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8 22:54
착하고 충성된 종
1987. 7. 19. 주일새벽
본문:마태복음 25장 14절∼30절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하나에게는 금 다섯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두 달란트를, 하나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고 떠났더니 다섯 달란트 받은 자는 바로 가서 그것으로 장사하여 또 다섯 달란트를 남기고 두 달란트 받은 자도 그같이 하여 또 두 달란트를 남겼으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가서 땅을 파고 그 주인의 돈을 감추어 두었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서 저희와 회계할새 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두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두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두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그 주인이 대답하여 가로되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러면 네가 마땅히 내 돈을 취리하는 자들에게나 두었다가 나로 돌아와서 내 본전과 변리를 받게 할 것이니라 하고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하니라
우리는 이 비유에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던 그 모든 것을 회개할 것이 많은 줄 압니다. 여기 금을 맡긴 비유에 있어서 이 주인은 주님 당신을 가리켜서 비유했고 또 여게 백성들은 우리 구속받은 성도들을 다 가리켜서 비유하셨습니다.
그러면 금을 맡긴 것은 당신의 그 구속의 은혜, 이 세상에 없어질 그런 것을 말함이 아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영감의 은혜라든지 진리의 은혜라든지 또 여러가지로 우리에게 준 그 은혜를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령한 것을 이루기 위해서 이 없어질 물질의 것도 우리가 받아 가지고 없어질 것들이 없어지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고 바꾸어집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죽은 것이 생명에게 삼킨바 되게 하려 함이라”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거둔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이렇게 되든지 저렇게 되든지 없어지지 아니할 그런 것들 영원히 있을 것들을 가리켜서 말씀을 했는데 여게서 우리가 첫째로 깨달을 것은 맡기고 가신 주인이 다시 돌아와서 회계한다 하는 이것을 첫째로 하나 우리가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우리에게 모든 이 세상 준비 기간에 이 처세 형편을 주시고 가신 주님은 반드시 구름타고 오십니다. 가신 주님은 구름타고 오시는데 구름타고 오시면 우리 각자들에게 은혜 주신 대로 그대로 하나도 빠짐없이 역력히 회계하신다 하는 것을 우리가 둘째로 기억해야 되겠습니다.
가신 주님은 반드시 오시는 것과 오실 때에는 가실 때에 우리에게 각자에게 주신 은혜대로, 오셨을 때에는 다시 낱낱이 회계가 있다, 우리와 계산이 있다 하는 그것 우리가 둘째로 생각해야 되겠고, 셋째로 생각할 것은 그 주신 은혜는 어떤 종류의 것이든지, 종류도 물론 많습니다.
종류도 많고 또 종류마다 그 양이 다릅니다. 많은 양도 또 적은 양도 그렇게 각각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의 양이 다르다, 그러면 양이 다른데 많이 준 자에게는 많이 거두고 적게 준 자에게는 적게 거둔다고 말씀하신 대로 양을 주신 대로 그렇게 계산을 댑니다.
대는데 닷 냥중 받은 사람도 있고 두 냥중 한 냥중 받은 사람도 있는데, 닷 냥중 받은 사람도 그걸로 장사해 가지고서 열 냥중 만들었고 두 냥중 받은 사람은 장사해서 넉 냥중 만들었는데 주인이 와서 회계할 때에 꼭 같은 비율로 심판했습니다.
