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서 주해

2007.05.31 11:20

선지자 조회 수: 추천:

이름 : 반석     번호 : 36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2/02/18 (월) PM 07:13:13  (수정 2006/02/19 (일) PM 09:54:16)    조회 : 323  


■ 아가서 주해

 

- 백영희목회설교록으로 김윤수목사님 정리

아가서 1:1∼17

1. 본서의 명칭(1절)
2. 성도가 주님에게 말함(2-4절)
3. 술람미 여자가 예루살렘여자들에게 말함(5-6절)
4. 성도가 주님에게 말함(7절)
5. 주님께서 성도의 믿음의 아름다움을 기뻐하시는  표현(8-11절)
6. 성도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과 사랑의 교제의 기쁨을 표현함 (12-14절)
7.신랑 되신 주님께서 성도의 아름다움을 칭찬(15-16절)
8. 신부 된 교회의(성도) 신앙 인격의 구성 요소(17절)


■ 1절에 "솔로몬의 아가라"
이 아가서는 솔로몬이 기록한 노래로서, "아가"라고 하신 말씀은, 노래 중에 노래요, 시(時)중에 시란 말이다
솔로몬은 그때에 성령이 충만하여 주님의 사랑을 어떻게 표시하기가 어려울 때에, 자기와 자기의 사랑하는 술람미 여자를 통하여 주님의 사랑을 기록해서 표시하신 것이 이 아가서인 것이다.
그러기에 솔로몬 왕과 술람미 여인의 연애적인 사랑은 오늘 우리 성도의 주님과의 연애적인 밀접한 사랑을 모형 한 것이요. 이들은 계시 기관인 것이다

[**성도가 주님에게 말함 (2-4절)**]
■ 2절에 "내게 입맞추기를 원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 보다 나음이로구나"
옛날에 유대 사람의 풍속에는 자기가 가장 사랑하는 자에게 입을 맞추는 풍속이 있었다.
지금도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이 주님 앞에 아름답게 보여서 주님이 자기에게 입맞추어 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입맞추는 일이 많이 있었다 몇 가지만 보면 다음과 같다.
눅 7:36절 이하에 보면 어떤 여인 예수님의 발에다가 입맞추었고,
눅 15:20절에 보면 탕자의 아버지가 탕자에게 달려가서 입맞추었다

그런데 이 "입맞춤은" 서로 사랑하고 밀접한 관계를 표시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고 하신 말씀은 성도가 주님을 향하여 자기에게 입맞추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하는 말씀이다.

그런데 성경에 보면 다윗과 솔로몬을 메시야의 상징으로 말씀했는데 다윗은 주님의 권능면을 상징했고 솔로몬은 주님의 영광면을 상징했다.
솔로몬의 왕궁에는 궁녀들이 많이 있었다. 그러나 솔로몬과 입맞추는 여인은 이 왕후와 궁녀들 중에는 하나도 없고 술람미 여인 뿐이였다.
이와 같이 오늘 믿는 사람들도 예수님의 도(道) 안에 들어와서 예수님을 중심해서 둘러 있지마는 주님과 서로 사랑하고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은 많지를 못하다.

이와 같이 오늘도 믿는 사람가운데에는
①예수님의 소문만 듣고 따라가는 신자, 곧 "예수 믿으면 좋단다"고 하는 이 말만 듣고 믿는 사람이 많이 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만나보지 못하고 소문만 듣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라고 입으로 말을 하지마는, 여전히 세상에 취하여 예수님을 찾을 여가도 없이 분주하게 날 뛰고, 실상은 믿지 아니하면서 믿는 줄로 알고 껍데기로 일생을 속아서 사는 이 사람을 가르쳐서 "소문만 듣고 믿는 사람이다"고 한다.

②또 예수님의 안면만 보고 따라가는 자가 있다. 이 사람은 예수님과 예수님의 도를 지식적으로만 알고 믿는 자인데, 이런 사람이 믿는 사람 가운데에 많이 있다.
이런 사람은 예수님에게 자기의 전부를 기울이지 아니한다.

③또 예수님의 음성만 듣고 따라가는 자가 있다.
이 사람은 주님이 자기에게 깊이 감동시킬 때 갈급한 심령을 가지지 못하고 감화 감동만으로서 만족을 가지는 자다.
예수님이 깊이 감동시켜 주시는 그때에는 일시 회개하고 소원하고 결심하고 작정하고 각오도 하지마는 감화감동을 받은 그대로 일을 추진시켜 실천에 옮길려고 하는 갈급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자기에게 일시적으로 감화감동 되어지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가슴속에 깊은 감동을 받고 또 이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에 가슴을 치고 애를 태우는 것이다.

④또 주님과 서로 이야기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가 있다. 기도하는 것으로 주님과 교제하는 것으로 만족을 가지는 사람이다. 우리는 기도가 잘 되는 것으로 만족치 말고 그 속에서 무엇을 잡아서 무엇이 되어야 한다.

⑤또 주님과 악수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가 있다. 이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일을 하는 것으로 심방하고 전도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⑥또 어떤 사람은 한 걸음도 나아가서 전지 전능하시고 어디든지 계시는 예수님이 밤낮으로 동행 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는 자가 있다.

그런데 위에 말한 사람들은 다 실패자요,
주님과 입맞춤과 같이, 주님과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 못한 자다.

⑦그러나 술람미 여인은 이런 것으로 만족치 않고 주님과 입 맞추지 않고서는 만족이 없었다. 교회사나 성경 역사에 보면 술람미 여인처럼 주님과 입 맞추지 아니하고서는 만족이 없고 주님과 입맞추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다.

다시 말하면, 고난의 주님과 생사를 같이하여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도 만족치 않고 주님을 사랑하므로 주님을 위해서 목숨을 초개 같이 버리는 이 순교로서 만족하는 성도들이 많이 있었다.
사도 '바울'도 고후 11:23절 이하에 보면, 주님을 위해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받았고 행전 21:13절에 보면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도 각오를 했다"고 말씀했고 딤후 4:6절에 보면 "자신을 관제로 드린다"고 말씀했다.

'베드로'도 로마에서 순교했고
'도마'도 인도에서 순교했다
참된 성도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기의 전부를 주님 위해서 희생의 제물로 드리지 아니하면 만족이 되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서만 만족되지 아니하여 죽음을 개의치 아니하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사랑함으로 죽는 데에까지 나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2절 초반 절에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는 술람미 여인과 같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한다고 해서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우리와의 연애는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여 취하고자 하는 것인데
거기에는 우리가 주님에게 아름답게 보이는 행위와 신앙인격이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이것이 없으면 주님과 우리사이에는 연애가 이루어지지 아니한다.
우리에게 아름다운 점이 없다고 하면 우리가 주님에게 아무리 기도해도 소용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과 연애하려고 하면 우리에게 어떤 아름다움이 있어야 하는가?
먼저 우리는 주님 앞에서 연약하면서 아름다워야 한다.
그 속에 있는 아름다운 인격은 상대방을 끄는 힘이 강하다.

우리는 연약한 자임을 깨닫고 자신을 부인하고 주님을 바라보고 범사에 감사하고 주님에게 순종하고  주님을 전적으로 의지 할 때에 주님의 사랑을 받을 수가 있다.

가정에서도 보면 아내가 남편보다 더 똑똑하고 잘나고 인격이 구비하고 훌륭하면 남편은 함께 살지 못하고 달아나 버리는 것이다.
이와 같이 믿는 사람이 주님 앞에서 "나는 이런 자이니 모든 것을 할 수가 있다"고 하면서 자기를 시인하면 주님은 멀리 달아나신다.

아무리 못나고 무식해도 자기를 부인하면 주님과 얼마든지 사귈 수 있다.
세상과 자기를 부인치 아니하면 아름다움이 없어지고, 이 아름다움이 없이 주님에게 가까이 나아가면 주님은 싫어하시고 멀리 달아나 버리신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이 순교의 각오와 준비 없이 "순교하겠다"고 입으로 장담을 하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눅 22:33절에 보면 베드로가 순교의 준비 없이 입으로 순교하겠다고 장담했지마는 결국에는 예수님의 면전에서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했다.
순교는 미리부터 각오와 소원과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순교는 평소의 생활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순교는 평소의 생활을 사진을 찍어서 영원히 기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평소에 주님을 사랑하여 자기의 전부를 주님께 바치는 생활을 하니까
주님은 이것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최고 절정인 순교로 옮기어 주셔서 한꺼번에 주님에게 다 바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의 세 가지 요소는 있으니,
①첫째는 사랑하는 주님을 속히 가서 만나보고 싶어하는 이 마음이 있는 것이요.

②둘째로는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자기에게 있어서 제일 귀한 것인 생명을 바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어서 바치는 것이요.
③세째로는 사랑하는 주님과 맺은 정조를 지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2절 처음에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고 하는 이 말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서 입맞춤을 받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그런데 "입맞춤"은 순교를 말한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십자가가 없는 곳에서는 주님을 만족히 사랑할 수가 없어서 십자가 있는 곳을 찾는다. 그래서 참된 성도는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손해보고 고난을 당하고 희생하는 데에서 기쁨과 평강을 가져오고 누린다.

그러면 참된 성도는 무엇 때문에 순교의 사랑을 원하는가?
:2절 중간에 "네 사랑이 포도주 보다 지남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의 사랑이 포도주 보다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말씀하신 "포도주"는
세상에 있는 소유, 영광, 취미, 향락, 부귀, 권세 이런 것을 말한다.
그런데 롯의 아내나 발람이나 가룟 유다는 이 포도주에 취한 사람이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이 포도주를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라고 말씀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사랑은 포도주 보다 강하다 이 사랑에 붙들리면 점점 더 사로잡히게 된다.
모세도 이 사랑에 도취되었다. 모세가 애굽의 종 되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의 해방 운동도 이 사랑에 도취되어서 이 사랑만 바라보고 했던 것이다. (힙 11:24-26절 참조)
사도 바울도 이 사랑에 도취되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날마다 죽는 길로 피곤함을 느끼지 아니하고 달려갔다. (빌 1:20절 찹조)

이 세상 부귀 영화는 일시적이요. 그림자요. 그리스도의 사랑은 실존이요, 영원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포도주 보다 강하기 때문에 이 사랑에 붙들리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초개같이 집어 던진다.

■ 3절에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네 이름이 쏟은 향 기름 같으므로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 구나"
(이 말씀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향하여 자문자답한 말이다).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을 사랑하는 것 같이, 성도들도 주님을 향하여 참 사랑하면 주님과 사귐이 밤새도록 사귀어도 시간이 모자란다.

3절상반절 "네 기름이 향기로와 아름답고"
여기에 말씀하신 "기름"은 제사장이나 선지자나 왕을 장립 할 때에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기름이"라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의 장립. 곧 제사장, 선지자, 왕의 장립을 받으신 것을 말한다.
그리고 "향기로와 아름답다"고 하신 말씀은 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세워서 사랑과 지능의 온전자로 육성시킨다고 하신 이것이 소식 중에 제일 기쁘고 복된 소식이라고 하는 말씀이요.
이 역사가 모든 역사 중에 제일 가치 있고 영광스러운 역사라고 하신 말씀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이 기름을 우리를 향하여 쏟았는데, 창세전에 쏟았다. 이렇게 쏟아서 우리를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세워 주셨으니 그 기름이 아름다운 것이다
리고 3절 처음에 "네 기름이 향기롭다"고 하신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세워서 사랑과 지혜, 지식과 능력의 완전자로 육성시킨다고 하신 이 소식이 모든 소식 중에 제 기쁜 소식이라는 말씀이요.

3절 중반절 "네 이름이 쏟은 향기름 같으므로" 여기에서
"네 이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하는데 예수님께서 베푸신 대속의 공로를 말한다.
그리고 "쏟은 향 기름 같다"고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신을 다 우리를 위해 희생하여 하늘의 부요와 영광과 평강을 다 내어놓으시고 이 대속의 공로를 우리에게 남김없이 다 주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3절 하반절 "처녀들이 너를 사랑하는 구나"하신 이 말씀은
이 대속의 향기로운 기름냄새를 맡은 성도들마다 자기의 전부를 주님에게 기울여 바친다.(빌 1:20-21, 3:10-14절 참조)

■ 4절 상반에 "왕이 나를 침궁으로 이끌어 들이시니 너는 나를 인도하라"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은 영적으로 해석하면 "예수님에게 붙들리기를 원한다"고 하는 말씀이다. 자기가 주님을 붙들고 가면 아무래도 안심이 되지 않고 위험하기 때문에 이 말씀을 한 것이다.

그러면 왜 안심이 되지 않고 위험한가? 자기에게 힘이 있을 때에, 자기의 역량으로 감당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는 자기가 주님을 붙들 수가 있는데 자기에게 힘이 없을 때에, 자기의 역량으로 감당 할 수가 없는 정도에 이르게 되면, 주님을 붙들지 못하고 놓게 될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자기 보다 무한히 강하신 주님의 손에 붙들려 놓으면, 자기가 어떻게 되어도 상관이 없고 안심이 된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주님에게 이끌어 주시기를 원해야 하고, 이 주님을 소망 할 것이다. 주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드리실 때에 크신 역사가 일어난다.
에스더 서에도 보면 아하수에로 왕이 에스더를 이끌어 드릴 때에 그 나라를 진동시키는 큰 역사가 일어났던 것이었다.

그리고 술람미 여인은 처녀요.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고 약혼만 해 놓았다. 그가 왕에게 이끌려 왕의 침궁에 들어가서 보니까 그 궁 안에 있는 모든 소유나 권세나 영광이 그것이 그의 것이 되었고 그는 왕에게 사랑을 받는 자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말씀하신 "침궁은"자기의 기도의 골방을 말한다
이와 같이 오늘 성도들이 주님과 밀접한 교제를 맺는 은혜의 세계, 기도의 골방. 여기에 들어가서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교제해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은혜의 세계를 갈급 하여 찾아간다. 땅 위에 있는 것을 분토와 같이 초개와 같이 다 버리고 주님의 말씀을 잡고 주님만 의지하고 믿고 따라간다.

그런데 성도가 땅위에서 주님의 사랑의 세계를 발견치 못하고 세상 것에게 갈급증이 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믿지 아니하는 불신의 죄 값인 것이다.

그래서 "너는 나를 인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주님께서 성도를 붙들어 주님에게로 인도해 주시기를 바라는 성도의 소원이다 .


4절 하반에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니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 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니라"
우리가 너를 따라 달려가리니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에게 이끌려 침궁으로 들어 갈 때에 이 여인에게 관련된 시녀들과 궁녀들이 왕의 사랑을 함께 받고 기쁨을 가지게 된다.
그래서 많은 처녀들이 술람미 여인이 침궁으로 이끌려 들어감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한 것이다.

그래서 :4절 중간에 보면 "우리가(성도들이) 너를(주님을)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한다"고 말씀했다. 오늘도 그러하다. 한 사람이라도 주님에게 붙들려서 주님의 인도하심을 받으면 그 사람에게 관련된 모든 성도들이 일어서게 되고 살아나게 된다.

그러므로 4절 하반절에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다"고 했는데,

"우리가 너를 인하여 기뻐하며, 즐거워하니 이 말씀은 구속받은 성도들이 주님을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주님 외에는 원하고 바라보고 사랑 할 것이 없다고 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전부를 다 맡겨놓고 보면 자기에게 영원히 필요한 것이 거기에 다 있는 것이다.
자기의 전부를 주님에게 맡기는 자는 주님의 침궁에 들어간다.
그러면 자기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히 여긴다.

네 사랑이 포도주에서 지남이라,
포도주"는
세상에 있는 소유, 영광, 취미, 향락, 부귀, 권세 이런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포도주 보다 강하다 이 사랑에 붙들리면 점점 더 사로잡히게 된다.
모세도 이 사랑에 도취되었다. 모세가 애굽의 종 되어 있는 이스라엘백성의 해방 운동도 이 사랑에 도취되어서 이 사랑만 바라보고 했던 것이다. (힙 11:24-26절 참조)
사도 바울도 이 사랑에 도취되어서 그리스도를 위해서 날마다 죽는 길로 피곤함을 느끼지 아니하고 달려갔다. (빌 1:20절 찹조)
이 세상 부귀 영화는 일시적이요. 그림자요. 그리스도의 사랑은 실존이요, 영원하다. 그리스도의 사랑은 포도주 보다 강하기 때문에 이 사랑에 붙들리면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초개같이 집어 던진다.


처녀들이 너를 사랑함이 마땅하다" 술람미 여인이 왕의 침궁으로 인도함을 받는 것을 모든 시녀들과 궁녀들이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만족하고 또 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했다.
그런데 시녀나 궁녀는 왕후가 될 수 있으나 왕후는 시녀나 궁녀가 될 수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주님의 은혜를 간접적으로 받는 것 보다 직접적으로 은혜를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외부적, 내부적으로 자기의 전부를 희생할 때, 예수 그리스도의 침궁으로 인도함을 받게 되고, 그로 말미암아 많은 생명이 구원을 얻게 되고 그 영광이 영원히 해와 같이 빛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전부를 주님에게 맡길 때 주님의 모든 소유는 자기 것이 되고,
자기의 전부를 주님에게 맡기지 못하는 것은 자기가 주님보다 나은 줄 알기 때문에 자기를 주님에게 맡기지 못하는 것이니 공연히 자기가 자기를 염려하게 되고 자기가 자기를 보호하게 되는데 이것이 어리석은 일이다.



[**술람미여자가 예루살렘여자들에게 말함(5-6절)**]
■ 5절 상반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예루살렘에 있는 여자들은 얼굴이 희고 아름답고 귀골이지마는 왕의 사랑을 받지 못했는데 이 술람미 여인은 얼굴이 검고 아름답지 못해도 왕의 사랑을 다 받았다.
이는 자기는 검고 못난 여인으로 알고 왕 앞에 나타났기 때문이였다.

그러므로 여기에 말씀하신 "예루살렘 여자들"은  세상적으로 잘나고 훌륭한 사람들이지만 믿음으로는 일반적인 믿음의 성도를 말한다
"내가"는 술람미 여인, 곧 주님과 생사를 같이하는 성도를 말하고
"비록 검으나"하는 이 말은 "죄인이나"이라는 말이요.
"아름다우니"하는 말은 "의롭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검은 것은 죄인을 말하고, 아름다운 것은 의인을 말하는데,
죄인이 죄인으로 나타날 때에 주님은 기뻐하시고, 또 주님 앞에 자기가 죄인인 것을 발견한 것만큼 주님에게 고침을 받게 되고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된다.
우리가 의인이 된 것은 주님이 장차 오실 때에 필요하지, 지금은 필요하지 않다.

:5절 하반에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다"
"게달의 장막은"은 짐승의 가죽으로 만든 천막인데, 그 색깔이 검은 것이다.
그러니까 "게달의 장막"이라고 하는 말은 검은 장막이라는 말이다.
즉 예수님 밖에서 생활하는 죄악적인 생활을 말한다

장막은 땅에 있는 육에 속한 것을 말한다.

그리고 "솔로몬의 휘장"은 솔로몬 왕이 일년에 몇 차례씩 유람을 갈 때에 치는 천막인데, 그 시대에 있어서는 가장 화려하고 높은 것이었다.
:5절 하반의 "게달의 장막 같으나 솔로몬의 휘장과 같다"고 하신 이 말씀은 :5절 상반의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고 하신 이 말씀을 보다 실감 있게 실지의 물체를 가지고 표시하신 것이다.

"솔로몬의 휘장"은 하늘의 처소, 천국 생활을 비유한다.
그러므로 예수님 안에서 생활하는 것은 솔로몬의 휘장과 같은 천국 생활인 것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 믿는 사람들이 게달의 장막과 같은 이 세상적인 생활은 언젠가는 벗을 것이요 죄악생활인즐 참으로 바로 알고,
솔로몬의 휘장과 같은 영원 무궁세계의 의로운 생활을 갈망하고 하는 사람이라야, 그 사람이 비록 못난 죄인이라도, 부족한 사람이라도, 천하고 무식한 사람이라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게 된다.
이 세상적인 생활은 언젠가는 벗을 것임을 모르고, 의롭고 영원한 것임인 줄로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요. 술에 취한 사람이요. 그 사람이 아무리 잘 나고 명철하고 유식하고 위대해도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주님에게 배척을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깨달은 사도 바울은 고후 5:1절 이하에 보면 "땅 위에 있는 장막에 있을 때에 하늘에서 오는 영원한 처소, 영원한 생명을 덧입기 위해서 무거운 짐진 것 같이 탄식하면서 힘을 쓴다"고 말씀했습니다

■ 6절 상반에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럼 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여기에 말씀하신 "일광"은 햇빛을 말하는데, 이 세상에 있는 부귀, 영화, 권세, 향락을 말한다.
그러면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럼하다"는 말은 어떤 말인가?
"햇볕 아래에서 정신 없이 마구 날뛰다가 보니 검게 되었다"는 말인데,
"이 세상에 있는 부귀, 영화, 권세, 향락을 좋은 것으로 알고, 이것을 가져 보겠다고 정신 없이 날 뛰었지마는  범죄 하여 상한 것뿐이다"고 하는 말이다.
믿는 사람들을 보면 일광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일광을 좋아해서 날 뛰면 반드시 일광으로 인하여 범죄 하여 상하게 된다.
심판꺼리만 마련하게 된다.

술람미 여인이 그러나 "나를 흘겨보지 말라"고 말했는데
이 말은 "내가 이제는 땅에 것이 가치가 없는 것인 줄 알고서 버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우리에게 주신 그리스도의 의를 바라보고 나아가니 나를  멸시하지 말고 업수히  여기지 말라"고 하는 말이다.

이 그리스도의 의가 성도에게는 있기에 세상 환란은 결코 성도를 해하지 못하고 삼키지 못한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환란이 올 때에 주님의 의지하지 못하고 땅의 권세를 의지하고 힘입을려고 하다가 삼켜진다.

그래서 자기의 포도원을 지킨다고 얼굴이 검게 된 것이 아니고 남의 포도원을 지킨다고 얼굴이 검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자기 멸시하지 말고 업수히 여기지 말 것은,
자기의 검은 것을 알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인 주님의 의를 입어 주님에게 고침을 받을려고 주님에게 나아가니까  주님이 자기를 불쌍히 여겨서 고쳐주시기 때문인 것이다.


:6절 중반에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

또 여기에 말씀하신 "내 어미의 아들들"은 타락한 교회를 말하고, 더 넓게는 불택자도 포함되고 , 더 넓게는 세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예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에 타락한 교회인 제사장, 바리새인들이 불택자인 빌라도, 헤롯과 하나되어 못 박았다)

"노하여"하는 말은 투기하고 시기하여 해치는 것을 말한다.
어미의 아들들이 술람미 여인을 시기하여 사랑하는 왕에게서 쫓겨나도록 하기 위해서 유혹하여 남의 포도원을 지키게 하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해석하면 이 세상이 믿는 우리로 하여금 사랑하는 예수님에게 배척을 받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를 유혹하여 넓은 길로 가자고 하는  것이다

옛날에 예수님에게는 바리새교가 어미의 아들들이였다. 이 예수님께서 바리새교에서 나오니까 이 바리새교가 예수님을 투기하고 시기하여 십자가에서 못을 박아 죽인 것이다. 선지자는 예루살렘 밖에서 죽은 일이 없다. 오늘도 참된 성도를 죽이는 자는 타락한 신자들이요 참된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는 것은 타락한 그리스도교인 것이다. "별스럽게 믿는다. 독선주자다. 뾰적하다. 심지어는 성경적이 아니다. 이단이다."라고 비방하면서 박해한다
참되게 믿는 성도를 잡아죽일 자는 이 성도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그래서 성경에 보면 "네 원수가 네 집안 식구라"고 말씀했습니다. (마 10:36절 참조)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는 말은
어미의 아들들이 술람미 여인을 사랑해서 그들의 포도원지기를 삼은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까 그런 것이 아니고 노하여 해치고자 한 것이였다.
그동안 술람미 여인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이 그들의 포도원을 힘껏 지켰으니 속은 것 뿐이요. 유익은 하나도 없었다.

이와 같이 오늘도 타락한 교회와 세상은  참된 성도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에누리하게 하고 신앙의 허리띠를 풀게 하고, 좁은 길을 걷지 않고 넓은 길을 걷게 하고, 자유를 주는 것 같으나 영원한 속박을 당하게 하고, 영원한 기업을 얻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인본의 사상을 가지게 하고 자율주의 신앙 사상을 가지게 하고, 자기중심으로 살게 하고 ,주님을 위하고 유익 되게 하는 것 같이 하면서 자신을 위하고 유익되게 하고, 세상 것을 위해서 살게 한다.

이것을 가르쳐서 "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들이 어미의 아들들이 아닌지 살펴보아야 하고, 주님을 위한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을 위하고, 주님에게 유익 되게 한다고 하면서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하고, 주님 중심이 아니고 자기 중심으로 살고 있지 아니한지 이것을 한번 심사해 보아야 한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수고한다고 해도 소유를 바치고 몸을 바치고 생명을 바친다고 해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희생하신 것에 비교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아무리 수고해도 희생해도 이것이 주님의 수고에 댓가가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술람미 여인이 자기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것을 깨닫고 원통히 여기고 탄식한 것처럼 우리에게도 이것이 있어야 한다.

:6절 하반에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이 말은 술람미 여인은 남의 포도원을 지키느라고 자기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이 사실을 깨닫고서 탄식함과 동시에 이제는 자기의 포도원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그러면 우리의 지켜야 할 우리 포도원은 어떤 것인가? 이 세상에 있는 동안에 자기 생활을 하는 것인데,  자기 생활은  곧 자기가 주님을 위해서 십자가에서 녹아지는 생활이다.
그러므로 이제까지 어미의 포도원. 곧 남의 포도원. 곧 이 세상사람들의 사는 생활과 같이 살아  주님의 뜻대로 생활하지 못한  남의 생활한 것을 통회하고, 이제는 자기가 주님을 위해 십자가에서 녹아지는 좁은 길을 걸어 갈려고 결심하는 것이니, 우리에게도 이런 결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냉수 한 그릇의 대접도 주님을 위해서 주님의 뜻대로 하면 복된 것이다.

베드로도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후에 이것을 원통히 여기고 통곡을 하면서 회개했다. 하나님의 도는 객관적이요. 주관적이 아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겸손히 듣고 순종으로 믿고 나가야 한다. 인간의 생각은 좁고 무지한 것이다.

[**성도가 주님에게 말함(7절)**]
■ 7절에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가 되랴"

:7절 상반에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라고 한 이 말은  성도가 주님을 향해서 하는 말인데, 성도가 주님을 잃어 버렸다가 간절히 다시 찾는 중심에서 하는 말이다.
"성도가 주님에게 성도의  전 인격과 모든 것을 다 해서 사랑하고, 성도 자신의 전부를 맡기고 의지하고 바라보기에 넉넉한 자야"하는 말이다.
믿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모든 정성을 다른 것에게 쏟아 놓고 입술로만 주여 주여 하는 외식자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마 15:7절 이하에 보면 "외식하는 자들아 이사야가 너희들에게 대하여 잘 예언하였도다 일렀으되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하는도다 하였느니라"고 말씀했다.

:7절 중반에 "너의 양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너의 양떼를 먹이는 곳"  이 말은 "주님의 양떼 먹이시는 일하시는 곳"이라는 말이다.
이 말씀은 성도가 주님과 함께 있지 아니할 때에 주님을 잃어 버렸을 때에, 주님을 찾고 만나게 되는 곳이 어떤 곳임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면 주님을 찾고 만나게 되는 곳은 어떤 곳인가?

첫째로는 "양떼를 먹이는 곳"이다  주님과 함께 있지 아니할 때, 주님을 잃어 버렸을 때에는 주님의 양떼를 먹이시는 것으로 찾아가야 한다.
그 양떼를 먹이는 곳은 어떤 곳인가?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곳이다.
그러니까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거기에서 주님을 찾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주님을 잃어 버렸을 때에, 잃어버린 주님을 찾겠다고 골방에 들어가서 거기에서 찾을려고 하는데, 이것은 헛일인 것이다.
"양떼 먹이는 곳"인  곧 복음의 진리를 전하는 데에서 찾아야 한다.
복음을 위해서 수고하고 희생하는 곳에서만 주님을 찾고 만나게 된다.


둘째로 주님을 찾고 만나는 곳은  "오정에 양떼를 쉬게 하는 곳"이다.
이 "오정"은 한낮인데, 오정에는 너무나 뜨겁기 때문에 양떼가 상한다 그러니까 목자는 양으로 하여금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숲 속에 몰아 넣어 가지고  숲 속으로 들어가서 쉬게 한다. 그래서 한낮에는 목자가 양과 함께 숲 속에서 쉰다.
그러니까 양과 함께 쉬는 곳에 가야 주님을 찾고 만나게 된다.
그러니까 오정 때에 숲 속으로 가야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서로 속삭이고 사귀게 되는 것인데, 이 "오정"은 세상이 강한 세력을 가지고 박해하는 환란 때를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는 이 때가 오기만을 기다린다.


그러므로 환란 때 곧 감옥이나, 극심한 병중이나, 범죄 하기 쉬운 곳은 오정에 양을 쉬게 하는 곳이라. 외부에는 햇볕이 뜨거워도 숲 속은 시원한 것처럼 외부로는 환란이나 고통이지마는 내부로는 주님을 만나서 깊이 사귀고 평안을 누리는 것이다

세상세력이 강하여져서 그 세력에게 아첨하거나 굴복치 아니하면 견딜 수가 없는 그 때를 가르쳐서 "오정"이라고 하는데 주님을 참사랑 하는 진실 된 성도는 이 때를 고대한다. 환란 때에 감옥에서, 토굴에서, 병상에서 주님과 더불어 깊이 사귈 수가 있다.

평안 무사 할 때에는 주님과 깊이 사귈 수가 없지마는 환란 때에는 깊이 사귈 수가 있다.
그러므로 목자가 오정에 양떼를 숲 속으로 인도하는 것처럼 환란 때에 주님은 사랑하는 성도를 어디로 인도하시는지 우리는 주님의 사랑을 깨닫고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곳이면, 감옥이라도, 겟세마네 동산이라도, 골고다 언덕이라도, 사형장이라도 따라가야 한다. 그곳이 주님과 보다 더 깊은 교제를 하는 곳이다.


