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동행 열 가지

 

1984. 11. 24. 토새벽

 

본문 : 창세기 5장 21절∼24절  에녹은 육십 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았으며 그가 삼백 육십 오 세를 향수하였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 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우리의 신앙을 전체적으로 말하면 신구약 성경 말씀을 호리라도 틀림이 없는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이  말씀대로 살려고 애를 쓰면 됩니다. 그라고 나서 하나 더 있다고 하면 주님이  내게 이루시는 것을 내가 이해할려고, 내 주관에 맞도록 할라고 애를 쓰지 말고,  당신이 그 이루시는 것이 어떤 범위에서 이루시는지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주관을 기준해서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되는 것도 많고 또 오해할  만한 그런 것도 많고 또 섭섭한 것도 많고 낙방할 만한 그런 것도 많습니다.

그것은 다 어데서 생긴 건가 하면 주님을 믿는 믿음에서 생긴 것이 아니고 자기  주관에서 생겨진 폐단들이요 다 그것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옛사람의  행위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확 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우리가 확실히  믿어야 하고, 또 그 다음에는 이대로 살려고, 이 명령에 이 말씀에 복종해서  이대로 살려고 범사에 애를 써야 하고, 그러면 두 가지입니다. 그라고 나서 한  가지 더 있는 것은 내 주관에 맞추면 오해 될 만한 일도 있고 또 원망, 불평,  낙망할 만한 그런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내 주관대로의 해석이지  전지자의 해석이 아니고 전체면을 다 관계를 가져서 전체면을 두고 비판하고  평가해 가지고 계획한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주님은 뭐 시간적으로나  종류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모든 존재, 물질계와 영계만이 아니고 창조주  하나님까지 전 존재에 상대해서 흠 없는 길로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갚아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당신을 바라보라고 하고 당신에게  맡기라고 하고 맡기면 그런 것도 다 맡기는 것이 맡기는 것입니다.

 모르드개에게, 하나님의 뜻을 행해서 뜻대로 하기 위해서 의롭게, 불의에  가담하지 안하고 의롭게 사는 그 결과가 박해뿐이지 아무 유익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를 하만이가 나무 오십 척에 달아 죽이기로 딱 결안을 한 그 전날 밤에  하나님이 모르드개에 대해서 그 행한 대로 갚아 주시는 일을 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경에 있는 것을 우리가 다 보고 있습니다. 범사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우리 소견은 매우 좁고 짧습니다. 그러기에, 모든  자기의 것이나 다른 사람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해서 우리는 그렇게 속단 속평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 보는 것은 그저 한 두 가지에 지나지 못하는 것들을 보고  거기에 따라서 비판하고 평가하나 원대하시고 광대하신 하나님께서는 광대하심을  가지고 역사하시기 때문에 '네가 무슨 일이든지 폄론하지 말아라 다른 이에게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폄론하지 말아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어떻게 하실런지 모릅니다. 그런 것을 우리가. 성경에서  나사로 같은 사람과 홍포 입은 부자와 그 둘을 주님이 이용해서 증거를  하셨는데, 그 두 사람의 생활은 같이 한 곳에서 살면서 아주 대조적인 그런  생활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깊고 영원함을 누가 알아서 나사로가 복 되다 홍포  입은 부자가 비참하다 말을 했겠습니까?  요셉이를 본대도, 요셉이가 그와 같이 아주 험악하고 억울한 길을 걷게 되는데  그때 그 토막을 보고 누가 요셉이에게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하나님을 바라고  복종하는 그 생활이 복되다 그렇게 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결말이 우리에게는  보였지마는 그때 사람들은 못 봤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조브랍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욥에 대해서도 당신은 그런  광대하신 계획이 있어서 후배된 우리들에게 가르쳐 주실 것이 있어서 그렇게  저렇게 이끌으셔 가지고 그런 순서를 통과케 하시는 당신이 당신의 뜻을 이루기  위한 하나의 계시 기관의 인물로 그 욥을 등장해 가지고 우리에게 거울이 되고  우리에게 구원 도리가 되도록 그렇게 하셨습니다. 그러면, 욥만이 아니고,  요셉만이 아니고, 뭐 노아만이 아닙니다. 노아의 가는 길은 홍수 내렸을 그때만  쓰여졌지 그 전에는 하나도 쓰여지지를 안 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신앙생활 하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너머 것을 근본으로 삼고  그것을 위주로 해서 우리를 관리하시고 우리를 인도하시고 처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생각이 좁아서 그저 이 세상에 있는 자연 은총의 것은 잠깐 있다가  없어질 거 라는 것을 우리가 알면서도 우리 표준은 항상 이 자연 은총의  표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영원에 유익한 것을 우리가 지식적으로 알아서  '영원에 유익한 것이다. 이 길이 영원에 유익하다.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영원에  유익하다' 확실히 판정되어지는 그것도 영원을 위해서 살지 못하고 영원을  해치는 현실을 현실대로 자기가 판정해서 걸어 가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또 영원을 표준해서 영원에 유익이 되도록, 영원, 영혼이 아니고 영원에  유익되도록 하면 이 세상의 자연 은총의 것도 자기에게 가장 유익되게 해 주시는  일이 됩니다. 그러면, 유익되게 해 주시는 것은, 그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겠다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먹을 거 입을  것을 더 풍성하게 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너희들에게 더한다는 말은. 이 자연  은총의 것은 영원한 은총의 것을 위하는 것들인데 영원한 은총의 것을 위하는  자연 은총으로서 가장 너에게 적절하게 해 주시겠다. 더 좋고, 이 자연 은총이  영원한 은총을 위해서 가장 유익되게 더 좋게 해 주시겠다, 그 면을 표준  평가해서 더하여 주시겠다 하는 것이지 그 물질이 자기를 해하는 것도 있고  죽이는 것도 있고 망치는 것도 있고 하나님을 배반케 하는 것도 있는데, 그런  것으로, 우리의 주관 판단 대로 그런 것으로 더해 준다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기에, 믿음의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상대해서 소망했던 것이  이루어지지 아니할 때에 놀랩니다. 원망 불평하지 안하고 이루어지지 안할 때에  놀라는 것은, 분명히 주님이 하시는 일은 과오가 없는데, 실수가 없는데  이루어지지 안하는 걸 보니 내가 소원해서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내 비판과  평가와 모든 결정보다 당신의 결정은 너무도 얼토당토 안하게 거리 멀고  정반대되니 여기에서 자기는 굴복하고 자기를 더욱 더 부인하는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에게 모든 것을, 그분을 믿으므로 그분만 바라야  됩니다. 그분 외에는 우리에게 좋게 해 줄 실력가가 하나도 없습니다. 또 좋게  해 줄 만한 그런 우리를 책임질 자도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사랑하는 자도  없습니다. 또 우리에게 무엇이 유익할는지 아는 자도 없습니다. 실력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알지도 못하고 또 우리를 그만치 끝까지 사랑하지도 못하고 하기  때문에 우리는 주님 외에 딴것을 바라볼 것이 없습니다. 똑똑히 성경 말씀을  가지고 자기 지식을 삼을 때에, 성경에는 빠진 것이 없습니다. 우리가 의지하고  바라봤던 거, 요것을 의지하느냐? 요것의 실력은 요쯤 되고, 요것을 네가  바라보느냐? 요것의 끝장은 어데 까지이고 하는 것을 낱낱이 가르쳐 주셨습니다.

