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23:22
참 연보와 그 결과
본문:고린도후서 8장 11절~14절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찌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케 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희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이번 건축하게 되는 이 일을 인해서 참 진정 기뻐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 줄 압니다. 그 기쁨이 예배 처소가 협착하다가 이것을 넓혀서 마음껏 형제 구원을 할 수 있게 되는 이 점에서 기뻐하는 사람들도 있겠고, 자기가 언제 세상을 떠날지 모르는데 자기가 하나님의 것을 보관하고 있는 것을 영원히 자기의 소유로 상속받는 이 기회를 허락하셨기 때문에 기뻐하는 이런 사람도 있겠고, 또 자기가 주님이 날 이렇게 사랑하셨는데 나도 주님을, 그저 심히 부족하지마는 성질적으로 주님이 날 사랑하는 그 사랑의 성질같이 나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이런 기회를 주셨으니 감사하고 기뻐하는 그런 사람들도 있는 줄 압니다.
그래서 연보에 대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그 뜻대로 다 그 뜻을 바로 깨달아서 연보를 작정해서 약속으로 하나님 앞에 바치는 일은 해 놨습니다. 이 바치는 일은 해 놨는데 이 바친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연보가 되는 것이 이제 중요한 문제입니다.
또 하나님이 기뻐 받으셔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 심는 자에게 씨와 양식을 주신다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또 더 많이 심을 수 있는 그 씨와 양식을 주셔서 받는 것이 또 문제가 되겠습니다. 받는 그것은 자기에게도 ‘하나님에게 이렇게 약속대로 하니 하나님의 약속대로 과연 더 심을 수 있는 풍성을 주시는구나!’ 하는 경험과 체험에서 자기 신앙이 더 자라가고 욕망이 더 견고해지니 좋고, 이것도 좋지마는 더 좋은 것 있는 것은 ‘아, 보라! 아무것이가 저렇게 먼저 건축 연보할 때에 연보를 그렇게 하더니마는 과연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말씀대로 그대로구나! 그이에게 또 심을 것이 생겨지고 점점 자라서, 나는 그때 인색하고 그는 감사함으로 바쳤는데 그와 나와는 지금에는 비교할 수 없이, 벌써 그는 나보다 경제에 자유있어 경제에 종이 되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사는 그런 사람이 됐다. 나는 그런 기회를 놓친 것이 후회된다.’ 하는 그런 빛이 되면 그 사람들도 회개할 수 있기 때문에, 자기 구원과 남의 구원에 유익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더 좋은 것입니다.
이 결과가 좋아져야 되지, 마치 뛰어 오르는 것은 실력대로 뛰어 오르지만 뛰어내리는 것은 그거야 뭐 생명 내놓으면 만길이라도 뛰어내릴 수 있습니다. 그거는 능력이 아닌 것입니다, 뛰어내리는 것. 뛰어내려 가지고 죽어 버리면 그거는 자살이지 무슨 용기라고는 볼 수 없는 거라 말이오. 해 놓고 뒤가 그만 그것 때문에 가정이 망하고 신앙이 망쳐지고 여생이 불만, 불평, 원망, 시비, 낙망으로 그 결과를 살게 된다면 그 연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한 연보가 되겠습니다.
어제 오전과 오후에 설교한 것은 여러분들이 연보를 하는데, 연보할 때에 잘못됨이 없이 헛된 연보가 되지 않도록, 연보할 때에 헛된 연보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한 지혜의 진리를 여러분들에게 증거했습니다.
어제는 연보를 하나님에게 바칠 때에 자기가 현품, 헌물로 바치든지 현품으로 바치든지 현금으로 바치든지 약속으로 바치든지 바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욕이 되지 아니하고 참 하나님을 대접하는 일이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 어제 오전, 오후에 연보에 대해서 설교를 했습니다. 혹 하나님의 기뻐하심에 도달하지 못한 그런 요소가 그 연보에 끼었을지라도 회개를 하고, 참 연보답게 한 연보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 오전 오후에 연보에 대한 하나님의 법칙을 말씀했습니다.
연보를 많이 내게 하기 위해서 한 것 아닙니다. 오전에 설교하고 나서 어떤 사람에게 내가 물었습니다. ‘오늘 오전에 설교한 것이 연보를 많이 하도록 권면하는 그런 설교가 됐느냐? 연보를 벌로 하지 말고 조심있게 연보해서, 연보를 하지 말라는 권면이 됐느냐?’ 제가 물었습니다. 오늘 오전 말씀은 연보하는 사람들의 조심은 하지마는 그 좀 연보할 마음이 그것이 어찌 생각하면 줄어지게도 했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좀 연보를 하라는 권면보다는 하지 말라는 권면의 양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다 연보를 연보답게 하라 하는, 참 연보가 되도록 하기 위한 것인데, 벌써 어제가 지나갔습니다. 연보는 이미 여러분들이 그 마음을 가지고 연보를 했으면 연보는 연보다운 연보가 됐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연보가 됐습니다.
그러면 연보한 후에 하나님께서 연보의 결과가 하나님에게 기쁨이 첫째 돼야 되겠고, 연보한 결과가 하나님에게 기쁨이 되어야 하겠고, 두번째는 연보한 그 결과가 자기에게 구원이 되어져야 하겠고, 또 셋째는 연보한 그것이 다른 사람의 구원이 되어져야 이제 연보의 참 완성이 되겠습니다. 시작은 완성했지마는 끝까지 완성이 되어야 하겠고, 시작은 완성이 즐겨, 인색이나 부득이나 억지가 아닌 즐겨 냈으면 시작은 바로 됐다 이거요.
시작은 바로 됐는데 남은 것이 두 가지가 남았으니 하나는 뭐이냐? 끝까지 바로 되는 이것이 남았고, 또 하나 남은 것은 그 연보의 결과가 어찌 됐느냐? 하나님이 자기에게 베푸시는 그 결과가 어찌 됐느냐? 이 두 가지 남았습니다.
이것이 바로 되어야 참 이 연보가 귀한 연보가 됩니다. 이번에 우리가 이 연보로 인해서 잘하면, 예수님의 재림이 바로 오늘 내일 되면 이것은 우리에게 이미 끝이 빨리 났는데, 있는 것을 하나님 앞에 연보했으니, 또 자기가 즐겨 냈으니 이것은 무궁세계의 나라에서 자기가 이 물질에 대한 사용 권리를 가지는 것입니다. 그 물질, 그 물질에 대해서 한정된 권리를 가진 게 아니고 물질에 대한 그 권위를 그만침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과부가 엽전 두 푼을 연보한 그것은 액수는 심히 적지마는 자기는 자기 주변에 자기 관련된 영계와 물질계의 모든 물질을 소유할 수 있는 전권주가 되게 된 것입니다. 왜? 그것은 자기의 있는 것을 다 주님에게 바치되 바친 성격이 다릅니다. 이걸 잘 들으십시오.
연보에 대해서 자기가 쓰고 남는 것, 여유있는 것 그것을 하나님에게 바치는 사람 있습니다. 여유있는 그것, 안 써도 되고 여유있는 것인데, 여유있는 그것을 욕심이 들어서 ‘더 많이 저축해 놓자’ 하는 이 욕심에서 의롭게 쓰지 못하고 이것을 더 저축해 가지고 ‘내가 앞으로 어떨 때 쓰겠다’ 이렇게 여유있는 그것을 자기 주관과 사욕을 위해서 의로운 일, 착한 일, 주님이 기뻐하시는 인간을 구원하는 일 이 일에 쓰지 못하고 자기 욕심대로 여유있는 그것을 가지고 있는 자도 있고 여유있는 그것을 하나님에게 바친 사람도 있습니다.
