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9 15:39
주님 잊어 버리면 환난온다
1987. 11. 27. 밤(금)
본문: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언제나 성경에 기록된 역사적인 그 형식 그 모든 기적들은 그 역사를 우리에게 알려 주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요 또 거기에 하나님의 능력의 어떠함을 알려 주려고 하는 것도 원 목적은 아니요 원 목적은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신앙 생활을 할 때에 어떻게 생활을 하여 구원을 이루어 가야 되느냐 하는 것을 가르쳐 주신 도리로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도리라 말은 길 도자 이치 리자, 우리가 신앙 걸음을 걸어가는 이치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게서 우리가 신앙 생활을 어떻게 살아가야 되느냐 하는 그 이치를 배워 깨닫고 그대로 우리가 살아가야 구원이 되지 그대로 살아가지 아니하면 이 성경은 그 사람에게는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로 아이와 여인 외에 장정 남자들의 수만 해서 오천여 명이 되도록 먹은 이 큰 표적을 보고 모든 제자들은 그때에 믿음이 다 불이 붙었고 또 소망을 견고히 잡았던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나는 이 많은 무리들을 다 흩어서 각각 저희들에게로 돌아가도록 흩어 보내고 너희들에게 갈 터이니까 앞서 바다 건너편 게네사렛으로 가라’ 이렇게 재촉을 했습니다. “제자들을 재촉하사” 이랬습니다. 급하게 가라고 지금 재촉을 하셨습니다.
이런 일이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이대로 이루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이런 일을 구원 도리로 영원 전 전지의 하나님이 계획적으로 다 설계해서 예정하셔 가지고 이루어져 가는 순서입니다.
제자들이 주님이 재촉하시는 말씀을 듣고 기뻐서 빨리 지금 바다가에 가 가지고서 배를 탔습니다. 그들은 어릴 때부터 어부의 자녀들이요 또 일찍부터 어부 생활을 한 사람들이기 때문에 배에 대해서는 대단히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배를 타고 주님이 가라고 명하신 대로 게네사렛을 향해서 지금 항해하고 있습니다. 그랬는데 이 배가 처음에는 잘 가더니마는 차차 차차 바람은 불고 파도가 일어나고 이래서 배가 잘 나가지 않습니다. 잘 나가지 안하니까 그들은 또 노를 젓는 데에 전력을 기울입니다. 그래도 바람이 그럴수록 점점 더 강하게 불고 물결이 강하게 일어나니까 배가 안 갑니다.
안 가니까 그들은 또 이제까지에 경험하고 체험하고 배우고 한 모든 지식과 자기네들의 기술을 힘을 다해서 지금 배를 항해시켜 보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렇게 노력을 할수록 점점 바람은 심히 불고 배는 주님이 가라는 그 목적으로서는 조금도 전진하지를 않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그들은 처음에는 뭐 그랬지만 바람이 심히 불고 배는 나가지 안하고 물결은 험하고 이러니까 그들이 지금 두려워서 아주 공포에 깊이 묻히게 됐습니다. 이래서 뭐 놀래 가지고서 가슴이 도근거리고 지금 호독거리고 있을 때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저 산에서 혼자 기도하시다가 제자들이 그렇게 풍랑 만나 가지고 심히 고난을 당하고 있는 것을 보시고 빨리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배가 없으니까 예수님께서는 물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셨습니다. 이러니까 제자들이 물 위로 걸어오는 주님을 보고서 주님에 대해서는 뭐 주님을 생각만 했으면 주님이야 물 위로 걸어오는 그런 것은 으례히 뭐 전지 전능의 하나님인 줄 알았기 때문에 이상히 볼 것이 없지만 그들은 주님에 대한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오시는 걸 보고서 유령이라 물귀신이 온다 이러면서 그들이 두려워서 고함을 질렀습니다. 고함을 지르면서 아마 그 고함 지른 것이 비명같이 질렀겠지요. 고함을 지르면서 무서워했습니다. 그러니까 주님이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이 여게서 첫째로 우리에게 주신 도리가 무엇인가? 이 제자들이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권능을 믿었습니다. 또 예수님이 무엇이든지 말씀하신 것은 다 그대로 된다는 것도 그들이 눈으로 보았고 했기 때문에 믿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말씀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도 믿었고, 또 주님은 능력이 크심도 믿었고, 주님은 말씀한 대로 했지 안 하신 일이 없으신, 주님은 무엇이든지 두 가지 말을 하지 안하시고 한번 말씀하시면 그대로 다 이루어지시는 진실의 주님으로도 믿었습니다.
이 주님이 앞서 배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시니까 그들은 기쁘고 즐거움으로 배타고 지금 빨리 갑니다. 이제 이렇게 좋은 주님이, 그들이 이스라엘은 그때 식민 정책 아래에 있기 때문에 아주 경제에 심히 빈곤했습니다. 이랬는데 보리떡 다섯 덩어리와 물고기 두 마리 가지고 오천 명이 먹고 배불리 먹고 남은 부스러기가 열두 바구니나 주웠으니까 뭐 경제 문제가 해결이 됐습니다. 이제 이 주님 모시면 경제라 하는 것은 문제가 없다 이러니까 그들은 참 아주 기쁘고 즐겁고 주님 한 분으로 만족입니다. 이런 신앙을 그때 가졌습니다. 바로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먹고 난 그 자리에서 헤어졌습니다. 그 자리에서 헤어져 지금 제자들은 앞서 보내고 모든 무리들은 예수님이 다 돌려보내고 이렇게 하신 그 자리입니다.
그러니까 그분들은 이렇게 좋은 주님, 주님 한 분으로 만족이다, 전부다. 뭐 주님 한 분만 있으면 우리의 소원은 다 이루어지고 모두 해결됐다 해서 기뻐 즐거워 이 주님이 가라 하니까 좋아서 ‘주님이 이제 건너편 게네사렛으로 가라고 하신다’ 산에 가라 했으면 산으로 달음질 칠 것이고 뭐 어데로든지 주님이 가라는 대로 명령 순종으로서 기쁨으로 지금 달리는 판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가라는 그 명령을 받고 이제 어서 가서, 주님이 어떻게 가시련지 모른다. 그러면 주님은 배도 없으니까 배타고 오시련지 날아 오시련지 어째 오시련지 어짜든지 어서 저 건너편 게네사렛에 가면 주님을 거기서 만날 것이다 하는 이 소망을 가지고서 기쁨으로 지금 나섰습니다.
나서니까 배가 설렁설렁설렁 잘 갑니다. 이래서 뭐 아주 참 힘들지 않고 배가 수리나 갔습니다. 여게 수리라 하는 그것을 우리 나라 리수로 말하면 얼마나 됩니까 여게 ○목사님, 이름 없는 박사, 아주. 몇 리나 됩니까? 나는 일 리를 십 리로 보는데요? 그것 안 그런가 몰라. 그래요? 요새 나는 박사들한테 어떻게 그만 눌려 놨는지 지금 내가 이 원어 아는 양반들한테 뽈끈 눌려서 지금 내가 숨을 못 쉬는데 그래도 언제 숨쉬는 날이 있을 거야. 수리를 가는데 배가 설렁설렁 뭐 어려움 없이 썩 갑니다.
