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9 17:31
주님을 기쁘시게
1989. 4. 23. 주후.
본문: 고후 5:8-10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그 위에 6절에 보면은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이 신앙 생활을 늘 하면서 주님을 바라보고 믿고 또 사모해서 주님으로 인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어짠지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자기가 육신을 입고 살 때는, 육신을 입고 살 때는 아무리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산다고 해도 주님과 거리가 멀고 따로 있는 것을 자꾸 자기가 느끼게 된다.
그것은 왜 그러냐?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함이로라' 이 보이는 이런 것으로 자기 생활을 전부를 삼지 안하고 보이는 것 그 이면 역사를 가지고 신앙 생활을 하기 떼문에 육신을 입고 신앙 생활할 때에는, 항상 자유롭지도 안하고 또 주님과 거리도 멀고 그렇게 따로 있는 그것을 자꾸 느끼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신앙 생활 하는 데는 첫째는 안 믿을 때에는 세상으로 인하여서 신앙 생활 했습니다. 세상이 동하면 동하고 정하면 정해서 세상으로 인해서 모든 생활을 했습니다. 세상으로 인해서 모든 생활을 이렇게 해서 움직이는 시발도 세상으로 인하여서 움직였고 또 모든 움직이는 생활에 목표나 소망이나 목적도 항상 세상 것을 소망하고 목적해서 우리가 살았던 사람입니나. 이제는 거게서 떠나서 우리는 세상에 사나 주님을 믿고 바라보고 하늘나라를 소망함으로 주님의 이 말씀과 또 주님을 인하여 우리 생활이 시발됩니다.
세상으로 시발된 신앙이 하늘나라로 시발이 됐고 모든 인간으로 시발된 우리 생활이 이제는 주님으로 인하여 시발되는 생활이 됐고 또 땅에 소망과 성공을 바라면서 모든 생활을 하던 우리들이 이제는 하늘나라의 소망과 성공을 위해서 신앙 생활 하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그러면 믿기 전 생활과 믿은 후의 생활이 아주 판이하게 다른 생활을 했고 또 원인을 가졌고 목적과 소망을 가지고 살게 된 우리들입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세상에서 나와서 주님 안에서 사는 것이라 그렇게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 안에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할 때에 우리가 몸으로 이런 저런 모든 신앙 행위를 할 때도 있고 또 우리 마음으로 또 이런 저런 신앙 행위를 할 때도 있습니다. 어떨 때는 몸으로는 하나 마음으로는 아니할 때도 있고 또 마음으로는 신앙 생활을 하나 몸으로는 또 아니할 때도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몸으로 먼저 해야 되겠고, 우리 신앙 생활이 몸으로 해야 되겠고 몸으로 하는 그 신앙 생활이 마음으로 하는 신앙 생활에 나아가서 몸과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타락한 후에 심령이 아주 어두워졌습니다. 심령이 어두워져서 구별하는 것도 심히 둔하고 또 비판하고 평가하는 것도 둔하고 소망하고 경영하고 취사 선택하는 것도 둔합니다. 우리 심령은 많이 둔해겼습니다. 이것은 악령이 이렇게 둔하게 만들어서 둔해졌는데 세상으로 인하여 세상을 목적삼고 사는 그 생애, 이제 예배 시작에 사회자가 '육신을 위하여 심는 자는 육신으로 말미암아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 영생을 거둔다' 하는 그 성경 말씀같이 우리들이 과거에는 육신으로 살았고 육신으로 심는 사람들 됐는데 이제 예수 믿은 후에는 성령으로 심는 사람들이 됐습니다.
그러면 성령으로 심는 사람 됐다 말은 성경 말씀대로 우리가 신앙 생활 하고 또 하늘나라의 소망을 위해서 신앙 생활 하고, 주의 대속을 입고 주를 위해서 그렇게 우리가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 믿기 시작하는 모든 우리 믿는 사람들의 신앙 생활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나와 가지고 예수님 믿는 신앙 생활을 하기는 하고 있지마는 여게서도 갈래길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잘못하면 이만하면 뭐 다 됐다 싶으지마는 실은 나중에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 보면은 엉뚱스럽게 아주 판이한 그런 헛일하기도 쉽다 그것입니다. 그 갈래길에 있어서 우리가 몸으로는 신앙 생활을 하면 다 인줄 아는 이런 사람들 있지마는 몸으로는 신앙 생활을 해도 마음으로는 아주 딴판을 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이래서 하나님은 온전자시요 그는 변치 아니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속성은 단일성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공부했습니다. 하나님은 단일성의 하나님이라 그러면 하나님은 이 성질과 저 성질을 두 성질을 가지지 못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한 본질 본성만 가졌지 두 본질 본성을 가지지 못했습니다. 그러기에 성낼 때나 웃을 때나 내나 그 마음이요. 그 성질이고 미워할 때나 사랑할 때나 그 마음이요 그 성질이지 미워할 때 마음이 따로 있고 사랑할 때 마음이 따로 있고 그런 거리 변하지도 아니하십니다. 다만 변하는 것은 우리가 변하니까 그분이 우리를 상대할 때에 변한 것으로 이렇게 나타나지 그분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에게 무슨 큰 징계를 줄 때의 그 마음이나 우리에게 큰 상을 줄 때의 그 마음이나 주님의 마음은 꼭 같은 마음이고 두 가지, 징계 주는 마음 있고 또 상급 주는 마음 있고 두 마음이 아니고 한 마음이신데 우리에게 하나님의 그 사랑이 징계가 와야 될 때에는 징계가 오고 상급이 와야 될 때에는 상급이 오는 것은 그것은 우리들의 그 변하는 데 따라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오는 보응이 변해지는 것이지 하나님은 그런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은 우리 마음이 아주 뭐 여러 갈래로 나뉘울 수 있습니다.
