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2007.05.31 11:06

선지자 조회 수: 추천:

■ 창세기 강해

 

  - 백영희목회설교록으로 김윤수목사님 정리
선지자선교회

1장 (제목 :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심)

1절 '태초'는 하나님께서 영계와 우주계를 창조하신 그때를 말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영원전을 말한다.
'천지'는 영계와 우주를 말한다.
창조주의 위치적인 면에서 볼 때 이위 성자 하나님이신 말씀(     )이, 그리스도께서 말씀(     )으로 창조하셨다.
3절 '빛'은 물질의 빛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먼저 계셨고 아무것도 없는 가운데에서 모든 것을 창조하시므로 존재들이 있게 되었다.
5절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지금과 같은 24시간의 하루를 말한다. 창조 당시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4계절도 변함이 없다.
<9~13>
한번 창조하신 것(원소 창조하신 재료를 이용하여)을 다시 이용하여 재창조를 하셨다.
하나님은 위치를 거스리신 일이 없고 하나님께서 한번 만드신 것은 멸시하지 않고 버리지 않고 그로 말미암아 무엇이 이루어지게 하신다. 여기서 하나님의 인격성을 엿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 땅에게 명령해서 식물(植物)을 내라고 하셨으며 24절에 동물을 내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직접 창조하시되 땅에게 권리를 주셔서 땅이 창조한 것같이 하셨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일하시는 성격을 찾아 볼 수가 있다.
그때에만 땅이 하나님께 권리를 받아서 동식물을 낼 수가 있었지 지금은 안된다. 이와같이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에게 구원 이루는 시기를 주시고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게 하시는데 이것은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시고 이것을 이루시는 때라 할 수 있다. 이 시기가 지나면 영원히 이루지 못한다. 오늘 이 시간에 이룰 구원을 이루지 못하면 영원히 이루지 못한다. 이루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만 이룬다. 그때에 땅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하므로 만들어 낸 것은 땅의 것이요. 땅의 영광이다. 땅이 만일에 동식물이 없으면 영광도 없고 할일도 없을 것이다. 또한 식물이나 동물도 땅을 떠나서는 살 수가 없다. 이와같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맺은 결과는 영원히 자기 영광이요. 자기의 일거리요. 영원히 자기 것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구원이 지금에 이루어진다.
<16~19>
하나님께서 이 우주를 창조하셨는데 그 중심은 지구다. 지구를 중심해서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 하나님 다음 존재자는 지구에 존재하고 지구에서 육성하신다. 그러므로 지구 외에도 생물이 존재한다고 하는 말을 믿어서는 안된다. 우주는 선택받은 성도가 처음이요. 그다음은 지구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 하나님의 속성을 가진 인격체로 만들었는데 이것이 사람의 영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지으신 특수성은 하나님께서 회의를 여시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고 만물을 사람에게 맡겨 위임통치하게 하셨는데 이 통치권을 영에게 맡기셨다.


        창세기1:1-31
1 . 하나님은 모든 物質組織[물질조직]이 細密(세밀)한것. 하나님은  無秩序(무질서)하신 하나님이 아니요 . 組織(조직)과 모든 規律(규율)들이 徹頭徹尾(철두철미)한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劃線(획선)을 끄어야지 하나님외에 것은 다 불타 버린다.하나님을 아는 자 마다 자기와 자기 所行과 자기所有와 관계되는 것의 하나만 되는 참의 것을 찾아 가져야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배워가는 사람은 紊亂(문란)해지지 않고 愚鈍(우둔)해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放縱(방종)치 않으니 外柔內剛(외유내강)하여 참의 사람으로 점점 思想(사상)도 行爲(행위)도 되어져 가는 것이다.
2. 만물을 창조하실때에 간단한 한 말씀으로 지으셨다. 하나님이 땅이 드러나라 하실때에 드러났고, 채소가 생겨져라 할때에 생겨졌고, 금수(禽獸)와 어류(魚類)들을 생겨져라할때에 말씀대로 생겨졌다. 그말씀대로 되어진 모든것을 우리가 안다 해도 그 外形만 알지 그 裏面(이면)에 있는 것은 複雜해서 알수 없다. 하나님께서 고기가 생겨지라하니 그 말씀대로 생겨진 고기만 單純히 보았고, 말씀만 알았지, 그 고기 속의 內部가 細密하여 아름답게  생겨진것은 人生이 다 모른다.  20세기에도 알수없는 美가 들어있다. 그러므로 수천년 硏究해도 그 한 마리 고기의 內部를 알수없다 한다.그 분이 지으신 땅의 植物도 그 植物의 種類가 수천가지인지 수만가지인지 다 알수 없다. 人生이 눈으로 보지 못한 식물이 더 많다. 그러므로 한 말씀에서 그 種類의 수를 다 모르나니, 그 存在目的의 構成된것을 다 모른다. 그러므로 內部에는 어떤 무엇이있다고 孔子도 哲人도 말했고 아무리 無神論主義라도 否認할수 없다. 그러므로 석가나 孔子도 宇宙에 큰 理致가 있다고 했다.그러므로 우리가 참고 할것은 이?이 신구약66권에 나타났다고 하지만 이節數와 사건이 많다 할지라도, 이한절에는 사람들이 영원토록 다 알지 못할 비밀이 그 내부에는 들어있다. 그러므로 그 한 말씀도 예사로이 여겨서는 않된다. 땅아! 식물을 내라 한 그 한 말씀의 권위는 얼마나 큰지 모른다.

그러므로 너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가라하신 이말씀의에 대하여 얼마나 큰 권위를 이루었는지 이것을 사람들이 모른다. 첫째 창조는 (1차 창조)  말씀 한마디로 이루어 졌고, 둘째창조(2차창조)는  믿음으로 이루어졌으니 이는 진동되지 않는 창조이다. 이썩지 않은 창조에 대하여 겸손을 가져야된다.그러므로 네가 회개하면 세리도 복을 주었으니, 이 한 말씀에 의지해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그 말씀과 조금도 다름이 없는데  그 한 말씀에 이루어지는 그 高貴한 진리를 모른다.  그러므로 인생이 하나님의 그 큰 역사의 내용을 아무리 연구해도 다 모른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말씀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

아담 해와에게 땅을 점령하라 했으니, 여기에 인생에게는 인격이어서 다른 조건이 하나 부쳐졌다. 그런데 하나님은 한번 명하시면 모든 피조물이 순복하나, 인격을 가진 인생은 하나님이 명하나 왜? 순종치 못했을까?  그 이유는 자기를 돌아 본 까닭이다. 다른것들은 자기를 돌아보지 않았다. 사람은 언제 자기를 돌아 보느냐!  자기를 위할때 자기를 돌아 보게되다.자기를 위하니, 먹지말라한 선악과가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헤롭게할만큼 탐스럽게 보인 거기서 인생은 망쳐졌다.  山川草木은 하나님 명령을 거부치 않고 순종했으나 인생은 거부하여 망했다.
[1] 하나님은 질서 조직이 철두 철미하시다
[2] 하나님의 한 말씀도 권위가 있고 세밀하다. 그 한 말씀이 질서 정련하다.
[3]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을 우리에게 나타낸 말씀이 만물에게 나타난 것과 똑 같다.
그런데 인생은 자기를 돌아보니 않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인생은 믿음보다 더 큰것이 없다.믿음은 자기를 부인하고 나가야된다. 그러나 無我主義는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있기때문에 하나님이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내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것 정리하는것보다 이 3가지 정리하는 것이 더 크고, 모든것 가진것 보다 말씀 정리해서 가지는것이 더 크니 그이의 혜택으로 영원히 살수있는 존재가 된다.

창세기 1:1-31
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시기에 순종하면 하나님과 같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가 지나면 안된다. 무생물이라도 하나님이 쓰시고자 하여 사용하시면 큰 일을 하게 된다. 땅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보니 동물과 식물을 내었고 바다도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보니 생물을 내었다.
② 천지와 그 사이에 있는 모든 만물이 하나님의 속성대로 지으심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있는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면 하나님과도 원수가 되고 모든 만물에게도 원수가 된다. 창조된 만물의 본성과 본질이 하나님의 속성대로 되어졌기 때문에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하면 하나님과도 원수가 되고 모든 만물에게도 원수가 된다.
③ "생물로 번성하라"고 했는데 생물이 번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데 인간이 인간에게 유익한 것을 제외하고는 생물의 번식을 방해하면 하나님의 뜻에 거역이 되는 것이다.
④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셨으니 이것이 다른 만물과 다른 점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것은 만물을 통치하는 치리자로 삼기 위함이다.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인격을 말한다. 범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사람의 영혼이 죽었으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인하여 진리와 성령의 권능으로 중생시켰으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하나님과 같은 인격자가 된다.
⑤ 하나님이 물고기는 물에서 살게끔 처소를 주셨고 짐승은 땅에서 살게끔 처소를 주셨고 새는 공중에서 살게끔 처소와 생의 법칙을 주셨다. 그런데 강한 사자가 강한 것만 믿고 바다에 들어가면 죽고 독수리가 빠른 것만 믿고 물에 들어가면 죽고 물고기가 물에서 살기 싫다고 육지에 나오면 죽는다. 하나님이 종류마다 제 각각 처소와 생의 법칙을 주셨으니 이것을 떠나면 죽는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믿는 사람과 불신자에게 주신 처소와 생의 법칙이 각각 다르니 믿는 사람이 하나님께서 주신 처소와 생의 법칙을 떠나서 불신자에게 주신 처소와 생의 법칙으로 살면 죽는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밥을 먹으면 먹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죽을 먹으면 먹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면서 한 끼만 먹으면 한 끼만 먹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감옥에 가면 감옥에서 살아야 하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다가 죽으면 죽어야지 살려고 하면 망한다. 새는 새로서 공중에 날아다니면서 살고 번식하고 먹고 살도록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새가 물에 들어가면 물에 있는 것이 방해해서 죽는 것이 아니라 새 자신의 생의 법칙에 맞지 않기 때문에 저절로 죽는 것이다. 물고기도 짐승도 그러하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각각 처소를 주셨고 성도가 살아야 할 생의 법칙을 주셨기 때문에 이것을 떠나면 죽고 망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른 처소로 옮겨 주시는 그 시간까지 자기가 처하여 있는 처소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할 것 뿐이다. 오늘은 땅과 바다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만들어 놓은 모든 생물들을 보관하고 있을망정 다시는 새로운 것을 만들지 못한다. 온 땅이 다 달려들어도 온 바다가 다 달려들어도 털끝만한 것이라도 새 것을 만들지 못한다. 처음에 하나님이 명령하실 때에 순종하니 하루동안에 그 순종으로 말미암아 자기의 영광을 마련했다. 동물과 식물은 땅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에 있는 생물은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는, 영원히 자기의 소유로, 영광으로 마련한 것이다. 동물과 식물이 땅이 아니면 못 살겠다고 할만치 땅과 바다가 위대하게 된 것같이 모든 존재들이 내가 아니면 못 살겠다고 하는 위대한 사람이 될 수가 있다. "아담 한 사람의 거역으로 말미암아 영원한 사람이 왔고 예수님 한 분 순종으로 말미암아 영생이 이루어졌다" 창조시의 하루가 오늘 성도들에게는 출생해서 죽을 때까지이니 이 시기에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존재들이 내가 아니면 못 살겠다고 하는 위대한 인물이 된다. 모든 것을 영원한 내 소유로 만든다. 이 시기가 지나고 영원한 나라에서는 털끝만한 것 한 개라도 만들지 못한다. 영원한 나라에서는 이 세상에서 자기 것으로 만든 것 가지고 사용하고 누린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 만들어질 것은 다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땅과 바다를 붙드시고 일을 하실 때에 쓰임을 당하니 이렇게 위대하게 되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붙드시고 쓰실 때에 쓰임을 당해야 한다. 이 시기에 하나님께 순종만 하면 안 될 것이 없는 만능의 시기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만 하면 전능자가 하시는 일을 한다.
창세기 1:26-28
하나님은 두 번 창조하셨다. 영계와 물질계를 창조하셨고 또 한 번은 이것을 근거로 하여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할 통일된 영원한 나라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이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치리권을 위임했다. 바다, 공중,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사람에게 맡기셨다. 맡기신 이유는 무엇인가? 사람이 만물 가운ㄷ에 하나님과 가깝기 때문에 맡긴 것이요 또 맡게 된 실력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은 영혼이 있기 때문인데 모든 것들을 이 영혼에게 맡기신 것이다. 영혼에게 맡기신 것은 곧 하나님의 속성과 같은 모형 속성들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대로 된 영혼에게 맡기셨고 앞으로 영원한 나라도 산 영혼들에게 맡기셨으니 그 영광을 누리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얼마나 우리에게 맡겨 주실런지 이것이다. 그 맡기시는 것이 어떤 사람에게는 많이 맡기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적게 맡기는 것이니 하나님과의 관계가 가깝고 밀접하면 많이 맡기신다. 우리의 소망은 상급인 기업을 많이 받는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산 영에게 모든 것을 맡기신다고 하니 산 영을 장성하게 하고 충만하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다. 에베소서 4장 13절에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자라가도록 노력을 해야한다. 오늘 이 시간에 여기서 배우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을 하나님께 신임성이 크고 작음에 따라서 맡기심이 크고 작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신임을 크고 많이 받을 수 있는 자가 되어져야 하는데 어떻게 해야 이런 자가 될 수가 있는가? 영이 장성해지는 것이다. 영은 하나님의 속성을 본받아서 지은 것인데 이 영이 장성해지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속성을 본뜨서 만든 그것에게 창조하신 모든 것을 맡기신다. 이 영을 기르는 것은 속성을 기르는 것이다. 이 속성은 하나님의 속성을 말하는데 12가지 속성이다. 자존성, 완전성, 불변성, 단일성, 이 4가지는 사람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이 4속성을 전체적으로는 닮지 못하나 간접으로는 닮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는 것은 지식, 지혜, 선, 사랑, 거룩, 진실, 의, 거룩 이 8가지 속성이다. 그러므로 영을 기른다는 말은 이 속성을 기른다는 것이니 8가지는 직접 기르고 4가지는 간접적으로 길러가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의 영혼에게 만물을 맡기셨고 앞으로 통일국가를 맡기는 것도 사람의 영혼에게 맡기는 것이니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속성에게 맡기는 것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모든 것을 맡을 수 있는 영혼을 길러가는 것이 하나님의 속성을 길러가는 것인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은 영이 자라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속성이 자라가는 것이요, 내 자체가 자라가는 것이니 곧 지식, 지혜, 선, 사랑, 거룩, 진실, 의, 주권이 자라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치하는 치리권을 사람의 영혼에게 위임시켰으니 곧 하나님의 속성에게 위임시킨 것이요, 다시 말하면 내 지식, 지혜, 선, 사랑, 거룩, 진실, 의, 주권에게 위임시키신 것이다. 내 영혼을 길러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영을 기르는 것인가?
1. 지식을 길러야 한다. 이 지식을 길러야 영혼을 기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을 기르는 것이 지식을 기르는 것이요, 하나님께서 영에게 치리권을 맡기신 것은 지식에게 맡기신 것이니 지식이 자라가는 것만큼 하나님은 맡기신다. 지식이 어린 것은 영혼이 어린 것이다. 이 지식은 완전한 지식이니 하나님의 지식이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지식이니 참된 지식이다. 종을 종으로 아는 것도 지식이요, 종을 밥으로 아는 것도 지식이요, 종을 닭으로 아는 것도 지식인데 여기에 바른 지식은 하나요, 잘못된 지식은 둘이다. ① 하나님께 대하여 ② 자기와 이웃에게 대하여 ③ 영과 육에게 대하여 ④ 시간과 공간에게 대하여 ⑤ 천국과 세상에게 대하여 ⑥ 물질에 대하여 ⑦ 영광에 대하여 ⑧ 권세에 대하여 아는 지식이 가지 각색이다. 바로 안 지식은 없앨 수가 없다. 빼앗을 수 없고 깨뜨릴 수가 없다. 바로 아는 지식이 커지면 이것이 하나님의 속성이 커지는 것이고 영혼이 커지는 것이다. 바로 아는 것이 커지면 그 지식을 가진 자가 담대해지고 자기에게 기쁨이 되어지고 든든해지고 영광이 되어진다. 바로 아는 지식을 가지고 시험장에 갔으면 그 사람이 제일 기쁘고 담대하고 든든해진다. 잘못된 지식들이 떠들수록 바른 지식이 든든해진다. 바로 아는 지식에게 모든 것이 속하고 싶어한다. 이는 자기가 바로 아는 자가 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앞으로 놀랄 세계가 전개될 것이다. 지금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유성을 주셨기 때문에 제 멋대로 알고 행해도 개의치 않으신다. 자유성을 주셨으니 자기 지체가 하나님의 속성을 찾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에게 속하기를 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 곧 하나님의 지식이 나타날 때에, 바로 알지 못한 지식들이 바로 아는 지식에게 꺼구러지고 바로 안 지식이 존귀해지고 영광스럽게 되어지는 것이다. 비판과 평가가 바로 되지 못한 것은 그때에 수치를 당한다. 바른 비판과 평가를 주는 것은 신구약 성경 뿐이다. 예배드리고 기도하고 연보하고 새벽기도하고 전도하고 주일 지키는 이것이 구원이 아니고 구원을 이루는 방편이요, 행사다. 자체가 자라야 한다. 이 지식이 외부로 나타나는 것은 육을 통하여 나타난다. 그러므로 구원을 이룬다고 하는 것은 영이 자란다는 것이요 하나님의 속성이 자란다는 것이니 이것은 지식이 자라야 한다. 바로 아는 지식이 자라면 자란 것만큼 만물을 점령한다. 피조물들이 바로 아는 것을 좋아한다. 안경은 하나인데 지식으로 소유하는 것은 천인, 만인이다. 천상천하에 대하여 지식으로 소유하는 것은 천인 만인이다. 바로 아는 것이 점점 커져나가야 한다. 알고 있는 것만큼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점령하는 것이고 또 모든 것을 바로 아는 것에게 점령 당하기를 원하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필연의 나라다. 그러니 이 나라의 수명은 한계가 없다. 영원히 없다. 땅에 있는 좋은 것은 천국의 그림자요 싫은 것은 지옥의 그림자다. 참된 지식이 주는 기쁨과 영광과 위로를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참된 지식을 가지지 못한 연고다. 이 참된 지식이 자라가니까 점령하는 범위가 넓어진다.
2. 지혜가 자라야 한다. 지혜는 미래에 관한 것이니 자기의 미래에 속한 것이다. 자기의 미래에 대하여 바로 아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앞으로 잘될 것인가 이것을 아는 것이 지혜다. 자기의 미래에 대하여 하나님의 미래에 대하여 인간의 미래에 대하여 전개될 존재들의 미래에 대하여 바로 아는 것이 지혜인데 이것이 자라가는 것이 영이 자라는 것이요, 하나님의 속성이 자라는 것이요, 인격이 자라는 것이다. 미래에 대하여 바로 아는 지식은 지혜다. 바른 지혜가 없으면 그 사람의 하는 일은 거꾸로 된다. 구하는 복은 오지 않고 화가 온다. 바른 지혜가 길러지면 욕심과 비판과 노력이 바로 되니 하는 일이 바로 되는 것이다. 모든 존재들이 바른 지혜를 원한다. 열심도, 선도 바른데서 나온 것이 아니면 헛되다. 그러므로 바른 지혜를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에서 길러야 한다. 땅 위의 천태만상이 생기는 것은 여기에서 자기의 지식과 지혜를 연단시키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환경과 처자를 주시는 것은 여기에서 자기의 지식과 지혜를 연단케 하는 것이다. 어떻게 길러야 할 것인가?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을 관련시켜 나가는데에서 기르고 연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과 입자은 내 영을 속성을 기르는데 사용하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고 땅에있는 선물을 비판하는데서 지식과 지혜가 자라니 온전한 지혜는 온전한 지식과 온전한 지혜에서 나온다. 이것이 영이 자라는 것이다.
3. 선을 길러야 한다. 선은 온전한 지식과 온전한 지혜에서 나온다. 온전한 지식과 온전한 지혜과 없어도 온전한 선이 나온다고 하는 것은 공중에다가 화살을 쏘아도 새를 맞힐 수가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온전한 지식과 지혜를 가지고 사용하면 온전한 선이 된다. 하나님과 나의 모든 사람과 모든 피조물에게 유익이 되게 하고 바로 되게 하고 잘되게 하는 이것이 선이다. 이 선이 자라가는 것이 내 영이 자라가는 것이요, 속성이 자라가는 것이요, 내 자체가 자라가는 것이요, 내 인격이 자라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 선에게 모든 만물을 치리할 수 있는 치리권을 맡기신 것이다. 이 선은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본질과 본성적으로 자라야 한다. 콩을 팥으로 아는 것도 지식이겠지만 콩은 콩이라는 지식이 올 때는 수치를 당한다. 선도 마찬가지다. 오늘에 모든 사람들이 선이라고 인정하고 환영하지만 내 일에는 선이 아니고 악이 되는 것이 있고 이 지방에서는 선이라고 하는데 저 지방에서는 악이 되고 이 세상에서는 선이라고 하는데 영원한 나라에서는 악이 되고 사람 앞에서는 선이라고 하는데 하나님 앞에서는 악이 되고 외형적에는 선이라고 하는데 본성과 본질이 사랑과 진리에 배치되는 선이 있으니 참된 선은 하나 뿐이다. ① 하나님께서 인정하는 선 ② 영원히 선 ③ 어디서든지 선 ④ 시간의 제한을 받지 않는 선. 이것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참된 지식과 지혜에서 찾을 것이다. 참된 지식과 지혜에서 나온 선이 아니면 참된 선이 아니다. 선의 본질은 진리요. 본성은 사랑이다. 이것이 아니면 참된 선이 아니다. 이 선이 자라는 것만큼 만물을 치리할 수가 있다. 모든 사람에게 선한 것 만큼 모든 사람을 점령하는 것인데 점령 당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선에게 점령 당하기를 원하고 점령 당하는 것을 기뻐한다.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원망과 불평과 시비가 없다. 점령할수록 좋고 점령당할수록 좋은 이런 나라에서 자유하게 사는 것은 지식이 자라야 하고 지혜가 자라야 하고 선이 자라야 한다.
4. 거룩이 자라야 한다. 거룩은 구별이다. 하나님께 대하여 자기와 사람에게 대하여 모든 만물에게 대하여 시간과 공간에 대하여 국가에 대하여 지식과 지혜에 대하여 선에 대하여 바른 구별을 해야한다. 이것이 영이 자라는 것이다.
5. 사랑이 자라야 한다. 지식이 있고 지혜가 있고 선이 있고 거룩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안된다. 사랑이 없으면 한 일이 전부가 헛 것이다. 사랑이 없으면 이것들이 쓰이지 않고 계속되지 않는다. 지식이 적으면 그만큼 사랑이 적다. 이곳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는데 큰 범위에서는 사랑이 안되는 수도 있다. 많이 먹으면 잘 자란다는 것만 알고 어린아이에게 많이 먹이면 죽는다. 소에게 콩을 먹이면 살찐다는 말을 듣고 날 콩을 한 말을 먹였는데 콩이 뱃속에서 불어서 소가 배가 터져 죽었다. 이렇게 많이 먹이는 것도 사랑이지만 이는 무지한 사랑이니 결과적으로는 미움이요 죽이는 것이 된다. 사랑은 지식이 아니면 안된다. 잘못된 사랑 때문에 많은 폐단이 일고 있다. 여기 사랑은 평가적인 사랑, 곧 아가페 사랑이다. 이 사랑이 자라는 것만큼 모든 피조물을 점령한다. 이 사랑에게 모든 것이 점령 당하기를 원하고 있다. 하늘나라는 이 사랑으로 충만한 나라요, 그 나라에서는 이 사랑이 실력이다. 이 사랑이 자라는 것이 영이 자라는 것이요, 내 자체가 자라는 것이요, 내 인격이 자라는 것이다.
6. 진실을 길러야 한다. 진실이 아니면 사랑이 아니다. 진실 없는 사랑은 허식이요, 간교다.
7. 의가 자라야 한다. 하나님의 뜻에 꼭 맞는 것이 의다. 하나님의 뜻에 안 맞으면 안된다. 진실되다고 해도 하나님의 뜻에 안 맞으면 안된다. 의가 아니면 안된다. ① 의가 자라는 것이 내 영이 자라는 것이요 ② 하나님의 속성이 자라는 것이요 ③ 내 인격이 자라는 것이요 ④ 내 자체가 자라는 것인데 이 의가 자란 것만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치리할 수 있는 치리권을 맡기신다.
8. 주권이 자라야 한다. 의에 맞으면 주권자가 된다. 어떤 것에게도 제재를 받지 않는 자유자가 된다. 이것이 영이 자라는 것이요, 속성이 자라는 것이요, 내 인격이 자라는 것이요, 내 자체가 자라는 것인데 이 주권이 자란 것만큼 하나님은 모든 만물을 치리할 수 있는 치리권을 맡기신다.
이 세상은 지식, 지혜, 선, 사랑, 거룩, 진실, 의, 주권 이것을 기루는 밭이요 연단하는 용광로인데 우리가 세상에서 사는 목적은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니 우리의 구원을 이루는 것은 영이 자라는 것이요, 내 영이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자라는 것이요, 내 자체가 자라는 것이니 먼저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한다. 이 지식이 먼저 자라야 한다. 그다음에는 지혜가 자라야 한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의 속성으로 인격으로 실력의 나라다. 이런 큰 구원을 우리에게 주셨는데 이 구원을 이루기 위해서 살지 않고 썩어지고 없어질 것을 취하고는 기뻐하고 만족해 한다. 세대가 바뀌고 세계가 바뀌면 아무 쓸데없는 이것을 위해서 분주히 살 것이 무엇이 있나? 지식, 지혜, 선, 거룩, 사랑, 진실, 의, 주권 이것이 자란 것만큼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만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맡기시니 이것으로 점령하는 것은 영원히 빼앗기지 않고 영원히 자기 것으로 누리고 산다. 이 구원을 위하여 우리는 전심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1:27-28
여기에 보니 "복을 주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 땅을 정복하라"고 했다. 자체 번성과 세력을 가지고 소유를 확장하는 복을 사람이 받았다. 이렇게 축복을 받은 자는 영이 산 사람이요, 영혼이 죽은 사람을 저주하신 것이다. 그때에 하나님이 쓰시던 법을 지금도 쓰시고 그때에 정치하시던 그대로 지금도 정치하시니 하나님의 법은 변치 않는다. 하나님께서 산 영혼에게 축복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의 축복이 많은 것을 추론할 수가 있다. 하나님은 산 영혼에게 축복하셨지 죽은 영에게 축복하신 일이 없다. 그리스도교는 사람을 구원하는 교이니 영과 육을 아울러 구원하는 교다. 그러므로 육이 없이 영이 되는 법이 없고 세상이 없이는 천국이 되는 법이 없다. 천국은 세상에서부터 시작된다. 마태복음 13장 44절에 "보화가 묻힌 밭과 같다"고 했다. 여기 밭은 세상을 말한다. 자기의 세상을 말한다. 이 자기의 세상에 하늘의 영광이 묻힌 것을 알면 자기 세상으로 삼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이다. 자기의 한 세상을 예수 믿는 법으로 생활했으면 자기 세상일 것이다. 우리의 법은 신구약 성경 말씀이니 이 말씀대로 생활하면 자기 세상으로 삼은 것이다. "소유"는 자기가 가진 힘이나 지혜나 지식이나 지위나 권세나 물질을 말한다.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밭을 산 것은 자기의 힘이나 재물이나 지위를 빼앗기는 한이 있어도 나의 법, 곧 성경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 세상으로 가지는 것이니 그 속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영광이 감추여져 있다. 우리는 구원을 받은 자이니 힘써야 자기에게 해당된 구원을 이룬다.
①. 어떤 사람은 "이 세상에서 구원 이루는데에 힘 쓰는 것은 세상살이에 불리한데 구원을 이루지 아니하면 안되겠고 구원을 이루자니 세상살이에 불리한데 구원을 이루지 아니하면 안되겠고 구원을 이루자니 세상 살이에 불리하니 어떻게 할꼬"하여 근심하고
②. 어떤 사람은 "세상에서 잘 살다가 예수 믿자고 하는 사람이요.
③. 어떤 사람은 "세상살이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구원이나 이루어 보자."하는 사람도 있고.
④. 어떤 사람은 세상반, 천국반 이렇게 양다리를 걸치고 생활하는 자도 있다. 이런 사람들은 참된 신자가 아니다. 가짜 신자다.
⑤. 참된 신자는 영혼을 구원하여 육까지 구원하고 천국을 취하고 세상까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자기 자신까지 사람을 사랑하여 자신까지 사랑하는 이 사람이 참된 신자요. 이것이 참도다.
믿는 일을 한는데 세상살이가 깨여지는 것은 순서가 꺼꾸로 되었기 때문이니 이것은 깨여져야 한다. 깨여져야 이것이 바로 되는 것이다. 내 대에도 좋고 내 자손대에도 좋고 영원히 좋은 것은 순서가 바로 된 것이다. 우주의 진리인 만물이 잘 살고 사람이 잘 살 수 있는 이 생활을 한다고 하면 영원히 형통할 것이다. 도적질하면 낭패가 되고 도박을 하면 낭패가 되는 이것은 법에 이탈되기 때문이요. 법에 비뚤어져 바로 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낭패되고 망하는 이것은 낭패되고 망한느 것이 없어 지는 것이니 화가 아니고 복인 것이다. 온전한 사람일수록 바른일 일수록 실패와 낭패가 적다. 일을 하다가 그 일이 실패가 되고 낭패가 되면 그 일이 바로 안되고 비뚤어진 것임을 깨닫고 그 일을 중단 해야 한다. 그러므로 영이 좋으면 육이 나쁘고 천국에 좋으면 세상에는 좋지 못하다는 사상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산영에게 축복하셨다. 그런데 범죄한 아담에게는 두 사람이 있었다. 하나는 저주를 받은 옛사람과 하나는 축복을 받는 중생된 새 사람이다. 가인은 저주로 번성했고 아벨은 축복으로 번성하였다. 우리는 아벨의 사상을 계통 받은자요. 아벨의 제자요. 아벨의 후배요. 아벨의 것들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법도를 써 먹는 데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도 다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법을 주시되 그 사람에게 필요하고 적당한 법을 주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심부름을 사람에게 시키면 하나님이 손해요. 사람이 감당치 못할 시럼을 하시면 무익한 것이니 지혜가 많으신 하나님이 이렇게 감당 못할 심부름과 시험은 주시지 않으신다. 사람의 영혼이 되어 있는 것 만큼, 장성하여 있는 것 만큼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교훈을 주시고 명령을 주시는 것이요. 영이 장성한 것 만큼 성경을 깨닫는 것이니 자기 정도 이상은 전심전력을 기울여도 깨닫지 못한다. 자기 정도의 신앙 생활을 하고 성경을 깨닫는다. 그 이상은 있는 힘을 다 써도 안된다. 전도하는 것도 자기 계급의 사람에게 전도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는 것이다.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 주는 것도 자기 계급의 사람에게 보여준다. 학교에서도 일학년은 일학년 정도의 깨달음을 가지고 이학년은 이학년 정도의 깨달음을 가지는데 일학년이 있는 힘을 다 기울여도 이학년이 깨달음 정도의 깨달음과 믿음 생활은 못한다. 다만 일학년은 일학년 정도의 깨달음과 믿음 생활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정도 외에는 신앙 생활을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 내지 못한 자기는 자기계급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낸다. 일학년이 잘 믿으면 일학년이 볼 때에 "그 사람은 하나님에게서 영육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축복을 주시고 이학년이 잘 믿으면 이학년이 볼때에 "하나님에게 영육의 축복을 받았다."고 하는 복을 주셔서 하나님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렇게 계급있는 교훈을 하시는 교훈을 감당할 수 있는 적당한 교훈을 하시는 것이니 교훈의 계급차이가 있고 행위의 계급차이가 있고 보상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적당한 교훈을 주시고 적당한 깨달음을 주시는 것이니 적당한 순종을 하게 되고 거기에 따르는 적당한 보상이 있다. 그러므로 이 보상은 행위가 가지게 되고 행위를 한 사람에게 적당한 보상이니 동일한 계급에 있는 사람에게 알게 되는 것이다. 물질을 중요하게 여기고 물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자에게는 물질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계명을 주시고 지위와 권세의 계급에 있는 자에게는 지위와 권세를 얻을 수 있는 계명을 주신다. 왜 이렇게 계급의 교훈을 하시는가? 그 사람에게 적절한 교훈이기 때문이다. 6학년에게는 6학년의 교훈을 해야 하고 1학년에게는 1학년의 교훈을 해야 한다. 그 사람이 받는 보상은 그 사람이 받아야 할 적당한 보상이니 돈을 위주로 하는 돈의 세계에서 돈의 계급에서 사는 자는 돈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교훈이 필요하고, 돈이 필요하다. 돈의 세계에서 사는 이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나타내고져 하면 돈을 주어야 하고 돈을 주실려고 하면 돈에 대한 교훈과 계명을 주신다. 이 사람은 돈에 대한 계명이 아니면 주어도 모른다. 지위나 권세나 명예나 도덕도 마찬가지다. 그 계급에 알맞는 계명을 주신다. 그 사람이기 때문에 그 계명을 주시는 것이다. 자기 계급에 해당한 복이 온다. 자기가 가진 세계관, 물질관, 만물관 이상의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기 정도의 것을 깨달을 수 있고 지킬 수가 있다. 그러면 자기 정도의 축복이 오고 자기 동류의 사람들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알 수 있게 하는 빛을 나타내니 예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자가 계급의 계명을 순종하면 자기 생활의 계명을 순종하면 자기 계급, 자기 생활의 축복이 온다. 다른 것이 올 줄로 생각치 말아야 한다. 정치가에게는 정치가가 지킬 계명을 주시는 것이니 정치가는 정치가에게 하나님을 나타내고 학자에게는 학자가 지킬 계명을 주시는 것이니 학자는 학자에게 하나님을 나타내고 사업가에게는 사업가가 지킬 계명을 주시는 것이니 사업가는 사업가에게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선자리를 몰라서 선자리를 찾지 못해서 실패한다. 독약도 쓸 자리가 있고 술도 담배도 쓸수 있는 자리에 쓸수 있으나 그 쓸자지를 찾지 못하고 전부 실패하는 것이다. 아내가 남편에게 귀하게 보이는데는 귀하게 보이게 하는 계명을 지켜야 하고 지키면 하나님의 보상이 나오는데 남편에게 귀하게 보일 수 있는 일이 나오고 사람이 나오고 용모가 나오고 인격이 나온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는 자기 계급이 있으니 자기 계급에서 살아야 한다. 하등계급에 있는 사람은 하등계명을 좋아하고 중등계급에 있는 사람은 중등계명을 좋아하고 상등계급에는 있는 사람은 상등계명을 좋아하는데 하등계급에 있는 사람이 하등계명을 지키면 하등계급에 속한 축복을 주시고 이렇게 해서 자라면 중등계급으로 나아가고 중등계급에 있는 사람이 중등계명을 지키면 중등계급에 속한 축복을 주시고 이렇게 해서 자라면 상등계급으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하등계급에 있는 사람이 중등계급을 통하지 않고 상등계급에 나아가면 이는 월권이다. 그러므로 자기 계급을 찾아서 자기계급에서 살아야 한다. 자기가 어떤 계급에 있는지 이것을 먼저 알아야 한다. 의식주단계에 있는지 자녀 교육단계 곧 지식단계에 있는지 지위와 권세의 단계에 있는지 덕망의 단계에 있는지 영능을 원하고 있는 단계에 있는지 영능을 가진 단계에 있는지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①.의식주 계급을 통하여 인물, ②.지식계급에 나아가고, ③.권세계급을 통과해야 덕망, 도덕계급에 나아가고, ④.덕망계급을 통과해야 영능계급에 나아간다. 의식주 계급을 통과하지 못하면 인물계급에 나아가지 못하고 인물계급을 통과하지 못하면 권세계급에 나아가지 못하고 권세계급에 나아가지 못하면 덕망계급에 나아가지 못하고 덕망계급을 통과하지 못하면 영능계급에 나아가지 못한다. 순서적으로 통과하지 않고 월권하면 못쓴다.
그럼므로 나는 어떤 계급, 어떤 단계에 있는지, 이것을 먼저 찾아서 여기에서 내게 오는 계명을 지켜야 한다. 초월적으로 전진해야 한다. 의식도 해결 못하는 자가 지식을 구하는 것이나 권세를 구하는 것이나 덕망을 구하는 것이나 영능을 구하는 것은 월권이다. 자가계급을 찾아서 거기에 있는 계명을 지켜 자기를 길러 나가야 한다. 월권치 말아야 한다. 사람들은 자기계급, 위치, 분수도 높은 분수를 원하는 이것 때문에 페단을 일어킨다. 월권하는 여기에서 폐단을 일어킨다. 월권하지 말아야 한다. 자기 계급에서 자기 계명을 지키는 이것이 겸손이다.

1:27-28
하나님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을 창조하시고 난 뒤에 사람을 창조 하실 때에는 특별하게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곧 하나님의 모형으로 양자로 지었다. 양자는 친아들이 아니면서 친아들과 같은지위와 권세를 가지고 유업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성도를 양자라고 한다. 사람의 영혼의 재료가 하나님의 본체에서 갈라져 나온 본체와는 다른 것이지마는 권세나 지위나 영광이 하나님의 본체에서 나온 것과 같은 것을 가진다. 그러나 우리는 영원히 양자요.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하나님의 영이시나 무형의 인격자이시다. 여기 하나님의 형상은 하나님의 인격의 형상이니 하나님의 사랑과 지헤지식과 능력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다고 하는 것은 육을 말함이 아니고 우리의 영혼을 말한다. 하나님의 인격 곧 도덕과 지혜지식과 능력을 닮은 내 도덕과 지혜지식과 능력이 내 영혼이다. 영혼을 하나님이 창조하셨으니 영혼이 하나님의 노릇은 못하나 하나님을 닮은 노릇은 해야 할 것인데 생기를 넣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형상은 입고 있지마는 하나님을 닮은 행동을 하지 못하도록 그렇게 지었다.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하나님을 닮은 영이 닮은 것을 나타내고 닮은 노릇을 할 수가 있다. 하나님과 연결되지 아니하면 하나님을 닮은 존재는 되어 있으나 닮은 노릇은 못하고 하나님을 보여주지 못한다.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의 형상, 속성, 곧 도덕과 지능을 나타내고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낼 수 있는 존재로 되어 있으나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지 못한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것은 영혼이요. 흙으로 지은 것은 사람의 육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영이라야 하나님의 형상의 모형이 될 수가 있다. 물질로는 안된다. 육은 물질인데 하나님의 형상대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창 1:27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지었다"고 하신 것은 사람의 영육이 같이 있는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것은 사람의 영혼이라는 것이요. 창 2:7절에 "흙으로 사람을 지었다"고 하신 것은 영육이 같이 있는데 육은 흙으로 지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람이라고 한다고 해서 영육의 합이라고 한테 묶어서 취급하면 안된다. 그러면 하나님은 사람을 영과 육으로 창조하셨는데 어느 것을 먼저 창조 하셨는가? 동시에 창조했으나 논리적으로 영이 먼저다. 처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라고 했다. 그 다음이 "흙이라"고 했다. 생기를 불어 넣기 전에는 영육을 가진 사람이지마는 활동은 못했는데 생령이 되었다고 함은 사람전체가 생령이 되었다는 것인데 영육은 하나님의 생기에 따라서 움직이고 사용되니 전체가 영뮬이라 즉 영으로 살았다는 것이요. 영의 삶이 되었다는 것이다. 영이 주격이 되어서 움직이는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다. 생기를 불어 넣고 난 뒤에는 하나님께 피동되어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낸다. 그러나 범죄 후에 연결이 끊어지니 존재적으로 생기를 받기 전의 영과 같다. 그러나 생기를 받기전의 영은 죽은 것도 아니요. 산것도 아니나 범죄 후의 영은 죽은 영이다. 생령이 되었다고 하는 것은 영육이 한 인격체가 되었다는 말이다. 여기 "생기"는 진리와 영감인데 "코에 넣었다"고 하심은 진리와 영감을 주신 것을 표현적으로 말한것 뿐이다. 이 생기는 물질을 살리는 생기가 아니고 영만 살리는 진리와 영감이다. 영을 살리는 것은 진리와 영감 뿐이다. 그러므로 범죄로 죽은 자에게 진리와 영감이 함께하면 전멸한다. 범죄로 죽은 자에게 사죄와 칭의를 입히고 진리와 영감이 함께 해야 다시 살아난다.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 사이에 있어서 하나님의 대리자로 세워서 모든 피조물을 위임 통치하시는데 그 대리자가 사람의 영혼이다.) 하나님과 우리와의 사이에 있어서 사역적으로는 하나님, 그 안이 진리, 그안이 영혼, 그 안이 이성, 그 안이 육체요. 성결적으로는 육체, 그 안이 이성, 그 안이 영혼이요, 그 안이 진리, 그안이 하나님이시다. 성령이 영혼을 붙들고 일을 하고 영혼이 이성을 붙들고 일하고 이성이 육체를 붙들고 일한다. 생기를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된 것 같이 진리와 영감이 영혼에게 접촉하니 진리와 영감이 나온다. 그래서 진리와 영감이 호랑이 하니까 아담도 호랑이 한다. (창 2:19-20)
그러므로 영육이 동시에 창조 되었는데 논리적으로는 영이 먼저요. 육이 다음이요. 영육의 생명도 동시에 창조 되었는데 논리적으로는 육이 먼저 살아나고 그 다음이 영이 살아나고 생기를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되었다. 영을 중심한 영육이 하나의 인격체가 되었다.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1:27-28
아담이 하나님에게 받은 권세는 하나님 다음 가는 권세로서 만물을 정복하고 다스리는 권세요. 하나님의 모든 충만을 유업으로 받는 권세요. 하나님에게 받은 충만을 만물에게까지 충만케 하는 권세다. 이렇게 된 것은 영혼이 있기 때문이요. 생명으로 살떄다. 영육이ㅏ 하나되어 영이 주격이 되고 육은 소유격이 된 때이다. 그리스도에게 피동 되어지는 자가 되어지면 사람의 것으로 살게 되어지고 그리스도의 뜻으로 움직이게 되면 전부는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는 순종자의 것이 된다. 권세를 주신 것은 생령에게 하나님의 형상에게 주셨다. 그런데 범죄로 인해서 영혼이 죽고나니 이 권세를 상실했다. 지금도 만물이 복증은 하지마는 복종케 하시는 자로 말미암아 강제 복종이다. 범죄 전에는 강제적이 아니고 자원적이요. 기쁨으로 복종하였다. 영으로 사는 것은 어떤 것인가?
하나님은 원형적 사랑과 지혜지식과 능력인데 하나님의 모형적 사랑, 지혜지식, 능력으로 사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의 특수성은 영이 있는 것이요. 사람의 가치는 영이 살아 있는데에 있다. 곧 산 영에게 있고 사람의 존귀는 지위에있고 사람의 지위는 영육이 합하여 하나된 그 영의 사람에게 있다. 이 권위는 도덕과 지혜지식과 능력의 권위를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기를 원한다"고 했다. 영과 육이 하나로 되어 정하고 동하는 이것만 되어지면 전체가 자기 것이다. 이 권세를 가지고 사는 자는 어떤 곳에서 살 것인가? 거주할 곳은 에덴 동산이다.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동거하는 곳을 모형한 것이다. 언제나 하나님과 결합되는 영교, 연결에서 살아야 이 권세를 얻고 사용한다. 에덴동산을 떠나면 이 권세를 빼앗긴다. 아담과 하와가 이 에덴동산생활을 못했기 떄문에 이 권세를 빼앗겼다. 에덴동산에서 할 일은 일반과실을 먹고 선악과는 먹지 말라고 했으니 먹지 말고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고 이렇게 하면 생명과실을 먹는다. 그러므로 천하에 큰 일은 하나님과 영교하는 일이다. 영교생활을 하면 하는 그 사람을 통하여 만물을 소생시킨다.

3 : 1-6
  에덴동산은 하나님과 영교하는 곳인데 에덴의 발전은 광야에서는 성막으로 이스라엘에게는 성전으로 신약시대에는 교회로 발전하였다.  하나님과의 영교를 방해받지 않고 영교를 방해하는 그것을 막는 일을 하고 영교를 사용하고 질서 정연하게 하는 그것이 인격자와 교제하는 것이요, 결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실패했다.  에덴에서 5가지를 해야 하는데 다시 말하면 일반과실은 먹는일, 선악과는 안 먹는 일, 동산을 다스리는 일, 동산을 지키는 일, 생명과는 먹는 일을 해야 하는에 4가지를 못했기 때문에 생명과실 먹는 일을 못하게 된것이다.  에덴동산을 다스리지 못하고 지키지 못해서 실패했다.  아담의 실패가 이것이였다.  다스리지 아니 했기 때문이다.  동산 안에 있는 것을 정리 정돈하고 사용하는 것이 다스리는 것인데 아담은 그렇지 못했다.  일반과실은 먹는 것으로 정리 정돈하고, 선악과는 먹지 않는 것으로 정리 정돈 하는 것인데 여기까지 잘 했다.  그런데 아담이 해아를 다스리지 못했다.  해아가 뱀과 말한 것을 보면 아담이 해아를 다스리지 못한 것을 알수가 있는 것이다.  아담이 해아를 다스렸으면 해아가 뱀과 말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또, 아담은 자기를 다스리지 못했다.  자기를 다스렸다고 하면 선악과를 먹지 않고 해아를 책망했을 것이다.  처음에 아담이 자기를 다스리지 아니했기 때문에 해아를 다스리지 못했고, 온 동산을 다스리지 못했고, 뱀을 다스리지 못했고 그래서 선악과를 먹게 된 것이다.  이렇게 자기를 다스리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지 아니한 연고다.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치 아니한 것은 게을한 연고다.  아담이 게을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명심하지 아니한 게을이요, 자기를 다스리는에 게을했고, 해아를 다스리는 데에 게을했고, 동산을 다스리는 데에 게을했고, 그래서 뱀이 들어와도 다스리지 못하고 해아를 미혹케 했다.  그러므로 죽게된 원인을 게을이다.  배이 해아에게 먼저 들어왔다.  해아에게 마귀의 미혹이 들어오니까 해아를 처음에 지을 때에는 아담을 위해서 지었는데 해아 자신을 위하는 주도권을 해아가 가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죄가 들어왔다.  뱀이 들어오면 아담에게 고하는 것이 원칙인데 해아는 아담에게 고하지 않고 해아 자기가 주도권을 가지고 뱀과 이야기 했다.  주도자는 남자인데 여자가 주도했다.  그러므로 인류에게 사망이 들어오게 된 것은 아담에게는 게을한 연고요, 여자에게 주도권을 쥔 책임이다.  그랬기 때문에 창 3:16절에 보면 "남자는 너를 다스릴것이요, 여자는 남자를 사모할 것이니라"고 했다.  고전 11:3절에 "여자의 머리는 남자요, 남자의 머리는 그리스도라"고 했는데 여자의 머리는 남자라고 하여 무조건 여자를 억압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것은 잘못 깨달은 사람이다.  그리스도를 자기의 머리로 모신 그 남자라야 여자의 머리가 될수가 있다.


         창세기 2:1-25

[1]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7일째 되는 날을 안식일로 복주셨다. 7일되는 안식일이 사람들의 범죄가 없었다면 영원히 안식될것인데 범죄함으로 안식이 없어졌다. 2차 창조는 주님이 택자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고 하나님의 율법의 요구가 만족되어졌다.  완전한 의를 가진자가 하나님의 보상이 되는 완전한 구원을 소유하게 되는 것이다. 주일을 지키는 것은 2차 창조를 완성하기 위하여 지킨다. 1차 창조는 범죄함으로 실패했고, 진동되지 않는 2차 창조는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시기 위하여 주셨는데, 2차 창종에도 인생들이 실패했다.그러므로 주일을 지키는것이 새 계명을 지키는 것인데, 이 주일을 지키지 아니하면 영원한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 새 계명이 아니면 천사의 방언이라도 불탄다.우리가 주일 지키는 것은 거룩하고 복되게 하는 것이니 특별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축복을 주시고 말씀대로 행하는 영감을 우리에게 주신다.

[2]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흙으로 빚어서 만들었으며, 물고기는 왜 물에서 살게 만들었으며, 해와는 왜 아담의 뼈를 뽑아 만들었을까? 이것이 하나님이 만드시는 역사다. 하나님은 만들어 놓으신것을 버리는 것이 없다. 반드시 이용하고 버리신다. 하나님께서 왜 아담은 흙으로 지으면서 해와는 갈비대로 지었을까?  그러므로 하나님은 과거와 현재를 통과 시켜서 미래를 발생 시키는 것이다.그러나 사람들은 과거와 현재를 잘 버리고 그것이 미래에 상관 없을 것으로 생각하여 하나님의 섭리를 어두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인생이 첫째 아담에게 속한자가 아니고는 둘째 아담이 못나온다. 자기의 타락을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못온다.  그러므로 타락한 인생이 언제나 이 타락을 끌고 들어 가야지 제 구원이 된다.  그러므로 시공(時空)을 통하지 않고는 하늘나라의 구원이 없다.인생이 인생 밑천 삼아야한다. 그러므로 자기 행위도 존재도 소유도 자기도 전부가 이대로 법칙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진리다. 이 법칙 떠나는 것은 모두가 다 파괴다. 바울이 언제든지 양쪽을 붙든것이 진리다.  그는 세상에 있고 싶기도하고 벗고 싶기도 한것은 세상을 밑천 삼지 않고는 영원한것이 않되는 이치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자기의 더럽다고 집어 던져 버리면 저는 깨끗해질수가 없다.

[3] 사람이 독처(獨處)하는 것이 조히 못하니 내가 그를 돕는 배필을 주리라는 이 말씀은 부부(夫婦)에서 아내는 남편을 돕기 위한것이 아니면 존재할 필요가 없다

[4] 하나님은 어두움과 빛을 나누었고, 물과 땅을 나누었고, 낮과 밤을 나누었다. 이렇게 구별하여 나누고 새는 공중에서 살아라 고기는 물에서 살아라 명령했다. 하나님이 명령한 그대로 지음 받은것이 살아야지 이것을 어겨서는 살수없다.이와같이 인생에게도 엄명(嚴命)이 있고 엄명중에도 자기에게 엄명한 것이 있다. 자기가 무능하고 고통된것을 안자는 형벌이 경하나 자기를 모르는 자는 형벌이 더 중(重)하다. 하나님은 하후하박이 없으시다. 그러므로 자기 진리 발견하여야 거기서만 능력있고 권위있지, 자기 진리 떠나서는 망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시는 역사와 그분 자체를 항상 우리 자신에 비추어서 알려하니 알수 없는 것이다.

중요점은 하나님은 밑천을 버리지 않고 그 밑천에서 새것을 만드시니, 인생은 끊을려고 해도 하나님은 인생이 영원토록 밑천과 인연을 맺게 하시기 때문에 끊기워 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자기의 범죄도 영원히 영향이 있다. 나쁜게 있든지 좋은게 있든지 반드시있다. 아담의 타락이 인생에게 구원이 된다. 반면에 아담의 타락이 수많은 영혼을 지옥가게 했다. 그러므로 자기가 거짓되니 조물주도 거짓된줄 아는 것으로 죽는다. 그러므로 썩을 것을 생명으로 만드는 것도 있고 생명을 죽이는 것도 있다. 그러므로 썩은것이 좋은 화초를 만들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의 썩은 것을 버리지 말고 밑천 삼아 살아야한다.

2장 (에덴동산)
<1~3> 안식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천지 창조를 마치신 후에 지킨 안식인은 구약교회가 지켰는데 제 7일 안식일로서 지금의 토요일이다. 지금 신약교회가 지키고 있는 주일은 제 8일 안식일인데 천국, 곧 그리스도의 구속의 나라를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지 삼일만에 부활하심으로 건설 완료하셨는데 이날을 안식일로 지킨다.
<4~17> 에덴동산에 대하여
에덴동산은 하나님의 모든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곳이요, 하나님과 의논하여 동산 밖의 모든 것을 통치할 수 있는 위임통치를 시킨 대리 왕국이요, 아담과 하와가 교제할 수 있는 곳인데 지금의 교회다.
그러므로 교회는 하나님과 동거동락할 수 있는 곳이요, 하나님께서 계시는 성전이요, 하나님께서 왕으로 통치하시는 왕국인데 그 요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진리와 구속받은 성도이다. 아담과 하와는 인류시조요, 초대교인이다. 에덴동산에는 세가지 과실나무가 있었다. 일반과실은 하나님의 자연은총이요, 선악과실은 하나님의 율법이요, 생명과실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말한다. 에덴동산에서 나온 네 강은 교회로 말미암아 영원토록 모든 피조물을 소생시키는 하나님의 은총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을 만들어가지고 아담 하와에게 주시면서 '이 동산을 지키고 다스리라'고 말씀하셨다. '동산을 지키고' 다른 것이 동산안에 침입하지 못하도록 방비하고 '동산을 다스리고' 동산을 사용하라고 하셨는데 아담과 하와는 그렇게 하지 못했다. 하나님과 나와의 영교를 끊지 못하도록 지키고 이것을 다스려야 한다. 17절에 보면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하나님께서 금하신 것을 하면 반드시 죽고 하나님께서 하라고 하신 것을 하지 아니하면 영광이 없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신 것을 하면 우리를 살리고 영광스럽게 한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치 아니했으면 우리의 실력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모실 것인데 범죄하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모시게 되었다.
<18~25> 인류시조의 목적과 사명과 생활 방편에 대하여
인류시조는 아담과 하와가 합한 것이 인류시조다. 아담만이 인류시조가 될 수 없다. 아담의 갈비뼈로서 하와를 창조하신 것을 보면 범죄전에는 분식이요. 순간적이다.
① 인류시조의 목적은 돕는 일을 하는 배필로 있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보면 '우리는 그의 만드신바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라고 말씀하셨다. 돕는 일은 선한 일이요. 이 일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기는 일이니 곧 자기를 구원하는 일이다.
② 인류시조의 사명은 하나님의 창조하신 모든 것을 위임 통치하는 것이다. 목적은 자기를 구원하는 것이요. 구원받은 자기로서 할일은 창조해 주신 모든 것을 위임 통치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흙으로 지으신 들짐승과 날짐승의 이름을 아담이 지었는데 하나님의 의사와 아담의 의사가 같았다. 이때는 아담이 하나님과의 연결을 가졌으므로 하나님께서 동하시면 아담이 동하고 하나님께서 정하시면 아담도 정했으니 아담의 이름 지은 것을 만족해 하셨다. 아담이 이름 지은 것은 그들의 생활하는 전부이니 그들의 생활 법칙을 전부 정했다는 말이요. 에베소서 1장 23절에는 '교회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하나님의 충만이라'고 말씀하셨다. 교회로 말미암아 피조물이 존속하고 생존하는 은혜를 피조물에게 입혀주신다.
③ 인류시조의 생활 방편은 둘이 합하여 한몸의 역활을 한다. 24절에 '남자가 부모을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몸을 이룰지로다.'라고 말씀하셨는데 하나님은 이것을 원하신다. 이렇게 해야 실력이 장성해진다. 외로운 가운데 자기를 고치고 장성해진다. 범죄 후에는 혈통으로 동족으로 치우친다. 그래서 진리와 영감으로 정당한 결합을 맺게 하기 위하여 가정에 어떤때에는 불목을 일으킨다. (마태복음 10장 34절~39절)
하나님은 사망 아래의 가정 단합을 없애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통일을 이루시는데 이것을 위하여 먼저 혈통의 단합을 원하시는데 이것이 가정교회요. 온전한 교회의 씨앗이다. 에베소서 5장 2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흠과 주름잡힌 것이 없는 교회를 이루기 위하여 부부제도를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25절에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범죄전에는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았지 자기를 위하고 좋게 하는 것이 없었음을 말씀하신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대로 있고 자기를 위해서 행하는 것(의복이나 거처)은 하나도 없이 하나님만 바라보고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이것을 나타내는 말씀이다.

2:1-7
구약은 외부요 그 하나님은 1차 창조가 끝나는 그 시간 부터 안식하셨다. "안식일"은 편안히 쉬고 노는 날이 아니다. 하나님이 지어 놓으신 만물에게 편안히 살 수 있는 복을 주신 날이다. 그 전에는 만물을 지어만 놓으셨지 편안하케 살 수 있는 복은 안 주셨다. 그래서 창조가 끝나자 당신이 지어 놓으신 만물에게 그 만물이 평안하게 살 수 있는 복을 주신 것이다. "복 주어 거룩하게 했다."고 말씀했다. 제 1차 창조는 물질을 창조 하셨고 주님은 제 1차 창조하신 것을  완전한 것으로 영원한 것으로 창조하는 제 2차 창조를 위해서 오신 것이다. 제 1차 창조의 것을 가지고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하는 완전한 것으로 재 창조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어셨는데 진리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죄가 없어야 하고 완전해야 한다. " 안식일"은 이 날을 받으면 복 받는다는 날이요. "주일"은 주의 것으로 주의 능력으로 주의 지혜대로 영원히 살수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주의 것과 완전히 바꾸었다는 것과 같다. 주의 것으로 바꾸어 살게 하기 위하여 주일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안식일은 외부요. 주일은 내부이니 주일은 복을 받아 그 속에서 주의 것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다.림자. 신약은 내부요 실제다. 이것을 확정해야 한다.


4절에 "여호와"하는 말씀이 처음 나온다. 이 여호와란 말씀은 하나님이 한번 약속한 것이면 기필코 이루어 놓으신다는 약속이행에 신실하신 하나님이라는 말씀이다. 여호와라는 말이 구약에는 많지마는 신약에는 없다. 이는 구약 시대에는 뼈속에 사모치도록 여호와라고 했으니 신약시대에는 그 위에서 살라는 것이다. 구약의 터 위에 신약을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기초면 신약은 집이요. 구약 없이는 신약이 세워지지 아니하고 신약이 없이는 구약이 완전하게 되지 아니한다. 이렇게 신약과 구약이 서로 관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창조하심. "흙으로 사람을 만드시고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고 말씀했다. 여기는 사람과 생령, 이 두가지로 말씀했고 또 생기를 말씀했다. 여기에 "흙으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신 것은 사람의 육을 말한다. 사람의 육은 흙으로 만드신 것이다.
창세기 1:27절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고 하신 것은 사람의 영을 말하는 것이다. 생령은 산영인데 하나님의 생기로 산영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흙으로는 사람의 육체를 만드시고 하나님의 생기로는 하나님의 속성을 받을 수  있는 영의 형체를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생기를 불어 넣기 전에는 육의 활동은 할 수가 있고 영은 활동할 수 없는 사람이였는데 생기를 불어 넣어 이제는 영이 활동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 노릇도 할수 있고 생령노릇도 할 수 있는 것이니 다시 말하면 육의 생활도 할 수가 있고 영의 생활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으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 이 생기가 생령이 된것이 아니다. 이 생령은 산영인데 "생기를 불어 넣었다"고 함은 하나님의 속성들을 받을 수 있는 영에게 생기로서 하나님의 속성들을 느끼고 가질 수 있는 감각을 준 것이다. 피아노 줄을 팅기면 소리가 난다. 줄이 소리가 아니로되 줄이 움직임으로 소리가 나는 것과 같다. 사람의 영이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로되 하나님의 입에서 나온 생기로서 하나님의 속성을 감각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속성을 감각하고 소유하고 또 퍼지게 하는 것이다. "생기"는 입김인데 하나님의 생기요. 하나님의 기운이다. 하나님의 기운은 진리와 영감이요. 사랑이요. 지혜다. 그러므로 진리와 영감과 사랑과 지혜의 힘이다. 즉 하나님의 마음의 힘이다. "불어 넣었으니" 이 말씀은 하나님과 연결을 가졌다는 말이니 성령의 감화를 말한다. 하나님과 연결을 가지고 성령의 감화대로 생활을 하니 생령이 되었는데 죄를 범하니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져서 영이 죽고 사람이 되어져 버렸다. 창세기 6:1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과 생령.이 두면을 가진 것을 말하고 "사람의 딸들은" 사람과 범죄하므로 죽은 영혼을 말한다. 그리고 "육체가 됨이라"고 하신 말씀은 사람 본위가 됨이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생령이된지라" 이 말씀은 산영이 주장하는 생활을 하는 사람이 된지라. 산영대로 사는 생활을 하는자라고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이 생활은 하나님과 연결이 된때에 할수가 있으나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생기가 떠나니 죽은 영이 된다. 생기를 불어 넣기전의 사람은 육은 활동하나 영은 아직 생기를 받지 못하여 살아나지 아니한 영이니 죄가 없는고로 깨끗하다. 이것은 짐승과 같은 육은 활동하나 영은 아직 살아나지 아니했는고로 움직이지 아니하는 사람이다. 이제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살리시니 영이 육을 주장하여 사는 생영이 되었다. 그런데 범죄후의 사람과 생기를 받기 전의 사람은 생기가 없는것이 같지마는 생기를 받기 전의 사람은 깨끗하고 생기를 받고 난 뒤 범죄한 후 생기가 떠난 사람은 죄로인하여 더러워진것이다. 그래서 이 사람을 옛인(人)이라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진리와 영감으로 거듭난 사람은 사람은 새 사람이라고 한다. 이 새 사람은 영원히 범죄할 수 없는 완전한 사람이요, 생령이다. 이 사람을 "성도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노릇할 때도 있고 생령 노릇할 때도 있다.



창세기 2:8-25
  8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동방의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그 지으신 사람을 거기에 두시고"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을 에덴에 두셨다. 여기 사람은 영과 육이 합한 사람으로 생령이된 사람을 말하는데 이 생령이 살곳은 에덴 동산이다. 에덴 동산은 어떤곳인가? 에덴 동산은 생령이 사는곳인데 하나님과 영교하는 장소이니 곧 하나님과 연결하는 그 연결을 말한다.  이 에덴은 형식계시로 보이신것이다. 그러므로 참 사람이 살 곳은 에덴 동산이요, 하나님과의 연결이다.
  9절에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생명 나무와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도 있더라" 에덴 동산에는 세가지 과실이 있었다. 먹을수 있어서 먹으면 양식이 되는 일반 과실과 먹으면 죽는 선악 과실과 먹으면 영생하는 생명 과실이 있었다.
①. 일반 과실은 생명을 유지하고 계속하게 하는 양식이다. 이는 하나님의 교훈과 지도와 영감과 계약으로 하나님의 자연 은총과 특수 은총이다. 이것을 먹으라고 했으니 안 먹으면 이미 있는 생명은 유지하지 목하고 계속하지 못한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해야한다. 이것이 우리의 양식, 사는 것이다.
②. 선악과는 먹으면 죽는다. 이 과실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이요, 행동이요, 사역들이다. 먹으면 죽는것과 같이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을 하면 죽는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사랑도 하면 죽고,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는 미움도 가지면 죽고, 하나님이 품지 말라고 하는 소원과 욕심을 품으면 죽고, 하지 말라는 재물을 취하면 죽고, 하나님이 취하지 말라는 지위를 취하면 죽고, 하나님이 가지지 말라고 하는 자유를 가지면 죽고, 하나님이 사귀지 말라고 하는 사람과 사귀면 죽고, 하나님이 가지 말라고 하는 곳에 가면 죽는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금하시는 것이 선악과 인데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을 하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그러면 죽고 망한다.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은 하지 말아야 한다.
  ③. 생명과는 먹으면 영생한다. 이 과실을 먹을 수 있는 것은 일반 과실은 먹    고,선악과는 안 먹으면 된다. 여기 생명과는 예수님을 말하는데 우리는 먹었    다. 일반 과실을 먹는 일 곧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일을 예수님이 대신했고,     선악과 먹은 죄를 예수님이 친히 담당하여 형벌받아(대형, 대행) 우리에게 사    죄와 칭의를 주시고 예수님의 부활로 중생을 주셨는고로, 다시 말하면 십자가    의 공로로 생명과 인 영생이 우리에게 왔다.
  14절에 여기에서  흐르는 네 강이 전세계를 적셨다. 우리에게 신령한 구원을 보여주기 위하여 형식 계시를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만물을 살리는 생수가 에덴에서 발원했다. 그러면 에덴은 어떤 위치인가? 생수를 펼쳐주는 위치인데 성도들이 살 위치이다. 하나님과 결합된 위치이다. 하나님과 결합된 생활을 하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들이 영육으로 복을 받는다. 지금 세계가 유지하는 것도 예수님의 구속의 은총으로 인함이다. 계5:5절에 "안팍으로 가득 쓴 책"은 세계 역사를 말한다. "어린 양"이신 예수님이 이 책을 펴거나, 보시거나,하시는 것이다. 범조로 인하여 세계 역사가 중단된 것인데 예수님의 대속으로 역사가 계속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지 아니했으면 인류 역사는 4000년이 끝인데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서 인류 역사가 연장 되었으니 이제 예수님의 구속이 끝나면 인류 역사는 종말이요, 죄는 깨어지고 만물은 새롭게 된다. 그러므로 한 사람이 하나님과 연결 생활을 하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가정도 유지되고 교회도 유지되고 사회도 국가도 세계도 유지된다. 모든 책임은 우리에게 있다.
  15-17절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에덴 동산을 주신 것은 이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게 하기 위함이다. 사람을 이 에덴 동산으로 이끄신 것은 하나님이신데 오늘 우리게게 연결을 주신이는 하나님이시다. 우리의 결심으로 된 것이 아니다. 우리의 힘이나, 지식이나 돈으로 된것이 아니다. 이 에덴 동산에서 할일이 무엇인가?
①. 에덴 동산을 다스린다. 다스리는 것은 하나님과의 연결을 이리 저리 써 먹는 것이다. 연결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이면 다 하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면서 정치도 하고, 사업도 하고, 공부도 하고, 가정도 이루고, 지위와 권세도 가지라는 말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명령하신 것을 "할수가 없다."고 하면서 안할것이 아니라 해야한다. 이렇게 연결을 사용하면 여기서 흘러 내리는 모든 은혜가 나와 내게 속한 모든 사람과 모든 만물에게 까지 퍼진다. 이렇게 자기의 에덴 동산이 각각있ㅇ니 자기가 잘 다스려야 한다. 이 어덴 동산을 다스리지 못하면 자기와 자기엥게 속한 것이 다 망한다.
②. 에덴 동산을 지킨다. 지키라고 하신 것을 보면 빼앗을려고 하는 것이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는 빼앗으려고 하는 세력이 잇으니 빼앗기지 말라고 하는 말씀이다. 이 연결을 어떤 것에게도 빼앗기지 말고 계속하면 여기서 흘러내리는 은혜로 계속한 모든 사람과 나를 살리고 복을 내린다. 이 연결을 빼앗겨서 계속하지 못하면 망한다.
③. 일반 과실은 먹어야 한다. 먹으라는 과실은 먹어야 한다. 하나님이 하라고 허락하신 것을 해야 우리의 생명이 계속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것이면 하나님의 말씀에게 순종하는 것이면 다 해야한다.
④. 선악과는 먹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금하시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동산에서 할 일이다.
그러므로 산영은 에덴 동산에서 만 살고 하나님과의 연결에서만 살고, 에덴 동산은 피조물 중에서 제일 복된 곳이요, 만복의 근원이요, 여기서 하는 일은 영원하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에덴 동산 생활. 한 사람의 하나님과의 연결 생활로 말미암아 그 한 사람과 그 사람에게 속한 모든 사람과 만물이 복을 받는다.