가는데 차차 차차 바람이 일어납니다. 또 물결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갈수록 바람이 잔잔한 게 아니라 바람은 더 심히 일어납니다. 물결은 더 크게 일어납니다. 또 배는 가도록 하려고 이들은 자꾸 힘은 더 쓰고 수단 방법은 다 내 부리고 애는 더 씁니다. 배는 안 나갑니다. 이것이 그때에 그 현 상태였습니다.
껍데기가 이런데 그 속에는 뭣이 어떻게 작용했을까 요것을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람은 불어, 물결은 일어나, 배는 안 가, 주님이 가라 하는 데는 일보도 전진은 안 돼, 처음에는 배가 설렁설렁 잘 갔어.
이랬는데 그 제자들이 가기를 시작하고 난 다음에 변해진 것이 잔잔한 바다가 물결로 변해졌고, 바람 없는 고요한 밤이 바람 부는 밤으로 변해졌고, 배가 설렁설렁 잘 가던 배가 가지 안하고 딱 버텨 가지고 섰는 배로 변해졌으니 이 외부에 보기에 바람이 없던 바람이 일어났고, 없던 물결이 일어났고, 잘 가던 배가 안 가고, 좋아서 기뻐 즐거워 뛰놀던 제자들의 그 심령이 고통스러워져 버렸고, 인간들이 보기에 이것은 봤습니다.
봤는데, 왜 그럴까? 이렇게 변해지니까, 변해지니 이것으로 그 속에 무엇이 변해졌기 때문에 이와같이 변해졌을까? 원인 없는 일이 없는데 그 속에 무엇이 어떻게 됐기에 이 겉어머리 나타나는 외형이 이와같이 변해졌는가 하는 것을 여게서 우리에게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시계가 찰칵찰칵 잘 가더니마는, 요새 시계는 뭐 약을 넣는다 하는데. 잘 가더니마는 그만 딱 서고 안 갑니다. 안 가면 왜 안 갑니까? 그 시계가 잘 가더니마는 왜 안 가지요? ‘시계가 안 간다. 고장났는갑다.’ 하니까 그 젊은 사람이 하나 오더니만 ‘전지 약이 없는갑습니다’ `약이 없어? 그러면 약을 사다 넣어 봐라, 보자.’ 약을 사다 넣으니까 그만 찰칵찰칵 잘 갑니다.
이와같이 이제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어나고 배는 안 가고 좋아 기뻐 뛰놀던 제자들은 지금 수심이 가득 찼고 근심이 가득 찼고 평안한 그들에게 고난이 오고 했으니까 그 속에 무엇이 어찌 됐기 때문에 그리 됐을까? 시계 침이 안 돌아가니까 나는 몰라서 ‘저 시계 고장났는갑다’ 하니까 저 젊은 사람 ○○○집사가 오더니만 ‘그 약이 다 됐는갑습니다’ `약이 다 됐어?' `그 약이 뭣인데?’ ‘전지약 사다 넣는 겁니다’ `그러면 갖다 넣어봐라' 갖다 넣으니까 그만 찰칵찰칵 가. 이와같이 침이 안 돌아가는 것 보고 약이 떨어진 것을 알고 약 갖다 넣으니까 돼져 버렸어.
그와 마찬가지로 여게는 그들이 주님 시키시는 대로 건너편 게네사렛으로 가려고서 배를 타고 노를 열심히 젓고 가는데 왜 풍랑은 일어났으며, 왜 이제 바람은 세게 불며, 왜 배는 전진하지 안하며, 왜 그렇게 기뻤던 이 제자들이 수심에 공포에 가득 싸여 가지고 있게 됐을까? 요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하시는 것입니다.
그들은 옛날 어부 생활할 때에 배 부리는 솜씨는 있으니까 이제 배를 척 타니 기분이 납니다. 주님이 가라 해서 가니까 기분 나고 좋고 이런데도 이제 건너편 게네사렛에 가서 주님 만날 것 생각하니 기쁘고 즐겁습니다. 즐겁고 또 이제 노를 잡으니까 오랫 동안 안 하던 일을 한번 저어보자 하고서 이래 저으니까 얼마나 잘 갑니까? 잘 가는데 차차차 그러다 보니까 그만 그 노 젓고 배타고 가는 거기에만 마음이 그만 기울어지고 주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가라고 재촉하신, 그렇게 기쁘고 즐겁게 했던,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였으니까 그들의 경제 타격을 받은 아주 식민으로서 로마 식민 정책 아래 있기 때문에 한없는 고난을 당하고 있는 그들에게 이 모든 어려움이 면해지니까 기뻐 즐거워서 출발했는데 주님이 가라는 명령대로 어김 없이 배탔고 어김 없이 갈릴리 바다를 항해해서 게네사렛을 향하여 갔습니다. 조금도 주님이 가라는 외모의 방편은 하나도 변동하지 않고 주님 명령대로 순종을 했습니다.
순종하는데 이 일을 하다 보니까 그만 주님 깜빡 잊어버리고 나니 바람 불지, 바람 불고 나니까 더 힘써야 되지, 또 배가 전진하지 안하니 더 솜씨를 부려야 되고 수단 방법 부려야 되지 이러니까 전부 이러니까 배는 가지 안하고 딱 중단되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러니까, 외모는 주님이 가라고 하시는 그 명령대로 순종하는 그 일을 착수해 가지고서 그대로 가지마는 그때에 처음에 나설 때는 그 나서는 데에 누가 주장을 해 가지고서 나섰느냐 하면 주님이 ‘배타고 앞서 가라’ 하시는 주님이 명령하는 주님을 인하여 배타고 건너가는 그 모든 동기가 시작했는데, 주님이 배타고 건너가게 하는 원인이 됐고, 그 원동력이 됐고, 동기가 됐는데, 또 그들의 목적은 지금 저 건너편에 가서 주님 만날 그 소망, 오병이어로 오천 명 먹고 나니까 얼마나 좋겠소? ‘또 건너편에 가 가지고 또 무슨 일이 있으련지 모른다. 야, 이 큰 수가 생겼다.’ 하고서 지금 기뻐 즐거워하고서 이랬는데 그만 그 일을 열심히 건너가는 데에 노젓는 데에, 주님이 명령하신 명령 순종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였어. 순종하는 데에 전력을 기울이다가 보니까 그만 주님을 잊어버리게 됐다 그말이오.
나중에 가서 노를 젓고 힘을 쓸 때는 ‘주님이 명령했다’ 그것 다 잊어버렸어.
저 건너편에 가 가지고서 주님 만나려는 그것도 다 잊어버렸어. 어짜든지 풍랑하고 싸우고 배하고 싸워서 자꾸 이래 그 건너가려고만 애를 쓰니까 처음에는 그 생활한 원동력이 주님이었고, 동기가 주님이었고, 소망이 주님이었지마는 자기도 모르는 가운데에 움직이는 그 역사하는 그 역사에서 자기네들의 심신은 그리 기울어지고 보니까 주인이 바꿔졌습니다.
