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7 15:05
신자의 생애 법칙과 결과
1984. 7. 30. 새벽
본문 : 마태복음 14장 22절∼33절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예수님은 기도하러 산에 따로 가서 계셨지만 제자들이 풍랑 만나고 어려움 당한 것을 아시고 그래 물위로 걸어오셨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를 떠나 계시든지 같이 계시든지 한가지입니다. 육체를 입고 계실 때에는 주님이 계시지 안하는 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영으로 계시고, 또 시간과 공간의 제한을 받지 아니하는 신령한 부활한 몸으로 계시기 때문에 주님은 지금 영과 육이 아울러 계시지 안하는 곳이 없고 신성과 인성이 다 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혹 다급한 일을 당하든지 의외의 일을 당할 때에 이 사정과 처지는 주님이 아시지 못하지 않겠는가 하는 그런 생각을 우리가 가져서는 안 됩니다. 우리야 어디 있든지 주님이 우리 사정을 다 살피시고, 당신이 말하기를 '내 손바닥에 너희들을 기록해 놓고 있다.' 그렇게 표현했습니다. 또 그보다도 신약 시대는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신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심을 알지 못하느냐' 성령은 내나 예수님의 영을 가리켜서 성령이라 이랍니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인데 그리스도의 영은 내나 예수님의 영이오. 예수님의 영이 성령이요 또 예수님의 영이 성부요 또 성부의 영이 또 성자요, 내나 한 분이 그 직분에 따라서 성부라 성자라 성령이라 이렇게 이름을 당신들이 표시한 것뿐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은 따로 계셨지만 제자들이 풍랑 만난 것을 보시고 찾아오셨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떠한 사정이든지 내가 알고 난 후에 주님이 오심이 아니고 알기 전에 주님이 오시고, 알고 난 후에도 오시고 언제든지 우리의 사정은 주님이 다 아시고 살피고 계속 관리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주님이 구약 때는 따로 계시고 관계가 있을 때만 와서 성도들을 외부에서 접했지만 신약 시대는 주님이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 밖에서 접하지 않습니다. 구약 시대의 영감과 신약 시대의 영감이 다릅니다. 구약 시대의 영감은 외부적으로 하나님께서 외부에 역사해 가지고 어떤 때에만 성도를 붙들고 역사하시고 또 그 역사가 끝나고 나면 성도들은 그대로 두고 또 성령은 따로 계시고 이랬지만 신약 시대는 중생될 때부터 내주 해 계셔 가지고 언제든지 같이 계시고, 마음과 몸이 배척을 하면 배척을 당해 가지고 우리 영에게 가 가지고 머물고 계시고, 환영을 하면 영에서 우리 마음으로 건너오시고 몸으로 건너 오셔 가지고 전능하고 전지한 그 능력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것은 구약 시대는 중생이 없고 우리에게는 중생이 있어서 그렇습니다.
구약 시대에는 중생할 만한 모든 준비는 다 갖추어 가지고 있고 가끔가다가 이래 때 만나서 역사하시지 안에 내주하시지를 않습니다. 왜? 그거는 예수님의 대속이 없기 때문에 아직까지 정죄 아래에 있고 해결이 되지 안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대속의 제물이 됐었을 때에 휘장이 갈라진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들 사이에 막힌 담이 헐어진 것을 표합니다.