18절에 여기 "독처"하는 것은 독신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세상에서 자기 환자서 처세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돕는 배필은, 부부간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도와사는 사람을 말한다. 사람은 서로 돕고 살도록 지음 받았다.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한 이상 사람을 지으신 것은 서로 돕기 위함이다. 남편은 아내를 위하고, 아내는 남편을 위하는 것으로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서로 돕고 위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렇게 서로 돕기 위하여 한 사람 이상 사람을 창조하신 것이다. 혼자있어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지마는 사람을 만드신 것은 서로 돕기 위함이다. 서로 돕는 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천직이다. 그러므로 먼저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사람이 서로 돕는 것이다. 정치가는 정치자로서, 사업가는 사업자로서, 학자는 학문으로서, 농업가는 농업으로서, 사람을 돕는 목적과 생활 방편으로 삼아야 한다. 가정을 이루는 것도, 직장을 가지는 것도, 사람을 고용하는 것도 사람을 돕는 방편으로 해야 한다. 자기를 유익되게 하기 위하여 자기를 좋게 할기 위햐여 직장을 가지고 사업을 하고 사람을 돕는다고 하면 죄다. 직분  은 자기의 일거리요 사업이니 노력이 있어야하고, 이 노력은 소득을 가지고 온다. 그러므로 첫째 수입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에서 오고, 둘째 수입은 사람을 돕는 일에서 가지고 온다. 여기서 얻어진 것이 아니면 다시 말해서 자기롤 좋게 하고 위는데서 얻어진 것은 세계를 얻는다고 해도 헛것이요, 일생동안 한 일이 헛일이요, 속고 속인자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않는 자를 엄수히 여겨야 한다. 시15:4절에 "그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한다"고 했다. 엄수히 여길자를 엄수히 여기고 존대할 자를 존대해야 한다. 서로 돕기 위해서 사람을 창조했으니 사람을 만나면 내가 그 사람에게 무엇을 도와 주어야 할 것인지 이것을 생각해야한다. 사람을 돕는 방편으로 정치를 하고, 교육을 하고, 가정을 이루고, 직장에서 일을 해야 한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녀를, 자녀는 부모를, 여자는 남자를, 남자는 여자를 서로 도와야 하고, 이웃은 이웃을 도와야 하고, 동양인은 동양사람안 도울 것이 아니고, 서양사람도 도와야 한다. 남을 도울수 없는 병신을 제하고는 남을 도울수 있는 몸을 가졌는데 남의 도움을 받는 것은 기생충이니 이 사람은 가련한 자이다. 이렇게 한 사람 이상을 만드신 것은 서로 돕는 일을 하기 위함이니 이 심령에서 일을 해야 하고, 이렇게 하면 복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위하고, 다음에는 사람을 위해야 한다.
19-20절에 아담이 한 일은 하나님이 하시고져 하신 일이라 아담이 말하는대로 되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통하여 당신의 뜻을 나타내었다. 아담의 손과 입과 몸이 하나님의 손과 입과 몸과 같았다. 아담이 에덴 동산에서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고 일반 과실을 먹고, 선악과를 먹지 않을때에는 하나님과 연결된 위치에서 살때 이 연결이 뻗치는 범위는 만물에게 까지 뻗쳐서 하나님이 아담을 통하여 일하시고 아담은 하나님께 받아 일을 하니 만물은 복종했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맞게 살면 그 맞은 증거가 사람과 만물 사이에 나타난다. 내가 하는 일에 하나님의 권능이 나타나는거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는거 이것을 경험할 것이다. 농업을 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일진데 농업을 통하여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 주신다. 만일에 농업으로 안보이시면 다른 면으로 보이신다.
예를 들면 주일을 지키다가 벼를 심지 못하여  굶게 되었을때 다른 것을 통하여 먹이시면 "하나님이 과연 계시구나"할 것이다. 하나님이 계심을 보여 주실때 하는 일이 형통케 하는 것으로 하나님을 보이시는데 이것은 불신자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이요. 역경을 통하여 보이시는 것은 성도들에게 보이시기 위함이다. 아담이 하나님과 밀접하니 하나님의 능력이 아담을 통하여 일을 하시니 하나님이 하시는데 아담이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아담이 하나님의 몸과 같이 쓰여지니 모든 만물이 복종하였다. 아담이 명한대로 이름이 되었으니 지금까지 변하지 아니했다. 이렇게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하여 한 일은 영원히 변치 않고 또 만물은 그에게 복종한다.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1-22절에 사람은 사람에게서 나왔다. 다른데서 나온 것이 아니고 사람에게서 사람이 나온다. 예수님도 사람에게서 나왔다. 그러나 동정녀에게서 성령으로 탄생했으니 죄가 없다. "뼈 중에 뼈요. 살중에 살이로다."천하 인간이 한살에서 한뼈에서 나왔으니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잉요 다른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자기를 미워하는 하는 것이요 다른 사람을 해하는 것이 자기를 해하는 것이다
3:24절에 결혼하면 가정단위로 사는것이 성경적이다. 그리고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것도 성경적이다. 아내의 부모도 공경하는 것이 성경적이다. 그러나 순서적으로는 남편의 부모가 먼저요. 아내의 부모는 나중이다. 만일에 아들이 삼형제이면 동일하게 부모를 섬겨야 한다. 장남만 부모를 섬기라는 법은 없다. 경제적으로 풍부한 자가 순서적으로 앞서야 한다. 그러면 독신자들은 어떻게 할것인가? 부모와 같이 있어서 부모를 섬기는 것이 유익하면 있을것이요. 따로 있어서 부모를 섬기는 것이 유식하면 따로 있을것이다. 이는 방편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므로 효도는 하나님과 사람앞에서 인격자가 되는 것이요 부모님의 근심을 없애는 신체 건강이요. 부모님을 기쁘시게 하는 대접이요. 물질을 많이 가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사회 성과 윤리성을 지키고 규범과 법과 예의를 지키는 것이요. 이것들을 초월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법을 먼저 지켜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예의와 체면을 지켜야하고 더 나아가서는 사람의 정을 지켜야 하고 더 나아가서는 도덕에서 살아야하고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을 섬기는 종교에서 살아야 한다. 법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면서 종교에서 살려고 하는 것은 월권이다. 그러므로 비판과 평가를 바로 해야 한다. 편벽과 월권은 자타를 해친다. 그리스도인의 걸음은 초월적이다.
25절에 이들이 벌거 벗었는데 왜 부끄럽지 아니했나? 하나님과 자기네 사이도 아담과 해아 사이에도 부끄럽지 아니했고 미안하지 아니했다. 하난미의 뜻대로 사니 양심에 부끄럽지 아니했고 미안한 것이 없었고 자기네가 도우니 자기 네 사이에 미안하거나 꺼리끼거나 부끄러운 것이 없다. 그래서 자기 몸에 대하여 이런가 저런가 생각이 없고 관심이 없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하여 양심에 부끄러운 것이나 꺼리끼는 것이나 미안한 것이 없는 입장에서 사는 사람이 평안하고 하나님과 사람이 보호하여 주니 안전하다.
그러나 양심에 꺼리끼는 것 만큼 걱정이요. 양심에 부끄럽고 미안한 것이 있는 것 만큼 근심이요. 염려고 두려움이 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 할 것은 하님이 한 사람이상 창조하신 것은 서로 돕는 일을 하기 위하여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사람을 돕는 일을 하기 위하여 창조하신 것이요.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인류는 한살, 한뼈에서 갈라져서 나온 하나다. 그러므로 남을 사랑하는 것이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요. 남을 미워 하는 것이 자기를 미워하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서 그 뜻에 맞으면 하나님은 그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시는데 하나님이 그 사람을 통하여 하신 일은 영원히 변치 아니하고 모든 만물은 그 사람에게 영원히 복종한다. 우리 그리스도 인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사회성과 윤리성을 가져야 한다. 글러므로 그리스도 인은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하여 양심에 가책 받을 것이 없는 것 만큼 자기에게는 평안이요. 하나님과 사람에게 대하여 양심에 가책이 있는 것 만큼 염려요. 두려하게 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고난과 평안의 책임은 자기에게 있다.

2:18, 1:20-25
창세기 2장 18절에 여기 하나님이 "돕는 배필을" 만드신 것은 하와가 아담을 위하고 도우고 아담은 하와에게 도움을 받으라고 지은 것이 아니다. 아담에게 돕는 일꺼리를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의 효과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다.  진리를 명상하여 성인, 성녀가 된다. 여기에 나타난 효험은 자기에게 있는 것이다. 은혜를 받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이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전해 주시는 것이 문제다. 또 모든 만물에게도 전해 주는 것이 문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했는데 사람을 위하는 것이 되어지면 이것이 그리스도교의 선이요. 진히다. 그런데 하나님을 위하는 일을 했는데 사람을 위하는 것이 안 되었으면 이는 죄요. 불건전한 신비주의요. 또 하나님을 위하지 사람을 위하는 것이 되어졌으면 이것도 죄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요. 도덕주의다. 이렇게 사람을 돕는 것이 천직이다. "배필을 정하신 것"은 자기만 위하고 자기만  좋게 하라고 정하신 것이 아니다. 서로 돕는 일을 하라고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자기만 위하는 사람 밑에는 자기만 위하는 사람이 나오고 남을 위하는 사람 밑에는 남을 위하는 사람이 나온다. 이렇게 하나님이 "돕는 배필"로 만들어 놓으셨기 때문에 인생은 어쨌든지 돕고 가는 것이다. 자기 자신이 원함으로 돕고 가는 사람은 영원히 영광스러울 것이요. 돕는 일에 이용만 당하고 가는 사람은 영원히 불행스럽게 될 것이다. 자원하므로 돕고 가는 사람은 축복의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갈 것이요. 돕는 일에 있어서 억지로 이용만 당하고 가는 사람은 멸망시키는 하나님으로 증거하고 갈 것이다.
창세기 1장 20-5절에 하나님이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시고 땅에게 "식물과 동물을 내라" 바다에게 "생물을 내라"고 하실때에 땅과 바다가 순종하니 이것들이 감당하지 못할 일을 했다.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시기에 순종하니 그대로 되었고 영광스러워졌고 지금까지 변하지 않고 계속하고 있다. 순종하여 된 것은 자기 것이 되었고 또 가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명령 하실때에 그대로 행하니 그대로 되었고 그대로 된 것은 자기 것이 되었고 자기 것이 된 것은 영광이 되었다. 땅과 바다는 인격체가 아니고 물체인고로 자유성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명령에 거역함이 없고 순종이요, 순종하여 만들어진 것이 자기것 되었지마는 이것을 하나님이 사용하는 것처럼 사용하지 못하고 물건을 그릇에 담아 두는 것 같이 보관만 하고 있지마는 사람은 인격체요, 자유성이 있기 때문에 하고자 하는 사람도 있고 하기 싫어 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고자하여 순종하면 순종하여 만들어진 것은 자기 것이 되는 것이며 이것을 하나님이 사용하시는 것처럼 사용할 수가 있으니 이것이 사람과 만물이 다른 것이다. 이렇게 순종하는 시기에 순종하니 상상도 못할 일을 하나님이 시키는 것이다. 지금은 전 땅과 바다가 힘을 합해서 무엇하나를 만들어 보겠다고 노력해도 털 끝 만한 것도 만들지 못한다.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는 "그 시기"에 순종하면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상상도 못할 위대한 것을 만드는 것이다. 오늘 이 세상에 있을 때에 순종해야 한다. 이 세상은 "시기"이니 이 세상을 떠나면 시기가 지난 것이니 힘써도 되지 아니한다. 하나님께서 땅과 바다에게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고 하시는 명령이 다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한 밑천과 터를 가지고 영원히 퍼지는 것이요. 점점 충만해지는 것이다. 이 시기가 중요한 것과 이 시기에는 하면 못할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에게 고장이 생기는 것은 자유성에서 고장이 생기는 것이다. 사람에게 고장이 난 것을 고칠려고 하면 자유성을 고쳐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시기가 중요한 것을 알고 시기를 놓치지 아니 하도록 해야 ㅎ나다. 시기를 놓치면 헛일이다. 하나님이 일하시고자 하는 시기가 오늘이니 이 오늘을 잃지 말 것이다. 이 시기는 만능의 시기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이 시기에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이 일을 하시니 오늘은 성도의 만능의 시기다. 이 시기에 순종하므로 만들어진 것은 영원히 자기 것이요. 자기의 영광이요. 자기의 일꺼리다. 사람은 서로 돕는 배필로 정했으니 돕는 일을 자원적으로 할 것인지 억지로 할 것인지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창세기 3:1-24

[1] 사망이 어떻게 들어 왔는가?  사망이 들어 온것은 사람이 조심하지 않은데서 들어왔다. 조심하지 않아서 배암의 말을 사람의 말과 동등으로 여긴것이 죽음의 시발이다. 오늘도 우리가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할려면 우리에게 알리는 그것이 참사람의 들을 만한 것인지 참사람에게서 나온것인지 참사람에게 알리는 것인지 이것을 구별 못하면 헛일이다.그 믿는것을 막사리로 믿으면 않된다. 교회 망치는것은 교회 일을 많이 하는 자가 망친다. 그다음은 강단을 치고 열심내어 설교하는 자가 망친다. 참 선한일은 하나님의 뜻에 들어 맞는 일이어야 한다.참 사람은 하나님 보시기에 인증할수 있는 데로 돌아가면 그사람은 하나님이 인증하신다. 하나님이 인증하시면 하나님이 그에게 바른길을 주신다. 그러므로 사이비한 다수가 인정하는데서 결국 대립되는 일이 있으니, 선지자가 과격한자는 죽임을 당했고 신약시대에도 죽임을 당한 선지자가 많다.사도행전21:10에도 선지자가 있다. 큰선지자는 죽은 후에 인정을 받고 작은 선지자는 배척 받은 후에 생전에 인정받는다.이것은 하나님이 알려 주기 전에는 모른다. 기독교는 열심을 낸다고 귀한것이 아니고 혹 생명을 내어놓는 결사적인 것도 귀하지않다 . 그 안에는 가증하여 이기주의와 공명욕일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깨닫는 것이 제일 귀하다. 중생되지 않은 자는 본질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악을 계속해도 악인지 모른다.  악인줄 알면 그 속에서 그만 두겠다는 것이 판단되고 아니라는 것이 판단되면 아니하게 된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신앙은 깨닫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로마서 10;에 전파하지 않으면 어찌 들으며 듣지 않으면 어찌 믿으리요하였다.
그러므로 인류의 죽음의 시작이 어디서 왔는가?  해와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원형인 하나님께 돌아가는 것이 생명이요 능력이요 지혜인데 이러한 자기인 것을 잊어 버리고 뱀과 자기를 동등으로 알았다. 인간은 삼위 하나님이 의논해서 지었고 또 하나님의 형상대로지었고 만물을 지배할수 있는 자로 지었으나 주의 하지 않아서 뱀의 말을 구별하여 듣지 아니하였기 때문에 그 지위에서 떨어 졌다. 우리 신약시대의 실패는 조심하지 않는데서 시작됐다. 조심하는 것은 구별인데 뱀의 말을 사람의 말 같이 생각하는데서 구별을 버렸다. 성도가 구별하지 않으면 성도의 지위에서 떠난 것이다.마귀의 말은 진실이 없고 참말과 거짓말이 섞여있다. 여기서 먹지 말라는 말은 참말이지만 모든 나무라는 것은 거짓말이다. 그러므로 악령이 미혹 할때는 반거짓말로 미혹한다. 짐승 또는 심지어 곤충을 통해서도 미혹한다. 반거짓말을하게되면 거기서 온거짓말을 하게되다. 벌써 해와는 반거짓말을 했다. 이제는 하나님이 자기를 주장하지 못하고 악령이 자기를 주장하게 됐다.  이러니 인간 정욕이 나와서 먹으면 죽는 선악과가 먹음직 보암직하게 여겨졌다.이러니 선악과를 먹지 않을수 없게 되어 먹음으로 범죄하게 되어 인간의 본 지위에서 떨어졌고 하나님을 배반하게 되었다. 오늘도 그 때와 같이 죄는 성경원리를 보면 약자로 부터 강한자에게 온다. 그러므로 네 집안 식구가 원수라 했다. 주님에게도 가장 가까운 베드로가 마귀 노릇을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한자로부터 마귀가 오는 것을 기억하고 가장 자기와 가까운 자를 조심해야한다.그러나 사람들은 가까우면 도리어 주의하지 않는다.그러므로 실패는 가까운 데서 온다.

10절에[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고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내가 벗었다는 것은 자기의 위험성을 말하고 자기를 염려하여 두려워하여 자기를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숨은 것이다. 신약 시대에는 자기가 자기 위하는 것 전부가 죄다. 하나님만 위하고 하나님만 소망하는 그 외에는 아무것도 할수없다.거기서 이탈되면 자기 염려를 가지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굴복하여 겸손하면 모든 염려는 없어진다.  10절의 말씀을 잘 기억하여 앞으로 환난이 올때에  염려 없을라면 자기에 대한 걱정이 없어야 되고, 자기를 책임 지지 않을려면 자기를 돌아 보지 않아야한다.우리에게 자기것은 없다. 자기의 마음을 하나님께 다기울여서 자기에 대한 염려도 불행도 생각할수 없어야한다. 그리하면 하나님은 자기에게 마음을 다 기울이고 자기는 하나님께 다 기울이나니 그러면 사람이 할수 없는 것은 하나님이 해주신다.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내가 있는 것이니 내 모든것을 바로 쓰지 못하면 두려움이 있다.이몸도 하나님을 위하여 쓰면 하나님의 능력이 내것 된다.그러므로 내힘을 남겨두고 다 쓰지 아니하면 두려움이 있다. 그러므로 바로 깨달아 조심해서 구별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데 이때 가까운자를 조심해야 한다. 이유는 가까운 자를 마귀가 이용하기 때문이다.
*내게 있는 것 주께 기울이지 않으면 내게서 망치고, 마음을 주께 기울이지 않으면 두려움이 오고, 몸을 주께 기울이지 않으면 무능한자 되고, 소유를 주께 기울이지 않으면 영원히 도적 맞는다.

      창세기 3:22-24
[1]   사람들이 어디서 어두워지고 실패를 취하게 되는가 하면, 전체에 속한 부분인 個體自己라는 것을 잊어 버리고, 전체와 관련없는 個體로, 전부와 관련없는 부분으로 모든것을 욕망하기 때문에 거기서 부터 하나가 갈라져서 둘이 되는 것이다.둘 다 존재할수 있는 것 같으나 그것은 시간 문제요 결국은 하나가 되고만다.그 이유는 갈라진 양세력은 투쟁하는 능력을 가졌기 때문에 종말은 하나가 된다. 그러므로 그 종말을 보기전에는 하나가 나뉘어져서 둘이 된것이 있을수 있는 것 같이 보여진다.
그러면 하나로 하나되는것과  하나가 둘이 되었다가 하나되는 차이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하나로 하나되는 것은 하나가 점점 자라서 하나되는 것이고, 둘이 되었다가 하나되는 것은 둘이 싸워서 하나가 깨어져서 하나되는 것이다.이것은 결과는 앞에  것과 같지만 손해가 많다. 원체(原體)와 대립되는 것은 깨진다. 두 세력이 있으면 반드시 싸움이 있다. 힘과 힘이 싸우면 약한 힘은 강한 힘에게 파멸당한다. 이 진리를 우리는 알아야한다.
모든 존재는 근본이 둘인가 하나인가? 천하에 보이는 모든 존재는 근본이 하나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는 一元論을 주장하고, 이종교에서는 多元論을 주장한다. 기독교안에 二元論을 주장하는 자도 있다.그러나 基督敎는 一元論이다. 모든 존재는 하나님 한분으로 말미암아 생겨졌다. 그러므로 개체인 자기는 전체에 속한 자요 그러므로 전체에게 유익을 입혀야하는데 자기 개체만 생각하니 그 순서가 잘못되어 거기서 어두움이 온다.그러므로 전체가 중심이 되지않고 개체가 중심이 되면 개체의 욕망과 계획으로 전체와 분리되어 싸우게 되는 것이다. 전체와 개체가 싸우면 개체는 약하여진다.전부에게 속한 부분은 전부보다 적은 줄알아야하고 그 부분의 힘은 전부에 있다. 그러므로 전부에서 떨어지면 자기는 아무것도 아니다. 부분은 전부를 위해 있는 것이니 부분의 영광이 전부의 영광이 되고, 전부의 영광은 부분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부분은 전부 보다 약한줄 알아야 하고 부분의 힘은 전부에 있다.그 부분의 영광도 전부에게있고 부분의 영광은 전부의 영광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선악을 아는것이  우리중 하나 같이 되었으니] 이말은 하나님이 피조물인 사람에게 할수 있으나 사람이 하나님에게 대하여는 될수 없는 말이다.
그러면 아담이 아는 선은 무었이며 악은 무었일까?
선은 하나님만 위할줄 아는것이요, 악은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이다.인간이 God 볼줄아는 것이 선이요 타율이요,자기가 자기를 아는것이 악이요 자율이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위하는 것은 전체를 위하는 것이요, 피조물이 자기가 자기를 위하는 것은 개체를 위하는 것이다.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전부의 속한 부분이니 전체인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지면 약하여 지고 죽는다.전부와 떨어지면 자기는 아무것도 않된다.그러므로 하나님을 위하는 것이 나를 위하는 것이니, 하나님의 전체주의는 살리는 것이요, 자기의 개체주의는 자기를 멸하는 것이다. 전체주의, 개체주의는 다 이단이다. 우리는 전체를 위한 개체요, 전체는 개체를 온전케 하기위해 있는 전체인고로, 전체와 나 개체가 결합되어 있는것이 우리 기독교이다.

[2]  [선악을 아는 것이 우리중 하나 같이 되었다] 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를 위할줄 아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기 중심으로 자기를 위하는 것이 전부를 위하는 것이 되지만 피조물은 자기중심으로 살면 전체와 대립되어 전체에게 개체가 깨어진다..

*****
죄의 대소에 따라 징계가 다르다. 여: 안에 징계--해산수고, 남자를 사모
                                남: 박에 징계--등골에 땀이 흘러야 되도록
범죄 전에는 아담과 해와가 동등이었으나 범죄 이후는 해와가 아담에게 속함
범죄한 자에게 평안 부요 시간 주면 더 죄를 범한다
동산에서 쫓아 내신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요 선물이다
이제 부터 하나님이 죄를 친히 부담하시는 것이다.(예수님의 대속)


3장 (타락)
④ <1~6> 인류시조의 타락 순서
뱀이 에덴동산에 들어오게 된 것은 에덴동산을 지키지 않고 다스리지 아니한 연고다. 에덴동산을 다스리라는 것은 하나님께 피동되는 것인데 하나님의 지시대로 행하지 아니했으니 자연히 뱀이 들어온 것이다. 지금도 그러하다.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죄가 들어온다. 여기에 뱀은 마귀를 상징한다. 에덴동산에 들어온 뱀은 하와를 먼저 유혹했다. 이와같이 마귀는 항상 사람의 약점을 잡고 유혹한다. 뱀이 하와에게 말을 한 것 보면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인간을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했다. 마귀는 언제나 사람을 중심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이용한다. 사람은 진리를 위해서 있고 진리는 하나님을 위해서 있다. 진리가 사람을 위해서 있다고 하면 인본주의다. 뱀은 언제든지 사람을 중심하고 위해서 하나님도 진리도 이용하게 한다. 이것이 뱀의 술책이다. 타락이 눈으로, 귀로 들어와서 이성에 한번머물 때에 벌써 죄악이 되었다. 하와는 영과 육이 합하여 된 사람인데 죄악이 육으로 부터와서 육이 범죄하므로 영육이 함께 죽었다. 아담은 하와를 통솔하지 못한 여기서 자기도 죽었다.
⑤ <7~24> 타락의 결과
타락전에는 하나님만 보던 자가 자기를 보고 자기만 생각하고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으니 이것이 자기 양심에서 울어난 것이요. 이것이 타락한 인격이요.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를 위하고 염려하고 자기를 생각하는 것은 타락한 부패성이요. 타락한 본능이다. 여기서 한가지 주의할 것은 자기가 자기를 염려치 아니해도 염려없는 사람이 된 후에 염려하지 아니해야지 지나치면 죄악이요. 자기에게 아무 해도 오지 않게한 후에 정직한 자가 정직한 자다. 다음은 자기의 책임을 잊어버리고 책임을 전가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이는 이미 자기가 죽었다는 증거요. 하나님과 사람과 모든 피조물과 원수되어서 대립이 되었다. 범죄전에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하나님께 받은 선물은 평안과 즐거움이요. 범죄후에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나서 하나님께 받은 선물은 수고와 고생이니 이것은 범죄자에게 합당한 하나님의 사랑이요. 선물이다.


3: 1-11
1절에 "여호와"라고 하실 때에는 "내가 계약을 세워 놓고 이 계약대로 실행한다." 고 선포 하신 말씀이다. "뱀이 간교하더라" 이 뱀이 처음부터 간교한 것이 아니다. 우주 밖에 영계에 있던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간교하게 된 것이다. "간교하더라"고 하신 말씀은 마귀의 유혹을 받기 쉽게 만들어 졌다는 말씀이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살마을 지으실 때에 어떤 사람은 마귀의 시럼을 잘 받는 자로 지어셨고 어떤 살마은 마귀의 시험을 잘 이기는 자로 만들어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알맞게 하나님이 계획하시는 일에 알맞게 사람을 지어 놓어셨기 때문에 자기가 잘났다고 자랑할 것도 없고 자기가 못났다고 원망하거나 낙심할 것도 없다. 원망하고 불평을 품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하심에 대항하는 것이요. 반대하는 것이니 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성신의 감동을 잘 받는 자로, 어떤 사람은 잘 받지 않는 자로 만들었으니 자기가 이미되어 있는 것 가지고 힘써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형형색색으로 지어 주신 것을 변개 시킬려고 하지 말고 지음 받은 것을 가지고 힘써 자기를 만들 것이다. 선천적으로 받은 성질을 잘 살려서 자기를 만들어야 한다. 우리 속에서 늘 역사하시는 성신의 기도 하심을 따라 행할 것이다. (요일 2:27)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뱀이 에덴 동산에 들어와서 하와에게 첫째로 입을 연것이 "하나님이"이라고 했다. 이 뱀이 창조주 하나님을 말한 것이 선하고 옳은 말이다. 그러나 이 선하고 옳은 말을 한 것은 하나님을 위하고 하와에게 유익을 주기 위함이 아니고 뱀이 목적한바를 이루어 하와를 해치기 위함인 것이다. 이제는 한층 더 들어가서 "참으로"라고 했다. 참을 말했으니 참은 진리다. 이 진리를 말했으니 얼마나 좋고 옳은 말인가! 이렇게 최고의 선을 말했지마는 동기와 목적과 적응이 악이다. 이것이 마귀의 고등술책이다. "하나님이 참으로" 해서 그 상대되는 악과 거짓을 조장하여 하와에게서 악과 거짓이 스스로 생겨나게 하는 심리작용을 이용한 것이니 이 지능을 하와가 당해 내지 못한다. 뱀이 참을 말할 때에 벌써 하와속에는 거짓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이 고등 술책에 넘어간 것이다. 선을 주장하면서 악을 조장하고 참을 주장하면서 거짓을 조장하는 것이다. 그 사람에게 일을 하라고 하면서 일을 못하게 하고 (조장하고) 그 사람을 위하면서 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은 자기를 위하는 것만 알기 때문에 다 실패하는 것이다. 위하기는 주먹만큼 하고 해치기는 큰 뭉치만치 하는데 이것을 잘못 알아서 실패한다. 주먹만치 위하는 이것만 보다 실패한다. 이렇게 하나님이 창조하신 우주를 깨뜨리고 이 우주를 지배 할려고 "하나님이 참으로"하는 이 동기와 목적과 적응을 몰랐다. 옛날에 서고 사람들이 아라비아에 가소 빵 한개로 금 한깨씩 바꾸어 왔다. 이 아라비아 사람들은 빵은 우선 먹는 것이기 때문에 빵을 주면 좋아하면서 빵 하나에 금 한개씩 주었다. 금을 이용하며 많은 빵을 구입 할 줄도 모르고 우선 먹는 것이 좋기 때문에 이렇게 교환한 것이였다. "너희더러 모든 동산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기에 "동산"도 "나무의 실과"도 맞은 말이다. 그런데 2:16절에 보면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라고 했는데 여기서 뱀은 "각종"이라는 말 대신에 사이비한 "모든"이라는 말로 살짝 바꾸어 놓은 것이다. 이렇게 처음과 마지막은 맞추어 놓고 중간을 살짝 사이비한 것으로 바꾸어 놓았다. 이것이 마귀의 술책이다. 그러므로 말을 들을 때에 전멱적으로 관련시켜서 들어야지 일면만 치우치면 마귀에게 넘어간다. "먹지말라 하시더냐" 여기서 또 살짝돌려 보렸다. (2:17절에 보면 "먹지 말라"고 했는데 여기서는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고 살짝돌려 버렸다. 마귀의 술책은 이렇다.)
처음에는 선을 말해 가지고 악을 조장하고 하나님을 내세워 가지고 하나님을 배반케 하는 것이다. 이 말을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할 것이다."하는 심리적작용을 이용하니 하와가 당할 도리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사람의 독한 혀가 제일 무섭다. 약 3:6절에 "혀는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제일적은 것이로되 전신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살으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고 했다. 그러므로 내가 이런 해독을 안 받아야 하고 또 이런 해독을 주어서는 안된다. 이렇게 뱀이 처음에는 얼마나 큰 선을 말하고 참을 말했지마는 꼬리에서 끝에서 살짝돌려 버렸다. "먹지 말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이 말씀하셨지마는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선악과에 한해서 하신 말씀이다. 그런데 이 참말을 붙여서 안되는 다른데다가 사이비하게 가만히 붙인 것이다. 이 말과 저 말의 연결을 비뚤어지게 했다. 붙여서는 안될 곳에 붙인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가 유혹하는 방편은
①. 최고의 선과 참과 옳은 것을 말하면서도 그 동기와 목적과 적응이 악이다. 사람은 결과를 중히 여긴다. 동기를 모르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를 중히 여기는 것이다. 동기가 나빳을찌라도 어떻게 환경을 통과하고 사람으로 말미암아서 결과가 좋으면 선으로 인정하나 하나님은 결과 보다 동기를 중하게 보신다. 선한 동기에서 나왔는데 악이 되면 선의 결과를 맺게 하신다.
②. 선을 말해서 그 상대방에게 선과 상대되는 악이 스스로 생겨지도록 심리 작용을 일으킨다. 선을 말해서 악이 나오게 한다.
③.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를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로 처음에 마지막위와 아래는 바른 말을 하고 중간에 "각종"을 "모든"으로 사이비한 것으로 살짝 바꾸어 놓는다.
④. "먹지 말라 하시더냐" 먹지 말라고 하신 것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이고 참말인데 이 말씀을 안 붙일 곳에 붙였다.
이렇게 고등술책을 가진 마귀와 상대하여 맞서면 패전한다. 여기서 하와가 이기는 방편은 동산을 다스리라고 했으니 다스리면 된다. 하난미과 연결을 써서 잘 구별하면 된다. 뱀이 못들어 올 곳에 들어 왔으니 "왜 들어 왔느냐"고 하면서 정죄하여 쫓으면 된다. 그런데 다스리지 못했다. 써먹지 아니 했는고로 구별치 아니했는고로 뱀을 용납했다. 그래서 뱀과 동격이 되었다. 뱀이 승격한 것이 아니고 하와가 떨어졌다. 또 동산을 지키라고 했으니 지키면 된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빼앗기지 않고 계속하므로 이기는 것이다. 그런데 먼저 다스리지 못했는고로 지키지도 못했다. 또 일반과실 곧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것은 하고 선악과 곧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은 안 하는 것으로 이긴다. 하나님과의 결합이 바로 되었는지 안되었는지 이것을 구별하고 또 연결되었다고 해도 지나치게 연결되면 불건전한 신비주의요 또 정도에 미달되어도 안된다. 하나님과 바른 결합에서 할 일은 다 해야 한다. 내가 선을 행하지 않고는 마귀의 유혹을 이길 수가 없다. 하나님과의 연결을 끊을려고 하는 유혹을 이기는 것은 하나님과 연결하는데에 있다.

3:2-11
창세기 3장은 인간의 타락된 시초와 범죄의 시초를 기록했다. 마귀의 유혹은 물질과 사람을 통하여 유혹한다. 외부는 선이지마는 내부는 악을 품고 해할려고 하는데 외부로 표현치 않는다. 마귀는 말과 일을 혼돈 시켜서 우리의 마음이 혼돈해지고 복잡해지게 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명확성과 정확성을 잃게 하고 마음이 흐르게 한다. 그런데 성신의 감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을 새롭게 하고 상벌에 대한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정확하게 명확하게 해준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것은 벌써 마귀의 유혹에 빠진 것이다. 이렇게 되면  콩이면 콩, 팥이면 팥인 정화성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넘어갔다. 그래서 하와가 "만지지도 말라"고 하는 말씀을 하시지 아니했는데 하와는 하나님이 하시지 아니하신 말씀을 더 했고 하나님은 "선악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했는데 하와는 "죽어리라"고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감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진실해야 한다. 진실은 하나를 취하는 것이다. 콩이면 콩, 팥이면 팥. 이것 하나를 잡는 것이 성신의 사람이다. 그런데 하와가 이렇게 흐려지고 보니 4절에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뱀이 처음에는 살살 유혹했지마는 이제는 뱀이 하와에게 명령하는 것이다. 이때부터 마귀의 역사가 명령적으로 온다. 거짓이 권위를 가지고 온다. 해서는 안되고 망하는 방편을 끌어다가 "하면 된다"고 명령과 강제로 우리에게 온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권위성과 정확성을 잃게 되면 주위와 환경에서 "거짓이면 된다"고 하면서 강제와 명령으로 온다. 마귀의 유혹은 처음부터 "먹지말라."고 명령과 강제적으로 하지 않고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고 여기서 부터 시작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권위성을 점점 잃게 하고 잃었으면 이때에는 강제와 명령적으로 온다. "먹지말라."고 한다. 예를 들면 김가라는 사람이 있으면 이 사람을 유혹하기 하여 박가라는 살마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권위성을 잃게 하는 말을 하게 한다.  처음에는 박가라는 사람이 김가에게 "이렇게 하면 안되겠습니까"라고 나온다. 처음부터 "안됩니다."라고 나오지 않고 "안되겠습니까"라고 한다. 이때에 김가라는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화성과 권위성을 잃지 않고 새롭게 가졌으면 박가를 물리쳤을 것이다. 그러나 김가가 유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명확성과 권위성을 잃었으면 하나님의 말씀으로 유혹을 분별치 못하고 마음이 혼돈해지고 복잡해져서 "하면 안될 것 같이" 보여진다. 이렇게 되면 박가가 김가에게 "하면 안됩니다."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면 안되겠습니까" 하던 것이 이제는 "하면 안됩니다."라고 명령으로 나온다. 이렇게 되면 김가는 그 길로 달려서 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권위성과 정확성을 잃어서는 안된다. 이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한다.
5절에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라" 이 말도 옳은 말이다. 이 말에 하와는 완전히 죽었다.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지고 선악을 알게 되어 하나님과 같이 된다. 마귀는 참말을 했는데 하와는 거꾸로 들었다. 왜 이렇게 했까?"마귀가 하나님같이 된다"고 유혹을 하니 사욕을 중심삼아 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욕을 중심한 해석이 나왔다. 이때에 하와속에 하나님만 영화롭게 하는 성신의 욕심으로 이 말을 들었으면 두렵게 여겼을 것이요. 거짓말로 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말을 해도 성신의 마음으로 들으면 거짓으로 들리고 사욕으로 들으면 참말로 들린다. 그러므로 상대방이 이렇고 저렇고 하는 것보다 내 속에서 이렇고 저렇다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많다. 하와가 뱀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는 말을 들을때에 바로 듣는 것은 뱀이 하는 말을 거짓말로 들어야 한다. "네가 말하는 것이 옳지마는 틀렸다."고 하는 이것이 바로 듣는 것이다.
만일 하와 속에 사욕이 없고 성신의 마음, 곧 하나님을 위하는 중심이 있었으면 뱀이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는 이 말을 할때에 기뻐하지 아니했을 것이요. 두려워했을 것이다. 지식으로 판단치 않고 다만 하나님을 위하는 중심으로 마귀가 뱀을 통하여 하는 말을 거부했으면 영영히 잘 되었을 것인데 거부하지 못하여 영영 실패했다. 이렇게 비판이 없어도 예수님을 위하는 중심하나만 가지고도 거부할 수가 있다. 다 방면에 지식이 미치지 못하나 하나님을 위하는 반면에 자기를 위하는 중심 하나만 가지면 진리지식의 수많은 것을 어둡게 한다. 자기를 위하는 증심 이것 하나가 자기를 해하는 것이 수많은 이 진리지식이 자기를 해치는 것보다 크다. 이렇게 마귀는 하와 자신이 스스로 죄를 지어 망하게 분위기를 조장한다. 하와가 사욕으로 마귀의 말을 들었을때에 마귀의 말을 좋게 여긴 것은 참말을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선을 아는 것 같이 하와도 그렇게 알았다. 하나님이 선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선이요. 하나님에게 순종하면 선이요. 하나님을 위하면 선이요. 또 하나님이 악을 아는 것은 하나님을 멀리하면 약이요. 하나님을 거역하면 악이요. 하나님을 위하지 아니하면 악이다. 하와도 방편적으로 이렇게 알았다. 하와를 가까이 하면 선으로, 멀리하면 악으로, 하와를 위하고 좋게 하면 선으로, 하와를 위하지 아니하고 싫어하면 악으로 정하여 하와 자신이 하나님자리에 앉았다. 모든 것을 하나님과 같이 보는 눈이 띄었다. 그래서 죽었다. 이렇게 마귀가 "네가 하나님과 같이 되고 눈이 열리고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하지 않고 "네 눈이 열려서 하나님과 같이 되어서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해서 이렇게 말을 위에 붙이고 아래로 붙여서 구별을 못하게 했다.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존귀하고 영광스럽게 될것 같았지마는 실상은 형편없이 망했다. 듣기는 영광스럽게 들려도 먹기는 맛있게 먹었는데 실지로는 망했다. 왜 망했을까? 창조주와 피조물과의 위차와 그 관계를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땅위에는 영광스럽게 보이는 논리가 많지마는 그대로 안되는 것은 나는 피조물이요. 또 창조주 하나님이 계셔서 심판하기 때문이다. 성경에 위반된 복으로 보이는 방편들이 많이 있는데 이대로 하면 안된다. 이는 나는 피조물이요. 독존자가 아니고 의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하신 이 선악과를 그렇게 먹고 싶어 한 것은 사욕 때문이다. "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리라"고 한 마귀의 말을 사욕으로 들을 때는 바로 들렸고 성령의 소욕에서는 꺼꾸로 ㄷ르렸다. 그런데 하와는 에덴동산을 다스리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권위성과 정확성을 잃어 마귀의 강제 명령에 순종했는고로 사욕이 발생하여 몯느 것을 꺼꾸로 비판한 것이다. 하나님의 소욕대로의 정말이오니 그때는 사욕은 망한다.

3:5-24
아담과 하와의 타락의 순서. (사람의 타락의 순서)
(1). 에덴 동산을 다스리지 않고 하나님과 연결을 쓰지 않고
(2). 에덴 동산을 지키지 아니하고 하나님과 연결을 계속치 않고
(3). 뱀이 "하나님이라"고 하면서 들어 올 때에 뱀의 정색과 정질과 정직을 벗어난 것을 용납했다. 내가 무엇을 하든지 또는 내가 무엇을 상대하든지 그것이 나타낼 정색과 나타낼 정색과 정질과 정직이 있다. 선생이면 선생의 정색과 정질과 정직이 있고, 학생이면 학생의 정색과 정질과 정직이 있고, 정치가면 정치가의 정색과 정질과 정직이 있고 상인이면 상인, 부모면 부모, 자녀면 자녀의 정색과 정질과 정직이 있다. 그런데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색과 정질과 정직이 변색되면 나를 넘어지게 하는 것이니 경계해야 하고 자기가 그런 사람이면 자기를 단속해야 한다. 정색인 태도와 정질인 본질과 본성과 정직이 하나님이 주신 천직이 있다. 새 한마리에게도, 풀 한포기에도, 벌레 한마리에도 정색과 정직과 정질이 있는데 이것을 벗어나면 괴물이다. 뱀이 에덴동산 밖에서 생활을 해야 하는 정색을 떠난 것을 용납했고 뱀이 사람과 같이 말하는 것이 뱀의 정질이 아닌데 하와가 이것을 용납했다. 벌써 정색과 정질과 정직을 벗어 났으면 마귀의 유혹인줄 알고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4). "하나님이라"고 했으니까 귀하고 선한 말을 했지마는 그 속에는 동기와 목적이 악하다. 모든 일을 할 때에 정색과 정질과 정직을 떠나면 일의 동기와 목적이 바로 되지 않는다. 외부에는 "하나님이라"고 얼마나 선하고 옳은 말을 했지만 그 내부에는 해아를 해칠려고 하는 악이 들어있다. 내가 외모의 방편이 아무리 선하고 좋은 것이라도 동기와 목적이 악하면 선한 일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다. 하나님은 결과보다 동기를 중하게 보시고 외보보다 목적을 중하게 보신다.
(5). "참으로"라고 한 것은 거짓을 전제로 하고 말한 것이다. 동기와 목적을 바로 가지지 아니하면 진실을 잊어 버린다. 천하 장사라도 진실을 보장 하거나 보수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부터 거짓말이 시발된다.
(6).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이것은 거짓말이다. 여기서 부터 거짓말이다. 하나님은 진리이신데 선악과에 대해서만 먹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뱀은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고 하시더냐" 하면서 진리를 혼돈 시킨 것이다. 이렇게 진실을 잊어 버리면 자기 속에 진리가 혼돈되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을 잊어 버리게 된다. 그래서 여기서 아무리 진리, 진리라고 말을 해도 진리는 떠나 버린다.
(7). 2절에 "여자가 뱀에게 이르되 … 죽을까 하노라" 이제는 상대하는 상대편에게 접촉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진리를 잊어 버리고 혼돈시켜 진리의 정확성을 잊어 버리게 하는 일을 하게 한다. 진리의 정확성을 가르칠 수 없는 죄가 이웃에게 퍼쳐 나간다.
(8). 4절에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때부터 마귀가 아주 거짓된 것을 명령하고 아주 틀린 것을 주장해도 이에 항거치 못하고 압제 당하는 것이다. 참이 아닌 것에게 강압당하여 거짓이 참이라고 해도 항거 하지 못하고 수락하는 사람이 되어진다. 여기서 하와의 영혼은 죽었다.
(9). 5-6절에 여기서 부터 자기 중심에서 사는 사욕이 생겼다. 어느 말에 사욕이 생겼는지?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한 말이다. 사욕이 생겨지니까 자기는 독존자가 아니요, 의존자요, 창조주가 아니요, 피조물이요, 하나님은 주인이요, 나는 그의 소유요, 하나님은 다스리는 분이요, 나는 다스림을 받는 자요,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자임을 잊어 버렸다. 하나님의 심판을 잊어 버렸다. "먹으면 하나님 같이 된다" 바른 말을 했다. 자기를 중심한 사욕이 자기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에 이 말을 들을 때에 사욕으로 인하여 좋게 여겼다. 하와가 뱀의 말을 들을 때에 "내가 하나님같이 되리라"하면서 창조주와 피조물, 자존자와 의존자, 주인과 종, 통치자와 피통치자의 입장이 바꾸어 지는 것을 두려워해야 할텐데 하와 속에서 사욕이 주장하는 고로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을 들을 때에 좋게 여긴 것이다. "먹으면 죽는다"라는 말로 듣지 못하고 자기 중심하는 사욕이 주장하는 고로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독존자로 모든 것을 다스리는 자로 되는 줄 알고 기쁘게 여겼다. 여기서 죄악이 발동했다. 사욕이 하와를 주장하는 고로 모든 평가와 비판이 꺼꾸로 되었고 사리판단이 꺼꾸로 되었다.
(10). 6절에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하와는 "선악과를 먹으면 정녕 죽으리라"고 말씀하신 이 두려운 말씀을  
잊어버리고 선악과가 좋게 보여졌다. 죽는 일, 망하는 일, 실패하는 일을 볼 때에 좋게 보여졌다. 여기서 부터 불의가 올 때에 그 생활을 하는 것이 좋게 보이고 그 일을 해야 무엇이 잘 될 것 같이 보여진다. 벌써 영혼이 죽고 사욕이 주장하는 고로 모든 것이 꺼꾸로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에 벗어난 영광, 권세, 지위, 재물 일을 하면 자기에게 유익되고 복스럽게 여겨질때에는 벌써 사욕이 주장하고 영혼이 죽은 때다. 영혼이 죽는다는 것은 영혼이 사욕에게 둘러 싸여서 영혼이 하는 일을 못한다는 말이다. 이 때에는 회개하기가 힘이든다.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이와서 말을 할때에 회개하는 수도 있고 또 다른 사람이 범죄하므로 당하는 징계를 보고 충격을 받아 성신의 감동과 자기자신에게 오는 징계로 일어나는 변동으로 충격으로 회개하는 수도 있고 또 임종시에 회개하는 수도 있으니 이때에 회개하는 일이 많고 이때는 모든 것을 내어 던지고 회개한다.
(11). 이렇게 사욕이 생기니 여기서 자율이 생겼다. 자율은 자기를 위한 자기가 세운 법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법인 타율과 반대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을 위하는 법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법이니 진리요. 하나님의 마음에서 나온 법이니 하나님의 자율이나 우리에게는 타율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타율의 종교다.
(12). 이렇게 자율이 생겨지니 오해가 나온다. 이제는 선악과를 보고 또 뱀의 말을 듣고 잘못된 해석이 나온다. 그러므로 오해는 자율에서 나왔고 자율은 사욕에서 나왔고 사욕은 동산을 지키지 아니한데서 나왔다. 오해를 가진것은 5절에 "하나님이 되고 선악을 알게 된다"하는 말에서였다. 뱀이 한 말이 참말인데 거짓말로 들어서 오해했는지 거짓말인데 참말로 들은 것인지 참말을 참말로 들어서 오해인지 이것은 참말을 참말로 들어서 오해인 것이다. 참말을 참말로 들은 것은 잘못인데 오해가 안되는 것은 "나로서는 하나님이 될 수 없다"고 했으면 된다. 그런데 "나도 된다"고 하는 것으로 오해가 된다. 장사하는 것과 직장에서 일을 할려고 하는 것도 나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닌지 이것을 생각해야 한다. 아무리 선이라도 자기에게 해당된 선이 아니면 선이 도리어 악이 된다. 참말을 참말로 들어도 오해 하는 것은 일과 자기를 바른관계를 맺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권위성을 떨어뜨리는데에 바른 판단이 없는 것이다. 땅 위에는 정확과 참은 하나님의 말씀 뿐인데 이것을 잊어버려서 비뚤어지고 사이비하고 잘못된 것이 수 없이 많은 판단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뱀이 하와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권위성을 떨어뜨릴려고 할 때에 하와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산 모든 나무라고 하지 않고 동산 각종 나무라고 하셨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권위성을 세웠으면 뱀이 도망 갔을 것인데 이 하와는 미혹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권위성을 잊어버려 혼돈하고 보니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말을 할 때에 여기서 허영심이 생겨 자기가 감당하지 못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허영심이 나오니 탐심이 생기고 못할 일을 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자기와 자기 후손이 해를 받은 것이다. 동산을 다스리고 지켰으면 해를 안받을 것인데 에덴동산을 지키지 아니했기 때문에 망했다.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데에 있어서 한면만 할 것이 아니고 동산 사방을 다스리고 지켜야 한다. 이와같이 경제면, 사회면, 도덕면, 인인관계의 면, 소유면, 취득면, 성품면을 다스리고 지켜야 한다. 여러 면으로 다스리지 못하고 지키지 못했으면 또 일어서야 한다. 남은 시간이 있으니 실패해도 다시 일어나야 한다.
(13). 오해를 하고 나니 탐심이 나온다. 6절에 "보암직도 먹음직도 하고"라고 말씀했다. 오해가 없으면 탐심이 없다. 콩 심은데 콩이 난다. 여기에 오해 한것은 할 수 없는 것을 될줄 안 것이니 이것이 탐심의 아버지다.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하나님의 법을어겨서 무엇을 해 볼려고 하는 것은 자기가 하나님이 될려고 하는 것이니 탐심이다. "결단코 죽지 아니하리라"에 해당된 말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겨도 하면 된다고 하는 것은 "결단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하는 말이다. 여기 오해는 자기를 오해 했다. 자기를 과대 평가 했다. 이렇게 자기를 오해하니 하나님을 오해하게 되고 일도 오해된다. 그래서 안될 것을 할려고 달려드는 탐심이 생겨진 것이다.
(14). 탐심이 생기니 월권했다. 자기를 몰랐기 때문에 탐심이 생겨서 월권하게 되었다. 정해(正解)를 하면 세상에는 하나님이 계시고 일에는 힘이 나오고 실력이 나온다. 실력이 없이 일하는 법이 없고 실력이 있고 일하지 않는 법이 없다. 힘이 있으면 힘이 있는대로 일을 하게 되고 일을 하는 실력이 있으면 실력대로 일을 하고 만다. 실력이 있는 것 만큼 일을 하게 된다. 하늘나라는 오해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자기 실력에 자기, 자기의 공로에 대한 자기를 바로 알기 때문에 질서가 정연하다. 세례요한이 "나는 쇠해야겠고 그는 흥해야 될 것이라"고 한 것은 자기를 바르게 달은 것(정해)이다. 오해를 하니 "하나님이 안된다. 선악과를 먹으면 죽는다"고 하는 말이 원수 같이 보인다. 탐심은 이렇게 무섭다.
(15). 이렇게 월권하니 큰 일을 하게 된다. 땅 위에서 제일 귀한 일, 곧 사람을 자기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하나님은 광명이요 진리인데 하나님을 거역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으로 만들지 못하니 사람을 제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다. 6절 하반절에 "여자가 그 실과를 따 먹고 자기와 함께 한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하와가 사욕의 주장으로 탐심이 나오니 월권하여 사람을 착취한 것이다.
(16). 사람은 인격이 있는고로 사람을 제 사람으로 만들어 놓고 보니 양심이 생겨 하와는 아담에게 가리울 것이 있게 되어고 아담은 하와에게 가리울 것이 있게 되었다. 물체를 보고는 부끄러울 것이 없지마는 사람은 인격체 인고로 인격을 보니 부끄러운 것이 있다. "벗은 줄 알고" 부끄러운 것이 있는 줄 알고 가리웠다. 양심이 있게 되니 자기가 되내어 놓은 것이 아님으로 부끄러워 가린 것이다. 하와가 벗은 것을 보고 아담이 부끄럽다고 한 것이 아니요. 아담이 벗은 것을 보고 하와가 부끄럽다고 하여 가린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이 부끄러워 가리운 것이다. 이렇게 가리운고로 자유하지 못한 것이다. 우리는 자유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사람에게 모든 만물에게까지 자기는 죄인으로서만 겸손으로서만 자유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하늘 나라는 자유의 나라다. 자유하지 못한 자는 자기의 세계가 좁은 것이다. 자유하는 것 만큼 세계를 가지게 된다.
(17). 가리웠다는 것은 아랫도리를 가리웠다는 것이 아니라 이는 형식계시로 나타낸 것이다. 서로 돕는 배필로 택해 주셨는데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했는고로 부끄럽다. 그 전에는 다 내어 놓아도 부끄럽지 아니했는데 이제는 다 내어 놓을 것이 없게 되어 가리울 것이 있게 되었으니 이때 부터는 사람에게 대한 양심이 생겨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양심이 생겨진 것은 선악과를 먹은 때인데 표시되지 아니했다. 양심이 생기고 보니 이제는 다 내오 놓지 못하게 되었다.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면 부러워하고 존귀하게 여기는 것이면 내어 놓을때는 더 커지는 것이다. 과거에는 벗었으나 부끄럽지 아니했는데 이제는 다 내어 놓지를 못했다.
(18). 덮어 가리기 시작했다. 아무리해도 위험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만큼은 내가 보호해야 했기 때문에 이것이 생겨져서 자기가 자기를 보호해야 한다. 과거에는 하나님이 보호하여 주시고 만물이 보호해 주셨는데 이제는 제가 보호해야 할 것을 자기가 만들었는고로 자기가 보호해야 한다. 그래서 "무화과로 가리웠다" 이제는 가리울 것이라고는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 뿐이다. 그러나 피조물은 가리우는데에 쓰이는 것이 본분이 아닌고로 반항한다. 그러니 강제로 쓴 것이다. 이제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는 것이 피조물 밖에 되니 아니한데 피조물이 옹호한다고 해도 유한한 것이요. 힘이 없는고로 하나님 앞에서는 감추는 그것까지도 추하게 보이는 것이다. 무화과로 가리운 것이 범위가 좁은 것이면 그것으로 가리워지겠는데 범위가 넓기 때문에 가리우지 못한다. 이 세상 뿐이라고 하면 가리워지겠는데 무한한 세계가 있는고로 가리워지지 않고 더 들어나는 것이다. 무화과 잎은 가리우는데 쓰는 것이 아니다.
(19). 이제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 참이 기뻐하지 않고 옳은 것이 기뻐하지 않고 진리가 기뻐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말씀이 반갑지 않다. 세밀한 것이 기쁘지 않고 구별하는 것이 기쁘지 않고 비판하고 평가하고 심판하는 것이 기쁘지 않다.
(20). 하나님께 내어 놓지 못할 것이 생겨졌다. 하나님이 반갑지 않기 때문에 가리울 것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께 내어 놓지 못할 것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내어 놓을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반갑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행할려고 해도 선과 옳은 일을 할려고 해도 기쁘지 않고 재미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 내어 놓지 못할 것을 내어 놓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있고는 하나님과 대면 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과 점점 멀어져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이 된다. "나는 부요한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하는 자가 된다. 이것을 회개하기 전에는 하나님과 가까워질 수가 없는 것이다. 회개해야 한다. 자기가 어디에 와서 있는지 알고 정리, 정돈하고 청산할 것이다. 김가가 선을 행하는 것을 박가가 좋아하지 않는 것은 박가가 김가에게 내어 놓지 못하고 가리울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가리울 것이 있으면 내어놓고 자기가 어디에 있든지 그 자리에서 일어서서 "해보자"하는 데에는 성령이 감동하시는 것이다.
(21). 이제는 나무뒤에 숨었다. 하나님을 피했다. 하나님을 멀리했다. 진리와 선과 참과 옳은 것과 멀리 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싫어하고 진리를 듣기 싫어하니 말씀과 선과 의와 참과 멀어진다. 이렇게 싫어지고 피하여 멀어지는 것은 하나님께 내어놓지 못할 가리울 것이 있는 연고다.
(22). 하나님이 아담에게 "하와에게 왜 먹었느냐" 이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뱀에게는 "왜 먹었느냐"고 하셨으니 인격자에게 심판이 있다. 이는 우리에게는 자유성과 인격이 있기 때문이다. 자유에는 책임이 있고 행사가 있고 행사에는 선악이 있고 선악에는 상벌의 보응이 있는 것이다.
(23). 아담과 하와의 대답 ( :12-13)
아담은 "여인이" 하와는 "뱀이"라고 대답했다. 하나님은 당신 중심에서 물은 것인데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중심에게 대답치 않고 자기 중심에게 대답했다. "내가 주의 계명을 어겨서 먹었나이다. 잘못했습니다."하는 것이 하나님을 중심한 대답이겠는데 아담은 "여인"이라고 대답하고 하와는 뱀이라고 하여 자기 중심에서 대답한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대 아담, 하나님대 하와로 말씀하시는데 이 아담은 자기대 여인, 곧 하와로 하와는 자기대 뱀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증심으로 인간을 창조 하셨는데 인생이 범죄하므로 자기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 그래서 망했다. 그런데 범죄한 인생이 하나님 중심으로 돌아 갈 수가 있다. 이 길은 설정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자기 중심에서 하나님 중심으로 생활하는 것을 사람은 죽도록 애를 쓰도 회복치 못한다. 예수님은 회복하는 길을 설정했다. 그러므로 하나님대 자기 자신을 논하지 않고 자기대 사람, 자기대 일, 자기대 물건을 논하는 것은 죄다. 고후 5:16절에 "그러므로 우리가 이제 부터는 아무 사람도 육체대로 알지 아니하노라 비록 우리가 그리스도도 육체대로 알았으나 이제 부터는 이같이 알지 아니하노라"고 말씀했다. 자기대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은 그 속에 죄가 주장하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애굽으로 내려간 것도 하나님께서 "왜 애굽으로 갔느냐"고 하실때에 "기근이 심해서 내려갔습니다."했으면 죄다. "애굽에 내려간 것이 잘못 되었습니다."라고 하는 이것이 하나님대 자기로 관계를 가지는 것이로되 "기근이 심하여 배가 고파서 내려 갔나이다."라고 하는 것은 자기대 사건을 말하는 것이니 죄다. 내가 죄를 범해놓고 하나님이 "왜 범죄했느냐"고 하실때에 "내가 잘못해서 범죄했나이다. 용서하십시요."라고 하나님대 자기로 대답하지 않고 "저 일때문에, 저 일때문에, 저 물건때문에, 저 환경때문에"라고 자기대 다른 것으로 말하는 것은 자기 중심에서 하는 것이니 죄다. 그래서 망한다. 아담과 하와도 그래서 망했다.
(24). 아담이 하나님에게 대답하기를 "여자가 내게 주므로 먹었나이다"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주어 함께한 그 여자라"고 대답했으니 아담이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하와는 하나님에게 대답하기를 "뱀이 주어서 먹었나이다."라고 아니하고 "뱀이 꾀이므로 먹었다."고 했으니 하와는 뱀에게 책임을 전가했다. 창 3:1절에 보면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중에 뱀이 가장 간교하더라"고 했는데 뱀은 하나님이 지어셨으니 "하나님이 그 뱀을 지어 놓으셨기 때문에 그 뱀이 나를 꾀어서 내가 먹었나이다."하는 말이니 하와가 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지마는 실은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다. 또 아담도 "하나님이 주어서 함께 한 그 여자라"고 했으니 "하나님이 주지 아니했으면 내가 먹지 아니 했을 것입니다."하는 말과 같은 것이니 아담이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이지마는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 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러 책임을 피조물엗게 전가 시키는 것은 하나님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인데 하나님에게는 책임이 전가되지 아니하고 결국은 하나님을 원망하게 된다. 자기의 형편이나 사정, 형편을 원망하는 것은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모든 사물에게 대하여 직접 관계를 생각치 않고 자기와 사물에 대하여 관계를 생각하고 내어 놓는 것은 죄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공심판은 면했고 그리스도의 사심판을 받을 자요.  지금은 자심판으로 자기를 고쳐 나가야 한다. 그러므로 죄의 책임을 피조물에게 지운 것을 회개하고 피조물에게 죄를 돌리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돌리는 것이니 이것을 회개해야



(25). 죄의 경중과 대소의 차이에 있어서 하와(여인)에게는 해산하는 수고와 아담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었고 아담에게는 등골에 땀을 흘리는한다.  수고와 여인을 다스리는 것을 주신 것이다. 먼저 하와가 뱀에게 꼬임을 받았으니 몸안에 수고를 가지게 하는 징계를 주었고 그 다음이 아담인고로 몸밖의 징계를 주셨다. "뼈중의 뼈요 살중에 살인" 여인을 다스리는 것은 범죄한 값이다. 남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으니 영광스럽게 보이나 실상은 죄값이다. 범죄전에는 한 몸과 같이 서로 사랑했지마는 이제는 다스리는 것이니 죄값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사람을 제몸같이 사랑하는 것이요. 나와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 차이를 두는 것은 죄값이다. 아담으로 하여금 하와를 다스리게 했다.
. "사모하게 했다." 사모하게 된 것은 독립성이 없어 의지하고 살게 하신 것이다. 여인이 먼저 범죄했기 때문에 이런 징계를 주신 것이다. 범죄전에는 서로 동등이 였는데 이제는 아담의 소속이다. 사랑에도, 교훈에도, 지도에도, 생활에도, 의지하고 도움을 받아야 살게 되는 것이다.  
. "다스리게 했다" 다음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다스리게 된 것이다. 사랑은 주고 ????하고 기도하고 생활의 도움을 주는 자가 되었다. 아담이 뒤에 범죄했기 때문에 죄의 차이로 하와의 소원이 아담에게 있고 아담을 사모하게 하신 것이다. 여인이 단장을 하는 것은 독립성이 없고 남을 의지하기 위함이다. 여기 단장하는데 있어서 남녀간에 잘못하면 사치하여 허영에 빠지기 쉽다. 벧전 3:2-4절에 말씀하신대로 외모에 치중하지 말고 인격의 단장을 해야 한다. 단장을 하되 자기 인격에 맞게, 자기 경제에 맞게, 자기 사회에 맞게 자기 직업에 맞게 자기의 종교에 맞게 해야 한다.
. 하와는 몸 안에, 아담은 몸 밖에 활동하는 것의 차이가 있다. 범죄하면 범죄한 그 사람에게 먼저 소유를 징계하시고 그래도 회개치 아니하면 활동에 대하여 징계를 하시고 그래도 회개치 아니하면 몸에 징계를 하신다. 우리가 죄에 대하여 두려움을 가지느 것은 의에 대한 평강을 가지는 것이다.
. 뱀에게는 "왜 먹었느냐"가 없는 것은 인격이 없기 때문이다. 인격이 없는 것에게 심판이 없고 바로 정죄하신다. 사람에게는 자유가 있고 인격이 있고 양심의 빛이 있기 때문에 심판이 있다. 양심은 "범죄하면 죽어리라"고 한 지식에서 나왔다. 아담과 하와에게는  선악과의 법을 주셨는고로 법으로 심판하신다. 양심이 있는자에게는 양심으로 심판하시고 법이 있는 자에게는 법으로 심판하시고 법도 양심도 없는 자에게는 법과 양심이 없는 심판을 하신다. 자기가 가진 법과 양심을 통하여 심판하시는데 뱀에게는 법도 양심도 없기 때문에 그대로 정죄하신 것이다.
(26). 하나님이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베푸신 은혜.
"뱀과 원수가 되게 하셨다." 원수되게 하신 것은 중생시켜 구원하신 것이다. 마귀와 원수되게 하는 요소를 주셨다. 여기 요소는 범죄하므로 죽고 해로 살아난 중생이다. "여인의 후손"은 예수님을 말하고 택자를 말한다. "뱀의 머리"는 마귀의 권세, 승리를 말하는데 사망과 죄다. "상하게 할 것이요." 승리를 실패케, 패전케 할 것이요. 여인의 후손인 예숙게서 마귀의 승리를 꺾어서 실패케 하셨는고로 우리의 영혼에게는 침해를 가하지 못하고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 뿐이다" 성도의 최 말단중에 말단인 육을 침해할 것 뿐이다. 이성과 몸만 시험 할 것 뿐이다. 마귀의 승리는 죄와 사망이다. 예수님께서 이 마귀의 승리 곧 죄와 사망을 깨트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마귀와 원수되게 대립되게 하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니 기쁘하고 즐거워하고 용감하고 담대해야 한다. 처음에는 뱀과 한 덩어리 되어서 죽었지마는 이제는 서로 원수가 되게하여 살게 하신 것이다. 이렇게 뱀과 원수가 되니 하나니을 사모하게 되었다. 그러나 육으로는 고통이요. 수고다.
. "수고와 고생을 주셨다" 죄를 죽이고 그 죄에게 이용당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수고와 고생을 주셨다. 범죄한 사람에게 평안을 주면 더욱더 죄가 솟아나는고로 수고를 주어 죄를 꺾는 것이니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다. 범죄하여 가난한자에게 부요를 주면 더욱더 죄를 범하게 되고 고난을 당하는 자에게 평안을 주면 더욱더 죄를 범하게 되고 분주한 자에게 안식을 주면 더욱더 죄를 범하게 된다. 그러므로 내가 처해 있는 입장과 환경을 감사해야 한다. 범죄한 인생에게 수고와 고생을 주어서 구원하시는데 당하는 수고와 고생을 피할려고 하는 것은 구원을 피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자비를 물리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고와 고생이라는 이 속에 보배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 "동산에서 쫓아내셨다" 동산은 자유세계요. 우주를 다스리는 곳인데 여기서 쫓아 내신것도 하나님의 자비요. 선물이다. 범죄자에게 자유를 빼앗고 영광을 빼앗고 권세를 빼앗고 지위를 빼앗고 부요를 빼앗는 것은 하나님이 당신에게 부담을 지우는 것이니 범죄자에게는 부담을 들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비요. 선물이다. 그러므로 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이 하나님의 자비다.


(27). 종결된 죄악, 결과로 맺어진 죄악, 뭉친 죄악.
"선악을 아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이것이 결과로 맺어진 죄다. 자기 중심으로 사는 죄가 결과적으로 맺어진 죄이니 머리가 되는 죄인 것이다. 자기를 위하면 좋아하고 자기에게 유익되면 좋아하고 자기를 칭찬하면 좋아하고 자기를 높여주면 좋아하고 자기를 위하지 아니하면 싫어하고 자기를 책망하면 싫어하고 자기에게 해가 되면 싫어하는 자기 중심에서 사는 이것이 머리죄이니 이것을 버려야 한다. 하나님은 이것을 깨트리시기 위해서 수고한다. 새사람과 옛사람, 사욕과 성령의 소욕을 구별해야 하고 하나님과 자기를 구별해야 한다. 우리는 행하는 것보다 아는 것이 먼저다. 알기 전에는 행할 수가 없으니 아는 것이 먼저요. 그 다음이 행함이다. 여러곳의 사경회에 참석하여 자극을 얻을려고 하지마는 이 자극은 따라다니지 못하기 때문에 자극이 떠나면 그만이다. 그러나 양심과 깨달은 진리 지식에서 나온 힘은 어디서든지 나오기 때문에 이 힘이 강하고 영원하다. 양심의 선조는 어떤 것인가? 하나님의 법이 아담에게 왔을때에는 그대로 행해야 된다는 느낌과 인식 뿐이니 이것이 양심의 선조다. 그러나 범죄하고 나니 그 속에서 "그렇게 하면 안되고 나쁘고 이렇게 해야된다. 아차 잘못했구나."하는 비판이 나왔으니 이것이 양심이다. 이때부터 양심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다. 우리는 먼저 믿는 이치를 배워야 한다. 믿는 이치는 말씀에서 배우는 것이니 말씀안에는 도덕, 지혜, 능력, 성령의 역사가 있으니 말씀을 실행만하면 이 모든 것이 나온다. 영혼은 범죄전 하나님이 생기를 불어 넣기전 부터 있었고 양심은 인생이 범죄한 후에 생긴 것이니 서로 같은 것으로 보면 안된다. 법으로, 양심으로, 법과 양심없이 범죄체도 형벌은 같다.

3:4-24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지키지 아니했는고로 들어 오지 못할 곳에 들어온 뱀을 예사로 여겼다. 뱀 혼자서 들어온 것이 아니고 그 속에 마귀가 있어서 마귀가 뱀을 통하여 아담과 하와를 망하게 하려고 온 것이다. 들어온 목적과 동기는 아담과 하와를 범죄케해서 하나님에게 쫓겨나게 하여 멸망 받게 하기 위함이다. 이 동기와 목적은 외부에서는 안보인다. 그러므로 아담과 하와는 도무지 모른다. 다른이의 품고 있는 비밀을 도무지 알수가 없다. 알았으면 이것을 방지해서 해를 당하지 아니했을 것인데 몰랐기 때문에 방지하지 못해서 자신이 해를 당하고 후손들에게 까지 해를 당하게 한 것이다. 오늘도 사람들이 자기를 해롭게 하는 일을 나타내기전에 은밀히 예방하며 해를 받지 아니한다. 비밀을 모르기 때문에 해를 받는다. 해를 받고난 뒤에 방지해도 소용이 없다. 기회가 지난후라 원통만 가지고 망하는 것이다. 장사를 하는 것도 잘 안되는 것을 알았더라면 장사를 안할 것인데 사전에 모르고 하다가 실패하는 것이다. 사람을 고용하는데도 자기에게 손해를 끼치고 망하게 할 사람임을 고용하기 전에 알았으면 그 사람을 고용치 아니 했을 것인데 몰랐기 때문에 사람을 고용하여 해를 당하는 것이다. 이 본문의 도리는 사전에 아는 도리다. 사전에 예방하면 해를 당할 것이 천하에는 없다. 일을 해서 실패하고 낭패를 당할줄 알았으면 아무리 귀하고 좋게 보이는 일 일찌라도 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또 좋은 결과를 맺을 것인데도 하면 안될것 같이 보여지기 때문에 안 하는 것이다. 그때에 에덴 동산에서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받는 생활을 하나도 아니했고, 죄도 없고, 전부가 사랑이요, 행복이요, 온전이요, 영광의 세계요,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을 가지고 누리고 살았다. 마귀가 이것을 시기해서 빼앗을려고 아담과 하와도 마귀와 같이 쫓겨나서 망하게 할려고 하는 것이다. 범죄 전에는 하나님의 천사 다음으로 영광스럽고 존귀한 자였다. 그 세계는 죽음이나 고통이 없고 영광스럽고 존귀한 세계다. 여기에 살고 있는 아담과 하와가 여기서 쫓겨나서 마귀편에서 살게 하기 위한 이 목적을 가지고 이 동기에서 악을 품고 아담과 하와에게 왔다. 하나님과 밀접하여 있는 아담과 하와를 하나님과 멀어져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사람끼리도 원수가 되고 만물과도 원수가 되게 하려고 들어 왔지마는 아담과 하와는 도무지 몰랐다. 이것을 알았다면 예방 했을 것이다. 악을 품고 온 뱀을 어떻게 알고 해를 받지 아니 할 것인가? 뱀의 배를 갈라도 모르고 뱀을 달아보아도 모르고 뱀을 만져보아도 모른다. 그러나 방비하는 법이 있다. 이것을 방비할 지혜와 도리를 알 수도 있고 해를 예방할 수 있는 길이 있고 오늘 우리에게 원수의 해를 사전에 방지 할 수 있는 유일의 법칙이 있으니 이것이 무엇인지?
모든 불행을 사전에 알고는 스스로 그 불행을 취할자가 없을 것이다. ???의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은 사전에 알려고 하는 사람이 많지마는 밤낮 연구해 보지마는 사전에 알지 못하는 것이다. 장사꾼이 물건을 사기전에 손해인지, 유익인지, 이것을 알아 볼려고 각양, 각방, 각면으로 노력한다. 그러나 알지 못한다. 그런데 사전에 알고 ???될 것을 예방하는 것이 창세기 3:1-에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방비하는 방법은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 것이다. 에덴동산을 사방으로 다스리고 지켰더라면 뱀이 들어 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에덴동산을 지켰으면 동산 지경안에, 경계안에, 들어오지도 못하니 해를 당치 않는 것이다. 그런데 다스리고 지키는 방법을 떠나고 보니 실패했다. 악을 품은 비밀을 해 받기 전에는 모르고 받고 난 뒤에 안다. 미리 알고 방지 할 자도 없다. 자기에게 해 될것은 모르나 에덴동산만 지키면 해 되는 것을 방지는 된다. 뱀을 동산안에 못들어오게 했으면 뱀이 해칠려고 하는 것은 모르지마는 예방은 되었다. 홍포입은 부자가 일생동안 생활한 것이 자기를 해한 것인줄 모르다가 하나님의 심판대에서 보니 일생동안 생활한 것이 자기를 해한 것인줄 알았다. 생전에 알았더라면 실패치 아니 했을 것이다. 사건을 당하는 것이나 일을 하는 것이나 사람을 접촉할 때에 하나님의 의사와 행동에 어긋난 것은 다 뱀이다. 주일을 지킬려고 하면 직장을 내어 놓아야 하고 직장을 지키고져 하면 주일을 범하게 되는 것은 이 직장이 뱀이다. 아담과 하와가 이것을 사전에 방비하는 방편을 에덴동산을 지켰으면 되고 다스리면 된다. 에덴 동산을 지키는 이것이 해침을 사전에 방지하는 유일한 도리요, 길이요, 방법이다. 여러 순서를 통하여 자기를 망치고져 하는 원수의 수단과 계획의 비밀을 알자가 없으니 이것을 방지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마음과 행동을 같이 하는 것 뿐이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 뿐이요, 진리대로 행하는 것 뿐이다. 하나님께 받은 전부가 내게 영생을 맺을 것이요, 나 혼자 만드는 행복, 기쁨, 쾌락, 그 전부가 죄다 물 밀듯 밀고 들어오는 해를 방지하고 행복을 가지는 것은 자기의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 것이다. 이것 외에는 없다. 일생동안 한 일이 그 나라에서 볼 때에 헛일 한 자로 나타나지 않기 위해서는 오늘에 자기의 에덴동산을 지켜야 한다. 자기의 에덴을 지키는 여기에서 모든 해독을 방지하고 자기의 행복과 영광을 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오는 해를 사전에 방지하고 행복을 누리고 싶으면 에덴 동산을 다스리고 지켜야 한다. 이것 뿐이다.