다 알고 보면 주님 외에는 바라볼 이도 없고 주님 외에 믿을 이도 없고 주님  외에는 내 모든 것을 맡 길 만한 이도 없고 또 그분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어.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어. 따져 보십시오. 하나님을 보면 그분 외에 의지할  만한 것이 있는가? 없습니다. 의지할 것이 없습니다. 그분 외에는 의지할 것이  없고 그분 외에는 복종할 것이 없어. 지도를 받을 것이 없어, 그분 외에는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 지식으로 삼지 안하고 배암의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아서 이 모순 속에서 혼돈돼 가지고 그런 것이지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 지식으로 삼으면 자기는 지식으로 삼은 것만치 당신 외에는 믿을 이가  없고. 당신 외에는 바라볼 이가 없고 당신 외에는 내 모든 것을 당신에게 다  맡겨 놓을 이가 없고, 당신 외에는 의지할 이도 없고, 당신 외에는 복종할 이도  없고, 이렇게 하고 난 다음에 당신이 내게 하는 일에 대해서는 그저 아브라함과  같이 얼마든지 참고 기다리고, 만일 내가 죽을 때에 '그 일이 설마 죽을 때야  되겠지' 했는데 죽을 때에도 이루어지지 안했을 때에 아브라함은 그것도, '죽을  때에야, 설마 죽기 전에야 되겠지' 하는 그것도 자기를 속이는 자기가 버려야 할  자기의 주관 옛사람의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깨닫고 믿음으로 나아가서 세상을  뜨면서 '내가 바라는 이 가나안보다 더 좋은 영원히 요동치 아니할 그 가나안을  나에게 주실려고 하나님께서 하신 것이다' 약속은 변하지 안하니까 그 약속을  믿고 보니 그렇게 밖에는 믿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믿는 그 믿음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의롭다 하셔서 사람이 부활 후에 영원한 나라를 바라보는  그 소망을 아브라함을 인해서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아브라함으로 인해서 우리는 그 소망을 가지게 됐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아브라함이 우리의 믿음의 조상 된 것은 이  세상에서 그를 향하여 그를 상대하여 영원을 준비한 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이 그  또 그분을 상대해서 영원을 바라본 것이 아브라함의 신앙입니다. 준비, 하나는  바라보는 거 그 두 가지가 아브라함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가 신구약 성경 말씀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지식인 것을 우리가 알고  인정한다면 우리의 생활은 필연적으로 이제 말한 대로 당신만이 믿고 당신만이  바라고 당신에게 모든 것을 맡겨 놓고 당신만 의지하고 당신에게만 복종을 하는  이 생활만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이 필연한 일입니다. 당신이 우리에게 당신의  지식을 주셨는대, 그 지식과 이 세상 지식과 볼 때에 얼토당토 안 하게 정반대  되는 그런 지식이 많은데, 그 지식을 차차 차차 하나님의 지식을 가지고서  거기에서 보강을 하고 하나님의 지식으로 거기에 대해서 증거하는 성경 안에  있는 내적 증거로서 이런 증거 저런 증거를 종합 해 볼 때에 배암의 지식이라는  것도, 이 지식이 다 무책임하다는 것도, 거짓부리라는 것도 다 알게 됩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지식은 이는 참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지식을 영생이라고  했습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영생이라. 아버지의 말씀은 사람이 한 번 행하는  그것이 영원히 살게 되는 그것으로 완성이 되어진다는 그 사실을 주님은  믿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가 사모하고 궁구하고 이 말씀에 따라서, 이  말씀 모시고 이 말씀에게 복종하고. 그 외에는 지도자가 없어. 이 말씀 모시고  이 말씀에게 복종하고,  또 우리와 직접 교제를 가지는 하나님, 만유주 하나님이 우리와 교제 가진다는  것이 얼마나 큽니까? 그 하나님을 성령이라, 그리스도의 영이라 말씀했는데, 그  하나님이 우리와 동행하는 것이 어떤 것이 동행하는 것이냐? 주님이 가르쳐  주시기를 그분이 오면 주님에게 대한 것을 더 똑똑히 가르치고 내것을 가지고  말한다 했습니다. 이러니까 성경을 더 믿어지게 하는 것. 더 깨닫게 하는 것. 더  갈망하게 하는 것 또 성경대로 행할 소원을 가지는 것. 더 강한 소원을 가지게  되는 것, 행해지는 것 이것이 전부 다 성신의 감화입니다. 성신의 감화. 뭐  성신의 감화를 이 외식자들은 다른 형체로 이런 모양 저런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을 말하지마는 성령의 역사는 신구약 성경 하나님의 지식을 우리에게 더  확고하게 또 구비하게 다 알도록, 믿어지도록, 바라보도록, 성경 말씀을 믿게  하는 것이 성령의 감화요.