그거는. 막힌 담은 죄가 막혔는데, 막혔던 그 죄가 해결됐다는 것을 표시해서 사람이 손대지 안하고 성전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갈라진 일이 있었고, 또 예수님이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 죽으셔 가지고 부활하시고 무덤 가운데서 부활하셨을 때에 자던 무덤의 성인들도 다시 살아났습니다. '살아났다가 예수님이 그 무덤에서 나와 가지고 거룩한 성으로 들어갈 바에 그때에 그 모든 성인들도 무덤에서 나와 가지고 거룩한 성으로 같이 들어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죄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그때에 해결됐고, 그전에 짐승으로 예표해 가지고 하나님의 계약을 맺어서 그 계약대로 하는 것은, 그것은 하나님의 참 어린 양이 와 가지고, 실상이 와서 대속을 할 때에 그 대속을 받을 수 있는 그 예비적 모형적 대속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주셨을 때에 하나님을 믿음으로 모형적 대속을 했던 사람들은 다 대속을 받을 수 있는 그런 희망이 있고 받은 그런 자의 은혜를 입었지만 대속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대형 했을 때에 사죄가 됐습니다. 그 전에는 사죄가 안 됐습니다. 아무리 짐승으로 아무리 제사를 드려도. 앞으로 그 드리는 것은 예수님의 그 대속을 향하고 그 대속에게 호소하는 것이고 대속에게 연결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구약 모든 성도들은 중생 문제라든지 영감 문제라든지 사죄 문제라든지 칭의 문제라든지 그런 문제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비로소 그것이 완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온 것은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고 율법을 완전케 하러 왔다.' 그 말은 율법에서 구약에서 약속한 그 모든 약속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가 부활하심으로써 예언 약속 그것이 완전 성취 됐다 하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고, 어제도 말씀했지만 여기서 뭣을 보이는 고 하니 베드로 이런 사람들은 다 과거에 어부들입니다. 어부 생활을 잘 합니다. 잘 하지만, 예수님을 만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전에는 세상 법대로 어부 생활을 했고 세상 법대로 어부 생활을 할 때에 그라면 고기도 잘 잡히고 뭐 바다의 어떤 풍랑이 와도 이리도 저리도 피하고 뭐 다 됐습니다. 이라지만 예수님을 일단 만나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난,다음부터 그 생의 방편이 다릅니다. 바다에 가서 고기 잡는 것도 옛날 잡는 거와 같이 그런 방식 가지고 잡아 가지고는 고기가 안 잡힙니다. 아무리 밤새도록 잡아도 고가 한 마리도 못 잡지 안했습니까? 또 여기서 아무리 노를 저어 봤자 그게 소용이 없습니다. 예수님을 만나서 제자 되고 난 다음부터는 주님이 시키시는 대로 해야 고기가 잡힌다 하는 것을 누가복음 5장에 말씀 해 놨습니다. 이러니까, 그 전에는 안 잡혔다 그 말이오. 또 여기에는 아무리 그 바다를 건너갈라 해야 가지를 못해.
이 바다는, 갈릴리 바다는 세상을 상징합니다. 세상에서 자기의 구원을 이루어 가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목적지로 주신 것은 우리의 구원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온전히 입는 것. 하나님의 영광의 찬미가 되는 것. 다 신령한 부활 할 수 있는 기능 구속을 입는 것이 우리의 목적인데 주님이 주시는 그 구원이 우리의 목적지요 종착지인데. 그 구원을 이 세상에서 이루어 가는데, 갈릴리 바다와 같은 이런 바다에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그 목적지에 가는 그것은 하나의 상징적으로 우리에게 보여서 주님이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으로 보여 주신 구원의 소망을 이루어 가는 데에는 예수님을 알기 전 세상 생활 하던 그런 생의 법칙 가지고는 안 된다 하는 것을 여기에 보여 줍니다.
이 제자들이 예수님 만나고 난 다음에는 처음에 출발할 때에는 주님 중심, 주님 위주와 주님이 명령하신 그 명령을 따라서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지 안하고 주님으로 인한 힘, 또 명령으로 인한 힘 그것이 저희들 마음 가운데 가득차 가지고 고 생각, 고 주의. 고 힘을. 고 마음을 가지고 항해하려고 할 때에 쑥쑥 나가서 배가 나갔습니다. 배가 나갔는데 나중에 나가는 가운데에서 배를 타고 노를 것은 그런 방편은 옛날 안 믿을 때의 방편인데, 안 믿을 때의 방편인데 안 믿을 때의 방편을 껍데기로는 쓰나 속에는 하나님 위주 하나님 명령 복종하는 거, 알맹이와 껍데기가 이중이 있다 말이오.
그러기에, 예수 믿는 사람이 안 믿을 때의 생활 같은, 안 믿는 사람과 같은 그 껍데기 생활 하는 속에 알맹이 생활이 있어요. 껍데기 생활만 해 가지고는 자기 구원이 안 됩니다. 그러기에, 껍데기 생활은 꼭 같은데 하나는 데려가고 하나는 멸망을 받았더라 그 말이오.
이러니까. 제자들이 노는 젓지만 노를 저어서 가느냐 주님이 가게 하셨으니까.
주님은 전지전능자요 창조주요 조물주시기 때문에 주님이 가라 했으니 주님의 명령 복종으로 갈라 하면 바다는 복종해서 가게 된다 하는, 주님을 생각하고 주님을 모시고 주님 위주로 주님의 명령 복종으로 이렇게 하면 배가 잘 가는데.
