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2 14:54
수상보행
본문 : 마 14:22-33 예수께서 즉시 제자들을 재촉하사 자기가 무리를 보내는 동안에 배를 타고 앞서 건너편으로 가게 하시고 무리를 보내신 후에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가시다 저물매 거기 혼자 계시더니 배가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떠나서 바람이 거슬리므로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더라 밤 사경에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서 제자들에게 오시니 제자들이 그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놀라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하여 소리지르거늘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 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 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 배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께 절하며 가로되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하더라
여기에 31절에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할 때에 주님이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셨다 하는, 요 즉시란 말을 우리가 언제든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신앙을 바로 갖추지 못했을 때에, 하나님은 지극히 공평되시고 또 약속에 정확하십니다. 또 하나님만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지으신 물건들도 다 정확합니다. 그중에 타락한 천사와 타락한 사람들에게 거짓이 있지 다른 데는 거짓이 없고 그렇게 가감의 에누리하는 일이 절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20세기의 최고로 타락한 창조 벌써 육천 년이 다 돼 가는 말세지말을 당한 이때지만 물리는 거짓이 없습니다. 물리는 거짓이 없습니다. 뭐 물질이 이치에 맞은데 안 되는 일도 없고 이치에 안 맞은데 되는 일도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만은 사람의 바른 이차에 틀런 게 오히려 잘되고 바른 것이 안 되는 사람과 타락한 천사만 심판을 받지 다른 것들은 심판 받을 만한 아무런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주도권이 없고 다 우주에 있는 것은 사람들에게 속했기 때문에 사람들로 말미암아 억울한 저주도 받고 그렇게 사망도 받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정확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틀렸을 때에 당신이 틀린 것을 그대로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또 틀렸는데 당신이 틀린 법을 통해 가지고 당신이 은혜 베푸시는 그런 죄를 범하지 아니하십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하나님을 향한 소망이나 의지나 복종이 당신에게 틀림이 없이 정확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사람이 거짓되니까 사람처럼 하나님에게도 그런 거짓이 섞여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나님을 상대하는 그 생활이 이렇게 정확하지 안하고 거짓되이 이래 해도 되리라 생각을 하고 참고 기다리는 가운데서 허송세월만 하게 됩니다. 정확하지 안하면 안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안될 때는 즉시 정확하지 안한 무엇인가 삐뚤어진 것이 있다 하는 걸 우리는 언제든지 생각을 하고 거기서 고치기를 빨리 노력을 해야 합니다.
이런데, 주님이 이 삐뚤어진 데 대해서 어떻게 말씀하셨느냐? 한 마디로 말하면 네가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제가 잘못한 것을 깨닫고 뉘우쳐 돌이키거든 용서하라 하는 이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삐뚤어진 데 대해서 오래 동안 그 삐뚤어진 것을 잡고 삐뚤어짐에 대한 그 보응을 베푸실라고 힘쓰시는 그런 정의의 법정만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시고 그것보다 긍휼과 자비를 가지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삐뚤어진 데에는 당신이 우리에게 은혜도 베풀지 못 하시고 또 삐뚤어진 것은 용납도 못 하시고 동시에 삐뚤어진 것을 우리가 고쳐서 당신에게 '내가 이거 삐뚤어졌습니다. 이거 용서해 주옵소서. 이 삐뚤어진 이것을 고치오니 은혜를 주옵소서' 할 때에 즉시입니다. 요 즉시라는 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합시다.
'예수께서 즉시' 31절에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즉시 손을 내밀어.
우리의 잘못된 것을 고치면서 용서해 달라고 할 때에. '내가 이 방편이 틀렸으니까 이 방편 고칩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할 때에 방편 틀린 것을 그것을 얼마든지 잡고 있지를 안하고-말씀을 들었어야 말씀의 능력이 속에 들어서, 말씀에 붙들려 이래야 되지 말씀 떼 내버리고 하면 믿는 자는 죽어요.
힘이 안 나. 말씀은 하나님의 능력이라. 이치를 깨닫는 데 돼지지 이치를 깨닫지 안하고, 깨닫지 안하면 믿는 것이다 거짓부리요. 바로 이치를 깨닫고 이치대로 믿을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잘못 됐다 말이오. 지금 베드로가 모든 게 틀려 버렸어. 신앙이라 하는 것은 하나 틀리면 다 틀리는 건데 이거 틀렸으니까 틀린 것을 깨닫고. 틀리니까 낭파를 당하고 다 틀리니까 다 절단난다 말이오. 틀린 것을 깨닫고 자기가 즉시 주님에게 부르짖습니다.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까 주님이 그 호소하는 소리를 듣고 '네가 삐뚤어진 길을 걸었으니까 좀 당해 봐라.' 이렇게 하지 아니하시고, 주님은 호소하는 그 호소에 '즉시 손을 내밀어' 즉시 들었습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은 우리의 삐뚤어진 것을 뭐 여간 삐뚤어져도 대충 됐으면 됐지, 여간 좀 백분의 일쯤이야 삐뚤어져 봤자 그런 거는 용납할 수 있지 않느냐 그렇게 털끝만한 불법도 불의도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기에, 당신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모든 은혜는 완전자의 은혜이기 때문에 완전의 그 방편이 아니면 은혜를 베푸시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은 완전자시요 정확 무오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분에게는 조그만치라도 틀린 것이 있으면 안 된다. 정확해야 된다. 이 정확을 당신 이 범하지 못하시는 하나님이시라. 정확을 범하면 하나님도 우리와 마귀처럼 뭐 그래 돼 버리고 어두워지고 말지 별게 없습니다. 하나님이 정확하셔서 이 정확을 범하지 안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광명이 언제든지 그대로 계속하는 것이지 하나님도 정학을 어겨도 하나님에게는 빛이 있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이 못 하는 것 있는데 하나님은 정확을 어기는 일을 못 합니다. 삐뚤어진 일을 하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이신 것을 우리가 깨닫고 그러면서 우리가 잘못된 것을 깨닫고 고칠 때에 즉시 용서하시고, 또 잘못된 것을 깨닫고 하나님에게 바로 정확하게 바로 고할 때에 우리에게 모든 면이 잘못됐을 때에 용서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진리요 약속이요, 또 우리가 잘못되고 부족해서 안될 때에 하나님에게 구하는 것이 이것이 또 약속이요 이것이 진리입니다. 구할 때에는 즉시 손을 내밀어서 들어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하나님의 정확 무오성을 믿는 동시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삐뚤어진 것을 당신에게 호소 할 때에 즉시 들어서 그것을 해결해 주신다는 것 요것을 우리가 믿어야겠습니다.
