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22 16:16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아는 것
1984. 10. 3. 수야
본문: 시편 91편 14절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여기에 건진다는 말씀과 높인다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람의 형편은 금생에서나 내세에서 이 두 가지 종류의 형편 외에는 없습니다. 우리들에게 모든 좋지 못한 해가 되는 일과 또 유익이 되는 일 이 두 가지뿐이요, 다른 말로 하면 실패하는 일과 성공하는 일 둘 뿐입니다. 또 망하는 일과 흥하는 일 이 둘 뿐입니다. 천해지는 것과 귀해지는 것 둘뿐입니다. 죽는 거 사는 거 이 둘 뿐입니다. 이 여러 가지로 말을 하려고 하면 많은 종류가 있는데 그것을 총 합해서 궁지에서 모든 불행에서 건지신다 또 하나는 현재보다 앞으로 더 좋아진다 하는 이 두 가지 말로 전체를 표시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하는 말씀은 인생에게 금생이나 내세에 모든 해로운 거 그 전부는 다 주님을 사랑하는 자를 주님이 구출하신다 그렇게 말씀하셨고, 또 수많은 종류의 모든 생명과 평강의 그 영광의 행복은 주님을 아는 자에게 높여 주신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참 모든 불행을 수습하는 것이나 치료하는 것이나 또 방비하는 것 거기에서 구출되는 것 이런 것이 너무도 방편이 많습니다. 수많은 마귀들이 사람들을 꾀어 가지고 구출되는 방편을 이거다 저거다 하는 그 구출 방편도 수를 셀 수 없을 만치 많습니다. 그러나 이외의 것은 누가 말했든지 전부 다 거짓말입니다. 온 거짓말이 아니면 반 거짓말입니다. 반 거짓말도 결론은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또, 사람이 현재보다 앞으로 좀 더 행복스러워진다. 존귀해진다 강해진다, 존영해진다 하는 이 건설에 있어서 그 방편도 알지도 못한 이 무책임한 사람들이 악령에게 꼬임을 받아 가지고 이 방편을 뭐 천도 만도 넘게 많이 말들을 해 놨습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구출을 받고자 하는 것과 보다 자기가 점점 건설해 나아가고자 하는 이것은 다 동감이요 같은 욕심입니다. 그러나 악령이 사람들을 미혹시켜 가지고 성경이 말한 대로 악령은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요 거짓말하는 자의 애비가 된다 그렇게 애비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 악령이 에덴동산에서부터 아담 해와를 꾀와 가지고 높아지는 방편을 말해 줬고 또 궁지에서 빠지는데에서 구출되는 그 방편을 말해줘서 우리 인류 시조가 그 배암이 말하는 구원 방편, 건설 방편 이것을 취해 가지고 전 인류는 사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수많은 종류의 이 파괴를 방지하고 건설을 이루어 나가는 그 방편을 말하였을지라도 그 모든 것은 다 거짓말이요 또 반거짓말이다. 어리석은 자가 볼 때에 죽을 때까지는 혹 거짓말이 아닌 것 같다 할지라도 숨이 딱 끊어겼을 때에 그때 계산 대면은 다 속고 속은 것뿐이지 하나도 참된 것이 없다는 결론이 나올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성경을 주님의 피공로로 인해서 선물로 받았는데 이 성경을 읽는 우리들이 첫째로 행복을 얻는 것은, 첫째로 참 복음을 받아서 복을 받는 것은 뭐이냐? 이렇게 분주 복잡한 방어법 치료법 건설법이 있는데 그 모든 것이 다 속이는 것이요 거짓말이요 멸망으로 끌고 가는 것뿐인 이 세상에 하나님께서 이는 털끝만치도 허위나 실패가 끼어 있지 않는 이 참된 방어법 치료법 건설법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이 도리를 받은 것이 믿는 자에게는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사실을 첫째로 우리가 믿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나 무궁세계에서나 진리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 방편은 변하지 않습니다. 젊을 때도 늙을 때도 변하지 않습니다. 평안 무사한 때도 변하지 안하고 아주 혹독한 환난 중에도 변하지 않습니다. 이 방편은 어디든지 변하지 않고 그대로 권위를 가져서 모든 어려움에서 건짐을 받기 위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으로 방편을 삼은 자는 천이면 천 만이면 만 뭐 몇 억 억 이든지 다 그대로 구출함을 받고, 또 자기가 앞으로 건설을 해서 성장 향상해 나갈라고 하는 자로서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하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고 이 방편에 복종한 자로서는 한 사람도 성공 못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어떤 데서라도 합니다. 독침의 그 사형 앞에서라도 합니다. 첩첩 공산주의의 포위 속에서 온갖 고문과 고형 가운데에서 죽었다 할지라도 이 방편을 믿고 이 방편을 쓰고 세상을 떠났다면 그는 장차 나타날 지극히 존귀한 높임을 받은 사람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궁지에서 구출되는 방편과 또 앞으로 모든 면으로, 자체면으로 활동면으로 명예나 영광면으로 소유면으로 어떤 면으로서든지 보다 좀 성장되고 향상돼 가는데에는 주님을 아는 이외에는 방편이 없다 하는 것으로 단정을 지우는 이것이 큰 축복입니다.
