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9 15:48
주님과 그날을 보고 살 것
본문 : 고전4:3-5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그가 어두움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우리는 알지 못하심이 없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또 능치 못하심이 없는 능력으로 모든 것을. 다 아시는 대로 처리하시는 주님 앞에 설 것입니다. 주님이 각 사람의 행함을 따라 영원한 갚음을 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의 판단이나 또 자기 본인의 판단 이나 그런 것으로 다 그 판단에 전부를 삼지 않는 것입니다. 왜? 다른 사람이 판단하는 것도 참 그것이 허무하고, 자기가 판단하는 것보다 더 허무하고, 또 자기가 판단하는 것도 그것이 허무하기 때문에.
왜 허무한가? 다른 사람이 나를 안다 할지라도 그 아는 것이 심히 희박하고 또 극히 부분적이고 또 내가 나를 판단한다는 것도, 내가 나를 아는 것도 다른 사람이 나를 아는 것보다는 좀 더 알 수 있지마는 잘 살피면 알 수 있지마는 그것조차도 아주 부분적 지식이요 너무 천박 하고 희박한 그런 지식이기 때문에 그 판단 가지고 안심할 수가 없다.
그러기에 마음에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있는 힘 다해서 하는 데까지 그것을 죽기 전에 하려고 노력해서 하도록 하고 또 해 놓은 것이 자기 마음에 잘못됐다고 생각되는 것은 죽기 전에 빨리 그 모든 것을 다 정리를 하고, 이것은 우리가 하지마는 그걸 했다고 해서 안심해서는 안 된다. 그분은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니 우리가 몰라서 감추어 있는, 몰라서 해결짓지 못한, 몰라서 행하지 못한, 모든 어두움에 감추어 있는 그것을 다 그분은 아시고 드러내고, 또 우리는 행동이 돼야만 무슨 행동인 줄 알지마는 우리의 마음과 뜻에 한번 지나간 것은 그것이 다 당신 앞에 하나도 가려지지 안하고 전부 다 드러난다.
그래서 불택자들은 그것으로써 영원한 고난을 받게 되고 택자들은 그것으로 인하여 모든 받을 그 영광과 능력과 구원을 다 삭제당하고 남아 있는 바른 것만 보상받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빌립보 3장에는 '어데까지 이르렀든지, 네가 어데까지 이르렀든지 죽는 날까지는 달음질해라' 말했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주님 앞에서 살아야 되겠고 또 주님만 상대해서 살아야 합니다. 주님이 오셔 가지고 심판을 할 때에 물론 사람과 사람끼리 잘못되고 잘된 그것도 가리지마는 그런 것은 별로이 필요가 없습니다. 전부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도, 또 사람과 물질과의 관계도, 또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도, 삼계명은 특별히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점을 중점으로 하신 말씀인 것입니다.
이 모든 관계가 인간 자기네끼리 한 일이지마는 그것이 주님에게 관련되지 않는 그런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저거끼리 시비했지마는 그 시비가 다 뿌럭지는 주님과 관련입니다. 또 믿는 사람이나 안 믿는 사람이 잘하고 못한 그것이 사람에게 또 누구에게 잘했다 못했다 이렇지마는 그것이 올라가고 올라가서 그 뿌럭지는 전부가 다 주님에게 관련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는 무엇을 중심해서 심관하시느냐? 심판하시는 그 심판법은 내나 우리에게 주신 영감 도리가 그 법이지마는 그 심판할 때에 영감 도리로 법을 삼아 가지고 누구를 상대해서 심판하느냐? 전부 당신을 중심해서 심판하십니다. 네가 그 사람에게 그렇게 한 것이 주님에게 대해서 어떻게 됐나? 그 사람에게 네가 악을 행한 것이 그것이, 그것이 내게 대해서 어찌 됐느나? 그 악을 행한 그것이 나를 무시하고 멸시한 것이 됐느냐, 나를 대적한 것이 됐느냐? 네가 하는 그 행위가 그것이 사람끼리 했지마는 그게 나를 대우한 것, 나를 보고 한 것. 결국은 주님을 중심해서 모든 심판이 다 됩니다.