:7절 하반에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가 되랴"고 하는 말은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왕 없이 혼자 있는 것인데.
즉 주님과 동행하지 아니하고 자기 혼자서 일하는 것. 주님이 함께 해 주지 아니하시는데 혼자서 기도하는 것을 말한다. 주님이 동행하여 주지 아니하시는 일은 실패다.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가 되랴"이 말은 주님이 함께 해 주지 않으니  수치를 당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동무의 양떼를 먹이는 곳" 다시 말하면, 주님이 함께 계시지 아니하는 양떼, 주님이 아니하시는 일, 성령 없이 일을 할려고 하는 것, 주님이 동행치 않는 곳. 여기에 가지 아니 할 것이요. 이것을 수치로 알고 그런 일을 해서는 안된 다.
주님께서 우리의 전 생활에 같이 해 주어야 한다. 주님이 같이 해 주지 아니하시면 거기에는 생명이 역사하지 못한다. 주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자를 찾는다. 주님은 이 사람에게 함께 하신다.

기독교 사업주의, 자기 혼자서 하는 일, 이것은 결과에는 반드시 실패한다.
그러니까 얼굴을 가리운 자처럼 수치를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함께 하시는 일이라고 하면 자기에게 실력이 없어도 돈이 없어도 권세가 없어도 배경이 없어도 염려 없이 시작해야 한다. 반드시 성사가 되고 성공하게 된다. 그러나 주님이 함께 하지 아니하시면 공연히 동무 양떼 곁에서 수치만 당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뜻에 합당한 일을 하지마는, 자신이 능히 할 수가 있는 일이라도, 주님이 같이 하지 아니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참된 성도의 처사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신구약 성경을 거울로 삼아서 주님의 뜻을 찾고 주님과 항상 의논하고 주님과 함께 일을 해야 한다.

그런데 요사이 믿는 사람들을 보면 자기의 이해타산으로 해 가지고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주의 일을 한다. 그래서 자기에게 유익이 있으면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고 자기에게 유익이 없고 손해가 되면 주님의 말씀대로 행하지 아니한다. 이런 사람은 이름만 믿는 사람이요. 실상은 믿는 사람이 아니다. 또 자기 혼자서 믿는 사람이지 주님이 믿는 사람으로 인정하지 아니한다.


[**주님께서 성도의 믿음의 아른다움을 기뻐하시는  표현(8-11절)**]
■ 그러므로 8절에 "여인 중에 어여쁜 자야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

:8절 상반에 "여인 중에 어여쁜자야" 이 말씀은
"다섯 가지 외식을 버리고 다섯 가지 소망을 잡은 자야"하는 말씀이다.
술람미 여인은 다 섯가지 소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 중에 어여쁜 자가 된 것이다.
①첫째는 반절에 보면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이 술람미 여인은 자기는 비록 검으나 아름답다고 했다. 자기는 비록 죄인이였지만 대속의 도를 발견하여 이 대속을 소망으로 가졌다.
이 여인은 육신을 상대하여 살지 아니 했고 자기의 이성비판대로 살지 아니했고 자기의 인격을 다 주님의 대속의 의에 기울여서 살았다. 자기의 이성비판대로 사는 것은 외식이다

②둘째로는 :5절 하반에 "게달의 장막 같을찌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았다"고 말씀했는데
이것은 자기의 처지를 말한 것이다. 그런데 고후 5:1절 이하에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우리의 영원한 처소인 하늘에서 오는 것을 덧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로, 땅 위에 있는 자기의 처지는 게달의 장막, 곧 참되지 못하고 죄악의 생활인줄로 알고, 솔로몬의 휘장. 곧 하늘의 생활을 소망으로 가졌다.
그런데 땅 위에 있는 자기의 처지를 자기의 영원히 누릴 참된 처소로 알면 외식인 것이다.
그런데 이 술람미 여인은 땅 위에 있는 처지

곧 가정이나 지위나 소유나 권세나 사업이나 이런 것은 게달의 장막, 곧 참되지 못하고 죄악적인 것으로 알았고 솔로몬의 휘장 곧 자기의 참된 처소는 하늘에 있는 줄로 알고 이것을 소망으로 가졌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처지로 만족하고 사는 이것이 외식이요. 죄악적이요. 심판 받을 것임을 발견하여 아는 이것이 겸손인 것이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은 게달의 장막에 소망을 두지 않고 솔로몬의 휘장에 소망을 두고 살았다.

③세째로는 :6절 상반에 "내가 일광에 쬐어서 거무스럼 할찌라도 흘겨보지 말 것은" 이 말은 솔로몬 왕의 아내 곧 왕후가 될 여인이 일광에 쬐어서 얼굴을 검게 만들어 못 쓰게 되었지마는 왕의 사랑과 긍휼을 소망으로 의지하였다는 것이다.
믿는 사람이 세상의 부귀와 영화와 권세가 복인줄 알고 이것을 위해서 사는 것은 외식이요. 불행이요. 이것이 있는 것만큼 손해를 보고 이것을 주님보다 더 바라보고 의지하는 것은 외식이다.
그런데 술람미 여인은 이것을 깨닫고서 과거의 죄를 인하여 낙심치 아니하고 주님의 의를 힘입어서 소망을 가졌다.

④네째로는 6절 하반에"내 어미의 아들들이 나를 노하여 포도원지기를 삼았음이라 나의 포도원은 내가 지키지 못하였구나"
남의 포도원을 자기의 포도원인줄 알고, 그것을 지키다가 나중에 이 사실을 발견 하고서는 통회하면서 자기 포도원을 지키는 것을 소망으로 가졌다.
어미의 아들들이 술람미 여인을 유혹했다. 그래서 이들의 유혹에 빠진 술람미 여인은 처음에는 그들이 자기를 사랑해서 포도원지기를 삼은 줄로 알았다. 그러나 나중에 알고 보니까 그들이 노하여 사랑하는 왕을 만나지 못하게 하는 방해인 줄 알았다. 그리고 자기의 지켜야 할 자기 포도원이 따로 있음을 알았다.
그래서 자기의 포도원을 지키지 못한 것을 원통히 여기면서 이제는 자기의 포도원을 지키는 것을 소망으로 가졌다.

그런데 :6절 중간에 말씀하신 "어미의 아들들"은 이 세상에 있는 " 타락한 교회, 우리 안에 있는 부패성이다. 옛사람이다.

이 옛사람이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멀리하도록 하기 위해서 우리의 포도원을 버리고 세상을 소망하여 세상으로 살도록 유혹한다. 이 유혹에 빠져서 그렇게 살면 외식자인 것이다.
우리는 새 소망을 가지고 우리의 포도원을 지켜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포도원은 어떤 것인고 하니 주님의 가신 길, 주님의 생애 이것이다.

⑤다섯째로는 7절에 "내 마음에 사랑하는자야 너의 양떼 먹이는 것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가 되랴" 여기서 술람미 여인은 주님을 섬기되 형식적으로 외식적으로 주님을 섬겨도 되는 줄 알고 그렇게 섬겼는데  그렇게 섬기는 것은 외식이요. 심령으로 섬겨야 참된 섬김인 줄 알고서는 주님을 심령으로 섬길려고 했다.
그런데 주님은 벌써 양떼를 몰고 가버리셨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서 심령으로 섬기는 이것을 소망으로 가졌다. 우리도 술람미 여인처럼 다섯가지 외식을 버리고 다섯 가지 소망을 가져야 한다.


:8절 하반에 "네가 알지 못하겠거든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
그러므로 8절 하반에는 목자의 삼대 희생을 말씀했는데,
①하나는 양을 따라가는 희생이요.
②또 하나는 양을 따라서 장막을 치는 희생이요.
③또 하나는 장막 곁에서 염소 새끼를 먹이는 희생인 것이다.

①여기에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라고 하신 말씀은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하는 것을 말한다. 양떼가 환란 가운데에서 울면 같이 울고, 어려움을 당하면 같이 당하고, 괴로워하면 같이 괴로워하고, 웃으면 같이 웃고, 즐거워하면 같이 즐거워하는 것을 말한다. 또 양떼가 갈팡질팡 할 때에 잘 인도해서  한 죄인이 죄악에 빠져서 헤매일 때에 찾아가서 권면해 주고 고쳐 주어라, 맹수가 오면 막아주고, 병들면 치료해 주고, 이렇게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하고, 희로애락과 생사고락을 같이 하는 것을 말한다.

②그리고 "양떼를 따라서 장막을 친다(목자들의 장막 곁에서)"고 하는 이 말은 양떼가 이 곳에서 풀을 다 먹으면 저 곳으로 옮겨 주어야 하니까 ,목자가 장막을 쳐도 일정한 곳에다가 장막을 치는 것이 아니고, 양떼를 따라 다니면서 장막을 친다.
뿐만 아니라 목자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장막을 치는 것이 아니고 양떼의 유익을 위하여 장막을 치고, 양떼에게 손해를 보이지 아니할 정도로 장막을 친다. 이런 목자가 참된 목자요. 참된 목자는 장막 밖에서 거처하는 때가 많다.
그러나 거짓된 목자는 양떼를 위하지 않고 장막을 쳐도 일정한 장소에 치고 그 안에서 잠을 자는 시간이 많다. 그리고 장막을 쳐도 양떼의 유익을 위해서 치는 것이 아니고 자기의 유익을 위해서 친다. 그래서 장막 안에 거하는 때가 많은 것이다.

그러므로 "양떼의 발자취를 따라 목자들의 장막 곁에서" 하는 말은, 양떼만 위하고 양떼의 생사고락을 같이 하고 희로애락을 같이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잃어버린 주님을 만날려고 하면 장막 안에 들어가서 잠을 자지말고, 장막 밖에서 양떼들과 거처를 같이 해야 한다.

③ 8절 끝에 보면 "너의 염소 새끼를 먹일찌니라"고 말씀했는데,
염소는 양을 시기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교인들도 보면 이런 교인들이 있다.
하나님의 택자로서 믿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염소의 성질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있다. 하나님의 교훈을 잘 받지 않고, 회개치 않고, 패역을 부리고, 고집을 부리고, 자기의 주관대로 욕심대로 행하고 질투와 시기로 말썽을 부리는 교인들이 많이 있다.
이런 교인이라고 해서 집어던지는 것이 아니고 가까이 두고서 알뜰하게 보살피고, 교훈하고, 지도하는 것을 가르쳐서 "장막 곁에서 염소 새끼를 먹인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베드로를 보시고 "네가 나를 사랑하면 내 양을 먹이고 치라"고 세 번이나 말씀했다.

■ 9절에 "내 사랑아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내 사랑아"하신 이 말씀은 "내가 내 전부를 다 기울여서 만든자야"하는 말씀이다.

"내가 너를 바로의 병거의 준마에 비하였구나"
"바로의 병거의 준마"는 전쟁에 날쌔고 힘이 센 말이다.
그러므로 "바로의 병거의 준마"라고 하는 말은 자기의 신앙을 굳게 가지는 것을 말한다.
솔로몬은 투사이기 때문에 승리의 용사를 기뻐한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전쟁의 투사요. 완전 승리자이신데,
주님처럼 신앙 전투에 용감하고 승리하는 자를 주님은 기뻐하신다.

술람미 여인도 신앙으로 살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자기의 주위와 환경을 자기의 주변에 있는 세력을 다 이겼기 때문에 왕이 칭찬하신 것이다.
오늘 우리도 신앙을 방해하는 주위와 환경과 온갖 세력을 신앙으로 이기면 주님이 우리를 칭찬하시는 것이다.

■ 10절에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네 목은 구슬 한 꿰미로 아름답구나"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뺨"은  인격성을 말한다.
"땋은 머리털"은 화목성을 말한다.
8절에 말씀하신 삼대 희생을 가지고 화평과 화목을 도모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주님은 이것을 아름답게 보신다. 그러므로 주님은 불목을 일으키는 입술, 불목을 일으키는 행동, 이것을 너무나 싫어 하신다.

우리 주님의 화목은 영원히 아름답다. 주님의 땋은 머리털은 영원히 아름답다. 그 향기가 충만하다.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 우리와 모든 인간, 우리와 모든 만물, 이 사이의 불목을 제거하고 영원한 화목을 이루시기 위해서 화목의 제물이 되셨으니 주님의 화목은 영원히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니까 모든 피조물들에게 세세토록 감사와 환영과 경배를 받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네 두 뺨은 땋은 머리털로 아름답다"고 하신 말씀은 "네 인격은 화목으로 단장했으니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다.

"네 목은 구슬 한 꿰미로 아름답구나" 고 하신 말씀은

이 말씀은 마음 가운데에 품은 거룩한 포부와 뜻이(구슬) 외부로 나타나는 것을(목) 말한다. 그러므로 "네 속에 품은 뜻과 포부가 외부로 나타나는 것을 보니, 거룩하고 진실한  진리와 영감대로의 뜻이요. 포부구나"라고 하신 말씀인데, 우리는 진리와 영감을 따라 거룩한 성품을 이루어야 한다. 그래서 이것을 구슬인 진주로 비유했다.


■ 11절에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우리가 너를 위하여"


"금사슬을 은을 박아 만들리라"
여기에 말씀하신 "금"은 영원성을 말하고 "은"은 성결을 말한다.
그러므로 "금 사슬을 은을 박아서 만든다"고 하신 이 말씀은 영원히 보배로운 것을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성결로서 준비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과 기업. 이 전부를 주시겠다고 하신 말씀이다.

[**성도가 주님을 찬양하고 주님과 사랑의 교제의 기쁨을 표현함  (12-14절)**]
■ 12절 상반에 "왕이 상에 앉았을 때에" 하신 이 말씀은
"주님이 성도의 심령에 찾아오실 때"하는 말씀이다.
세밀히 말하면
이 "상"은 왕의 신부가 자기의 전부를 다 기울여서 사랑하는 왕을 위하여 베풀어 놓은 잔치자리를 말하고,

"앉았을 때에"는 주님이 성도의 심령 속에 찾아오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성도가 성도의 심령 속에 주님을 모시기 위하여 준비해 놓은 어떤 존재도 한번도 써보지 못한 성도의 심령의 제일 높은 자리로 찾아오심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상을 헤치고 깊이 파고 주님을 깊이 궁구 해야 비로소 우리를 찾아와 우리 중심에 계시는 주님을 찾아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 성도의 마음 가운데에 찾아오시지마는 제일 높은 자리에 찾아 오시거 제일 깊은 자리에 찾아오신다. 깊은 심령에 찾아오신다.
그래서 주님을 찾아서 만날 때에 그곳은 천국이요. 주님을 찾아서 만날 때에 참된 즐거움과 담대함을 가지게 된다. 깊이 궁구 하면 즐겁고 감사치 않을 수가 없다. 주님을 찾아서 만나고 보면 모든 것이 해결이다.

그리고 12절 하반에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했다"고 말씀했는데,
눅 7:36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바리새인의 집에 앉아 계실 때에 어떤 여인이 향 기름을 예수님의 머리에 부음으로 향 기름이 향기를 토한 일이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나도 기름이 향기를 토했다"고 하신 말씀은 "내가 사랑하는 주님이 내 마음 안에 찾아 오셨을 때에 내 정성, 성품, 뜻, 생명이 나도 모르게 열정적으로 단 번에 주님에게로 기울여 졌다."고 하는 말씀이다.

주님은 빛의 속도보다 더 빠르게 우리의 마음을 향해서 찾아오신다. 우리도 이 술람미 여인처럼 주님의 사랑에 쏠리어 주님을 향해서 빠르게 나아가야 한다.
사람이 몸으로 선을 행한다고 해도 이것은 하루 종일 해도 얼마 되지 아니하고 뿐만 아니라 아주 둔하다. 그러나 심령은 몸보다 굉장히 날쌔고 활발하고 민첩해서 일분동안이라도 수 십번 주님을 열정적으로 사랑하여 모실 수가 있다.

그리고 이 "향"은 성도의 기도인 것이다.
주님의 사랑에 무의식중에 끌리어서 주님을 자기의 깊은 심령 속에 모시게 되었고, 자기의 전부가 주님에게 다 기울어지게 된 것이니,  감사요, 기도인  향인 것이다.

사랑하시는 주님이 찾아 왔을 때에 자기의 마음, 뜻, 성품, 정성, 생명 이 모든 것이 열정적으로 주님에게 다 기울어진 것을 말한다. 주님의 사랑에 끌리어서 무의식중에 피동적으로 끌려서 주님을 자기의 깊은 심령 속에 모시게 되었고 자기의 전부가 주님에게 다 기울어지게 된 것이니, 이것이 소망이요. 감사요. 기도요. 향인 것이다.


■ 13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 품 가운데 몰약 향랑이요"
상반절에 "나의 사랑 하는 자"라고 하는 말은 창 2:23절에 "내 뼈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라"고 하신 말씀과 같은 말인데 "나의 전부를 맡길 만한자라"고하는 말이다.

"내 품 가운데" 는  성도의 중심에, 마음에 하는 말이고
"몰약 향랑"은 몰약이 들어있는 주머니라는 말하고,
몰약은 썩는 것을 방비하는 방부제요, 좋은 냄새를 내는 향품인 것이다.
그런데 품안에 몰약 주머니를 가지고 있으니, 썩지 않고 향기가 나는 것처럼
내 중심에 주님을 모시니 죽음과 더러워짐이 제거되어 없어지고, 의로움이 조성되어 나의 인품과 행위가 주님 보시기에 아름답게 단장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요11:25절에 보면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한다"고 말씀했다.

■ 14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나의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비유한것입니다

"내게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로구나"
이 엔게디에는 강이 있고 평야가 있고 거기에는 포도원이 있고 포도원안에 고벨화도 많이있다.
이 고벨화는 그 색깔이 붉은 것도 있고 노란 것도 있다. 그리고 향기가 있고 아름답다. 그런데 붉은 색은 희생을 말하고, 노란색은 화목을 말하고, 향기는 복된 소식을 말하고, 아름다움은 영광을 말한다.
이렇게 엔게디 포도원에는 고벨화가 많이 있지마는 술람미 여인은 그 중에 한 송이 고벨화만 보고 있다.
이것은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희생과 화목과 복된 소식 영광이 있어서 그 숫자가 억억만도 더 된다. 종교마다, 도덕마다, 사상마다, 민족마다, 지방마다, 정치마다, 희생과 화목과 복음과 영광이 있어서 그 종류가 심히 많다.

그러나 참된 성도는 이 많은 희생과 화목과 복음과 영광 중에서도 자기의 정성과 심정을 다 쏟을 곳은 하나 뿐이다.
그러면 그 하나는 어떤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화목과 복음과 영광인데 여기에만 자기의 전부를 기울여서 쏟는 것이니, 이것을 가르쳐서 "엔게디 포도원의 고벨화 송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소식도 보면 이 세상에는 기쁜 소식, 복된 소식이라고는 것이 많지마는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하늘나라의 영광의 복된 소식, 이것만이 참된 소식이요. 기쁜 소식이다.
그런데 오늘 믿는 사람들을 보면 술람미 여인이 한 송이 고벨화만 바라보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과 화목과 영광을 바라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것 외에 다른 것을 보고있다.
한 송이만 바라보아야 정절이 있는 여인인데, 두 송이를 바라보면 음녀요. 세 송이를 바라보면 창기요. 네 송이를 바라보면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술람미 여인 처럼 한 송이 고벨화, 곧 예수 그리스도의 것만 바라보아야 한다.

[**신랑되신 주님께서 성도의 아름다움을 칭찬(15-16절)**]
■ 15절에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네 눈이 비들기 같구나"
"어여쁘고 어여쁘다"고 두 번이나 말씀했는데,
처음에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5-7절에 있는 것을 칭찬함이요.
두 번 째로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8절에 있는 것을 칭찬함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내 사랑아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고 하신 이 말씀은 주님이 우리 성도를 향해서 하신 말씀인데
"내가 네게 임할 때에 네가 내게로 나도 기름의 향기처럼 달려오는구나,
네가 내 사랑에 끌리어 무의식중에 열정적으로 네 전부를 내게 기울이는구나, 네가 나 하나에게만 소망을 두고 있구나, 땅위에는 훌륭하고 유명하고 위대한 것들이 많이 있는데 너는 그런 것들에게 소망을 두지 않고 나에게만 소망을 두고 있구나 그러니 어여쁘고 어여쁘다"고 하는 이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이 세상에서도 보면 위대하고 훌륭한 사람에게 사랑을 받으면 만족하게 느끼고, 영광이라고 한다. 자기가 사랑하고 존경하는 분에게서 어여쁘다고 하는 말을 들으면 영광으로 생각하고 그 분과 사귀면 영광과 만족으로 생각한다.
하물며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전지 전능하신 주님, 어디든지 계시는 주님, 이 분이 우리를 향하여 어여쁘고 어여쁘다고 하신다면 이것은 영원히 만족스럽고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고 영광된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에 붙들려 놓으면 꼼짝도 하지 못하고 어디든지 따라간다. 이 사랑이 자기를 죽는데에 집어넣어도 거기에서 뛰어 나오지 않고 거기에서 죽고 마는 것이다. 사도 바울도 이 사랑에 붙들려 가지고 담대하였고 물불을 가리지 않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천국 복음을 전했던 것이다.
과연 사도 바울은 주님에게서 "어여쁘고 어여쁘다"고 하시는 이 사랑을 다 받은 사람이였고 예수님의 전부가 되었다.

"네 눈이 비둘기 같구나" 이 말씀에
"눈"은 소망, 사상, 정신, 마음, 생각, 지식, 비판과 평가, 이런 것을 말하고
"비둘기"는 순결성, 정절, 정조성을 말한다.
그러므로 "네 눈이 비둘기 같다"고 하는 이 말씀은 "네가 신앙 정조를 깨끗하게 지키는구나, 네가 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따르는구나"하는 말이다.


■ 16절 상반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어여쁘고 화창하다
"나의 사랑하는자야"하신 말씀은 "내 전부를 맡길만한 자야"하는 말이요.
"어여쁘다"고 하는 말은 "믿을만하다.  사랑할만하다."고 하는 말이요. "
"화창하다"는 말은 "존경 할 만하다"고 하는 말이다.

:16절 하반절에 "우리의 침상은 푸르고 "
침상은 교제, 기도를 말하고.
푸른 것은 생명을 말한다.
이 말씀은 주님과 더불어 교제하는 것은 생명이요,. 주님 밖에 나가는 것은 사망이요. 주님과의 불목은 멸망이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솔로몬과 술람미 여인과의 밀접한 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주님과 우리 성도와의 밀접한 관계를 나타내신 말씀이다.

[**신부된 교회의(성도) 신앙 인격의 구성 요소(17절)**]
■ 17절에 "우리의 집은 백향목 들보, 잣나무 석가래로구나"
"우리 집"은 반석 위에 지은 집인데, 주님과 우리가 합하여 지은 신앙의 집이요.

백향목은 높이가 백자나 되고 둘레는 사십자나 된다.  
"백향목 들보"는 큰 믿음을 말한다.
그리고 백향목은 사시 푸른데 이것은  신앙 절개를 말한다.
또 백향목은 향기가 있는데 이것은 사랑을 말하고

또 "잣나무 석가래"는 지붕을 덮는 것인데
잣나무는 사시 청청한  신앙을 말하는 것이요.
지붕은 외부적으로 나타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진리대로의 행위, 곧 믿음, 소망, 사랑으로 되어 있는 신앙이 외부적으로 청청하게 나타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집"은 신앙의 집인데, 주님과 우리 성도가 합해서 짓는 집인데 먼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 요소를 짓고,
외부로는  진리대로의 행위, 주님과 맺은 약속대로의 실행, 이것으로 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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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2:1∼17

■ 1절에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사33: 9  땅이 슬퍼하고 쇠잔하며 레바논은 부끄러워 마르고 사론은 사막과 같고 바산과 갈멜은 목엽을 떨어치는도다
사35: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사65:10  사론은 양 떼의 우리가 되겠고 아골 골짜기는 소 떼의 눕는 곳이 되어 나를 찾은 내 백성의 소유가 되려니와

(1) 박윤선 목사님 주석에서는 주님을 수선화와 백합화로 상징했습니다
수선화는 샤론의 들에 자생하는 꽃이다. 그러므로 "나는 사론의 수선화요"란 말씀은 나는 자존자요란 말이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란 말씀은 세상을 구원하려고 세상에 피조물을 입으시고 오셔서  낮아지시고 가난해지심으로(골짜기) 대속의 은혜를 입혀주신 주님을(백합화) 상징한다

(2). 아가서의 문장의 흐름을 보아서는 (1)의 해석을 보다는 (2)의 해석이 받을 만하다. 사론은 레바논 평야에 있는 아주 아름답고 기름진 곳이다. 그러므로 "사론의 수선화요"는 아름답고 참사람의 양식이 충만한 주님의 대속의 은혜에 심기워져 있는 복 있는 성도 자신에 대하여 주님께 감격을 토하는 시적 표현이다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 골짜기는 대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가 자기의 분수를 바로 알아 겸손함을 상징하고
"백합화"는 대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의 성결과 아름다움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는 대속의 은혜를 입어 성결하고 아름다운 성도가 대속의 은혜에 심기워져있는 복있는 성도 자신에 대하여 주님께 감격을 토하며 자기가 현재의 자기 된 것이 전적 주님의 은혜로 된것임을 바로 깨달아 자기의 분수를 바로 알아 겸손함을 상징하는 것이다


■ 2절에 "여자들 중에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에 백합화같구나"
왕이 술람미 여인을 보고 말한다.

"여자들"은 주님과 일반적 관계의 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말한다

"내 사랑은" 술람미 여인과 같이, 주님과 깊은 밀접한 관계의 생활을 하는 성도를 보고 주님이 말씀한것이다.

"백합화"는 대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를 가리키는데

"가시나무 가운데에 백합화"는 바람이 불면 가시나무 가운데 있는 백합화는 이리 저리 흔들려 가시에게 찢기게 되고, 가시에게 찢기면 찢기여 질수록 향기를 많이 발하게 된다.
이와같이 땅 위에 모든 죄악과 불법 가운데에서 핍박과 침략을 받아도 그리스도의 사랑만 나타내는 생활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내 사랑은 가시나무 가운데에 백합화 같구나"하신 이 말씀은 "내 사랑 너는 이 땅위에 온갖 죄악과 불법들에게 어떤 핍박과 고난 받아도 그 속에서 주님의 사랑만 들어내는 신앙의 생활만 하는구나"하신 말씀인 것이다.
주께서 십자가의 대속으로 사죄를 주시고 의를 입혀서 의롭게 해 주신 것이다.

■ 3절에 "남자들 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

여기에 "남자들 중에"라고 하신 이 말씀은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세력들 중에"라고 하는 말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는" 성도가 성도 자신이 긴밀히 사랑하는 주님을 가리켜 표현한 것이다

"수풀 가운데에 사과나무 같구나"
"수풀"은 1장 7절에 "한낮에 뜨거운 햇볕을 피하여 양과 함께 쉬는 곳인데, 신랑 되신 주님의 보호와 주님과 깊은 교제 가운데에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성도가 주님과 깊은 교제를 가지는 곳은 어떤 곳인고 하니, 감옥이요. 암혈이요. 토굴이요. 병석인데, 이것을 수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세상 권세와 타협하지 않고 이 환란의 수풀 속에 들어가야 주님과 신령하고 깊은 교제를 가질 수가 있으니 참된 성도는 이 환란의 수풀 속에 들어가는 것을 기뻐한다.

" 사과나무 같구나"  사과나무는 주를 위한 고난인데, 그 고난을 소원해서 기뻐서 받는 것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은 "내가 감옥에 있고 토굴에 있으니까 사람들의 보기에는 세상에 어떤 세력에 의해서 강제로 거기에 있는 것 같지마는 나는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려 거기에 있다."고 하신 말씀인 것이다.
사도 요한이 밧모섬에 귀양을 갔으니까, 사람들이 보기에는 세상에 어떤 세력에 의해서 강제로 거기에 귀양을 간 것 같지마는, 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려서 거기에 귀양을 가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들은 순경에서나 역경에서나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리어 고난을 받는데, 그 고난 가운데서 그리스도와 깊은 교제를 가지는 것을 기뻐하고 이것을 자기의 취미로 삼는다.
그래서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심히 달았다"고 말한 것이다.

■ 4절 "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

여기에 "잔치집 에 인도하여 들어갔다"고 하신 이 말씀은 환란 가운데에서도 성도가 복음 전함을 환란에 피동 되어서 멈추지 아니하고 계속 복음을 전하게 하심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성도는 환란에서 심문을 받고 고문과 고형을 받을 그때에 복음을 증거 하는 것을 잔치 집에 들어가는 것으로 안다.
그래서 성도가 고문 고형 속에서 자신이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어 드리는 것으로서 양심의 평안함과 기뻐함을 가지고, 또 내게 고난 주는 그들의 심문과 고문과 고형을 주님의 거룩하신 뜻을 이루는 이용만 당하는 자들임을 깨달아 도리어 그들을 긍휼히 여기게된다.

그리고 4절 중간에 "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라고 하신 이 말씀은 성도를 심문하고 고문하고 고형을 하는 그 사람과 그것을 보고들은 모든 사람이, 고문 고형당한 성도를 보고 "이 사람은 사랑의 나라에서 온 사람이구나" 이렇게 인정하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왜정 말년에 신사참배 문제로 일본 고등계 형사가 손양원 목사님을 심문하고 때리지마는 일본 형사가 손 목사님을 보고 "이 사람은 사랑의 나라에서 왔구나" 이렇게 알게 된 것이다.

■ 5절에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해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시편 42:1-4

"건포도"는 예수님의 피를 말하고

"사과"는 주를 위한 고난을 말한다. 그런데 주님을 사랑하므로 병이 난것은 주님을 위해서 죽어야 그 병이 완전히 낫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피와(건포도) 고난은(사과) 병을 낫게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는데에 힘을 돕는 것 뿐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므로 병이 난 것은 사랑하는 자를 위해서 죽어야 만족함이 있는 것이지, 이것 외에는 만족함이 없는 것이다.
그 병이 완전히 낫게 되는 것은 사랑하는 자를 위해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5절에 말씀은 어떤 말씀인고 하니 "내가 주님을 사랑하므로 병이 났으니 , 예수님의 피 공로로, 고난으로 주님을 사랑하는 데에 힘을 돕게 해 달라. 주님을 위해서 죽기 전에는 만족이 없다"고 하는 말씀이다.

