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22:57
착한 양심
1987. 7. 1. 새벽 <수>
본문:베드로전서 3장 18절∼22절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덞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이런 말씀은 많은 양의 말씀을 아주 축소해서 그저 영감 받은 사람이 깨달아 알 수 있을 만치 아주 건너 뛰어서 한 말씀이기 때문에 잘못 알면 도리어 해를 받기 쉽습니다.
여게는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의 그 비밀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입니다.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구원을 주셔서 예수님의 죽으심과 관련된 구원을 우리가 얻어야 되고 또 예수님의 부활하심과 관련된 구원을 얻어야 되는데, 이 구원은 범위 넓게 예수님께서, 창세기 1장에 보면은 하나님이 와 가지고 물 위로 운행하시고 또 숲속에 숨어 있는 아담 하와를 찾으시고 에덴동산으로 인도하시고 하신 그 하나님이 누구냐? 곧 그때에 그리스도의 영이 오셔 가지고서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노아 홍수 때에 그때도 복음을 전했는데 하나님께서 영으로 이렇게 복음을 전한 영의 역사를 했는데도 그때에 순종치 아니하므로 육체로 구원 얻은 사람들이 겨우 여덞 명입니다. 또, 그래서 홍수 때에 이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물은 홍수로 멸망을 받고 홍수에서 구원 얻은 사람이 겨우 여덞 명뿐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사활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얻는데 그때에 그 물에서 구원 얻은 사람들이 겨우 여덟 명뿐이다 하는 이 말씀과 또 예수님이 사활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구원의 그 하나의 표라. 이는 곧 세례라 이랬습니다.
세례도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심의 그 구원을 우리가 받는 그 표로써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이거 너무 범위가 넓어서, 지금 천주교에서는 연옥설을 말하고 또 개혁교 정통에서는 그 연옥설을 부정합니다. 그런 것은 조금 여게 범위가 넓고 하기 때문에 천주교에서는, 천주교 교리로서는 연옥설을 주장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 사람들은 그만한 껍데기에서 놀기 때문에 그렇고 지금 또 연옥설을 부인하는 그 부인이 ‘사람이 죽고 난 다음에도 구원이 있다’ 이 세상에서만 구원 준비하지 죽고 난 다음에 영계에 가지고서도 구원이 있다 하는 그런 것은 성경 다른 데서 비추어서 그것은 있을 수가 없다 이래 가지고서 연옥설을 부인하지, 이 사실에 대한 내용의 진리를 바로 깨닫고 연옥설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부인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백 명 중에 하나 있을까 말까 그만치 좀 어렵습니다, 좀 범위가 넓고.
그런데 여게서 요는 뭣을 지금 여기 나타내느냐 하면은 주님의 이 사활의 대속이 우리 구원이 되는데 죽으심의 구원을 입는 사람들은 그 양은 다 같이 입지마는, 또 부활하심의 그 양을 입기는 입지마는 부활하심의 양을 입은 양은 심히 아주 유약하다, 아주 유약, 어릴 유자 약할 약자, 아주 유약하다 하는 그말입니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가서 뭐 예사로 알게 아니라 깊이 깊이 생각하고 기도하고 많이, 사람이 변화가 돼 버려야 요 진리를 알지 변화되지 안하고서 옛사람의 입장에 서 가지고는 암만 해 봤자 깨닫지 못합니다.
그걸 말하면 세례인데 세례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구원인데 이 세례는 곧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라” 하는 요게서 곧 우리의 이 건설구원, 건설구원을 여게서 밝혀서 말합니다.
그러면 요 통틀어서 말하면 여러분들이 다 거게 대한 세밀한 것을 조직적으로 해서 증거할 만한 시간도 없고, 실은 양성원 학생들은 요걸 조직적으로 해 가지고 알아야 됩니다. 조직적으로 모르면, 조직적으로 제가 아무래도 사람이 변화되지 안하면은 절대 말은 해도 이해도 못 하고 알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교역자라면은 이걸 조직적으로 해서 똑똑히 깨달아야 자기가 다른 사람한테 증거할 힘도 있고 또 증거할 때에 그 실상이 전달돼 가지고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또, 예수님의 죽으심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예수님의 부활하심의 대속의 공로를 입고 중생하기까지는 쉽습니다. 그거는 다 됩니다. 그거는 우리 사람이 힘쓰지 않습니다. 않고 전부 하나님이 하셔서 그와 같이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구원에 속한 것인데 중생까지는 그것은 순전히 객관 역사지 우리 주관에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다음에 중생돼 가지고서, 중생돼 가지고 자기의 성화구원 얻는 것이, 이루는 것이 그것이 심히 어렵다. 노아 때도 그렇게 많은, 하나님의 성도들이 많았습니다, 여덟 사람뿐 아니오. 많았는데 많은 가운데서 육체로 구원 얻은 사람이 겨우 여덟 명뿐이었습니다.