우리 마음이 단일성의 마음이 아니고 우리 마음은 전부 이것이 다 잡합심의 마음입니다. 잡것이 전부 합해 가지고 되어 있는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 마음은 쪼갠다고 하면은 그게 뭐 몇백 쪼가리 몇십 쪼가리로 우리 마음이 그렇게 쪼개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 마음은 쪼개지지 안하고 단일성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우리 마음은 단일성의 마음이 아니고 여러가지 잡것을 주 종합해 가지고서 된 마음이기 때문에 마음 하면 하나인 줄 알지마는 마음에게는 얼마나 많은 잡것들이 마치 모래 무더기 같습니다. 우리 마음은 모래 무더기 같고 하나님의 마음은 나눌 수 없는 한 덩어리 한 개의 마음으로 그와 같이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이 이렇게 여러가지 잡합으로 되어 있는 종합 마음이라, 잡것이 합해서 집합되어 있는 마음이라, 모래 무더기같이 되어 있는 마음이라, 자갈 무더기같이 되어 있는 마음이라, 우리 마음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켜서 자기가 몸으로 행하고 또 마음으로 행동하고 그러면 마음과 몸이 같이 하니까 그것은 온전한 행위라 할 수 있겠습니다. 마음으로도 행하고 몸으로도 행하면 온전한 행위라 할 수가 있겠는데 그 마음으로 행하는 그것을 보니까 마음은 아주 그 쪼갱이가 많아서 이 마음을 가지고 몸과 하나되어 행동할 때도 있고 저 마음을 가지고 몸과 하나로 행동할 때도 있습니다. 몸이라는 이것은 하나의 한 몸으로 뚜렷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도 뭐 이중 삼중을 할 수 있는 몸이지마는 거게는 한 몸뚱이면은 한 행동을 하고 이 두 가지 세 가지를 하지를 못하는 그런 무능해서 우리 몸은 몸으로 행동할 때는 그만 그 몸으로 그 행동하지 몸으로 이 행동하면서 또 몸으로 지금 저 행동하고 또 몸으로 여게서 일하면서 몸으로 저게 몇십 리 밖에 딴데 가서 행동하고 그래 못 합니다. 이거는 무능해서 못 합니다. 몸은 무능해서 이걸 여러 갈래로 하지 못하고 그저 한 행동으로 이와 같이 하지마는, 무능해 못하고.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몇 가지 갈래로라도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그 행동을 마음으로 하면서도 마음을 이 마음 가지고 그 행동과, 고기덩어리 행동과 같이 할 수도 있고 저 마음과 고기덩어리 행동을 같이 할 수도 있고 또 고기덩어리 행동하고 그래 못 합니다.
이거는 무능해서 못 합니다. 몸은 무능해서 이걸 여러 갈래로 하지 못하고 그저 한 행동으로 이와 같이 하지마는, 무능해 못하고, 우리 마음이라 하는 것은 이것은 몇 가지 갈래로라도 행동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행동을 할 때에 그 행동을 마음으로 하면서도 마음을 이 마음 가지고 그 행동과, 고기덩어리 행동과 같이 할 수도 있고 저 마음과 고기덩어리 행동을 같이 할 수도 있고 또 고기덩어리 행동은 하는데 그 마음은 아주 딴데 가서 엉뚱한 짓 지금 하고 있을 수도 있고 하는 이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에서 떠나서 신앙 생활로 옮겨서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요 생활을 연습하고 숙달하도록 노력을 하고 그 다음에는 우리 몸으로 행동하는 이것을 우리 마음과 몸이 하나가 돼 가지고서 심신으로 한 행동을 하는 이런 행동이 되어지도록 또 우리가 힐을 써야 되겠습니다. 마음과 몸이 같이 움직여서 행동하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판단해 가지고서 이것은 해야 될 일이라 생각이 될 때에는 몸으로는 행동하는데 그 마음은 딴걸 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을 자꾸 붙들어서 마음과 몸이 일치의 행동을 하도록 그렇게 우리가 연습도 하고 노력을 해야 되겠습니다.
예를 든다고 하면은 하나님을 찬송하는 찬송을 입술로 하니까 그 몸으로 하는 행동입니다. 찬송을 하면서 그 마음은 지금 뭐 오만 데 다 돌아다닙니다. 찬송가 일 절을 부르는 데도 벌써 그 마음은 뭐 동양에도 갔다가 서양에도 갔다가 팔팔 올림픽에도 갔다가 뭐 또 이제 테레비에도 갔다가 저거끼리 장난하고 노는 데 거기도 갔다가 이렇게 이 마음이 이것이 아주 잡되게 그렇게 제맘대로 날뛸 때가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 몸으로 하나님의 뜻으로 요렇게 해야 된다고 하나 우리가 확정을 지웠으면은 확정 지우고 난 다음에 행동할 때에 우리 몸으로 행동을 하고 그걸로 다라고 생각지는 말고 몸으로 행동하는데 마음이 같이 행동해야 된다는 이것을 우리가 노력을 해 가지고서 몸과 마음이 같이 움직여지는 이 일을 하도록 우리가 또 힘을 써야 합니다.
