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23:12
참 목자
본문 : 요 10:1-3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의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참 모두 간증을 하는데 다 속에 성령이 역사하는 그 흔적을 들을 때에 기쁩니다. 우리가 늘 말하기는 쉽지마는 실상은 매우 어렵습니다.
우리의 행동이라 하는 것은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도 있고 몸으로 행동하는 것도 있는데 몸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마음으로 행동하는 것이 더 위대합니다. 또 마음은 몸보다 심히 능력있는 것이 마음입니다. 또 영은 더욱 그러합니다. 영은 그 본인에게 대해서는 중생된 후는 하나님과 꼭 같은, 꼭 같은 일을 자기 육에게 베푸는 것이 그것이 영입니다. 뭐 하나님과 조금도 다름이 없이 역사합니다.
그것을 표시해서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해 준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몸으로 행동하는 이것만을 행함이라고 자주 그 착각하는 이런 일을 우리가 범하지 아니해야 할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꼭 행함에 대한 하나님의 비판이 나올 때에는 중심이라고 했습니다. 그 중심을 본다 그 심령을 본다 마음의 뜻을 본다 말씀했습니다.
○목사님이, 자기 그 체험이겠는데 '하나님에게 대한 그저 바른 마음을 가지니까? 달라지더라' 녜 그것이, 다 그런 체험들을 자기가 자꾸 자기를 연구해서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받을 수 있는 그 마음을 갖추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사람의 행위를 보고서는 복 받을 행위다 하나님이 섭섭해하는 행위다 그렇게 그 행위보고는 판단한다는 것이 너무 껍데기이기 때문에 우리 사람들도 그런 판단은 하기가 싫습니다. '아, 그 사람이 이런 이런 그 행동을 하니까? 복 받겠다' 하는 그런 판단을 우리 사람들도 가지기 싫습니다. 왜? 너무 그거는 외부적이기 때문에 그 마음이 문제지요. 그러나, 그 마음을 볼 때에 '아! 그분의 그 마음 참 복받을 마음이라' 그것은 우리가 담대히 그렇게 평가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복받을 마음을 우리가 가지도록 노력을 해야 될 것입니다.
몸의 행위보다는 마음의 행위가 아주 탁월한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 마음은 모르기 때문에 몸으로 행동한 육안으로 볼 수 있는 그것을 위주로 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러하지 하나님은 그 마음을 다 감찰하시기 때문에 마음을 표준으로 하지 몸의 행동을 표준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사람은 그래도 영혼이 다 있기 때문에 영은 죽은 사람이라도 그 영물이기 때문에, 판사가 무슨 판단을 해도 벌써 외부의 나타난 법적인 행위는 어떻게 됐다 할지라도 그것을 뭐 법적으로 뚜렷이 내세울 만한 그런 것은 못 된다 할지라도 그 마음을 보는 면에서 어떤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법을 어떻게 하든지 활용해 가지고서 그 사람을 좀 변호해 주고 싶은 사람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법인이 어쩔 수 없지마는 할 수 있는 대로는 법을 활용해 가지고서 그를 정죄하고 싶은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그것은 다 똑똑히 보지 못하나 그 속에 마음의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다 느끼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씩 확정을 지워서 가야겠는데 '나는 몸의 행동을 행동으로 표준하지 안하고 마음의 행동을 행동으로 표준하겠다' 요것도 작정만 하면 굉장한 투쟁이 생겨집니다. 거기에서 마찰도 생겨지고 또 그런 가운데에서 자기도 모르게 뭐 헝클어져서, 헝클어져서 대단히 분망할 일이 아주 간단하게 그렇게 정리되는 것을 우리가 얼마든지 봅니다. 그러기에, 마음의 행동을 표준으로 삼아서 거기에서 무엇을 시작도 하고 정리도 하고 처리도 하고 정돈도 하고 하는 사람이 참 슬기있는 사람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 종종 말씀하신 것을 보면 마음의 행동에서 잘못 저질러 놓은 것은 필연적으로 조만간에 그거는 몸의 행동으로 나오기 때문에 몸의 행동에서 그것을 무슨 정리해서 고쳐보겠다고 하는 그것은 참 둑에 구멍이 난 것을 밖에서 막으려는 거와 같고 그것을 마음에서 마음에 가 가지고 그것을 정리를 할라고 하는 사람은 둑에 구멍나서 물 흐르는데 안에 가 가지고서 안에 들어가서 막는 거와 꼭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에, 행동에는 그것을 삼가하나 마음에는 삼가하지 안하는 그런 사람이 되는 그것이 스스로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기는 압니다. 그러기에 그만 자기에게 불신임당해 버립니다. 자기가 자기를 불신임해 버립니다. 그러면 자신이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에 정확이라 하는 것이 생겨지지를 안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꼭 심신의 행동이 하나이지마는서도 마음의 그 행동을 행동의 표준으로 삼고 그것이 몸의 행동까지 번져 나가도록 그렇게 우리가 산다면 속지 아니할 것입니다.
몸의 행동과 마음의 행동이 다른 그것은 다른 사람은 해하지 못하고 자기만 해합니다. 다른 사람은 몰라서 속는 것 같지마는서도 그것에 대한 변상은 조물주가 다 심판으로 다 변상합니다. 그러기에 작은 것을 가지고서 큰 복을 빼앗기는 사람 많습니다. 조그만한 일 가지고서 큰 복을 자기가 끌어오는 일이 많습니다.
요거는 다 여기는 속한 것이 아니고. 그저 제가 증거하는 일에 대해서 사람들이 말할 때마다 제게는 좀 가슴이 따끔따끔합니다. 그것이 또 내가 알고는 외식이라고 회개도 합니다. 제가 그렇게 독서에 능률이 없습니다. 없어서, 모든 선배들의 그 저서를 아주 읽은 그 독서량이 없습니다 전혀. 제가 이름만 그저 뻘코프 조직 신학이라 어드만 조직 신학이라 뭐 칼빈 조직 신학이라 또 박형룡 박사가 엮어 놓은 조직 신학이라 이래 말만 하지 실은 그 책을 한 박형룡박사의 저서를 삼 페이지 이상은 내가 읽어보지 안했고 다른 분들의 저서도 그렇습니다.
제가 그 넓은데 가 가지고서 아주 광문 다학한 이 목사님들 ○목사님이 그 ○목사님이나 ○목사님 이런 분들 또 가끔 어데 선교사로 오는 그런 분 들 있으면 강의에 참여도 하고 이래서 늘 제가 염려하는 것은 그것이 있습니다.
고려 신학교 제가 들어갈 때에 거기에 들어가는 제일 목적은 따로 있었고, 제일 목적은, 그때 절 딿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내가 갑자기 죽을지 모르니 나를 딿는 사람들을 어디다가 귀속을 시켜 놓고 내가 가겠나 만일 이라다가 이리 되는 날이면 그 참 흉악한 이리 떼들이 와 가지고서 이럴 터이니까? 어데 이것이 소속이 되겠느냐 이래서 그때 인제 비판하고 평가하다가 제일 고신이 낫다 해 가지고서 그 후배들을 고신으로 귀속시키기 위해 가지고 제가 고려 신학교를 갔었습니다. 처음에 그만 마음에 그렇게 맞지 안해서 그만 나흘만에 와 버렸습니다. 박영기 조사님도 그때 나흘만에 의논한 거는 아니고 뒤에 조사해 보니까? 그런데 그분도 그만 나흘만에. 그만 가 버렸습니다. 그만 여기에서 자꾸 이래 뭐 이라고 있을게 뭐꼬 이라면서 그분도 참 그때 일 많이 했습니다. 그것이 첫째고.