이것을 여기서 자꾸 연상해 가지고서 이렇게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다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의 이 구원을 얻고 또 부활하심으로 중생된 구원을 얻기는 얻었지마는 얻은 그것까지는 뭐이냐? 곧 노아 홍수 전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구원 주신 그 구원인데 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이 시험하는 그 시험을 이겨 가지고서 합격해서 구원 얻은 사람은 수많은 성도 가운데에 여덟 명뿐이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의 공로를 힘입어서 구원을 얻기는 얻어서 다 중생되는 데까지는 꼭 같이 됐다. 같이 됐지마는 중생된 이후 건설구원인 실지의 이 시련에 통과해 가지고서 승리한 이 육체의 구원을ㅡ성화구원ㅡ이 성화구원을 이루는 것은 심히 어렵고 성화구원을 이루는 사람들은 심히 적다 하는 그것을 여게서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서 지금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심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라” 이것이 심히 어렵기를 노아 때에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많았지마는 홍수 그 심판을 통과한 사람들은 적었다. 이 홍수 심판은 곧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공심판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심판인데 그리스도의 심판을 통과한 사람들이 적을 것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지금 예수님의 사활의 대속으로써 얻은 구원, 기본적으로 얻은 구원 그 구원은 다 일반적으로 꼭 같은 구원 얻었습니다. 중생까지는 꼭 같은 구원을 얻었어. 중생도 꼭 같고, 하나님 아버지 아들도 같고, 영생하는 생명도 같고 꼭 같습니다. 그러나 영생을 얻은 양은 다릅니다. 또 심신의 그 기능 구원 얻은 것은 심히 다릅니다.
그러면 얼마나 그것이 차이가 있느냐? 노아 때에 수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마는 겨우 여덟 명밖에 안 됐다. 그와같이 심히 희귀하다.
또 그보다 그 뒤에는 하나님께서 이 표로 하나 나타내셨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께서 많이 인도해 내셨지마는 많은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가나안에 간 사람은 몇 사람 안 됐다. 여호수아 갈렙밖에는 안 됐다. 갈렙밖에는 못 갔고 모세도 못 갔다.
여호수아 갈렙만 갔고 그 뒤에 그 광야에서 난 사람들, 또 거게서 아주 애굽에서 나와도 자의식이 아직까지 분명치 못한 그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거게서 성화돼 가지고 믿음을 가져서 갔지마는 그전 사람들은 주관 그놈 때문에 믿음을 가지지 못해서 다 실패하고 말았다. 완전히 주관 없이 하나님을 믿는 그 사람들만 요단강을 건너서 갔다. 이렇게 한 이런 것이 다 우리에게 구원의 표로써 점점 우리의 구원을 온전케 하려는 그런 역사인 것입니다. 거게 대한 해석은 너무 범위가 넓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성경을 볼 때에 하나 여러분들이 기억할 것은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이 불신자를 위해서 주신 것이냐 신자를 위해 주신 것이냐, 이 모든 신구약 성경의 구원 도리를 말씀하신 이 구원 도리가 택자들에게 한해서 말씀하신 것이냐 불택자에 대해서 망라해서 말씀하신 것이냐 이것이 중요합니다.
이것을 이거냐 저거냐 하나로써 단정을 짓고 가지는 데에서 성경이 해석하기 어려운 난해절이 풀려나가는 것도 있고 이래서 이 성경은 진리이기 때문에 전체가 하나이니까, 이것을 믿음으로 저걸 믿을 수 있고 저걸 믿음으로 이것을 믿을 수 있지 어디든지 하나 안 믿은 거 있으면 안 믿은 그것으로 인해서 그 깨달음이나 구원 이루는 데에 큰 사고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복잡하고 다만 언제 시간 있으면 증거하겠습니다. 저는 제대로는 여게 대해서 확정을 짓고 있습니다. 확정을 짓고 있으나 그거 너무 말하기가 시간이 없기 때문에.
우리의 구원은 어떤 것이 우리의 구원이냐? 곧 세례도 그것도 세례 받는 것도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함께 다시 사는 그것을 지금 표하는 한 표입니다.
한 의식의 표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함께 죽고 또 예수님과 함께 살아난 것이 곧 새사람이데 이 새사람으로 사는 이것이 어렵습니다. 우리가 지금 노력할 것은 새사람으로 사는 이 노력이 우리의 노력이요 우리의 할 구원입니다. 다른 것은 다 객관 역사로 됐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힘써 가지고 할 이거는 뭐이냐 하면은 다 새사람으로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그 영생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지금 힘쓰는 것입니다.
우리가 힘쓴다는 이것도 신앙이 어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해야 자기 주관을 좀 인정해야 이해가 될 것이기 때문에 주관 인정으로 그렇게 말하나 실상은 그런 것이 아니고 전부가 하나님의 주권 구원입니다. 하나님의 주권 의지로 예정하신 것을 주권 능력으로 다 성취시킵니다. 그러기 때문에 전체의 우리 구원은 피동적입니다.
요것은 어린 신앙들에게는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전체가 피동적이라 하면은 거기서 깨닫지 못하고 도로 범죄해서 구원에 실패할 일이 있기 때문에 ‘전적 피동이 아니고 주관으로서 능동으로 된다’ 이렇게 말하나 능동으로 되는 것은 하나도 없어. 피동이 아니면 구원이 안 됩니다.