오늘 아침에 증거하려고 하는 것은 27절에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이렇게, 우리가 의심해서 잘못돼 있을 때에는 주님은 즉시 우리에게 있는 의심을, 우리에게 있는 삐뚤어진 것을 고칠라고 착수하십니다. 삐뚤어져도 내비두고 잘못돼도 내비두고 우리가 망 할 길을 보시고 '좀 그대로 고생 좀 당해 봐랴' 이렇게 하실 때도 있습니다. 그거는 하나님 믿는 사람들이 오래 동안 하나님을 애를 먹였을 때에는 제가 회개한다고 해서 즉시 듣지 안하고 '보라, 네가 회개하는 것이, 내가 싫다.' 이런, 맘을 가지십니다. '돌이켜 회개할까 하나님이 두려워한다' 했습니다. '저놈이 저래 나가다가 고가 하나 깨지든지 무슨 일이 나야 될 터인데 그게 좀, 저게 당해야 된다.' 이렇지만 회개하면, 당신의 계획이 그렇기 때문에 회개하면 즉시 또 하나님이 안 들으실 수가 없는 하나님이십니다.
제자들이 잘못돼 가지고 놀라 있는데 주님은 찾아오셨습니다. 산에 가서 기도하셨지만, 같이'계시지 안하지만 제자들이 풍랑을 만난 것, 이 만나는 것은 하나님이 그렇게 제자들을 굳게 세우기 위해서 너희들이 믿음 이 이렇츰 허무하다 하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 풍랑이 영원 전 예정한 그 풍랑이 일어난 것이오. 일시 일어난 것이 아니오. 그럴 때 그들은 놀랐습니다. 놀랄 때 주님은 산에 계셨지만 즉시 그들이 시험에 들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찾아오셔 가지고 그들을 구원하실라고 오셨습니다. 그때에 사람이 잘못되었을 때에 예수님께서 구원하러 오시는 그 구원은 이 제 자들이 보니까 물귀신이라 그렇게 보였습니다.
우리가 잘못됐을 때에 주님이 우리 구원하러 오신 것은 반드시 잘못된 자기는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의 반대의 자기 '옛사람이 주관해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옛사람으로 잘못됐고 인간 지식으로 잘못 됐고 자기중심이라는 원죄로 잘못돼 있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은 전부 이래, 잘못된 거는 원죄가 들지 안하고 잘못된 일이 없고 악령이 들지 안하고 잘못된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자기중심, 악령, 또 이제까지 모두 다 나쁜 짓을 한 그 모든 악습 이런 것들이 합작해 가지고 잘못됐기 때문에 잘못된 데 하나님이 구원하러 오시는 것은 잘못된 것의 반대로 바로 된 것으로 구원하러 오시기 때문에 반드시 잘못됐을 때에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가 볼 때는 자기를 망치러 오는 거와 같이 그렇게 들려집니다. 삐뚤어진 사람을 우리가 바로 잡을라 할 때에는 삐뚤어진 사람이 '나를 망칠라 하네 하는 그것이 그 자체가 삐뚤어져 있기 때문에 구원을 그렇게 보는 것이 지당합니다.