쓰는데, 힘을 쓰니까 몸과 마음의 움직임은 같이 움직이기는 움직이는데 보니까 움직이는 움직이기는데 또 그 마음이라 하는 것은 뭐 참 수많은 갈래로 이렇게 되어 있기 때문에 그 몸으로 행동하는 그 행동에 거게 동원돼야 될 그 마음이 동원돼 가지고 그 심신이 행동하지 안하고 엉뚱한 그 마음하고 이 몸뚱이하고, 몸뚱이는 동으로 가자 하고 마음은 서로 가자 하는 마음과 몸이 일치되지 안하는 그런 행동을 또 우리에게 자꾸 하도록 마귀란 놈이 이렇게 삐뚤트립니다.
삐뜰트려서 몸으로 행동하는 그 행동과 마음으로 해야 되는 걸 알고 마음까지 같이 심신이 같이 할라고 애를 써서 노력을 하니까 마귀란 놈이 몸으로, 신으로 행동하는 이것을 마음과 같이 할라고 하니까 마음을 동원되지 못하도록 이 마음을 끌고 이 동으로 서로 막 양사방 돌아다니면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일치된 행동을 못 하도록 이렇게 방해를 자꾸 지깁니다.
지기니까 이거는 참 어리석은 사람이 볼 때에는 그 사람이 행동하니까 그 행동을 지금 하고 있는 줄로 알고 있지마는 인간의 마음을 보는 하나님이 보실 때에는 몸뚱이뿐이지 그 마음은 지금 어만 데 딴데 가 가지고 엉뚱한 일 하고 있다 그거요.
그러면 그런 그 미혹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또 살펴 가지고서 그 몸과 마음이 일치된 그 행동을 할라고 애를 쓰고 마음이 딴전을 보지 못하도록 이렇게 자꾸 본인이 단속하고 중생된 영이 단속하고 성령이 단속하고 진리가 단속하고 또 옆에 있는 신앙의 선배들이 단속을 하고 이라니까 그걸 못 하니 이제는 심신이 같이 활동하기는 해야 되는데 마음에 갈래길이 많고 마음의 종류가 많으니까 그 마음의 종류에서 그 행동하는, 그 마음의 행동하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그 마음의 행동하는 그 행동에 이탈된 그 마음을 끌어다 붙여 가지고서 그 마음하고 그 몸하고 둘이 합작해서 행동하도록 그렇게 또 이 마귀가 유혹을 시킵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런 걸 알고 자기가 지금 어떤 그 한 행동을 한다면 만일 믿음 행동을 한다면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그 행동이니까 그는 그 믿음 행동을 할 때에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약을 생각하고 그 몸으로 하는 행동을 생각해서 요것이 합해 가지고서 요 마음이, 하나님 생각하고 하나님의 약속한 계약법, 하나님의 이 계약법을 생각하고 거게 준하는 그 따른 그 마음 가지고 그 몸하고 같이 행동해야 되는데 이 엉뚱하게 이거는 내비두고서 그 행동은 하면서 저 하늘의 소망을 두고서 행동하게 합니다. 하늘의 소망을 생각하면서 행동하고 부활의 영광을 생각하면서 행동하고 엉뚱한 거, 거게는 꼭 믿음을 지킬 때에는 그때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계약,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계약의 법도를 생각해 가지고서 그대로 깨닫고 순종하는 것이니까 그 계통을 생각하는 그 마음 가지고서 해야 되는데 마귀란 놈은 '어라, 네가 이 행동을 하니까 이 잘한다. 이 행동하는 데는 너는 하늘의 소망을 두고서 행동해야 된다.' 이래서 그만 하늘의 소망을 두고서 소망의 마음을 가지고서 지금 이 순종하는 행동을 합니다.
