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자의 생애 법칙과 결과


선지자선교회 1984년 8월 5일 주전 

 

본문 : 마태복음 14장 24절∼33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 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오늘 이 말씀을 학생들에게 공과로 가르쳤습니다. 똑똑히 구별을 혹 못 하는  그런 일이 있는가 해서 아무래도 한 진리라도 확신을 가지고 잡아야 거기에서  능력이 역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님을 따라다니면서 여러 날 동안 은혜를 받던 중에 그들은 뭐 그때는 먹는  것이고 마시는 것이고 세상 일 다 모르고 그저 주님 한 분이면 족하고 주님이  말씀하신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그대로 복종해서 가는 그 판입니다. 그때에,  주님이 제자들에게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너희들은 앞서 바다 건너편으로 가라'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제자들이 그 말씀에 순종해서 지금 배를 타고 바다  건너편으로 갈라고 출발했습니다. 출발한 배는 순조롭게 수 리를 떠났습니다. 수  리를 육지에서 떠나고 난 뒤에 풍랑이 이르러서 그 배가 앞으로 가지를 못하고  심히 어려움을 당했습니다. 벌써 밤중이 되기까지 거기에 섰으니까 신강을  상당히 오랫동안 서로 신강한 셈입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물 위로 걸어오셔 가지고 오시니까 제자들이 보고- 유령이라  하는 것은 물귀신이라 말입니다.-유령이라, 이 물귀신이라 물귀신이 오니까  우리는 인제 다 죽는다 이라면서 그만 그들이 고함을 지르고 심히 놀래서  경거망동 했습니다. 주님이 그 소리를 듣고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안심하라' 이랬습니다. 안심하라 이러니까 그렇게 지금 죽겠다고 모두 다  놀래서 정신이 없는 그런 아주 위급한 가운데에도 유령이라고 했는테,  유령이라고 한 그 예수님께서 '내로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하는 주의 음성을  한번 척 들으니까 그만 그 제자들의 마음이 변해졌습니다. 변해져서 베드로는 뭐  풍랑으로 인해서 죽겠다. 두렵다, 이거 낭파다 하는 근심 걱정, 고통, 두려움  완전히 없어져 버렸습니다. 없어지고 하는 말이 '주님은 능치 못하심이 없으시고  또 주님은 저들의 소원을 들으시는 줄 알고 주여 주님이시거든 나도 그 물 위로  좀 걸어 오도록 그렇게 명하시옵소서' 주님의 명령 복종은 무엇이든지 다  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럴 때에 주님이 '오라' 아 이러니까 이제까지 풍랑에서 죽겠다고지 금 떨고  있던 베드로가 주님의 음성을 한번 듣고 난 다음에 '오라' 이러니까 그 풍랑  심한데 배에서 물 위로 척 내려섰습니다. 척 내려섰습니다. 내려설 때 그때에  베드로는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이라고 고함을 지르면서 죽겠다고 지금  놀라던 그 사람과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난 다음에 물 위로 걸어오라고  하십시오,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과 오라 할 때에 물 위에 착 내려 선 사람과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우리는 좀 생각을 가져야 하겠습니다.

 내려 보니까 아무 어려움 없이 배를 이렇게 물 위로 걸어서 갑니다. 걸어  가다가 걸어 가다가 갑자기, 여기에 성경에 기록하기를 그 풍랑을 봤다  이랬습니다. 이제 주님만 바라보고 주의 명령 순종으로만 딱 이렇게 다시 복구가  됐을 때 처음에 거기에서 출발 때와 같은 그런 복구가 됐을 때 옛날로 회복이  됐다 말이오. 복구가 됐을 때-그래서 이 복구가 얼마나 그리운지 해방 후에  복구파라 하는 파가 있습니다. 복구파, 복구파라 말은 신사 참배를 한 사람들이  다시 회개하고서 신사 참배 회개를 하고 신사 참배 안 한 그 사람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복구파라 그렇게 하는 복구파가 있었습니다.

 풍랑을 보고서 무서워서 또 빠져 들어갑니다. 그러니 그때 빠져들어 가니까  무서워서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내가 물속에 지금 빠져 죽습니다.' 이래 고함  지르니까 주님이 베드로가 구하자마자 즉시 손을 내밀어 건지셨다 이랬습니다.

그러면 여기 즉시란 말이 두번 있는데, 내가 그전에도 읽을 때에 즉시란 말을  특별히 높이 고성을 돋아서 그렇게 즉시! 이렇게 읽었는데 그걸 여러분들이  기억했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서워 소리 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우리에게  어려움이 있을 때는 주님은 지체하지 아니하시고 즉시 우리를 구원하시는  주님이시며, 우리가 또 여러가지로 답답해서 기도할 때에는 주님은 즉시 우리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이십니다.

 그라면서 베드로가 물 위로 걸어 왔다가 이제는 물속에 빠져 들어가는 그  이유를 주님이 설명했습니다. 설명하시기를 '믿음이 적은 자여' '믿음이 적은  자여' 그라면 믿음이 적다는 걸 보면 처음에 물 위로 걸어 올 때는 믿음이  많았고 지금은 믿음이 적게 되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그렇게 책망을 했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했느냐' 이라면서  손을 내밀어 그래 베드로를 붙들고 바다 위로 걸어서 배에 올라가셨습니다. 배에  올라가니까 그만 풍랑이 잔잔하고 배는 저절로 목적지에 잘 갔었습니다.

 오늘 다시 이것을 증거하려고 하는 것은 그 제자들이 내나 변하지 않는 갈릴리  바다 그 바다입니다. 바다는 우리에게 하늘나라를 향하여 가고 있는 이 세상을  자주 상징해서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그들이 갈릴리 바다를 건너서 목적지에  가는 요 한 토막은 우리에게 갈릴리 바다인 이 세상을 거쳐서 주님이 우리에게  명하신 하늘나라를 목적하고 가는 우리의 영주처를 성경에서 우리 구원의 이  길을 걷는 데는 어떤 사건들이 있겠다. 또 어떤 유혹들이 있겠다. 우리는 어떤  방면을 취해야 되겠다. 이래서 이 제자들로 하여금 짤막한 그 갈릴리 바다에  건너가는 거기에서 실패한 원인으로서 우리의 일생 실패를 거울삼아 가르쳐  주시고, 그때에 또 거기에서 실패에서 다시 회복된 그 회복을 가르치셔서 우리의  일생을 살아가는 가운데에 실패에서 회복되는 그런 도리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도 그 주님이요 주님도 변하지 안했습니다. 주님도 그 주님이요 또  제자들도 그 제자들입니다. 또 바다도 갈릴리 내나 그 바다입니다. 또 배도 그  배입니다. 또 노도 그 노입니다. 노를 젓는 그 젓는 식도 또 내나 그 식입니다.

