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9 17:33
주님을 기쁘시게
1989. 4. 24. 월새
본문: 고후 5:8-10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여기에 '우리가 담대하여' 하는 것은, 이 담대는 어데서부터 온 담대인가? 이는 주님에게 소망을 두고 어서 가서 주님 만나서 같이 있기를 원하는 이것이 모든 세상을 향하여 담대함이 됩니다.
사람의 모든 공포와 비겁이 어데서부터 나오는가? 그것은 땅에 속한 소망을 가지는 자로서 그것이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땅의 소망을 저의 소망으로 가진 사람으로서는 세상에서 공포와 비겁의 생활을 안할 수가 없는 것이고, 또 순전히 주님에게 소망을 두어, 주님에게 소망 둔 그 생활이라도 두 가지가 있어서, 세상에서 주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는 것과 이 세상을 떠나 무궁한 세계에서 주님을 향한 소망을 가지는 소망이 달라서 무궁을 향한 주께 대한 소망을 가진 사람은 땅위에서 모든 생활이 담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논리적으로만 되는 게 아니고 주님을 접하고 주님을 가까이하고 이렇게 해본 경험과 체험에서, 주님과 가까이하는 것보다 더 행복이 없고, 기쁨이 없고, 평강이 없고, 수입이 없고, 자기에게 유익이 없다는, 모든 면으로 유익이 되는 그것을 자꾸 경험하고 체험하는 그 사람은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하는 이 자기 소원이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자기가 그저 주님을 소망한다고 해도 주님을 자기가 접함으로, 주님을 접함으로 접한 그 결과에 자기에게 생명과 평강과 유익이 오는 그것을 체험하는 데서 나옵니다.
처음에 믿을 때에는 땅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을 접할 때에 재미가 있고 접하는 그것이 자기에게 유익된 것을 자기가 보기 때문에 항상 주님을 말해도 땅에 있는 피조물을 상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을 접한 사람은 주님을 접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을 접하는 것보다 자기가 확실히 현재에 유익이 있는 것을 자꾸 경험한 사람들은 모든 피조물을 접하는 것보다 주님 접하는 것이 유익하기 때문에 주님을 접하는 사람이 됩니다. 자꾸 주님을 접촉하고 만나려고 하고 주님을 사모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됩니다. 접한다 말은 서로 주님과 서로 가까와지고 이렇게 만나지는 걸 말합니다.
주님을 이렇게 가까이하는 이 일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가까이하는 것과 이 두 가지를 해본 사람은, 결국은 주님을 가까이 하는 데로 기울어기고 피조물을 가까이 하는대로 기울어지는 그 일이 차차 감해지고 없어지게 됩니다.
주님을 가까이 접함으로서 유익을 보는 그 사람은 세상에 살아 있을 동안에는 주님과 아무리 밀접하게 접한다고 해도 이 몸 안에 있을 때에는 주님과 접하는 것이 어떻게 서투르고 또 지장되는 것이 많이 있기 때문에 주님과 접하는 그것이 어떨 때는 좀 주님과 밀접하게 접하게 될 때에는 자기가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마는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자기가 지금 주님하고 접하는 것은, (어? 왜 졸아? 엊저녁에 뭐 했어? 일찍 자, 일찍. 자기 말이야, 자기. 새벽에 와 가지고 꾸벅꾸벅 졸고 있어?) 이 피조물인 세상과도 접해보고 또 주님과도 이렇게 접해보고, 접한다는 말은 만날 접(接)자, 대일 접(接)자라 말이요. 접해보면, 세상 모든 거, 뭐 사람이든지, 물건이든지, 사건이든지, 세상의 과학이든지, 영광이든지, 지위든지 오만 것 세상의 좋은 것 다 접해봐도 주님과 피조물인 이 세상에 있는 것과 접해보니까 주님과 접한 것이 유익이 훨씬 낫습니다. 