 것, 성공과 영광 있는 것, 존귀 있는 것, 모든 선한 것, 바른 것, 곧은 것, 이런 것을 한 말로 빛이라 말씀하셨습니다.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께서 생명을 가지고 오신 것은 이 생명이 사람들에게 접선이 되면 마치 죽은 송장에게 생명이 가면 송장이 일어나 살아 역사 하는 것처럼, 생명에 접선이 되면 인간들이 빛으로 나타납니다.

'사람들의 빛이라' 인간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후회할 것이 없는 자로 옳고 바르게 되어서 하나님 다음의 위치를 감당하고, 천상 천하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 다음으로 필요해서, 하나님은 빛 된 예수님께 또 피조물들은 빛 된 그 예수님께 곧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 중보의 역할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지도록 이 일을 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말씀입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피조물인 우리 사람들이 하나님과 연결되는 방편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서만 연결이 되지 다른 것으로는 연결이 안 됩니다. 예수님의 인성이 세 가지 공로를 베풀었기 때문에 이 세 가지 공로 면으로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과 연결됩니다. 그러면 사람들에게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지금은 무엇 하려고 오셨는가?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생명 가지고 무엇 하려고? 사람들을 빛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모든 영계와 물질계 천상 천하의 모든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처럼 필요 있는 존재가 되고, 하나님처럼 만족케 해 줄 수 있고, 하나님과 같은 의무, 책임, 본분, 사랑, 생명, 능력의 역사를 할 수 있는 이런 자 되게 하기 위해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예수님 안에서만 인간이 하나님과 결합될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 안만에 생명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생명이 있다'는 말씀은 생명은 하나님과 결합인데 예수님 안에서만 생명이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서만 신인결합이 있습니다. 생명은 신인결합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이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은 신인결합이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빛이라' 말은 이 생명으로서만 사람들이 영생을 할 수 있다. 옳은 것을 할 수 있다, 바른 것을 할 수 있다, 깨끗한 것을 할 수 있다. 심판 면할 것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어두움을 정복하는 것은 빛 외에는 없습니다. 어두움은 세상의 모든 죄악, 사망, 모든 더러운 것을 다 총칭한 말인데, 이것을 이기는 것은 빛만이 이길 수 있는데 이 빛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된 행동이 빛이기 때문에 그것은 어두움을 정복한다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세상을 이기는 이김은 하나님과 영이 연결된 자가 하나님과 연결된 심신의 움직임으로 세상을 이깁니다. 그 자에게 세상이 정복을 당합니다.

어두움은 우리를 박해하는 어두움인데 하나님과 연결되면 그 어두움에게 해를 받지 않는 것은 그 어두움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어두움을 잡아먹고 강해집니다. 주님과 결합이 잘 됩니다. 다니엘처럼 어려움을 주는 어두움이 하나님과 연결된 그 행위에서 깨져버립니다. 녹아져 버립니다. 다니엘을 죽이려 하는 세력들이 다 녹아져 버렸고 없어져 버렸습니다. 다니엘이 믿음으로 나가니 '파사' 나라에 다니엘을 반대하던 정권과 모든 것이 바짝 깨져 버리고 다니엘을 환영합니다. 이것이 다니엘을 보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이 사건으로 인하여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게 됩니다. 믿음의 유익이 되고 구원의 유익이 됩니다.