그러기에 이것을 미리 알고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사람과의 관계 생활을 하든지 그와 같이 심판될 것이기 때문에 평가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알든지 모르든지 그대로 됩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크고 작은 모든 것을 주님 앞에서 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내가 이와같이 하는 것이 주님에게 어떻게 되느냐? 주님에게 어떤 거리낌이 되느냐? 주님에게 어떤 부담이 되느냐? 책임이 되느냐? 또 이것이 주님을 무시하고 부인하는 것이 되어지느냐?' 하는 그 결말이 맺어지고 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나와 함께 계시면서 보고 계시는, 또 거게 대해서 듣고 계시는, 또 거게 대해서 모든 인간을 초월한 무한한 이성적 감정과 그 모든 정의적 판단을 가지고 그 자리 참가하고 계시는 이 주님을 보면서 우리의 생활은 조절돼야 되겠고, 우리 생활은 재재를 받아야 되겠고, 우리 생활은 위로도 받고, 안심도 받고, 또 평강도 누리고, 두렵기도 하고, 떨기도 하고, 그분을 봄으로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소욕과, 우리의 경영과, 계획이 그분을 봄으로 인하여 조절되는, 그분에게 내가 충격을 받고 그분에게 자극을 받고, 그분의 보심 때문에, 그분이 여게 참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분이 들으시기 때문에, 그분 앞이니 내가 이렇게 하는 것이 막바로 그분에게 하는 것이요, 그분 눈에 뜨이는 것이요, 그분 감정에 다 접촉이 되어지는 일인 것을 우리가 알고 사는 것히 이것이 깬 생활입니다. 모르고 살든지 알고 살든지 이대로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어데서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뿐이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마귀가 우리를 술취하게 하는 것이요 미혹 주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람과의 관계든지 일이나 물건과 관계되는 그 관계는 주님은 언제나 내가 몰랐지 우리와 같이 거게 참여하고 계십니다.
그것을 보고 계십니다.
그러기에 우리 하는 일이 사람에게 대해서 한 일이라도 사람에게 대해서 무시하고 하는 그 일은 곧 사람 무시하는 것보다도 그분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에게 못할 일 하는 그것이 그분을 아주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람도 같이 있으면 그 사람 안면 보아서 차마 못 할 일 있고, 그 사람 때문에 참는 일도 있고, 또 그 사람 때문에 안 할 일도, 참 그 사람의 안면을 봐서 하기 싫은 일을 하는 일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만 자기에게 있어도 그 사람으로 인해서 우리의 그 모든 언행심사의 행동이 다소나마 제재를 받습니다. 또 사람 중에도 좀 자기가 아는 대로의, 그 거룩한 사람이면 거룩한 면에서 많이 절제를 받게 되고, 또 권세 있는 사람이면 그 권세에게 자기가 절제를 받게 되고, 또 그 사람이 모든 자기의 행동을 감시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그 감시하는 사람으로 인해서 자기는 많은 제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주님은 우리에게 더 같이 계시고 또 인간으로 측량도 못 할 인간을 탁월한 감정, 오기, 시기, 질투, 분노, 복수, 보상, 이런 뛰어난 감정을 가지시고 우리를 상대하십니다.
이런데 우리는 이분을 이 육신의 눈, 육안. 육안 이것만을 위주로 하고 마음의 눈을 우리가 쓰지 안하기 때문에 눈에 안 보이면 없다 이렇게 생각하기 쉬운 우리들입니다.
그러기에 큰 죄를 저지른 말을 해 놓고도 그 말이 그만 자기 기억에 사라졌으면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또 자기 마음이나 생각이나 가진 그것을 없애버렸으면 그만 없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마음의 뜻을 다 드러내신다'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육안 위주로 육신의 눈을 가지고 이것으로만 위주로 사는 그런 소경의 외식하는 생활을 벗고 어쩌든지 우리 마음의 눈으로, 우리의 양심의 눈으로 이렇게 보고 생각하는 이것을 자꾸 우리가 연습을 해서 숙달되도록 해야 되겠습니다.
무엇이든지 우리에게는 발달성이 있고 또 순응성이 있도록 그렇게 하나님이 지어 놨습니다. 이러니까 무엇이든지 자꾸 한번 두번 하는 버릇하면 그것이 차차 차차 연습돼서 능숙해집니다. 또 이 지체를 쓰기 시작하면 자꾸 그 지체를 사용할수록 그게 발달이 돼서 점점 강해져 갑니다.