이러니까 경험하고 체험한 사람은 차차 차차 세상은 멀어지고 주님과 접촉하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하기는, 세상에 살지마는 벌써 세상은 바울을 십자가에 못박았고 바울은 세상을 못박았다고서, 바울은 세상에 있어도 세상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는 사람이고 또 바울에게도 또 세상은 아무 소용없는 사람이 돼 버렸습니다. 그것을 배설물과 같이 그렇게 평가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래서 피조물과 주님을 세상에 있으면서 둘을 접촉해보면은, 접촉 해보지 않은 사람은 마귀라는 놈이 작용하기 때문에 주님 접촉하는 것은 아예 접촉만 하면 손해가 가고 실패되고 낭패되기 때문에 자꾸 주님 접촉은 멀어지고 세상 접촉이 가까워집니다. 그러나 주님을 실상으로 접해본 사람들은 주님과 피조물을 이렇게 사귀어서 전해 보니까 피조물을 접한 그 결과보다도 주님을 접한 그 결과가 유익이 현저히 나으니까, 현저히 나으니까 차차 차차 살아가면서 주님과 접촉하는 것은 자꾸 더 갈급이 생겨지고 소원이 생겨지고, 이 피조물과 접하는 것은 차차차 알고 보니까 뭐 할 필요도 없고 그것은 되든지 안 되든지 되는 대로 둬 두어 버리고 그만 자꾸 마음이, 정신과 모든 힘이 다 주님을 사귀어서 접하는 그리 기울어지게 됩니다. 그리 기울어지는 사람은 나중에 가서 무슨 결과가 맺어지는고 하니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게 알게 됩니다. 자꾸 주님을 접하게 되는 사람은 몸 안에 있으니까 이 몸 때문에 주님 접하는 것이 많이 방해가 되고 둔해진다 그 말이오. 이라다가 어떻게 주님과 밀접한 그 접촉을 가지게 될 때에는 자기가 그만 몸 안에 있는지 몸 밖에 있는지 그걸 모르게 돼. 자기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지 어데 있는지 자기 몸이 있는지 없는지, 자기가 육에 살고 있는지 세상에 살고 있는지, 영계에서 살고 있는지 그만 모든 거 다 그게 잊어버려지고 구속한 주님만 이렇게 바라보여지는 그런 접촉이 되어집니다.
이라다가, 그래 한참 주님과 접하니까 심령이 밝아져. 심령이 깨끗해져, 모든 것이 다 정평 정가가 돼, 모든 관이, 보는, 모든 것을 보는 것이 다 정확해져, 소망도 또 손해나 유익도 이게 다 그만 완전히 딴 세계가 되어서 영원한 그것을 보게 돼서 주님이 보는 거와 같은, 만물관이 그렇고, 또 이해관이 그렇고, 손익관이 그렇고, 빈부관이 그렇고, 고락관이 그렇고, 가치관이 그렇고, 이래 다르니까 그 세계에서 있을 때에는 주님을 가까이 전할 때인데 그래 가지고 그만 그대로 있으면 좋을 터인데 이라다가 떡 어째 버리니까 그만 몸에게로 돌아와 가지고 주님과의 접하는 생활이 거리가 멀고 내나, 세상과는 다르지마는 그런 사람이 돼. 이러니까, '몸에 있을 때에는 항상 주님과 멀고 따로 있다' 이래서 어서 몸을 떠나서 주와 함께 있는 것을 원하는 그런 사람이 돼져.
왜 그리 되느냐? 그것은 이 보이는 이런 것을 접하는 그런 생활을 자기 생활로 살지 안하고 보이지 않는 것, 보이는 것들을 없는 가운데서 만들어 내신 보이는 것들을 없는 가운데서 만들어 놓으신 그분하고 접하다 보니까 그분이 만들어 놓은 보이는 것들과 접하는 생활은 차차 멀어지기 때문에 '보는 것으로 살지 안하고 믿음으로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렇다 저렇다' 가르쳐 주시는. 가르쳐 주신 그 가르침에 따라서 자기가 살게 되니까 그런 사람이 된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오늘 아침에 제가 이 말씀을 마지막으로 하고 끝내려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를 사람하심으로써 참 말로 다 할 수 없는 지극히 큰 사랑의 대속을 하신 주님을 상대해서 우리가 사는 생활인데, 믿을 것도 있고, 바라볼 것도 있고, 의지할 것도 있고, 충성할 것도 있고. 뭐 이런 거 저런 거 다 많이 있습니다. 또 인내할 것도 있고 자기의 모든 것을 바칠 것도 있고 이렇게 다 있지마는 우리가 모든 언행심사의 생활을 하려고 시작할 때, 이 모든 생활이 출발할 때에, 시작할 때에 우리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는 일이 돼야겠습니다. 요것을 우리가 작정을 합시다.