그라면서 노를 저었으면 노를 저음으로써 배가 가는 게 아니라 주님 중심과 그 명령 순종으로 실상은 배가 간다 그거요. 왜? 그것은 그들이 주님 잊어버리고 주님 명령 잊어버리고 나니까 노를 암만 저어 봤자 배가 못 갔다 그거요. 이것을 대구 집회에서 설교를 한 모양인데 어떤 사람이 편지 오기를. '노를 안 저어도 주님 중심 주님 위주만 하고 그렇게 하면, 노를 것은 그런 것은 하나의 하나님이 자연을 사용 하라고 그 자연법을 버리지 말라는 것으로 하는 것이지 그거는 슬렁슬렁 이래 해도 그 하나님이 역사하심으로 잘 갈수 있다' 하는 그런 말 했더니만 '안 저어도 어찌 가겠습니까? 안 저어도 가겠습니까?' 그 다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배 위에 올라서니까 뭐 노젓는다는 말은 없고 그만, 다른 데 보면 '목적지에 다 도달했다'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깨달아야 됩니다.
아무리 굼벵이지만 굼벵이는 그 지렁이가, 지렁이가, 어제 뭐 된다 했소? 지렁이가 뭐 텅아리 된다 하더나? 방우잽이 된다 했지? 메뚜기 방우잽이. 우리 목사님이 설교할 때에. 그것은 혹 그래 되는 게 있어도. 방우잽이 알이 있습니다. 메뚜기 그거 다 알이 있어요. 알이 있어 가지고 하지 처음에는 하나님 만드실 때에 그래 만들었고. 매미는 그것이 부화돼 가지고 그렇게 돼져요.
그러나 저도 그런 걸 봤는데, 방우잽이가 처음에 될 때에 보면 똑 지렁이가 되는 것 같습니다. 끄트머리 방우잽이 밑에 궁둥이는 똑 지렁이와 같아. 칸이 드문드문하이, 칸이 기단하이 이만치 기단한 게 차차 차차 기어 들어가요.
기어들어가 가지고 이래 가지고 되는 거 나도 많이 봤어요. 봤는데, 굼벵이가 매미 되는 것은 그것은 굼벵이 아니고는 매미 되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또 구더기가 안 되고는 또 파리 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면 구더기가 파리가 되는 것이든지 물벌레가 돼 가지고 모기가 된 다든지 이런 것은 다 부화되는 것인데. 부화 전과 부화 후가 거처하는 곳 도 다르고 생활 방편도 다르고 식물도 다릅니다. 굼벵이도 굼벵이로 있을 때에는 그것이 거처하는 곳은 땅속이라야 되지 땅 위에 나오면 죽습니다. 땅속에나 그리 안 하면 무슨 썩은 것 속에나 어쩌든지 속에 있어야 되지 태양 빛을 보면 죽습니다.
또 먹기는 거기에 있는 수분을 빨아 먹고 그래 사는 것이지만 매미가 일단 되고 난 다음에는 그런 거 속에 들어가면 즉시 죽습니다. 못 삽니다. 또 먹는 것도 이제는 그런 거 먹지 안하고 이슬이나 받아먹지 매미가 무슨 물벌레나 잡아먹거나, 무슨 버러지를 잡아먹는 것 아닙니다. 이슬만 받아 먹다가서 그만 끝을 마치고 마는 것입니다. 부화 전과 부화 후가 그 처소도 다르고 식료도, 다르고 생활 방편도 달라요. 잠자리도 그 잠자리는 물 버러지 외에는 잠자리되는 것이 없습니다. 전부 물벌레가 다 잠자리가 되는데. 잠자리되기 전에 물벌레로 있을 때에는 물속에 살고, 또 물속에서 이런 거 저런 거, 뭐 이런 버러지도 잡아먹고 그게 그랍니다. 이렇지만 잠자리가 되고 난 다음에는 물에 들어가면 즉시 죽습니다. 물에 들어가면 즉지 죽지만 그놈이 알을 슬을 때는 또 물에 슬습니다. 그러면, 잠자리가 날아 가지고 물속에 꼬리를 물에다가 살짝 살짝 대면 아이들은 모르고 '잠자리가 방아 찧는다.' 이라지만 그 꼬리를 물속에 대는 그때 알 슬습니다. 알을 슬어서 이래 놓고 가면 그게 물벌레가 되는 건데, 그 부화 전에는 물속에 살지만 부화하고 난 다음에는 물속에 들어가면 죽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택한 백성들이 중생되기 전에는 예수님을 믿어 중생되기 전에는 이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은 방편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야 됩니다. 세상 속에, 죄를 짓고 살고, 의롭게 못 살아요 택한 자도 안 믿는 사람은 전부 죄 속에 삽니다. 죄 속에 살지 안하면 못 삽니다. 죄 속에서 살고 있소. 뭐 어떤 의인이, ○○○○도 죄인 중의 죄인이오. 죄 짓고 살았소. 눈이 어두워서 그걸 몰라서 그렇지 죄 안 짓는 자가 없소. 전부 죄 가운데에 살고 있소.
