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22:56
착한 양심
1987. 6. 30. 새벽 <화>
본문:베드로전서 3장 21절∼22절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여기 물은 노아 홍수 심판과 홍수 구원을 인용해서 말씀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로 적응시키면 곧 세례라 하는 말씀입니다. 세례는 어떤 게 세례인고 하니 예수님의 죽으심에 같이 죽고 부활하심에 같이 살아나 가지고 구원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슨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그런 것이 아니고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선한 양심이라 말은 일반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한 양심, 양심은 수많은 종류가 있습니다. 다 죽은 양심이요 구속을 입은 선한 양심만이 산 양심입니다. 하나님 중심인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서 찾아가는 이것이 세례라 했습니다.
우리는 영의 구원은 이미 얻어 가지고 있고 우리의 심신의 구원을 얻었고 또 얻어가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이미 얻은 구원은 얻은 구원으로 살아서 얻은 구원을 견고케 하고 성장케 하는 것이고, 또 아직까지 얻지 못한 부분은 얻어가고, 그러면 얻지 못한 걸 얻어가고 또 얻어 놓은 것이 성장돼 가고 하는 것이 우리의 이 육체의 구원입니다.
그런데 이 구원은 두 가지로, 이 구원 방편을 두 가지로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는 사색하는 것, 사고하는 것, 찾아 찾는 것이고, 사고하는 것이요 사색하는 것이요 그러면 찾는다 말입니다. 모든 과거를 그것을 자본으로 삼아 가지고서 미래를 지금 자기에게 있는 전부를 다 기울여서 바로 옳게 찾고 이래 가지고 나아가는 그것을 가리켜서 사색이라 사고라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찾는 것과 또 자기가 찾은 그대로 실험하는 거기에서 온전을 이루어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건 이렇다’ 미래의 것을 자기가 사고하고 사색하고 찾아 연구하고 `이렇다’ 이렇게 자기가 짐작을 하고, 그러면 그대로 실지로 실험을 해 보는 데에서 ‘그 사색한 게 바로 됐다, 그게 잘못됐다.’ 이렇게 구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그 과학을 연구하는 사람도 과학 연구하는 사람이 처음에는 논리적으로 연구를 합니다. 논리적으로 이렇게 지식을 가지고서 연구를 하고, 연구한 그것이 옳다고 인정하는 것을 그대로 실험을 하면은 바로 된 것도 알고 또 잘못된 것을 찾아서, 논리 연구에다가 실험을 첨부하면 그 걸어가는 것이 다소 건전해질 수 있습니다.
인제 그라고 난 다음에는 볼 게 뭐이냐? 세월이 지나가면 그것이 다 미래가 현재가 되고 현재가 과거가 됩니다. 과거가 되면은 과거 되는 그때에 보면 그것이 그 결과가 어떤 결과가 맺어지느냐? 내 주관이 틀렸지 이 객관이라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의 섭리인데 그것은 틀리지 않기 때문에 좋은 결과가 맺어지는가 나쁜 결과가 맺어지는가 그렇게 삼중적으로 그것을 연구하게 되면, 그 옳은 경건한 걸음을 걸어갈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너무 이 세상에는 사이비한 것이 가득 차고 있는 이 세상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고 방식이 중요합니다. 사색하는 것이 이게 중요합니다. 하도 사이비한 것이 가득 찼는데 그 가득 찬 사이비한 중에 옳은 것은 꼭 하나뿐이지 둘은 없습니다.
이런데 우리가 잘못하면 뭣을 찾아나가다가 그 찾아나가는 방식이 옳은 것을 찾는 그 찾음이 되지 못하고 자기 속에 주관인 자기 사욕을 찾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사람들이 다 망하는 것은 자기야 어찌 됐든지 자기를 일단 부인하고 자기보다 옳은 것이 좋기 때문에 옳은 것을 찾아갈라고 하는 이 마음을 가지고 찾지 안하고서, 그만 옳든지 그르든지 자기 좋은 것, 자기 유익한 것, 자기와 가까운 것, 자기와 같은 것 이런 것을 찾을라고 하는 데에서 완전히 인간이 멸망을 받고 마는 것입니다. 그건 뭐 다른 사람이 멸망을 시키는 게 아니라 제가 제 멸망을 자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찾는 데는 옳은 것을 찾는 것과 삐뚤어진 걸 찾는 요 두 가지로 구별하면 쪽발로 걸어가는 사람이 됩니다. 찾을 때 무엇을 보더란대도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에게 대해서 그 사람의 옳은 점을 우리가 찾아 연구하고, 그러면 나쁜 점은 절로이 옳은 점을 찾아 연구하면 나쁜 점은 저절로 발견하게 됩니다.