처음에도 그래 가르쳐 저어 가지고 그 배가 항해했고 지금도 풍랑 올 때도 내나  그 식으로 지금 자꾸 배를 젓고 있습니다. 그랬는데 변하지 안한 것이 여기에  있었고 변한 것이 있었는데 우리 거기에서 변하지 안한 것도 우리가 하나의  모형적으로 구원 도리를 이 형식을 가지고 가르친 것이기 때문에 변한 것도  우리가 여기에서 참고로 삼아 가지고 연구해야 되겠고, 변하지 아니한 것도  참고로 삼아 가지고 연구를 해야만 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변하지 안했습니다. 주님은 변하지 안하고 또 제자들도 내나 그  제자들입니다. 뭐 그 제자들은 사람이 바뀌어진 거 아니요 내나 그  제자들입니다. 또 바다도 바꾸어지지 안하고 내나 그 바다입니다. 또 배도 내나  그 배입니다. 또 노를 젓고 있는 그 노도 내나 그 노입니다. 젓는 그 방식도  옛날 노 젓던 그 방식 그대로 노 저었지 딴거 없습니다. 이랬는데, 거기에  변한게 뭐 뭐인가? 변한 것은 변한 거 뭐이만 변했지요? ○○○집사님 한번 말해  보이소. 뭐이 변했지요? 학생들 살린다고 막 뛰돌아 다니면서 인도하고 그라면  피곤하긴 피곤하지마는 피곤해도 다른 사람 살리려다가 내가 죽으면 다른 사람  못 살리요. 내가 살아야 그 다음에 다른 사람들을 살릴 수가 있지.

 그리고, 주일 학교 반사들은 이렇게 심방하고 나서 주일 학교 마치고 나서  가까운 집의 사람들은 얼른 가서 아침 먹고 오자 하고 아침 먹고 오면 하고 아침  먹고 오면 그만 그 날은 실패입니다. 학생들 구원은 했을지라도 제 구원은  헛일이오. 그만 실패했어. 이러니까 될 수 있는 대로 밥을 해서 변할상 바르거든  냉장고 안에 넣어 놓고. 그리 안하면 보온밥통 하나 사 가지고 보온밥통에 넣어  놓고 이래 가지고 밥을 저녁에 넣어 놔요. 넣어 놓고, 그만 아침에 여기에 네  시나 세 시 반에 일어나 가지고 오면서 새벽 기도 오면서 그때 기도하면서 뭐  하나님이 축복하시면 맛이 있어요.

 나는 음식 먹는 거는 고급을 먹는데 고급을 먹는데 도무지 맛 없고 영양이  모자랍니다. 맛도 없고 소화가 안 되니까, 이런데 과거에 제가 이 전도사로 이  부자 부산에 오기 전에는 그저 여름이면 꼭 꽁보리밥입니다. 보리밥. 교역자  나서고는, 교역자 나서기 전에는 뭐 쌀 꽉 찼었습니다. 이렇지만 교역자 나서고  나서는 다 처분 해 버리고 없어 놓으니까 쌀도 없어서 여름에는 꽁보리밥입니다.

꽁보리밥이라도 아침에 해 가지고서 그 땐땐한 꽁보리밥을 갖다 놓고 그거 찬물  부어 가지고 뚝뚝 꺼내 가지고 뭐 반찬 아무것도 없어요. 된장, 고추나 더러  부질러 넣어서 찌져 가지고서 그만 나중에 이라면 뭐 참 아이들 말로 밥하고  장하고 인사 못 해요. 그만 그냥 밥은 밥대로 넘어가 버리고 장은 장대로 뒤따라  넘어 가고 이래서 먹어도 영양 부족이 없었습니다.

 아마 주일 학교 반사 선생님들은 아침에 '주여, 소화 잘 되게 해 주옵소서.'  하고 그만 그래 먹으면 뭐 냉장고에 넣었던 밥이라도 상관없어요. 그만 그래  가지고 물 부어서 이래 뚝뚝 꺼내 가지고서 한 술 먹고 그래 나서면 그만  됩니다. 그래 먹고 나서 여기에 예배 시간 전에 참석을 해 가지고 잠깐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 힘을 얻어 가지고 그렇게 하는 거 좋을 겁니다.

 주일 날 새벽에는 새벽 기도 나오는 교인이 반 수 밖에 안 됩니다. 그거는 그만  제가 길을 잘못 들여서 주일날은 특별히 말씀 받기 위해서 피곤하면 안 되니까  그 날은 좀 토요일날이라고 또 내일 주일 보니까 열두 시까지 또 망령되게 일을  하고 이래 놓으니까 피곤해서 그라면 새벽 기도 못 나와도 주일날 졸지 말고  말씀을 들으라고 이래 하기로 했는데 그만 그게 습관이 돼 그런지 새벽으로는  아예 안 나와요. 인제 그래 하지 마십시오. 주일날 새벽에 하나님께 은혜를  주십니다. 저는 대개 주일날 새벽에 이 주일 학교 학생 반사들을 위해서 이렇게  하나님 말씀을 증거한 거기에서 설교는 대개 그만 받습니다. 오늘은 무슨  설교하라고 딱 주님이 지적해 주십니다. 지적해 주시면 그저 기도나 하지 뭐  설교 준비는 연구하지 않습니다.

 이 제자들이 처음에 갈릴리 바다에 주님이 가라고 했을 때에 변한 것과 변하지  안한 것을 가만히 한번 연구해 봐요. 주님도 안 변했고 또 제자들도 내나 그 뭐  사람이 바뀌지 안했습니다. 내나 그 사람입니다. 또 갈릴리 바다도 내나 그  바다입니다. 배도 내나 그 배입니다. 노도 그 노입니다. 그들이 또 노를 젓는  것도 젓는 그 노 젓는 기술도 내나 그 기술입니다.

 이랬는데, 변한게 뭣 뭣입니까? 변해진게 뭐 있습니까? 잔잔한 바다가, 잔잔한  바다가 큰 풍랑으로 변해 버렸습니다. 그게 변했습니다. 또 그렇게 술술  항해하던 그 배가 그만 도무지 전진하지 안하고 딱 그렇게 머물러서고 있습니다.

그 배가 전진치 안하는 것이 변해졌고, 없던 풍랑이 일어나서 변해졌고, 또 그  다음에는 이 제자들이 기쁨이 충만하고 뭐 기쁘고 즐거워서 가정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고 기쁨이 충만했는데, 기쁨이 하나도 없고 기쁨의 반대 그만  근심. 걱정, 고통, 두려움으로 변해져 버렸습니다. 변해지고 이러니까 주님을  만나면 반가워서 좋아서 주님을 만지고, 이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 사람들이  주님이 오시니까 물귀신이라고 그만 예수관이 아주 변해 버렸습니다. 주님을  보는 것이 아주 눈이 변했어. 주님 보는 눈이, 그 구주가 오는데 구주를 원수로  봤으니까 그 눈이 변했다 그거요. 변해졌어. 자, 그들의 평안이. 그 행복이  말하자면 불행으로 변해졌고, 또 밝은 눈이 그만 꺼꾸로 보는 눈으로 변해졌고,  또 잔잔한 바다가 풍랑으로 변해졌고 또 술술 전진하던 배가 도무지 전진이 안  됩니다. 이게 변해졌습니다.