우리가 모든 신앙 생활을 시작할 때에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자기의 모든 시작하는 생활이 되어지도록 요것을 확정을 지웁시다. 자기가 말을 할 때나 사람을 접할 때나 그때에, 그뭐 믿음도 좋고, 정의도 좋고, 성결도 좋고, 공의도 좋고, 화목도 좋고 모든 거 다 좋은 겁니다. 좋은 것이지마는 그것은 전체의 열쇠가 되는 그런 좋은 것은 아니라. 그런 하나의 지엽이라. 하나의 지엽이기 때문에 원둥치는 내 놓고 가지만 거머쥐고 날뛰기가 쉽다 그거요.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전…, 사람을 접할 때에 말하는 것이나 물건을 거석하는 것이나 이것을 우리가 가지도록 합시다. 아브라함 생명이, 떡 물질 문제면 물질 보고, 사람 문제면 사람 보고, 사건 문제면 사건 잘 되도록 그래 봤는데 아브라함은 그렇지 안하고 모든 일에 '내가 어짜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해야 되겠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모든 일을 판단하고, 비판하고, 경영하고, 이행하고 하는 것이 아브라함의 생활이라 말이오.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러면 우리는 모든 언행심사, 말이나 생각이나 '내가 생각을 가질 때에 이것을 주님이 기뻐하시겠느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생각이냐?' 말에나 생각에나 모든 것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시발하고 움직이는 우리의 모든 생활이 되어지도록 요것을 확정짓고, 그라고 난 다음에 우리가 생활하고 나서 뒤에 계산을 따질 때에, 결산을 따질 때에는 뭘로 따질 거냐? '내가 한 이것으로서 주님이 기뻐 하시겠느냐?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됐느냐?' 주님이 기뻐하시는 그 결과가 맺어지는 요것으로서 우리가 마지막에 결산을 맺도록 요렇게 합시다.
그러면, 시발의 모든 경영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또 우리가 해 놓은 그 모든 일에 대해서 계산을 대서 마지막에 결산 댈 때는 '주님을 기쁘시게 한 일이 됐느냐? 주님이 기뻐하시겠느냐? 주님이 내가 한 이 일에 대해서 기뻐하시느냐?' 하는 요것으로, 그만 시작에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결말에는 주님을 기쁘시게 한 일이 됐는지,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됐는지 그것으로서 우리의 전생애의 시발과 결론을 짓는 요것으로서 우리 생활의 열쇠를 삼아 가지고 범사에 이 열쇠로 가지고 꺼내면서 전진해 나가는 우리가 되도록 합시다. 그것이 오늘 아침에 제가 증거하려는 목적입니다.
반사 선생님들은 자기가 담당한 이 공과 요 몇 공과 안되는데 넷 주일도 다섯 주일도 되는 거니까 다섯 주일씩 한다면 찍해야 열한 공과밖에 안 됩니다. 그렇게 많다고 생각지 말고 이 공과를 꼭 외우고 자기가 실행, 실천해서 거게서 경험하면, 일년에 열한 공과를 경험하고 체험해서 요래 나가면은 거게서 자기는 굉장한 변화를 받을 것입니다.
이번에 우리가 공과에서 여섯 가지 받은 구원도 자기가 새기면 새길수록이 자기는 점점 온전한 사람이 되어지고 심령이 밝아지고 모든 세상이나 만사물들을 보는 그 눈이 다 밝아지고 옳아지고 자기도 자기를 바로 보게 되고, 이러기 때문에, 그 모든 자기 아닌 다른 데에서 행복이나 평강을 누리는 것보다는 자기에게서 누리는 것이 낫습니다. 자기에게 누리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은 주님, 하나님에게 가 가지고 누리는 것이 제일 좋습니다. 이래서, 반사들이 요렇게 할 것.