그러기에 손으로 가지고 일하는 대장장이는 팔힘이 세지고, 자꾸 또 뛰어다니는 사람은 아랫도리 힘이 강해지고, 또 자기가 무엇을 이래 보는 그런 것은 자꾸 그 보는 그것도 연습하면 눈의 그 시력이 점점 강해지고 그만 깜깜한 어두운 데서 아무것도 보지 안하고 그래 살면 얼마 있으면 눈이 먼답니다, 나는 그걸 해 보지는 안했지마는.
이러니까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항상 주님이 내 곁에 서서 계시고 내 언행심사의 하는 일에 당신이 다 참가하셔서, 나 하는 일이 그분을 대접하는 일도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분을 무시하는 일도 되고, 또 아주 그분을 목석같이 아무 감각 없는 그런 존재로 이렇게 아주 멸시하는 일도 되게 되고, 참 그분을 두려워하는 일도 되고, 그분을 바라보는 일도 되고, 또 그분을 의지하는 일도 되고, 그분 때문에 그분의 처리를 기다리면서 참는 것도 되고, 그분의 갚음을 생각하면서 기다 리는 것도 되고, 이제 우리가 마음의 눈으로 그분이 우리와 함께 계시고 인간을 무한히 탁월한 완전하신 그 지정의의 감정을 가지시고 우리의 하는 일을 참가하고 계실 뿐만 아니라 내가 무슨 물건을 해도 당신의 것입니다. 사람을 접촉해도 당신의 것입니다.
내가 어데서 그걸 봤던가? 오, 현충일날 그 모두 참 무덤에 가 가지고 모두 울고 기념하는데 거게 어떤 데는 보니까 남펀이 살았을 때에 사용하던 손수건 그것 하나를 보존해 놓고 그걸 보면서 울고, 또 어떤 사람은 보니까 아주 신은 볼 것 없는데 그때 그분이 살았을 때 신고 있던 그 신을 그것을 놓고 기념을 하면서, 그렇게 뭐 여러가지 소지품, 보니까 조그만한 그런 것 가지고 기념하고 있는 그런 것을 봤습니다.
내가 무슨 말 하다 이리 나갔지? 녜, 그래, 자기의 그 사랑하는 자의, 그가 없으니까 사랑하는 자의 그분이 손으로 만진 것, 그분이 사용하던 것, 그분이 준 것, 그것을 그저, 뭐 죽은 지가 뭐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됐다 하는데도 그걸 그대로 보존하고 그것을 기념하고 가지고 그걸 보고 남편을 생각하면서 울고 또 슬퍼하고 그 애착을 하고 하는 그런 것을 봤습니다.
우리가 이 모든 사람이나 물건이나 움직이는 것이나 그것이 전부 다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당신의 것이라는 것을 우리가 몰라서 몰랐지 실은 당신의 것이기 때문에 우리 앞에 있는 사람 그게 당신의 사람이요, 물건이 당신의 물건이오.
이러기 때문에 그 물건 하나를 그걸 아주 멸시 천대하는 것이 그것이 당신에게 욕을 보이는 것이고 멸시하는 것입니다. 그것 또 사람 하나를 보고 뭐 그 사람은 그 사람인데 '그 사람이 나한테 잘못했는데, 어쨌는데.' 그 사람 관계를 가질 때에 주님을 보면서 이 사람이 주님의 것이요 주인은 주님이 주인이시니 주님을 보면서 그 사람에게 대해서 주님을 보면서 참은 것, 주님을 보면서 용서하는 것, 주님을 보면서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것, 주님 때문에 그 사람에게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것 주님 때문에 그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것, 주님 때문에 그 물건에 대해서 어떻게 하는 이것이 바로 실상으로 주님을 대우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새털같이 많은 날이라.고, 또 현실은 현실에 자꾸, 꼬리를 물고 지나가니까 예사롭체 여기지만 주님은 우리가 닥치는 그 현실 현실에서 당신과 우리가 어떤 관계맺는 것, 당신을 어떻게 대우하며, 어떻게 인식하고 있으며, 어떻게 믿으며, 어떻게 그를 높이며, 어떻게 두려워하며 어떻게 그분의 영광을 생각하고, 그분의 안면을 생각하고, 우리가 행동한 그 행동 하나 하나가 만들어져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과 악령이 거게 제일 권세를 가지고 대하고 있고 사람과 일과 물건과 나와 대하는 것은 그 둘 앞에서 대하고 있는데 거게서 내가 마귀 앞에서 주님 앞에 영광을 돌리는 일, 주님을 참 존대하는 일 그때에 주님을 멸시하고 마귀를 존대하는 그런 일 그런 것이 우리가 몰라서 과거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러니까 그런 것도 다 가기 전에 해결하면 됩니다. 양심에 자책되는 그런 것을 오늘에 주님의 피가 필요합니다. 오늘에 주님의 피로 해결 되지 않을 것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양심에 자책되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참 화가 있고 아는 사람이 복이 있고, 알 때에 그것을 가지고 앓고 있을 게 아니라 알았으면 찰나도 거게 있는 것을 주님이 원치 안하십니다. 알았으면 주님의 피에 고해서 즉시 해결받고 새출발하고 새로 일어서야 합니다.