요 연보 정도가 있고, 그러면 그 사람은 앞으로 하나님께서 여유있는 것을 그분에게 줘서 여유있는 것은 너는, 네가 여유없는 것은 안되고,○○○씨가 자꾸 조는데, 어제 ○ 뭐고? 뭐이지? ○○○이가 어제 연보할 때에 혼났습니다. 혼난 것은, 내가 혼내는 것은 그저 입에 발리고 허영심 가지고, ‘다른 사람도 다 바치니까 나도 한번 다 바쳐보자’ 하는 그런 허영심에서, 또 모험심에서, 모험, 신앙은 모험이라 하는 그 사람은 신앙이라는 걸 알지도 못하고 하는 말입니다. 신앙은 절대로 모험이 아니오. 신앙에는 모험 있으면 안됩니다. 신앙은 모험이 아닙니다. 신앙은 절대 확신 확신, 자기가 놓고 떼고, 과학적이요 진리적이요 절대적인 신앙에서 하는 것이 신앙이지 ‘아, 되든가 안 되든가 한번 해 보자.’ 하는 그런, ‘되면 되고 안 되면 안 되고 해 보자!’ 하는 그런 모험심은 그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이런데 자기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뭐 말하는 대로 그렇게 바칠려고 하면 어떤 문제인지 모르고, 그러면 그 뒤에 따라 올 애로가 어떤 애로가 있을 것인지 모르고, 정신이 바짝 차려지고, 참 여기서는 사람이 돈에 속해 죽고 사는 건데, 여기서 자기가 그만침 큰 절단이 나는, 희생이 나는 그런 일을 하는데, 그 일을 하면서 그 일에 대한 연보하는 주일날 설교하는 데 거기 대해서 눈이 떨어지지 않고 바짝 뜨이지 않고 꾸벅꾸벅 조니까 그게 벌써 속에 허용과 허욕과 헛된 것으로 한다 말이오. 그게 밉다 말이오. 그게 미워서 내가 말했어.
제가 참 마음에, 물질이라는 그것이 자기 피도 되고 살도 되고 자기 명예도 되고, 하나님과 물질이 자기에게 두 주인이라고 할 만침 그만침 중요한 것인데, 이 중요한 것을 주 위해서 척 바친다는 것은 참 가슴이 떨릴 일이고 마음이 떨릴 일이고 굉장하지마는 이것보다 더 그것이 좋고, “주님을 내가 사랑하는 것이 평생 소원이 되어 가지고 너희들이 원하는 마음 있던 그것을 이제 기회를 닥쳤으니까 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1년 전에 행하기를 먼저 시작할 뿐 아니라 원하기도 하였은즉 이제는 행하기를 성취할지니 마음에 원하던 것과 같이 성취하되 있는 대로 하라”이러니까 마음에 원하고 원하던 그것이, 암만 원하지마는 기회가 없으니까 안됐는데 원하던 것이 기회가 되니까 하게 됐다 말이오. 이렇게 해야 될 것인데 설렁 잠을 자고, 내가 아니고 뭐, 부모가 벌어 가지고 유산으로 준 것이니까 거기 대한 아무 느낌도 없이 그래 하기 때문에 돈만 들였지 연보가 아니라. 가치있는 연보가 아니라.
연보는 물질을 통하여, 자기 몸을 통하여, 생명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에 감격해서 자기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형제를 구원하려는 그 간절한 마음 느낌의 그 인격의 희생에서 그게 물질을 바쳐도 자기 희생이오. 몸을 바쳐도 자기 희생이오. 등급은 있지마는. 생명을 바쳐도 자기 희생이오. 자기 희생으로 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가 깨어지든지 매를 맞든지 할 때에 안 아플 리가 있습니까? 그런 아픔을 가지고 해야 된다 그거요. 그런데 슬슬 졸기 때문에 내가 야단 쳤지. 여반에도 하나 졸고 있기 때문에 내 야단친다 그말이오. 여러분들 이거 잘 알아야 합니다.
연보를 시작은 했는데 끝을 잘 맺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현금이 있어서 연보를 했습니다. 그러면 끝은 언제 끝이 나느냐? 연보 끝은 연보하고 난 다음에 뒤에서 ‘아, 그거 안 했더라면 여기 쓸 걸, 안 했더라면 저 모를 메꿀 걸.’ 인색을 마귀란 놈이 뒤에 얼마든지 가져와 가지고 헛연보 하게 만듭니다.
끝을 맺는다는 말은 연보를 하고 끝까지 ‘그 연보에 대해서는 잘했다. 참 감사하고 기쁘다.’ 이것으로서 끝이 나 버려야 됩니다. 끝이 나야 그 연보가 연보다운 것이 됩니다.
어떤 사람이 거지 집에 갔는데 거지 집에서 참 자기 정도에 지나치게 밥상을 차려서 대접을 했습니다. 그럴 때는 과거에 은택도 입은 것이 있고 하니까 ‘아, 내가 이분에게 은혜를 많이 입었는데 이분이 오니 어쩌든지 우리가 힘 있는 대로 해서 참 기회니까 한 끼 식사라도 잘 성의있게 대접하자.’ 이래 가지고 자기에게 있는 성의를 다 기울여 가지고 있는 것을 툴툴 털다시피 해서 참 한 끼를 대접을 했습니다. 대접을 하니까 대접받은 이 부자가 ‘아, 저거가 이렇게 대접을 할 수 없는데, 이거 참 저거 피와 연명할 것을 막 졸여 가지고 이래 대접을 했다. 이거 참 이것이 음식이 아니라 나를 존경하고 나를 위하고 섬기는 성의의 밥상이니 내가 이거 받아 먹기에는 참 마음에 송구스럽다. 이러니 내가 여기 대해서 그저, 저거가 손해가지는 않지. 내게 이래 하니, 내가 저거보다 형편이 나으니까, 이래 봐야 저거에게 유익되지 손해가지는 않지. 그러나 제가 과거에 은혜받은 데 대해서 감사하고 사은을 하는 사람이니 이 사람은 쓸모있는 사람이고 사귈 만한 사람이고 앞으로도 괜찮은 사람이다.’ 이렇게 생각을 가지게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앞으로 그 사람에게 대해서 ‘아, 이 사람에게 대해서 더 후한 내가 은혜를 베풀어야 되겠다.’ 해 가지고 아마 밥상 값의 천 배 주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만 배 주는 사람, 자기 실력 있는 대로 줄 것입니다. 뭐 만일 돈이 많은 부자라면 ‘야, 너거, 너 있는 그 마을 옆에 너거에게 제일 가까운 토지로서 내 토지 좋은 토지가 어떤 게 거기 있나?’ ‘거기는 없습니다.’ ‘그래? 네가 농사 짓기 제일 편리하고 좋은, 너거에게, 너거 농장에 알맞는 농토라면 얼마 하면 되겠느냐?’ ‘왜 그걸 묻습니까? 뭐 할려고 묻습니까?’ ‘그래, 내가 뭐 다른 데 논 사느니 거기 논 사 가지고 너거 주면 안되겠나?’ ‘네, 얼마 하면 됩니다.’ ‘제일 좋은 논이 어떤 논이냐?’ ‘아무거나따나 뭐 산골 논이라도 사 주면 좋습니다.’ ‘좋은 논은 어떤 논이냐?’ ‘그 어떤 논이라’ 이러니까 이 부자가 떡 알고 그 지방에 있는 소개꾼에게 떡 말해서 ‘그 토지를 팔려고 하지 않더냐?’ ‘그거는 안 팔 것입니다.’ ‘돈 많이 주면 팔지 않느냐?’ ‘돈 많이 주면 팔지요.’ ‘그러면 그것 얼마 주면 사겠느냐?’ ‘얼마만 주면 살 것입니다.’ 이 사람이 논을 떡 사 가지고 ‘얘’ 불러서 ‘네가 지금 생활이 너무 곤란하고, 네가 나 밥 한끼를 대접했다고 그런 게 아니고 내가 보니까 은혜를 감사한 줄 알고 네가 사람이 됐으니 사람된 사람에게 나도 도울 마음이 있다. 그 토지를 내가 사서 내것이 되었는데, 내가 네 이름으로 해 줄 것이지마는 내것 된 것은 네가 또 무슨 변동될까 싶어서 내 이름으로 했지마는 네가 그것을 부쳐라.’ 보니까 알뜰히 부쳐서 그걸 가지고 살림살이가 졸졸 늘어갑니다. 늘어가니까 재미가 있다 말이오. ‘야’ 떡 가서, 그만 언제 보니까 토지세가 자기에게 나왔습니다. 취득세가 나왔어. 나는 아무것도 안 했는데, 가서 물어보니까 ‘아무것이 논이 자기 논 됐네.’ ‘아이 내가, 어찌 내 논이 됐을꼬?’ 이동까지 해서 그래 줄 수 있지. 그렇지 않습니까? 부자로 그런 사람 많이 있지 않습니까?저 시골에 가면 흰죽다랭이라고, 밥은 해 주려니까 쌀이 없어 못 하고 죽을 끓여 줘서 흰죽다랭이라 하는 논이 있습니다. 그걸 대접할려고 해도 쌀이 없어서 그분이 척 지나가서, 참 허기가 나 가지고 지나가니까 어떤 사람이 ‘내가 허기 났다’ 하니까, 이 사람이 아무것도 없으니까 멀거이 흰죽을 끓여 가지고 한 그릇 대접을 했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저거 처지에는 그것 가지고 나물 넣어서, 하루는 살 건데, 밥 할 쌀은 없고 흰죽을 끓여 가지고 한 그걸 보고 그 부자가 감탄되어서 올라가 가지고 그 지방에서 제일 유명하고 좋은 논을 그 사람에게 줬기 때문에 이거는 흰죽다랭이라, 흰죽다랭이라고 이름 지어있는 그 논 이름되어 있는 것이 많이 있습니다. 흰죽다랭이라는 말 들은 사람 있으면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흰죽다랭이.