그거는 물론 소망도 좋은 것이지마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그 행동에는 소망의 행동은 딴 갈래이기 때문에 그거는 상관이 없는 건데 또 그 마음을 또 들어 붙입니다. 이래 가지고 엉뚱한 마음을 자꾸 들어붙여 가지고서 우리들에게 이 신앙 생활을 하라 하기 때문에 어떨 때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믿음의 마음이 움직여야 될 때에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안하고 하나님께 대한 소망의 마음이 움직일 때가 있고 또 하나님을 향한 소망의 마음이 움직일 때에 그 마음이 움직이지 안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또 그 마음이 움직일 때도 있고 하나님을 위하는 마음이 움직일 때도 있고 이렇게. 다 신앙 생활에 하늘나라를 소망하는 그 신령한 마음들이요 좋은 마음들이지마는 그 마음이 각각 달라서 여게 작용하는 마음 있고 여게 작용하는 마음이 있고 여게 작용하는 마음이 있고 여러 군데에 작용하는 마음들이 따로 있는데, 그 마음의 작용을 처음에는 몸뚱이만 하도록 마음의 작용을 못 하도록 이놈이 방해를 하다가 이제는 자꾸 마음의 작용도 같이 심신이 움직여야 된다는 걸 알고 힘을 쓰고 강조하게 되면은 그럴 때에 마음의 움직임을 하지 못하도록은 안 되니까, 자꾸 할라 하니까. 못 하도록은 안 되니까 그때 엉뚱한 마음을 가지고서 자꾸 이렇게 심신이 하나되도록 뺏기 때문에 자기는 마음과 몸이 같이 움직였으니까 바로 된 줄 알지마는 나중에 분석을 해 가지고 따져보니까 그 몸은 혼자 하는 것이고 마음은 엉뚱한 마음이 와 가지고 상관 없는 마음이 와 가지고 그 몸뚱이 행동에 가담을 해 가지고서 이렇게 가장을 꾸며 가지고 이래 했기 때문에 이래 또 탈선이 되도록 이렇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에서 나와 가지고 신앙 행위를 하는 데에도 우리는 하나님의 이 성경 말씀을 법도로 삼아 가지고 이 법도로써 진가나 모든 정오, 바르고 굽은 것을 요것을 판단하는데 그 판단해서 살도록, 그러면 성경을 준해서 살도록, 세상을 준해서 살던 생활이 이제는 성경을 준해서 사는 생활로 바꾸어졌고 또 세상을 소망해서 살던 생활이 세상에 있으면서 세상을 소망해 살지 안하고 하늘나라를 소망하면서 사는 생활로 바꾸어졌고, 이래서 하늘나라의 소망하고 하나님을 향해서 사는 이 행위를 해서 세상 행위에서 나와 가지고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행위를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행위를 하면 다 된 줄 알아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행위를 하는데 그리스도 안에 있는 행위를 할 때에 몸뚱이만 덜렁덜렁 하고 있고 또 마음은 안 하면 이게, 둘이 하나가 되고, 몸과 마음이 하나가 돼 가지고 움직여야 우리의 이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인데 몸만 움직이고 마음은 움직이지 안하니까 이것도 또 헛일이라.
이걸 또 깨닫고, 마음 없이 몸만 행동하면 안 된다. 마음과 몸이 같이 행동해야 된다. 이게 귀하고 이것이 아니면 안 되는 줄 알아서 마음과 몸이 같이 움직여 가지고서 신앙 생활을 할라고 애를 쓰게 되면은 악령은, 이것은 아애 마음을 행동에 가담하지 말고 몸은 몸대로 행동하고 마음은 마음대로 행동하라고 이렇게 꼬와서 안 듣고 '심신이 일체가 돼야 된다. 심신이 일체가 돼야지 그렇지 안하면 안 된다.' 이렇게 자꾸 주장을 하니까 이놈이 마음을 딴 마음을 슬그머니 넣어 줘 가지고서 심신이 둘이 합작은 되기는 됐는데 자세히 분류해 보니까 그 마음은 거게 해당치 않은 엉뚱한 마음을 가져와 가지고서 그렇게 일치가 되도록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이래서 우리 신앙 생활은 믿음 생활을 할 때도 있고, 또 복음 운동을 위해서 할 때도 있고, 또 성결을 위해서 할 때도 있고, 또 충성을 할 때도 있고, 희생할 때도 있고, 또 세상으로 더불어 전투할 때도 있고 하는데 이런 이 생활은 갈래가 이리 저리 갈래길이 돼 가지고 있고 갈래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거게서만 해당이 되지 다른 데서는 해당이 안 되기 때문에 요 방편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는 그만 믿음이면 믿음, 또 복음 운동이면 복음 운동, 충성이면 충성. 회개해서 성결이면 성결, 그리 치우쳐 가지고서 그것만 주장해서 그만 그것만 일생 동안 치우쳐 가지고서 행동하도록 하게 하는 그런 유혹도 있고, 이래서 어데든지, 어데든지 무슨 행동을 하든지 몸으로 행동할 때는 이 사람은 그만. 믿는 마음과 연결. 그리 안 하면 인간 구원과 연결 또 회개와 연결 그런 것만 연결해 가지고, 거게 해당된 그 마음을 그 행동과 일치가 돼 가지고 하도록 그렇게 작용하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자꾸 삐뚤어지게 만듭니다. 그래서 마귀는 처음부터 거짓말 잘하는 자요 거짓말하는 자 애비도 되고 우리로 하여금 범죄케 하는 것이 마귀입니다. 범죄케 한다 말은 우리를 삐뚤어지게 만든다 그 말이오.
자꾸 삐뚤어지게 만들라고 애를 써요.
이라는데 무슨 일을 하든지 그때에 우리가. 물론 하나님 믿는 것도 좋고, 소망하는 것도 좋고. 사랑하는 것도 좋고, 의지하는 것도 좋고, 또 인간 구원도 좋고. 자기가 성결도 좋고, 세상으로 더불어 투쟁하는 것도 좋고 이게 다 좋지마는 그런 것은 다 개별적인 그런 속성들이 돼 가지고 있고 우리는 단일성의 속성을 가지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성을 바로 선택해 가지고서 거게 합당한 속성을 활동하지 안하게 되면은 엉뚱한 일이 나 불거지고 아주 딴판이 되는 그런 일이 된다 그거요.