사람들이 왜 이렇게 모두 다 분주 복잡해서 시간을 갖지 못하도록 그렇게 분주한가 하는 것은 이 배암이 주는 구출 방법과 배암이 주는 그 승리의 존영의 방편을 가졌기 때문에 이것이 쑥물이요 이것이 사약인데 이것을 먹은 자는 이 교훈과 이 사상을 가진 자는 그것 때문에 평생 분망하고 자기만 골빠지고 마지막에 죽을 때에 가보면 다 헛된 수고를 한 자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사람이 해 아래서 수고한 것이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한고' 마지막 죽을 때의 결산에서는 후회하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데 이렇게 승패에 대한 정확무오한 방편을 우리가 알았다는 것, 이 지혜를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행복이요 얼마나 큰 축복인지 모릅니다. 이러나 이 사실을 믿지 안하고 배암이 주는 그 방편을 항상 되풀이하는 자는 그는 계산을 따져 보면 여나문 살 먹을 때까지 한 일을 스무 나문 살 먹을 때에 계산해 보면 환하게 정답이 나오고, 한 이십 세 됐을 때에 한 것을 한 스물 댓 살 먹었을 때에 계산 해 봐도 벌써 정답이 나오는데 아닌줄 알면서도 마귀란 놈이 꼬와서 그렇지마는 설마 설마 요번에는 안 되겠느냐? 열 번 실패했지만 한 번만 성공하면 되지 하고서 그런 요행심과 그 설마라는 이 미혹에서 사람들은 일생 동안 망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밤에 우리는 첫째로 요것부터 확정을 지웁니다. 그 물질면이나 또 사업면이나 출세면이나 자기의 무슨 실력을 갖추는 학업면이나 권세면이나 지위면이나 영광면이나 명예면이나 금생이나 내세나 꼭 같습니다. 이 외에 다른 방편이 없다. 다른 방편은 전부 거짓말이요 다 속이는 배암 마귀가 우리에게 멸망받도록 유혹시켜서 준 것이지 참말은 하나도 없다, 해야 됩니다.
어떤 자가 배암의 방편을 써 가지고 온 세상을 주름잡고 자기 장중에 다 거머쥐고 했으니까 성공같지마는 그 사람도 눈이 멀어서 성공이라고 하는 것이요, 반드시 그 사람이 세상을 떠날 때에는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느끼고 내가 한 것이 모두 다 헛된 일을 했다 후회뿐이지 그에게 참 죽음이 오고 보니까 잘됐다 하는 그런 결론을 내린 자는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어리석지 말고 요것을 단정합시다. 이것부터 단정한 사람이라야 그 다음 것이 필요 있지 이것을 단정하지 안하고 이외에도 방편이 있다고 생각하는 자는 그 자는 방편이 있다고 하는 그것이 배암이 준 것이요 마귀가 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방편과 정반대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방편은 옳은 것이니 그거 전부는 다 틀린 것이니까 반대됩니다.