적게 맡긴 자는 그대로 충성, 많이 맡긴 자는 그대로 충성, 이래서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이렇게 칭찬했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착하다 말은 네가 살되 여러가지 이런 중심 저런 중심 뭐 이것을 위해서 살고 저것을 위해 사는, 자기가 위해서 살 수 있는 그런 목적이 천도 만도 넘은데 그러기 때문에 사람마다 이 사람은 이것 위해서 저 사람은 저것 위해서 그렇게 사는데 여게 “착하고” 하는 그 말은 그저 하나님 앞에 은혜를 많이 받았든지 적게 받았든지, 잘났든지 못났든지, 잘나고 못난 것도 하나님께 많이 받아서 많이 잘나고 또 적게 받아서 적게 잘났고, 또 하나님 앞에 많이 받아서 건강하고 또 적게 받아서 병신이고 누운뱅이고 앉은뱅이고 그런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이 자연 은혜는 이것이 신령한 은혜로 변화될 수 있기 때문에 신령한 은혜나 자연 은혜나 그 모든 것이 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인데 은혜를 가지고 이 세상에서 주님 만날 때까지의 준비를 하는데 준비한 데 대해서 심판하는 조건이 첫째가 “착한 종아” 그러면 주님 위해서 사는 것, 주님 위해서 사는 것, 우리가 무슨 일이든지 하는 데는 이 마귀란 놈이 유혹을 주기 때문에 이미 하면서도 공로를 위해서 공명심, 공로와 명예 위해서 하는 것도 있고, 또 자기 권력 위해 하는 것도 있고, 자기 뭐 평안을 위해 하는 것도 있고, 자기가 좋아하는 어떤 것을 위해서 하는 것도 있고, 뭐 하는 목적이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다 주님이 상관하지 않고 다만 “착한 종아” 착하다는 것은 주님을 위주로 주님을 중심으로 한 것을 착하다고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주님 위해서 한 것만 주님이 계산하지 주님 위해서 하지 않은 것, 자기가 명예를 위해서 또 자기 공로를 위해서, 사람들에게 존대받기 위해서, 자기 좋기 위해서, 뭐 부자되기 위해서 그런 것 다 좋습니다. 이렇지마는 나중에 가서 분석해 가지고서 주님 위한 것만 그때 주님이 계산하지 주님 위하지 안한 것은 하나도 남겨 있지 않습니다.
그 외에 것은 사람 보기에는 아주 굉장히 위대하고 훌륭한 것이 많이 있지마는 그것은 다 불타버립니다. 그러면 주님을 위하지 안한 것, 뭐 국가를 위한 것이, 민족을 위한 것이, 가족을 위한 것이 뭐 다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나 그런 건 다 불타버립니다.
자기가 가족을 위한다 해도 주님을 위해서 가족을 위할 수 있습니다. 주님 위해 가족, 사람 보기에는 가족 위하는 것 같으나 가족 위하는 것이 주님 위해서 위하는 것, 또 민족 위하는 것도 주님 위해서 하는 것 있고, 국가 위하는 것도 주님 위해서 하는 것 있고, 또 주일학교 반사를 하는 것도 주님 위하는 것 있고, 주님을 위하는 데에는 직접으로 주님을 위하는 것이 되는 것이 있고 직접은 아니지만 간접으로 그것을 통해서 주님을 위하는, 간접으로 주를 위하는 것도 있고, 간접보다도 더 뜨게 간접 간접 간간접으로 주님 위한 것도 있고 어쨌든지 하나님께서 잘 분석해 가지고서 주님 위한 것만 그때에 주님이 상급으로 계산합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둘째로서는 충성이라, 충성이라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한 것이 충성입니다. 충성이라는 말과 권위라는 말과 실력이라는 말은 아주 다릅니다. 권위는 자기에게 없는 사람은 아무리 충성해 봤자 그까짓 것 권위 있는 사람 한 마디 말한 것도 일생 내 해야 다 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또 실력 있는 사람도 그렇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실력 있고 권위 있는 그것은 심판하지 안하고 다만 충성만 그때에 가치로 칩니다. 왜? 인간이 뭐 천태만상으로 가지고 있어도 다 제가 가지고 있는 것 제것같이 생각하지마는 가서 보면 주님에게 받지 안한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주님이 주시지 안한 것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신 것 다 뺏든다면 인간에게는 다 공뿐이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데 주님이 어떤 자에게 많이 주고 적게 줬기 때문에 적은 자는 주님이 적게 줘 그렇고, 또 누운뱅이는 주님이 적게 줘서 누운뱅이 됐고, 앉은뱅이는 그렇고, 장사는 그렇고, 부자는 그렇고, 거지는 그렇고 다 주님이 주신 대로 가진 것인데 주님이 각각 당신이 많이 준 자는 많이 가져 있고 적게 준 자는 적게 가져 있기 때문에 많고 적은 것은 상관이 없고 자기가 가진 대로 있는 걸 가지고서 하나님에게 충성한 것, 충성이라 하는 것은 자기가 가진 것을 가지고 주인을 위한 그것이 충성입니다.