하루 삼십분 기도 요거 잃지 말고 꼭 계속합시다. 이것이 우리가 이제, 몇년째지? 팔년째가? 팔년째인데 요 기도, 관심을 가지고 기도 한 사람과 안 하는 사람이 앞으로 큰 차이가 있습니다. 박윤선 목사님이 그래서 기도를 다이나마이트를 재서 할려고 구멍 뚫는 거와 같다 했어. 땡땡 구멍 뚫어봤자 하루 뚫어봤자 까짓 거 얼마 못 뚫지마는 그래 놓고 뒤에 다이나마이트를 질러 가지고 꽝 그러면 굉장한 결과가 나는 거라.
우리 기도라 하는 것은 뭐 할때는 유야무야 그렇지마는 이 기도를 해서 기도의 그릇이 가득 차고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웅답이 올 때에는 누가 그를 따라가겠습니까? 따라갈 수가 없어. 그런고로 삼십 분 기도 잃지 말고 그렇게 꼭 계속합시다.
권사님들은 아홉 분이 다 나오셨고 목사님들은 두 분이 다 나와서 기도했고, 장로님들은 열 분이 기도했습니다. OOO, OOO, OOO, OOO, OOO. OOO, OOO, OOO, OOO, OOO.
자기네들이 자기를 연구해야 돼. 자기 연구도 해야 되고 자기 생활 연구도 해야 되고 자기에게 닥치는 모든 사건, 환경 그것도 연구해야 됩니다. '요라니까 좋더라.
저라니까 나쁘더라.' 짐승들도 다, 풀이 꽉 찼지마는 풀을 먹으면서 '요 풀 먹으니까 안됐다 나쁘다' 그렇기 때문에 풀을 먹여 보면은 먹다가 좀 거석한 게 있으면 막 뱉아 가지고 이래 막 뱉아 내뜨립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자기 생활에 요 생활을 먹으니까 자기에게 어떤 결과가 맺더라, 저 생활 먹으니까 자기에게 어떤 결과가 맺더라, 요것을 자기가 연구를 하게 되면은 차차차 될 터인데 뭐 덧배기라. 마구잽이라, 이러나 저러나 아무 상관없이.
그래서, 자기가 장로된 사람이 '내가 장로직을 이렇게 하나님에게서 받았으니까 장로로서 내가 덕을 세워서 어찌됐든가 유익이 되도록 거게 사명을 다하겠다.' 요 마음만 먹어도 복이 됩니다. 요 마음먹고 자기가 손해봤습니다. 요 마음을 먹고 '요 장로 때문에 내가 이거는 손해를 본다' 장로 때문에 손해보는 건 주님 때문에 손해보는 것이요, 복음 때문에 손해보는 것이요, 이웃 때문에 손해보는 것인데 손해만 봤으면 손해본 그 결과에 유익이라 하는 거는 굉장한 걸 자기가 알게 될 것인데, 요 맛을 본 사람은 그렇게 옛사람으로 사는 그런 생활을 하지 안합니다.
장로님들은 열 분 그래, 요렇게 자꾸 요 함으로써 자기가 어떤 그 결과가 맺어지고 좋은 결과가 맺어지는가 그 보면 알아. 자기 생활도 연구해야 되고 자기도 연구해야 되고 '내가 요라니까 요 사람 되더라, 저라니까 저 사람 되더라.' 이걸 연구를 해야 되지 그거는 연구하지 안하고 자꾸 열심만 가지고 산다고 되는 게 아니라. 꼭 자기를 연구해야 돼. 자기 연구해야 되고, 하나님 연구하고, 하나님 연구가 제일 유익이 많고 자기 연구가 그 다음 유익이 많고 그 다음에는 사람 연구해야 돼. 되나 안되나 친절하다고 사랑하는 게 아니라. '요 사람을 접하니까 어찌 된다. 요 사람을 접하니까 어찌 된다.' 모든 사람을 자기가 접하면 벌써, 미래로 두고 현재를 지냈으면 과거가 되기 때문에 접한 결과가 나왔다 말이오.