 또 성경 말씀과 성령의 역사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가 점점 깨닫고  믿고 의지하고 힘입어서 이 대속의 공로를 기념하는, 대속의 공로를 '이런  대속을 나에게 입혀 주셨다' 그 대속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는 것, 대속을  집어던지지 안하고 대속을 보여 주는 거, 대속을 기념하는 거. '내가 올 때까지  기념하라.' 성만찬에 기념하라는 그 성만찬 기념이 내나 예수님의 대속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기념하는 것이 사죄를 기념하는 것이요  칭의를 기념하는, 어데든지 사죄를 자랑해. 천하가 다 달라들어도 '주님이 날  이렇게 사죄하셨다' 하는 것을 증거하는 것이 그것이 기념하는 것입니다. 사죄를  기념하고 칭의를 기념하고 화친을 기념하고, 이것이 다 주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이라면서, 그라다 보니까 주님 앞에 자꾸 감사가 연달아 나오고, 또 그러다  보니까 주님 앞에 너무 잘못한 것 있으니까 자복이 연달아 나오고. 또 그라다  보니까 모르는 거 너무 많고 알아야 될 거 너무 많기 때문에 어느 스승에게 가서  물을 수가 없어. 내 안에 계시고, 밤에도 나와 같이 계시고 바다 가운데에서도  나와 같이 계시고, 사자 굴 속에서도 나와 같이 계시고 언제나 떠나지 안하고  나와 같이 계시는, 선생은 한 분뿐이신, 참 선생은 한 분뿐이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니까 그분에게 안 물을 수 없어 이래서 이것 저것을 묻다 보니까  그것을 가리켜서 도고하는 기도라 이랬습니다.도 고하는 기도라. 이러니까, 자꾸  당신에게 간구해야 될 거 있습니다. 내 이름으로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구하는  자마다 다 얻으리라 말씀했으니까 내가 알고 이뤄지지 못하니 그분에게 기도하면  그분이 주신다고 했으니까 안 할 수 없다 말이오.

 이거 다 필연 생활입니다. 필연 생활. 처음에 일호를 시작하면 이호는  필연적이요. 일호와 이호를 시작했으면 삼호는 될연적이요 신앙생활은  필연적입니다. 이거 뭐 다른 사람의 말 듣고 믿는게 아니라 자기 속에서 내정  내정으로써 필연적으로 필연적으로 이루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슨 조립된 기계적인 것이 아니고 뭣을 서로 합해 가지고 이  합되는 회의적인 것이 아니고 전부 생명적입니다. 전부 생명적이요. 이것이  차차, 몸에 생명이 있으면 그것이 차차 차차 커지고 하나씩 둘 씩 자꾸  커집니다. 어린 아이가 생명이, 속에 잉태될 때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그  조그만한 정충 속에 생명이 있기 때문에 그 생명이 들어서 하나씩 둘씩 필요한  것을 자꾸 구비한 것이 태중에서 자라는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이라다가 열 달  동안을 구비하니까 그만하면 세상에 나올 수가 있다 하는 때가 될 때에 세상에  나왔고, 세상에 나와 가지고서 또 그 생명이 세상에서 이렇게 저렇게 살면서  자꾸 마련하는 것이 그것이 무궁세계에 가서 살 수 있는 것을 마련하는 것이 그  생명, 이 세상에서 역사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광대한 무궁세계에 가서 살 수  있는 것을 마련하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세상도 하나님의 사랑의 조성의 태속이오. 양육의 태  속이오. 내가 어머니 속에 있는 것도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이 거기다가 넣어  놓고서 나를 양육하시는 내나 양육의 태중입니다. 그와 같습니다. 이래 가지고  거기에서 열 달 동안 잘못되면 유산돼서 헛일 할 것이고 잘되면 세상에서  사람으로 나와서 활동할 것이고 세상에서 잘되면 무궁세계에 출생 됐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은 이 세상이라는 이  방에서 문 열고, 무궁세계로 문 열고 들어가는 것입니다.거기에 들어가 가지고서  마음에 조급하기는 어서 거기에서 활동하고 싶지마는 하나님께서 때가 있기 있기  때문에 너희 동무들도 다 이렇게 와서 횐 두루마기 입고 오도록 기다리고 있거라  했습니다. 그라면서 횐 두루마기를 주면서 너는 이거 입고 기다리고 있거라  예수님의 대속만 네가 거기에서도 자꾸 입고 자꾸 먹어라 낙원에서도 네가  예수님의 대속만 먹어라 그 말입니다. 이라다가 때가 되면 다시 그 모든 영과  흔들을 데리고 와 가지고 자기의 가졌던 이 물체 이것도 신령한 것으로  변화시켜서, 시간과 공간에 제한받지 않는 영원 한 것으로 변화를 시켜 가지고,  변화를 시켜 가지고 다시 무궁세계를 향하여서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신앙이 어짜든시, 주님이 처음에 말씀하시기를 '자기를  부인하고'라고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를 부인하지 못 하면 구원은  헛일입니다. 자기를 부인하지 못하면 구원은 헛일입니다. 자기는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된 자기인데, 그 자기를 웃리가 알 수가 없습니다.