그러기에, 요것부터 단정을 지우고, 고 다음에는, 그러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구출의 유일한 방편이라. 유일한 방편이라 말은 제일 좋은 방편이란 말이 아닙니다. 유일한 방편이라 말은 요 방편 하나뿐이란 말입니다. 요 하나뿐이란 말이오. 그 방편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니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어떤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가? 네,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라니,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가? 부부끼리 사랑하는 요새 이십 세기 음란한 세대가 와서 남녀끼리 사랑하는 그 사랑인가? 아닙니다. 자기의 동등인 동 계급인 자주 만나고 사귀는 그 동류의 사랑 그건가? 그것도 아닙니다. 그라면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는 그 혈통적인 사랑인가? 그것도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저가 나를 사랑한즉'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이 사랑을 인간들은 알기를 이 세 가지 사랑밖에는 모릅니다. 사람들이 이 세 가지 사랑 외에 아는 사람은 성령의 사람이 아니고는 알지를 못합니다. 이 사랑은 하나님의 사랑인데, 배암의 사랑과 정반대가 되는 사랑입니다.
사랑은 하나님 한 분만 가지셨지 다른 것은 가지지를 못합니다. 왜? 사람은 영원 불멸의 존재이기 때문에 천 년을 사랑한다 할지라도 천 년 너머 또 있으며 영원히 그를 사랑할 수 없으면 그 사랑은 반드시 사망으로 화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기에 영원히 사랑하는데에는 영원한 지혜가 있어야 그 방편이 영원불변의 무궁한 방편이 되겠고, 또 내가 사랑함으로 그에게 역사하는 그 노력이 제한 없는 전능의 그 능력의 노력이 아니라면 어딘간가 제한되면 그것이 끝날 때에는 반드시 비참으로 화해지고 말 것입니다.
또 전지전능하다 할지라도 사랑의 대상이 되어 있는 우리 사람들의 여하에 따라서 다소라도 피동을 입는 사랑이라면 우리는 실족하기 쉽기 때문에 당신의 사랑이 변해질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의 어떠함에 따라서 거기에 제재를 받지 아니하고 거기에 피동되지 아니하는 이 사랑이라야 참사랑이기 때문에 이는 하나님만이 가질 수 있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전지의 사랑이요 전능의 사랑이요 영원불변의 사랑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이 사랑을 가지고서 우리를 사랑하셨는데 그 사랑이 무엇인가? 성경에 말씀하시기를 사랑은 여기 있으니 인간이 사랑하는 사랑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히 구출하시기 위해서 독생자를 보내셔 가지고 죄의 문제를 해결한 사랑이요, 또 의롭게 하는 의로운 사랑이요 자존자 주재자로 더불어 영원 불멸의 친밀을 가지게 한 이것이 사랑이라, 성경에 말씀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은 이 세 가지 사랑을 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잘못을 대신 형벌받으셔 가지고 대형으로서 사죄의 사랑을 베풀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죄로 그 값으로 멸망받게 되는 그 죄를 대신 형벌 받으셨는가? 그 죄는 세 가지 종류의 죄입니다. 하나는 하나님의 선포된 하나님의 뜻인 이 진리를 어긴 죄입니다. 또 하나는 창조주에게만 피동되지 아니하고 이 피조물 제가 자존자처럼 자기 주관대로 행한 이 불의의 죄입니다.
또 하나는 창조주시요 주재자시요 모든 것이 그로 인하여 생겼고 그로 인하여 보존되고 그로 인하여 생육하고 번식해 가는데 그분으로 더불어 원수가 되어진 그분을 배반한 그분으로 더불어 윈수된 이 죄입니다.