둘째는 내가 이거 혼자 성경만 보고 이렇게 깨달은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이 공통성이 있나 없나 모든 사람들이 깨달은 이 깨달음의 공통성이 있나 없나 하는 그것을 알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둘째로 가졌고, 또 그러면 이것이 그래도 거기에는 아주 오랫동안 그 계통적으로 연구해서 나온 참 역사성이 있는 그런 모두 교리와 신조를 갖추고 있으니까? 이거 내가 깨달음이 어떤고 해서 그런 생각을 가지다가 그래 그 신학교에서 배우는 대로 배우면서 틀린 것이 없다는 거기에 대해서 별로이 그들과 깨달은데 틀린 것이 없다는데 대해서 참 마음에 쾌감을 느끼고 또 힘을 얻었습니다.
그라고 이 ○목사님 ○목사님이 갔다 왔을 때에 제가 노트를 맡겼습니다.
맡겨서 내가 뭐 어찌 증거한 가운데에 혹 자기네들이 배운 대로 이거 좀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것을 기록해서 날 알려 달라 나는 참 우물 안의 개구리 모양으로 도무지 그 일반 교계에서 공통적으로 이렇게 깨달은 것이 어찌 되는지 내가 그것을 보지 못하고 나 혼자 독단으로 이래 깨달았기 때문에 이 어느 정도의 위험성 탈선성이 있는지 그것을 기록해 달라고 그렇게 보냈었습니다 그랬는데, 또 노트도 주고 말로도 그래하고 했는데-그분들이 그 나를 속여서 그렇지는 안할 건데 -뭐 별로이 그런 것이 없다고 이렇게 해서 별로이 그런 지적을 받지를 못했습니다.
○목사님한테서는 새 사냥군이라 하는 그걸 저는 그전에는 새(鳥)라고 하다가 그 뒤에 또 어찌 내가 생각하기를 새 사냥군이라 하면은 묶은 사냥군 지친 사냥군이 아니고 새로 출발하는 새(新)사냥군인가보다 이렇게 제가 생각을 하고서 그걸 말하다가, 그 그런 것이 아니고 새라고, 여기 날아다니는 새 그 새의 사냥군이라는 그 뜻이라는 것을 수정받았고 다른 데에서는 하나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라고 그 뒤에 차차 차차 이제 여기 저기에서 오랫동안 그래 나오는 가운데에 세월이 지나가니까? 이제 저에게 깨닫게 한 것이 그렇게 탈선된 그런 것은 없다 하는 것을 그런 것을 제가 알고 기쁨을 가집니다.
제가 이 성경에 대해 깨달은 것은 내가 성경을 보고서 알라고 이렇게 앉아서 읽고 연구하고 생각하고 생각해서 이렇게 해서 깨달은 것은 별로이 없습니다.
별로이 없고 제일 많이 깨달은 것이 새벽으로 그 인도할 때에 언제나 부족하지마는서도 주님이 오늘 새벽에는 무슨 말씀을 해 주실 것인가 주님이 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주님이 해 주시는 그 말씀을 나를 통해서 하리라 그렇게 생각하고, 주님이 무슨 말씀을 오늘 새벽에는 하실 것인가. 그분이 언제든지 말씀해 주시는 그것을 받을라고 애를 쓰는 그거는 변하지 안하고 그랬었습니다.
지금도 늘 그래 나오는데.
그래서 제가 무슨 성구를 보고 이 말씀해야 되겠다 그렇게 설교 제목을 택해 본 것은 없고, 본문은 택해 본 것은 이제까지 제가 알기는 별로이 없습니다. 뭐 집회를 가도 그렇고 그저 '하나님이 무슨 말씀을 하라고 하시는가' 이라다가 그것이 참 바로 된 것도 있겠고, 뭐 잘못된 것도 있을런지 모르겠지마는.
마음에 이 말씀이라 하는 것이 자기에게, 내 생각에 감동돼 올 때에 그 말씀을 증거하게 되는데 그 말씀은 대개 보면 내가 생각지 못하던 것 또 군중을 보고, 군중을 보고 그 형편을 봐서, 이 말씀을 해야 되겠다. 군중에 맞추어서 그래 하는 그런 말씀이 아니고, 그때 깨닫게 될 때에 제가 그 제목을 가지고서 설교하면서 대개는 배운 것입니다. 새벽기도면 새벽기도에 설교하면서 그저 일어나서 설교하는데, 내게 깨닫게 해 줘 가지고서 깨닫는데 어떨 때는 그만 깨달은 대로 그렇게 말해 놓고 이 말이 무슨 탈선되는 말을 했나 내가 뭐 좀 상고도 해 보고 대조도 해 보고 성경적인가 이것도 좀 해 보고 해야 될 터인데 그만 말만 이래 떡 선포를 해 놨으니까? 이것이 어찌 됐나 해서 설교를 지금도 설교를 하고 난 다음에는 뒤에 떨려서 반드시 그 설교한 것을 재독할 때에 저는 꼭 재독을 듣습니다. 재독을 들어서 이게 무슨 잘못된 것이 아닌가 그래 들어 보면 괜찮다 할 때에 그때 인제 안심을 하고서 그라는데, 대개는 강단에서 배운 것이 제일 많고.
또 그 다음에는 제가 이렇게 좀 기도하면서-거기에 대해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기도하는 가운데에 우뚝 깨달아진 것. 나는 그걸 생각하지도 안했는데 기도하는 데에서 '아!' 무엇을 하나 깨달아 '아!' 그래 깨달아지면 그때 그것을 기록을 하고 이래 기록을 해서 기도하는 가운데에서 깨달아진 것 그리 안하면 어데 길을 가면서도 이제 주님에게 대해서 이렇게 뭐 주와의 관계에 대해서 이렇게 주를 생각하면서 이래 갈 때에-생각한 그 문제가 아니고-그럴 때에 뜻밖에 나에게 깨닫게 해 주는 것이 있어서 그래서 깨달은 것 기도 가운데에 뭐 묵상 가운데에서 깨달은 것 또 길을 가면서 이래 생각하는 가운데에서 깨달아진 것 또 내가 혹 무엇을 생활하면서, 생활하는 그 생활에서 깨달아진 것.
언제든지 모르는 것은 성경에서 모르는 문제가 나오고 그 문제를 깨달아진 것은 그런데에서 깨달아서 배웠고 설교에서 배웠지 별로이 뭐 사람에게 배운 것이나 제가 연구한다고 해 가지고서 배워진 것은 아닙니다. 그랬는데 그것이 그렇게 탈선된 일이 없고, 이제까지 수많은 종들이 연구 연구했는데 그 깨달은 거와 일치됐다는 그거 나는 큰 기적으로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알려 주셨다 기적으로 생각하고. 그래서, 하나님이 나에게 알려 주셨기 때문에 이것은 참 자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자랑하는 것이지마는서도 내가 자랑하는 것같이 이리 되기 때문에, 나는 지금 이것을 연구해서 안 것도 아니고 이건 참 공짜로 얻은 것뿐입니다.
그러나 차차 차차 이렇게 성경에 대해서 아는 것이 폭넓게 이렇게 알게 되니까? 이제 성경이라는 것을 그 전체적으로 이렇게 체계적으로 알게 되니까? 지금은 좀 무엇이라는 것을 짐작도 하고서 이렇게 되어 집니다.