예를 들어 어두움이 예배당 안에 가득 차 있는데 어떤 용사가 칼을 가지고 창을 가지고 휘둘러 봤자 그 어두움은 꼼짝도 안 합니다. 성냥개비에 불태우던 꼭 벼룩 만한 반디 불이라도 그것이 있으면 그 빛이 정복한 범위 내에서는 어두움은 깨져 버렸지 어두움은 빛을 삼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우리에게 가르쳐서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니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요1:5)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어두움'이라는 것은 삐뚤어진 것을 말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하나님께로 나온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 생명성, 하나님께로서 나온 완전한 것, 완전한 보존, 완전한 힘, 완전한 지능,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이 완전이 어두움에 비치되, 완전이 아주 잘못된 것, 삐뚤어진 것에 와서 비치지만 잘못된 것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하나님께 인간이 필요한 모든 것이 있는데 이렇게 인간에게 필요한 그 모든 요소를 가리켜서 빛이라 합니다. 그러면 왜 빛으로 비유했느냐 하면 빛으로 비유한 것은 온전하다, 깨끗하다, 참되다, 영원 불변되다, 영생의 것들이다, 그런 것을 표시해서 빛이라 하셨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치되' 영생이 영원 사망에게 비치되, 온전이, 완전이 그 반대인 아주 몹쓸 것에 비치되, 곧은 것이 그것의 반대인 굽은 것에 비치되, 어두움은 피조물을 멸망케 하는 그 모든 것을 총칭해서 어두움이라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로 온 옳은 것이 어두움에 비추되 어두움이 대립되어지지 어두움 스스로는 이 빛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 빛이 오면 어두움은 다 녹아져 버리고 죽어져 버리기 때문에 이 어두움은 빛을 반대합니다. 인간은 어두움에게 묻혔기 때문에 이 빛이 왔지만 이 빛이 오면 인간이 완전히 죽어서 새로 살아나야 되기 때문에 인간과 빛은 서로 충돌이 됩니다. 그래서 눅12:51에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도리어 분쟁케 하려 함이로라'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삐뚤어진 것에 옳은 것이 오면 대립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요1:6-8)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저가 증거 하러 왔으니' 세례요한은 증거 하러 왔습니다. 무슨 증거를 하러 왔는가?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빛이라 하는 것은 곧 성자 예수님을 가리켜서 빛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성자 예수님을 증거 하러 왔다는 말씀입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독생자요 하나님이신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왔다는 말씀입니다.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해서 증거 하러 온 자입니다.

●(요1:9) 참 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나니

참 빛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그러면 세례요한은 빛에 대해서 증거 하러 온 것이 세례요한이요. 오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반사시키기 위해서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계심으로 우리를 통해서 빛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빛이 아니요 성경에 '빛을 맡은 자'라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참 빛이 있었으니' 참 빛 예수님이 있었으니 무엇 하러 오셨느냐 하면 우리를 빛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사람들에게 비취는 빛이라' 그러면 우리에게 생명이 온 이유는 우리를 예수님과 꼭 같은 자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예수님과 꼭 같이 제 이의 예수를 만들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는 참 열매요 우리는 그와 꼭 닮은 그 다음의 열매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결실이 되어지는 우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생명을 무엇 하려고 주시느냐 하면 세상의 빛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 생명을 받는 비결이 무엇이냐? 영접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과 또 내세의 무궁세계 피조물들에게 가장 필요한 빛이 되려고 하면, 빛이 된다는 말은 생명이 나와서 역사 할 때에 그것을 가리켜서 빛이라 표현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빛이 되는 데는 어떻게 되느냐? 그 이름을 영접하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영접하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곧 믿는 것입니다.

그 이름을 영접하는 것은 곧 믿는 것이니 믿는 것은 어떤 것이 믿는 것이냐? 내 지식으로 그분의 지식을 붙들고, 내 능력으로 그분의 능력을 붙드는 것, 내 지식과 능력은 그분의 지식과 능력을 잡는 데만 써야 되지 제 지식 가지고 저를 행복 되게 하려고, 제 지식 가지고 저의 불행을 면제해 보려고, 제 능력 가지고 자기를 행복 되게 해 보려고, 제 능력을 가지고 자기의 불행을 감소시켜 보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며 다 오용입니다. 그렇게 쓰면 망쳐지는 것뿐입니다.

쥐약은 쥐를 잡아야 요긴한 것이 되지 쥐약을 제가 먹으면 되겠습니까? 이와 같이 무엇이든지 용도를 바로 하지 않으면 망하는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 지식과 우리 힘의 용도는 하나님의 지식과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는 여기에만 전용되어야 합니다.