참 남은 사람들은 복이 없구만. 그런 것 못 듣는 모양이라. 흰죽빼미, 흰죽빼미라. 나는 그랬어. 흰죽빼미라니? 논이 어찌 흰죽빼미입니까? 그 이야기를 그 지방 사람이 죽 다 해요. 이러니까 그 지방 사람이 그 흰죽다랭이 하나로 인해서, ‘사람이 손님 대접하기를 힘써야 된다. 손님 대접을 힘써야 된다.’ 저거 가친은, 그 동리에서 제가 어릴 때 어떻게 어렵게 사는지 밥을 학교 갔다 와봤자 똑 혀가 들랑날랑하게 그래밖에는 안 줍니다. 어떻게 뭐 아껴서. 이래도 동리에 오는 손은 전부 우리 집으로 다 와. 그만 여관같이 사랑 하나 지어 놓고 오는 손님은 전부 대접 다 해요. 내가 물었는데, 흰죽빼미란 얘기를 들으니까 아버님이 잘 이야기를 잘해 줘요.
그와 같이 이랬는데, 그걸 떡 하나 앞에 한 끼 대접해 놓고 나중에 풍문에 말을 들으니까 ‘와서 뭐 안 그럴 수도 없고 있는 것 톨톨 털어서 대접하고 나니까 우리가 곤란하다’ 고, 그 소문을 온 동리 다 내서, 쌀 꾸러간 집에도 가 가지고 ‘쌀 좀 꿔 주십시오.’ ‘왜 쌀 꿔 가노?’ ‘아, 그 부자 그분 와서 대접 한 끼 하느라고 돈이 얼마 들고 보니 그만 쌀 양식 팔 돈이 없어 그랬습니다.’그만 동리 사람이 아무것이 대접해서 그만 양식 떨어지고 곤란하다 하는 그 소문이 동리 꽉 퍼졌다 그말이오. 그러면 부자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부자 마음이 어떻겠어? 그 대접이 되겠소? ‘이놈 과거에 내가 은혜 많이 베풀었는데 배은망덕한 놈 이거, 이놈이 그러면 내게 대해서 뭘 어떻게 했는고?’ 한번 찾아갑니다. 찾아 가 가지고 ‘너 나 대접한 것이 얼마지? 아나.’ 시장 본 것이 얼마 얼마 딱 쳐 가지고 그 액수대로 딱 주면서 ‘이놈은 다시는 손댈 놈이 아니고, 이놈은 대접이 아니고, 이놈이 날 뭘로 알고 이랬는가?’ 심한 모욕감을 가질 거라 말이오. 그렇지 않겠소?하나님은 인간보다 더 예민하시고 더 무한히 예민하신 분이십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번 연보로 인해서 서부교회가 예수님의 재림이 아직 남았다고 하면 아주 한번 크게 경제면에도 부흥이 될 것입니다. 크게 부흥이 되나 그 총중에는 또 아나니아와 삽비라와 같이 절단나는 사람도 있을까 두렵다 그거요.
어제 연보는 우리가 3억을 원했는데 하나님께서는 그것 가지고는 안된다고 생각해서 3억8천4백인데, 아마 한 4억 되지 않나, 기록지 아니한 사람들이 아직 있고 하니까 한 4억 될 것입니다.
이러니까 내기는 즐겨 냈습니다. 그래도 제가 오랫동안 연보하라는 것은 가르치지 않았는데, 주님의 구속에 대해서 가르쳤는데 이 구속에 대해서 깨달음이 있다 하는 그것을 보고 저는 기쁩니다. 연보 액수 보고 기쁜 게 아니고, 연보의 액수를 보고 기쁜 게 아니고, ‘이 사람들을 두고 뭐할려고 내가 새벽마다 가르치고 주일마다 가르치나? 가르쳐 봤자 꾸벅꾸벅 졸기나 하고 하는 사람들에게 뭣 한다고 이렇게 하는지?’ 했는데 그래도 깨달음이 여러분들에게 있다는 그 증거가 나타났기 때문에 저는 기쁩니다.
어떤, 그 우리를 이해 못하는 그런 목사님이 한 분 와 가지고, ‘어떤고 보자.’ 와서 보고 그날 주일에 ‘하나님의 종의 축도로 폐회하겠습니다.’ 이랬는데 그날은 손들고 축도하지 아니하고 기도로 폐회를 했습니다.
축도는 삼위일체 이름으로 축도하는 것도 축도이고 기도도 축도입니다. 이래서 제가 예배순서를 이렇게도 하고 이렇게도 하는 그것은 뭣 때문에, 총명이 감해져서 정신이 없어서 그와 같이 하는 것 아닙니다. 왜 이렇게도 하고 저렇게도 하느냐 하면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의 성경적으로 제도가 되어 버리고 법칙이 되어 버리면 안됩니다.