죄는 어떤 게 죄냐 하면 하나님에게 대해서 바른 관계를 가지지 못한 그게 전부 죄라. 하나님을 부인했는데 무슨 죄가 아니라 말이오? 죄 안 지은 사람이 하나도 없소. 죄 가운데서 마귀 시키는 대로 살아야 살고 또 마귀에게 감화 받은 인간 생각대로 살아야 되고 이렇게 살았지만 일 단 중생하고 난 다음에는, 부화한 거와 마찬가지로 중생되고 난 다음에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됐기 때문에 옛날 안 믿을 때의 생활 하는 그 생활 방편을 가지고 하면 자꾸 망하기만 망하지 안 됩니다. 요거 꼭 알아야 돼요.
말은 말대로 들어 놓고 저거 행동은 나쁘게 하기 때문에 안 하기 때문에 효력이 안 나요.
아무리 택한 백성이라도 중생하고 난 다음에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 믿 다가서 무슨 은혜 받아 중생되는 것 아니오. ○○교 교리는 그랬는데 그 교리가, ○○교의 교리 틀린 교리가, 완전주의라고. 믿다가 완전해질 그 때가 중생된 때다 하는 이 중생론이 틀렸습니다. 성경에 그렇게 말 안 했습니다. 중생된 걸 사람들이 모른다고 말했어'. 모르지만 중생하고 난 다음에는, 그 행동을 보면 중생한 표가 난다 그렇게 말했습니다.
중생하기 전에는, 중생하기 전에는 마귀 법을 따라야 살고 죄 가운데라야 살고 죄를 먹어야 삽니다. 죄 안 먹으면 못 살아요. 이러니까 그만 중생되지 안한 사람은 죄만 먹고 삽니다. 죄만 먹고 살고 마귀 시키는 대로 만 합니다. 죄 아닌 거는 한 내끼도 못 먹어요. 죄만 먹고 살지. 죄 아닌 거 먹으면 죽어 버려요. 죄 아닌 거 먹으면 죽는다 그거요. 제 식료가 아니기 때문에, 죄만 먹고 살고 마귀 인도만 받아서 살지, 만일 그게 세상에 있으면서 마귀 인도 안 받으면 대번에 마귀에게 즉사 당한다 말이오. 또 죄악의 사람이 먹는 그 죄를 먹지 안하면.
그러면 대번 죽어 버려요. 그러니까, 인간 생각대로 인간 법칙대로 세상 사람들의 사는 법칙대로 사는 것은 다 마귀의 인도를 따라서 사는 것이고 타락한 그 원죄와 본죄의 그 죄인이 사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죄를 먹고 마시고 삽니다. 또 마귀의 인도를 받고 삽니다.
이렇지만 중생되면 그때부터는 딴사람이 됐기 때문에 중생된 사람은 그 사람이 아무리 예수 믿기 전에 세상적인 그런 생활 방편이나 박력이나 활동력이나 지능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하면, 그대로 하면, 어부들이 안 믿을 때의 그 어부 노릇 하는 것이 얼마나 능합니까? 그렇지만 그대로 하면, 어제 몇 가지가 이루어진다 했습니까? 첫째. 예? 골이 빠져. 녹아져. 저는 진액만 빠졌지 아무 소용없어. 골 빠지고, 또. 예? 둘째는, 근심, 걱정, 고통, 번민, 두려움. 예수 믿는 사람이 그거 아닌 거 있습니다. 저는 버리고 세상 법칙대로 나가서 어떻게 부유해졌든지. 어떻게 고관대작이 됐든지, 어떻게 존귀한 영광 명예 있는 사람이 됐든지 반드시 그의 전 생애는 근심, 걱정, 고통, 염려, 두려움 그것 빼 놓으면 아무것도 없소. 그것뿐입니다. 또 하나는 뭐입니까? 모든 걸 꺼꾸로. 자기를 구원하는 자기에게 유익된 거는 해로 여기고 해로운 거는 유익되게 여기고 전부 꺼꾸로 안다 그거요. 이거 사람 죽을 일 아닙니까? 또 하나는 뭐입니까? 예? 자기의 목적지에는 못 갔어. 우리로 말하면 자기 목적. 우리 목적은 구원인데 자기 구원은 한 내끼도 못 이룬다 그 말이오.