이 세 가지 죄의 형벌을 주님이 대신 받으시므로 이 죄를 우리에게서 사죄하셔서 우리를 죄 없는 자로 하나님 앞에 세우셨습니다. 죄 없는 자로 세우실 때에 하나님의 지공법과 지성법에 죄 없는 자로 인정받게 세우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살 때에 죄악이 와 가지고 죄가 와 가지고 삐뚤어진게 와 가지고 마귀나 모든 불법이나 이런 것들이 와 가지고 우리를 침노해서 강제할 수 있는 침노해서 강제할 수 있는 그런 모든 세력들을 다 제거 시켰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악령과 죄와 사망과 저주는 우리를 강제 침해하지 못합니다. 침노하지 못합니다. 또 우리들이 하나님의 뜻에 삐뚤어짐이 없이, 죄 없이 살 수 있는 그 능력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셨고 여기에 대한 구비한 모든 은혜들을 우리에게 구비시켜 주셨습니다. 이것이 사죄의 사랑입니다.
또, 하나는 우리는 창조주이신 그분만이 영원을 아시고 완전한 지혜를 가지셨기 때문에 그분의 인도를 받아야만 되고 그분의 도움을 받아야 전지전능의 도움을 받아야만 의를 이룰 수 있는 것인데 주님이 대신 우리의 불의를 그 값은 형을 받아서 다 해결하셨고, 우리가 하나님에게 순종하지 못하는 하나님에게 피동되지 못하는 그 피동을 주님이 대신 피동했습니다. 대신 피동해서 대행으로 인해서 우리에게 의롭다 하는 그 공로를 입혀 주셨고, 또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서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이런 공로를 설정해 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시는 이 공로를 설정했고, 우리는 하나님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인도를 따를 수 있는 이런 실력을 우리에게 부여해 주셨습니다. 그것이 주님의 공로와 진리와 성령의 능력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에게 베푸셨습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과 원수된 그 죄의 형은 대형으로서 다 해결을 지우셨고 대신 화친해서 화목의 제물이 되셔서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셔서 창조주 자존자이신 이 하나님으로 더불어 우리가 밀접하게 이 부자의 관계를 가지고 얼마든지 교제할 수 있고 얼마든지 대화할 수 있고 얼마든지 모든 것을 다 의를 의탁을 할 수 있는 이 밀접한 친교의 이 관계를 설정하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사랑인 것입니다. 이 정욕적인 사랑에 이것이 있을 수 없고, 동류적인 사랑에 이것이 있을 수 없고 혈육적인 사랑에 이것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만 이 사랑을 가질 수 있는 실력을 가지신 분이요 또 이분만이 우리에게 이 사랑을 베푸셨습니다.
그런고로, 사랑은 어데나 있는 것 아니고 하나님 한 분만이 가지신 사랑 하나뿐입니다. 사랑은 하나뿐이라는 것을 우리가 또 명심해야 됩니다. 하나뿐인 이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신 것은 그 사랑이 들어서 대형의 공로를 베풀어서 사죄의 그늘 아래 살게 하셨고, 또 대행의 공로를 베풀어서 의의 그늘 아래 살게 하셨고, 화친의 공로를 베풀어서 하나님과 화친된 자로 살 수 있도록 이렇게 우리에게 베푸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십니다.
그러면, 이 사랑을 받는 것이 무엇이며 이 사랑을 거부한 것이 무엇인가? 이 사랑은 기본적으로는 이 사랑을 아무도 거부하지 못합니다. 일생 동안 거부해도 이 사랑은 그에게 입혀져 있습니다. 그러나 건설면에 있어서는 이 사랑을 거부할 수도 있고 이 사랑을 환영할 수도 있습니다. 이 사랑을 환영하면 그 사람의 생활에 이 사랑이 밑받침이 돼 가지고서 역사할 수 있고 이 사랑을 거부하면 그의 행동에는 이 사랑의 능력의 혜택이 역사 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문을 두드리노니 문을 열라 그러면 내가 들어가서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고 말씀하신 그것이 제한적 자유지마는 우리 성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안 받아들일 수 있는 그런 제한적 권리가 있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 해 놓은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이 세 가지 공로를 자기가 인정하고 믿는 