처음에는 주님이 주인이었지마는 나중에는 주님이 주인되지 못하고 곧, 주님을 잊어버리고 나니까 그의 주인이 누구겠습니까? 주님을 잊어버리고 나니까 그 주인이 누가 주인이 되겠소? 누가 주인이지요? 주님이신 성령님이 떠나고 났으니까 성령은 잊어버렸으니까 누구겠소? 악령이 주인이요, 저거들의 중심인 악이 주인이요, 주님이 떠나시고 나니까 악령이 주인이요 원죄가 주인이요 본죄가 주인이라. 옛사람이 주인이라.
그러면 옛사람이 지금 주님 잊어버리고 주님의 하시는 명령대로 아무리 순종한다 할지라도 주님 잊어버렸으니까 시키는 대로 그 모양과 형식만 그 행동 했지 속에 주님 잊어버리고 나니까 사람이 바꿔져 버렸어. 주인이 바꿔져 버렸어. 새사람이 그와같이 하다가서 이제는 그만 옛사람이, 그 주인이 바꿔져 가지고 옛사람이 지금 노젓고 그러게 돼 버렸어.
이러니까 풍랑 일어나고 주님이 가라는 그 걸음은 주님 잊어버리고 난 다음에는 일보도 전진을 못했습니다. 고민만 했지 전진을 못했습니다. 요것을 요게서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주님으로 인하여 시발하고 주님에게 소망 두고 시발을 했다 할지라도 나중에 하다 보면 주님은 잊어버리고, 주님은 잊어버리고 그 주님의 명령대로 성경대로의 그 행위에만 몰두하고 거게만 주력하다가 보면 그만 주님 잊어버리고, 하루 종일 전도합니다. 하루 종일 전도하고 하루 종일 심방하고 또 그 사람이 ‘말씀을 증거해야 되겠다’ 사경회에 가 가지고서 하루 종일 말씀을 증거합니다.
말씀을 증거하니까 열심히 증거합니다.
열심히 증거를 하면서 증거하는 데에, 그 증거하는 데에 은혜가 없으면 은혜가 없으니까 은혜되게 하려고 막 고함을 지르고 또 어찌됐든간에 말을 많이 하고 시간을 길게 하고 자꾸 애를 씁니다. 이래도 그만 주님은 잊어버리고 주님이 시키신 일만 하지 주님은 잊어버리고 나중에 가 보면 주님은 뭐 일주일 내 사경회 하면서 주님 한번도 생각지 안하고, 말씀 생각하고 말씀만 증거하고 살아계시는 인격의 주님을 자기가 생각지 안하고 그분으로 더불어 인격 교제의 영감은 없이 그렇게 날뛰기가 쉽습니다.
그러면 우리 일에는 여러가지 악령의 방해로써 풍랑도 일어나고, 바람도 불고, 또 자기 마음에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쁨도 없어지고, 소망도 없어지고, 욕망도 없어지고, 주님으로 말미암은 거는 없어지고 순전히 안 믿을 때와 같은 그런 사람으로서만 가득 차 가지고서 자기 주관 자율 자기로만 가득 찬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면 아무리 애써도 주님 앞으로 가까이 나아가는 그 전진이라 하는 것은 추호도 가질 수가 없다 하는 것을 여게서 보여 주는 것입니다.
믿는 사람들이 살면서, 사람 만납니다. 사람을 만나면 그 사람 만나 가지고서 마귀 소리 안 합니다. 그 사람 만나 가지고 그래 성경대로 얘기하고, 성경대로 교제하고, 여수 거래도 성경대로 하고, 그 신앙 양심 지켜서 성경 말씀대로 그래도 이러지 성경 말씀을 어기는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하지 안하고 하루 종일 하는 것이 자기는 성경 법도를 지켰소.
성경 법도를 지켜서 성경대로 살고 이렇게 했지마는 생명이 되신 주님은 까마득히 하루 종일 생각지 못하고 주님의 법도만 지켰으면 그 사람은 율법주의자요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기 때문에 율법만 지켰지 이제 주님을 모시지 안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은 아니고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이 됩니다.
이래서갈라디아서에, 우리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도 될 수 있고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도 될 수 있습니다. 율법 아래에 있는 사람은 점점 사망을 향하여서 가게 되고 은혜 아래에 있는 사람은 생명을 향해서 가게 됩니다.
여게서 우리가 아무리 주님의 주신 이 은혜를 가지고서 주님을 믿는 것도 뜨겁게 믿고, 소망하는 것도 뜨겁게 소망하고, 또 주님의 명령을 단마음으로 즉시 순종해서 지금 순종해 나가고, 또 주님이 약속하신 그 소망을 바라고 이와같이 나가고 이렇게 한다고 해도 자기가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이 행위, 이 행위에 열중하다 보면, 열중하다 보면 주님 잊어버리고 행위 열중만 해 가지고서 속에 사람이 바꿔지기 쉽습니다.
‘나는 주님의 구속을 받은 자라, 주님의 것이라, 주님 모시고 나는 주의 것이니까 주님으로 동하고 정하고 주님으로 인하여 살리라.’ “나로 인하여 살리라” 말씀하신 대로 주님으로 인하여 사는, 주님을 자기가 사모하고 구속을 자기가 받은 것을 생각해서 ‘나는 주님의 것이라, 주님의 종이라, 주님의 성전이라, 주님의 지체라, 주님의 몸이라, 주님의 신부라, 나는 주님의 제사장이라, 선지라, 왕이라, 주의 것이라, 사나 죽으나 주님의 것이라.’ 이러며 ‘주님으로 말미암아 나는 동하고 정하는 것이라. 주님으로 말미암아 동하고 정하는 것이니 주님이 없는 가운데서 천지가 생겨져라 하니까 천지가 생겨졌는데 당신이 되라고 하셨으니까 그 명령에 따라서 가는 데에는 뭣이 어떻게 하겠느냐?’ 만일 주님을 그들이 모시고 있었다면, 모시고 주님을 사모하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그 바다에 출발해서 가고 주님이 명령하신 목적지에 가는 것이 속에 가득 차서 주님을 자꾸 생각해서 이랬더라면 그때 바람이 잔잔 안 하면 호통을 쳤을 겁니다.
‘바람아 물결아, 만유 주님이 지금 우리를 게네사렛으로 가라고 해서 가는데 바람 네가 이 방해를 지겨? 바람아 물러가! 풍랑아 잔잔해!’ 제까짓 게 잔잔 안 하고 어떻게 어떻게 일겠어? 잔잔하지 제까짓 것은 일지 못해.
힘 없어. 주님 잊어버렸어. 주님 잊어버리고 나니까 차차 차차 그만, 주님 잊어버리니까 뭣 됩니까? 주님 잊어버리면, 주님 잊어버리면 마귀 들어옵니다.
우리 사람이라 하는 것은 기독자라 하는 것은 독립은 절대 없습니다. 독립은 찰나도 없다는 걸 알아야 됩니다. 주님을 모셔서 주님과 나와 둘이 있든지 그렇지 않으면 마귀하고 나하고 둘이 있든지 이렇지, 내가 주님도 안 모시고 마귀도 내 속에 없고 나는 나 혼자 단독으로 독립해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습니다.