 몇 가지 변해졌습니까? 네 가지가 변해졌습니까? 네 가지. 하나는 하나는  잔잔한 바다가 풍랑으로 변해졌습니다. 요것을 단단히 기억합시다. 우리가  신앙생활해 나가는데 모든 주변에 환경의 그 전부가 다 우리를 옹호하고  응원하고 우리를 위해서 평탄하게 이렇게 평온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그것이 갈릴리 바다에 풍랑 없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이것 뭐 전쟁이라든지  이런 무슨 환난이라든지 가정에서든지 가정 밖에서든지 여러 가지 환난이  일어나는 것을 가리켜서 바람으로, 심한 것은 폭풍으로 이렇게 성경에다가  비유해 놨습니다. 그러면 잔잔한 바다가 아주 풍랑으로 변해졌습니다. 또  제자들의 행복이 불행으로 변해졌습니다. 또 그들의 모든 시각이 보고 깨닫는 그  시각이 변해졌습니다. 또 그들의 목적의 전진은 처음엔 전진하다가 하나도  안하는 것으로 변해졌어. 이 네 가지가 변해졌어.

 이 네 가지가 변해졌는데 이 네 가지를 우리 신앙생활에서 한번 생각 해  보십시오.

 내가 사업을 하는데 사업이 순조롭게 좋았는데 사업에 그만 자꾸 이런 환난  저런 환난. 이런 재난 저런 재난. 이런 풍랑 저런 풍랑. 이런 어려움 저런  어려움이 자꾸 생겨진다 그 말이오. 내가 사업할 때 그때는 순조롭게 사업이  어떻게 잘 돼 나가는지 술술 잘 돼 나갔는데 잘 돼 나가던 이 사업에 이거 똑  바람이 이는 것 모양으로 큰 자꾸 환난이 어려움이 닥쳐온다 그거요. 또, 내가  직장 생활 할 때에 그저 그저 솔솔 모든 사람이 좋아하고 옹호하고 찬성하고  이렇게 좋아하던데 그만 그 직장에서 그만 마찰이 돼 가지고 자꾸 훼방을 하고  대립이 되고 여러가지로 자꾸 애로가 생겨집니다. 그런 거 다 풍랑이라. 애로가  생겨지는 것. 또, 자기가 학교에서 뭐 학교 직장을 가지든지 장사를 하든지  뭐이든지 하는데 그저 참 순풍에 돛단 거와같이 슬슬 이렇게 자꾸 성장되고  전진되고 향상되고 자꾸 부강해지고 이래졌는데 그만 그 일이 안 되고 그만  환난이 자꾸 일어난다 말이오. 환난이 일어나는 거 그게 내나 이 풍랑 일어나는  거와 같은 것입니다.

 그럴때에 또 하나는 제자들의 마음이 행복에다 영 불행으로 바꿔졌습니다.

이러니 처음에 사업할 때는 아주 재미도 있고 즐겁고 해서 사람도 후한 사람이  되고 선한 사람도 되고 다른 사람과 싸울 것도 없고 뭐 어떻게 모두 다 사람들이  전부 위하는 사람마다 자기를 위해 주고 이러니까 사업이 참 순풍에 돛단 듯이  됐는데, 이제는 거기에 마찰이 있다 보니까 고만 원수도 생겨지고 걱정도  생겨지고 고통도 생겨지고 이제 이 근심 걱정이 자꾸 생겨집니다.

 뭐 그래 가지고 사업이든지 자기 직장이든지 또 자기 무슨 어떤 일이든지,  목회자면 목회든지 뭐이든지. 뭐 목회자나 장사꾼이나 공장을 하는 사람이나  무슨 자선 사업하는 사람이나 또 공직에 있는 사람이나 또 무슨 학계에 있는  사람이나 뭐 연구하는 사람이나 연구하는 사람도 자기가 연구하니까 연구가 척척  잘 돼서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고 이거 아주 높이 등용해서 자꾸 유명해 지고  자꾸 형통해지고 이래 되어지는데 이제는 뭣이 연구할라 하니 연구도 잘 되지도  안하고 해 놓으니까 그만 자꾸 방해가 있어 가지고서 이제 밑천도 못 찾겠다.

말이오. 그런게 다 뭐이냐 하면은 그러니까 고통될 것 아닙니까? 그러니까 근심  걱정 고통이 된다 말이오. 행복이 변해서 고통이 되어지고 사업하는 사람에게 그  즐거움이 없어지고 근심으로 돼져 버리고 고통으로 돼지고 염려로 돼지고 이렇게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하게 하는 사람이 이제 저 놈 때문에 안 된다, 원수가  많고 복수자가 많고 대적이 많고 이러니까 자연히 자기 마음도 그렇게 악해진다  그거야. 그런 것이 이 제자들이 평안이 불행으로 변해 진거와 꼭 같은 것입니다.

꼭 같애요  이러니까 갈릴리 바다는 내나 그 바다요, 갈릴리 바다는 변하지 않지만 갈릴리  바다는 이 세상을 말한 겁니다. 이 세상은 변하지 않고 이 세상은 내나 그  세상이지마는 그 세상이지마는 이렇게 고만 여러가지 자꾸 재난이 일어난다  말이오. 세상은 그 세상이지마는 풍랑이 뭐인지 고것을 여러분들이 새겨서  풍랑이 일어난다 내 사업에는 지금 풍랑이 일어나고 있다, 내 직장에는 풍랑이  일어나고 있다, 내 지금 또 이 무대에는 풍랑이 일어나고 있다. 내 행정에는  풍랑이 일어나고 있다, 내 정치에는 풍랑이 일어나고 있다. 정권을 잡았는데  술술 되다가 풍랑이 떡 일어난다 말이오. 뭐이든지, 뭐 정권자든지 공직자든지  또 그리 안하면 상인이든지 이런 가게 구멍가게 차린 사람이든지 남에게 가서  날품드는 사람이라. 날품드니 이 사람도 일해 달라 저 사람도 일해 달라  이랬는데, 이제는 일해 달라 하는데 자꾸 다른 사람이 삣고 깎습니다. 그 사람  이중의 사람이고 신용 못 한다 안 된다, 자꾸 허는 사람이 있어 놓으니까 일하는  사람이 도무지 일터가 나지 않는다 그 말이오. 그런게 다 뭐이냐 하면은  풍랑이라 말이오.

 그런 걸 일면 그 사람에게 근심됩니까 고통 됩니까? ○○○씨, 근심되지.