이래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를 우리의 육안으로 인간끼리 이렇게 하는 그런 외식에서 우리가 머물지 말고 우리의 모든 언행심 사가 당신 잎에서 또 악령 앞에서 우리가 살고 있고 행동하고 있는 이 사실을 우리가 자꾸 보기를 힘쓰고, 또 알기를 힘쓰고, 또 그분과 악령을 대해서 하는 생활인 이 사실을 우리가 깨닫고 그 면에 대해서 힘을 써서 참 그저 자기 아는 대로는 그분 상대해서 아무런 자책할 것이 없이, 악령을 상대할 때에 악령으로 인해서 주님을 기쁘시게 할지언정 주님을 섭섭하게 노엽게, 주님을 수치스럽게, 주님을 부끄럽게 그렇게 하는 일이 없도록 이것도 자꾸 연습하면 됩니다.
사람이 이 모든 지식이라 하는 것이, 나는 한글 알고, 또 뭐 한자 몇자 알고, 또 일본 그 국문 알고, 그외에는 하나도 모릅니다. 그 외에 글자가 지금 현재로 아마 백여 나라의 그런 다 방언들이 있을 것이고 하지마는 그걸 모르는데 아는 사람들은 그걸 거의 다 압니다. 그걸 자꾸 보니까 '요라는 건 무슨 자라, 요라는 건 무슨 자라.' 뭐 헬라어니 히브리어니 하는 것은 그게 글자도 같지 앉고 이런데 그 점 하나에서 꼬꾸랑이 하나에서 아주 뜻이 다른 제일 고전어기 때문에 그 고전어로 가지고서 정확을 안다는 것이 너무도 어렵습니다. 그 범위가 너무도 넓습니다.
이것도 자꾸 봄으로 자꾸 숙달돼서 알게 된 것이 모든 어학들입니다, 봄으로.
모르던 것, 나는 거기 대해서 보는 연습 안 했기 때문에 그뭐 에이자 하나는 아는데 그 다음자는 모릅니다. 내가, 그러나 자꾸 보고 연습한 사람은 알게 된다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육안으로 사는 우리들이 마음의 눈을 가지고 내 곁에 계시는 주님, 또 내 곁에 있는 악령, 또 모든 것과 내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주님과의 연결되어 있는 그 연결, 내가 접촉하는 모든 사람과 악령과의 연결되어서 한없는 고난 가운데 붙들려 있는 것, 한 없는 사랑을 가지고 안타까와 구출하기를 원하셔서 당신이 손 못 대고 인간을 통해서 댈 것은 인간을 통해서 대는 그분이 소원하고 계시는 그것, 이것을 자꾸 우리가 보는 연습을 하면 자꾸 보여집니다.
종류적으로도 더 많아지고, 범위로도 더 많아지고, 또 질적으로도 더 세밀해지고 이렇게 해서 마음의 눈으로 우리가 주님과 악령과 내가 접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을 이것을 보는 그 관계를 보면서 내 현재의 행동에서 그분을 봄으로 악령을 봄으로 모든 것이 그분과 관련되어 있는 그 관련을 봄으로 이렇게 우리가 하나 하나 사는 이 연습을, 이것도 연습입니다. 하면 됩니다.