거창 가면 소 시장이 참 아주 시골장이라도 큽니다. 소가 여러 아마 수천 마리는 몰라도 수백 두 나옵니다. 이런데 소가 그렇츰 많지만 임자 없는 소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면 그 많은 소가, 그 많은 소가 서로 임자가 없이 혼자 있는 그 시간이 일 분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그 임자 없는, 그 소가 자유로 임자 없이 자기 혼자 자유로 주인 없이 제 자유로 독립으로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것이 일 분이라도 있습니까 없습니까? 있소 없소? 없어.
왜? 딱 말뚝에 매놓고, 말뚝에 매놓고 벌써, 갑의 소인데, 갑의 소인데 을이 돈 주고 갑의 소가 을의 소로 즉시 넘어가서 일 초도, 일 초도 주인 없는 시간이 없습니다. 알겠습니까? 일 초도 주인 없는 시간은 없어. 김가 소가 아니면 이가 소지. 김가가 이가한테 팔아도, 팔아도 딱 돈받고 착 내주기 때문에 일 분도 그 소가 임자 없는 제 자유로 있는 때는 없는 것과 꼭 같소.
우리 기독자가 하나님 말 하고 하면 언제든지 하나님이 제 안에 계시는 줄로 이렇게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계시면 마귀 떠나고 하나님 떠나면 마귀 즉시 들어옵니다. 찰나도 저 혼자 있는 시간은 없어.
이러니까, 제자들이 주님 잊어버리고, 명령이야 순종하지. 명령은 열심히 순종해.
막 가면서 ‘노 저어라. 얼른 저어라. 이 기술을 써라.’ 이러는 가운데에 주님은 잊어버리고 나중에 결과는 무슨 사람이 됐느냐? 예수님 믿기 전 어부노릇 하던 완전히 그 사람되고 말았지 주님은 그 속에 안 계셨습니다.
이러고 나니까 가는 그 방편은 주님 명령대로 하는 것, 행하는 것 같지만 실은 마귀 사람이라. 마귀 사람이라는 것을 뭘로 알 수 있는가? 자기가 주님이 그 속에 계셨으면 물 위에, 풍랑 이는데 물 위로 걸어오시면, 걸어오시니까 ‘주님이다. 햐, 주님인가보다.’ 이렇게 생각하지 왜 하필 유령이라 물귀신이라 이렇게 생각했겠어? 주님은 까마득히 잊어버렸어.
이러니까, 물귀신이라고 생각했으니 그때에 물귀신이라고 말한 그 사람은ㅡ이걸 전부 다 알아야 되는데ㅡ사람은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이나 자기가 독립으로 못 합니다. 말 한 마디도 성령이나 악령이나 그 두 영의 지도를 받아서 말 한 마디도 생각 하나도 하지 혼자 생각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말 한 마디도 단독 생각은 없어. 단독 말은 없어.
사람이 다 제 생각인 줄 알지만 아니오. 제 생각 하나도 없습니다. 성령의 생각 아니면 마귀 생각이오. 성령 생각도 아니고 마귀 생각도 아니고 제 생각이 있는 줄 압니까? 제 생각이 없어. 주인 없이 독립을 못 하도록 돼 가지고 있어.
이러니까 ‘유령이라’ 하는 것 보니까 마귀가 그를 주장해 가지고서 마귀 시키는 대로 지금 고함 지르고 놀라고 있어. 그 놀라는 것이나 두려워하는 것이나 또 노를 부지런히 저어라든지 이 수단 저 수단을 부려라 이렇게 모두 다 말하는 것이 예수님 만나기 전 옛날 어부노릇 할 때에 그 사람의 기술과 수단과 방법과 기존 지식 선입적 관념 모든 경험 체험 전부, 그것은 예수 믿기 전 사람의 전 언행심사의 행동이었지 예수 믿은 후의 행동은, 내나 배타고 가라고 명령하신 대로 하지만 껍데기만 그와같이 하고 있지 속에 사람도 다른 사람 됐고, 그 속에 주장하는 신도 다른 신 됐고, 완전히 바꿔졌습니다. 이렇게 될 수 있는 것이 우리라는 것을 여게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들도 생각하기를 뭐 예수님이 그와같이 지금 배타고 갔으니까 가면은 그것은 주의 명령 순종하는 것인 줄 알고 그렇게 그들은 이랬지만 그 일을 하면서 행동은 하면서 주님은 잊어버렸어.
우리가 신앙 생활을 성경 말씀대로 하기는 하면서, 성경 말씀대로 하루 종일 직장 지키면서 하기는 하면서 주님은 잊어버리고, 주님을 잊어버렸으니까, 주님을 우리에게 어떻게 모십니까? 우리 마음으로 모시고 생각으로 모시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모시고 생각으로 모시고 우리 사모로 모시고 그 모셔서 그분으로 인해서 우리가 동하고 정하고 해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런데, 주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껍데기 행동만 하기 쉽다. 껍데기 행동만 하면 주님 가라는 그 노선은 일보도 걸어가지 못한다. 또 주님 잊어버리고 주님 가라 하는 그 길을, 주님 잊어버리고 인간 단독이 가려고 할 때에는 전부가 바람이요 물결이라 거슬려서 가지 못한다. 요것을 우리에게 여기 지금 똑똑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잊어버리게 되면 내나 그 신앙 생활이라 하는 주님 순종 생활을 하기는 하면서 주님을 귀신이라 했으니까 어떤 사람이요? 주님과 정반대자 아닙니까? 주님과 정반대자라. 주님과 정반대자고 주님과 적이라. 주님과 원수고 주님과 정반대자라. 껍데기 신앙 행위는 하면서 알맹이는 주님과 정반대인 원수인 거짓 기독자가 얼마든지 된다 하는 것을 여게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가 그저 성경 말씀대로 행하면 되는 것 아니오.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뭐입니까? 피와 살을 먹는, 예수님의 피를 우리가 어찌 먹을 수 있소? 예수의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무슨 말입니까?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게 무엇이요? 주님이 피는 세 가지를 위해서 흘렸는데 우리의 모든 죄값의 형을 이것을 대신 받느라고 주님이 피흘리셨고, 우리 대신 하나님의 대율법을 공심판법을 대신 이행하시느라고, 대행하시느라고 피를 흘리셨고, 하나님으로 더불어 원수된 것을 화친하시기 위해서 흘리신 피 아닙니까? 피와 살을 먹는 것 뭣입니까? ‘주님이 이렇게 내가 영원한 멸망에서 멸망의 이 죄값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대신 죽으셔서 여기서 구출해 주셨다, 인간이 아무리 행할래도 행할 수 없는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을 예수님이 대신 행하시기 위해서 죽기까지, 신인양성일위가 죽기까지 하셨다, 이렇게 조그만한 불목도 틔울라 하면 힘이 들어도 못 틔우는데 a는 인간과 불목 그것 틔우기가 얼마나 그거 어렵다는 것을 차차차 조금씩 자꾸 느껴갑니다. 이런데 이 하나님과 우리와의 영원한 원수된 이것을 당신이 화친으로 틔울라 했으니까 안 죽을래야 안 죽을 수 없고’ 그 죽으심을 이를 자꾸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이 주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 피와 살은 참된 양식이요 참된 음료라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랬어.