일생을 살아도 구원은 하나도 이루지 못하고 허송세월만 하고 만다 그거요.
믿는 사람이 중생한 후에는 곤충 이런 것들 다 부화하고 난 다음과 부화 전과 달라. 그러니까, 우리는 그 계란이, 계란이 생명이 있습니다. 계란이 살았소.
계란이 죽은 게 아니고 살았어. 무정란은 죽었지만 유정란은 계란이 살아 가지고 생명이 있어요. 속에 생명이 있는데 계란으로 있을 때에는 공기 좋은 데라야 삽니까 공기 밖에 나와야 삽니까? 그 계란 껍데기 속에 아주 꼭 틀어박혀야 삽니까? 예? 거기에 구멍만 뚫어 놓으면 그만 계란 죽어 버려요. 고 안에 숨도 못 쉬고 딱 고 안에 들어야 산다 그 말이오, 그렇지만 그것이 병아리로 부화하고 난 다음에는 그 안에 집어넣어 놓으면 당장 죽어요. 바깥에 나와야 되지.
이러니까 부화 전과 부화 후가 다르다. 기독자가 예수 믿기 시작한 전과 예수 믿기 시작한 후와 다르다 하는 요것을 똑똑히 명심해요.
뭐이 저 ○○○이라든가? 와 조불라요 조불기를? 이름이 ○○○이오? 예? ○집사 구역에, 이름이 뭐이요? ○○○이? 조불기는 왜 조불라? 그런 꼭 안 믿는 사람들의 방편 같은 그런 방편을 살면서 지금 살아야, 그래야 헛일이라. 돈은 모이고 집은 사도 헛일이라 그 말이오.
믿는 사람이 딱 중생하고 예수 믿기 시작하고 난 다음에는 생활 방편이 다릅니다. 생활 방편을 주님이 몇 가지로 줬다고 했습니까? 두 가지 줬어. 두 가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 위주로 하나님만 바라보고 하나님 의지하고 하나님만 좋아하고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 하면서 행동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주님의 계명 복종 주님의 계명 복종이라 말은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대로 복종하면 돼요.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대로 복종하면 돼요.
어리석습니다. 인간이 간판을 키우면 얼마나 키울 것이며 유명하게 되면 얼마나 유명하게 될 것이며 크면 얼마나 크겠습니까? 여러분들. 자기가 제일 천하에 제일 큰 일 하려 하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선생 자기가 천하에서 제일 큰 일, 자기에게 대해서는. 자기에게 대해서는 천하에 제일 큰 일 어떻게 하는 것이 제일 큰 일 하는 것입니까? 이 학생 한번 대답해 봐. 예? 개별 목적? 또 ○선생.
자기에게 대한 하나님의 뜻. 그것이 자기로서는 천상천하의 자기에게 대한 제일 큰일이요 중요한 일이요 귀한 일이요 값있는 일입니다. 요걸 알아야 돼요, 요걸 알아야. 뭐 큰 일이 자기. 하나님이 자기에게 하라 하는 고거 외에 큰 일이 있는 줄 압니까? 하나님이 이거 하라 하는데 이거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 앞에 영영히 없어지지 안할 일이 고 가치 있는 일이고 존귀한 일이고 만물이 다 환영할 일이고 제일 큰일이지 그거 놓고 '아, 정치 운동하자. 모두 민족 운동 하자. 문화 운동 하자.' 제까짓 게 아무리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있기를?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마귀란 놈이 다 꼬아서 속인다 그거요. '네가 그리스도로 더불어 다시 살리움을 받았으면' 중생 됐으면 '위의 것을 생각하라.' 위의 것 뭐? 하나님 생각하고 그 계명 지키는 것 주님은 두 가지밖에 안 했어요. 보내신 아버지를 생각하고 아버지의 시키는 대로 하는 거 그 두 가지밖에 안 했어요. 이랬는데 '아버지 우편에 계셨느니라.' 예수 믿는 사람이 어디서든지 중생됐다면 뭐 자기가 당장에, 하나님 중심으로 위주로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령하신 그 하나님의 법칙 하나님의 뜻을 찾아 가지고 그대로 하려 하면 당장에 직장이 떨어지고 당장에 가정이 뭐 파괴당하고 당장에 자기가 감옥소에 들어가고 당장에 죽어도 하나님 중심과 하나님의 뜻 복종하는 요것만 버리지 안했으면 죽었으면 속성을 했소. 하나나 손해 가는 줄 압니까? 이걸 하지 안하고 엉뚱하게 세상살이에 노 저은 거와 마찬가지로 세상 생활 하다가. 그만 세상 방편 쓰다가. 껍데기는 세상 방편. 속에는 성도의 방편 써야 되는데 성도의 방편은 내버려 버리고 세상 껍데기 방편만 하다가 껍데기화 되고마니까 결과가 뭐 됐습니까? 하나도 전진은 못 했고. 또 근심. 걱정, 고통.