이러기 때문에 오전에 증거한 대로, 그러면 우리가 믿음 가지고 사는 것도 있고, 소망 가지고 사는 것도 있고, 하나님을 사랑함으로 사는 것도 있고, 의지함으로 사는 것도 있고, 뭐 복음 전도로, 회개로, 또 전투로 이렇게 사는 것 많이 있는데 거게 하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이것은 어데든지 들어맞습니다. 이거는. 하나님을 기쁘시게만 할라 하면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라 하면은, 하나님을 내가 기쁘시게 해야 되겠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뭐이냐? 하나님이 믿음도 기뻐 안 하실 때 있습니다. 하나님이 복음 운동도 기뻐하지 안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가 몸과 소유와 생명을 바치는 이것도 기뻐 안 하실 때가 있습니다. 기뻐하실 때도 있고 원할 때도 있지마는 그거 안 될 때 있다 그 말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기 말하기를 '거하든지 떠나든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바울이 말한 것은 그저 그는 이런 조건 저런 조건을 많은 숫자의 조건을 따지지 안하고 그저 하나님 기쁘시게 하려는 하나님 기쁘시게 하려는 것, 요 교리 신조를 딱 가지고 어데서든지, 이라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겠느냐? 기뻐하지 않겠느냐?' 요거 하나의 교리를 거머쥐고 자기가 살고 보니까 몸뚱이 행동할 때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요거 하나 가지고서 잘못된 것을 다 수정을 해 가지고서 바로 그걸 잡아 가지고 바로 되게 할 수 있는 요 우리의 신앙 생활에 아주 지혜의 눈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10절에,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하는 것이 9절에 있는데, 9절 끝인데 그 다음에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이거는 반드시라 말은 하나도 빠짐 없이 틀림없이 하는 말입니다. '이는 우리가 다' 다라 말도 하나도 빠지지 않는다 그 말이오. 다. 반드시 하는 이것도 필연이기 때문에 하나도 거기 거게 빠지는 자가 없다 그말입니다. 아주 강조하는 말입니다.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이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어떤 행동했든지 행동하는 그 행동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검사를 맡습니다. 우리 행동은 하나도 그저 지나가는 일이 없고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우리가 다 검사를 받고 다 통과를 받습니다. 거게서 조사를 받아 가지고서 거게서 심판을 받게 됩니다. '앞에서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각각 선악간이라 하니까 선은 하나님 중심이요 악은 자기 중심이니까 하나님 중심이냐 자기 중심이냐 이 두 가지로만 구별해 가지고서 심판을 받는 것으로 그렇게 우리가 생각하기 쉽다 말이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가면은 거게는 둘로만 구별해 가지고 심판이 된다. 악이냐 선이냐 둘로만 구별해 가지고서 심판이 된다.' 요렇게만 보기 쉬운데, 거기 '각각 선악간에 행함을 따라서 받으려 함이라' 그러니까 우리가 이 신앙 행위를 하지마는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가면은 우리 신앙 행위 하는 것이 몸이 행했나 안 행했나? 또 마음이 같이 했나 안 했나? 또 그 마음이 거게 해당된 마음이 했느나 엉뚱한 마음이 와 가지고서 했느냐? 또 고 행동할 때에는 그 행동할 때에는 성령이 인정을 했나 안 했나? 그래서 성령의 인 친, 성령이 인정을 했나 안 했나? 이런 수많은 까다로운 하나님의 세밀하고 공평된 아주 세밀하고 공평되고 정확한 하나님의 심판,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우리가 가서 살 우리들이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몸의 행동으로서, 몸의 행동으로서 시작 되는 것인데 몸의 행동으로서 이제 행동하면 다 됐다고 생각할 게 아니라 몸의 행동에도 마음과 몸이 하나돼 가지고 했는지 마음과 몸이 하나되지 안하고 몸뚱이 저 혼자 그렇게 했는지 이것을 우리가 살펴야 되겠고, 또 마음과 몸이 둘이 하는데도 그 마음은, 수는 차서 마음하고 몸하고 행동하지마는 그 마음은 엉뚱한 마음이라. 엉뚱한 마음이라 딴데 관계되는 마음인데 그 엉뚱한 게 와 가지고 지금 거기 행동하는 데에 그 마음 대신이 돼 가지고 하기 때문에 이거는 그 마음이 없이 몸만 행동한 것이나 다름이 없이 내나 몸뚱이만 한 것이지 그거는 거게 합격이 되고 일치되는 그것이 아니라 그거요.
이래 가지고 우리가 이걸 또 살펴 가지고 그러면 몸과 마음이 이렇게 같이 할라고 애를 쓰는 데도 거게 해당된 마음 자기가 그 행동하는 그 행동에는 어떤 마음이 해당된다 하는 그 마음의 움직임이 그 몸의 움직임과 같이 할 수 있도록 그 딴 마음은 안 되고 거게 책임지고 거게 당사자가 되어지는 그 마음이 와서 활동을 하도록 우리는 마음을 가지고도 요 마음을 가지도록 그것을 살펴서 애를 써야 되겠습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신앙 행위가 세상 사람과 같은 이 신앙 행위 하다가 이제는 예수 믿는 행위를 합니다. 예수 믿는 행위를 하는데 그러면 우리는 잘못하면 세상 사람들 같은 그 행위하기 쉬운데 세상 사람과 같은 행위가 아니고 성경 법칙대로 하나님을 인하여 하나님을 따라서 소망하고 행동하는 이 행동을 해야 되기 때문에 세상 행위에서 거게서 빠져나와 가지고서 이제 신자의 행위를 하고, 신자의 행위를 하는 데에서 몸뚱이만 할 게 아니라 마음과 몸이 같이 행동해야 되기 때문에 마음과 몸이 같이 행동할라고 애를 써야 되겠고 또 마음과 몸이 같이 행동하는 데도 그 마음이 거게 해당되지 안한 엉뚱한 마음이 와 가지고서 그 행동에 하고 있으니까 그 행동에 해당되는 마음이 있는데 그 몸의 행동에 해당되는 마음이 아닌 엉뚱한 마음이 와 가지고서 이게 떡 '마음하고 몸하고 둘이 합해야 되지 안 된다' 하니까 어만 마음이 와 가지고 거기 와서 하니까 그 어리석은 사람 보기에는 마음과 몸이 둘이 합작해 가지고 하는 것 같지마는 실은 그것은 엉뚱한 딴게 왔기 때문에 있으나 없으나 한가지라 말이오. 한 가지기 때문에 이것을 우리가 또 구별해서 살아야 되겠고.