또 그런 사람 있고, 어떤 사람은 그렇지 안하고 그 사람에게 대해서 나쁜 점을, 좋은 점이야 얼마가 있든지 나쁜 점을 찾아서 연구하는 그런 사람 있습니다. 그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속여서 망치는 사람이 됩니다. 요거 좀 여러분들이 아주 알아듣기 어려운 말입니다, 요거 뭐 성경 천 독을 한다 해도 성경 읽어 가지고서 되는 건 아니고 자기가 실지로 순종하는 생활에서 경험과 체험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일을 자기가 찾는 데에도 그 일에 대해서 옳은 점 유익되는 점 이 점을 찾고, 그 점을 찾고 난 다음에 손해가는 점 해가 되는 점 그 점을 그다음으로 찾아지는 것이 그 순서입니다.
또 물건에 대해서도 그러합니다. 물건에 대해서도 그 물건에 대해서 좋은 점, 옳은 점 좋은 점을 발견하고 또 나쁜 점을, 좋은 점을 발견하면은, 좋은 점을 발견하면 좋은 것 아닌 것은 나쁜 것입니다. 요거 아주 어려운 말입니다. 좋은 것을 발견하고 좋은 것이 아닌 것은 나쁜 것입니다. 그거는 다 버려버리면 됩니다.
이렇지, 그렇지 안하고 자기가 무엇을 사색하고 사고할 때에 사고하는 과제, 사고하는 문제, 내가 사고하고 내가 사색하고 연구하는 그 대상 말이오. 대상에 있어서 좋은 것을 찾지 안하고 나쁜 것을 찾는 사람은 그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망치는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 두 길이니까 나는 무엇이든지 물건이든지 일이든지, 또 무슨 이치든지, 그리 안 하면 종교든지, 어떤 종교를 연구합니다. 연구할 때에 종교 연구하는 것도 그 옳은 점을 찾습니다, 어떤 종교라도. 또 나쁜 점을 그거는 안 찾아도 옳은 점만 찾으면 옳은 점이 아닌 것은 나쁜 점으로 그렇게 정죄당해 나가야 되지, ‘옳은 것 찾고 나쁜 것도 찾아야 되지 않느냐?’ 그 자기 속는 일입니다. 옳은 것만 꼭 찾으십시오. 옳은 것만 찾고 옳지 안하는 것은 ‘요거는 아니라’ 하는 그것만 남겨 두면은 그거는 나중에 찌끄러기고 그건 다 폐쇄됩니다.
내가 찾는 그 상대방에 있어서는 옳은 면을 찾고 나쁜 면을 찾지 말고 그 사람에 대해서 좋은 점을 찾습니다, 그 나쁜 점 찾지 말고, 그 사람의 좋은 점을 자꾸 찾습니다.
좋은 점을 찾는데 ‘요것도 좋다. 요것도 좋다. 아, 이거는’ 좋지 안한 건 내비 두십시오. 좋지 안한 건 내비두면은 나중에 가서 보면은 좋은 것이 찾아지고 자기가 좋지 안한 것은 제거해 두면은 나중에 가서 제거한 뭉텅이는 집채 뭉텅이만하고 자기가 좋은 것 찾은 것은 주먹덩이만하고 하면은 그건 못쓸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말하면은 나쁜 점이 많고 좋은 점이 적으니까 버려버려야 됩니다. 또 좋은 점이 많고 나쁜 점이 적으면 그거는 취해서 나쁜 점은 버리고 좋은 점만 취해서 자기가 가져야 됩니다.