그러기에 예배는 찬송, 기도, 성경 이 세 가지만 있으면 그 순서야 옳든지 꺼꾸로든지 예배는 바로 드린 것입니다. 우리 예배 의식이 이렇다 하는 것은 그 예배를 보는데 찬송없이 예배를 보든지 성경없이 예배를 보든지 기도없이 예배 보면 우리는 이거 그 예배가 우리와 같은 예배 의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질적으로 거기는 따라서는 안돼. 조심해 봐야 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마는 그게 있으면 되기 때문에, 그게 아닌데 사람들이 꼭 법칙을 만들어 가지고 뭐 묵도 하고 또 뭐 하고 뭐 하고 딱 그어 가지고 이거는 진리 모양으로 변하지 아니하고 이래 되면 천주교 된다 그말이오. 천주교가 그 교파의 의식이라는 것이 확고부동해서 그게 아니면 아닌 줄 알기 때문에 천주교가 썩어 버리고 넘어갔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교파 운동은 망하는 것입니다. 교파 운동은 절대 망합니다. 안된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축도는 이래 가지고 하는 것도 축도이지마는 또 그 사람이 하나님이 세워 주신, 하나님께서 모세의 자리에 서기관들을 세웠기 때문에 그 말을 순종하라 하는 것이지 하나님이 세워 주신 그 위치에서 그 위치를 가지고 기도하는 것이면 다 축도입니다. 이걸 깨닫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래서 그날 아침에는, 그날 오전 예배에는 기도를 하고 말았는데, ‘거기는 뭐 축도를 하는데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축도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와 다르다.’ 그 사람이 무식해서 범위가 좁은 사람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 빛이니까 다른 사람이 왔을 때에 우리가 잘못하면 그 빛을 가리운 게 된다 말이오. 가 보니까 눈이 또록또록 정신을 딱 차려서 예배보기를 경건하게 예배보면 그 사람이 깜짝 놀라 가지고 ‘아, 여기 성령이 같이 하시는구나. 참 우리가, 나는 알지 못하고 지금 오해했더니마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구나!’ 은혜받을 건데 ‘가 보니까, 뒤에 가 보니까 뭐 반이 존다. 3분지 2가 존다. 거의 다 자더라. 졸더라.’ 이래 졸아 놓으니 그 사람들에게 빛을 가리웠다 그거요. 그게 복음을 가리운 거라 그말이오. ‘졸고, 축도도 보니까 달리 하고 좀 이상한 점이 있더라.’ 사람은 많이 모였으니까 그거는 의심 안 나고, 사람 많이 모으는 거야 뭐 그 전에 전도관, 또 ○○○ 그런 사람들 있는 데는 더 많이 모이고 이단에는 더 많이 모입니다. 사람 많이 모이는 거 가지고는 몰라.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빛이 되어야 되는데, 연보도, 연보를 여러분들이 이렇게 바친 것 보니까 어떤 사람은 자기 먹고 입고 쓰고 나머지, 그것도 행여나 뒤에 어떤 데에 쓰일까 해서 그것도 주님이 원하시는 생명 역사에 바치지를 못하고, ‘이것도 혹 뒤에 쓸 데가 있지 않겠나’ 해서 아까운 마음이 있어서 여기 바치지를 못하고, ‘이까짓 거야 없어 봤자 뭐 별 것 없고 또 있어 봤자 별 것 없으니까 이만큼은 없어도 뒤에 곤란당할 필요가 없는 것들이니까, 없는 그런 액수를 주님에게 바쳐서 복음 운동하자’ 하는 것으로 그렇게 바친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바친 사람들도 많이 있어.
저거 부부에 2백만원 해야 되는데, 내가 볼 때는, 2백만원 해야 저거 위치에서 저거 정도에서 하나님이 연보다 할 수 있도록 될 건데 거기서 뭐 20분지 1, 10분지 1, 백분지 1 그래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네. 그것도 처음에 자라지 못하니까 그래 가지고라도 차차 차차 자라가면 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을 본받아서, ‘다른 사람은 여유있는 거 다 바쳤는데 나는 아이도 안 낳아 놓고 뒤에 아이 낳으면 학비 당할 것 그것까지 다 계산해 놓고 했기 때문에 이 가책된다.’ 다른 사람 보고 회개하는 마음을 가져야 저에게 구원 역사가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여유있는 것을 바쳤습니다. 여유있는 걸 바쳤으니까 살기에는 곤란이 없는데, 살기에는 곤란이 없는데 마귀란 놈이 무슨 시험을 주느냐? 여유있는 걸 바쳤는데 ‘살기는 곤란치 않지마는 만일 무슨 일이 있으면 어찌 되겠느냐? 그때 그걸 바치지 않았으면 지금 얼마가 되고 얼마가 됐을 터인데, 어떤 일이 있을 때에 이것을 충당할 수 있는데 지금은 그날 그날 생활에 바당바당하니 여유가 없으니까, 여유가 없으니 위험하다. 이 생할에 여유가 없으니 갑자기 무슨 병이 날런지 어떤 일이 있을런지 모르니 여유가 없으니까 이거 좀 위험스럽고 염려스럽다. 그때 그걸 안 바쳤더라면 의외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그걸 감당할 수 있을 터인데’ 또 이 마귀 시험이 와 가지고 그 뒤에 인색한 마음이 들어 가지고 연보를 하지 못하게 그만 이렇게 연보의 권위를 삭제해 버리는 이런 일이 됩니다.
이러니까 여유있는 것을 바친 사람은 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갑자기 병 나 가지고 치료할 그런 여유를 준비할 것이야 하나님께서 병 안 나게 해 주시면 더 좋지 않느냐? 또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 있기 때문에, 주님 나 위해서 다 바쳤기 때문에 나 주님 위해서 좀 여유 다 바쳐서 여유없으면 곤란스러운 그 곤란 당해야 되지 않겠느냐?’ 곤란을 원하는 마음이면 마귀는 도망쳐 버리고 맙니다. 이게 십자가면 다 도망쳐. 그러기에 여유로 바친 사람은 이 시험에 들지 않아야 됩니다. 이 시험에 들지 않아야 되고,또 어떤 사람은 여유를 바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있는 것을 다 바쳤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바쳤어. 다 바쳤으니까 이 사람은 무슨 시험이 들어 오느냐? 있는 것을 다 바쳤으니 그다음에 뭐이 오겠습니까? 곤란이 옵니다. 있는 걸 다 바쳤으니까 곤란있을 것 아니겠소? 있는 걸 다 바쳤으니까 곤란이 있을 것이라 그말이오.
예를 들어서 냉장고 있는 걸 바쳤으면 냉장고 편리하게 쓰던 걸 편리하게 못 쓰니까 저희에게 곤란이 있을 게 아니겠소? 자기에게 호화주택이 있던 것을 바쳤으니까, 바치고 셋방 한 칸에서 있으니까 거처하는 데 곤란스러울 것 아니겠소? 자기에 있는 것을 바친 사람은 그 있는 것이 자기에게 필요했던 것인데, 있는 걸 다 바쳤으니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필요하게 쓰지를 못하니까 곤란을 당하니까 곤란당할 그때에 마귀란 놈이 와서 시험을 해 가지고 내나 있는 대로 바친 모처럼 귀한 일 해 놓고 아나니아의 연보가 되고 만다 그말이오. 아나니아의 연보가 되고 마니까 그것으로 인해서 자기가 크게 손해를 볼 거라 그말이오.
이 이치를 가르쳐서, 두 부부가 즉사를 했지마는 즉사는 안 한다 할지라도 사망의 역사가 자기에게 역사할 거라 그말이오. ‘연보하고 나니까 내가 이렇게 곤란하다. 곤란하다.’ 이러니까 자기 심령부터 죽을 것이요, 기쁨도 죽을 것이요, 소망도 죽을 것이요, 감사도 죽을 것이요, 용기도 죽을 것이요, 원망 불평 죄악 이놈이 자꾸 사망에 속한 것들이 자꾸 살아날 것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그 사람은 끝을 잘 맺어야 되는 것은, 그럴 때에 곤란당할 때마다 ‘주님은 하나님으로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가난한 자 되어서 땅 위에 머리둘 곳도 없기까지 항상 고난당해서,? 이렇게 저렇게 당신의 것 하나도 없고 여기서 그저 얻어먹고 저기서 얻어먹고, 이 사람 집에 가 밥 먹고 저 사람 밥 먹고 이렇게 지내셨는데, 하나님이 나 위해 지내셨는데 내가 주님의 구속을 받은 자로서 주를 위해서 이와같이 당하는 것이야 당연하지 않느냐? 이런 마음 되어서 곤란당한다고 곤란당한다 하는 이 독사와 시랑이 같은 놈아!’ 자기를 정죄하고 ‘이놈 죽어야, 이놈 옛사람이지 나는 아니다. 이놈은 죽여야 된다.’ 그놈을 죽일려고 하는 이 마음을 가지고 이놈을 죽여야 됩니다.