○○○씨 지금 꽃 장사하는데 꽃 장사도 다른 사람들이 모두 술술해서 아따, 이  꽃 이거 어데서 참 좋다고, 또 이 집에서 사오니까 꽃이 좋아 꽃이 헐 해.

어쨌든지 자꾸 고게 실실 사람이 오는데 나중에 가서 그만 풍랑이 이르는 것은  와 가지고 조금 뭐 잘못된 것도 아닌 것도 와 가지고 트집을 뜯지 뭐 비싸다고  트집 뜯지. 이 사람이 트집 뜯지 저 사람이 트집 뜯고 하니까 자꾸 소문이 나  가지고 그만 안 된다 그거야. 그러니까 ○ 집사님이 이 처음에는 장사하다가  좋지마는 고통이 될 거라 말이오. 근심, 고통이 돼 모든게 다 그렇습니다.

 이제 풍랑이 일어나고 그 다음에는 고통이 오고 그라고 난 다음에는 셋째는 뭣  됐습니까? 모든 시각이 거꾸로라. 이 생각 거꾸로라 하는 것 그것 참 못 할  일입니다. 사람을 지도해 보지 안한 사람은 그것이 큰 문제인 줄 그렇게  모릅니다. 이렇지마는 사람을 지도해 보면 고거 꼭 요래 해야 되는데고 고집을  피워 가지고, 옳은 지도를 하면 되는데 제 생각에 그래서는 안 되겠다. 싶으니까  암만 말해야 안 듣습니다. '네가 이라면 망한다, 봐라.' '아이구 망해도  좋습니다.' 망해도 좋습니다. 이라고 뒤에 망해도 그 뒤에 또 지도하면 또 안  들어요. 안 듣고 말하기를 '내가 뭐, 이렇게 지금은 내가 그 소리 많이 안  들었는데 그전에 조사로 있을 때에 저 시골에 있을 때에 조사님이 시키는 대로  안 하면 의례히 내가 망할 줄 압니다. 반드시 이거 안 되고 손해 갈 줄 압니다.

'그래도 나는 안 할랍니다.' 망한 걸 경험하고 체험하고도 안 하려고 이를 갈고  꼬박꼬박 반항을 합니다. 그거 왜 거꾸로 깨닫고-옳은 깨달음과 옳은 감동, 그  엘리사가 영감을 구한 것뿐 아니라 우리도 영감 구합니다. 성령이 와서 내  마음에 성신의 감동된 마음, 성신의 감화된 생각, 성령의 감화된 욕심. 성신의  감화된 그 방법, 성령의 감화된 취미, 성령의 감화된 모든 평가, 성령의 감화가  와 가지고 된 것은 참 좋고 옳고 영원히 가도 갈수록이 더 가치 있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이 생각이 거꾸로, 세근이 거꾸로 돼. 생각이 거꾸로 돼. 고만 그  이상 더 불행이 없습니다. 제자들이 보니까 왜 자기 구주를 보고서 물귀신이라  합니까? 이 보고 깨닫는 것이 영 다르지 않습니까? 그런 것을 우리에게 가르친  것이라 그 말이오. 시각이 거꾸로 되면 그 사람 그만 망합니다. 또 자기가 뭐  하는데 벌써 방해물이 많으면 망합니다. 안돼요. 풍랑이 많으면 안돼요. 그렇게  되면 자기는 그만 근심 걱정에 싸여지고 이러니까 근심, 걱정, 고통에  싸여지니까 사람은 자꾸 마음이 작아져요. 좁아지고 작아지고 견해가 자꾸  꼬여지고 계산이 안돼요. 이러니까 모든 시각이 거꾸로 될 수밖에 없어.

 보면은, 요 말씀을 자세히 듣고 가서 봐요. 자기가 저를 봐서 모르거든 남을  보면 알 수 있어요. 저 사람은 지금 순풍에 돛 단 듯이 아주 순조롭게 배가  항해하고 있느냐. 풍랑을 지금 만나고 있느냐? 또 저 사람은 지금 평안하고  있느냐, 근심 고통이 가득히 싸여 가지고 있느냐? 저 사람은 지금 무슨 모든  견해가 지금 착각을 일으키고 그 모든 견해가 정상이 아니고 비정상이라 그렇게  되어 있느냐 알 수 있다 그 말이오. 그리고 자기의 목적은 하나도 달성하지  못합니다. 전진이 안돼. 항해가 안돼요. 그러면 배가 자꾸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거든. 그게 다 변해겼어. 그게 다 변해졌습니다.

 변해졌는데, 변하지 안한 것 또 한번 쳐 봅시다. 변하지 안한 것. 뭐이 변하지  안했어? 갈릴리 바다는 그전에 그 바다입니다. 갈릴리 바다는 내나 그 바다요  제자들도 내나 그 사람들이요, 또 배도 그 배, 노도 그 노요 젓는 기술도 내나  그 기술이요, 그랬는데 이 고장이 어데서 나왔습니까? 이 고장이 어데서  나왔습니까? 요 고장을 찾자 그 말이오. 요 고장을 찾는 것이 우리의 모든 어떤  처지와 어떤 분야에서 살든지 자기에게 일어나는 고장이 있으면 그 고장의  원인이 뭐인가 그 원인을 찾는 것이니까 요 원인을 찾아 가지고 하면 그만  됩니다.

 이것 다 이랬는데 변하지 안한 것, 바다가 변하지 안했고, 제자들도 내나 그  제자들로 변하지 안했고, 배도 변하지 안했고, 노도 변하지 안했고 모든 것  변하지 안했는데 뭐이 변했어? 주님도 변하지 안했고, 주님도 변하지 안했어.

내나 그주님이시오. 변한 거는 무엇이 변했습니까? 자, 변한 것 요걸 한번  발견하십시오. 변한 거 뭐인지? 뭐이 변했습니까? 이것 모르는 사람은 자기 이  신앙생활을 해 나가다가 바람이 일든지 또 근심 걱정이 오든지 모든, 자기가  자기를 봐도 자기 생각이 꼭 이렇다 싶었는데 나중에 가서 보니까 그 생각이  틀렸거든. 사람이 무엇을 정평 정가한다고 자기가 평가하고 자기가 비판한 것이  그것이 뒤에 오판이 되고 오평이 돼 버리면 한번 두 번 끌어 박아 놓으면 자신이  없는 사람이 돼 버려요. 그만 자신이 없어서 아이구 내가 내 생각을 도무지 믿을  수 없다, 자신이 없다 자기가 자기에게 신용을 잃어 놓으면 그게 제일  불행스러운 사람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신용 잃어버린 것보다 자신이 없는  사람이 제일 불쌍한 사람입니다. 요것이 한번 딱 생각해 보면 그대로거든 계획의  그대로거든 판단의 그대로거든 자신이 있다 말이오. 자신이 있으니까 누가  말해도 자신이 있어. 자신이 있어 용감스럽게 자신이 있어 해 나갔는데 나중에  보니까 자신 있는 그대로 딱 들어맞았거든 그러면 자꾸만 그 사람이 용감스럽고  담대하고 능력 있는 사람이 돼지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여기에서 변한게 뭐인지, 오늘 오전에 지금 전하는 거는 요거 변한  것을 고걸 우리가 찾아야 되겠다. 고 변한 것이 무엇입니까? 네, 변한 것은 변한  것은 두 가지가 변했습니다. 두 가지가 변했는데, 한 가지는 뭐이 변했느냐  하면은 이제 차차 차차 노를 젓는 이 가운데에서 고만 주인이 바꿔졌습니다.