 없는데, 어데서 제일 알기가 쉬우냐 하면은 하나님의 지식과 세상 지식과  대립이 될 때에, 하나님의 그 하시는 역사와 자기 주관이 대립이 될 때에  거기에서 옛사람을 알게 됩니다. 왜? 하나님은 나에게 좋게 해 주시고  전지전능자가 좋게 해 주시는데 내 조브라운 주관에 비추어서 주관을 기본해  가지고서. 원인으로 삼아 가지고서 모든 것을 비판할 때에 이해 안 된다 하는  그것이 옛사람입니다. 낙망 된다는 그게 옛사람입니다. 원망하는, 원망되는 그게  옛사람입니다. 불만 불평되는 그게 옛사람입니다.

 또, 자기는 주관으로 이것이 좋다고, 이게 제일 좋다고 생각했는데 성경 말씀이  아니라고 할 때에 그때에 성경 말씀은 전지자의 말씀이요 천지는 없어져도  없어지지 않는 그런 책임 있는 말씀이기 때문에 이 말씀과 자거 견해가 다를  때에 자기 견해를 의례히 이거 부인해야 되는데 자기 견해와 하나님 말씀의  견해가 이렇게 서로 대립이 될 때에 그때에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리고라도 자기  주장대로 해야 되겠고 자기 소원대로 해야 되겠다는 그자가 자기를 죽이는 강한  자기 아닌 자기, 옛사람 자기, 자기를 죽인 자기, 원수 자기 요 자기인 것으로  알아야 될 터인데. 고걸 부인 하지 못하고 그자가 나서 가지고서 자기에게 낭패  지우는 그때에 요놈이 원수라 하는 것을 고것을 원수인 것을 딱 이마빡에다가  못을 탁 쳐 놓고서 '요게 원수다. 요때에 나타난 요 자가 원수라' 그렇게해서 참  자기를 부인하는 것도 일생 공부입니다. 일생 공부요 일생 노력입니다. 그렇게  단 번에 부인돼지는 것 아니오.

 이렇게 해서 자기 부인하면 이미 자기 속에 들어와 가지고 있는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의 능력으로 살려 놓은 산 영이 있습니다. 살려 놓은 산 영이  있으니까 그 영이 이것들에게 방해 받아 가지고 일 못 하는데 이것만 이거  방해만 저버려서 이것만 제거해 버리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이것을 저버리고 방해하는 걸 저버려도 우리의 이 심신 구원이라는 것은  심신은 세포적으로 돼 가지고 있고 종합적으로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세포  구원이 단번에 한목 다 되지 않습니다. 요 세포 구원하고 조 세포 구원하고 자꾸  이렇게 차차 구원해 나가야 되는데 벌써 구원 할 시기가 다 지나가 버렸고 남은  것이 얼마 안 됐으면 남은 그거나 구원 하지요, 지난 것도 한목 구원되는 것은  아니라 그 말이오. 그러기에, 단번에 주신 도라, 단번에. 모든 것이 단번  도입니다. 단번 도. 우리의 성화도 단번입니다. 우리의 사망도 단번입니다.

단번에 죽을 것은 다 죽어 버렸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자기 부인하는 것이 얼마나 힘드는지 모릅니다. 그러면 이  일을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것은, '천국은 침노하는 자의 것이니라'  말했습니다. 천국은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 그 말이오. 힘쓰는 자가 빼앗는다.

 그러면, 무슨 힘을 써? 지난 밤에 말씀하신대로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해  가지고서 제일 중요한 생명 성공을 했습니다. 또 노아가 하나님과 동행해  가지고서 자기의 이 세상적 기업 성공을 했습니다. 제일 부자 됐습니다.

노아보다 더 큰 부자가 어데 있습니까? 또 자기의 자손 성공,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동행해 가지고서 자손 성공했어요. 그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의 자손은  혈육의 자손도 자손이지마는 혈육의 자손을 말하지 안했습니다. 혈육의 자손이  아니라 그 혈통이라도 믿음의 자손이 안 된 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닙니다.

그는 조만간에 다 떠났고 벌써 세상을 떠난 사람들은 다 떠났습니다.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다만 믿음의 자손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아브라함은 자손 성공을 했습니다. 믿음의 자손의 성공 했습니다. 이러니까,  천하에 있는 역사에 있는 모든 믿는 자를 다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말했습니다.