그러면 자기는 가진 것의 십분의 일을 가지고서 주인을 섬겼다든지, 백분의 일 가지고 섬겼다든지, 있는 대로 다 가지고 섬겼다든지, 만일 제일 적게 받은 자가 있는 대로 다 가지고 주님을 섬겼고 제일 많이 받은 자가 십분의 일, 백분의 일만 가지고 섬겨도 적게 받은 자의 섬긴 것보다 양이 많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은 그걸 보지 않고 충성을 봅니다.
당신이 주신 대로 그것 가지고 다 쳤느냐 덜 바쳤느냐, 십분의 일을 바쳤느냐 백분의 일을 바쳤느냐 하나밖에 안받은 데에 하나 받은 것 그것 다 바쳤느냐? 그러기 때문에 하늘나라 가서 보면 어떤 사람이 복있는 사람이겠느냐? 아주 많이 받은 사람과 제일 적게 받은 그 두 사람이 제일 복이 있을 것입니다. 왜 많이 받은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은 많이 받아 가지고는 대개는 백분의 일만 해도 많으니까 받은 것은 생각지 안하고 충성한 그것만 해서 자기는 많은 양을 바쳤기 때문에 자기가 많은 줄로 이렇게 알기 쉬운데 자기는 많이 받았으나 많이 받은 것을 다해서 주님을 위해서 충성했습니다. 많이 받아 가지고 충성한 사람, 다 가지고 주를 섬긴 사람, 제일 적게 받아 가지고서 다해서 주님을 섬긴 사람 그 두 사람이 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것으로서 충성하였으니 많은 것으로 네게 주겠다” “네가 적은 것으로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 작은 것은 이 세상에서 가진 것을 말하고 많은 것은 무궁세계의 것을 말합니다.
그러면 이럴 때 아주 적게 받아 가지고 있는 충성 다 한 사람 있고, 아주 제일 많이 받아 가지고 있는 것 다해서 충성한 사람 있고 그럴 때 여게는 보면 착하고 충성되다는 것으로 “주인의 즐거움에 와서 참여하라 네가 적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이 세상 것 가지고 충성했으니 “무궁세계에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겠다” 이렇게 말씀했지마는, 이것은 제 생각입니다. 제일 많이 받은 사람 있고 제일 적게 받은 사람 있는데 다 같이 충성했다면 제일 많이 받은 사람이 혹은 더 상급이 크지 않겠느냐 그런 생각도 가져봤습니다. 가져봤지마는 그것은 성경에 없기 때문에 가져봤자 그것은 권위가 있다고 그렇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이러니까 제일 많이 받은 자와 제일 적게 받은 자, 그 두 사람이 하늘나라에서는 제일 복이 많은 사람이 그 속에서 나오겠다 그렇게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은 성경대로입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천을 받아 가지고 천을 다 주님에게 바쳐서 주 중심으로 있는 것을 다해서 충성했습니다. 한 사람은 하나 받아 가지고서 고것 있는 대로 다해서 주를 위해서 충성 다 했습니다.
그러면 그 두 사람이 우리가 생각할 때는 하나 그까짓 것 가지고서 하는 것은 쉽겠지마는 많이 받아 가지고 참 그것을 다해서 충성하기는 힘들겠다 이렇게 보여지는데 성경은 그렇게 말씀하지 안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래도 아주 제일 많이 받아 가지고 충성한 그 사람을 하늘나라에서 아주 제일 적게 받아 가지고 충성한 사람보다 높은 자리를 줘야 되겠다 이렇게 내 생각 같다면 그렇게 생각이 돼지는데 그게 아니라 그말이오.