자꾸 접해보면은 자기가 거게 대해서 '요렇게 해야 되겠다, 저렇게 해야 되겠다.
요 사람은 요래 해야 되겠다, 저 사람은 저래야 되겠다.' 그 연구해야 되니까 이렇게 연구를 해 가지고 사는 사람은 슬기로운 사람이기 때문에 실패가 없지마는 그거 안 하고 막 사는 사람은 다 실패할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지난 재독에 참석한 사람 이백사십칠 명, 주일학교 남반사들은 꽃마을로 삼십이 명이 기도하러 갔습니다. 기도하러 가 가지고 요 꼭 주의할 것, 기도하러 가 가지고 주의할 것은 뭐입니까? 인솔자 OOO조사님 한번 대답해 봐요.
기도하러 가 가지고 꼭 주의할 것은 뭐입니까? 그런 건 다 지엽이라, 지엽.
잎사귀고 가지고 그래. 외나 주 되는 둥치는 뭐인고? 기도하러 가면 갈 때와 갔다 올 때에 고친 게 있어야 됩니다. 무엇인가 변화된 것, 고친 게 또 새로운 걸 뭐 올 것 것 아닙니까? 꼭 요 고친 게 있어야 되겠다 요걸 명심해요. '내가 기도하러 요번에는 갔다가 오는데 무엇인가 고쳐진 게 있고 달라진 게 있어야 된다.' 내가 달라져야 주님이 달라지고, 내가 달라지는 것은 주님이 내게 대한 관계가 달라졌다 그말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지금은 시간 늦지 안합니다. 빨리 가서 주일학교 또 중간반 새벽기도에 참석을 시키도록. 세상 공부 그것 때문에 다 등한히 하다가 후회됩니다. 나도 후회된 사람 중의 하나요. 그러니까 모두 경험한 사람들이 말하는 것이니까 어짜든지 세상 지식 넣어주는 것보다도 하나님의 지식이 그 속에 들어가야 그 사람이 변화를 받습니다.
지금은 이 사층에 예배보는 사람들이 몇명 안돼. 여덟시 반에 사층에 예배보는 사람들이 얼마되지 안해요. O선생? 여덟시 반에 예배볼 때 몇명 돼, 총? 백명? 남반만? 그전에 합하여 볼 때에는? 몇명 돼, 남녀반에? 이삼백은 무슨 이삼백? 그리 되지도 안했어요. 이백 명 됐는가 몰라. 그런데 인제 이천명까지 올라 가야 돼요 이천명까지.
이러니까 어짜든지, 그 동안 자꾸 교회에 제도를 이리저리 바꾸는 데에서, '이라면 좀 나을까?' 그것도 연구해, 이래보고 또 안 되니까 또 저래보고 자꾸 이거 제도를 이리저리 바꾸어가는 거게서 많은 손해를 봤습니다. 이 중간반 시키는 데에서 잘 안되니까 그만 구역으로 이렇게 주일학교 반사에게로 귀속시키는 이 일을 삼 년 하는 동안에 아주 손해를 많이 봤습니다.
이래서 손해 많이 봐 이제는 그걸 고쳐서, 중간반은 반사를 등용해 가지고 있어야 되겠는데, 중간반 반사 등용하는 것을 처음에는 '목회자 나갈 사람들은 다 목회자 실천 신학을 하기 위해서 중간반 반사로 들어오라' 그래 가지고 약속을 그래 했고 또 그들도 그런 생각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그때에 중간반 반사로 등용 됐다가 목회자로 나가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밖에 없는데 그 한 사람은 다른 데로 가서 그만 그리 돼 버렸고 나머지기는 목회자가 다 됐습니다. 그래서 그때 한 사람은 목회자 다 됐고, 이랬는데 지금은 반사 등용을 할 그런 생각을 가져집니다. 이 중간반 반사하는 것이, 우리가 뭐 권찰직도 있고 주일학교 반사직도 있고 이래 있지마는 제일 중요한 직이 중간반 반사들이라 하는 그런 것을 제가 생각을 가졌습니다.