주인이 바꿔졌어. 그러면 중심이 바꿔졌다 말이오. 이제 그때는 주님뿐이요,  처음에 올때는 주님뿐이라. '아. 주님이 저 건너편에 앞서 가라 하더라. 또 앞서  가면은 무슨 기이하고 신기하고 좋은 일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주님으로 기뻐  즐거워서 은혜 받고 가다가 주님으로 그들 속에 가득히 찼었는데 차차차 노를  젓는 가운데서 주님은 차차 차차 멀어지고 자기네들이 고만 자꾸 나타나게 됐다  말이오. 이러니까 주님이 그 주인이 되지 못하고 자기들이 주인이 됐습니다.

 이러니까 그전에는 주인 따라 다닐 때는 뭐 주님이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오고 죽으라 하면 죽고 뭐 다 주를 위해서 다 죽기도 하고 감옥에도 갇히고  뭐이든지 다 하겠습니다. 다 그렇게 한 사람들이야. 이러니까 완전히 주님이  주인이었지마는 이제 그 배 타고 가는 가운데에 그렇츰 짤막한 시간 가운데에  그만 자기들도 모르게 조심하지 안하니까 주인이 바꿔졌다 말이오. 주인이 내나  옛날 주인이 주인이 돼 버렸고 주님이 주인이 되지 안했어. 주님이 주인이 되서  주님 중심 위주가 됐으면 되는 건데 출발할 때는 그랬는데 이제는 저희들 중심,  저희들 위주, 그만 주인이 저희들이 주인이지 주님이 주인이 아닙니다.

 그 다음에는 뭐이 바꿔졌습니까? 그 다음에 뭐 바꿔졌어? 배우지 안했어 뭐?  뭐이 바꿔졌어? 처음에는 주님이 가라 하는 주님의 말씀의 지식만 가득히  찼었는데 이제 지식이 바꿔집니다. 처음에는 주님이 가라 하니까 지금 그 지식  가지고서 노를 젓고 갔는데 이제는 그 지식이 자기네들 그 수단 방법, 과거에  경험 체험, 또 유전해 내려오는 지식, 이제 어부 노릇하던 그 지식 가지고 지금  배를 자꾸 이렇게 운행을 하려고 하니까 자꾸 풍랑은 심해지고 안 갔다 그  말이오.

 이러니까 그런 가운데서 이 배도 변하지 안했어. 배도 변하지 안했는데 그거는  자연입니다. 우리가 자연을 이런 자연 저런 자연을 사용하는 자연은 신자들도 그  자연 사용하고. 또 불신자도 그 자연 사용하고 자연을 사용하는 그 자연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사업도 하고 저 사업도 하고 이  직장도 가지고 저 직장도 가지고 성경에 위반된 그 직장이 아니면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와 가지고서 '이래 공부를 하는데 또 시험 치는 거는 꼭 주일날만  시험치니 이거 주일날 시험을 쳐야 됩니까, 안 쳐야 됩니까?' 이라기 때문에  '치라 해라. 시험을 치라고 해라.' 이랬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물으면 '아.

시험을 치랍니까, 안치랍니까? 아무래도 쳐서는 안 되겠지요?' '그래, 치지  말아라. 안 쳐야 되지.' 그렇게 찰 수 밖에 없어  이 주일날 주일날 시험치는 것을 하고. 이렇게 주일날만 이렇게 시험치는 일을  하니까 고거는 학교 교실 이용하려고 하는 것인데, 그까짓 거 교실 이용 안 할라  하면 어데 그 빈 들판이라도 하면 될 터인데 여기에서 정말로 나라에 참말로  국충은 국충되는 사람은 쏙 빼 버리고, 이미 한번 그 나라의 백성으로서 한번  직책 맡았으면 하나님의 법에 위반되지 안하는 이상 자기는 생명을 내걸고  충성을, 요런 국충 진충의 인물들은 쏙 빼 버리고, 예수 믿는 사람 가운데서 뭐  진리고 신조고 교리고 상관없이. 돈에 따라서 이리저리 얼마든지 변동될 수 있는  고런 인물만 총총 추리고 안 믿는 사람에게 어떤 인물 고런 인물만 추리고  고것이 우리 교회에 큰 복덩어리를 이제 탁 깨트리는 것이라 나는 그렇게  봅니다.

 여기에 지금 정보부에서 누가 와 있는지 모르겠어. 누구든지 요것을 말을 해  주면 좋겠어. 그 시험치는 장소 문제라. 장소 문제보다 인물 등용이라 하는게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데, 인재 양성이 얼마나 중한 문제인데 이러니까 그 돈이  없어도 그런 장소면 천막이라도 쳐놓고 시험치지 뭐 하면 될 것 아니요?  이랬는데. 고 주일날은 그 선생들이 다 모두 놀고 이러니까 좋고 교실도 비고  있으니까 좋다. 고런 손톱 밑에 배 접 난 것 그 때끼 때끼한 배접 난 고것만  알고 염통에 쇠를 쓸었으니까 그만 죽는다 말이오. 쇠 쓸었다 그 말은 벌써  바이러스균이 염통에 벌써 접했다 말이오. 그라면 죽는 거라. 이 큰 거는 모르고  작은 것밖에 몰라요.

 그래, 이제 직장 무슨 직장인데? 그 직장에 갈라 하는데, 그 직장에 갈라면  주일날 시험을 치는데 그러면 우리 신자들이 사용할 수 있는 자연입니까  아닙니까? 자연 아닙니다. 그거는 안 해야 됩니다. 주일 날 시험 쳐 가지고  어떻게 나가고 그거는 안 쳐야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는 것은 어떤 거라도 다  할 수 있습니다.

 이러니까, 요 배는 변하지 안했습니다. 노도 변하지 안했습니다. 바다도 변하지  안했습니다. 제자들도 변하지 안했습니다. 내나고 사람들이라. 또 노 젓는  기술도 변하지 안했어.

 안했는데, 뭐이 변했느냐? 잔잔한 바다가 풍랑의 바다로 변해졌고, 기쁘고  평안이 충만, 기쁨이 충만한 제자들이 근심, 걱정, 두려움으로 가득하게 차서  변해져 버렸고, 모든 비판과 평가의 견해가 변해져 버렸고, 견해가 변해져  버렸고, 또 그렇게 술술 잘 가던 배가 도무지 항진하지 안하게 돼 버렸고,  여기에 변해겼다 말이오.