내가 이 말 하는 것은 왜 하느냐 하면은, 하나님께서 날 당신이 하나의 기관으로 삼아 가지고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나를 세워서 깨닫게 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깨달은 것이고 또 여러분들에게 붙인 모든 하나님의 주의 양떼를 위해서 이 깨닫게 해 주신 것이기 때문에 이 깨달은 것이라. 그래서 아까 ○○○ 목사님이 말한데 대해서 그 뭐, 참 저는 똑똑히 말하면 마태복음 23장 2절과 같이 '그들이 말하는 것은 들어 지키라 행하는 것은 보지 말아라' 할 수 있는 그런 꼭 그런 사람입니다. 나의 이거 행동을 보고 누가 만일 따른다고 하면은 그만 그 사람은 참 많은 손해 볼 것입니다. 그저 증거하는 요 말씀만 듣고서 이렇게, 이것은 하나님이 그저 막대기도 당신에게 붙들려질 수 있기 때문에, 통해 주신 것이니까? 그런 줄 알고 받아서 하는 것이 좋으리라 그렇게 생각되고. 모르기는 모르겠습니다. 모르나, 그러나 이상한 것 하나 본 것은.
그전에도 제가 이상한 것을 신앙생활 하면서 늘 이렇게, 주님이 내게 대해서 왜 이라는고 하는 그런 것을 더러 기억한 것이 있었는데, 제가 그것을 노트에다가 적어 놓고 그렇게 지내 나온 그런 것들이 있었습니다.
이 서부 교회에 이거 그만 시작하다가 끝을 내 버리는 것같이 이래도, 주일학교라든지 이 주일학교가 이렇게 이름나게 된 것 이거 모양으로 만일 퍼진다면은 이 복음이 널리 퍼질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러면 거기에 대해서 아무 내가 그걸 퍼칠라고 거기 대해서 참, 그걸 숨길라고 들었지 그걸 선포할라고는 한 것은 없었는데 그래 된 것 보니 '하나님이 이거 섭리하신다 하나님이 뭐 붙들고 이래 우리 진영을 붙들고 하나님 일하시지 않나' 그 뭐이 혹 가르칠 때는 보면 이 뭐할라고 이 무리들을 데리고, 아무 가르쳐 봐야 소망도 없고 희망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데 여기에다 이 가르쳐 가지고 뭐이 되겠느냐 이래 싶어도 이제 차차 세월이 지나감에 따라서 그런 건 아니라 참 그 보면 놀랠 만한 주일학생들이 있고 중간반 학생들이 있고 이래서 아마 하나님이, 당신이 붙들고 일하시는 것은 그저 큰 데에서나 작은 데에서나 인간 생각과는 아주 판이하다 그런 것을 느끼면서 나 보기에는 아주 허무해도 거기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대로 증거하기를 아무 낙망없이 소망을 가지고 그렇게 증거를 합니다.
제가 이 말 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것을 주님이 주셨다는 그것을 제가 하나의 간증해서 이것은 날 위함이 아니고 여러분들을 위함이고 모든 속한 양떼를 위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셨다 하는 그것을 이제 말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이고 이러기 때문에 이 복음대로 우리가 사명을 받았으니 '내가 심판할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들에게 말해 준 이 말이 마지막 날에 너희들을 심판하리라' 말씀하신 대로 이 우리에게 참 복음도 될 수 있고 심판도 될 수 있겠다 하는 그런 것이 생각나서 말합니다.
오후에, 이 요한복음 10장을 이래 보는데 여기에 보면,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뭐인지 이것을 하나 연구 과제로 두고 우리가 돌아가서 연구를 하도록 합시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것,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이렇게 중요합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요 강도요' 이랬습니다. 그러면,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안한 것은 다 절도요 강도라 이랬으니까? 우리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안하면 절도 강도 아니겠습니까? 양을, 그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양을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이랬으니까? 이것이 다 목자에게 대한 말입니다. 이거, 목회자에게 대해 한 말이니까? 우리가, 목회자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안한다면 우리는 이거 참 뭐 하나님의 일대 적이 안 되겠습니까? 이러니까?,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뭐인지 이것을 우리가 아무래도 좀 각각 연구해서 이걸 알아서 이 일을 우리가 성공을 해야 되지 이 일을 성공하지 안하면 우리는 목회자라 하는 이것이 양을 죽이고 멸망시키고 도적질하고 그렇게 하는 그것이 된다면 우리의 받을 심판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아무래도 우리가 문으로 들어가야 이 양의 목자지, 목회자 바른 목회자가 되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않고는 그 목회자가 아니라는 것을 여기에서 판정을 지워 놨습니다.
이러니까?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뭐인지 우리가 알고, 우리에 문으로 안 들어가면 나는 하나님의 양을 도적질하고 멸망시키고 죽이는 그런 적기독이라, 이거는 하나님의 원수라. 이러니까?, 우리가 이 일을 예사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깊이 깊이 생각해서 아무래도 이 문제를 해결을 지워야 되지 않느냐 우리가 다 목회자는 목회자인데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안하면 우리는 이 하나님의 양떼를 멸망시키고 도적질하고 죽이는 이런 자가 된다면 우리가 어찌 되겠습니까? 뭐 우리에 문으로 안 들어가는 자는 그런 자라 했으니까?, 뭐 누구가 아니라 그만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안하는 자는 뭐 몇이든지 다 그런 자라고 여기 단정을 지워 놔 버렸습니다.
3절에,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문을 안 열어 주면 못 들어 갈 터인데, 이 목자가 문을 열고 들어갈라고 할 때에는 문지기가 도와 준다, 문지기가 문을 열도록 도와 준다. 그러면, 이 문으로 들어가는 일은, 들어가는 이는 문지기가 도와 준다는 이 문지기를 뭘로 해석을 하겠습니까? 이 문 열어 주는 것을 뭘 그걸 사람으로 해석을 하겠습니까? 무슨 우연이라고 해석을 하겠습니까? 세상이라고 해석을 하겠습니까? 무엇이라고 해석을, 다른 것은 이것은 붙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또 양의 문이라 하는 것은 내라 했거든 '내가 양의 우리에 문이라' 이러셨거든. 이러니까?, 이제 이 문으로 들어가는 데에 문지기는 성령이라고 밖에는 우리는 해석할 수 없고, 이거는 성령이라고 우리가 해석하는 것이 이거는 뭐 틀림없는 해석으로 그렇게 확정이 됩니다.
그러면,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데에 성령은 도와 주신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면 성령님이 도와 주시고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안하면 성령님이 안 도와 준다 그 말이요. 또 그는 목회를 암만해야 양 죽이지, 양이나 죽이지 양을 살리지는 못한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이거 목회자가 되어 가지고서 이제까지 목회를 하고 있는데 우리가 정말로 양을 살리는지 죽이는지, 하나님의 양을 죽이는지 살리는지 어떤 일하고 있는지 이 일을 이거 아무래도 심각하게 좀 생각해서 요게 대해서 판정을 짓고 요게 대한 확신을 가지고 우리가 살아야 되겠습니다.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문을 열고' 문지기는 들어갈 수 있도록, 들어갈 수 있도록, 문을 안 열어 주면 못 들어갈 것 아닙니까? 저 혼자 들어가지 안하는 것이 아니라 문지기가 문을 열어줘야 들어가지 문지기가 문 안 열어 주면 어째 들어가겠습니까? 이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것이 이것이 어려워. 문지기가 도와 줘야 되지 문지기 도움 안 받고는 그거는 들어갈 수 없는 것이라. 절대로 들어갈 수는 없는 일이라. 문지기의 도움을 받아야 들어가지. 문지기의 도움을 받아 가지고서 문으로 들어가야 또 목자라. 거기 안 들어가는 것은 전부 도적이요 강도라. 절도요 강도라.