피동으로 되기 때문에 우리 구원은 구원의 능력은 인적 요소는 하나도 없습니다.
인적 요소는 하나 없고 전부 신적 요소입니다. 다만 인적 요소는 뭐이냐 하면은 첫째 아담에게 받은 바의 이 영 육 그것은 인적 요소지만 그것이 완전히 신적 요소로 변화를 받는 것이 우리의 구원이니 그것은 다 완전이요, 영원이요, 전능이요, 전지요, 불변인 것입니다. 영생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그러기 때문에 어린 신앙에게는 예정 도리를 벌로 가르치면 ‘예정 뭐, 하나님 예정이니까 내가 뭐 할 게 뭐 있느냐?’ 이래 가지고 ‘하나님 예정이니까 그 주권대로 되어지는 것이니 내가 뭐 힘써 봤자 좌우로 이렇게 무슨 변동시킬 수가 있겠느냐?’ 이러니까 그만 태만하기 쉽다 그말이오.
그것은 하나님의 예정된 그 주권적인 구원이 우리에게 올 때 우리가 피동적으로 입는 그 구원을 피동적으로 입을 때에 제가 해 가지고 제가 열심으로 하지 안하면은 이루어지지 안한, 제 힘으로 이룬 것같이 여겨지는 그런 방편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주권으로 이렇게 주시는 그 피동적 구원이 안 된다 그거요.
그러나 그 주관이 강한 자들은 이해가 안 돼.
그런고로 이렇게 노아의 시대도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적지 않해.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때 육체로 구원 얻은 사람은 겨우 여덟 명뿐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을 얻어 가지고서 구원 생활을 해서 하나님의 후사의 노릇을 할 수 있는 능력 있는 그 구원 얻은 사람은 여덟 명뿐이라 그말이오.
여기에서 다른 건 다 몰라도 이렇게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이 많지마는 이 성화구원 얻은 사람은 심히 적다. 또 사람의 숫자도 적을 뿐만 아니라 그 한 사람으로 말해도 그 사람이 기본구원 얻었지마는 건설구원은 아주 얻은 양이 극히 작다. 건설구원 얻은 그 양은 극히 아주 작다, 어리다, 심히 어리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깨닫고,
그러면 우리 육체의 구원을 얻을라고 하면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라” 요것이 제일 골자고 결론이고 요지인 것입니다.
찾아가는 것인데, 예수님은 지금 신인양성일위로 부활하셔 가지고서 우리와 항상 함께 계시는 동시에 또 하나님 아버지 우편에서 우리 위해서 기도하고 계십니다.
또 그분은 모든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는 데에 이 모든 것들이 순복할 수 있는 지극히 크신 능력의 존재입니다.
그러면 그 능력의 존재 그 능력이 우리 안에 와 가지고 역사하고 우리를 붙들고 역사하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우리 구원을 그 건설구원 이루는 것이 이렇게 좀 힘든다 하는 이것을, ‘아주 희귀하고 힘든다, 이 성화구원 이루기가 힘든다, 이 성화구원을 이루어 가지고서 가는 사람들이 심히 드물다.’ 이 성화구원이 이렇게 힘들고 어렵다는 것을 말하는데 오늘 요새 모두 다 신학자들 모두 다 교역자들은 인간에게 간교하게 인간들의 비위를 맞추고 좋아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것이 아주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되어지는 구원이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힘쓸 것도 없고 이거는 아주 쉽게 이루어진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순전히 은혜로 된다 하는 그말은 맞습니다. 은혜로 됐는데 은혜로 되는 그 과정이 어떠냐 하는 그것이 인제 문제입니다.
건설구원은 뭘로 이루어지느냐?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믿음으로. 믿음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은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나를 안즉” 하나님의 그 전능을 아는 자, 전능을 믿는 자, 전능을 알므로 행동이 되는 자, 하나님의 전능을 알므로 행동이 되는 자가 땅위에서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을 행할 때에 어려울 것이 있겠는가? 또 하나님의 뜻에 붙들려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가 땅위에 어떤 능력에 대해서 제재를 받겠는가? 그게 뭐이냐 하면 믿느냐 안 믿느냐 하는 증거입니다.
그래서, 하나 예를 든다면 ‘하나님의 전지 전능의 사랑의 주님이 모든 것을 주권하시되 우리에게 관계되는 그 개별 개별을 다 주권하고 계신다.’ 하나님의 개별 주권 그 역사를 자기가 알고 믿어 믿음으로 말미암아 난 행위라면, 믿음으로 말미암아 난 행위라면 놀랠 일이 있겠는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난 행위라면 무엇을 염려하고 의심할 게 있겠는가? 뭣을 두려워할 게 있는가, 주님이 내게 하시는 일에 대해서 나는 만족하고 감사히 받을 것뿐이지, 주님이 내게 대해서 하는 일이 내게 해로울 게 있겠는가.
그러니까 해로울 것이라 해서 놀랠 것이나 이상하게 볼 것이나 그럴 것이 있을 수가 없다 말이오. 믿으면 있을 수가 없어. 믿으면 있을 수가 없고 의심하고 놀래고 염려하고 이래 하는 것은 안 믿는 증거라 그말이오.