그러면 거게 해당되는 마음과 거게 해당되는 몸, 이 심신이 합해 가지고서 이제 하나의 믿음 생활을 합니다. 마음과 몸이 합해 가지고서 신앙 생활을 할 때에 그러면 이만하면 다 됐느냐? 이만하면 다 됐느냐 하는 데에 거게서 다 된 게 아니라 또 살펴봐야 돼. 또 살펴봐야 되니 뭘 살펴봐야 되는가? 그래 가지고서 그것이 자기 양심에 살펴볼 때에 양심에 오점이 없이 양심이 찬성을 하면은 그만하면 다 됐느냐? 양심이 찬성을 해도 또 안 됐다 그 말이오.
양심이 찬성해도 안심이 못 돼. 왜? 성령이 와 가지고서 찬성을 해 줘야 되겠다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마음에 자책할 것을 찾지 못하나 이로 인하여서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고서 고민하는 것이 바울의 고민이었습니다. 이러니까 성령이 인정하도록 그렇게 우리는 찾도록 이렇게 애를 써야 되는데 그러면 성령이 옳다고 인정을 했으면은 그것은 안심을 할 수가 있고 자기에게 안심의 담력이 오는 것을 자기가 체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의 신앙 생활이라 하는 것은 자꾸 구별하고 또 사색하고, 사색하고 연구하고 구별하고 이래서 하기 때문에 우리 신앙 생활에는 이 생각이라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생각이라는 요소가 이것이 중요해서 이 생각을 쉬지 않고 늘 생각을 쉬지 않고 계속 생각을 노력하면은 이 생각이 자꾸 옳고 그른 것도 잘 구별해 내고 또 한 문 한 문을 열고 들어가는 깊이 들어가고 높이 올라가는 것도 이 마음이 들어서 올라갈라고 노력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생각이 중요합니다.
그러면 이런 찾는 그 모든 일이 복잡하고 이래 가지고 있는데 이 찾는 방편을 우리들이 하나 정해야 되겠는데, 이 찾는 방편에 제일 요긴한 것을 하나 정해야 되겠는데 아이들이 공부할 때 참고서를, 저거 학년에 해당된 참고서를 가지고 그 참고서로 자꾸 찾으면 저거 공부하는 정도로서는 그 바로 정답이 나와서 찾아 나갈 수가 있는 거와 마찬 가지로 이렇게 우리들이 이 신앙 생활을 바로 찾아 나갔라고 애를 쓰는데 거게 참고서와 같은 그 좋은 열쇠가 하나 있으니 열쇠가 하나 있으니 그 열쇠는, 하나님을 믿으라, 하나님을 바라봐라, 하나님을 의지해라, 하나님을 사랑해라, 또 하나님께 순종해라, 또 회개를 해라. 이렇게 이웃을 사랑하고 인간 구원에 전력을 기울이라 이런 것 다 좋은데 그것은 부분적으로만 해당되는 것이지 전체면에 해당되는 그 열쇠가 되지 않습니다. 부분적으로만 해당이 되고 전체면에는 해당되는 열쇠가 되지 않기 때문에 전체면에 해당되는 그 열쇠는 뮈인고 하니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노라' 하는 요것이 그 전체면에 요 열쇠가 됩니다.
전체면에 열쇠가 돼서 요 열쇠를 가지고 요 열쇠를 가지고 언제든지 자기가 생활하고 모든 문제를 해결을 지울라고 할 때에는 요 교리,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는 요것이 들어서 탈선되는 것도 잘 알려 주고, 또 지내친 것도 잘 알려 주고 미달된 것도 잘 알려 주고, 치우친 것도 잘 알려 주고, 딴 종류도 잘 알려 주고 잘 알려 줍니다. 요 기쁘시게 하려 하는 것 요것이 우리 신앙 생활에 있어서 아주 좋은 열쇠인데 요것을 우리가 찾아 가지도록 그렇게 노력을 합시다.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서 받으려 함이라 하는 그것을 어데다가 말했나 하면은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기를 힘쓰노라 하고 난 다음에 '이는' 말했습니다. 요거 똑똑히 알아야 됩니다.