내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을 옳다! 참되다! 인정을 해서, 내 지식 전부보다 당신의 지식을 내 지식으로 삼아 내 지식은 당신의 지식을 환영하고, 당신의 지식을 인하고, 당신의 지식을 내가 영접하는 여기에만 써야 됩니다.

또 내 힘은 내 힘 가지고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능력을 내가 영접하기 위해서 씁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영원 불변의 것으로 만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능력을 끌어오는 여기에 전용하는 힘이 되는 것입니다. 내 힘으로 보이는 것은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들어진 것이 완전성 영원성 불변성의 것은 안 됩니다.

●(요1:10)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이라고 하는 것은 어떤 것을 세상이라고 하는가 하면 시공 역사가 시작한 그때부터를 가리켜서 세상이라고 합니다. 시간이 생겨졌고 또 공간이 생겨졌고, 모든 피조물들이 생겨지는 그때부터를 가리켜서 세상이라 말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하는 것은 도성인신 하셔서 오시기 전에 우주를 창조하실 그때에 이분이 계셨다는 말입니다. 이분이 창조하셨고 이분이 창조하실 그때에 계셨습니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물질계로 되어 있는 이 우주의 모든 존재를 그 분이 창조하신 것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인간이 창조되어서 에덴 동산에서 타락한 것과 또 타락한 이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대속한 이 모든 것이 다 합해서 세상입니다. 인간의 타락이나 구원이나 이런 것이 다 주님으로 말미암아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에 이런 죄악, 저런 의, 이런 시비, 저런 전쟁, 이런 흉년, 저런 풍년, 이런 비바람. 저런 변화, 이 역사 세계가 이루어지는 것, 하나님 앞에 지음을 받은 것들이 서로 교제하고 관계를 가지고 움직이고 하는 그것이 다 세상입니다. 그러면 그런 것을 다 주님이 하셨다 그 말입니다. 여기 지금 꽃 한 송이가 피어 나왔습니다. 또 그것이 졌습니다. 그것을 자연이라고만 생각하는 사람들은 좁은 사람입니다. 그것도 다 세상 속에 포함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 났습니다. 났다가 병을 앓았습니다. 그러다가 치료를 받았습니다. 그러다가 죽었습니다. 그러면 병들고, 낫고, 죽고, 잘살던 사람이 못살고, 못살던 사람이 잘살고, 약한 나라가 강한 나라되고, 강한 나라가 약한 나라 되고, 없던 나라가 생겨지고, 있던 나라가 없어지고 하는 것이 세상입니까? 세상 밖의 것입니까? 한번 대답을 해 보십시오. 대대학(大大學)에 가도 무신론을 궤 뚫지 못합니다! 그것은 다 죽은 길입니다! 그 모든 것은 세상 안에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지극히 작은 것이 둘이 나뉘어지고 합해지고, 이렇게 움직이고 저렇게 움직이는 그 전부를 이 분이 하셨고, 이 분이 지으셨고, 지어 놓은 것을 지금 운영하는 것도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오신 신인양성일위의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는 일을 하시고, 또 신성으로서는 이런 것들을 직접 운영하고 계십니다. 지금도 세상을 운영하시는 분이 예수님의 신성이십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께서 이 모든 것을 혼자 단독 경영하시고 단독 섭리하셔서 된 이것이 세상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런 분이신 것을 우리가 알고 믿어야 합니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이런 예수님께서 도성인신 하셔서 오셨지만 세상이 모른다 그 말입니다, 알지 못하였고.