'위하여 문을 열고' 문으로 들어갈라 하는 그 사람을 위해서 문지기는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양은 그 자기에게 소속된 양이 아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물론 주님의 양인데 주님이 이 사람에게 저 사람에게 소속시켜 준 우리는 주님의 그 지체요 주님의 종이요, 그러기 때문에 주의 양은 우리 양으로 벌써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텀 우리를 통해서 구원하기로 한 그것이 우리 양이 아니겠습니까? 그게 있다는 말입니다.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러면, 이 양은, 이 양은 뭐 뭐이겠습니까? 오늘 새벽에 ○○목사님이 옛사람과 새사람에 대해서 많이 증거했는데 이 양은 그러면 우리가 안 믿을 때의 그 사람인지, 이 양은 뭘로 봐요 이 양은 그러면 예수 믿는 사람으로 봐야 되고 구원얻을 사람으로 보기는 봐야 되겠는데 이것을 뭘로 보겠습니까? 그러면, 이것은 벌써 '양이 목자의 음성을 듣나니' 했으니까?. 들을 수 있는 존재이니까? 이것은 뭘로 해석하면 좋겠습니까? 녜? 뭘로 해석, 뭐 어떤 것으로 해석할까요?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이제 문으로 들어간 자의 음성 듣는다 말입니다. 문으로 들어가지 안한 자의 음성은 듣지 안해. 문으로 들어간 자의 음성을 듣는데 이 양은 하나님의 택한 자요 참 천국갈 자요 영생을 할 자요 예수님의 피로 값주고 산 자가 아니겠습니까? 이 구원 받은 자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것을 옛사람으로 보겠습니까? 새사람으로 보겠습니까? 새사람으로 볼 수밖에 없다 말이요. 이거는 새 사람으로. 달리는 해석을 할 수 없어. 새 사람으로 해석할 수 밖에는 없어요.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러면, 새사람이 듣는 설교가 있고 옛사람이 듣는 설교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그 사람이 암만 설교해도 옛사람이 듣는 그 설교를 할 수도 있고 참 새사람이 듣는 그 설교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도. 우리가 그 설교를 들을 때에 알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러면 집회에 가 가지고, 어떤 다른 집회에 가서 참석을 할때에. 우리가 그렇게 확정은 짓지 못하지마는서도, 이거는 참 이거 꼭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좋겠다 이 안 믿는 사람들도 참 듣기에 좋고 이는 땅에 속한 사람들이 듣기에 좋겠고 세상 사람들이 듣기에 좋지 이것은 새사람에게는 전부 거리낀다 새사람이거 전부 죽이는 말이요 새사람에게는 다 거리끼는 말이요 이것은 옛사람 세상에 속한 그 사람에게 관한 말이다, 그걸 우리가 판정할 수 있지 않습니까? 이러니까?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이러니까?, 새사람이 들을 수 있는 설교, 새사람이 들을 수 있는 그 교훈 이것은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한 자라야 그런 설교를 할 수가 있다, 그런 권면 할 수가 있다, 뭐 설교 뿐 아니라 사적으로 권면하는 것이나 기도하는 것이나 모든 것이 다 목자의 음성이 아니겠습니까? 이러니까?,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그러면, 자기 양이라는 이것이 물론 주님의 구속받은 구속하신 양이지마는서도 자기 양이라 하는 이것은 하나님께서 각각 우리에게 소속시킨 그 교인이 자기 양이 아니겠습니까? 그 사람이 일년 동안 자기 양이 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십년 자기 양 되는 것도 있을 것이고, 또 일시 자기 양 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떤 큰 집회를 할 동안에 그 동안에 자기 양 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어쨌든지 자기를 통해서 구원얻을, 자기를 통해서 자라고 자기를 통해서 치료되고 자기를 통해서 그 양이 유익을 보고 자랄 수 있는 그것이 전부 자기 양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면 이 자기 양은, 자기 교회의 교인도 되겠고 타교인도 되겠고 오다 가다 만난 그, 만나 가지고 잠깐 이야기하는 그 사람도 자기 양이 들어 있을 수가 있다 그것이요. 어쨌든지 이 자기 양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책임이 지워져 가지고 있고 자기로 인해서 구원을 이루어갈, 한 달이든지 일 년이든지 며칠이든지 그 순간이든지 자기로 인해서 구원을 이루어갈 수 있는 그 양이라 말이지요. 그 양에 대해서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느니라' 그러면, 자기 양을 자기가 각각 불러서 인도한다. 그러면, 자기가 그 사람을 알고 인도하든지 모르고 인도하든지 자기에게 속해진 그 양이 자기와 인연이 되어져서 은혜받는 인연이 이루어진다 말이지요 은혜받는 인연이 은혜받은 인연이 이루어지니까? 우리는 껍데기만 보면 보지마는서도 벌써 한 집회에서 많은 양을 인도할 수도 있고 또 직접 교훈 안 받아도 먼데에서 소문을 듣고도 그럴 수 있다 그 말이요.
소문을 듣고도.
어떤 데에서 혹, 그 도무지 평생 만나지도 못했고 뭐 연락도 없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알아 가지고서 그분은 그 사람을 멀리서 보고 그 말만 듣고 말만 듣고 그이만 생각하면 은혜가 돼지고 또 그이만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에게 대해서 열심이 돼지고 잘 믿어야 되겠다 하는 그거 가지고서 양식이 되어서. 생전 만나 보지도 못했는데 그 사람의 먼데서 소문만 듣고 이름만 듣고도 그 양이 살아나는 그런 것도 있다 말입니다.
이라기 때문에, 어쨌든지 자기에게 소속하고 자기에게 분담된 그 양은 자기가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한 다음이라야 그 양떼들을 자기가 다 끌 수 있고 자기에게 소속시킬 수 있고 자기와 인연을 가지게 할 수가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이 공간적으로서 이 교회에 있다고, 그 교회 양이 있어도, 그 교회 교인이지마는서도 실은 그 양이 목자는 딴데 속하는 것도 많이 있습니다. 그 교회 교인 노릇하지마는서도 실은 그 양은 지금 딴데 속해 가지고 딴 데에 그 연줄이 있어서 사모도 하고 기도도 하고, 만나지 못 해도 생각만 해도 은혜가 되고 또 생전 보지도 안한 안면인데 꿈에도 꾸여 지고, 이 뭐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이리 저리 연결시켜 가지고서 그 줄을 만들어서 연결 줄 만들어 놓은 그걸 우리가 복잡해 그걸 모르겠다 이거요. 그러니. 그 모든 것을 우리가 무슨 지혜를 가지고서 다 붙들며 또 그 인도하며 잡겠습니까? 내가 양의 우리의 문으로 통과한 그거 하나 가지고서 그만 자기에게 관련된 양은 다 각각 이름을 불러내는 것이 되고 다 끄는 것이 된다 그 말이요. 그러면, 이런 일은 우리가 알고 끄는 것도 있고 모르고 끄는 것도 있고, 모르고 끄는 것이 많은 줄 압니다.
어떤 사람은-책 보니까?-그 사람이 그 사람을 평생 한 번도 만나 보지도 안했는데 그 멀리서 말만 듣고 밤낮 사모하고 그이만 생각해서 기도하고 거기에서 날아오는 그저 짤막한 말씀 한마디에서 자기는 평생 표어를 삼아 가지고서 그렇게 신앙이 잘 자라는 사람, 그래 가지고서, 만나야 모르지마는서도 어째 알아 가지고서 그 통해서 서로 소개가 되어지면 그만 견디지 못 하는 그 만족과 기쁨을 누리고 '아! 죽기 전에 하나님이 나에게 한번 만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기도를 들어 주셔서 이와같이 한번 죽기 전에 하나님이 이 종을 만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더라 그 말이요.