두려움만 가졌지 뭐 했습니까? 아무것도 못 가져요.
그러므로 오늘 아침에는 중생된, 예수 믿기 전 생활 방편과 예수 믿기 전 처세와 믿은 후의 처세와 처세가 다르고 생활 방편이 다른 것을 알아야 됩니다.
또 먹는 것도 달라요.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 그랬어. 이러니까, 뭐 돈 많아야 잘 살 줄 압니까? 아니오. 중생된 예수 믿는 사람은 참 기쁘고 즐겁고 평안하고 행복된 그 생활이 따로 있습니다. 말씀을 들으면 자꾸 변화가 돼야 되지 변화가 안 되면 아무 소용없어요. 변화가 돼야 되지.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여기 온 사람들 왔다가 그냥 가면 헛일이라. 작정을 하고 가요 자 자기가 지금 중생 됐다고 생각해요 안 생각해요? 중생된 사람 손들어 봐요. 중생이 돼야 예수 믿어요. 다 중생됐어요. 중생됐어요.
그라면 우리의 생활 방편은 몇 가지입니까? 두 가지. 작정해요. 두 가지 안 하고 예수 믿기 전 안 믿는 사람들의 방편과 같이 그런 방편으로 살면 몇 가지가 이루어집니까? 네 가지, 네 가지 헛된, 골만 빠지고. 또 하나는 근심, 걱정, 고통, 번민, 두려움, 염려 조급 그 더러운 것만 이루어지고, 또 하나는. 셋째 뭐입니까? 셋째 뭐입니까? 꺼꾸로. 자 꺼꾸로! 꺼꾸로! 그 사람의 생각이 꺼꾸로 되면 미쳤소? 안 미쳤소? 예? 정신 빠졌지. 꺼꾸로면 망하는 거라, 꺼꾸로. 모든 걸 다 꺼꾸로 생각해. 사람 만나 가지고 무능한 거는 상관없소. 무능해도 그게 옳게 말하면 옳게 알고 틀린 거는 틀린 줄 알고 이라면 희망이 있는데 이거는 암만 말해 봤자 생각이 꺼꾸로라서 옳은 말 하면 뒤집어 듣고 가라면 안 가고 꺼꾸로 되면 그 희망이 없어. 꺼꾸로. 또 넷째로 뭐입니까? 자기가 한국 재벌이 돼도 고 생활 하면 자기 목적 자기 구원이라 하는 거는 털 끝 만치도 못 이룹니다.
그라면. 한국 재벌이 다 돼도 세상 떠날 때 그거는 다 두고 가고 자기 가지고 갈 거는 아무것도 없소. 홍포 입은 부자와 같이 돼져요. 그러므로 우리 생활은 두 가지라는 요것을 굳게 잡고, 이제 주님이 계시니까 '두 가지 요대로 살면 낭파가 되겠다.' 낭파가 돼야 죽지. 낭파가 돼야 주님과 진리를 위해서 낭파가 돼야 죽지. 죽어야. 뭐이 나옵니까? 죽으면 뭐 나옵니까? 이런 이거 참 부활이야. 죽어야 부활이 나오지. 뭐 생명은 무슨 생명? 죽어야 부활이 나오지.
이 두 가지 방편을 해 가지고 낭패와 실패 다 당하면, 이 이 두 가지 옳은 방편을 가지고 낭파 실패 당했으니까 낭파 실패 그거는 뭐이냐? 다 봐도 병든 것이기 때문에 수술하는 거라. 다 치료해서 끊어 내버리는 거라. 내버리고 그거 없애 버리고 이제 새움과 같이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부활에 속한 생명에 속한 것이 쑥 솟아 올라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