그런고로, 그가 자기 망할 줄도 모르고 삐뚤어진 그 일을 하고 있는 그 걸 분개하거나 괘씸히 여기거나 그렇게 복수성을 가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 저 망할 줄도 모르고 그게 악령에게 사로잡혀 있고, 원죄 자기중심 원죄에게 사로잡혀 있고 또 본죄에게 사로잡혀 있고 악령과 원죄와 본죄에게, 악습은 본죄입니다. 사로잡혀 가지고 이래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올바른 것으로 구원하려고 하면 저희에게 전체가 다 반대가 되기 때문에 반대할 수밖에 없고 그를 대적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건 필연성이오. 이러기 때문에, 저 망할 줄도 모르고 그런 것이니 그를 제가 반대되는 그것을, 내가 벌써 하나님 편에 섰기 때문에 어짜든지 반대하는 그걸 타이르기도 하고 또 이치를 가르치기도 하고 하나님께 기도하기도 하고 성령과 진리와 중생된 영과 자기의 심신과 이렇게 합작을 해 가지고 그 사람에게, 이 죽은 자를 산 자가 살리지 죽은 자가 스스로 살아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그 반발하고 있는 그 모든 죄악을, 저희에게 책임 있는 게 아니고 저희는 절대 불가능자이요 이제 저를 붙들고 이렇게 구원 할 그 책임은 곧 그를 알고 착수한 자기에게 있다는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능력의 역사가, 능력의 역사의 동행이 부족한 것이나 자기 성심성의가 부족한 것이나 기도가 부족한 것이나 자기의 지금 타이르고 가르침이 부족한 것이라는 것을 이걸 깨닫고 그 면을 자꾸 더 증가시키고 더 보강시켜야 되어지는 것이지 상대방에게 대해서는 아무런 힘이 없는 것이고 죽은 것이, 죽은 것이 썩는 것뿐이지 다른 일은 그에게 하는 힘이 아무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들도 삐뚤어져 가지고 지금 이렇게 망하는 현실에 있는데 그때에 예수님이 구원하러 오시니까 전부 다 '물귀신이다' 하면서 저거를 대적해서 망치는 자인 줄 알고 놀라지 안한 그 선원들이 없었습니다. 놀라 지 안한 제자들이 하나도 없어. 다 놀랐어요.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는 요것을 상식으로 단단히 가지고 내가 삐뚤어졌을 때에는 반드시 주님이 나를 구원하시는 일은 나 보기에 삐뚤어졌다. 나 보기에 삐뚤어진 것으로 온다. 그러니까, 나는 주님을 삐뚤어졌다 하고 주님은 나를 삐뚤어졌다 하고 이렇게 이런데, 반드시 내가 삐뚤어졌으면 주님의 일은 삐뚤어졌고 내가 삐뚤어졌을 때에는 마귀와 이 세상일은 딱 들어맞는다. 마귀와 세상일은 내게 딱 들어맞고 주님 하시는 일은 삐뚤어지게 된다. 그러나 내가 그때에 그런 줄 알고 '이거 내 보기에는 아닌데' 목사가 와 가지고 내한테 권면하는 것이나 권찰이 와 가지고 권면하는 것이나 전도사가 와 가지고 권면하는 것이나 장로님이 와 가지고 권면하는 것이나 이 권면하는 것이 내게는 도무지 적합하지 안하고 합당치 아니한 데 왜 그들의 권면이 내 보기에는 내 반대로 이치에 타당치 안하고 또 그들은 자꾸 그런 걸 가지고 나를 권면하고 하느냐? 이 둘이 일치되지 안하고 이렇게 서로 대립이 되어지니까 무엇인가 하나 틀린 게 있다 하는 요것을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어야 됩니다.
무언가 하나 틀린 게 있다. 틀렸으면, 하나 틀린 게 있으니 틀렸으면 상대방이, 나를 권유하고 있는 상대방이 틀렸느냐 내가 틀렸느냐 둘이 벌써, 둘 중에 대립이 돼 있으니까 하나는 틀렸다는 요것을 생각을 하고, 생각하고 틀린 건 그것을 어느 것이 틀렸느냐 요것을 살필라고 하면 벌써 빛이 왔기 때문에 그 마귀란 놈은 떱니다. 그때 살필라고 하면서 그러면 내가 하나님의 지식을 표준으로 해야 되겠느냐 인간 지식을 표준해야 되겠느냐? 그러면, 상대방이 나를 권유하고 인도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이냐 인간 지식이냐? 내가 지금 주장하고 있는 것은 인간 지식이냐 하나님의 지식이냐? 이 지식을 들어가서 지식을 심사하려고 달라들면 마귀란 놈은 항복을 하고 도망을 쳐 버려. 벌써 그놈은 안 되니까 달리 휘뜩 뒤비트려 버려요. 달리 뒤비트려 버리요. 이러니까 그때 놓지 말고 어느 지식으로써 지금 이 판단이 나온 것이냐? 내가 하는 것은 하나님의 지식이 아니고 인간 지식이고 저 상대방이 말한 것은 하나님의 지식 성경대로다.
그러면, 틀림없이 이거는 내가 틀렸기 때문에 틀리게 보이는 것이니까 내가 틀린 이것을 완전히 부인해 버리고 배척해 버려 버리고 내 보기에 틀렸다는 저 법칙을 따라가야 되겠다, 요것을 우리가 가지는 것이 용기입니다. 요것이 믿는 사람들이 실패에서 일어나는 용기요.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요것도 우리가 언제든지 평소에 기억하고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의 종들의 권유가 이것이 자기 보기에 틀렸을 때에는 자기는 벌써 그게 대립이니까, 둘 중에 뉘든지 하나 틀렸는데 그때 그 심사 할 때에 둘 중에 하나 틀렸다는 요것을 잡는 것이 중요합니다. 둘 중에 하나 틀렸다. 하나 틀렸으면 그 다음에 이차적으로 지금 우리가 착수할 거는 뭐이냐 하면 어느 지식이냐? 어느 지식에 속했느냐? 그 지식을 지금 심사하는 것이 이차 착수입니다. 둘째로 지식을 심사하고 나면 그때 확실히 어느 지식에 속했다 하는 것을 알게 되니까 세 째로는 뭐이냐? 하나님의 지식은 생명의 지식이요 인간 지식은 사망케 하는 지식이기 때문에 두 지식을 판단해서 사망의 지식에 속했고 생명의 지식에 속했고 이것이 확실히 판단됐을 때에는 셋째는 용단입니다. 용단을 내려야 됩니다. '이것은 상대방 하나님의 지식에 속했고 이거는 사람의 지식에 속했기 때문에, 사람의 지식에 속했기 때문에 사람의 지식에 속한 것을 부인하고 이것을 원수를 삼아서 포기하고 아무리 내가 원수같이 생각했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지식에게 속한 것을 내가 잡고 그리 속해야 되겠다.' 완전히 거기서 방향을 빽 돌아서서 전환하는 이것이 용단입니다. 이렇게 돌아서는 용단이 우리에게 있어야 되지 이 용단이 없으면 헛일입니다. 돌아서는 용단이 있어야 됩니다.