그런데 연습을 하되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라' 그 말씀은 하나님의 한 성경 진리를 아니까 하나를 더 알게 됐고 둘을 아니까 둘을 알게 됐고 자꾸 이렇게 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눈이 더 밝아지고 보여지고 이래서, 말씀이 우리에게 말해 주는 대로 나와 주님과 나와 악령이 합께 있고 내가 접하는 모든 사람과 만물이 다 같이 있는데 그 연결이 나와도 연결이 돼 있고 주님과도 연결이 돼 있고 악령과도 연결이 되어 있으니 거게서 주님을 대접할 수 있는 가장 요긴한 촛점이요 또 그때에 네가 악령을 배척해 버리는 그 촛점이요 그때에 모든 사물에게 대해서 내가 관련 가진 것이 주님과의 관련 가진 그것에 다 집합된 아주 초점이요 절정의 그 현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일을 자꾸 연습을 해야 하겠고, 또 우리는 늘 그저 주님 앞에 가 서면 참 하나님의 날, 우리가 죽는 날, 주님이 재림하시는 날, 또 우리가 부활하는 날, 또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심판을 받는 그 날, 또 심판받아 가지고 영원 무궁토록 내 행한 대로 갚음을 받는 그 날, 그 날을 우리가 자꾸 또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은 그 날에 가 있어야 된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 라 하나님의 날 그날에 소망을 가져라.
'간절히 사모해라' 내 모든 마음은 거게 있어 가지고 거게 있는 그 마음과 계획과 소원을 그때는 해야 소용 없기 때문에 그 날의 것을 오늘 이 현실이라는 이 현실에서 네가 처리를 해라, 이렇게 우리에게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꾸 깨어서, 우리 모든 하는 일을 그저 '그 날에 가면 어찌 되겠느냐?' 그날을 생각하면 우리 마음이 밝아집니다. 그래서 '네가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고 땅에 쌓아두지 말아라. 보물 있는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네게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어둡겠느냐?'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을 하늘의 소망에 두면 우리 마음이 밝아진다는 것입니다. 하늘 소망에 두면 우리 마음이 밝아집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우리와 같이 계시는 주님을 이렇게 처음에는 잘 안 보이지마는, 갓난 아이는 어머니가 보입니까, 어데? 자꾸 이렇게 보는 연습을 하는 가운데서 어머니를 똑똑히 아는 것처럼 자꾸 우리도 그렇게 발달돼 나가도록 하나님이 지어놓은 것이라 그말이오.
같이 계시는 주님을 우리가 보면서, 또 같이 있는 악령을 보면서, 이제 주님과 악령은 나를 두고서,나를 두고서 내가 어떻게 하나? 참 시기하기까지 지금, 시기하는 똑 우리 사람에게 시기심이 있는 것과 같은 시기심을 가지고 네가 악령이냐 내냐, 악령이냐 내냐 하는, 그것을 언제든지 가지고 내 현실에는 닥치고 있기 때문에 그때에 주님을 영 접하는 것이 참 주님을 대접하는 것이요 그때에 주님을 내몰라라 하 고서 배척하고 악령을 대접하면 그게 주님에게 큰 모욕을 준 것입니다.
이러니까, 지금 가만히 알고 참고 기다리고 계시기는 계시지마는 그것이 그 날에 다 드러날 것이라 그거요. 그러므로 우리는 마음의 눈으로 보는 연습도 자꾸 해서 점점 숙달 해서 온전함에 나아가도록 해야 되겠고 또 우리는 내나 지금 주님 보면은 다 되는 것이지마는 그래도 또 그날을 또 생각하면은 또 그 면으로 그 각도로 또 우리에게 새로와진다 말이오.
그 날을 생각하면서 우리 모든 전소원이나 생각이 마구 그날에 집중돼 가지고 그 날에 전부 가서 다 집합되어 있으면서 그 날에 된 그 마음이 오늘 현실이라는 데 발동이 되어지도록 이렇게 해라 하는 것을 성경이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물론 이 세상에서 뭐 사람의 이목구비, 그것도 두렵지마는 참 우리가 사람의 이목구비가 두려워서 우리의 모든 언행심사가 제재되는 그것은 이것은 참 외식입니다. 이거는 껍데기 생활입니다.
우리는, 물론 처음에는 그것이라도 있어야 되지마는 거게서 우리는 멈추지 말고 나와 함께 있는 주님과 악령의 그 눈과 귀와 그 감정과 그분이 지금 어떻게 지금 나 하는 행동에서 그분에게 어떤 충격이 갈 것인가? 그것을 우리가 생각하면서 사는 그것을 바울이 말한 것입니다.
거게 있고 이제 사람의 눈이나 귀나 입이나 거게 제재받는 거게서 있지 마라.