요거 사고하고 사색할 때에 내가 사색하는 그 과제, 그 상대, 내가 사색하는 그 상대편, 상대편 그것을 사색할 때에 꼭 좋은 점을 찾는 요 방식을 우리가 가지고 놓지 안해야 돼. 잘못하면 요 방식을 놓기 쉽습니다. 좋은 점을 찾는 그것을 가지지 안하고 잘못하면 자기와 같은 것을 찾는 사람이 되기 쉽습니다.
자기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자기와 같은 것을 찾은 사람은 삐뚤어진 사람은 자꾸 삐뚤어집니다. 굽은 사람은 자꾸 굽어집니다. 악한 사람은 자꾸 악해집니다.
자기대로의 좋은 것을 찾도록 그렇게 노력하고, 그러면 좋은 것 중에는 뭐이 제일 좋은가?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것이니라” 하나님보다 더 좋은 이가 없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다음으로 좋은 것은 뭐인가? 좋은 것은 진리입니다. 진리는 우리에게 나타난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성경 말씀과 같나 안 같나?’ 이 성경 말씀을 거기서 찾습니다. 그 모든 상대방의 사람에게나 물건에게나 그 행동에서 성경 말씀을 찾습니다. ‘요거는 성경 말씀과 같다 같다 같다’ 이거 찾고, 이 같은 것을 그만 찾아나가고 나머지기는 이건 성경 말씀과 같지 않기 때문에 그거 남겨 보면은 나중에 가서 잠깐 동안이면 그것을 정평 정가할 수 있습니다.
‘이건 성경 말씀과’ 아무리 살인 강도라도 거게 성경 말씀대로 된 것이 있습니다, 없는 게 아니라. 그거 있고, 또 그거 아닌 것 찾으면은 아닌 것이 한 구십프로 되고 성경 말씀대로 된 것이 한 십프로 되고 이라면은 그것을 내가 다 취하면 나는 백분지 구십은 틀렸고 백분지 그 일 옳은 걸 가지고 찾기 위해서 했다가 나쁜 것 구십을 가지니까 나는 망하고 맙니다.
만일 오십 오십이 된다면 그거 취하나 안 취하나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오십 오십이면 취할 필요가 없습니다. 옳은 것이 육십이고 나쁜 것이 사십이면 그거는 옳은 게 조금 많기 때문에 스물이 있으니까 고거라도 취할 수가 있기 때문에 그거 한번 잡아서 연구해 가지고서 좋은 거는 가지고 나쁜 거는 버릴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고 방식을 이렇게 해 나가면 되는데 사람들은 여게 사고 방식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여게 대한 지혜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진리를 찾고, 진리보다, 진리보다 더 깨끗하고 좋은 이는 하나님입니다.
물론 진리도 깨끗하고 좋고 하지마는 그 평가적으로 또 순위적으로 하나님이 먼저요 그다음에 하나님의 뜻이 이 진리입니다. 그런데 여게서는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그러니까 제일 좋은 분을 향해서 찾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색이나 사고할 때에는 그 반드시 내가 무엇을 사고하든지 사색하든지 내가 사색하는 그 대상이 있으니까 그 상대방이 있으니까 그 상대방에 대해서 좋은 것을, 좋은 면을 찾고 나쁜 면을 찾지 말아라. 좋은 면을 찾아라. 좋은 면을 찾고 좋지 안한 것은 제대로 버려 둬라.
그러면 나중에 가서 그래 찾고 보면은 이게 좋은 것이 많으냐 나쁜 것이 많으냐 나중에 전체로써 그 프로수를 내면은 거기서 정확하게 ‘이거는 취할 만한 것이다 이거는 버릴 것이다’ 하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된다 하는 그것입니다.
이해가 됩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습니까? 또, 그러면 이 사색하는 데에는 상대방이 있고 내 주관이 있습니다. 상대방이 있고 내 주관이 있으니까, 상대방에는 그러면 좋은 것을 찾아서 이렇게 가는데 내 주관에는 어떻게 되겠느냐? 거게는 “착한 양심이라” 이랬어.
내 주관에는 욕심도 있고, 감정도 있고, 비위도 있고, 여러가지 그뭐 또 기억성도 있고 이런 것 뭐 오만 요소가 다 마음에는 많지마는 그중에 양심을 가지고서 모든 걸 찾아야 됩니다.