것이 이 믿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요, 이 사랑을 받아 가지고 이 사랑의 은혜를 힘입어서 사랑 받은 자로 사는 것이 공로를 입은 자로 사는 것, 이 공로에 합당하게 사는 것, 이 공로에 거슬리지 않게 사는 것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모든 부요 모든 소유를 다 날 사랑하시기 위해서 모든 부요를 다 내어 놓아 나를 사랑하셨으니 나도 모든 부요를 다 내어놓아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 대속의 이 사랑을 내가 버리지 않기 위해서, 이 대속의 사랑을 입고 이 대속의 사랑을 입은 자로 살기 위해서 이 대속의 사랑을 내가 보존하고 기념하고 이 대속의 사랑을 벗지 안하고 이 대속의 사랑을 입고 받고 이 대속의 사랑을 받은 자로 자기가 살기 위해서 모든 소유가 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절단나는 것이 소유를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또 자기의 모든 기능이나 몸을 이 사랑으로 살기 위해서 모든 자기의 몸이나 기능을 다 바쳐서 사는 것이 자기의 몸을 바쳐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요, 자기의 생명을 다 바쳐서 이 대속을 입고 살고 이 대속 때문에 모든 생명이 절단나도 대속을 벗지 않는 것이 생명을 다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은 이 사실을 확실히 믿고 이 대속을 자기가 입고 이 대속을 받아 입은 자로 이 대속 받은 자로 이 대속으로 사는 그것이 주님의 사랑을 받아 주님을 사랑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요거 외에는 구출되는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이 금생과 내세에 택한 자들의 구출은 꼭 요 방편을 통해서만 구출하게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이 하나님의 구출이 아니고는 구출될 수 없는 고 현실을 만들어 주시고 고 현실을 만들어 주신 것은 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구출이 아니면 안 되는 고 현실을 만드신 것은 하나님이 구출을 주시기 위해서고 현실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고럴 때에 고 현실에서 하나님의 구출을 받는 것은 주님의 대속하신 주님의 사랑을 내가 믿고 인정하고 요 사랑을 하는 것입니다. 요 사랑을 받아 가지고서 대속의 사랑으로 사는 것이 대속의 공로로 사는 요것이 주님의 구출을 받는 것이니, 요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주님을 사랑하는 대속으로 사는 요것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인데 대속으로 살라고 하면 소유가 상하는 때도 있고 자기의 몸이 상하는 때도 있고 자기의 생명이 상하는 때도 있고 모든 위험이 있기 때문에 위험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는 그 위험에서 대속의 공로를 다 벗고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다 버리고, 대속의 공로를 입고 고대로 사는 것이 사랑하는 것인데, 대속의 공로를 입고 살려 하면 거기에 너무도 오는 마찰이 많고 거기에 큰 어려움의 환난이 있기 때문에 그 환난이 두려워서 대속의 공로를 벗음으로서, 하나님이 모처럼 준비한 이 구출을 주시려고 한 것인데, 대속의 공로를 벗음으로 구출은 줄 수 없고 대속의 공로를 입는 자에게만 한해서 하나님이 구출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으로서 인생의 영원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영원의 인생의 모든 구출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현실이든지 그. 현실은 주님이 나를 사랑하심으로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나를 존영하기 위해서 필요한 현실로 만들어 주셨는데 공산주의가 와도 뭐이 와도 주님이 이 현실은 만드신 것이요 나에게 필요 있는 현실이다, 요것도 확고부동의 진리로 가지면 자기를 영영히 구출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덧붙여서 이 현실은 주님이 만들어 주신 것인데 이 현실은 반드시, 주님이 나를 구출하시기 위해서 영원전 예정대로 순서에 닥친 현실이요 하나님이 또 나를 구출하기 위해서 창조하신 모든 것들이 등용돼 가지고서 이루어진 이 현실인데, 현실은 나를 구출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현실인데. 