안 믿는데 그 구원이 와서 있을 수가 없어. 믿으면 그 구원이 와 가지고서 곧 행위요 행위는 껍데기요 행위 안에 그 사람이 벌써 그 사람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거는 알맹이라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의를 얻는다는 것을 갈라디아서에 많이 말했는데 여게 대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구원에 대해서 바로 이루어 가지 못합니다.
여러분들이 여기서 배운 것은 굉장한 것을 배웠습니다. 그거 뭐 그래 껍데기로 그런 게 아니고 굉장한 것을 돋파 가지고 돋파 가지고 거게 들어가 가지고 초월 초월 해 가지고 지금 둥치, 묵은 둥치에서 새 움이 나 가지고 거게서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새 움이 난 것인데 이 새 움이 묵은 둥치로 돌아가면 성령으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다시 돌아가고 마는 것입니다.
이 건설구원에 대해서 성경에 말하기를,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야 이 건설구원은 영생인데, 건설구원이 영생이 다 건설구원이지 영생 외에는 건설구원이 없습니다. 건설구원 다 영생입니다. 다 영생은 이래야 얻는다 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계약을 선포해 놨는데 안 그런 것이 영생이 되겠습니까? 그러면 자기의 생활 가운데에 마음 다하고, 목숨 다하고, 힘 다하고, 뜻 다해서, 하나님이 목숨을 받지 안하니까 안 해도 다 바치기는 바치라 말이오. 이걸 다 바쳐서 산 생활이 하루 동안에 얼마나 있으며 또 며칠이나 계속하며 이 생활하는 게 얼마나 어렵다 하는 것을, 어렵다는 걸 알고 힘쓰는 자는 거게 구원에 가까이 갈 수도 있고 얻을 수 있지마는 이렇지 안한 자들 이거는 얻을 수가 없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우리 교회도 지금 이 잡탱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모두 방언파들, 모두 예언파들, 지시파들, 꿈파들 이거 다 멸망받습니다. 멸망받아. 그런 자들은 기본구원은 얻지마는 건설구원은 다 멸망이라 그말이오. 건설구원은 그런 데 있는 게 아니라.
그런고로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간다” 찾아간다 말은 사색한다 말이오. 찾아간다 말은 사색한다 말이오.
사색한다 말은 사고한다 말이오. 사고한다 말은 궁구한다는 말이오. 궁구한다 말은 연구한다는 말이오. 자기의 물론 과거도 연구하지마는 여게 찾는다는 것은 과거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과거 현재를 가지고서 미래를 지금 찾아나가는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미래를.
내가 그라면 이 시간에 지금 이 시간에 어떻게 해야 되느냐, 또 앞으로 어떻게 해야 돼, 어떤 걸 경영해야 되느냐, 무엇을 소망해야 되느냐? 이래 모든 미래에 속한 것을 자기가 연구해 가지고서 바로 알아야 되는 것이라 말이오. 바로 모르면 구원이 이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미래에 대해서 바로 연구하고 바로 알아야, 바로 생각해야, 바로 소원해야, 바로 계획을 해야, 바른 방편을 써야, 바로 움직여야 바른 것이 돼진다 말이오.
그러면 이 모든 것의 제일 일호로 첫째 되는 게 뭐입니까? 이 모든 것의 제일호로 되어지는 것이 어떤 것입니까? 행동입니까, 거게 대해서 잘됐나 못됐나 그걸 심사하는 것입니까, 계획입니까, 또 자기의 궁구입니까? 이 가운데는 제일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어느 것이 먼저요? 어느 것이 먼저요, 양성원 학생들? 계획이 먼저요, 심사가 먼저요, 행동이 먼저요, 궁구가 먼저요? 뭐이 먼저입니까? 저 ○조사님? 궁구가 먼저야. 사색이 먼저라. 사고가 먼저라. 생각이 먼저라.
그라고 난 다음에 이제 거게서 의지가 나서 가지고서 그것을 지금 착수해서 이룹니다. 의지가 착수하고 난 다음에 그다음에는 이제 모든 그 신경들이 다 합동해 가지고 그 일을 계획하고 이제는 행동하고 추진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기 때문에 제일 우리 건설구원을 이루는 데에는 제일 중요한 것이 뭐냐 하면은 내가 지금 이 건설구원 이루는 데에는 과거는 과거대로 돼 버려 그거는 다시 고칠 수 없고, 과거는 말이요, 과거는 앞에다가 놓을 수 없습니다.ㅡ○○○? 안 들으면 몰라, 안 들으면 뒤에 못 해. 뭐 지금 학교에 배우면 그까짓 거 많이 배운 줄 알아도 얼마 안 돼.ㅡ자기가 이 건설구원 이루는 데는 이제 이 시간까지 해 놓은 것은 다시 고치지 못합니다. 해 놓은 것은 앞에다 세울, 해 놓은 것은 미래로 당겨 놓지 못합니다. 그거는 그만 해 놓은 그거는 과거로 그만 자꾸 지내가 버리고 마요.