 그 위대하고 큰 것이 어데서 이루어졌습니까? 이는 하나님과 동행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노아도 없어질 세상 것들이지마는 그 큰 기업을 전체의 기업을  받게 된 것도 하나님과 동행에서 됐습니다. 사망을 이긴 영원한 생명도 하나님과  동행하는 그 동행에서 이루어졌습니다.

 이래서, 어제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는 방법을 어제 몇 가지 말했습니까? 예?  몇 가지? 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을 열 가지를 말했고,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는 거, 하나님 붙드는 것을 몇 가지 말했지요? 일곱 가지, 예? 일곱 가지,  처음에 일곱 가지 말했다가 일곱 가지 대답해서 됐다 하니까 고만 또 의심이  나니까 두 가지라 해? 일곱 가지.

 자, 첫째, 사모. 둘째로. 하나님을 믿어요. 세째로 하나님을 바라봐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맡겨요. 하나님을 의지해요. 하나님에게만 그저 죽는 것도  시키는 대로입니다. 당신 시키는 대로만, 시키는 대로 할라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라면서 당신만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는데 어떻게 버리고 가겠소?  우리가 악할지라도,  제가 어떤 사람들 말 들으니까 청춘에 과수 돼 가지고서 그저 유복자 하나를  기르고 그렇게 일생을 수절을 했는데, 거기에 대해서 전설이 있는데 '자, 어떻게  해서 수절을 했습니까?' '그 유복자 하나 그것 때문에 수절 했다. 그것이 밤낮  사모하는데 그거 버리고 갈 수가 없다.' 시가집에 떼 내 버리고 갈 수 있지마는  밤낮 자기만 사모하고 있는 그것을 버리지 못해서 그 사모의 힘으로써, 아무것도  믿지 안하고 자지, 엄마 하나만 전체로 다 믿고 '그분 한 분이면 다 된다.'  엄마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힘 이 없지마는 그 아이는 엄마 있으면 다라고  어머니만 믿고 있고 엄마만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무것도, 다 맡겨. 엄마만  바라보고 있어. 다 맡겨 놓고 엄마만 의지하고 있어. 그저 엄마만 좋아하고,  엄마의 말이면 다 그것이 사는 것이고 복된 줄 알고서 엄마에게만 복종하고,  어데 갔다 늦게 와도 눈이 깜짝 깜짝 하면서 울면서 엄마만 기다리고 있어.

'그것을 버리지 못하고 그것 때문에 내가 수절했는데 이제 지금 와서는 후회가  된다' 말합디다. 왜? 왜 후회가 됩니까? 아들이 그때 같은 것이 변했기 때문에  후회가 돼. 지금은 어머니 없어도 좋고. 어머니만을 바라지 안하고, 요 일곱  가지가 달라져서 후회가 된다 해.

 어떤 사람 말 들으니까 자기가 참 불 같은 정욕이 타올라서 견디지 못해서  '이제 다 집어던져 버리고 나도 한번, 한번 팔자를 한번 고쳐 봐야 되겠다고서  가다가, 울면서 가다가, 울면서 가다가 지금 나오는가 싶어 나만 바라보고 눈이  깜짝 깜짝 하면서 나 오는가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갈 수  있느냐? 다시 거기에서 그 바라보는 그 눈꼴을 눈초리를 생각할 때에 못 견뎌서  돌아와서 살았다.' 그러면, 그때는 그렇게 살아도 그렇게 인간 청년으로서는 참  정욕이 불같이 타오를 수 있는 것인데 그런 것도 다 억제하고 다 이기고 지겹지  않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그 하나의 작용으로써,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부모가 자녀를 그렇게 애지중지 기른다는 그것이 공으로 기르는 거 아니다. 세  살 먹을 때까지 부모를 기쁘게 만족하게 해 준 것이면 벌써 부모가 그 아이  기른데 댓가는 다 됐다 하는 그 댓가가 크다는 것.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요걸 원하십니다. 하나님이 어머니와 같이 요걸  원하시요. 이라는데, 이스라엘에게 대해서 분노한 것이 그 아이를 그렇게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키웠는데 키워 가지고 나중에 장가 들이고 보니까 그만  달라지니까 거기에서 환장을 하고 거기에서 섭섭하고 일찍 개가 못 한 것이  원통하고 이렇게 자꾸 생각이 나진다 그거요. 꼭 같소. 우리와 꼭 같습니다.

우리와 꼭 같애.

 당신을 붙드는 방법이 뭐이냐? 당신만 바라고 있는데 당신이 어떻게 버리겠소?  우리는 힘으로도 안 됩니다. 강제로도 안 됩니다. 억지로도 안 됩니다. 당신만  바라고 있는 것을 어떻게 당신이 버리겠소? 이 일곱 가지는 당신이 나를 놓고  떠나지 못하게 붙드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당신을 동행할라면 어떻게 하면 동행하는가? 동행하는 것을 우리가 또  말했습니다. 그분을 사모하는 것이 동행입니다. 그분을 사모할 때에 당신은 나를  떠나지 안했습니다. 나와 같이 있소. 내가 사모할 때에 그분은 나와 같이  있습니다. 내가 진리의 말씀을 내가 떠나지 안하고 그 말씀과 동행하는 것이  동행하는 것이라. 성경에 보십시오. '네가 나를 버렸다.' '언제 버렸습니까?'  이스라엘이 '언제 버렸습니까?' '네가 내 규례를 버린 것이 나를 버린 것이다'  말씀했습니다. '너희들은 나를 대적하기 때문에 만군의 여호와로서 나도 너희를  대적해서 너로 더불어 싸우겠다.' '우리가 언제 만군의 여호와를 대적했습니까?'  '너희들이 내 말대로 한 것이 헛되다. 그분만 바라보면서 근신하는 생활이  헛되다 그분에게 자책을 차지고 회개한 것이 그것이 헛되다, 슬퍼하면서 고적한  세상 생활 한 것이 헛되다. 그분에게 복종한 것이 헛되다, 오히려 교만한 자가  복이 있고 망령된 자가 복이 있고 하나님을 저버린 자가 저버린 그것이 과가  되지 않는다, 화가 되지 않는다 한 이것이 나를 대적한 것이 아니냐'  이랬습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해도 소용 없다 하는 이것이 바로 날 대적한 거  아니냐' 그렇게 말했어. 이러기 때문에 당신의 말씀을 청종하는 것보다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 없다고 했습니다.