여게는 보니까 그렇지 않다. 꼭 같은 대우한다. 이랬으니까 우리 생각은 아마 어렵기가 더 많이 받은 게 어렵지 않겠나 이래 싶지마는 여게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렇게 말씀했기 때문에 그 말씀대로 우리가 믿어야 되지 뭐 우리 추측 생각 그런 것은 소용이 없습니다.
“많은 것으로 네게 주겠다” “많은 것을 맡기겠다” 하는 것은 무궁세계의 것을 맡길 것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기가 하나님 앞에 받은 것이 많이 받은 사람, 적게 받은 사람 각각 있는데 인제 그것 가지고 영원을 마련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이 영원 무궁을 마련하는 세상이다. 이 세상은 영원 무궁을 마련하는 것이 이 세상이다 요것을 우리가 변치 않는 것이기 때문에 요걸 굳게 잡아야 되겠습니다.
이 세상에서 영원 무궁의 모든 것이 결정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현실은 영원이란 말을 제가 늘 많이 말했습니다. 이 현실이 잠깐 지나가는 것 같지만 이것은 잠깐 지나가는 이것이 영원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현실은 영원을 결정하는 것인데 오늘 아침에 달란트 비유에서는 많이 가진 사람, 적게 가진 사람 있는데 그것은 주님이 주신 대로 가졌기 때문에 많이 가지고 적게 가진 것의 차이점은 하나도 없다. 많이 가졌으나 적게 가졌으나 그 차이점은 하나도 없다.
제일 많이 가진 사람이나 제일 적게 가진 사람이나, 제일 모든 세상에서 구비한 사람이나 제일 불쌍하고 가련한 사람이나 그 두 사람이 영원 무궁을 하는 데는, 영원 무궁을 마련하는 데에는 조금도 차이 없다. 꼭 같다. 왜? 뭘로 보느냐? 그것은 착한 것과 충성된 것 요 두 가지로만 평가하기 때문에 그러하다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오늘 주님 앞에 설련지 내일 설련지 모르기 때문에 주님 앞에서 서서 반드시 계산하는 일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생각하면서 우리가 살아야 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자기가 무엇을 위해서, 땅의 것을 위해서 했으면 그 기쁨도 또 소망도 그 효력도 다 없어집니다. 크나 작으나 우리는 주님 위해서 해야 됩니다. 반사들도 주님 위해서 하고 권찰도 주님 위해서 하고, 잘못하면 마귀란 놈이 주님 위해서 시작한 그 일을 다른 사람이 알아주고 못 알아주고 뭐 칭찬하고 욕하고 거게서 충격받기 쉽습니다.
우리는 우리 싸움은 뭣이 싸움이냐? 우리 싸움은 주님에게 피동으로만 나는 살라 하는데 내 환경에 피동되는 이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모릅니다. 하다 보면 누구하고 딱 만났으면 그만 그 사람하고 만났으니까 그 사람하고 만나서 얘기하는데 주님 잊어버렸어. 그러면 그것은 누구한테 피동입니까? 그 사람에게 피동입니까 주님에게 피동입니까? 그 사람에게 피동입니다.