이러기 때문에 앞으로 구원 얻을, 구원을 이룰 수 있는 이것은 뭘로 이루느냐? 앞으로 구원 이룰 수 있는 이것은 지금 내가 앞으로 미래사를 지금 내가 어떻게 하면 구원이 되고 어떻게 하면 멸망이 되고, 이 되는데 앞으로 내가 미래로 이 구원을 이룰 때에 거게 해당되는 당사자는 몇이라고 어제 아침에 배웠습니까? 당사자가 어제 몇이라고 배웠습니까, 손가락으로? 어제 몇이라고 배웠어? 아무도 몰라요? 주관과 객관 둘이야, 주관과 객관. 주관은 내요 나하고 나 아닌 모든 주위 환경도 모든 것, 하나님도 객관이요 모든 우주도 객관이요 인간도 만물도 다 사건도 다 객관이오.
그러면 나 주관, 내 주관하고 객관하고 둘이 이 합쳐서 모든 역사가 일어나는 거라. 이런데 내가 이 주관하고 둘이 합하는데 둘이 합해 가지고서 이리 합해지면 이리 행하고 저리 합해지면 저리 행하고 이 둘이 합작되는 그것이 우리 미래의 행동이요 이것이 멸망이냐 구원이냐 영생이냐 되는 것이라 그말이오.
그런데, 이 둘이라는 당사자라 말이오. 이 둘이라는 당사자인데 그러면 이 둘이라는 당사자를 어떤 것을 택해야 된다 했습니까? 이 둘을 어떤 것을 택해야 된다 했소? 나는 자꾸 몰라요, 자꾸. 아는 분만 내가 자꾸 해. 성을 내가 잘 몰라요, 안면은 다 아는데. 저 ○조사님? 객관, 또? 이 주관과 객관 이 둘로 가지고서 지금 이 당사자인데, 주관과 객관이 우리의 미래를 만드는 당사자입니다. 이 둘이 들어서 만들어요. 이 주관과 객관 이 둘이 들어 만들어.
만들었는데 이 주관하고 객관하고 그 조화가 바로 되면 구원이 이루어지고 조화가 잘못되면 잘못 이루어진다 말이오. 이러니까 이 주관과 객관의 조화를 바로 해야 되겠는데 조화를 바로 하기 전에 그보다도 먼저 전제적인 그 모든 조건이 있으니까 이 조화를 이루는 것보다 먼저 있는, 선재한. 조화를 이루는 것보다 먼저 있는 것이 뭐입니까? 조화 이루는 것보다 먼저 뭘 해야 되지.
저 ○○○? 하나를 찾아야 되고. 그 옆에? 그게 둘인가? 또 하나 있어야지.
오십점이야, 오십점. 또? 양성원 학생 또 어데, 그 옆에? 그 옆에? 그 옆에 양성원 학생 아니가? 그래, 뭐이야? 아니야, 주관에 대해서는 양심을 찾는다 하는 그것이 백점이라, 딱 맞았어. 주관에 대해서는 신앙 양심을 찾는 것이 그거 백점이라, 다 맞았어. 그 뒤에? 저 ○선생? 하나님을 찾는 요거 잊어버리면 안 돼요.
주관과 객관인데 주관은 주관 중에는 자기 착한 양심, 착한 양심이라 말은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양심이라. 양심도 뭐 부처를 중심한 양심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화인맞은 양심은 돈을 중심으로 한 양심도 있고 별것 있는데 하나님을 중심하는 양심을 가리켜서 선한 양심이라 했다 말이오.
이 선이니 악이니 선악의 정의를 지금 이것이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것인데 이 선악의 정의를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학자들이 제일 인정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바로 인정하지 안하면 성경 해석이 다 틀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시편 해석을 시편 주석가들을 보면은 엉망이라고. 얼토당토 안한 소리 해 놔. 전부 제 주관으로 말해 놓고 만 것이 많고 바로 해석을 하지를 못했어. 이건 완전히 자기가 변화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
착한 양심, 이거 지금 내 앞으로 내 미래가 내가 지금 이 앞으로 발자국을 디뎌내는 것, 내 미래의 지금 행동 이것이 영생이냐 멸망이냐? 내 심신의 기능이 지옥을 가느냐 천국을 가느냐? 이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느냐 노엽게 하느냐? 이것이 하나님하고 하나냐 하나님과 이렇게 떨어져서 결렬이 되어지느냐? 이것이 지금 한 자욱, 한 자욱에서 결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중요합니까? 이것의 중요성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은 여게 대해서 그 심신을 기울이지 안하고, 중요성을 느끼지 안하면 기울이지 안하고 기울이지 안하는 자는 모른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거 다 어려운 말인데.
그러면 우리 앞길을 지금 이래 밟아서 구원이나 멸망이나 걸어나가는 데에는 그것을 몇이 들어서 공작을 하느냐? 거게 대해서, 사람 말로 말하니까. 당사자가 몇이냐? 거게 해당되는 당사자가 몇이냐? 둘이라고 말했다.