3:1-11
모르는 해독을 어떻게 피할 수 있으며 모르는 유익을 취할 수 있을까?
해를 알면 취할려고 할 자가 없고 유익이 될줄 알면  취하지 않을 자가 없을 것인데 유익과 해독을 사전에 알 사람이 없다. 나를 망치는 것을 알지 못해서 망하고 나를 복되게 하는 것을 몰라고 복되게 못하는 것이다. 해로운 것, 유익된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가려서 해로운 것은 버리고 유익된 것은 취할 것인데 이것을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원치 아니하는 해를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이 해를 미연에 방지하는 유일한 길이 있으니 이것은 에덴을 다스리는 것이요,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이것을 찾아서 이대로 행하는 것은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것이요, 어려움이 와도 행하는 것을 굽히지 않는 것은 에덴을 지키는 것이다. 이렇게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켰으면 뱀이 들어오는 것을 쫓아 내었을 것인데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지 아니했는고로 뱀을 용납해서 이로 말미암아 동산을 빼앗겼다.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면 어떤화가 미연에 방지되고 어떤 복이 오는지 이것을 모르나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 이것 때문에 화를 면하고 복된 것을 취하게 된다. 우리에게 오는 것은 해가 되는 것과 복된 것 뿐인데 해가 되는 것을 피하고 복된 것을 취하는 것은 에덴동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것인데 사방으로 다스리고 지켜야 한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생활을 하는데 이 생활을 빠짐없이 해야 한다. 한가지라도 함께하는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하는 이것을 통하여 마귀가 틈 타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면 그것은 동산을 지키지 않는 것이니 이것을 통하여 뱀이 들어오니 이것을 알 수 있는 지혜를 단단히 배워야 한다. 요셉이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보니까 형제들의 미움을 사게 되었고 애굽에 팔려 갔고 종살이 했고 감옥에 들어 간 것인데 이것이 총리 대신을 찾아가는 걸음인 줄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1장 6절에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한다"고 했다. 순종이 없으면 하나님이 만족히 여기시는 행복한 사람이 안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가면서 낭패와 실패하는 입장을 당하면 하나님을 원망하기 쉽기 때문에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시는 것과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했으니 하나님이 계심을 믿어야 ㅎ나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실패와 낭패를 만나게 하시니 여기서 연단을 받는 것이다. 요셉이가 바로의 인정을 받고 총애를 받게 하는 길로 인도 하시는 것이 이것이였다. 하나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순서를 통과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기 때문에 다 실패한다. 또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다가 다리가 뿔어져도 이것이 상이 되는가?
이 세상 뿐이면 상이 안되지마는 영원한 나라가 있으니 이것이 큰상이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위를 넓게 잡아야 한다. 모든 해를 피하고 모든 복을 취하는 것은 자기의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자키는데에 있다. 하는 일과 당하는 사건에서 미래를 알지 못한다. 아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러나 자기의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느 여기에서 당할 뻔한 해는 방지되고 복을 받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해서 하나님의 권능을 체험한자 외에는 이것을 모른다. 그런데 하와는 망칠 것이 들어 왔는데도 망칠자인줄 모르고 재미있게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를 망치는 사업을, 언행을 깨닫지 못하고 이것과 더불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망치는 자인 뱀이 "하나님이" 하면서 들어온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정확무오한 권위있는 말씀인데 이 말씀을 혼돈시키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이리 붙이고 저리 사용하고 감하고 했다. 그런데 하와도 물이 들어서 자기도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무오한 것과 권위성을 잊어버렸다. 우리가 어디에 가든지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무오성과 권위성의 자극이 내게 강하게 올때는 성신의 감화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무오성과 권위성의 자극이 희미해지면 벌써 마귀의 침해를 받았다. 어두운데 비치는 등불인 진리의 말씀이 떠나 버렸다. 그래서 어두워져서 판단을 못했다. 그러니 뱀이 거짓말을 노골적으로 했다.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이제 어두운 하와는 뱀의 말이 거짓인지, 참인지 이것을 구별치 못하기 때문에 거짓도 참으로 들은 것이다. 그래서 종말에는 선악과를 먹고 만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하와가 하나님의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권위성을 떨어트리고 혼돈시킴에 빠진 것은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권위성을 떨어뜨리게 하는 이런 유혹을 미연에 방지하는 것도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데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권위성에 대한 감화가 강한 것은 성신의 감화인데 이것을 없앨려고 하는 것이 마귀요, 있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요, 하나님의 말씀이 복을 주고 기쁨을 주고 하나님을 떠나면 죽는 줄알고 말씀을 지키는 강한 마음을 가지게 하는 것은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권위성에 대한 감화를 소멸케 하는 마귀의 역사를 방비하는 것은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데에 있다. 에덴동산을 다스리지 못하면 어두어지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정확성과 권위성을 떨어트린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 한마디라도 어기고는 견디지 못하고 또 순종치 못하고는 견디지 못하는 자가 복된 자인데 이것은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데에 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극이 강하고 뜨거운 것은 동산을 다스리고 지키는데 있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극이 희미해지는 것은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키지 못하는데에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수 없이 넘어져도 또 일어서야 한다. 종말을 바라보면서 끝까지 가야 한다. "하나님의 능하신 손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면 높이리라 (벧전 5:6)"고 했으니 우리는 종말을 보아야 한다. 요셉이가 애굽에 팔려 갔다. 종말을 보아라. 바로왕 앞에 섰다. 종말을 보아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라가다 원망하지 않으면 안될 입장을 만나도 거기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시리니 종말을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의 에덴동산을 다스리고 지켜야 한다. 하나하나 정리해 나가야 한다.

3:9-13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한 것과 "하나님이라"고 한것의 다른 점은 하나님이라고 하심은 창조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인간과 계약을 하시고 계약하신 하나님이 계약조건으로 여기에 아담을 부르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하나님이 아담과 계약하신 것을 조건으로 아담을 부르시고 아담과 계약 조건으로 여호와 하나님이라고 하신 것이다. 계약을 전제로 하고 이 계약을 앞으로 써먹을 목적으로 아담을 부르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약이 있기 때문에 앞으로 이 계약을 실행하실 목적으로 아담을 부르신 것이다. 신약시대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없다. 벌써 여호와 하나님을 터전으로 먼저 인식 되어있기 때문에 신약 성경에서 다시 증거하거나 계시할 것이 없기 때문에 신약 성경에는 여호와라는 말이 없다. 그러나 여호와를 견제로 하고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찾아오시는데 아담과 하와가 숨었다. 벗지 아니했으면 하나님을 반가이 맞이 했을 것이다. 전에는 벗었어도 부끄럽지 아니했는데 이제는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이 떠나시니 벗은 줄 알게 되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실때에 "예"하고 나갈수 있는 것은 선악과를 회복시켜야 한다. 그러나 아담은 죽을 힘을 다해도 선악과를 회복 할 수가 없다. 우리는 회복할 수가 있다. 예수님의 공로로 회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선악과 먹은 것을 예수님이 대신 책임지시고 십자가에서 피흘려 돌아가셨으니 이제 우리는 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로 회복된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때에 찾아오시는가? 환란때인지, 평안한 때인지, 낮인지, 밤인지, 고요한때인지, 소란한때인지? 하나님은 사건을 통하여 찾아 오신다. 그 사람과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은 내게 오신다. 아담과 하와는 찾아오신 하나님을 반가히 맞이 할 마음이 없어서 나무 뒤에 숨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생활을 했으면 그 일에 내포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반가히 맞이 했을 것이다. 그런데 찾아온 하나님의 뜻을 반가히 맞아 드리지 못하는 자기 중심하는 행동이 나오게 된 것은 벗었기 때문이요, 이 행동이 피조물이요, 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피조물과 하나과 되어 합해지니 이것이 진리를 떠난 것이요, 피한 것이다.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내게 유익될까"해서 자기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 찾아오신 하나님을 맞이 하지 않고 등산나무 사이에 숨은 것이다. 하나님이 "아담아" 하고 부루실때에 첫째로 아담이 손을 덴 것은 "내가 어떻게 할까"하는 자기에게 마음이 간 것은 벗은 연고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순서다. 마음에 하나님이 부르실때에 아담이 자기 마음이 자기에게 쓸리지 않고 하나님께로 움직였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부르실 때에 나갔으면 큰일 났다. 즉살 당했을 것이다. (출 33: 3 하반) 하나님이 범죄자를 멀리하시는 것은 하나님은 죄와 함께 하시지 못하시는고로 멀리 하시는 것인데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이 아담에게 범죄한 자로서는 정당한 행위다. 여기서 차차 멀어진 것이다. 이 시간에 이 사람에게 어떤 일이 봉착되었으면 거기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바로 찾는 것이 생명문인데 이 생명 문은 사람마다 일마다 하나다. 그런데 이 생명문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다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은 벗은 증거다. 그러므로 벗은 것이 무엇인지 이것을 찾아야 한다. 주님과 하나 되지 못하고 일과 자기와 하나되고 사람과 자기가 하나가 된 것은 벗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인데 벗은 것은 무엇인가? 그 일을 당할 때에 방종하고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인격대 인격 결합의 신앙을 가져야 한다. 기계적인 신앙과 인생을 가지면 안된다. 신앙은 눈에 안 보이는 고로 일생동안 범죄의 날로 생활하면서 외부에는 성자의 인정을 받을 수가 있다. 지극히 적은 생활무대를 가졌을찌라도 인격체인 인생관을 가지고 생활한다고 하면 여기서 배운 것으로 우주를 다르릴 것이요, 천사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을 바로 믿으면 한없이 넓고, 한없이 좁고, 한없이 약하고, 한없이 강하고, 한없이 관대하고, 한없이 성쇠하여, 배척하는 사람이 된다. 의를 행하므로 전개되는 사건이나 범죄하므로 전개되는 실은 예수님이 전개 시킨다. 아담이 범죄하는 것도 예수님이 예정하신 것이요, 이 예정에는 성화시키는 이가 예수님이시다. 주권적 능력으로 성취하신다. 이것을 칼빈이 발견했기 때문에 위대한 인물이 되었다. 아담이 범죄한 것을 보면 파괴시키는 일이라 모순인 것 같이 보이나 앞으로 통일된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는 파괴시키는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어도 범죄해도 주님이 찾아 오신다. 내가 범죄 했을 찌라도 거기에는 하나님의 뜻이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 부인 한 큰 죄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 베드로는 거기에서 그 뜻을 찾았는고로 구원을 받았다. 주님을 부인하므로 범죄할 때에 그로 통하여 찾아오신 뜻을 눈이 마주 칠 때에 찾아오신 뜻을 영접할때에 구원 받았다. "세번 부인하리라"고 하신 말씀이 몇시간이 지나자 이루어지니 자기의 무지, 무능함을 알고 여기서 꺼꾸러진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 할 것은 우리가 사람이나 일이나 시간이나 불건을 봉착할 때에 사람과 일과 시간과 물건을 통하여 오시는 주의 뜻을 영접치 못하는 것은 벗은 연고인 것을 알아야 한다. 방종한 연고요, 이미 배운 진리 지식을 사용치 아니한 연고다. 돌이킬려고 하니 꺼리끼는 것이 있다. 이것을 해결해야 합해진다. 오늘은 넘어져도 일어 설때다. 하루에 7번씩 70번 넘어져도 일어서야 한다. 이 말씀을 범죄 하는데에 이용하면 안된다. 의를 행하는데에 써야 한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는 것은 어떻게 하시느냐 하면 한 사건에 있어서 그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떻게 되었느냐를 심판하시는 것이다. 나와 김가와 일과의 관계점을 의로 죄로 심판하시는 것이다. 이 심판의 성질을 잘알아서 "사람과 사건 때문에 어떻게 되었다"고 할 수 없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앞에 잘했느냐, 잘못했느냐가 심판이다. 무화과 나무가 열매를 맺을 시기가 되었던지 안되었든지 이것이 문제가 아니고 열매가 없기 때문에 저주를 받았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는 이유나 변명이 있을 수 없고 다만 의로 생활할 것이다. 자기네끼리는 원망할 수 있을런지 몰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원망이 없다.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면 심판을 면하리라"고 말씀했다. 원망과 불평을 하지 말고 자기와 피조물과의 관계를 자기가 혼자서 책임을 져야 하고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게 살 것 뿐이다. 하나님이 아담에게 물으실때에 "내가 잘못해서 먹엇나이다. 잘못했으니 용서해 주십시요."해야 할 것인데 아담은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 했다. 그러나 아담이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했다고 자기는 심판을 통과 한 것이 아니다. 자유와 인격을 주셨으니까 한번 심문한 것 뿐이다. 아담의 고백을 추호라도 의지하고 하와에게 옴긴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심판대에서는 다른 사람의 변명이 필요가 없다. 나와 누구, 누구와의 관계가 어떻다고 하는 것이 소용이 없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어떠함을 심판하는 것이다. "형편이 이렇게 어렵고 해서 다소라도 인정해 주시겠지" 하는 것은 부패성이 하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유익된 것 만이가 필요하지 그 외의 것은 하나도 필요가 없다. 아담이 "하와가 먹게해서 먹어습니다." 하면서 책임을 하와에게 전가했으나 책임을 전가한 이것이 아담에게는 하나도 효험이 없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공로로 하나님의 공심판을 면했다. 계 1:5하반절에 "우리를 그의 피로 해방하사"라고 하신 말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공로로 하나님의 공심판에서 구원하셨다는 말인데 하나님 앞에서는 예수님의 공로를 입고 설수 있다. 착한 일을 했다고 해도 이것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덮어야 한다. 하나님은 지공하시고 지성하신고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아니면 도저히 설 수가 없다. 천사는 인격은 있으나 하나님께 절대 복종하는 자유 밖에 없으며 심판이 없다. 우리에게도 영혼에는 심판이 없다. 이는 하나님과 하나된 완전한 자유이기 때문이다. 롬 8:1-2절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고 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심판이 있으니 이 심판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시는 사심판을 말한다. (고후 5:10) 이 사심판은 곧 예수님 앞에는 사람으로 할 수 있는 의를 가지고 설수가 있다. 이학년은 이학년의 의를 했으면 예수님 앞에 설수 있자마는 이학년이 일학년의 의를 했으면 못선다. 인성을 가지신 예수님 앞에서는 사람으로서 최선을 다하여 행한 의를 가지고 예수님 앞에 설수가 있다.

3: 22-24
죄의 시발이 에덴동산을 다스리지 않는데 있다. 죄를 막고 죄를 이기는 것은 에덴동산을 다스리는데에 있다. 에덴동산을 다스리는 아니하면 죄를 막고 이길려고 아무리 힘을 써도 전력을 기울이고 죽을 힘을 써도 안된다. "다스리는 것"은 써먹는 것이요, 사용하는 것이다. 여기서 죄가 못 들어오는 것이다. 요사히 보면 감동과 자극을 받기 위하여 부흥회나 사경회를 찾아다니지마는 믿는 이치를 알기를 원치 아니한다. 사람을 통하여 오는 감동과 자극을 원하는 것이니 다 실패한다. 자기 속에서 말씀을 통하여 이치를 통하여서 나오는 감동을 가져야 한다. 말씀하고 단 둘이 앉아서 내가 말씀을 묵상하고 새김질 하는 여기에서 나오는 감동이 강하고 능력이 있고 영원한 것이다. 이미 아는 이치에서 오는 감동이면 받은 이치대로 실행하지 못한 것은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고 실행중에 있으면 계속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새로 배우는 이치이면 이것을 알기 힘써야 한다. 말과 간증에서 얻어진 감동은 시간이 지나면 희미해진다. 이런 것을 원하는 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실지로 환란을 당하면 다 실패한다. 하나님 의 말씀만이 환란을 이기게 하는 것이니 성경에 있는 이치를 배워서 이 이치대로 실행코져 시발해야 한다. 이 이치대로가 아니면 회개하고 이 이치대로면 그대로 나가는 것을 어릴때 부터 연습해야 한다. 이곳 저곳에서 감동을 받아살려고 하는 것은 말씀을 배우지 않고 감동으로만 살려고 하는 것이다. 만나지는 사건이 시간마다 다르고 만나지는 사람이 시간마다, 형편마다 다른데 이렇게 다를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다르니 말씀이 아니면 그 뜻을 찾지 못하고 찾지 못하면 실행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는 이치를 먼저 알아야 한다. 자극에서 오는 힘은 자극이 떠나면 힘은 없어지나 이치에서 오는 능력은 실행하면 할 수록 강한 능력이 나온다. 최후에는 순교할 능력이 나온다. 이곳 저곳에서 사경회를 통하여 얻은 감동은 구걸하여 허기를 면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하여 구걸할 곳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 이치에서 나오는 힘에 의한 감동이면 이치를 깨달아서 양심에서 나오는 힘이면 자활하여 자급자조하는 것이 가면 갈수록 박력있는 생활을 하게 되니 생명이 사는 것이다. 하나님이 성령을 주시는 것은 사람을 통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고 이치를 통해서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정서를 통하여 사람을 통하여 고함을 통하여 오는 감동은 먼져 버려야 한다. 환경에서 오는 감동도 오는 감동도 버려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 이치에서 오는 감동을 가져야 한다. 내 속에 있는 이치를 혼자서 생각하여 이치를 깨닫고 이 깨달음에서 오는 감동을 가져야 한다. 여기에서 나온 것이 아니면 헛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이치를 배우는데에 힘써야 한다. 배우고 꺠달아 실행하고 또 배우고 깨달아 실행해야 한다. 이 이치속에는 하나님의 모든 것이 다 들었으니 이치를 먼저 배워야 한다. 그러므로 힘과 자극은 자기 혼자서 일어켜야 한다. 외부에서 일어나는 것은 시간이 가면 희미해진다. "야곱의 우물은 마셔도 다시 목마르거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묵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고 했다. 밖에서 오는 감동을 받으면 받을 수록 부족하지만 내 마음안에서 나오는 이것이 영원하다. 내 속에서 나온 자극과 감동이 내 주위를 내 가정을 점령하고 온 교회를 점령하고 온 나라와 세계를 점령하는 것이다. 이 감동과 자극이라야 순교하는데 까지 나아간다. 내 속의 감동과 자극을 외부에서는 꺾을 세력이 없지마는 내 속에서는 하나가 있으니 그것은 새로운 이치와 진리다. 어제 내 속에서 한 진리를 말씀 10개 깊이로 깨닫고 여기에서 나온 감동과 자극으로 기쁘하였는데 오늘에는 20개 깊이로 깨닫고 여기에서 나온 감동과 자극으로 기뻐 한다고 하면 어제의 기쁨은 오늘의 기쁨에게 굴복한다. 그러므로 깨달으면 깨달은 만큼 능력이 있고 기쁨이 있다. 깨달은 것 만큼 행하는 능력을 막을 자가 없다. 그러므로 믿는 이치는 사람에게서 배우고 감동과 자극은 제 혼자서 일어킬 것이요, 또 배운이치를 써 먹기는 제 혼자서 선택하여 사용해야 한다. 그러면 성령이 가르쳐 주신다. "내 속에 기름부음이 가르쳐 준다"고 했다. 자기 혼자 속에서 나온 감동과 자극은 꺾을 자가 없다. 다만 더 나은 진리가 꺾을 것이나 이것은 꺾는 것이 아니고 돕는 것이요, 자라는 것이다. 사람이 주는 힘, 환경과 분위기가 주는 힘, 물질이 주는 힘, 사업이 주는 힘, 지위와 명예가 주는 힘은 땅에 속한 힘이라 가치가 없고 세상을 떠나면 자기에게는 힘이 하나도 되지 않지마는 이치가 주는 힘은 가치가 있고 강하고 영원하다. "심방을 하니 기쁘다. 전도 하니 기쁘다. 예수 믿는 사람이 부지런히 일을 해야지"하는 여기에서 나오는 힘도 참힘이 아니다. 다만 이치가 주는 힘, 진리가 주는 힘이 참힘이다. 이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3:22-24
  하나님의 말씀은 영생이요, 지혜요, 권능이요, 영광이요, 행복이다.  우리에게 나타난 말씀은 사랑과 진리과 영감이다.  그러므로 말씀을 지켰으면 영생과 지혜와 영광과 권능과 행복을 가졌고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으면 이런 것들을 버렸다.  하나님은 완전자시고 완전하신 인격을 가졌고 우리는 하나님의 모형인 인격성을 가지고 있다.  원형인 하나님과 연결되면 하나님과 같은 성결, 온전, 능력을 가진다.  그러나 하나님과 끊어지면 존재적으로는 있으나 활동적으로는 죽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었기 때문에 형혼속에 하나님의 형상이 들어 있는 것이다.  바로 믿으면 도덕과 지능이 온전하고 원만한 인격자로 만든다.  우리의 영혼이 독자적인 권능을 가지나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면 죽은 시체와 같이 아무런 가치가 없다.  "코에다 생기를 불어 넣으니 생령이 된지라"고 했으니 생기와 연결이 될 때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육의 가치는 영혼에게 있고 영혼의 가치는 하나님에게 있다.  만물이 영혼을 기뻐하는 것은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영혼에게서 하나님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연결이 끊어지고 영혼이 죽으면 만물이 싫어한다.  생령이 된 아담이 비판하고 계획하고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앴다.  이때의 결합은 끊어 질수 있는 결합이였고, 지금 중생된 영은 영원한 결합인데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높은 사랑이요, 지혜적으로는 전지요, 능력적으로는 만능이요, 모든 충만과 천상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이 소유다. 영교는 다스리고 지키고 먹고 먹지 아니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실패했다.  인류에게 사망이 들어온 것은 해아를 통해서다.  그러나 아담은 해아를 다스리지 아니한 연고로 주권을 해아 자신이 가지게 되었다.  여자가 가정에서 주도권을 가지면 가정도 망하고 자기도 망하고 자기도 망하고, 여자가 교회에서 주도권을 가지면 그 단체는 망한다.  여자는 언제나 배우고 다스림을 받아야하고 남자는 가르치고 다스리기로 결정되었다.  남자가 주도권을 가지지마는 남자의 의무와 책임을 다 해야 한다.

3:1-21
  인류시조 아담 해아가 어떻게 해서 하나님이 금하신 실과를 먹어서 하나님의 법령을 범했는가?  그것은 두가지다.  뱀이 꾀었고, 욕심이 있었다. "하나님 같이 된다." 고 하는 이 말에 꾀임을 받는 것이다.  인생이 멸망 받는 원인은 꼬임을 받기 때문인데 꼬임 받는 원인은 어떻게 하든지 간에 자기 좋게 하려는 이것 때문이다.  그러므로 멸망을 피하려고 하면 꼬이지 아니해야 하고 자기 좋게하려는 이것을 없애야 한다.  이 세상에 꼬우는 것이 없을 수가 없다.  그런데 자기만 생각하면 꼬일수 밖에 없는 것이다.  자기보다 자기 가정과 자기 사회와 자기 국가와 인류를 위하고 져하면 자기는 꼬이지 않는 것이다.  자기만 위하고 좋게 하려는 이것 때문에 꼬이고 꼬이면 망한다.  "어떻게 하면 이웃을 위하고 유익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사회를 가정을 위하고 유익되게 할까"하는 이 마음이 적으면 적은것 만큼 자기에게 행복이 적고 이 마음이 크면 큰것 만큼 행복이 크다. 아담이 망하게 된것은 인정과 애정이 하나님보다 앞섰기 때문이다.  자기 지방 정실, 혈통 정실, 동류 정실, 애정. 이것이 하나님보다 앞서면 망한다.  이렇게 아담이 망하고 난 결과는 범죄하고 난 후에는 하나님을 피하게 되었다.  제자가 잘못하면 스승의 낯을 피하게 되고 자식은 부모의 낯을 피하게 되고, 아내는 남편의 낯을 피하게 된다.  잘못하면 옳은 것을 피하게 된다.  옳은 교훈과 사도가 싫어진다.  이것은 자기 속에 죄가 있기 때문이다.  또 아담과 해아가 범죄하기 전에는 사랑이 두터웠다. 그러나 범죄 후에는 그렇지 못했다. "하와가 줘서 먹었습니다" 하면서 아담과 하와 사이에 금이 갔다. 또 하와는 뱀과 금이 갔다. 또 아담 때문에 땅이 저주를 받았는데 저주 받은 땅이 아담을 저주했다. 먼저 범죄한 하와는 아담에게 다스림을 받고 사모하게 되었고 아담은 범죄 했지마는 뒤에 범죄 했기 떄문에 하와를 다스리고 사모를 받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죄를 회개해야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옳은 교훈과 지도가 갈급이 되고 좋아지고 가까이 하게 되고 고통을 벗어나게 되고 인생을 다스릴 수가 있고 사랑으로 희생으로 봉사로 다스릴 수가 있고 인생의 사모의 대상이 되고 모든 만물과 가까워진다. 이것이 변치 아니한다. 죄를 정리하고 의를 행해야 이렇게 되는 법칙은 변치 않는다. 그러므로 행복과 존귀와 영광과 생명에 속한 모든 것을 원하면 죄를 정리하고 의를 행해야 한다. 이것이 새 사람이다. 이 법칙 외에는 자기를 행복스럽게 영광스럽게 하지 못한다. 죄를 정리하고 의를 행해야 한다. 이것이 새 사람이다. 이 법칙 외에는 자기를 행복스럽게 영광스럽게 하지 못한다. 죄를 정리하는 이것 외에는 없다. 죄를 두고는 행복을 구하지 말아야 한다. 의가 있는 곳에는 행복에는 행복이 있다. 영광이 있다.

3:22-24
이성과 체면을 가진 사람은 책망할 때에는 자기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을 책망하고 짐승같은 사람은 자기에게 가장 먼 사람을 책망한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꼐서 금하신 선악과를 먹는 일을 했다. 이로 인하여 그때에 인간에게 죽음이 왔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일을 해서 그 값이 완전히 들어난 것은 하나다. 하나만 들어 내어서 그 형벌이 얼마나 큰 것을 보여 주신 것이다. 하나만 보여 주신 것이 죽음이다. 하지 말라고 하시는 그 하나 한것의 값이 죽음이다.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신 것을 두개 했으면 인생의 죽음 같은 형벌을 두개 당한다. 세개 했으면 세개 당한다. 이것을 예수님이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형벌을 받으신 것이였다. 그러므로 그 은혜가 크다. 놀라운 은혜다. 범죄한 형벌을 죽었다가 다시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에서 정죄 받고 영원히 받는다. 선악과 한번 먹은 죄의 형벌이 이렇게 크고 영원한데 우리는 수천번, 수만번 선악과를 먹었으니 그 형벌이 얼마나 크겠나! 이것을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셨으니 그 은혜가 너무나 크고 놀라운 것이다. 우리가 영원히 찬송할 제목은 예수님의 피공로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으로 하여금 영생하지 못하도록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시고 이뿐 아니라 천사를 지켜서 생명나무 과실을 따먹지 못하도록 단속하시고 화염검(성령의 감화와 권능)으로 생명과를 찾지 못하도록 했다. "선악을 아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된 이것이 영생할까 하노라" 죽지 아니하고 망하지 아니할까 염려가 된다고 했다. "사망하지 아니할 위치와 사정에서 밀어내자 쫓아내자"고 하시면서 범죄한 아담, 하와를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이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하나님이 세운 대책은 ①.죽고 망하지 아니할까 하여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이다. 자기에게 유리하고 형통한 형편과 입장과 사정은 하나도 없고 죽고 망하는 그런 것이 있도록 그런 형편과 사정고 ㅏ처지를 하나님이 전능한 능력으로 마련하신 것이다. ②. 그룹들을 (천군, 천사)동원하여 생명나무 길을 지키게 하신 것이였다. 범죄하여 이탈하는 그 사람에게 형통한 것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사망의 입장과 처지와 사정과 행동과 계획 거기에서 만이 살게 하신 것이다. 사망만이 가득찬 그런 운동을 천군천사가 한다. ③. 화염검으로 두루 지킨 것이다. 화염검이 번쩍번쩍 하면서 두루 지키니 생명과 나무를 찾지 못하고 가까이 가지 못한다. 가까이 하면 칼이 찌른다. 행복한 것은 찾지 못하게 진리와 영감이 감추고 또 망하게 한다. 진리와 영감이 막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일을 하면 우리에게 행복이 오지 못하도록 하나님이 막으시고 천군천사가 막고 진리와 영감이 막는다. 그러나 하나님이 시키는 것 행하고 금하시는 것 행치 아니하면 우리에게 행복이 오도록 하나님이 도유시고 천군천사가 도우고 진리와 영감이 도운다.
①.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는 선생이 없고 지도자가 없고 경고 시키는 사람이 없음과 같이 하나님이 금하시는 그런 걸음을 걸으면 자기에게는 자기를 지도하는 자가 없고 선생이 없고 자기를 경고 시키는 사람이 없음을 말한다. 인생에게는 인간이상이 되신 분이 인생을 지도하고 경고하신다. 그런데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일을 행도을 하면 자기를 지도하는 지도자가 없게 되고 자기 이상 그런 분이 교훈해 주시고 경고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는 길이 끊어진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저주 받은 중에 하나다. 인생은 악해서 선생되기를 원한다. 자기에게 지도할 사람이 없고 경고할 사람이 없는 것을 원한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저주 받은 것 중에 하나인 것이다. 사람과 사람 차이는 좁쌀 하나 차이지마는 하나님과 사람 차이는 영원하다. 그러므로 인생에게는 인생이 아닌 하나님이 간섭하시고 지도하시고 경고하심의 관계를 맺지 못했으면 불쌍하고 가련하다. 이 세상에서 어떤 자리에 있어서 모든 것을 가졌다고 해도 불쌍하다. 나로 하여금 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지도와 교훈을 해주시는 하나님이 나에게 계신다고 하면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요. 하나님이 나의 선생님이 되시고 인도자가 되시고 지도자가 되시고 경고하시는 감독자가 되신다고 하면 이 사람은 행복한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될려고 하면 하나님이 시키시는대로 에덴동산을 지키고 선악과는 먹지 말아야 한다. 교훈자 하나님, 감독자 하나님, 인도자 하나님과의 인연이 끊어지는 것은 선악과를 먹는 것이다.
②. "우리 중에 하나 같이 되었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을 하나님 혼자서 하신다. 이와같이 인생이 자기 일을 자기 혼자서 하는 것이니 이것이 저주 받은 것이다. 인생은 혼자서 일을 하지 못하고 인간 이상인 하나님이 도와 주셔야 한다. 인간이 자기 일을 자기 혼자서 하는 것이 저주 받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일을 하면 하나님은 "오냐 네 일을 네 혼자서 해라"고 하시면서 손을 떼신다. 하나님이 시키시는대로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자기를 맡기는 것이다. 이 사람이 행복한 사람이다.
③. 하나님을 중심하여 하나님이 좋아하시면 악이요. 하나님과 멀어지면 악이다. 이는 하나님은 참이요. 완전자이시기 떄문에 그러하다. 그런데 독사와 시랭이 같은 사람, 이런 사람이 자기를 중심하여 하나님처럼 선악을 정하면 이것이 자기를 망하게 하고 불행스럽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같이 되면 멸망이요. 사망이요. 불행이다. 하나님과 진리를 중심하여 비판하고 평가하여 하나님과 하나되면 선이다. 내게 손해가 되어도 내게 배치가 되어도 하나님과 합치되고 하나님 중심이면 선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의 선생님이 되시고 지도자가 되어야 한다. 마귀가 와서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 그래서 하나님이 못 먹게 하신다"고 유혹하니 선악과가 먹고 싶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는 위반되지만 인간이 하는 것 보니 주일을 범해도 살겠다고 그렇게 생각되기 때문에 말씀을 범한다. 주일을 범해야 사업이 잘 될 것 같기 때문에 주일을 범하게 된다. 이 길이 에덴에서 쫓겨나는 길이요. 그룹들이 막고 있는 길이요. 화염검이 지키는 길이다. 주의 인도대로 가는 길에는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길에는 죽고 망하는 길이 아니고 이탈하는 것이 죽고 망하는 길이다.

3:1-19
이 창세기는 하나님꼐서 영계를 창조하시고 그 다음에 우주를 창조하시고 또 창조해 놓으신 모든 만물에게 대한 하나님의 근본이 되신 뜻을 우리에게 기록하여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창세기는 이 우주의 기록이요. 그 안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기원이다. 본장은 인류시조를 창조하시고 이 두 사람에게 약속을 하시고 이 약속을 지키지 아니했을 때에 어떻게 된 것을 말씀 하신 것이다. 세계의 이단이 창 3장에서 시작되는 것이 많다. 이 종교도 이 창세기를 끌어다가 허부한 논설들을 제작한 일이 많다. 성경을 잘 깨달아야 한다.
①. 여기 "뱀"을 계 12:9절에 보면 "용이라, 옛뱀이라, 마귀라, 사탄이라"고 했다. 뱀은 사탄이 아니고 사탄이 뱀을 통해서 역사한 것이다. 사탄의 기원은 유다서에 보면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 천사"라고 했다. 천사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한고로 타락하여 하나님과 대적이 되어 가지고 하나님에게 쫓겨나서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다. 어떤 교파에서는 루스벨 천사장이라고 한다. 지금은 미가엘이 천사장이다. (단 10:31, 12:1, 유 1:9, 계 12:7) 천사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해서 지능의 제한 받게 되었고 유리하게 되었다"고 유다서에 말씀했다. 죄는 우주가 창조 되기 전에는 이 우주 밖에 있었다. 천사장이 어떻게 해서 사망의 근원인 사탄이 되었는가?
: 천사장이 자기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가 자기를 존귀케 할려고 하는 욕심을 가지고 존귀하기 위하여 노력한 것이 타락하게 된 것이요. 자기가 자기를 높이기 위해서 높이는 이 노력을 한 것이 타락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지위와 분소와 본분에서 살아야 하는데 자기의 분수와 지위와 분분에서 지나다가 타락해서 죄악의 근원자가 되었다. 마귀, 사탄이 되었다.
이렇게 천사장이 하나님의 지위를 빼앗을려고 하나님과 싸우다가 천사로 좌천되어 하나님에게 쫓겨나서 공중에서 권세를 잡고 있다가 이제느 천사장 미가엘과 싸우게 되었다. 자기의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다가 천사장의 지위를 빼앗기게 되자 좌천된 그 자리에 있지 못하고 천사장 미가엘과 싸우다가 미가엘에게 져서 한층 더 떨어져서 이전보다 더 제한된 위치에서 살게 되었다. 땅으로 쫓겨났다. 공중에서 땅으로 쫓겨온 마귀가 따에서 권세를 잡고 있다가 이제느 ㄴ그리스도와 교회로 더불어 싸워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지위를 뺴앗을려고 하다가 한층 더 떨어져서 무저항에 떨어지게 된다. 또 무저항에서 천년동안 갇혀 있다가(계 20:1-3)나와서 성도들과 싸우다가 떨어져서 영원히 멸망하게 된다.(계 20:7-10) 그러므로 천사장이 하나님과 싸워서 떨어져서 천사로 좌천 되었고 천사장 미가엘과 싸워서 떨어져서 인간계로 쫓아 내려오고 하나님의 교회와 싸워서 떨어져 무저항에 갇히고 성도와 싸우다가 곡과 마곡과 같이 유황 불못에 영원히 떨어진다. 마귀는 올라갈려고 하다가 떨어지고 올라 가려고 하다가 떨어지고 올라가려고 하다가 떨어져서 영원한 유황 불못에 떨어진 것이다. 이 마귀의 인도는 어떤 인도인가? 올라갈려고 하는 인도다. 자기 분수, 지위, 가치, 이상의 것을 욕심 품고 그것을 취할려고 하다가 멸망케 하는 것이 마귀의 전투 방편이요. 지능 방편이다. 마귀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이사으이 위치, 분수를 탐하게 하고 남의 위치, 분수를 탐하게 하므로 망하게 하는데 이것이 마귀의 인도요. 마귀의 지식이요. 마귀의 방편이다.
②. 인류시조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타락한 원인은 무엇인가? 올라갈려고 하는 뱀의 유혹을 받아서 타락했다. 올라갈려고 하다가 떨어진 마귀의 본질과 지식과 방편을 따라서 이 아담, 하와도 자기의 분수와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선악과를 먹으면 네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리라"고 하는 이 말에 유혹을 받아서 아담, 하와가 하나님이 될려고 하여 선악과를 따서 먹고 타락하여 멸망 받은 것이다. 자기지위와 분수를 버리고 자기 이상의 지위와 분수를 취할려고 하다가 영원히 멸망 받는 조상이 되었다. 아담의 아들 가인도 아벨을 죽인 원인이 이것이다. 하나님이 시키시는대로 하지 아니하고 자기가 스스로 제도와 법도를 세워서 그대로 하다가 제이의 사망의 원인이 되는 분쟁을 마련했다. 마귀는 무엇을 가지고 꼬우나? 마귀에게 꼬임 받은 옛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나를 꼬우나? 자기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이것으로 꼬운다. 이것이 악령의 유혹이다. 마귀의 궤휼이 사람을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마다 접촉해 보면 자기를 높일려고 하는 것 뿐이다. 자기를 낮출려고 하는 것은 종자를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희귀하다. 성경에 보면 피조물은 자기가 자기를 높이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이 높여야 하고 자기 밖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높여야 한다. 모든 사망은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하는데서 나온다. 하나 가진 것이 두개 가진 줄 알고 계획하고 전투하는 것은 다 사망이다. 두개를 가진 것이 하나 가진 줄 알고 계획하고 노력하고 전투하는 것은 전부가 성공이다. 약 4:6 하반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신다"고 했고 벧전 5:5하반-6절에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시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 시리라"고 말씀했다. 교만한 자는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자요. 자기 분수와 지위에 대하여 불만을 가지는 자인데 그 근원은 자기 가치가 그보다 낫다고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하는데서 생겨 나온 것이다. 이것이 교만이다. 있는 것을 있다고 하는 것은 교만이 아니다. 자기와 자기에게 있는 것을 실지 이상으로 평가하고 자기 밖에 있는 것는 객관이 곧 자연이나, 사람이나, 조물주가 자기에게 대접해 주고 대우해 주는 것이 박하다고 생각하는 이것이 교만인데 모든 고통이 여기에서 나오고 뿐만 아니라 하나님에게 물리치심을 당하고 인류에게 자연에게도 물리침을 당하고 자기가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한 댓가를 지물한다고 잏생동안 녹는다. 사람을 녹히는 것이 무저갱에서 나왔다. 그 사람의 욕심에서 나왔다. 여기 말한 욕심은 바른 마음이 아니고 사욕을 말한다. 자기를 녹히는 것은 자기를 과대 평가하는데 나왔다. 자기 밖에 있는 객관들이 자기에게 대하여 대우해 주는 것이 정확하다. 하나인 것이 둘로 알면 자기 밖에 있는 것이 자기에게 대하여 박대하는 것이 된다. 자기에게 둘이 있는데 하나인줄 알면 모든 것이 자기에게 대하여 대우해 주는 것이 감사하다. 과분해서 감사라게 된다. 그러므로 천국과 지옥은 자기에게 있다. 겸손은 두개가 있는데 하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르 바로 알고 바로 평가하고 바로 취급하는 것이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는 만원짜리면 만원짜리로 나타나고 만원짜리로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고 일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마귀읭 본질과 본성과 사상이 인류 시조 아담, 하와에게 들어와서 시조가 타락하고 이것이 보통 생육법으로 출생한 우리에게 있기 때문에 세상에는 이것이 가득차 있다. 그러므로 자기를 과대 평가하는 것과 싸워야 한다. 이 전투를 잊어 버리면 자기는 벌써 교만했다. "그러므로 능하신 하나님의 손 아래에 겸손하라. 모든 사람들이 전부 높아졌다. 한층, 두층, 세층 도적질하여 올라가서 있기 때문에 거기에서 내려오라. 그리하면 하나님 내가 적당한 기회에 올려 주겠다"고 하는 말씀이다.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하고 보니 전부가 원망이요. 시비요. 그 결과는 사망이니 네가 네 지위, 분수를 바로 찾아라 그리하면 내가 너를 붙들고 역사하겠다는 말씀이다. 국민학교 교사가 대학교 교수를 할려고 한다. 이 사람을 그 자리에 갖다 놓으면 그 자리를 감당하지 못하고 발길에 짓 밝힌다. "네가 네 실력에 맞는 국민학교 교사를 하라. 그리하면 네가 자라면 대학교 교수도 되게 하겠다"는 말씀이다. 이 세상 사람들은 마귀의 방편을 취하다가 다 망했다. 그러므로 자기를 과대평가하는 죄를 회개해야 한다. 행복과 성공과 출세와 전진과 신임이 자기를 정평정가 하는데서 나온다. 자기를 바로 알아서 자기에게 알맞게 계획하고 알맞게 소망하고 알맞게 움직이는데서 행복이 나오고 성공이 나오고 전진이 나온다. 똑같이 배운 사람들이 하나는 성공하고 하나는 실패하는 것은 허영과 허욕 때문이다. 당장에 눈 앞에 성공될 것 같으나 실패의 원이 쌓이고 쌓여서 큰 실패가 되는 것이다. 자기르 보다 적게 평가하는데서는 전진속도가 느리지지마는 실패가 없고 자기를 과대평가하면 실패다. 마 20:1-에 보면 포도원 품꾼 비유가 있는데 이것이 여기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늦게 온 자에게나 먼저 온자에게나 노임이 같은 것을 보고 늦게 온 사람은 고맙게 여겼고 먼저 온 사람은 불평이였다. 그래서 주인과 대적이 되었다. 자기 이상의 댓가를 받는다고 하면 망하고 자기 이하의 댓가를 받으면 하나님이 끌어 올리고 사람이 끌어올리고 자연이 끌어 올린다. 그러므로 자기 분수 이상 올라가려다가 떨어지고 자기 실력이상으로 그 댓가를 받을려고 하다가 실직자가 되고 만다. 이것은 전부 마귀의 유혹을 받아서 그렇다. 인간의 한 사람, 두 사람은 악하나 전체의 사회는 선하고 자연도 변질 되지 아니하여 선하고 하나님도 선하다. 그러므로 자연과 인류와 하나님은 정당한 대우를 한다. 그러므로 정당한 이루어지고 만다. 어디서든지 자기를 정확하게 평가해서 합당한 분수와 대우와 가치 이것을 바로 계산해서 자기에게 합당한 지위를 찾으면 일꺼리가 있고 대우가 기다리고 있다. 자기 것을 버리고 남의 것을 찾아 다니기 때문에 얼마안가서 시비가 나고 절단이 난다. 자기 이하의 것을 잡았다고 하면 자연과 사회와 하나님이 밀어 올려서 자기 지위로 올려 놓는다. 그러므로 자기를 바로 모르면 자기 이하로 내려서야 한다. 그리하면 자기 아닌 것이 밀어 올리니까 쉽게 올라간다. 자기 이상 올라가면 자기 아닌 것이 끌어내리기 때문에 안 내려올려고 시비하다가 영원히 멸망이다. 그러므로 생명법은 자기가 내려 가려고 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있는 장점보다 자기에게 있는 단점을 찾아서 자기를 비판하고 평가하고 계획하고 대우를 받으려고 하니 올라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자기에게 장점을 표준해서 대접을 받을려고 하니 떨어져서 멸망할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올라갈려고 하지 말고 내려 갈려고 힘쓰라. 내려가면 자연이 올려주고 사회가 올려주고 하나님이 올려 주신다.

3:1-19
여기에 "뱀"은 마귀가 아니고 마귀가 이용한 것이다. 마귀는 천사장으로서 높아질려고 하다가 떨어지고 떨어지고 해서 앞으로 떨어질 곳은 유황불못이다. 자기 분수와 지위 이상으로 올라가다가 실패하고 허영과 허욕으로 실패한 마귀가 인류시조 아담과 하와를 유혹해서 실패하게 했다. 마귀의 유혹을 받은 아담과 하와는 실패한 마귀처럼 자기 지위와 분수를 원망하고 자기 지위와 분수 이상을 차지하여 하나님과 같이 될려고 하다가 실패했다. 오늘도 마귀가 이런 방편으로 사람을 유혹시킨다. 유혹시키는 종류는 많으나 유혹시키는 이치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다. 자기의 현실을 불만하게 하고 자기와 분수에 불만하게 하고 자기의 소유와 권세와 대우에 불만하게 한다. 이것이 에덴동산에서 꼬운 꼬움이다. "네 실력으로서는 지금의 네 지위가 낮고 합당치 않다. 너는 억울하다. 좋은 대우와 권세를 받도록 하라"고 치켜서 올린다. 마귀가 자기를 멸망 시킬려고 치켜 올리는 것인데 이것을 모르고 마귀가 치켜 올릴때에 좋다고 올라간다. 마귀가 치켜 올릴때에 좋다고 자기가 올라가서는 "나는 이만한 존재인데 이보다 나은 정도에서 이보다 나은 대우를 받고 살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이제는 자기 현실을 불마하고 올라가고 커지고 부요해 질려고 힘을 쓴다. 자기 실력 이상의 지위를 차지하고 보니 이 지위를 감당할 수가 없어서 실패하고 자기 실력 이상으로 계획하니 자본과 실력이 모자라서 실패하고 자기 실력 이상의 대우를 받고 보니 자연과 사회(인류)와 하나님이 대우해 주시는 대우도 불만하게 생각하니 모든 면에 불만이요, 시비요, 악독이요, 나중에는 사망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자기 스스로든지 다른 사람이든지 간에 자기를 높여주는 것에 대하여 높여주는 것은 여기에는 전부가 해 뿐이지 유익이 없다. 자기실상보다  ㄴ재가 낮아져 있어도 자기의 현실보다 높은 말을 하는 것도 자기에게 유익이 없다. 자기를 높여주는 것은 사망의 씨를 심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잠깐 자기보다 높은 위치를 취했다. 뱀과 말하던 때부터 선악과를 먹기까지 잠깐동안 자기 자체 이상의 위치, 자기 실상보다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영원히 떨어지고 말았다. 멸망했다. 첫째 아담은 자기 이상 지위, 대우, 욕망, 권세 이것을 몇달이나 몇해나 누린 것이 아니고 불과 몇시간이였다. 순간이였다. 첫째 아담은 자기 실상 이상의 지위나 자기 실력 이상의 소유와 대우를 자기 스스로 만들어서 가졌다. "나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가 있고나 선악과를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셨지마는 나는 먹을 수가 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창조 하셨으니 나도 그렇게 할 수가 있다."고 생각하고 큰 포부와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이것을 몇 시간 누리지 못하고 자기와 자기의 후손이 죽고 망하는 큰 댓가를 받았다. 요사히도 이런 병이 많이 들었다. "하루에 1000원을 벌이는데 내가 700원 받고 일을해" 하면서 어찌하다가 1000원 벌인 것 가지고 700원 벌이는 일을 업수히 여긴다. 자기 실력 이상의 것을 취하면 그 누리는 것이 잠깐이요. 잠깐 누린 그 댓가는 굉장히 큰 것이다. "내가 동회 서기를 해, 구청장을 해야지. 내가 동아대학을 가, 서울대학을 가야지"한다. 이것 때문에 자기도 죽고 자기 후손도 죽인다. 허영과 허욕으로 망한다. 천사장 루스벨이 하나님 다음으로 시력있던 자였는데 자기 실력 이상 의 것을 취하려 하다가 하나님에게 쫓겨나서 마귀가 되었다. 아담과 하와도 선악과를 버석버석 먹은 볓 시간의 허영과 허욕의 댓가로 자기의 전 생애를 망하고 영원을 망친다. 약간의 댓가를 내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실패자가 되고 천물이 되는 원인은 이것이다. 보리 한말 밖에 지지 못하는 것이 한가마니를 졌으니 자기가 넘어져서 다치는 것이 뻔한 일이다. 자기 실력으로서는 한 달에 2000이면 합당한 월급인데 이것이 적다고 집어 던지고 40000원짜리 직장을 찾아 다니다가 실직자가 된다. 자기 실력이사의 것을 계획하고 욕심을 가지다가 실패하고 천물이 된다. 자기를 정평정가 하지 못하기 때문에 허영과 허욕을 가지게 된다. 자기 실력에 합당한 현실이 자기 기업이요. 자기의 집이다. 그러나 자기 실력 이상 것을 탐하면 흑암에서 유리하게 된다. 무엇이 올까하여 방황하지마는 그 사람에게는 사망 외에는 올 것이 없다. 그러므로 자기 실력 이상을 탐하는 허영과 허욕을 뽑아야 한다. 분수와 지위를 바로 찾아서 거기에 서면 전 인류에게 없어서는 안될 존재가 되고 자기 분수를 떠나면 하나님과 전 존재에게는 거치는 기생충과 같은 자가 되고 만다. 그러므로 잠깐 누린 허영과 허욕의 댓가는 영원한 댓가였는데 첫째 아담은 이것을 받았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신 예수님은 이와 반대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시는 것은 말구유도 십자가도 지옥도 뷸만치 않고 주시는 그대로 지당한 줄 알고 만족하게 여기고 받아서 거기에서 그대로 지냈다. 하나님이 주시는 그대로 어디까지 천해지고 낮아지든지 귀해지든지 간에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시는 그 분수, 그 지위, 그 생활을 33년 4개월간이나 했다.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주신 지위, 소유, 대우 그대로 33년 4개월간이나 사신 그 댓가는 어떠했나,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앉았고 천상천하의 모든 것을 다스리게 되었고 천상천하의 모든 권세를 다 받았고 인류와 만물을 새롭게 하였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시는 지위, 분수, 대우, 소유를 떠나지 않고 거기에서 만족하고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살았으니 그 대우가 지극히 크고 영화롭고 권위 있어서 모든 피조물위에 뛰어났다. 빌 2:5-11절에 보면 여기에 대해서 말씀해 놓으셨다. 주님이 이렇게 사심과 같이 자기가 꺠달은 신앙양심대로 살아 천대, 고독, 고난, 감옥이 오든지 간에 이것을 떠나지 아니하고 여기서 사는 자의 대우가 영원하다. 자기가 신앙양심대로 진리와 영감대로 살다가 만나지는 것은 어떤 것이든지 이곳은 내가 살 곳이요. 자기 소유요 자기가 받을 대우다. 그러므로 괴로워도 고독해도 주님이 나에게 주신 지위, 분수, 대우를 떠나지 아니하고 모든 것을 주님에게 맡겨 놓고 산자의 대우가 주님이 받으신 것처럼 영원하다. 그러므로 영원한 사망의 대우를 받겠느냐 영원히 보상의 대우를 받겠느냐! 자기의 신앙양심대로 진리와 영감대로 살므로 자기에게 만나지는 것은 자기의 지위요. 자기 길이니 여기에는 영영한 보상이 기다리고 있다. 아브라함을 알아 주지 아니했으나 그는 예수 그리스도 다음가는 머리다. 그러므로 올라가다가 망하는 그 값이 크다. 사람이 허영과 허욕을 가지면 자기의 일생은 헛일이다. 그 댓가를 치루고 나면 일생은 헛일이다. 이와 반대로 자기 지위, 분수, 자기 길을 바로 찾아 가지고 이것을 요동치 앟고 한번 걷는데에서 높아지고 커지고 두번 걷는데에서 더 높아지고 커진다. 이 길을 걸으면 생명을 내어 놓는 일이 많지 아니하다. 그런데 생명 내어 놓는 일을 몇번이나 당하고 나면 그 사람의 보상이 얼마나 크고 영화롭겠나. 세상의 성자가 이 걸음을 다 걸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실력은 낮아지는 것이다. 그런데 낮아지는 것이 어렵다. 그러나 낮아지면 올라가기느 쉽다. 올라가는 것은 객관이라야 쉽다. 자기가 올라갈려고 하면 안된다. 객관이 올려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낮아져라.

3:1-19
창 3장은 인류타락의 근원장이기 때문에 심히 복잡하다. 몇가지만 간추려서 간단하게 말씀드리겠다.
①. 죄는 우주 밖에 있었고 인류시조때에 우주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천사로 부터 시작된 죄가 인류시조에게 임하여 모든 사람에게 죄가 임했다.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다. 이 죄의 동기는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지위, 분수, 자체의 가치를 만족하지 않고 거기에서 더 커지고 높아지고 값이 비싸질려고 하다가 범한 행동이 죄다. 이 죄는 에덴동산에서만이 그런 성격으로 역사하는 것이 아니고 오늘도 그 본질과 본성으로 역사한다. 우주에 들어오기 전에 영계에서 이 방편으로 범죄했다. 그 결과는 높아질려고 하다가 떨어졌고 귀해질려고 하다가 천해졌고 더 많아질려고 하다가 빼앗겼다. 우주 밖에 있던 죄의 주인인 악령과 우주 안에 있는 죄의 주인인 인간은 자기극 과대 평가해서 하나님이 자기에게 주신 것이 부족하다하여 좀더 지위가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요. 자기 분수가 부족하다 하여 좀도 나은 분수로 나아갈려고 하다가 망한 것이였다. 이것이 원죄다. 그러므로 원죄와 본죄는 이 성질대로의 죄다. 이것을 명심해야 한다. 자타간에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하는 것은 벌써 마귀에게 점령당한 것이요. 타락한 멸망의 죄악성이요. 자타를 망치는 원수인 것을 지적해야 한다. 자기가 자기를 높이려고 하는 이것은 미친 것이다. 자기 자신의 분수를 만족치 않고 자기의 분수를 불평하고 자기 분수보다 나은 분수에서 살려고 하는 이것도 미친 것이다. 내가 내 분수를 불평하고 더 나은 분수에서 살려고 했으면 "내 속에 미친병이 일어나는구나"라고 정평해서 단정을 지어야 한다. 자기 지위 이상을 노리는 것도 미친 것이다. 이런 것들은 귀신들린자가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무덤에서 사는 것과 같은자다. 자기 자신을 자기가 해치고 사망으로 이끌어 드리는 것이다. 자기의 가치, 지위, 분수, 대우 이것이 자기에게 합당하도록 하나님이 섭리하신다. 느부갓네살왕이 천하의 대왕으로 지냈으나 7년간이나 들에서 풀을 먹고 이슬을 맞고 다녔다. 이것이 억울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그때에는 그에게 합당한 대우와 지위와 가치로 주신 것이다. 7년후에 즉시 대왕으로 들어 올리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에서 천사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기 분수를 넘고 지나친 욕망을 가지다가 멸망한 것과 인류 시조 아담, 하와가 자기 지위를 지키고 않고 자기 분수를 넘고 지나친 욕망을 가지다가 멸망한 것과 지금도 인간들이 이것 때문에 망했고 지금 사람도 이것 때문에 망한다. 행 8:17-23절에 보면 사마리아 성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던 시몬이 이 원죄와 본죄대로 올라갈려고 하는 것을 자기를 지나치게 평가 할려고 하는 이것을 베드로가 보고 "네가 불의에 메여 있고 네가 악하다"고 책망을 했다. 요사히는 자기를 과대 평가하는 이것이 자타를 멸망 시킨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다. 세상에서 박사라고 하는 사람도 이것을 모르고 있다. 어떤 수단과 방편을 사용해서라도 좀더 높은 대우를 받을려고하고 좀더 높은 지위에 올라갈려고 한다. 이런 마음만가져도 자타를 죽이는 것인데 이 주장을 가지고 자기를 높일려고 하니 이 세상은 완전히 사망 아래에 있다.  자기의 지위, 가치, 분수, 대우 이것을 높이는 것의 주권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 자기는 낮추는 것이 자기 일이다. 자기의 장점보다 자기의 단점을 따라서 대우를 기다리고 분수를 지켜야 한다. 이런 자에게는 자기 분수와 대우 이상으로 대우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자기의 단점을 상대하여 사는 삭람은 자기가 처하여 있는 현실의 대우가 과분하다고 하기 떄문에 전부가 환영한다. 첫째 아담은 올라갈려고 하다가 떨어졌고 부요해질려고 하다가 가난해졌다. 그러나 들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 하나님이시나 천한 인간이 되셨고 죽기까지 복종하시므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극히 높여 하나님 우편에 앉게 하시고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존재들이 예수 그리스도앞에 굴복케 하시고 주라고 시인하게 했다. 예수님은 낮아지고 가난해지기 위해서 오셨다. 이러므로 높아졌고 부요해졌고 예수님 한분으로 모든 존재가 살게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예수님의 공로를 입은 자이니 낮아져야 하고 이 예수님을 위해서 가난해져야 한다. 우리가 우리 대우 이상의 높은 대우를 마련하다가 저질러 놓은 것을 해결해 주실려고 예수님은 낮아졌고 우리가 우리의 분수이상 부요해질려고 하다가 저질러 놓은 것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예수님은 가난해졌고 우리가 우리 지위 이상의 놓은 지위에 올라갈려고 하다가 저질러 놓은 것을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 종이 되셨다. 낮아지데에는 사망이 없다. 자기를 조금 값이 싸게 평가하는 데에는 행복이 깃든다. 그러므로 높아질려고 하는 이것을 버려야 한다. 이것이 원죄다. 원죄가 있는데에는 기쁨이없고 감사가 없고 하나님의 은혜가 없고 향상과 전진이 없고 성화가 없다. 거기에는 불평, 불만, 원망, 시비, 분쟁, 낙망, 비통, 살해 뿐이다.
②. 6절에 해아가 선악과를 보니까 "먹음직하고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웠다."계명을 어겨도 그 직장을 가면 좋겠다고 여겨지고 계명을 어겨도 그 지위를 차지 했으면 좋겠다고 여겨진다. 계명을 어기지마는 주일을 범하지마는 신앙생활을 못하게 되지마는 그 돈을 가지면 좋겠다. 저 사업을 하면 좋겠다. 그 사교를 했으면 좋겠다고 여긴다. 그러나 좋겠다고 보여져서 가지면 죽는다. 먹음직해서 먹고 죽었다.  광채가 있고 풍채가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도 그 행동 그 노력을 하면 죽고 망한다. "지헤롭게 할만하다." 말씀을 어기고 취하면 자기에게는 가장 잘하는 것 같이 보이고 지혜롭게 하는 것 같이 보여서 그 일을 한다.  그러나 죽었다. 농사 짓는 사람이 농번기에 있어서 새벽에 일찌기 논에가서 모를 심고 예배 시간에 예배보러 왔다가 예배 마치고 가서 또 모를 심는다. 일년에 한번 밖에 없는 이 기회를 놓자면 가을 추수가 없을 것이니 이런때는 이렇게 하는 것이 지혜롭게 보여진다. 그러나 그렇게 했으면 죽었다. 선악과를 보니까 먹음직하고 보암직하고 지혜롭게 하는 것으로 보여져서 따먹은 결과가 어떠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취직하고, 사업하고, 공부하고, 출세하고, 사교하고, 장사사고, 결혼하고, 난 뒤에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자기 눈에 좋게 보여지는 대로 행하고 자기 귀에 좋게 들려지는 대로 행하고  자기 마음에 좋다고 생각되는 대로 행한 결과는 어떠한가.
  ⓐ.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하나님과 벌어지고 하나님과 동행이 없고 모든 것을 책임지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잊어버렸다. 지금도 그때와 같다. 사망의 눈은 제 주머니에 100원 짜리 한장 나간 것은 알아도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자기와 자기 자손에게 화가 온 것은 보지 못한다. 이것은 제 눈에 보이지 않게 온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하나님과 멀어진다. 처음에 조금 벌어지면 좀 알지마는 벌어질수록 이것을 모른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도 만족하게 여긴다. 돈 때문에 망했으면 알아야 할 것인데 이것을 모르고 돈을 더 의지 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직장을 가졌으면 하나님을 팔아서 직장을 산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으 말씀을 어겨가면서 농사를 지었으면 하나님을 팔아서 농사를 산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팔리시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멀리떠나가신다. 미련한 눈에는 하나님이 없어도 상관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 없는 결과으 보응이 오면 그 때에야 하나님을 찾지마는 이때는 벌써 하나님은 떠나갔다. 그러므로 미래의 것을 아는 것은 축복이요, 현재의 것을 아는 것은 놀라는 것이요. 지나고 난 뒤에 아는 것은 후회다.
  ⓑ. 아담과 하와가 서로 사랑하므로 주고 먹었으나 자기와 자손대대가 사망했고 서로 원수가 되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뼈중에 뼈요. 살중의 살이요. 서로가 책임지는 둘이 한 몸이라"고 했는데 선악과를 먹고 난뒤에는 "너 때문에 먹었다. 하와 너 때문에 망했다."고 했다. 여기에는 기록되지 아니했지마는 하와도 아담을 원망했을 것이다. "아담 네가 나를 책임졌으니 나는 먹었을찌라도 너는 먹지 아니했으면 나도 망하지 아니했을 것이다."고 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사람을 사귀지마는 이것이 얼마가지 않는다. 그 사귐이 절단이 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서로가 찰떡 같이 사랑하고 위하고 아끼지마는 이것이 얼마 안 가서 미움과 해침으로 되어지고 마지막에는 회복치 못할 원수가 된다. 아담과 하와는 회복이 없었다. 그대로 심판 받아서 멸망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서로가 찰떡 같이 사랑하고 위하고 아끼지마는 이것이 얼마 안가서 미움과 해침으로 되어지고 마지막에는 회복치 못할 원수가 된다. 아담과 하와는 회복이 없었다. 그대로 심판 받아서 멸망 받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영광스러운 것이 없다. 수치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평안이 없다. 고통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기쁨이 없다. 슬픔 뿐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행동한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당사자끼리 원수가 되고 고통이다. 선악과 먹은 이 원죄의 값인 사망만이 이 세상에 나타났으나 본죄의 값은 이 세상에 나타나지 아니했다. 이 본죄의 값은 영원한 심판 후에 나타나는데 그 값이 무지무지하게 크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가면서 사람을 사귀지 말것이요. 위하지 말것이요. 사랑하지 말것이다. 그 결과가 원수로 되어진다.
  ⓒ. 17-18절에 아담의 범죄로 인해서 땅이 저주를 받았기 때문에 땅이 아담에게 혜택을 주지 아니한다고 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므로 만물과 원수가 되었다. 지금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서 농사를 지으면 그 농사가 효력을 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겨 가면서 장사를 하면 그 장사가 자기에게 효력을 주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는 자에게 하늘은 놋이 되고 땅은 철이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면 신령한 면부터 먼저 절단이 나는데 이것은 눈에 보이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지 말라고 하시는 일을 하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일을 하지 아니하고 고집을 부리다가 하나님과 원수가 되고 인간과 원수가 되고 만물과 원수 되었으니 하나님과 인간과 만물에게 멸망을 받는다. 이것은 천지는 변해도 변치 아니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내게 온 것은 내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돈이 왔으면 이 돈은 내 것이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므로 지위와 권세가 왔으면 이 권세와 지위는 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과 물질에게 존대를 받을려고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 뿐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꾀나 수단이나 술책에 녹아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이런 무능한 하나님이 아니시다. 회개하고 하나님에게 돌아와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이것을 참아 기다리시는 것 뿐이다. 그러나 사랑과 긍휼이 많으신 하나님이시지마는 참으시는 것도 한계와 정도가 있다. 참으시는 그릇이 차면 하나님은 그릇을 엎으신다. 노아시대에는 하나님이 그릇을 엎으시니 수 억만명이 홍수로 전멸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저 뿍뿍 순종하는 것 뿐이다.


<4장1~26> 가인의 제사와 아벨의 제사
가인은 믿음을 버리고 자기 세상과 자율과 사욕에게 이용된 사람이요, 아벨은 자기 세상을 믿음으로 이용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가인의 제사는 세상과 자율과 사욕을 쫓아서 드린 제사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지 아니했고 아벨의 제사는 하나님의 약속을 순종하는 믿음으로 드렸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받으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벨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성도다.
7절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고 말씀했는데 선행을 계속할 때는 죄가 침노하지 못하고 선행하는 것을 피곤하게 여길 때부터 쉴 때까지는 움직이는 것은 전부가 죄가 된다. 회개할 기회는 양심에 가책이 될 때요, 이때에 회개하면 벌이 없고 그후에는 회개해도 벌이 있다. 가인과 아벨은 초대교인이다. 당시에 가인과 아벨외에도 다른 사람들이 있었으나 여기에 기록되지 아니한 것은 성경은 우리 구원에 필요가 없기 때문에 여기에 기록하지 않했다.