‘이놈은 흉측한 놈이다. 이 놈이 날 일생동안 끌고,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던 나 아닌 나, 나를 죽인 나, 거짓된 나,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이놈’ 이것을 알아서 이놈을 죽이고 멸하고 이럴 때마다 해서 그저 ‘내가 땅위에서 이 면은 사소한 이런 면이지마는 나도 주를 위해서 고난을 당하면’ 고난 당할 때마다 주를 위해서 고난 당함을 인해서 기쁘고 즐거워함이 자기에게 있으면 그 고난이 앞으로 하나님이 그 고난을 보충해 주사 나중에는 본래 있던 그만침 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넉넉하게 해서 이제 주님 때문에 고난당한다 하는 그런 일이 없이, 굴지가 다 막혀지기까지 자기 마음이 감사와 주를 위해서 고난당하는 그 일에 기쁘고 즐거운 그 마음이 그 굴지가 매여서 지금은 ‘봐. 주님에게 드렸더니 주님이 더 많이 주시고 넉넉하게 됐네.’ 할 때까지 그 마음이 계속이 되면 이제 끝을 바로 맺은 것입니다. 알겠습니까?끝을 바로 맺은 것이고, 그러므로 다른 사람 보기에 그랬는데 하나님께서 이렇게 은혜를 주셔 몇 해가 걸리든지 고난을 그것을 받고, 자기 있어야 할 것을 있는 것을 다 바친 그것이 큰 게 아니라 그 후에 고난을 당해도 고난 당할 때마다 감사하고 주의 구속을 생각하면서 ‘내가 주님 위해서 이렇게 할 수 있도록,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이 어려움을 이만한 어려움이라도 당할 수 있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 감사 그것이 주님에게 원하는 제물입니다, 원하는 제물. ‘너희들이 가져오는 그 예물은 내가 무거운 짐이다. 내가 그 예물을 누가 원하더냐? 그런 거 원치 않는다.’ 하는 이 욕스러운 제물이 되면 안된다 그거요.
그런고로 있는 것을 바친 사람은 마귀란 놈이 이 시험을 줄 때에 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 그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해야 될 것. 있는 것을 바친 사람은 곤란스러울 거라 말이오. 곤란스러운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거, 주님이 나를 사랑해서 구원하기 위해서 고난받으신 그 고난에 나도 동참하는 거라. 주님이 원하시는 형제 구원을 위해서 내가 고난받는 거라 그말이오. 형제 구원을 위해서 고난받는 것.
그런고로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이것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은, 바로 연보한 사람은 이것이 떡 가 가지고 굴지가 매여서 자기는 생각도 안 해도 자꾸 이런 것들이 어째 어째 모여져 가지고 곤란당하지 않으니까, ‘주님이, 주님의 이 가난해지신 구속의 고난에, 냉장고 없어 날마다 고난당하면서 주의 고난에 날마다 동참했는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게 없네. 날마다 거처할 방이 좁아서 고난당해 주님의 고난에 날마다 방 좁아서 주님의 고난에 동참했는데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게 없네.’이러니까 그로서 자란 사람은 어서 어덴가 기회만 닥치면 주님 위해 고난 당할 수 있는 그런 것을 마련할려고 기회를 노립니다. 이 사람이 세상이 모르는 그는 참 행복에서 사는 사람입니다.
또 이 사람보다 더한 사람 있습니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바친 사람, 여기 보니까 연보에 먹고 쓰고 남는 거 바친 사람 있고, 여기 여유있는 사람 많지 않아? 또 그보다 그 위에는 자기 있는 대로 바친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있는 대로 바치는 것이 아니고 자기 없는 것을 자기가 바친 사람 있습니다. 없는 것을 약속으로 바친 사람 있어. 어떻게? 약속으로 바친 사람은 ‘내가 앞으로 지금 건강하고 내 노력의 실력으로 말하면 내가 이렇게 이렇게 노력을 하면 얼마동안만 하면 이게 될 터이니까, 얼마동안 이 노력을 해서 이것을 갚을 요량 하고 약속 연보를 했다.’ 하는 그런 사람도 있을 것이라.
그 사람은 뭐 바치는 것입니까? 물질 바친 게 아닙니다. 그 사람은 물질 바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은 자기의 몸을 바친 것입니다. 자기 몸을 바친 것이오. 그 정도에는 몸을 바친 사람이니까 그다음에 자기는 그 감사한 마음으로 자기가 몸이 피곤해도 ‘주님의 인간 날 구원하기 위해서, 인간 구원 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바친, 몸을 바쳐 주신 그분의 바치신 그분의 사업에 나도 몸을 바쳐 사업에 동참하게 된다.’다른 날은 일을 여덟 시간 하는데 내가 이 일 할려면 열두 시간 해야 되니까 네 시간 더 일하면 피곤한데 ‘이 피곤은 주님의 몸을 바쳐 구속하신 이 고난에 나도 동참한다. 이 네 시간은 피곤하나 주님이 나 위해서 몸을 바치시고 형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몸 바치신 그 일에 나도 형제 구원, 주님이 하시는 그 일, 나도 형제 구원 그 일에 나도 몸을 바친다.’ 이래 가지고 네 시간 일하는 것은 주님의 몸 바친 고난에 동참이라는 것을 깨닫고 감사하고 기쁨으로 할 때는 그에게 나타나는 역사가 있을 것입니다.
거기에서 자기가 성결해지는 것, 자기가 거룩해지는 것, 자기가 사랑화되어지는 것, 주님과 밀접해지는 것, 그리고 나면 네 시간을 더 노동하고 와 가지고 훌렁훌렁 씻고 이래, 착 놓을 때에 무슨 똑 큰 묏등이나 띄운 듯이, 할일을 하고 온 듯이 마음에 기쁘고 즐겁고 할일한 것 같이 마음이 쾌활해 가지고 척 와서엎드리면서 ‘아, 주님, 오늘도 이 네 시간을 기쁘고 즐겁게 하게 함을 감사합니다.’ 내가 주님에게 바쳤으니 주님이 나한테 고맙다 해야 될 터인데 그게 아니고 ‘이렇게 네 시간 쿨쿨 잠이나 자고 죄나 짓고 엉뚱한 헛된 소리, 헛된 농담이나 하고 노라리나 하고 있을 터인데 이 시간을 이렇게 귀중하게 바치게 됐으니 감사합니다. 이러니 감사합니다.’이것이 주님이 십자가 상에서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떻게 나로 하여금 이 대속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해 주십니까’ 하는 감사의 기도를 십자가 상에서 한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한 사람들은 ‘주님이 죽기가 싫어서, 하도 고난이 많아서 이렇게 원망하기까지 됐다.’ 원망이면 죄 다 됐는데 무슨 지공의 일이 합격이 되겠습니까? 이렇게 해서 해놓은 것이 모든 주석들이라 그말이오. 알겠소? 그 담을 넘어야 돼. 그 기본 전환, 기본 회개를 해서 방향 전환을 한 것과 안 하고 옛사람이 예수믿는 거는 보면 압니다.
이러니까 이 네 시간 일을 더 하는 것, 또 반사들도 어떤 반사들 말합디다. ‘내가 이거’ 가봉, ‘하면 가봉이 있는데 내가’ 그런 반사가 아직까지 있다는 말 내가 못 들었는데 혹 있는가 싶어 말합니다. ‘내가 이거 해 가지고 6월 가봉, 12월 가봉 이러니까 두 달 밖에는 못 하지 뭐 이 다음에’ 12월 안으로 다 갚아야 되니까, 어떤 사람은 또 ‘그다음달 가봉 이래 하면 7만원이 8만원 되고 이런데 8만원 되는데 더 올라가면 9만원이 될 터이니까 내가 이제 생활에 근근이 할 뿐 아니라 열심히 일해 가지고 이제 가봉을 자꾸 더 받아 가지고 이러자.’ 가봉 받아 뛰고, 막 잠도 못 자고 뛰고 구르고 이렇게 열심히 해 가지고 가봉이 됩니다. 본봉 외에 가봉이 돼. 가봉되도록 할려 하니까 자기 진액이 기울여져서 어려워지지 않습니까? 어려움을 겪으면서 ‘이 어려움 주님이 구속하시기 위해서 당신의 몸을 다 바친 것처럼 나도 주님의 구속하시는 그 업을 위해서, 그 업에 내 몸을 바쳐서’ 다 바치지는 못해도 이만치 일하는 것만치 외의 걸 바쳐서 하는 것으로 기뻐 즐거워하며 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제물이 된다 말이오. 그거 하나님이 기뻐한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없는 것을 바친 자는 없는 것 바친 가운데에서 ‘이래 바쳤으니까 누가 해 줄 것이다.’ 아닌지? ‘내가 이랬으니까 해 줄 것이다.’ 하는 그것은 온전한 연보는 되지 못합니다. 그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 예를 들어서 부모가 주는 것 다 바치면 또 주겠지 부모에게 소망하는 것, 하나님에게 바쳐 인간 구원에 바치는 것 그것도 제법 되지마는 온전한 연보는 안돼.