둘이라고 말했는데 둘인데 하나는 뭐이냐? 하나는 주관이요 하나는 객관이라 그말이오. 맞아요? 이해가 돼요? 양성원 학생들 이해가 돼요? 이해가 안 되면 헛일이라. 이해가 안 되거든 자꾸 가서 기도하고 하면은 깨달아져.
둘인데, 둘인데 그러면 주관도, 주관도 열도 스물도 넘어요, 주관이. 우리에게 주관이 열도 스물도 넘어. 어떤 자는 명예 주관이 있고, 어떤 자는 물욕 주관이 있고, 어떤 자는 음란 주관이 있고, 뭐 주관 속에도 막 이런 거 저런 게 막 많아서. 요새도 지금 우리 나라 대통령 될라 하면은 서로 대통령 될라고 내가 될라 네가 될라 하는 사람들 꽉 찼는데 그거 모양으로 우리 마음에도 말이요, 이놈이 대통령 할라 하고 저놈이 대통령 할라 하고, 어떤 사람은 돈 욕심, 물욕심 그놈이 대통령입니다. 저는 뭐라고 쌓아도 말이지 제 속에 공명심, 제 공로와 제 명예, 명예심이 그게 대통령이 돼 가지고 있어요.
그자는 암만 해 봤자 성경 공부해도 그렇고 항상 공명이 왕이 돼 가지고서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런게 주관하면 안 돼.
그라면 우리의 영은 하나님하고 같이 동행하기 때문에 내비두고 우리의 육으로 말하면은 심신인데 거게 누구를 대통령을 세워야 돼? 이 심신에 대해서 누구를 대통령을 세워야 돼요? 착한 양심을 대통령으로 세워야 돼, 착한 양심을. 이해가 됩니까? 착한 양심을 대통령으로 세워야 돼.
착한 양심이 대통령이 돼 가지고서 여게 물욕, 물욕이라는 만일 이놈이 나오면은 딱 눌러버리고, 정욕이 나오니까 딱 눌러버리고, 명예욕이 나오면 딱 눌러버리고, 감정이 나오면 딱 누르고, 복수성이 나오면 딱 누르고, 시기가 나오면 딱 누르고 모든 거 다 눌러버리고 이 착한 양심이 그 심신의 대통령이 돼야 됩니다.
지도자가 돼야 된다 말이오. 인도자가 돼야 된다 말이오. 선봉장이 돼야 돼.
양심은 화인맞은 양심과 자유하는 양심 요 두 가지로 구별해야 됩니다, 양심은 화인맞은 양심과 자유하는 양심. 화인맞은 양심이라 말은 무슨 말이요? 어떤 것의 것이 됐다 그말이오. 양심의 주인이 있어. 양심의 주인이 있어.
이런데 양심의 주인이 있는데 양심은 주인이 있으면 죽어버려. 양심이 내것도 아니고 아무것의 것도 아니고 중심이 하나님과 그 인간 사이에서 지금 역사하는 아무데도 무소속하고, 속하지 안하고 독립성을 가진 그것이 자유하는 양심입니다.
그런데 양심 중에도 여러가지 양심이 있는데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양심,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양심이 그 양심이 신앙 양심이요 산 양심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내게는 내 앞길을, 내 앞길을 찾아나갈라고 이렇게 연구할 때에 아무에게도 맡기지를 못해.
자기 앞길에 돈 욕심, 지식 욕심, 권세 욕심, 명예 욕심, 그거 다릅니까 꼭 같습니까? 같소 다르요? 같애요 달라요? 같애. 신앙 욕심은 좋은 건 줄 알지마는 그것도 실은 궁구하면 좋지 못해. 그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기쁘시게, 하나님 영화롭게 하는 그것만이 우리 욕심이 되어야 돼.
그러면 자기 주관 요소에는 착한 양심, 이게 내게는, 내게서는 아무도 내세우지 안해. 착한 양심을 내세워 가지고서 ‘네가 이 대외 관계에 이 객관으로 더불어 교제해라’ 하는데 이제 이 주관에서는 착한 양심이 나서 가지고서 ‘그러면 상대방이 천도 만도 넘은데 누구를 찾을까요? 누구를 찾을까요? 내가 나를 대표로 지금 착한 양심을 내세워서 내 미래를 바로 찾아서 지금 우리를 바로 인도해 달라고 이래 대표를 세워 놨는데 그러면 나는 가 가지고서 찾을 때에 누구를 찾을까? 사람도 있고 권력가도 있고 이 모든 물질도 있고 자연도 있고 만물들이 있기 때문에 누구를 먼저 찾을까?’ 누구를 먼저 찾아야 돼요? 하나님을 먼저 찾아야 돼요. 요것이 아니면 구원이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뭐 성경 여러 수백 독 읽어도 몰라. 모를 수도 있어.
그러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이 적고 모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전부 모르는 것이 다 절단을 내고 주장을 해. 그러기 때문에 이 회의의 법칙에 우리는, 모든 회의라 하는 것을 그 회의가 처음에 조상 때부터 내려오기를 그 회라 하는 것은 다수 가결입니다, 다수 가결. 회의라 하면 다수 가결 아니요? 종다수 가결 안 하요? 투표 하면 다수 가결 아닙니까? 많은 걸 따라가는 것.