그러면 이제 우리가 주님을 우리 마음 가운데에 모시는 것은 주님의 이 대속을 생각하고 생각하니까 이제 우리의 언행심사의 행동은 ‘이제 나는 죽어도 죄를 범할 수 없고, 이제 죽어도 내가 의를 행하다 내가 중단할 수 없고, 이제는 내가 죽어도 주님을 배반하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과 원수될 수 없다.’ 하는 이것이 자기 속에 불이 타올라와 가지고서 이러므로 인해서 주로 인하여 사는 이 결과가 맺어지는 것이 주님의 피와 살을 먹는 증거라 말이오.
주님의 피와 살을 먹었느냐 안 먹었느냐 하는 것은 주님으로 인하여 사는 그 결과가 맺어지는 것이 주님의 피와 살을 먹은 증거라 말이오.
그러면 주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것은 뭣이냐? 주님의 이 대형 대행 대화친의 이 사랑의 역사를 자꾸 생각하니까 이제 주님의 대속을 생각하니 주님으로 인하여 물불을 가리지 안하고 살 수 있는 이 사람의 용기가 나오고 소원이 나오고, 이와같이 죽도록 충성하면서 살면서도 오히려 주님 앞에 ‘내가 이만치 살았으니까 무던히 살았지’ 하고서 교만하지 안하고 주님 앞에 항상 부족을 느끼고 ‘어떻게 하면 나도 주를 위해서 죽을까? 어떻게 하면 주를 위해서 고난당할까?’ 자꾸 이렇게 소원하는 이 소원이 우리 속에 맺혀지는 그것이 주님의 피와 살을 먹는 사람이라. 그것이 주님을 자기에게 모신 사람이라.
이렇게 하는 자는, 뭐라 했습니까?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내 안에 있고 나도 그 안에 있으리라” 이렇게 했어.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은, 이게 주님을 우리 안에 모시는 것이라.
그러면 이 모심이 없이 우리가 한 형식의 행동만 하면서 이래 지내감으로 말미암아 자기도 모르게, 처음에 시작은 주님으로 시작했지만 시작한 것이 마지막에 가다보니까 완전히 변해져서 주님의 원수인, 주님을 원수라고 귀신이라고 하는 이 완전히 결과는 다른 사람이 돼지기 쉬워지는 이것을 우리에게 알려 주시기 위해서 요런 요 역사적인 형식계시로 우리에게 믿는 도리를 가르쳐 주십니다. 얼마나 요긴하게 명확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이것을 깨달아서, 우리들이 성경 말씀대로만 행하여 가면 되는 것 아니라.
말씀대로, 잘못하면 성경 말씀대로 살면 되는 줄 알아도 말씀대로 사는 게 큰 게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서 우리가 행동하면 무슨 행동해 무슨 큰 성과를 거두겠어? 당신이 무슨 노동력이 모자라서 우리가 말씀대로 사는 그 행동하는 걸 당신이 뭐 원해서 값어치 있어서 그와같이 하는 줄 압니까? 사람을 믿구로 하기 위해서? 믿구로 하는 것도 큰 일 아니야. 믿구로 하는 그것 당신이 하려면 아마 일 분이나 삼 분 동안이면 천하 사람이 막 발발 떨면서 다 ‘예수 믿겠습니다’ 다 할 수 있도록 하실 수 있어. 없겠어? 그게 큰 게 아니라. 대속하신 주님을 모시고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의 그 대속의 그 사랑에, 그 은혜에, 주님이 주신 그 구원에 감격해 가지고서 행동한 그게 귀해.
그게 귀하다 말이오.
거게 감격해서, 돈 한 푼을 들인 것이 거게 감격해서, 말 한 마디 한 것도 감격해서, 그 대속을 인해 주님으로 인하여서 움직여 복음 하나 전하는 것이 큰 것이지 뭐 행동만 하면 그것만 가지고, 사람들은 행동한 것만 가치로 봅니다.
행동이나 뻔뻔스럽게 하면 그것이면 다 된 줄 압니다.
그러나, 여게 보니까 처음에 그렇게, 그들이 주님 안 믿은 게 아니야. 오병이어로 오천 명 먹였으니까 그들 속에는 주님에게 대해서 확신이 가득 찼소. 주님에게 대해 소망이 가득 찼소. 주님 한 분이면 전부라 다라 하는 것이 가득 찼어.
이렇게 나섰어.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나섰어.
주님으로 인하여 기쁘고 즐거움으로 나섰을 때는 배가 술술 가다가서 차차 바람 일어나고 물결 일어나서 배는 자꾸 힘을 쓸수록 더 안 갑니다. 여기에 뭣이 변해졌느냐? 뭣이 변해졌기 때문에 요와같이 됐느냐? 요와같이 변해져 가지고, 그렇게 변해졌는데 나중에 이 문제가 해결되는 것 보니까 주님 모시니까 해결됐어. 주님 음성 들으니까 ‘안심하라 내로라 두려워 말아라’ 이 소리를 들으니까 그들이 이상해졌어. 이상해졌어. 자기네들 속에 그 음성을 들으니까 자기들 속에 말씀이 그 속에 역사해서, 그 영감이 그 속에 역사해서, 말씀과 주님이 함께 들어와 역사하니까 사람들이 변해진다 말이오. 받은 증거가 있어. 변해져.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뒤에 말하기를 ‘보라, 길가에ㅡ그분은 가고 주님은 떠나 버렸는데 가고 난 다음에ㅡ우리가 같이 올 때에 그분이 우리로 더불어 말씀을 할 때에 우리 마음이 어떻더노? 나는 그 마음이 이상해지더라. 이상한 감동이 되고 내 마음이 뭣이 변화되는 것이 이상한 것을 느꼈다.’ ‘나도 그래 느꼈다.' 다 공동 고백이라. 모두 그래 느꼈어. 이러고 나니까 해결이 됐어.
이러니까 요것을 똑똑히 알아서 굳게 잡고 놓지 안하고, 이렇게 해도 되고 저렇게 해도 되고, 이 해석이 다는 아니고 이것 해석을 이렇게 저렇게 하는 그 해석의 이치는 꼭 같습니다. 껍데기 하다가 좀 알맹이 하다가 또 더 알맹이 하다가 더 알맹이 하다가 자꾸 이렇게 점점 그 참으로 가까이 나아가서 이래 하는 것이지 딴것, 이래 됐다가 저래 됐다가 딴것 말하면 그것 이단이라.
이래서, 요동치 않고 이렇게 굳게 잡아야 합니다.
이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껍데기 성경대로 사는 그 생활 가지고는 얼마든지 적기독 노릇 하고 거짓 그리스도 노릇 하고 마귀 노릇 얼마든지 할 수 있어.
구약에 있는 모든 성도들이 성경 율법대로 지킴을 인해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어.