■ 6절에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하고 오른손으로 나는 안는구나"

"왼손"은 약속을 말한다. 그러므로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 한다"고 하신 이 말씀은 "내 전부의 소원은 주님의 약속 위에 든든히 서 있다. 내 소망의 전부는 주님의 약속을 내 산 기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이다.

"오른손"은 주님의 능력의 승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다"고 하신 이 말씀은 "주님의 능력이 나를 승리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을 바라보므로 병이 났으니 건포도-곧 주님의 피와 살을 먹어야 하고, 사과-곧 주님을 사랑하고 위해서 고난받고 희생하므로 기뻐하고 만족해야한다. 그리고 주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우리의 소망으로 우리의 산 기업으로 삼고, 주님의 능력 속에 들어가서 보호함을 받아야 한다.

시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시37: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63: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시91: 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시91: 7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시91:14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시91:15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 7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란 말은 "모든 성도들아, 일반적인 주님과 관계의 믿음을 가진 성도들아"하는 말이다.

"노루와 들 사슴"은 순진한 들 짐승이다. 그래서 조그만한 소리에도 놀라서 멀리 달아난다.
주님은 당신의 뜻에 맞지 아니한 것이 우리에게서 하나라도 발견되면 멀리 가버리신다. 진리에게 합치되지 않고 이탈된 것이 우리에게서 하나만 발견 되어도 놀라서 멀리 달아나 버리신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너희에게 부탁한다 " 는 말은 일반적인 주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에게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다  

7절 끝에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고 하신 이 말씀은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만족하니, 주님이 만족하시기 전에는 내가 이 감옥에서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니, 너희들이 나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이 운동을 하지 말아라. 너희들이 이런 운동을 할까 해서 염려가 된다"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밤이 지나면 낮이 오고 낮이 지나면 밤이 오는 것과 같이, 우리의 신앙 노정도 그러하다. 술람미 여인이 환란 가운데에서 기뻐한 것처럼 ,참된 성도는 환란 가운데에서 기뻐한다.  수풀 속에 사과나무와 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려서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잔치 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거기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사랑은 생명을 이룬다. 주님은 하나 뿐인 생명 있는 사랑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한다.

땅에 속한 사랑은 사망만 이룬다. 그러므로 땅에 속한 사랑은 들에 꽃을 보고  자기 하나만 생각하고서는 집에서 볼려고 그 꽃을 꺾어서 집에 가지고 가는 것과 같은 이기적인 사랑이요. 죽이는 사랑이다.  땅 위에 있는 사람은 자기의 유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사랑한다. 그리고 교인들 중에도, 교역자 중에도 서로 사랑하는 데에 있어서 자기 본위로 자기 입장, 평강, 소원, 만족을 위해서 사랑한다. 이것은 너무나 이기적인 사랑이요. 당파를 짓는 사랑이요. 땅에 속한 사랑이요. 무지한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지해서 주님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이 서로 사귐에 있어서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야 한다.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겨야 한다.
안 믿는 사람이나 ,믿음이 어린 사람은 술람미 여인과 같은 그런 신앙 사상과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술람미 여인과 같은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성도는 환란을 당해도 주님의 불변의 약속을 자기의 소망으로 삼고 ,주님의 승리의 능력을 의지하여 환란 가운데에서도 평안하게 지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사과가 달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는 것처럼 기쁨이 없으면 안 된다. 구레네 시몬 처럼 억지로 십자가를 지는 것은 별 유익이 없다. 우리는 어떤 역경에서도 사과를 찾고 건포도를 먹어야 한다.

술람미 여인이 깊은 수풀 속에 들어 있으니까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저 여인은 수풀 속에 있으니까 햇볕을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겠지마는
이 술람미 여인은 사랑하는 자의 사랑에 붙들려 있기 때문에 기쁨과 만족을 누리고 있으니 이것은 예수의 환란으로 맺어진 사랑의 사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는 잔치 집, 곧 복음 운동으로 잘 먹을 때가 있으니 이 때가 우리 앞에 곧 올 것이다. 그때에 잘 먹도록 하고 또 주님을 사랑하고 위해서 주님의 뜻대로 살다가 죽을 것뿐이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이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나를 흔들지 말고 깨우지도 말라"고 말한 대로 우리가 환란을 당해서 감옥에 있게 되면 주님이 원하시고 만족하시기 전에는 우리가 감옥에서 빨리 나오도록 기도하지 말고 주님을 사랑하고 위해서 환란을 이기고 잘 죽도록 하라고 모든 성도들에게 말해야 한다.
그래서 술람미 여인은  7절에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 하노니 사랑하는 내 주님이 원하시기 전에는 나를 여기에서 빨리 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잘 이기고 잘 죽도록 위해서 기도하라"고 했다.

■ 8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의 목소리구나 "
이 말씀은 성도가 사모하는 주님의 음성인 말씀을 들을 때 기뻐해서 토하는 외침이다
우리의 뼈 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 되신 주님께서 하늘나라에서 우리를 향하여 달려 오시는 것을 말한다. 주님은 온갖 구비한 의를 가지고 우리를 찾아 오시는데 우리 성도들은 이런 주님의 사랑을 보고 산다.

8절 하반에" 보라 그가 산에서 달리고 작은 산을 빨리 넘어 오는구나"고 말씀했는데
"작은산"은 인간이 알 수 있는 작은 거룩, 성결, 희생, 고난의 사랑, 인간이 깊이 궁구하면 알 수 있는 성결, 희생과 고난의 사랑"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큰 산"은 하나님만이 측량 하실 수가 있고 생각 하실 수가 있는 초자연적인 성결, 희생과 고난의 사랑,
인간의 지능으로서는 상상 할 수 없는 성결과 사랑, 무한의 희생과 고난의 사랑, 이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주님은 이런 성결과 희생과 고난의 사랑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고, 우리에게 베푸시는 것이다. 그래서 이 주님의 성결과 사랑을 깨달은 자는 주님의 사랑에 붙들어서, 주님의 고난에 영원히 참여하여 기뻐하는데, 이것이 성도의 참된 심정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에 뿌리를 깊이 박고 말씀의 터 위에 굳게 서서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말 것이다.

"빨리 넘어 오는구나" 우리에게 이 큰 구원을 주실려고 현실을 통해서 지체하지 않고 속히 오시는 주님의 사랑을 나타낸다

■  9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서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보는 구나"

여기에 말씀하신 "노루와 어린 사슴"은 빨리 달려오고, 조그만한 소리만 나도 멀리 달아나 버리고, 보지 못했던 것이 하나만 나타나도 깜짝 놀라서 멀리 달아난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빨리 달려오셔서 우리를 보실려고 하시며,
또 당신의 뜻에 맞지 아니한 것이 우리에게서 발견되면 멀리 가버리신다. 진리에게 합치되지 않고 이탈된 것이 우리에게서 하나만 발견 되어도 놀라서 멀리 달아나 버린다. 우리는 주님이 이런 분이심을 알고 조심있게 상대해야 한다. 주님을 이런 분으로 깨달은 성도는 항상 조심하고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조심있게 다 이행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 일수록 조심하고 예의를 지키고 엄격해야 한다.

그리고 9절 중간에 "우리 벽 뒤에 서서 창으로 들여다보며 창살 틈으로 엿본다"고 말씀했는데,

사랑하는 자를 직접 대하여 보면 인격이 보이고
문틈으로 들여다보면 사랑하는 자의 자연스러운 외부의 태도를 다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주님이 벽 뒤에 서서 문틈으로 들여다보고 있다"고 하신 이 말씀은 주님께서 성도가 자기의 정성을 어디에 쏟고 있으며 무슨 계획을 가지고 어떤 행동을 하고 있는지 주목하고 계신다고 하는 말씀이다.

이렇게 주님께서 벽 뒤에 서서 문틈으로 주목하고 계시니 직접 대면 할 때 보다 더 조심하여 덕을 세우는데에 힘을 써야 한다. 주님은 벽 뒤에 서서 우리의 언행심사의 행동을 항상 주목하고 계신다. 우리의 마음, 생각, 행동, 전부를 주목하고 계시는데,

주님이 우리를 주목하고 계시는 여기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고,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보는지 여기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하면 어리석은 일이다.
물론 자기의 잘못된 행위로 인해서 믿음의 형제들이 시험에 빠져서 신앙에 손해를 보고 있는지, 여기에 대해서 살 필 필요가 있다.
그런데 이것이 아니고 주님을 사랑하는 자기의 행위에 대해 ,형제들이 자기를 어떻게 평가하는지 여기에 대해서 귀를 기울인다고 하면 이것은 치사한 일이다.
주님은 당신의 뜻에 맞지 아니 한 것이 우리에게서 발견되면 멀리 달아나시고
벽 뒤에 서서 창틈으로 엿보는 것 처럼 우리의 언행심사의 행동을 하나 하나 주목하고 계신다.

■ 10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주님을 가리킴이고,  "내게"는 성도를 가리킴이다

여기에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라고 주님이 성도에게 하신 이 말씀은 "사과나무 그늘 아래에 있고 건포도로 힘을 돕고 사과로 시원하게 하고, 주님을 사랑하므로 병이 나고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깨우지 말고, 주님은 노루와 사슴 같아서 조금만 마음에 다른 것을 생각만 해도 달아나시니 주님이 자기에게서 떠나시지 않도록 삼가 조심하는 자야"하는 말이다.

"일어나서 함께 가자" 고 하신 이 말은, 주님이 성도에게 주님과 같이 사과나무 아래에 쉬자, 주님과 같이 건포도를 먹어 힘을 돕고 사과 먹어 시원케 해라. 고 하는 말이다. 그런데 믿는 사람 중에 어떤 사람을 보면 교회에서 일을 하는데 자기는 조금 일을 해 놓고서는 얼마나 많이 한 것 같이 추태를 부린다. 우리는 이런 사람이 되면 안 된다. 이런 사람은 너무나 철이 없고 어리석은 사람이요. 유치한 사람이다.

■ 11-12절에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의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여기에 "겨울도 지나고"하신 이 말씀은 "환란이 지나고"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비도 그쳤고"하신 이 말씀은 "악한 세력의 활동도 그쳤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하신 말씀은 평안 무사한 때도 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겨울도 지나가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었다"고 하신 말씀은 "환란도 지나가고 악한세력의 활동도 그치고, 시온의 아침, 곧 모든 사람에게 희망의 새 아침이 되었다"고 하신 말씀이다.

그리고 "새"는 기회주의 자들을 말한다. 그런데 이 기회주의자들은 평안무시 할 때에 몰려다니면서 야단을 지긴다. 그래서 "새들의 노래 할 때가 이르렀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반구는" 비둘기를 말하는데 "반구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린다"고 하신 말씀은 모진 환란 가운데에서 신앙 절개를 지킨 소식이 들린다"고 하는 말씀이다.

■ 13절에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는 성도를 비유한다
여기에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다"고 하신 말씀은 "다른 나무는 열매를 맺지 못하는데 무화과나무만 열매가 익었다."는 말인데 이 무화과는 꽃이 사람에게 보이지 않게 열매를 맺는다. 이와 같이 참된 성도들은 남이 모르게 은밀하게 신앙의 결실을 가진다.

눅 22:7절 이하에 보면 제자들이 유월절 준비를 할 때에 예수님을 보고 "우리가 어디서 유월절을 준비해야 되겠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보시고 "너희들이 성내로 들어가면 물 한동이를 가지고 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리니 그 사람의 들어가는 집으로 따라 들어가서 그 집 주인에게 우리 선생님이 유월절을 지킬 것인데, 어디에 준비했는지 물어 보라고 하시더라고 말을 하면 그 사람이 다락방에 준비하여 놓은 것을 보여 줄 것이다"고 말씀했다. 이 사실은 제자들도 몰랐고 70 문도들도 몰랐고 예수님만이 아셨다. 주님은 은밀한 중에 일을 하는 것을 기뻐하신다.

또 막 11:1절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 두 사람을 베다니에 보내면서 "너희가 이 동네의 아무 집에 들어가면 그 집 문간에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아니한 나귀가 있을 것이니 이것을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를 보고 왜 이렇게 하느냐고 묻거든 주님께서 쓰신다고 전해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고 말씀했다.

이런 사람들은 일찍부터 주님으로 더불어 비밀의 교제, 은밀의 교제를 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들은 일편단심 주님의 쓰실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미리 알고서는 준비해 놓았던 것이였다. 그러므로 남이 모르는 주님과의 은밀한 교재는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많은 시간을 두고 만나기를 힘써다가 겨우 만나기도 했다.

나다나엘은 무화과 나무 아래에서 주님과 은밀하고 깊은 교제를 하다가 주님의 실지로 만나게 된 것이다. 무화과는 숨은 성도를 말한다.

그러므로 13절에 보면 다른 나무는 다 죽어서 열매가 없는데 무화과에만 익은 열매가 있었다. 이와 같이 환란 가운데에서도 신앙 절개를 지킨 이런 사람들이 .환란이 지나고 나니까 들어 나게 되는 것이다.
신약 성경에도 보면 아리마대 요셉도 한 때가 오니까 들어 나게 되었다.
주남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이나 주기철 목사님이나 이런 분들도 한번 환란을 통과하고 나니까 이런 분들의 신앙 인격과 지조가 들어 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13절 중간에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한다"고 말씀했는데, 이 말씀은 주님의 대속의 은혜를 받아  이 은혜에 감격하여 대속을 기념하는 행위를 말한다,
그래서 "나의 사랑하는 자야, 일어나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 것이다.

■ 14절에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마10:16  보라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도다 그러므로 너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같이 순결하라
시11: 1  내가 여호와께 피하였거늘 너희가 내 영혼더러 새같이 네 산으로 도망하라 함은 어찜인고

바위틈은 독수리를 피해 비둘기들이 둥지를 트는 숨는 피란처이다
성도의 피란처 곧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비둘기는 순결한 성도를 상징한다

여기에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하신 이 말씀은 "고독한 자리에서 항상 고결한 생각과 높은 이상을 가지고 은밀하게 신앙 정조를 지키고 있는 자야"라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니까 일반 사람들은 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나로 네 얼굴을 보게 하라"고 하신 말씀은 어떤 말씀인고 하니 얼굴은 과거사인데 "네 얼굴을 보게 하라"는 말은 "네 과거의 신앙 승리한 인격을 나에게 보여달라"는 말이다.
그리고 "네 소리를 듣게 하라"는 말은 미래사인데 "네가 남은 때에는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살겠다고 하는 주밀한 생각과 사상을 내게 고하라"고 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다"고 하신 말씀은 " 네가 미래에는 주님을 위해서 어떻게 하겠다고 하는 네 숨은 생각과 포부는 듣기에 좋고, 네 과거의 신앙 승리는 아름답구나"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위틈 낭떠러지 은밀한 것에 있는 비둘기처럼 입으로 떠들지 말고 마음 가운데에 열심히 추진시키고 하나님 앞에서 충실히 살도록 해야 한다.
은밀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을 제 이로 돌리고, 인간 대접을 제일로 하면 하나님은 섭섭해하신다. 하나님은 은밀한 가운데에서 은밀하게 찾는 자에게 만나 주신다.

우리가 발로서는 하루에 많이 걸어야 백리 정도이지마는 마음으로는 순식간에 세계를 한 바퀴 이상 돌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밀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이렇게 긴밀한 심령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이것을 어떤 위대한 예술가라도 그려 내지 못하고 어떤 위대한 과학자라도 측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은밀하게 계시는 하나님을 은밀한 중에 섬겨야 한다. 주님이 만왕의 왕으로 영광 중에 구름 타고 오실 때에는 숨은 성도의 기도를 타고 오실 것이다.
무화과나무가 꽃은 보이지 않고 은밀한 가운데에서 열매를 맺음과 같이 성도는 은밀한 가운데에서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나타내고 신앙 실력을 길러야 한다. "네가 하나님과 진리를 따르겠느냐 하나님과 진리를 버리겠느냐"고 하는 때가 올 것이니 깊은 소망 가운데에서 깊은 신앙으로 살아야 한다. 인간이 인정하든지 안 하든지 상관하지 말고 주님 한 분에게 인정받는 것으로 기뻐해야 한다.

■ 15절에 "우리를 위하여 여우 곧 포도원을 허는 작은 여우를 잡으라 우리의 포도원에 꽃이 피었음이니라"
여기에 말씀하신 포도원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 여우"는 우리 속에 있는 교회를 해하는 죄악을 말한다.
"작은 여우"는 작은 죄악을 가리킨다
그런데 과거에 승리한 성도들은 작은 여우와 같은 죄악성을 자기 속에서 뽑기를 힘썼다. 앞으로 어두운 세상이 오기 때문에 이 죄악성을 뽑지 아니하면 신앙을 다 빼앗긴다.
우리의 신앙 걸음은 무거운 걸음이기 때문에 여우 새끼와 같은 죄악을 뽑아야 한다. 뽑지 아니하면 실패한다.
그런데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여우 새끼를 잡을려고 하지 않고, 오히려 이것을 변호 할려고 한다.  옛사람, 죄악의 근성을 뽑지 아니하면 아무리 열심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이것은 모래 위에 지은 집이요.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이다. 평소에 이것을 뽑아야 한다.

■ 16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고 나는 그에게 속하였구나.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양떼를 먹이는구나"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요. 나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은 백합화가운데에서(성결의 은혜 가운데에서) 양떼인 우리 성도를 먹이고 있구나.

■ 17절에 "나의 사랑하는 자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때에 돌아와서 베데르 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

"나의 사랑하는 자야"는 성도가 주님에게 사랑을 표시하는 것이다

여기에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간다"고 하신 말씀은 어두움이 온다는 말인데 환란의 때를 말한다.  

"노루와 사슴"은 성도가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으면 즉시 떠나시는 면을 상징한다.  이 어두워지는 환난때에 주님이 나를 떠나지 말고  돌아와서 베데르산에 있어주십시오.

그리고 "베데르산에서의 노루와 어린 사슴 같아여라"고 하신 말씀은 베데르 산에 있는 사슴과 노루가 아무리 도망치고 달아나도 그 산속에 있지 다른 곳으로 가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17절에 말씀은 어떤 말씀인고 하니 주님이여 환란이 올 때에 나를 떠나지 마시고 내게고 돌아와서 내가 실수 할 때에도 떠나지 마시옵소서. 내가 주님을 두고 떠난다고 해도 주님은 나를 떠나지 마옵소서 환란 때에 주님이 나를 떠나지 아니해야 내가 승리 할 수 있나이다."라고 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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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3장 1-11  

우리가 여기 주님과의 관계를 술람미 여인과 솔로몬 왕의 관계를 가지고 지금 상징을 해서 오늘 우리에게 구원의 도리를 알려 주신 것입니다.  비유를 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 1절 내가 밤에 침상에서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내가 밤에 침상에서 이 말은 우리 기독자가 진리가 가리워 지고 성령의 감화감동이 가리어진 개인적인 어두움의 때에 내가 밤에 성도 개인이 자기에 대한 진리가 가리어지고 성령의 감화 감동의 역사가 가리워 지는 이런 때를 밤에 이랬습니다.  

왜 이렇게 진리 영감이 가리워 졌느냐 하면 내가 자기 중심의 욕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지었기 때문에 욕심의 연기 그로 말미암아 진리와 나 사이가 가리어지고 영감과 나 사이가 가리어져 그래서 내가 어두워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야고보서 1장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했습니다. 욕심이 들으니까 가리어지고 얼마 있으니까 그 욕심이 무엇으로 나타나느냐 죄로 나타납니다.  하나님 말씀을 어기는 죄의 행위로 나타나고 얼마 안 있으면 그것이 무엇이 됩니까?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하나님과 나 사이를 끊어 버리는 그런 사망의 결과를 맺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밤에  침상에서  이 말은,
요한계시록 2장 22절에 보면 두아디라 교회에 말하기를 네가 그 음행을 회개치 아니하면 환난에 던지겠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종이 이세벨과 같이 음행 해서  죄짓는 행위를 하는 사람을 침상에 던진다했습니다. 그 말은 믿음을 죽인다 믿음의 잠을 자게 한다는 것입니다.

믿음을 죽인다는 말은  하나님과 연결이 없는 믿음, 그래서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진 면을 말하고,  
믿음의 잠을 잔다고 표현할 때에는
영은 하나님과 연결되어서 살아 있는데 우리의 마음과 몸이 하나님과 연결된 생명 생활을 하지 아니하는 면을 가르쳐서  잠잔다 이랬습니다. 즉 영은 연결되었고 심신은 믿음의 활동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내 믿음이 사는 생명 활동이 전혀 없는 내가 되었습니다. 이럴 때 기독자는 여기에서 고통을 당합니다.  
:1중반--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찾았구나

그래서 자기의 중생 된 영은 여기에서 탄식을 하면서 자기를 구속하신 주님을 여기서 찾습니다.  
그러나 이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와 있습니다.  지금 여기에도 와 있습니다.  
나의 안에 내 영 안에 와 계시고 나의 밖에도 내 앞에 계십니다.  
이 주님을 우리가 만날 수 있는데 왜 못 만나느냐  
내 마음과 몸이  자기중심 자기위주의 욕심을 가져서 이것이 죄를 낳고 죄가 사망을 낳아서 주님과 끊어져서 어두워 졌다. 이 말 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이 주님을 다시 만나는 방법이
주님의 사활대속을 생각해서 들어가는 면도 있고
로마서 11장 32절에서 로마서 12장 3절에 순서대로 찾아가는 방법도 있고
또 우리가 먼저 자기가 내게 대한 주님의 뜻을 문서 계시를 통해 양심으로 들어가서 영감으로 찾는 이 순서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제일 알기 쉬운 것은 현실에 주님은 와 계시므로  언제나 만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의 죄만 회개하고 자기중심 자기 위주의 악만 회개하면 얼마든지 주님은 여러분들과 지금 얼마든지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안에도 계시는 주님 영 안에 계시는 주님이 당장 여러분의 마음에 와서 몸에 와서 만나서 동행할 수 있는 주님이십니다.  

내 밖에 계시는 주님도 지금 내가 나의 악을 자기중심 자기위주의 악을 회개하고 또 하나님 뜻에 어긋난 죄만 회개하면 나의 밖에 있는 주님과 나와 만나서 동행할 수 있는 주님이 되십니다.  

그러니까 바로 주님을 발견하고 발견한 주님을 당장 영접할 수 잇는 제일 쉬운 방범이 무엇이냐 현실에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으면 됩니다.  
여기서는 하나님이 이것을 하지 말라고 하는구나 여기서는 이것을 하라고 하는구나  주님이 기뻐 하시는 것을 해야 하겠구나  싫어하시는 이 행동은 생각은 안 해야 되겠구나 하면서 주님을 찾은 사람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길을 걷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현실에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자가 주님을 만나려고 하는 자요 찾아서 그대로  순종하는 자가 주님을 만나는 자 입니다.  

그 말은 현실에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그대로 찾아서 고치라는 죄와 악을 회개하라는 것 회개하고 ,주님께 순종하라는 것 순종하면 주님을 만나지게 되어 있습니다.  


1-5절은 주님을 만난  성도를 말했고
6-11절에는 이런 비천한 우리가 이렇게 크시고 존귀한 주님과 이제는 결혼하는 밀접한 관계가 어떻게 맺어지느냐 하는 것을 여기에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 안에는 내가 정말로 사랑하고 사랑하는 주님이 그 안에 계십니다.  
그것을 찾고 순종하면 주님을 그 사랑하는 나의 전부요 생명이신 주님을 만나 동행하고 있는 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바로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안에는 주님이 계시고 무한한 영광이 들어있고 금생과 내게의 모든 부요도 그 안에 들어있고 또 하나님의 지극히 크신 능력도 들어있고 어떤 피조물도 빼앗을 수 없는 평강이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있습니다.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 주님의 명령을 찾은 그 사람이 가장 존귀한 것 큰 것 부요한 것 가장 행복된 것을 찾아서 잡은 자입니다.  
어떤 일국(一國)의 대통령이나 어떤 큰 재벌이 권세가 오고 재물이 오는  그것보다도 ----

우리 주님이 현실마다 우리 각자에게 당신의 뜻을 명령하고 우리가 그것을 잡았다면 이것보다 큰 것을 우리가 잡은 것이 없고 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우리들이 믿어야 하겠습니다 이것을 깨닫는다면 땅의 어떤 세력이 나를 흔들어도 걱정이 없습니다.  거기서 두려움이 없습니다.  거기서 항상 담대해 집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성경에 나타나기를 다니엘이나 사드락 메삭 아벧느고가 사자굴이나 풀무불 앞에서도 아무 걱정하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담대했습니다.  
우리가 현실을 만날 때 죄짓지 않고 주님의 뜻을 찾아나갈 때 왜 두려워합니까?  

우리가 두려워 할 때는 두려워 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할 때는 두려워합니다.  

죄를 지어서 자기에게 온 현실의 어려움은 두려워 빨리 회개해야 합니다. 그런데 죄를 지어서 온 주님의  징계는 징계를 받아도 두려워하지 아니합니다.  빨리 회개해서 그 멸망에서 벗어나야 하는데
그런데 도리어 내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그대로 살므로 오는 어려움은 두려워 할 필요가 없고 걱정 할 필요가 없는데 그것을 두려워하고 걱정함으로 주님과 동행이 중단해 버립니다.  
왜 그럴까?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있는 능력을 몰라서 그래 1차 창조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있고 2차 창조의 구원의 능력이 그 안에 들어있다는 것을 알대로 알지 못하고 믿을 때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들이 찾으니까 쉽게 하나님의 뜻이다 잡은 것 너무 그렇게 쉽게 가볍게 넘기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죄가 됩니다.  어떤 유력한 사람의 말보다도 주님이 내게 대한 뜻 현실의 명령을 아주 두려워하고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어져야 주님이 나를 그렇게 대우해 주십니다.  이것을 통해서 주님을 만납니다.  

:1하반--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발견하지 못했어.  

그래서  1-5절까지 술람미 여인이 사랑하는 솔로몬왕을 만날려고 끝까지 끝까지 무던히 애를 쓰는 것이 나옵니다.  마지막 만날 때까지 애를 쓰니까 결국에는 만나게 되는데 오늘 우리들이 혹시 내가 고범죄를 지어서 주님과 나 사이가 이렇게 끊어져서 주님이 나를 떠났다 하더라도 내가 실수를 해서 주님이 나를 떠났다 하더라도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을 끝까지 찾으려고 하는 이것이 있으면 당신은 우리를  주님을 찾아서 만나게 해 주시도록 당신의 피 공로가 약속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보면 쉽게 주님을 찾아지지는 안 했습니다. 많은 어려움을 통해서 찾아졌습니다.  

왜 사람이 주님을 찾다가 중단할까  그 이유는 뭘까요?  주님이 없어도 살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가다가 중단하는 것입니다.  주님 당신 아니면 나는 절대로 살수 없다  당신 외에는 살길이 없고 당신 외에는 나를 행복 되게 할 분이 없고 당신 외에는 나를 평안하게 해줄 분이 없다.  당신의 나의 전부의 전부 생명으로 삼지 아니했기 때문에 그는 가다가 주님 아니라도 돈이면 되고 주님 아니라도 배경 힘  있는 사람이면 되니까 가다가 중단해 버립니다.  정말 여러분들이 그게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있으면 그것을 끝까지 붙들고 찾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 없이는 살수 없다고 간절히 찾는 자는 많은 어려움을 겪고도 또 또 겪고도 마지막은 주님을 끝까지 찾기 때문에 이런 자를 주님은 만나주신다 이 말 입니다

그래서 여기 믿음이 죽어서 믿음의 잠을 자고 있는 그때에 중생 된 영이 자기 속에서는 이 주님을 다시 찾아야지 내가 이래 가지고는 안 되는데 하면서 찾으려면 만나 볼려고 주님의 뜻을 이거다 하고 알 수도 있고 내게 대한 뜻도 밝을 때는 금방 찾는데 어두워지니까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도 찾지 못하는 아주 어두운 사람이 되어 버렸어.  이럴 때에 여러분들 그 입장에서 회개 좀 해야 되겠다  주님을 만나봐야 되겠다 이래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여기서 그런 마음을 가지고도 못 찾았습니다.  여기에서 찾아도 발견치 못하였구나

■ 2 절 이에 내가 일어나서 성중으로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나 찾으리라 하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이에 내가 일어나서 내가 일어났다.  일어났다는 말은 열심을 내서 이 말 입니다.  열심을 내야 돼요  마음에 찾을려고 이것만 가지고 안 되었어요  이에 내가 일어나서 2절에 열심을 내야 돼요  그래도 못 만났습니다.  

:2중반--성중으로 돌아다니며
성중은 예루살렘 성을 말하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교회를 상징합니다.  하나님의 교회 성중에 돌아다니며 가견적인 교회를  말하지요 교회 안에 들어와서 교회 나오면 예배드리러 나오고 성도를 만나고 이래 하면은 예배도 드리고 전도도 하고 성경 공부도 하고 이렇게 하면 주님을 만날 것이라고 교회에 와 봤습니다.  그런데 돌아다니며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거리에서나 큰길에서 찾으리라하고 거리에서 사람이 많이 돌아다니는 거리 많은 성도들이 있으니까 이 성도들을 통해 내 믿음이 살아날까 그래서 주님을 만날까 싶어서 이 사람에게 기웃거리고 저 사람에게 가서 기웃거려도 주님은 만나지를 못해  그리고 큰길 아주 유명한 이런 사람들에게 가 가지고 만나 볼까 예수님 잘 믿는다 이런 사람들도 저런 사람들도 교제해 봐도 주님을 만날 수 없었습니다.  