 말씀과 내가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영감과 동행하는 것이  내가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주님의 대속의 공로의 사죄와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이요, 칭의와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이요, 화친과 동행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하는, 것이요, 주님에게 감사하는 것이 주님과 동행이요 주님 앞에  잘못된 것을 자복하는 것이 그분을 안 떨어질라고 하는 그것이요, 주님과 우리와  떨어진 것은 다 우리가 자복할 것을 하지 안 하는 데서 떨어졌습니다. 그것  때문에 먼저 대형으로써 사죄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습니다. 자복이. 회개가  동행이요 모든 사정을 고하는 것이 동행이요. 당신에게 간구하는 것이  동행입니다.

 뭐 하나님은 무형의 존재입니다. 주님은 무형의 존재요. 신인 양성 일위로서  인성은 나타나서 볼 수 있겠지마는 부활하신 후에는 그 인성이 보일라면 보이고  안 보일라면 안 보입니다.

 그러면, 이 예수님의 지금 우리와 동행은 성령으로 동행하지 신인 양성 일위가  동행하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은 잘못 생각한 것입니다. 신인 양성  일위이신 나 위해서 십자가에 대속하시고 부활하신 주님이 직접 나와 지금  동행하고 계십니다. 마태복음 28장 16절 17절인가 그 이하에 보면 당신이  부활하신 후에 나타났습니다. 신인 양성 일위로 나타났습니다. 나타나서 그들이  봤습니다. 손으로 만졌습니다. 만지고도 이거 꿈이가 생시가 하면서 의심하는  자들이 있었다 했습니다. 그때 신인 양성 일위 당신이 말했습니다. '내가' 하는  건 신인 양성 일위이신 당신입니다. 일위이신 당신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같이 하겠다 너희들이 인간 구원하는 일을 할 때 내가 동행하겠다 내가  가르친 말씀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는 데에 동행하겠다 사람에게 세례 줄  때에 동행하겠다' 세례 준다는 말은 사람을 옛사람은 죽이고 새사람으로 살리는  그것이 세례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사람을 옛사람 죽이게 하는 그 역사 할 때  나는 너를 떠나지 않는다. 새사람으로 살게 하는 그 역사에는 나는 떠나지  않는다.

 주님과 동행이 어렵지 않습니다. 주님과 동행이 어렵지 않소. 옛사람 요 놈만  죽이면 주님과 동행이라 하는 것은 그것은, 가시밭 내두고 대로로 가는게 얼마나  좋습니까? 이렇게 사는 것은 대로로 가는 것이요, 이것은 전능자의 품에 안겨  가지고 가는 것인데 뭐 어려운 것이 있겠습니까? 마귀 이놈이 들어서 모든  혼란을 일으키고 착각을 일으켜서 옛사람,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옛사람에 대해서 적을 삼는 것은, 옛사람이 그 사람을  붙들고 명예를 위해서 살게 해 가지고서 명예 욕심으로 일생을 살도록 하는 그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작용하는 작용이 있습니다. 그거 하는 사람은 회개 못  합니다. 자기가 악령과 악성의, 악습의 인도, 옛사람 그놈이 내 마음과 내 몸을  다 주관해 가지고서 살아 가지고 지위와 권세와 명예 위해서 살았기 때문에 그게  죄인 줄 모른다 그 말이오. 그게 악인 줄 몰라. 그러나, 악령과 악성과 악습이,  그 옛사람이 자기를 붙들고 살았는데 자기를 붙들고 사는 그 생활 가운데에 제일  나쁘고 제일 못되고 뉘든지 이거는, 이거야 말로 이거야 참말로 아니다. 할 수  있는 그 생활을 하게 하는 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 그 사람은 옛사람이. 고렇게 옛사람으로 산 생활이, 고렇게 아무리 천군데  만 군데로 비추어 봐도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거야 틀렸다' 할 수 있는 그  생활한 사람은 그 생활 한 그것이 옛사람이 했다는 그 옛사람을 원수인 걸  깨닫고 발견해 죽이지마는 자기가 옛사람으로 산 생활이. 세상에서 아주  번들번들한 지위나 권세나 재물이나 그보다도 제일 옛사람이 자기를 붙들고  생활하는 가운데에 제일 해독의 생활이 뭐입니까? 제일 자기가 망쳐지고 제일  나쁜 생활이 뭐입니까? 그거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제일 나쁜 생활이  뭐이겠습니까? 뭐이겠습니까? 예? 옛사람이, 악령 악성 악습이 내 마음을 붙들고  내 몸을 붙들어 가지고서 생활했는데 나를 붙들고 생활할 때에 제일 그놈에게  붙들려 가지고서 불행스러운 생활한 사람이 어떤 사람입니까? 어떤 사람입니까?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예?  아멘! 그 생활을 자타가 인정하고. 자타가 이렇게 다 인정해서 노벨상을 타고,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 도덕주의자가 제일 불쌍한 자입니다. 알겠습니까! 도덕  이게 전체인 줄 알고 이것을 표준으로 삼아 가지고 산다 그 말이오. 그 사람은  옛사람에게 붙들려 가지고서 도덕 생활, 이제까지 신앙생활 안 하고 도덕 생활  이거 했기 때문에. 자기 한 것이 나빴다 그 생활한 그것이 옛사람이라 그걸  똑똑히 모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옛사람에게 붙들려 가지고서 만일 살인 강도짓을 오 년이나  십 년이나 이십 년이나 삼십 년이나 사십 년이나 했다고 하면, 그러다가 자기가  반성해서 다시 돌아서게 된다고 하면은 삼십 년 사십 년 산 생활 이것이야 말로  천인 만인을 놓고 물어도 이것은 다 죄악이라고 하기 때문에 이 생활한 것이  옛사람이 생활했다는 것을 자기가 확신하고. 삼십 년 사십 년 뭐 생활한 그것이  순전히 옛사람으로 살았다는 그것을 자기가 확정했기 때문에 옛사람을 원수로  절실히 느껴서, 암만 말로 느껴도 모르는데 이 옛사람이 자기를 들어서 이런게  망쳤다는 그것을 생각해서 옛사람과 원수가 되기 때문에,  옛사람에자 붙들려서 헛된 생활을 하되 헛된 생활로 사이비해서 인정하기  어려운 그 생퇘 한 그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이거는 아무리 밤에  생각해도 이거는 망할 생활 했다는 것으로서 그렇게 자타에게 인정되지 안하는  그런 아주 참 불행스러운 그 생활을 그놈에게 붙들려 가지고 한 사람이 옛사람  이별하기가, 옛사람을 확실히 발견해서 간판을, 못을 박아 놓기가 제일 쉽기  때문에 그것이 행복이다 그말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금생 내세의 성공은 당신과 동행하는 거 그 외에  없습니다. 이거보다 더 좋은게 없습니다.