오늘 아침에 지금 내가 증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입니다. "내니 두려워 말라" 이라시니까, 28절에, 요 베드로 하는 일 요것을 우리가 단단히 기억 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대답하여 가로되 주여 만일 주시어든" '만일 주시어든' 하는 것은 아직까지 요 주님에게 대해서 음성을 듣고 요렇지만 주님에게 대한 아주 밀접한, 연결을 가지지 안하고 조금 거기에 의문이 있는 건데 의문을 가리켜서, 뭘로 해결 지을라고 하느냐 하면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당신이 내게 계속 섭리하는 것을 봐서 당신을 확고하게 확정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거는 이거 필연성입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주님을 발견했다 할지라도 주님이 내기에 계속적으로 연속적인 그 섭리, 연속적인 그 섭리에서 자기의 신앙은 자꾸 이렇게 자라 가는 것이지, 연속적인 그 역사로 따라서 자라 가는 것이지 대번에 몽땅 한목 오는 것은 아니라 그말이오. '만일 주시어든' 했는데 그 다음에 '나를 명하여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하는 것은 이것은 이제 거의 자기를 다 부인한 온전한 신앙으로 벌써 서 가지고 이렇게 행동하는 것입니다.
"만일 주시어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한대" 그러면 이것이, 벌써 요게서 세 가지를 갖추었습니다. 세 가지 뭘 갖추었는고 하니 이제는 뭐 저거들이 이런 저런 소망을 가지고, 이런 것 저런 것 다 소망을 가지고 이것도 바라보고 저것도 바라보고 이것도 저것도 다 이랬지만 여기서 주님을 딱 향하면서 주님에게만 소망이 집중됐습니다. 그 때는 다른 걸 바라봄이 없었다 말이오. 주님만 바라보는 바라봄의 요 주님만 바라보는 것. 주님이 해 주시는 것을 바라는 것, 주님만 해 줄 수 있다는 것 주님만 소원하는 것. 요 주님이 자기에게 해 주실 것을. 그것만,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바라는 요 바람이 정선이 돼 가지고 온전한 바람이 됐 고 또 주님이 자기에게 모든 것을 해 주실 수 있지 다른 것은 아무것도 해 주실 수 없고,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바랐고 주님만이 해 주실 수 있다 하는 요 소망이 차차 차차 발라졌습니다. 소망이 발라졌습니다.
주님만이 해 주실 수 있다 하는 것을 그것을 그 다음에 연속적으로 보면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 이것 보면 아주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바랐다 그말이오. 이제까지 밤새도록 풍랑에서 죽는다고 지금 죽을 지경인데, 그 뭐 물만 생각만 해도 징그럽고 귀찮을 것인데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시니까, 물위로 걸어오시니 그때에 주님이, 주님이 주시는 것 그것만을 받을라는 거기에 집중된 것 요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주님에게만, 소망하는 것이 주님에게만 집중됐다.
그때에 '아, 내가 살아서 앞으로 좌의정 우의정을 해야 될 터인데, 내가 살아서 뭐 가족을 만나고 어째야 될 터인데, 내가 살아 가지고 무엇을 해야 될 터인데' 다른 소망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없고, 주님에게만 소망이 집중됐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단단히 깨달아서 굳게 잡아야 됩니다. 주님에게만 소망이 집중됐다.
다시 말하면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바라는 거기에 단일이 됐다 그말이오.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바랐지 그때에 둘이나 서이나 딴것을 바라저 안하고 그저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바랐다.
그러면, 그것을 우리가 무엇으로 가지고 증거 할 수가 있느냐 하면 밤새도록 물로써 심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는데, 주님에게, 그 다음에 보니까 물위로 걸어오라고 하는 것을 이것을 보면 베드로가 그때 딴 생각이 하나도 없었다 말이오. 딴 데 소망이 하나도 없고, 주님이 주시는 것만 바랐기 때문에.
이제까지 밤새도록 원수가 되고 밤새도록 진저리나고 밤새도록 무서운 그것을 바란 것을 보면 딴 소망이 하나도 없고 주님만 소망하는 그 소망 집중이 됐다.
그러면, 자기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구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주님이 주시는 것만 소망하는 요 소망이 단일로 집중됐다 요걸 여러분들이 잘 구별해야 됩니다. 주님이 주시는 것만 바라는, 주님이 주시는 것만 받을라고 하는 이 소망에 집중이 됐다. 또 그 다음에는 주님만이 해 줄 수 있다.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자기는 받을, 주님이 역사로써 이루어 주시는. 주님이 이루어 주시는 것만 바랐다.