:2하반--큰길에서나 찾으리라고 찾으나 만나지 못하였구나  

아무리 찾아도 주님을 못만나  이렇게 노력을 해도 안돼.  열심을 내가지고 교회들어가서 이사람 이 신앙동지들 신앙이 좋다는 사람들 붙들고 물어보고 힘을 써도 주님을 만날수 없었어 열심을 내었는데.

■ 3절 성중의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서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성중에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 묻기를 여기는 성중에 순행하는 자 행순 순찰하면서 살펴보는 사람들 교회를 살펴보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목회자들 하나님의 종 목회자들을 만나 가지고 묻기를 3절 하반절에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들을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그 하나님의 종들에게 주님을 보았느냐 하고 물어도 그분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게 해 주지를 못했어요.  그래서 여기 주님을 만날 수 없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종들은 종들 그 자신을 만나면 하나님을 만난다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그 종을 통해서 자기가 힘을 써서 주님을 만나지는 것이지  아주 깨끗한 종 신령한 종을 만났다고 바로 주님을 만났다고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이 말 입니다.  

왜 그 종은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지도는 해 주지마는 주님을 만나는 것은 종이 지도를 해서 성령의 인도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종이 성령의 인도로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지도를 해 주고 가르쳐는 주겠지마는 자기가 직접 만나야 돼.  종의 지도를 받아 가지고 사람의 지도를 받아서 어떤 지도를 받도록 해야 됩니까?  

성령의 지도를 받아야 됩니다.  이래서 성령을 통해서야 직접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신령한 종 밑에 같은 교회에 있다 할찌라도 자기가 그 가르침에 힘을 써서 성령의 지도를 받도록 힘을 써 가지고 성령을 통해서 주님을 만나는 힘을 쓰는 자는 주님을 만나는 것이고 지도를 받은 그것만 가지고 자기가 힘쓰지 않는 자는 성령의 직접 지도를 받는 그것을 배워야 돼.  여러분들이 배우는 것을 무엇을 배워야 하느냐  사람에게 배우는 것은 어떻게 성령을 만나서 성령의 지도를 받을 수 있느냐  성령의 지도를 받아서 주님을 만나는 길이 무엇이냐  이것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앙선배나 지도자가 그렇게 사는 것을 보고 아 저렇게 살아야 되겠구나  저렇게 힘을 써야 되겠구나  또 신앙의 행위를 배워서 자기가 그렇게 하는 것 입니다.  자기가 해야 됩니다.  사람은 자기가 가르쳐주고 하는 것은 자기가 성령의 직접 지도를 받도록 힘을 써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을 만납니다.  내 신앙선배 신앙 지도자는 원래 잘하시니까 하는 자는 못 만납니다.  자기가 힘쓰지 않는 자는 못 만납니다.  

■ 4절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그래서 성중에 행순 하는 자를 만나 묻기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너희가 보았느냐 하고 했는데 그들을 떠나자마자 마음에 사랑하는 자를 만나서 만났습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종들에게 지도를 받아서 즉시는 못 만났는데 떠나자마자 힘을 성령의 인도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기를 배우고 나서 이대로 해 보니까 주님을 만나게 되었다 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종들은 그렇지 못하고 주님을 못나게 하는 그런 종들도 있다는 것이 아가서 5장 7절 성중에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도리어 그들을 통해서 주님을 만날려고 이렇게 도리어 나를 쳐서 상하게 했다.  믿음을 상하게 만들었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교회를 지키는 자들이 누구입니까?  하나님의 종들 웃옷을 벗겨 주님의 대속을 옷을 도리어 벗겨서 벌거벗게 만든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이런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서든지 두 면의 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아무리 옳은 종이라도 여기에서 떠나자마자 만났다고 했기 때문에 3장에서는 자기가 그 지도를 받아서 성령의 직접 지도를 받아서 주님을 만나도록 힘을 써야 된다는 면을 여기 말했습니다.  이래서 주님 만납니다.  
같은 종 밑에서 말씀을 듣고 지도를 받으면서도 왜 어떤 사람은 주님을 긴밀하게 만나고 못 만나는지  그것은 자기가 힘을 써서 성령의 인도로 주님을 만날려고 열심을 내지 아니 했기 때문입니다.  

:4하반--   그를 붙잡고 내 어미 집으로, 나를 잉태한 자의 방으로 가기까지 놓지 아니하였노라

나의 어미의 집은 --나를 낳고 키운 집 하나님의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교회 참된 하나님의 교회로 들어가기까지 또 들어가서 나를 잉태한 자의 방  피 성령과 진리로 내가 낳았습니다.  잉태되고 낳았습니다.  그래서 참된 교회 안에 가견적 교회 안에 들어 가가지고 피 성령과 진리로 낳았기 때문에 나는 잉태한 성령님을 만나서 동행하기까지 놓치 아니했다  이렇게 주님을 만날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이것은 우리성도들이 참 자기가 욕심으로 말미암아 죄를 짓고 죄로 말미암아 자기와 주님과 사이가 끊어진 관계에서 다시 주님을 찾아 만날려고 애를 쓰는 과정에서 어떻게 해야 주님을 만나느냐 하는 면을 여기 말씀한 것입니다.

어떤 어려움도 자기가 중단하지 말고 끝까지 진실 되게 찾으려고 하는 자는 만난다
그런데 왜 중단되느냐 주님보다 더 필요한 것이 있고 더 큰 것이 있고 할 때에는 중단되게 주님이 그 현실에 어려움을 준단 말입니다.  
어려움을 주는 것은 그것보다도 내가 필요한자로 만날 수 있고 그것보다도 내가 더 필요해지지 아니하면 중단되어지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현실에 그것들을 두어서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찾는 방법으로 교회 안에 들어와야 되고-- 마음에서 주님을 찾는 그것만 가지고는 안되고 열심을 내어야 되고 열심을 내서 교회 안에 들어와야 되고-- 교회 안에 들어와서 이런 저런 사람에게 묻는다고 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의 종들에게 묻는다고 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의 종에게 물어 가지고도 뭘 묻고 배워야 하느냐  성령님을 만나서 인도 받을 수 있는 그 길을 사람에게 배우고 --
그러고 난 다음에 만나는 것은 자기가 성령님을 붙들고 가서 만나야 됩니다.

종을 통해서 내게 대한 성령님을 만나서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지도를 받을 수 있는 시작이 무엇이냐  하나님이 이것을 기뻐한다  
하나님의 종이 이것이 죄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중심이 아닌 인간중심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중심이다.  이것을 구별해서 알리면서 그러니까 너가 빨리 여기서 죄를 회개하고 악을 회개해서 의의 사람으로 살고 하나님 중심의 선으로 살아라 가르쳐 줄 때 그것을 붙들고 이것을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인정하기까지 그것을 내가 온전히 회개해서 성령님을 딱 만나놓으면 성령님이 주님을 만나서 동행하게 하신단 말입니다.  그래서 오늘 여기에서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붙들고 바로 주님을 만나는데

지금 나는 행순 하는 자인데 여러분들에게 주님을 만나는 그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하며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찾아 들어가라. 이것은 주님이 좋아하는 것이다.  싫어하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중심이다.  인간중심이다.  그러니까 이것을 빨리 알고 고쳐나가라  

이럴 때 성도가 이 말씀을  붙들고 이제는 힘을 써서 성령님을 만나기까지 양심을 써서 들어가면 바로 주님을 만나 진다 말입니다.  

■ 5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예루살렘 여자들아  
예루살렘 여자들아 하는 말은 일반적인 신앙의 성도들을 가르쳐서 예루살렘 여자들아 했습니다.  

내가 노루와 들 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주님은 노루와 들 사슴 같아서 노루와 들사슴은 조금만 소리가 나도 천리 만리 도망갑니다.  멀리 도망  갑니다.  노루는 도망 갈 때 위로 잘 뛰어 오라 가고 산을 잘 탑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우리가 조금만 중심이 당신에게서 떠나고 그래서 우리가 죄의 행동을 하면은 주님은 어느새 어디로 가시는지 나를 떠나는 면을 가르쳐서 노루와 들사슴이라 했습니다.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그러니까 너희들은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 사랑하는 주님이 주님과 나의 사이의 환난이 주님이 됐다 이 정도면 됐다고 만족할 때까지는 이 환난이 지나가기를 기도하지 말라 왜 거기서 주님과 바로 성도가 깊은 사랑의 교제를 하기 때문에 깨우지 말아라.  


6-11절에 보면은 주님의 사활대속을 입은 성도가 주님을 향한 기도를 가지고  솔로몬의 연을 타서  주님과 결혼하는 면을 나타내는 것 입니다.  
우리 성도가 주님과 결혼하는 광경--이것이 얼마나 깨끗한 결혼이며 얼마나 기쁜 일이고 얼마나 경사스러운 일이고 얼마나 존귀한 일이겠습니까?

1-5절은 주님을 만난  성도를 말했고
6-11절에는 이런 비천한 우리가 이렇게 크시고 존귀한 주님과 이제는 결혼하는 밀접한 관계가 어떻게 맺어지느냐 하는 것을 여기에 말하고 있습니다.  

■ 6절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연기 기둥과도 같고
성도의 기도 생활이 결혼가마 앞에선 연기와 같이, 자기의 모든 생활에   기도가 기둥같이 앞서  계속 나가야 하고 , 우리는 기도를 따라 나가는 생활이 되어져야 한다
범사를  기도로 미리 해결 짓고 나아가야 한다.
즉시 돌발적으로 나가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  
이렇게 하는 사람이 깨어 기도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연기 기둥과도 같고  여기 연기는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은 뒤에 나오는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의 향연을 가르쳐서 연기 기둥이라 말했습니다.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향품의 향연은 성도의 기도를 주님께 상달케 하는 대속입니다
또 몰약은 썩지 않게 하는 방부제이므로 -주님의 사활대속은 사람들로 죄악으로 썩지 않게 하는 방부의 역할을 하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유향은 기도를 상징합니다

그 모든 악취를 제거하는 것이 향인데, 인간의 모든 악취를 제거하고 인간에게서 아름다운 냄새를 나게 하는 것은 대속을 입고 하는 기도인데 이것이 신앙의 아름다운 행위로서 주님에게 올라가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면을 가르쳐서 연기 기둥과도 같다했습니다

이런 자라야 솔로몬의 연을 탈수 있다.  솔로몬의 연은 가마입니다.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누구인고?"
거친들-세상적으로 고독하고 의지할 것 하나도 없고 해하는 것밖에 없는 세상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편단심 주님께만 일편 단심으로 소망과 의지를 가지고 주님만을 찾아 나아가는 자가 누구인고 하는 말이다
즉  광야에서 이리 가운데 있는 양이, 목자를 향해 달림과 같은 감정과 의지와 행동을 가지고 주님을 찾아 나아가는 자가 누구인고 하는 말이다
거친 들이니 세상에는  취미가 하나도 없습니다

■ 7절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인이 옹위 하였는데

이는 솔로몬의 연이라\
이는 솔로몬 왕으로 더불어 결혼할  신부 탄 연이라.
솔로몬의 가마에 누가 타느냐  솔로몬의 신부가 탄다.  바로 솔로몬은 주님을 말하는데 주님의 신부 된 우리가 탄다.  주님의 사활의 대속의 의를 입고 기도하고 대속의 의를 입고 현실에서 썩지 않는 생활을 하고 현실에서 주님의 사활의 대속의 의를 입고 아름다운 믿음의 행위의 향을 나타내는 생활을 하는 자가 주님과 결혼할 수 있는 가마를 탈수 있다.  이 가마는 어떤 가마인가  신부가 탈수 있는 가마다.  

이스라엘 용사 중 육십 인이 옹위 하였는데
이 가마 옆에는 이스라엘 용사 중 60인이 옹위 하였는데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이스라엘 용사는 믿음의 전투에 아주 용감한 사람들을 말한다.  
이렇게 참 믿는 데에는 천사도 돕고, 모든 믿는 사람들의 동지도 돕고, 신앙의 선배 지도자 이 사람들이 믿음의 전투의 능력 있는 사람들이 4가지 면에 자격 있는 신부를 옹위 한다.  협조한다.  
4가지 면으로 살아보려고 하면 신앙의 동지 선배 지도자가 협조를 하게 됩니다.  

■ 8절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다 칼을 잡고 싸움에 익숙한 사람들이라
죄 사망 마귀를 격파하는데 능한 사람 익숙한 사람들이라.  
즉 믿음의 싸움을 많이 싸웠고 승패에 연단이 많음으로 이제는 싸움에 능숙한 성도들이라.
천사도 물론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옹위 해서 진리와 성령의 검을 가지고 이렇게 성도를 보호한다.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허리에 칼을 찼느니라.  
밤의 두려움 ---진리 영감으로 어두워진 이 세상에서 죄 사망 마귀의 세력들을 능히 감당해 내려고 허리에 칼을 찼다.  
진리의 검 영감의 검을 항상 준비하고 있는 자들이라 말입니다.  
환난과 사이비한 유혹의 밤의 두려움을 인하여 각기 성령의 검, 진리의 말씀으로 자기를 든든케 무장하였더라.

그러므로 성도가 앞으로 환난 이기려면 성경 많이 읽어 사이비한 유혹적인 환난을 구별 해야한다.  
어떻게 성경에 말했나?
사이비한 유혹을 성경과 영감이 아니고 이길 수 없다
성경 말씀과 기도로 칼을 차야 한다.


가마가 어떻게 만들어졌느냐 하면
■ 9절  솔로몬 왕이 레바논 나무로 자기의 연을 만들었는데

만주의 주시며 만왕의 왕이시며 십자가로 구속하신 그리스도께서 성도가 탄 연을 만들었는데
레바논 나무로 가마를 만들었다. 말은
① 레바논 산은 사람이 올라갈 수 없는 높은 곳에 눈이 사시사철 녹지 않는 그것인데
이것은 성화 된 아주 언제나 주님의 대속의 의를 입고 있는 성화 된 그 사람을 비유합니다
그러니까 주님과 결혼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사람이어야 하느냐-- 백향목으로 연을 만든 것과 같이 주님의 사활의 대속의 의 가마를 타고 언제나 변하지 않는 그런 하나님의 형상의 성화 된 사람이라야 가마를 타고 주님과 결혼할 수 있다는 것이요.  

■ 10절  그 기둥은 은이요 바닥은 금이요 자리는 자색 담이라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②그 기둥은 은이요 은은 성경에 성결 즉 성화를 말합니다. 주님의 대속의 의를 입고 더럽히지 않는 성결한 그것이 가마의 기둥이 되어있다, 그러므로 이런 성결한 성화된 자라야 이 가마를 탈수 있다

③바닥은 금이요  금은 믿음을 말합니다.  
성도가 믿음을 가져야 이 가마를 탈수 있는 사람이 되어지고
그래서-- 성화의 기초는 다 믿음의 순종에서요.

④ 또 자리는 자색 담이라-- 이것을 원문대로 정확하게 해석하면 자색 담으로 가마의 지붕을 덮는 것을  말합니다. 가마의 지붕 덮개인  자색담은 주님의 대속의 피를 말하는데 주님의 대속의 피로 우리의 죄와 허물들이 다 씻어졌습니다.  이 대속을 입고 벗지 않고 있는 자가 가마를 탑니다.  

또 6절의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되어야 솔로몬의 가마를 탈수 있다

이렇게 4가지로 만들어진 가마이기 때문에 가마를 탈수 있는 자격은 4가지 레바논 나무, 기둥은 은, 바닥은 금, 자리는 자색담 4가지와 , 연기 기둥과도 같고 몰약과 유향과 장사의 여러 가지 향품으로 향기롭게도 하고\ 거친 들에서 오는 자가 되어야 솔로몬의 가마를 타게 되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 안에는 예루살렘 여자들의 사랑이 입혔구나  
그 가마를 탄 신부의 자리는 모든 성도들의  사랑과 앙모가 집중 옹위 하여 있는 위치이니,
이는 성도가 주와 하나되어 있기 때문에-- 주를 향한 모든 것이 이 신부를 향한 모든 것이 되어진 위치이라.
사람들이 이해 못해도- 자신만 모든 것이 주와 같이 하나만 되어지면 -주님께 오는 조롱도 칭찬도 미움도 사랑도 높이 섬김도 다 자기를 향한 것이 된다. 이 위치가 가장 영광된 위치이다.


■ 11절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 왕을 보라 혼인 날 마음이 기쁠 때에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시온의 여자들아 나와서 솔로몬왕을 보라  시온의 여자들은 일반적인 성도를 말합니다. 예루살렘을  시온성 다윗성이라도 불렀습니다.  

:11하반--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 그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
주님으로 결합되는 시기,  환난의 때인 혼인날, 마음이 기쁠 때

이제 이 신부가 결혼 할려고 오는 솔로몬왕 그런데 여기 시온의 여자들아 솔로몬왕을 보라 이래 했거든요  바로 가마의 탄 신부 성도가 주님과 같고 주님이 이 성도와 같은 이런 면을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볼 때 주님을 보는 것 같고 주님을 볼 때 참 주님과 결혼할 수 있는 모든 자격을 갖추고 오는 성도를 볼 때 주님을 보는 것 같고 주님을 알려고 하면 주님을 보니까 성도 같고
-- 그것을 표현하기를 빌립이 주여 내게 아버지를 보여 주옵소서 이렇게 요청하니까 예수님이 나를 본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여달라 하느냐 그래서 우리가 성화된 성도 믿음의 성도들 순결한 성도들 주님의 대속의 피를 항상 입고 사는 성도들은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보면 그것이 또 성도들에게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11하반 -모친의 씌운 면류관이 그 머리에 있구나
세상의 환난 가운데서 믿음의 승리를 한 그것이 그 머리에 있구나

예수님도 땅에서 승리한 믿음의 면류관을 쓰셨고


그러므로 신부 된 우리도 이 면류관을 써야 이런 결혼을 할 수 있다 말 입니다.  
땅에서 진실 된 결혼이라고 하면 경사 중에 큰 경사가 아니겠습니까?  
참 신랑 되고 참 신부 된 주님과 우리 사이의 결혼이 얼마나 좋은 것인지 그것만이 참된 결혼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 결혼도 그냥 되는 것 아닙니다.  힘을 써서 되어 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활대속으로 내가 중생 되어서 예수 믿게 부름 받았다고 다 된것 아닙니다  

여기에서 주님과 나 사이가 이런 가마를 타고 현실 현실마다 그때 그때마다 결혼되어지고 또 결혼되어지는 것 결혼이라는 것은 계속해서 하나가 되어지는 작업이 시작되는 것이 결혼식입니다.  

가면 갈수록 모든 소원과 생각과 뜻과 영광과 부요가 점점 더 하나되어져 가는 것
다른 이질들이 모든 소원과 생각과 뜻과 영광과 부요 이 모든 것이 하나 되어지는 것이 온전한 결혼 아닙니까?  
바로 우리 주님과 우리 사이의 결혼은 영원히 결합되어 가는 결혼입니다.  
한번에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결혼이 된 이 식을 올려서 한 부부가 된 그 자체만 해도 얼마나 큰 영광이냐  그 결혼이 온전히 되어서 내가 주님을 점점 닮아나가고 주님은 나의 모든 부족을 책임져 나가는 완전히 하나되는 이 결혼 역사 바로 우리가 땅위에서 이루어 나가는 건설구원이며 영원히 이루어 나가야 할 우리의 구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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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아가 4장 1절∼5절
참조 : 백영희 목사님 설교록 94호 343쪽, 1983년 8월 5일 지권찰회


■ 1절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이는 주님이 성도를 향해서 성도를 어여쁘다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성도의 어떤 점을 보시고 어여쁘다 하시는가?

첫째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짐승 쳐놓고는 비둘기가 예절이 제일 깨끗합니다. 다른 것은 뭐 암컷이나 수컷이나 죽으면 그 다음에 그만 당장 재혼입니다. , 비둘기는 절개가 있습니다. 한 마리가 죽으면 대개는 수절을 합니다. 재혼하는 게 별로 없어요.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은 비둘기 같고'  너울은 결혼할 때 입는 예복 아닙니까?
'네 눈은 비둘기 같고' 아주 정조의 눈이다.  딴걸 탐하지 안 하고 주님만 바라보고  사는 그것을 주님이 제일 미로 봅니다.
더워도 주님만 바라보고 추워도 주님만 바라보고, 가난해도 어려워도 주님만 바라보는 그 인격을 주님이 제일 어여뻐하십니다. 제일 기뻐하십니다.

또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길르앗에 있는 그 염소들은 그 비옥하니까 살이 쪄서 털이 번쩍번쩍합니다.
머리털은 이것은 화목을 말하는 건데- 네 화목은 아주 길르앗에 있는 염소 새끼 그 모인 떼 모양으로 번쩍번쩍하다. 그러면 믿는 사람은 둘 하고도 합하고, 셋 하고도 합하고, 열 하고도 합하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잘 화평해 가지고 있는 그것을 주님이 둘째 미로 보십니다.
성도들이 이 세상에 결혼할라 하면 그 처녀들이 아주 지아비를 위해서 단장하고 예비하는 것 모양으로, 신부 될 사람들이. 우리는 영원히 주님의 신부인데 신부라 말은 이 세상 부부 그거는 모형입니다. 신부라 말은 신부가 결혼하면은 신랑의 것은 전부 신부의 것 다 안 됩니까?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든 것이 우리 것 되고 우리의 모든 단점을 하나님이 책임지는 것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 2절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구나

셋째로는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털 깎인 암양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상태를 낳은 양 같구나'  

■ 3 절 네 입술은 홍색실 같고 네 입은 어여쁘고 너울 속의 네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네 입술은 홍색실 같구나'
입술이 빨가면 건강하고,   주님이 우리의 인격의 건강 그것을 이 육신의 사람으로 말하면 입술이 발가이 아름다운 것같이 그렇게 봅니다.
그러면 홍색실 같은 거는 뭐냐 하면 무슨 일을 맡기면 그 일을 착착 잘 감당을 해 내는  강건체,  
어떤 사람은 일을 맡겨 놓으면 그만 그 일을 하느라고 몸치가 나고 병이 나고 이래도 자기 맡은 사명은 기어코 해 냅니다. 또 해 내고 나서도 아무 자랑도 안 하고 뭐 대우를 기다리지도 안하고.
이런데 뭘 시켜 놓으면 조그만한 걸 시켜 놔도 아주 어려운 일 한 듯이 다른 사람에게 무슨 알아주지 않는가? 대우를 안 해 주는가? 이렇게 하는 그거는 그런 사람은 주님 앞에 그 인격의 입술이 아주 누리팅팅하게 송장 입술 그런 입술 같습니다.

뭐 조금만 시켜 놓으면 '하, 이런 일 시켜 내가 이렇게 어려운 일 했다. 어려운 일 했다.' 또 칭찬 받을라고 또 대우 안 해 준다고 토라져서 삐쭉하는 그거는 주님 앞에 인격의 입술이 송장 입술 모양으로 누리팅팅하게 그러면 그 보기 싫을 것 아닙니까? 그걸 여기 말합니다.


'네 입은 어여쁘고'
그래서 '네 목의 구슬꿰미라' 한 말 한 말 나오는 것이 다른 사람을 살리는 그런 말하는 사람은 아주 입이 예쁘게 생겼다고. 어떤 사람은 '그 사람 입이 예쁘게 생겼다고'

또 '너울 속에 네 뺨은 석류 한 조각 같구나' 뺨  잘생긴 사람은 아주 그만 그 낮에 다른 것 여간 잘 못생겨도 다 흉한 걸 덮습니다. 이러니까 참 이 뺨이 잘 생긴 게 그게 아주 신부로서는 참 좋은 건데.
성도들 주님의 신부된 성도들의 뺨은 어떻게 생겨야 잘 생기느냐? '네 뺨은 너울 속에 있는 네 뺨은 석류 한조각 같구나' 이 석류는 보면 끄트머리가 뿔뚱뿔뚱하게 아주 보기 험합니다. 그 험한 열매가 겉은 하나뿐이지마는 이걸 뚝 쪼개보면 속에는 꼭 아주 깨끗한 피가 얽힌 것 모양으로 얽혀 가지고 있으며 속에는 열매가, 그거 나는 세어보지는 안 했는데 그걸 아마 수백 개 될런지 몰라. 수백 개 될 겁니다. 겉은 하나지마는 속에는 열매가 수백 개입니다.

어떤 한 사건을 좋은 의의 열매를 하나 맺었으면 사람 보기에는 의의 열매 그거 하나 뿐으로 보지마는 그 의의 열매를 맺은 내용을 가서 들여다보면은 터먹터먹에 참 사람이 감동을 받을 만한 남 모르는 수고, 남 모르는 그 사랑, 남 모르는 봉사, 남 모르는 인내, 남 모르는 애로, 겉이 하나면 그 껍데기 하나 속에 알맹이는 여러 수십 배가 들어 있는 그렇게 외식 생활하지 안하고 은밀 생활하는 그 사람의 그 행위가 신부의 어여쁜 뺨과 같이 됐다 그 말입니다.


■ 4절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목은 군기를 두려고 건축한 다윗의 망대 곧 일천 방패 용사의 모든 방패가 달린 망대 같고' 네 목은 망대 같다. 그 목에서는 한 마디가 나오니까 모든 걸 다 방비하고, 모든 것을 방비하고, 또 한 마디가 나오니까 적군을 다 쳐서 멸하고. 그러니까 그 목은 망대도 되고 일천 방패와 병기를 단 그런 아주 전쟁에 능숙한 망대, 그러면 그 사람 모가지에서는 나오는 것이 전부 사람, 원수를 죽이고 죄를 멸하고 마귀를 멸하고 사망을 멸하고 사람을 구원하는 그것이 그 모가지에서 썩썩 나온다 그 말이오. 그게 이제 예수님의 신부의 목이 아름답게 생겼다 그랬습니다.


■ 5절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네 두 유방은 백합화 가운데서 꼴을 먹는 쌍태 노루 새끼 같구나' 그러면 유방은  쌍태 노루 새끼 같다. 노루 새끼는 새끼 쳐놓고 빨리 크는 것이 노루 새끼입니다.
'쌍태 노루 새끼 같다'  대개는 쌍태 낳는데 한 마리 낳는 거는 별로 없어요,

꼭 같은데, 유방은 그렇게 생겼다.
그거는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의 후배인 믿음의 후배, 믿음의 자녀, 그 믿음의 자녀를 기르는, 믿음의 자녀를 기르는 그 은혜가 자기에게 나와서 자기가 자기에게 속한 양떼를 기르는 그 기르는 양이, 양떼에게 젖을 먹여서 기르는 양이, 유방이 처음에는 요만해 가지고 젖이 쪼그매 나오다가 또 요만하면 많이 나오고 이만하면 많이 나오고 자꾸 큰다 그 말이오.

그러니까 자기에게 속한 양을 먹이는 그 양이 또 많아지고 많아지고 커지고 커지고 자꾸 많은 양떼를 먹여서 기를 수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주님의 신부의 유방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요것이 신자의 신앙 인격입니다.
신앙 인격은 이런 걸로 단장해야 되지
이 세상이 지나가기 전에 신앙 인격의 용모를 단장을 잘해 놓으면 그 단장은 영원히 갈수록 계속합니다. 그러니까 이 속사람 단장을 좀 잘 하도록 합시다.

오늘 지금 말하는 것은 홍색실 같아야 되겠다 그것을 말할라고 하는 겁니다. 홍색 실. 홍색 실은 무슨 표라 했습니까? 홍색실은 무슨 표라요?, 건강. 됐어, 건강 맞았어.

이러니까 이 집회 때에 자기 양떼를 거느리고 가면서 그만 조금 하면 탁 웅크려지고 몇 번 가서 권면하다 안 들으면 그만 '에, 치워버려라.' 이래 낙망하는 그런 지는 그건 사람은 주님의 신부의 인격으로서는 입술이 송장 모양으로 누르팅팅하게 지금 곧 죽을 사람 모양으로 그런 겁니다.

그저 또 권면해서 안 들으면 또, 열 번에 안 들면 열한 번, 스무 번에 안 들으면 또 스물한 번, 스물한 번에 안 들으면 스물두 번, 또 위해서 기도하고 권면하고, 기도하고 권면하고 이래도 또 마음에 부족해서 자기에게 속한 식구를 이렇게 돌보는 데에 건강체가 돼야 되겠고 또 그것들을 때를 따라서 잘 양식을 먹이는 그런 두 유방이 잘 생겨야 되겠습니다. 쌍태 노루 모양으로.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주님께서 맡겨 주신 그 사명에 대해서 의지가 강건해야 되고, 사랑이 강건해야 되고, 또 인내가 강건해야 되고, 열심이 강건해야 되고, 그러면서 절제가 있어 잘 조절해야 되지 그만 조절하치 못해 가지고 조금 잘 못해서 턱 쓰러지면 안 됩니다.
그러니까 자, 홍색실도 같애야 되겠고, 또 두 유방도 쌍태 노루 모양으로 뚜렷해야 되겠고, 또 입에서는 젖과 꿀이 흘러야 되겠고, 또 뺨은 석류 한조각 모양으로 다른 사람 보기에는 하나 했지마는 남 모르는 속에 알맹이는 그 몇십 배나 되도록 그래 해야 되겠고, 눈은 무슨 눈 같애야 된다 했습니까?  비둘기 눈. 주님만 바라보는, 주님만 바라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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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아가 4:6-9  
(백영희 목사님의  171호 574쪽, 1988년 11월 2일, 삼일밤, 아가 4장 6절∼16절. 설교     --참조)

이 아가서를 기록한 이는 솔로몬인데 우리 믿는 도리를 상징으로 해 가지고 무슨 모양 이런 것을 가지고 우리에게 구원 도리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4장 1절로부터 5절까지는 하나님의 신부가 된 교회는 어떻게 단장해야 되고 어떻게 구비해야 되는 것을 이런 저런 모든 모양들을 끌어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6절로부터는 예수님으로 더불어 동거하고 동행하는 데에는, 주님으로 더불어 동거하고 동행하는 데에는 어떻게 하면 동거하고 동행할 수 있다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신 말씀입니다.