이것은 자기가 알고 인도한 사람도 있지마는서도 몰라도 인도한 사람 있어요.
몰라도. 어데 집회를 간다든지 이래 거석한 사람이 무슨 그 사람 안면이나 압니까? 안면도 모르고 아무 서로 연락도 없고 그러나 그에게 속한 양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서 은혜받고 그분만 생각하면 은혜가 되어지고 그분에게 어째 한마디 떨어져 나간 그 말, 그 말씀이 평생 자기를 살리는 수 있다 말이오.
저는, 그 한 상동 목사님 출감하고 난 다음에 제가 입감 해서 있을 때에도 많이 사모했고 출감하고 난 다음에 그분에게 직접 대해 가지고는 내가 그 뭐 뚜렷한 은혜 받은 것은. 마지막에 제가 나뉠 때에 한마디 들은 그것을 제가 기억하고 있는데 그 은혜받았고 그전에는, 그때 집회를 거창 와서 하는데 그 집회에 저는 참석을 안 했습니다. 왜 안 했느냐? 내가 그 집회 참석하면은. 너무 확 무슨 돌변될까 싶어서 그래서 겁이 나서 안 했어. 그게 참말 뭐 고쳐 줄까 두려워서 하는 거와 마찬가지로 그게 그때 내게 대해서는 축복 아니던 모양이라.
이랬는데 그 집회를 마치고 난 다음에 참석한 가족들은 다 오고 저는 집회 마치고 난 다음에 내려갔습니다. 내려가니까? '이번에 그 집회할 때에 모두 은혜 많이 받았지?' 이러니까?-여기에 ○○○선생 자기 아버지입니다. ○○○ 씨입니다.-○○씨가 있다가서. '은혜를 무슨 은혜를 받았어?' 이러니까? 그분이 말하기를, 마태복음 28장 끝절에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있으리라' 하는 그 말씀을, 한 상동 목사님이 그 말씀을 가지고서 언제든지 외롭지 않고 자기는 그 한 말씀을 가지고 주님이 항상 당신과 같이 계신다는 고 한 말씀을 가지고서 그 육 년 동안이나 칠 년 동안이나 지내도 한 번도 고독감을 느끼지 못했다 하는 이런, 해석은 내가 붙였지마는서도, 그저 그분은, 그거 한 상동 목사님 표어라 합디다 이러면서 말 해 주는 것뿐이었습니다. 이랬는데 그 말씀이 내기에는 아주 큰 양식이 되고 힘이 됐습니다. 아, 그런 어른들이 다, 주님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나는 너와 항상 같이 있으리라' 하는 요 말씀을 그는 믿었기 때문에 이것 가지고서 하나님이 같이 하신. 요 말씀을 인해서 하나님이 같이 계신다는 것을 그분이 참 그 믿음의 지식을 가졌고 그분이 그 믿음의 행위를 가졌고 믿음의 사람이 됐기 때문에 이 하나로서 만족하고 뭐 '아 내가 육 년 동안 감옥에 있는 것은 단지 이 한 계약 가지고서 나는 지내왔습니다' 그 전하는 사람은 그래 말 안 했지마는 나는 거기에 대해서 많은 그 해석을 붙였습니다. '그분은 그런 분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제가 정 뭐 실상 만나 가지고는 그렇게 다 못 해도 간접적으로 되는 그 한마디에서 그는 참 언제나 나의 목자인 줄 알고 그분이 세상 떠날때까지 하루 아침도 빼지 안하고 늘 기도했습니다.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면 내기에 힘이 납니다. 그분을 위해서 기도하고 '아, 그분은 나에게 이런 은혜를 줬다' 그분 생각하면. 마태복음 28장 20절입니까? 끝절이? 예? 예? 녜. 생각하면 그 절(節) 생각하고. 그 절 생각하면 내게 대해서 회개할 것 나오고 그 절 생각하면 위로와 평강이 나오고, 이러니까? 그것이 그분의 양 떼 중에 그 어느 부분적으로 거게 소속한 양이 아닌가 그렇게 저는 생각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그러면 우리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간 그 생활에서, 그 향기만 맡고 그 향기만 맡고 그 소문만 듣고 그 하나의 행동만 보고 그 한마디 말만 듣고 그래도 그것이 인제 자기에게 소속한 양떼를 다 불러내는 것이 되고 인도하는 것이 된다.
그러니까?, 이거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안하면은 자기 양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옛사람과 새사람은 원수인데 새사람이 어떻게 옛사람하고 서로 화합이 되겠습니까? 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참 자기 형제는 유별스리 친근한 형제간인데 한 근 십년을 만나지 못하고 밤낮 만날라고 애를 쓰고 이렇게 하다가서 막상 만났는데 만나니까? 한마디 한마디 하는 것이 전부 그 안된 말만 하니, 그 말을 두고 지나가고 듣고 지나가면 그 형제를 멸망시키는 말이기 때문에, 한 마디 말하면 부득이 그 형제에게 대해서 그 말을 바른 말 하면, 그 말한데 대해서 반항하는 말 있고 거슬리는 말이 되고 이러니까? 그렇츰 모처럼 만났는데 말마디라 하는 것이 전부 반박밖에는 안 되고 이와 같이, 분쟁밖에 안 되니 참 이거 안타깝지마는서도 이거는 어짤 수 없다 이라면서 그저 그렇게 만나고 싶은 형제 만났는데 만나 가지고서 밤새도록 이야기한다는 것은 밤새도록 대립되어서 싸운 것밖에 없다 하는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 우리가 그거는 많이 체험을 합니다.
이러니까?, 그래 가지고는 그 양떼와 그렇게 서로 화합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야 자기 양도 알고 그렇지 그리 안하면 안 되겠습니다.
4절에,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우리가 자기에게 속한 양이 뭐 천 마리인지 만 마리인지 억만 마리인지 뭐 압니까? 어데? 몇 사람이나 되는 지도 알겠습니까? 모른다 말이요. 모르는데 내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그거 하나 가지고 다 돼 버리요. 내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그거 하나 가지고서 내게 속한 양이, 나는 모르지마는서도 그거 하나 했으면 내게 속한 양은 다 불러 인도하는 것이 다 된다 이거요. 그거는 하나님이 계약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되게 하실 것이고, 또 실은 그 빛이 그럴 것입니다. 성령 안에 계시기 때문에 이것을 전달하시는 이는 성령 아닙니까? 이러니까?,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간, 들어간 이자에게는 자기에게, 속한 자기 양을 전부 낱낱이 다 불러내도록 성령이 역사해 주시니까?, 약속하신 성령이 역사해 주시니까? 다 불러낼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자기에게 속한 양을 불러내는 것도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이것으로서 해결이 되지 이거 안 들어가 놓으면 안 되겠다 이거요. 그러니까?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게 뭐인지 이것이 문제입니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앞서 가면' 그 앞서 가면, 우리가, 아벨이 앞서 갔는데 아벨이 우리에게 뭐 권면했소? 이렇지만 아벨이 그 앞서 간, 그분이 참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간, 아벨이 앞서 간 그 앞서 간 그것을 인해서 우리가 그를 딿지 않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아벨은 우리를, 살아서 교훈하고 우리에게 훈계하고 우리에게 많이 다져 주고 네가 이렇게 인간으로서는 그 이상 친밀한 사이가 없는데 이렇게 친밀한 사이에 이런 대적이 돼도 너는, 진리를 네가 버리지 않겠느냐, 그것도 참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래서 아마 이 한 가지로서, 인간은 다 정적 존재인데 이 정으로 말미암은 이 모든 것을 이 한 아벨의 이 역사로서, 남겨둔 그 역사로서 정적인 그 시험을 다 해결받은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 뭐 여러 억천만도 넘을 것입니다.