4:1-10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다른 피조물보다 우대 하셨다. 인격이 없는 것은 물건을 다스리는 것 같이 여기고 물건을 보고 좋아하는 것 같이 여기시지마는 인격을 가진 사람은 이와 다르다. 인격대 인격이 ???인고로 그 관계는 다른 피조물과는 다른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요, 물체가 아니신고로 물질을 보니 좋은 느낌은 가질 수가 있으나 물질을 접촉함으로 느끼는 육과 육이 접촉함으로 느끼는 기쁨은 가지시지 못하신다. 예수님은 신성이신 참 하나님과 인성이신 참사람 (이둘이 다 한 인격자인데)이 합해서 한인격을 이루기 까지 결합 된 분이시다. 이 결합은 완전결합이다. 그러니 신성은 창조주 하나님이시요, 인성은 피조물이요, 소유물이지만 그 인격의 결합은 완전결합이다. 창세 전의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쁘하신 소원은 당신의 인격에 맞는 상대자를 만들어 교제하기 위함의 소원이다. 아브라함도 에녹도 노아도 모세도 다윗도 하나님이 좋아하신 것은 육체의 미가 있어서 좋아하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인격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인격을 제일 좋아하신 때는 예수님이 세상에 탄생하신때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소원에 맞추어 여생을 가지고 계셨기 때문에 하나님은 기뻐하신 것이다. 그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내가 기쁘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이 신인양성일위가 되신 것 같이 하나님과 사람과의 결합을 책임지시고 중보가 되신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하셨다"고 말씀했다. 이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땅에 세상에 오신분이 예수님이시요, 이를 첫 열매라 장자라 중보자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장자요, 우리는 만물에게 장자다. 그래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자의 충만이니라"고 말씀했다. 인격결합을 가지니 영혼이 살았는데 하나님과의 인격결합이 범죄하므로 깨여지니 영혼이 죽었다. 범죄전의 아담과 하와의 결합은 그들의 주체인 인격적 결합이였다. 인격결합이 되고 육의 구별이 없이 "뼈중의 뼈요 살중의 살"이 된것이다. 주격인 인격이 움직이니 소유격인 육체는 인격의 움직임에 따라서 사용된 것 뿐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느끼는 물체와 물체의 접촉에서 오는 기쁨(밥을 먹음으로 오는 기쁨 ... )은 맛보실 수가 없고 다만 인격체 인격결합에서 오는 기쁨은 맛보시는 것이요. 그 관계만 가지시는 것이다. 영혼과 육의 관계도 이와같다. 따스함, 시원함, 음식을 먹어서 기쁨을 누리는 것은 육이니 없어질 것이다. 이는 물체와 물체가 결합하는 것이다. 이는 물체와 물체가 결합하는 것이다. 인격은 이 낙을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격은 물체를 사용해서 물질계에 나온다. 영혼이 물체를 통하여 나타나는 오묘한 나라에서는 영원히 왕은 예수님이시다. 땅에 있는 동안에는 물과 물(物)의 결합이다. 이 결합이 아니면 번식이 안되고 현상유지가 안된다. 이 세상에서는 밥을 먹는 것이나 남녀 동침결합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나 인격이 물질을 통하여 나타날 수 있기 위한 필요인 것이다. 이것 외에는 필요가 없다. 밥을 먹는 재미나 동침하는데서 오는 재미나 물질을 취하는데서 오는 재미나 다 같다. 이것은 다 물질과 물질결합에서 오는 것이니 물질이 가감에서 오는 낙이다. 그러나 하늘나라에 물질을 고정시키기 때문에 영원히 변치 않는 신령한 것으로 변화시키니 물질을 존속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없다. 그래서 물질결합에서 오는 낙이 없다. 순전히 인격과 인격결합의 재미와 인격의 물질을 사용하는 재미 뿐이다. 천국은 물질과 물질의 결합에서 누리는 재미가 아니고 인격과 인격결합에서 오는 낙이요, 영이 누리는 낙이다. 주인이 집을 지으면서 기쁘하는 것은 일하는데에서 기쁘하는 것이 아니고 집을 사용하는데서 기쁘하는 것이다. 밥을 먹으니 재미있는 것은 밥을 먹음으로 사는 재미니 주격인 영이 사용하여 느끼는데서 흘러 나오는 재미다. 만들때의 재미보다 만든 후에 만든 것을 사용하는 재미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재미가 있다. 인격자인 영이 몸을 사용하는 것은 하나님을 점점 차지하게 된다. 이 재미가 비교 없을 만큼 제일 고귀한 재미다. 귀한 것을 보면 천한 것을 버리지 아니할 자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위에서 여러가지 결합이 있는데 물질과 물질의 결합은 없어질 것이요, 인격과 인격의 결합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과 물질의 결합을 통하여 인격결합을 가졌으면 썩어질 육으로 썩지 아니할 신령한 것으로 거두는 것이니 가치가 있다. 홍포 입은 부자가 음부에서 말하는 것은 영이 말하고 있지마는 순전히 육의 지식으로 하는 말이다. 세상에 있을때에 순전히 육으로 생활 했기 때문에 육의 지식이 연습 되었기 때문이다. 물 한방울 요구한 것이나 동생들을 부탁한 것이 순전히 육의 지식에서 나온 말이다. 영의 지식에서 나온 말은 아브라함이 말한 것이다. 인격과 인격의 결함은 영원하고 인격과 물질은 결합이 아니고 집 주인이 집안에서 사는 것과 같이 인격이 물질안에 거하면 ??물질을 사용하는 관계다. 그러므로 결합은 인격결합 하나 뿐이니 땅위에 있는 동안에 이 결합을 키울 것이다.

4:1-6
가인은 아담과 하와의 영과 결합되지 아니했고 아벨은 아담과 하와의 영과 결합되어 하나님과 연결이 아벨에게 계속해서 내려왔으니 이것이 교회요, 지상교회의 시발이다. 교회는 선지자의 터 위에 세웠으니 첫 선지자는 아담이다. 선지자를 통하여 선지자를 육성했으니 이것이 선지자의 터 위에 교회를 세우는 것이다. 전체를 말하면 예수님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것이니 구약시대에는 미래의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자기의 구원을 이루는 것이니 양의 피로 예수님을 대신 한 것이다. 그러므로 혈육 계통에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고 신앙계통에서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그들이 행한 사역을 통해서 그들과 내가 하나가 되어 한몸을 이루는 것이니 그들과 나는 그리스도의 지체요, 교회다. 눈과 손과 발과 입이 서로 멸시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서로의 구원이 잘 이루어 나갈수 있게 하는 것이니 그리스도 안에는 대적이 있을 수가 없다. 그러므로 교회의 단일성을 기억해야 한다. 예수님의 몸은 하나 뿐이니 지금은 예수님의 몸을 세우는 중에 있다. 진리와 영감으로 중생된 사람들이 한테 뭉쳐서 하나가 된 것이 교회이니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다. 우리의 몸은 형제들이니 나는 형제들에게 속했고 형제는 나에게 속한 것이다. 우리는 잘못하면 예수님은 좋아하고 형제는 싫어하기 쉽다. 이것은 어리석고 잘못된 것이다. 나만 구원을 이루고 형제는 구원을 이루지 못해도 상관이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에는 계통이 있고 전체가 하나가 되어 한구원을 이룬다. 그러므로 믿는 이치를 지식의 곡간에 넣는 식으로 하지 말고 배워 보존하여 이것을 사용하는 자로 살아야 한다. 주입식으로 이치를 받는 자는 계통이 없고 노선이 없고 늘 받는데서만이 살기 때문에 현실에 맞추어서 살게 되고 주위와 환경이 변동됨에 따라서 변해진다. 그리고 힘은 이치에서만 얻어야 한다. 자기 속에서 힘을 내어야 한다.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 했다. 또 "누구에게서 배운 것을 알아" 처음에 배운 것을 들추어 내어서 이미 배운 것을 또 배워서 자기 속에 주입치 말아야 한다. 그리고 힘은 이치에서만 얻어야 한다. 행함의 선택은 자기 속에 있는 신앙 양심을 가지고 선정해야 한다. 이렇게 착한 양심을 가지고 찾으면 성령님이 가르쳐 주신다.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고 했으니 찾으면 "기름 부음이 가르쳐 준다" 아벨이 아담의 영과 관계를 가진 것이니 이것이 지상 교회의 시발이다. 아벨은 아담에게서 배우고 아담은 하나님에게서 곧 앞으로 오실 사람이신 예수님에게서 배운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하여 교회가 이루어진 것이요, 하나님과 사람이 합해진 경계선은 예수님의 신성과 인성이 합해진 경계선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인성을 "첫 열매"라고 했다. 예수님의 인성에서 아담에게로 아담에게서 아벨에게로 이렇게 계통적으로 내려온 것이다. 구약 끝에서 예수님의 인성이 나타나서 여기서 사도들에게로 계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선지자와 사도들의 터 위에 교회를 세웠다고 한다. 그러므로 선배, 후배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지상교회는 단일성이요, 동양사람과 서양사람의 관계를 끊을 수 없는 지상교회는 단일성이다.

4:1-7
가인과 아벨의 생활에 차이가 있어서 하나님은 아벨의 생활과 아벨은 받으시고 기뻐하신 것이다. 가인은 농사꾼이므로 곡물로 아벨은 양치는 사람인고로 양의 첫새끼와 기름을 하나님께 드렸다. 여기에 제사하는 것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드려서 섬기는 일을 하는 것인데 섬기는 이 일을 이치에 맞게 해야 한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이치에 안 맞았기 때문에 버림을 당했고 아벨은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이치에 맞았기 때문에 하나님에게 환영을 받았다. 구약 이스라엘도 하나님을 섬길때에 곡식을 드려서 하나님을 섬겼다. 1년에 세번씩 하나님에게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다. 그런데 왜 가인은 멸망을 받았는가? 구약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리는 소제는 순전히 곡식으로 드리는 제사인데 가인은 곡식으로 제사를 드렸는데도 버림을 받게 되었는가? 제물이나 예물이나 전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인데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면 일체의 전부가 제물이다. 행위의 전부가 제물이다. 회개하는 것, 전도하는 것, 연보하는 것, 선행하는 것, 헌실하는 것, 전부가 제물이다. 제물이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여기에서 어떤 사람의 제물은 받으시고 어떤 사람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셨다고 하는 것을 보이신다. 가인과 같은 성질이면 안 받으시고 헛일이요. 아벨과 같은 성질의 제물이라야 하나님이 받으신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일이 첫째로 나타났고 둘째로는 가인과 아벨의 제사드림이 나타났다. 가인과 아벨의 갈라짐이 참된 교회와 거짓교회의 갈라짐의 시발이다. (개인적으로 교회적으로 참과 거짓을 구별하기가 힘이 든다.) 그러므로 아벨과 가인의 갈라짐은 전체적으로는 교회적으로 참과 거짓의 갈라짐이고 개인적으로도 자기안에 참과 거짓의 갈림이다. 천주교의 교리가 이단이지 구속에도 택자가 있으나 거기에도 구원받을 자가 없다고 단정치 못한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이 갈라짐과 같이 교회와 신조적으로 정통과 이단이 있고 교파에게도 교회에도 정통과 이단이 있고 교인에게도 참된 교인이 있고 거짓교인이 있고 개인에게도 성화된 부분과 성화가 안된 부분이 있다. 이것을 구별치 아니하면 성화구원인 건설구원은 실패한다. 아벨은 양으로 제사를 드렸으니 그리스도의 대속의 터 위에서 드렸고 가인은 곡식으로 드렸으니 그리스도의 대속없이 드렸다. 그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았는데 그렇게 말하면 너무나 범위가 넓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받는 것이요, 하나님께 청구하는 일이요, 자기 것으로 완전히 만드는 일이 되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서 하나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연보하는 것도 헌신하는 것도 하나님의 것으로 삼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보관하고 있던 것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전기로 통과하여 영원히 자기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땅위에는 제것이 없고 하나님의 것을 보관하고 있는데 잘못하면 영원히 만날 수 없고 만난다고해도 영원히 사용치도 못하는 것이다. 가인과 아벨이 하나님께 드림으로 달라고 하는 것은 같은데 달라고 하는 종목이 다르다. 가인은 곡식을 달라고 하고 아벨은 양과 기름을 달라고 한 것이니 곡식은 범죄한 후에는 하나님과 상관이 없고 양과 기름은 하나님과 상관이 있는 것이다. 양은 예수 그리스도를 대신한 것이요, 기름은 성신이니 ???일에 협조한다. 우리가 모든 일을 할 때에 예수님과 성령을 ????야 하는데 죄에서 의로워지는 소원과 의에서 의로????는 소원과 성신의 협조를 원하는 소원으로 해야 이것이 ????소원이다. 봉사도 헌신도 연보도 전도도 심방도 소원에서 해야 한다.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을 받으시고 사람의 행사를 받으실 수 있는 것이다. 일생을 이것으로 살아야 하는데 이것이 없는 그 시간과 날은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시간이요, ????다. 영감을 받을려고 하는 소원이 없ㄴ느 시간과 날은 하나님이 받으????없는 시간이요, 날이다. 그러므로 죄를 없앨려고 하는 소원, 의와 영감을 사모하고 갈급하는 시간과 날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받지 아니하는 시간이요, 날이다. "양심에 자책할 것이 없으면 담대하라" 말씀했는데 현재의 과거에 범한 죄를 회개하여 하나님이 받으실 수 ???담대하다는 말이다. "자책할 것이 없다." 이것은 ???에 의를 구하는데 있어서 다 구했고 성화 될 것이 없는 ???? 아니고 미래에도 회개 할 일이 있고 의를 덧입을 것이 ???? 이것을 찾으면 자책할 것이 없는 것이다. ???으로 제사를 드린 것은 하나님의 어린 양을 달라고 하는 것???? 지금은 어린양을 구하는 시기다. 그러므로 어린양을 달라????하는 요청이 아니면 하나님이 ??? 필요도 없는 것이다. ???죄와 칭의, 영감 밖에는 받을 것이 없는데 지금은 이것을 받을 시기다.

4:1-7
하나님과 아벨자기와 마귀와 새생명과 그리스도의 대속이 합한 한인격을 가진 것이 아벨이요, 하나님과 연결을 가진 것이 아벨이다. 가인은 순전히 자기만인고로 버림을 당했다. 결합에는 인격결합과 무인격결합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격결합을 원하신다. 자체와 행위의 전부를 합해서 자기라고 한다. 하나님과 영교를 맺는 것은 인격이나 소행은 인격의 표시가 되????다. 나는 특수한 은총으로 지음을 받은 자인데 원죄?????하고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진리와 영감으로 중생된 자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죄를 죽고 죄를 벗고 의는 입고 의는 가지고 의는 건설해야 할 사람이다. 천국에서는 의만 행하는 것 뿐이요. 지금 우리의 영은 이 일만 하고 있다. 예수님과 성령님이 육을 죄에서 구원하며 성화시키는 책임을 진것 같이 우리 영도 이 책임을 지고 있는 것이다. 중생된 영은 하나님과 진리와 성령으로 다시 살아 났으니 그의 힘과 움직임은 진리와 영감의 힘이요, 진리와 영감의 움직임이요, 영혼은 진리와 영감에게 피동이다. 하나님이 아벨은 취하고 가인은 버리신 것은 결합적인 차이로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리신 것이다. 하나님과 인격적인 결합을 가진 아벨은 취하고 육체적인 결합을 가진 가인은 버리신 것이다. 회개의 책임은 영에게 있다. 영이 육을 뉘우치게 하는 것이니 영은 의사요, 육은 환자로서 영이 육을 죄에서 구원하는 것이다. 회개 시키는 것은 영이요, 회개하는 것은 육이다. 인격체는 이제까지의 자기의 소행을 한테 뭉쳐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영과 육사이에 죄가 끼여 있는 이 사람으로서 나타나야 한다. 전적부패한 자인 동시에 하나님과 같은 온전한 자임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는 버리고 미워하고 죽이고 하나는 취하고 사랑하고 살려야 한다. 지금까지 가인과 아벨의 그 자체가 어떠함을 말했다. 또 하나는 제사드리는 방편과 목적이 틀렸기 때문에 하나는 취하고 하나는 버리신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으로 제사??고 아벨은 하나님에게 받는 것으로 제사했다. 드리는 것??받기 위한 것이였다. 하나님께 드림은 진리대로 드림이 ??으니 진리대로 변하여 옮긴다는 것이다. 오늘 우리의 인격은 예수님과 나와 하나가 되어야 하니 의인이면서 죄인???순종자면서 거역자요. 한없는 희망이 있는 ????이면서 한 없이 희망이 없는 자로 대하는 것이 인격??????이 인격결합을 가져야 아벨이다.

4:1-7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종류적으로는 불택자와 택자를 ????교회에도 참된 교회와 거짓교회를 말하고 개인에 ?????성화된 부부와 성화되지 아니한 부분을 말한다. ???질적으로는 자체적으로 인격과 육체를 말한다. 하나님이 ??? 하실때에는 인격체와 무인격체를 창조하셨다. ???인격체와 교제하시고 기쁘하시나 무인격체와는 ????도 아니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는 인격결합으로 영원히 사???? 당신의 인격의 상대자로 길러서 "그리스도의 장성한데까지 자라가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인격체로 된 것 만큼 ??동거동행 하신다. 가인은 인격을 벗어버렸고 ????줄로 나타났기 때문에 사람 취급을 못 받고 하나님에게 버림 받은 것이다. 무인격체의 소행과 행위 때문에 사람 취급을 받지 못한다. 이렇게 무인격이 된 것은 무신성이 된 것이요, 무인격의 행위가 된고로 무신성의 행위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아니고 짐승이다. "사람이 육체가 되었고"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본지위와 타락한 것, 하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다시 중생된 자기로서 뱀과 예수 그리스도로 뭉친 것이 자기인데 이 자로 나타???인격이 나타나는 것이다. 또 방편적으로 아벨은 하나님의 것을 제것으로 받는 방편으로 하나님께 드렸고 가인은 제것을 가지고 하나님에게 드리는 방편을 가졌다. 가인의 일은 자기 마음으로는 되었지마는 실질적으로는 안되었다. 그러므로 가인은 하나님을 흔들어 볼려고 하는 자요, 다시 말하면 아담과 같은자요, 다시 말하면 선악을 아는 것이 하나님과 같은 자요, 자기중심자요, 자기것이 있는자요, 중생되지 아니했다. 때문에 옛사람 그대로 있었다. 아벨은 하나님에게 속한자요, 하나님에게 속한 것으로 드림으로 신자요, 하나님의 것으로 살고 하나님 중심으로 산자요, 중생된자로 살았으니 하나님은 아벨은 취하시고 가인은 버리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것으로 된자가 하나님의 것으로 움직여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영생한다. 가인의 생활은 받고 싶어도 방편이 틀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못 박으신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영원한 자기 것으로 바꾸는 것이니 하나님께 얻은 것이다.

4:1-7
하나님이 소유하시는 것은 시은적으로 소유하시고 관활적으로 소유하시고 창조적으로 소유하신다. 가인은 자기가 가지고 있으니까 자기 것인줄 알고 이것을 하나님에게 드리면 하나님의 것이 되는 줄 알았다. 중생되지 못하고 범죄자의 주장과 사상대로 거기에 속하여 살았기 때문이다. 자율적인 인생이 되고 독립적인 인생이 된 것이니 자기를 위해서 자기에게 유일된 것을 끌어 댕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을 위하면 선, 하나님을 위하지 아니하면 악으로 아심과 같이  가인도 자기를 위하면 선이라, 자기를 위하지 않고 자기에게 유익되지 안하면 악이라 하게 되었으니 가인의 행동과 하나님은 대립이 되었다. 하나님은 참이요, 진리이시기 때문에 선의 표준이 하나님을 위하면 선이 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하면 선이 되지마는 가인은 참과 진리를 대적해서 나와서 된 것이니 하나님은 가인을 받으실 수가 없다. 아벨도 과거에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였다. 그러나 이제는 중생되어 하나님을 중심삼아 하나님의 지식, 지혜, 선, 사랑, 거룩, 진실, 의, 주권이 자기와 같애 모든 것이 하나님과 같고 하나님과 동지라 이런 사람이 아벨에게 있어서 이것이 주격이 되어 있지마는 한쪽에는 가인과 같은 사람이 있어서 서로 싸우고 있다. 이것이 대내전이다. 우리에게도 이 대내전이 있다. 아벨이 양을 드린 것은 제물로 드린 것인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아니고 양은 그리스도의 예표이니 하나님의 어린 양을 달라고 드린 것이다. 드리는 것이 하나님께 받는 것인줄 알았다. 아벨은 진리의 생명법을 바로 알았다. 몸은 사망에 속한 것이나 진리대로 한번 쓰여지면 그 만큼 성화가 된다.

4:3-7
영이 자라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자라는 것이요. 영이 결합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이 서로 교통하는 것이다. 영이 자라는 것은 참된 지식이 자라는 것인데 지식만 다 자라도 영이 다 자란 것이 아니다. 8가지 속성이 다 자라야 한다. 지식이 자라면 지혜가 자라는 것이니 지식은 지혜를 낳는다. 그러나 지혜가 없는 지식은 죽은 지식이다. 자연에 관한 지식도 (과학)알아야 한다. 자연에 관한 지식을 무시하면 안된다. 다만 이 자연에 관한 지식을 주격적, 주체적 지식으로 삼지 말고 이 지식을 가지고 참지식이 자라게 하는데에 비용으로 해야 한다. 자연과 물질에 관한 지식이 없는 것 보다 있는 것이 났고 많이 아는 자가 났다. 다만 쓰는 방편이 바로 되어야 하고 보는 견해가 바로 되어야 한다. 없어지지 아니하는 참된지식이 없는 자는 죄가 자란 것이다. 잘못 안 것을 깨닫고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돌아서는 것은 영이 자라는 것이다. 저 사람이 말을 할때에 내가 깨달음을 가지는 것은 저 사람의 말과 내 감정과 지식이 합해서 깨달음이 나오는 것인데 내 자신이라는 각도가 틀리면 깨달으도 들린다.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어라"고 하신 것은 이미 있는 지식위에 새 지식을 입어라는 것이요. 지혜위에 지혜를 덧입어라는 말이요. 서위에 선을 덧입어라는 말이요. 사랑위에 사랑을 덧 입어라는 말이다. 영이 결합하는 것은 이 지식과 저 지식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서양에서 배운지식과 동양에서 배운 지식에 있어서 구별함과 깨달음이 같으면 영적 결합이다. 지혜도 선도 사랑도 마찬가지다. 영이 교통하는 것은 현재에 영이 서로 통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이미 아는 지식을 또 배우는 것은 영적 교통이요. 서로가 하나가 되는 것은 결합이다. 육적(물적)결합이 없어도 서로의 깨달음이 같을 때에 영적결함은 되나 영적 교통은 없을 수 있다. (서신왕래가 없을때, 서로 갇히고 배우지 않을때) "네가 배우고 확신하는 일에 거하라" 배우는데에 있어서 교훈과 사람과 함께 있어야 하고 교훈과 사람과 함께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영이 자라는 것과 결합하는 것과 교통하는 것을 구별해야 한다. 영의 교통은 영이 자라는데에만 유익한 것이요. 영의 결합은 육적결합이 없어도 결합 될 수가 있다.

4:4-7
2-4절에 보면 가인은 농사꾼인고로 곡식으로 아벨은 양을 치는 자인고로 양과 기름으로 하는 말씀이 있다. 가인은 농사를 택한 것이 잘못이였다. 하나님의 백성은 양을 먹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양과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린 아벨은 구속받은 자로서 나타났기 때문에 아벨의 제사는 받으신 것이다. 여기에 간단하게 기록 했으나 빠진 것이 하나도 없다 (사 34:16 참조) 직엄을 논하는 것은 잘못하면 곡해하기 쉽다. 죄되는 직업은 버려야 하고 죄되지 않은 직업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직업과 인인관계, 사물관계에 있어서 구속의 도가 주격이 되어서 이 모든 것을 지배해야 한다. 이 세상에서 어느 입장, 사정, 형편에서 신앙생활을 못할 곳이 없고 못할 일이 없는 것이 아니지만 자기의 힘을 측량해서 어려운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지혜다. 자기의 세상이 어떤 것이든지 세상을 이기는 것이 신앙생활이지마는 이기는 여기서 부터 시작하지 말고 자기의 세상을 만들려고 하는데서 시작해야 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와 자기를 모르는 자가 무식하다. 세상을 이겨야 한다고 하면서 힘도 없는 것이 성자형세를 하는 자는 결국에는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되는 것이다. 기도의 근본원리는 하나님과 영교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교제 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의논하는 것이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하나님께 보이고 시정 받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사와 행동에게 내 의사와 행동이 피동되어 나와 하나님이 하나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달라고 하는 것만이가 아니고 하나님과 자기와의 차이점과 틀린점이 있는 것을 찾아서 고치고 시정 받는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과 자기에게 대한 무식을 깨트리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다. 자기를 찾는 것과 하나님을 찾는 것이 기도다. 기도의 제목을 세워놓고 기도하는 것은 일종의 사욕에서 나오기 쉽다. 자기가 어느 정도의 실력이 있으며 자기의 환경이 어느 정도 알맞는지 이것을 찾는 것이 기도다. 평신도의 일을 하고난 뒤에 직분을 가진자의 일을 할 것이요. 복음을 전해야 할 것이다. 가정의 일을 하고 난 뒤에 교회 일을 해야 할 것인데 이런 순서를 통하지 않고 머리부터 갈려고 하니 폐단이다. 일학년이 이학년을 통과하지 않고 삼학년, 사학년의 일을 할려고 하는 것과 같다. 외부의 생활을 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볼때는 그 사람들과 같은 생활이지마는 나의 예수 믿는 생활이 되어야 한다. 예수 믿는 생화로 하지 않는 것은 자기 생활이 아니다. 자기의 전 생활이 믿음 생활이 되어야 한다. 탁상공론과 같이 실생활이 없는 말로만하는 생활은 헛된 것이다. 연구와 논리만으로도 안되고 또 연구와 논리 없이 실험만 가지고도 안된다. 연구와 논리와 실험이 겸비해야 한다. 말로 하는 계획과 실생활이 겸해야 한다. 지능과 도덕이 제일인 사람과 같이 사는자가 제일 행복되고 제일 불행스러운 자다. 우리는 제일 행복하고 제일 불행스러운 자가 될 수가 있다. 자기를 부정하여 수정하는 여기에 행, 불행이 좌우된다. 그러므로 자기의 환경을 신앙 생활의 환경으로 삼아야 한다. 자기 힘에 겨운 환경은 삼가해야 한다. 너무 어렵다고 피할 것도 아니고 용맹을 가지고 힘에 겨운 환경을 취하는 것도 안된다. 믿는 사람은 단순하면서도 어디든지 충만해야 하고 진리는 좁으면서 한 없이 넓다. 이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다. 세밀히 심사 해야한다. 그러므로 우리의 이름이 성도다 "거룩"은 구별하고 구별해서 하나인 참을 잡은 것이다. 자기 환경을 자기와 맞추어야 한다. 못할 것을 할려고 하는 만용은 버려야 한다. 반면에 자기의 환경과 주위에 대하여 대항부터 해 놓고 어찌 할수 없어서 받아 드려야 하고 받아드렸으면 자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생명체요. 이대로 사는 것은 생명체가 생활을 하는 것이다. 바다에 사는 고기가 염분을 막으면서도 필요한 염분은 취한다. 처음에는 대적하여 막는 투쟁을 하면서 세밀히 심사하여 필요한 것은 취하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이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 세밀히 심사하여 구별해야 한다. 주위와 환경을 지배해야지 이것들에게 지배당해서는 안된다. 직장을 주신 것도 하나님이 주시는 것인데 어렵다고 버리는 것도 폐단이요, 안주시는 것을 될려고 하는 것도 폐단이다.

4;6-12
6절에 여기 "안색"은 보이지 아니하는 영의 반사다. 안색은 윤곽과 혈색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안색이 변하는 것은 진실이 아니고 주권적이 아니면 산색이 변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진 것이다. 분함이 심하면 안색이 변한다. 7절에 선을 행하면 하나님과 접근한다. 여기 "낯을 든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 접근하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과 접근하는 것은 양심을 통하여 접근하는 것이니 선을 행치 아니하면 양심에게 거부당하므로 접근하지 못한다. 우리는 죄의 종이 되든지 의의 종이 되든지 하지 독립할 수 없게 되어있다.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이 두가지의 종이 아닌 진공과 같은 상태였다. 선악과를 먹은 후에 이런 입장에 있게 되었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선을 행하면 죄는 옆에 붙지마는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앞에 엎드려 있어서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상한다. 죄만 짓는다. 다시 말하면 이 말씀은 선을 행할때에만 죄와 상관이 없고 선을 행치 아니할 때에 죄가 노리고 있어서 그 사람이 움직이는 것마다 죄를 범하게 된다. 사람이 죄를 벗을려고 해도 아무리 노력해도 소용이 없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내가 진리와 성령으로 다시 살아난 나임을 먼저 지식적으로 비판하고 중생된 영을 찾을 것이다. 영은 하나님의 속성, 능동의 속성. 살아계시는 하나님의 속성이니 이것의 본질과 본성대로 움직이고조 하는 것이 산속성이다. 이 지식적으로 참사람이 발견되어 일어????????????
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가 과거에 죄 지은 것을 한번만 잘못된줄 알았으면 즉시 의로 돌아가야 한다. 고치지 않고 생각하는 것은 죄에 죄를 거듭하는 것이 된다. 먼저 그리스도의 피로 돌아가야 한다. 가인이 아벨에게 자기의 잘못을 고했다. 한번 꾸중 들었으면 고칠 것이지 또 거듭말하여 동생을 죽이게 된 것이다. 과고의 실수를 후회에다가 붙인 가룟유다는 죽기까지 후회하다가 죽었고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피에다가 붙인고로 일어선 것이다. 일어선후에 고쳐가지고 과고에 잘못된 것을 생각 할때에 의의 양식이 되어진다. 고치지 않고 과고의 잘못을 생각하면 도리어 죄에 빠지는 것이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이제는 죄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가인안에 있다. 벌써 정죄의 말씀이다. 중생된 자는 법적으로 정죄하지 못한다.



8절에 가인이 "하나님이 내 제사는 안받으셨다."고 아벨에게 고했지마는 이것은 잘못 고한것이다. 바로 고하는 것은 "나도 너와 같이 제사를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딤전 1:12 이하에 보면 바울은 일어선 것을 먼저 말하고 타락한 것을 뒤에 말했다. 이대로 하면 가인은 일어서야 하는데 잘못된 것만 먼저 말한 것이다. "나는 전에는 잘못 드렸다"고 하는 것보다 "나도 양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해야한다. 잘못된 것을 고치는데에 힘써야 하고 후회는 잠깐 쓰고 고치는데로 속히 나아가야 하는데 고치는데로 나아가지 않고 후회만 거듭하면 안된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뉘우침을 가지고 여러날을 계속하는 것이다. 뉘우침은 잠깐이요. 고침은 계속적이다. 전진적인 신앙을 가져야 한다. "나는 이래 가지고 되겠나"하는 이 시간부터 진리 생활과 대립이 된다. 이때부터 가인과 아벨의 행동이 대립이다. 가인이 잘못된 줄 알고 돌이켜 아벨과 합작이 되어야 하는데 우물쭈물하면 서로 대립이 된다. 이것이 심해서 아벨을 죽이는데에 까지 나아갔다.


9절에 가인 자기가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거짓말을 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말해도 꺼리끼지 아니해야 거짓말을 안하게 된다. 자기가 정리정돈되면 거짓말을 안하게 된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이니까" 가인이 하나님의 사랑만 알았지 두려움을 몰랐으니 만만한 하나님으로 대하였고 이렇게 망령된 말을 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존경과 두려움은 나누지 못한다. 존경이 없으면 사랑은 썩어지고 멸시되고 사랑이 없는 존경은 두려움 밖에 없다. 사랑이 없고 존경(두려움)뿐인 곳에는 외식이요. 이중생활을 하게 되어 성공이 없고 또 두려움이 없고 사랑 뿐이면 결과에는 서로가 원수를 맺게 된다. 상하층의 인물간에도 사랑과 두려움을 주고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두려움이 겸전한 존경이라야 한다. 사람을 섬기고 사랑한다고 하면 이는 거짓말이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르 다스릴지니라"고 하신 말씀은 인자한 교훈인데이 인자한 교훈을 인자한 교훈으로 받지 못한 것은 하나님의 사랑만 알았지 두려움이 없었는고로  교훈이 범죄하는데에 협조하는 것이 되었다. 하나님의 은혜로운 복이 도리어 자기에게 죽는 일이 되고 범죄하는 일이 된다. 이는 하나님의 교훈을 하나님의 은혜로운 복을 잘못 이용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직접 하나님이 주셔서 되는 것 처럼 보이지 않고 자기가 해서 된 것 같이 보여지게 하여 일을 하시느 것이다. 자기가 자기 구원을 이루는 것 같은 방편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일도 자기가 스스로 감사하는 것 같이 하는 것이요.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랑도 깨닫게 하시는 것이 자기가 깨달은 것 같이 하신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자로 자기가 자기를 만들어야 한다. 하나님이 직접 일하시면 그 사람은 죽는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모세는 아론을 통하여 이스라엘을 교훈하시고 일을 하신 것이다. 음식이 위장을 통하여서 양분이 되어 살이 되고 피가 되는 것이지 음식을 직접 살에다 놓으면 살이 안되고 썩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과 두려움을 연구해야 한다. 연구하지 아니하면 결국에는 사랑만, 또는 드려움만하게 되니 사랑만 알게 되면 가치 없는 일이 되고 두려움에는 차차 업수히 여김을 가져오는 결과를 맺는다. 하나님께 대하여 사랑과 두려움을 겸해야 한다. 그리그 사람에게 대해서도 그러하다 윗사람에게도 아랫 사람 사람에게도 동류간에도 그러하다. 그러므로 주고 받을 때에는 두려움과 사랑을 겸해야 한다. 사람에게 대해서 우리가 두려워하는 것은 외부적으로 해야지 내부까지 두려워 하면 안된다. 복음을 위하여 영을 위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두려워 하는 것이다. 건설을 위하여 두려워 하는 두려움이니 하늘과 땅도 옹위하고 양심도 평안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에는 질서와 조직이 있어야 하고 모든 것이 겸전해야 한다. 온유와 강함을 겸해야 한다. 결심은 강하고 방편은 온유해야 한다. 결심과 방편이 강하기만 하면 실패가 많다. 고드럼 인생이다. 또 결심과 방편이 온유하기만 해도 안된다. 사랑만으로도 안되고 두려움만으로도 안된다. 겸전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랑과 두려움을 만들어야 한다. 그런데 가인은 이것이 없었는고로 망령을 부렸다. 질서와 지위가 만만해 보이면 망한다.
10절에 약 5:4절에는 "만군의 귀에 들렸느니라"고 했다. 여기 "만군"은 싸움을 전제로 한다. 품삯을 안 준 것은 남을 침략하는 것을 말한다. 남이 수고한 땀의 댓가를 내가 지불하지 않고 착취하는 것을 말한다. "피 흘린"이것도 난ㅁ을 침략하고 해친 것을 말한다. 공의의 하나님은 침략자로 더불어 싸운다. 침략은 하나님의 공의를 이탈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다"는 말씀이다. 사람을 침략한 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침략한 것이요, 진리를 침략했기 때문에 하나님과 진리가 복수한다. 압살롬이 다윗을 칠때에 시 3:7절에 말씀한대로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뼈를 꺾어심"을 다윗이 보고 두려워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남에게 애매한 언행은 삼가해야 한다. 물질 관계에서, 사건에서, 인인관계에서 남을 해치는 언행은 하지 말아야 하고 남에게 침략하는 언행은 삼가해야 한다. 우리가 심판 받는 것은 언행이다. 유다서 1:15절에도 보면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치 않은 자의 경건치 않게 행한 모든 경건치 않은 일과 또 경건치 않은 죄인의 주꼐 거스려 한 모든 강퍅한 말을 인하여 저희를 정죄하려 하심이라"고 했다. 방어만 하고 침략은 하지 못한다. 방어도 그 경계선을 넘으면 침략이 되고 말아 버린다.
11절에 땅이 생긴 본질과 본성이 하나님의 속성대로 된 것이니 하나님과 배치가 된 것은 땅과도 배치가 된다. 그러니 땅이 저주하는 것이다. 땅을 하나님의 지혜와 능력대로 만들었기 때문에 하나님과 적이 되면 땅과도 적이 된다.(롬8:19-21)
12절에 수고하나 그 댓가가 없다. 하나님의 모든 창조는 하나님과 더불어 뭉쳐서 하나요. 대립은 마귀와 죄뿐이다. 이런 분위기 안에 있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지키면 전체가 나를 위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기면 전체가 나에게 집중 공격이다. 주의 말씀이 영생의 말씀이니 이 말씀대로 행하면 농업도, 상업도, 공업도, 목축업도 영생이다. 그러나 주의 말씀을 거역하면 전부는 멸망이다.

4:1-12
(1). 가인과 아벨에게서 신앙계대와 혈육계대가 다르다는 이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아담은 인류의 첫 시조요, 첫 교인이요, 첫 신앙가이다.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고 이 구원을 자손들에게 계대하여 상속케 하신다. 혈육으로 말하면 장자인 가인이 받아야 할 것인데 차자인 아벨이 받았다. 구원은 신앙계대인고로 혈육의 계대와 다르다. 마 1:1-에 보면 "예수님의 족보"도 그러하다. 하늘나라는 신앙적인 계대 뿐인 것이다. 이것을 먼저 보인 이유는?
①. 사람들이 구원을 이루어 나가면서 혈통계대로 계대되는 줄 알고 신앙계대를 무시하기 때문이다. 영이 주격이요, 육은 소유격인 것 처럼 신앙계대가 주격이요. 혈통계대가 소유격이다. 그러므로 혈통계대 보다 신앙계대가 귀하고 혈통의 자손보다 신앙의 자손이 귀하고 혈통의 선배보다 신앙 선배가 귀하다.
②. 선조가 나쁜 일찌라도 그 밑에서 성자가 나올 수 있다. 그 혈통이 나쁘다고 해서 그 밑에 성자가 나오지 않는 법이 없다. 이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장사이다. 그러나 아들인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 되었다.
③. 아무리 신앙가라도 그 밑에 신앙이 없는 자손이 있을 수가 있다. 신앙가라고 반드시 신앙가의 자손이 나는 법이 없다. 이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사무엘이나 엘리는 그 당시에 제사장이지마는 그 아들들은 형편 없이 타락했다.
④. 자녀의 신앙보고 부모의 신앙을 논하는 것도 안된다. 이것을 보이기 위함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참 아들이라"고 했다. 혈육은 마귀가 지배하고 있으니까 혈육으로 날뛰면 실패하고 마귀가 비웃는다. 우리 앞에는 이길, 저길. 두길이 언제나 있으니 바른 길을 찾아 바로 걸어가야 한다. 아브라함과 롯이 갈라졌으니 하나는 바로 되었고 하나는 비뚤어지게 되었다. 여기서는 신앙계대와 혈통계대가 다르다는 것을 보인다. 그러므로 신앙계대는 신앙계대로 따라 있고 혈통계대는 혈통계대로 따라 있는 것이다. 이것을 바로 비판하지 못해서 탈선하는 일이 많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어떤 계대로 끌고 있는 자인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다윗의 가는 길을 좋아했지마는 그 행사가 사울과 동행해서 의인이지만 사울과 같이 망했다. 이는 신앙계대가 아니고 혈통계대가 앞섰기 때문이다. 신앙계대보다 혈통계대가 앞서 있으면 위험하다. 혈육이 요동됨에 따라 변하기 쉽다. 그러므로 나는 어느 계대에 속했는지 이것을 구별해서 자기를 단속해야 한다. 신앙계대와 혈통계대가 다르니  신앙계대를 주로 삼아야 한다. 혈통계대를 주로 삼으면 혈육에게 이끌리고 만다. 그리스도 교에는 국경이 없다. 요한계시록에 보면 "나라와 족속과 방언에게 전했다"고 말씀했다. 여기에 조심치 아니하면 혈육과 지방과 민족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신앙노선 구별에 있어서 첫째로 싸울것은 신앙계대와 혈육개대다. 피를 논하게 되면 지방을 논하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민족과 국가를 논하게 된다. 그러므로 혈육계대보다 신앙계대를 중하게 여기고 혈육을 신앙으로 성화 시킬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리고 혈육을 무시해도 안된고, 주로 해도 안된고,  떠나도 안되고 떠나면 염세주의다. 혈육을 사랑해도 안되고 사랑하면 ???세 주의다. 혈육을 멀리해도 안되고 가까이 해도 안된고 버려도 안되고 취해도 안된다. 그러면 혈육을 어떻게 할 것인가? 어떤 사람은 혈육인 세상을????????????
이것을 내 마음대로 사용해야 한다. 진리와 영감으로 사용해야 한다. 사용한 것만 내것이 되고 영원히 사용한다. 여기 내 마음은 중생된 영의 마음이요, 예수님의 마음이니 예수님의 마음은 성경에 기록한 진리다. 이 예수님의 마음이 내게 온 것이 영감이다. 내가 받은 영감대로 세상을 취하면 이것은 내 것이니 이것이 세상을 이김이다. 세상 속에는 보화가 묻혀 있기 때문에 세상을 내세상으로 삼으면 그 속에 있는 보화와 진주가 내것 된다. 짧은 한 토막의 세상에는 내 구원이 다 들어 있다. 자기의 영원한 구원이 있는 줄 알고 있는 것을 다 판다. 생명, 소유, 몸을 아끼지 않고 다 내어 놓는 것이니 이것이 천국가는 생활인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 노선을 잘 구별해야 하니 잘못하면 전체가 실패다.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2). 2-5절에 가인은 농사꾼이므로 농산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치는 사람이므로 양으로 제사를 드렸다고 했으니 어부라고 하면 고기로 제사로 드렸을 것이다. 잘못하면 자기 직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린 것으로 보기 쉽다. 껍데기로 보면 자기의 손으로 한 것 가지고 제사 드린것 같이 보이나 그 이면에는 하나는 받고 하나는 받지 아니했으니 받은 것은 만고의 신앙의 표본이요. 안받은 것은 큰 죄악을 맺게 되었다. 너도 농업하고 나도 농업을 하니 네가 하는 신앙생활이나 내가 하는 신앙생활이 같은 줄 알고 있는 것이다. 껍데기의 움직임은 같은나 그 이면에 있어서 하나는 자기 뜻에게 피동되는 것이요.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게 피동되는 것이니 이것을 구별해야 한다. 여기에 보면 외부에는 같은 생명의 소산으로 제사했지마는 (제사는 신앙행위를 말한다)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게 피동으로 드렸고 하나는 순전히 자율로 드렸다. 자기의 행위를 바로 하므로 바로 걷고 바로하지 못하므로 바로 걷지 못한다. 그때에 양을 잡은 것이나 오늘에 우리의 신앙행위가 같은 것이다. 당신의 죽어심을 힘입어 내가 죽고 다시 사심을 힘입어 내가 다시 사는 것이다. 오늘은 명인들이 자기 직장에서 자기 가정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신앙생활 하기 전에 하던 일을 신앙생활 한 후에도 하고 있고 신앙생활하기 전에 내가 처하여 있던 환경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너도 나도 자기의 입장과 처지와 환경에서 자기의 신앙생활을 동일하게 하는 것 같이 보이지만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는 자기의 주관대로 한다. 여기서 노선이 갈라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의 뜻에 피동되느냐, 자기 주관에 피동되느냐. 이것을 구별하고 자기가 처하여 있는 입장과 처지와 환경을 변개하지 말고 거기서 하나님이 왕이냐, 내가 왕이냐, 다시 말하면 누가 왕이냐 이것을 구별해야 한다. 다 같이 직장에서 일을하고 가정을 꾸미고 교회생활을 해도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피동이요. 하나는 자기 뜻대로 하는 것이다. 마 24:40-41과 눅 17:34-35절에 보면 "두 남자가 한 자리에 누웠으니" 이는 가정생활을 말하고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이는 생업, 직장 생활을 말하고 "두 여인이 매를 갈매"이는 교회생활을 말한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혀둠을 당한다고 했다. 외부에 나타난 생활은 같지마는 내부에서는 서로 달랐다. 마 25:1-에 보면 10처녀가 손에 등을 든 것은 다 같았다. 그러나 5처녀는 영접함을 받았고 5처녀는 배척함을 당했다. 다 같이 권찰 노릇하고, 다 같이 주일학교 반사 노릇하고, 다 같이 아버지 노릇하고, 다 같이 어머니 노릇하고, 다 같이 장사하고, 다 같이 공장에 다니고, 다 같이 예배드리고 연보하고 신앙생활을 하는데 하나는 구원이요, 하나는 버림이다. 자기 소산으로 드린 것 같지마는 하나는 믿음, 곧 하나님꼐 순종으로 드렸고 하나는 자율인 반역으로 드렸다. 그러므로 외부의 모양만 볼 것이 아니라 내부에 하나님에게 순종이냐 불순종이냐 하는 이것을 구별하여 바로 노선(路線). 바른 신앙 걸음을 걸어야 한다. 내가 주인이냐 하나님이 주인이냐 하는 중인에서 노선이 같다지는 것이다. 신앙길이 갈라지는 것이다. 가인은 농사꾼인고로 양과 살지 아니하고 농사만 상대했기 때문에 농작물로 드렸고 아벨은 양을 쳤기 때문에 예약에 의해서 양으로 제사는 드린 것이다. 사람은 자기의 처지, 입장, 형편, 환경의 소산이 되기 쉽다. 웃는 형편에는 웃고, 우는 형편에는 우는 사람이 되기 쉽다. 그러므로 바른 신앙노선, 바른 신앙걸음을 걸어갈려고 하면 내 입장과 형편과 환경에게 제제 받지 말고 지배 받지 말고 하나님에게 제제 받고 지배 받아서 이것들을 사용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가인은 이와 반대였다. 믿음 하나로 하나님에게 피동되어 하나님은 선이시니 이 선이 움직이니까 내가 피동되어 선이 되고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이 사랑이 움직이니까 내가 피동되어 사랑이 되고 하나님은 진실이시니 이 진실이 움직이니까 내가 피동되어 진실이 되고 하나님은 지식과 지혜이시니 이 지식과 지혜와 움직이니까 내가 피동되어 지식, 지혜가 된다. 내가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것은 하나님의 속성역사에 피동되는 것이니 이 하나님의 속성역사에 피동되면 나는 이 속성과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이것은 놓지 못하겠다"고 하는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고 "이것을 놓으라"고 하시고 또 "이것은 버려야 되겠다"하는 환경을 만들어 놓으시고 "이것을 잡으라"고 하셔서 연단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오직 하나님 한분에게만 피동되는 자로 만드시기 위함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로 더불어 영원히 왕노릇할 인격과 실력을 준비하고 연단하는 것이다. 다니엘은 하나님에게 피동되어 사자굴과 죽음의 종이 되지 아니했고 아니엘의 세 친구도 불에게 피동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에게 피동 되었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을 이긴 최고의 신앙가들이다. 여기도 아벨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제사를 드렸고 가인은 하는 일, 곧 농사짓는 일이 들어서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 버렸다. 가인의 형편과 사정과 환경이 들어서 그렇게 만들었다. 그러나 아벨은 자기의 형편과 사정과 환경에 지배를 받아서 제사를 드린 것이 아니고 하나님에게 지배 받아서 제사를 드린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가인은 형편과 사정과 환경의 지배를 받아서 지배받는 생활을 했고 아벨은 하나님에게 이용당하고 지배받는 생활을 했다. 가인은 자기의 형편과 입장과 환경에게 지배를 받았으니 세상에게 진자요, 세상의 종이요, 세상에게 이용 당했고 아벨은 하나님에게만 지배 받아 자기의 형편과 입장과 환경을 지배 했는고로 세상을 이긴자요, 세상의 주인이요, 세상을 이용했다. 그러므로 내가 환경을 사용하느냐 내가 환경에서 사용당하느냐 하는 것에서 노선이, 가는 길이 갈라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와 자기 환경과의 관계를 논해야 한다.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아니하면 환경을 지배 할 수가 없는 것이다. 성신의 사람이 아니고 환경을 지배할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 정치가는 국민의 여론에 따라 움직이고 철학자는 사람의 행위에 따라 움직이고 도덕가는 그 시대의 사람의 사상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이냐, 자기냐, 사용하느냐, 사용당하느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내 주인이 되어야 내가 환경의 주인이 되는 것이요. 내 주인이 내 자신이면 환경은 내 주인이 된다. 에덴동산의 실패는 주인이 바꾸어졌기 때문이다. 주인이 바꾸어지면 실패한다.
①. 시대와 나와의 관계에서 나는 시대의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 민주주의 시대가 와도 공산주의 시대가 와도 흉년이 와도 풍년이 와도 여기에 따라서 내가 변동되지 아니해야 한다. 여기에 따라 변동되면 나는 시대의 종이다. 우리는 시대의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
②. 물질과 나와의 관계에서 물질의 종이되면 안된다. 물질이 있으면 힘이 나고 기쁘고 물질이 없으면 힘이 빠지고 슬프지면 이는 물질의 종이다.
③. 사회와 나와의 관계에서 사회의 종이 되면 안된다.
  ·인적(人的)면에서 내가 이런 사람을 접촉하면 이런 사람이 이 되어 버리고 저런 사람을 만나면 저런 사람이 되어버리면 사람의 종이다. 이는 죽은 연고다. 사람에게 이용당한 것이다. 사람의 종이 되어서는 안된다.
  ·언어면에서 말 한마디에 충격을 받아 변하는 사람은 말의 종이다. 이 사람도 죽은 연고다. 이런 말을 들으면 이런 사람이 되고 저런 사람이 하는 말을 들으면 저런 사람이 되는 사람이 많은데 이 사람은 죽은 연고다.
하나님에게 피동되어서 이것이 시대까지 물질에게 까지 사람에게 까지 미쳐야 한다. 천인 만인이 콩이라 한다고 나도 콩이라고 하면 안되고 이것을 성경으로 비판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리지식을 주시고 이것을 사용할 수 있는  환경을 주신다. 마 13:44절에 말씀하신대로 보화가 묻힌 밭을 사는 것과 같다. 이 밭은 내가 처해 있는 환경과 입장과 처지인데 곧 자기 세상이다. 이 밭을 살려고 하면 중생된 나 외에는 생명도 몸도 소유도 다 팔아야 한다. 팔기 전에는 사지 못하고 사지 못하면 그 속에든 보화는 차지 하지 못한다. 그러므로 시대나 물질이나 사람들이 밀때에 안 밀리고 땡길때에 안땡기는 이것이 믿음이다. 밀때에 밀리고 땡길때에 땡기는 것은 신앙이 아니다.
그러므로 신앙노선, 믿음 길을 잘 선택해야 한다.

4:6-13
본문은 자기의 신앙노선, 자기가 걸어가는 신앙걸음이 바로 되었는지 바로 되지 아니했는지 이것을 구별하는 성구다. 가인과 아벨이 믿음에서 출발했으나 갈라졌고 아브라함과 롯도 믿음에서 나왔지마는 뒤에는 갈라졌고 르호보암과 여로보함도 갈라졌다. 우리도 믿음에서 시작했다가 이탈되는 일이 얼마든지 있다. 일시적으로 잠깐 이탈되는 것도 있고 여생을 이탈하여 그 길로 가는 자도 있다. 본문에는 이 노선에 대하여 참고 되는 일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는 실지로 우리에게 노선구별에 대한 참고가 되는 성구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주어야 할 도리는 문서에 기록하여 보여 주시니 문서는 보여주는 방편이요. 기록한 것은 모세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했으니 사용된 사람은 모세요. 실질적인 형식을 도구로 삼은 것은 아벨과 양, 가인과 곡식이다. 여기에 나타난 사실은 우리에게 두번 특별계시로 나타난 것이다. 그만큼 우리에게 필요한 이치다.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한다. 그때에 부패한 가인과 아벨은 오늘에 부패한 우리들과 같고 그때의 마귀가 지금의 마귀요. 그때의 세상이나 지금의 세상이나 같고 다만 죄의 관영이 지금이 많을 뿐이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섭리가 그때나 지금이 같고 이치가 수 많은 종류로 나타나 쓰이지마는 그때에 사용한 이치나 지금 사용하는 이치가 같다. 그러므로 바로 구별해서 곧은 길을 택해야 바로 갈 수가 있다. 여기 노선이라고 하는 것은 교파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걸어가는 신앙길을 말한다. 같은 교파안에도 같은 교회안에도 명인의 신앙걸음이 다르다. 그러므로 본문은 신앙노선을 계시한 말씀이니 이 말씀에서 자기의 신앙걸음을 바로 찾아야 한다. 자기의 신앙걸음은 자기가 하는 자기의 일이다. 사람들이 시작은 바로하나 도중에서 굽어지는 일이 많다. 신앙걸음이 바로 되었는지 바로 되지 아니했는지 구별하는 것은
(1).내가 움직이고 있는 것이 신앙을 주로하여 움직이고 있는지 혈육(세상)을 주로하여 움직이고 있는지 이것을 알면 자기의 믿음질이 어떠함을 알 수가 있다. 사람들이 "진리를 좇고 좋아한다고"하고 "신앙 신앙"하지마는 신앙이 혈육에 붙들려 있는 사람들이 많다. 신앙보다 혈육에 매여 있는 줄이 강하면 때가 되면 혈육으로 변한다. 그러므로 선배나 후배에게도 믿음의 줄로 연결되어야 한다. 신앙걸음을 걷는다고 해도 혈육의 줄을 끊치 아니하며 일생동안 제자리 걸음이다. 신앙관계가 강해야 신앙걸음을 걸어간다. 혈육을 앞세우고 혈육을 위주하여 걸었으면 신앙의 줄을 끊은 사람이요. 신앙을 앞세우고 신앙을 하여 걸었으면 혈육의 줄을 끊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냐 혈육이냐를 구별해야 한다. 혈육가 매인 줄을 끊는 것이 신앙이다. (마 16:24-25 참조) 그러므로 내가 어느 줄에 매였는지 어느 곳에 속하여 있는지 이것을 잘 구별해야 한다. 진리를 찾는 것이 하나님을 찾는 것이요. 진리와 결합되는 것이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이다.
(2).가인과 아벨이 자기의 직업의 소산으로 하나님에게 제사 드린 것은 같은 일로 보였지마는 양으로 드린 것은 하나님의 계약에 의해서 드린 것이다. 만일에 아벨이 농업을 하든지 공업을 했을찌라도 하나님의 계약이 그러하니 양으로 제사를 드렸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제사를 드렸고 하나는 자기 뜻대로 드렸다. 성도들은 자기의 입장과 환경에서 살고 있지마는 하나님에게 순종으로 사는 자도 있고 자기 뜻대로 사는 자도 있고 사업을 하고 생업을 해도 하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고 하나는 자기 뜻대로 하니 외부는 같으나 내부는 다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를 주장하시느냐 내가 나를 주장하느냐 하는 이면을 살펴야 한다. 형식과 태도는 외부인데 이것만으로 신앙생활을 한다고 안심하면 속는다. 현재에 하고 있는 생활이면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생활하고 있는지 자기 뜻에 따라 하고 있는지 하나님의 뜻대로 해 보겠다고 하는 이 마음이 없으면 헛일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면 자기에게 손해가 올까하여 두려워하는데 이것은 오해다. 힘도 육체의 힘보다 이성의 힘이 강하고 이성의 힘보다 영혼의 힘이 강하다. 그러므로 영의 힘이 기성을 점령하고 영혼에게 점령당한 이성이 육신을 점령하는 것이 믿음이다. 내가 하고 있는 일을 내가 주장해서 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장하여 나는 하나님의 뜻에 피동되어 일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기 위해서 힘써 노력하면 배후에는 만능의 힘이 내 영혼과 연결되어 내가 능력자가 되는 것이다. 대개는 영혼의 힘과 이성의 힘이 연결되지 아니하면 실패한다. 그러므로 누가 주장하고 있는지 이것을 구별해야 한다. 이것이 아니면 외식이다.
(3).하나님께서 명인에게 환경을 주시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험한 환경을 주시고 어떤 사람에게는 순탄한 환경을 주시는 것은 그 사람에게 있어서 유익하기 때문이다. 사람마다 자기의 환경을 가지고 있으니 이것에게 지배를 받으면 안된다. 내가 바른 신앙걸음을 걷고 있는지 않는지를 아는 것은 내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지 환경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이것을 알면된다. 환경의 지배를 안 받는 사람은 없다. 곁에서 촉분질을 할 때에 성을 내는 것도 환경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다른 사람이 선을 행하는 것을 보고 "나도 선을 행하자"고 하는 것도 좋은 것이지마는 위험하다. 다른 사람이 행하는 선행이 외부에는 선행이지마는 그 내부가 어떤 것이며 또 나도 그와같이 해야 할 것인지 안해야 할 것인지 (내가 처한 입장에서 볼때에) 내 속에서 비판하고 결정해야 한다. 그러므로 환경의 지배를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환경의 지배를 받으면 내가 바른 신앙걸음을 걷는 것이 아니다.
(4).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기뻐 받으신 것은 죄 있는 아벨은 죽고 죄없는 양의 생명으로 살았기 때문이다. 양은 죄때문에 죽었다. 아벨의 죄를 양에게 대신 했기 때문에 양은 아벨의 죄로 말미암아 죽었고 아벨은 죄 없는 양의 생명으로 산 것이다. 아벨이 양의 생명으로 살았으니 양의 것이다. 죄를 짓는 자기를 죽이는 것과 죄없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것과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는 나를 예수님께 드리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으로 사니까 내 전부가 예수님의 것이다. 위에 말한 4가지가 바로 되었으면 자기의 신앙 노선이 바로 된 것이다. 신앙노선이 바로 되고 안된 것을 심사하는 것은 나타난 열매로 안다. 신앙노선이 바로 안된 가인은
①. 분이 났다. 불안과 불만과 원망과 불쾨와 허무와 고독과 두려움이 생겨져서 나중에는 분한 것이 된 것이다. 분이 있으면 잘못 된 것이다.
②. 안색이 변했다. 진실이 아니고 주권적이 아니면 안색이 변한다. 다시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없어졌다. 분함이 심하면 안색이 변하는데 이는 신앙노선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③. 여기서 못 고치면 움직이면 죽는다. "죄가 문앞에 엎드린다"적이 복병하는 것 처럼 움직이면 죽는다.
④. 사람과 대립이 된다. 대립이 심하면
⑤. 미움이 생겨 나중에는 죽인다.

4:6-7
신앙노선 구별에 있어서 4가지로 말했는데 그래도 또 심사하는 것은 분과 안색이 변하는 것과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는 것과 죄를 다스리는 것이다. 죄가 문에 엎드리는 것은 위험성을 말하는 것이다. 꼼짝하면 죄에서 상함을 받는 것이다. 의를 행하는 것을 계속할 때만 죄가 상하게 못한다. 의를 행하는 것을 중지하면 벌써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 숨어 있어서 문밖으로 나가면 상함을 받는다. 무슨 행위든지 하면 곧 죄다. 죄가 민첩하게 노리고 있기 때문에 죄에게 상하기전에는 죄가 해칠 것을 모른다. 꼼짝하면 죽는다. 원수가 가만히 문 앞에 엎드려 있으면 문 밖에 나가기만 하면 침해를 당한다. 당하기 전에는 모른다. 내가 의를 행하지 않을 때에는 죄가 문 앞에 엎드려있으니 움직이면 해를 당한다. 해를 당해야 죄가 엎드린 것을 안다. 의를 계속행해야 해를 안 당한다. 사람이 죄에게 해를 당하는 것을 사전에 방비하는 것은 의를 행하는 것 뿐이다. 죄는 눈에 안보이나 죄에게 상한 상처는 볼 수가 있다. 죄의 행적은 볼 수가 있다. 죄에게 상하기 전에는 "상하리라"고 생각치 못한다. 죄를 짓기 전에는 "죄를 지어리라"고 생각치도 못한다. "지어리라"고 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죄를 방비하는 것은 하나인데 다만 의를 계속하는 것이다. 계속적으로 의를 행하는 것 뿐이다. "이렇게 하면 죄를 짓겠는데"하는 것은 벌써 죄를 지은 것이요. 죄에게 침해를 당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의 하는 장사에 손해를 끼치겠는데" 하는 것은 벌써 저 사람의 장사를 손해 보이는 행동에 옮겨선 것이다. 이때는 장사를 중지해도 손해를 끼친다. 무엇을 거래하는 것도 "이렇게 하면 저 사람에게 손해를 보이겠는데"하고 이것을 깨닫고 청산을 다 하는 것은 복병권이요. 의를 행하는 것을 계속하는 때요. 청산을 다 못하는 것은 복병후에 침해를 당하고 난 후에 깨달은 것이다. 의를 행하는 것을 중단하면 죄에게 침해를 당하고 당하고 난 뒤에는 안다. 의를 계속적으로 행하는 것이 죄를 방비하는 것이다. 말에 대해서 "내가 어떤 사람을 만날 것인데 말에 실수를 하지 아니해야겠는데"라고 했는데 말에 실수를 했으면 그것은 "실수 하지 아니해야겠다"고 할 그때가 벌써 실수한 것이요. 실수하지 아니할려고 하는 노력을 계속치 않고 중단한 때가 실수한 것이다. 죄를 방비하고 이기는 것은 의를 행하는 그것만이다. 죄를 짓는 것은 육인데 이 죄를 안 지을려고 방비하는데 있어서는 의를 계속 행해야 한다. 왜 그런가? 육은 마귀보다 죄보다 약하고 또 어둡기 때문에 의의 줄을 끊고서는 이길 수가 없다. 하나님과 영혼에게 육이 붙들려 있어야 죄가 와도 상관치 못한다. 하나님과 영혼에게서 끊어지고 의를 행하는 것을 중단하면죄를 이길 도리가 없다. 어린아이가 아버지와 같이 가면 큰 아이가 상관치 못하지마는 혼자서 가면 봉변을 당한다. 이는 어린아이가 큰 아이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영혼과 육이 합하면 죄를  방비하지마는 서로 나누어지면 죄에게 삼킴을 당한다. 이 육은 영과 끊어지면 어둡고 약하고 허무하여 죄만 짓고 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이기는 방법은 선을 행하는 것 뿐이다. 갈 5:16절에도 보면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다. 선을 행하는 이것으로만 죄를 방비한다.


4:6-7
신앙노선에는 개인노선과 단체노선이 있다. 개인이 자기 신앙만 유지하면 단체노선(가정, 교회, 교파) 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 하여 단체노선을 무관심하게 여긴다. 이것도 폐단이다. 단체노선에서도 신앙동지만 가려서 바로가면 성도의 교통가운데에서 얻어지는 것이 많으므로 단체노선이 필요하다. 단체는 정치적인 세력을 가지고 있으므로 정치가 세력을 가지고 교훈과 성업을 간섭한다. 그러므로 단체노선을 잘못 택하여 놓으면 개인노선, 곧 개인사역에는 자유하지마는 단체 사역에는 함께 있는 사람들이 협조하지 않기 때문에 자유하지 못한다. 단체노선의 정치가 잘못되었으면 따라가게 된다. 혼자서 아무리 말을 해도 소용이 없다. 따라가야 한다. 단체가 정치세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교훈을 가진 단체이며 교훈의 영향을 받는다. 잘못된 교훈의 단체는 잘못된 교훈을 한다. 그래서 교훈의 손해를 본다. 그러므로 단체노선을 잘 택하고 잘못 택하는 여기에서 교훈과 사역과 교통에 대하여 영향이 크다. 이는 단체에서 정치 세력이 있어서 정치가 간섭하기 때문이다. 교훈에 대하여 간단한 실례를 들면 진리를 위치 웨치는 종을 강단에 안세우고 은혜 받는 곳에 교인들을 못가게 하고 이단 속에서 정통이 교훈을 못한다. 그러므로 단체노선을 무시하고 개인노선만을 주장하는 것도 폐단이요, 개인노선을 무시하고 단체노선 주장하는 것도 폐단이다. 그리고 떠돌이 신자도 폐단이다. 떠돌아 다니기 때문에 간섭을 받아야 할 때에는 간섭을 못 받고 교회도 사회인데 사회의 혜택을 입지 못한다. 그리고 한 곳에 정착하는 것도 폐단이다. 더 나은 진리를 배우리 위해서는 어디에 더 나은 진리가 있는지 이것을 살필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는 독재요, 자유다. 하나님 한 분의 독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사도를 통하여 사도는 속사도를 통하여 우리에게까지 온 절대적인 독재다. 그러나 억지는 아니다. 또 자유다. 억지로 순종하는 것이 아니고 성신의 감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해서 자의로 순종하게 하신다. 다시 말하면 유기적인 영감이다. 이해와 납득과 감화로 자원적인 순종을 하게 하신다. 개인노선은 대내적이요. 단체노선은 대외적이다. 단체노선이 필요한 것은 교훈과 사역과 회개에 대하여 중대한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행사로 인하여 교훈을 받지 못하고 교훈으로 인하여 행사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진화종교가 아니다. 진리는 진화하는 것이 아니다. 단체에게서 자기의 신앙사회에서 매일 접촉하고 있으니 물들기 쉬운 것이다. 그러므로 의로운 자는 점점 의로워지고 불의한 자는 점점 불의해진다. 진실하나를 굳게 잡고 나가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도를 진실히 깨달으면 이것이 밑천이 되어서 점점 진실이 되어지고 인간이 하나님의 도를 거짓되게 깨달으면 이것이 밑천이 되어 점점 거짓되어진다. 세계적인 학자라도 거짓되게 깨달을 수가 있다. 무엇이라고 말을 할때 단번에 가볍게 수락하는 자는 대개는 거짓되게 깨닫는다. 그러나 자기의 기존지식으로 힘써 검토하고 경험과 체험의 지식으로 검토하고 이성이 영과 같이 어떻게 되더라도 하는 이성의 촉감으로 검토하여 어디서든지 생사간에 바로 된 것이면 끝까지 주장해야 한다. 진실이 있으면 진실하지 못한 것과 자연히 대적이 된다. 진실이 아닌 것을 대적하지 않는 것은 진실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된 자는 속화되지 아니하고 점점 진실되어 주위와 환경을 지배하는 자가 된다. 바로 된 것이 거짓에게 가면 더욱더 바로 알게 된다. 잘못된 것이 옳은 것에게 물들기 쉬워도 옳은 것이 잘못된 것에게 물들지 않는다. 잘못 아는데서 미혹에 넘어간다. 자기가 진실되게 안 자는 많은 수입이 없을찌라도 틀린 것을 가질려고 하지 않는다. 엿보는 눈이 많은 곳이 좋다. 조심과 긴장과 세밀이 있으니까 좋다. 진실은 하나다 자기의 신앙인격을 좌우하는 진리와 영감에 대하여 진실된 것을 용납하여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요일 4:1-에 보면 "하나님께로서 왔는지 어디서 왔는지 구별하라"고 말씀했다. 감화면 좋다고 하여 악령의 감화도 용납하면 위험하다. 진실로서 구별해야 한다. 진실되지 못하면 이런 곳에 가면 이런 사람이 되고 저런곳에 가면 저런 사람이 되어진다. 신신학에 가면 신신학자가 되고 정통에 오면 정통신학자가 되오진다. 개적노선이 바르면 단체노선이 바른 것을 찾고 단체노선이 바르면 개인노선이 바른 것을 찾아야 한다. 이렇게 바로 찾는 것은 진실하나만 가지고 찾는다. 진실도 범위가 넓어야하고 일시적이면 안된다. 그 입장에서 넓은 면을 기만하여 좁은 것을 가지고 미혹한다. 그러나 넓게 보면 안 넘어간다. 그러므로 단체노선이 중요하다. 개인노선만 중요시 하고 단체노선을 무시하면 감시하는 눈이 없기 때문에 탈선하기 쉽다. 그리고 뜬 교인이 되지 말고 한 곳에 속하지마는 그 곳에 붙들리면 안된다. 진리에게만 붙들려야 한다. 자기 신앙노선을 바로 가져야 한다. 자기의 혈육이라고 우정이라고 지방이라고 이것을 따를 것이 아니고 신앙에 진리에 따라야 한다. 이것이 자기 신앙노선을 가지는 것이다.