왜? 주일학교 딱 졸업맡고 난 다음에 중학교 삼 년, 고등학교 삼 년 대학 일 년.
칠 년이라. 그 칠 년간이 제일 중요해. 칠 년간에 제일 탈선돼 가지고 믿던 거 다, 하나님 다 팔아 버리고 복음 다 팔아 버리고 세상 이 음행의 포도주에 들어 가지고 망하게 되는 그것이 꼭 칠 년 동안에 망하는데, 요 칠 년 동안만 잘 넘겨서, 중학, 고등학교, 대학 일학년까지만 요 신앙을 바로 가지고 한다고 하면은 그런 나중에 어데 던져 놔도 그만 살 수가 있어. 그러기 때문에, 요 시기가 제자 복음으로서 인간을 구원하는 시기 중에는 요 칠 년이 제일 한토막이고 제일 중요한 시기다 하는 그것을 깨달았어요.
깨달아서 이러면 중간반 반사는 요것을 깨닫고, 중간반 반사 하는 요 사명이 어떻다는 요 사명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중요성을 깨닫고 주님이 원하시는 것을 얼마나 원하신다는 거, 얼마나 가치가 있다는 그것을 바로 깨닫고 요 중간반 반사직의 요 가치 있는 그것을 깨달은 사람만이 중간반 반사로 등용을 해야 되겠어요.
과거는 우리가 구역으로 하는 것은 자기 중심의 구역, 자기 중심의 구역을 이래도 안 되니까 '자기 중심의 구역을 이렇게 해서 해 봐야 되겠다.' 왜? 과도지점으로 찍해야 학생들 받아 가지고 또 내보내고 받아 내보내고 받아 내보내고 하니까 자기에게 처쳐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까 이 사람들이 취미를 가지지 안해서, 그러면 자기에게 남아 있도록 하는 그 방편을 취하자 한 것이 구역장에게 소속을 시키자 또 주일학교 반사들도 끝까지 반사하면은 그것이 주일학교 반사에 중간반 반사 나중에 구역장으로 해 가지고 끝까지 자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 사람을 관리해 가지고 기르도록 그렇게 하자 하는 거게다가 가치를 두고 그런 방편을 썼던 것입니다. 그래 해 보니까 그것도 일시로 인간들의 그 기분으로서는 열심이 있지마는 그것도 자꾸 쇠해지고 퇴보돼지고 자꾸 쇠퇴해져요.
이래서 이제는 '이 가치가' 일 년에 졸업하는 학생들이 얼마인데, OOO조사? 일 년에. 금년에는 졸업한 사람이 얼마요? 졸업한 학생이 한 칠팔백 명이나 되는데 일 년에 칠팔백 명씩이 졸업이 되면은 얼마요? 십 년이면 칠천 되고 뭐 이십 년이면 만오천되고 이럴 건데 이 졸업한 것이 전부 다 그만 세상으로 나가 가지고 독수리한테 채여 보내 버려서 병아리 다 채여 보내 버리고 뭐 남아 있는 거 몇 마리 안돼요 그만. 다 채어버려 버리고. 이런데 독수리에게 안 채여가고 암만 와도 이게 다 제 힘으로서 박력을 가짜 수 있는 때는 뭐이냐? 칠 년 동안만 잘 기르면 그것이 이제 요동치 않는 그런 사람이 돼져. 칠 년 동안이 이 중요해요.