양심을 가지고서 찾아야 되는데 양심 중에도 수많은 양심이 있으니까 어떤 양심이라야 되느냐? 하나님 중심 양심, 선한 양심이라 말은 하나님 중심 양심이라 말입니다.
우리 진영에는 선악을 정의를 선은 자존자 중심, 악은 피조물 중심이라 하는데 아직까지도 이 선악의 정의를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요것을 삼지 못하면 전체적으로 그 사람이 나중에 가보면은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집을 짓고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집을 지은 그것이 별로이 없어서 다 공적이 불타버리고 살아 있는 것이 없게 됩니다.
또 우리는 자꾸 모든 것을 사색해 나갈 때에 연구해 나갈 때에 그 방편을 가리켜 성경에는 거룩이라 말했습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하고 구별하고 자꾸 구별해서 나가는 것이 거룩인데, 구별해서 나가는 것이 거룩인데, 구별해서 나가서 어떻게 하는 것이 거룩입니까, 저 ○조사님? 옳은 것을 찾는 것? 옳은 것을 찾는 것, 요 답이 맞습니까 안 맞습니까? 자 양성원 학생들, 맞는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손을 들어 보십시오. 안 맞는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안 맞습니다. 좋은 것은 많이 있습니다. 거게 좋은 것이 많이 있어. 좋은 것의 좋은 것 있고 더 좋은 것 있고 더 좋은 것 있고 더 좋은 것 있습니다.
그렇지 안해요? 좋은 거라 하면 범위 넓은데 거게서 더 좋은 것이 있습니다.
거룩이라 말은 구별하고 구별해 가지고서 하나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이상이 없는 그 완전이라는 하나에 도달하는 그것이 그게 거룩입니다, 사색하는 방편.
그것이 아니면 헛일입니다.
‘이것도 좋은데 뭐’ 어느 정도 가면 다 좋습니다. 좋은데 `이것보다 더 좋은 건 없느냐? 요것보다는 요게 더 좋다.’ 좋은 것 중에 좋은 것 좋은 것 중에 좋은 것 자꾸 그래 가지고서 ‘이 이상은 없다. 요것이 완전이다. 이 이상은 더 좋은 건 없다.’ 이렇게 꼭 하나를 찾아야 됩니다.
이래서 양성원 학생들에게는 ‘교리를 단일 교리를 가지라’ 우리 교리라 하는 것은 성경에 대한 깨달음인데 깨달음은 단일 깨달음을 가져라. 요새는 뭐 보수파에서도 이것도 보수가 인정하는 것이다, 이거 정통이 인정하는 것이다.
정통이 인정하는 것이 많습니다. ‘정통이 인정하는 것이 백이라도 나는 안 되겠다. 백 중에 자꾸 또 가리자.’ 가려 가지고서 백 중에 ‘요것이 완전하고 제일 좋다’ 하는 단일 그것을 찾아서 나아가고 그걸 잡기 전에는 쉬지 말고 자꾸 찾아라 하는 것이 단일 교리를 가지라 하는 말입니다.
이래서 내 주관은 뭘로 하느냐? 하나님 중심인 양심을 가지고서 찾아라. 그러면 나는 내게는 내게 제일 좋은 걸 가지고, 내게 제일 좋은 것이 양심입니다. 영은 영이기 때문에 육에 대해서는, 우리가 육을 찾고 있는 것이지 영은 벌써, 성령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하나가 됐습니다. 하나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꼭 성령은 우리 영으로 더불어 동거 동행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에 대해서는 말하는 게 아니고 이 심신으로 된 육에 대해 말하는 것인데, 육 중에는 제일 옳은 것이 뭐이냐? 양심입니다. 그러면 양심이면 ‘양심으로 하면 된다. 불교인의 양심도 있고 뭐 유교인의 양심도 있으니까 양심으로 찾으면 된다.’ 안 됩니다.