 이러니까, 뭐이 변해 그런 건가? 변하기는, 변하기는 그것들은 따라 변했지  그거 먼저 변한 거 아닙니다. 변한 것은 제자들에게 주님을 중심해서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나는 주의 것이라. 주님이 죽으라면 죽고 살라 하면 살고 나는  주의 것이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 중심 주님 위주로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 주님이 말씀하신  그 지식, 그 지식을 가지고서 주님이 가라 했더니 간다. 만일 풍랑이 일었으면  그때 우리가 뭐 노 저어 가나? 주님이 가라 했어. 풍랑 네가 우리 주님이 가라  하는 이배를 못 가게 네가 막을 수 있느냐? 물결아, 이 풍랑아, 호령쳤으면 그  풍랑이 당장에 팍 꺼꾸러져 버렸어. 팍 거꾸러진다 그 말이오. 주님이 누구신데,  주님이 우리를 배 타고 건너가라 했는데 풍랑 네가 막아? 네가 막을 수 있어?  어떤 분의 명령인데 네가 막아? 막을거야? 잔잔하지 않느냐, 바다야 잔잔하라.

대번에 딱 잔잔했을 거라 말이오. 알겠습니까?  이랬는데, 벌써 주인이 바꿔졌고 지식이 바꾸어지니까 뭣이 바꿔집니까? 뭣이  바꿔집니까? 주인이 바꿔졌으니 주님이 쫓겨 나가야 돼. 진리가 바꾸어지니까  그만 또 권능이 쫓겨 나가야 돼. 이러니까 지식이 바꾸어지면 제가 주인됩니다.

지식이 바꿔지면 당장 죄가 와서 왕 노릇합니다. 지식이 바꿔지고. 또 주인이  바꿔지면 무엇이 와서 왕 노릇합니까? 뭐가 와서 왕 노릇합니까? 주님이 주인이  안 되고 제 자신이 주인이 되면 무엇이 와서 왕 노릇합니까? 예? 예? 악령.

악령.

 이러니까, 주님이 주인이요 진리가 저희 지식이 되었을 때는 지극히 큰 능력이  동행하니까 바람이 뭐 어떻게 거슬릴 것이요? 뭣이 방해를 할 것이요? 기쁘고  즐겁고 평안했지요. 이러나 요 두 가지가 바꾸어졌을 때에 기독자는 능력이  없어집니다. 능력이 사라집니다. 자기가 어떤 그 처지에 이르렀을지라도 주님을  자기 주로 모시고 자기는 주의 것이라. 주님이 자기 안에 생명으로 권능으로  자기 주로 모시고 주의 말씀의 이 말씀을 말씀의 지식을 자기가 변동하지 안하고  요 지식과 주님과 요 둘을 모시고 주님을 위해서 이 말씀대로 복종하는 요것만  가지고 있으면 요걸 했을 때는 지극히 큰 능력이 동행하기 때문에 만물이 아무리  버퉈도 소용이 없습니다.

 다니엘이 버퉈 가지고서 온 전국을 이긴 그 능력은 그 속에 지극히 큰 능력이  들어서 그렇게 한 것입니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불미 속에 들어 갔지마는  불이 태우지 못한 그것은 그들이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극히 큰 능력이  그들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태우지 못해 잡아넣었지마는 아직까지 생명이  남아 있는 날이 있는데 불이 못 태워 죽인다 그 말이오.

 그런고로, 우리는 요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모든 자연은 우리가 쓰는  데에 믿지 아니할 때에는 자연을 쓸 때에 자기 위주 자기중심으로 또 인간  생각대로 자연을 사용했습니다. 인간 생각대로. 고것이 불신자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자가 되고 난 다음에는 주님 모시고, 주님 위주로, 주님  중심으로, 주의 명령 복종으로. 주님 중심, 주의 명령 복종, 주님이 저희들의  주가 되시고 주의 명령 복종 요 두 가지만을 가지고 있을 때에는 지극히 큰  능력이 함께 하십니다.

 무슨 능력이? 하늘과 땅의 것을 다 상속받으신 예수님의 인성의 능력과 영원  자존하신 주권자이신 신성의 능력과 또 그 영감과 진리 영감도 하나님이시요  진리는 인격 존재는 아니지마는 모든 것을 없는 가운데에 창조한 지극히 큰  독자적 권위를 가진 이 진리인데 진리의 능력, 능력이 속에 가득 차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배는 무사히 자꾸 항해를 했었는데 이제 그 속에 두 가지가  바꾸어지니까 두 가지가 바꾸어지니까 두 가지는 쫓겨나가야 됩니다. 두 가지를  바꾸니까 두 가지를 쫓아냈습니다. 두 가지를 쫓아내니까 두 가지가 들어와서  주인공이 됐습니다. 이 두 가지를 바꿔 놓으니까 누가 쫓겨 나가겠습니까?  주님과 진리는 쫓겨 나갑니다. 우리에게 자유권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 자유를  박살시킬 수가 없기 때문에 우리가 부정하면은 할 수 없이 주님은 밀려 나가야  되고 진리도 밀려 나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문을 두드리노니 문을 열어 달라' 하는 것은 강제로 들어올  수가 있지마는 우리에게 자유성이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유기적으로 우리가  원하고 원하는 자유성을 가지고서 환영할 때에 주님이 우리 안에 와서 역사 하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요 자연과 또 방법과 이 방법에 둘이  있는데 한 방법의 결과는 사망이요, 한 방법의 결과는 생명과 평강이 되는  것인데 그러면 이 방법이나 저 방법이나 자연은 같은 한 자연이다 자연은 한  자연이다. 배도 내나 같은 배다. 처음에 그 배가 그 배요 나중에 그 배가 그  배라. 노도 처음에 그 노요 나중에 노도 그 노라. 기술도 그것이라. 바다도 그  바다라. 이랬는데, 변한 것은 뭐이냐? 변한 것은 그 제자들의 심령이  변했습니다. 제자들의 심령이 변했어. 제자들의 심령이 변하니까 이제는 사람이  변해져 버렸어. 사람이 변해지니까 사람이 변해지니까 사람의 주인이 변해  버렸어. 주님이 자기 주인인데 주님이 자기 주인 되지 안하고 마귀가 자기  주인이 돼 버리고 말았다 말이오. 또 진리가 저희 지식의 법칙이 아니고 이거는  인간 지식이 법칙이 됐기 때문에 그건 다 비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제 하나님의  지식으로 자기 지식을 했을 때에 거기에는 빛이 있고 의가 있고 죄는 용납지를  못합니다. 그러나 지식을 인간 지식으로 자기 지식을 삼았을 때에는 그만 즉시  죄의 종이 되고 맙니다. 지식을, 하나님의 지식을 인간 지식으로 바꾸면 죄의  종이 되고 하나님 주인을 마귀 주인으로 바꾸게 되면 이거는 그만 사망이  됩니다.