9절에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힘쓰노라 이는' 왜 힘써야 되느냐? 주를 기쁘시게 하는 일을 왜 힘을 써야 되느냐?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을 왜 힘을 써야 되느냐? '이는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서 드러나서 각각 그 행한 대로, 선악간에 행한 대로 갚음을 받기 위함이라.' 이러니까 우리는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가서 우리의 언행심사의 전생활을 하나도 그냥 무너기로 들어가는 일이 없고 하나 하나 세밀히 세밀히 그것을 나벼 가지고서 그뭐 하나 머리털 하나도 그저 들어가지 못하도록 이렇게 세밀히 나벼 가지고서 조사하고 검사해 가지고서 이렇게 다 그대로 영원한 보응을 받게 되는 이런 심판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한다.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왜 힘쓰느냐?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왜?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드러나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서 받으려 함이라' 그러면 '이는' 기쁘시게 하는 것과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우리가 드러나서 모든 그 세밀한 심판을 받아야 되는 것과 관련이 무엇이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입니까? 관련이 뭐인가? 요 좀 알기 어려운데 이 관련은 우리가 주님을 어데서든지 기쁘시게 하는 것을 위주로 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요것을 가지는 요것이 하나님의 심판에 통과하는 데에, 하나님의 심판을 면해 나가는 데에 제일 좋은 열쇠라 그말입니다. 제일 좋은 열쇠라.
우리는 믿음 생활도, 믿음 생활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없이 믿음 생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기쁘시게 하는 것 없이라도 신구약 성경 하나님의 뜻을 알 수는 있습니다. 또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대로 순종할 수도 있어요.
기쁘시게 하는 것 없어도 할 수가 있다 그 말이오. 또 인간 구원에 자기 전부를 투자하는 것, 인간 구원에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투자해 가지고 인간 구원을 다 하는 이것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마음 없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자기가 일생을 선교에 헌신한다는 그 취미로, 그 자부심으로, 또 그 행위로, 영광으로,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없이 이것도 할 수 있는 일이라 말이오. 없습니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없이 할 수 있습니다. 복음 운동에 자기 전부를 기울이는 것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없이, 주님 기쁘시게 하는 그거 생각 없이 자기가 복음 운동에 전부를 기울일 수도 다 있다 그거요. 또 자기를 깨끗게 해서 아주 자기를 거룩하게 거룩하게 성결하게 언행심사를 깨끗이 깨끗이 거룩한 생활 하는 데에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목적이 없이 자기 또 성결을 갖추어 구비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해가 돼요? 또 자기는 주의 일에 충성, 자기는 무슨 목회했으면 목회에 충성을 합니다.
전도했으면 전도에 충성을 합니다. 자기는 어떤 복음 운동에 어떤 기관에서 들어가서 일을 하면서 그 기관에서 죽도록 충성을 합니다. 이래 충성을 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없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잊어버리고 할 수 있다 그거요. 할 수 있어요. 이거.
또 자기의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바쳐서 사는 데에도 이것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없이 할 수 있습니다. 일생 동안 자기 소유와 몸과 생명을 바쳐서 나라를 위해서도 하고, 민족을 위해서도 하고 인류를 위해서도 하고, 자기 명예를 위해서도 하고 영광을 위해서도 하고 뭐 얼마든지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빼놓고도 할 수가 있는 일입니다.
또 죄와 사망과 마귀와 세상으로 더불어 생명 내놓고 일생을 전투해 가지고서 이렇게 승리하는 이 승리를 했다 할지라도 그것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이것을 잊어버리고 없이 빼놓고도 할 수 있다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면은 이제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왜? 이것은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 드러나서 우리 선악간에 그 행함을 따라서 받으려 함이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거 하나만 가지면 다른 것은 빠진 것이 없고 여게 다 종합으로 다 들었습니다. 믿음 생활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는 믿음 생활이어야 됩니다. 회개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회개도 자기 영광을 위해서 자기 존귀 위해서 자기 권위 위해서 자기 하늘나라 구원 위해서 뭐 상급 위해서 권위 위해서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를 기쁘시게 한다는 이것이 아주 골자요 생명입니다. 이것이 주님과 자기와의 연결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심판 앞에 가 가지고서 오전에도 말했지마는 자기가 일생 동안 참 회개해서 천하에 제일 성결한 사람이 됐습니다. 성결한 사람이 됐으면 그 사람 성결의 사람이 돼 가지고서 하나님이 성결한 사람이니까 자연 보응으로 그는 담대함을 가졌을 것이고 평안함을 가졌을 것이고 남에게 인정을 받았을 것이고 다 존경을 받았을 것이고 그만하면 됐지 예수님이 그에게 갚아 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안 갚아 줘도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인간을 위해서 복음 운동 인간 구원을 위해서 자기가 다 바쳤으면 이제 구원 받은 사람들이 그를 존경할 것이고 전인류가 '저는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일생을 바쳤다' 해 가지고서 전인류가 찬성을 할 것이고 존대를 할 것이고 모든 피조물들이 '아이고 하나님의 아들 들을 많이 만들어 주셔서 그들이 자유함으로 말미암아 우리 구원이 이루어 졌습니다.' 찬송받으면 됐지 뭐 딴거 뭐 있겠습니까? 세상으로 더불어 싸워서 승리했다고 하면은 면류관 주면 됐지 딴거 뭐 있겠소? 그러나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 거하는지 떠나든지 일편단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동기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목적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 자기 방편도 쓰다가 주님 기쁘시게 하는 방편 아니면 또 고쳐 버려.