그러기에 여게서 지금 말씀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행하는 것이 중한 게 아니라, 그것만이라면 다 속이는 외식이요 거짓부리라. 죄악이나 다름이 없어.
하나도 좋을 게 없어. 주님 내 중에 계시지 안하고 주님 모시지 안하고 겉어머리 외식의 형식만 그와같이 하는 것은 그것이 적기독이요 그게 외식자요 그게 다 하나님의 성도들을 앞으로 죽일 자들이라.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그래도 주님 잊어버리면 안 된다. 주님으로 인하여 움직이고 주님을 향하여 가고, 동기는 주님으로 인하여 시발되고 목적은 주님을 향하여 주님에게 가서 만나질 주님에게 대한 소망으로, 출발은 주님으로 향방은 주님이라.
이래서 우리 안에 주님이 내주해 계시는 이것이 중요하고 그로 인해서, 그 구속에 감격해서, 주님이 나를 구속해 주셨으니 이 구속으로 인해서 자기가 동하고 정하는 그게 가치 있고 크다는 것이지 일해 놓은 게 가치가 큰 것이 아닙니다.
이러기에 어떤 그 성자가 입신해 가지고 하늘나라 가 보니까, 입신해 가지고 하늘나라 가서 보니까 제일 눈감고 명상 많이 한 사람, 눈감고 주님을 많이 사모하고 주님의 그 구속에 감격해 가지고서 많이 감격한 사람, 이러니까 모든 행동이 주님에게 감격되어서 한, 명상 많이 한 사람이 주님을 제일 잘 섬겼고, 많이 섬겼고, 땅위에 인간들 위해서 봉사도 제일 많이 한 사람이고, 전도도 많이 한 사람이고, 주의 일을 제일 많이 한 사람이더라 그렇게 어떤 파소주의라 하는 그 책에서 그런 걸 제가 봤습니다.
이러니까 이것을, 이것이 일호로서 요것을 기억하고 또 이호로서 여게서 생각할 것은 제자들은 주님이 앞서 가라 하시고 저희들끼리 가니까 저희들은 주님을 잊어버리고 망령을 부리지만 주님은 산에 가 계셔도 그들을 늘 살피고 계셨기 때문에 그들이 풍랑 만나서 어려움 당하고 있는 것을 주님은 그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급히 물 위로 걸어서 찾아오셨습니다. 요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너는 어데까지 타락하고 어떤 망령과 패역을 부려도 주님의 사랑은 놓지 않고 너를 구원하려는 적절한 그 방편에서 너를 찾고 붙들고 너를 구원하려고 하고 계신다 요것을 요게 보여 줍니다.
이번에 여기 ○○대학 총장 ○박사, 저 서울대학 법학 대학원에 원장으로 계시던 분, 그분이 요번에 나한테 와서 요 사택에 와 가지고서 잠깐 얘기를 했는데, 그래 그분이 말하기를 ‘이번에 내가 주님이 멀리 계시지 않고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걸 내가 체험했습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계시는 것을 봤습니다. 나는 주님이 멀리 계시는 줄 알았는데 주님이 나와 함께 계셔서 바로 나와 대하고 내가, 내 곁에 계시면서 물으면 대답해 주시고 의논하면 의논해 주시고 이렇게 주님이 내 곁에 계셔서 나로 더불어 같이 계시면서 내 모든 일을 다 돌보시고 내 사정을 다 알으셔서 나 먼저 당신이 역사하시는 것을 내가 이번에 봤습니다.’ 그래 가지고 그 총장이라면 대단히 높은 사람 아니요? 뭐 여기 법관들은 다 그 제자입니다. 이랬는데 그분이 와 가지고서 꿇어 앉아서 ‘주님이 내 곁에 계시는 것을 봤습니다’ 이러면서 ‘이제는 내가 아무것도 안 하고 주님만 위해서 살겠습니다. 이제는 주님 위해 살겠습니다.’ 한다 말이오.
그만 인제 그때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하고, 다른 사람이 다 그런 그전에 자존심에 하나님 계신다 하면 그런 사람 다른 사람이 ‘저 무슨 저 사람이 좀 변해졌다’ 수치스럽게 그런데 이제는 주님이 내 곁에 계신다는 것을 어떻게 자랑을 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자랑하면서 ‘이제는 내가 주의 일만 하다가 갈랍니다. 다른 일 안 하고 주의 일만 하다 갈랍니다.’ 자기가 주님이 자기 곁에 계시는 것을 이제는 똑똑히 봤어요.
이래서, 우리는 요게서, 그 제자들은 주님 다 잊어버리고 망령부려서 마귀노릇 하고 그 지금 마귀놀음 하고 이러지마는 주님은 제자들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찾아오셔 가지고서 그를 구원하려고 지금 가장 구원하기에 좋은 방편으로 그들에게 써 가지고서 구원하시는 일 했습니다.
여게서 언제나 주님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시고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노력하신다는 걸 요것을 우리가 생각해야 됩니다.
하고, 우리 믿는 사람이 주님과 동행하지 아니하면 모든 일이 낭파됩니다. 바람 불고 물결 일어나고 배는 안 가고 낭파 아닙니까, 전부 낭파 아니요? 낭파된 것이 뭣 때문에 낭파됐습니까? 주님 잊어버린 데서 낭파됐다는 것 요것 일학년으로 굳게 잡아야 됩니다. 주님 잊어버렸으므로 낭파된다. 사업에 낭파, 직장 낭파, 가정 낭파, 모든 경제에 낭파, 출세에 낭파, 건강 낭파, 모든 낭파, 기독자가 낭파 닥치는 것은 주님 잊어버리는 걸음에서 낭파당한다.
‘내가 주의 말씀대로 주일도 잘 지키고 뭣도 잘하고 이래 하는데’ 그것은 마귀의 자식이 돼 가지고도 외부 형식은 얼마든지 그와같이 할 수 있다. 그렇게 해야 마귀 사람들이 와 가지고 그와같이 해야 저 예수 믿는 사람인 줄 알고 취급했다가 큰 낭파를 당하지. 그래야 그 예수 믿어도 마귀가 와 가지고 하는 것 보고 ‘저 예수 저래 믿어도 믿는갑다’ 하고서 미혹받아 가지고 자기도 그래 믿도록 만들지.
어짜든지 예수 믿는 사람이 껍데기 사람 보기에 행동은 아무리 성경 말씀대로 한다 할지라도 그 심령에 주님 모시고 안 모시는 그게 문제고 주님으로 인해서 동하고 정하는 그게 문제라. 그게 문제라. 그것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어.
예수 믿는 사람이 제일 처음에는 이게 다 잘 됩니다. 처음 믿을 때에는 예수님을 생각하고 예수님으로 인해서 동하고 정하고 하지것만 얼마 동안 예수 믿고 나면 그다음에는 그만 그게 익숙해 가지고서 예수 없이 제 하나의 이거 연습으로 버릇으로 이와 같이 하고 있지, 주님으로 인해서 동하고 정하는 것이 없고 전부 제 혼자 단독으로 이와같이 지금 생활하는 이런 하나의 형식과 제도의 외식 생활이 되기 쉽다. 그러면 신앙 성장은 없다. 신앙 전진은 없다. 주님의 명령대로 주님을 향해서 가는 걸음은 가지 못한다.