■ 6절에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내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그런 시대를 만나게 되는데,
날이 기운다 말은 날이 이제 해가 넘어간다 말입니다. 해가 넘어가고, 해가 넘어가면 그림자가 없어집니다. 해가 넘어가고 그림자가 없을 그때에 내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에 거게 가서 성도를 기다리겠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날이 기운 것은 하나님의 성령의 은사가 그만 가리워지고 또 진리가 가리워져서 마치 해가 없으면 음지인지 양지인지 그것을 분별 못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리와 영감이 이렇게 가리워지면 뭐 음달 양지 모르는 것처럼 죄인지 의인지 모르는 이런 다 혼탁 세계가 되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왜 이 해가 가리워져서 해가 지는가?

요한계시 9장에 보면은 해가 지는 것은 사람들 속에 끝없는 욕심이 자꾸만 일어나서 전부 세상은 인간 욕심 세상이 되고 옳고 바르고 맑은 것이 하나도 없고 전부 인간 욕심으로, 이 사람 욕심 저 사람 욕심 욕심으로만 가득 차서 제 욕심에게 자기를 비추어 살릴 수 있는 진리와 영감이 가리워져 버리고 또 다른 사람들의 욕심 행위로 인해서 진리와 영감이 가리워져서 진리와 영감을 찾아보지 못할 만큼 이렇게 진리와 영감이 가리워지고 인간 욕심만 마치 옹기점에서 연기 올라오듯이 퐁퐁 올라와 가지고 그 심령을 어둡게 해서 영감과 진리의 빛을 받지 못할 것을 말씀을 했습니다.

뭐 예수 믿는 사람들이지마는 자타의 욕심, 자타의 그 끝없는 욕심 이것을, 내 욕심 또 이루어야 하지 다른 사람 욕심 또 이루도록 협조해 줘야 되지 말세가 되면 전부 욕심 놀음입니다. 욕심 놀음이 돼 가지고 진리의 빛을 다 잊어버리기 때문에 음지 양지를 모르고 전부 새카매지는 것과 같이 빛이 어두워지니까 이제는 처음에는 죄니 의니 뭐 저거는 비성경적이니 성경적이니 이렇게 말 있지만 이제 그전 것이 없어서 음지가 양지가 구별이 없이 그만 전부가 다 새카매지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지금도 뭐 교회는 많이 서고 믿는 걸 많이 말하지마는 실은 한 가지만 가지고라도 저게 저 진영이, 저 진영이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저 교회가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저 사람이 하고 있는 것이 인본주의냐 신본주의냐 저게 세상주의냐 천국주의냐, 참말로 십자가의 운동이냐 십자가의 원수인 운동이냐? 이것을 도무지 분별하지 못할 만치 대단히 혼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이 바로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입니다.
그러면 지금은, 어디서 주님을 만날 것인가?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으로_주님이 간다 했습니다.
그러니까 몰약산에 가서 만날 수 있고 유향의 작은 산에 만날 수 있다.
몰약산이라 말은 몰약은 방부제 양을 말합니다 방부제 약.

그러니까 이렇게 온 세상이 다 의고 죄고 그런 것이 없고 뭐 다 혼탁해서 의니 죄니 말만해도 듣기 싫어하고 또 하나님의 뜻이니 사람 뜻이니 이렇게 구별만 할라 해도 모든 사람들이 다 징그럽게 생각하고 싫어합니다.

이래서 도무지 진리를 만날 수 없고 영감을 만날 수 없는 이런 어두움의 때가 될 때에 그때에는 주님을 어데 가서 만나겠느냐? 그때 주님 만나는 그 길을 가르쳐 줍니다. 몰약산에 가 있겠다. 몰약산에 가야 주님 만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모두 다 진리도 없지 영감도 없지 뭐 이 사람도 저 사람도 전부 뭐 세상주의고 자기 욕심주의인데, 그래서 악하니라 해, 때가 악하니라.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때가 악하다. 때가 악하다 말은 네 주위 환경 전부가 다 피조물 중심 자기 중심으로 되어 있는 세상이기 때문에 네가 아주 조심하지 안 하면 다 거기 삼키기 쉽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럴 때는 몰약산으로 가라. 그렇게 주위 환경이 다 부패해질 때 그때에 네가 방부제 산으로 가라 그 말이요, 방부제 산으로 가라. 몰약은 방부제, 썩는 것을 썩지 못하게 하는 방부제인데 방부제 산으로 가라 하는 말입니다. 방부제 산으로 가라 말이 무슨 말인가? 온 세상이 다 썩어도 너는 썩지 말고 참고 견뎌라.

뭐 장로도 썩고 목사도 썩고 또 집사도 권사도 반사도 부장도 다 썩고 나이 많은 사람도 썩고 젊은 사람도 썩고 다 이렇게 세상이 썩어져 가니까 너도 다 세상이 이런데 뭐 나 혼자 이렇게 이러니 저러니 특별나게 말할 게 뭐 있느냐? 이렇게 뭐 독선으로 이렇게 할 게 뭐 있느냐? 그래 가지고 네가 멸망하기 쉬우니까, 몰약산으로 가라.
그럴 때에 너는 썩지 말아라. 썩지 않는 데, 그때 썩지 않는 거기에 주님이 계시기 때문에 썩지 않는 그 사람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또,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라 이 말은 유향은 기도를 가리켜서 말하는데 지금은 뭐 양산동 기도하러 간다고서 몇십 명씩 어떨 때 많이 갈 때는 하루 삼백 명도 사백 명도 가는데, 제일 많이 가는 날은 얼마 갔어? 한 사백 명 이렇게 뭉쳐 갑니다. 그렇지마는, 지금은 그렇지마는 이제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가면 다 썩어지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없습니다.

그럴 때에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라. 네가 모든 사람 움직이는 이런 큰 단체 운동에 거게 네가 횝쓸리지 말고 그저 너 혼자 어느 한 골방에서 한 구석에서 조용 조용히 은밀한 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에게 기도하는 사람이 되라. 그러면 거기서 만날 것이다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전적으로 부패해졌을 때에 그때에 나다나엘은 고요히 무화과나무 밑에 가 가지고서 혼자 기도했습니다.
이랬는데, 기도하니까 그는 썩어지지 안하고 모든 이스라엘이 패망의 길을 걸어가는 것을 답답하게 여기고, 뭐 이러다가 잘못하면 '다 이런데 나 혼자 뭐 이 기도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이렇게 낙망하기 쉬운데 그래도 나다나엘은 꼭 계속해서 기도했습니다.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가 나다나엘을 예수님에게 데리고 왔는데 메시야를 보라 해서 나다나엘이 따라오니까 예수님께서 이는 참 간사함이 없는 이스라엘 백성이다. 간사함이 없어. 그는 참 원리적으로 아주 대격적(大格的)으로 그 신앙 생활하는 굳건한 사람이다.
이라니까 나다나엘이 깜짝 놀래 가지고 '선생님 나를 언제 봐서 아십니까?' '무화과나무 밑에서 내가 봤다. 네가 무화과나무 밑에서 나에게 기도할 때에 내가 너의 기도를 듣고 거기서 내가 너를 만났다.' 그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래서, 앞으로 세상이 점점 흑백을 가리지 않는 세상이 됩니다. 인제 해가 기울면 흑백이 없습니다. 검은 것 횐 게 없습니다. 해가 기울면 검은 것 횐 게 없소. 지금도 그때입니다. 지금 뭐 성경에 이러니 저러니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다 듣기 싫어합니다. 저 무슨 저 인간은 항상 뭘 트집만 부리고 뭐 따지기만 하고 까다롭기만 하고 아이고 그놈의 교회 가니까 머리가 아파서 안 됐더라.

그래, 일주일 내, 세상에서 돈벌이하고 양사방에 죄악에 시달렸다가 주일날 한번 가면 시원하게 사이다 마신 듯이 좀 마음이 컬컬하게 좋고 그만 이래 시원해야 될 터인데 그 예배당에 가면은 곡딱꼭딱 네가 요거 잘못했지, 요랬지 조랬지, 요거 또 요라면 망한다 요거 회개해라 이래 쌓으니까 에이구 징그러워. 다시 뭐 지옥을 가지 그놈의 예배당에 못 가겠다고 이래 가지고서 안 가는 그런 때가 습니다. 그때가 뭐이냐? 해가 기울 때요. 진가를 구별 안 할 때. 요새는 그렇습니다. 요새는 그걸 말하면 싫어해요.

우리 총공회 진영에서도 그거 말하면 제일 싫어하는 신사들이 어데 있느냐 하면은 서울입니다. 서울 교회들은 다 신사들이오. 그런 것 말하면 '에, 째째하게 뭐 그런 걸 말해?' 이래 가지고서 서울 교회가 신사 교회요. 그래 저는 서울 교회에 대해, 서울 다른 진영 교회는 내가 말하지 안 해. 서울 우리 진영 교회는 완전히 속화돼서 부패됐다. 너희는 완전히 속화돼서 지금 눈이 가리워져서 뭐이 뭐인지를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렇게 말합니다. 그거보다 조금 나은 것은 대구가' 조금 덜 돼, 속화가 덜 됐고 대구  보다도 부산이 속화가 좀 덜 됐고 이제 참 아주 시골에서 성경만 보고 주님만 보고 믿는 그런 사람들, 이 밖에 것들이 침노 안 한 데 그런 데는 또 깨끗한 신앙이 있는데 이 밖의 것들이 막 저거 동무 삼을라고 들어갑니다. 들어가 가지고서 이렇게 해가 기울고 그림자가 없을 때에 어데 가서 주님을 만날 것이냐? 몰약산과 유향의 작은 산에 가면 주님 만난다.

그럴 때에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하든지 네가 썩지 않는 몰약산, 썩지 않는 산, 산이라고 말하는 건 여기 산으로 말하는 것은 절정을 말합니다. 우뚝우뚝 솟은 절정. 산만당이니까 높지 않습니까? 몰약산, 썩지 않는 절정. 네가, 조금 우리가 어려움이 있으면은 그만 속화되고 더러워지는 그런 데는 소용없어 이래 가지고서, 속화되지 안하고 더러워지지 안하고 감염되지 안하고 타협하지 안하고 혼자 외로워도 꼭 이 속화되지 안하고 썩지 안 하는 그 절정에 거기 주님 만납니다. 안 썩기 쉬운 곳이 아니고 범죄하지 않기가 쉬운 곳이 아니고 가장 범죄하지 않기가 어렵고 속화되지 않기가 어렵고 이 죄악으로 더불어 타협하지 않기가 어려운 그 절정에 거 게, 어렵기는 어렵지마는 절정 거기서 내가 너를 기다리고 있겠다 이랬어. 거기 안 가는 사람은 주님 못 만납니다.

그저 초저녁 성결이야 누가 못 지키겠소? 밤중 성결이 돼야 주님 만났지요 또, "유향의 작은 산으로 가리라" 모두 지금은 뭉떵뭉떵한 단체적으로 뭐 어데 기도회 뭐 몇천 명 기도회, 구국 기도회 뭐 어짜고 떠들어 쌓지마는 그만 그때는 다 썩어지기 때문에 뭉텅이 단체 기도하는 것은 속은 전부 마귀 놀음이오. 마귀 놀음으로 다 그라고 그럴 때에 네가 참 은밀히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서 고요히 조용히 골방에 계시는 너의 아버지에게 기도하는 이 사람이 되라. 거기서 나를 만날 것이다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 또, 7절에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이래 이렇게 주님이 사랑하는 성도는 흠이 없는 성도라야, 흠이 없는 성도라야 주님이 그에게 마음이 기울어집니다. 이래서 우리는 하나님을 감동시키는 사람이 돼져야 됩니다. 하나님이 우리 행동에 참 감동을 하셔야 됩니다. 감동을 받아야 됩니다. "나의 사랑 너는 순전히 어여뻐서 아무 흠이 없구나" 이래서 어여쁘고 흠 없는 것은, 어여쁜 것은 주님의 피공로 안에 있으면 어여쁘고 흠 없는 것은 영감과 진리대로 행하면 흠이 없습니다. 흠과 점이 없습니다.

"나의 신부야" 나의 신부야 하는 것은 주님이 이 교회를 가리켜서 나의 신부야 이렇게 말했는데 왜 교회를 신부라고 하나님이 말씀했는가? 이 신부라면 똑 사람들의 육적 부부 모양으로 그렇게 생각하기 쉬운데 사람들의 이 부부는 하나님과 교회의 이 부부관계의 하나의 모형으로서 그 사실을 알리기 위해서 가지고 이렇게 하나의 제도와 형식을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교회와는 원형 부부요 인간 남녀는 원형 부부를 모형한 모형 부부입니다. 부부로 말하는 것은 이것은 첫째는 그 아내의, 요새는 뭐, 요새 세상은 망한 세상이 돼 가지고 이거는 다 변질이 돼서 정상이 없어. 정상으로 말하면 신부의 모든 일은 남편이 다 책임입니다. 잘하고 잘못된 것 남편이 전부 다 책임이오. 신부의 모든 것은 잘못된 것은 남편이 다 책임 신부가 해야 될 그 오든 의무와 책임은 남편이 다 해야 되는 것, 또 남편의 것은 다 신부의 것이 되는 것. 그러면 이 신부의 흠과 점과 모든 신부가 해야 될 못 하는 것 이런 거는 전부 남편이 하는 것처럼 그 성도들이 해야 될 것 못 하는 것은 전부 주님이 다 담당하시는 그 면을 가리켜서 남편이요 신부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또 아무 거지같은 것이, 신랑에게 시집 왔으면 신랑의 소유는 다 그것은 그만 신부의 것이 돼 버려. 이 모양으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이 교회라 하는 것은 피조물 사람인데 피조물 사람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인해서 결합이 되면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교회의 것이 되는 것을 가리켜서 이 소유권적인 유별. 소유권적으로 유별해 또 책임적으로 유별해, 의무 책임?대신 담당하는 것으로 유별해. 또 유별은 무슨 유별이냐? 동거 동락 동역이라. 일도 둘인데 하나 일이라. 남자 일이 아내 일이요 아내 일이 남자 일이요, 또 동거, 동행, 동역 또 동락, 같이 즐거워하고, 동역, 같이 일해. 그것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교회인 성도와의 이렇게 동거 동락 동생(同生)하는 이것을 이 유별을 가리켜서 신랑이라 신부라 그렇게 여기 표현을 한 것입니다.

이래서 그 다음에 하나는 이제는 아내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남편 영광이 전부 아내 영광이 다 돼 버렸어. 남편 영광이 아내 영광이 다 돼 버렸어. 참 결혼을 해서 그 남편과 아내가 그래 뜻이 맞아 가지고 좋은 결혼이 됐다면은 그 남편의 명예고 권세고 다 그만 아내의 것이 다 돼 버립니다.

모든 면을 모든 것 다 책임지는 것, 의무와 모든 책임지는 것, 또 하나님의 것이 전부 성도의 것이 되는 것, 하나님과 성도가 동거 동행 동락하는 것, 또 남편의 그 영광이 다 아내 영광이 돼. 하나님의 그 무한한 영광이 전부 성도의 영광이 되는 이 무한한 면을 가리켜서 성도들을 신부라 하고 하나님을 남편이라 했어.

육의 부부는 뭐 부부 동침이 있지마는 하나님과의 성도의 부부의 이 관계는 이것이 상관이 없어.


이래서,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그러면 어디서부터 이 신랑하고 신부하고  동행하는 것 말합니다.

"레바논에서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 이 레바논이라 말은 그 팔레스틴에 예루살렘 북쪽에 있는 큰 산맥인데 제일 큰산입니다. 그 산에는 일 년 내내 눈이 녹지 안하고 있어서 그 산 이름을 백산(白山)이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레바논 산에서 나와 함께 하고 그러면 이렇게 하나님께서 성도들과 함께 할 때는 어디서 동행하는가? 성도들이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면은 어디서 동행할 것인가? "

이 레바논산 산꼭대기는 그 눈이 썩지를 안 해. 썩지 안하고 그대로 녹지 안하고 그대로 있어.
이와 마찬가지로 온 세상이 아무리 더러워져도 썩지 안하고 그렇게 항상 성결을 지키고 있는 성결 절정,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서 동행하는고 하니 성결 절정에서 동행합니다. 성결 절정에서.
하나님과 동행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태복음 25장 비유에 보면은 그 등불은 성결인데 초저녁에야 다 불이 있지. 초저녁에 불이 있지마는 나중에 밤중 돼 가니까 불이 꺼져 갑니다. 신랑 온다 하니 그때는 불이 다 꺼져 버려.

이러니까 불 있는 사람은 신랑 맞이하고 없는 사람은 맞이 못 했습니다. 이제 처음에야 아무라도 다 성결을 가지지마는 성결을 가지다가 차차 차차 조금 세월이 지나가면은 그만 성결이 없어집니다.

그러면 레바논 그 백산에서 주님이 같이 하자 그 말은 그 성결의 절정에서, 같이 하자 그 말이요, 성결의 절정에서. 그러기 때문에 성결의 절정, 성결을 할라 할 때에 모든 사람이 이런 어려움이 오게 되니까 성결 내버리고 저런 어려움 오니까 다 성결 내버리는데 나중에 인간으로서 극난 극난 어려움이 오니까 다 성결했던 사람이,' 다 성결 내버려 버리고 다 더러워지는데 다 더러워져도,
천하 사람이 다 더러워져도 자기만은 더러워지지 안하고 남아 있는 그것이 백산 레바논 산꼭대기에서 주님과 함께 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같이 하고 싶은 사람은 성결산에서 같이 하는데 성결산 중에도 성결산의 제일 절정인 거기서 같이 하는 것은, 다 같이 하지만 거기서 같이 하는 거와 같이 하는 것이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성경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성결을 지키다가 조금 어려우면 그만 그 성결을 버리기 쉽습니다. 성결 최고의 절정, 모든 사람이 성결을 가지지 못하는데 자기만이 가졌으면 자기만이 주님과 동행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가 죄짓지 안하고 의롭게 살고 하나님 모시고 사는 이게 다 성결 생활인데

장로도 썩어지고 목사도 썩어지고 동역자도 썩어지고 다 썩어지는데, 모두 다 썩어지는데 다 썩어져도 자기 혼자 참 낙락장송 모양으로 어떻게 하든지 자기 혼자라도 그럴 때에 썩어지지 안하고 남이야 어쩌든지 나는 주님이 나를 피로 구속하신 이 구속이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 나를 구속해 줬기 때문에 나도 죽기까지 죄로 더불어 싸워서 범죄하지 안 해야 되겠고 죽기까지 의를 행해야 되겠고 죽기까지 하나님 모시고, 주님 모시고 살아야 되겠다 하는 요것을 그렇게 해 나가는 그것이 레바논 그 백산에 올라가는 것이, 절정이 되는 것이니까 거기서 주님이 함께 하자,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백산에서 부터,
모든 사람 다 썩는데 썩지 안 하는 거기서부터,

모든 사람이 이래 썩고 저래 썩고 ,물질 때문에 썩고, 명예 때문에 썩고, 권세 때문에 썩고, 또 행락 때문에 썩고, 뭐 일 계명 때문에 썩고, 이 계명 때문에 썩고, 삼 계명 때문에 썩고, 사 계명 때문에 썩고, 오계명 때문에 썩고, 육계명 때문에 썩고, 칠계명 때문에 썩고, 팔계명 때문에 썩고, 구계명 때문에 썩고, 십계명 때문에 썩고,

이런 것 저런 것 다 썩는데 다 썩어도 썩지 않는  레바논산 꼭대기 ,
밑에는 다 썩어서 허연 것이 다 썩어 버려서  눈이 하나도 없는데
그 오뉴월 칠팔월에도 눈이 하얗게 있는 썩지 않은 거기에 이제 주님이 같이 하자,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자 말씀하신 요 말씀을 기억하고 우리는 어짜든지 성결의 절정을 향해서 우리는 인내할 것입니다. 뭐 아무리, 성결의 절정을 인해서 사업이 다 뺏겨져도 있고 생명이 뺏겨져도 거기 있고 주님 위해서 주님 때문에, 주님과 나와의 세 가지, 사죄 칭의 화친의 이 성결을 내가 지니기 위해서 어떤 걸 '손해 봐도 다 거게 있지 하나도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거 다 영광스럽게 있지 뭐 손해가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이래 레바논에서부터 주님과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주님하고 이제 둘이 같이 동행하자 그 말이오. 같이 동행하자. 이러기 때문에 주님과 동행에는 성결에서 동행합니다. 주님과 동행에는 성경에서 동행하는데 성결에도 이거 산만당, 모두 다 여기 이름 한 게 다 몰약산이니 또 유향산이니 레바논 산이니 다 산으로 말하는 것은 다 절정을 가리켜 말합니다. 절정. 우리가 신앙의 절정, 성결의 절정, 인내의 절정, 진리의 절정. 이러니까, 뭐,

이거 사람들로 더불어 타협을 안 할라 하면 외로와지고, 외로와지고 다 천대받고 뭐 이래 하나마 그 절정, 어떻게 외로와져도 외로움의 절정, 고독의 절정,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아마나도 스닐도 세르몬도 전부 레바논 산에 속한 우뚝우뚝 솟은 다 산만당들입니다.
이 레바논 산은 큰 산맥인데 거기에 아마나 산도 거게 있는 큰 산봉우리요 스닐도 산봉우리요 혜르몬 산꼭대기도 산봉우리입니다.

헤르몬 산 다 이거 이 세 산이 다 레바논에 속한 산이기 때문에 전부 백산이라는 뜻을 다 가지고 있어. 성결의 산이라 하는 그런 뜻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이랬는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 대해서 아마나는 견고히 잡자 하는 견집의 절정이라, 뭣이든지 그만,
요새 지금 새벽으로서는 우리가 뭉치지 안 할라 하는데 이 어린 양으로 더불어 싸울 때에 세계에 모든 머리 일곱 머리 열 뿔이 한 덩어리되는데 그때에 내가 한 덩어리되지' 안 할라고 거기 뭉쳐지지 안 할라 함으로써 어려움 오는 그것도 하나의 성결의 산입니다. 또 우리가 거기서 끊어질라 하는 것, 또 예수님으로 더불어 뭉칠라고 하는 것, 이래서 어짜든지 여기서 다 말한 것은 절정을 말을 했는데 어떤 그 신앙 행위든지 그 신앙 행위에 시작과 절정이 있으니 절정을 찾아갈 때마다 따라오는 사람이 적습니다.

산이 밑에는 저 지리산도, 그 지리산 밑에 발치는 전라도 경상도 또 전라남북도 이거 셋 도(道)를, 세 도를 발을 뻗쳐 가지고 있는 그런 큰산이지마는 속에 맨 위에 절정에는 이거 그저 저 예배당만도 못해요. 큰 방석 하나, 큰 덕석 하나만한 그렇게 좁아요.

이러니까, 밑에서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많지마는 마지막에 절정에 올라가는 데에는 끝까지 견뎌서 절정 가는 데에는 거기는 많지를 못합니다. 거기에 주님이, 작은 산에서도 주님이 가서 거기 있는 사람 만나고 제일 거석은 뭐이냐 하면은

헤르몬 산꼭대기에서 나와 함께 가자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어짜든지 신앙의 절정을 향해서 갈수록 주님과 가까와지고 주님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지 시작과 중간이 있고 마지막 최종의 절정이 있기 때문에 절정을 향하여서 우리는 나아갈 때에 자기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나 아끼지 말고 어짜든지 이 성결의 절정에 나아가서 거기서 주님 만날 이런 각오를 가지고 우리는 인내해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그 산은  태산이니까 거기는 맹수들이 가득 찬 곳이다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보아라"
거기서 이제 사자굴 표범산에서 이 세상을 내려다보아라.
이 무슨 말씀인고 하니 하나님의 뜻을 찾아서 이 성결을 뺏기지 안하고 이 성결을 가지고 나갈라고 하면 온갖 맹수의 어려움이 있습니다. 뭐 곰도 있고. 사자도 있고 오만 뭐 표범도 있고,

요한계시록에 보면은 곰도 있고 표범도 있고 다 그런 것들이 있어. 사자도 있고. 이래도, 그런 것이 있는 데에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못 가요. 믿음이 어린 사람들은 지금 그 표범산에 갈 때에 자기와 함께 하시는 주님은 표범을 만드신 분이시요

전능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표범의 구 두려움보다 주님의 보호의 평안을 더 크게 누리는 사람이 가지 그리 안 하면 못 갑니다.
불미 속에다 '불미를 칠 배나 더 뜨겁게 해라' 하고서, '이놈들 전부 불미에 다 불 속에 집어 던지구로 불미에 불을 칠 배나 더 뜨겁게 해라' 칠 배나 더 뜨겁게 하라고서 이렇게 하는데 그 칠 배 뜨겁게 해서 그 두려움, 뜨거운 그 두려움보다 하나님을 배반할라 해도 하나님이 더 두렵고, 그 불보다 하나님이 더 두렵고 또 불이 그 청년들을 해하는 그 세력보다 하나님의 보호의 세력이 더 큰 것을 믿는 사람이라야 가지 그리 안 하면 못 가요, 그래. 이게 다 뭐이냐? 하나님께서 다 이것은 당신을 사랑하는 그 사랑의 모든 정도와 그 실력을 이렇게 다림질하는, 이것을 달아. 이걸 달아 봐요. 중량을 달아. 다림질해 보는 거라.

이러니까 이제, 그 셋 청년이 불미 속에 들어갔으나 불내도 안 났어. 사자구덩이에 들어갔으나 하나도 상하지 안 했어. 그 땅위에 불같은 혹독하고 사자 같은 맹혹한 어떤 것이 있어도 그것이 뭐이냐? 주님이 하시는 것인데 그것이, 어느 정도 주님을 믿나, 그거보다 주님을 더 두려워하나, 그 두려운 해보다도 하나님의 보호를 크게 믿나 하는 이 것을 당신이 이제 나타내서 영광을 받으실라고 하는 것이지 믿고 가는 사람은, 믿고, 믿고 가는 사람은 절대 자기 정한 생명 일 초도 전에 죽지 않습니다. 일 초도 일씩 죽어지는 일이 없어요. 믿어야 돼요.

이래서,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보아라" 그러니까 거기까지 올라갔으니까 온 세상 모든 교계들을 볼 때에 이 교계들은 저 티끌 속에 파묻혀 있습니다. 저 밑에서 오든 짐승들에게 다 삼키고 밟히고 이래 가지고서 짓밟혀 모두 다 삼켜지고 다 죽어지고 있는데 이렇게 올라간 사람들은 새자굴 표범산에서 얼마나 평안한지, 거기서 저 밑을 내려다보아라. 그러면 이 말씀은, 주님이 주신 이 성결, 사죄 칭의 화친을 자기가 뺏기지 않기 위해서 어디까지 가도, 어디까지 가도 해할 자가 하나도 없다. 가는 자는 다 승리하고 주님하고 동행하지, 가지 않는 자는 그래 또 가는 자는 주님하고 동행하고 승리합니다. 못 가는 자는 다 처박히고 말아요.

일정의 신사참배--
6.25의 핍박--

이래서 오늘밤에 본 이 말씀에는 우리가 주님 만나는 곳은 어디서 만나는가? 성결산에서 만난다. 몰약산에서 만난다. 썩지 않는 데에서 주님 만난다. 썩지 않는 데서 주님 만난다. 또 어디서 만나는가? 유향의 작은 산에서 만난다. 은밀히 고요히 참 어느 구석에든지 어데 처박혀 가지고서 주님하고 속살거리는 거기에서 주님 만난다. 또 어디서 만나는가? 백산에서 만난다. 눈산에서 만난다, 눈산에서 레바논 산은 일 년 내내 눈이 있습니다. 일 년 내내 눈이 있어서 그 산 이름을 백산이라 해요.

그러니까 삼사월만 돼도 다 썩어서 눈 온 것 다 썩어져 버리는데 거기는 칠팔월이 돼도 한여름에도 눈이 썩지 안하고 그래 하야이 회게 있어, 그와 같이 온 세상이 이와 같이 부패할 때에 다 썩어져도, 뭐 형도 동생도 목사도 장로도

다 썩어져도 썩어지지 안하고, 썩어지지 안하고 거룩하게 거룩하게 깨끗이 깨끗이 성결을 지키고 있는 그  성결의 절정에서 주님 만난다.

'아마나' 절정에서 주님 만난다. '아마나'는 굳게 잡는다는 뜻인데 굳게 잡는 절정에, 잡았다가도 슬며시 놔 버려요. 굳게 잡는 절정에서 주님 만난다,

또 이 끊기도, 처음에는 끊기 쉽지마는 아주 끊기 어려운 것 죄악이나 모든 불의의 모든 합세의 이 끊기 어려운, 끊기 어려운 절정에 거기서 주님 만난다.

또 백산 꼭대기에서 주님 만난다.

또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거기서 주님과 동행한다.
이러기 때문에, 주를 믿고 의지하고 세상이 가지 못하는 그 신앙 걸음을 걸어가는 사람은 세상이 못 보는 주님보고 세상이 만나지 못하는 주님 만나고 그는 세상이 입지 못하는 하나님의 그 능력을 입어서 경험하고 체험하게 됩니다. 경험하고 체험하게 돼요.

6.25 때에 공산 점령 하에서 위천교회에서 예배드린 사건--

어짜든지,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보자. 네가 성결을 지키기 위해서 사자를 만나고 표범을 만나도 두려워하지 말고 성결을 지키고 그대로 나가거라. 그러면 네가 성결 지킨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모든 이 속화되고서 세상 죄악에게, 세상에게 삼켜져서 참 죽을 욕보는 그 모든 성도들 위에서 내려다 볼 수 있을 것이다 하는 것을 말한 것입니다.

■ 9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뻐앗았구나" 이렇게 가는 데에 주님 마음 다 빼았습니다. 이렇게 믿는 사람들 그 신앙으로 주님 마음 다 빼앗아요. 네가 내 마음 다 뺏들었다. 내 마음이라 말은 주님 마음이라 말이오.