이러니까?,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그러니까?, 앞서 가면 따라오는 것, 이제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한 것은 그게 앞서 가는 것, 그것만 통과했으면 벌써 자기에게 속한 것도 다하고 또 그들도 다 따라서 뒤에 오게 된다 이거요.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그러면 이 타인은 누구겠습니까? 타인은 이거 양의 우리의 문으로 통과하지 아니하고 담으로 넘어온, 다른 데로 넘어온 자가 아니겠습니까?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하지 아니한 그자가 다른 사람이라. 타인이라 그 말이요.
그러면, 타인은, 그의 말하는 것을 새사람이 모르는 말 한다 말이요. 새 사람 죽이는 말 하면은 도망칠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과연 설교하는 데에 새사람을 기르는 말 하는지 새사람을 죽이는 말 하는지 그것도 보면 제가 언제, 유명해서 서울에 그때 뭐 오십만이 그때 모인다 해서 참, 지금 모이는 것 보다 또 그때는 옛날인데, 그랬는데. 가보니까? 참 양을 두드리고 양을 죽이는 말을 하고 양을 함정에 빠트리는 말을 하지 양을 꼴을 주거나 양을 이래 젖을 먹이거나 보호하는 그런 말은 없고 양을 큰 엉쿨에다, 세상이라는 큰 엉쿨에다 빠트리는. 아주 거기에 집어 던지는 그런 말이 나오는 것을 봤습니다. 내가 그때 그라고 나서 단정짓고 그 다음에는 담대히 말을 합니다. 그렇다는 것을.
'도망하느니라' 그러니까?. 우리가 양이 도망할 수 있는 이런 설교하는 사람이 아닙니까? 우리 별 수 없습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했을 때는 이렇고 또 한 번 통과했으면 다 되는 게 아니라 그저, 그 요한 1서 2장에, '아무도 너희들을 미혹하지 못하게 해라' 무슨 미혹? 금방 네가 하나님의 자녀 됐다가 마귀 자식 됐다가 그렇게 빨리 빨리 그렇게 교체된다. 금방 하나님의 자녀 됐다가 마귀 자녀 됐다가 그렇게 쉽다, 하나님의 자녀 한 번 됐으면, '뭐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녀지' 그렇게 생각지 말아라. 하나님의 자녀가 바로, 바로 그 찰나에 마귀의 자식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빨리 교체되는 것을 네가 부인케 하는, 부인케 하는 그런 미혹에 들지 말아라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성령으로 시작했다가서 육체로 마친다. 그 빌립의 딸, 그 선지들인데 그들이 바울에 대해서 말한 걸 보면, 처음에 한 말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선지의 말을 했다 말이요. 선지 말을 했는데, 나중에 내나 선지 말해 놓고서 '예루살렘 가지 마십시오' 하는 그 말은 순전히 마귀 말이라 그 말이요.
이러니까?,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우리가, 교회가 이렇게 참 많이 침체되고 많이 떨어져 내려갔는데 우리가 설교한다는 것이 이것이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하지 안하고 해서 우리의 음성이 양들이 다 놀래서 도망치게 하는 그런 우리가, 설교를 하지 안했나, 참 그 뭐 우리 참 교역자에게 책임있지 교인들에게 책임있지 않습니다. 뭐 교인들이 박박 이를 갈고 원수같이 생각하고 뭐 그렇게 그 쌓아도 그분들은 참 순진합니다. 한 설교에 그만 팍 녹아져서 완전히 변화돼 버립니다. 아무 그런 것 없습니다. 이거 좀, 좀 지성인이라 하고 좀 이렇게 뭐 시연단받은 그런 교역자들이 한번 그러면 변화도 잘 돼도 안하고 참 쇠눈이라고 쇠눈은, 녹지 안한 쇠눈 모양으로 이리 되어지지 그 양떼들은 그 목자의 음성을 한 마디 들으면 그만 변화돼 버리요. 염려도 다 없어지고 원수도 다 없어지고 모든 근심도 없어지고 마음에 평안하고 또 뭐 아무것도 아까운 것이 없어.
자기의 눈도 빼 줄라고 한다고 했으니까? 뭐 아까운 게 없어요.
이러니까?, 교역자가 실상 그 교인들에게 눈이라도 빼 줄라고 할 수 있는 그런 그것이 교역자이지 뭐 교역자가 교인들과 항상 대립이 되어 가지고 이렇게 그 안에다가 많은 성을 쌓아 놓고서 이렇게 배척당하는 그것이 교역자가 아닙니다.
그렇게 눈이라도 빼 줄 수 있는 그런데에서 참 조심하지 안하면 그거는, 그게 나빠 그런 것이 아니라 그 다음에 마귀의 다음 시험에 들어서 잘못되는 것이지 그 나쁜 것이 아니라 말이요.
바울이 말하기를, 이 복이 너희들에게 지금 어디 있느냐 그렇게 말했어. 그것이 복이라고 말했습니다. 양떼들이 목자 아니면 죽겠다 목자에게는 자기 눈이라도 빼 바치겠다. 자기 아무리 친밀한 뭐 형제간이고 부부간이라고 해도 자기의 진정한 속에 내용은 그 목자에게 다 통하고 그이에게 의논해야 될 줄 알고 그에게 다 기심없이 다 해서 수정받을라고 하는 그것이 다 옳은 목자인 것입니다. 그게 목자의 권위요 그게.
그런데 벌써 그 양떼들로 더불어 이러니 저러니 있는 그것이, 물론 알렉산더가 있어서 바울같은 이도 반대하는 그런 사람이 있기는 있었습니다. 있었지마는서도 그게 있어도 그이에게는, 그이에게는 바울에게는 그렇게 고통이 되지 안했고 오히려 그이에게 대해서 그로 인해서 자기는 더 경성 됐고 더 유익본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기에, 아가서에는, 나의 사랑하는 자는 장막 곁에서 '염소 새끼를' 먹인다 했습니다. 염소보다 염소 새끼는 더 철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염소 새끼를 먹이는 것이 나의 사랑하는 신부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종이라 그렇게 말했소 그러면 교회에 보면 참 염소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그걸 귀엽게 여겨서 그것도 주님이 맡겨 놓은 양이기 때문에 그것도 필요한 줄 알고 그렇게 기르는 그것이 목자겠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간혹 없을 수는 없지마는 그것은 양을 위해서 유익 위해서 있습니다.
저는 몽고에 가 보지 안했는데 몽고 갔다 온 여기 추교경 목사님에게 제가 그때 물었습니다. 몽고 갔다가 처음에 해방되어서 왔을 때에 내가 그분을 처음 만나 가지고 물은 것이 '몽고에 거기 목축이 많습니까?' '예 목축이 많습니다' '그러면 그 양은 얼마나 먹입니까?' 양은 한 집에서 뭐 보통 사오백 두 이렇게 먹인다 고서 그라면서 이야기를 웃으면서 해요. '먹이는데 양 열 마리에 염소 한 마리씩을 끼워둡니다.' '그건 왜 그렇습니까?' 양은 너무 겸손하고 서로 화친해서 그만 한 마리가 드러누우면은 하도 서로 좋아해서 한 마리 드러누우면 그 위에 또 그만 포개 드러눕고 포개 드러눕고 이라면 뭐 넘어지기 전에는 자꾸 위에 가서 포개 드러눕는 답니다. 자꾸 포개 드러누우면 그만 여름에는 밑의 것이 떠 죽는데요. 이러니까? 그래 하는데 그래서 할 수 없어서 양 열 마리에 염소 한 마리 끼워 놓으면 염소 이놈은 시기 질투가 있어 가지고서 두 마리만 한테 포개 누워도 와 가지고 그만 떠받아 버리고 이러니까? 도무지 위에 포개 눕들 못한다고서 그 참 묘한 법이라면서 웃으면서 저한테 그런 말을 해 줍니다.