주님에게 피동돼 가지고서 모든 것을 접한다는 것, 주님에게 피동돼 가지고 모든 언행심사를 한다는 것, 이러기에 듣는 것이나, 듣는 것으로, 귀로 접하는 것, 눈으로 접하는 것, 입으로 접하는 것, 마음으로 접하는 것, 이 피부로 접하는 것 모든 접하는 것, 모든 것을 이렇게 내가 당해 있어 접하는, 이 접하는 이것을 자기 혼자 그만 접하기 쉬운 것은 주님과 동행이 아닙니다. 에녹은 삼백 년 동안 주님과 동행했다 하는데 접할 때 내가 들을 때도 주님하고 같이 듣고 볼 때도 주님하고 같이 보고 어짜든지 주님하고 같이, 모든 귀로 접하든지, 눈으로 접하든지, 입으로 접하든지, 피부로 접하든지, 수족으로 접하든지, 마음으로 접하든지, 모든 것을 이렇게 접할 때 이 접할 때에 주님과 동행되느냐 자기 혼자냐? 독보냐 동행이냐? 그것을 우리가 가리켜서 주님과 동행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찍해야 산다 해도 이래 보면 주님하고 동행하는 것은 참 얼마나 하기가 힘들고 대개는 제가 그만 사람 만나면 떡 먼저 접해 놓고 난 다음에 접해 놓고 생각하니까 내가 주님 잊어버렸습니다. 이러니까 그다음에 주님 생각합니다. 제가 앞서 달리고 주님을 뒤에 따라오라는 것이오. 제가 떡 가서 먼저 접해 놓고 난 다음에 새로 그 뒤에 이제 뒤에사 주님을 불러 가지고 주님을 찾아오니까 주님이 따라와야 된다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앞서지 말고, 앞서지 말고 주님과 먼저 동행해라, 또 이 모든 어떤 것으로 인해서 하지 말고 주님으로 인해서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그것은 다 영생이 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늘도 반사 선생님들이나 권찰님들이나 우리는 일주일 내 애써서 수고하던 것이 오늘 나타납니다. 오늘 주일날 자기는 자기 학생의 얼마를 인도했으며 자기 교인을 얼마를 인도했으며 또 자기 교인들이 다 같은 예배 자리에 참석했지마는 은혜를 얼마나 받으며 못 받으며 하는 그것이 다 일주일 내 우리 수고한 것이 주일날 추수합니다. 주일날 나타납니다.
이것이 이제 영원 무궁세계에서 착하다는 것, 주님 중심, 충성, 요 두 가지로 심판할 때 내가 한 것이 착한 양이 얼마나 되며 충성된 양이 얼마나 되는가 고것 우리가 생각하면서 해야 됩니다.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지은 집은 사람 보기에는 아주 잘했는데 나중에 가 따지고 보니까 주님 중심 위주는 하나도 아니고 제 중심 제 위주입니다. 그건 착함이 없습니다. 또 충성은 뭐, 주님 위주가 아니고 자기 중심 자기 위주면 충성 다 해 봤자 그것은 충성이 아니고 제 욕심대로 한 것이지 하나도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범사에 주를 위해서 하고 우리는 주님과 동행하는 것과 주님으로 인해서 사는 것 이것을 우리가 연습을 얼마나 해야 될지 모릅니다. 대대로 살아서 나오기를 악으로 자기 중심 모두 이것으로 살아나왔기 때문에 이걸 고친다는 것이 그렇게 힘이 듭니다. 얼마나 힘든지 모릅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 동행하는 에녹은 동행하다가 산 채로 승천했습니다. 엘리야는 주님에게 순종하다가 산 채로 승천했어. 그러기 때문에 주님에게 피동과 주님과 동행만이 영생이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어짜든지 언제나 공과를 꼭 외우도록 하십시오. 공과 외운다는 것이 이게 얼마나 복된 일인지 모릅니다. 공과 이래 외우면 굉장한 수입이 돼서, 일 년에 쉰두 주일인데 그렇게는 우리 안 돼도 셋 주일에 한번씩도 되고 넷 주일에 한번씩도 되고 하는데 이 지금 공과가 몇 공과가 됐습니까, 공과책? {공과책에 공과모음에 몇개나 모여 가지고 있어? 몇 개 모여 있지? 편집실 없나?} 공과모음에 몇 공과 모였지? 공과 외우고 공과 외우면 나중에 공과를 다 외우면 뒤에 가서 그만 성경 박사가 됩니다, 정말로. 그러니까 그저 티끌 모아 태산으로 한 공과 한 공과씩 그래 외워 나가는 것이 나중에 가서 자기에게 큰 능력이 됩니다.
그리고 지하철 공사 위해서도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