 이러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내 주로 삼느냐, 내가 내 주가 되느냐? 주인을  자기가 자기 주인이 되면 즉시 마귀의 것이 돼 버리고 자기가 주님의 것인데  주님이 자기 주인이 돼 버리면 이는 주의 것이 되니까 거룩한 자의 것은 썩는데  이르지 않습니다. 사망에 이르지 않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요것을 단단히 기억해서, 여기에서 모든 자연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이 모든 자연을 사용하되 그것을, 주님을 주인으로 주님의  지식을 가지고서 자연을 사용할 때에 모든 땅 위에 있는 자연은 그것이 뭐이  됩니까? 하나님의 선물이 됩니다. 선물 이런데 이 둘을 바꾸어 가지고서 지식을  바꾸고 주인을 바꾸게 되면 세상에 있는 화려한 이십 세기의 문화는 뭐이  됩니까? 뭐이 됩니까? 음녀! 음녀가 돼요. 이 세상에 이십 세기의 모든 지식을  이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용하라고 주신 지식인 줄 알고 이 지식을  이용하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그러나 이 지식에게 복종하려고 하면은  벌써 그 사람은 음행의 포도주가 되고야 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간단한 요 형식 계시에서 우리는 여러 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답답한 것을 모르지 않습니다. 떠나 있지 않소.

우리의 사정을 언제든지 보고 계십니다. 보고 계시고 뭐 지체 않고 즉시, 이런데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요 두 가지를 예수 믿기 전에 중생된 사람들은 중생 돼  가지고 예수 믿기를 시작한 사람들은 벌써 법칙이 다릅니다.

 물 속에서 나온 구더기가 파리가 됐지마는 그 부화되고 난 다음에 파리가 물  속에 들어가면 그만 죽습니다. 이런 데서는 잘 모르지마는 시골에는 그전에  유리로 파리통 만들어 놓은 것, 파리통 만들어 놓은 것 있는데 그 안에다 밥을  넣고 이라면 들어가 가지고 훨훨 날라 가지고 요 밑에 물에 빠져 죽고 말아요.

보면 그 물에 파리가 소복하게 빠졌습니다. 물 넣어 가지고 파리통 가지고 파리  잡는 것 한번 본 사람 손 한번 들어 봅시다. 그거 본 사람, 아마 그것도 안 본  사람은, 요새는 못 봤을 거라. 요새는 그런 것 없어요. 물에서 나온 파리지마는  부화되고 난 다음에 물에 들어가면 다 죽는다 그거야. 그게 다 진리라. 쉬운 것  같지만.

 우리가 중생되고 난 다음에도 믿기 시작하기 전에는 안 믿는 사람과 꼭  같습니다. 안 믿는 사람의 법칙을 쓰지 안하면 죽습니다. 왜? 마귀를 주인으로  안 모시면 죽소. 당장 죽습니다. 이제 하나님이 중생시킨 턱 착수 한 이후부텀은  마귀가 꼼짝 못하지마는 아직까지 성령도 진리도 와서 주인도 오지 안했는데  제가 마귀 배반하다가는 당장 죽어.

 이러니까, 중생된 사람도 믿지 안할 때에는 안 믿는 사람의 법을 써야 됩니다.

안 믿는 법을 쓰는 것은 뭐인가? 인간이 중심이요 인간 지식을 저들의 지식으로  삼는 그것이 그들의 법칙인데, 안 믿는 법칙인데 믿고 난 다음에는 바꿔 졌어.

주님을 중심으로 주님을 주인으로 삼고 주님을 내 주인으로 주님의 말씀을 내  지식으로 요 두 가지만 바꾸어 가지게 되면 이제 과거 자연은 꼭 같은 자연인데,  직장은-꼭 같은 직장인데 장사는 꼭 같은 장사인데, 장사도 무슨 사창굴 같은  그런 장사는 안 되지요. 하나님의 법에 어기지 안한 장사라면 다 할 수 있소.

사업도 다 할 수 있고 직장도 다 가질 수 있고 있는데. 속에 믿는 사람이면 두  가지는 변해야 됩니다.

 변한게 뭐이냐? 이제는 사는 것이 내가 사는 게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말씀하신 대로 주님을 자기 주인으로 삼아 주를 위해서 주님의 법을  거기에서 지키는 것으로 그 직장을 삼는다. 그 법을 지킨 것으로 그 직장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지극히 큰 능력이 동행하기 때문에 풍랑이 없습니다. 풍랑이 일  것 같고 낭파 될 것 같은데 안 됩니다. 이러니까 그렇게 하고 난 다음에사 모든  사람들이 말하기를 '야, 참 그라면 영 망할 줄 알았는데 모든 군왕들은 양부가  되고 왕비들은 다 유모가 되어지고 다 우리 자녀들 다 어깨에 메고 오고 또 내  발에 티끌을 하고 이렇게 말씀대로 하니까 이렇게 존귀해지는구나.'  요셉이가, 그게 하나 우리에게 표본 인물로 보여 준 것입니다. 이러니까  가보니까 즉 암흑, 암흑, 암흑, 암흑으로 계속해 갔지만 마지막에 보니까 이  애굽 사람들이 모두 요셉이를 아버지라 했어. 아버지, 아버지라 했어 이북에서  뭐 아버지라 하나 어버이라 하나? 어? 이북에 어? 어버이? 그때 애굽 사람들이  요셉이를 전부 다 어버이라 했어. 어버이, 모든 사람들이 전부다. 그게 뭐이냐?  발에 티끌을 하거든. 그렇게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그를 위해서 그의 명령대로  복종해 가지고서 이렇게 끝까지 복종하면 주님이 당신의 소원이 그건데. 나를  주인으로 삼고 내게 속해 가지고 나 시키는 대로 하는 사람이면 봐라 하고 높이  들라고 하지마는 조금하다가 그만 변해 버리니까 그만 안 되고 안 되고, 이래  가지고 주님의 소원은 그게 소원이요. 당신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모든 것을 맡겨  놓고 그에게 복종하는 사람의 하나님이라는 것을 만방에 보여 가지고 모든  인간이 다 그렇게 되기를 원하기 때문에 그런 사람 높이 들기를 원하는데 그런  사람이 없다 그 말이오. 그래서 높이 들 터인데. 네, 그렇게 하는 사람마다 다  높이 들립니다. 지금도 꼭 같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여기에서 요 진리를 깨닫고, 우리는 어떤 그 자연이라면 이  세상의 기존에 무엇입니다. 무엇이나 다 할 수 있습니다. 하는데, 다만  우리에게는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주님을 위해서 주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

그것이 경건이라. 경건만 버리지 안하고 경건만 가지고 있으면 지극히 큰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에 바람이 일어봤자, 바람이 일어봤자 참 권능만 나타내고 뒤에  가서 더 복만 되어졌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요 두 가지를 변하지 안하고 우리 법칙으로 삼아서 이래 해야  되지 자연을 쓸 때에 안 믿는 사람들은 저거 지식대로 해요. 저거가 주인이오.