그것이 그런 염소의 그런 것들이 없을 수는 없지마는서도, 그것도 우리가 필요해서 하나님이 주셨기 때문에 잘 길러야 되겠고 그런 게 간혹 있지마는서도 그 양이 벌써 목자에게 은혜받지 못하고 거기에 다 맡길 수 없고 기울이지 못하고 그저 그 목자 하나의 그 음성으로서 만족을 하는 그것이 되지 못한다면 우리 목자의 과실인 줄 알고 우리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도록 우리가 노력을 해야 될 것입니다. 그 방편은 딴 거 없어.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것뿐입니다.
6절에,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이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요게 해석을 했어 '나는 양의 문이라' '양의 문이라' 이러니까?, 예수님으로 통해 들어가는 것이라 그 말이요. '양의 문이라.' '양의 우리에 문이라.'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통해서 들어가는 것인지, 예수님을 통해 들어가면은 성령이, 들어갈 수 있도록,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준다 했는데, 우리만 들어갈라고 하면은 들어갈 수 있도록 해 준다고 말을 했습니다.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하나님의 택한 자는 다 거게 따르지 안했는데, 절도요 강도라는 이 절도는 누구를 말하겠습니까? 절도는 예수님의 도와의 관계없는 사람들이 다 절도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도와의 관계없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구속에 관계없는 그 사람들이 다 강도요 절도 아니겠습니까? 이러니까? 이 세상에 그저 많은 학문이 있고 많은 종교가 있지마는서도 그것은 참 하나님의 양떼를 죽이고 해하는 것뿐이고, 다시 말하면은 생명 운동이 아니고 전체는 사망 운동이고 전부 그 사망 역사지 생명 운동은 하나도 아니라 그것이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산다는 것이 하루 살았다, 하루 살았으면, 그러면 하루 살면, 분명히 살라고 나섰는데, 살라고 나서서 산 줄 알고 살라고 애를 쓰고 또 산 줄 알고 살라고 애를 쓰고 사는 것으로서 자기가 알고 자꾸 살고 살라고 하고 애를 쓰고 사는 건데, 사는 건데 그것이 그 죽음이 되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지 않습니까? 사는 그것이 하루 살았으면 하루 죽었고 하루 살았으면 하루 죽었고 십 년 살았으면 십 년 죽었고 이제 그것이 점점 더 죽어가는 것이고 마지막에 세상 떠나는 것이. 이제 정죄해서 사망 아래 있는 것이 완전히 죽는 것이 그것이 세상을 떠나는 그 날 아닙니까? 이러니까?, 세상 전부는 다 죽는 일 하는 것이요 죽이는 일 하는 것이요, 죽이는 일 죽는 일 도둑맞는 것 다 빼앗기는 것 이건데 이 세상이 이걸 모르고 이래 사는데 우리는 이걸 알지 안했습니까? 이것이 얼마나 복입니까? 그들이 뺏는다는 것이 다 빼앗기는 일 아닙니까? 나는 이만침 취해 놨다 하지마는서도 그것이 다, 그만침 취했다는 것이 다 그 만침 빼앗겼다는 것이요. 결과적으로는 빼앗기는 걸 우리 눈으로 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 뜰 때에는 다 소유는 다 내놓고 가지 않습니까? 산다고 그렇게 산다는 것이 마지막에 보니까? 다, 마지막으로 다 죽어 버리고 가지 않습니까? 그 죽는 일이라 그 말이요.
그러기 때문에,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러면, 예수님의 이 대속의 공로가 없이 땅 위에서 뭐 인간 구원이라 뭐라 하는 것은 사람을 다 죽여서, 하나님의 양떼를 죽여서 멸하는 것, 하나님이 구원하라는 것 하나님의 구원을 해치고 구원을 도둑하는 것이지 그것이 인간 구원은 하나도 아닙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런 걸 깨달으면 세상에 이종교라 하는 것을, 그 뭐이라는 것을 확신을 가지고 담대히 말할 것인데, 요새 기독교가, 종교 통일이라 하는 이 말에 기독교인지 뭐인지 영 기독교가 다 귀가 어두웠고 눈이 어두워서 분별을 못 하기 때문에 아주 거룩이라 하는 것을 완전히 잊어 버렸습니다. 이 구별성이라 하는 것을 완전히 잊어 버렸어. 구별성을 잊어버리고 그만 화평성만 가지기 때문에 구별이 없는 화평은 그거는 썩어 버리고 맙니다. 화평이 없는 거룩은 성장돼 나가지를 못합니다. 번성을 못 합니다.
9절에, '내가 문이니' 또 문이라. '내가 문이니' 내가 문이니, 두 번 말했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이 문으로 들어가면, 이 문으로 들어가야 되지, '나로 말미암아'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이문에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구원도 여게서 결정입니다. 문에 들어가는데 여기 구원되지 딴 데는 구원이 없어요. 문으로 들어가는데 여기서만 구원이 있다,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식을 얻어.
양식도 전부 이문에서 다 얻어요. 구원도 이문에서 얻고 양식도 이문에서 얻는다, 들어가면서 문에서 얻고 나오면서 문에서 얻고. 문에서 얻으니까? 이 양식은 중생된 새사람이 먹을 양식이 아니겠습니까? 여기에서 얻은 양식이라야 양들을 먹일 때에 양들이 살이 찌고 좋아하고 듣지 여기에서 얻지 안하는 양식이면 안들으니까? 이 양의 우리에 문이 뭐인지.
우리가 양의 우리에 문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양의 우리에 문은, 이는 예수님이라 했으니까? 그 예수님의 뭐 무슨 사람들이 그린 예수님의 그림이나 무슨 성화겠습니까? 그러면 예수님이 대체, 예수님이 문이라면은 예수님이 뭐인가 우리가 한번 좀 분석해 보면 우리가 알 것입니다.
예수님이 첫째는,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신인양성일위이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면, 일위로 들어간다, 삼위일체, 신인양성일위인 이 일위가 나에게, 이 일위가 나에게 지식을 주었고 이 일위가 주는 지식 이 일위가 주는 행위 이 일위가 주는, 내가 사람이 되어 지는 것은 내 스스로는 못 하기 때문에 성령의 도우심이라야 된다 그거요. 이것이 뭐 얼마나 어렵습니까? 일조 일석에 되겠습니까? 그러면, 그분이 사람됨에 대해서 그 무슨 필요가 있어서 사람되겠습니까? 그분이 사람됨으로서의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열 가지 스무 가지 백 가지입니까? 그 범위는 자기 지식에 따라서 뭐 일 년이고 십 년이고 백 년이 넘어도 끝이 없을 것입니다. 또 대속하신 그분이 자존자 하나님이신데 그 하나님에 대해서, 그분이 나 위해 죽었다는 것 이것도 뭐 이것만 해도 생각해도 한정없습니다. 신인양성일위이신 그분이 우리 위해서, 뭐 간단하게 세 가지를 하지 안했습니까? 대형해서, 대형해서 우리에게 사죄를 주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그 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 주님이 내 죄로 말미암아.