양심을 또 구별해야 됩니다. 양심에 또 거룩을 가져야 돼. 양심에는 “선한 양심이라” 하나님 중심인 양심이라. 하나님 중심인 양심 가지고서, 그러기에 내게 모든 것을 앞으로 지금 사색해 나가는 것을 내 미래를 지금 발자욱 떼놓는 것이 이 사색으로 떼놓는 것이고 사고로 떼놓는 것이고 자꾸 연구로 떼놓는 것이기 때문에, 이 일을 벌로 하면 안 됩니다. 안 되기 때문에 내게 제일 좋은 것, 제일 깨끗하고 좋은 것이 뭐이냐 하면은 양심인데 양심보다 더 좋고 깨끗한 것은 뭐입니까? 양심보다 더 좋고 깨끗한 것은 어떤 것입니까, 여기 양성원 학생들? 나는 자꾸 몰라서, 여기 또 어디 누가 있노? 저 ○○○조사님? 양심보다 좋은 것 뭐, 내가 양심 말했나? 양심보다 좋은 것 깨끗한 것, 어? 중생된 영. 이 답이 모두 어떻소? 내가 묻기를 잘못 물었는지, 나는 묻기를 그런 답을 원했던 것입니다. 양심보다 깨끗한 것은 양심은 수많은 종류가 있기 때문에 착한 양심이어야 된다. 양심 중에 좋은 거는 착한 양심이라. 이러기 때문에 양심이라 말은 양심 전부 도매금이고, 그총중에는 착한 양심.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내가 모든 것을 내 사색이라 연구라 하는 것은 내 미래를 지금 발자욱을 이리 떼놓나, 이리 떼놓나? 내가 앞으로 지금 걸어가는 발자욱을 어떻게 지금 미래를 내가 돋파 나가겠느냐? 미래를 내가 밟아 나가겠느냐? 걸어 나가겠느냐? 미래를 조성해 나가겠느냐? 미래를 내가 지금 창작해 나가겠느냐? 건설해 나가겠느냐 하는 미래인데 미래에 대한 모든 것을 연구하는 걸 가리켜서 사색이라 사고라 이렇게 말합니다.
이 미래는 자기 성패가 거기 달렸기 때문에, 이 중대한 문제라. 중대한 문제기 때문에 사색하고 사고하는 것에 대해서는 내게 있는 중에 제일 좋은 재료를 들여 가지고서 이것을 사색해야 됩니다. 왜? 제일 중요하기 때문에.
우리가 우리에게 있는 제일 좋은 재료가 뭐입니까? 제일 좋은 재료는 양심이라 하면은, 양심이라 하면 ‘아, 그거 잘됐다. 맞다.’ 틀렸습니다, 양심이라 하면.
양심 중에는 별별 양심이 많은데, 양심이 많은데 불교 양심도 있고 뭐 이종교 양심도 있고 별별, 지식의 종류가 많기 때문에 양심의 종류도 많은데 아무나따나 양심이면 다 된다. 불교인도 그 사람도 양심으로 하기 때문에 ‘양심으로만 하면 그 사람 다 합격이라.’ 아니라 말이오. 선한 양심이라야 되지. 하나님 중심인 양심이라야 돼지 안 돼.
그러면 하나님 중심인 양심이라면 내 육적인 그 인적 요소로 말하면 제일 깨끗하고 제일 명철하고 제일 옳은 것이라. 이것이 제일 명철하고 깨끗한 이것을 선봉장을 만들어 가지고서 앞길을 인도하도록 안내자를 세워야 되지, 자기 착한 양심을 안내자로 세워야 되지, 착한 양심이 아닌 욕심을 안내자로 세워 가지고서 욕심 그놈에게 제일 선봉장을 세워 가지고 그놈이 사색한다면 그놈은 흉측한 제 좋은 것 제 욕심만 그것만 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됐을지 모른다 그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이 앞을 돋파 나가는 이 사색에 있어서는 내게 제일 좋은 것 양심, 아니 양심보다도 하나님 중심인 선한 양심, 착한 양심, 선한 양심이 앞에 선봉장이 돼 가지고서 지금 찾을라고 날뛰고 있습니다.
그러면 찾는 데는 뭘 찾느냐? 내가 찾는 대상에는 억억만도 더 되는 것이 있기 때문에 이거 찾을래 저거 찾을래 어느 거 찾을래? 내가 찾는 데에는 뭐 찾아야 됩니까? 뭣을 찾아야 되겠어? 돈을 찾을까요? 권세를 찾을까요? 인간을 찾을까요? 뭘 찾아요? 하나님을 찾아야 돼, 하나님. 하나님보다 더 좋은 이가 없어.