온전한 연보는 ‘내가 이거는 내가 바쳐야 할 터이니까 이것을 다른 사람에게 도움받지 아니하고 내 힘으로 해 가지고 해서 기어코라도 바치겠다.’ 하는 그 사람은 자기 몸을 바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바치는 것이고, 다른 사람의 도와줌으로써 굴지 매울 줄 알고 하는 사람은 그 밑에 제일 하등 연보, 여유있는 연보를 하는 사람은, 여유있는 연보를 한 사람은 ‘네가 여유를 바치므로써 다른 사람이 네 곤란한 것을 그 여유로 너를 줘서 네 곤란을 면케 한다.’ 이 연보에 똑똑히 말해 놨어. 알아듣겠습니까? 여유있는 것을 바친 사람은 여유있는 것을 바치므로써 그 어려움 당하는 것은 다른 사람이 그 어려움을 굴지를 메워줄 수 있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 네 어려움이, 굴지가 매여서 어려움이 없이 되리라 그래 가지고 균등되게 한다 그렇게 말씀해 놨습니다. 그 밑에 있지요?“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케 하려는 것이 아니요 평균하려 함이니 이제 너희의 유여한 것으로 저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저들의 유여한 것으로 너희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평균하게 하려 함이라” 여기 속한 연보입니다. 여기 속한 연보가 돼요. 아주 가치있던 연보가 뚝 떨어져 가지고 거기 속한 연보가 됩니다.
이러니까 자기가 있는 것을 다 바쳐 놓은 사람은 자기가 곤란이 올 터이니까, 쓰기 곤란이라 말이오. 쓰기 곤란이 올 터이니까 그때 시험에 들지 아니하고 이제 주님의 그 어려움에 동참하는 것, ‘주님은 옷 한 벌이 없어, 머리 둘 곳이 없었는데’ 그 성구를 자꾸 외워요. ‘주님은 머리 둘 곳이 없었는데’ 외워서 자기에게 연보되게 하는 것.
어떤 사람은 없는 것을 작정했다 그말이오. 없는 것을 작정했으니까 어디서 나오겠어? 성경에 물질은 무슨 값이라 했지요? 피값, 물질은 피값입니다. 자기가 아무것도 없는 걸 작정을 해, 작정을 해 연보를 해 놨으니까, 이제 그 연보에는 자기는 할려면 피밖에 팔 게 없다 말이오. 피밖에 팔 게 없어.
이러니까 자기 몸으로 충당해야 되겠으니까, 중간반 반사로 말하면 몸으로 충당하려 하면 뭐 밥값 본봉으로 내야 되지, 또 그거 가지고 토큰도 사야 되지 여유가 돈 한내끼도 없는데, 할려면 가봉밖에는 받을 게 없다 말이오. 가봉을 해 가지고 그 돈을 갚는 날에는 하나님이 자꾸 축복을 내리 퍼부을 것입니다. 내리 퍼부을 것이오. 자기가 다른 때보다 ‘아, 내가 그 연보 작정한 연보를 내가 갚을려면 가봉을 받아야 되니까 가봉을 받을려면 내가 아침 일찍 일어나야 되겠다.’ 이래 가지고 ‘가봉’ 하면서 일찍 일어납니다. ‘이것이 주님의 고난에 주님의 몸을 바친, 주님의 몸 바침에 동참이라. 주님이 몸 바쳐 나를 구속했기 때문에 나도 몸 바쳐 주님을 이제 사랑합니다. 대접합니다.’ 이래 가지고 그 마음으로 자체가 성화되는 것이 굉장할 것이오.
그러면 자기가 그렇게 할 때에 피곤할 때에 낙망하지 아니하고 그걸 바로 깨달아 가지고 이렇게 했어. 이 사람이 없는 걸 연보하고 나니까 그다음에는 얼마나 부지런한 사람이 돼 버렸고, 그만 자기를 절제시키는 사람이 돼 버리고, 이래 놓으니까 과거에는 설렁 설렁 일은 하고 그 남은 힘은 자기 행락에 다 투자하고 자기 취미에 투자하고 다 이렇게 노라리하고 돌아다녔는데, 이제는 이걸 하고 난 다음엔 여유가 없어. 있는 힘을 다 기울여 해야 되기 때문에. 이렇게 되어지면 참 주님 앞에 연보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자기 몸을 바쳐 하는 사람.
과부의 연보는 어떤 연보입니까? 과부의 연보는 주님이 크게 생각하는 것은 ‘연명할 것을 바쳤다. 자기 연명할 것을 바쳤다.’ 이러니까 먹고 살 것 바쳐서 자기 죽을 각오하고 바쳤기 때문에 연보에서 순교도 있을 수 있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연보에서 생명 바친 것도, 그 거지 과부는 연보지마는 그거는 생명을 바쳤기 때문에 주님이 제일 크다고 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유있는 것도 안 바치는 자, 제일 입학이 여유있는 것 바치는 사람, 그다음에는 여유는 없지만 자기에게 필요한 거 있는 것 바치는 사람, 자기에게 없지마는 자기 몸과 생명 하나 생각하고 몸과 생명을 이것을 팔아 가지고 바칠 요량하고 자기 몸을 바치는 연보하는 사람, 자기의 생명을 바쳐 연보하는 사람 이렇게 차이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이런 계급에 따라서 있을 터이니까, 그게 있는 자마다 마귀가 와서 시험하는 그 시험에 들지 않도록 여러분들에게, 이제 기쁨으로 연보답게 연보를 했는데 그 연보에 끝을 잘 맺어 가지고, 끝을 잘 맺어서 참 하나님에게도 영광이 되고, 자신에게도 구원이 되고, 다른 사람에게도 빛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미 해 놓은 연보가 아나니아의 연보가 되지 않도록, 아나니아의 연보는 어떤 연보입니까? 연보해 놓고 난 다음에 뒤에 생각하니 인색한 마음이 있었고, 인색한 죄를 지었고, 그다음에 더 큰 죄를 지은 것은 인색한 그 마귀 시험에 끌려 가지고 그것을 속여서, 그 액수를 속여 가지고 둘인데 하나를 가지고 ‘이게 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 대한, 연보는 하나님께 향해서, 하나님을 대해서 하는 것인데, 하나님을 대해서 하는 것인데 그 액수를 속이는 이것은 네 사람 속이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다 해 가지고 두 부부가 즉사했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러니 참 손해가는 연보가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이러니까 이 연보를 어제 오전, 오후 설교는 연보를 연보답게 하라는 것으로 설교해서 그 말씀만 하면 연보답게 연보를 할 것이고, 연보 난 액수를 보니까 연보답게 연보는 됐습니다. 연보답게 연보는 됐습니다. 연보 이것 때문에 망하고 연보 때문에 싸우고 찢고 이러는 그 가정은 그 가정이 회개를 해야 되지 회개하지 않으면 ‘이놈아, 그러면 내게 있는 거 내것 그거 다 내가 도로 찾겠다.’ 대가리를 찾아 놓으면 큰 문제요. 단숨에 바보가 돼 가지고 하는 일이 전부 다 망할 터이니까 어찌 돼? 대가리를 찾으면 어찌 돼요? 몸뚱이를 찾으면 어쩔 것이오? 소유를 찾으면 어찌 될 것이오? 그런 망령을 부리면 안됩니다.