4:7-15
"낯을 들지 못하는 것"은 양심이 있어서 잘못 된 것을 지적하기 때문이다. 양심이 전체를 밝혀주니 잘못된 것을 깨닫게 되어 낯을 들지 못하는 것이다. 잘못된 것을 느꼈기 때문에 가책과 책망을 받는 것이다. 그런데 낯을 들지 못하면서도 잘못함을 느끼지 못하는 때도 있다. 양심의 충격을 받아 잘못된 것을 느끼게 되니 부끄럽고 미안하고 겁이나서 낯을 못드는 것이다. 잘못된 행사를 하면서도 잘못된 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잘못을 느낀 것도 이성이요, 잘못을 느끼지 못한 것도 이성이다. 이성이 느껴서 태도를 나타내지마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판정해서 들어내지 아니한다. 가인은 잘못 되었다고 느끼면서도 이것을 판정지어서 정죄하기는 싫어 한다. 애굽왕 바로가 재앙이 오면 이스라엘을 나가라고 해 놓고 재앙이 물러가면 이스라엘을 가지 못하게 했다. 이것을 이스라엘을 내어 주기가 싫어서였다. 물위에 뜬 배를 물이 밀고 있는 것 같이 죄가 나를 쉬지 않고 밀고 압축하고 있다. 이미 알았으면 잘못되었다고 판정을 지어서 정죄해야 할 것인데 판정도 정죄도 못하도록 죄가 방해하고 있다. 그리고 또 잘못된 것이 확실히 들어나도 또 한번 가리어 보자고 하면서 수입을 또 볼려고 하고 이제는 더 확실히 들어나면 변명을 해보자고 하고 또 확실히 더 들어나면 "억울하다. 분하다" 하여 못고치게 하고 또 확실히 더 들어나면 사랑이 없고 잔인하다고 하여 못고치게 하고 또 확실히 들어나면 사랑이 없고 잔인하다고 하여 못고치게 하고 또 확실히 더 들어나면 이제는 교만하다고 하여 쉬지 않고 방해한다. 배를 가라 앉게 할려고 밀로 압축하는 물이 배가 가라안지 않는다고 멀리 가는 것이 아니다. 계속 밀고 압축하고 있는 것이다. 물에서 고무 풍선을 불면 물이 밀려 나간다. 물이 밀려 나가면서도 풍선을 밀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죄라고 판명이 났다고 해서 죄가 멀리 도망가는 것이 아니다. 옆에 붙어 가지고 끝까지 한 몫 볼려고 밀고 있는 것이다. 머리를 못 들었으면 잘못된 것인데 왜 아벨을 죽이기까지 했을까? 여기서 죄의 근성을 알 수가 있다. 이성이 10분의 8을 깨닫고 10분의 2를 마귀가 붙들고 놓지 않기 때문이다. 양심이 붙들린 것을 힘써 해방 시켜야 한다. 이성전체가 잘못을 느꼈으면 거기에는 마귀가 쫓겨 났다. 그러나 멀리 간 것이 아니고 아직도 곁에서 사로 잡고 있는 것이다.
개(改, 고치는 것, 옮겨서는 것, 방향을 바꾸는 것)를 하지 못하도록 사로 잡고 있다. 새롭게 하는 것은 영이다. 영이 양심에게 양심은 이성에게 이성은 몸에게 명령한다. 수은을 모래에 부으면 부은 것만큼 모래가 뜬다. 이와같이 죄를 깨닫게하고 (구원이 와서), 성신의 감화가 와서 죄를 깨닫게 하고 후회하게 하여 고친다. 죄를 회개해야 구원이 오는 것이 아니고 구원이 와야 죄를 회개 한다. 죄가 종일 패전했다고 멀리 떠나는 것이 아니다. 바울에게도 죄가 일생동안 따라 다녔다. 성신의 감화와 은혜가 오는 것만큼 죄가 밀려간다. 그러므로 죄와 죽는 날까지 싸워야 한다. 이성과 몸을 진리와 영감과 영혼이 점령하느냐 죄와 마귀가 점령하느냐 하는 이것이 싸움인데 이성과 몸은 죄와 마귀를 이길 힘이 없다. 이성과 몸은 독립하지 못한다. 일순간이라도 독립치 못한다. 팔려고 시장에 온 소가 시장에 있다고 주인없이 잠시라도 독립적으로 자기 혼자 있는 시간이 없다. 이성과 몸도 그러하다. 진리와 영감과 영혼이 이성과 몸을 점령하여 있으면 죄와 마귀를 이긴다.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러진다."고 했고 갈 5:16절에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육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와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안색이 변하고 낯을 들지 못하는 것은 양심의 충격을 받은 연고다. 분이 나고 안색이 변하고 낯을 들지 못하는 이것은 가인안에서 증거 하는 것이다. 잘못된 줄 알았는데  뒤에 행위를 보면 잘못되지 아니한 것으로 나타나서 불평과 원망과 악을 발해서 아벨을 죽이기 까지 했다. 이만큼이나 했으면 잘못된 줄 알았을 텐데 그래도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대답했다. 이렇게 하나님을 대항하다가 하나님에게 벌을 받았다. (:11-12) 벌을 받았으면 이제는 자기의 잘못을 죄의 벌을 깨달을 텐데 "내 벌이 중하여 죽겠나이다."라고 원망했다. 죄벌을 받으니 자기를 깨달았지만 마귀는 그를 떠나지 않고 그를 붙잡고 원망케 한 것이다. 가인은 자기의 의사로 시작하여 죽는 날까지 자기 의사대로 했다. 마지막에는 "내가 죽겠나이다"하는 죽음에 이르기까지 자기의사를 계속했다. 그동안에 자기의 의사가 잘못 되었다고 자기 안에서 증거를 받았고 자기 양심에게 받았고 하나님께 받았고 형제에게 받았고 자기의 태도와 행동으로 증거를 받았고 마지막에는 저주를 받으므로 자기의 잘못된 증거를 받았다. 그러나 이 증거를 받는대로 마귀가 떠난 것이 아니고 끝까지 붙들고 있어 하나님께 쫓겨나는 정도까지는 붙들고 놓지 아니했다. 최종으로는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이렇게 죽기 싫은 이것가지고 하나님에게 "가인을 해하는 자는 벌을 칠배나 받으리라"고 하시는 것을 받았다. 이것은 최종적으로 자기를 유익되게 한 것이다. 자기의사로 출발한 자기의사는 끝까지 자기만을 유익되게 하고 자기를 위하는 자기중심으로 살고 자기를 왕으로 삼아 통치하는 자율이 생긴 것이다. 끝까지 자기를 유익되게 했다. 가인이 곡식으로 제사를 드린 것은 자기를 유익되게 한 것으로 자기를 존귀하고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드린 것이다. 가인이 자기 의사로 자기를 위한 방편과 결과를 살펴보아야 한다. 어떤 방편을 사용했나? 자기를 위한 방편은 하나니의 뜻을 무시하는 것이요. 자기 뜻대로 자기를 의로운 자로 생각하낟. 자기가 죄인인 것을 잊어버렸고 하나님의 대속의 은혜로 구원을 얻는 것을 잊어 버렸다. 죄인이라고 정죄하는 것이 자기 진리인데 가인에게는 이것이 없었다. 언제든지 자기에게 있는 약점은 보이지 않고 장점만 보인다. 자기가 참죄인인 것을 느껴서 죄인 편에 서는 것을 벌써 진리편에 선것이다. 잘못된 것을 깨달아도 분이나고 안색이 변하기 까지 자율을 좇고 낯을 들지 못하기까지 되어도 자율이 떠나지 아니했고 더 진보하여 아벨을 죽이기 까지 되었고 죄벌로 저주를 받아도 알 것인데 거기서 하나님께 대항하였다가 쫓겨나서 유리하는 자가 되었는데 그래도 안죽을려고 한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을 해하는 자는 칠배나 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는데 이것은 축복인가? 저주인가? 비뚤어진 생명이 보존되어지니 축복인가? 저주인가? 범죄한 아담이 회개하니 하나님께서는 생명과를 못따먹게 하였고 동산에서 쫓아내신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그러나 가인은 다르다. 살게 하신 것이다. 죽이지 아니하고 살게 하신 것이 축복인가? 그때에 가인이 죽었으면 가인의 죄는 그로서 끝이 났을 것인데 자기를 살리고져 하는 생의 애착으로 살아 이 땅위에 가인의 죄가 관영하였다. 가인으로 말미암아 그 죄가 많은 사람에게 퍼졌다. 이것은 가인이 최종적인 자기를 보호하는 사욕의 결과다. 하나님의 율법은 가지지 않고 자기율법, 곧 자율을 가지고 자기를 유익되게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어둡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주 중에 저주다. 가인이 자율을 이용하여 제일 크게 효험을 본 것은 죽음을 면한 것이지마는 그것이 저주중에 저주요, 우주에 가득찬 저주다. 자울이 적으면 적은 저주요. 자율이 크면 큰 저주다. 사람은 자율에서 돌아서야 한다. 이것이 아니면 자기를 유익되게 하는 법은 없다. 자율을 가지고 천사의 말을 하고 모사로서 큰 일을 도모 할찌라도 자기를 망친다. 빛과 어두움이 합할 수가 없다. 사람의 법속에 하나님의 뜻이 조금이라도 끼여 있는 법이 없고 하나님의 법속에 사람의 뜻이 조금이라도 끼여 있는 법이 없다. 사람의 뜻 속에서 죽이는 것 뿐이다. 나오기를 죽음에서 나왔고 그 목적이 죽음에서 나왔기 때문에 죽이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차??속에서 살면서 평안을 찾을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사람에게서 어떤 정도의 높은 법, 곧 수양법, 처세법, 호시법을 배웠다고 해도 이것 가운데에는 사는 것과 평안한 것이 하나도 없고 선도 하나도 끼여 있지 아니하다. 어떤 높은 도덕가가 말을 했다고 해도 죽은 것 뿐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 이외에 자기 생각으로 자기를 유익되게 할려고 이런짓, 저런짓을 해 보아도 저주만 온다. 적은 것 만큼 적게오고 많은 것 만큼 많이 온다. 그러므로 자율에서 돌아서야 한다. 자율을 합리화하여 바로 할려고 해도 해치는 것 뿐이다.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이것이 회개요, 사는 것이다. 자율이 죽는 날까지 자기 속에서 자꾸만 자온다. 죄의 시초인 자율이 일생동안 따라 다닌다. 자율 이것이 적이요, 원수인데 이것이 틀린 줄 알고 "하나님께로 돌아서야 하겠는데 바로 해야 할 텐데"하면서 고칠려고 하면 자율이 나온다. 이렇게 해서 점점 깊은데로 이끈다. 예수님의 피공로가 있으니 돌아서면 되는데  자꾸 잘못된 것만 연구한다. 여기서 속는다. 연구만 해 보았자 자기는 죄와 허물로 죽은 자인고로 죽은 것만 나온다. 연구하면 하는 것 만큼 그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성경이 무어라고 하시는지 이것을 찾아서 연구해야 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일에 대해서 이 주장에 대해서 성경이 무어라고 말씀하시는지"성경으로 돌아가야 한다. 영감계시만으로 안되기 때문에 문서계시로 선물을 주신 것이다. 모세 이전에는 영감계시 뿐이였다. 자기에게는 죽음과 고통과 수치와 실패와 타락 뿐이다. 가면 갈수록 이것만 나온다. 그러므로 땅위에 난 사람 가운데에 날때보다 죽을 때가 복이 있는자가 없다. 그러나 성령의 사람은 날때보다 죽을때가 복되었다. 가인이 낯을 들지 못하기까지 (내중인데 열매를 보아서 원인을 알 것인데) 되었으면 돌아서야 할 것인데 그대로 계속하여 최종에는 하나님에게서 저주중에 저주를 받았다. 자율속에 기쁨과 평안과 생명이 있을거라고 생각치 말아야 한다. 일을 바로 하고 살려고 하면 자율과 이별해야 한다. 여기서 생명과 평안이 나온다.

4:7-8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이 말씀은
①. 자기가 옳은 일을 행하고 선을 행했으면 자기 속에 양심이 있어서 긍정해 주고 옹호해 주고 해방시켜 자유를 준다. 자기가 자기에게 해방되어 자유하고 자기가 자기를 대할때 담대하고 자기의 모든 부분 곧 욕심이나 생각이나 성질이나 이런것들을 대할때에 부끄럽지 않고 미안하지 않다. 이렇게 되니 옳은 것이 견고해지고 이 옳은 것이 꺾어질까 염려가 없다. 자기와 전체가 단합이 되니까 복잡이 없고 싸움이 없다. 어디로 가야 좋을지 이것도 모르는 것은 단합되지 않고 나누인 연고다. 이미 행한 것이 선이 아니라는 증거다. 이성속에서 양심이 왕이다. 이 양심은 영혼과 이성사이에 심부름꾼이다. 자기 속에 있는 빛이다. 선을 행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부끄럽지 않고 담대하다. 이 세계를 발견하여 이 세계에서 산 사람들이 도덕가요. 철학가다. 그래서 이 세계를 보고 이 세계보다 더 나은 세계가 있는 줄 알고 자기 안의 이 세계를 뚫고 나갈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말씀 외에는 하나님에게로 나아가는 길은 없다. 도인과 철인들이 자기 뜻과 생각과 비판으로 더 나은 세계를 찾을려고 했다. 아무리 노력해야 사람에게는 옳은 것이 없기 때문에 찾지 못한다. (롬 3:11-12)
그러나 우리에게는 성경을 주셨기 때문에 찾을 수가 있다. 자기라는 것이 단합이 되면 강해지고 나누어지면 약해진다. 피조물보다 제일 강한 것이 흩어져 놓으면 제일 약하다. 잘못해 놓으면 부끄럽고 미안해서 슬슬 피한다. 선을 행해 놓으면 자기를 가까이 하고 자기의 각 부분에게 미안하지 않고 반갑고 점점 가까워진다. 성질과 욕심도 가까워지고 단합이 되어진다. 단합이 되어지면 강한 힘이 나온다. 일을 하나해도 전체가 거기에 집중되어지니 그 일을 하는데에 자신이 생긴다. 사람은 일을 하는데 두 가지로 한다.
  ⓐ. 하나는 자기 양심에게 인정을 받지 아니할려고 전심전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거기에는 단합이 안되어지고 실패가 온다. 도적질이나 강도질을 할 때에 양심에게 인정 받지 아니할려고 전심전력을 기울이나 두려움이 오고 결국은 잡히는 것은 단합되지 않고 나누어진 연고다. 그러므로 일을 저지런 주체가 나누어지니까 외롭고 두려워서 무엇을 의지 할려고 방황하다가 체포되는 것이다.
  ⓑ. 또 하나는 양심에게 인정 받는 일을 한다. 불신자라도 선을 행하면 양심 (불신자의 양심은 죽은 것)에게 긍정받고 긍정 받으면 자기는 단합하여 지고 정리되고 담대한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에게 긍정받지 못하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한다. "선을 행하면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선을 행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낯을 든다는 말이다. 이것이 자기가 자기 길을 찾는 것 중에 하나다. 자기와 자기가 단합하는 것은 선행하는 것 뿐이다. 자기의 감정과 의지로서 단합되는 것이 아니다. 자기가 자기와 단합되지 아니하면 자기를 비판하지 못하고 다만 생의 본능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사람 가운데에 수양이 제일 적은 사람은 본능으로 움직이고 이보다 좀 나은 사람은 이성 비판과 사리판단으로 산다. 이성으로 자기 밖에 것은 비판하고 평가하는 자가 많으나 자기의 행위나 자기 자체를 비판해 볼려고 하는 사람은 적다. 불신자 중에도 자기 행위와 자기자체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으니 이런 사람을 도덕가라, 철인이라고 한다. 이런자가 이 종교 안에도 있다. 이성은 인격이 아니로되 인격과 같은 주격 노릇을 한다. 사람은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나타내기에 가장 알맞다. 하나님이 아니면서 하나님의 신격과 같은 것이 우리안에 있다. 영혼을 나타내는데에는 이성이요. 이성을 나타내는데에는 몸이다. 나와내가 합해지면 우리몸의 각 기관과 지체가 진리와 한덩어리가 되면 이성이 강권해지고 진리와 한 덩어리가 되지 아니하면 이성이 병이 들어 약해진다. 물체인 육체가 병이 들면 환부를 짤라서 낼 수가 있으나 이성이 병들면 그 환부를 짤라 낼 수가 없다. 고쳐야 한다. 육체가 세포적인 것처럼 이성은 이보다 더 세밀하고 조직적이요. 영혼은 이보다 더 세밀하고 조직적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단속할려고 하는 것은 이성과 몸이다. 영혼이 죽었던 것인데 진리와 영감으로 다시 살렸기 때문에 이 영혼은 우리의 주격이요. 진리와 영감이 책임지고 계신다. 영원히 지키고 간섭하고 계시니 영혼에게는 어두움이나 죽음이 없다. 영생하는 것으로 중생시킨 것이다. 이성이 영혼의 지도와 보호를 받아야 하는데 이성이 벌써 죄의 습성에 젖어 있기 때문에 잘 받지 아니한다. 육체의 병은 형체가진 균의 병이지마는 이성이 병드는 것은 죄다. 이성에는 죄가 가득히 베어 있기 때문에 이성이 썩어지는 것인데 영혼이 이것을 치료하여 고칠려고 한다. 바울이 "죄인 중에 괴수죄인이라"고 한 것은 이성이 건전하게 치료 되었다는 것이다. 부분적으로 이성이 선행할려고 할 때에 ??이성이 협조하지 않는 것은 (전심하지 않는 것은) 병이 완치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죽는 날까지 고쳐야 한다. 이성이 단합되면 수 많은 힘이 나오고 인격과 같은 역활을 한다. 이성을 통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전능이 몸에까지 전하여지지 않는다. 자기를 정리하여 단일성을 만들려고 하면 한가지 이성을 만들려고 하면 선을 행해야 한다. 악으로서는 안된다. 이성을 선을 모형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악으로서는 단합이 되지 아니한다. 그러므로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하는 이 말씀은 내가 선을 행치 아니하면 자기 이성이 자기 이성에게 낯을 들지 못한다는 말이요. 자기 이성이 영혼에게 낯을 들지 못한다는 말이다. 이렇게 되면 영혼이 이성에게 나타나지 못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부끄러워 멀리되어 분산된다. 이것을 방심, 방신(放心, 放身)이라고 하겠다. 영혼과 이성이 바로 된 이것이 바로 회개하는 것이다.
②. 선을 행치 아니하면 이웃(가정, 사회, 국가, 민족, 세계)에게 낯을 들지 못한다. 내가 옳은 일을 하면 다른 사람에게 자랑하고 싶고 나타내고 싶고 담대하여 용기가 나지마는 내가 선을 행치 못하고 악을 행하면 다른 이에게 미안하고 부끄럽고 용기가 없어진다. 내가 선을 행하면 이웃에게 대하여 단합하게 되어 이웃과 하나가 된다. 단합이 되어지는 것은
  ⓐ. 내가 선을 행하면 사회에 대하여 미안하지 않고 부끄럽지 않고 반갑기 때문에 단합이 되어지는 것이요.
  ⓑ. 이렇게 사회에 대하여 미안하지 않고 부끄럽지 아니하니 용기와 담대가 나온다. 그래서 단합이 되어지고
  ⓒ. 내가 선을 행하면 상대편에게 있는 양심이 나를 원하니 나는 상대편의 양심을 점령하게 되어 상대편이 나를 좋아하고 환영하기 때문에 단합이 되어지는 것이요.
  ⓓ. 상대편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고 반대하여도 상대편 속에는 죽은 것이나마 하나님의 형상의 모형인 영혼이 있기 때문에 깊은 속에서는 선행을 환영하게 된다. 이렇게 내편에 서서 나를 반대하는 것을 반대하게 된다. 그래서 단합되고
  ⓔ. 나로 하여금 선을 행하도록 감동시킨 영감이 나를 통하여 상대편을 감동시켜서 나와 같은 사람을 만들기 때문에 단합이 되어지는 것이다. 영계에서도 천국과 지옥사이에 구름이 가로 막혀 있지마는 나는 지옥에 있는 자를 불쌍히 여기고 지옥에 있는 자들은 나를 사모하는 것으로 단합이다.
③. 내가 선을 행하면 하나님에게 대하여 낯을 들게 되니 하나님과 단합이 되어 진다. 내가 하나님의 속성대로 움직이고 보니 이성도 몸도 하나님과 가까워진다. 영이 하나님의 것으로 충만해졌는고로 하나님과 밀접하다. 죽은 영은 불변성적인 선을 행치 못하지마는 진리와 영감으로 중생된 영은 절대성 있는 선을 행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속성에 가까워진다. 이렇게 되면 기도도 열심히 하게 되고 행함에도 열심이요. 충성에 욕심이 생긴다. 하나님의 속성대로 만들어지고 하나님의 독립성을 닮는다. 자존자가 아니면서 모든 피조물에게 제한 받지 않고 독립하는 자가 된다. 전능자의 능력이 배후에서 나를 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에게는 피동당하나 모든 존재위에 독립한다. 여기 "낮은" 영과 이성과 몸의 낯이다.
④. 내가 선을 행하면 모든 만물에게 낯을 들게 된다. 롬 8:20-21절에 "피조물이 허무한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고 했고 창 3:17하반-18절에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 해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땅이 네게 가시 덤불과 엉컹퀴를 낼 것이라"고 했다.

4:7-12
자기에게는 개인노선과 단체노선이 있으니 단체노선이 필요한 것은 교훈에 대하여 사역에 대하여 자기 신앙 사회에 대하여 깊은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단체노선은 자기의 신앙 사회다. 개인노선은 자기 생활이다. 그 사람이면 그 생활이요, 그 생활이면 그 사람이다. 사람이 선을 행하다가 보면 선한 사람이 되어지고 본성이 선하다고 할찌라도 악을 행하다가 보면 악한 사람이 되고 만다. 하나님이 주신 길은 완전한 길이기 때문에 내가 이 길을 걸으면 내게도 좋고 이웃도 좋다. 하나님이 가라고 하시는 길은 걸어가면 모든 피조물이 환영하고 유익을 주는 길이다.
①. 혈육이냐 신앙계대냐 하는 이것을 바로 구별하여 바로 가져야 한다. 신앙보다 혈육을 앞세우면 자기는 바른 노선을 걸어가지 못한다. 혈통은 자기 일꺼리요. 자기 무대다. 그러므로 신앙으로 혈통을 다스려야 한다. 혈통의 제일 가까운 사람은 자기 혈통이니 전도도 자기 가정에 주력하라.
②. 하나님이 주인이냐 내가 주인이냐 하는 이것을 바로 가져야 바른 노선을 걸어간다. 자기 일을 자기가 하지마는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ㅈ기가 주인이 되어서 자기 마음대로 자기 뜻대로 하면 하는 일 전체가 헛일이다. "두 여인이 매를 갈매"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두 사람이 한자리에 누웠으니"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였다. 자기 환경에서 자기 일을 같이 했지마는 하나는 하나님의 의자대로 하나는 자기의 의사대로 함에 대한 결과가 나타난 것이다.
③. 환경이 주인이냐 내가 주인이냐 하는 이것을 바로 가져야 바른 노선을 걸어간다. 내가 환경을 지배하느냐 내가 환경에게 지배를 당하느냐 하는 이것을 바로 가져야 자기는 바른 노선을 걸어갈 수가 있다. 서울에 가면 서울 사람이 되고 부산에 가면 부산 사람이 되고 이런 모임에 가면 이런 모임의 사람이 되고 이런 사람을 접촉하면 이런 사람이 되고 술 먹는데 가면 술먹고, 담배 피우는데 담배피우는 이런 사람이 된다고 하면 이 사람은 환경에게 지배를 받는 사람이다.
④. 양으로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렸다. 죄있는 자기는 죽고 죄 없는 양의 생며으로 살아야 바른 노선을 걸어가는 것이다. 이렇게 4가지로 자기의 노선을 구별해도 잘 모르겠으면 나타나는 열매를 보면 알 수가 있다.
  ⓐ. 분이 나면 바른 노선을 걸어 가는 것이 아니다. 바른 노선을 걸어가면 다른 사람이 무어라고 해도 분이 나지 아니한다.
  ⓑ. 안색이 변하면 바른 노선을 걸어가는 것이 아니다. 분이 심하면 인격이 변한다. 본질이 변한다. 하나님의 형상이 떠나 버린다. 이것은 바른 길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여기까지는 심사하는 것이요. 그 다음에 주의 할 것은
  ⓒ. 7절에 "선을 행치 아니하면 낯을 못든다." 이것도 바른 노선을 걷지 않기 때문이다. 또 의를 행하지 아니하면 죄의 침해를 당하낟. "죄가 문에 엎드린다" 움직이면 죄의 침해로 상함을 당한다. 미연에 방지 하는 법은 선행 뿐이다. 죄를 대항코져 하면 선을 행하라는 말이다. 중생된 영과 이성과 몸이 연결되어 있으면 죄를 이길 수 있으나 영과 연결이 끊어지면 죄에게 삼킨다.
  ⓓ.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다스리는 것은 사용하는 것이요,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다. 죄의 소원은 밤낮 내게 있다. 죄는 항상 나를 이용할려고 하고 있으니 나는 죄를 사용해야 한다. "닭 울기 전에 나를 세번 부인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 하신대로 베드로가 세번이나 부인하는 죄를 범했지마는 베드로는 이 죄를 평생 사용했다. 닭이 울때마다 울었을 것이다. 사도 바울도 "나는 과거에는 거역하고 핍박하던자"라고 하여 과거의 죄를 일생동안 사용했다. 이것이 죄를 다스리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자기를 꺾고 눌러야 한다.

4:7-16
선을 행하는 것만으로 자기와 이웃과 하나님과 만물과 합해질 수가 있다. 선이 아니면 합해지는 법이 없다. "죄가 문 앞에 엎드려 있으니" 숨어 있다고 하는 말인데 문 밖에 나오면 침해를 당한다. 선의 입장에 서야 죄를 알게 된다. 선의 입장에 서기 전에는 죄에게 맞아 상해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어실때에 의존성으로 살 수 있게 지어셨고 죄보다 약한 이성과 몸으로 지어셨기 때문에 선에게 연결되기 전에는 죄를 이길 수가 없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죄는 너를 삼킬려고 하고 있고 벌써 죄의 소원은 네 소원이 되었다고 하는 말씀이다. 죄는 가인의 소원이 되어 가인을 삼킬려고 하고 있다. 죄는 가인의 원수인데 이제는 이 죄의 소원이 가인의 소원이 되었으니 원수의 소원이 자기 소원이 되어져 버렸으니 이제는 죄가 마음놓고 가인을 삼킬 수가 있게 되었다. 처음에는 죄가 나를 삼킬려고 하지마는 죄에게 삼켜 놓으면 이제는 죄의 소원이 내게 소원이 되어 자기가 자기를 삼키는 것이다. 그러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 죄를 사용하라. "이미 죄에게 삼켜서 죄의 소원이 네 소원이 되어 죄를 지을려고만 하고 죄만 짓는다. 거기서라도 네가 살려고 하면 죄를 사용하라. 자기의 구원에 유익되도록 사용하라"고 하시는 말씀이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번이나 부인한 무서운 죄를 죽는 날까지 사용한 것 같이 이미 범한 죄를 자기의 구원에 유익되게 사용해야 한다. 이렇게 사용하니 큰 도움이 되었다. 또 바울도 스테반을 죽였는고로 이것을 늘 자기는 복음 전파에 사용했다. 그래서 "나는 상급이 없다. 화만 있을 것이라"하여 어려움 중에서 위로를 받았고 충성하라고도 겸손했고 더 충성했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하셨으면 회개해야 할 것인데 8절에 보면 "가인이 아벨에게 고했다." 이는 회개의 고함이 아니고 "나는 나요, 너는 너다."하는 것을 고했다. "나는 이렇게 되었다. 나는 마구잡이로 하겠다."고 하는 이런 약한 마음으로 선포했다. 사람이 되면 점점 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안되면 점점 안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잘되면 점점 잘되고 못되면 점점 못되는 것이다. 그러나 잘되게 되니까 잘되는 그 재미로 하는 것은 이것도 잘못이다. 이렇게 하여 잘되니까 잘되는 재미로 하여 이 재미가 많이 자라게 되면 안되어 질때는 고통이 더하여진다. 잘되어도 못되어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마귀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이런 사람이 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잘되면 잘되는 재미로 잘되게 하고 못되면 "하나 잘못되나, 둘 잘못되나 한 가지다."하여 점점 못되게 하는 것이다. 언제나 비뚤어지게 한다. 진리를 찾기가 어렵다. 죄 짓기는 쉬우나 진리로 살기는 어렵다. 하나님이 가인에게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리느니라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찌니라"고 말씀 하실 때에 가인은 회개해야 할 것인데, 회개치 아니하고 "나는 이런 사람이 되었다."고 하면서 아벨을 적대시라고 원수시 했다. 가인 자기가 잘못해서 그렇게 된 것인데 아벨 때문에 그렇게 된 줄 알고 아벨을 원수시 했다. 처음에는 제 혼자 범죄해 놓고 이제는 사람과 원수가 된다. 사람을 원수로 삼으면 이제는 죽인다. 의인을 미워하게 되었고 또 의인을 죽였다. "미워하는 자는 살인하는 자니 영생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한다."고 말씀했다. 죄의 소원이 있게 되면 "너 때문에"라고 탓하게 되고 이제는 아벨이 가인의 적이 되어졌다. 그렇게 되면 죽이게 된다. 미워하는 미움을 품게 된다. 미움이 있으면 성신이 거하지 않는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나니 하나님이 가인에 묻는다.
9절에 "네 아우가 어디에 있느냐" 하나님이 이렇게 물어시는 것이 당연하다. 아벨이 어떻게 되었느냐, 다시 말하면 "네가 미워하는 것이 어떻게 되었느냐"하는 것이니 이는 성령의 감화다. 이때는 "내가 죽였나이다"하고 회개해야 할것인데 회개는 커녕 죄를 감춘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죄를 숨긴다. 우리가 사람을 미워하는 것이 예사로운 줄 알고 있으나 미움은 구원을 이루는데 큰 방해다. 살인에 대한 것은 인간에게 대하여 둘째계명이다. 이것을 뽑기 전에는 구원이 안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 "네가 아벨을 어떻게 했느냐"고 말씀하시는 것이 중대한 일인데 가인은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내게 책임이 어디 있습니까"라고 상관이 없는 줄로 안다. 이것이 큰 문제다.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이제는 하나님을 대항한다. 의인을 대항하면 하나님을 대항하게 된다. 별수 없이 대항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또 회개할 기회를 주신다.
10절에 "네가 무엇을 하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 부터 호소하느니라" 생명이 죽는 호소가 내게 왔다는 말씀이다. 아벨을 해하는 진동이 하나님에게 진동이 되었다. 약 5:4절에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고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고 했다. 사람을 저주한 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는 것이니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저주하는 것이다. 사람을 죽일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간접적으로 죽일려고 하는 것이니 하나님이 놀라시는 것이다. 이것을 가르쳐서 말씀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치 아니하면 죄에 들어가는데 죄에 들어가는 순서는 분이 나고, 안색이 변하고, 낯을 들지 못하고, 죄가 문에 엎드리고, 죄의 침해고 죄의 소원이 내게 있게 되고, 의인과 대적이 되고 나중에는 의인을 죽이게 되고 하나님과 대항하게 된다.

4:7-8
"선행하면 낯을 든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낯을 든다고 하는 것은 안면이 있고 면복이 있고 미안치 않고 부끄럽지가 않고 담대가 있다는 말이다. 선을 행치 아니했기 때문에 낯을 들지 못한다.
①. 선행을 하지 아니하면 자기가 자기에게 낯을 들지 못한다. 단일이 안된다. 영과 이성이 단합이 안되니까 목적이나 계획이나 소원이나 성질이 정리정돈 되어 있지 않고 혼합되어 있기 때문에 방종한 사람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성질, 생각, 감정, 비판, 계획, 소원. 이런 것들이 단합이 되었으면 강한 사람이다. 선을 행하는 이것만으로 단일성의 사람이 된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기 때문에 방편과 동기가 선이 아니면 단일성의 사람이 되지 아니한다. 악으로 되는 줄 알면 속는다. 세상 사람들이 악으로도 단일이 되는 줄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전체가 비뚤어지는 것이다. 불의를 행하여 세상에서 잘 되어 나가는 것이 멸망인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을 보지 못한자는 일시적인 면만 알고 있는자다. 좀 넓게 보면 환히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악한 방편을 삼는자가 많다. 재물을 쌓는 것도 그 방편이 악이면 다 빼앗긴다. 선은 강하다. 전지의 지혜, 전능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선이기 때문에 선을 망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망친다고 하는  것이니 선을 망치는 자는 없다. 선을 망칠려고 하는 자는 그가 망한다.
②. 선행을 행하면 이웃에게 대하여 낯을든다. 사회는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모인 것이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사회에 면목이 없다. 선을 행힜으면 천하 사람들이 반대해도 종말에는 이 선을 환영하게 된다. 지옥에 있는 영들도 이 선을 환영한다. 오늘은 연단기로 회개의 시기로 주셨기 때문에 이리도 할 수 있고 저리도 할 수가 있으나 내세에는 회개하는 시기가 없다.
③. 선을 행하면 하나님에게 낯을 들 수가 있다. 선으로 선에 나아간다. 하나님을 점점 가까이 나아가게 하고 하나님이 점점 소원 되어지고 하나님을 의지 하고 싶다. 선을 행치 아니하면 하나님을 의지할려고 해도 안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려고 해도 안된다. 범죄한 아담이 하나님에게로 부터 점점 멀어지고 부끄러워 나무 뒤에 숨었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리웠다. 자기의 이웃과 하나님과 만물에게 멀어진 것은 회개하여 선을 행하면 가까워진다. 선을 행하기 전에는 가까워지지 아니한다.


4:8-15
죄의 소원이 자기의 소원이 될때에 그 죄를 자기의 구원에 유익되게 써 먹어야 할 텐데 그 기회를 잃어버리면 "아벨아 나는 이렇다."고 하는 막가는 사람이 되어서 사람과 대적하게 된다. 처음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하면 이것을 회개치 않으면 사람에게 대적하는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대적하면 벌써 자기 속에는 하나님을 대적한 죄가 있는 줄 알아야 한다. 죄의 소원이 자기의 소원이 될 때에는 벌써 자기를 망칠려고 하니 회개치 아니하면 사람을 죽이게 된다. 먼저 대립하게 되고 대립하고 난 뒤에 죽이게 된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 사람이 자기의 대적이 되어질 때에는 벌써 죄가 자기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때다. 만일 성령이 자기의 주인공이 되어 있을 때는 구별해서 하나님의 형상의 모형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 속에 죄만 미워하게 되지만 죄가 주인이 되어 있으면 의인이든지 죄인이든지 간에 대적하게 된다. 이것을 규정지어야 한다. 의인이든지, 죄인이든지 간에 사람이 자기의 대적이 되어 있으면 그때는 벌써 죄가 자기의 주격이 되어 있음을 판정지어야 한다. 죄가 주격이 되어 있지 아니하면 죄만 대립이 되고 사람은 대립이 되지 않는다. 죄외에 다른 것이 대적이 되어질 때에는 내 속에 죄가 주인이 되어 움직인다.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의로운줄 알면서 그 의를 대적하는 수가 있다. 그때는 의로운 일이 나쁜 것이 아니고 내가 죄의 것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의를 대적하는 일이 있을까 하지마는 의를 대적하는 일이 많다. 말씀을 받을 때에는 자기의 행동을 들고 말씀과 비추어 보면서 받아야 한다. 말씀은 받고 행동은 떼어 놓으면 생명이 없는 노트와 같은 것이다. 자기 행동을 말씀에게 비추어서 자기 행동이 틀렸으면 고치고 맞으면 칭의를 해서 나가야 한다. 사람은 자기에게서 먼것은 평가하기 쉬워도 자기에게 가까운 것은 정평하지 못한다. 현재 사는 모르나 과거사는 안다. 자기보다 남을 정평 잘하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정평하지 못하는 것은 사욕 때문이다. 천하에 제일 귀한 연구는 하나님 연구요. 그 다음은 사람 연구요. 그 다음 일을 연구하는 것이요. 그 다음은 물질연구다. 죄만이 대적이 될 때가 옳은 사람일때요. 성신의 주인일때인 것이다. 사욕이 둘러싸고 있기 때문에 이런 때를 구별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죄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미워하게 되고 대적이 되어지면 무조건 죄가 주인이 된 줄 알고 죄를 찾아야 한다. 죄를 청산하지 않고 죄가 주인이 되어서 일생동안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도 이런 자는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요, 그리스도교 도덕주의요, 그리스도교인 본주의가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자기 주인이냐 환경이 자기 주인이냐 죄가 자기의 주인이냐 하는 이것을 잘 구별해야 한다. 하나님이 자기 주인이 되어야 자기 길을 간다.
(1). 자기 활동의 발원이 자기에게 접촉되고 부딛쳐진 환경 그것 때문에 생겨지는 사람도 있다. 자기가 접촉하는 환경에서 생각이 나오는 사람은 환경에 따라서 움직인다. 울어야 할 환경에는 울고 웃어야 할 환경에는 웃고 환경이 이끄는대로 간다. 환경이 서라고 하면 서고, 가라고 하면 가고 환경이 성을 내라고 하면 성을 내고, 환경이 춤을 추라고 하면 춤을 춘다. 환경에서 지배를 받는다.
(2). 자기의 활동의 발원이 하나님께로서 발원하는 사람도 있다. 하나님께로서 발원된 사람은 하나님이 움직이시는대로 따라서 움직인다. 천하사람이 울어야 하겠다는 환경에서도 하나님께서 웃어라고 하면 그 사람은 웃는다. 환경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이 하나님이 하시는대로 움직이는 것이다. 환경 보고 따라가면 하나님과 대립되는 일이 있으니 하나님을 보고 따라가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환경이든지 자기에게 닥칠때에 무조건 반대해도 안되고 무조건 환영해도 안된다. 하나님의 명령이 어떠한지 이것을 찾아야 한다. 하나님만 접촉하여 하나님과 의논하여 하나님과 같이 환경을 보아야 한다. 적은데서 부터 이것을 연습해야 한다. 자기 생각을 환경에다가 접촉시키는 이런 버릇을 들이지 말아야 한다. 처세에 능하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을 보고 뛰어난 사람이라고 할찌라도 환경과 접촉 되었으면 하나님의 종이 아니요. 자기가 환경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환경의 종이다. 환경마다 변하는 사람이면 세상에 있으면 세상 사람이요, 천국에 가면 천국 사람이 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이길 수가 없다.
①. 어떤 사람은 무슨 환경이든지 간에 환경에 따라가는 사람이 있고 이 사람은 팔방미인이다.
②. 어떤 사람은 무슨 환경이든지 간에 대적하는 자가 있고
③. 어떤 사람은 환경을 환영도, 반대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고
④. 어떤 사람은 환경이 닥치면 환경을 잡아 떼어 놓는 사람도 있고
⑤. 어떤 사람은 환경을 떼어 놓고 하나님과 의논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을 구별하지 아니하면 사람만 얻지 하나님은 얻지 못하고 처세에 능한 사람이 된다. 이것이 "666"의 수다. 우리는 환경을 잡아 떼어 놓고 하나님과 의논해야 한다. 환경을 잡아 떼어만 놓으면 이 사람은 극단의 방종의 사람이다. 하나님과 의논하는 이 사람이 믿음 길을 걷는 사람이다. 사사건건에 이런 것이 있으니 세밀히  구별해야 한다. 나무에도 큰 뿌리가 수분을 취하지 않고 세근이 수분을 취하는 것이다. 자자한 면에서 생명을 가지게 된다. 환경을 만날 때에는 이 환경을 위에 말한 5가지로 구별해서 환경을 잡아 떼어 놓고 하나님과 의논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지식적으로 알고 실지로 써 먹어야 한다.

4:9-12
9절에 "아벨이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아벨이 어떻게 되었느냐 하는 말씀인데 하나님이 아벨의 죽은 사실을 이미 아시고 아벨이 지금 어떻게 되었지 하고 가인에게 묻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벨의 형편과 사정에 대한 것을 가인에게 책임 지우는 말이 아니고 이미 책임이 지워져 가지고 있는 가지고 있는 것을 말하여 "네가 어떤 책임을 졌지" 하는 말이다. "어디에 있느냐" 계약 이행에 불변하시고 추호도 가감없이 시행하시는 하나님이 가인에게 하신 말씀인데 "어디에 있느냐"하는 이 말씀은 아벨의 처소와 형편을 묻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아신 사실에 대하여 가인이 어떠한 책임을 졌는데 "그 진것이 어떤 것인지 네가 아느냐"하고 묻는 것이다. 진책임이 무엇인지를 반성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벨의 형편과 사실을 몰라서 알기 위함이 아니고 이미 지어진 책임이 어떠함을 물어신 것이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가인이 알지 못한다고 했는데 그 속에는 "나는 아벨에게 대하여 책임이 없습니다."고 하는 말이다. "내가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내가 아우를 책임진자 입니까? 내게다 책임을 지웁니까, 아벨에게 대한 책임을 내게다 지울 수가 있습니까 하는 말이다. 이렇게 하면 자기는 다 된줄안다. 사람은 이렇게 어리석다. 책임을 회피하면 된 줄 아는 이것이 어리석다. 외부의 말과 행동, 이면에 몇 거풀이 있는 것이다. 세 거풀이 있는 것을 말했다. "네가 네 책임을 아느냐" "책임이 없습니다" "내게다 책임을 지웁니까"하는 세 거풀이 있고 또 한가지는 "네가 보응을 아느냐" 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여 가인을 반성시킬려고 하신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어떻게 하든지 숨겨서 가릴려고 하고 자기를 파고 들어가서 자기를 멸망시키는 자가 자기 안에 있는데 이 자를 찾아서 멸해야 하는데 가인은 밖으로 내 품기만 하니 마귀가 멸망시키는 일을 자유롭게 하도록 만들고 있다. 자기에게 닥친 문제, 화제를 가지고 자기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복된 사람이다. 껍데기로 날 뛰는 것은 어리석다. 마음을 불의한 것에 사용했으면 마음이 더러워졌으니 비판과 평가, 관찰이 어둡다. 그 마음에서 그것이 나온다. 저 사람에게는 악한 마음을 가져놓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선한 마음을 가질려고 한다. 이것은 어리속다. 고치기 전에는 선한 마음을 가질 수가 없다. 물질과 일과 사람에게 대하여 잘못 생각한 것을 고쳐야 한다. 고치기 전에는 바른 것이 나올 수가 없다. 왜 악한 마음이 되는가? 여기 자기는 악한자요. 더러운 자니 이 자기를 위하는 마음은 악을 위하고 더러운 것을 위하는 마음이니 악이다. 하나님을 위하지 않고 자기를 위하는 마음은 악한 마음이다. 중생된 자는 자기를 위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위하는 자기다. 어째서 전적부패한 자기가 전적 의로운 자기로 되었는가? 하나님만 위하는 것이 되어졌기 때문에 선해졌고 의로워졌고 무능자이면서 능력자가 되어졌다. 하나님은 의로운 자시요, 거룩하신 자시요, 능력자이시니 이 하나님을 위하면 자기가 의로워지고 거룩해지고 능력자가 되어진다. 그러나 자기를 위하면 악해지고 죽는다. 남을 위하기 때문에 선이 된 것이 아니다. 남을 위하는 것이 선인줄 아는데서 중세대 그리스도교 철학이 나왔다. 이것이 "666"이다. 사람만 위하는 것이 바벨탑이다. 인본주의다. 이 인본주의를 사람들이 전부 좋아하기 때문에 인본주의가 세상을 점령하고 신본주의는 박해를 당한다. 그러나 최종에는 신본주의가 모든 것을 점령하고 구원을 이룬다. 모든 사람을 위하는 것이 왜 악인가?
모든 사람도 악하기 때문이다. 인본주의 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이기주의 자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이시요, 악이 아니시다. 죄가 아니시다. "777"에 속한 사람은 모든 사람을 같은 것으로 본다. 인본주의 이기 때문에 죄다. 하나님은 이를 제일 미워하신다. 그러므로 인간에게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만 생각하면 안된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죄라고 하는 것은 인본주의에서 나온 것이요, 또는 이것을 악이라고 하는 것도 인본주의에서 나온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것이 선인줄 아는데 이는 미련한 것이다. 다른 사람을 위하는 이것도 사람을 위하는 인본주의요, 다른 사람도 사람이라 악을 위하는 것이므로 죄다. 앞으로 세상에서는 인본주의 곧 "666"의 표를 가지지 못한 사람은 매매를 하지 못한다고 했다. "매매를 못하게 한다."는 말은 생활을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먹고 살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최종에는 죽인다. 이 "666"의 표를 안 받을려고 하면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한다. 세상과 생명을 내어 놓기 전에는 "666"을 안받고는 못 견딘다. 그래서 먹고 살기 위해서 이 "666"의 표를 다 받는다. 그러므로 인본주의에서 돌아서기 전에는 인본주의를 뽑기 전에는 신본주의로 올 수가 없고 신본주의로 살 수가 없다.


10절에 "네 아우의 핏소리가 호소한다." 피가 호소하고 또 땅이 이 피를 받고 저주하는 권리가 있고 효력을 주고 안주는 권리가 있고 땅이 배척하는 권리가 있다고 했다. 이는 땅 자체가 그렇게 하는 것인지 또 이 보응하시는데 표현해서 한 말인지 땅은 무감각인데 하나님이 계셔서 심판하시고 보응 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땅과 피는 아무것도 아니로되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땅과 피를 표현해서 한 말인지 땅은 하나님의 속성의 움직임에 따라서 된 것이니 땅 자체의 본질과 본성이 신성대로 지음을 받았고 신성을 닮았고 신성에 속했고 신성대로 움직이고 있고 땅 자체가 하나님의 속성적으로  되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과 배치가 되어 있으면 본질적으로 배치가 되어지는 것이니 이것을 말하고 또 하나는 "피가 호소했다."고 했는데 호소는 하나님께 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연결이 얼마나 밀접한 것을 말한다.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은 머리요, 교회는 몸인것은 그 연결이 얼마나 밀접한 것을 말한다. 육체는 신경이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머리에 바늘을 찌르면 발 끝이 놀라는 것처럼 그리스도와 교회도 이렇게 밀접한 연결을 가지고 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니 하나님은 우리의 머리요, 교회인 우리는 몸이니 우리도 하나님이라고 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가 밀접한 것을 묘사한 것뿐이다. 하나님과 우리가 희로 애락을 같이 누리는 밀접한 관계를 묘사 한 것 뿐이다. 언제나 하나님은 창조주이시요. 우리는 영원히 하나님의 피조물이요, 사람이다.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과의 관계는 밀접하고 긴밀하다. 밀접하고 긴밀한 관계성은 머리와 몸과 같이 묘사 할 수가 있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경계선이 영원히 완연하지마는 관계성은 밀접하다. 피조물이 무엇을 당하면 그 자극을 하나님도 받으시고 피조물이 느끼는 것보다 하나님은 더 강하게 느끼신다. 아벨이 죽으면서 "아야" 하는 것보다 하나님이 "아야" 하고 느끼는 것이 강하다. 피에서 전달이 온다. 발가락이 바늘에 찔리면 머리가 "아야"하는 것과 같다.

11절에 "땅이 피를 받았다." 이것도 땅이 피를 받은 형태보다 하나님이 가진 형태가 더 크다. 그 형체가 하나님에게로 온다. 또 땅이 효력을 주는 것도 안 주는 것도 하나님이 하시는 것보다 강하지 못하고 크게는 못해도 땅도 효력을 주고 또 안준다. 또 땅이 대립하는 것도 하나님 만큼 강하지 않지마는 피조물이 대립하는 것도 강하다. 이렇게 되면 범신론을 말하기 쉽고 피조물도 하나님의 분자라고 생각하기 쉽다. 이것은 다 이단이다. 영계도 우주도 그 안에 있는 모든 것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이다. 하나님은 본질과 본성이 완전자로서 불변의 하나님이시다. 커질수도 없고 작아질 수도 없는 완전자 인고로 영원히 불별하신 분이다. 당신의 주권의사로 모든 것을 예정했고 주권적 능력으로 모든 것을 이루어 놓았기 때문에 이 모든 것들은 영원히 하나님을 위하고 살고 하나님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아벨이 당한 고통을 모든 피조물도 느끼고 하나님은 더 강하게 느끼신 것이다.

그러나 정반대로 피를 위하고 사랑하면 모든 피조물들이 감사할 것이다. 롬 8:21절에 "모든 피조물의 소원은 뭇 하나님의 아들들이 돌아오기를 바란다"고 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화친하면 어디에 가도 화친이다. 지옥에 가도 화친이다. 그러나 하나님 한 분과 불목이 되면 전체와 모든 피조물과도 대립이 되어진다. 노아 당시에 모든 사람은 노아와 대립이 되어졌다. 노아가 의인인데 모든 사람과 화친되어야 할 것인데 대립이 되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죄와 마귀의 이용물이 되어 있는 고로 노아가 죄에서 안 삼키는 것이 죄와 마귀와 싸워 모든 사람을 점령할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히 노아의 것으로서 상속을 받은 것이다. 불의를 대적하여 이기면 불의에게 이용당한 모든 것을 자기 것 삼는 것이요.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는 것이니 오늘은 세상도 영계도 자기 것 삼는 시기요, 모든 것을 유업으로 받는 때이다. "지극히 적은 자에게 하는 것이 내게 행한 것이라"고 하셨으니 지극히 적은 일에게 한 것이 주님에게 행한 일이 될 수가 있다고 하신 말씀이다.

4:10-12
이 말씀을 깨닫고 평안과 불안이 하나님과 연결되어야 한다. 하나님 한분만 화복되면 총뿌리도, 역경도, 순경도, 마귀도, 감옥도 나를 환영하기 때문이요. 하나님과 대립이 되어지면 전체가 나와 대립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 한분과 화목되니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피조물과 화목되고 모든 피조물과 바른 관계를 가지고 보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게 된다. 본질과 본성이 하나요, 소원도, 목적도, 방편도 하나인데 다만 권위적이로 존재적으로 지위적으로 양적으로 차이가 있는 것 뿐이다.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피조물은 유한한 것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과 바른 결합을 가지면 하나님과 바른 결합을 가지게 되고 하나님과 바른 결합을 가지면 모든 피조물과 바른 결합을 가지게 된다. 하나님과 피조물은 하나이지마는 하나님은 무한하시고 피조물은 유한하고 하나님은 창조주요, 피조물은 하나님이 지어신 피창조물이다. 이것을 믿는 것이 신앙이다. 땅위에서 우리에게 봉착되는 일이 4가지 인데 5가지로 나타난다. 하나는 생명세계요. 하나는 사망세계인데 생명세계의 것과 사망이 세계의 것을 또 두가지로 나눌 수가 있다. 이것을 형이상학이라고 한다.
①. 사망세계의 것.
  ⓐ. 선악에 대하여 상과 벌로 갚아 주시는 간섭받는 자가 있다. 불신자라도 선악간 상벌로 보응하시는 하나님의 간섭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 방임하여 두는 자가 있다. 이 사람은 범죄해도 얼마든지 잘 살수가 있다. 얼마든지 형통해 질수가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연단하여 속에 믿지 않는 않는 것을 폭로하는 여기에 쓰는 것이다. 신자속에 불신의 죄들이 뭉클뭉클일어난다. "하나님이 계시면 왜 이럴까?" 의심이 난다. 하나님은 이런 사망에 속한 의심을 뽑기 위하여 이런 입장을 주신다. 죄를 범해도 형통해지는데 이것은 하나님의 저주요, 하나님이 버려두심인데 그리스도인을 구속하는데 쓰기 위함이다. 신자속에 있는 불신, 의문을 뽑기 위하여 두신 것이다.
②. 생명세계의 것.
  ⓐ. 성도들이 죄를 범할때에 하나님의 징계의 어려움과 잠깐 방임의 순풍이 있다. 성도들이 죄를 지으면 하나님은 어떤 때에는 징계를 주신다. 상하지 않게 하시고 지혜를 주신다. 먼데서 부터 하나하나 깨닫게 하여서 가깝게 징계하신다. 할 수만 있으면 가벼운 징계로 또 징계없이 깨닫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징계없이 깨닫게 하실려고 하니 하나님의 징계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하고 자신도 징계를 받지 아니하도록 조심해야 한다. 또 어떤 때는 죄를 지어도 징계가 없이 버려두는 일이 있다. 이것은 징계가 없어도 회개할까하는 하나님의 자비요, 스스로 죄의 양이 눈에 보여 회개하는 것을 기다리시는 자비다. 그러나 스스로 깨닫지 아니하면 죄의 그릇이 찬다. 차면 호리라도 제감치 않고 한 몫징계하신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가 범죄하면 반드시 징계가 온다. 징계나 방임은 성도를 회개하게 하는 방편이다.
  ⓑ. 성도가 의를 행할때에 고통, 고난, 실패가 오는 때도 있고 평안, 기쁨, 성공이 오는 때도 있다. 의로 말미암아 실패가 오는 때도 있고 또 형통이 오는 때도 있다. 고난이 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의를 더 빛나게 하는 것이요. 더 가치 있게 강하게 하기 위함이요. 의와 가치와 실력을 더 높여 주기 위함인데 이것은  장성한 신앙에게 온다. 의가 있어도 고통과 실패가 왔는데 이렇게 되어도 의가 깨어지지 아니했으면 한근짜리 의가 두근짜리가 되는 것이다. 금을 불로 연단하면 정금이 된다. (벧전 1:7)
이것은 하나님의 축복중에 최고의 축복이다. 의를 행할때에 평안을 주시는 것은 의를 행할 때에 고난을 주시기 위함이다. 이미 행한 의를 깨지 않고 보존토록 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다. 의를 행할때에 평안을 주시는 이것도 하나님의 축복인데 약할 때에 주시는 것이요. 의의 재료로 삼아서 의를 만들게 하려하심이다. 그러므로 성도가 의를 행할 때에 평안과 기쁨과 성공이 오는 것은 어린 신앙에게 오는데 의의 자료를 삼기 위해서 오고 또 이미 행한 의를 보존하기 위해서 온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섭리하시는 것을 좁게 보면 안된다. 하나님이 가지신 범위를 우리가 바로 깨닫고 나면 그때는 기쁨과 감사의 생활이 나오고 바로 사용하게 된다. 이것이 신앙이다. 성도들이 범죄할때와 의를 행할때에는 생명에 관한 두가지를 바로 깨닫고 바른 관계를 가져야 한다. 바른 관계를 가지는 이것이 거룩이다. 하나님이 내게 베푸신 절대자비를 깨닫고 모든 것이 내게 유익이 있고 손해가 있는 것을 알아야 한다.

4:12-15
지난 시간에는 생명세계에 속한 것과 사망세계 안에 있는 것을 말했는데 가인은 어디에 속했는가? 여기에 볼때에는 사망세계에 속한 사람과 같이 되었지마는 구원에 대해서는 단언하지 못한다. 가인은 저주를 땅에서 받았지마는 하늘에 까지 저주를 받았는지 받지 아니했는지 또 택한자인지 불택자인지 그것까지는 모른다. 이것을 속단 할 수가 없다.
①. 이 세상에서는 하나님을 부르면서도 마귀의도가 있다. 정통에 대한 큰 대적은 인본주의요, 세상주의 인데 천주교가 대적이 된다. 천주교는 의식과 제도만 가지고 수백년간 내려오다가 보니 정치만 남아서 정치를 가지고 세계를 점령할려고 한다. 천주교는 주후 300년경에 로마 국교로 된 때 부터 천주교가 생긴 것이다. 주후 1500년경에 천주교가 이단인고로 많은 핍박속에서 루터가 개혁을 부르짖고 개혁교회를 세웠으니 이것을 종교개혁이라고 한다. 그래서 천주교와 개혁교가 서로 대립이 되고 개혁교 중에서도 속화 된 것과 속화되지 아니한 것이 대립이 된다. 그러므로 말세가 될수록 로선(路線)을 구별하는데에 중요시해야 한다. 옳은 노선이면 거기에 속해야 한다. 노선이면 같은 것으로 알면 행위구원은 실패다. 옳은 것만 잡으면 천하가 옳지 않다고 해도 제제를 받지 아니한다. 마귀가 밀때에 안 밀리겠다고 마구 밀기만하면 마귀가 댕길때에는 넘어지고 만다.
  ⓐ. 밀기만 하는 자는 다른 노선을 외면하고 접촉도 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것도 지나치면 탈선이요. 자기가 속하여 있는 노선이 옳은 것이면 거기에 속하여 있으면서 다른 노선과 접촉할 수가 있도 교훈을 청취할 수가 있는 것이다. 다른 노선을 외면하면 안된다.
  ⓑ. 댕기는 자는 아무 노선에 속해도 된다고 하는 자인데 이것도 지나치면 안된다. 그러므로 모자라도 안되고 지나쳐도 안되고 치우쳐도 안된다.
일반적으로 알고 양면을 모르기 때문에 폐단이다. 모든 면에 세밀하고 주밀해야 한다. 물건을 취급하는데 있어서도 있어서 유익할 때가 있고 없어서 유익할 때가 있는 것이다. 있어야만 한다고 하는 것도 폐단이요, 없어야만 한다고 하는 것도 폐단이다. 돈이 벌려서 손해가는 것이나, 돈이 안벌려서 유익한 것이나 돈이 벌려서 유익한 것이나 돈이 안벌려서 손해가는 것이나 이것을 동등시 해야 한다. 천하가 무어라고 해도 옳은 것이면 놓지 말아야 한다. 금하는 것이라고 하여 정도에 지나치게 금하면 도리어 반박하는 일이 있으니 간접적으로 반박하게 만든 것이다. 강하게 금하여도 되는 일이면 자기와 하나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옳은 것이면 옳다하고 그른 것이면 그러다고 해야지 이에서 지나면 죄다. 속화되면 형식과 제도와 의식에 치중하게 되는 것이다.
②. 주를 배반한다고 해도 불택자라고 단언치 못한다. 택자는 일시 부인 할지라도 최종에는, 또는 어느 시기에는 회개한다. 그러므로 회개하지 않는다고 불택자로 단정치 못한다. 그 사람이 죽는 날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권면하고 전도해야 한다. 일시만 생각 할 것이 아니라 복음을 헐지 않고 복음을 세우는 그 면으로 나가야 한다. 부모가 믿는 사람이라고 해서 자녀 전부가 택자라고 단언치 못한다. 그러므로 증거를 보기전에는 유아 세례를 주지 못한다. 세례요한은 뱃속에서 뱃속에 계신 예수님을 찬송한 그것을 근거하여 유아세례를 준 것이다. 죽은자에게 세례를 준다고 하는 것도 성경적이 아니다. 또 죽는 날까지 범죄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하는 것도 치우친 것이다. 세상을 사랑치 말라고 성경에서 말씀했다고 세상을 무조건 싫어 하는 것도 치우친 것이요. 죄악을 미워하다가 사람까지 미워하는데 까지 나가면 이것도 치우친 것이다. 치우치지 않도록 방비해야 한다. 그러므로 의와 불의가 함께 있다. 의가 있는 곳에 불의가 있고 불의가 있는 곳에 의가 있으니 의에서 불의까지의 거리가 가깝는고로 의에서 불의를 안심 할 수가 없고 불의에서 의를 낙망 할 수가 없다. 의에서 죄가 멀지 않으니 섰다고 안심하지 못하고 불의에서 의가 멀지 않으니 의가 먼줄 알고 낙망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4:13-15
14절에 "이 지면에서 쫓아내셨으니" 이 말씀을 보면 그때에 가인을 가인이 있던 곳에서 쫓아낸 것 같이 보인다. 그것이 아니고 가인이 쫓겨나는 지면은 에덴동산 부근만이 아니고 온 세계에서 쫓겨나는 것이다. 여기 "지면"이라고 한 것은 어느 지방을 말하는 것 아니고 가인이 범죄하기 전에 있었던 그 위치에서 쫓겨난다는 말이다. 그러면 왜 지면이라고 했는가? 하나님과 자기와 관계된 이 위치를 두고 말한 것이다. 하나님은 참이시요. 옳고 복된 것이 하나님께 있으니 하나님과 멀어지는 것은 복된 것과 옳은 것과 참된 것과 멀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는 멀어지고 복과는 가까워질 줄 아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하나님과 멀어지면 자기가 좋아하고 자기에게 필요한 것과 멀어지는 것이다. 하나님과 가까워져야 행복과 가까워지고 하나님과 멀어지면 행복과 멀어지는 것이다. 모든 것은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지면 모든 것과 멀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가인을 쫓아내셨는데 지면에서 쫓아내셨다. 지면은 동양도, 서양도 지면이다. 가인이 땅위에 있는 동안 하나님과 관계된 위치에서 쫓아내신 것이다. 땅에게서 혜택을 입고 땅에게 혜택을 입히고 또 하나님의 혜택을 입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관계의 위치에서 멀어진 것이다. 가인이 하나님과 멀어졌으니 그 만큼 땅과도 멀어진다. 하나님과 관계가 맺아지면 땅과도 관계가 있다. 하나님의 혜택을 입으면 땅에게도 혜택을 입는다. 이것을 받지 못하는 것을 가인이 탄식했다. 하나님의 혜택을 받지 못하니 땅의 혜택도 못받아 가는 곳마다 배척이다. 그래서 "땅에서 유리하는 자라"고 했다. 지면에서 쫓아내었다고 했으니 그 장소에서 쫓겨나 10리나 100리나 가서 살게하는 쫓겨남이 아니고 그 장소에 있으면서도 쫓겨나는 쫓겨남이다. 제 5계명에 보면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허락하신 땅에서 오래 살리라"고 말씀했는데 어떤 곳에서 오래 산다는 말인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오래 산다는 말인지, 자기가 살고 있는 곳에서 잘 산다는 말인지, 하나님이 인생에게 선물로 주신 땅을 선물로 받아서 선물되게 관계하는 위치에서 산다는 것인지, 어느 것인가? 하나님이 인생에게 선물로 주신 땅을 선물로 받아서 선물로 사용하는 위치에서 산다고 하는 말이다. 지면에서 쫓아내리라고 하신 말과 정반대되는 말이다. 하나님과 피조물과 옳은 관계를 가지고 그 위치에서 오랫동안 누린다는 것이니 수명도, 흥왕도, 하나님의 은총도, 지면의 혜택도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 제 5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엇이기 때문에 허락하신 땅에서 오래 살고 가인은 아벨을 죽인 것이 무엇이라고 지면에서 쫓겨남을 당하는 보응을 받았는가? 제 5계명을 지키는 자가 받는 보응과 가인이 받는 보응이 정반대인가? 결과 반대인가? 원인이 반대인가? 결과가 정반대인 것은 원인이 정반대이기 때문이다. 제 5계명을 지키는 자나 가인이나 그의 원인이 무엇인가? 인륜을 지키는 화평이다. "거룩함과 화평이 없이는 주를 보지 못한다."고 했다. 계명의 강령은 두 가지다. 하나는 주 하나님을 공경하고 또 하나는 옆으로 형제를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다. 제 5계명은 둘째 강령이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는 줄이요, 뿌리다. 부모는 내 위에 있는 분이요. 형제는 내 옆이다. 그러므로 부모를 공경하라, 형제를 사랑하라는 말은 다 화평하라는 말이다. 술어를 달리 쓴 것 뿐이다. 이 가인은 화평함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에 쫓겨났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 형제를 사랑하는 것인데 가인은 아벨을 죽였기 때문에 위로 하나님을 배반했고 옆으로 형제를 배반했다.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형제를 죽이는 자라"고 했고 "살인하는 자는 그 속에 영생이 없다."고 했고 "보는바 형제를 사랑치 못하면 보지 못하는바 하나님을 사랑치 못한다."고 했으니 이런자는 사랑이라는 본질과 요소가 없다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이것이 자라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들을 직접 하나님께 대하여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을 직접 맞데어서 해 본 사람도 없고 할 수도 없고 이 방법은 위험하다. 다만 계명을 지키는 것 뿐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라"고 하실 때 그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것은 계명을 통해서만이 관계를 가진다. 사랑을 주고 받는 것은 계명을 주고 받는 것이다. 이것 외에 다른 것으로 사랑하는 방법으로 기울어지면 불건전한 신비주의에 빠진다. 그러므로 보는바 형제를 사랑치 못하면 하나님을 사랑치 못한다. 사람과 화평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화평을 누리는 것은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화평을 누리고 인간을 사랑하는 것이 될까?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천태만상과 화평을 누리고져 하면 강도와 화평을 누리고져 하면 내가 강도가 되어야 하고 놀음꾼과 화평을 누리고져 하면 내가 놀음꾼이 되어야 하고 술꾼과 화평을 누리고져 하면 내가 술꾼이 되어야 할 것이나 이것은 화평이 아니다. 다만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계명 지키는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요.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 사랑은 단일성이요. 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계명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이 계명은 하나님의 속성에서 나왔으니 하나님의 속성이 있다. 그래서 단일성을 가졌다. 인간과 화평을 가지는 것은 계명적이라야 하는데 이는 지식적인 화평, 지혜적인 화평, 선적인 화평, 사랑적인 화평, 의적인 화평, 거룩적인 화평, 진실적인 화평, 주권적인 화평이라야 한다. 이런 화평이 아니면 화평이 아니다. 신화적인 화평도 치우친 화평이다. 이는 불건전한 화평이다. 불건전한 신비주의로 치우치고 인화적인 화평은 사람 좋다고 하는 것이니 이런 자는 팔방미인이라 이것도 치우친 것이다. 신화적인 화평이 인화적인 화평에게 까지 미쳐야 하고 인화적인 화평이 신화적인 화평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는 것이 곧 하나님과 사람과 화평을 누리는 것이다. 천태만상의 사람이 있으니 인화주의에 치우치면 여러 모양의 사람이 된다. 치우친 것은 죄다. 적중해야 한다.

4:13-15
진리지식은 반드시 회개를 낳는다. 진리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을 인정할 때에 생긴다. 많이 알고 있다고 할찌라도 인정하지 않으면 자기 지식이 아니요. 남의 지식을 알고 있는 것 뿐이다. 성경을 보고 여기에 있는 것을 인정하기 전에는 자기지식이 아니다. 천하에 있는 것을 다 알아도 자기지식이 아니다. 이 세상에는 생명에 속한 일들이 있고 사망에 속한 일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생명에 속한 것을 주시는 때가 있고 사망에 속한 것들을 주시는 때가 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생명에 속한 것을 대개는 주신다. 생명에 속한 것 중에 하나를 말하면 형통이 있고 막힘이 있다. 의를 행해도 형통도 있고 마찰도 있다. 그리고 죄를 범해도 형통이 있고 실패도 있다. 그러므로 일시에 되어지는 것 보고 성공이라 또는 실패라고 단정 지울 수가 없다. 이렇게 두가지씩이 있으니 결과적으로 어떻게 되는가? 죄를 범했을때의 결과로는 망하는 것 뿐이요. 의를 행한 값은 성공이다. 그러나 지금은 두가지로 나타나는 것은 결말을, 열매를 맺는데에는 여러가지가 든다. 성공도, 실패도 들어야 망할 것은 아주 망하게 되고 성공할 것은 크게 성공하게 된다. 흥했다. 망했다. 하는 이것이 있어 가지고 흥할 것은 아주 흥하고 망할 것은 완전히 망하게 하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의 결과를 이루기 위해서 이런 것들이 있는 것이다. 성도들은 현재에 자기에게 이루어진 그것보고 기쁘하는 것이 아니다. 바울이 빌립보 교회에게 "항상 기쁘하라"고 했는데 어디서 기쁨을 찾을 것인가? 기쁨을 찾는 방편은 무엇인가? 옳은 깨달음과 행함에서만이 찾는다. 수많은 죄 중에서도 옳은 깨달음만 있으면 기쁘다. 이 기쁨이 없으면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성도가 기쁘하는 것은 옳은 깨달음과 바른행함에서만이 얻어지는데 성도들은 어디서 사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때에 어떤 때는 하나님이 누를 때도 있고 어떤 때는 들어 올릴 때도 있다. 이것은 성도를 연단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다. 우리는 또한 힘만 쓰도 안된다. 우리가 힘을 쓰는 배후에 하나님의 힘이 있어야 한다. 성도들이 기쁘하는 것은 눈에 보여지는 그것 가지고 해서는 안된다. 성공과 실패의 기준은 동기와 목적과 방편에 두어야 한다. 성공해도 그 동기와 목적과 방편이 잘못되었으면 실패한 것만도 못하다. 좋은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일을 추진하는데 그 방편이 어떻게 되었는지 이것을 살펴야 한다. 여기에서 나온 실패도 성공이요, 여기에서 나온 성공도 성공이다. 주일을 범하면 성공한다고 하는 것도 잘못 깨달음이요. 주일을 범하면 실패 뿐이라는 것도 잘못 깨달은 것이다. 주일을 범해도 성공할 수가 있고 주일을 범해도 실패할 수가 있다. 그리고 주일을 지켜도 성공할 수가 있고 주일을 지켜도 실패 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성도의 눈앞에 나타난 것만 보고 결정짓는 것은 외식이다. 이것은 인격적 외식이요. 비판적, 사상적, 희로애락적 외식이다.