●(요1:11)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땅에 오매' 땅은 물질계 가운데 지구를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물질계 지구를 당신이 만드시고 이 당신의 것에게 주인으로 찾아오매 하시는 말씀입니다. '자기 땅에 오매' 이 지구만 당신 것이 아니라 이 우주도 당신 것이요 전부가 당신 것입니다. 당신 것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신론자도 당신 것이요, 또 모든 잡신도 당신의 것이요, 또 우주도 당신의 것이요, 강대국도 당신의 것이요, 우주 공간의 별들 세계의 것도 다 당신의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백성이라 말은 땅 위에 있는 믿는 사람이나 믿지 않는 사람이나 모든 사람은 다 하나님께서 통치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자기 땅에 오셔도 사람들이 영접지 아니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만드신 이 세상에 오셔도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영접하지 안 한다 하셨습니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 오시기 전에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것을 지으셨고, 역사 세계도 지으셨고, 지금도 직접 홀로 운영하시고 모든 것의 주인공이십니다.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하나님께서 선포한 말씀의 획 하나도 변동을 못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분이 오시기 전에 한 일이 무슨 일인가? 모든 것을 지으신 것, 세상을 만드신 것, 모든 것의 주인이신 이것을 우리가 믿어야 됩니다. 아무리 원수라도 그 사람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의 주인이 주님이시기 때문에 함부로 취급을 하면 안 됩니다.

모든 존재는 주님께서 지은 것이라 하는 이 지식은 천하에 가득 찬 모든 인간 머리에 나온 지식보다도 뛰어납니다.  역사 세계의 모든 세상은 그 분이 지으셨고,  그 분이 당신의 필요에 따라서 지금도 운영하시고 경영 유지하고 계신다 하는 이 사실을 세상을 대할 때에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모든 존재의 주인은 주님이라 주님의 소유라 이것을 믿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를 믿을 때에 타락한 인간에게서 머리를 들고, 타락한 인간선 위에 머리를 꿰뚫고 올라가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모르는 자는 제 아무리 잘나고 세계의 모든 것을 거머쥐고 움직인다 해도 사람 수에 계산할 것이 없어! 타락한 그것은 지저분하게 지옥 채울 것 밖에는 안됩니다.

●(요1: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는 자' 전 인류가 영접하지 안 하는데 영접하는 자가 있으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예수님을 믿는다는 껍데기는 '예수님을 내 구주로 믿는다' 하는 것인데 '이름'이라는 그 속의 뜻은 무엇인고 하니 예수님이 행하신 공로를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는 것은 예수님이 대형의 사죄, 대행의 칭의, 대화목의 화친, 대생(代生)의 부활로써 새 소망 가진 이 대속을 믿는 것을 가리켜서 그 이름을 믿는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름'이라는 것은 예수님의 사활대속 공로를 말하고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는 것은 사활대속의 공로를 바로 알고, 인정하고, 그대로 순종해서 대속 입은 자의 생활을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대속을 입은 자라고 말하면서 불법 생활하는 것은 다 정죄 받아서 유황불 구렁텅이 가 버리고 다만 대속에 일치되는 것만 구원에 나아갑니다.