그러면 요 두 가지 그 두 가지가 합해서 소망의 믿음입니다.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자기는 바랐다. 천 가지만 가지 바라는 것이 있지만 다 치워 버리고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바란 고 단일 소망에 집중됐다. 그 다음에는 주님은 나에게 능치 못하심이 없기 때문에 주님은 무엇이든지 나에게 해 주실 수 있다. 주님은 나에게 무엇이든지 해 주실 수 있다.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바란다. 요것을 또, 주님의 능력을 바랐고 주님이 주시기를 좋은 종류를, 주님이 주실 때에 좋은 종류로 주시니 주님이 주시는 그 종류만이 내게 필요 있지 주님이 주시는 종류 외의 거는 필요가 없다. 주님이 주시는 종류 그 단일 소망에 집중이 됐고 또 주님의 능력으로 해 주시는 그것만 바랐지 다른 무슨 힘으로 해 주는 것을 바라지 안했다 말이오. 이렇게 소망의 집중이 돼 가지고 소망의 집중이 돼 가지고 이제 단일 소망이 됐습니다.
단일 소망이 되니까 이제까지에 있던 낙망이나 절망이나 그런 것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낙망 절망이 다 없어지지 안했습니까? 그들이 낙망한 것은, 물에, 지금 심히 밤새껏 고민하고 있는 것은 물에 빠지면 그만이오. 물에 빠지면 그만 죽어 버리고 만다 그거요. 주님이 오시는 것을 물귀신이라고 그렇게 기절한 걸 본다고 해도 그들은 '물에 빠지면 인제 다 끝이다' 이래 가지고 모두 절망 낙망 공포에 가득히 찼는데, 이 베드로에게는 이 소망으로 인해서 모든 절망이 다 없어져 버렸습니다. 모든 절망이 없어졌다 말이오.
그러기에, 우리가 주님이 주시는 것만 바란다 이랄 때에 주님 외에 딴 데서 오는 것을 다 부인해 버려야 주님이 주시는 것만 바라는 것이 돼지지 딴것을 바라고 있으면 헛일이라 그말이오. 주님이 주시는 것만 바랐다, 또 주님이 해 주시면 능치 못하심이 없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바랐으니까 다른 무슨 의지하는 힘이나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 말이오. 바라보는 힘이 하나도 없다 말이오. 요것을 가리켜서 단일 집중 됐다. 이라니까, 그거는 절망과 낙망으로 더불어 싸워서 그걸 정복했습니다.
'물위로 오라 하소서.' 이러니까, 베드로가 이렇게 주님만 소망하는 이 소망을 가지니까, 주님만 소망하고 주님이 주시는 것만 바라고 또 주님은 내기에 모든 것을 좋을 것을 다 해 주실 수 있다. 주님이 해 주시는 것만 바라고, 주님이 주시는 것만 바라고 이라니까 밤새껏 놀랐던 베드로가 '나를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이랬습니다. '물위로 걸어서 오라고 하소서' 이러니까, 물위로 걸어서 오라고 하는 이것은 자기가 뭐 물에 대해서 이치를 환하이 다 알고 있는 사람이 배에서 그대로 내렸으면 물에다가 푹 빠져 들어가 버리지 뭐 별게 뭐 있습니까? 이러니까 어떻게 배에서 '나를 걸어오라 하소서' 이렇게 했겠습니까? 그것은 자기가 무엇을 의지하고 그와 같이 했던가 말이오. 자기가 배에서 내려서 물위로 걸어오라고 이렇게 명해 달라고 이렇게 말할 때에 그때에 그 베드로가 배에서 푹 뛰 내려오는 그것은 무엇을 의지하고 그런 요청을 했던가 말이오. 무엇을 의지하고 그렇게 요청을 했던가? 그는 순전히 주님만을 의지하고 그 요청을 했습니다. '나를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이렇게 명해 달라고 하는 그 요청이 주님만을 의지하는, 주님 의지하는 주님의지에서 그런 요청이 나왔다 말이오. 그 주님을 바라보는 것과 주님을 의지하는 그 두 가지에서 그 요청이 나왔습니다.
요청이 나왔고, '나를 걸어오라 명하시옵소서.' 하는 그것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의지하는 거기에서 주님에게 무엇이든지 복종할 복종이 구비 됐다 말이오.