13-14절에 "가인이 여호와께 고하되 … 나를 죽이겠나이다."
①. 가인이 자기의 범죄한 것과 범죄에 대하여 오는 보응이 너무 크다고 생각했다. 범죄한 보응이 다 온 것은 아닌데 그 값이 비싸다고 했다. 자기의 현재에 당하는 가치를 지나치게 정하고 죄에 대하여는 가볍게 정하는 것은 망할 성질이요. 지식이다. 성화되어 갈수록 죄에 대한 무게를 크게 본다. 죄의 해독은 크다. 적은 죄라도 그것이 주는 해독이 큰 줄 알았기 때문에 그 죄가 자기에게 점점 크게 보인다. 사도 바울이 "괴수죄인이라"고 한것은 전에는 적게 본 죄를 이제는 크게 보았고 전에는 양심의 가책을 적게 본 것을 이제는 크게 가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화되어 가는 것이다. 죄의 중수를 적게 보는 것과 적게 느껴지는 것은 멸망 받을 증거다. 그러므로 자신이 범한 죄에 대해서는 죄벌이 얼마나 큰것인지 이것을 자주 연구하여 그것이 커 갈수록 의인이 되어 가는 것이다. 자기 잘못은 적게 보고 남의 잘못은 크게 보는 것, 죄의 보응은 적게 보고 자기에게 오는 고통은 크게 보는 것은 악한 연고다. 가인이 자기의 범한 죄의 해독이 큰 것임을 깨달았으면 현재에 자기가 당하는 고통은 시발이요. 앞으로 ㅇ러마나 더 큰 보응을 받아야 할 것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너무나 크다."고 했다. 고쳐 바로 하는데로 나아가는 시발은 잘못한 가치를 바로 느끼는 것이다. 잘못을 뉘우치는 양이 실제의 양보다 적게 가지는 것은 뉘우침에 머물러 있는 것이요. 실제의 양보다 많게 가지는 것은 성화에로 가는 것이요. 실제의 양 만큼 가지는 것은 뉘우침에서 고쳐 바로 함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더 크게 보여지는 것은 죄의 해독이 제삼자에게 까지 영향을 미치게 하는 것을 본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잘못을 적게 보는 것, 자기의 잘못이 보이지 않는 것은 멸망할 증거다. 이런 사람은 상대하기가 힘이 든다. 자기의 잘못을 적게 깨달은 자는 남의 잘못을 크게 보는 자요. 자기의 잘못을 크게 깨닫는 자는 남의 잘못이 적게 보여진다. 잘못을 자기에게 전적으로 심각하게 느껴지면 남의 잘못은 보여지지 않는다. 그래서 바울이 "괴수죄인이라"고 했다. 이렇게 된자가 모든 것을 바로 처리하고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또 하나님을 사랑하게 된다. 남의 잘못은 잘 보고 잘알고 말을 하면서도 자기 잘못은 모르는 그런 사람을 건설을 위해서 멸시해야 한다. 고치기 위해서 멸시한다.
②. 자기에게 오는 고생에 대하여 그 고생의 값을 중하게 여겼다. 못쓸 사람일수록 고생의 값을 중하게 여긴다. 한근짜리 고생을 두근짜리로 여긴다. 수고한 것을 많게 여긴다. 이것이 못쓰게 될ㄹ 사람이다. 많은 수고를 해 놓고도 부족하여 적게 여기는 자는 남의 하는 수고를 크게 여긴다. 자기의 수고는 적게 여기고 남의 수고를 크게 보는 것이 불신자에게도 있는데 하물며 성도들이겠나!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 남의 수고를 크게 보고 자기의 수고는 적게 보아야 한다. 잘못하면 외식하기 쉽다. 이렇게 남의 수고는 크게 보고 자기 수고는 적게 보는 이것이 사는 것이요. 평안이다. 이 성질이 점점 커지면 평안이 점점 커지는 것이다. 이것이 천국이다. 남을 크게 보고 자기극 적게 여기고 남의 잘함만 보이고 자기의 잘못만 보여지면 여기에는 회개의 열매를 맺는 고통이 나온다. 이 고통은 생명에 속한 고통이다. 이 고통을 통하여 점점 평안에서 평안으로 나간다. 그러나 남의 잘못만 보고 자기 잘못은 안보여지고 남의 수고는 적게 보여지고 자기와 자기의 수고는 크게 보여지면 임시는 평안이나 가면 갈수록 고통에 나아간다. 이 평안은 사망에 속한 평안이다. 말세가 되어 갈수록 고통을 두려워한다. 또 하나는 고생을 두려워한다. 이것은 죄 값이다. 범죄한 아담과 하와에게 수고와 고생과 고통을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것인데 이것을 두려워하고 싫어하는 것은 죄다.
③. 가인이 죄의 벌이 중하다고 떨었다. 죄는 무거워하지 않고 벌만 중하게 여겼다. 그래서 하나님은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이 7배라"고 했다. 이 말씀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 벌보다 가인을 죽인 벌이 7배라는 말씀이 아니다. 범죄한 가인을 죽인 벌이 7배라고 한것이니 의인 아벨을 죽인 벌은 몇배인지 모른다. 이 말씀은 가인이 아벨을 죽인데 대하여 한 것이 아니고 남을 한번 해 하였으면 7배나 해를 받을 것이니 사람은 사람을 해하지 못하는 것을 보이신다. 자기를 해치는 원수까지도 우리는 해치지 못한다.

4:15, 24-26
①. 사람이 죄를 범한다고 하나님이 그 사람의 생명의 정한 기한을 변개하지 아니하신다. 아무리 범죄해도 정한 기한 전에는 죽지 아니한다. 예정대로 죽는다. 또 의를 행하였다고 정한 수명이 길어지는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대개는 의를 행하는 자를 그 의를 통해서 수명이 길게 하시고 죄를 통해서 수명을 짧게 하시는 것이 보편의 것인데 이것도 작정하신대로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한 모든 의로운 행위는 물론 영생하는 것이요. 육도 장수하는 값이다. 죄는 사망하는 법이요. 또 신체에도 단명하는 규칙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이 법칙은 영육을 복되게 하는 법칙이다.
②. 범죄한 가인을 죽이지 아니하신 것은 첫째로 가인의 수명이 정한 기한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남은 수명이 있기 때문이다. 또 하나는 하나님이 심판 하실때까지는 전체적으로 무엇이든지 생긴 것을 없애지 않고 심판때까지 자라가도록 그대로 두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의인의 순종하는 그 의를 기르시고 길러서 그 의의 분량대로 장성하는 것을 원하심과 같이 하나님의 교훈을 떠난 그 죄악이 얼마나 불행한 것을 보여 주기 위하여 죄악의 양을 정하시고 그 그릇이 차기를 기다리시기 때문에 가인하나가 멸하여지는 것이 부족하여 수 많은 자손이 멸망하여 지도록 그릇에 차게 하신 것이다. 가인의 살인죄가 시간이 갈수록 더 심하여 오늘에 와서는 더욱 심하다. 또 하나는 하나님은 가인이 회개하는 것을 기다리신 것이다. 회개의 기다림에서 안죽이신 것이다. 가인은 범죄했는데도 망하지 않고 남아 있는 것은 이 세가지 때문이다. 오늘도 신자가 범죄했는데도 보응이 안오는 것은 이것 때문이다.
③. "보응이 7배라"고 한 것은 아벨을 죽인 가인을 죽이면 벌이 7배라고 한것이 아니고 타인(他人)을 해쳤으면 자기는 7배나 해를 받는 것을 말한다. 남을 조롱하고 시기하고 훼방하는 것도 같다. 그와 반대로 남을 유익되게 했으면 7배의 유익을 받을 것이요. 자비를 베풀고 사랑했으면 이것도 7배나 받을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이 생명을 사랑하시는 것이니 여기에 생명은 건설을 말한다. 하나님은 건설을 사랑하시고 좋아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다른 사람을 미워하면 7배나 미움을 받고 내가 다른 사람을 노히면 7배나 노림을 받는 것을 알아야 하고 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 7배나 사랑을 받고 자비를 베풀면 7배나 자비를 덧입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런 법을 우리에게 주셨고 이 법이 실시가 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다 이루리라"고 하신 이 말씀이 보증하신다.
④. 가인이 큰 죄를 범했는데도 하나님 앞에서 쫓겨남 밖에 더 받지 아니했는데 도리어 벌이 크다고 했다. 이것은 이기주의에서 이기주의로 나가는 무서운 죄다. 공(公)을 떠나서 다른 사람과 차별을 두는 것은 죄다. 사망이다. 이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로, 자기의 머리털 두개가 빠지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머리털 한 개가 빠지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고 둘째로, 자타의 머리털이 빠지는 것을 동등하게 보는 사람도 있고 셋째로, 다른 사람의 머리털 두개 빠지는 것보다 자기 머리털 한개 빠지는 것을 더 중하게 여기는 사람도 있다. 다른 사람의 목이 날아가는데 이것보다 자기의 머리털 하나 빠지는 것을 더 크게 보는 이런 사람은 악인 중에 악인다. 공(公)을 떠나면 안된다. "이웃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고 했는데 이웃을 위한 수고와 자기를 위한 수고 중에 어느 것에 더 힘쓸것인가? 자기에게 더할 것인지 다른 사람에게 더할 것인지. 자타에게 같이 할 것인지, 자기가 자기에게 대하여 책임을 졌기 때문에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유익을 주어야 하는데 이것이 공욕에서 나온 것인지 이기주의에서 나온 것인지 이것을 심사해야 한다. 하나님은 제일로 자기와 이웃은 같이 여겨야 한다. 귀중히 여기는 정도는 똑같은 정도로 해야 한다. 평가에 있어서 똑같이 해야 한다. 남을 위해서만 힘을 더 써야 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이타주의인 그리스도교 도덕주의요. 자타에게 힘을 같이 쓰야 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교 사회주의요. 자기만 위한다고 하는 것은 그리스도교 이기주의인지  그리스도교 복음주의인지 잘 모른다. 자기를 위하는 것이 전체를 위한 것이면 산것이요. 자기만을 위하는 이기주의이면 죽은 것이다. 이것 가지고 모든 것을 비판하면 환하게 알 수가 있다. 한 사건을 가지고 이것에 관계되는 대외적인 여러문제와 관계를 맺아야 한다. 모든 면에 세밀해야 한다. 일방적인 면만 생각하는 자는 위험하다. 될것만 생각하는 것도 일방적이요. 안될것만 생각하는 일방적이다. 사람은 같은 사람으로 생각하고 책임은 자기에게 대하여 먼저 하고 남은 힘가지고 남을 책임져야 한다. 남을 더 났게 여겨도 안되고 자기를 더 낫게 여겨도 안된다. 자기보다 남을 더 낫게 여기라는 것은 도덕면에서 보라는 것이다. 남의 눈에 티를 보고 자기 눈의 들보를 보는데에만 쓰여진다.

4:15,24-26
하나님이 범죄한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한것은 수명을 변개치 아니하기 때문이요. 범죄의 그릇을 채우기 위함이요. 회개를 원해서 기다리시기 때문이다.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받지 아니하기 위해서 방비는 해도 그 방비하는 선을 넘어가면 침략이라 죄다. 상대방은 나에게 손해를 보일 수가 있으나 나는 상대방에게 손해를 보일 수가 없다. 다만 나는 손해를 받지 않도록 방비할 권리는 있다. 그 보응이 하나님에게 있으니 하나님이 다 처리 하신다. 남을 사랑할 권리가 있고 미워할 권리가 없다.

24절에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7배일찐데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77배로다." 이 말씀은 가인은 가만히 있는 아벨을 죽였지마는 나는 나를 해롭게 하는 자를 죽였으니 났다고 하는 것이다.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보다 내가 사람을 죽인 것이 났다고 하는 것이다. 자기가 남에게 은혜 베푼 것이나 도움을 준 것은 어떻게 잘 아는지 자기에게 있는 적은 의를 과대평가한다. 자기에게 있는 잘한 적은 것 하나를 부풀어 먹고 또 자기를 해한자가 해를 받는 것을 얼마나 기쁘데 여기며 시원스럽게 여기는지 자타에게 공정하게 하는 것이 귀하다. 한번 다른 사람에게 은혜를 받은 것과 한번 해를 받은 것을 일생동안 써 먹는다. 자기가 다른 사람에게 해를 받는 것은 잊어 버리고 다른 사람을 해롭게 한 것을 잊지 않는 것은 죄의 사람이 죽어가는 것이지마는 남에게 해를 받은 것은 잊지 않고 남을 해한 것은 잊어 버리는 것은 죄의 사람이 점점 사는 것이다. 이것이 사욕에서 나온 것이다. 공정을 잃어 버리면 여기에는 불평과 원망과 죽이는 것만 나온다. 공정은 어디에서나 사용해야한다. 물건에 대하여도 사건에 대하여도 사람에게 대하여도 공정을 기해야 한다. 그러므로 공정ㅇ르 바로 정하지 못하면 헛일이다. 우리는 구약은 무시하기 쉬운데 이것은 폐단이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책임성과 권위성을 같다. (마 5:17-18). 또 죄를 범했다고 단번에 멸하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은 회개하기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나님은 회개의 기간을 주셨기 때문에 참아 기다리신다. 뿐만 아니라, 나 한사람으로 인하여 나와 내게 속한 전체가 잘 되고 못된다. 다시 말하면 자기가 실력이 있고 없는 것에 있어서 전체가 좌우된다. 그런데 이것보다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안된다. 실력이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축복이 아니면 안된다.

4:25-26
가인이 하나님 앞에서 쫓겨 났다고 해도 아담과 하와가 있으니까 하나님을 섬겼으리라고 하겠지마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 형식적으로 되지 아니했다. 형식적으로 하나님을 공경치 못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이렇게 살아오다가 셋 때에 와서 비로소 여호와를 안것이다. "여호와"라고 함은 계약을 선포하시고 선포하신 계약대로 이행하심에 불변하신 자존자란 말이다. 아담으로 부터 구원의 계대가 뚜렷이 나타났다. 아담에게서 아벨로, 아벨에게서 셋으로 계대 된 것이다. 이 계대 밖에는 구원이 없었다. 이렇게 하여 나오다가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후에 아브라함의 혈통계대를 통하여 근원이 계대 되어 온 것이다. 아벨과 같은 제사를 통하지 않고는 구원이 계대되어 내려오지 아니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이 당신이 계약하시고 택자들에게 영감으로 선포되었고 계약을 받은자 외에는 구원이 계대되어 내려오지 아니했고 또 이 계약이 계대 되어 내려가면서 하나님의 도가 점점 밝아져갔다. 이것을 보고 그리스도교를 진화종교라고 하는 자가 있으나 그리스도교는 진화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이 계시하신 계시가 점점 밝아지고 온전함에 나아가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어둡기 때문에 영이 자라가매 따라서 점점 밝게 온전에 나아가는 것이다. 계대되어 내려가면 갈수록 점점 밝아지고 온전함에 나아가는 것이다. 진화적인 종교라고 할 만치 온전히 나타나는 것이다. 유교나 불교에 구원이 없는 것을 대속의 공로와 성신이 없는 증거다. 그리스도교가 타락하여 천주교가 되었을 때에 루터가 개혁하였다. 많은 피를 흘려서라도 개혁하도록 진리와 성신이 역사 하신 것이다. 구약시대에는 이스라엘 외에는 구원이 없었다. 이방종교가 생겨진 것은 신정국가 이스라엘이 생긴 천년후다. 그 전에도 종교가 아닌 미신적인 우상종교가 있었다. 이것을 보면 이방종교에 구원이 없는 것을 알 수가 있다. 또 에덴동산 이후에도 신앙계대 밖에는 대속의 도와 성신이 없었다. 그런데
·성경에 양심을 논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아니했을찌라도 양심만 지켰으면 구원이 있다고 하는 이가 있고
·선이 하나님께로서 나왔으니까 선만 행했으면 구원을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도 있다. 전부 잘못된 주장이다. 여기서는 모든 선이 하나님께로서 나왔다고는 할 수가 있으나 구원을 논하면 탈선이다.
대속의 도 외에 양심을 가지고 양심 생활을 한자는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이요. 선을 행하면 구원을 얻는다고 하는 것인데 이런자는 선악과를 먹지 않은 자에게는 해당된다. 원죄가 없어야 한다. 천하에 있는 모든 사람은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이 아니면 구원이 없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도성인신하여 사람들에게 도를 가르치신 것은 지금부터 1500여년 전이요. 그리스도의 영으로서 도를 전한 것은 에덴동산에서 부터요. 구원을 계획하신 것은 영원전이다. 예수님이 죽어서 지옥에 갔다가 천당에 갔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예수님은 즉시 천당에 가셨다. 예수님의 영은 죽지 아니했다. 죽지 않고 죄를 담당하셨기 때문에 구주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죄를 담당하여 형벌을 받을 때가 예수님의 최고의 의를 행할때요, 최고로 강할때요,최고로 기쁘고 평안할 때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신 구원은 아무데나 있는 것이 아니요, 창세전 계획 하신 것이요. 성경과 성신에서만이 있고 신앙계대에만 있다.


창세기 4장: 아벨과 가인

1-3.    아벨과 가인의 업
4-5    아벨이 드린 제물은 열납하시고 가인이 드린 제물은 열납치 않으심
6-7    가인이 시기로 아벨을 죽임
8-16   가인의 형벌
17-24  가인자손의 계보
25-16  아담에게 아벨 대신에 셋을 주심

동침이란 말이 왜? 이때부터 나오냐-범죄함으로 분식법이 끝나고 부정모혈의 생육법으로 바뀜을 나타냄

     창세기 4:1-26
여기 몇가지 알기 어려운 진리가 포함되어있다
하나는 가인과 아벨이 대립되는 사건이다. `죄의 소원은 네게 있으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신앙계통에서 구원을 이룬다. 아담은 첫 선지자다. 아벨은 아담에게서 오실 예수님[제사의 첫 새끼양]을 배운것이다.
그때의 제사는 지금의 예배요, 우리의 전 생활은 하나님을 향한 예배이어야 한다.
아벨은 그리스도의 대속의 터 위에[새끼양] 제사 드려서 대속과 성령을[기름] 받아 영원히 자기것 만들었다
가인은 제것 가지고 하나님께 드려 하나님것 만들려는 잘못된 제사를 드렸다. 그제사로 자기 뜻대로 하나님을 움직여 볼려는 것이었다.[선악을 아는 것이 우리중 하나 같이 되었다]
그러므로 가인과 아벨은 참교회[신본교회]와 거짓교회[인본교회]의 갈라짐의 시발이다.
우리는 세상 업과 직장과 결혼 상대자를 선택 할 때에 아벨과 같이 하나님 기뻐 허락하시는, 자기가 거기서 신앙자유할수 있는 것을 택해야 한다.힘 없는 것이 성자 행세하면 결국 패배한다. 세상을 이기는 것 보다 먼저 세상을 자기 세상 만드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가인은 업,--을 자기 주관대로 잘못 선택하여 구원 실패했다.
아벨은 하나님께 지배 받는 생활을 하여 세상을 이기었고,가인은 세상 환경에 지배 받는 생활로 세상에 삼켰다.
:4 가인이 분하여 안색이 변하지 말고 여호와께서 받으실수 있는 제사를 드릴려고 하는 회개가 있어야한다.
:5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는 말씀은 가인의 신앙 양심이 하나님앞에 자기 생활이 중심과 위주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5 하, 선을 행치 아니하면 죄가 문앞에 엎드리느니라는 말씀은  선을 행하면 하나님과 접선이 되고 선을 계속 행하는 것이 죄를 막는 방편이다.죄는 문앞에 엎드려 있어서 눈에 보이지 아니하나 죄의 상처는 보인다.
성경 연구는 연구와 논리와 실행이 같이 나아가야 된다. 참된 진리의 사람은 단순하면서 세밀하고 좁으면서 한없이 넓어야한다.
:8 `가인이 그 아우 아벨에게 고하니라' 가인이 하나님께 한번 책망 받으면 고칠것이지 고치지 않고 과거의 잘못된 것만 생각하면 도리어 죄에 빠진다.베드로는 예수의 피를 힘입어 고쳤다.
바울도 딤전 1:12에 일어선후에 타락을 말했다.  고치지 않고 머뭇거리면 의와 대립이 되고 더 머뭇 거리면 의인을 죽이는 데 까지 나가게 된다.
:9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 책임을 회피할려고 한다고 죄의 책임이 면해지지 않는다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자기를 회개하여 정돈하면 거짓말을 하지 않게 된다.
가인은 하나님의 사랑만 알았지 하나님의 두려움을 몰랐다.
:14 `나를 만나는 자가 나를 죽이겠나이다,
가인을 죽이지 못하게 한것이 축복이 아니고 저주이다. 자기의 죄로 자기만 망하면 될터인데 그죄가 후손에게 미쳐 죄가 더 넓게 퍼져 많은 사람을 망하게했다.자기 죄를 파고 들어가 고쳐야한다.여기서 가인은 자기 잘못을 알았지만 끝까지 자기의 잘못을 숨겨 가리우고 자기만 유익되게 할려고 하였다. 그러므로 가인은 자율로 시작하여 회개치 않고 자율로 망한 택자의 선조다
@ 가인은 자기 의는 과대 평가하고[자기를 조금이라도 해하는 자는 7배나 해받는 것을 정당히여기고], 자기 죄는 과소 평가[아벨을 죽인 것에 가책이 없었고]


<5장1~32> 에녹이 승천함
사람이 출생하는 것과 자라는 것과 죽는 것은 일반적으로 죄가운데서 되는 일인데, 전부가 사망 안에 있는 것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만 사망을 뚫고 나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가 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은 모든 일반 생활에서 해야 한다. 에녹은 여기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했기 때문에 자기의 전부를 천국에 옮겼으니 에녹은 하나님이 기뻐하신 성도다.


창세기 5:1-22

:3에 자기 형상과 같은 아들은 아담의 신앙을 계대한 아들이란 뜻이다
:6-:31 의 족보는 인생들의 일반적인 삶인 사망선 아래의 삶의 되풀이를 나타낸다
:24의`에녹이 하나님과..,  는 하나님과 동행만이 사망을 이기고 영생한다는 계시이다


5:1-32
성경에는 하나님이 말씀하실때에 인간적으로 하신 때가 있고 하나님적으로 하신 때가 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 하시면서도 사람이 하는 것처럼 하시고 또 하나님이 하나님적으로 하시는 때가 있다. "생명으로 인도 하는 길은 좁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다."고 하신 말씀은 인간이 볼 때는 험한 것 같이 보이나 하나님이 보실때는 누워서 가도 평안이다. 본문에서 몇가지만 증거 하겠다.
①. 본문에 보니까 사람이 나서 살다가 시집가고 장가가서 자녀놓고 자녀놓고 살다가 죽고 하였다. 사람이 장수하는 수명이 사람이 보기에는 복이라고 하겠지마는 하나님이 보실때에는 복이라, 또는 복이 아니라고 하실 수가 없다. 자녀를 낳는 것이 복이라, 자녀를 낳는 것이 불행이라, 하는 것도 사람이 볼때에 그렇다. 사람이 살고 죽는 것이 복이라, 불행이라고 하는 이것도 사람 볼때에 그렇다. 그러나 인생으로 하여금 자녀를 자녀를 낳게 하신 것도 수명을 길게 하시는 것도 수명을 짧게 하시는 것도 살게 하시고 죽게 하시는 것도 하나님이 범죄한 인생에게 주신 선물이요, 베푸신 사랑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범죄하는 시간과 힘을 허비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주신 일이 있고 어떤 사람에게는 그 고통을 주어서 회개케 하시기 위해서 주신 일이 있다. 죄를 범했기 때문에 주신 것이요, 또 앞으로 죄를 범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신 것이다. 자녀가 있고 없고 수명이 길고 짧고 하는 이것이 사람에게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므로 장수는 복이라, 단명은 복이라 할 수가 없고 사는 것이 복이라, 죽는 것이 복이라고 할 수가 없고 이와 반대로 장수를 화라, 단명을 화라고 할 수가 없고 자녀가 있는 것을 화라, 자녀가 없는 것을 화라고 할 수가 업고 사는 것이 화라, 죽는 것이 화라고 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복이 아닌 것을 가지고 복이라고, 화가 아닌 것을 가지고 화라고 하여 날 뛰고 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범죄한 인생에게 주신 것은 수고로 주신 것이다. 기쁨도, 슬픔도, 살고 죽는 것도, 자녀도, 그 전부를 수고로 주신 것이다. 오늘의 생식법은 범죄한 죄값이다. 범죄전의 생식법과 다른 것이다. 악을 많이 행하지 못하도록 축소시킨 것이다. 범죄 이후에 잉태하는 수고, 해산하는 고통을 주신 것이다. 행복도, 불행도 다 선물로 주셨다. 그러면 어떤 것이 복이며 어떤 것이 화인가? 모두가 복될 수가 있고 모두가 화 될수가 있다. 이것은 복이라고만 할 수가 없고 이것은 화라고만 할 수가 없다. 자녀와 수명과 생사, 그 전부가 복될 수도 있고 화 될 수도 있다. 이 모든 것이 복도 되고 화도 되어지는 것은 다시 말하면 복이나 화로 결정되어지는 것은 자기 구원에 이용되면 복이요, 자기 구원에 방해가 되면 전체가 화다. 그러므로 복되지 아니할 시간과 장소와 사건이 없는 것이다.
②. 이렇게 오래 살때에는 재미 있는 일도 있었을 것이요, 고통스러운 일도 있었을 것이요, 좋은 꼴도 보았을 것이요, 싫은 꼴도 보았을 것이나 다 헛일이였다. 다 죽었다. 잘 먹어도 소용이 없고 못 먹어도 소용이 없고 장수해도 소용이 없고 단명해도 소용이 없고 자녀가 있어도 소용이 없고 자녀가 없어도 소용이 없고 다만 "하나님과 동행한 것"만이 소용이 있다. 하나님과 동행한 이것만이 가 세상 밖으로 나간다. 이 동행은 아무데서나 자기 형편에서 하는 것이니 자기 형편을 하나님과 동행하는 위치요, 무대인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필요하다. 부요도, 가난도, 자녀가 있고 없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고 못하는 여기에서 가치가 있고 없는 것이지 있다고 가치가 있고 가난하다고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부자라서 모든 것에 부요하다고 행복이라 할 것이 아니고 가난하여 없다고 불행이라고 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동행하고 안하는 여기에서 행복과 불행이 결정 되는 것이다. 그러면 에녹은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했는가? 존재적으로 사역적(활동적)으로 속성적으로 동행했다. 이 세가지를 한꺼번에 할 수가 있고 따로 할 수가 있는데 이미 익속해진 부분은 한 몫되어지나 처음에는 한 몫 되어지지 않고 하나씩하게 된다. 한 몫한다고 하면 온전한 사람이다. 그러면 하나씩 하면 무엇부터 먼저 할 것인가? 먼저 활동적 동행부터 해야 한다. 여기 활동은 마음의 활동과 몸의 활동이다. "뜻과 마음이 행함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사역적 동행, 곧 활동적 동행이 먼저 이루어지고 그 다음으로 속성적동행이 생겨지고 속성적 동행이 생긴 오랜 후에 존재적 동행이  되어진다. 이것이인격 결합이다. 존재적인 동행이면 벌써 오나전이다. 행하면 경험과 체험적인 지식이 나오고 이것이 본능이 되어지고 나중에는 인격적 결합이 되어 존재적으로 동행하게 된다. 여기에 보면 "에녹이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다."고 했다. 이것은 사람이 자기 생활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는 것을 보인다. 자기의 환경과 입장에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환경과 입장을 변경하여 놓고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하는 것은 마귀의 시험이다. 먼저 호나경과 입장과 형편을 정리해 놓고 하나님과 동행할려고 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요, 이는 사욕이다. 먼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차차 자기의 환경과 입장과 형편을 정리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하나님이 환경과 입장을 정리해 주신다. 돈을 벌어놓고 이번 일만 해놓고 자녀 교육시켜 놓고 난 뒤에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하자고 하는 것은 순전히 인본주의요, 사욕이다. 그러므로 환경을 변개 하는 것은 죽는데 이르는 죄가 될 수가 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할 수 있는 일이면 하고 할 수 없는 일이면 그만 두어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먼저 해야 한다. 이 난제를 해결지어 놓고 하나님과 동행하겠다고 하지 말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차차 이 난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 하나님과 동행하면 일이 바로 되어지고 정리 되어지고 일이 이루어 진다. 하나님과 동행 못할 시간, 장소, 사건이 없는 것이다. 불못 속에서도 사자굴에서도 하나님과 동행했다.
③. 여기에 보면 인생들이 세상에 와서는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려고 한다. 이것이 본능이다. 왕래하는 것도, 시비하는 것도, 살려고 하는 것이니 생의 본능이다. 벌레도, 짐승도 이 생의 본능대로 움직인다. 아무리 살려고 날뛰어 보아야 결국은 죽고 마니 헛수고다. 애를 쓰다가 쓰다가 죽고 마니 헛수고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얼마동안 산다. 살면서 시집가고 장가가고 그래서 자녀 놓고 이것이본능이다. 인간은 지각이 있기 때문에 자녀를 낳으면 "내 자식이다."하지마는 짐승은 같이 있으면 알 수가 있으나 격리 시켜 놓으면 모른다. 동물은 본능과 욕심뿐이다. 살다가 자녀 낳고 자녀 낳고 난 후에 또 살려고 발동을 한다. 그러나 죽었다. 살려고 하는 생의 애착심에서 또 생산에서 또 생의 애착심에서, 이 세토막으로 끝나는 것이 인생이다. 제가 제 죽을 줄 모르고 날뛰는 것을 볼때에 불쌍한 마음이 생겨진다. 하나님의 크신 사랑을 건설하기 위해 그 도구로 지옥을 만드신 것이다. 하나님을 떠나면 이렇게 비참하고 가련해진다는 것을 알려서 영원히 사랑을 건설하기 위함이다. 다른 동물과 식물은 다 본질로 돌아가 버리지마는 어떤 행위를 했을찌라도 가지고 가지 않지마는 사람에게는 영혼을 주셨기 때문에 어떠한 행위라도 다 가지고 가는데 사람이 제일 불행하고 헛수고 하는 것이다. 속아서 헛수고 하는 것이다. 자기 것이 아닌 것을 가지고 헛수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 헛된 수고가 어떤 것인가? 첫째로, 사려고 날뛰는 것이다. 죽고 싶다고 죽고, 살고 싶다고 사는 것이 아니고 죽고 싶다고 일각이라도 빨리 죽고 살고 싶다고 일각이라도 늦게 죽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작정하신대로 죽고 사는 것이다. 죽고 사는 것을 전능자가 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살려고 날뛰는 것이 헛수고다. 둘째로, 자녀를 낳는 것이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도 가고 싶다고 가고 안가고 싶다고 안가는 것이 아니다. 자녀를 낳는 것도 낳고 싶다고 낳고 낳기 싫다고 낳지 않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낳게 하니 낳게 되고 못 낳게 하시니 못 낳는다. 셋째로 안죽을려고 하는 것이다. 안죽을려고 한다고 안죽는 것이 아니니 안죽을려고 하는 것이 헛수고다. 하나님이 살게 하시니 살고 자녀 낳게 하시니 낳고 죽게 하시니 죽는데 모든 사람이 같고 그 가치가 같다. 일찍 죽고 오래 사는 것도 그 가치가 같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것이니 내가 수고하고 염려할 필요가 없고 좋고 싫은 것도 없다. 하나님은 살게 하시는 것이나 자녀에게 대해서 죽는데 대해서 택자에게는 적당하게 하신다. 다만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이용할 것 뿐이다. 살려고 하는 것도 자녀를 낳는 것도 죽는 것도 우리 구원을 이룰려고 사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자기가 할 일이다. 구원을 위하여 사용하면 전부가 보배요. 구원을 떠나면 전부가 헛수고다. 자기 할 일을 하는 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영감의 충만하심을 받은 자뿐이다. 이럴게 같은 일을 하되 다 같이 살고 자녀낳고 죽되 하나는 자기 일을 하고 하나는 헛일을 한다. 두 여인이 매를 갈매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웠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한다고 말씀했다.

5;1-32
창 5;21-24절에 여기에는 에녹이 산채로 승천한 것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의 해석이 있다. 이 시간에는 이것을 생략하겠다. 창 5장 전후를 보면 같은 말씀이 있다. 몇살에 자녀 낳고 몇살에 죽었다고 하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을 보면 자녀를 낳는 것이나 자녀 낳고 사는 것이나 이것은 죽음을 찾아가는 것임을 알 수가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만이가 사는 것임을 보여 주신다. 인간들은 자기 딴에는 큰 일을 하고 있다고 하지마는 전부가 죽음을 찾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은 영생하는 것이다. 사망을 벗어나는 것이다. 창 6;1-8절에 하나님이 노아시대의 사람들을 땅과 함께 멸하시기로 선포하시고 120년을 연기 했으나 선지자 노아의 말을 한 사람도 듣지 아니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에서 전멸했다. 멸망치 아니한 사람은 노아 외에는 노아의 말을 들은 7식구 뿐이였다. 여기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과 하나님과 동행하는 선지자의 말을 들은 사람만이가 하나님의 정죄하는 심판을 벗어날 수 있는 것을 보여 주신다. 죄악으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정죄받아 멺아하는 세상에서 멸망을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을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이다.
창 8:17-18절에 하나님의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숨기지 아니했고 아브라함을 강대케 하여 천하만민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복 받게 하시겠다고 말씀했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의논의 대상이 되고 복의 기관이 된 것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약 2:21-23절에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같이 일하고 행함으로 온전케 되었느니라. 이에 경에 이른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다"고 말씀했다. 여기에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하나님의 동행자라고 하지 않고 친구라고 했는데 동행자라는 말과 친구는 같은 뜻을 가진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숨기지 않고 알려주고 하나님의 논의 대상이 되고 복의 기관이 되는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이다. 딤후 4:17절에 주님이 바울 곁에 서서 사자와 같은 사람에게서 구원하여 내시고 복음전도에 강한 힘을 주셨다고 사도 바울이 간증했다. 이것도 사도바울이 주님과 동거동행 했기 때문이였다. 그러므로 에녹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 사망치 않고 영생하는 것을 보여 주셨고 노아를 통해서는 죄악으로 멺아하는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으로 벗어남을 보여 주셨고 아브라함을 통해서는 자기 자손과 모든 사람들을 복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보여 주셨고 사도 바울을 통해서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여기에서 모든 것에서 승리하는 것을 보여 주신다. 전부가 배신하고 자기 길만 찾아 가는데 사도 바울은 선교를 유별나게 했고 바울의 신앙생활에는 피곤함이 없고 용솟음 치는 열정을 가지고 복음을 전파했다. 이 뿐만 아니라 이르는 곳곳마다 사람이 감당치 못하는 모든 위험에서도 담대히 승리한 것도 환란과 역경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승리하고 나아간 것도 "주님이 내 곁에 서서 나를 사자의 입에서 건져 내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세상에서는 주님과 동행하는 일을 크게 여기지 아니한다. 자기에게 당면한 문제만 크게 여긴다. 자기가 큰 사업을 한 것이 크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깔본다. 큰 사업을 하는 사람은 적은 사업하는 사람이 이것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적은 사업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다니"하면서 깔보기 쉽다. 인생이 인생이라는 테두리를 벗어 날때에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인생으로서는 최고, 최대의 걸음인 것을 꺠닫게 된다. 우리는 죽기전에 인생의 테두리를 벗어나기 전에 이것을 깨닫고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인간이 온갖 생활을 하지마는 하나님과 동행만이가 인생의 사망선을 넘을 수가 있고 심판을 면할 수가 있고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할 수가 있고 세상에서 의의 생활을 힘차게 할 수가 있고 모든 위험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의 수명이 몇백년이나 되었고 문화가 발달하였다. 탑으로 홍수를 이길려고 한 것을 보면 문화가 지금에 못지 않다. 사람과 사람의 차이는 얼마 되지 아니한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도 지금 못지 않게 야망과 포부를 가지고 있었고 학자도 정치가도 많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외에는 홍수에 전부 침몰 되었다. 우리는 전부 죽어야 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자기에게 있어서 급선무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자기가 하는 사업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는 이것은 미련하다. 자녀 공부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다고 하면 이것은 미련하다. 직장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다고 하면 어리석다. 부모 때문에, 형제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한다고 하면 미련하다. 그러므로 모든 것 내어 주어도 하나님과 동행은 변치 아니하는 자가 복있는 사람이요. 지혜있는 사람이다. 이 세상에서 자기가 어떻게 살든지 간데 부자로 살든지 가난한 자로 살든지 큰 사업가로 살든지 적은 사업가로 살든지 유식한 자로 살든지 무식한 사람으로 살든지 출세를 했든지 못했든지 간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아니하면 가치가 없다. 홍수로 침몰되기는 같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멸망에서 벗어나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 하는 것 뿐이요. 사망을 이기는 것도 하나님과 동행 뿐이다.  이 세상에서 모든 소원을 누린다고 해도 하나님과 동행치 아니하면 멸망이다. 자기와 자기 자손과 이웃을 행복되게 하는 길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뿐이요. 자연 사람을 초월하는 타락한 실력과 인격을 가지는 것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뿐이다. 사람은 자기의 환경과 입장을 이기지 못하고 또 인간은 한 사람도 이긴다가 없다. 그러나 예수님 안에 있다. 변천되는 환경의 어려움을 이기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안에 있다. 인생이 감당치 못하는 어려움을 이기는 것은 예수 안에 있으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뿐이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한 베드로가 주님과 시선이 마주칠때에 나가서 대성통곡을 하였던 것이다. 인격과 이격이 동행하는 여기에는 피곤이 없고 평강이요, 기쁨이다. 인격과 인격이 동행하는 여기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데 죽지 아니하는 실력이 생긴다. 온천하가 멸망을 받는데 이것을 벗어날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이다. 고후 11:23-27절에 보면 무수한 위험과 환란에서더 지중해으 풍랑 중에서도 담대하게 있었던것은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이다.  주님과 동행하는 여기에서 인간을 초월하게 된다. 성경은 하나님을 소개해 놓은 말씀이요. 하나님이 인생에게 교훈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기록한 것이요 하나님을 대접하는 것이 어떤 것임을 기록해 놓은 것이요 내가 하나님에게 이렇게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해주시고 내가 하나님에게 저렇게하면 하나님은 나에게 어떻게 해주시는 것을 기록해 놓은 것이요. 하나님은 모든 입장과 사건을 일으키심을 기록해 놓은 것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마음을 다하여 성경을 상고 하면 성경 가운에 있는 하나님이 우리의 상상속에 떠오르고 성령님은 우리의 상상속에서 하나님이 기억되게 하시고 느껴지게 하신다. 이렇게 나아가면 하나님에게 내 마음에 사모가 되어지는 것이다. 주님을 사모하되 성경대로 사모하지 아니하면 인본주의로 사모하게 되면 불건전한 신비주의가 되고 만다. 성경을 근거해서 주님을 사모해야 한다. 성경과 동행이 병행해야 한다. 주님과 인격적으로 동행하다가 보면 성경을 잊어버리게 되고, 성경만 동행하다가 보면 법적인 사람, 논리적인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인격을 잊어버리게 된다. 주님의 인격돠 성경과 동행이 병행해야 한다. 이 시간, 이 자리, 이 사건, 이 입장에서는 어떤 주님으로 나타나시는지 성경대로 상고해야 한다. 담대하라고 하시는 주님으로 나타나시는지 평안하라고 하시는 주님으로 나타나시는지. 기뻐하라고 하시는 주님으로 나타나시는지. 성을 내라고 하시는 주님으로 나타나시는지. 이것을 성경으로 상고해야 한다. 주님과 성경을 양손에 들고 같이 보아야한다. 여기에는 주님이 어떤 주님으로 나타나시는지 이것을 알고 나는 어떤 나로 나타나야 하는지 이것을 알아야 한다. 이렇게 하면 주님에게 대한 나의 태도가 달라지는 것이요. 자기 생활이 불탈것과 영생할 것으로 판명되어진다. 하나님과 인격 교제가 아니면 피곤해지고 인격 동행이 아니면 허기가지고. 인격동행이 아니면 비겁하여 진다. 예수님을 발견하여 내 모든 것을 예수님에게 마끼고 예수님과 인격 교제를 가지는 여기에 피곤이 없고. 소망이 든든하다. 인격 결합으로 내 전부가 예수님에게 끌려지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데에 피곤이 없고, 세상의 그 어떤 것이라도 나에게 타락을 주지 못한다. 베드로가 주님과 눈이 마주칠때 밖으로 나가서 대성 통곡한 것은 인격동행의 시선이 힘을 주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격동행의 시선과 인격동행의 양심의 음성이 강한 힘을 주기 때문에 담대하고 기쁘?하게 되는데 이렇게 나가다가 보면 성경을 잊어버리고 잘못하면 마귀와 동행하기 쉽다. 이렇게 되면 주님은 멀리떠나가고 악령이 나에게 와서 역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격동행과 성경동행이 항상 병행해야 한다. 인격동행과 성경동행이 병행치 아니하면 주님과 동행한다는 것이 자기 주관과 동행하기 쉽고, 그래서 주관주의자가 되어 불완전한 신비주의가 되고 마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만 동행하여 자기 주관으로 성경을 해석하다가 보면 자기 주관에 합하게 해석하게 되니 합리주의자가 되고, 신신? 이 되고 만다. 부부가 정답게 살고 가정을 믿음으로 사는 가정으로 일으켜 볼려고 하면 우리가 보기에도 좋은데 인격중에 인격자이신 하나님이 보실때에는 얼마나 보시기에 좋겠는가! 경제적으로는 부요하지 못해서 고양진미를 먹지 못하고 비단 이불을 덮지 못해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런 가정으로 이런 자기로 만든다고 하면 복이 있는 가정이요, 복이 있는 사람이다. 에녹의 사적에서 이것을 깨달아야 한다. 자기의 유한한 힘을 유효하게 쓰는것이 귀하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일을 힘써야 한다. 성경을 떠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의 인격을 명상하고 동행하여 이 인격다가 자기 주관에 인정되어 부정할래야 부정 할수 없는 체험을 가지게 되기까지 하다가 얼른 성경으로 돌아가야 하고, 성경에 돌아갔다가 얼른 인격동행으로 돌아가야 한다. 어느 한 쪽으로든지 치우치면 안된다. 내 주관으로 그 인격을 믿고 동행하는 것 만큼 그 인격은 나에게 동행하신다. 그러므로 에녹에게서, 노아에게서, 아브라함에게서, 사도 바울에게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을 배워 하나님과 동행으로 세상을 마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것만이가 자기와 자기의 소유를 세상 밖으로 완전히 옮겨 영생하게 한다. 이것만이가 나와 내 자손과 이웃을 복되게 한다. 이것만이가 인간이 감당 못하는 초인간적인 걸음을 걷게 된다.

5:1-32
본분은 인류시조의 전기를 간단하게 기록하여 참고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여기에 기록된 모든 인물들과 지금 사람들과 다른 것은 그때는 장수했고 지금은 장수하지 못하는 것인데 그외에 것은 대개가 같다. 여기에 기록된 인물의 일생을 간단하게 기록했는에 몇 해만에 초산의 자녀를 생산했고. 또 자녀를 생산했고, 또 얼마나 살다가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 생산하기 전까지의 한 토막과 자녀 생산하는 한토막과 자녀 생산 그치고 죽을때 까지의 한토막이다. 이것이 인생의 전기다. 인류시조 아담으로 부터 홍수심판이있던 노아까지 2,000년간의 모든 사람의 전기를 기록하여 주신 목적은 무엇인가? 어떤 효력을 위해서 하나님이 주셨는가? 이것은 타락한 인생들에게 교훈하시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어떤 사람은 학자로, 어떤 사람은 사업가로, 어떤 사람은 정치가로, 어떤 사람은 장사하는 상인으로, 어떤 사람은 노동으로, 어떤 사람은 직공으로, 이렇게 수많은 종류에서 살고 있으니 이것은 다만 먹고, 입고, 살기위함인 것이다. 어릴때에는 부모에게서 먹고, 입고, 살다가 장성하면 자녀 낳고, 먹고, 입고, 살다가 죽는 것이 일반 사람들이다. 그러나 전부가 제 잘난 맛으로 산다. 사람마다 꿈을 가지고 자기의 목표를 향하여 달리면서 "이번만, 금년만, 명년에는"하면서 늙어 죽기는 싫어하면서도 목표를 달성하려면 시간이 경과해야 하니까 "시간이 속히 자기 않나"하면서 애타고 있는 것이다. 이 구석에 가도 희망이 양양하고 저 구석에 가도 희망이 양양하다. 이렇게 희망이 양양해도 이런 모순. 저런 모순성에서 살다가 죽지 아니할려고 하다가 죽고 마는 것이 인생이다. "나는 문화인이다. 나는 지성인이다. 나는 실업가다. 나는 정치가다. 나는 과학자다. 나는 예술인이다." 하면서 제 잘난 맛에서 살지마는 네가 얼마나 살겠나 사망뿐이다. 이것이 일반 사람이다. 그런데 여기에 특수인 하나가 있다 . 이 특수인은 일반사람과 같이 먹고, ?고 자녀 낳는 것도 꼭 같은에 다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과 산채로 승천한 것이 다르다. 총각들도 팔뚝같은 결심을 하지마는 결혼하고 나면 그것이 그것되고 만다. 처녀들도 마찬가지다 . 물질을 초월했다고 해도 가서 보면 물질의 테두리 속에서 죽기를 두려워하고 살고 있다. 이 생 선 이하는 먹고 입고 살다가 자녀 낳을 때가 되면 자녀 낳고, 자녀를 다 낳으면 먹고 입고 살다가 죽는 것이다. 그러나 에녹은 인간선을 초월했다. ??넘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먹고 입고 자녀를 낳았다. 시집가고, 장가가는 것이 죄가 아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먹었고 입었고 장가갔고 자녀 낳았다. 인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 인간선 이상이요 이것이 인간선을 넘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대우인것이다. 그런에 인생들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을 못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느냐? 국경을 넓히기 때문에  네가 무엇 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느냐? 돈을 모우기 위해서 돈 때문에 못한다. 네가 무엇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느냐? 사업체를 넓히기 때문에. 네가 무엇때문에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느냐? 출세하여 좀더 유명하기 위해서. 네가 왜 하나님과 동행하지 못하느냐? 재미있게 살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이 아니면 국경을 넓히는 것도 돈을 모우는 것도 사업체를 키우는 것도 출세하는 것도 재미있게 사는 것도 가치가 없다. 시체가 되는 것뿐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대로 살면 백발이 영광이다. 겉사람을 노쇠하여 지나 속사람은 날로 강권하여진다. (고후4:16) 하늘 나라를 위해서 땅에 것을 이용해서 먹고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다. 인간선 이상의 하나님과 동행하는 데에 모든 것을 이용한 사람은 찌기를 취하는 사람이 아니고 기름을 취한 사람이다. 바울은 "배설물과 같이 여겼다."고 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①. 지정의 의 인격을 갖추신 하나님이 나와 함께 지금 계시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기가 어떠한 자리에 머물찌라도 하나님이 인격자로 나와 함께 계심을 인정하는 것이다.
②. 하나님을 인격자로 사랑하므로 내 심신이 움직이고 하나님을 숭배하므로 내 심신이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다.
③. 이 하나님과 사귀는 것이다. 교제하는 것이다. 지금 함께 계시는 인격자로 사귀고 교제하고 내가 숭배하는 이분과 사귀고 교제하는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주고 당신은 나에게 주시는 것이다. 나는 무지하고 무능하고 당신은 나에게 주시는 것이다. 나는 무지하고 무능하고 당신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시다. 내게 있는 무지를 하나님에게 드려서 나는 고침을 받고 "나의 성격은 이렇습니다."하면서 내 성격을 하나님에게 내어 놓는다. "내 사정은 이렇습니다."하면서 내 사정을 하나님에게 맡기고 하나님의 것을 가지겠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맡겠습니다 하는 이것이다. 내 의사와 하나님의 의사를 주고 받고하여 하라고 통일되는 이것이 교제요. 사귐이다. 이것이 동행이다. 인생선 이하의 것은 가치가 없다. 인생선을 추월한 것이 가치있다. 이것은 자연인을 초월한 것이다. 이 세상에서 큰 소리치고 살아도 자연인은 가치가 없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이 인생의 가치다. 육체의 소욕을 주님에게 드리고 당신의 소욕을 내것 삼고 내 성격을 당신에게 드리고 하나님의 성격을 내 성격으로 삼아서 사는 이것이 인생의 가치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이 아니라고 하면 입고 먹고 자녀 낳고 사는 이것이 돼지와 같다. 돼지는 한태에서 12마리를 낳는다. "야, 저 사람을 보라. 위대한 정치인이다. 재벌이다."하지마는 별수 없다. 자연인이다. 늙고 죽는다. 그러므로 시야를 넓혀라.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는 것이다.

5:1-32
본문은 인생의 전면도를 간단 명료하게 기록한 말씀이다. 본문이 계시하는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본문에 보니까 출생이 같고 결혼이 같고 자녀 두는 것이 같고 늙는 것이 같고 죽는 것이 같다. 사람의 가치를 바로 평가하면 사람의 가치가 같음을 깨닫지 못하게 때문에 미혹을 받는 것이다. 좋은 가문에서 출생한 것이나 빈천한 가문에서 출생한 것이다. 그 가치가 같고 자녀를 많이 둔 것이나 적게 둔 것이나 그 가치가 같고 자녀를 둠에 있어서 훌륭한 자녀를 둔 것이나 병신 같은 자녀를 둔 것이나 그 가치가 같고 오래 산 것이나 오래 살지 못한 것이나 그 가치가 같고 사업을 크게 한 것이나 적게 한 것이나 그 가치가 같고 공부를 많이 한 것이나 적게 한 것이나 그 가치가 같다. 이는 죽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것만이가 인생의 가치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은 하나님과 의사가 같고 하나님의 뜻대로 진리대로 사는 이것인데 이것만이가 인생의 가치다. 좋은 가문에서 출생했고 재벌이고 미인에게 결혼했고 훌륭한 자녀를 많이 두었고 장수하다가 죽었다고 해도 하나님과 동행이 없었다고 하면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인생노정을 웃으면서 지나갔거나 울면서 지나갔거나 큰 자로 지나갔거나 작은 자로 지나갔거나 이래 살았든지 저래 살았든지 간에 이것이 영원에 가서 효력이 없는 것이라고 하면 이래 산 것이나 저래 산 것이나 동등이다. 이것은 가치가 없는 것이다. 온 세상이 환영하는 생활을 하였다해도 영원에 저주를 마련했으면 이 세상 살이는 가치가 없는 것이다. 이 세상에서 초조하게 살았다고 해도 시골의 한쪽 구석에서 도시의 한쪽 구석에서 소문 없이 살았다고 해도 이것이 영원에 효력을 주는 축복을 마련했다고 하면 이 세상살이는 영원히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생관을 바로 가져야 한다. 본문이 계시하?????하는 이 인생관을 가져야 한다. 출생, 자람, 결혼, 자녀, 생산, 장수 이것만으로는 가치가 없으나 이것으로 인하여 믿음이 자랐다고 하면 이것은 가치 있고 보배다. 믿음을 자라게 하는데에 이용됨에 따라서 가치가 정하여 진다. 믿음에 따라서 가치가 정하여 진다. 그러므로 출생과 사망을 같이 보아야 한다. 아무리 좋은데서 출생해도 거기에 믿음이 없으면 죽었고 천하가 부러워하는 사업을 해도 거기에 믿음이 없으면 죽었다. 보기 좋은 시체요. 훌륭한 시체다.


[ 6장 1절 ~ 8장 22절 ] 노아가 홍수에서 구원을 받음
노아시대가 홍수로 멸망받은 원인은 남녀관계로 말미암은 것인데 사욕대로의 관계가 원인이었다. 홍수심판은 죄악이 관영한 때로부터 120년 후인데 정죄받은지 120년만이다. 하나님의 정죄심판은 시일이 지연된다고 변동이 되는 것이 아니다. 조만간에 공의대로 반드시 이루어진다. 하나님이 선포하신대로 방주를 만든 노아와 그 식구들이 구원받았고 모든 생명을 가진 동물들도 노아의 방주에서만 보존되었다. 홍수 속에서 오직 노아의 방주 안에만 생명이 거주할 수 있었다. 노아의 방주는 교회의 모형이다. 지금도 그때와 같이 죄악으로 침몰하는 때다. 하나님의 심판으로 전멸되는 때다. 노아의 홍수와 같은 때다. 그때에 방주 안에만 생명이 있었음과 같이 오늘도 방주와 같은 교회 안에만 생명운동이 있다. 교회는 삼위일체 하나님과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와 성도로 조직된 것이다. 노아 홍수때에 하늘에서 비가 쏟아지고 땅에서 물이 솟았다. 이와같이 말세에 하나님의 심판도 하늘과 땅에서 일어난다. 노아 식구가 홍수에서 구원받은 원인은 정욕과 자율로 인간관계를 맺지 아니한 것이요.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요. 의인으로 인정받은 것이요. 하나님의 지시대로 방주를 만든 것이요, 새날을 보기까지 순종한 것이다. 여기에 보면 멸망받기로 저주받은 자들에게 세상적인 용사가 많았다. 노아가 평지에서 방주를 지었다. 사람과 동물이 작은 배에 들어간 것과 거기서 견딘 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이적이었다.

창세기 6:1-22

:2에 사람의 딸은 믿지 않는자,불택자
     하나님의 아들들은 택자들
:3 `육체가 됨이라, 심신으로만 살아  자기영에게 통치 받지않고 악령에게 통치 받아 산다는
    것이다
    악령에게 미혹받으면-
    육체가 되고[자율의 사람되고-`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가치관이 달라짐[유명관,부요관,존귀관--]-

:7 위와 같기에 자기들의 죄악으로 멸망의 홍수를 끌어 들인것이다
    지금은 보이지 않는 홍수 멸망으로 가득차 있다
:6-:8 `한탄하사, 일반적으로 난해절이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이 어떤것을 노하시고 어떤것을 기뻐하시는가 하는 것을 인간들에게 알리실
    려고 이렇게 사람들을 예정가운데 패괴케 하신것이다

@ 노아는 일관된 신앙을 가져서 구원을 받았고
  홍수 가운에서 구원받은 것보다-
  방주 모은것이 먼저요-
  방주 모은것은 순종의 결과요-
  순종은 하나님의 음성인 하나님의 명령을 현실에서 들었기 때문이요
  하나님의 명령을 들을수 있는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기 때문이요
  하나님과 동행은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여 있기 때문이다

기회주의 신앙들은 산으로 피하였어도 즉 현실을 회피하였지만  결국은 필연적으로 멸망받았다

@ 노아 방주안에 들어가는 자가 천하에 가장 복된것 같이 믿음안에 있는 자가 가장 복되다

@ 노아방주[기독교]외에   다른 배들은[이종교] 다 홍수에 침몰 하였다

@ 방주는 교회의 모형,  방주안 곧 교회안에만 생명이 있다

@ 홍수가 물러 가는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다


6:1-4
노아 시대에 노아와 그 식구 외에는 전부 홍수에서 전멸했다. 홍수는 오늘로 비하면 죄와 같은 것이다. 홍수에 빠지고 안 죽은 자가 없는 것 같이 죄에 빠지고는 안 죽을 자가 없다. 노아시대의 사람들의 홍수에 빠진 이유는 무엇인가? 그 시대의 사람들이 자기 마음대로 이방여인을 취했기 때문이다. 이는 형식으로 계시하신 것이다. 그 내부에는 그 사람들의 욕심의 대표로 이방여인과의 결혼에다가 비한 것이다. 사람이 죽게 된 순서는 창 3:1-에 부터 시작했다. 아담과 하와가 조심치 아니했을 때에 마귀의 유혹을 받았고 마귀의 유혹으로 자율이 나왔다. 조심치 아니하면 마귀의 유혹을 받고 조심하면 마귀의 유혹을 물리 칠 수가 있다. 마귀의 유혹을 받으면 자율이 생긴다. 자율은 제 생각, 제 주장, 제 마음, 제 뜻이요. 타율은 하나님의 생각,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주장, 하나님의 마음이다. 성경말씀이다. 자율이 나오면 욕심이 나온다. 이 욕심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영화롭게 할까 하는 하나님께 대한 욕심이 아니고 어떻게 하면 내가 잘 될까 하는 사욕이다. 이 욕심이 나오면 범죄하고 범죄하고 나면 죽고 망한다. 이와 반대로 조심하면 성신의 감화가 오고 성신의 감화가 오면 타율인 하나님의 진리가 오고 타율이 오면 하나님께 대한 욕심이 나오고 이 욕심이 나오면 의를 행하고 의를 행하면 평안과 생명이다. 그러므로 조심치 아니하는데서 실패한다. 조심하는 여기에서 모든 죄를 방비한다.

6:-4
4절 하반절에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였더라" 이 유명관과 용사관을 성경적으로 바꾸어 가질 것이다. 유명한 것을 세상 사람들이 보는대로 가지지 말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유명한 것이라고 해도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 있고 세상 사람들이 하잘것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유명한 것이 있다. 세상에서는 유명하지 못ㄹ한 것을 가지고 유명하게 본다. 이 유명관을 바꾸어야 한다. 이 유명에는 지식으로 용모로 진리로 유명함이 있으니 이는 성경대로 보아야 한다. 세상이 유명하다고 하는 것이라도 성경이 하잘것 없는 것으로 보면 나도 그것을 하잘것 없는 것이로 여길 것이요. 세상 사람들이 하잘것 없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라도 성경이 유명하다고 하면 유명한 것으로 여겨야 한다. 또 용사로 보는 것도, 유력하게 보는 것도 성경적으로 바꾸어야 한다. 성경적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자기가 복잡해 지는 것이다. 죄로 말미암아 멸망 받을 자들인데 그 자녀가 용사요, 유명한 자들이였으니 이런 자들을 업수히 여겨야 할 것인데 오히려 이런 자들을 유명하다고 부러워한다. 이렇게 모든 사람이 볼때에는 유명ㅎ나 자였으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홍수에 멸망 당한 것이다. 그리고 힘이 아닌 것ㅇ르 힘으로 알기 때문에 자기를 복잡하게 하고 혼돈 시킨다. 성경적으로 바로 가지면 자신과 남을 속이는 것이 아니요, 바로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자가 유명한 자인가? 하나님으로 부요하고 하나님으로 힘이 있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살고 영으로 움직이는 자가 유명한 자요, 실력자다. 하나님을 떠난 재산, 지식, 권세, 건강은 힘이 유명이 아니다.
3절 중간에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사람이 육체가 되었다. 하나님을 본받아 살아야 영으로 사는 것인데 영으로 살지 않고 육으로 사니 순전히 자기의 욕심대로 살았다. 이 육은 이성과 몸을 말한다. 육체가 되었기 때문에 즉 죄에게 지배 받는 몸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 에덴동산에서 조심치 아니해서 마귀의 유혹이 오고 자율이 생기고 육심이 생기고 범죄하고 죽고 망한 것이다.
2절에 "아름다움을 보고" 이것은 안목의 정욕을 말한다. "딸들을 아내로 삼았다" 이것은 육체의 정욕을 말한다. 여기에 "아름다움을 보고 딸들을 아내로 삼았다"고 하는 말씀은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을 대표해서 말한 것이다. 안목의 정욕은 눈에 보이는대로 움직이는 것이요. 육체의 정욕은 본능대로 움직이는 정욕이다. 짐승은 본능대로 움직여도 좋지마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영혼이 있기 때문에 본능대로 움직이면 죄다. 이런 자에게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시지 않는다. 요일 1:10절에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했다고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했다. 그 사람을 구원할 말씀이 계시지 아니하는 것이다. 바울 속에는 이 말씀이 있어서 역사했는고로 죽는 날까지 회개하고 간 것이다. 욕심이 있는 것 만큼 바른 평가를 하지 못한다. 내 구원을 방해하는 욕심이 무엇인지 이것을 뽑아야 한다. 뽑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시지 못하신다. 점점 깊은 연결을 가지지 못한다. 하나님은 함쎄 하시기를 원하시지마는 육체주의이기 때문에 이것이 가로 막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뽑아야 한다. 신앙걸음은 자기가 비판하고 평가하는 대로 간다. 가치를 바로 알아야 큰 것에는 큰 것 만큼 투자 할 것이요. 많은 것은 많은 만큼 투자 할 것이요. 적은 것에는 적게 투자하고 또 수고할 것이다. 당시에 유명해지고 실력있게 된 것은 분명히 죄 값으로 된 것이니 멸망의 그릇을 채우기 위하여 그렇게 만드신 것이다. 유명해지고 실력있는 자로 나타난 것은 정욕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다. 안목의 정욕과 육체의 정욕의 열매로 나타난 것이니 멸망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욕심을 중대시 해야 한다. 실패는 여기서 생긴다. 사람은 영과 육의 합이다. 육은 이성과 몸의 합이다. 영혼은 범죄치 않고 영생하나 육은 의의병기로 쓰일 때가 있고 죄의 병기로 쓰일 때가 있다. 영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육이 신앙생활을 하고 안하고 한다. 육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요. 육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신앙생활을 안하는 것이다. 회개하는 것도 영이 하는 것이 아니고 육이 한다. 영혼에게서 옳은 것이 와서 이성에게 부딪치고 일을 착수하여 성신의 감화로 이성과 몸을 삼킬려고 하고 또 죄와 마귀가 이성과 몸을 삼킬려고 한다. 죄와 마귀는 내 몸안과 내 몸밖에도 있다. 마귀는 물질이 아니고 영물이다. 이 마귀가 와서 돈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권세에 대한 욕심 온갖 욕심을 품게 한다. 그래서 하나님보다 돈에 욕심을 더 가지게 한다. 이렇게 돈에 대한 욕심을 더 가지게 할 때에 이 욕심을 가지면 죄다. 그러면 돈은 필요가 없는가? 하나님에게 욕심을 품어서 이 욕심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떤 때는 돈도 필요한 때가 있고 또 돈이 필요 없는 때가 있으며 건강도, 지위도 그러하다. 돈욕심이 생겨진 것은 마귀와 죄와 이성이 합해서 마귀와 죄가 내 이성을 사로 잡을 때에 생긴다. 그래서 욕심대로 한 것은 몸까지 합작된 것이다. 이렇게 마귀와 죄에게 사로 잡힌 이성과 몸이 영에게 사로 잡혀야 ㅎ나다. 이것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니 욕심을 품고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고 할려고 해도 안된다. 욕심을 바꾸는 이것이 신앙생활을 한다. 이것이 첫째 능력이다.

6:5-22
방주의 구원은 잘 아는 사실이다. 당시에 죄가 관영했으며 이로 인하여 멸망 받았다. "사람이 패괴 되었을 때에 짐승까지 패괴 되었다."고 하는 것이 문제다. 사람은 피조물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았기에 사람이 의로워지면 그것들이 의로워지고 사람이 패괴하여 지면 그것들이 패괴하여 진다. 이렇게 하나님이 지어신 것이다.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가지고 홍수에서 구원을 받았으니 홍수는 무엇인가? 홍수는 멸망 받는 것을 말한다. 방주 안에 들어갔는고로 구원을 받았다. 어떻게 만들게 되었는가? 하나님이 시키시는대로 만들게 되었다. 노아는 당시에 의인이요. 하나님과 동행했기 때문에 이런 명령이 내렸다. 그러므로 홍수에서 구원 받는 것보다 앞선 것은 방주요, 방주 보다 앞선 것은 순종이요, 순종보다 앞선 것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것이요, 하나님의 명령보다 앞선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마음이 하나님에게 가서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수에서 구원 받는 것 보다 큰 것은 방주를 만드는 것이요, 방주를 만드는 것보다 큰 것이 순종하는 것이요. 순종보다 큰 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는 것이요,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것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하나님께 마음을 기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치 못했으면 그 명령을 받지 못했을 것이요. 그 명령을 받지 못했으면 순종치 못했을 것이요. 순종치 아니 했으면 배가 만들어지지 아니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노아의구원은 하나님과 동행하는데서 시작하여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순종하고 순종하여 배를 만들고 해서 비로소 구원이 되었다. 그러면 배는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행한 행위인데 그 행위자체가 구원케 하는 것이다. 오늘도 눈에 보지 않는 홍수가 가득찬 세상이다. 눈에 안보이는 멸망이 가득찬 세상이다. 여기서 사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행위 뿐이다. 이 행위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신 명령에게 순종하는데에서 나오고 명령을 받는데에는 순전히 마음을 하나님께 기울일 때이다. 하나님이 나에게 명령하신 자기 진리를 찾아서 순종하는 신앙행위가 아니면 구원 받지 못한다. 방주를 만드는 이 방편이 아니면 구원 받지 못한다. 그 당시에 많은 배가 있었고 훌륭하게 만든 배도 있었지만 노아의 방주만이 구원 받았다. 그 당시에 노아만이가 하나님의 뜻을 안 것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자만 알지 모르는 사람은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가 복되다.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것도 귀하지마는 하나님의 명령이 내게 온 것이 귀하고 하나님의 명령이 내게 온 것도 귀하지마는 이 보다는 하나님과 동행한 것이 귀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심적행위에서 부터 시발되고 순종하는 행위도 완성되는 것이다. 방주를 만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들어라 저렇게 만들어라"고 하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해서 만들었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그 당시에 수 많은 배가 있었지마는 다 깨여졌고 노아의 방주만이 구원을 받은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명령대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홍수가 깨지 못했다. 하나님에게 마음을기울이고 계명을 받고 계명을 받아 순종한 터 위에 건설된 방주인고로 홍수가 어찌하지 못했다. 하나님에게 마음을 기울인 여기서 구원이 시발된것이다. 하나님에게 마음을 기울이고 보니 사람, 일, 물건에게 마음을 기울이게 된다. 하나님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은 참에게, 진리에게, 하나님의 속성에게 마음을 기울이는 것이다. 하나님과 온전한 관계를 가지고 보니 사람과 일과 물건에게도 온전한 관계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실생활에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것이 방해가 되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기울이면 명령이 나오고 명령이 나올 때에 순종하고 순종하면 행위가 되었다. 우리에게 행위는 노아의 방주다.

6:5-12, 18-22
6절에 보면 "한탄하시고 근심하셨다."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이 이해가 안가는 말씀이다. 이 말씀이 우리에게 의문을 준다. 한탄이면 후회하는 것이니 하나님에게 후회가 있다고 하면 예정에 관계가 있는 것이요, 하나님이 근심하였다면 전지전능의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나님이 함부로 해서 근심하신 것이 아닌가로 생각하기 쉬운데 잘못하면 그리스도교 자연주의에 빠지기 쉽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 당신이 보실때 "어떻다고 하신 것"도 있고 좁은 우리가  볼 때에 "어떻다"하신 것도 있다.
9절에 노아를 의인이라, 완전한 자라고 하신 것은 타락한 사람치고는 완전한 자라고 하신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이 한탄하셨다"고 하신 말씀은 성경의 난해절 중에 하나다. 여기에 "하나님이 한탄하셨다"고 말씀하신 것은 사람들 자신이 생각하는 그 마음대로 말한다고 하면 노아시대의 사람들을 보고 한탄하고 후회한다고 하신 말씀이다. 하필이면 왜 사람들 생각과 견해대로 하면 한탄이라고 하지 아니했을까? 이렇게 말하지 아니할 이유가 있다. 하나님이 마귀를 지어신 것도 사람을 타락하게 하신 것도 홍수를 예정하신 것도 기이하다. 이렇게 기이하게 하신 것은 건설을 위해서는 파괴를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당신이 목적하신 대상을 만드시는 것을 이루실려고 하면 "순종하면 어떻고 불순종하면 어떻다"는 것을 알게 하여 주어야 할 것이요. 넘어지면 악하고, 악하고 죄인인 이것을 독생자로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본성의 사랑이 어떠하심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 것을 나타내시는 방편이요. 하나님이 건설을 위해서는 파괴도 하시고 타락도 시키신다. 집을 짓는데에 있어서 파괴도 하고 긴것은 짧게도 하고 짧은 것은 있게도 하고 두꺼운 것은 나누어서 쓰기도 한다. 이와같이 하나님이 대 계획하신 큰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이리저리 사용하시니 이는 곧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함이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시고 또 사랑하기 위해서는 미워도 하시고 사랑도 하시는데 이것을 모르고 사람들은 자기네들의 견해대로 "왜 미워하고 사랑합니까"라고 하지마는 하나님은 큰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인간이 볼때에는 "이렇다."고 하는 일을 하시는 것이다. 사람들이 견해하는 대로 "한탄하고 후회할만한" 일이지마는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이런 일을 하신다. 건축가의 아들이 와서 "아버지 이것은 긴 것인데 왜 짧게 합니까, 이것은 두꺼운 것인데 왜 얇게 합니까, 이것은 긴것을 그대로 사용하면 되는데 짧게 토막토막 끊습니까?"라고 할 때에는 그의 아버지가 아들의 잘못된 견해를 고쳐 주실 것이다. "네가 볼때에는 긴 것대로 짧은 것은 짧은 것대로, 두꺼운 것은 두꺼운대로, 얇은 것은 얇은 것대로 사용하면 될 것 같이 보여지지마는 집을 지을려고 하면 긴것은 긴것대로 사용할 때도 있고 긴 것은 짧게 끊어서 사용할 때도 있고 두꺼운 것은 얇게 해서 사용할 때가 있고 토막토막 끊어서 사용할 때가 있다."고 할 것이다. 하나님도 이와 같으시다. "인간 너희들이 볼때에는 한탄하고 후회하는 일이지마는 내가 계획한 큰 목적을 이루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이런 일을 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가 얼마나 원대하고 광대한 것을 알아야 한다. 우주와 영계도 진리 안에 들어있다. 진리대로 자기 자신이 지어져 그대로 장성했다고 하면 우주와 영계도 자기 속에 들어오나 자기는 이 속에 들어가지 못한다.
22절 끝에 "다 준행하니라" 노아 신앙생활이 생명있는 모든 것들에게 까지 뻗쳤고 관련이 있었다. 무엇으로 그렇게 되었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렇게 되었다. 우리에게도 이렇게 되는 큰 구원이다. 노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모든 것을 다 접촉했다. "다 준행할때"에 모든 것이 접촉 되었으니 우리도 다 준행할 것인가? 그 당시에 노아는 다 준행해야 되기 때문에 다 준행케 하신 것이지마는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다 준행하셨고 우리는 준행한 것 만큼 접촉이 있다. 준행한 것 만큼 구원이니 우리는 구원관을 넓혀야 한다. 좁은데서 넓혀야 한다. 바울이 "너릐가 좁아진 것은 우리가 너희를 좁게 한 것이 아니라 너희가 너희를 좁게하니 넓히라"고 말씀했다. 사람들이 이해 못할 일을 하나님은 하시나 다 선이다. 내가 어둡고 약하고 좁고 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악하거나 잘못된 것이 아니다. 어린 사람은 장성한 사람의 하는 일을 이해하지 못하나 장성한 사람은 장성한 사람이 하는 일을 이해한다. 어린 사람이 장성해지면 장성한 것 만큼 이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곡해 해서는 안된다.