이 말은 무슨 말이냐, 제일 좋고 완전을 네가 찾아. 네가 완전을 찾아가야 되지 완전을 찾아가지 안하고, 어떤 자는 나쁜 것만 찾습니다.
예를 들어서 ‘이거는 쌀가마니다’ 하면은, ‘쌀가마니다' 하면은 쌀가마니 가운데에 이 사람은 `이 쌀가마니라? 여게 무슨 흠점이 없나?’ 이래 가지고서 이래 찾으니까 미돌 돌이 한 개 들었어. 들면서 ‘여게 돌 있다, 돌. 무슨 쌀가마니고? 이게 돌가마니지, 이거. 여게 돌 있다.’ 그 사람은 옳은 것을 찾는 게 아니라 나쁜 것을 찾는 사람이라.
또 이 사람 여기서 ‘이거는 쓰레기라.’ 쓰레기라 하니까 그 쓰레기라 하니 `쓰레기 가마니라? 쓰레기 가마니라? 쓰레기 가마니에는 좋은 것 없나?’ 이거 뭐 툴툴 다 찾으니까 쌀내끼 하나 있어. ‘쌀 여기 있다. 쓰레기 가마니 아니라 이게 쌀가마니지.’ 이렇게 말하는 그 사람은 자기가 자기를 망칩니다. 그것을 고치기 전에는 구원이 안 됩니다.
이래서 오늘 시간 많이 지나갔는데 다음 시간에 계속 할란지 모르겠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모든 사색에서는 내 주관에 대해서 제일 좋은 것을 가지고 또 내가 사색하는 상대방에 있어서는 제일 좋은 것을 네가 자꾸 찾아라. 옳고 좋은 것을 찾아라. 요것이 중요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새는 지금 이 정치관, 정치관에 대해서도 뭐 별별 정치관들이 생겨 가지고서 별별 말하고 있는데 거게 대해서, 어떤 사람은 그 쓰레기 가마에서 쌀내끼 가지고서 ‘여기도 쌀내끼 있네’ 쌀내끼 두고 말하는 인간도 있고 어떤 사람은 이 쌀가마니 ‘여기도 돌이 들어 있다’ 돌 들고 말하는 것 그거는 다 망합니다. 그건 다 치우쳐서 망하고 맙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사색하는 데는 내 주관에 제일 좋은 것 깨끗한 것 옳은 것 착한 양심을 가지고, 찾는 대상은 뭘 찾아야 되느냐? 하나님을 찾아야 됩니다.
그러면 뭐이든지 하루 종일 그 사람하고 얘기합니다. 얘기하는 가운데에 거게서 잘못하면 자기 욕심 찾기 쉽습니다. 하루 종일 얘기하는 가운데에서 나는 그 사람에게 대해서 대할 때에 아주 착한 양심을 가지고 그 사람을 상대하는 것이 내가 나를 살리는 것이요 나를 죽이지 안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기 때문에 나는 여기서 복수성을 가지고 뭣 가지고 뭣 가지고’ 착하지 안한 그 외에, 착한 양심 외에 딴걸 가지고서 상대하는 것은 자기가 자기를 멸하는 자멸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 손해보이지 않습니다.
또 그 사람 말에서 ‘이거 내게 유익이 있나 없나?’ 사람들은 대개는 인간의 이 타락성, 사망성 이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사람 말하는 것이 내게 유익이 있나 없나? 좋으나 안 되나, 해로우나 안 해로우나?’ 전부 자기를 중심해 가지고 사색하기 때문에 모둘때기로 자꾸 부패해 나가고 타락해 나가 가지고서 멸망하고 마는 것입니다.
거게서 그래 하지 안하고, 그 사람은 하루 종일 얘기할 때 상대하는 가운데에 ‘여게 보자, 하나님을 찾자. 요거는 하나님과 같은 것이다. 요거는 진리와 같다.’ 요거 좋은 점을 자꾸 찾아 보면은 나중에 가 하루 종일 보니까 하나님에 대한 것은 하나나 둘이나 하나도 없고 전부 자기 비위에는 딱 맞아서 자기를 하루 종일 위하기는 위했지마는 나중에 보니까 하나님 아닌 딴것뿐이지 하나님께 대한 것 하나도 없으면은 완전히 사망뭉텅이기 때문에 집어던져 버려야 됩니다.