영원 멸망 받는 데에서 그분이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위해서 대형 하셨다, 그러면 대형을 자꾸 생각하며 대형을 알라고, 대형을 알라고, 내 죄를 알라고, 죄의 형을 알라고 그분의 고난을 알라고.
그러니까? 프란시스가 자기 제자들로 더불어 한 달 동안 기도할라고 가면서 '밥을 한끼씩만 갖다 달라' 한끼씩만 먹고서 기도하는데 선생님 무슨 기도하는고 이래 가 보니까? 항상 기도하는 것이 '아버지는 누구십니까?' 한번은 보니까? 이 나무에 달려 가지고서 '주님의 십자가의 고난이 어떤 고난입니까?' 그라고 한참 울고 그래 그라다가서 어떤 고난인가 했는데 나중에 가서 그 기도를 마치고 나서 보니까? 손에 옆구리에 다 구멍이 뚫렸어, 구멍이 뚫렸어. 프란시스 손에는 못 구멍이 있어요. 옆구리에 창 구멍이 있고. 주님의 그 고난을, '주님은 어떻게 그래, 고난을 받았습니까?' 그것은 성신이 도와서 그걸 느껴서 실감하게 그래 알려 준 것이지 우리 사람이 그거 아무리 느끼고 느낀다 해도 안 느껴진다 그 말이요. 그렇게 느껴지는 거기에서, 그러니까?, 죄가 거기에 어찌 가까이 오겠습니까? 그러니까?, 죄는 죽어도 지을 수 없고 이런 투쟁, 이런 투쟁 이런 느낌 이런 감동 이런 연구, 여게 대한 이 실감으로 자기가 깨달아서 알라 하는 거기에 나온 양식이 양식이요. 그라고 보니까? 사람을 알겠고 양식을 알겠고 주의 피로 구속한 양떼가 얼마나 귀하다는 것, 자기 생명도 바칠 만한, 바치고 남을 만한, 양도 알고 양도 또 목자를 알고 거게서 양떼들에게 먹일 양식을 거기에서 얻는다 그 말이요. 그 사죄를, 칭의를. 주님이 우리와 연결시키기 위해서, 우리와 끊어져서, 하나님과 우리와 끊어져 가지고서 제 독단대로 이렇게, 벌써 그 줄기에서 끊어져 가지고 우리는 우리대로 말라서 영원히 멸망할 자 아닙니까? 이런데 하나님과 연결시켜서 하나님께 피동되게 하는 것, 하나님께 피동되어서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하나님을 인하여 살 수 있는 이것을 만들어 준다는 이것이 얼마나 어렵습니까? 이거. 그거는 지공법 지성법에서 딱 끊어졌는데 이것을 할라 하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가 죽기까지 고민하다' 그 겟세마네 동산에서 죽기까지 고민한 것은 뭐 그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대해서 그런 것 아닙니다. 죽음을 두고 겁낸 것이 아니라, 죽음 그런 것은 세상 사람들도 죽음이라 하는 거 그렇게 크게 여기지 않습니다. 죽는 그게 큰 것이 아니요. 주를 위해서 이제 순교를 해, 죽는 것이 큰 문제가 아닙니다.
죽는데 어떻게 죽느냐, 어떤 감정으로 죽었으며 어떤 느낌으로 죽었으며 어떤 깨달음으로 죽었으며 어떤 소원으로 죽었으며 어떤 느낌으로 죽었느냐 어떤 정신으로 죽었느냐 그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원수를 그 원수를 그 하나님이, 하나님의 지공 지성법에서 원수로 딱 결정 돼 버렸지, 참 삼위일체의 하나님이신데, 그 삼위일체신데 일체에게 버림을 당해서, 주님이 죽으신 것은 저주 죽음입니다. 주님이 죽으심은 저주의 죽음입니다. 주님이 저주의 죽음을 받았습니다. 주님이 죽으심은 정죄의 죽음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아서 저주해서 버림받아서 죽음입니다. 그렇게 죽으시는 그 죽으심에서 우리와 화친케 하기 위해서 일방적인 참 화평을 가졌습니다. 일방적인 화평, 주님은 일방적인 화평을 가졌는데 그 화평을 가지다가서 그것으로서 그만 끝나 버렸기 때문에, 끝나 버려, 화평으로 끝나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정죄할 수 없고 더 이상 저주할 수도 없고 더 이상 끊을 수 없기 때문에 화평은 이루어지고 말았습니다.
결국 죽음으로 죽음을 이겼고 참 저주의 배척으로 완전히 화합을 이룬 것이 주님의 죽으심입니다. 이것을 우리가 자꾸 생각하고 생각할 때에, 우리로는 그걸 다 바로 느낄 수가 없어. 우리는 다 거기에 대해서 느낄수 없는데 문지기가 문을 열어줘. 문지기가, 성령의 감동이 우리에게 느껴지게 해 줄 때에 거게서 양식도 나오고 우리 구원도 되고 거게서 담력도 나오고 거기서 기쁨도 나오고 일생 동안 주님을 위해서 살고도 참 유위 부족인 겸손도 나오고 또 만족도 나오고 여기에서 나도 살고 양도 사는 것이 다 나오는 것인 것을 말한 것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간다는 요 주님의 말씀을 우리가 간직해 가지고 가서 우리가 어쨌든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갈라 하는 것은 주님이 누구신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요 연구하는 것이요 그 분의 대속의 크심이 넓으심 이 높으심이 어디까지 뻗쳤으며 그의 고난이 어디까지며 그의 사랑이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을 우리가 자꾸 연구할라고, 이제 이 세상 현상 세계는 다 떠나서 현상 세계를 버리고 주님 한 분으로 내 사모의 연구의 전부를 삼아 가지고서 대상해서 할 때에 그때에 성령이 가르쳐 도와 주셔 가지고 알게 될 것이고 거기에서 구원도 되고 거기에서 목자의 그 자격도 있고 실력도 갖추고 또 자기에게 속한 양을 구원할 수도 있고 양식도 줄 수가 있다는 요것만 기억해 가지고서 어짜든지 우리가 이 목자의, 우리에 양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는 것, 다른 데로 넘어 들어가는 것은 절도요 강도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절도와 강도를 판정하고 여기에서 어짜든지 참 문지기의 도움을 받아 통과함으로써의 우리가 목자가 되고 구원도 얻고 양식도 얻고 또 내게 속한 양을 다 불러낼 수도 있고, 또 나 하나 가면, 나 하나 가면 그들이 따라올 수도 있고 나 하나 가면 따라올 수 있고, 소문 듣고 따라오니까?, 이렇게 따라오면 하나님께서 다 뒤에 후계를 해 가지고서, 그 후임을 해 가지고서 그 일을 이루어 주시는 이가 주님이 아니십니까? 이러니까? 아벨 하나 갔는데 아벨에 대해서 거기 속한 모든 것을 다 그대로 따라서 가도록 성령님이 그 뒤를 싸서 다 이루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여기에는 참 외식이라는 거 가지고는 목회는 안될 것이라고 판정이 됩니다. 그저 여기에서 명예주의 뭐 물질주의 뭐 세상의 그저 옛사람주의 전부, 우리가 하루 종일 옛사람으로 생각하고 옛사람으로 살기도 쉽습니다. 그것 가지고 이렇게 그저 뭐 무슨 큰 교회 작은 교회 거기에서 뭐 자기 나타나고 이렇게 저렇게 하는 그 뭐 사람은 순전히 옛사람인데 옛사람이 들어서 어떻게 목회하겠습니까? 우리가 여기에서 단단히 깨어서 확정을 지어야 할 것입니다.
녜, 다 같이 한번 잠깐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