이것은 이것은 그 소망이 누굽니까? 그 소망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를, 그에게 갚는 데에는 뭐 상급 줘도 안 되겠고 칭찬해도 안 되겠고, 그걸 봐 가치로 안 알기 때문에. 상급이나 칭찬이나 권위나 영광이나 그런 걸 가치로 삼지 안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것만이 가치로 삼고 거기만 전소망을 가지고 그것만 전심 전력을 기울이니까 그 사람에게 뭘로 갚아 줘야 돼? 딴걸로는 갚아 줄 수가 없어, 이러니까 거기 대한 정당한 보답이라 하는 것은 뭐 있어? 주님은 영원히 그를 기쁘게 하는 그 외에는 보답이 없습니다. 이해가 돼요? 그래서 이것은 오전에도 말했지마는 젖이 아니오. 절으로 먹이는 젖이 아니오, 이거는 밥입니다. 이건 참 영양이 많은 아주 야문 음식입니다. 야문 음식이기 때문에 이제 이제는 이만큼 장성해졌으니까 이 장성한 음식을 먹으면 자꾸 씹으면 그거 영양이 많이 나옵니다. 이래서 이제부터는 우리가 이런 것 저런 것 수많은 소망도, 수많은 약속도, 수많은 희망도, 수많은 우리의 의무도 책임도 모든 것 다 있지마는 이제, 이제는 그거는 다 죽으로 먹는 것이요 그거는 젖으로 먹이는 것이니까 이제는 어데서든지, 우리가 만일 '순교하면 된다' 아니오 이제 우리의 생활은 순교가 문제가 아니라 이제 순교 내 순교 하는 것이 당신을 기쁘시게 함이 될란지? 순교함이 당신을 기쁘시게 함이 안 되면 아무 소용 없어.
내가 충성해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그 소원 그 동기 목적 그 정신 일편단심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이것이 들어서 이것 저것 하면 가치가 있지마는 그거 없이 빼놓고 하면은 그거 다 가치 있는 일은 가치 있는 것이지마는 아주 충고 절정의 생명되는 그것은 없는 것이 되기 때문에 이제는 장성한 자가 먹는 음식인 그저 어데서든지, 과거에는 '네가 성결을 지켜라. 진실해라. 거룩해라.' 하는 그 모든 거 있었지마는 인제 그걸 하나씩 둘씩 해 나와 가지고서 우리의 목표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그게 돼 나왔으니까 이제는 우리의 모든 전 생활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요 동기에서, 요 목적에서, 요 방편에서, 가다가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게 아니면 주님을 기쁘게 하기 위해서는 뭐, 자기 몸 바치고 생명 바치는 그게 문제가 아니라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요것을 목표로 삼아 가지고서 우리 신앙들을 나아가도록 이렇게 장성한 요 교리와 신조를 잡고 나가시기를 이제 오늘 여기서 증거합니다.
따라합시다.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제는 장성한 교리를 우리가 배우고 들었으니 이 장성한 자들이 가지는 이 교리와 신조를 우리 교리와 신조로 삼아 가지고서 내가 아무리 뭐 희생을 하고 충성을 하고 어떻게 한다 할지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중심이 없으면 안 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 일이 안 되면 안 되고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이 안 되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밑에 낮은 차원에서는 가치 있는 일이지마는 이 고차원의 일에서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으면 주님이 뭐 돈 준 자에게는 돈으로 주고, 상으로 갚아 줄 수도 있고, 노동력으로 갚아 줄 수도 있고, 권위로 갚아 줄 수도 있고, 지위로 갚아 줄 수가 있고, 부요로 갚아 줄 수가 있고 모든 만물에게 영광과 존귀를, 영광과 존귀로 갚아 줄 수 있지마는 당신이 친히 그를 향하여서 엉원토록 그를 상대하지 안하면 안 될 그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요것이, 요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는 자는 돈을 줘도 '나는 그거 싫습니다.' 영광을 줘도 '나는 싫습니다. 내게 해당되지 안해. 내가 그걸 보고 일생 동안 살지 안했습니다. 내가 그것을 가치로 삼아서 영광스러운 구원 그거 내 가치로 삼아서 살지 안했습니다. 나는 일편단심 주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하는 요것만이 나의 소망이요 나의 목적이요 이것을 위해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하는 그자에게는 딴걸로는 갚을 수 없어. 뭘로 갚아야 되겠소? 한번 말해 봐. 뭘로 갚아 줘야 되겠소? 녜, 그거 외에는 딴거 없어. 그 외에는 아무것도 말 안 해. 아주 고차원의 이 소망을 가지고서 바울이 선포한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3장 1절 이하에 있는 말씀을 제가 오전에 낭독을 했던 것입니다.
이래서 어짜든지 우리는 무슨 일이라도, 인인 관계든지 사물 관계든지 또 신앙 관계든지 어떤 것이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것을 우리의 목적으로 삼아 가지고서 그저 뭐 주님이 기뻐하지 안함이면 다 포기요, 주님이 기뻐하지 안한 거면 다 중단이요 그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면 물도 불도 상관없고 죽음도 상관없고 그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만 힘쓰는 우리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어떠한 일이라도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없으면 그거는 참 진공입니다.
생명은 없습니다. 그저 어데든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요것이 제일 열쇠이기 때문에 수많은 교리 신조가 있지마는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요 열쇠를 잡고 우리는 남은 때를 착착 열어서 걸어가야 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