이 현실에서 주의 구출을 받는 것은 주를 사랑함으로서만 받는다는 요 단일한 법칙이 다 진리적으로 결정돼 있기 때문에 사랑하는 고 법칙을 떠나서는 아무도 주의 법칙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핑계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저 맹종적 신앙으로 믿사옵나이다 하면은 다 된다는 그런 허무맹랑한 소리 그것은 마귀란 놈이 거짓 그리스도의 탈을 입고 와 가지고서 사람들을 속이는 것입니다. 모르면 행할 수 없고 행함이 없으면 행위 구원은 안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간단하게 해서 주님을 사랑하는 것은 주님이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공로를 베풀어서 이 공로가 있기 때문에 이 사죄자로 무죄자로 의인으로 하나님과 친밀한 자로 우리가 살 수 있는 공로를 베푸시고, 또 이 자로 살 수 있도록 이 자로 살 수 있도록 하나님은 나를 인도하시는 인도자가 되어서 의를 행할 수 있도록 저 객관면을 다 하나님 편에 그 면을 전부 다 설정해서 다 구비해 놨습니다. 다 단속해 놨습니다. 아무리 약자가 강자를 친교할라 해도 강자가 허락지 안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와 친교를 가지고저 원하시고 영원히 변치 않는 친교를 가지기를 원하시고 가지도록 요 모든 구비한 준비를 베풀어 놓으셨습니다. 우리를 죄 없는 자로 이렇게 사죄 공로를 입히실 뿐 아니라 죄 없는 자로 살 수 있는 그 모든 구비 조건들을 다 구비해 놨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은 하나님의 법적인 대속과 그 공로로 우리를 보호해서 아무 원수도 우리를 해할 수 없도록 안보하는 이 공로와 이것만이 안하고 이 법적 구원에서 안보의 이 은혜의 속에서 또 내가 셋째로 이 사죄 행위를 칭의의 행위를 화친의 행위를 내가 실질적으로 할 수 있는 이런 모든 요소를 구비해 놓은 것이 주님의 대속인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의 대속은 사죄 칭의 화친의 새생명의 이 세 가지인데, 한 가지가 세 가지씩 삼 삼 구의 대속을 자기가 이렇게 누리는 이 누림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구출을 받을 수가 있습니다. 이 구출은 건설적인 구출이요, 건설 구원 성화 구원적인 건설이요, 행위적인 구출인 것입니다. 우리가 거기에서 어떤 사람이 영감을 받았으면 그를 생각해서 깊이 깊이 생각하면 자기가 이 은혜에서 활발하게 활동할 그 무대는 끝이 없는 그런 광대한 무대인 것을 자기가 알게 될 것입니다. 어디든지 마음대로 뛰놀 수 있고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고 어디든지 활동할 수 있는 조건도 다 구비되어 있고 입장과 처지도 다 되어 있고 거기에 있는 실력들도 모든 것도 다 구비되어 있는 것을 자기가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구출되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그 다음에. '저가 나를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우리의 건설은 주님을 아는 것 주님을 아는 것,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고, 또 주님은 나를 책임지셨으니 내가 주님을 책임지는 그것이 아는 것입니다.
첫째는, 주님을 아는 것은 주님은 나를 대속해 주신 주님으로 아는 것이 첫째 아는데에 제 일호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이렇게 광대무변 영원하신 이 구비하신 이 대속을 나에게 베푸신 하나님이시다 하는 것을 첫째 아는 것이 그것이 아는 것이요, 다음에는 이 주님은 자존자시며 목적을 정하신 자시며 예정자시며 창조주시며 모든 것을 주재하는 주재자시며 모든 것의 보존자시며 주권자시며 영원히 개별 개별의 모든 것을 주권적으로 섭리하시는 주권 의지로 홀로 모든 것을 예정하셨고 주권 능력으로 모든 것을 성취하시는 이 하나님이라.
보든 존재가 그분이 짓지 안 한 게 없고 모든 순서가 그분이 정한 대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고 모든 움직임이 그분의 주권적 섭리로서 움직이지 않는 것이 없다는 이 사실을 자기가 지식으로 가지고, 그 지식으로 가진 그 지식을 인해서 자기 안에 대내적인 주관적인 그 효력이 자기에게 있어야 합니다.
주관적인 효력이라 말은 전능자 아버지시니 다른 사람이야 조롱하고 저놈 미쳤다 하든지 말든지 주권자가 나의 주님이시라. 전능자가 나의 주님이시라.
