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과 결합

 

1981. 1. 12. 새벽 (월)

 

본문: 요한계시록 18장 3절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를 인하여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로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고들도 그 사치의 세력을 인하여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여기에 음행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우리가 구속해 주신 주님만 사모해야 할 우리  마음이 주님 외에 다른 것을 사모하는 것이 그것이 신앙적 음행이 되는  것입니다. 또 주님만을 사랑하고 주의 사랑만을 받아야 할 우리들이 주님 외에  딴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또 음행은 주님과 같이 살아야 될 우리들이 주님을  버리고 다른 것으로 더불어 같이 사는 것이 음행입니다. 모든 희로애락을 주님과  같이 해야 될 우리들이 주님 외에 다른 것으로 더불어 희로애락을 같이 하는  것이 이것이 음행입니다.

하나님께서 구속받은 성도들에게 제일 노여워하시는 것은 음행입니다. 제일  미워하시는 것이 음행입니다. 야고보서 4장 4절에 보면 “세상과 벗되는 것이  하나님과 음행하는 것인 것을 너희들이 알지 못하느뇨”라고 말씀을 했습니다.

우리의 행동도 그러하지마는 행동보다도 우리의 마음입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 향해서 할 그 마음이 하나님 아닌 다른 것, 혹은 자기나, 다른  사람이나, 어떤 단체나, 일이나, 물건이나, 어떤 것이든지 하나님에게만 이렇게  상대하여야 할 그 상대를 피조물들에게 하는 것은 다 음행입니다.

또 우리를 구속하신 하나님에게 대해서는 그럴 수 없고 다만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에게 대해서 우리가 상대하여야 할 그런 정도의 상대를 하나님에게 하는 것은  벌써 음행한 자가 하나님을 멸시하고 외식하는 가증스러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라” 말은 우리 믿는 사람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음행이 되기도 쉽고 음행한 자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멸시하고 외식으로 덮어  가루어 하나님을 상대하는 자가 되기도 쉬운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제일  진노케 하는 일이 됩니다.

이런 일을 자기도 범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범할 수 있게 말을 하고, 주장을  하고, 또 글로 써서 이렇게 세상에다가 내어놓고 하는 이런 모든 것을 가리켜서  포도주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과학이 나쁜 것이 아니지마는 모든 과학이 어떤 자에게는 이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가 됩니다. 그러나 이 과학을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의 부리는 사람들을 통해서 자기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알고  이렇게 상대하는 자에게는 과학이 주님에게 받은 귀한 선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이 과학을 인하여 하나님과 멀어지고 하나님을 모셔야 될 그  자기의 마음 자리에 이 과학으로 인하여서 다른 것을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이  자리잡아야 하는 이 위치에 이 과학으로 인하여 다른 것이 자기 마음의 높은  자리를 차지했으면 이것은 음행의 포도주에 취한 자입니다.

모든 이종교 이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이종교의 사상, 무신론의 사상, 물질  만능의 유물주의 사상, 유물주의라고 하면 물질을 제일 귀중히 여기는 것이  유물주의입니다. 주의라고 말하면 그것을 제일 주로 여긴다 말입니다.

유물주의라면 물질을 제일 중하게 여기는 것이요, 도덕주의라 하면은 도덕을  제일 중하게 여기는 것을 도덕주의라고 붙이고, 또 정치주의라 하면은 이 세상  정치를 그 사람이 제일 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이라면 정치주의가 되겠습니다.

이런 것은 다 음행의 포도주가 됩니다.

인간들이 말하고 있는 모든 도덕론 모든 철학 이런 것은 두말 할 것 없이 이것은  다 음행의 포도주입니다. 지식 중에 과학은 주님에게 받은 선물로 받을 때에  그는 선물이 되고 이것으로 인하여 주님과 멀어지게 될 때에는 이것이 음행의  포도주가 됩니다.