요거 아주 중요한 말인데 여러분들이 앞으로 사고하고 사색하는 데 있어서 자기 주관에 대해서 제일 착하고 좋은 재료를 가지고서 상대방에 대해서는 좋은 것을 찾아서 걸어나가야 내가 나를 살리는 것이 되지 상대방의 단점을 찾는 사람은 자멸하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그 점에 대해서 좀 집에 가 좀 생각해서 우리는 사고와 사색이 좀 자라가고 깨끗해 수정돼 나가야 되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됩니다.
대구집회에 작정한 헌금, 지금 또 앞으로 곧 팔월달 집회가 작정이 되겠는데 요 작정한 것은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내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낼 수 있는 그런 기회를 주시는데 그 기회를 주실 때 그걸 내지 안하고서 달리 써 버리면 다시는 그걸 찾지 못합니다. 제가 아무래도 그거는 나중에 가서 은혜되게 하지 못하고서 무례다 강제다 해 가지고서 뒤에 가서 시험에 들고 연보해야 백지 헛연보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 작정한 것은 언제든지 마음으로 두고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면은 하나님께서 ‘요때라’ 하면서 할 수 있는 그때를 주시니까 그때 하면 문제가 없고 복도 되고 쉽게도 되고 다 돼. 그 안 한다고 딴데 있느냐? 안 하면 딴데로 흘러나가 버리고 말아요. 요것을 팔월 집회 안으로 할 수 있으면 다 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합시다.
그라고 지하철 공사를 위해서 계속 기도합시다. 어제 ○○○집사님이 지금은 자기는 건축을 하고 있기 때문에 거게 돌볼 시간은 없지마는 시간을 내 가지고 자꾸 이래 거석하니까, 그 사람들하고 타협하기를 양쪽에 다 하고 아무래도 여기 곧 장마가 시작할 터인데 장마 동안에는 여기는 건드리지 안하고 양쪽만 다 하고 장마 다 그치고 난 다음에 여기 하겠다고 그런 타협을 봤다고 말을 들었습니다.
아주 좋은 타협이 돼서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뭐 ○○○집사님이 일 잘 해 그런 게 아니라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 하면 막 전부 영웅이 됩니다. 알겠습니까? 요거 아십시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하는 사람은 나중에 가 보면은 전부 영웅이오. ‘그 사람 그렇츰 어찌 사람이 그리 할 수 있느냐?’ 다 잘난 사람 돼요.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 일을 붙들어 가지고 하는 사람은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나중에 보면은 박살이 되고 맙니다. 요거 알아요. 하나님을 알고 보면은 하나님 버리고 딴거 취할 인간이 아무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일만 하면은 전부 영웅이 되고 다 위인이 되고 다 능력가가 되고 이러고 하나님이 싫어하는 일을 제가 착수해 가지고 하면은 그만 뭐 아무리 잘난 사람이라도 박살이 나 버리고 맙니다. 아주 못난 사람 되고 말아요.
하나님이 그렇게 하셔서 그 사람들이 척척 우리한테 ‘그러면 거게는 장마 다 지나가고 그럴 때 밑에 지하수가 나지 안할 그럴 때에 그거 하겠습니다.’ 그래 하는 것을 그 잘못하면 ○○○집사님도 ‘내가 상당히 언변이 있고 내가 뭐 버틀이 있는 모양이라. 내가 말하니까 어데 없나? 내가 말하니까 척척 그 사람들이 다 상응해 온다, 응종해 온다.’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임마, 너 그래 보자. 한번 이거 찡글트려 봐야 되겠다.’ 버려 버립니다. 안 돼요.
그저 교만한 것은 물리침을 당하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는 언제든지 요 겸손 이것을 잊어버리면 안 됩니다. 겸손은 뭐이 겸손이냐? 겸손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하나님과 사람을 높이는 그게 겸손이지 그외에 딴거 없어. 겸손이라도 뭐 이 굽신거리면서 실은 착취하기 위해서 모든 사람을 이용하기 위해서 하는 조작 겸손하는 그것은 아주 교만 중에는 최고의 악한 교만입니다.
지하철 위해서도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