주님이 모든 것을 창조하신 주의 것이라. 이제 이 주님의 모든 속성. 주님의 그 자체의 모든 지능면이나 속성면이나 사랑면이나 모든 면을 자기가 말로 인정을 한다고 하는 그 인정이 믿는 그 믿음이 자기 속에 주관적인 그 구원이 얼마나 되는가? 주관적인 구원이 얼마나 되는가? 말로는 전능자가 나를 보호하신다.
말로는 하지마는 위험한 그 세력 앞에 대할 때에 전능자가 나를 보호하신다는 보호를 입으로는 말하지마는 내 마음 속에 주관으로서는 하나도 믿어지지는 않기 때문에 뻘뻘 떨리기는 그대로 떨립니다. 그분의 전능이 내 주관을 담대하게 만들고, 그분의 사랑이 내 주관을 기쁘고 즐겁게 만들고, 그분의 그 주권 섭리가 독침 앞에서도 이제 사랑의 주님이 내면은 사랑의 손인 것을 내 주관이 알아서 기쁘고 즐겁게 이제 주님이 나를 연애하시는 그 역사인 것을 알고 주관적 평강과 주관적 구원이 얻어지는 그 신앙을 가졌을 때에 내 주관이 되고 나면은 내 주관 밖에 있는 모든 객관적인 대외적인 당신의 구원이 우리에게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그를 앎으로 말미암아 주관적 높임이 내게 옴을 인하여서 하나님께서는 그 믿음 그 아는 거 가지고 그 아는 거 가지고 당신은 내 밖에서 객관적인 모든 역사를 하여도 모든 피조물을 내 구원을 위해서 다 움직여서 역사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음으로 온전케 하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믿음의 주여 온전케 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아브라함도 믿음으로, 모든 너희들은 다 믿음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받았는데 이 믿음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그러기에 당신을 안다는 이것은 내 주관에 어느 정도 효력이 오는가? 암만 말로는 하지마는 주관에 효력이 없으면 불신입니다. 주관에 효력이 오면 내 몸 밖에 대외적인 객관의 효력 역사는 즉시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일이 일조일석에 되는 그런 쉬운 일은 아닙니다. 아는 것으로 다 되는 거는 아닙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의 이 건설 구원을 이루도록 하기 위해서 어떤 사람은 모태에서부터 믿어 가지고서 칠십, 팔십 년이 걸리도록 하시고 어떤 사람들은 몇 십 년 가고 난 다음에 그 뒤에 몇 십 년이 걸리도록 하시고, 저는 스물다섯 살 먹어서 예수 믿기 시작했으니까 주님이 이렇게 이 두 가지 연습을 시키는 것을 오십 년이 흘렀습니다. 오십 년이 걸려서 이랬지마는 오십 년 동안 알뜰히 연습을 했으면 벌써 숙달돼서 꿈에라도 뭣이 온다 해도 당신의 어떠하신 분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믿음으로서 세상이 우스꽝스러운 일이 오면 올수록 우습고 기쁘고 즐겁고 이게 좋아서 모세가 홍해 바닷가에서 기쁘고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의 하시는 솜씨를 바라보자 하는 그런 기쁨이 올 터인데, 오십 년 동안 이 일을 연습을 했지마는 정신 딱 차려 가지고 있으면 그러다가 짜빡 놓으면 의심만 들어오면 금방 있던 거 다 무너져 버리고 아무것도 없고 다시 이제 가지고서 '주여! 주님은 나를 돕는자시니 피조물 이 나를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고서 담대히 이렇게 가지고 이렇게 되는데 쉽게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늦었지마는 앞선 자가 뒤 되고 뒤선 자가 앞 된다고 말씀하신 대로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짤막한 그 시일이라도 우리가 눈을 다른 데에 기울이지 안하고 그저 틈 없이 이 두 일을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과 주님을 아는 이 일을 연습하고 연습해서 가속도로 돼서 어쨌든지 우리는 그 공산주의나 어떤 대환난 속에서라도 주님이 어떠하신 분인 것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는 기쁨과 평강이 올 수 있는 이 주관적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는 이 단계를 빨리 마련해야 됩니다. 이것이 곧 준비한 기름입니다. 자기 주관에 이것이 있으면 모든 대외전은 반드시 승리를 하고야 마는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