이래서 이 칠 년 동안이 뭐, 다른 것도 다 중요하지마는 주님이 보실 때에 학생들을 주일학교 졸업해 가지고, 졸업할 때까지는 다 그냥 지내요. 졸업해 가지고 그 다음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에 가는 데는 막 이래 막 흩어져 버리지 또 그때는 이 사회인으로 피장 나가고 흩어지지, 제일 어려운 시기기 때문에, 요 시기를 잘 넘기면 이거는 참 기독자 노릇을 할 수가 있으니까, 요것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시기가 요 칠 년 동안에 있다는 요 가치를 깨닫고, 나는 뭐 다른 데 가 가지고 목회하는 그것보다도, 한 군데 가서 목회해서 거기서 그만 평생 목회해 가지고 기르던 그 교인만 자꾸 자꾸 길러 나가는 것보다도 이제 칠 년 동안 받아 가지고 길러서 또 내보내고 받아 내보내고 어짜든지 이래도 칠 년 동안, 들어오기만 들어오면 요 것을 참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만들어 가지고 세상을 이기도록 하는 요것이, 가 가지고 단독 목회하는 뭐 몇백 명 하는 그것보다도 요 칠 년 동안 요 토막을 요거 과도지점에서 받아 가지고 요걸 알뜰하게 길러 가지고 세상에 나가도 다시는 속화되지 안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만들어 내야 되겠다' 하는 요 가치성을 가지는 요 사람이라야 중간반 반사로 등용을 하겠습니다.
이제는, 이래서 중간반 반사를 등용을 남반사 이십 명 여반사 이십 명 대개는 지금 그런 인물들이 없으나 있는 데까지는 그렇게 해 가지고 중간반 반사를 등용을 하려 합니다. 일생 동안 이걸 자기가 할 그런 사람, 이래서, 편집실에도 자기가 펀집실 하는 이것이 이제 가 가지고 뭐 목회하고 전도하는 것보다도 이게 모든 이 교훈이 세계에 퍼쳐 나가니까 이 교훈을 바로 해 가지고 세계 모든 사람에게 퍼쳐 나가는 이것이, 자기는 편집실에 앉아 있어도 세세에 전하는 사람이 돼야 된다는 요 가치성을 깨닫고 거게다가 일생을, 그러다가 뭐 연단받아 가지고 딴데 갈라 하는 게 아니라 그걸 평생직으로 일생을 바치겠다는 요런 사람들만 편집실에도 등용해 가지고 이제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인원수는 자꾸 줄어서 들어갈 것이고, 그렇게 하려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저한테도 '저는 편집실에서 일생을 주님에게 바쳐서 일하는 것이 그것이 제일 내게는 적성이요 또 요긴하다고 중요한 사명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일생을 편집실에서 그만 주를 섬기는 일을 하겠습니다.' 하는 그 소원을 가지는 사람들이 더러 있어요. 나한테 말한 사람들이 더러 있어. 다른 사람들은 속에 포부가 있는지 없는지 모르지마는. 그라고 중간반 반사에서 요 칠 년이라는 중요한 요 시기. 요 시기가 일생 동안에 인간 성장에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에 요 시기 요 토막을 내가 차지해 가지고 내가 있는 충성을 해 봐야겠다는 그런 사람들만 등용할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원하는 사람들은 남녀반에 뭐, 너무 연령 차이가 있어도 안 되지마는 엔간하면 다 될 터이니까 요것만 결심만 가지는 사람이라면 반사로 지금 등용을 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뭐 경제 생활은 넉넉하게 주지는 못하고 과거보다는 조금 더 후하게 하려고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내가 어제 저 OOO조사, 전화하니까 심방 가고 없어서 부인에게 말했어.
부인에게 그래 '중간반 반사들이 이런 이런, 그런 중요한 책임이 있는데 네가 다시 들어와서 하겠느냐?' 이렇게 내가 하나 말을 던져 넣고 'OOO조사님에게 말해라.' 이랬습니다. 아마 그 분은 좀 깨달아서, 이 가치성을 깨닫기 때문에 그리 할 것입니다.
이래서, 여러분들이 반사 천거를 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이래서 그 반사는 이제 구역장이 돼 가지고 자기 구역의 사람으로 일생을 기르는 것보다 요 과도지점인 칠 년 동안이 제일 중요한 토막이기 때문에 요 토막에서 이제 사람을 구원해서 멸망하지 않도록 하려는 요 가치성을 깨닫고 거게서 충성할 사람들이면 이제 소개도 해 주시고 또 자기가 자원도 하고 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