이 술로 말한 것은 교훈의 종류들을 가리켜서 술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는 왜  술로 이렇게 비유했는고 하니 술은 그 주정으로 인해서 거기에 감염이 되기  때문에 이와 마찬가지로 이 교훈으로 인해서 결국은 이 교훈적 사람이 되어  하나님과 멀어지기 때문에 이 상징할 때에 포도주라, 또 바리새교인의 누룩이라,  또 술취하지 마라 이렇게 말씀들을 하신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구속하신 주님을 자기 마음으로서는 제일 높은 자리 이 자리에  주님을 모시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자기를 세상 이것 저것이  다 우리와의 관계를 가지고 있지마는 하나님이 제일 주장되는 권세를 가지도록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이 주장된 권세를 가지고 주장하시는 것이 이것이  우리로서는 정상입니다. 자기를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주장할 때에는 이것이 곧  하나님께 대해서 음행의 진노의 행위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또 자기의 마음이 온갖 데 다 기울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보다  하나님에게 마음이 기울어져 하나님만을 사모해서 하나님과 자기 마음이 같이  있어 하나님으로 인하여 모든 것을 생각할 수 있습니다. 또 모든 것을 좋아할  수도 있습니다. 또 모든 것을 소원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고, 함께 소원하고, 거기에 대해서 함께  일하고, 함께 노력하는 이것은 하나님과 동행이요 동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잊어버리고 어떤 것을 생각했든지 어떤 것에 대해서 노력했든지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것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잊어버렸을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음행이요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어떤 사람이든지 일이든지  물건이든지 그것과의 하나가 되어 가지고 하나님에게 거슬려지는 행위를 했을  때에 그것이 음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떤 일이나 물건이나 사람에게 대해서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그런 일은  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법도대로 거기에 대해서 행동한다 할지라도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그 일을 하는 것은 그것은 음행은 아니지마는 음행의 미수가 됩니다.

음행의 시작이 됩니다. 하와와 아담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에덴동산에서 둘이  움직인 그 결과에 배암에게 미혹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의 법도대로 산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법도대로만 살고  생존하신 우리를 구속하신 우리 사람을 지으신, 사람을 지으신, 사람의 감정을  지으신, 사람의 그 모든 애정을 지으신, 이것 다 하나님이 지으셨는데. 사람보다  무한히 탁월한 다정 다감하신 이 인격의 하나님 이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어떤 일을 하는 것은 음행은 아니지마는 하나님을 떠난 행위입니다. 이 행위는  위험합니다. 잘못하면 마지막에 하나님을 범하는 그 죄에 나아가기 쉽습니다.

그런고로 음행은 하나님을 사모해야 할 그 도수의 사모를 하나님을 하지 안하고  다른 것을 사모하는 것, 또 하나님만 그렇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랑인데 이 도수의  사랑을 가지고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 또 하나님만이 나를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데 하나님만 나를 이렇게 주장할 수 있는 그 정도의 주장을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나를 주장할 때에, 만일 자기가 생명 문제가 생겼습니다. 자기가  자기의 생명이 위험하게 되었을 때에 생명이 위험한 죽음에 닥친 일이니까 그  죽음에 대해서 사람이 극도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죽음이니까 인간으로서  제일 큰 일이지마는 주님이 우리와의 관계는 이보다 지극히 무한히 큽니다.

이러기에 죽음이 닥쳐 죽음에 대한 그 생각의 도수라도 그것이 주님에게 대한  도수보다 크면 음행이 됩니다.

또 자기가 무슨 일을 하든지 어떤 것을 닥쳤든지 주님과 같이 있으면서 주님과  함께 그것을 상관할 수 있고 취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잊어버리고 내  심신이 거기에 기울어졌을 때에는 벌써 그것이 음행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것이 주님을 제일 노엽게 합니다.

이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나는 사람을 상대할 때에 외모를 상대하지 안하고  그 중심을 본다”(삼상 16:7)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하나님은 물질이 아니십니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대해서 제일 가까이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영입니다.

하나님은 영체를 가지신 영이 아닙니다. 영체도 물체도 없으신 완전자이십니다.

하나님과 가까운 것이 우리의 영이요, 그 다음으로 가까운 것은 우리의  마음이요, 그 다음으로 가까운 것은 모든 만물보다 우리의 몸입니다.

영은 하나님과 함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습니다. 떠날 수 없도록 함께  있게 됐습니다. 이것이 진리와 성령으로 중생된 중생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영은 진리와 하나님과의 끊어질 수 없는 결합이 됐기 때문에 중생은 영생하는  중생으로 중생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지금 노력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인가?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 우리의 몸이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과  결합되는 것,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결합되는 이것을 하고 있는 것이 천국  건설입니다.