이 사자굴과 표범산에 동행하는 네게 내 마음 다 뺏겼다. 주님의 마음을 다 뺏들어 버렸어. 주님이 '아이고 네가 내 마음 다 뺏들었다. 내 마음은 전부 네게 다 가 있다.'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번 보는 것과 네 눈으로 한번 보는데 그만 내 마음 다 뺏겨 버렸다. 이런 성도들이 주님만 바라볼 때 주님 바라볼 때에 주님의 마음은 그 바라보는 그 성도에게 솔빡 다 기울어지고 맙니다.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뻐앗았구나" 네 목의 구슬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다 말은 목의 구슬 꿰미라 말은 그 목에서, 목에서 한 마디 톡톡 튀어나오는데, 그 목에서 한 마디씩 톡톡 튀어나오는 그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주님 마음 다 뺏들어 버려, 톡톡 튀어나오는 데, 그 말에서, 그 입에서 신앙의 말, 원수 앞에 굴하지 안 하는 진리를 지키는 말 그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주님의 마음을 다 뺏겨요. 이거 이 신앙 생활이 이것이 우리 앞에 갈 걸음이 됩니다.

이러니까 오늘밤에 우리가, 주님 만나는 곳은 어쩌든지 썩지 않는 절정, 뭐 처음에 안 썩어도 한 번 안 썩고 두 번 안 썩고 그라면 자꾸 안 썩는 것이 높아지지 않습니까? 썩지 않는 것이 높아지지 않소? 썩지 않는 절정 거기서 주님 만나고, 또 날이 기울고 그림자가 갈 때에 은밀히 고요히 주님만 바라보고 기도하는 거기에 주님 만나고, 또 백산에서, 레바논에서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나와 함께 가자, 사자굴과 표범산에서 내려다 보아라, 네가 내 마음 다 뺏들었다, 네 목에 구슬 꿰미가 내 마음 다 썹들었다, 네 입에서 한 마디 한 마디 증거 하는 그 증거에 주님의 그 마음은 그 사람에게 솔빡 다 뺏겨진 것을 가리켜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우리도 이 신앙에는 절정이 있기 때문에 절정을 향하여 가는 데에는 피곤한 것입니다.
그러나  밑에서 만나는 주님과 ,또 한 층 올라가고  위에 절정에서 만나는 주님이 다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의 자꾸 절정에서 절정에서 올라가서 거기서 주님 만나서 가는 자마다, 다니엘 그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 사람들이, 다니엘이 사자구덩이에 들어가기 이전과 이후와 주님 만난 것이 다릅니다. 그라고 난 뒤에 그가 평강을 얻었어.

그러기 때문에 다니엘이 사자구덩이 들어가기 전보다도 들어가고 난 다음에 그 믿음이 나아졌고 이제 더 하나님을 더 의지하고 더 평안이 됐어.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신앙 생활할 때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양보하지 말고 진리대로 나가서, 우리 뭐 아무래도 죽을 것 뭐, 아무래도 한번 죽을 것, 한번 세상 뜰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뭐 몸을 아낄 게 뭐 있으며 의식주를 아낄 게 뭐 있으며 생명을 아낄 게 뭐 있습니까? 아끼지 안하고 진리대로 그대로만 나가면 나가는 사람은 하나님의 권능을 봅니다, 하나님을 만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만납니다. 과연 믿음은 놓치 못하심이 없다는 것을 만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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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경 : 아가 4장 12절∼16절

    (백영희 목사님의 81. 1. 14. 수요일 새벽  참조)

말세에 온 세상이 멸망 받는 것과 하나님의 택한 자들이 멸망 받는 그 죄를 한마디로 음행한 죄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음행이란 것은 구속받은 자는 하나님만 상대해서 살아야 할 자인데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께 대해서 행할 모든 성질의 것을 다른 피조물들에게 대해서 하나님께 대하여 행하는 것같이 하는 그런 것을 다 가르쳐서 한 말로 음행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세상은 결과를 중하게 다룹니다. 동기야 좋든 나쁘든 결과만 좋으면 좋은 것으로 인정하고 아무리 동기가 좋아도 결과가 나쁘면 나쁜 것으로 평가하는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은 모든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과를 중하게 여기지 아니하시고 결과보다 그 동기를 중히 여기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비밀을 아시기 때문에,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외부에 나타난 행동보다도 그 마음을 하나님이 원하십니다. 여기 말씀하신 음행이라 하신 이것은 성도들의 마음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그런 모든 행위를 가르쳐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12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는 잠근 동산이요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아가 4장 12절 "나의 누이" 란 말은 한 태(胎)에서 나왔다는 뜻을 말합니다.
성도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인해서 하나님께로 난 자인 것을 가르쳐서 "나의 누이라", 형제라 말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와의 형제, 다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표시해서 말하고

"나의 신부는" 이는 주님의 배우자, 주님의 상대자 성도를 가르쳐서 신부라 말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요 예수님의 배우자가 되는 성도는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하느냐? 여기 "잠근 동산이요" 성도의 마음은 잠근 동산이어야 합니다.
잠근 동산이란 말은 성도의 마음에는 주님만 출입하지 다른 것은 출입할 수 없는 것을 두고서 하는 말입니다.
왕의 동산은 왕만 소풍하고 출입하지 다른 사람들이 출입하지 못하는 그런 산과 같이
성도의 마음은 세상 아무 것도 용납하지를 아니하고 또 다른 것이 뚫고 들어갈 수 없는 그런 마음이면서.
그 다음에 내리 읽어보면 모든 향나무들이 가득 찼습니다. 아름다운 꽃나무, 아름다운 향나무들이 그 동산 속에 울밀(鬱密 : 울창하고 빽빽함)했고 아름다운 과수(果樹)들이 울밀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도들 마음에는 그 시대나 세상 부귀 영화나 또 세상의 어떤 그 유혹의 죄악이나 이런 것이 하나도 자유로 들어왔다가 나갔다가 이렇게 할 수 없도록 자기 마음 문을 굳게 잠가서 아무 것도 들어오지 못하고 주님만이 자기 마음에 계시는 마음이어야 하고,

그 마음에 온갖 아름다운 신덕(信德)을 나타낼 수 있는 그런 진리가 자기 속에 가득 차 있는 것을 가리켜서 향을 나타내는 향나무들이라, 또 아름다운 과실을 맺는 과실나무들이라 또 석류나무들이다.

석류는 한 개의 과일이지만 그 과일을 쪼개면 그 속에는 수많은 과일이 들어 있는 것이 특히 석류입니다. 성도들의 마음에는 그 속에 진리와 영감의 것으로 가득 채워 있는 것이 향기 나는 향목(香木)과 같이 또 석류나무와 같이 그것으로 인해서 현실을 접하면 현실을 통해서 세상에 빛이 되고 세상의 생명을 주는 생명 과실이 되는 아름다운 신덕을 끼칠 수 있는 그런 영감과 진리가 그 마음속에 가득 찼고 세상이 출입하지 못하는 그것이 주님이 사랑하시는 성도의 마음인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자기 속에 영감과 진리로 인해서 지금이라도 현실을 닥치면 아름다운 의의 열매를, 사랑의 열매를, 진실의 모든 믿음의 열매들을 가득히 맺어서 세상에게 향기를 피우는 것 같은, 세상에 덕을 끼칠 수 있는, 언제든지 의를 행할 수 있는 그런 마음속에 진리와 영감의 준비가 되어 있는 이것이 잠근 동산이요 각종 향목과 과수와 모든 아름다운 꽃나무들이 가득 차 있는 마음인 것입니다. 이것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덮은 우물이요 봉한 샘이로구나
" 덮은 우물이라" 자기 속에 구속의 은총을 마음 가운데에 간직하고 있는 이것이 우물의 생수입니다. 우리가 영감은 주님의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을 주신 이 은총에 대해서 깊이 느껴 감격해 있는 이것이 곧 생수입니다. 생수는 주님의 구속을 우리에게 뜨겁게 강하게 사모하고 느끼고 감사하게 하는 이 영감을 가리켜서 생수라 비유한 것입니다.
"덮은 우물이라" 주님의 구속을 영감 하는 여기에 덮어놨기 때문에 먼지도 들어오지 못하고 티도 들어오지 못하고 이 세상 잡된 것이 와 가지고 주님의 구속의 은총을 사모하고 또 갈급하고 이 은혜에 감격 되어 있는 여기에 세상 어떤 사건이나 이건(利件)이나 물질이나 감정이나 그런 것들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게 되어 있는 이것이 덮은 우물입니다. 이런 마음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봉한 샘이라" 속에 생수는 가득 찼는데 봉해 놨기 때문에 제 마음대로 길가는 사람들이 떠먹지를 못합니다. 자기 속에 있는 진리를 영감을 아무도 빼앗아 가지 못합니다. 이런 현실이 닥쳐도 그를 뽑아 버리지 못하고 또 저런 죽음이 와도 자기 속에 구속의 이 사은에 대한 이 영감을 아무도 도적 해 가지 못하고 손해 보이지 못하는 되는 이것을 가리켜서 봉한 샘이라 말씀했습니다.

■ 13절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벨화와 나도초와
■ 14 절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와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13절에 보면 "네게서 나는 것은 석류나무와 각종 아름다운 과수와 고멜화 나도초 나도와 번홍화와 창포와 계수 각종 유향목과 몰약과 침향과 모든 귀한 향품이요" 이랬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우리를 피로 구속하셔 가지고서 하나님의 목적하신 그 목적이 이루어지도록 하려는 것은 우리의 마음에 자기 현실을 통해서 이 세상에 온갖 것들이 자기 마음속에 들어오는 것, 이것이 음행입니다.
아무것도 자기 마음속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단단히 잠가 두고 왕의 동산에 왕만 산보하고 주행하는 것처럼 주님만이 자기 마음에 와서 계시고 또 아름다운 향나무, 과수나무, 꽃나무와 같은 이런, 자기가 진리와 영감으로서 현실만 닥치면 어떻게 해보려 하는 그런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그런 의에 욕망이 그 속에 가득 차 있는 그것을 여기에 각종 아름다운 나무들로 비유했습니다.
이런 마음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 15절 너는 동산의 샘이요 생수의 우물이요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15절에 "너는 동산의 샘이요"
  그 마음은 동산의 생수가 나는 샘이라. 그 말은, 그 마음속에는 성신의 감화가 부절(不絶)히     용솟음치고 있는 그 마음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생수의 우물이요
자기 마음에 세상 아무것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또 자기 속에 주의 구속의 은총을 사모하고 있는데 이런 시대나 이런 환경이나 이런 형편이나 그런 것들이 티를 넣지 못하도록 하고 이 은혜를 다른 이가 빼앗아 가거나 뽑아 가거나 손해 보이게 이렇게 하지를 못하고 그 마음속에는 늘 주님의 구속을 사모하는 이 영감이 늘 속에서 용솟음치는 그런 마음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레바논에서부터 흐르는 시내로구나
   레바논산 높은 곳에 사철 쌓여 있는 눈 녹은 물이 수원이 되어 언제나 시냇물이 마르지 않는 레바논 시내인데 이는 끊임없는 무한한 성령의 역사를 비유한다

■ 16절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나의 사랑하는 자가 그 동산에 들어가서 그 아름다운 실과 먹기를 원하노라
"북풍아 일어나라 남풍아 오라"  바람은 환난을 말합니다.
" 나의 동산에 불어서 향기를 날리라" 그러면 이렇게 성도의 마음이 되어 가지고 있는고로
동남풍 부는 그런 환난이 오면 그 속에 주의 구속에 대한 가득 찬 소원이 그 환난을 통해서 세상에 나타나므로 이것이 세상의 빛이 되고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지는 이것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세상 임금이 오겠으나 내게는 상관이 없다 그가 와 가지고 나에게 온갖 박해를 주면, 십자가에 못박는 박해를 주면 나타날 것은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사랑하며 아버지의 명령에 어떻게 순종하는 그것만 나타나지 딴 것은 없다."고 주님이 말씀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이 마음에 주님의 구속으로 가득 차고 세상 어떤 것이 와도 이 구속에 감격한 마음을 흔들거나 요동하지를 못하고 다른 또 세상 것들이 들어와서, 티와 같은 잡된 것들이 들어와서 구속의 은총을 더럽히지도 못하고 다른 것이 마음에 들어오지도 못하고 이 은혜를 누가 뽑아 가지도 못하고 마음에는 각종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기회만 오면 하나님 말씀대로 해서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는 좋은 빛을, 덕을 끼칠 수 있는 이런 향품을 향기를 나타낼 수 있는 이런 걸로 가득 차 가지고 있다가 환난이 오면 그 환난으로 통해서 자기 속에 차 있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감격이 세상의 빛으로 나타나는 이런 마음 자리를 주님이 원하십니다.
이것이 주님의 구속하신 성도에게 대해서 원하시는 것인데 성도들의 그 마음이 세상과 하나되어 가지고 세상이 그 마음에 가득 차고 또 그 마음은 세상에 옮겨져 가지고 있고, 이러기 때문에 주님이 제일 진노하십니다.

아가(雅歌)는 보면 우리의 그 마음이 어떻게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나타냈습니다. '성도의 마음은 어떤 마음으로 되어 있는 것을 주님이 원하신다.' 그것을 나타내서 가르쳤고.

요한계시록 17장과 18장에는 성도들의 마음이 이 세상과 세상에게 가 가지고 마치 주님께 대해서 하는 마음과 같은 그런 마음을 세상에게 기울이는 이것이 하나님 앞에 제일 진노하시는 음행이라 이렇게 기록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믿는 사람은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여서 하나님과 자기 마음이 같이 있기를 이것을 연습해야 됩니다. 자기 마음이 주님께 있고 자기 사모가 주님께 있고 자기의 기쁨이 주님께 있고 자기의 사랑이 주님께 있고 자기의 소망이 주님께 있어서 자기 모든 것이 주님께 기울여질 뿐 아니라 주님과 함께 자기 마음이 움직여져서 주님과 함께 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같이 할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을 주님이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함께 하면 실패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함께 할 때에 우리는 마음이 깨어지고 마음이 밝아지고 또 그 마음에 잡것이 물러가고 마음이 동여지고.
이래서 모든 경영이 다 주님과 함께 경영하고 또 모든 지혜와 능력이 다 주님의 지혜와 능력이 우리를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에 영과 육이 다 성공되는 것입니다.

마음을 주님께 기울여서 주님과 동거 동행한다고 해서 실패되는 것이 아니고 주님과 동거 동행하므로 영도 육도 잘 되도록 그렇게 해서 과연 하나님 다음으로 만물 위에 있는 그런 존귀한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 주님의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주님께 기울이기를, 사모를 주님께 기울이기를, 우리의 정성을 주님께 기울이기를, 우리의 애착을 주님께 기울이기를, 우리의 욕심을 주님께 기울이기를, 모든 것을 주님께 기울여서 주님과 동행하는 이 일을 평소에 연습해서 이 일이 연성 되어서 차차 차차 이렇게 살기 어려운 현실로 바꾸어 주실 때 그때 요동치 안하고 주님과 함께 하는 이 마음으로 자라 가면 이것이 우리의 완성이요 세상을 이기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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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5장 1절-16절

주님의 재림이 가까운 말세에 신앙적 음행이 가득하여 주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고 주님보다 돈을 더 사랑하고 쾌락을 사랑하기를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딤후3:1-2, 4) 이때에 참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찾기 힘들어 주님이  내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신 그때인 지금에 성도가 아가서를 배워서 주님을 진실 되이 사랑하여 말세의 존귀한 구원을 얻어야 하겠습니다
또 성경대로의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어(딤후4:3) 그 사욕 따라 가기에 바빠서 바른 교훈을 받을 시간도 힘도 없는 자가 많다
그러므로 더욱 진실 되이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는 성경의 바른 교훈을 받을 려고 더욱 더 힘을 써야한다

바른 교훈을 받아 주님이 어떻게 크신 분이며  우리를 위해 어떤 크신 희생의 사랑의 역사를 하신 주님인가를  바로 아는 것 만치 주님을 특별히 사랑할 수 있다

■ 1절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내가 내 동산에 들어와서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내 포도주와 내 젖을 마셨으니 나의 친구들아 먹어라 나의 사랑하는 사람들아 마시고 많이 마시라

나의 몰약과 향 재료를 거두고
죄악에 썩지 않게 하는 대속, 주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아름다운 대속의 행위            
나의 꿀송이와 꿀을 먹고
은혜로운 말씀

■ 2절  내가 잘지라도 마음은 깨었는데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내가 잘지라도
믿음의 잠을 자게 되는 이유는- 주님을 향하여 진리와 영감대로 살려 하면, 죄악 세상, 자기안의 옛사람과 마찰이 싫어서, 그 믿음의 길을 양보하고, 먼저 세상으로 임시 평안할려는 데에서 마음이 어두워져서 믿음의 잠을 자게 된다
[마 26:40 그 자는 것을 보시고--]  [마 25: 다 졸며 잘쌔--]

마음은 깨었는데
성도들은 세상에 주님과 말씀을 버리고 자기주관과 세상을 따라가는 생활을 할 때 심령에 불안을 가지게 되고 신앙이 무력해진다

믿음의 잠을 자는 것을 크게 원통히 여기는 성도는 크게 경성하여 다시 주님을 만나 동행하게 된다

나의 사랑하는 자의 소리가 들리는구나
주님을 사랑해 보았기에 주님의 음성이 사랑스럽고 만나고 싶어 애타는 것이다

문을 두드려 이르기를
"문을 두드림"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림이니 회개하라 말이다. 너의 주인을 너에서 주님으로 바꿔라, 그리고 주의 것 되어 주님 위해 살아라. 이것이 마음문을 여는 것이다.

"나의 누이"
한 태(胎)에서 나왔다는 뜻을 말합니다. 성도는 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인해서 하나님께로 난 자인 것을 가르쳐서 "나의 누이라"라 말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우리와의 형제, 다같이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인 것을 표시해서 말합니다 .

"나의 비둘기"
항상 순결하여 주님보시기에 완전하고, 어떤 환란과 유혹의 어려움에서도  신앙 정조를 지키고 있는자야"라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나의 완전한 자야

문 열어다고


내 머리에는 이슬이,
내 머리털에는 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밤에 왔다" 것은 주님이 우리 성도들을 구원하실려고 하늘의 부귀 영화 다 버리고 피조물로 오셔서 가난해지고 낮아지고 고난 받으신 걸음이 반이오.

이슬이 가득하였다 하는구나
또 반은- 33년4개월의 생활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받고 아버지께 까지 버림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는 마지막 죽음의 고통의 순서와, 영원히 우리와 같이 하시고자 육신을 입으시므로 스스로 우리를 위해  영원히 속박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찾아오셨는데도 우리 성도들이 주님을 영접지 않고, 어떤 자는 조롱과 멸시와 천대를 해도 우리를 버리지 않고 참으시면서 끝까지 우리 성도들을  회개시키시는 주님을 나타낸다.

누가13:34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 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 3절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내가 옷을 벗었으니 어찌 다시 입겠으며
그리스도의를 옷 입어 살던 생활 벗어 놓고, 내 것으로, 내 위주로, 내 중심에서 살고

내가 발을 씻었으니 어찌 다시 더럽히랴마는
주님을 향하여 진리와 영감의 인도를 따라 가는 길에는 언제나 우리에게 십자가가 있는데 이 고난의 길을 피하였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길은 내가 녹아짐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고  형제들에게 유익을 주는 길이다.

누가14:16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배설하고 많은 사람을 청하였더니
14:17  잔치할 시간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가로되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하매
14:18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하나는 가로되 나는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 보아야 하겠으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4:19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니 청컨대 나를 용서하도록 하라 하고
14;20  또 하나는 가로되 나는 장가들었으니 그러므로 가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 4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내 마음이 동하여서

나의 사랑하는 자가

문 틈으로 손을 들이밀매
나 위하여 회개케 할려고 징계를 주는 것은 , 순종으로 돌아오지 아니하니 강제로 돌아오도록 함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말씀으로 경고할 때 받지 못하면 -시험에 들어서 주님을 알게 하시고 -죄를 지어서 알게 하신다.

■ 5절  일어나서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 때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에 듣는구나

일어나서

문을 열 때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영접할 때에

마태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21: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21;31  그 둘 중에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몰약이 내 손에서, 몰약의 즙이 내 손가락에서 문빗장(문을 잠구는 도구)에 듣는구나(떨어지는 구나)
우리를 죄 없이 하여 썩지 않게 하신 주님의 대속을 생각하여 믿어, 자기를 부인하여 마음 문을 닫았던 죄악을 회개하니 하는 말이다
몰약은 향품인데 방부제다.  썩을 것으로 썩지 아니할 것으로 옮기는 것이다.
죽음 이편의 세상 현실에서  영원히 썩지 않을 것을 마련하는 준비를 하여야
한다.

■ 6절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문을 열었으나 그가 벌써 물러갔네"
회개라는 것은 자기 죄를 고쳐서 주님을 자기 안에 영접해 들이기까지 회개의 완성이 되는 것인데 이때 술람미 여인은 주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그때 내 마음의 문을 두드리면서 회개를 재촉했는데  그때에 내가 회개하지 아니하고 뒤로 미루었다.  
그 후에 이제 내가 회개해야 되겠다 해서 회개를 하려고 하니까 회개가 되지 않습니다.  

회개는-  자기가 고칠 죄를 알고 있다고 회개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우리가 그 죄를 고칠 수 있는 현실을 주실 때에 회개가 완성이  되어집니다.

여러분들! 회개를 하려고 애를 쓰는데 그래도 회개가 안되고 주님을 만나려고 해도 만나지 못하는 답답한 심정을 느껴 봐야 됩니다. 그래서 이것 때문에 너무 답답해서 울어도 보고 별별 짓을 다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성도가 참 주님을 사랑하는 자다 ,

그가 말할 때에 내 혼이 나갔구나 내가 그를 찾아도 못 만났고 불러도 응답이 없었구나
우리가 여기에서 깨달을 것은
주님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려서 회개를 재촉할 때에-  
어떤 때는  성경을 성경이 보기 싫은데 성경을 펴서 보니까 그 말씀이 자기 회개를 재촉하는 그 말씀이 눈에 들어오고 -
어떤 때는 가기 싫은 예배를 가니까 회개의 말씀이  들어오고 -
또 어떤 때는  신앙의 동지가 와서 회개의 재촉의 말씀을 전하는 그것이 주님이 나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때 회개를 하지 아니했다 말입니다.  
이제는 회개를 해야 되겠다. 이래서 회개를 하고 주님을 만나려고 하니까 안 된다  

회개도 기회가 있으니까- 하나님이 회개하라고 할 때 그때 회개를 해야 합니다.

은혜의 때에 내게 응답하였고 한 것처럼 은혜를 베풀 때 그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이지 아무 때나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49:8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조심할 것은 자기가 참 은혜를 많이 받고 있을 때 사람들은 잘못하면 교만해 질 수 있습니다. 힘만 쓰면 된다. 저 사람은 왜 은혜를 못 받을까?  

이것을 알고 -은혜의 때인 하나님이 준비를 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준비 때는 열심히 준비를 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준비한 것을 하나님이 쓰게 할 때가 있습니다. 또 준비한 것을 쓰면 , 거기에서 깨달아 지는 다른 면의 준비가 있습니다.  

앞으로 현실의 전투의 준비를 하게 하는 것이 있고
현실 당해서 그 동안 준비한 것을 가지고 열심히 전투해서 승리하면 거기서 다음의 것을 준비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에 주님이 찾아오시는 이 기회를 놓치면 안됩니다. 또 내일은 내일의 기회가 있는 것입니다.  놓치면 안됩니다.


■ 7절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이 나를 만나매 나를 쳐서 상하게 하였고
신앙 지도자인 하나님의 종들(성중에서 행순하는 자들)을  만나 가지고  주님을 그 종를 통해서 만날 수 있을까 도움을 받으려고 했더니, 도리어 자기를 쳐서 상하게 만들었어 ,이런 신앙지도자가 많습니다.  

성벽을 파수하는 자들이 나의 웃옷을 벗겨 취하였구나
여러분들의 신앙후배들이 볼 때에 저 선생님 저 집사님 보니까 예수 믿는 소망이 안 생긴다. 저런 분도 새벽기도 안나오는데, 나도 안나와도 되겠구나  
저런 분들이 주일날 예배마치고 자기대로 자기 일을 하는 것 보니 나도 그렇게 해도 되겠구나 해서 친다 말입니다.

사람 의지하고 세상 의지하고,- 주님은 껍데기로 의지하는 외식자들은 행순하는 자에게 웃옷을 벗김 당한다.

딤후4: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 8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너희에게 내가 부탁한다 너희가 나의 사랑하는 자를 만나거든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다고 하려무나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주님 잊어버려서 그분을 만나지 못하는 애를 타는 심정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목회자는 자기 안에 주님을 만나서 모시지 않고는- 설교를 하려고 해도 힘이 안 난단 말입니다.  
아무리 설교 준비를 다해 놔도 설교할 힘이 안 납니다 그래서 애가 탑니다
마음에 주님을 영접하면 -설교가 바로 되어집니다  

■ 9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이 말은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 여인에게  하는 말입니다.  
즉 오늘 일반적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주님을 특별히 진실 되이 간절히 사모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의 신앙행위가 이해가 안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해야 될까?  

152장 찬송가 가사에-  목마른 사슴이가 물을 찾음같이 갈급한 이 심령은 예수 찾아 타네.  
시편 42편에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성구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믿음의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이렇게 갈급해도- 주님께 대해서는 갈급하지를 못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에 대해서 특별한 갈급성을 가지는  성도가 되어야
주님이 아가 5:2하반-나의 사랑 나의 신부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완전한자야 이렇게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됩니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인가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사랑하는 것이- 예루살렘 여자들이 솔로몬을 사랑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다는 것이냐고 이해가 안되어서 묻는 말입니다.  
오늘도 진실된 성도들이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하는 것과- 일반적인 성도들이 주님을 사랑하고 사모하는 것은 다르다  
같은 주님인데 왜 그럴까?  주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달라서 그런 것입니다

아가 5:10-16에 기록된 대로 술람미 여인은 솔로몬을 바로 알았기에 특별히 사랑했다-우리 성도들도 그와 같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남의 사랑하는 자보다 나은 것이 무엇이기에 이같이 우리에게 부탁하는가
주님을 사랑함으로 병이 나기까지 하는 성도가 되어야 주님의 신부 된 성도의 정상이고, 이 주님에게 대한 사랑을 주님에게 알려 달라고 부탁하여 자기를 떠나신 주님을  만날려는 애타는 성도의 마음이 되어야 하겠다

진실 되게 주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진실 되지 못한 성도들의 그 면을 안타깝게 여기고 긍휼히 여길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믿는, 진실 되지 못하게 믿는 성도들은- 진실 되게 믿는 성도들 주님을 사랑하 것을  이해를 못한다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이 장성한 가정 안에서도, 자기가 주님께 더 가까이 가면 , 뒤에 따라오는 가족들은 먼저 주님께 가까이 나가는 가족을 이해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 가정 안에도 보이지 않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왜 그렇는가 -신앙이 같지 않으면 그렇습니다.  
신앙이 어린 자는 장성한 신앙에게 항상 유혹을 줍니다.  
성경을 잘 아는 자는 도리어 성경을 가지고 주님을 특별히 사랑하는 자를 미혹을 합니다.  

이런 미혹, 환난 다 주님의 은혜로 승리 할 수 있습니다
모든 현실은 내게 가장 유익한 현실로 주셨다.  

베드로전서  5 장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로마서  8 장

37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고린도전서  10 장

13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10절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어떤 주님이기에 너가 주님을 병이 나기까지 사랑하느냐
-이것은 술람미 여인이 아는 솔로몬- 우리가 아는 주님이 이런 주님이다
그분이 어떤 분인지 아는 것 만큼 진실 되게 주님을 사랑할 수 있지 않습니까?  

성경으로  당신이 어떤 분이라는 것을 알려주실 때 바로 알아야 주님을 진실 되게 사랑할 수 있습니다.

희고도 붉어
희고도- 성결하다(주님과 같다-성화),  붉어-대속의 피공로,
대속의 피공로로  말미암아 이 성결이 우리에게 올 수 있습니다.  
그분 자체가 성결하신 깨끗한 분이신데 -이것이 사활대속의 공로 붉은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와서 우리가 성결케 되었다.  

만 사람에 뛰어난다
우리에게 성결케한 사활 대속을 사랑을 알고 보니- 그분을 진실히 사랑 안 할 수가 없어.  
모든 능력 가운데 가장 뛰어난 능력을 가지시고 모든 사람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을 가지신 분이다.  
또 진실히 사랑하다 보니까 그분이 어떤 분이지 또 깨닫게 돼.  

이런 분이니 내가 주님을 어떤 남보다 뛰어나게 사랑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 11절  머리는 정금 같고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머리는 - 그의 사람의 가장 귀중한 면을 말하고 ,
정금이라는 것은- 불변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영원히 변치 아니하시는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  
머리털은 고불고불하고 까마귀같이 검구나
머리털이 검다는 것은 젊다는 것.  
젊다는 말은 주님은 노쇠함이 없이 영원토록 일을 하시는 분이시다는 것을 가르킨다
청청하게 힘있게 일하신다는 그런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 12절  눈은 시냇가의 비둘기 같은데 젖으로 씻은 듯하고 아름답게도 박혔구나

이 눈은 주님의 눈인데-
주님의 성령을 말하는데- 요한계시록 5장6절에 보면 눈은 온 땅에 보내심을 입은 하나님의 일곱 영, 곧 성령이라 했습니다

시냇가에 비둘기 같은데 .  
비둘기는- 주님의 신부로서의 순결과 정조를 말합니다.  
시냇가는- 비둘기가 먹는 것이 풍성하여 부족함이 없는 것을 말합니다
즉 주님의 성령의 역사는- 모든 면에 풍성한 은혜를 베풀면서, 비둘기같이 순결하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은 사람은 - 비둘기 같이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기의 지조를 내어놓지 아니하는 순결의 그것이 있게 된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자가  죄짓고  불의를 행하고 사람과 하나님과 원수 되는 이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젖으로 씻은 듯 하고 아름답게 박혔다


■ 13절  뺨은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과도 같고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

얼굴의 뺨은
주님의 이력을 말하고 있습니다.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것은- 주님이 향기로운 것은 주님의 도성인신 신인양성 사활대속을 하셨기 때문에 향기로운 것입니다.  향은 대속입니다.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악의 악취가 제거되어 죄 없는자 되었고, 죄로 말미암아 고통 당하는 이 문제가 해결되고
칭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 아름다움이 우리성도에게 주어지게 되어졌습니다.  
화친의 대속으로 말미암아-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평화가 우리에게 오게 되어졌습니다.  
그래서----주님과 우리와 평화, 만물과 우리와 평화가 있게 되어지는 면을 가르쳐서 향기로운 꽃밭 같고 향기로운 풀 언덕과도 같다 했습니다

입술은 백합화 같고--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말미암아  성도가 백합화 같고 깨끗해지는 은혜를 받게 되었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진다는 말은--
몰약은 부패하지 않는 면인데,    
주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이 우리 성도를 백합화 같이 깨끗하게,  
주님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씀이 우리 성도를 몰약과 같이 부패하지 않는 썩어지지 않게 하시는 말씀이 되었다.