'그 이름을 믿는 자들이라'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라는 두 글자를 표시하는 예수님을 믿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름을'하는 그 이름은 예수님을 말하고, '그 이름을 믿는다'고 하는 믿는다는 말은 예수님의 공로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설정한 공로를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설정한 공로는 영원 전 목적을 정하셨고,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정하셨고, 이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예정대로 창조하셨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예정, 창조, 보존, 섭리하시고 또 섭리 중에 대속, 부활, 승천, 또 우리와 동행으로 성화, 또 우리 몸이 부활 후 영화를 시키는 이 모든 것을 믿는 자를 가리켜서 '그 이름을 믿는 자'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권세'는 하나님의 자녀의 실력을 준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가진 권세를 준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가 실상으로 되는 권세를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권세를 주셨으니'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것을 똑똑히 알면 능력이 나올 터인데 이 진리를 모르기 때문에 또 다 믿지 안 하니까, 반신반의 하니까,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능력은 믿음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런 분이신 것을 인정하고, 이분에게 소망을 두고, 이분을 따라서 사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신다고 하셨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신성을 닮은 인격성으로 점점 성장되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원형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신격에 모형적(模型的) 인격이 차츰차츰 자라가게 되고 구비하게 되어져 가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 사람으로 믿게 하여서 믿는 사람으로 성공을 이루어 나가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렇기에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믿어짐으로서 그 사람에게 건설이 되어 지는 것이지 사람이 동서양의 권세를 다 차지한다 해도 그것은 성공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이 믿어지는 것도 은혜입니다. 믿어지는 사람이 믿어져서 건설하는 것은 하나님의 신성과 같은 인성이 되어 신격성을 모형한 인격성으로서 자체가 하나님의 형상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모든 행동이 하나님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해서 죽음을 보지 않고 산 체로 승천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하나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는 일만 하고, 하나님과 꼭 같은 모양의 자기가 되어지는 이것이 우리의 성공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마5:48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우리들의 성공입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준다는 말씀은 하나님의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는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본체를 받지 않고, 하나님의 본체 외에 모든 것을 다 받는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입니다. 하나님의 본체 외에 하나님의 능력도, 하나님의 역사도, 하나님의 소유도, 하나님의 모든 영광도, 전부 하나님의 것을 유업으로 받아 하나님의 것을 상속받는 것과 또한 하나님은 아니지만 자식이 부모를 닮는 것처럼 제이(第二)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과 꼭 같은 자가 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입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불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1: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이는 혈통으로 나지 아니하고'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라는 그 말씀은 아담의 계통으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아담의 아들, 손자, 증손, 이렇게 아담의 계통으로서 난 자가 아니라는 뜻을 가리켜서 혈통으로 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부정모혈로 상속된 자녀가 아니라 진리와 영감에게 연결되어 성화 된 인간의 요소는 신적 요소에게 접선되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혈육의 것이 아니라 혈육의 것이 접선되어있는 무한 그 자체가 곧 하나님의 자녀 권세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 이 말씀은 육의 모든 작용으로 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육의 정기나 육의 정신 이런 것으로 나지 아니했다는 말씀입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피와 살로 된 물질 중에 일반 물질로 되어 있는 것이 있고 또 물질 중에 신비한 물질로 된 것이 있는데 이런 물질로 된 것을 가리켜서 육정이라 합니다. 정기. 정신은 고기 덩어리가 아니나 신령한 물질로써 육체입니다.

'육정으로 나지 아니하고' 그 말은 첫 사람 아담에게서 난 사람들의 정신이나 정기로 나지 안 했다 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모든 정실, 정기, 감정, 정성, 인간에게 있는 인적 요소로 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사람의 소원으로 시발된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인해서 발원되고 계획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육적인 것도 아니요, 정서적인 것도 아니요, 인간들이 구상한 하나의 사상이나 상상도 아닙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인간이 창조주와 접선됨으로 창조주의 무한한 것이 인간에게 접선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입니다. 이 권세라는 것은 능력이라 말입니다. 모든 피조물을 만족케 할 수 있고, 모든 피조물을 살릴 수 있고, 모든 피조물을 다스릴 수 있고, 모든 피조물을 충만케 할 수 있는 사람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피조물인데 하나님의 역사를 다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라 하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자들이니라' 하나님의 자녀는 아담 하와의 자손이 아닙니다. 아담 하와의 자손을 집으로 삼고 그 안에 주인공으로 들어앉아 있는 것이 하나님으로 난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사죄. 칭의. 화친. 부활영생 소망. 영감, 진리로 났는데 이것은 전부 신적요소이지 인적요소가 아닙니다. 이것은 유한의 것이 아니라 무한의 것이요, 완전의 것이요, 불변의 것들입니다. 이것으로써 우리가 났습니다.

●(요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신구약 성경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이 아니라, 제 이위 성자의 이름이 '말씀'인데 '말씀'이라는 제 이위 성자가 육신 되었다는 것입니다.