그러니까, 고 간단한 데에서 주님 바라는 것과 의지하는 것과 복종하는 이것이 완전히 구비됐습니다. 바라보는 것의 대적이 다 없어졌고, 밤새도록 바라보는, 주님 소망하는 소망의 적이 가득 찼고, 소망의, 밤새도록 주님 만나기까지는 소망의 적이 그들을 덮어 가지고 있고 적만 가득 찼었고, 또 의지하는 것이 다 없어서. 의지하는 것이 아무 것도, 의지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의지의 반대만 가득 찼어. 또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는 것을 반대하는. 하나님의 명령을 다 잊어버리고 다 집어 던져 버리고 반대하는 요것만 가득 찼었는데, 밤새도록 가득 찬 것이 절망과 또 의지없기 때문에 외로움과 또 자기네들 주관에 가득 찼습니다. 이 주관으로 가득 찼었는데, 이러니까, 순전히 악령과 악성과 악습으로 가득 차 가지고 있는 그들인데, 이 악령과 악성과 악습은 누구의 적인고 하니 주님의 적인데, 다시 말하면 주님을 바라보는 적이요 의지하는 적이요 복종하는 적이요 이 세 가지 적이 이 악령과 원죄와 본죄, 악성과 악습 이것들인데 이것이 완전히 정복돼 버렸습니다. 완전히 정복 돼 가지고 '물위로 오라 하소서.' 이러니까 이렇게 '나를 물 위로 걸어오라 하소서'하는 이 말 한 요청을 하는 그 베드로는 어떤 사람이 되었느냐? 이는 주님만을 바라고 주님만을 의지하고 주님에게만 복종하려는 요 세 가지가 완전히 구비됐습니다. 요것을 여러분들이 자꾸 느껴야 돼요. 요 세 가지만 구비돼서 요 세 가지로써 충만한 고 필연성으로 요 결과가 나왔습니다. 하나에 하나 보태면 둘이 된 다는 거와 마찬가지로 요렇게 요 세 가지가 똘똘 뭉쳐서 하나가 되니까 그 베드로는 '나를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하는 그것이 그이에게 요청했다 말이오. 주님이 물위로 걸어서, 그때 '주님이여. 날 병신 고치는 능력 주옵소서. 나에게 어디 가서 전도하게 해 주옵소서. 나로 하여금 부귀 영광을 주옵소서.' 하는 게 아니라 주님이 물위로 걸어오시니까 그 주님에게 단일 소망을 가지니 그때 '물위로 나를 걸어오라 하소서' 그것밖에 없고, 또 그때 주님만을 의지 하니까 나를 물위로 걸어오라 하는 그것밖에 할 말이 없고, 또 주님에게 복종하고자 하니까, 이제 복종하려는 요 마음이 각오가 되고 돌아보지 안하고, 주님 복종해서 죽느냐 사느냐 낭파가 되느냐 그런 게 아무, 그런 게 다 없었어. 없어져 버리고 주님에게 복종하려 하니까 '그저 '나를 물위로 걸어오라 하소서.' 그것 외에는 필연적으로 다른 거는 말할 아무 그런 것이 새에 끼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니까, 주님이 29절에 "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오라 하시니까.
배에서 내리는 것이 주님에게만 소망을 가졌기 때문에 주님이 오라 하시니까 지금 배에서 척 내립니다. 주님에게만 소망했기 때문에 배에서 척 내렸습니다.
또 주님만 의지했기 때문에. 주님만 의지했기 때문에 배에서 내렸습니다.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그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니까 이제 이것이 마지막에 주님에게 복종하는 걸음 하고 있다 말이오. 위에 소망, 주님만 소망하고 의지하는 그 두 가지 원인으로 인해서 그 결과인 복종 생활이 이제는 이루어졌다 그말이오. 그러니까, 배에서 내릴 때, 배에서 내려설라고 하는 거기에는 주님만을 바라보고 의지하는 고 둘의 힘을 가지고 배에서 내려서는 때부터는 그때 주님에게 복종하는 행위라 말이오. 이러니까, 그 복종하는 행위는 소망과 의지 그 생산이오. 소망과 의지는 이 순종의 어머니입니다. 소망과 의지가 없으면 순종이 생겨지지를 안해. 소망과 의지가 있으니까 거기서 순종이 나와서 물위로 걸어갔습니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바람을 보고" 이제는 바람 보는 게 나쁜 게 아니오. 바람 보고, 풍랑이 불면 '풍랑아 불어라. 뭐 동남풍도 서북풍도 불어라. 풍랑 네가 좀 한번 마구 역사에 없는 풍랑으로 어떤 한라산 같은 그런 풍랑이라도 한번 불어봐라.' 바람 부는 것이 나쁜 게 아니고, "바람을 보고" 바람을 보는 데에서 주님에게만 소망한 이 소망한 이 소망 이 흔들렸다 그말이오. 주님만 바라보는 이 소망이 흔들렸습니다. 바람에게 피동됐다 그말이오. 바람에게 피동됐어. 바라보는 게 나쁜 게 아니라 바람으로 인해서. 이 바람이니 또 풍랑이니 이런 것이 다 그때에 베드로에게 현실인데, 현실의 요소들인데 이 현실의 요소들을 인해서 현실의 요소가 나쁜 게 아니라 현실의 요소를 내가 정복하면 현실은 나에게 이용물이 되어지고 내가 현실에게 피동을 당하면. 정복을 당하면 나는 그것의 종이 되고 마는 것이라 말이오.
바람을 볼 때에,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만 소망했는데, 주님만 소망할 때에 주님만 소망하니까, 주님만 소망하니까, 주님만 소망하니 동시에, 주님만 소망하니 주님만 의지하는 의지가 생겼고 주님만 소망하고 주님만 의 지하고 있으니까 당신에 피동이 생겨졌고 요 셋이 논리적 순서로 말하면 일, 이, 삼이 있지만 서도 요 셋은 동시라 말이오. 소망하니 의지 생겨졌고 의지하니 거기서 복종하게 돼 버리고 요 셋은 하나인데, 첫째 둘째는 하나요. 논리로는 순서가 있지만 하나요. 그 다음에 셋째 것은, 셋째 순서의 것은 그 다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그게 다 동시에 되어지는 것이요 행동은 계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좀 지르르 그는 것이지 되기는 동시에 출발, 동시입니다. 논리적 순서로서는 일 이 삼으로 할 수 있지만 실상은 그것이 동시에 발족이라 그말이오.