 그런고로, 주님과 동행하는 일을 처음에는 동행한다는 것이 그것이  허무하지마는 동행했으면 반드시 동행한 것만치 자기가 밝아질 것이요 빛이 왔을  것이요, 빛이 오면 깨달아질 것이요. 깨달아지면은 모든 것이 차차 정평 정가가  될 것이요  이러니까, 이 신앙생활이라 하는 것은 시작만 하면 됩니다. 시작만 하면 돼요.

믿음으로 믿음에 나아간다는 것은 그 믿음으로 시작만 하면 자꾸 믿음으로 돼  나가는데  믿는다고 해도 말로 믿고 모든 형식으로 믿고, 믿어도 자기 속에 주관 그 놈이  왕이 돼 가지고서 합니다. 자기를 죽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자기를 먼저  선배가 말하든지 영감이 말하든지 해 가지고서 옛사람을 죽일 수 있는 고런  기회에 고것을 똑똑히 알아서 딱 죽일 때에, '말은 분명히 옳은 말은 옳은  말인데 어쩐지 내가 듣기 싫다.' 고놈이 옛사람입니다. '말은 옳은 말은 옳은  말인데 내 형편에서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그라는 고놈이 옛사람이오. 고놈이  옛사람.

 그래 그 기회가 자주 닥칩니까? 자주 안 닥칩니다. 남 듣기 싫은 소리를 사람이  잘 해 줍니까? 남 듣기 싫은 소리를 잘 해 주지 않습니다. 다 사람들이  약습니다. 말세가 되어 갈수록이 약아서 남에게 거리끼는 그런 소리를 안  합니다. 그게 자기 상할까 싶어서 안 합니다. 이런데, 지금은 선지자가  없습니다. 자기가 죽어도, 그 사람에게 원수가 되어서 욕을 얻어 먹어도, 그로  말미암아 자기에게 큰 폭탄이 던져져 와도 옳은 건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해 주는 그 사람이 선지자인데 그 사람이 없다 그 말입니다.

 모처럼 선지자 만나 가지고서 겨우 깨닫게 됐는데, 고게 분명히 하나님과  대립이니까 진리와 대립이니까, 옳은 것과 대립이니까 옛사람이요 그거는 죄악의  사람인줄 알면서도, 발견됐지마는 버리지 못할 때에 그때에 '나는 옛사람을  부인하지 못한다' 하는 것을 알고 거기에서 고것을 놓고서 못을 박아 놓고,  '내가 요럴 때 요 옛사람을 배반치 못해서 자기를 부인하지 못해.'고 자기  부인이라 말은 옛사람 부인이라 말이오. 옛사람 부인.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고  바라보고 그에게 복종하고 그만 좋아하고 그만 두려워하는 자를 왜 부인합니까?  그자를 길러야 되는데. 옛사람을 부인하라 그 말이오. 옛사람을 부인하라  말이오, 자기를 부인하라는 것은  이래서,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됩니다. 하나님과 동행에서만 이루어지지  다른 데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동행하는 이 연습을 자꾸 합시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공부를 자꾸 합시다. 그리 되면 차차 차차 우리도 모르게 우리는  닮아져 갑니다. 당신을 닮아져 가요. 그 형편을 묘사해서 당신을 닮아 간다,  처음에는 당신을 본받아 갑니다. 당신을 본받아 가다가서 나중에는 차차 차차  당신을 닮아 가다가 마지막에는 당신의 형상이 이루어집니다. 당신의 형상이  이루어져.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라, 세상에 있는 사람들은 세상 분깃으로  먹고 살다가 자기 자녀에게 상속시켜 주는 것으로서 끝마치지마는 나는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 깨고 보면 한번 죽었다가 부활하고 나서 보면  주님의 형상 주님의 모형 된 것만 가치 있습니다. 주님의 모형 된 것만 하늘에  가 있습니다. 주님의 모형 된 것만 활동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주님의  지능의 모형 모형이 뭐이냐? 그에게 피동, 그의 새끼, 그로 말미암아 난 거  이것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그분이 움직이는 그 움직임이 내 움직임 된, 그분의  움직임에 피동된 내 움직임이 그것이 영생이요 그것이 생명입니다.