이런데 그때 그들이 풍랑 만나고 그렇게 해서 배가 가지 안하고 지금 두려워 떨리는데 그들이 하는 방편이 무엇입니까? 그 하는 방편이 뭣이 좋겠소?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이 좋은 방편일까요? 열심히 노를 젓는 것이 그때에 제일 좋은 방편일까요? 열심히 이 돛대 말이오. 돛대를 이래 젓는 것 어이싸 어이싸 이래 하는 것 말이오. 노를 젓는 것이, 열심히 힘을 내 젓는 것이 제일 그때는 배가 안 가는 데 전진 항해하고 배가 앞으로 가도록 하는 데는 노를 열심히 힘을 다해서 젓는 것이 제일 좋은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하나도 없어? 과거 어부노릇 할 때에 이런 경험 저런 경험, 이런 체험 저런 체험, 이런 수단 저런 수단, 그런 방법을 골고루 골고루 이제 구비하게 써서 이 방편 쓰다 안 되면 저 방편, 저 방편 쓰다 안 되면 이 방편 이렇게 골고루 그 자기네들의 과거에 경험 체험 모든 배운 수단 방법 그것을 열심히 써야 된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봅시다. 그것도 안 돼.
그러면 거게서 ‘예수님이 우리를 가라고 하셨다. 예수님이 우리를 가라고 명하셨다. 전능자가 명하셨다. 저 건너편 게네사렛에서도 만나자고 주님이 약속하시고 재촉해서 빨리 가라 하셨다. 빨리 가라 했는데, 빨리 가라 하니까 우리가 빨리 갈라 하는데 물결이 방해를 해? 바람이 방해를 해? 대주재이신 만주의 주이신 창조주 주재자 주권자가 가라 하셨는데 가는 걸음을 바람 네가 방해해? 물결 네가 방해해? 주님이 가라 하시는 걸음이야. 재촉해서 가라 했어.’ 이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이 가라 하시는 이 주님을 생각했으면 그때에 그 생각하는 방편이 좋은 방편일까요 나쁜 방편일까요? 좋은 방편이라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여기는 죽었어. 무슨 말인지 모르는구만. 못 알아들으니까 손을 못 들어.
주님이 가라 하시는 걸음이라. 주님을 사모하고 생각하고 주님이 가라는 명령이라는 것을 자기네들이 생각하고, ‘재촉한 명령이라’ 이제 주님의 명령인 것을 생각하는 것이 좋은 방편이라고 여기는 분들은 손 한번 들어 봐요. 다 들어야 돼. 여겨. 그거면 돼.
이게 사는 것이라. 뭐이야! 예수 믿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다가서 앞으로 낭파가 되거들든, 풍랑이 일거나 낭파가 되거든, 가정 낭파든지, 사업 낭파든지, 출세 낭파든지, 활동 낭파든지, 건강 낭파든지 뭣이든지 낭파되거들든, 어째요? 낭파되면 세상 사람들의 그 방편을 열심히 써야 돼요? 그 지혜와 수단과 그걸 써야 돼요? 과학을 써야 돼요? 어떻게 해야 돼요? 좋은 방편이 뭣이요? 제일 좋은 방편이 뭣입니까? 자기네들의 전심 전력을 기울이는 것입니까? 그러면 이 모든 인간들이 사용하고 있는 이 과학입니까? 주님을 찾아서 대속하신 주님을 찾아 자기 마음 속에 모셔서 주님으로 인하여 주님의 대속으로 인하여 동해지고 정해질 수 있는, 주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자기 속에 불이 일어나는, 주님의 대속을 자기가 사모해서 주님을, 대속의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까, 뭣이요? 무엇이 해결짓는 것입니까? 주님을 모시는 것이 둘도 없는 하나된 유일한 열쇠입니다. 유일한 열쇠요. 해 보십시오. 해 봐, 안 되는가? 마귀란 놈들은 안 된다 해. 그거 그럴 이치가 있는가? 안 된다 해.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덩어리 가지고 오천 명 먹인 게 이치에 맞습니까? 안 맞아. 죽은 썩은 송장이 살아나는 것이 믿는다고 살아난다는 게 이것 맞습니까? 안 맞아. 이러니까 그들이 그러고 있는데 주님이 구원하러 찾아오시는데 구원하러 찾아오시는, 자기네들 구원하러 찾아오신 주님을 보기를 뭐라고 봤소? 저거 잡아 죽일 귀신으로 봤어. ‘물귀신이다. 이제 우리는 죽는다.
저 귀신 온다.’ 하면서 놀라고 고함을 질렀어.
이렇게 외식의 행동만 하고 속에 주님 잊어버리면, 외부의 인간이 보는 행동만 성경 말씀대로 하고 속에 주님을 모시지 못하면, 영감을 모시지 못하면 그자는 어떠한 자 돼요? 주님의 인도와 구원은 정반대의 귀신으로 마귀로 보입니다.
주님이 구원시키는 방편은 멸망시키는 방편으로 보입니다. 주님이 구원하시는 지도자는 만나면 원수로 보입니다. 자기를 멸망시킬 그것은 가장 친구로 보입니다.
요러기 때문에 저 망치는 그자하고는 아주 둘도 없이 친해. 만나면 꿀이 흐르지! 달지! 멸망에서 구출하는 지도자와 설교 지도는 원수같이 보여지지! 깨어! 안 깨면 망해! 죽어! ‘유령이로다’ 고함을 치면서 두려워했어.
우리는 오늘밤에 요것만 공부합시다, 더 하지 말고. 여러분들.
예수 믿는 사람들이 처음에는 그것 사업이 졸졸, 그 형편이 졸졸 뭘 잘돼 나가다가 풍랑 만납니다. 안 돼. 그러면 왜 그래요? 왜 그래 되지요? 힘을 안 써 그래요? 힘 안 쓰는 건 왜 안 써요? 힘 안 쓰는 건 왜 안 써요? 삐뚤어진 건 왜 삐뚤어지게 해요? 주님 잊어버리면 삐뚤어지고, 주님 잊어버리면 게을해지고, 주님 잊어버리면 교만해지고, 주님 잊어버리면 망령되고, 주님 잊어버리면, 주님은 우리의 생명입니다. 장사라도 생명이 떠나면 그 모든 지체가 송장 한가지야. 아무 무용지물이 돼 버려. 생명이 가면 힘써요.
이와같이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지혜가 살아나고, 능력이 살아나고, 모든 도덕이 살아나고, 평안이 살아나고, 즐거움이 살아나고, 소망이 살아나고, 담력이 살아나고, 온유가 살아나고, 겸손하고, 막 좋은 것은 막 살아나!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면 좋은 것은 막 살아나! 주님이 우리 속에 떠나면 좋은 것은 차차 차차 사라지고 이 세상에 있는 것 전부 마귀 사망 죄되는 요것만 자꾸 속에서 솟아나.