■ 14절  손은 황옥을 물린 황금 노리개 같고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하구나

손은 황옥을 물린
손은 주님의 행사를 말합니다.  황옥은 성결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대속이 없어도 성결한 분이고
우리 성도들은 주님의 대속이 있어야 성결해 집니다.  
성결이란 무엇을 기준 해서 성결 인가.  당신을 기준 해서 성결입니다.  
그러니까 우리 입장에서 봐서 어떤 죄도 불의도 불목도 없는 아주 깨끗하신 분이다.  

황금 노리개 같고
금은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상징하고 있는 것입니다.  

몸은 아로새긴 상아에 청옥을 입힌 듯 하구나.--  
청옥 생명색인데, 주님과 연결의 생명 적인 깨끗을 가리켜서 청옥을 입힌 듯 하구나 했습니다.  

■ 15절   다리는 정금 받침에 세운 화반석 기둥 같고 형상은 레바논 같고 백향목처럼 보기 좋고

다리는 ---- 화반석 기둥 같고
이것은 주님이 우주와 영계보다 무거운 중량의 우리의 구원을 책임져서 대속 하시는 주님의 능력을 가리켜서  화반석 기둥 같다 했습니다.  
계 3:13 에-빌라델비아 교회에게 이기는 자는 성전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하나님의 교회 첫 번째 기둥이 누구냐 우리 주님입니다.  
주님의 사활대속의 역사로 말미암아 첫 번째 기둥이 되었습니다.  
대속을 입고 벗지 아니하는 이기는 자가 되면  성전이 기둥이 되어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는 복 있는 자가 됩니다.  

정금 받침에 세운
여기서 정금을 영원불변성을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을 영원히 책임지시는 면을 말합니다

■ 16절  입은 심히 다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여자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입은 심히 다니
주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주님의 말씀이  꿀같이 단 말씀이 된다.  
그러나 주님을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말씀이 짐이 되어 집니다.  
또 자기에게도 걸거치는 것이 되어집니다.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아가5:10-16 의 주님의 전체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주님의 그 모든 행위를 하나하나 뜯어보니 주님의 전부가 다 사모할 수밖에 없고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생각과  행위를 하시는 분이다 하는 말입니다.  

예루살렘 여자들아
:10-16 의 주님으로 알지 못함으로 - 주님을 사랑함으로 병이 나기까지 주님을 알지 못하여, 껍데기로만 주님을 알아 일반적인 주님과 관계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아

이는 나의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일다
:10-16 에 내가 아는 주님이 어떠한 주님이라는 것을 발표했는데
그 주님은 신부의 참된 사랑의 대상이요
친구와 같이 모든 것을 다 숨김없이 의논하고 알고 지내는 뜻과 소원이 같은자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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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아가서 6장 1절-14절


1. 예루살렘 여자들이 그리스도를 비유하는 신랑 솔로몬이 있는 곳을 물어봄(1절).
2, 술람미 여인의 답변-교회를 비유하는 신부의 답변(2-3절),
3, 그리스도를 비유하는 신랑 솔로몬이 교회를 비유하는 신부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말함(4-10,14절).
4. 어린 새 성도에게 찾아감 (11-12)
5. 예루살렘 여인들이 술람미 여인을 찾음(13)

예수님을 신랑으로 비유한 성경(마 25:l-l3 ,마 9:l5, 요 3:29, 고후 1l:2,
엡 5 : 3l-32,  계 19:7, 22:l7).


■ 1절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여자 중 극히 어여쁜 자야
이 말은 예루살렘 여자들이 술람미 여인에게  하는 말입니다.  
즉 오늘 일반적인 믿음을 가진 성도들이, 주님을 특별히 진실 되이 간절히 사모하고 사랑하는 성도들의 신앙행위가 이해가 안되어 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얼마나 주님을 사모하고 사랑해야 될까?  
152장 찬송가 가사에-  목마른 사슴이가 물을 찾음같이 갈급한 이 심령은 예수 찾아 타네.  
시편 42편에 보면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성구가 있습니다.  
일반적인 믿음의 성도들은 세상에 대해서는 이렇게 갈급해도- 주님께 대해서는 갈급하지를 못합니다.  
오늘 우리들은 주님에 대해서 특별한 갈급성을 가지는  성도가 되어야
주님이 아가 5:2하반-나의 사랑 나의 신부 나의 누이 나의 사랑 나의 완전한자야 이렇게 부름을 받을 수 있는 우리가 됩니다.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갔는가 너의 사랑하는 자가 어디로 돌이켰는가

우리가 너와 함께 찾으리라
이 말씀은 증요하다. 예루살렘 여자들같이 일반적인 피상적인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따르던 자들이 이제 술람미 여인으로 비유된 진실한 성도의 증거 하는 말을 듣고-- 자기들도 주님을 가까이 따라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주님에 대하여 듣는 것이 절대로 필요하다.
그러므로 [롬 10: l7]에 말하기를,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고 하였다, 사람은 주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주님에 대하여 바로 깨닫게 되어진다. 주님의 영광에 대하여는 인간의 지식으로 깨달을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통한 성령의 감동이 사람에게 임할 때에 사람은 보이지 않는 주님에 대해 바로 깨달으며, 믿게 되어진다
언제나  성령의 감동은 진실한 신자들의 증거로  임하는 것이다.

(요 4 : 39-42),사마리아 여자가 그리스도에게 대하여 증거한 결과로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주님에게 나아와 주님을 믿게 되었다

■ 2절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향기로운 꽃밭에 이르러서 동산 가운데서 양 떼를 먹이며 백합화를 꺾는구나
이것은 신부로 비유된 교회(성도)가 증거 하는 말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자기 동산으로 내려가
곧 주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주님의 양 떼를 먹이시고 계신다는 것이다.

``동산" 이란 말은 여기서는 양 떼를 먹인다는 말씀과 관련되어 있는 것만큼 확실히 은혜로운 교회를 비유한다.
그러므로 넓은 의미에서는 사회교회, 좁은 의미에서 개인교회 각각의 마음이라고도 할수 있다

``향기로운 꽃밭"이란 말은 주님의 대속의 아름다운 향기를 입은 성도들을  비유  하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대속의 아름다운 향기를 입은 성도들과 함께 하신다.

"백합화를 꺾는구나" 이는 주님께서 진실한 성도들의 믿음과 대속을 입은 성결한 성도의 아름다움을 기뻐하심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다. 호 l4:5-6 .

■ 3절  나는 나의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나의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다 그가 백합화 가운데서 그 양 떼를 먹이는구나

주님은 나의 주님이시요. 나는 주님의 것이요. 주님은 백합화가운데에서(성결의 은혜 가운데에서) 양떼인 우리 성도를 먹이고 있구나.

여기서 교회는 자기와 그리스도가 일체라는 것을 말한다.

교회와 그리스도가 일체 되기는 그리스도의 구원의 결과이다.
[요 17:22-23] 에 말하기를  
"이는 우리가 하나가 된 것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 곧 내가 저희 안에,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셔 저희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또 나를 사랑하심 같이 저희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라고 하였다.

[로마 8:32]에  --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4-7은 솔로몬은 또 다시 술람미 여인의 어여쁨을 칭송한다,
우리는 솔로몬이 어떤 면에서 술람미 여인의 어여쁨 칭송하는지 알아야 한다.

■ 4절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내 사랑아 너의 어여쁨이 디르사 같고
디르사는 이스라엘에 있는 아름다운 도시의 이름으로서 이스라엘 왕들이 별궁을 두었던 아름다운 곳이라고 한다(왕상 l4:I7, l6:23),
그러므로 주님을 긴밀히 사랑하는 성도의 아름다움을  묘사한 것이다.

너의 고움이 예루살렘 같고
예루살렘이 아름답다는 사상은 시 48:2(터가 높고 아름다워 온 세계가 즐거워함이여 큰 왕의 성 곧 북방에 있는 시온산이 그러하도다)에 있다.
그러면 교회의 아름다움을 예루살렘으로 비유한 이유는 무엇인가 ?
그것은, 거기 있는 성전에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거룩한 행사가 거행되기 때문이다(시 l22:3-4). 성도의 진정한 아름다움은 그 무엇이든지 하나님 중심한 것이다

엄위함이 기치를 벌인 군대 같구나

이것은 술람미 여인같이  주님을 긴밀히 사랑하는 성도는 죄악에 대한 정복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신부로 비유된 주님을 긴밀히 사랑함으로 죄악의 정복력을 지니는 성도의 위엄을 비유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죄악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고 있다.
구약 시대에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원수들로 더불어 전쟁하였으며. 또 승리하였다.

■ 5절  네 눈이 나를 놀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네 눈이 나를 놀래니
주님을 바로 알고 나니 성도가 놀랄 수 밖에 없다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
다음과도 같이 번역한다. ``네 눈을 나를 향하여 돌리라"라고.
이것은 진실된 믿음과 진실된 사랑으로 주님을 바라보라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성도의 주님께 대한 긴밀한 믿음과 긴밀한 사랑올 보시고 매우 기뻐하신다.
주님은  백부장의 신앙을 보시고 놀라시며 기뻐하셨습니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뭇하였노라고 하였다.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길르앗에 있는 그 염소들은 그 비옥하니까 살이 쪄서 털이 번쩍번쩍합니다.
머리털은 이것은 화목을 말하는 건데- 네 화목은 아주 길르앗에 있는 염소 떼  모양으로 번쩍번쩍하다.
믿는 사람은 둘 하고도 합하고, 셋 하고도 합하고, 열 하고도 합하고,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잘 화평하는  그것을 주님이 미로 보십니다.

■ 6절 네 이는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곧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네 이는
주님은 무엇을 좋은 이로 말했느냐 하면-- 말씀을 잘 듣고, 새김질하고, 연구하는 성도의  행위를
                                          

목욕장에서 나온 암양 떼
사람이 목욕을 하고 나면 음식이 더 맛있는 것 같이
양을 목욕을 시켜 놓으면 사료를 더 많이 먹습니다
자기를 성결케 하기 위해서 성경 말씀을 자꾸 읽고 묵상하고, 연구하고, 잘 배우고 하는 성도의 미를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피 성령 진리로 자신을 씻어서 주님과 같이 깨끗한 자 되기를 힘쓸 때 주님이 나를 어여삐 여겨 주십니다

새끼 없는 것은 하나도 없이 각각 쌍태를 낳은 양 같고
새끼를 낳으면 음식을 더 맛있게 먹게 됨을 비유한다

**털 깎인 암양 [아가4:2 에는 이 구절이  있으나 아가6:5에는 없음]
양의 털을 싹 깎아 놓으면 아주 사료를 배나 먹습니다.  
털 깎는 거는 주인의 수입이오-그래서 주님 기쁘시게 합니다

■ 7절 너울 속의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너울 속의
너울은 신부가 쓰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혼의 신부가 신랑만을 향한 순결한 마음같이, 주님만을 향한 마음만 가진 순결한 성도를 어여삐 여겨서 비유한 것이다

너의 뺨은 석류 한 쪽 같구나
뺨  잘생긴 사람은 다른 것 여간 못생겨도 다 흉한 걸 덮습니다.
이러니까 뺨이 잘 생긴 게 그게 아주 신부로서는 참 좋은 건데.

주님의 신부된 성도들의 뺨은 어떻게 생겨야 잘 생기느냐?
'석류 한 조각 같구나' 이 석류 같아야 된다
석류는 겉은 뿔뚱뿔뚱하게 아주 보기 험합니다. 그런데 이걸 뚝 쪼개보면 겉은 하나지마는 속에는 꼭 아주 깨끗한 피가 얽힌 것 모양으로 얽혀 가지고 있는 열매가 수백 개입니다.

이것이 상징하는 것은-- 어떤 한 사건을 좋은 의의 열매를 하나 맺었으면
사람 보기에는 의의 열매 그거 하나 뿐으로 보지만은, 그 의의 열매를 맺은 내용을 가서 들여다보면은 참 사람이 감동을 받을 만한 남 모르는 수고, 남 모르는 그 사랑, 남 모르는 봉사, 남 모르는 인내, 남 모르는 애로가 있는 은밀한 생활하는 그 사람의 그 행위를 신부의 어여쁜 뺨과 같이 됐다 말한 것입니다.

■ 8절  왕후가 육십이요 비빈이 팔십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그런데 솔로몬의 왕궁에는 솔로몬 왕을 중심으로 왕후, 비빈, 시녀들이 많이 있었다. 이 들은 왕을 위해서 일생을 살아야 한다.
왕후와 비빈은 왕의 아내요, 시녀는 왕 아내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여인들이다,
왕을 가까이서 직접 모시는 왕후와, 가까이에서 직접 모시지 못하고 멀리서 간접적으로 모시는 시녀도 있다.

이와 같이 오늘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중심해서 둘러 있지마는
왕후와 같이 주님과 서로 사랑하고 밀접한 관계를 가진 사람도 있는데, 이런 사람은 많지를 못하다.

또 시녀와 같은 입장에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도 있다.
(1)다시 말하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여기에 대해서 소문만 듣고 믿는 사람도 있고
(2)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그 안면만 보고 믿는 사람도 있고
(3)예수님과 서로 이야기하는 정도에서 믿는 사람도 있다.
위에 말한 이런 사람들은 주님과 동거동행 하지마는 왕과 입맞춤이 없는 것처럼 주님과 입맞추는(아가1:2) 그 자리에는 이르지 못한 사람이다.

(1)그러면 소문만 듣고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만나보지 못하고 소문만 듣고 "나는 예수 믿는 사람이다"라고 입으로 말을 하지마는, 여전히 세상에 취하여 예수님을 찾을 여가도 없이 분주하게 날 뛰고, 실상은 믿지 아니하면서 믿는 줄로 알고 껍데기로 일생을 속아서 사는 이 사람을 가르쳐서 "소문만 듣고 믿는 사람이다"고 한다.

(2)그러면 예수님의 안면만 보고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과 예수님의 도를 지식적으로만 알고 믿는 자인데, 이런 사람이 믿는 사람 가운데에 많이 있다.

(3)그러면 예수님과 서로 이야기를 하는 정도에서 믿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예수님에게 기도하는 정도로 믿는 사람을 말한다.

그런데 위에 말한 사람들은 실패자이다,
이들은 주님과 입맞춤과 같이, 주님과 생사고락을 같이 할 수 있는 그런 정도의 밀접한 관계를 가지지 못한 자다.

다시 말하면 이들은
(1)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2)안면을 보고 믿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감동시켜 주시면 그것으로 만족하는 자다.
예수님이 깊이 감동시켜 주시는 그때에는 일시 회개하고 소원하고 결심하고 작정하고 각오도 하지마는
감화감동을 받은 그대로 실행 하고자하는 갈급을 가지지 못하고, 마음이 일시적으로 감화감동 되어지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사람이다.

(3)또 예수님과 서로 이야기하는 정도에 있는 사람은 예수님에게 기도하는 것으로서 만족을 누리는 자다.
(4)또 어떤 사람은 예수님이 밤낮으로 동행 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한다.
곧 예수님과 함께 심방하고 전도하고 일하는 것으로 만족하는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술람미 여자처럼 참된 성도는 이런 것으로 만족치 않는다. 이런 순서로서는 만족되어 지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술람미 여인과 같이 주님과 입맞추기까지 나아간 성도들도 있는데,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누가복음 7:36-38, 44-50)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여 자기의 전부를 주님의 제단 앞에 주님 위해서 희생의 제물로 드리지 아니하면 만족이 되지 아니하는 순교를 원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는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서만 만족되지 아니하여 죽음을 개의치 아니하고 주님을 위해서 주님을 사랑함으로 죽는 데에까지 나아가고 마는 것이다.
그래서 아가1:2절 처음에 "내게 입맞추기를 원한다"고 말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순교를 애모함이 빈약하고 주님을 사랑함이 빈약하다.
그때에도 솔로몬의 왕궁에는 궁녀들이 많이 있었고, 예루살렘에도 여인들이 많이 있었지마는
솔로몬의 참된 사랑을 받은 여인은 술람미 여인뿐이었다. 지금도 주님의 참된 사랑을 받는 성도는 드물다. 희귀하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입 맞추어 주실 수가 있는 자격과 행사가 우리에게 있어야 되지, 우리가 원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우리가 순교를 원한다고 해서 순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님과 우리가 서로 사랑하여 이 사랑에 도취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순교는 주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연애의 최고 절정이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내가 영원히 주님을 버리지 않겠습니다."라고 장담을 했지마는 거기에 대한 준비가 없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준비를 하지 않고 때가 오면 순교하겠다고 하는 자는 도리어 주님을 배반하게 되고 만다.
순교는 주님과 영원히 입맞추는 미덕인 것이다.
순교는 그 사람의 평소 생활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사진을 찍으면 평소의 자기 모습에 그대로 나타남과 같이, 평소에 주님을 사랑하는 그 현상, 그 모양이 그대로 그 때에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순교의 각오가 없는 자도 어리석은 사람이요,  
자기의 연약성을 깨닫지 못하고 준비 없이 자기의 주님에게 드리고자 하는 사람도 어리석은 사람인 것이다.

주님을 당신의 전부를 다 쏟아서 우리를 만드셨다.
①그러기 때문에 자기가 자기 단독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사람은 주님을 참 사랑하지 못한다. 자신이 연약한 줄 알고 자기에게 있는 것을 주님에게 맡길 때에 주님은 일을 하실 수가 있다.

②그러므로 순교는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서 그 사랑에 감격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에게 제일 좋은 것을 주님에게 바쳐서 감사하는 마음이 뜨겁게 솟아나야 순교하게 되어지는 것이다.
③그런데 사랑하는 자와 맺은 정조를 자기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는 것이 순교 할 수 있는 요소가 되어진다.

요약하면
① 자기의 연약함을 알고 주님에게 자기를 다 맡기는 것과
② 자신이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는 것과
③ 주님과의 맺은 정조를 생명보다 더 사랑하는 것.
이 세 가지가 있어야 순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진다.

■ 9절  나의 비둘기, 나의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나의 비둘기,
항상 순결하여 주님보시기에 완전하고, 어떤 환란과 유혹의 어려움에서도  신앙 정조를 지키고 있는자야"라고 하는 말씀인 것이다

나의 완전한 자
주님의 대속의 사랑을 입어 사죄를 입은 죄 없는 자기요, 칭의를 입은 의인 자기요, 화친을 입은 주님과 결합된 자기인 것을 알고  이런 자기를 더럽히지 않을려고 소유와 생명까지도 아낌없이 주님께 바치려하는 자를(술람미 여인) 가리킨다    

하나뿐이로구나
가장 성결한 성도들의 대표자로서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을 사랑함 같이, 주님을 긴밀히 사랑하는 성도를  들어 말한 것이다.

그는 그 어미의 외딸이요 그 낳은 자의 귀중히 여기는 자로구나
어미는 특별한 주님과의 관계를 가진 성도를 키운 하나님의 교회
이런 자를 낳은 자는- 잉태하여 낳은 하나님의 교회


여자들이 그를 보고 복된 자라 하고 왕후와 비빈들도 그를 칭찬하는구나
일반 성도들이 성결과 사랑면에 있어서 그들보다 더 주님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사는 특수한 성도를 부러워하고 흠모한다는 뜻이다. [벧전 l ; l0-l2 ]
10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11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 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 10절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달같이 아름답고 해같이 맑고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아침 빛 같이 뚜렷하고------ 해같이 맑고(계12:1 참조)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면류관을 썼더라
해는 주님으로부터 오는 진리와 영감을 비유한다
그러므로 진리와 영감이 그 안에 충만한 자를 주님이 어여삐 여겨서 말하는 것이다
아침빛은 진리와 영감의 광명을 받아 어두운 마음이 밝아지는 각도이고
해같이 맑고는 진리와 영감이 충만히 비추는 것을 말한다

달같이 아름답고
진리와 영감이 그 안에 충만한 자를 주님이 어여삐 여기는 자가 세상에 진리와 영감의 빛을 나타내는 증거 생활을 진실 되이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기치를 벌인 군대같이 엄위한 여자가 누구인가
4절 해석과 같음-이것은 술람미 여인같이 주님을 긴밀히 사랑하는 성도는 죄악에 대한 정복력을 지녔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이는 신부로 비유된 주님을 긴밀히 사랑함으로 죄악의 정복력을 지니는 성도의 위엄을 비유한다,
교회는 세상에서 끊임없이 죄악으로 더불어 싸워 이기고 있다.
구약 시대에 광야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계속적으로 하나님의 원수들로 더불어 전쟁하였으며. 또 승리하였다.
개인전투와 많은 양떼를 책임지고 전투하는 전투는(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그 중량이 다르다

■ 11절  골짜기의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주님->사랑하시는 성도에 대하여
골짜기는 겸손한 마음을 비유한다. 보편적으로 새로운 초신자들에게는 믿음의 교만이 없다.
푸른 초목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알려고 내가 호도 동산으로 내려갔을 때에
주님은 어린 새성도들을 찾기도 하신다
어린 새성도들은 아직 백향목과 같지 못하고 푸른 초목 같으며, 포도나무 순과 같고 석류나무의 꽃과도 같다

■ 12절  부지중에 내 마음이 나로 내 귀한 백성의 수레 가운데 이르게 하였구나
믿음이 어린 새 성도들을 주님은 찾아가시고
또 한 면으로는 주님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성도에게 주님의 마음이 속히 끌린다  

■ 13절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예루살렘 여자들이->술람미 여인에게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특별히 주님이 긴밀한 사랑의 은혜를 입고 긴밀히 사랑의 교제를 하는 성도를 보고 , 일반적 믿음 생활을 하는 성도들이 주님과 특별히 긴밀한 관계의 신앙생활을  자기들에게 와서 보여주고  자기들에게 와서 가르쳐 달라고 간청하는 것입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우리들도 네게 배워서 주님을 너와 같이 사랑하므로 병이 나기까지 긴밀히 사랑하고 싶다

■ 14절  너희가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이 귀절은 다음과 같이 개역 되어야 한다. 곧, ``너희가 술람미 여자에게 무엇을 보려고 하는가? 마하나임의 춤추는 것과 같은 것이지. "라고.
이것은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을 칭찬하는 솔로몬의 말이다
``마하나임"은 "천사의 두 무리" 란 뜻이다.
천사의 춤추는 것은 물론 고상하고도 아름다움을 말함인데,
아가 6:4-10 의 술람미 여인의 아름다움이 솔로몬의 보기에 천사의 춤추는 것 같이 고상하고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술람미 여인으로 비유된 아가 6:4-10 의 성도들의 고상하고 아름다움은 주님 보시기에 천사들의 춤추는 것처럼 고상하고도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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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제7장 1절-13절


1.그리스도를 비유하는 신랑이 교회를 비유하는 신부의 아름다움을 묘사함(l-9상반)
2.신부(교회)가 신랑(그리스도)에게 대한 자기의 기쁨과 교제에 대하여 말함(9하반-l3).

■ 1절  귀한 자의 딸아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귀한 자의 딸아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 된 성도를 비유한다.

신을 신은\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신을 신은
대속의 복음을 받아 가졌다는 것이다
에베소 6:15  평안의 복음의 예비한 것으로 신을 신고

네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그의 발이 아름답다고 함은 복음을 전하는 성도의 행보가 아름답다는 의미이다

이사야 52:7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

네 넓적다리는 둥글어서 공교한 장색의 만든 구슬 꿰미 같구나. [해석 미확정]
이 표현은 신부로 비유된 성도들의 단결을(구슬 꿰미 같구나.) 비유한다
에베소 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 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 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구슬 꿰미 같구나 함은 그 단결이 귀중하고 또 하나님 앞에 아름답다는 뜻이다.

■ 2절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배꼽은 섞은 포도주를 가득히 부은 둥근 잔 같고
하나님의 대속의 사랑과 말씀의 은혜를 가득히 받은 교회의 처지릍 비유한 말씀이다.
시편 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허리는 백합화로 두른 밀단 같구나
허리는 몸의 부분 중 생산의 방위이다(히 7 :5).
허리가 밀단으로 비유되었으니 이것은 신부로 비유된 성도가 많은 성결의 열매를  맺는 것을 가리킨다.
``백함화"는 하나님의 성결의 은혜를 비유한다(사 35 : l-2).

                           이사야  35 장
1  광야와 메마른 땅이 기뻐하며 사막이 백합화같이 피어 즐거워하며
2  무성하게 피어 기쁜 노래로 즐거워하며 레바논의 영광과 갈멜과 사론의 아름다움을 얻을 것이라 그것들이 여호와의 영광 곧 우리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리로다


■ 3절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고
두 유방은  암사슴의 쌍태 새끼 같다.
말이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의 믿음의 후배,  믿음의 자녀를 기르는 그 은혜가 자기에게 나와서, 자기에게 속한 양떼에게 젖을 먹여서 기르는 양이,
처음에는  젖이 조금 나오다가 먹이는데 따라서 많이 나오고 유방이 자꾸 큰다는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먹이는 그 양이 수가 많아지고  커지고 하니까
많은 양떼를 먹여서 기를 수 있는 실력이 되는 것을  가리켜서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신앙 인격은 이런 걸로 단장해야 됩니다
이 세상이 지나가기 전에 신앙 인격을 단장을 잘해 놓으면 그 단장은 영원히 계속합니다. 그러니까 이 속사람 단장을 좀 잘 하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때를 따라서 양떼를 잘 먹이는 교훈과 정치의 두 유방이 잘 생겨야 되겠습니다.

■ 4절  목은 상아 망대 같구나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목은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을 비유한다.  
상아는 빛처럼 순결한 것을 비유한다
망대는 적의 침공을 미리 보고 살피는 강한 방위의 역할 을 한다,
그 사람에게서 나오는 말은 우리의 적인 마귀의 간사한 유혹을  미리 보고 깨뜨린다

눈은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눈은 마음을 비유한다

헤스본 바드랍빔 문 곁의 못 같고
이못은 아주 말고 깨끗하다

주님께만을 향한 성도의 깨끗한 마음을 비유한다-주님은 이런 성도를 어여삐 여기신다

코는 다메섹을 향한 레바논 망대 같구나
이것으로 코를 비유한 것은,
코가 냄새를 분별하는 것처럼  주님이 어여삐 여기는 성도는 진리를 바로 분별할 뿐 아니라, 원수 마귀의 궤계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막거나 공격해서 멸해야 될 것올 가르친다.

`레바논 망대" 는 아람 나라의 수도 다메섹을 정탐하기 위하여 세워진 것이었다,

■ 5절  머리는 갈멜 산 같고 드리운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머리는 갈멜 산 같고
``갈멜산"은 초목이 무성하며 그 꼭대기가 둥글고 부드럽게 보인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산으로써 술람미 여인의 머리를 비유한다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머리털은 자주 빛이 있으니
술람미 여인의 머리털이 자주 빛이라 함은 왕이 택하는 고귀한 빛올 가리킨다.


왕이 그 머리카락에 매이었구나 함은,
솔로몬왕이 술람미 여인의 머리카락의 아름다움에 이끌렸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신자들의 머리털까지 다 세시듯이 그들을 철저히 사랑하신다
(마 10 : 30).

■ 6절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사랑아

네가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신랑으로 비유되신 .그리스도께서는 성도의 아름다움에 대하여 다시 묘사한다,
이것은 물론 그 성결의 미에 대한 칭찬이다.
계19:8에는 교회의 성결을 `깨끗한 세마포"로 비유하였는데, 그 것은 하나님이 이루어 주신 것이다.
그와 반면에 인간의 의는 그 어떠한 것이든지 더러운 누더기와 같다(사 64 : 6).

이사야  64 장
6절  대저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쇠패함이 잎사귀 같으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

고린도후서  2 장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호세아  14 장
5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6  그 가지는 퍼지며 그 아름다움은 감람나무와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 백향목 같으리니
7  그 그늘 아래 거하는 자가 돌아올지라 저희는 곡식같이 소성할 것이며 포도나무같이 꽃이 필 것이며 그 향기는 레바논의 포도주같이 되리라

어찌 그리 화창한지 쾌락하게 하는구나
화창한지 --화평

쾌락하게--기쁨

화평케 하여 주님과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구나


■ 7절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네 키는 종려나무 같고
종려나무가 높고 곧은 것 같이, 참된 교회는 높이 하나님만 향하여서 곧게 살고 이 세상을 향하지 않는다,
골로새서  3 장
1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네 유방은 그 열매송이 같구나
유방은 .
진리와 영감과 피의 참 양식을 먹이는 것을 비유한다

그 열매송이 같구나
그들이 열매를 많이 맺는다는 의미에서 ``그 열매 송이" 또는 ``포도송이" 같다고 했다.

■ 8절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네 유방은 포도송이 같고 네 콧김은 사과 냄새 같고

내가 말하기를 종려나무에 올라가서 그 가지를 잡으리라 하였나니

콧김은
참된 성도에게 나타나는 성령 감화감동을  비유한다

사과 냄새 같고
진실한 성도가 주님을 위한 고난을 받는 것이 주님 보시기에 향기로와 주님이 기뻐하신다

■ 9절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네 입은 좋은 포도주 같을 것이니라
그 입의 말은 포도주 같이 기쁨을 준다는 것이다, 이것은 복음의 말씀이 많은 사람에게 기쁨을 준다는 뜻이다,
이사야  55 장
1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포도주는 \나의 사랑하는 자를 위하여\ 미끄럽게 흘러 내려서\ 자는 자의 입으로 움직이게 하느니라
신부->신랑
여기서부터는 신부(교회)가 신랑(주님)에게 대한 자기의 기쁨과 교제에 대하여 말함이다(9하반-l3).