많은 수를 따라가니 다수 가결을 자기네들의 움직이는 활동 방편으로 삼은 그 회의의 활동 방편으로 삼은 그 회의는 보나 안 보나 타락하고 부패해 간다 확정을 지울 수가 있어.
왜? 바로 깨달은 사람 수가 많아요 잘못 깨달은 사람 수가 많아요? 저 ○조사저 뒤에 있는 조사, 조사인가 집사인가}? 그러니까 다수 가결이면 잘못된 걸 따라가요 잘된 걸 따라가요? 그러니까 타락하지. 그러니까 부패해지지.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종다수 가결을 우리는 주장하지 안하고 어짜든지 한 사람이라도 성경대로 옳고 바른 것을 따라가자. 옳고 바른 것을 우리는 따라가고 숫자 많은 걸 따라가지 말자 하는 그것이 종다수를 우리는 이용하지 안하고서 옳은 것을 따라가자 하는 것이 그 예사로운 말 같아도 그것이 온 세상을 지금 막 흩쳐버리고 발아래 밟는 말이라. 이렇게 큰 말을 큰 말인 줄 모른다 말이오.
이해가 돼요? 이러기 때문에 이제 착한 양심이 다른 것을 찾으면은 어만 놈을 찾아 가지고서 의논하면 헛일이라. 이게 어만 놈을 찾아 가지고 이라면 그놈한테 폭폭 속는다 그말이오. 내가 속지 안하고 바로 요긴통을 거머쥐고 붙들어 가지고서 의논해서 내 모든 그 미래의 한 자욱 한 자욱이 실수 없이 바로 걸어가는 데에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누구를 찾아야 돼요? 하나님을 찾아야 돼요, 하나님을.
또 이 양심도 이런 것 저런 것 중심한 양심을 내보내지 안하고 착한 양심을 대표로 내보내면서 착한 양심에게 부탁하는 것이 ‘착한 양심은 하나님을 네가 찾아라. 하나님을 찾아라.’ 하나님을 찾고 나니까 다 돼.
이렇게 우리 건설구원이라는 건설구원이 이렇게 한 자욱 한 자욱을 돋파 나가지 안하면은 우리는 탈선되고 맙니다. 이러기 때문에 자기딴에는 뭐 구원을 이룬 줄 알지만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 말이오. 구원을 마구 죽이고 있어.
주객으로 더불어, 주객으로 더불어 술이 취해 가지고서ㅡ○○○? 잘 안 들으면 기도도 옳게 못 해. 바로 못 해. 욕심 기도 하기 쉬워. 바로 기도해야 그것들이 잘되지. 잘 들어야 돼요.
내가 뭐 말했지? 뭐? 뭘 말하다 말았는데. 옳지, 주객으로 더불어 뚜드리고.
주객으로 더불어 먹고 마시고 술이 취해 가지고서 동무들을 뚜드립니다. 동무를 뚜드려요. 그 주객이 뭐입니까? 주객으로 더불어 마시는데 주객으로 더불어 술 마시지 딴것 마시겠소? 그 술이 뭐입니까? 세상주의라 말이오. 알겠습니까, 세상주의? 세상주의.
세상주의가 육신주의요, 이 죽음 너머 하나님의 그리스도의 심판 너머서 어찌 되나 그거는 생각지 안하고 우선 좋은 것, 우선 명예, 우선 지위, 우선 권세, 인기, 사람 취하는 것, 재물 취하는 것 그게 다 전부 세상주의입니다.
“너희들이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생각하라. 땅엣 것을 생각지 마라. 위엣 것을 찾으라.” 이런데 그게 아니고 땅의 것이라 말이오.
이리 되면은 저는 제딴에는 그 구원 운동, 복음 운동, 뭐 개혁 운동, 보수 운동 한다고 하지마는 주객으로 더불어 마셨으면 술놀음하지 별수 없어. 술 먹으면 아무리 양민이라도 술취해 가지고서 술취한 사람 노릇하지 그 사람이 정상의 행동을 할 수 없어.
이거 모양으로 세상 주의인 이 주장과 교훈과 그 모든 사상에 꽉 젖어 놓으면 그 사람이 천국 가는 사람 때린다 말입니다, 천국 가는 사람. 그게 뭐이냐 하면은 너희들이 천국문을 가로막고 너도 들어가지 안하고 다른 사람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그것이 뭐이냐? 외식자라 했어.
외식자가 뭐인데? 외식자는 하늘나라보다 이 세상을 중하게 여기면 그게 껍데기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외식자라. 하나님보다 피조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그게 외식자라. 알겠습니까? 이러니까 얼마나 정신차려 배우고 얼마나 이래야 되는데 암만 말해 봤자 헛일이라.
언제 대구집회에서 아브라함 교훈이 그래서 그걸 닷새 동안 계속했더니마는 어떤 사람이 가 가지고 그라더래요. 어데 할 말이 없어서 그 닷새 동안 내내 그말만 하고 있다고. 네가 그말을 들었으면 사는데 그말은 네가 네게 천리 만리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자꾸 또 씹고 씹고 자꾸 그래도 네 속에 들어가지를 안했으니까 언제 그걸 받을 수 있겠느냐? 그래 가지고 씹기면 나중에 가서 겨우 어짜면 들을듯하다 그만 끝마쳐 버리고 마니까 안 돼.