우리는 주님이 우리의 주인이요, 또 주님의 지식이 우리의 지식입니다. 요 두  가지만 변하지 안하고 어떤 그 자연을 사용하든지 무슨 장사라는 그 자연을  사용하든지 과학을 자연으로 사용하든지 그리 안하면 공장 자연을 사용하든지  사업 자연을 사용하든지 무슨 직장 자연을 사용하든지 무엇을 하든지 무슨  일이라도 죄 되지 안한 거는 다 할 수 있어요. 하는데 고 일을 하되 고 일을  하되 껍데기는 주님의 말씀 복종으로 해라. 알맹이는 주님을 중심해서 주님을 네  주로 모셔 가지고서 주님을 위해서 해라. 요거 두 가지만 돼 가지고 있으면  지극히 큰 능력이 역사하기 때문에 아무도 해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고로, 제자들이요 노 젓고 요래 하다가 고만 요 두 가지를 바꿔 버렸어.

주님과 주의 말씀을 인간의 지식과 인간과 바꿔 버렸어. 바꾸니까, 노는 그래  젓지마는 노는 젓는데 와 안 갑니까? 노는 젓는데 와 안 갑니까? 와 안 가지요?  와 안 갑니까? ○ 목사님, 두 가지를 바꿔서 그런데, 두 가지를 바꾸니까 노를  저어도 안 갔다 말이오. 두 가지 바꾸면 두 가지 바꾼다고 와 노를 저어도 안  갑니까? 두 가지 바꾸면 와 안 갑니까? 신자의 두 가지를 두 가지 방법을 쓰면  왜 잘 갑니까? 왜 잘 가요? ○○○ 집사님, 어? 하나님의 권능. 따라합시다.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권능! 따라해요. 하나님의 권능! 하나님의 권능!  지극히 큰 능력! 지극히 큰 능력! 지극히 큰 능력은 주님을 그 사람의 주인으로  주로 삼았을 때에 지극히 큰 능력이 와서 역사 할 수가 있고, 또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의 지식으로 삼았을 때에 모든 죄를 정복하고 의를 달성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거 쉬운 것 같지마는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합니다. 자기를  부인하기 전에는 절대 안 됩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아주 쉽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는 그것이 주님을 주로 모시는 것이요. 또 인간  지식을 부인할 때에 하나님의 지식을 인정하는 것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번에 집회 가면은 시간 있으면 이 사람에 대해서, 사람에 대해서 좀  가르칠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영이 무엇이며, 마음이 무엇이며,  고기 덩어리가 무엇인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할 수 있는 대로 가르칠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거는 지금 제가 얼마 전에 조금씩 이렇게 말하고  발표하지를 안했는데 요번에 가서 시간이 있으면 증거할까 합니다.

 그리고, 믿는 사람이 가는 것은 항상 기뻐하라. 언제든지 기쁘고 즐거워 하고  이렇게 살 수 있는 것인데, 믿는 사람이 근심. 걱정. 고통. 두려움에 있는 것은  이거는 정상이 아닙니다. 이거 지금 이상이 돼 가지고, 변질이 되어 이상 돼  가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기쁘게 즐겁게 평안하게 담대히 살 수 있는  것이 기독자의 신앙 걸음입니다. 이런데 이렇게 살지 못하는 것은 두 가지 이유.

지식이 없어 바른 지식을 몰라서 살지 못하는 거, 바른 지식을 안다 할지라도  자기가 주인 된 이 주인 요놈이 안 비킬라고, 주인이 안 비킬라고서.

 여러분들, 돈 욕심 내는 돈 욕심에 전부가 돈 욕심으로 살고 있는 사람. 그 돈  욕심하는 돈 욕심을 내서 내는 그 사람이 자기입니까? 자기 아니요 그게 자기  아닙니다. 돈 욕심내는 그게 자기 아니요. 내 마음을 돈 욕심에 마귀고 놈이 와  가지고서 내 마음을 돈 욕심의 마음을 만들어 가지고서 그와 같이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자기 아닌 자를 자기가 알아야 됩니다.

 이래서, 우리는 이제 두 가지 방법을 놓치 말고 이 두 가지 방법을 꼭 잡고  그대로 어디든지 가면 됩니다. 무슨 직장이든지, 무슨 사업이든지, 이 두 가지만  가지고 주님이 인도하는데 어디든지 갈 수 있어요. 이 두 가지만 가지면 뭐 능치  못할게 없어. 어디든지 갈 수 있어. 무슨 사업이든지,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사업을 갈라고 하지말고, 사업은 무슨 사업이든지 좋아요. 어떤  사업이든지 요 두 가지만 있으면 지극히 큰 능력이 그 속에 역사하시고 지극히  큰 전지의 지혜가 역사하기 때문에 고만 돼져. 모든 거는 거기에 속한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까 사업을 종류를 선택하려고 하지 말아요. 종류 선택하려고  하지말고 장소 선택하려고 애를 쓰지 말고, 그 골 빠지지 말고. 그저 요 두  가지만 변동하지 안하고 바로 가지고 있으면 모든 것은 다 됩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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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89 신자의 생활법칙/ 마태복음 14장 24절-33절/ 840804토새 선지자 2015.11.27
2688 신자의 생활순서/ 시편 1장 1절-6절/ 840523수새 선지자 2015.11.27
2687 신학은 시찰로 족하다/ 누가복음 15장 1절-10절/ 881020목새 선지자 2015.11.27
2686 신학이란/ 베드로전서 1장 3절-7절/ 881014금새 선지자 2015.11.27
2685 실질적인 사람이 되자/ 창세기 9장 1절-7절/ 810522금새 선지자 2015.11.27
2684 실행/ 갈라디아서 6장 6절-10절/ 810111주후 선지자 2015.11.28
2683 실행/ 갈라디아서 6장 6절-7절/ 810111주전 선지자 2015.11.28
2682 실행과 기도/ 요한계시록 3장 1절-3절/ 820513목새 선지자 2015.11.28
2681 실행으로만 완전한 자가 된다/ 야고보서 1장 25절/ 800802토새 선지자 2015.11.28
2680 실행해야 산다/ 요한계시록 3장 1 절-6절/ 850112토새 선지자 2015.11.28
2679 심는대로 거둔다/ 갈라디아서 6장 7절-8절/ 890621수야 선지자 2015.11.28
2678 심는대로 거둔다/ 갈라디아서 6장 7절-8절/ 1989. 6. 21. 주일학교 공과 선지자 2015.11.28
2677 심는대로 거둔다/ 갈라디아서 6장 7절-8절/ 890625주새 선지자 2015.1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