우리의 영으로 인하여 마음이 하나님과 결합이 되고, 우리의 마음으로 인하여  우리 몸이 하나님과 결합되고, 우리 몸으로 인해서 우리의 모든 행동이 하나님과  결합되고, 우리의 행동을 인해서 모든 만물이 하나님과 결합되게 하는 이것이  천국 운동이요 또 자기 구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것을 연습해야 됩니다. 우리 마음이 하나님을 사모하는  연습을 해서 하나님 잊어버리는 시간이 없고 장소가 없도록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와의 같이 계시는 이 인식과 이 습성이 우리에게 가득 배서 언제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이 인식을 가져지도록 이것을 우리가 노력하고 연습해야  됩니다.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는 이것을 인식해 있으면서 어떤 것을 하나님보다  크게 여기고 하나님보다 두렵게 여기고 또 그것을 더 좋아하는 것은 하나님과  함께 있으나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 것을 모르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대해서 무식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런고로 하나님이 우리를  시험하셔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이 크냐 어떤 것이 크냐 큰 것을  비교하는 현실을 만들어 주셔서 우리를 시험합니다. 그럴 때에 하나님이 그보다  큰 것을 그가 인정할 때에는 그에게 평강이 오고 담대가 오고 일이  형통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와 함께 계시지마는 하나님보다 그것을 크게  여기면 그 결과로서는 그로 인해서 두려움이 자기에게 오고, 그것에게 대해서  고통이 오고, 거기에 눌려지고 꺾어지게 되는 그것이 하나님에게 대한 믿음이  없는 연고로 상당한 보응을 자기가 받는 것입니다. 죽지 안하지마는 죽을 것과  같은 죽음을 많이 자기가 겪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세상에서 시험을 받는 것은 욕심에 끌려 미혹함이라”(약  1:14) 말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대해서 확신이 없고 이 세상 것에게  미혹을 받아서 그렇게 사람들이 어려움의 고통을 당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배타고 가다가 풍랑에 걸려서 심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가집니다. 그  풍랑이 그 제자들을 절대로 물에 침몰시키지 못합니다. 주님과 주님의 말씀의  권능을 이렇게 믿었으면 그들은 두려움은 없었을 것이고 풍랑이 날뛸 때에  풍랑에 대해서 조롱했을 것이고 풍랑에 대해서 ‘네가 어떻게 하 그는 주님이  분명히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셨기 때문에는가? 네 힘이 강한가 주님의 힘이  강한가 네맘대로 한번 해 봐라.’ 하고서 구경하는 자 될 것입니다.

이는 모세가 애굽에서 나와서 홍해 바다 가에 있을 때에 애굽 병정들의 그  추격을 인해서 하나님 을 믿는 모세는 그는 기이한 하나님의 한 섭리를 또 처음으로 새 구경하겠다고  그는 기뻐하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하시는가 구경하자.’ 그는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자들은 죽지는 안했지만 죽은 것과 꼭 같은 그런 고통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세상에 두시고 하는 노력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이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충만을  우리에게 주어 가지고 우리를 통해서 만물에게 충만케 하려 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와 결합되려는 것은 창조주의 그 신성이,  하나님이신 그 신격이 우리의 인격과 서로 결합되는 것입니다. 인격과 인격이  서로 단합되는 것.

그러기에 아무리 부부가 좋아도 전우, 전쟁에 가 가지고서 죽음을 같이 많이  겪은, 수많은 죽음에서 같이, 저가 나를 돕고 내가 저를 도와서 그 죽음을  부부의 관계보다도 더 큰 일을 많이 겪어 두 사람이 사지의 전우가 된 그 결합은  그는 생사 결합이요 자기네들의 모든 움직임의 결합이기 때문에 아무리 좋은  부부라도 그 결합 속에는 뚫고 들어가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부부적인 애정 이건적인 그런 결합이 아니고 그것을 초월한 생명을 같이  했고 죽음을 같이 한 생사의 결합인 친구기 때문에 남녀가 아닌 같은 남자인  생사 결합인 그 친구입니다. 전우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우리와 결합되어 부부적 결합을 가지려는 것은  하나님의 신격과 우리의 인격이 하나되어 하나님의 모든 것을 우리가 다 우리  것을 삼을 수 있고, 또 하나님의 모든 사랑을 우리가 다 받을 수 있고, 나의 그  인격성을 돈에게보다 인간에게보다 자기 목숨에게보다 하나님께 기울여 바치는  요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몸보다 마음을 하나님에게 기울여 하나님과 항상 내  마음이 같이 있는 연습을 하고 이것이 습관화되고 이것이 본능화되어져서 자기  마음은 하나님과 같이 있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자기 마음은 움직이고, 자기  마음은 하나님에게 다 기울여지고 하나님은 모든 것을 자기에게 다 기울여,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그것과 결합하고, 또  하나님과 함께 그것을 관계 가지는 것이 이것이 신앙의 지조를, 신앙의 정조를,  신앙의 진실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여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라 하시기 때문에 가정을 가집니다. 부부의 애정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기 때문에 부부 애정을 가집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기 때문에  그 명령을 인해서 부부의 애정을 가집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가집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으로 인하여 하나님 때문에  가졌기 때문에 그것은 그 부부의 애정은 원인이 하나님 때문에 가졌기 때문에 그  애정은 세상과 세상에 있는 어떤 것이 그 애정을 끊으려고 해도 갈라뜨리려고  해도 가르지 못합니다.