이랬는데,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하니까 벌써 바람에게 피동됐다 말이오. 무서워하는 것이, 무서워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 의지가 변동됐다는 것이오. 하나님의지가 변동된 그것이 어디서 나왔느냐?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것이, 하나님은 무엇이든지 다 우리에게 좋은 것 주신다. 해 주실 수 있다. 하나님을 소망하는. 하나님을 바라기 때문에 하나님은 물위로 걸어오게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할 수 있다는 그 소망을 가지고 지금 그렇게 나갔었는데 바람을 보고 하나님만을 소망하는 소망이 흔들려졌습니다. 바람을 보고 소망이 흔들렸어. 소망이 요동됐어. 소망이 요동되니까 의지가 요동됐습니다. '바람을 보고' 하는 데는 몰랐지만서도 무서워하는 것 보니까 벌써 의지가 변동됐으니 의지 변동된 것이 뭐이냐? 하나님이 주시는 그것만 받을라 하는 그것이 아니고 이제 환경에서 바람이 오니까 하나님만을 바라봤던 그것이 변동되니까 벌써 바람이 자기에게 주는 절망 이것이 자기에게 와 가지고 벌써 시작했다 말이오.
요것 전부 말하는 것은 마음 문제입니다. 마음 문제요.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은 요 마음 문제가 문제, 거기에다가 다 승패가 결정되는 것인데 요 마음은 생각지 안하고 마음은 어찌 됐든지 사람의 귀만 속여서 거짓말하든지 무슨 말 하든지 이래 해 가지고 자기 속에는 이런 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나 겉으머리 말만하면 된다는 요것을 생각하고 있는 이 총공회 산하에 있는 교역자들 이거 거짓부리들 회개해야 됩니다. 아주 거짓부리요. 저거가 그래 가지고는 앞으로 환난 오면 이길 자가 내가 보기에는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전부 거짓부리요. 이 행동보다 마음이 중요한 것인데 이 마음에 대해서 도무지 생각을 안 가진다 그말이오.
바람을 보고 무서워했습니다. 바람을 보고 무서워한 것은 벌써 의지가 깨뜨려졌고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그것이 벌써 바람이 주는 것을 받았다 그 말이오. 바람이 주는 것 받았고, 바람을 보는 것 아무 상관없지만 무서워하는 걸 보니까, 하나님만 소망하고 하나님만이 나에게 모든 것을 해주실 수 있다고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하나님을 소망하는 것 잊어버리고 바람이. 하나님을 거슬려서. 하나님을 거슬려도 바람이 자기에게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바람의 세력을 벌써 의지했기 때문에 바라봤기 때문에 하나님의 세력은 물러갔다 그말이오.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빠져가는 요것은 행동에, 행동에 속한 것입니다.
이러니까, 그 둘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이 흐려졌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흐려지고, 그 증거가 뭐이냐? 무서워했고, 그라니까 그 다음에 바라보는 것이 변동됐고 의지가 변동됐으니까 행동이 변동된다 그말이오. 행동이 변동됐어.
행동이 변동돼서 빠져 들어갑니다.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주님이 하시는 말씀에서 이게 판정이 난다 말이오. 주님이 그것을 보고 거기에 대해서 어떻게 판단하셨는가? 판단 보니까 "믿음이 적은 자여" 믿음이 적다는 요 믿음은 무엇을 말했는가? 주님을 바라보는 그 바라봄이 단일 집중 의 소망이 흐려졌다 말이오. 적다 말은 흐려졌다 그말이오. 또 주님만을 의지하는 그 의지가 흐려졌다 말이오. 믿음이 적은 자라 말은 흐려졌다 그 말이오. 그것이 백 프로 되어야 되는데 오십 프로가 됐는지 사십 프로가 됐는지 벌써 흐려졌다 말이오. 흐려지니까 흐려진 결과로 흐려진 행동이 나오니 흐려진 행동은 소망을 해치고 또 흐려진 행동은 의지를 해치고 또 흐려진 소망은 의지를 해치고 흐려진 소망은 행동을 해치고 이 셋은 하나가 삐뚤어지면 서로가 다 해쳐 버리고 맙니다.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의심하였느냐' 하는 이것은 벌써 하나님을 주님만을 바라보는 것이 벌써 흐려졌고 의지하는 것이 흐려졌고 당신에게만 피동 당신에게만 피동되는 이 피동이 흐려졌다 그거요. 이것이 전부 "의심하였느냐" 이랬으니까 물에 빠져들어 가는 그것도 마음 작용 아닙니다. 요거 잘 알아야 돼요. 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도 마음 작용이 아니요 배에서 내려서는 그것도 마음 작용이 아니요, 물위로 걸어가는 것도 마음 작용 아니오. 이 배에서 내려서는 것이나 또 물위로 걸어가는 것이나 또 빠져 들어가는 것이나 이것은 전부 마음 작용이 아니고 행동 작용인데 행동 작용인데 요 행동 작용이 어디서 나왔느냐 요것을 우리가 살펴봐야 됩니다. 요 행동 작용이 어디서 나왔느냐? 행동 작용이 될 때에 사람들은 볼 수 있고 할 수 있지만 사람들이 볼 수 없는 행동 작용이 아닌 그 마음의 작용 거기서 이 행동 작용이 나왔지 행동 작용에서 그게 시작된 것이 아니고 마음 작용에서 행동 작용이 나왔다 말이오. 이러니까, 행동 작용은 사람들이 볼 수 있지만 마음 작용은 사람들이 보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우리의 신앙은 사람들이 볼 수 없는 마음 작용 거기서 다 결정돼 버립니다. 고 결정된 그것이 행동 작용으로 나오기 때문에 행동이 되었을 때에는 벌써 마음 작용에서 이루어진 것이 거기에 소산으로 나오는 것이라 그거요.