건설구원이 얼마나 힘들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기억하고, 건설구원은 자기 미래에 있는 것입니다. 미래, 과거 암만 후회해 봤자 소용 없어. 후회는 아무 건설구원에 효력이 없어요. 후회함으로 그것이 미래를 북돋을 수가 있고 미래에 자극을 줄 수 있는 것이라면은 그 효력이지 자꾸 미래에서 이루어지는 거고, 미래에 이루어지는 데에는 미래는 둘이 합작되는 거게서 지금 불이 일어나.
음전기 양전기가 일어나면 꽝 그러며 일어나는 거와 마찬가지로 이제 주관과 객관 둘이 이래 만나 놓으면 행동이라는 게 시작돼. 이러니까 만나는 것이 객관으로 말해도 천도 만도 넘는 객관이 있기 때문에 어느 놈하고 만나 가지고서 무슨 폭발이 되는지 몰라. 행동은 폭발인데. 그러기 때문에 내게는 착한 양심, 객관에는 하나님, 둘이 만나 가지고서 폭발만 되면 그게 다 영생이라.
알겠습니까?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지하철 공사를 위해서 기도합시다. 지금 뭐 여게 대해서 특별 취급을 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쭉 해서 올라올 건데, 위해서 해 내려오고 여기서 해내려오고 여기 제일 뒤에 두는 것은 이거는 뭐냐 하면 그런 이유가 있어. 우리들이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만일 그냥 관계 없으면 하고 만일 관계 있으면 그만 이거는 내비둘라 하더란대도 다른 것 다 내비뒀으면 여게 그런데 거게도 그렇기 때문에 지금 모든 것이 어려운 문제가 있어서 그라고 또 인제 장마드는 것도 이렇고 하니까 이거 하나님께 기도한 덕택이니까 기도를 열심히 해요.
이거 무너지면 장보 이거 떡 금이 나면, 엉그름이 하나 쩍 가면 우리 여기서 어찌 예배를 보며 또 교인들이 올 수 있겠습니까? 이러니까, 어떤 사람은 이거 지하철 안 해도 이 장보가 이래 기니까 ‘아이구야 그 장보 긴 것 보니까 겁이 나더라.’ 그 무서워 여기 못 오는 사람도 있어요. 하나님은, 아무 일 없어요, 든든해.
이러니까 우리가 그래도 기도해서 지하철로 상하지 안해야 돼요. 이거 하나님이 우리에게 간구하는 소리를 들어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함께 하는 것이 이게 이렇게 많이 보이지마는 강퍅한 자들에게는 안 보여.
이번에도 그 모아봤어요, 얼마? ○○○ 어데 있노? 얼마나 돼? 총수, 어? 약 육백이면 육백이 그거 뭣이 와서 그라지요? 귀신이 와서 그래요? 귀신이 고치는 것도 있어요. 귀신이 고치는 것은 출애굽기에 보면 세 번까지는 귀신들이 같이 했지마는 네번째부터는 못 했어. 세 번까지 따라왔는데 그 따라왔지마는 그다음에 못 따라왔어.
못 따라오고 난 다음에 네번째 못 따라오고 하나님께서 선민과 구별돼서 같은 자리에 있어도 재앙이 같이 오지 안하고 선민들에게 오지 안했어. 인제 자꾸 이래 단계적으로 올라가야 되는 것이오.
그 고치는 것은 사람이 고치는 게 아니고 성령이 와서 고쳤다고 하는 그것을 말했어. 성령이 와서 고쳤는데, 육벽여 명 성령이 고친 것 아닙니까? 다 그분들이 또 나을라 할 때에 자기가 알 거라. 자기가 알 때 무슨 미신에 그렇던가? 하나님 말씀 듣고 난 다음에 그 말씀대로 행할라고 살라고 애를 쓰고 간절하고 자기 받은 지식과 믿음과 자기 행동이 같이 될 때에 맞아떨어질 때 그때 불이 일어나 가지고서 다 고침을 받았다 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일이지마는 그 예사라. 다 책에서 봤으면은 한 집회 가운데에 그때 육체의 병 낫은 사람만 해도 근 육백 명이 됐다 하면 놀래 자빠질 것인데 놀래 안 자빠져.
이제 자꾸 세대가 되니까, 우리가 낫아 그런 게 아니고. 사도 시대에도 그렇게 사람도 많지를 안할 뿐 아니라 그렇게 많지를 안했었어, 속사도 시대도 그렇고.
이런데 이거 말세가 되니까 하나님이 자꾸 이렇게 역사하시는데 이래도 우리가 말세에 성령을 물붓듯 부어 준다 했는데 성령이 와서 했어요. 그때에 그 역사를 놓지 안하고 자기가 강직하고 그 사람으로 변동되지 안하고 자꾸 자라가면은 성령의 사람으로 되어지는 것입니다.
건설구원은 이루는 데 힘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