'그 제재는 내가 매우 작은 것으로 여긴다. 어두운 데 감추어 있는 것을 다 드러내시고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분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까지 다 드러내고 판단하시기 때문에 그분 앞에 서야 되는데 그 분이 아는 대로 내가 다 알지를 못하기 때문에 내 아는 대로 다 했다는 그것이 너무 부분적이고 너무 지엽적이고 하기 때문에 안심하지 않는다 안심이 되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그저 죽는 날까지는 그분의 긍휼을 기다릴 것밖에 없다.' 하는 이것이 사도 바울의 간증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세상에서 살면서 소용 없는 것을 자꾸 간추려야 되겠습니다.
말도 간추려야 되겠고, 또 행동도 간추려야 되겠고, 일도 간추려야 되겠고, 연습도 간추려야 되겠고, 모든 공부도 간추려야 되겠 고 간추려서 주님과 그날을 보면서 참 이것도 필요하다 하는 그것을 우리가 다 할 수 없습니다. 없어서는 안 될 것, 자꾸 간추려서, 우리의 지식이 좁을 때에는 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의 지식이 자꾸 넓어가면은 필요하 것이 뭐 우리가 그 백분의 일도 못 할 만치 많습니다. 또 우리가 해결될 것도 그렇게 많습니다. 많은데 그것 다 할 수 없으니까 거게서 간추려야 되겠습니다.
'자 내가 이 연습을 하면은 이 연습은 그 날에 어찌 되느냐? 그 날에 효력이 있는 것이냐 그 날에 효력이 없는 것이냐? 또 이것이 주님 앞에 설 것이냐 주님 앞에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냐? 내 연습해서 숙달된 이게 뭐이냐?' 우리는 자기가 자꾸 매일 매일 하는 것이 연습인데 매일 매일 하는 생활에서 자기의 온전함을 이룰 수 있는 그 참 재료를 이것을 다 절 단내는 그런 것을 자꾸 해서, 꼭 한정되어 있는 자본이기 때문에, 한정되어 있는 자본입니다.
우리의 힘도, 우리의 젊음도, 우리의 기운도, 우리의 총명도, 우리의 기억력도 다 한정이 있습니다. 그렇게 뭐 무 한정의 것이 아닙니다.
한정돼 있기 때문에 한정되어 있으니 이것을 어디다가 써야 되느냐? 이 정력은 어디다가 쓰며, 어떤 걸 연습하며, 어떤 것을 수입하며, 어떤 것을 지금 내가 숙달을 시키며, 어떤 것을 저축을 하며, 관계를 가지겠느냐? 이것을 우리가 할 일을 자꾸 간주려서 그 구별하지 안하면 안 되겠습니다.
거룩이라 하는 것은 자꾸 구별해서 '요것보다는 요게 낫다 요것보다는 요게 낫다, 요것보다는 요게 낫다. 요거는 아니다.' 이래 가지고 자기로서 그 건에서는 최고의 자기로서는 이상적인 좋은 걸 그걸 택해서 가지는 것이 그것이 거룩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제 거룩은 다시 말하면 모든 세상에 지식이 만지마는 제일 중요한 것이 '자존자가 계셨다. 자존자가 계셨다. 또 모든 것은 그분에게 지음을 받은 것이다.' 이것이 대가리 지식입니다.
이런데 제가 세상에 있는 것을 천 가지 만 가지를 내놓음으로써 모든 사람이 '아, 만물박사다.' 만물 박사가 됐다 할지라도 그가 자존자를 몰랐으면 그 지식은 모가지 끊긴 지식 입니다. 대가리가 끊겼기 때문에 죽은 지식이오.
그러기 때문에 여게서 입각해서 사는 사람은 어떤 무신론자가 다 이렇게 할 때에 '이 지식은 모가지가 끊긴 지식이기 때문에 분명히 죽은 지식이로구나.
그러니까 거게서 살리기 위한다면은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생겨졌습니까?' 말 한 마디를 질문 안 하고 갈 수가 없고, 그러면 저게서 뭐 자존자로 말미암아 지음받았다는 창조설을 말하든지, 진화론을 말하든지, 유전설을 말하든지, 유출설을 말하든지, 자기가 자연설을 말하든지 무엇이든가 있을 것이라 그말이오.