'육신'이라는 이것은 예수님의 신인양성일위이신 인성을 총칭해서 하나의 표현으로 '육신이 되어' 이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신성이 인성을 입고 신인양성일위로 나타났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긴 것입니다. 여기 육신은 인성을 말합니다.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이 말씀은 신약교회 안에 계시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신 '말씀'은 1절에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하는 이 '말씀'과 같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진리입니다. 이치입니다. 무인격 존재입니다. 인격존재가 아니고 이치입니다. 여기 '말씀'은 이치가 아니고 인격존재입니다. 신격을 가지신 존재입니다. 곧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예수님이 오셨는데 어떤 일 하러 오셨는고 하니 당신이 목적을 정하시고 그 목적이 완성이 되면 예수님께서 재림하십니다. 목적이 완성되었을 때 그 목적을 봄으로 하나님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모든 피조물들이 알게 됩니다. 이래서 완성된 이 목적을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라' 말씀하셨습니다.

목적이 완성된 것을 보니 하나님은 절대자이시다. 불변이시다. 그분은 시작하면 완성이지 미완성이나 변동이 없으신 분이시다. 알파와 오메가이시다. 그분은 사랑이시다. 그분은 거룩이시다. 그분은 참된 분이시다. 그분은 화평이시다, 그분은 자비이시다, 그분은 진실이시요 거룩이시다. 이렇게 하나님의 목적대로 만들어진 것을 볼 때에 또 이렇게 하나님의 목적이 완성된 것을 볼 때에 그 자체가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로구나, 하나님은 긍휼의 하나님이시로구나, 하나님은 은혜 베푸시는 하나님이시로구나, 모든 존재가 그분으로 인해서만 살 수 있구나, 모든 존재보다 그분은 내게 필요한 분이시구나, 이렇게 모든 존재들이 다 필요하다고 느낄 수 있도록 되어지기 때문에 그분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고, 그분보다 더 필요한 것이 내게는 없다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엡1:6에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는 것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하나님께서 사람되신 그 목적과 동기와 중심과 그 결과가 이루어질 것을 보니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도성인신 하신 것이 선 중에 제일 큰 선이요, 희생 중에 제일 큰 희생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은 큰 줄 알지만, 하나님께서 그 많으신 부요를 다 내어놓으시고 사람되어 오신 것이 제일 큰 희생이며 큰 고생이며 큰사랑입니다. 우리들이 아직까지 여기에 대해서 깊이를 잘 모르고 있습니다.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신인양성일위가 되신 그 영광이라, '영광'이라 말은 자체가 훌륭한 것을 가리켜서 영광이라고 말하지 않고, 영광이라는 것은 그 자체를 인해서 많은 것들이 은혜를 입어서 복되게 된 그것을 가리켜서 영광이라 말합니다.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하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도성인신 하셔서 신인양성일위로 나타나신 그 분의 영광이라. 또 신인양성일위가 피조물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 못 박혀 죽은 것이 영광이라, 부활하신 것이 영광이라. 전부 영광 덩어리입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하나님의 무한하고 충만하신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오는 것을 가리켜서 '은혜가 충만하더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충만을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갖다 주시는 은혜 뭉텅이입니다.

'진리가 충만하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충만을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갖다 주시는데 그렇게 값없이 거저 갖다 주시는 것이 참이고 옳더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람을 사랑한다 하면 치우쳐서 내가 사랑하는 것이 상대방에게는 좋지만 제삼자들에게는 거리끼는 것들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을 우리에게 갖다 주시는데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옳고 옳고, 참되고 참됩니다. 전부 은혜요 참된 것뿐이기 때문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말씀한 것입니다

●(요1:15)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예수님께서 세상에 사람의 모양(빌2:8)으로 오시기는 세례요한보다 뒤에 나셨습니다. 그러나 '그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그러면 사람으로 나타나시기는 세례요한보다 뒤에 나타나셨지만 그가 세상에 계시기는 먼저 계셨습니다. 이것을 혼동하면 안 됩니다.