왜?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게 됐기 때문에. 하나님의 명령으로 사랑하게 됐기  때문에. 하나님이 소원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셔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해서 하나님 위해서 가진 것이기 때문에 그는 세상이 해할 수 없고 그를  어떻게 멀어지게 나뉘어지게 하지를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 예를 들면 이와같이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접할 때에 이 모양으로  접합니다. 이 모양으로 접촉을 합니다. 이러기에 모든 것을 접한 것이 하나님이  아니면 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붙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시작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시작한 것을 하나님이 아니면 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절대가 없는 기독자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절대자와 같은  절대성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것이 기독자의 신앙 생활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악령이 강하지마는 악령이 근방에 오지를 못하고 악령이 아무리  손을 대 봐야 여기에 높아서 손이 닿지 아니하고 침해를 할 수 없는 이런 관계를  가지게 하려는 것이 주님이 우리를 구속하는 구속입니다.

요와 같이 양이 많든지 적든지 요와 같이 된 것만이 부활의 권능입니다. 무궁한  하늘나라에서는 요와 같이 된 것만이 부활할 때에 자기의 권능입니다. 부활할  때의 그 가진 권능은 피조물이 그 사이를 벌어뜨릴 수 없고 피조물이 어떻게 할  수 없고, 하나님과 하나되어 움직이는 그 움직임으로 모든 피조물을 상대하기  때문에 상대하는 것은 다 영생입니다. 그는 완전이요 그는 무한이요 영원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우리 마음이 하나님에게 나아가기를, 하나님과 같이 있기를, 내  마음의 절정이 하나님에게 기울어지기를, 하나님에게 나아가기를, 내 마음에  제일 주인이 앉을 내 마음의 보좌, 내 마음의 보좌에 주님이 와서 앉아 계시기를  요것을 우리가 노력하고 연습해야 됩니다.

이래서 우리를 가리켜서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렇게 말씀하셨고, 또 사랑하는  자가 거처하는 골방이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것은 자기 마음을 가리켜서  말씀했습니다.

바울이 말하기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 말씀은 자기의 마음자리 제일 높은 보좌에 주님이 앉아 계시면서,  주님이 왕으로 앉아 계시면서, 주님이 자기 마음에 주인으로 계시면서 주님이  자기 마음을 통치하고 계시기 때문에 자기 마음이 움직이는 것은 주님이 자기  마음 안에서 주님이 자기 마음을 움직여 움직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은 다  주님으로 인하여 움직이기 때문에 자기의 사는 것은 주로 인하여 사는 것이요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소욕이라 말은 성령이 자기 욕심에 주인공이 돼 가지고 자기 마음을  성령이 주관하기 때문에 자기 마음의 욕심이 성령의 욕심이 자기 마음으로  나오는 것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마음이 주를 향하여 찾아 주께 기울어져 내 마음의 사모가 주께  있고, 내 마음의 애착이 주께 있고, 내 마음의 섬기는 이 숭배성이 주께 있고,  주님이 나를 주장하고, 이리하여 주님으로 인하여서만 내 마음이 움직여지는  요것이 기독자의 정상입니다.

이럴 때에 그 사람은 실수할 수 없고, 이 사람은 약할 수 없고, 이 사람은  교만할 수 없고, 월권할 수 없고, 이 사람은 어리석을 수 없고, 이 사람은 어떤  것에게라도 피동되는 그로 인하여서 하나님과 멀어지는 이 음행에 빠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빠지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기에 주님이 요것을 원하시기 때문에  요 면이 이루어지지 안한 것을 하나님이 분하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하는  것은 요것은 주님과 요 정상 결합되는 요것을 말하고 “힘을 다하고” 하는 것은  몸의 움직이는 것을 가리켜서 말씀합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가룟유다가 마음은 딴 데 있으면서 주님에게 와 가지고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할 때에 주님은 주님을 잡아주러 온 그자가, ‘내가 이렇게  가서 손을 잡고 입을 맞추거든 그가 예수인 줄 알고 너희들이 잡아라’ 요렇게  암호를 서로 정해 가지고 와서 주님에게 ‘선생님 안녕하십니까?’ 하지마는  주님은 그를 버리지 아니하시고 후대했습니다. ‘형제여, 와서 볼일 너 할 일을  해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두지 안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 또 입술로 주여 주여 하는  것 이것이 마음이 주께 있어 주를 섬기지 안하고 주의 구속의 이 은총을 베푸신  주님에게 있지 아니하고 외부로 행동하는 것은 마치 가룟 유다가 주님을 향한  행동과 같은 성질의 행동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주께 기울이지 안한  이것을 총칭해서 외식이라, 겉어머리로 꾸몄다, 외식이라 말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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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0 주님 잊어버리면 환난온다/ 마태복음 14장 22절-28절/ 871126목새 선지자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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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님과 결합/ 요한계시록 18장 3절/ 810112월새 선지자 2015.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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