그러면 거게서 벌써 그분이 계셔서 그분이 해 놨는데 그분 떨어진 그것이 다 그분에게 벌받을 일이요 죽을 잎이요 멸시당할 일이요 무시당할 일 아닙니까?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뭣이든지 공부를 하든지 듣든지 보든지 할 때에 언제든지 네 생활 속에 거룩이 있으라 하는, 지난 주일 오후의 것을 재독하는 걸 제가 들었는데 그만해도 살 수 있습니다. 얼마나 하나님께서 귀한 것을 주셨는지? 우리가 생활 속에서도, 생활 속에도 그 거룩을 네가 가져라. 그러면 우리가 생활하는 가운데 '그러면 이것은 어떻게 생겨졌는가? 자존자와 그것의 존재가 어떻게 됐나? 그러면 그것이 뭣 때문에 있나? 어떤 데 이용할 것들인가? 그러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무슨 결과를 맺어야 되겠느냐? 나는 어떻게 살고 있느냐?' 자기를 아는 대로 바로 알았으면 그만큼은 거룩을 가진 것이오. 이 거룩으로 찾아나가는데 요게서 한 자욱은 바로 떼놨지마는, 바로 떼놨으면 그게 거룩이오.
거기 또 가니까 갈래길이 있는데 거게서 이리 떼놓나 저리 떼놓나? 거게서 갈래길이 있는 거게서 바른 자욱을 떼 놨으면 거기 또 거룩이오.
이래 가지고 자존자로부터 모든 존재 자기의 생활의 전분야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이 가르친 대로 구별해서 옳은 것 구별해서 옳은 것 구별해서 옳은 것으로 나아가는 이것이 거룩이니 결론적으로, 총괄적으로 말하면 그것이 주님의 피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알아야 될 것 많고 필요한 것 많이 있지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정하기를 구원의 길을 하나만 정했기 때문에 주님의 피와 연결되는 그것을 자존자가 창조주가 그걸 정해 놓은, 절대자가 심판자가 그걸 정해 놨기 때문에 그 길을 찾아가는 그것이 제일 인간으로서 정로를 찾은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구세주 대속주 주님의 공로를 찾아들어가는 것이 수많은 그 억억만 갈래길 가운데서 첩경인 곧은 길을 찾아 들어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공부를 하면서도 거룩을 가져 '나는 자존자가 아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지음받았다. 그분이 목적을 가지고 지었다. 지은 그분에게 거슬리면 이게(주:주먹으로 책상을 치심) 된다. 이것이 자기가 공부하는 데 자기가 무슨 일 하는 데에도 그게 첫째 대가리가 되어 있지 안하면은 그 사람은 죽은 사람입니다. 죽은 생활이라 그거요.
그러므로 우리가 깨어서 삽시다. 잠시 잠깐 후면 주님이 오십니다. 인인 관계에 무엇이 뭐 억울함이 있다고 해도 아무리 억울해도 주님이 다 보고 계시기 때문에 너무 억울한 걸 못 견디면 주님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의의 주님 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나쁜 것을 내가 미워하는 것보다 주님은 몇 억억만배도 더 미워하십니다. 또 옳은 것이면 당신이 기뻐하시고 가치로 평가하기를 내가 평가하는 것보다 억억만 배도 더 평가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냉수 한 그릇의 수고의 옳은 것도 무궁세계에 상을 잃지 않겠다고 당신이 말씀하시지 안했습니까? 그러기에 이분이 계시는 이분을 아는 사람으로 우리가 자꾸 처리하고 행동할라고 애를 쓰고 이분을 무시하는 그런 일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노력을 해야 되고 그 날을 생각하면서 살아야 되지 참 지금 현재만 보고서 이것으로 평가하고 산다는 것은 다 외식이요 소경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시간이 많이 갔는데 권찰회에 별 일은 없고 중간반이 중학교 일학년으로부터 고등학교 일학년까지를 중간반이라 했는데 그 다음에 고등학교 이학년으로부터 대학 일학년까지를 관리를 안 하니까 이게 그만 전부 이리저리 흩어지고 악령이 와 가지고서 자꾸 사로잡혀 갑니다 조그만한 병아리가 통밖에 나가면 독수리가 채 가지고 가는 것처럼.
그것은 제가 이십 한 이삼 년 전에 한 삼사 년 전에 삼각산에 가니까 어떤 할아버지가 있는데 '병아리가 겨우 자라서 날개 나 가지고 날개 쪽지 나 가지고 퍼득거리는데 다 통 밖에 나가니까 독수리가 다 채 가는 것처럼 사람이 겨우 조금 부등깃 날 만한 사람이 되면 이것이 철때기 없이 이 사회에 교계에 명예 영광주의에 나가 가지고 전부 독수리한테 다 채여 가고서 지금 남은 병아리가 얼마 없습니다' 하는 그것을 그분이 말을 해서, 목사가 그때 은신해 가지고 그래 가지고 있는 사람인데 가서 그 말을 들은 것을 지금 내가 기억이 납니다.