세례요한이 증거하기를 마3:12에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곡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 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주를 심판해서 하늘나라에 영접할 것과 유황불 구렁텅이로 태울 것으로 모든 피조물을 구별해서 영원한 구원과 영원한 멸망으로 우주의 종말을 결론지을 분이시다 하는 말씀입니다.

●(요1:16)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받기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처음에 일차 창조의 은혜를 우리가 받았습니다 또 일차 창조의 은혜 받은 그 위에 도성인신 하셔서 특수 은혜를 받앗으니 곧 사죄, 칭의, 화친으로 우리를 중생 시켜서 부활 영생의 소망을 가지도록 하는 은혜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 자연은혜도 그분의 것이요, 특수은혜도 그분의 은혜라 하는 것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요1: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모세의 율법은 우리를 구원하려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이 죄에 대하여 모르는 것을 율법을 주어서 이것은 죄라! 해서 자기가 죄인인줄 알고, 멸망 받은 거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도록 주신 것이 율법입니다.
  
모세의 율법 곧 하나님의 진리에서 자기가 죄인인 것을 깨닫지 못하는 자는 예수님의 대속이 필요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율법으로 죽고 예수님의 대속으로 구원 얻는 것이 하나님의 道입니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죽이는 것은 율법으로 인해서 죽이고, 살리는 것은 대속하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리게 된다 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요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하나님은 영원히 보지 못합니다. 우리가 접할 수 있도록 나타나신 것은 예수님의 인성이십니다.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가 볼 수 있도록 나타나신 하나님이 예수님이십니다.

'독생 하신 하나님이라'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사랑으로 희생하셔서 세상에 나타나신 분이신데 사람의 모양(빌2:8)으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이분은 사람으로 나타났으나 속에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볼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를 도성인신 하신 예수님께서 환하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하나님의 속성도 예수님이 나타내 보이셨고, 하나님의 정신도 예수님이 나타내 보이셨고, 하나님의 사랑도 예수님이 나타내 보이셨고, 하나님의 욕심도, 하나님의 정의도, 하나님의 시기도, 하나님의 감정도 예수님께서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예수님은 볼 수 없는 하나님의 형상이라'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었지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볼 수 없는 하나님을 나타냈다'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자체가 하나님의 본체는 아니로되 본체가 줄 수 있는 것을 우리가 다 받아 가지는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요, 또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받아서 감당할 수 있는 자로 성화 되고 성장되는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자격으로 점점 성장되어 나가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요, 이것을 위해서 우리가 지금 부르심을 입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 대속을 주셨지만 우리가 이 대속을 믿지 않고 교만과 강팍과 망령을 부리나 하나님께서 오래도록 참으시지만 마지막에 몽둥이를 들 때는 철장으로 질그릇을 깨뜨리는 것같이 바싹바싹 부숴서 영원한 유황불 구렁텅이에 던지시는 것입니다. 히12:29에는 또 말씀하시기를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니라'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①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하신 일과 ②오시기 전 어떤 분이신 것과 ③지금은 무엇을 가지고 무엇을 하러 오셨는가 하는 것과 ④그러면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하는 이 네 가지를 우리가 굳게 잡아야 됩니다.

이런 것을 붙잡아야 세상을 이깁니다. 그래야 참 구원이 이루어집니다. 이런 것을 잡지 않고 도둑질하지 말아라, 정직해라, 사람을 사랑해라,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줘라, 그런 소리는 불교에도 있고 다른 이종교에도 있고 어디든지 있는 것입니다. 그까짓 것은 아무리 해 봤자 뿌리 끊긴 화초가 해 돋으면 말라 버립니다.

이 네 가지를 굳게 잡지 못하면 시기를 따라서 말라져 버립니다. 무신론 세계가 되면 무신론자 되고, 공산주의 세계가 되면 공산주의자 되고, 민주주의 세계가 되면 민주주의자 되는 이런 자는 소용이 없습니다. 뿌리가 있어야 됩니다. 이 뿌리를 박지 못한 기독교 도덕주의, 기독교 사회주의, 기독교 윤리주의는 아무 소용없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