예수 대속의 복음(포도주)이 주님(나의 사랑하는 자)을 위하여 전파될 때에 그것을 받아 들이는 ``자는 자" (믿음의 잠을 자는 자,혹은  미중생자가 중생)는 입을 열어 그리스도를 찬송하게 된다는 것이다.

"나의 사랑하는 자 " 라고 성도가 주님을 부르게 되는 것은 주님은 성도의 진정한 사모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성도에게 없어서는 절대 않될 필요한 은혜를 베푸시는 분이기에 진정한 사모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들의 전부의 전부가 되시고 생명이 되신 분이시다

■ 10절  나는(성도는) 나의 사랑하는(주님에게) 자에게 속하였구나\ 그가(주님이) 나를(성도를) 사모하는구나

나는(성도는) 나의 사랑하는 자(주님)에게 속하였구나
나는 주님의 것이요.
여기서 성도 자기는 한몸의 일체라는 것을 말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 --- 9절 하반절의 해석과 동일

나의 사랑하는(주님에게) 자에게 속하였구나
--주님께 속한 성도의  가치와 행복을 말한다
안개와 같이 잠깐인 세상의 권세, 경제에 힘있는 자들에게 속하는 것도 사람들이 가치 있게 여기는데, 주님은 영원하시고 전지전능하시고 이렇게 크신 주님으로서 전부를 다 희생해서 우리를  사랑하시는 분이시니 이 주님에게 속한 것이 얼마나 가치 있고 복 있는 자기임을 바로 알아 그 행복의 감사를 토하는 말이다.

그가 나를 사모하는구나
주님의 전부를 다해 대속 구원한 성도 내가 이 주님의 대속 사랑을 알고 주님께 정결한 신부로서 주님을 순교적 사랑으로 사랑하니  주님의 마음이 다 내게 다 쏠려 있다는 말이다


■ 11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우리가 함께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나의 사랑하는 자야--- 9절 하반절의 해석과 동일


우리가 함께(주님+성도) 들로 가서 동네에서 유숙하자

우리가 함께---주님과 밀접한 성도가 같이
들로 가서--들은 광야를 말한다, 광야는 사람이 유익 되고 의지할만한 것이 하나도 없고 사람에게 해되는 것만 있고 고독한 곳이다

왜! 주님과 밀접한 성도가 이런 광야로 주님과 같이 갈려하는가?
광야 같은 세상에서 주님 외에 전부가 나를 해하는 것밖에 없는  광야에서 주님만이 나를 돕는 자이시므로  더욱더  주님과 밀접해 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성도는 광야, 산에 가서 기도함으로 주님을 만나고 긴밀한 관계를 가진다.

우리는 여기서 신랑 되신 주님을 들로 인도해 가려는 신부의 소원을 명심해야 된다
성도가 주님을  사랑하게 되는 마음의 자세는 세상과 전에 가졌던 관계를(세상이 주인 되고 자기는 종 된)  단절하고 떠나는 데에서만 가능하다.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흑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고 하셨고 (마6:24),

■ 12절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가서 포도 움이 돋았는지, 꽃술이 퍼졌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 네게 주리라

우리가 일찌기 일어나서
우리의 첫 마음이(수지의 마음이)   열심을 내어서

포도원으로 가서
여기에 말씀하신 포도원은 하나님의 교회를 비유하고
또 성도의 마음을 비유한다.

포도 움이 돋았는지
어린 성도는 자기 안에 주님같이 되어지려는 믿음이 움트는 대로 그것을 키우고자 하는 것이요.
장성한 성도는 주님의 대속을 전보다 더 새롭게 깨닫는 그 면을 힘쓰는 것 말한다
그러나 믿음의 성장은 그리스도께서 동행해 주시는 경우에만 가능하다
빌립보서  2 장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꽃술이 퍼졌는지,
``퍼졌는지"란 말은 ``열렸는지"라는 말이다.
꽃이 피고 거기에 열매가 맺는다
이와 같이 대속 구원의 열매를 맺을 준비인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신앙행위가 있는지 보자는 비유이다 계명을 지킬 때에 주님이 함께 해 주셔서 (요 l4 :23) 신앙 생활에 열매를 맺게 된다,

요한복음  14 장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석류꽃이 피었는지 보자
"석류꽃" 은 그 향기가 특별히 짙은 것으로 유명하다.
석류열매는 그 안에 수많은 열매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 성도의 행위는 그 한 행위 안에 많은 행위가 담뿍 담겨 있을수록 주님이 그 성도를 더 기뻐하신다

요한복음  14 장
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거기서 내가 나의 사랑을(성도가)  네게 주리라(주님에게) 하였으니,
이것은 성도가 진실한 신앙 생활을 통하여 주님과 긴밀한 사랑의 교제하기를 원하는 신앙 고백이다.
성도가 주님을 먼저 사랑한 것은 아니다. 우리가 주님과 원수 되었을 때에도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대속 제물 되셨고 그보다 먼저 영원전 목적에서부터 우리를 당신과 같은 자로 만드실려는 사랑을 하셨다. 로마서 5장 10절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 되었은 즉 화목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요한일서  4 장 19절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성도는 그 받은 사랑에 감격하여서 그를 사랑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그를 사랑한다는 성도들의 진실한 신앙 고백을 듣기를 원하신다.


■ 13절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고
여기 `합환채"는 ``사랑" 이란 뜻이 있는 말이다.
이 합환채가 ``향기를 토하는" 것처럼 주님을 자기의 마음과 전부를 진실 되이 다 드려 사랑하고도 만족지 못하는 성도의 주님을 향한  그 신앙행위를 비유한다.

*성도의 신앙행위로 주님의 사랑이 나타날 때 그것을 향기라 비유한다

고린도후서  2 장
14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15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주님의 성도들에 대한 대속의 사랑이 나타날 때 향과 향연으로 비유한다

요한계시록  5 장
8  책을 취하시매 네 생물과 이십사 장로들이 어린 양 앞에 엎드려 각각 거문고와 향이 가득한 금대접을 가졌으니 이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

요한계시록  8 장
4  향연이 성도의 기도와 함께 천사의 손으로부터 하나님 앞으로 올라가는지라

우리의 문 앞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우리의 문 앞에는 ---우리 현실에는

각양 귀한 실과가
각양 귀한 실과는 성령의 은혜로 우리 성도에게 온 각양 구원을 말한다
이 은혜는 주님을  섬기기 위한 것이다

요한복음  15 장
2  무릇 내게 있어 과실을 맺지 아니하는 가지는 아버지께서 이를 제해 버리시고 무릇 과실을 맺는 가지는 더 과실을 맺게 하려 하여 이를 깨끗케 하시느니라
5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8  너희가 과실을 많이 맺으면 내 아버지께서 영광을 받으실 것이요 너희가 내 제자가 되리라


새 것, 묵은 것이 구비하였구나
새 것- 성령의 은혜로 우리 성도에게 새롭게 온 진리 구원, 온전한 행위 구원, 성화 구원을 말한                다.
묵은 것-전에 주신 성령의 은혜로 우리 성도에게 이루어져 있는 진리 구원, 온전한 행위 구원, 성화 구          원을 말한다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너를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내가 나의 사랑하는 자  
주님

너를 위하여
주님을 위하여

쌓아둔 것이로구나
우리의 진리 구원, 온전한 행위 구원, 성화 구원을 주님은 양식으로 맛있게 잡수시기 때문에 주님을 위하여 이 구원의 결실을 맺어 준비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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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서 8장 1절-14절

l. 신부로 비유된 성도가 신랑으로 비유된 주님과 밀접한 교제를 원함(l-3절).
2. 주님과 긴밀한 성도가 일반적인 믿음을 가진 성도에게(4절)
3. 주님이 성도에 대한 사랑의 찬송(5절) .
4. 주님에 대한 성도의 사랑(6-7절)
5. 장성한 성도가(신앙지도자, 선배) `'작은 누이" 곧 초신의 어린 성도를 위하여 할 일을 말하고(8-9절),
6 믿음이 어린 성도가 자기의 처지를 고백(10절).
7. 성도가 주님의 포도원에 대하여 말 함(1l-l2절).
8. 주님께서 성도의 기도와 찬송을  들으시기를 원하심(l3절) .
9. 성도가 주님이 자기에게 오시기를 청원함(l4 절).

**신부로 비유된 성도가 신랑으로 비유된 주님과 밀접한 교제를 원함(l-3절)**.

■ 1절  네가 내 어미의 젖을 먹은 오라비 같았었더면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도성인신 하시기 이전의 구약 교회 성도들의 소원이다.
미래적으로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입고 세상에 오셔서 대속의 공로를 설정하사 우리 성도들에게 사죄 칭의 화친을 입히셔서 우리를 깨끗케 하심으로, 성도들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자격과 주님과 결합할 수 있는 자격을 은혜로 받게되어 주님과 가까워질 수 있게되고, 성도들이 그리스도와의 교제를 가짐에 있어 담대하게 되리라는 뜻이다.

지금의 성도들에게는 과거적으로 이루어져 있는 대속을 입어 담대히 긴밀히 주님과 사랑의 교제를 할 수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사활 대속으로 이 죄악의 장벽이 없어짐으로  신인 양자의 교제는 완전히 실현되었다.
또, 주님이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심으로(도성인신) 주님과 성도는 형제 같이 되었다(롬 8 :29; 히 2:11),

내가 밖에서 너를 만날 때에 입을 맞추어도 나를 업신여길 자가 없었을 것이라

주님과 입을 맞추는  순교적인 긴밀한 사랑의 교제의 행위를 성도가 주님에게 하여도,  주님의 대속으로 깨끗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지성지공법에도 합당하고, 모든 존재들 앞에서도 합당하기에, 업신여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2 장
11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하게 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14  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18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느니라

로마서  8 장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20 장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 2절  내가 너를 이끌어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네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 마시웠겠고

내가(성도가) 너를(주님을) 이끌어
주님이 성도를 위해 대속의 희생을 하심으로 성도는 주님을  "이끌어" 모실 수 있는 자격을 얻었습니다.
그러나 성도가 이런 자격을 가졌어도
성도가 주님의 도성인신 사활대속의 사랑을 깨달아 주님에게 자기의 전부를 다 기울이는 자라야, 주님의 마음이 그런 성도에게 다 기울어져서 그런 성도에게 끌려갑니다  

내 어미 집에 들이고
"내 어미 집"이란 말은 성도를 중생 시키고, 양육하여 믿음을 성장시키는 참된 교회 말한다(갈 4 : 26).
그러므로 주님을 교회에서 모시고 주님의 말씀을 듣는다는 말이다

네게서(주님에게서) 교훈을 받았으리라
이것은 신자가 주님으로 말미암아 진리의 교훈을 받음을 가리킨다. 누가10:39 요6:44-45

나는 향기로운 술 곧 석류즙으로 네게(주님에게) 마시웠겠고
이것은 성도가 석류 열매와 같이 속 가득찬 주님이 향기롭게 여기는 신앙행위로 주님을 기쁘시게 함에 대한 비유이다, 행 I6:l4  계 3:20 .

■ 3절  너는(주님) 왼손으론 내 머리에 베게하고 오른손으론 나를(성도) 안았었으리라
  (同-아가2:6)
2절에 기록된 행위를 하면 3절에 기록된 은혜를 베풀어주신다

"왼손"은 약속을 말한다. 그러므로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개 한다"고 하신 이 말씀은 "내 전부의 소원은 주님의 약속 위에 든든히 서 있다. 내 소망의 전부는 주님의 약속을 내 산 기업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라고 하는 말씀이다.

"오른손"은 주님의 능력의 승리를 말한다.
그러므로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다"고 하신 이 말씀은 "주님의 능력이 나를 승리하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주님을 바라보므로 병이 났으니 건포도-곧 주님의 피와 살을 먹어야 하고, 사과-곧 주님을 사랑하고 위해서 고난받고 희생하므로 기뻐하고 만족해야한다. 그리고 주님의 신실하신 약속을 우리의 소망으로 우리의 산 기업으로 삼고, 주님의 능력 속에 들어가서 보호함을 받아야 한다.

시37: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
시63: 8  나의 영혼이 주를 가까이 따르니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거니와

시91: 4  저가 너를 그 깃으로 덮으시리니 네가 그 날개 아래 피하리로다 그의 진실함은 방패와 손 방패가 되나니
시91: 7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이 재앙이 네게 가까이 못하리로다
시91:15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난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주님과 긴밀한 성도가 일반적인 믿음을 가진 성도에게 부탁(4절)**
■ 4절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며 깨우지 말찌니라 (同-아가2:7, 3:5 )

"예루살렘 여자들아" 란 말은 "모든 성도들아, 일반적인 주님과 관계의 믿음을 가진 성도들아"하는 말이다.

".내가 너희에게 부탁한다 " 는 말은 일반적인 주님과의 관계를 가지고 사는 성도들에게 4절하반의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라"는 부탁을 하는 것이다  

4절 하반에 "나의 사랑하는 자가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찌니라"고 하신 이 말씀은 "내가 사랑하는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해야 만족하니, 주님을 사랑함으로 주님 말씀 순종하다가 감옥에 갇히는 환란을 당할 때에라도, 주님이 원하시고 만족하시기 전에는 내가 이 감옥에서 나가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니, 내가 감옥에서 빨리 나오도록 기도하지도 운동도 하지 말아라.
도리어 내가 주님을 사랑하여 환란을 잘 이기고, 주님을 위해 잘 죽을 수 있도록 기도해달라고 모든 성도들에게 부탁하는 것이다.

아가2:3,4의 성구도 4절 하반의 성구와 같이, 환란으로 인해서 주님에게 안겨 깊은 사랑의 교제를 하고 있는 성도의 행위를  기록한 것인데
(아가2:3"남자들중에 나의 사랑하는 자는 수풀 가운데 사과나무 같구나 내가 그 그늘에 앉아서 심히 기뻐하였고 그 실과는 내 입에 달았구나")에서는
수풀 속에 거하면서 사과나무 실과를 달게 먹는 술람미 여인같이
참된 성도는 수풀 속에 있는 환란 가운데에서, 사과실과를 달게 먹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붙들려서 즐거움을 누립니다

사과가 달지 아니하면 소용이 없는 것처럼 아무리 주님을 위해서 고난을 당한다고 해도 최종은 자신이 성화됨으로 고난이 아닌 기쁨이 되어야한다.

성도는 환란의 어떤 역경에서도 2:6말씀같이 사과를 찾고 건포도를 먹어서 자기 힘을 도와야한다. "2:6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해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아가2:4"그가 나를 인도하여 잔치 집에 들어갔으니 그 사랑이 내 위에 기로구나")에서는 잔치집에 들어가는 것처럼 환란가운데에서 복음을 전하고, 곧 복음 운동으로 잘 먹을 때가 있으니,  그때에 잘 먹도록 하고, 거기서 주님을 위해서 죽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는 것을 기록한 것이다.

일반적 믿음을 가진 성도는 술람미 여인과 같이  주님의 사랑하는 신앙 사상과 신앙행위를 이해하지 못한다.
술람미 여인과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참된 성도는 4절 하반 말씀과 같은 환란을 당해도, 3절 말씀과 같이 주님의 불변의 약속을 자기의 소망으로 삼고 ,주님의 승리의 능력을 의지하여 환란 가운데에서도 평안하게 지내는 것이다.

**주님이 성도에 대한 사랑의 찬송(5절)**
■ 5절  그 사랑하는 자를(주님을)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성도가) 누구인고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주님이) 너를 깨웠노라

그 사랑하는 자를 의지하고\
이것은 성도가 주님의 말씀의 참된 사실과  전지전능과 진실한 사랑 깨닫고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올 말합니다.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 누구인고(同-아가3:6하반)
짐승과 그의 우상과 그의 이름의 수가 가득한 세상, 맹수같이 잔혹하고 사이비한 미혹이 가득 차서 성도를 해하는 것밖에 없는 무의무탁하고 고독한 세상을 주님을 의지함으로이기고  하늘나라를 향해 주님께로 올라오는 성도의 아름다움을 주님이 찬송하는 것입니다 .
그래서 요일 5장4절에 말씀하기를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주님이) 너를 깨웠노라

너를 인하여 네 어미가 신고한,
너를 인하여-- 성도를 구속하려고
여기 "네 어미가"란 말은 참된 교회를 가리킨다(갈 4:25). 시 87:5-7  
신고한,-- 대단히 어려움을 당한
그러므로 이 말씀은 성도를 구속하려고  주님의 교회가 대단히 어려움을 당한 곳에서

너를 낳은 자가 애쓴 그 곳 사과나무 아래서 내가(주님이) 너를 깨웠노라
너를 낳은 자가 -- 이것도 참된 교회를 가리킨다-교회는 주님에게 사명을 받아 아직 부르심을 받지 못한 성도를 예수 믿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였다

애쓴 그 곳--교회가 중생 되지 않은 택자들로 주님께 부름 받아 예수 믿게 하고 그들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힘쓴 곳이란 말이다.

어떻게 교회가 애를 썼는가?
"요 5: 25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 는 말씀같이 성도를 살리고 장성케 할려고 사활대속의 복음을 전하는데 애를 썻다.

사과나무 아래서- 교회가 중생 되지 않은 택자들로  주님께 부름 받아 예수 믿게 하고 그들의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어려움을 당하고 힘을 씀으로, 하나님의 교회가 고난을 당하는 것을 비유한다

내가(주님이) 너를(성도를) 깨웠노라
주님은 주님의 교회가 성도를 구속할려고 애를 씀으로 고난을 당하는 교회의 희생을 가지시고 성도의 믿음의 잠을 자는 것을 깨웠다는 말입니다
믿음의 잠자는 성도에게 환란을 주시는 방편으로 그 믿음의 잠을 깨우십니다

그러므로 5절하반절 종합적 해석은- 참된 교회가 주님의 명에 수종 들어 택자를 예수믿게 하고, 또 이들의 믿음을 더욱 성장시키기 위해 애를 쓰고 대단히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여기에 곧 교회가 성도의 구속을 위해 고난 당하는 그 희생을 가지시고 거기에서  성도의 믿음의 잠을 자는 것을 깨웠다는 말입니다

**6-7은 술람미 여자- 곧 주님과 밀접한 성도가 주님에 대한 소원과 주님의 사랑의 위대성을 기록한 것이다**
■ 6절  너는(주님) 나를(성도)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너는(주님) 나를(성도) 인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같이 팔에 두라
6정 상반절은-주님과 밀접한 성도가 주님에 대한 소원을 기록한 것이다
인이나 도장은 옛날 이스라엘 사회에서 귀중품으로 간주되었던 것으로서(창 38:l5-18) 그 소유자가 그것을 가슴에 품어 보관하였으며, 또 오른손에 건사하기도 하였다(렘 22: 24).

그러므로 이 귀절은 성도가 주님을 향하여 주님의 가장 깊은 사랑을 요구하는 말이다.
우리를 언제나 주님 안에 품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주님의 모든 행사에 항상 우리와 같이 하고 교제하기를 소원해서 하는 말이다
주님은 그 택한 백성을 위하여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다(롬 5: 6-10, 고후 5:l4-l5).

그러면 어떻게 하면
우리를 언제나 주님 안에 품어 보호하시고 인도하시며, 주님이 모든 행사에 항상 우리와 같이 하고 교제하실 수 있겠습니까?
7절 하반절 말씀과 같이 주님의 사랑의 가치를 바로 알고,
5절 상반절 말씀과 같이  그 사랑하는 자를(주님을 ) 의지하고 거친 들에서 올라오는 여자가(성도가) 되고
2절 상반절 말씀 같이 주님에게 자기의 마음을 다 쏟아 기울임으로  주님 마음이 이런 성도에게 다 기울어져서  그 성도에게 이끌림을 받을수 있도록 하면 됩니다

사랑은 죽음같이 강하고
6절 하반-7절까지는  주님의 사랑의 위대성을 기록한 것이다
우리 성도들에게 대한 주님의 사랑을 어떤 사망의 세력도 막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실상의 사건이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마땅히 주님을 생명 소유 다해서 사랑해야 된다.

투기는 음부같이 잔혹하며
투기란 말은 뜨거운 사랑이란 말이다
주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으로 우리에게 대한 사랑이 아주 맹렬하다(2계명 가운데에서)
이 뜨거운 사랑은 음부와 같이 주님의 사랑의 대상인 성도를 붙잡고 놓지 않는다

불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이 말도 역시 주님의 성도에 대한 사랑을 어떤 것도 막을 수 없는 것을 가리킨다.
여호와의 불(진노)을 누구라도 막을 수 없는 것과 같다

■ 7절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성도에게 대한 주님의 사랑이 영원 불변하다는 것이다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여기 물은 세상 미혹을 비유하고 홍수는 환란을 비유한다. 세상 미혹과 환난 때문에 성도의 주님에게 대한 사랑은 약해지는 경우가 많지만
택한 백성에게 대한 주님의 사랑은 세상 미혹과 환난도 조금도 약해지지 아니한다는 말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사랑이 우리의 행위에 따라 변하지 않고, 영원 불변하기 때문에
주님에게 대한 성도의 사랑도 영원해야 된다.

롬8: 38-39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 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고 하였다.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주님의 크신 사랑은 온 가산 보다 귀하니 성도가 가산 때문에 주님을 버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주님의 사랑의 가치가 지극히 크다는 것입니다

**\8-9절은---장성한 성도가 어린성도를 위하여 할 일 말함**
■ 8절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우리에게 있는 작은 누이는
하나님을 아직 잘 모르는 믿음이 어린 성도를  "작은 누이"로 비유하여 말한다.
믿음이 어린 성도를 주님의 순결한 아내 되도록 인도함이 장성한 성도(신앙지도자, 신앙선배)의 책임이다, 고후 ll:2.

아직도 유방이 없구나
아직 믿음과 진리의 실력이 없어서  참사람의 양식을 먹이지 못하는 것을 비유합니다

그가 청혼함을 받는 날에는 우리가 그를 위하여 무엇을 할꼬
성도가 현실에서 성화 되어 주님과 결합되는 구원의 실상의 열매를 맺는 때에, 신앙선배 신앙 지도자가 믿음 어린 연약한 성도를 잘 보호하여  마귀에게 유혹 받지 않도록 하여 성화구원을 잘 이루도록 돕겠다는 것이다

■ 9절  그가 성벽일진대 우리는 은망대를 그 위에 세울 것이요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그가 성벽일진대
성벽이란 말은 무슨 뜻인가?
성벽은 견고한 방어를 비유하는데,
세상의 죄악의 세력에 침노를 받아도 해를 받지 않고 자기 신앙 인격의 깨끗을 지키는 성도의 강력하고 견고한 방어의 신앙인격을 의미한다(렘 l:8, l5:20).

"은망대를 그 위에 세운다"는 비유의 말씀의 뜻은
성도가 성벽과 같이 주님에게 대한 믿음의 지조를 파수할 경우에, 신앙 지도자 선배는 믿음이 어린  성도를 위하여 망대같이 원수 마귀의 궤계를 미리 잘 살펴 원수 마귀에게서 지켜주겠다는 뜻이다

그가 문일진대 우리는 백향목 판자로 두르리라
그가 문일진대.
이것은, 초신(初信)의 어린 성도가 그 받은 은혜와 진리를 잘 지키지 못하는 연약한 상태를 비유한다.
이런 경우에 백향목 판자로 두른다고 함은  신앙 지도자 선배가 초신의 어린 성도를 위하여 진리와 영감으로 교훈 하여 대속을 더욱 깨닫고 믿게 하여 대속을 어떤 현실에서라도 벗지 않는 자가 되도록 해서 그 받은 은혜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주겠다는 것이다

9절 전체의 종합 해석은 다음과 같다--
작은 누이(믿음이 어린 신앙)가 회개하고 성벽과 같이 든든히 진리를 파수하게 되면, ``우리" 곧 신앙의 장성한 신앙 지도자 선배는 믿음이 어린 성도를 위하여 은 망대같이 원수를 잘 살펴서 막아주고, 백향목 판자로 두르는 것 같이 그 받은 은혜를 빼앗기지 않게 지켜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은혜를 받아 보존하는 자에게 더 큰 은혜를 주시는 천국의 법칙대르 되는 일이 다.  (마 25 : 20 달란트 비유 )

** 믿음이 어렸던 성도가 신앙선배 지도자들의 돕는 은혜로 인하여 믿음이 자란 현재의 자기를 고백(10절)**.
■ 10절  나는 성벽이요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나는 성벽이요
믿음이 어린 성도가 그 동안 장성한 성도들의 도움을 입어 하나님의 말씀을 성벽같이 잘 지킬 수 있는 자로 믿음이 자랐다는 말이고,

나의 유방은 망대 같으니
전에는 유방이 없었던, 즉 진리 없고 영감 없어 믿음의 자녀를 낳을 수도 없고 먹여 키울 수도 없는 자이었는데, 이젠 신앙선배 신앙지도자들의 도움으로 믿음이 자라고 진리와 영감이 충만하여 믿음의 자녀를 낳고 양육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더 자라서 망대와 같이-원수 마귀의 잘 살펴서 마귀의 궤계를 잘 구별하며 물리칠 수 있는 자가 됐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보기에 화평을 얻은 자 같구나
이렇게 안전하게 방어되고 있는 성도에게는 화평이 있다.

**성도가 주님의 포도원에 대하여 말 함(1l-l2절)**.
■ 11절  솔로몬이 바알하몬에 포도원이 있어 지키는 자들에게 맡겨 두고 그들로 각기 그 실과를 인하여서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구나

솔로몬은 주님을 비유하고, 포도원은 주님의 목적이요 성도의 구원인 성화구원의 열매를 맺는 세상 현실, 또는 교회를 비유합니다, 사 5:2  
그리고 지키는 자들은 성도들, 또는 교회의 교역자들을 비유하고(마 20:1-2, 21:33)
은 일천을 바치게 하였다고 함은 성도들이 주님의 심판 때에 성화구원을 이룬 대로 주님 앞에서 회계를 할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마 25:14-30   히 13: l7


■ 12절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솔로몬 너는 일천을 얻겠고
포도원의 주인이신 주님께서 성도로 인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것을 비유한 것이고(마 25:l9  롬 l4:7-8  고전 3:21-23).

실과 지키는 자도 이백을 얻으려니와
성도들은  주님의 포도원을 위한 수고대로 깨끗의 열매 곧 성화구원으로 하나님이 갚아 주시는 것을 비유한 것입니다

내게 속한 내 포도원은 내 앞에 있구나

**주님이 성도에게(13절)**
■ 13절  너 동산에 거한 자야\ 동무들이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나로 듣게 하려무나

너 동산에 거한 자야란 말은 주님이 만들어 주신 현실에서 주님과 교제를 하고 있는
성도야 하는 말입니다

동무들이
동무들이란 말은 신앙동지들을 가리킨다.

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니
"신앙동지들은 , 술람미 여인과 같이 주님과 긴밀한 관계를 가진 성도가- 주님에게 대한 긴밀한 사랑의 교제의 대화의 기도를 듣고 싶어하고 , 또 이렇게 긴밀히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가 주님의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하신 대속 사랑의 은혜를 찬송하는 것을 신앙동지들이 듣고 싶어하니" 하는 말입니다(벧전 l : 12)

나로 듣게 하려무나
주님은 신앙동지들 보다  더욱 관심을 가지시고 듣고 싶어하신다.

**성도가 주님이 자기에게 오시기를 청원함(l4 절)**.
■ 14절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향기로운 산들에서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나의 사랑하는 자야 너는 빨리 달리라
주님은 빨리 내게 오시기를 탄원하는 말이다
(주님의 재림을 재촉함--요한계시록  22:20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향기로운 산들에서
우리를 대속 하신  주님의 사랑이 높고 큰 것을 말합니다

노루와도 같고 어린 사슴과도 같아여라
주님의 대속 사랑의 높고 큼을 깨닫고 감격하여 생명과 소유 다 바쳐 주님을 사랑하는 성도들을 주님이 기뻐 하셔서 떠나지 아니하시고 같이 동행하는 면을 말한 것입니다  

참고

[1]아가2:7---"노루와 들 사슴"은 순진한 들짐승이다. 그래서 조그만한 소리에도 놀라서 멀리 달아난다.
주님은 당신의 뜻에 맞지 아니한 것이 우리에게서 하나라도 발견되면 멀리 가버리신다. 진리에게 합치되지 않고 이탈된 것이 우리에게서 하나만 발견되어도 놀라서 멀리 달아나 버리신다는 것을 상징한 것이다

[2]아가 2:9---여기에 말씀하신 "노루와 어린 사슴"은 빨리 달려오고, 조그만한 소리만 나도 멀리 달아나 버리고, 보지 못했던 것이 하나만 나타나도 깜짝 놀라서 멀리 달아난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우리에게 빨리 달려오셔서 우리를 보실려고 하시며,
또 당신의 뜻에 맞지 아니한 것이 우리에게서 발견되면 멀리 가버리신다. 진리에게 합치되지 않고 이탈된 것이 우리에게서 하나만 발견되어도 놀라서 멀리 달아나 버린다. 우리는 주님이 이런 분이심을 알고 조심 있게 상대해야 한다. 주님을 이런 분으로 깨달은 성도는 항상 조심하고 자기의 의무와 책임을 조심 있게 다 이행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사랑하는 사이 일수록 조심하고 예의를 지키고 엄격해야 한다.

[3]아가2:17---"노루와 사슴"은 성도가 주님을 마음에 모시지 않으면 즉시 떠나시는 면을 상징한다.  

[4] 아가 3:5---주님은 노루와 들 사슴 같아서 노루와 들사슴은 조금만 소리가 나도 천리 만리 도망갑니다.  멀리 도망갑니다.  노루는 도망 갈 때 위로 잘 뛰어 오라 가고 산을 잘 탑니다.  이와 같이 우리 주님은 우리가 조금만 중심이 당신에게서 떠나고 그래서 우리가 죄의 행동을 하면은 주님은 어느새 어디로 가시는지 나를 떠나는 면을 가르쳐서 노루와 들사슴이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