인본주의 교회에서는 어떠한 일을 해도 괜찮소. 인본주의 일에는 해 봤자 하나님께 합격되지 않고 다 인본의 생활이기 때문에 다 제거니까 성전 밖마당에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서부교회는 인본주의 교회 아닙니다. 성전과 제단과 경배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연보 일하는 그말 하는 게 아니고 꼭 진리와 영감으로만 지금 가르칠려고 하고 있습니다. 딴걸로는 하지 않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혹 그런 시험에 걸렸으면 그것을 단단히 회개를 하고 고쳐야 될 것입니다. 그것을 완전히 회개하면 또 먼저 된 자가 나중 되고 나중 된 자가 먼저 될 수도 있어. 또 배나 더 은혜롭게 될 수도 있어.
이러니까 회개만 하면 돼. 회개하고, 진정, 아무리 원망 불평으로 했다 할지라도 다시 회개하고 감사함으로 하면 고쳐집니다. 또 자기가 연보한 결과에 잘못해 가지고 이 연보를 할 때는 잘했지마는 끝을 잘못 맺어 가지고 했으면, 끝을 잘못 맺은 것은 인간의 시험에 드는 것이니까 다시 회개하고 고치면 또 된다 그거요. 한 번 그런 마음을 먹었으면 안된다는 말이 아니고 성경에는 하루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잘못한 것을 회개하면 된다 했습니다.
이러니까 회개해서 여유있는 그것도 연보하지 아니하고, 여유있는 것도 다 바치지 아니하고 한 그런 사람은 그대로 신앙을 지켜서 자라가야 될 것이고, 여유있는 것을 바친 사람은 시험이 들어올 터이니까 그 시험을 이겨야 될 것이고, 있는 대로 바친 사람은 더 큰 시험이 들어올 터이니까 그 시험을 이겨야 될 것이고, 또 없는 것을 바친 사람은 더 큰 시험이 들어옵니다. 더 큰 시험이 들어올 터이니까 그것을 이겨야 되겠고, 자기의 생명을 바친 사람은 더 큰 시험이 들어오니까 그 사람도 그 시험을 이겨야 좋은 결과를 맺을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 서부교회가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면 예배당이 잘 지어집니다. 기뻐하지 않는 것이 들어오면 그런 것은 제거해 버려야 돼요. 그게 들어서 거기 더러운 것이 들어 있으면 성전 건축이, 예배당 건축이 순조롭지 않아요.
그러면 그런 거는 다 제거해 버릴 건가? 제거해 버리면 안돼. 제거해 버리면, 제거해 버리면,, 눈이 자꾸 핏발이 서고 눈물이 나고 눈이 아프니까 쏵 잡아 뽑아 내버려 버리면 시원할 줄 알아도 눈을 빼 버리면, 그래라도, 핏발 서 있으며라도 붙어 있는 게 낫아. 알겠소?‘이런 연보는 이거 부정하니까 제거해 버려야 되겠다.’ 제거해 버리고 나면 그다음에는 우리 본체는 더 고통스럽고 주님은 더 걱정하십니다. 이러니까 그것을 제거해 버리는 것은 그런 마음이 없도록 그에게 깨닫게 해 줘 가지고 깨달아서 이제 감사와 기쁜 마음으로 연보, 그거나마 연보다운 연보가 되어지도록 해야 될 것이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연보하고 난 다음에 이 일이 잘 끝을 맺도록, 끝을 맺는 것은 뭐이냐? 이제는 그런 것이, 그런 어려움이나 그런 고난이 없어지기까지, 자, 없는 것을 바친 사람은 끝까지 바로 연보답게 한다고 하는 것은 언제까지입니까? 없는 것을 작정해 놓고 하는 사람은 언제까지 하는 것이 끝을 잘 맺는 것입니까? ○○○씨? 죽을 때까지가 아니라. 여기, 뭐라 하노? 감사가 계속해야? 저기는? 자기 한 것이 다 갚아지면 그다음에는 없을 거라. 갚아지고 난 다음에 기쁠 거 아니오? 갚아지고 나니까 자고 싶은 사람 자고 좀 쉬고 싶은 사람 쉴 수 있으니까, 갚아지고 나면 그때는 그런 거는 날래야 날 수 없는 거라. ‘아, 이제는 다 갚았다.’ 기쁨이 나오는 그때까지가 그 어려움이 있을 때에 원망이나 불평이나 그로 인함이라 하는 그런 것이 없이 단 마음으로 그 돈이 다 갚아지기까지 단 마음으로 수고해서 끝이 났으면 그는 끝을 잘 맺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이 연보에 대해 끝맺는다는 것을 잘 알아들어야 돼요. 이 연보는 언제가 끝인가 저 연보는 언제가 끝인가 그걸 잘 알아야 돼요.
또 있는 것을 다 바쳤는데 끝을 잘 맺는 것은 언제까지 원망 불평 없이 감사함이 언제까지 계속되면 끝을 잘 맺는 게 됩니까? 여반에 한번 대답해 보지요? 예? 네, 곤란이 없기까지, 이러니까 없기까지 하면 돼. 마귀라는 놈이 들어오면 그로 또 다가 아니오. 곤란이 없게 되고 난 다음에도 ‘내가 그때 그거 안 바쳤더라면 지금은 얼마가 됐을 건데!’ 그렇게 또 망령된 것는 또 망령됩니다. 마귀라는 놈은 끝까지 우리를 꾀웁니다.
있는 것 다 바친 사람은 이다음에 곤란 없기까지 될 때까지 하면 끝을 잘 맺은 사람이오. 또 곤란당한 것이 없기까지가 아니고 끝을 잘 맺은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이지? 아냐, 있는 것을 다 바친 사람인데, 그 사람이 곤란당하는데 곤란이 없기까지 원망 불평없이 감사함으로 지냈으면 이제는 곤란 없으니까 그런 시험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이거 끝을 잘 맺었습니다.
그보다도 속성으로 끝맺는 일이 있는데 그거 뭐입니까? 네, 이 사람이 잘 깨달아. 이거 앞으로 좋은 목사 되겠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고난을 원하는, 주를 위해서 죽기를 원하고 원하는 사람이면 당장 해결 다 됐다 그말이오. 이 사람이 신앙입니다. 그래야 그 사람은 오든지 가든지 있든지 말든지, ‘내가 부요할 때도 처할 줄 알고 가난함에도 처할 줄 알고 내가 지족함을 알았다. 주를 향하여 따라가는 생활이야 내가 이래도 좋고, 감옥에 가도 좋고 존영한 자리에도 좋고 아무데나 주님 인도하는 걸음을 나는 만족한다.’ 하는 지족을 아는 사람, 그러면 없으면 어쩔려고?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느니라.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이런 사람들은 벌써 기본회개를 해서 자기를 부인하고 새사람으로 살기 때문에, ‘아, 독생자도 아끼지 아니하고 너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 하물며 모든 것을 너희에게 주지 않겠느냐? 왜 그분을 믿지 않느냐?’ 그런 사람들은 다 해결이오.
이러니까 여러분들 ‘이 연보에는 무슨 고난이 시험이 올 것이다. 저 연보에는 무슨 시험이 올 것이다’ 하는 그것을 여러분들이 알고 기다리고 있으면 마귀라는 놈이 낙망을 합니다. 여기 와 가지고 마귀라는 놈이 ‘백목사 저걸 죽여 버려야 될 터인데 저걸 살려두기 때문에 지금 큰 야단났다.’ 그놈이 그럴 것이고, 실은 이거 뭐 미군 철수보다도 한국 남한에 있는 하나님의 종들을 이거 제거하는 것이 이것이 참 직선입니다. 직통, 직통 김일성이 성공이오. 이렇지만 김일성이 그런 거는 모르고, 또 알아도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니까 안돼.