'독수리한테 채여 갔다.' 우리는 어쩌든지 조심해서 이렇게 삽시다.
이것 모양으로 그만 고등학교 이학년으로부터 대학 일학년까지, 그것 또 진학에 무슨 한 마디가 있는데 관리 안 하니까 그만 이게 채여가 버려. 이래 가지고 관리 안 하니까 그만 독수리한테 다 채여 가서 그만 못쓰게 된다 그거요.
이래서 이걸 관리를 하자 해 가지고 중간반 일부 이부로 해서 이부는 고등학교 이학년부터 대학교 일학년까지를 했습니다.
그거는 대학부라 착기로 해도 되고 또 무슨 부라 하기도 할 수가 있지마는 그것을 역부로 안 붙일라고 중간반 일부 이부라 했습니다. 이러니까 그 할 줄 모르는 게 아니고 알지마는 그것은 나중에 가서 폐단이 있습니다. 나중에 가서 보면은 잡탱이 마귀란 놈이 낚시를 걸 수 있는 그런 홀랭이가 많이 걸캥이가 많이 돼 있기 때문에 걸리면 죽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는 데까지는 그런 마귀의 홀랭이에 걸리지 안할 수 있도록 매끌매끌하게 하기 위해서 이제 그런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부 남녀 학생들을 관리할 수 있는, 남반은 관리할 수 있는 사람들이 결정이 됐습니다. 여반은 고등학교 이학년으로부터 대학일 학년까지를 관리할 그런 사람이 결정이 안 됐습니다. 거게 신청하는 사람늘은 더러 있습니다마는 그분들은 다 일부에 대한 반사를 원했고 이부에 대한 걸 원하지 안했고 이랬는데 그 이부에, 일부에도 원한 사람은 제가 자격을 봐 가지고 그래 하겠습니다.
이러니까 좀 더 널리 알려서 그것을 좀 책임맡을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는데, 더러 만났습니다. 만나니까 '가정 경제가 이래 돼 가지고 있으니 이렇습니다' 하는 사람, '녜, 그것도 책일맡아야지요.' 제가 시집가면은 부모네 덕이나 봤지 뭐 제가 벌어 가지고 시집가고 난 다음에도 부모의 그것 무슨 봉양을 하겠습니까? 그게 핑계라 그 말이오. 하기 싫은 핑계라. 내가 이 가정에 경제를 책임을 져야 되는데 오늘이라도 시집갈 때 되면은 그만 시집가야 될 것이고 부모네도 시집보낼 건데 그게 제가 하기 싫으니까 핑계라. 내가 그런 사람을 둘을 전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또 본인도 원하고 이래서 했는데 보니까 그걸 말해. '네가 벌써 속화가 됐다. 그저 너는 그 자리에서 하라.' 그러고 권하지 안했습니다. 그게 다 굉계라 말이오.
그러므로 어쩌든지 우리는 그 날을 바라며 삽시다. 그 날을 바라면서 그 날에 가치 있는 것을 보고 살아요. 또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치 못하심이 없고 모든 걸 보고 계시는, 이 일을 위애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기까지 하시고 또 영원히 창조주가 피조물의 형상을 입고 나타나신 이분을 보면서, 이분이 모든 것 다 가졌습니다. 이분이 못할 것 없습니다.
이분을 보면서, 이분의 대적이 선물인데 대적이 됐어. 사람들이, 남편이 필요 있게 쓰라고 종을 데려줬더니마는 종하고 둘이 그만 사이가 좋아서 그만 종이 간부가 돼 버렸어. 세상을 선물로 줬는데 세상에 그만 간부가 됐어. 이것이 현재입니다.
그러므로 그 날을 보면서 살고 자기가 의식주의 자기의 모든 생사 화복에 그분을 바라보면서 그분이 주권하고 계시니까 그분을 정말로 보면서 그분을 참 인정하는 언생심사의 행위로 처리하는 그것이 당신을 대우하는 것이오. 주를 바라보는 자 결단코 부끄러움 당하지 않습니다. 당신을 바라보는데 헛바라봤다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