6:9-12
10절에 보면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그가 세 아들을 낳았으니"라고 하는 세상이 있다. 노아가 세 아들을 낳은 사적을 다른 곳에다가 기록해도 얼마든지 기록할 수가 있다. 노아가 방주를 만든것과 그후에 구원을 얻은 것을 기록해도 되는데 하필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세 아들을 낳았다고 기록한 것은 특별히 기록할 일이 있어서 여기에다 기록한 것이다. 창 5:21-22절에 보면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녀를 낳았다."고 했다. 말씀했는데 이 말씀은 사람의 마음이 미련해지고 이리 저리 다 파괴된 것을 말한다. 노아 시대에는 사람들이 조심과 욕망과 열심이 다 파괴되어서 무엇하나 바로 된 것이 없는 것을 말한다. 그  시대에도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진자도 있었고,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도 있었고 하나님께 대하여 열심을 품은 자도 있었고, 조심하는 자도 많았지마는 노아 식구 8명만이 구원 받았다. 창 6:2절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도 하나님의 택한자들이 많이 있었고, 창 6:4절에 "네피림이 있었고"한 것을 보면 그 당시에 용사들 곧 유명한 사람들이 많이있었다. 그러나 노아 식구 8명만 구원을 받았다. 사람의 눈으로 볼때에는 유명한 사람들이 많았지마는 하나님의 눈으로 보실때에는 다 패괴했다. 그래서 노아 식구 8명을 제외하고는 물심판으로 하나님이 멸하셨다. 그런에 이 사람들은 영혼 구원을 받지못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다. 방주에 못들어가고 천국에 들어간자도 있는 것이다. 사람들이 볼때에는 노아 식구 8명 뿐이였다. 지금도 같다. 하나님이 패괴했다고 하시는 것을 나도 패괴한 것으로 보아야하는데 이와 반대로 용사로 유명한 사람으로 네피림으로 보니 두려운 일이다. 그 당시에도 용사, 네피림. 하나님의 아들들이 많이 있었는데 왜 구원을 얻지 못했을까?
12절에 보면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패괴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있는 자의 행위가 패괴함이였더라"
13절에 보면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고 말씀했다. 패괴했기 때문에 다 멸하신 것이다. 마음과 행위적으로 패괴했기 때문에 멸하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에게 조심이 있고 열심이 있고 하나님을 존경함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모르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패괴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면이 잘 되었으면 저 면이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동을 보면 서를 보지 못하고 이 면이 잘되면 저 면이 삐뚤어지고, 장점만보면 단점은 모르는 것이다. 감옥에 든 사람이 감옥안에서 고형받는 것만 보지 감옥밖의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이것을 깨닫지 못한다. 노아시대가 다 패괴한 것으로 보면 안된다. 사람들이 볼때에 성남성녀라고 하는자라도 하나님이 보실때에는 패괴한 자들이 있는 것이다. 땅에 있으면서 무심히지나 가는 사람에게는 땅위에 일어나는 일들을 무심히 볼것이요 시험으로 여기는 자는 시험으로 당할 것이다. 여기에 보니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 세 아들을 낳았다."고 했는데 자녀를 낳는 것은 세상주의 중에 세상주의다. 그런데 자녀를 낳아도 하나님의 뜻에 합한 생활을 할 수 있음을 보인다. 신본주의에서 자녀를 낳고, 양육할 수 있고, 하나님과 동행하면서도 자녀를 낳고, 양육할 수가 있다. 그러면 하나님과 어떻게 동행할 것인가? 하나님의 도덕과 동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지혜 지식과 동행해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과 동행해야 한다. 그런데 먼저 하나님의 지혜 지식과 동행해야 하나님의 도덕과 동행할 수가 있고, 하나님의 도덕과 동행해야 하나님의 능력과 동행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6:9-12
"패괴"는 깨여지고 허물어졌다는 말인데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 대해서는 너무 사랑이 부족해서 지나쳐 악평하기 쉽다. 그리고 자기에게 대해서는 너무 선하게 평하기 쉽다. 자타를 초월해서 원만히 공평하게 평해야 한다. 정평정가하는 것이 의다. 선행하는 것도 의가 되지마는 선과 의의 기초는 정평정가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큰의가 시작된다. 그 시대가 "패괴했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패괴햇다고 하는 것이니 어떤자라도 자기의 장점만 보면 천하에 제 잘난 맛으로 살지 아니할 자가 었고, 교만해 질수 밖에 없고, 스스로 만족할 수 밖에 없다. 자기의 단점만 보고 이 단점을 고치는데에 주력을 한다고 하면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이라고" 인정치 아니할 자가 없다. 그러면 어디서 살 것인가? 오늘은 의인으로 단정하고 살때가 아니다. 죄인으로 살때인 것이다. 자기가 죄인된 이것을 깨닫는 것이 자기 진리다. 내가 어느 모퉁이가 패괴되었는지 이것을 바로 잡아서 살피도록해야 한다. 또 보면 "하나님과 동행했다"고 했다. 에녹에게도 아브라함에게도 동행했다고 말씀했다. 하나님의 뜻대고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동참하고 협조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과 명령과 교훈으로만 행하는 이것을 하나님은 만족히 여기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을 인격자로 모시고 인격자의 뜻에 순종치 않을려고 하면 안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만이 아니고 살아계시는 인격자로 이분을 좋아하고 이분을 중심해서 순종함을 하나님은 원하신다. 육체가 하나님과 동행치 못하지마는 육체를 가진 마음이 육체를 안가지신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신다. 인격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해서 죄와 의와 평안에 대하여 하나님을 의지하고 동행하는 것을 주님이 원하신다. 육체가 강해서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있는 죄가 강하고, 그 속에 있는 마귀가 강해서 죄를 범하는 것이요, 의를 행하는 것도 육체가 강해서 의를 행하는 것이 아니고 그 속에 의가 강하고 그 속에 하나님이 강해서 의를 행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해야 한다.

6:1-14 히 11:7
  예수님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의 종말을 노아시대로 관련시켜서 말씀하신일이 몇 번이나 있었다. "인자의 때도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다. 노아 홍수 때는 창세 2,000년 되는 때다. 예수님께서 구름타고 오실때도 그 때와 같으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했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노아의 때를 연구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여러가지를 깨달을 수도 있고, 우리의 구원에 척?와 같이 삼아야 할 부분들이 많이 있다.
(1) 예수님의 재림이 노아 시대와 같다고 하신 일에 있어서 어떤 점을 말씀했는가?
  ①. 노아시대에 하나님의 진노의 멸망이 오게 된 원인이나 재림때에 하나님의 진노의 멸망이 오게 되는 원인이 같다. 그 원인은 무엇인가? 여인은 미혹의 존재가 되어졌고, 남자는 여인의 아름다움에 미혹되어 하나님의 법도를 떠났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자기네 마음대로 여인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의 아내로 삼았다고 했다. 물론 노아때의 죄악이 이것 뿐이아니고 많이 있었으나 간단 명료하게 표시한 것이다. 멸망의 원인은 여인은 하나님의 법도를 생각치 아니하고 자기 욕심대로 행동을 했고, 거기에 피동되어서 남자가 자기 욕심대로 행동을 했다. 에덴동산에서도 그러했다. 처음에 여자가 자기의 좁은 욕심대로 했고 그 다음에 남자가 자기의 좁은 욕심대로 여자에게 피동되었다. 선악과를 먹게한 욕심이다. 창 6장에는 남녀 이성교제로 표시 했으나 간추려서 한 가지로 표시한 것이다. 그 중심인 이 계시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은 생각치 아니하고 자기의 좁은 생각, 욕심을 위주하는 것이 여인이 먼저요 남자는 그 여인의 좁고 단편적이고 감정적인 욕심에서 일어나는 그 욕심에게 피동되어서 자기 사욕을 충족시켜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서 마지막에는 공통적으로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는 범죄의 행동을 한다는 것인데 이것이 노아의 때와 인자의 때가 같다. 요사히도 여인의 세대라고 할 만치 치마 바람이 세다. 출세는 여인에게 달렸다고 할수 있는 세대다. 이것은 한국만이 아니고 세계적이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인자의 때가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으니 이것이 세계적이다. 그러므로 멸망한 원인인 하나님의 법도를 떠나서 사욕대로 움직였으니 여인에게 해산하는 고통을 주신 것이다. 범죄전에는 아담이 생산 했는데 범죄 후에는 여인이 해산하고, 해산하는 고통을 가지게 된 것이니 이 여인된 사람은 이것을 명심하고 속하도록 해야한다. 그리고 남자들은 여인의 말이라면 하나님의 말씀은 생각치 않고 여인에게 따라간다고 하면 일차에는 에덴 동산에서 이차에는 노아시대가 남녀 공동으로 망한 것처럼 삼차 예수님의 재림시에도 남녀가 공동으로 망하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여자와 남자의 욕심이 어떠하든지 간에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지 아니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오는 멸망은 금할 수가 없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요사히는 둘이 만나면 둘이 수근거리고 셋이 만나면 셋이 수근거린다. 부모와 아들, 아내와 남편이 모이면 전부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까?"하지 않고 "어떻게 하면 잘살까, 돈 벌이를 잘 할까"하는 순전히 따의 욕심뿐이다. 사람들이 세상것 때문에 죽지 세상것이 없어서 죽지 않는다. "육체가 굶는 것보다 인격이 굶는 것이 크고, 옷을 벗는 것보다 도덕적으로, 행위적으로 벗은 것이 수치다. 돈에 궁핍한 것보다 하나님의 진리과 영감에 궁핍한 것이 문제다"하는 사람이 적고, 이런 가정이 적다. 어디를 가서 보든지간에 에덴동산에 있던것. 노아시대에 있던것이 가득하다. 그러므로 땅위에 멸망이 오는 것은 귀정사실이다. 그러므로 내가 멸망속에 들어 있는지. 내 가정이 이 멸망 속에 들어 있는지. 내 교회가 이 멸망속에 들어 있는지 이것을 찾아 보아야 한다. 멸망이 오는 것은 결정적이다.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한다."고 하시고 인자의 때는 노아의 때와 같다고 했다.
   ②. 또 그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또 용사라. 고대에 유명하다고 했다. 이 말씀을 기록하신 것은 하나님이 분개해서 기록하신 것이다. "인생들아 너희의 행복이 유명해 지는데에 있지 아니하고 너희의 행복과 불행이 용사나 유명한 자에게 메여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너희의 행복과 불행이 용사나 유명한 자에게 메여 있는줄 알고 하나님과 말씀을 집어던지고 신앙양심을 짓밟아서라도 어떻게 하든지 땅위에서 유명해지기를 원하고 있지않느냐 하나님의 말씀이야 동화 같이 여기고 병신 하나님으로 뒷방 구석에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 같이 섬기고 돈이 있어야 행복해진다. 기술이 있어야 한다. 출세를 해야 한다 하여 아무 정치인을 보아라 아무 경제인을 보아라 아무 기술자를 보아라 아무 예술인을 보아라 아무 사업가를 보아라 고하면서 아무 유명한 정치인에게 아무 유명한 경제인에게 아무 유명한 기술자에게 아무 유명한 예술인에게 아무 유명한 사업가에게 팔렸다."고 하신 말씀이다. 지금에 사는 그리스도인들도 이 유명에게 팔렸고, 이 유명에게 인격을 박탈당했다. 여기게 보면 이름없고, 보잘것 없고, 조롱받는 이 노아는 하나님에게 붙들렸다. 이 노아에게 홍수심판후에 후사가 있었지 유명한 자에게 있지 아니했다. 세상이 부러워하고 있는 유명한 것에서 돌아서서 하나님에게로 돌아와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멸망이다. 자기가 유명하면 어떨것이며, 제가 용사면 어떨 것인가 하나님의 홍수 심판에서는 전멸이였다. 지금도 교회안에서도 유명주의요, 용사주의다. 세상적으로 유명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이것이 막바로 멸망이다. 이 유명관이 노아시대와 인자의 때가 같다. 이것 때문에 멸망받는다. 지금에는 사욕이 판을 치고 있고, 유명이 판을 치고 있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은 무시를 당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유명한 것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무시를 당하고 있다. 세상에서 유명한 것이 교회안에 까지 유명하게 되었다. 지금은 교회안에서도 ??를 가르치고 안가르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유명한 강사, 유명한 박사라고 하면 사람들이 폭녹는다. 유명하면 그 시간부터 썩기 시작한다. 그러므로 진리를 아는 사람은 일생동안 유명을 피했다. 유명하면 그것이 끝이난다. 더자라지 못한다. 유명을 탐하는 사람은 철부지다. 이 유명관을 바꾸지 아니하면 헛일이다. 자기의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유명에 도취된것을 뿌리 뽑아야 한다. 땅위에 유명한 것이라고 하는 것을 자세히보면 전부 음행했다. 계 17:-2절에 보면 "땅에 임금들도 그로 더불어 음행했다"고 말씀했다. 우리는 유명관을 바로 가져야 한다. 그래서 유명이라는 미혹을 받지말고, 미혹을 주지 말아야 한다. 유명하다고 하는 여기에 하나님의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다. 없다.
  (2) 히 11:7절에 "경외하므로 방주를 예비했다." 말씀했다. 매일 생활하는 생활을 조심하지 아니하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인적요소가 생기지 아니한다. 노아는 매일 하나님을 경외하는 생활을 하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선청되어져서 미래를 준비하게 되었다. 매일하는 생활을 조심치 아니하고 마구잡이로 하면 미래를 준비하는 요소가 없다. 매일 생활을 조심해야 한다. 벧전 3:10-11절에 보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고 말씀했다. 자기의 평소 생활을 주님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하고, 주님때문에 손해보고 주님때문에 유익보고, 주님때문에 일을 하고, 주님때문에 일을 하지 아니하는 이런 사람이라야 미리 준비한다. 노아가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준비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성격을 평소에 마련했기 때문에 일생동안 준비했다. 일시적으로 두려워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평소에 모든것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믿는 사람 중에도 하나님보다 장사가 잘 안되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하나님보다 직장이 떨어지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하나님보다 체면이나 위신이 떨어지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하나님보다 명예에 손해가는 것을 더 두려워하고, 하나님보다 농사가 잘 안되는 것을 더 두려워하는 사람이 많다. 다윗이 성공한 비결은 하나님의 계약을 지키는 것으로 했다. 하나님의 계약을 지킬때에는 깨닫지 못했는데 뒤에 보니까 다 해결된 것을 본 다윗은 시 34:1-에 보면 이것을 간증했다. 평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길러야 하고 평소에 하나님의 법도대로 사니까 결과적으로는 좋아졌다고 하는 경험과 체험을 해야 한다. 성경에 보면 미래에 대한 준비를 어떻게 하라고 말씀했으니 이것을 보고 내가 준비하고 소망을 가져야 비로소 준비가 된다. 미래를 준비 할수 있는 요소를 현재에 마련해야 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평소에 길러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니까 결과적으로 복되다 하는 경험과 체험을 많이 쌓아야 미래에 대하여 마찰을 싹싹 끊고 전진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오늘이라는 현재를 실패했으면 미래도 실패다. 이것을 고치는 것은 당장에 있고 현재에 있다. 구출도, 멸망도 현재에 있다. 다음 시간에 있는 것이 아니요 미래에 있은 것도 아니다. 미래를 두고 혈서를 써도 헛일이요, 혀를 깨물어도 헛일이다. 현재에 즉시해야 한다. 이 시간을 빼앗기면 영원히 찾지 못한다. 이것이 산다싱의 교훈의 중심이다.
  (3) 노아가 긴 세월에 방주를 지었느데 그 효력이 언제 나타났는가? 노아가 만든 배는 짐이나 사람을 실어다 주고 돈을 버는 것에 사용하는 배가 아니다. 상선이 아니요, 객선이 아니요, 유람선이 아니다. 이 배는 홍수로 멸망받을 때 쓰여지는 배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경건 생활은 어디에 쓰여지느냐하면 앞으로 인생을 멸망시킬때에 이 멸망에서 자기를 구출하는 것이다. 땅위에서 하는 일의 효력을 당장에 받는 것이 아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이 세상살이를 하는 이것이 세상적으로는 노아보다 더 유명했다. 그러나 이것 가지고는 홍수에서 구출하지 못했다. 지금도 그러하다. 세상사람들이 인간학, 자연학, 아폴로 우주도 킹을 가지고 자랑하지마는 이것 가지고 이 다음에 전인류를 멸망시키는 멸망에서 구출하지 못한다. 한쪽 구석에서 초초히 앉아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경건생활하는 이것이 구출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이냐, 자기 사욕이냐, 세상 유명을 존귀하게 여기느냐, 하나님의 말씀을 존귀하게 여기고 그 말씀을 따르냐, 우리는 자기 사욕을 꺾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위주하고 따라야 한다. 히 11:33-38절에 보면 믿음의 사람들은 어떤 고형과 악형에서도 믿음으로 승리했다. 앞으로 죽음을 두고, 죽음을 자취하므로 구원을 얻는다고하면 죽는 것보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해야 말세에 목베임에서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다. 죽음을 두려워하면 죽음의 종이 된다. 그러므로 평소에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을 길러가야한다. 이뿐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경건 생활을 할 때에 하나님은 미래에 계약을 비추어 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약을 표?해서 구출할때에 구출할 수 있는 배를 예비했느냐 하는 이것이 문제다. 세상 것은 방주를 예비하는 비용이다. 계 18:6-10절에 사람들이 애착하여 마련해서 아끼던 것이 불탈때에 이것을 마련한 자의 마음이 찢어지게 해통한다고 했다. 우리가 지금 이런 사람이 되어있지 아니한지!



7:1-5
성경을 읽을 때에는 상식을 많게 하기 위해서 읽어도 안되고 많이 읽기 위해서 읽어도 안되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기 위해서 읽어도 안된다. 자기에게 잘못된 것을 고치고 바로 행하기 위해서 읽어야 한다. 본문에 보면
①. 하나님이 천하에 있는 모든 것을 멸하시리고 작정하시고 노아의 식구만 구원하시기 위하여 방주에 들어가라고 하실때에 노아는 얼마나 복되고 영광스러운자이겠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멸하실 때에 의논의 대상이 어느 사람이 될지! 그 시대에 노아가 힘이 있고 열심히 있고 유명하다고 그렇게 된 것이 아니고 120년전 부터 해오던 순종생활로 인한 것이다. 긴 세월에 쌓아온 신앙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은 자가 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계시가 통하여 아니했는데 노아 한 사람에게만 계시가 통했던 것이다. 온천하가 망할때에 멸망을 피하게 하시고 또 열심과 간절한 마음이 있어서 순종할 수 있는 이것이 성령의 감동이요, 충만이다. 성령의 충만을 받는 것은 몸이 뜨거워지고 몸이 떨리는 것이라고만 하는 것은 잘못 된 것이다. 몸이 뜨겁고 떨리는 것이 성령의 감동의 자극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 악령의 감동의 자극에서 그런 것인지 이것도 모르고 날뛰는 사람이 많은데 이런 사람이 성공한 자가 심히 적다. 불만 받으면 된다고 하는 것은 변태적인 신앙이다. 자기의 마음에서 하나님의 말씀에게 순종하여 구원을 이루고져 하는 간절과 힘을 쓰는 이것이 성령충만이다. 실례를 들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니까 노아 당시에 노아만이가 하나님의 의논의 대상이 되어서 특수하게 취급 당한 것을 보고 "이것이 복이로구나 나도 이렇게 되기를 원한다. 노아가 이렇게 된 것은 긴 세월에 순종생활을 한데서 기인한 것이니 나도 순종하겠다."고 하는 이것이 성령의 감화요, 이 생활을 계속하는 것은 성령 충만이다.
2-3절에 보면 하나님은 본능대로 움직이는 짐승에게 까지 세밀히 귀하게 취급하시는데 사람을 얼마나 세밀하고 귀하게 취급하겠나! 영원미래에 대해서 사람들에게 가르쳐 주신 것이 성경인데 이것이 보배다. 그런데 이 성경을 등한히 여긴다. 하나님에게 미래사에 대해서 의논의 대항이 된다고 하면 얼마나 영광이 되겠나! 가정과 교회와 사회에서 미래사에 대하여 어떻게 될 것을 하나님에게 의논의 대상이 되는 것은 그 영광과 복을 말로 표현하지 못한다. 이렇게 하나님의 의논에 대상이 되는 비결은 멸망 중에서 구원받는 비결은 일시에 되는 것이 아니다. 노아는 120년간이나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한 것이다. 동물도 하나님의 말씀대로 방주에 넣었다. 성경을 모르면 신앙생활을 못한다. 성경을 알면 그 만큼 순종ㅎ나다. 그러므로 성경을 열심히 상고해야 한다. 성경에서 자기의 과거, 미래, 현재에 대하여 비판하여 나가야 한다. 일시적인 열심과 간절과 힘을 쓴다고 되는 줄 알고 헛되게 자신을 망치지 말고 평소에 자기가 하는 일에서 여러면으로 순종생활을 해야 한다.
②. 1절 하반절에 "네가 이 세대에 내 앞에서 의로움을 내가 보았음이니라"고 했다. 만유주 하나님께로 부터 이 한마디만 받으면 천하를 가지는 것보다 났다. 불의한 자는 불의에게 삼켜서 망하게 하신다. 평소에는 죄인을 회개 시키기 위하여 사랑하시나 하나님은 의인을 사랑하고 결코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이 아니다. 회개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죄인을 사랑하신다. 다시 말하면 의인 될 희망이 있기 때문에, 의인 때문에 죄인을 사랑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를 귀하게 여기신다. 의가 있는 개인, 의가 있는 가정, 의가 있는 사회, 의가 있는 단체는 결단코 하나님이 멸하시지 않고 영원히 보존 하신다. 렘 5:1절에 보면 예루살렘성보다 의인 한 사람을 귀하게 보셨고 창 18:32절에 보면 소돔, 고모라성 보다 의인 10 사람을 더 귀하게 보셨다.
③. 2절에 보면 구원 얻는 한 사람을 통하여 모든 것을 구원하신다. 노아 때문에 모든 짐승과 새들과 벌레를 존속케 하신 것이다. 오늘도 의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존재들을 구원하시는 것이다. 우리 성도가 잘 되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세밀한 간섭을 받는 자가 복이 있다. 그러나 불의를 계속하면 하나님은 버리신다.
④. 5절에 보면 "노아가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대로 다 준행 하였더라"고 하신 말씀이 있다. 노아가 하나님께서 계약하신 계약을 다 준행 했으니 계약하신 하나님 노아에게 계약하신대로 다 준행하신 것이다. 무식하고 천하고 가난한 사람이라고 할찌라도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계명을 다 준행한다고 하면 하나님께서 "이 세대에 내가 네 의로움을 보았노라"고 인정하시고 "네가 방주에 들어가라"고 하는 이 한마디를 받아 구원의 세계에 들어가게 되고 다음 세계에서는 주인공이 되는 것이다.                                      

7:6-24
①. 11-12절에 "홍수가 땅에 있을때에 … 비가 땅에 쏟아졌다"
  ⓐ. 7절에 "홍수를 피하여 방주에 들어갔고" 방주에 들어가서 홍수를 피했다. 그 당시에 많은 사람들이 홍수를 피할려고 하는 마음은 다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진노나 징계나 환란을 피할려고 하는 마음을 사람마다 전부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앞으로 어떤 환란이 올찌 모른다. 그때에 주를 파는 자가 되어야 한다. 노아 식구가 환란을 피한 것은 일시적으로 된 것이 아니고 수 많은 세월에 된 것이다. 환란을 피하고 구원받기를 원했으나 평소에 준비가 없어서 망했다. 우리도 평소에 믿음을 지키므로 환란을 준비해야 한다.
  ⓑ. 4절과 10절에 "지금부터 7일이면" 몇달 몇일에 환란이 났다. 그 당시에는 재앙이 오는 종말을 노아 외에는 아무도 모르고 모든 사람들이 먹고 마셨고 시집가고 장가 갔다. 오늘이 바로 그날이면 돈이나 권세나 지위가 무슨 필요가 있으면 쾌락이나 향락이나 명예가 무슨 필요가 있나! 자기에게 현재에 있는 것이면 족하게, 더 많이 가져볼려고 정신없이 날뛰고 있는 것이다. 어기석고 미련한 것이다.
  ⓒ. 9절에 보면 짐승들이 노아에게 나아왔다. 노아가 잡아서 놓은 것이 아니고 짐승들이 스스로 나아왔다. 노아가 문을 열고 들어 가라고 하면 감사하면서 들어갔다. 그러므로 이 짐승들은 전부가 노아의 것이였다. 영원히 노아의 것이였다. 오늘도 주의 말씀에 순종하면 모든 존재들도 기쁘하고 모든 존재를 영원히 자기것 삼는 것이요. 모든 존재들을 통치한다. (이것을 알게 하신 성경을 등한히 여긴 죄를 회개해야 한다.) 성경 외에는 옳은 것이 하나도 없다. 성경에서 얻은 믿음이라야 참 믿음이요, 성경에서 얻은 힘이라야 참 힘이다.
②. 13-24절에 "곧 그날에 노아와 … 10일을 창일하였더라"
  ⓐ. 13-16절에 짐승도, 새도, 곤충들도 하나님의 명령대로 해서 순종하여 홍수에서 살아났다. 순종치 않고 산것은 하나도 없었다. 순종으로 살았다.
  ⓑ. 17-24절에 노아가 방주를 만들어 가지고 그 안에 들어가서 구원을 얻었다. 다른 사람들도 홍수가 나니까 집안으로 높은 언덕으로 높은 산으로 피해갔으나 마지막에는 홍수를 피하지 못하고 다 죽었다.
그러나 노아식구는 홍수를 피하지 않고 홍수 위에 떠 있었기 때문에 처음에는 사람들이 산으로 피하지 않는다고 조롱했을 것이다. 노아가 홍수 위에 떠 올라가니 땅과는 점점 위치가 멀어졌다. 노아는 홍수 위에 뜨서 있기 때문에 물의 깊이가 10길이든지 100길이든지 천길이든지 간에 상관이 없다. 뜨는 것은 10길이나 천길이나 같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홍수를 피하는 것이 다르다. 집으로 언덕으로 높은 산으로 피하는 것이 다르다. 물이 많을수록 높은 곳으로 피해야 한다. 노아가 홍수를 피하지 않고 홍수 위에 뜬 것은 장기간 순종하여 홍수 위에 뜰 수 있는 권능의 사람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세상의 멸망을 발아래 짓 밟을 수 있는 능력자로 만들어진다. 하나님의 명령이 곧 세상의 멸망을 짓밝고 서는 권능있는 명령인고로 이 명령에 순종하면 자신이 그렇게 만들어진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명령이 명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선물이다. 하나님은 먼저 준비할 수 있는 형편과 시간과 도리를 주셔 가지고 준비시켜놓고 준비한 것 만큼 시험을 주신다. 준비시키지 않고 시험하시지 않으신다. 언제나 멸망이 이르기 전에 준비하게 하시고 준비하면 구원을 주신다. 그러므로 구원이 먼저요. 구원 다음에 멸망이 오니 핑계하지 못한다. 다른 사람은 홍수가 오니까 홍수를 피한다. 자기에게 어려움이 오면 죄로 인하여 왔든지 의로 인하여 왔든지 간에 이 어려움을 피하지 말고 이 어려움을 극복하여 그 위에 서면 큰 어려움도 점점 이길 수가 있다. 피한 사람은 다 죽었다. "이 입장에서도 못 믿겠다."고 하여 이리저리 입장을 옮기면 살 것 같지마는 결국에는 죽고 만다. 당시에 홍수가 한 지방이나 어느 지역에 만 있었든 것이 아니고 세계적이였기 때문에 아무곳에 가서 피하여도 다 죽었다. 앞으로 예수님의 재림때에 전 인류가 멸망하는 마지막이 올때는 미국으로 간다고 사는 것이 아니다. 한국땅에 있다고 죽는 것이 아니다. 피하지 말고 자기가 선 그 자리에서 신앙으로 극복하여 어려움을 이겨야 한다. 이렇게 적은데서 부터 점점 이겨 나가면 최고의 큰 어려움이 와도 이길 수도 있다. 높은 산에 올라가는 것도 한 걸음씩 옮기면 최종에는 산봉에까지 올라간다. 하나씩, 하나씩 이겨 나가야 한다. 이것은 일시에 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이 오기 전에 평소준비 기간에 준비해야 한다. 하나씩, 하나씩 극복하여 나가는 자와 이리저리 피하는 기회주의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진다. 홍수가 땅에 넘치니 집으로 집에 넘치니 언덕으로 언덕에 넘치니 조금 높은 언덕으로 여기에 넘치니 높은 언덕으로 여기에 넘치니 낮은 산으로 여기에 넘치니 높은 산으로 이리저리 피하는 기회주의자와 방주에 들어 있어 홍수를 피하고 뜨는 노아와는 홍수가 깊어 갈수록 거리가 멀어진다. 이와같이 기회주의 적인 신앙과 일관하여 이겨 나가는 신앙이 최종에는 서로 달라진다. 노아의 방주가 물 위에서 뜨는 것은 10길 물에서 뜨는 것이나 100길 물위에서 뜨는 것은 같다. 이렇게 자기에게 오는 어려움을 피하지 않고 하나씩 이겨 나가면 적은 것을 이기는 것이나 큰 어려움을 이기는 것이나 같다. 아브라함에게 갈대아 우르를 떠나라고 하는 시험이나 이삭을 제단에 바치라고 하는 시험은 다를 것이 없고 똑 같았다.



8:1-22
1-5절에 보면 아무의 힘으로도 창일한 물을 감할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홍수위에 뜰 수는 있었으나 창일한 물을 감하게 하는 권세는 노아에게 없었다. 홍수를 물러가게 할 수는 없었다. 홍수가 물러가게 된 것은 하나님의 작정이요. 하나님이 노아를 구원하는 역사요. 죄악의 멸망이요. 복스러운 것이 들어나는 것이다. 홍수가 오는 것은 멸망이 오는 것이요. 홍수가 물러가는 것은 멸망이 물러가는 것인데 홍수가 오게 된 것도 하나님의 작정이요. 당시의 사람들이 자기네의 죄로 인해서 끌어 드린 것이요. 그 시대의 온 교계가 세계가 이 홍수에 빠진 것이다. 그 당시에 홍수로 전 세계가 멸망되든 것과 같이 오늘도 죄악으로 멸망되는 것을 보는 사람이 영의 눈을 뜬 사람이다. 이때에 신앙으로 죄를 밟고 서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제는 홍수가 점점 물러가고 산봉우리가 하나씩, 하나씩 나타난다. 이와같이 멸망이 하나씩 물러가고 그 개인의 복된 것이 하나씩 낱나고 그 가정의 복된 것이 하나씩 나타나고 그 교회의 개혁이 하나씩 나타난다. 예수님 믿는 이치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열변이라고 웅변이라고 정서적이라고 해도 예수님 믿는 이치가 그 속에 없으면 울리는 괭가리다. 졸변이라도 정서가 없고 말을 더듬어도 예수님 믿는 이치를 말하면 권위가 있다. 그리고 예수님 믿는 이치를 배워서 자기 신앙의 진로로 삼아야 한다. 듣고 그대로 이용만 하면 청산유수 같이 말을 해도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이치를 듣고 배워서 이치를 가지고 자기를 빗고 깎아서 자기를 이 이치대로 만드는 사람이 권위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자기를 만들어야 한다. 성경 말씀에서 나오는 감사와 소원과 눈물이라야 참된 것이지 다른데서 나오는 것은 잡된 것이다. 소리나 감정이나 수사에나 정서에 피동되지 말고 믿는 이치에만 피동되어야 한다. 이런 일은 적은데서 부터 연습해야 한다. 이치에 피동되지 아니하고 소리에나 감정에나 정서에나 수사에 피동되면 이런 것들이 있을 때에는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겠으나 이런 것들이 없으면 신앙생활을 못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결단코 승리의 생활은 하지 못한다. 우리의 구원은 이치대로 나를 만들어 가는 것인데 감정이나 정서나 수사, 이런 것들이 구원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정서나 감정에게 피동되면 자기도 모르게 정서나 감정의 사람이 되어서 실패하는 일이 많다.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고 멸망을 일으키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구원과 멸망을 계획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라. 그것들을 오게도 하고 가게끔 하는 것은 사람이다. 멸망과 구원을 오게 한 이는 처음에는 하나님이시요. 그 다음에는 사람, 곧 노아와 그 당시에 범죄한 사람들이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함께 일하신다. 노아가 방주를 지어서 홍수심판과 면했을때에 노아의 배 외에도 다른 배가 많이
있었다 인류창조 이후 2000년이 경과한 후인고로 배를 만들어서 사용하는 기술이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에 노아의 배보다 큰 것도 있었고 좋은 배도 있었을찌라도 구원 받지 못했다. 아담이 범죄 전에는 모든 피조물이 사람에게 순종했지마는 범죄 이후에는 모든 피조물들이 사람과 대적이 되었다. 노아시대에는 죄가 관영했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사람과 서로 대적이 되어 사람에게 순종치 아니했다. 그런데 모든 것이 노아에게 나아왔다고 했고 노아는 이것들을 취했다고 했고 "하나님이 노아에게로 나아오게 하시매"라고 하신 말씀이 있으니 어찌보면 노아가 한 것 같이 보이고 어찌보면 하나님이 하신 것 같이 보인다. 이는 하나님이 노아를 통하여 일을 하시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 많은 배가 있었지마는 노아의 배 외에는 구원 받지 못한 것 같이 오늘도 많은 종교가 있지마는 이런 종교에는 구원이 없다. 또 많은 신자들이 있지마는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 외부의 형태가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지 아니하면 구원이 없다. 노아의 배 같이 다른 사람이 배를 만들었다고 해도 하나님의 공의가 깨트렸을 것이다. 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령하지 아니했기 때문에 소용이 없다. 하나님이 부르시고 순종하고 나가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이 부르신 자요. 중생된 자요. 하나님이 간섭하는 자요. 순종하는 자라야 구원을 받는다. 사람에게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아무리 도덕가라도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서 시발 되어진 것이 아니면 구원이 안된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않고도 자기 자신이 신앙생활을 할 수가 있고 또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보고 할 수가 있으나 그것 가지고는 구원을 이루지 못한다. 요 6:57절에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를 인하여 살리라"고 말씀했다. 예수님을 말미암은 것이라야 권능이 있고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으면 형태가 있을찌라도 권능은 없다. 예수님을 말미암지 않고도 믿는 형태나 모양을 갖출 수가 있다. 자기 감정에서, 자기 생각에서 형태와 모양을 갖출 수가 있다. 그 당시에는 노아의 배가 그렇게 큰 배가 아니다. 그라나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시니 구원을 받았다. 거기에다 모든 짐승을 넣고 양식을 넣고 사람들이 들어간 것도 하나님의 권능이다. 방주안에 싣는 것도, 홍수에 이기는 것도, 모든 것들이 순응하는 것도, 모든 것과를 관계를 맺는 것도 하나님의 권능이다. 권능을 뽑아 놓으면 형태는 꼭 그와 같으나 아무 것도 아니다. 애굽을 나와서 요단을 건너가기 까지가 전체가 하나님의 권능이였다. 오늘 우리 그리스인이 살아가는 것이나 모든 것을 접촉하는 것이나 모든 것이 순종하는 것이나 하나님과 모든 관계를 맺는 것이 하나님의 권능이다. 형태가 많이 있지마는 보이지 않는 권능이 있고 없음에 따라 구원이 있고 없는 것이다. 그 형태는 그만한 것 밖에는 감당 할 수가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형태를 가지고 어떻게 그 일을 했을까 하는 방편으로 하나님이 역사해 나가더라, 도무지 다른 사람 같으면 살 수가 없는데 그 사람은 살아가더라"고 하는 이런 방편이다. 시 91:7절에 "천인이 네 곁에서 만인이 네 우편에서 엎드러지나 재앙이 네게 가까이 오지 못한다."는 말씀이다. 형태도 중요한 것이지마는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구원을 얻지 못한다. 예를 하나들면 "말씀대로 살려고 하면 구멍가게 밖에는 더 못하겠고 이것만 하면 굶어 죽겠다"하여 다른 것으로 바꾸면 형태만 귀하게 여긴 것이요. "적은 구멍가게이지마는 하나님의 권능이면 산다. 그리고 굶어 죽어도 순종하다가 죽으면 좋다."고 하여 구멍가게를 가지며 이는 하나님의 권능을 중하게 여긴 것이다. 외부에 나타난 형태의 생활보다 나타나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권능이 중하다. 희미한 형태가 있을찌라도 하나님의 권능이면 위대한 것이요. 위대한 형태라고 할찌라도 하나님의 권능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런데 잘못하면 형태를 전적무시하기 쉽다. 노아가 방주 아니였으면 구원이 없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생겨진 형태라야 한다.


[ 11장 1절 ~ 9절 ] 바벨탑
바벨탑 건축이 인류의 분산, 혼돈, 충돌의 원인이 되었다. 바벨탑 건축 전에는 언행과 사상이 같아서 떨어질 수 없는 한덩어리였다. 그래서 아주 행복했는데 이 바벨탑을 쌓은 이유는 노아시대와 같이 하나님이 홍수로 멸해도 죽지 않기 위해서다. 하나님은 노아에게 홍수심판을 하지 않겠다고 약속했는데 노아의 후손들은 바벨탑을 쌓기 시작했다. 이것은 하나님의 계약 말씀을 믿지 않는 죄요,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지 않고 자기 이름을 높이고 자기네 욕심을 달성시킨 죄요, 하나님이 멸망시킬지라도 자기는 멸망치 않겠다고 하는 하나님을 대항한 죄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부인하고 자기를 존대하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성질에서 바벨탑을 쌓았다. 그 결과로 하나님은 그들에게 분산을 주었다. 하나님을 높임이 아니고 자기 중심, 자기 높임이었는고로 서로 충격하여 자멸하게 하셨다. 하나님의 약속은 저희들에게 길인데 이 약속을 믿지 아니했으므로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혼돈을 주었다.
그러므로 멸망을 받았으니 자기 꾀에 자기가 속았다. 하나님을 떠난 문화, 예술, 노력, 계획, 인간의 모든 움직임 그 전부는 바벨탑과 같다.

11:1-9
본문은 바벨탑을 쌓은 사실인데 이것은 사람들에게 유명하게 알려진 사실이다. 본문에서 몇 가지만 상고 하겠다.
①. 이 탑을 쌓기 전에는 언어가 하나였다. 지금은 지방마다, 민족마다, 국가마다 언어가 서로 다르다. 그때에는 한가지 말을 가지고 천하에 있는 사람들이 사용했으니 일의 경영이 잘 되었을 것이요, 신속히 되었을 것이다. 이렇게 언어가 많게 된 것을 우리가 볼때에는 저주로 보인다. 어학을 공부하자니 시간과 정력이 소모되니까 저주로 보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축복이다. 범죄한 아담, 하와에게 수고와 고통을 주셔서 죄를 방지하심과 같이 그 당시에도 언어를 많게 하여 죄를 적게 범하도록 했으니 이것이 축복이다. 지금은 어학에 능한자가 출세한다. 그러나 이것보다 실지의 일을 하는 것이 낫다.
②. 이 탑을 쌓기 전에는 의견 충돌이 없었으나 이 탑을 쌓은 후 부터는 서로의 의견 충돌이 생겨서 사상혼잡이 생겼다. 이 탑을 쌓기 전에도 의견 충돌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노아의 8식구에게도 죄의 근성이 있어서 대립하는 죄가 있었으나 외부에는 나타나서 충돌이 없었고 자손이 차차 퍼지매 서로 충돌함이 나타났다. 그러나 일을 경영하지 못하도록까지의 충돌은 없었다. 이렇게 언어와 사상 혼잡이 생겨지니 행사의 혼잡이 생겨지고 여기서 분쟁이 생기고 분열이 생겼다. 탑을 쌓으므로 인하여 언어와 사상 혼잡이 생겨지니 표면에 나타나는 사역 혼잡이 생겨지고 그러니까 분쟁과 분열이 생겼다. 탑을 쌓기 전에는 행복이였는데 바벨탑을 쌓은 후 부터는 불행이였다. 우리에게도 폐단은 여기에서 원인이 되어 가지고 일어난다. 언어 혼잡이 사람 사이에 있는데 이 사람이 하는 말을 저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고 저 사람이 하는 말을 이 사람이 이해하지 못하면 이것도 언어 혼잡인데 이렇게 되면 충돌이 생긴다. 친구 사이에도, 동업자 사이에도, 가정에서 가족끼리도, 한동네에서 이웃끼리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면 언어 혼잡이니 이렇게 되면 충돌이 생긴다. 잘한 말이라도 이해하지 못하면 충돌이 생기고 좋지 못한 말일찌라도 이해하면 충돌이 없다. 이해를 바로 한다고 하면 옳은 말이나, 잘못 된 말이나 충돌이 생긴다. 충돌이 없고 단합이라고 하면 진행이 빠를 것이지마는 충돌이 생겨서 실패가 많다. 충돌 되는 것에는 충돌 될만한 원인이 있다. 충돌이 되어서 충돌 되는 것도 있고 단합이 되었기 때문에 충돌을 끌어 오는 것도 있다. 여기 탑을 쌓은 것도 단합이 되었기 때문에 충돌을 끌어 온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충돌이 되었던가?
충돌로 충돌이 되는 것도 있고 단합이 충돌을 끌어 오는 것도 있으나 충돌의 뿌리는 원인은 하나님으로 원인 되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 원인 되지 아니한 것이면 혼잡이나, 단합이나, 전부는 혼잡이다. 세상에는 혼잡과 단합 뿐인데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혼잡과 단합이 있고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아니한 혼잡과 단합이 있으니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산 것이요. 하나님으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은 죽은 것이다. 그러므로 혼잡과 단합을 구별해야 한다. "내가 세상에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신 이 혼잡은 산 혼잡인데 사망 뿐인 곳에 산 혼잡을 주신 것이다. 사망으로 뭉친 것에 혼잡을 주어서 사망을 깨트리니 이것은 산 혼잡이다.
③. 4절에 "또 말하되 자 성과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그들이 이름을 내려고 하니 하나님은 수치스러운 이름을 가지게 하시고 지면에 흩어짐을 면할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지면에 흩으심으로 흩어짐을 당했다. 사람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데 그러면 하나님은 이 사람에게 대하여 대적의 입장에 서서 이 사람이 목적한 것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이루고져 하는 것 만큼 정반대로 이루신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에 강제로 순응 하는 자가 되었다. 바벨탑을 쌓는 것은 순종치 아니한 것이요. 강제로 순종 당한 것은 망할대로 망한 것이다. 자원해서 순종하면 축복의 순종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축복하시는 것을 보여 주고 거역하면 저주의 순종으로 하나님이 그에게 저주하시는 것을 보여주니 사람의 생활은 하나님을 증거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래도 살아도 저래 살아도 하나님을 증거하다가 가는 것이요. 이래도 순종하고 저래도 순종하는 것이니 사람은 어떤 순종이든지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하나는 생명의 순조이요, 하나는 사망의 순종이다. 노아시대에는 사람들이 멸망 당하지 아니 하려고 해도 하나님이 멸망 시켰도 노아 식구만 구원 시켰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멸망 시키고져 하시면 멸망을 받아야 하고 구원 시키고져 하실 때 구원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이 실패케 하시거든 실패해야 하고 하나님이 가난케 하시면 가난해야 하고 하나님이 천하게 하시거든 천해져야 한다. 이것이 진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받지 아니 할려고 하면 악이라 배나 당한다. 그리고 구원 시킬려고 하실 때에 구원 받지 않을려고 하는 것도 악이다. 망하지 아니 할 것을 진리가 천하게 한다고 하면 진리가 천하고 거짓이다. 이는 진리가 아니라 악이요, 불의다. 멸망 될 것은 멸망되고 천하게 될 것은 천하게 된다. 그리고 귀하게 될 것은 귀하게 된다. 망하지 아니할 것을 망하게 하는 법이 없고 망하는 것을 망하지 않게 하는 법이 없다. 망할 것은 망한다. 흥할 것은 흥하고 망할 것은 망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망하게 하시는데 사람은 흥하려 하고 하나님은 흥하게 하시는데 사람은 흥하지 아니할려고 한다. 그 당시에 사람들은 하나님이 멸하시고져 하는데 멸하여지지 않을려고 힘을 쓴다. 어떻게 힘을 썼는가? 탑을 쌓는 것으로 힘을 썼다. 하나님은 구원하지 않을려고 하는데 그들은 구원을 얻을려고 하며 멸망 하지 않고 이름을 내고 단합이 될려고 탑을 쌓고 역청을 발랐다. 이 일이 물리에 맞고 인간이 서로 살자고 하니 인간 이치에도 맞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에만 틀렸다. 고장은 진리에 있었다. 고장이 생긴 거기에는 방비하지 않고 다른 곳에 와서 해 볼려고 하니 이것이 멸망을 끌고 왔다. 하나님을 대적해서 싸워 보았지마는 깨여지기는 그들이였다. 멸망을 받아야 할 때는 받아야 할 것이요. 받는 것을 좋아해야 한다. 자기가 멸망할 처지에 있을 때에 좋아하여 멸망을 받아야 하고 구원 받을 처지에 있을 때에 좋아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멸망 받을 처지에 있을 때에 멸망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멸망을 없애는 것이요. 구원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요. 자기가 구원 받을 처지에 있을 때에 구원 받는 것을 좋아하는 것은 구원을 이루는 것이다. 이것들이 시발되는 것은 진리에서다. 하나님은 진리에서 해결을 지우면 인간 이치에서 해결되어 맞고 그 다음에는 물리에서 해결되어 물리에 맞게 된다. 물리에서 인간 이치로, 인간 이치에서 하나님의 진리로 올라가는 것은 천하 장사라도 안된다. 그 당시에 사람은 인간 이치에서 시작하여 물리로 내려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대적하시니 성사가 되지 않고 멸망을 당한 것이다. 물리에서 시작하는 사람이 제일 천한 사람이요. 그 보다 나온 사람은 인간 이치에서 시작하는 사람이요. 모든 일을 하나님의 이치, 진리에서 시작하는 사람이 제일이다. "이 일은 하나님의 뜻에 맞나, 안맞나"하여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사람이 제일 귀하다. 상업을 하는데도 하나님의 축복을 먼저 바라보고 그 다음에 사람을 포옹 하는데로 나가야 하고 그 다음에 수입을 많게 하는 가격으로 나가야 한다. 어떤 사람이 매장염을 앓는데 어떤 의사든지 수술만 잘해 달라고 하여 수술에만 중요성을 가지면 물리에 치중하는 사람이요. 의사에 치중하면 인간 이치에 치중하는 사람이요. 이 수술은 하나님께서 잘해 주셔야지, 의사 선택도 수술시나 수술 후의 경과도 하나님이 잘해 주셔야지 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 진리에 맞게 치중하는 사람이다.



[ 12장 1절 ~ 14장 24절 ] 아브라함과 롯
'아브라함과 롯의 신앙출발과 시험'
아브라함과 롯의 신앙출발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기와 자기 자손의 축복을 바라보면서 본토와 친척, 아내, 집을 버리고 출발했다. 이렇게 출발한 그들에게 시험이 왔다. 세 가지 시험이 왔다. 경제적인 궁핍으로 인한 시험, 경제적인 풍부로 인한 시험, 윤리적인 시험과 권세로 인한 시험이 왔다. 처음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소망을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본토와 친척, 아비집을 버리는 이 세 가지 요소로 출발했다. 오늘 우리도 신앙출발을 이렇게 해야한다. 신앙출발을 한 아브라함이 벧엘에 와서 살 때, 하나님이 가난으로 시험하셨다. 벧엘에 흉년이 들게 하여 가난이 오게하셨다. 이 시험에 낙제했다. 가난을 이기지 못하여 애굽에 내려갔다가 회개하고 벧엘로 올라오니 부자가 되었다. 이제는 하나님이 부요를 가지고 시험을 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이겼다. 우리는 신앙걸음을 걸어가면 처음에는 가난을 받으나 나중에는 부자가 되게하여 가지고 이 부요로 시험하신다. 벧엘에서 부요를 가지고 하나님이 시험하실 때, 아브라함이 이기고 나니 이제는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재물을 많이 주셨는데, 이 재물을 지키는 사람이 318명이나 되었다. 이후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윤리적인 시험을 했다. 소돔 성에 살고 있던 롯이 소돔 사람들과 함께 4대 강국에게 포로가 되었다. 아브라함이 옷을 구원하려고 하면 4대 강국과 싸워서 이겨야 한다. 그렇게 하려고 하면 자기와 전 가족의 생명을 내어놓아야 한다. 이것이 윤리적인 시험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 친족들이 잠시 멸시하고 배반한다. 어떤 때는 원수처럼 대적도 한다. 이때 우리가 잘못하면 그들을 원수시 하기 쉽고 복수심이 일어나기 쉽다. 그래서 그들이 어려움을 당하여 우리에게 구원을 요청하면 거절하기 쉽고 또 구원한다고 해도 자기 몸같이 구원하기가 심히 어렵다. 이것이 윤리적인 시험이다. 아브라함에게 가난의 시험이 왔을 때에 이 가난을 피하여 간 것이 실패인줄 알고 가난을 스스로 취하므로 승리했고 또 아브라함이 벧엘에서 부요할 때에 하나님이 그 부요를 가지고 시험하셨는데, 아브라함은 주를 위하여 자기의 모든 부요를 포기함으로 그 시험을 승히했고 윤리의 시험이 올 때 자기의 의사를 세우지 않고 상대방의 의사를 죄가 되지않고 한계를 벗어나지 않는 한 높였다. 상대방을 자기처럼 사랑하므로 이 윤리적인 시험을 이겼다. 이후에는 권세시험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부권을 주셨고 318명이란 큰 집안의 군대를 양성하여 4대 강국을 물리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 권세를 하나님 위해서 쓰겠느냐, 너를 위해서 쓰겠느냐? 하는 시험이 권세시험이다. 아브라함이 롯의 포로됨을 알고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4대 강국을 격멸하고 빼앗긴 재물로 찾아가지고 돌아올 때에 처음에 멜기세덱이 나와서 아브라함을 영접할 때에 교만하지 않고 하나님이 4대 강국을 자기 손에 붙여주심을 믿고 겸손하게 십일조를 드렸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권세를 주신 후에, 이 권세가 누구의 권세임을 밝히실 때에 아브라함은 십일조를 드림으로 하나님이 주신 권세임을 밝혔다. 자기에게 주신 권세가 하나님의 주신 권세임을 십일조를 증표로 드렸다. 그다음에 소돔 왕이 나타나서 "재물은 다 가지고 사람을 자기에게 돌려달라"고 말을 했는데 이것은 재산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 하는 권세의 시험이었다. 하나님께서 권세를 아브라함에게 주셨는데 그의 재산을 취하면 자기는 좋으나 하나님께는 영광이 없음을 알고 "신들매 한 개도 가지지 않겠다"고 하면서 물리쳤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방패와 상급이 되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처음에 하나님은 버리라고 하시고 버리니 주신다. 또 주신 것을 주님을 위해서 내어놓을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방패로, 상급으로, 영광이 되게 하셨고 아들 이삭을 주셨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가난으로 인한 시험을 피하려고 하다가 하나님께 책망을 받은 후에 가난을 자취하므로 그 시험을 이겼고 부요로 인한 시험은 물질보다 사람을 귀중히 여겨 물질을 포기하므로 이겼고 윤리적인 시험은 형제를 내 몸같이 사랑하므로 이겼고 권세의 시험은 권세의 주인을 밝힘으로 이겼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권세임을 밝힘으로 이겼다. 이렇게 시험에 이기고 나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삭을 주셨으니 이 이삭은 만민의 구주의 씨요, 구원의 씨다.

12:-14: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만드는 자이지만 거기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은혜로 부르셨다
12:1- 이하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계약을 선포하시고 아브라함은 순종했다. 믿는자는 계약이행해야 약속한 복을 받을수 있다
자연계시시대[양심시대]-율법시대-복음시대
여호와는 제이위 성자이다
아브라함이 순종하여 처음 경제궁핍의 시험을 받았고 그 뒤에는 부요의 시험을 받았다
처음엔 가난을 피하여 실패했지만 회개하고 난 그이후에는 가난으로 가난을 이겨 더욱 부요하여졌다.  물질보다 사람을 더 귀히 여겼다.
믿음의 방편으로 가지지 아니한 친척 재물을 믿음으로 다 버리니 새로운 더 좋은 것으로 바꾸어 더하여 주셨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하는 것으로 행복을 삼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알려주셨고 천사를 심부름 시키는 자가 되었다. 롯은 가족 기뻐하는 것으로 행복을 삼았다. 그러므로 롯은 세상살이에 취하여 자기처소가 멸망에 가득차 있는 것을 몰랐다.
롯을 구출하는 것은 기독교는 무저항주의가 아니라 죄와 마귀에 대해서 저항주의인 것을 나타낸다.  기독교는 먼저 율법으로 처리하고 다음에 사랑으로 구원해야한다[율법으로 하나님이 죄를 우리에게 알게한후에 예수의 대속을 입혔다]
4왕을 이긴후에 권세 영광 물질 시험에서 이김으로 하나님께서 방패와 상급이 되어 주셨다

12:1-20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다. 믿는 사람은 아브라함 자손이다. 이는 혈통적인 자손이 아니고 신앙적으로 자손이 된 것을 말한다. 아브라함이 우리의 조상이 된 것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이 우리에게 비추어 와서 그 약속에 우리가 동참하는 것도 있지마는 아브라함의 신앙을 모형해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해야 하기 떄문에 우리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한다. 아브라함의 신앙전기는 창 12:1-25장에 기록되어 있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을 만들어서 파는 사람이라고 한다. 이 시간에는 아브라함에게 대하여 간단히 말씀드리겠다.
①. 창 12:1-4절에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서 "너는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다. 이 명령을 받은 아브라함은 즉시 떠났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 가졌던 자기 소유, 지방적인 정실, 혈통적인 정실, 이것보다 하나님의 축복과 하나님의 명령에 더 애착을 두었고 하나님에게 더 애착을 두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진리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지방적인 정실이나 혈통적인 정실이나 자기의 모든 소유보다 하나님과 명령과 하나님의 축복을 더 크게 여겼다. 이것이 첫 출발이다. 하나님의 명령과 축복에게 더 애착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첫 명령에 순종하여 승리하고 나니까 두가지 축복이 왔다.
  ⓐ. 창 12:17-20절에 영적 축복이 왔다. 애굽에서 죄중에 빠져 있을 때에 하나님이 지켜 주셔서 범죄치 않게 하시고 성결케 해 주신 것이다. 이 영적인 축복은 하늘나라에 바로 들어 간다. 이는 영원하다.
  ⓑ. 창 13:1-6절에 육적 축복이 왔다. 한 지방에 두 가족이 살 수 없을 만큼 부요가 왔다. 물질 축복이 왔다. 그러나 이 육적 축복은 시험을 통과하여 하늘 나라에 가지고 간다. 막 바로 천국에 가지고 가지 못한다. 한번 시험을 통과하고 천국에 가지고 가는 것이다.
②. 창 13:7-13절에 이렇게 물질 축복을 받으니 시험이 왔다. 물질이냐, 윤리냐, 물질이냐, 사람이냐, 물질이냐, 하나님이냐 하는 시험이였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물질을 취하면 조카 롯과 원수가 되고 하나님은 섭섭해 하시고 물질을 포기하면 하나님과 롯을 잡으면 가정에 곤란이 오고 경제에 타격이 오고 재물에 곤란이 온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의 길을 걷지 아니하고 사람을 취하는 길,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이 기쁘하시는 길을 취했다. 하나님과 롯 때문에 받은 물질 축복이 절단나게 되었다. 이래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롯을 취했다. 이렇게 시험을 통과하고 나니까 두가지 축복이 왔다.  
  ⓐ. 창 13:14-17절에 영적 축복이 왔다. 아브라함에게 속한 모든 사람이 의롭게 되었다.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면 이삭과 같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아내를 위해서 기도하면 사라같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고 종을 위해서 기도하면 아브라함의 종과 같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리 만큼 자기에게 속한 사람들이 의롭게 되었다.
  ⓑ. 창 14:13-16절에 육적 축복이 왔다. 사병 318명이 지켜야 할 만큼 큰 재벌이 되었다. 그 위에 권세가 왔다. 5대 강국을 격파한 4대 강국을 멸하는 권세가 왔다. 여기에는 시험이 온다.
③. 이렇게 권세의 축복이 오니 시험이 왔다. (창 14: 2-24) 소돔 왕이 와서 시험한 것이다. 하나님이 축복으로 주신 권세를 자기와 자기 재물을 위해 쓰겠느냐, 권세를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과 권능을 위해서 쓰겠느냐 하는 시험이였다. 이때에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권능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축복으로 받은 권세를 희생했다. 이렇게 시험을 승리로 통과하니 두가지 축복이 왔다. 영적 축복과 육적 축복이 왔다. 영적 축복은 천국에 바로 들어간다.  
**********************************************************************
12:1-20
사람은 두 종류로 나눈다. 하나님의 택하신 종류와 하나님의 택하신 밖에 있는 종류다. 영원전 하나님이 홀로 계실때에 하나님의 의지 안에서 하나님의 목적을 세우시고 그 목적 안에서 택함을 받은 사람으로서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육성시키기 위하여 창조 하시고 섭리하신다. 또 이 목적 밖에서 창조함을 받은 사람도 있으니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서 창조했다. 이 사람은 나기 전에 지옥으로 가기고 선택된 것이다. 사람은 출생 전에 하나는 하나님의 작정으로 천국에 가게 되고 하나는 하나님의 작정을 지옥에 가게 된다. 택자는 하나님이 구속을 입히시고 중생 시키고 성화 시킨다. 이 일을 위하여 이용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을 유기자라, 불택자라고 한다. 이 사람들은 출생하기 전에 그렇게 된 것이다. 토기장이가 질 그릇을 자기 마음대로 만듬과 같이 하나님이 당신 목적을 세우시고 이 목적을 달성 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도 있고 이 목적 안에서 당신과 같은 인격자로 육성 시키는 사람도 있다. 선택 안에서 창조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게 되고 선택 밖에서 창조함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을 믿지 못하게 된다. 아무리 예수님을 믿을려고 해도 믿지 못하게 된다. 본문에 보면 택자 중에도 두 종류의 사람이 있는 것 보인다.
12:1-9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종전인인관계, 사물관계를 끊고 내가 말하는 성경이 말하는 인인관계, 사물관계를 가지라"고 했다. 종전 인인관계, 사물관계를 가지면 절단이 난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명령 하신대로 하나님이 지시하는 곳으로 갔다. "본토"는 사물관계를 말하고 "아비와 친척"은 인인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인인관계와 사물관계를 하나님 말씀대로 가져야 한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가졌다. 12:10-20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아이라는 곳에 인도하여 놓고 얼마동안 나타나지 아니했다. 또 그곳에 기근이 들어서 아브라함이 차차 내려간 것이 애굽에 까지 가게 되었다. 이 애굽에 가는 것은 하나님이 거기에 가라고 지시하신 것이 아니다. 이렇게 아브라함과 아내가 의논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받아서 나왔지마는 벧엘에서 경제적인 타격을 크게 받은 것을 알 수가 있다. 애정적인 문제 보다 생의 애착이 더욱 강해서 아내를 빼앗긴 각오를 하고 경제적인 어려움을 해결 하려고 했다.
13:1-13절에 애굽에서 회개하고 애굽에서 벧엘로 올라 왔다. 양을 먹이면서 올라오니까 애굽에서 벧엘까지 오는데에는 몇 해가 걸렸을 것이다. 애굽에서 양식을 얻어 배를 채우고 보니 정신이 돌아와서 애굽에 내려간 것이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순종한 것이 아닌 줄 알고 애굽에서 올라온 것이다. 이렇게 회개하고 벧엘로 올라오니 하나님이 경제적인 축복을 하셨는데 한 지방이 비좁아서 숙질간에 서로 다투게까지 경제적으로 부요했다. 그래서 가족회의를 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따랐고 롯은 자기 생각대로 따랐다. 롯은 소돔을 택했다. 가나안은 1년에 비가 두번 밖에 오지 아니하니 초장이 없어 짐승을 먹일 수가 없고 시골이라서 자녀 교육도 할 수 없는 곳이기 때문에 경제적인 문제가 제일이라 하여 소돔을 택했다. 롯도 의인인데 삼촌 아브라함에게 좋은 곳을 양보하고 아브라함 시키는대로 할려고 했으나 아내와 자녀와 수하사람을 이기지 못해서 소돔을 택했으니 사람을 이기지 못하는 의인이였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처음 부터 발족한 것은 하나님 한 분만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소망했기 때문에 사람의 도움이나 문화의 혜택이나 경제적인 혜택을 바라지 아니 했으므로 자산인 가나안을 택했으니 아브라함은 외유내강한 의인이요, 옳은 것이면 아내나 자녀나 수하사람이 무어라고 해도 듣지 아니했다. 하나님의 뜻이면 그대로 밀고 나갔다.
13:14-18절에 이렇게 롯이 떠난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찾아왔다. 이전에 땅에 것을 보고 따라간 것을 회개하고 이제는 땅의 것을 바라보지 아니하려고 작정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찾아 오셔서 아브라함을 높은 곳에 세워서 눈에 보이는 것, 또 멀리 데리고 다니면서 걸어온 곳, 발로 밟은 곳을 영원히 네와 네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했다.
14:1-24절에 하나님이 약속하신대로 아브라함에게 축복했기 때문에 아브라함 집에서 재산을 지키는 군인이 318명이나 되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아브라함 단독으로 문화시설을 했고 정치시설을 했고 경제건설을 했다. 5대 강국이 이기지 못한 전쟁에서 아브라함은 4대 강국을 이기고 롯을 구원했고 소돔성 백성을 구원했고 많은 전략물을 취했다.. 아브라함이 개선 할때에 살렘왕 멜기세덱에게 십일조를 드렸고 소돔왕이 와서 "백성은 나에게 주시고 물품은 취하시요" 할 때에 아브라함은 "내가 소돔왕으로 인하여 부자가 되었다고 할 것이니 신들메 한 개라도 가지지 아니하겠다."고 하면서 아무 것도 가지지 않고 소돔왕에게 주었다. 아브라함은 순전히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살려고 했고 신앙 양심으로 살려고 했지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 아니할 것, 신앙 양심에 배치가 되는 것을 취하지 아니했다. 신앙 양심에 배치가 되는 것은 신들메 한개라도 취하여 가지지 아니했고 하나님의 영광에 손해가 가는 것은 실낟끈 한개라도 취하니 아니했다. 전부를 집어 던졌다.
15:1-7절에 이렇게 한개라도 취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신앙양심대로 살고 하나님을 전부로 삼으니 하나님이 찾아 오셨다. "네가 하나님을 전부로 삼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니 나도 네게 대해서 네 방패와 상급이 되겠다."고 약속하셨다. 네가 나를 전적 의지하니 내가 너의 방패가 되어 너를 해하는 원수를 내가 원수로 삼아 싸워 주겠고 네가 나를 너의 전부로 삼으니 내가 너의 전부가 되어 너를 전적 책임지겠다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했다.
16:1-38절에 깨달음이 앞선자가 깨달음이 뒷선자에게 추종하면 둘다 망한다. 롯이 아내의 말을 제일 많이 추종 했기 떄문에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는 "야라진" 보응을 받았고 그 다음에는 딸, 그 다음에는 하인, 그 다음에는 물질이였다. 하나님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혈육정실, 물질과 사욕을 따라가면 그 결과가 비참하게 된다. 롯은 자기와 가족이 비참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혈육정실, 물질에게 꺾이지 아니했으니 아내는 만고의 여인 표본이 되었고 아들 이삭은 만고의 효자상, 성자상이 되었다. 이들의 영광이 가면 갈수록 더 크고 죽을 때는 더 크고 심판대에서는 더 크고 영원한 나라에서는 더욱더 클 것이다. 그러므로 어느 걸음을 걸을 것인가! 아브라함의 걸음이냐 롯의 걸음이냐 아브라함은 심심산골에서 성자를 길렀고, 롯은 문화도시에서 악녀를 길렸던 것이다.

12:1-3
성경은 66권이다. 구약 성경은 처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약 하신 말씀이고  신약 성경은 구약에 첨부하여 계약을 새롭게 하신 말씀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경에 합치된 것을 취하고 성경에 배치가 되는 것은 버리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이니 예수님 믿는 이치는 성경에서 많이 배워야 한다. 세상에서 유력한 인물이라고해서 거기에 예수님 믿는 이치가 있는 것이 아니고 성경에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 빋는 힘은 성경에 있는 이치를 깨달음에서 얻어지는 힘이다. 이 시간에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말하겠다. 우리의 목적은 하늘 나라인데 이 세상에서 살면서 천국을 이루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천국을 위해서 있는 것이다. 세상은 천국을 연습하고 준비하는 곳이요. 천국을 배우는 곳이다. 세상을 가져야 천국을 가질 수가 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천국과 세상을 취했는지 이것을 이 시간에 살펴 보기로 하겠다. 여기에 보면 "본토 아비 친척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명령 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즉시 떠났다. 이렇게 아브라함이 떠날 때에 하나님이 함께 하여 주시고 인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명령대로 자기가 가진 것을 버려야 얻는다. 그러면 내어 놓을 것은 어떤 것인가?
잘못된 것과 가치가 적은 것이다. 본문에는 본토와 아비, 친척이다. 본토는 우상을 섬기는 지방이요. 친척과 아비는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다. 전설에 의하면 아브라함의 아버지는 우상장사를 했다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런 곳에서 떠나라"고 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지체하지 아니했다. 즉시 순종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지체하지 않고 즉시 순종하니 하나님께서는 애굽왕의 권세에게 눌려서 죄를 범하게 될 때에 하나님이 보호해서 범죄치 않게 했다. 성결생활을 하게 했다. 또 재산을 많이 주셔서 거부가 되게 하시고 강하고 큰 권세를 주신 것이다. 이런 원리와 순서로 되지 아니한 것은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온 것이 아니니 절도요, 강도라" 자기에게 재물이나 권세가 오면 온 것 만큼 자기를 해치고 망친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서 그대로 순종하여 본토를 떠나니 경제적인 타격이요, 아비집을 떠나니 인격적으로 타격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서슴없이 떠났다. 떠나 하나님의 명령대로 행하고 보니 인격적으로는 일국의 대왕 된 바로에게 큰 대접을 받았고 자기가 거느린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대우를 받았다. 경제적으로는 롯과 시비가 날 만큼 부자가 되었고 자기 집 재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사병 318명을 둘 정도로 거부가 되었고 권세적으로는 5대 연합국이 이기지 못한 4대 강국을 아브라함 식구들만으로 이기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토를 떠나야 한다. 내가 났고 자랐고 지위를 가진 곳을 떠나라고 하실 때에 떠나야 한다. 내가 관계한 가정, 사회, 국가도 하나님이 떠나라고 하시면 떠나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다가 깨여질까 두려워하지 말고 그대로 나가야 한다. 이런 사람들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니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떠나라고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두려워 하지 말고 떠나야 한다. 명령하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책임지신다. 하나님이 책임지시기 때문에 명령 하시는 것이다. 아브라함은 이것을 믿고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했다. 히 11:8절에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차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갔다"고 말씀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명령에 즉시 순종하는 자가 되자.