저 먼저께는 그날 밤에 마음에 이상스러워서 동원을 해 가지고 이랬는데, 저 재목집에서 이자가 거기서 술먹고 살인 도급을 받았다 말이오. 나 죽일 도급을 받았어. 그래 가지고 사다리를 갖다, 저기 사다리를 갖다 놓고 그리 올라가 가지고 이래 넘어 올려고 이랬는데 뜻밖에 사람들이 그때 많이 모여 가지고 웅성하니까, 올라오기는 올라와 가지고 와 보니 사람이 많아 내려오지 못하고 거기 있다가 붙들렸다 그말이오. 하나님이 하지 않았으면 그게 와 가지고 여기 들어오니까 뭐 다 자니까 뭐 있습니까? 또 사다리 가지고 5층에 기어 올라왔을 거라 말이오. 기어 올라와 가지고 그때 어떻게 할지 모르지.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시니까 그게 거기 올라와 가지고 여기도 들어오지 못했어.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안돼! 다른 사람은 ‘뭐 그렇게 꾸미냐?’ 그러면 왜 그때 그날 밤에 그 사람이 뭣 때문에 왔어? 신분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라. 뭣 때문에 그날에 둘이 여기 와서 앉아 술 실컷, 열두시 지나도록 술 먹고 그래 가지고 왔겠소? 그런데 그 사람을 딱 붙잡았으면, 살인도급하는 사람은 그렇습니다. ‘얼마 주마.’ 이번에 전대통령도 얼마? 6천만 원. 3천만 원이더나? 6천만 원이더나? 도급비가? 이 사람을, 전대통령 살해 도급맡은 사람이 신문에 액수가 나오지 않았어? 아무도 기억 못하고 있어? 응? 이런, 6천만 원인가 3천만 원인가 그렇대요.
그 사람 붙들리니까 성공 못하지 않았어요? 이렇게 도급을 살인 도급이 있습니다. ‘얼마만, 얼마 줄 터이니까 네가 그를 살해하겠느냐?’ 계약을 맺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것을 그 사람의 이름으로 뭐 수표를 끊어주는 것보다 현금이오. 그거는 외상이 아니라. 현금치기라. 이래 가지고 술 먹이고 그다음에는 독약을 먹여. 독약을 먹이면 아무것도 무서운 것이 전혀 없어. 없어져 버려. 그래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이래도, 그날밤에 하나님이 먼저 알려 주셔서, 헤롯이 죽일려고 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벌써 먼저 현몽해 가지고 피하게 하니까 다른 사람만 죽였지 예수님은 살해하지를 못했다 그거요.
그런 일 많아요. 한상동 목사님 말 들으니까 8월 17날 감옥에서 나와 가지고 그 방에 모두 같이 누워서 자고 있는데 한상동 목사님 꿈에 ‘여기 소련군이 들어오니까 빨리 피해라.’ 이래서 갑자기 일어나 가지고 모든 출옥 성도들을 막 두드려 깨우면서 ‘여기 지금 이런 내가 이상한 징조를 내가 봤다. 빨리 피해라.’ 이래 가지고 주인한테 소리해 가지고 ‘지금 소련군이 우리 습격하러 온다 하는데 어디 피할 자리가 없느냐?’ 하니까 그분들이 말해 가지고 요리 넘어가면 되니까 요리 넘어서 어디 가 숨으면 된다고 그래 막 숨고 막 나가고 나니까 소련군이 포위해 딱 들어왔더라고. 그때 붙들렸으면 그만 가는 거라. 하나님이 허락지 않으면 안돼. 이렇게 우리를 세밀히 간섭하십니다.
제가 위천교회 있을 때에도 누워 자니까 하나님께서 ‘공비가 너를 잡으러 오니까 빨리 피해라.’ 하는 그런 꿈을 꿨어. 이상함을 봤어. 이래 가지고 ‘아마도 그래도 뭐 누워자지. 뭐 그거는 공연한 생각이겠지. 내 주관의 감정이지.’ 또 누우니까 또 그래. 할수 없이 일어나 가지고 ○○○목사입니다. 그 사람들이 주목해서 죽일려고 하는 건 나하고 ○○○집사님, ○○○집사 둘밖에 없기 때문에 ○○○집사를 집에 가서 깨워 가지고 ‘아무래도 안됐다. 가자.’ 거기서 살금살금 피해서 한 100미터 오니까 뒤에 따콩따콩 총 소리가 납니다. 나는데, 나 막 거기서 집 밖에 나가자 인민군들이 우리 사택에 습격해 가지고 ‘어서, 조사 어디 갔느냐? 조사 나오라.’ 그래 찾더라고.
그랬는데 그때에 그 면이, 위천면이 3일동안 공산주의에 점령을 당해 가지고 학교, 면소, 금융조합, 뭐 지서 전부 쏵 다 태우고 거기 있던 순경들은, 포위당한 순경은 다 죽이고 그랬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시기 때문에, 이분을 친하지 않아 놓으면 내가 뭐이 될지 압니까? 이분을 친해 놔야 이분이 우리를 책임을 지고, 내가 그분에게 책임을 맡겨야 그분이 책임을 지지. 사소한 일도 내 일 다 내가 책임지고 그분에게 안 맡기는데 그분이 날 책임질 수가 있어야지? 어리석지 마십시오.
이번에 연보하는 것도 좋은 기회입니다. 좋은 기회요. 또 이런 연보 이거 거석한 사람들은 이런 것은 벌써 지나가고 그런 거는 아예 그런 데는 상관없는 그런 세계에서 다 신앙생활 합니다.
어제 나온 것은 3억8천4백인데 아마 더 나오지 않느냐? 한 4억이 나오지 않느냐? 이랬으니까 연보는 단 마음으로 바쳤습니다. 단 마음으로 연보답게 바쳤는데 연보답게 끝을 맺으십시오. 끝을 맺고 어디까지 와야 되느냐? 그 결과가 와야 됩니다. 결과가 와서 모든 사람에게 환하게 보여줄 수 있는 그 결과가 와야 됩니다.
그 결과는 어떤 사람은 돈은 한 푼 없어도 능력있는 사람 있고, 어디 가서 말만 하면, 어디 가든지 가면 차비 나오지 옷 나오지 돈 나오지 밥 나오지. 나는 이제, 나는 돈은 없어. 돈 그거 필요없어. 어디 가든지 가면 밥 자꾸 밥 줄려 해서 밥이 많이 들어와 문제이지, 옷이 많이 들어와 문제이지. 차비가 많이 들어와 문제이지.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나에게 있는 권능이 내 재산이라. 내 옷이요 밥이요 차비요. 다 돼.
이러니까 이제 이런 이것으로서, 이것으로서 이제 하나님 앞에서 갚아 주시는 씨를 심는 이 씨를 받은 사람이 최고, 이 씨 받은 사람이 최고요. 이 씨 받은 사람, 이제 여기 있는 이 모두 남녀 반사들은 이 씨를 받아야 될 거라. 이 씨를 받아야 되니까, 그래 가지고 척 그러니 뭐 어디든지 안 있습니까? 여기서 집짓는다 하니까 ‘무슨 돈 가지고 이 불경기에 지을렵니까? 불경기, 어려운 불경기, 연보가 날 때에, 이 집 지을려면 한 3억 되어야 될 터인데 무슨 연보로 그런 연보가 나겠습니까?’ 이러는데 그걸 아무것도 돈 한 푼도 없는 것이 ‘3억짜리 집짓자’ 하니까 이제 4억이 썩 나왔다 말이오. 그것이 내 영광이요 여러분들의 영광이요 주님의 영광입니다.
그 사람이 어제 전화를 했어. ‘어떻게 됐습니까?’ 이래. 전화를 했어. 내가 전화에서 말하니까 그 사람이 마음에 깜짝 놀라며 ‘아, 이 신앙이 이런 게 신앙이로구나!’ 연보는 연보답게 하기는 했는데 끝을 잘 맺어야 되겠고, 끝만 잘 맺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 ‘봐라!’ 하고 눈에 보이다시피 뚱그러이 와야 되겠는데, 씨와 양식이 와야 되겠는데, 그러면 이제 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