그리 되면 주님에게서 오는 것은 전부 원수로 망하는 것으로 보여지고 마귀에게서 오는 것은 다 좋고 사는 것으로 보여져.
이러니까 믿는 사람은 주님 모시기를 힘써야 됩니다. 생명이 떠나면 장사라도 그 시간부터 썩어. 그 시간부터 썩어. 생명 떠나면 그만 썩어요. 만일 산소로 호흡을 시키지 안하고 그것 속에 산소로 호흡시키지 안하면 사람 속에는 생명 딱 떠나면 즉시 송장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는데도 자꾸 산소로 자꾸 속을 씻어내야 되지 안 하면 즉시 송장 돼.
생명만 떠나면 그만 썩어. 주님 잊어버리면 그만 썩습니다. 주님 잊어버리면 그만 썩소. 주님의 구속을 생각지 안하면 뭣 생각합니까? 주님의 구속을 생각지 않을 때는 인간을 생각하든지, 돈을 생각하든지, 자기 욕심을 생각하든지, 목적을 생각하든지, 전부 그것만 생각하지 주님 잊어버릴 때는 다 썩은 것이 들어와 가지고서 결국은 자기를 멸망시키고야 맙니다.
그러기 때문에 심지어 주님의 뜻대로 신앙 행위를 하는 것 가지고 안 돼. 행위를 해도 보니까 여게 썩었어. 행위를 해도 멸망을 받았어. 하물며 행위하지 안히고 이 세상 행위 하면서 주님 잊어버린 데야 거기 무슨 생명이 있겠소? 이러니까 이 시간에는, 주님의 뜻대로 행동하는 데도 주님 잊어버리면 우리는 거게서 자기도 모르게, 행동은 그와같이 합니다. 행동은 하는데 주님 잊어버리니까 뭣이 바꾸어집니까? 주님 잊어버리니까 뭣이 들어옵니까? 주님 잊어버리면 뭣 들어오요? 악령 들어와.
우리 주인이 몇입니까? 우리 주인의 영이 몇입니까, 손가락으로? 우리 주인의 영이 몇이요? 둘이라, 둘. 그전에는 악령이 우리 주인이었는데 예수님으로 중생되고 난 다음에는 성령이 우리 주인이라. 주 하나님이 우리 주인이라. 성령이 우리 주인이라. 우리 힘은 뭐입니까? 영감과 진리가 우리 힘이라.
이랬는데, 성령 떠나면 악령, 악령 떠나면 성령, 그렇습니다. 악령이 떠납니까? 악령이 안 떠나. 악령이 얼마나 안 떠나려고 애쓰느냐? 그것을 출애굽기에 이스라엘을 해방시킬라 할 때에 바로가 이스라엘을 놔주지 안하려고 그렇게 열 번이나 재앙받아 가지고서 내놓고 그러고도 나중에 홍해 바다에서 다 죽고야 말았지 안 놓아. 마귀는 우리를 이렇게 전멸되기 전에는 놓지 않습니다.
마귀는 이렇게 우리를 놓지 안하려고 애를 쓰는 이 마귀의 역사가 있는데 주님 잊어버리면 주님 잊어버리는 찰나에, 주님 잊어버리자 마귀 들어와서 나를 주장합니다. 주님 잊어버리자 마귀가 나에게 들어와 주장을 하요.
주님 사모하고 모시자 마귀는 도망쳐 버립니다. 왜? 주님이 승리하셨고 주님이 벌써 마귀를 승리해서 우리를 피로 구속해 놨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만 사모하면 마귀는 우리에게 왕노릇 못 해. 주님만 사모하면 즉시 도망쳐.
요것을 다 기억합시다.
광고합니다.
반사 선생님들은 공과를 꼭 외우고 명상을 많이 하십시오. 그리고 하루 삼십 분 기도 잊어버리지 말고 꼭 계속 하십시오. 또 지하철 위해서도 기도하시고, 십 분 기도 후에 지난 주일 오전 오후의 설교 말씀 재독이 있습니다. 시간 봐서 시간이 없으면 하나만 재독하고 말 것입니다.
또 요번 주일에는 우리가 연보하기로 했습니다. 이번 주일에 연보하기로 했는데 잘 기도해 가지고서 그 구역장들은 자기 식구에게 그 연보할 것을 고것 잘 깨우쳐 주셔 가지고서 그렇게 요번 주일 연보할 터이니까 그렇게 해서 생각을 하고 하십시오.
과거에 분교 연보를 우리가 마지막에 한번 했는데 두번째 한번 했는데 분교 연보한, 분교 연보하던 그 반액만 되면 그 액수가 됩니다. 또 너무 많이 내도 소용 없고.
그리고 없는 연보 하지 말아요 돈 없는 것 하지 말아요. 돈 있는 대로 꼭 하십시오. 돈 있는 대로. 양식은 먹고 씨는 심어. 그러니까 자기가 할 수 있는 연보해요. 할 수 있는 연보하면 자꾸 할 수 있을 게 자꾸 생겨. 할 수 있는 연보해서 일곱 가지 도적질만 회개하면 연보할 게 자꾸 꾸역꾸역 나와요. 연보 해 보니까 또 연보할 것 나오고 연보하니까 또 연보할 것 나오고, 우물에, 우물에 물 푸면 또 물 나오고 물 푸면 또 물 나오고 안 해? 우리에게 지금 가르쳐 주고 있어. 이 우 물은 부산 시내 사람이 다 먹어요. 이런데 밤낮으로 자꾸 푸는데 물은 자꾸 퍼도 남아.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이러면 땅이 아마 가라앉겠다’ 이러는데, 저 서면 가서도 저 남포동 어데 가서도 저 음식점에 가니 그러더래요. ‘좋은 물 한 그릇 드릴까요?’ 이러면서 아주 보배라고 다른 것보다도 아주 좋은 물이라 하면서 아주 컵에다 조그만한 컵에다가 이래 갖다가 주더래요. 주면서 ‘이 물은 저 대신동 서부교회의 물인데 이 물이 좋다고 그렇게, 거기 가서 모두 먹고 와서 그래. 자꾸 퍼 먹으니까 자꾸 나와요.
우리 양산동은 물을 적게 먹으니까, 저 먼저 보니까 맛이 물맛이 없어. 그래서 지금 인제 내가 요다음에 가면 좀 물을 좀 전부 좀 자꾸 좀 많이 먹으라고 많이 쓰라고 광고를 해서 그럴려고 하고 있습니다.
연보도, 있는 것 내고 성경대로 사니까 또 연보 낼 것 있고 또 낼 것 있고 또 얼마든지 있어. 없는 것 내지 말아요. 있는 돈 내고, 연보할 마음 있으면 내요.
연보 많이 안 해도 좋아요. 어짜든지 그 일곱 가지 도적질하던 걸 회개하고 똑 성경대로만 살아서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 얼마든지 복음 역사를 해 나갈 수가 있습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오늘 저녁에 고쳐요. 하다가서 풍랑 만나거든 주님 잊어버려 그렇다는 걸 생각하고 주님만 찾아요. 그러면 문제가 해결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