1997년 10월 19일 주일 오전, 오후,  10/20-22 새벽 설교
본문: 창세기 14:22-15:1

* 아브라함은 보이는 세상것 보다 ->하나님의 축복을 더 귀중히 여겼고
  하나님의 축복 보다 -> 하나님을 더 귀중히 여겼다

*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많이 축복을 받아도  만족하지 않고, 그 이면에 항상 더 큰것인 하나님을 차지하는 것에 전 마음이 기울어져 있었다

*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자기의 전부가 되었고 생명이 되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순종하여 받은 축복은 ①세상축복과② 하늘에 속한 신령한 구원의 축복을 같이 충만히 받았다                    
아브라함은 하늘에 속한 신령한 축복인 진리의 깨달음과 진리의 행위의 축복을 자기를 위해 쓰지 않고 -하나님을 위하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을 차지하는 데에만 썻다

예수님 당시 외식하는 서기관 바리새인들 같이 하나님 말씀과 신앙행위를 자기들을 위해 마련하고 쓰는, 즉  자기 안에 하나님은 모시지 않은 외식의 자기중심의 신앙행위를 하지 않고, 하나님을 모시고 하나님의 것 되어지는 즉 하나님에게 그의 전마음은 기울어져서 사는 진실한  성도의 신앙행위를 했다

아브라함과 같은 이런자에게 주님의  마음은 다 쏟아진다
아브라함의 자손된 이삭, 야곱도 아브라함과 같이 주님 당신을 주님의 축복보다 더 귀중히 여기는 신앙생활을 하였으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 일컬음을 자랑스럽게 여기신다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다

* 이런 진실한 성도, 곧 아브라함과 같이 전 마음이 주님께만 기울어진 성도는
생각, 소원, 행위가 다 주님을 표준하여 살기 때문에 자기는 도무지 생각지 않고
주님이 인정하실까, 기뻐하실까, 주님에게 영광이 돌아갈까,
또 주님이 안타까와 하실까, 염려하실까, 섭섭해 하실까, 노하실까, 주님에게 욕이 돌아가지 안을까 생각하며 소원도하고 행위를 하는 사람인 것이다
이런자에게 주님은 (창 15: 1)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주겠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렇지 않고 자기의 전 마음이 자기에게만 기울어진  사람은  주님은 도무지 생각지 않고  자기만을 표준하여 생각하고 소원하고 행동을 한다
이런자는 무능한 자기가 자기를 책임져야 하니 무능하고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한자가 되어 스스로 고통을 당한다

조심할것은
복은 주님만이 만들 수 있고 주실수 있지
어떤 피조물이나 사람도 복을 만들수가 없고 복을 가질수도 없고 복을 줄수도 없다  

복은 주실 때 기회를 놓치지 말고 받아야지
내가 시기 장소 방편을 정해놓고 힘쓰면 복을 만들든지, 받아 가질수 있다고 잘못 생각하면 않된다    복을 받는 시기 장소 방편도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이 주시는 데로 따라 나가야 한다

*성도가 주님의 인도를 따라 나갈때에 주님과 자기와 일치되는 것은 -> 다시 더 굳게 하실려고 주는 현실이요,   배치되는 것은 -> 고쳐서 주님과 같게 할려고 주시는 현실이다

주님과 성도가 배치 되는 것은  다 성도인 우리가 틀린 것이다
이 틀린 지식, 행위, 사람이 현실에서 우리가 고통을 당하는 데, 빨리 고쳐야  현실에서 평안하고 기쁘게 살며 능력있게 살수 있다
이 틀린것을 고치는데는  잠시의 수술의 고통이 있다

*이렇게 주님 당신을 귀중히 여김을 마음을 주님께 다 쏟는 성도에게  참된 믿음의 후사를 주신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혈육에서 예수그리스도가 나왔고, 모든 성도를 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자손으로 주셨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아가서의 술람미 여인이 솔로몬 왕과의 긴밀한 사랑의 관계와 같이
나와 주님과의 긴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는 것은
아브라함 같이 평소 현실에서 긴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고, 또 준비하여  
환난의 현실에서 더욱 더 긴밀한 사랑의 관계를 맺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가서에   성도가 주님에게 대하여  
아가  2 장
5  너희는 건포도로 내 힘을 돕고 사과로 나를 시원케 하라 내가 사랑하므로 병이 났음이니라
6  그가 왼손으로 내 머리에 베게 하고 오른손으로 나를 안는구나
7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노루와 들사슴으로 너희에게 부탁한다 내 사랑이 원하기 전에는 흔들지 말고 깨우지 말지니라

아가  5 장
10  나의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만 사람에 뛰어난다
아가  8 장
7  이 사랑은 많은 물이 꺼치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엄몰하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위의 성구와 같이 성도가 주님을 긴밀히 사랑하니까

주님은  이런 성도에게
                                      아가 4 장        
1  내 사랑 너는 어여쁘고도 어여쁘다 너울 속에 있는 네 눈이 비둘기 같고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 기슭에 누운 무리 염소 같구나
9  나의 누이 나의 신부야 네가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네 눈으로 한 번 보는 것과 네 목의 구슬 한 꿰미로 내 마음을 빼앗았구나
위의 성구와 같이  주님의 마음을 다 빼앗겼다고 말씀 하신 것이다


14:17-15:1
아브라함이 4대 강국을 이기고 돌아 올 때에 된 사실인데 이것은 우리가 잘 아는 사실이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소돔성에서 살았고 소돔왕은 위대한 5개 왕과 그돌라오멜을 위시한 4개왕이 연맹전을 했는데 소돔왕 편이 패전하고 소돔성이 빼앗기고 성민도 포로되고 롯도 포로 되어갔다. 이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이 자기 집에서 자기집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서 기룬 사람 318명을 거느리고 가서 4대왕을 격파하고 포로들도 구원하고 재물도 찾고 롯도 구원하여 돌아 왔다. 이기고 돌아 오는 길에서 된 일이 본문에 기록된 것이다. 이 시간에는 아브라함과 롯에 대해서 간단하게 증거하겠다. 이 두 사람은 어떤 인물인가?
①. 아브라함이 자기 본토에서 조카 롯을 데리고 하나님의 인도 하시는대로 따라서 나왔다. 벧엘에 와서 있는데 흉년이 들어서 이것을 피하여 가다가 보니 애굽에 까지 가게 되었고 거기서 자기와 자기 가정에 위기를 만났다. 여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위기를 면하고 애굽에 내려온 것을 회개하고 전에 자기가 머문 멛엘을 향해서 올라간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머물라고 하신 곳을 떠나서 애굽으로 가니까 큰 위험이 있었고 그곳에서 회개하여 돌아오니 거기에서도 하나님이 축복하여 부요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곳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함께 머물수가 없어서 목자끼리 시비가 일어났다. 아브라함이 롯과 의논했다. 롯은 얻은바 재물과 사람을 생각하여 소돔들을 얻어야 자기의 재물이 잘 되겠고 자기식구들이 잘 되겠다고 생각되어서 서덤들을 택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롯과 시비하면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 아니하고 하나님이 섭섭해 하실 것 같아서 자기가 가진 재물과 자기 사람을 버리다 싶이했다. 가나안은 일년에 비가 두어번 밖에 오지 아니하는 곳이라 풀이 없는 자산이요. 첩첩산중이요, 미개지다. 자녀 교육을 시킬 수 없는 산골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위하여 자기가 얻은 재물과 사람을 희생시켰고 롯은 하나님이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자기가 얻은 재물과 자기 식구와 종업원에게 유리한 편을 택했다. 그 결과가 여기에 나타났다. 롯의 결과는 재물도 사람도 없어진 것을 성경은 말해주고 있다. 자기가 아끼던 혈통가지도 종업원도 재물도 절단났다. 자녀의 출세를 위해서 그때에 교육도시요, 문화도시인 소돔성을 택했는데 출세는 커녕 만고의 수치의 조상이 되었고 자기의 재물을 위해서 여호와의 동산 같이 보이던 소돔들을 취했으나 재물은 절단나고 단벌 입은 옷으로 소알에 도망친 것이됴,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위해서 손해보고 내어 놓는 일에 축복하신다. 하나님을 위해서 내어 놓아야 할 때에 내어 놓지 아니하면 하나님은 멸하신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하나님 보다 앞서 생각한 사람도 소유도 실패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생각하다가 보니까 자기의 소유와 사람이 희생이 되고 손해가 되어도 하나님을 섭섭하게 할 수가 없어서 하나님을 위해서 전부 내어 놓았다. 자기가 가진 것이 손해가 되어도 하나님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면 이것을 단행했다. 이렇게 단행하면 짐승은 풀이 없어서 다 죽이는 줄 알았는데 가나안에 초장이 생겼다. 사 49:9 하반절에 "자산에도 푸른 초장이 있다"고 이사야가 아브라함을 연상해서 이 말씀을 기록한 것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생각하여 자기의 소유와 자기 사람을 희생했다. 그래서 거기서 하나님의 축복으로 거부가 되었다. 자기의 가정과 재산을 지키는 사람이 318명이나 되었다. 뿐만 아니라 자기 아내는 벧전 3:5-6절 말씀하신대로 만고에 여성의 표본 인물이 되었고 아들 이삭은 성자가 되었고 자기집 하인들도 하나님을 공경하는 충성한 종들이 되었다. (창 24:12-14, 34-44, 48-49, 52-56) 하나님을 위해서 자기를 손해 본 것을 하나님이 모른척 하고 계시지 않고 거기에 대한 상당한 보상을 하신다. 막 10:30절에도 "주와 복음을 위해서 집이나 전토나 부모나 형제나 자식을 버린자는 100배나 받는다"고 말씀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시다.
②. 아브라함이 4대 강국을 이기고 빼앗겼던 재물과 사람을 다 찾아 가지고 돌아오니 소돔왕이 영접하면서 말하기를 "사람은 내게 돌려 주고 재물은 아브라함이 전부 가지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아브라함은 거절했다. 실낟끈 한개도 취하지 않고 ㄷ로려 주었다. 아브라함이 전쟁에서 승리해서 얻은 전리품이기 때문에 으례히 아브라함이 차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소돔왕이 "가지라 가지지 말라"말할 것 없이 아브라함의 소유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것을 차지하면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지 않고 하나님에게 영광이 되지 아니하는 그면을 알고 아낌없이 재물을 내어 놓았다. "소돔왕 네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부자 된 것은 하나님으로 된 것이 아니고 내가 주어서 아브라함이 부자가 되었다고 말할 것이니 나는 소돔왕 네게 속한 것은 구두끈 한개라도 가지지 않겠다"고 하면서 당장에 거절했다. 생명을 걸고 생사를 초월해서 싸워서 얻은 그것을 하나님을 생각하여 희생했다. 그 후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아브라함아 네가 고전 분투해서 생사를 걸어놓고 싸운 전투에서 얻은 것을 나 위해 내어 놓았으니 내가 이제 너 한테 갚아 줄 것은 이제 후로는 내가 네 방패가 되고 네 상급이 되어주마 네 원수를 내가 막아주고 내가 싸워서 너로 상하지 않게 하겠고 내가 너의 전부가 되어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우리는 여기서 주를 위해서 손해 보고 희생한 것을 하나님이 어떻게 갚아 주시는 것을 알 수가 있고 또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을 희생시킨자의 결과가 어떠 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이든지 주를 위해서 손해 본것을 주님은 그대로 두시는 몰인정하고 도의 없고 체면 없는 분이 아니신 것을 명심해야 한다. 제믈이나 지위나 권세나 명예로 희생 했으면 재물이나 지위나 권세나 명예도 갚아 주신다.
③.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차지한 것과 하나님을 차지 할 것을 생각해서 모든 일을 해야 한다. 사건마다 하나님 없이 진리를 거슬려서 역리로 무엇을 차지 할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 진리를 거슬려서 자기 스스로 차지하면 멸망이요. 진리대로 행하는 순리로 무엇을 차지 했으면 넘치고 견고하다. 하나님과 진리로 인해서 차지한 것은 견고하다. 그러므로 내가 당하는 일에는 그 일에서 내가 하나님을 차지 하느냐 하나님을 잊어 버리느냐가 달려있다. 사건마다 이것이 달려있다. 이기선 목사님이 평양에서 산정현교회에 분쟁이 생겼을 때에 교회를 내어 주고 하나님을 차지 한다고 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든지 그 일에는 진리대로 행하는 것이 있고 진리를 거슬리는 것이 있다. 또 그 일에는 하나님을 차지하느냐 하나님을 잊어 버리느냐가 달려 있다. 우리는 이 시간에 아브라함과 롯에게서 자기와 자기 재물과 자기 사람의 유익을 위해서 하나님이 섭섭해 하시는 그 길을 가는 자의 결말이 어떠함과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자기와 자기 소유와 자기 사람을 희생한 자의 결말이 어떠한 것을 알아야 한다. 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자기가 생사를 걸어 놓고 투쟁해서 얻은 소유를 희생하면 하나님은 이것을 매정하게 모른척 하지 않고 거기에 상당한 보상을 하시는 것을 알아야 한다. (사 41:15) 또 사건마다 거기에는 하나님을 위하느냐 하나님을 버리느냐가 달려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 소유를 취득함에 있어서 진리를 거슬리므로 자기 스스로 취하는 길이 있고 진리대로 행하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취하는 길이 있으니 역리로 취하면 멸망이요, 순리로 취하면 더욱 견고해지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 15:1~17:27 ]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약속
⑴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령대로 믿기 전에 안 믿는 법대로 사귀었던 친척과 머물었던 처소를 순종으로 전부 버렸을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성경과 재산을 주신 것이다. (애굽에서 사라를 지키시고 벧엘에서 부자가 되게 하신 것이다.)
⑵ 하나님의 계명에 순종함에 있어서 거치는 자연은총을 버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중심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성화의 권세를 주셨고
⑶ 하나님의 영광을 들어내고 하나님의 영광을 높임에 있어서 거치는 재물을 버리고 자기를 돌보지 아니할 때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방패가 되시고 지극히 크신 상급이 되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원하고 자기를 버렸으므로 이렇게 크신 약속을 하시고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어 주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되시는 이런 위치를 가졌을 때에 천하만민을 구원할 수 있는 구원과 복의 기관으로 인정하시고 만민의 구주인 구원의 씨를 약속으로 허락하신 것이다.
⑷ 하나님의 하시는 일은 공중 누각처럼 일을 하시지 않는다. 오래전부터 계획하시고 계획하신대로 질서있게 모든 면에 구비하게 일을 하신다. 그러므로 이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면 내 인격과 생활이 정리되고 정돈되고 갖추어져야 계명을 지킬 수가 있다. 담대해 질려고 하면 오랫동안 화평을 다 이루고 내가 희생할 것을 하고 나면 담대해진다. 아브라함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었으므로 아브라함의 대적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아브라함의 원수는 하나님의 원수요, 아브라함의 인격과 하나님의 인격이 동질의 인격이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소망이 아브라함의 소망이요, 하나님의 소원이 아브라함이 소원이었다. 이는 아브라함이 그렇게 될 수 있는 자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진리가 줄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이 주시지 못한다. 하나님은 진리시다.

15:1
아브라함이 4대 연합국과 싸워서 이기고 돌아 올때에 재물과 사람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처리했다. 그래서 하나님이 "내가 네 방패와 상급이 되겠다"고 말씀 하신 것이다. 이 시간에 우리가 배울 것은 어떤 것인가? 무슨 일이든지 간에 사람과 내가 관계를 가질 때에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상대방의 하나님이 되시든지 한다. 또 내 하나님도 되시지 않고 상대방의 하나님도 되시지 않는다. 또 내 하나님도 되시고 상대방의 하나님도 되시기도 한다. 그러므로 내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이 내 편이 되느냐 저편이 되느냐 하는 이것을 생각하여 일과 물건을 빼앗겨도 하나님은 안 빼앗겨야 한다. 그런데 일과 물건에 욕심을 품어 하나님을 빼앗기는 수가 많다. 롯은 이 길을 취했다. 그 결과는 하나님도 빼앗겼고 일도 물건도 사람도 빼앗겼다.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일과 재물을 같이 취할 수가 있었는데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서 앞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울 것이면 일과 물건을 아낌없이 집어 던졌다. 이것을 보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방패와 상급이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방패"라고 하신 것은 대적이 많은데 네 모든 대적을 내가 싸워서 물리치고 원수를 내가 맡고 방비하겠다고 하는 말씀이요. "상급"이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너의 복이 되고 지혜가 되고 사랑과 명예가 되겠다고 하신 것이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방패와 상급이 되셨는가? 아브라함이 미남이고 열변가요, 웅변가요, 학식이 많고 부자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또 하나님이 변해서 과거에는 방패와 상급이 아니신데 지금은 이런 하나님으로 변해서가 아니고 아브라함이 변해서이다. 아브라함이 종전에는 하나님이 자기의 방패와 상급이 되시는 그런 입장에서 살지 못하고 있었지만 이제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하나님편이 되어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방패와 상급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을 대적하는 것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요. 아브라함을 환영하는 것이 하나님을 환영하는 것이다. 이렇게 된 것은 아브라함이 설자리에 섰기 때문이다. 아브라함이 소돔왕과 더불어 일을 처리 할 때에 아브라함의 인격이 나타났다. 아브라함의 심리와 인격의 처사가 하나님이 동행 할 수 있는 것이였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떠한 일을 하든지 마음을 가질 때에 반드시 하난미과 하나가 되든지 그렇지 아니하면 하나님과 대적이 되든지 한다. 갑과 을이 일을 할 때에 갑과 을의 하나님이 되시기도 하고 안되시기도 하고 갑의 하나님이 되시든지, 을의 하나님이 되시든지 한다. 이는 심리와 인격처사의 미에 따라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내 하나님이 되시도록 노력 할 것이요. 하나님이 내게 하나님 되는 동시에 상대방의 하나님도 되시도록 이 마음을 가지고 일과 물건을 처리해야 한다. 그러므로 둘의 하나님이 못되시는 것 보다 자기만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낫고 자기만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 보다 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이 낫다.


[18:1~19:38] 아브라함과 롯의 비교
⑴ 지도자나 선배가 나를 지도할 때 이 지도가 옳은 지도라고 하면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서 지도하시는 것임을 깨닫는 깨달음에 있어서 아브라함과 롯은 차이가 있었다. 이 차이는 갈대아 우르에서 출발할 때부터 있었다. 출발에 대한 사명감에 차이가 있었다.
⑵ 애굽에 갔다가 벧엘에 다시 와서 부요하게 되었을 때에 물질관과 행복관이 아브라함과 롯은 서로 차이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물질은 하나님의 축복으로 좌우되는 줄 알았고 롯은 물리로 좌우되는 줄 알았다. 행복관에 있어서도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행복과 쾌락으로 삼았고 롯은 가족 단합과 가족들이 기뻐하는 것으로 행복과 쾌락으로 삼았다.
⑶ 아브라함은 인격과 부권과 신권과 구원권을 가졌고 롯은 인권과 부권과 신권과 구원권을 가지지 못했다. 뿐만아니라 가족과 성민에게 멸시와 물질 탈취와 하나님의 징계와 포로를 당했다. (구원권은 롯과 만민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구원얻은 약속)
⑷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비밀이 없는 의논의 대상이 되고 조카의 구원을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천사를 심부름시킨 사람이었고 롯을 멸망중에서 하나님이 구원하시도록 하는 구원의 공로자 곧 원인자이었다. 롯은 자기와 자기 처소가 죄악으로 관영하여 멸망을 재촉하는 것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워졌으며 하나님의 유황불 심판도 전혀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세상살이에 도취하여 하나님과 멀어졌으며 하나님과 영교가 끊어졌으며 기도하나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기도이었으며 아브라함의 혜택으로 하나님이 보내신 천사를 영접하였으나 이 천사까지도 성민에게 모욕과 멸시를 당하게 하였고 모든 소유와 자기 처와 사위들을 구원하지 못하였고 자기와 두 딸까지도 급한 화는 아브라함의 혜택으로 면할 수 있었으나 종말에는 하나님의 도리와 인도를 범한 무서운 죄악의 조상으로 구원이 욕된 것으로 변하여지고 말았다.
⑸ 결론.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있음은 영감에서 시작하여 모든 견해와 행동이 조금씩 차이가 있어 아브라함은 신본주의로, 롯은 인본주의로 화해졌는데 종말에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빚어내었다.



[20:1~18] 아브라함의 실수와 회개
아브라함이 애굽에 갔을 때에 헛된 두려움으로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 하여 애굽 왕 바로를 실족케 하므로 하나님의 징계로 바로에게 손해를 입혔는데 아비멜렉에게도 이와같은 방편을 썼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보호를 믿지 않는 죄와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일, 곧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 하여 아비멜렉과 그 백성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므로 깨닫고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한 이것을 돌이켜서 아브라함을 책망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런 책망을 받는 것은 억울함이 아니요, 죄의 값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시키는 일이요, 복음을 가루는 일이다. 아비멜렉이 회개할 때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들에게 대하여 조그만 불평이나 원망이나 미움을 하나도 가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들어실 수 있을만큼 진실한 사랑과 간절한 기도로 아비멜렉의 사죄와 축복을 빌어 그들에게 임한 재앙을 물러가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게 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회개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이웃의 피해가 아브라함의 회개로 완전히 회복된 후,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삭을 선물로 받았다.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은 치신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은 이웃의 피해가 있을 때에는 그것이 완전히 회복 된 후, 축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그러므로 내 실수로 인하여 이웃이 범죄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
김윤수


[20:1~18] 아브라함의 실수와 회개
아브라함이 애굽에 갔을 때에 헛된 두려움으로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 하여 애굽 왕 바로를 실족케 하므로 하나님의 징계로 바로에게 손해를 입혔는데 아비멜렉에게도 이와같은 방편을 썼다. 이것은 하나님의 권능의 보호를 믿지 않는 죄와 이웃을 생각하지 않는 죄를 범하는 일, 곧 자기 아내를 누이 동생이라 하여 아비멜렉과 그 백성을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했다. 그랄 왕 아비멜렉이 하나님의 징계를 받으므로 깨닫고 아브라함의 아내를 취한 이것을 돌이켜서 아브라함을 책망했다. 하나님의 백성이 이런 책망을 받는 것은 억울함이 아니요, 죄의 값이요, 하나님의 영광을 모독시키는 일이요, 복음을 가루는 일이다. 아비멜렉이 회개할 때에 아브라함은 자기의 잘못을 깨닫고 그들에게 대하여 조그만 불평이나 원망이나 미움을 하나도 가지지 않고 하나님께서 들어실 수 있을만큼 진실한 사랑과 간절한 기도로 아비멜렉의 사죄와 축복을 빌어 그들에게 임한 재앙을 물러가게 하고 하나님의 은혜가 회복되게 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회개다. 아브라함으로 말미암은 이웃의 피해가 아브라함의 회개로 완전히 회복된 후, 아브라함도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이삭을 선물로 받았다.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은 치신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은 이웃의 피해가 있을 때에는 그것이 완전히 회복 된 후, 축복을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공의다. 그러므로 내 실수로 인하여 이웃이 범죄하지 않도록 해야한다.

=========================================================================
81021133(창세기 22장 1절∼19절)
1981. 2. 11. 밤 (수)
제목: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의 성격(性格)
1. 시험의 성격
① 실력을 기르도록 준비 ② 적은 것에서 큰 것으로서 ③ 합격할 때까지  ④ 이 세상 것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2. 시험 통과한 아브람함의 받은 축복


본문:창세기 22장 1절∼19절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지시하신 곳으로 가더니 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 위에 놓고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가라사대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내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수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렸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수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두번째 아브라함을 불러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사환에게로 돌아와서 함께 떠나 브엘세바에 이르러 거기 거하였더라
1. 시험의 성격
① 실력을 기르도록 준비
오늘밤에 봉독한 말씀 초두에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이 시험은 무슨 시험인고 하니 하나님께서 영원 무궁한 세계에서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성도들에게 모든 하늘나라의 것들을 다 맡기십니다. 그때는 천군 천사들이 맡아서 일하지 아니하고 예수님의 구속을 받은 성도들이 하늘나라에서 하나님 앞에 직접 모든 것을 인계받아 대리 통치를 하고 천군 천사들은 이 성도들의 수종을 들도록 그렇게 되어 있습니다.
그 나라에서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런 직책 저런 직책을 맡기실 그 시험을 치르는 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서 우리의 모든 생활에 이런 현실을 주시고 저런 현실을 주시는데 우리는 이 비밀을 모르고 좀 좋은 평안한 현실을 주시면 ‘하나님의 은혜라’ 하고 기뻐하고, 조금 어려운 현실을 주면 그만 불만 불평을 합니다.
실은 좋은 현실을 주는 것은 하나님께서 너거 행함에 대해서 이렇게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인정하신다 하는 표로 신임을 하는 그 신임하는 하나의 행사입니다.
세상에서도 시험을 치러서 합격이 되면 또 공부를 시켜서 준비시켜 가지고 또 시험 치고, 또 시험 쳐서 합격되면 또 공부를 시켜 가지고 또 시험 치고 이래서 점점 그 배움이 전진하고 향상하도록 그렇게 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도 그렇게 하십니다.

② 적은 것에서 큰 것으로
준비하도록 하시고 그다음에 시험을 치를 때에 시험을 잘 치러서 합격이 되면 그 일은 끝나버리고 또 그다음에 또 하나님께서 그전보다 좀 더 큰 은혜를 주십니다. 큰 은혜를 줘 가지고 재산이라면 재산도 더 많은 재산, 권세라면 권세도 더 큰 권세, 또 영광이라면 영광도 더 큰 영광, 뭐 보배라면 보배도 더 큰 보배 이렇게 그전보다 더 크고 많은 것을 이렇게 주십니다.
주셔 가지고 얼마 동안 그것을 우리가 누리고 재미를 붙이고 정을 붙이고 이러고 나면 하나님이 또 시험을 하십니다. 시험을 하시기를 ‘보자, 네가 이렇게 정들고 재미 있고 좋은 것을 가졌는데 여기에 재미 다 붙이고 정붙여서 여기에 쏠려 가지고 내가 너한테 말하는 것을 순종 하나 안 하나?’ 그 시험을 치릅니다.
시험을 치러서 하나님이 보실 때에 죽고 못 사는 것 같고 아주 뭐 그것은 참 제일로 사랑하고 제일로 좋아하는 것같이 이렇게 보여질 만치 정이 딱 들어붙는데 그러고 난 다음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것에 대해서 하나님 명령이 나오기를 ‘그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라. 하나님의 뜻대로 써라.’ 어떨 때는 ‘그것을 버리라' 이렇게 명령이 나옵니다.
나오니까 대개는 사람들이 그 정이 들었으니 그것을 못 버리겠고 또 그 얼마 동안 써보니까 자기에게 참 필요가 있고 요긴하니 하나님에게 바치지를 못하겠고, 하나님께 바친다 말은 하나님의 뜻대로 쓴다 말입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대로 쓰려 하니까 자기가 못 쓰고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나님 소원대로 쓰니까 자기 소원대로는 쓰지를 못하게 된다 말이오. 그러면 그만 사람들이 거게서 아까와서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그것을 취급하지를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시험에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하나님이, 어떨 때는 ‘버리라’ 안 버리면 죄가 되도록 딱 만들어 놓습니다. ‘버리라’ 할 때에 하나님이 버리라고 하고 안 버리면 죄가 될 때에는 사정 없이 척 버려버립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것을 ‘이렇게 써라’ 이렇게 하실 때에, 참 그것 애끼기를 자기 생명같이 애꼈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이렇게 써라’ 하면은 `예' 하고 딱 순종해 씁니다.
그러면 이래서 하나님이 이 땅위에 우리를 살려 두시고 이런 것 저런 것 모든 좋은 것을 주십니다. 참 우리가 볼 때에 귀하고 좋고 아름답고 아깝고 필요하고 요긴한 것 그런 것을 하나님이 주십니다. 주셔 가지고 하나님께서 어떨 때는 ‘버리라’ 어떨 때는 또 ‘써라’ 어떨 때는 `누구에게 줘라' 어떨 때는 `간직하라' 이 골고루 하나님이 우리를 시키십니다.
시켜서 작은 것을 맡겨놓고 또 가치가 작은 것 적은 것 이런 것을 맡겨놓고 하나님이 이렇게도 시켜 보시고 저렇게도 시켜 보실 때에 시킨 대로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요것은 적고 작으니까 이렇게 하고 정이 덜 들었으니까 이렇게 하지 많이 들면 이놈이 어떻게 하는가 보자.’ 하고서 그다음에는 더 좋은 것, 큰 것, 많은 것, 정이 더 폭 들도록 하는 그런 걸 딱 맡겨놓고 그다음에 또 하나님이 시켜 봅니다.

③ 합격할 때까지시켜 보면 전에는 그걸 잘했지마는 이제 요번에는 크고 많고 좋고 가치가 많고 더 정이 많이 들어 놓으니까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하려 하니까 아까와서 안 되겠다 그말이오. 그만 ‘아이구 이번에는 할 수 없다.’ 그만 순종 안 합니다. 안 하면 시험에 떨어져 버렸습니다.
시험에 떨어지면 그 다음에 향상도 전진도 없고 또 시험을 재시험을 또 쳐야 됩니다. 이다음에 얼마 동안 있다가 또 하나님이 또 시험을 치십니다. 그러면 또 이번에도 아까와서 순종을 못 하게 되면 평생 그러다가, 죽을 때까지 그러다가 합격 못 하고 재시험 치고 재시험 치고 이러다가 세상을 마치는 사람 있고.
하나님께서 가치가 적고 정도 덜 든 것 그런 것을 하나님이 딱 시키실 때에, 하나님의 뜻대로 어떨 때는 버리라 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하나님의 뜻대로 쓰라 할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누구에게 주라 할 때도 있고,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 현실을 통해서 자기가 핑계할 수 없게 환하게 알 수 있도록 그렇게 딱 만들어 주십니다. 딱 만들어 주셔 가지고 한번 시험을 쳐 봅니다.
시험을 치니까 그렇게 아까와했지마는 하나님이 명령하시니까 지체하지도 안하고 ‘예’ 하고 순종을 합니다.
또 어떻게 정이 들어놨는지 인간이 오면 참 싸움을 해도 원수가 져도 내줄 수가 없을 건데 하나님께서 ‘내놔라’ 하니까 `예' 또 그것을 자기만 위해 썼는데 하나님께서, 하나님 말씀에 ‘네가 이것은 요번에 이렇게 이렇게 써라’ 할 때에 아깝기야 짝이 없지마는 하나님이 자기에게 현실에서 진리를 통해서 신앙 양심을 통해서 ‘이렇게 써라’ 이럴 때는 `예' 하고 이렇게 써버립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참 아름답고 {귀하고,} 귀하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요것은 희망이 있다. 요게 어데까지 해 나가는고 보자.’ 또 이제 그다음에는 그보다 좀 나은 것을 줘 가지고 얼마 동안 있다가 또 시험합니다. 그러니까 또 순종을 합니다.
순종하면 이제 하늘나라에서는 ‘오, 너는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요만한 것은 맡겨도 되겠다.’ 그 결정이 됩니다. ‘무궁세계에 요만한 것은 맡겨도 되겠다.’ 결정이 됩니다. 또 그다음에 또 해 봅니다. 또 순종합니다. 이제는 더 크고 좋은 것, 또 순종해서 시험에 합격이 됐습니다. 더 좋은 것.
이래서 여러 배 백 배 준다 그말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시험할 그 시험의 재료를 더 크게 많게 가치 있는 것을 가지고서 높은 시험을 치르게 됩니다. 이래 가지고 어떤 사람은 죽는 날까지 시간도 걸릴 것도 없이 퍼뜩 받아 가지고 시험 치니까 합격되니까 또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또 올라가고 자꾸 올라갑니다. 이래서 하나님께서 뭐 그에게 오만 걸 다 줘 봐도 다 됩니다.
이러니까 ‘네가 네 소유는 그러지마는 네 몸뚱이는 그렇게 안 하지?’ 싶어서 하나님께서 몸뚱이를 시험합니다. ‘자, 네가 이번에는 저 전염병 드는 그 전염병 환자에게 가서 복음을 전하라.’ 이러니까, 소유물은 그렇지마는 거기 가서 전염병이 들 모양이니까 문제라 그말이오. 이렇지마는 ‘예’ 그만 가 버립니다. 가서 전염병 환자에게 복음을 전합니다.
또 이번에는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면 제가 감옥에 안 들어가고는 안 되는 그런 감옥에 들어가는 그런 것을, 하나님의 계명 지키려면 감옥에 들어가도록 그런 일을 딱 만들어 감옥에 들어가는 일을 닥치게 합니다. 이러니까 이 머뭇거리고 그럴 건데 그저 지체하지 안하고 ‘예’ 그뭐 감옥에 뭐 감옥에 훅 뛰어들어갑니다.
또 이번에는 아주 형벌을 많이 받아서 뭐 장기간 그 고문과 고형을 받을 수 있는 그런 일이 있는데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면 그 형벌 안 받을 것이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면 그 형벌 받을 수 있도록 딱 그렇게 하나님께서 만들어 가지고서 시험을 딱 한다 말이오. 그 고문과 고형을 받을 그런 형편이 와도 하나님의 명령 따라서 ‘예’ 하고서 고문과 고형을 받습니다. 또 하나님이 그 시험할 때에 고문과 고형을 하되 자기가 있는 힘을 다 기울이지 안하면 모든 걸 포기하지 안하면 그 시험에 합격할 수 없도록 어려운 고문을 시킵니다. 하나님이 시키는 것이오. 고통을 주는 것이오.
이러니까 ‘야, 어떻게 할래?’ ‘주님 나 위해 죽었는데 나 주 위해 죽는 것이 마땅하지 않습니까? 주님 위해서 나도 주를 사랑함으로써 고문과 고형을 당하니까 주님의 고난에 이 더러운 죄인을 참가하게 해서 나도 고난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러면서 뭐 고문 고형 아무것이 있어도 척 감당합니다.
이러니까 자, 이것은 이제 소유도 몸도, 하나님의 명령에는 그저 소유도 하나님 명령대로 다 순종, 몸뚱이도 하나님 명령대로 다 순종, 인제 뭣 남았습니까? 뭣 남았지요? 예, 목숨 하나 남았지. 이제는 생명에 딱, ‘생명 보자, 생명 어짜는고 보자.’ 우리에 생명이 제일 귀하지 않습니까?주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면 생명이 이제 끊어져야 되고 지금이라도 주의 계명만 어기면 문제 없이 안 죽고 살아날 수 있고 하는 생명에 딱 걸어 가지고서, 하나님께 순종하려면 생명이 끊어져야 되고 생명이 안 끊어지려 하면 순종을 안 해야 되겠고 요래 딱 만드니까 그저 지체하지 않고 ‘예, 그저 뭐 주를 위해서 목숨 버리는 게 마땅하지 않습니까?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나 위해서 생명 버렸는데 나 주님 위해서 목숨 버리는 것, 이 천한 죄인이 주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다니요? 일생 동안 고대했는데. 감사합니다.’ 목숨을 턱 내놓는다 말이오.
이러면 이제 그 사람을 하나님의 계명 지키는 일에 있어, 하나님의 시키시는 일에 있어, 하나님 사랑하는 그 일에 있어서 세상이 그 사람으로 하여금 무슨 세력을 가지고 그 사람을 하나님 순종 못 하게, 하나님 사랑하지 못하게 할 그런 방편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는 사람 있거든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이제는 세상이 몸 소유 생명 다해도 이것은 주를 사랑하면은 주께 순종하면은 뭐 지체하지도 않습니다. 이러면 세상이 이제 그 사람을 시험할 거리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자, 없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보십시오. 네, 없습니다. 없소. 이게 세상을 이긴 것입니다. 이것이 세상을 이겼소.
이러니까 자, 이것은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 당신 명령은 뭣이냐 하면은 당신 명령은 자신을 자기 아닌 것을 위해서 자기 아닌 것을 사랑함으로 자기를 제물로 소금으로 녹혀서 봉사로 바치는 이것이 하나님의 계명이요 하나님의 소원이라 말이오.
이 세상에서 시험해 보니까 이제는 소유도 암만 좋은 것 맡겨봤자 이것은 안심할 수 있고 몸뚱이도 암만 좋은 몸뚱이 맡겨봤자 주를 위해서 주의 계명 지키는 데 위해서는 뭐 상관없이 그것이 우상되지 안할 터이니까 안심할 수 있어 목숨도 그럴 수 있어, 이럴 때에 그 사람은 무궁세계에 당신의 모든 것을 그에게 맡깁니다.

④ 이 세상 것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누가복음에 보면 그런 말씀이 있습니다, 청지기 비유에. “네가 불의의 재물로 충성치 아니하면 누가 참된 것으로 너에게 주겠느냐”(눅16:9) 그 참되다 말은 영원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시,} 일시 있다가 없어질, 불의라 하는 것은 죄 아래 있기 때문에 죄 아래 있는 재물은, 죄 아래 있는 몸은, 죄 아래 있는 생명은 한번 죽어야 됩니다. 없어질 날이 있다 그말입니다.
없어질 것 가지고 하나님을 위해서 살지 아니하는 너에게 영원히 없어지지 아니할 완전한 그것을 너에게 맡기면 어떻게 하려고? 없어질 것도 맡겨 주니까 이게 아까와서 그만 하나님이고 진리고 명령이고 다 내몰라라 하고서 거게만 애착을 해 가지고 하는데 영원 무궁한 완전한 것을 줘 놓으면 더 그럴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참된 것을 누가 너에게 맡기겠느냐”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조상을 하나님께서 이렇게 시험하시는 것처럼 우리도 모든 생활이 시험입니다. 모든 일생 생활이 전부가 시험이오.
이래서 야고보 1장 12절에 보면은, 시험에 변동되지 안하고 시험에 인내해서 어떤 시험이 와도 신앙 생활을 그대로 쪽 계속해 나가는 자가 복이 있도다. 시험을 참는 자라 말은 인내라 말이오. “시험을 참는 자가 복이 있도다 이 일에 대해서 하나님이 옳다 인정하신 후에” ‘됐다. 합격이다.’ “인정하신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리라” 말씀했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이 세상에서 하루밤 나그네 같은 잠깐 지나가는 세상에서 영원 무궁한 세계를 두고서 지금 시험을 쳐서 합격되나 안 되나, 뭐 우리 세상 살이 가지고서 환하게 다 판명이 돼서 환하게 나타났는데 그때 불평할 게 뭐 있겠습니까?이러니까 일시의 이 세상에서 없어지고 두고 갈 것, 없어질 것, 버리고 갈 것, 이것 가지고 하나님의 명령을 어떻게 지키며, 하나님을 어떻게 사랑하며, 어떻게 하나님을 거역하며, 그것들을 사랑해서 하나님을 사랑치 안하고 거게 애정을 붙이는가 하는 요것을 시험해 가지고 요것으로써 무궁세계는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은 시험의 세상인 줄을 알아야 됩니다. 이렇게 영원 무궁을 두고 이 지금 시험쳐 나가는 이 지극히 큰 참 놀랄 만한, 뭐 일류 대학에 들어갈 뭐 입학 시험 그것도 크지마는 그것은 여기다가 비하면은 이 시험은 이 지구 땅덩어리 같으면 일류 대학에 들어가는 그 시험은 뭣만할까요? 먼지만할까? 아이고, 먼지만도 못해. 먼지만도 못해. 우리에게 당한 시험을 만일 지구 땅덩어리만하다고 하면은 그런 시험은 먼지만도 중량이 못합니다. 가치가 없습니다.
이런 큰 시험을 치르고 있지마는 우리 심령의 눈이 어두워서 하나님의 심판도 모르고, 무궁세계도 모르고, 하나님도 모르고, 무궁세계의 생활도 모르고 이것 모르니까 눈 앞에 보이는 것, 이것 똑 짐승 모양으로, 성경으로 영감으로 생각하면 알 수 있는데 생각하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이것만 위주하기 때문에 이 시험을 무시하고 시험 치르려고 공부도 안 하고, 시험 치르려고 공부도 안 하고 시험 낙제하는 그것으로 취미를 붙이고 있으니까 얼마나 불쌍합니까?이 시험에 합격하려고 공부하는 사람들, 밤마다, 내가 여기 엊저녁에 와 보니까 뭐 저기서 막 이래 가지고 ‘주여, 어쩌든지 소유와 몸과 생명을 주님이 요구하실 때는 어느 때나, 어느 장소나, 어떤 사건에서나, 어떤 방편으로서나 원할 때는 즉시 즉시’ 막 이래 하며 이래 가지고 손을 거머쥐고 기도를 하고 고함을 야단을 지기는데 이렇게 소원하는데 어떤 사람은 주를 위해서 털끝만치도 손해는 보지 안하고 ‘예수 믿어서 무슨 덕이나 볼까?’ 이렇게 생각하고 있으니 참 기가 찰 일입니다.

2. 시험 통과한 아브라함의 받은 축복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이 일이 이것이 왜 우리에게 성경에 기록해 지고서 주셨느냐? 이것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계시입니다. 가르쳐 주시는 이 문서계시요 또 형식계시입니다.
여게 보니까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12절에 보니까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내 손을 대지 마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알았노라.” 이것 얼마나 이것 기쁜 일이요?하나님께서, 백 세에 난 독자 이삭에 대해서 어떻게 뭐 애지중지하니까 하나님이 보실 때에 ‘아마 아브라함 네가 제일 사랑하는 것이 이삭이요, 좋아하는 게 이삭이요, 제일 소망 두는 게 이삭이요, 제일 정든 것이 이삭이요, 제일 귀하게 애끼는 것이 이삭이라.’ 이런데 이제 이게 이렇게 떡 해 놓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하는고 보자. ‘야, 이삭 잡아서 번제로 드리라.’ 하니까 ‘참 다른 것은 드릴 수가 있지마는 이것만큼은 참 하나님이 너무 합니다.’ 이렇기 쉬운데,아브라함은 그말 떨어지니까 ‘하나님께 필요 있습니까? 이삭이 하나님께 번제로 필요 있습니까? 예.’ 이래 놓고 난 다음에 그만 밤에 잠을 못 자고 말이지, 좋아서 잠을 못 자고 밤에 장작 패 놓고, 장작 뭐 산에 있는데 그럴 게 뭐 있는가? ‘하나님이 요구하시니까, 우리 아들 이삭을 번제로 요구하시니까 장작도 이것 산에 가 할 게 아니라 집에서 잘 준비해 가지고 가야 된다.’ 이래 가지고 밤새껏 준비하고 밤새껏 좋아서, 아들 설 닥친 것 모양으로 좋아서 우줄거리고 이래 있다가 벌써 날도 안 새서 안장 지워 가지고 ‘가자. 하나님이 지시한 모리아 산으로 가자.’이렇게 하나님이 요구하시고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명령이면 어떤 것이라도 애끼지 안하고 “네가 독자도 애끼지 안하고 내 명령을 복종했으니” 그다음에 또 어데 “아끼지 안하고” 그다음에 또 한번 있는데 어데입니까? 또 여게 또 16절에 보면 있습니다. “가라사대 여호와께서 이르시기를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를 애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승리한다 말이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이렇게 하나님께서 명령하실 때에, 하나님이 버리라, 써라, 없애라, 누구에게 줘라, 이렇게 하나님이 명령했을 때에 그 명령을 받았을 때에 어떤 것이라도 애끼지 아니하고, 그게 뭣이냐? 그보다 하나님을 크게 여기는 것이오. 그것이 그게 바로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를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 명령 복종하기 위해서,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라 말이오.
이삭은, 아브라함이 이삭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견해가 바로 됐습니다. 이삭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대로 하기 위해서 이삭을 기르고 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이삭을 사랑하고 있고, 하나님의 {명령,} 명령에 순종하기 위해서 거느리고 있고, 하나님의 요구에 만족하도록 하기 위해서 가지고 있는 것이니까 하나님이 명하니 기뻐 즐거워서 했던 것입니다.
그럴 때에, 그러면 아브라함이 어떻게 한 사람입니까? 아브라함이 좋아하는, 참 좋아하고 사랑하고 보배로 여기는 것을 아브라함은 애끼지 안하고 하나님에게 바쳤습니다. 그러면 바친 아브라함에게는 어떻게 됐습니까? 바쳤는데, 아브라함이 아브라함의 것을 하나님께 바쳤는데 바친 아브라함에게는 어찌 됐습니까? 몇 배나 줬습니까? 백 배 줬습니까? 뉘가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몇 배 줬습니까? 몇 배 줬지요? 자, 남반에, 몇 배 줬습니까? 한 십 배나 백 배 줬습니까? {이동근}???장로님? 뭐라 하노? 뭘 어떻게 몇 배나 줬느냐 그말이요? 하나 줬는가, 열 줬는가, 백 줬는가, 천이나 줬는가?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이 줬습니다. 바닷가의 모래의 수와 같이 줬습니다.
그러니까 아브라함이 독자 이삭 하나를 바침으로써 나도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 여러분들도 아브라함의 아들이오. 이게 바다 모래 수에 비합니까? 이게 또 무궁세계에 가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오병이어를 드리니까 오천이 먹고 난 다음에 열두 바구니 남지 안했소? 오병이어로 오천 먹었었는데 열두 바구니 되니까 열두 바구니 그것은 몇 만 명을 먹이겠소? 이치를 가르친 것입니다. 인생이 하나님에게 바쳐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에게 바친 것은 지극히 작은 것이 얼마나 영원 무궁에 시간적으로 공간적으로 종류적으로 얼마나 확대가 되고 얼마나 번창해지는지 이것은 그 배수는 측량 못 합니다.
아브라함에게는 이삭 하나 바쳐놓고 바다의 모래의 수와 같이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은 이 숫자를 받았습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 바쳤는데 바쳐진 제물 그것은 어찌 됐습니까? 바친 아브라함은 좋고, 바쳐진 그것은 어찌 됐습니까? 그것은 불행했습니까? 어찌 됐소? 그것은 천하 만민이 그것 인해서 복받았어, 천하 만민이. 그것은 그 자체는, 바쳐진 제물 자체는 천하 만민이 그것으로 인해서 복받았어.
바친 자는 이렇게 형언 못 한 수배 말할 수 없는 이 번창을 하나님께서 베풀어 주신 것을 여게 말씀하고, 바쳐진 그 제물 자체는 어떻습니까? 그 제물 자체는 모든 존재들이 그로 인해서 복받습니다. 모든 존재들이 그로 인해 복받는 기관이 됩니다. 이것이 예수 안에 있는 비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몸을 바치고 생명 바치고 다 바치고 애끼지 안하지 세상뿐인 줄 알진대야 수지 계산 맞추는데 누가 바칠 사람이 누가 있겠소, 있기를?우리는 이것을 깨달읍시다. 바친 아브라함에게는 어떻게 됐으며 바쳐진 그 자체는 어떤 것이 되어졌느냐? 어떻게 있어지며 어떤 가치 있는 것이 되어졌느냐? ‘아브라함아, 네가 내게 대해서 사랑하는 독자라도 애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내가 너를 어떤 자인 걸 내가 알겠다. 이러기 때문에 네 씨가 바다 모래 수 하늘 별의 수와 같이 많게 된다. 또 그 씨 자체 그 자체는 그것은 천하 만민이 그로 인해서 복받게 된다.’이것이 심으는 놀음입니다. 이것이 심으는 장사요. 이것이 천국을 심으는 것이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혈육의 것으로 심고 신령한 것으로, 이것이 심는 것입니다, 이것이 씨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확정합시다.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을 확실히 알면 무엇이든지 우리는 좋은 기회를 만났습니다. 소유든지 몸이든지 생명이든지 당신이 우리에게 요구하신다면 이는 참 지극히 영광스러운 것입니다. 요구하신다면 우리는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됩니다.
요구하실 때에 없어질 것 같으면 바치는 것으로 끝나버립니다. 죽는 걸로, 없어지는 것으로 끝날 것이 바친 것으로 끝납니다. 없어지지 아니할 것은 ‘손대지 말아라.’ 암만 바쳐도 그대로 다시 남아 있습니다. 즉시 다시 돌아와서도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기에 없어질 때가 아닌 것을 하나님께 바친 것은 절대 없어지지 않습니다. 다시 돌아옵니다. 그게 돌아오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다시 줍니다. 씨를 줍니다. 없어질 때가 됐으면 그것으로 성공하고 {&&없습}*끝납*니다.
확정을 지웁시다. ‘주여, 이제는 주님이 내 생명이나 몸이나 내 소유나 뭐 지위나 권세나 어떻게 내가 애착하고 좋은 것이라도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내가 확실히 알면 애끼지 않고 즉시 바치겠습니다.’ 요것 확정지워요. 이것이 권능입니다.

81.2.11새벽{92.8.14이훈일} @90분 테이프 한면 (전체 44분) 녹음상태 B면 양호1999년 5월 10일 (월) 윤봉원: 01, A+.


===========================================================================
21장:이삭에 대한 언약의 성취와  아브라함과 아비멜렉의 언약

1-4: 이삭의 출생과 할례
5-7: 사라의 기뻐함
8-14: 하갈과 아들 이스마엘을 내어 쫓으라는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이 순종함
15-19: 하갈의 방성대곡과 하나님이 하갈을 위로 하심
20-21: 이스마엘의 장성
22-34: 아비멜렉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음


22장: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심
1-2: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하심
3-6: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감
7-8: 이삭의 질문
9-11: 주의 사자가 이삭을 번제로 드리지 못하게함
12-14: 예비된 번제물
15-19: 약속의 재확인
20-24: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가계

23장: 사라의 죽음
1-2: 사라의 죽음과 아브라함의 슬픔
3-11: 헷족속에게 가서 장사할 막벨라굴을 사려함
12-20: 대가를 주고 사서, 거기에 사라를 장사함

24장: 이삭이 리브기를 아내로 맞음
1-4: 이삭의 아내를 택하여 오라고 종에게 아브라함이 맹세를 시킴
5-8: 이삭의 택한 아내가 따라 오려하지 않을 경우에 대해 아브라함이  종에게 말해줌
9-11: 아브라함의 종의 순종
12-14: 아브라함의 종이 하나님과 약속
15-22: 하나님과 약속이 이루어짐
23-25:종과 리브가의 문답
26-27: 종이 하나님께 감사기도
28-33: 라반이 아브라함의 종을 영접함
34-48: 종이 라반에게 지난 일을 고함
49-53: 종의 청원에 라반과 브두엘의 승낙
54-60: 라반이 종의 길을 만류하나 돌아감
61-67: 이삭이 리브가를 영접함

25장: 아브라함의 죽음과 야곱과 에서의 출생
1-4: 아브라함의 후처들
5-6: 아브라함의 가산 처리
7-10: 아브라함의 죽음과 장사
11: 이삭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심
12-18: 이스마엘의 계보와 그의 죽음
19-26: 야곱과 에서의 출생
27-34: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야곱에게 팜

26장: 이삭의 믿음과 하나님의 언약의 불변
1-6: 이삭이 그랄로 내려감
7-11: 이삭이 그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임
12-16: 그랄왕 아비멜렉이 이삭을 축출
17-22: 이삭의 양보
23-25: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나타나심
26-33: 그랄왕 아비멜렉이 이삭으로 더불어 화친조약을 맺음
34-35: 이삭의 가정에 에서의 결혼으로 걱정이 생김


27장: 야곱이 장자의 축복을 받음
1-4: 이삭이 에서에게 축복하려함
5-17: 리브가가 야곱을 위하여 계책을 꾸밈
18-29: 야곱이 아버지를 속여 축복을 받음
30-38: 이삭의 한탄
39-45: 에서에 관한 이삭의 예언과 에서의 울분
46: 야곱이 하란으로 도망함

28장: 야곱이 하나님을 만남
1-5: 야곱이 하란으로 떠남
6-9: 에서의 중혼
10-17: 벧엘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야곱이 받고, 약속을 재확인 하심
18-22: 야곱의 경배와 서약

29장; 야곱의 하란 생활
1-8: 야곱이 하란 도착
9-14: 야곱이 라헬을 만남
15-27: 야곱이 라헬을 사랑하여 7년 수고, 속은 결혼
28-30: 야곱이 라헬과 결혼하고 다시 7년 수고함
31-35: 레아에게서 난 자식들


32:24-32
이 시간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의 유래와 결말을 증거 하겠다. 이르라엘이라는 이름은 사람이 하나님과 씨름하여 하나님을 이겼다는 뜻을 가진 이름이다. 아브라함의 손자요, 이삭의 아들인 야곱이 12아들(12지파인데)들이 사용하여 왔다. 그러다가 얼마 후에는 12지파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지지 아니하고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는 유다라는 이름을 가졌고 10지파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이렇게 나누이게 된 것은 솔로몬왕의 아들 르호보암왕때에 감정 문제로 대립이 되어 르호보암을 왕으로 세우지 아니하고 이방 사람인 여로보암을 왕으로 세웠다. 북쪽을 차지하고 있는 10지파와 남쪽을 차지하고 있는 유다지파는 사이가 좋지 못했다. 신앙 사상대립으로 마찰이 생겼다. 그러다가 주전 740경에 앗수르가 와서 이스라엘 10지파를 죽이고 남은자를 생포해서 앗수르로 가고 그곳에는 앗수르 사람을 이민 시켜서 살게 했다. 북쪽 10지파는 전멸을 당한 것 같다. 그 후에 이스라엘 10지파의 흔적이 역사에 없다. 생포당해 가지고 난 후에 살육당한 것으로 보이고 또 성경을 깊이 연구한 사람들은 생포된 10지파는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것이 종적도 없이 변질 되었다고 한다. 그후에 남쪽 유다와 베냐민 지파도 바벨론으로 포로되어 갔다가 얼마후에 해방되고 돌아와서 다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뒤에는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아주 포기하고 유다 족속이라, 유태 사람이라고 해서 지금까지 나왔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라고 하는 이름을 가진 백성은 전멸이 되고 하나도 없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지금도 신약 시대의 성도들을 신령한 이스라엘이라고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결과이다. 결과적으로는 이스라엘이 전멸 되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의 이름은 축복의 이름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이름의 뜻은 무엇인가? 사람이 하나님과 씨름을 하는데 사람의 힘이 강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졌다. 사람이 이기겠다고 하는 그 이름이 이스라엘이다. 창 32:24-에 보면 야곱이 외삼촌집을 떠나고 고향으로 갈때에 가족은 먼저 강으로 건너게 하고 자기는 강가에 있었다. 그때에 한 사람이 와서 야곱과 밤새껏 씨름을 했는데 승부가 나지 아니했다. 날이 세어가는데도 야곱이 놓지 아니한다. 그 사람이 할 수 없이 환도뼈를 쳤는데도 야곱이 놓지 아니한다. "나에게 축복 하기 전에는 놓지 않겠다."고 하니 "네 이름이 무엇이냐" "야곱입니다." 이 야곱은 도적놈이라고 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 사람이 "이제는 야곱이라고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고 해라 이는 네가 하나님과 겨루어서 이겼다고 하는 이름이라"고 하고 야곱에게 축복하고 떠났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보내신 천다. 하나님이 천사를 입고 나타나서 일을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여기서 야곱의 죄악성을 야곱과 야곱 자손에게 또 믿음의 자손인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사람보다 힘이 모자라서 지신 것이 아니다. 야곱속에 있는 죄악성을 하나 알리기 위한 형식을 갖춘 것인데 그때에 야곱은 몰랐다. 그 사람이 야곱을 축복하고 떠나고 난 후에 눈이 열려서 깨달았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면 했으나 죽지 아니했다는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그곳을 브니엘이라고 했다. 이스라엘 10지파가 전멸한 것을 보면 이 이름이 무척 혹독하고 나쁜 이름이다. 그 전에 야곱의 어머니 리브가가 잉태중에 태아가 싸우는 것을 보고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하나님이 리브가에게 대답하시기를 "두 민족이 있고 큰 자가 작은자를 섬긴다"고 했었는데 이 말씀을 리브가가 기억하고 해산할 때에 큰아들에게 표를 해서 섞이지 아니하도록 했다. 그후에도 어머니 리브가는 하나님의 약속을 기억하면서 자식을 양육했다. 뒤에 야곱에게 말하기를 "너는 사람보기에는 차자이지만 너는 하나님의 약속을 계대하여 나갈자라"고 했다. 장자의 축복을 하나님이 야곱에게 상속 시킬것을 말했다. 야곱은 이 말을 늘 기억하면서 살았다. 그후에 사냥중에서 돌아온 형 에서에게 시장한 틈을 타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샀다. 하나님께서 "야곱이 장자가 되고 구원계대가 된다"고 말씀했지 장자의 명분을 어떻게 얻어라고 말씀하시지 아니했다. 사라, 빼앗으라고 하시는 말씀은 한번도 안했고 또 리브가에게도 어떻게 어떻게 해서 장자의 명분을 주도록 하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계시도 없었다. 그러므로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의 명분을 산 것은 야곱의 단독행위요. 양고기로서 사냥고기를 대신해서 야곱이 가지고 이삭에게 가게 한 것은 리브가의 단독행위다. 야곱은 하나님에게 축복을 모태에서 부터 받았고 장자의 명분을 차지 하기 위해서 에서를 두번이나 속였고 에서는 속임 받은 것이 분해서 야곱을 죽일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고 그래서 리브가의 구실 꾸밈으로 야곱이 외가집에 피란을 가고 피란을 가다가 벧엘에서 하나님에게 약속을 받았고 또 자기도 하나님에게 약속을 했고 라반의 집에 도착하여 고용살이를 시작했는데 야곱의 걸음걸음마다 하나님이 축복해서 형통했다. 또 결혼하기 위해서 14년간 수고했고 야곱으로 인해서 라반집이 형통했고 라반과 야곱사이에 품삯을 정했는데 하나님이 야곱에게 나타나서 "천사를 보내어 너를 축복할 것이요 점백이와 얼록이가 난다"고 말씀했다. 또 야곱이 하나님의 축복으로 큰 부자가 되었고 라반과 그 아들들이 야곱의 재산을 빼앗을려고 모의 했고 이것을 눈치챈 야곱이 외삼촌 모르게 도망했고 야곱이 도망한 것을 라반이 듣고 야곱을 잡을려고 좇아왔다. 길르앗 산에서 대면한 후 라반은 하나님의 지시대로 자기 집으로 돌아갔고 야곱은 계속 길을 떠나 얍복강에 도달했고 에서가 야곱을 죽일려고 400명을 거느리고 오고 있고 야곱은 가족들을 먼저 강을 건너게 하고 자기는 강가에 남아서 하나님에게 기도했다. 외부는 씨름이요. 내부에는 하나님은 "강을 건너서 가거라" 야곱은 "아닙니다 가면 에서가 죽입니다" "안죽인다 강을 건너라" "아닙니다 에서가 죽입니다"고 하는 이러한 씨름이였다. 이 야곱이 태아로 있을때에 리브가에게 하나님이 계시하셨고 벧엘에서 하나님이 약속하셨고 라반의 집에서 하나님이 약속도 했고 축복도 했기 때문에 야곱은 하나님의 약속과 권능과 축복을 믿었다. 그러나 그것이 인정되어지지 아니해서 밤새껏 용납치 아니하고 자기의 꾀, 수단, 주관을 세운다. 자기의 주관을 죽이고 하나님에게 복종치 아니한다. 밤새껏 자기의 주관을 관철 시켰다. 자기의 주관에 그럴듯 하다고 인정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말을 한다. 마지막에는 야곱의 주관이 승리를 했으니 이것을 표시해서 씨름에 이긴 것이다. 그 벌로 하나님이 야곱의 환도뼈를 쳐서 위골 시켰다. 한대 맞고 난 다음에 정신이 나서 이제는 축복해 달라고 했다. "이스라엘이라고 하나님을 이긴 놈이라"고 하는 이름을 주시니 이제는 잘못 되었다고 회개하므로 하나님이 축복했다. 야곱은 한대 맞고 깨닫고 회개했다. 요사히 보면 X사람들도 한대 맞고 회개하여 겸손해진다. 병신이 되고 망하고 난 뒤에 회개할 것이 무엇인가! 야곱은 도적놈이라는 이름인데 이보다 더 나쁜 이름인 사람과 시비해서 이긴 이름인 이스라엘이라고 하라 하시니 이제야 "나는 하나님과 시비해서 이긴 놈입니다"라고 하면서 회개했다. 밤새껏 하나님을 인간같이 여기고 시비하여 하나님을 이기는 죄를 범했으나 벌만 받았지 죽지 아니했다는 것을 기념해서 브니엘이라고 했다. 야곱이 브니엘을 떠날 때에 해가 돋았다. 회개하는 순서를 통과해야 광명이 온다.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저주를 받은 원인은 무엇인가? 야곱은 하나님의 계약도 축복도 믿었고 하나님의 구원을 보존 할려고 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절대적인 권능의 섭리를 믿지 못하고 그 일을 성취하는데에는 자기의 주관이라야 되는 줄 아는 이런 죄를 범했다. 형이 사냥갔다가 돌아와서 아주 시장할 때에 형의 배고픈시기를 노리는 더러운 심뽀를 사용했다. 이 방편을 쓰지 아니해도 하나님이 그 축복을 야곱에게 보내 주신다.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양을 칠때에 버드나무 가지로 양이 교미하는 것을 가려서 점백이, 얼룩쟁이를 만들려고 했다. 살찌고 건강한 양에게 이렇게 했다. 이런 행동을 하지 아니해도 하나님이 되게 하신다. 자기 양과 라반의 양을 서로 나누어 놓았는데 한테 섞여 있어도 된다. 자기가 형을 속여서 장자의 명분을 차지한 것도 아니고 간교한 수단으로 부자가 된 것도 아니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된 것이다. 그래서 얍복강가에서 전부 내어 놓은 것이다. 자기 자손중에 10지파는 전멸이 되었고 두지파만 남게 되었다. 하나님의 축복도 계약도 권능도 믿었으나 하나님의 섭리를 믿지 아니하는 것이 이스라엘이다.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고 했는데 이것을 믿지 아니하고 주일을 범해야 될 것 같으면 주일을 범하고 그래서 되면 주일을 범해서 된 줄안다. 주일을 지켰으면 안되었을 것인데 주일을 범해서 된 줄 안다. 이것이 이스라엘이다. 버드나무가지를 꺾어서 그늘지게 했다고 얼룩양이 나온 것이 아니다. 주일을 범했다고 취직이 되고 밥을 먹고 안될 일이 된 것이 아니다. 돈을 빌리는 것도 주일에 가지 아니했으면 못 빌렸을 것이다라고 하겠지마는 주일을 지켜도 돈을 빌릴수가 있다. 환도뼈가 뿌러지기 전에 회개해야 한다. 회개하지 아니하면 환도뼈가 뿌러지고 경제가 절단이 나고 가정이 절단나고 권세와 지위가 절단난다. 자기의 자손이 절단이 난다. 자기 자손의 12분의 10이 절단난다. 자기의 인격이 절단나고 자기의 이력이 절단나고 자기의 행동이 절단난다. 하나님의 섭리고 이루어지는 것이지 자기의 꾀나 수단이나 주관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창세기 33장: 야곱과 에서의 만남
1-7: 야곱이 에서와 대면하고 , 에서의 마음이 변함
8-11: 야곱이 에서에게 예물을 줌
12-17: 에서와 야곱이 서로 떠남
18-20: 야곱이 세겜에 머물음

창세기34장; 야곱의 딸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 당함
1-7: 디나가 세겜에게 강간 당함
8-12: 세겜의 청혼
13-17: 야곱의 아들들의 궤계
18-24: 세겜과그 아비 하몰이 야곱의 아들들의 제안을 수락
25-31: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성 사람들을 죽이고 디나를 데려옴


창세기  38장-유다의 범죄와 다말의 복수
1-5: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함
6-10:  유다의 아들 엘과 오난의 죽음
11: 유다가 다말을 친정에 보내어 기다리게함
12: 유다의 아내의 죽음
13-18: 다말의 잘못된 복수
19-26: 다말이 피소 되어 유다와의 관계가 들어남
27-30: 다말이 쌍둥이 베레스와 세라를 낳음
내용해석:
1.  창세기에 유다의 행적을 특별히 기록한 이유
***구속자 예수그리스도가 유다로부터 나오기 때문에
2. 이장에 유다의 최대 수치를 기록한 이유
***①성도들에게 오직 그리스도로만 만족하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리스도 구원외에 다른 것을 찾지 않게 할려고  
   ②그리스도에게서 세상적 광채를 구하지않게하려고  
   ③ 그리스도의 영광이 육신의 조상들에게 유래하지않고 믿음으로 십자가로 승리한 데에서 유래됨을 알리기 위해서
3.  1-5: 유다가 가나안 여인과 결혼함
   ① 하나님께서 금한 결혼을 함으로-거기서난 자식들이 저주받음
   ② 그러므로 장자 엘이 악했고-하나님이 죽이심, 차자도 악하여죽이심
4. 6-10:  유다의 아들 엘과 오난의 죽음
       형수에게 씨를 주는것은--경건의 법칙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허락한 일반 양심법칙도 지켜                                  야 할것이 있음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에게 기만을 당하기 전까지는 --유다의 장자 엘의 아들을 낳을 의무                            와 소망을 가지고 재가 않고 시아버지의 요청대로 친정에서 기다렸음
5. 유다는 며느리 다말을 기만함
***창 38:14 그가 그 과부의 의복을 벗고 면박으로 얼굴을 가리고 몸을 휩싸고 딤나 길 곁 에나임 문에 앉으니 이는 셀라가 장성함을 보았어도 자기를 그의 아내로 주지 않음을 인함이라
***아들 엘이 죽은 이유는 엘의 악함이 원인이지 다말의ㅡ잘못이 아님

6. 다말의 복수
***정욕으로 인한 간음이 아닌 근친상간
***정욕이 일어날 때 사람들의 생각과 행위--
7. 다말이 보복을 자랑하는 표를 얻음--지팡이, 인장

8. 자신의 수치를 드러내지 않을려고 친구를 보내--물건을 찾음

9. 유다는 자기의 행위는 잊고 며느리를 정죄하여---

10. 유다의 회개--다말을 가까이 하지않음

11. 유다와 다말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았으나---그들을 낮추시기 위해 자손을 낳게하심
창세기 39장-요셉이 고독과 유혹의 시련속에서도 믿음을 지킴
1-6: 요셉이 애굽에서 보디발 집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으로 형통함
7-12: 보디발의 아내에게 유혹을 받음
13-18:요셉이 무고히 참소됨
19-23: 요셉이 감옥에 갇힘

내용 주해:
1. 주와 복음을 위하다가 만난 고독한 환경이 주님과 밀접하게 함

2. 이방인도 경건한 신앙에 감동받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

3.용모가 준수한 것이 요셉에게 재난의 원인이 됨
  ***우아한 외모에 크게 소원치 말고 자기 분깃에 만족하자

4. 요셉에게는 경건한 신앙이너무 우세하여 음란을 이김

5. 보디발 아내의 요셉에게 대한 눈짓-안목의 정욕
***   피할 정욕-물질의 탐심(쇼핑), 이성의 정욕, 감정
***   함께 있지도 아니함--
6. 날마다---청하였으나
   **요셉의 놀라운 절제와 주인의 은혜에 대한 충성으로 요셉은 시종일관 지조를 지킴
   ***함께 있지도 아니함--
   ***요셉의 마음은 진정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외감에 사로 잡혀 있음
***손해를 보아도 옳은데 서는 것이 참된 하나님의 사람이다

7. 보디발 아내의 거짓된 행위
***정욕에 끌려 다니는 사람들의 악함

8. 보디발 아내의 수치를 침묵으로 덮어주고-- 회개의 기회를 그 여인에게 줌

9. 사람은 보디발과 같이 자기와 가까운 사람의 일방적 말만 듣고--진실히 알아 보지 않은 실수가 지금 우리들에게도 있을수 있다

10. 하나님의 요셉에게 대한 인자
  ***전옥에게 총애를 받게 하심-인간 심리를 하나님이 주장
  ***그후 보디발이 요셉의 결백함을 알았기에--
      자기 수하의 전옥이 요셉에게 은혜 베푸는 것을 막지 아니한 것이다



창세기 40장-요셉이 바로의 두 관원장의 꿈을 해몽해 줌      
1-4: 바로의 두  관원장이  투옥됨                              
5-15: 요셉이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함
16-19: 요셉이 바로의 떡맡은 관원장의 꿈을 해몽함
20-23: 요셉의 해몽대로 이루어짐

신 13:3 너는 그 선지자나 꿈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단 2:28 오직 은밀한 것을 나타내실 자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시라 그가 느부갓네살왕에게 후일에 될 일을 알게 하셨나이다 왕의 꿈 곧 왕이 침상에서 뇌 속으로 받은 이상은 이러하니이다

고전 12:4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

**하나님의 섭리로 감옥에 들어오게 됨
**그의 친족이 애굽으로 내려오게 됨(창 15:13 의 약속이 이루어짐)
**보디발의 분노가 누그러짐-간수장이 요셉에게 호의를 베풀수 있는 이유
**꿈은 성경이 완성 되기 전에 사용하신 계시 방편
***꿈을 꾸고 근심한  이유--너무나 인상 깊이 남아 있는 보통 굼이 아니었기 때문에
**7-8: 하나님의 종으로 사람들과 접촉을 많이 가지고 선을 힘씀-그래서 하나님을 알리려 힘을 씀:해석은 하나님께 있다고 말함
**12-15: 자기의 출옥을 도와 달라 부탁한 것은 잘못이 아니고 사람의 정당한 길을 걷는 것이다-이것을 포기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떡굽는 관원장의 흉조의 꿈을 서슴없이 말해 준 것은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하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23: 잊게하신 하나님의 역사-요셉을 더욱 고난 가운데 연단 시키심
      궁중의 일반적 풍조-결백보다 힘있는 자들의 감정을 상하지 안으려는 행동

창세기 41장-요셉이 애굽의 총리가 됨
1-8: 바로의 꿈
9-13: 바로의 술맡은 관원장이 요셉을 바로왕에게 추천함
14-16: 바로가 꾼 꿈을 요셉이 말하여 풀게함
17-32: 요셉이 바로의 꿈을 풀어줌
33-36: 요셉이 바로에게 국가적 시책을 건의함
37-45: 바로가 요셉을 총리로 등용함
46-49: 7년 풍년동안 많은 곡식을 창고에 저장함
50-52: 요셉이 두 이들을 봄
53-57: 온 세상에 기근이 임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