 그런고로, 동행하는 이 일을 우리가 힘씁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 말씀이 일호로 나의 지도자요 나의 전부요 그 다음에는  영감이 나의 전부요. 그 다음에는 주님의 대속의 공로가 나의 전부입니다.

그라면 다 됐습니다. 그 외에 없어. 성령과 진리는 뭐 하러 왔습니까? 주님의  대속의 공로를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하고 다 힘입어서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약속되어 있는 우리의 기업을 다 받아서 누리도록 하기 위해서, 대속의  공로를 입고 대속의 공로 입은 자로 살기 위해서, 주의 것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의 종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의 성전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의 지체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의 몸으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의  신부로 살고, 이제 주님의 제사장. 주님의 제사장, 주님의 선지, 주님의 왕,  주님의 형상, 주님의 영광의 찬미로서 마지막에 결성이 되어지도록 하려는 것이  우리의 이 구원입니다. 대속의 공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소망이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이것을 방해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방해하는 것이 옛사람 그것이 방해합니다.

옛사람이 뭣 가지고 방해합니까? 죽음 너머 영원한 것을 바라보지 못하게 이  현상주의, 이 현실주의, 이 현상주의 이것으로써 소망을 이것을 멸하게 하는  그것이 악령이 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 번 두 번 이렇게 악령에 끌려서 현상주의로 이렇게 살다가 한 번  코가 깨졌든지 뒤 꼭지가 깨졌으면 다시 그 짓 안 가져야 됩니다.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한 번 징계 받았으면 다시 두 번 안 받아야 되는 것이지 징계  받고 또 받고 또 받으면, 징계를 받는 데에는 우리의 자원이 소모가 많이  됩니다. 몇 번 징계 큰 징계 받고 나면 자본 없습니다. 자본 다 들어가 버렸어.

헛일이라. '주의 징계를 경히 여기지 말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어짜든지 이 재독하는 거, 그저 자기가 '그만 듣기 싫다' 이러나 그대로의  사람이 되어지고, 그대로의 자기가 행위가 되어지고, 그대로 모든 사건들을  성취해 나갈 요것을 생각하면 거기에서 능력이 나옵니다. 능력이 나오요


선지자선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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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지 2022.07.04-5596 김반석 2022.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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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4 주님 사모의 이유/ 요엘 2장 15절-27절/ 830220주후 선지자 2015.12.19
1253 주님 영접-전도사인허/ 요한계시록 3장 20절/ 790907금야 선지자 2015.12.19
1252 주님 잊어 버리면 마귀된다/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871128토새 선지자 2015.12.19
1251 주님 잊어 버리면 환난온다/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871127금야 선지자 2015.12.19
1250 주님 잊어버리면 환난온다/ 마태복음 14장 22절-28절/ 871126목새 선지자 2015.12.19
1249 주님 재림의 날 준비/ 마태복음 24장 32절-51절/ 870907월새 선지자 2015.12.19
1248 주님 중심-삭개오/ 요한일서 5장 5절-8절/ 830228월새 선지자 2015.12.19
1247 주님 중심-삭개오/ 야고보서 4장 1절-5절/ 830421목새 선지자 2015.12.19
1246 주님 한 분에게 얻고 피동되는 사람 / 이사야 31장 1 절-4절/ 850216토새 선지자 2015.12.19
1245 주님,나,믿음 생각할 것/ 요한계시록 3장 18절 상반절 871030금새 선지자 2015.12.19
1244 주님과 결합/ 요한계시록 18장 3절/ 810112월새 선지자 2015.12.19
1243 주님과 그날을 보고 살 것/ 고린도전서 4장 3절-5절 / 830616목새 선지자 2015.12.19
1242 주님과 나와 상호내주 하면 새사람이다/ 요한복음 15장 5절-8절/ 880108금새 선지자 2015.12.19
1241 주님과 대립된 자리에 서지말라/ 요한복음 11장 36절-44절/ 821001금새 선지자 2015.12.19
1240 주님과 대면 대화 동거동행/ 신명기 28장 1절/ 850113주전 선지자 2015.12.19
» 주님과 동행 열 가지/ 창세기 5장 21절-24절/ 841124토새 선지자 2015.12.19
1238 주님과 동행하는 법/ 열왕기하 2장 1절-11절/ 841212수새 선지자 2015.12.19
1237 주님과 동행하는 법칙/ 마태복음 28장 16절-20절/ 871206 남권찰회 선지자 2015.1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