그런고로 '왜 의심하였느냐' 하는 것은. 물에 빠져 들어가면 '왜 네가 물에 빠져 들어가느냐' 이렇게 말씀하지 안하고 주님은 이 고장을 어디다가 뒀습니까? 이 고장을 어디다가 부담을 시켰습니까? 이 고장을 '네가 왜 물로 빠져 들어가느냐? 왜 걸어오다가 빠져 들어가느냐?' 이렇게 그 행동 사람이 볼 수 있는 행동에다가 책임을 부담을 시켰습니까? 어디다가 부담을 시켰습니까? 마음에다 부담을 시켰습니다. 의심하였느냐는 그거는 마음을 말하는 거라 '의심하였느냐.' 그 마음 작용에서 이 두 가지가 틀렸기 때문에 그 사람이 볼 수 있는 행동이, 행동 개시가 돼 가지고 타락한 행동 빠져 들어가는 행동이 돼졌다 하는 것입니다.
지금 증거할라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은 우리 중심을 더 중하게 여기십니다.
그러면, 우리 마음에 하나님을 바라보는 그것이. 하나님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것이 요것이 마음에서 요것이 가득 차서 마음에서 요것이 이루어져야 되고. 마음에 요것이 이루어져 가지고 있어야 그 다음에 행동이 되는 것이지 마음에 이루어지지 안하고 행동만 할라 하는 그자는 외식이기 때문에, 외식이기 때문에 무슨 사람입니까? 마음에 요것이 이루어져 가지고 있으면, 마음에 이루어져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을 끌어서, 우리 영은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요것도 참 알아 듣기 가 어렵습니다. 쉬운 게 아니오.
우리가 마음에 이루어지는 것은 우리 사람은 영, 마음 몸 세 가지인데 영에는 다 이루어져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안하고 있는 것이 마음이라 말이오.
마음에만 이루어지면 하나님은 우리 육체에 착수를 했습니다. 우리 육체에 착수를 했습니다. 우리에게 같이 했소. 시작을 해서 착수를 했습니다. 그러면, 그 다음에 우리의 마음까지 벌써 주님과 영감과 진리와 중생된 영이 내 마음과 동행했기 때문에 내 마음과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있으니까 그 다음에 우리 몸만 하면 된다 말이오. 이게 한 덩어리 됐으면 몸은 지금 복종할는지 안 할는지 몸 문제고 그 다음 문제지만 요거는 한 덩어리가 됐으면 하나님은 지금 우리 육에 착수를 했다 그말이오. 착수를 했으니까 이제는 주님과 또 영감과 또 진리와 중생된 영과 또 마음, 몇이 하나 됐습니까? 이 다섯이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이 몸을 지금 점령해서 '몸 너도 우리와 같이 하자.' 자꾸 이래 달래고 있다 말이오. 몸만 같이 하면 전능이 착수했기 때문에 이렇게 같이만 하면 그 영육은 피조물이 다 복종해야 되지 피조물이 반대하지를 못하는 것인데, 요것이 지금 안 되고 주님과 영감과 진리와 중생된 영이 그 마음과 동행하는 것이 그 순서인데 그 마음과 동행하지를 못하고 마음은 악령과 악성과 이 세상 지식으로 더 불어, 자기 원죄와 본죄로 더불어 이 마음과 한 덩어리가 돼 가지고 있는데 마음의 이 문제를 해결해서 요것이 완전히 수정되고 회개 돼 가지고 이 마음과 다섯이 하나가 돼 가지고 단일 행동, 이 다섯이 합해 가지고 단일 행동이 이루어지는 요기에 힘을 쓰지를 아니하고 거기는 텅 비워 놓고 껍데기 행동만 둘러맞출라고 하니까 그 사람의 행동은. 그래 가지고 믿음 생활을 하려고 하는 그거는 믿음 생활은 이 모든 악령과 죄악을 다 대항하는 것이요 모든 피조물을 복종하는 것이 믿음인데. 복종시키는 것, 믿음이라는 것은 악령을 대항하는 것이요 죄를 대항하는 것이요 사망을 대항하는 것이요 모든 피조물을 다 복종시키는 이 권위 있는 행동인데, 이 권위 있는 행동을 마음의 이 문제를 해결 지워서 마음이 변화돼 가지고 마음이 이 다섯과 합작돼 가지고 단합된 단일 행동을 하지 안하고 행동만 하려고 하는 사람은 제 힘 가지고 뭣 할라는 사람입니까? 제 힘 가지고 뭣 할라는 사람이오? 제 힘 가지고 지금 뭘 할라 하는 사람이지요? 제 힘 가지고 마귀를, 제 힘 가지고 싸워서 마귀를 정복할라 하는 자입니다. 또 다음에는 뭐이요? ○○○목사님 예? '죄' 그라면 '죄' 하면 다 도매금이라 못 써 마귀를 제가 제 힘 가지고 대항해서 이겼다는 말이요, 또 자기중심인 이 원죄를 대항해서 이겼다는 말이요, 자기의 본죄를 대항해서 이겼다 말이요, 또 하나는 뭐입니까? 자기 육체를 자기가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제어하겠다는 말이요 모든 피조물을 자기가 복종하겠다는 말이니까 이게 뭣 되겠다는 말이오? 이게 하나님 된다는 말이오. 해석을 하고 보면 이게 하나님 돼. 제가 하나님 된 다 말이오. 하나님이 됩니까? 자, 인간이 인간 제 힘으로써 마귀를 이길 수 있소, 원죄를 이길 수 있소, 본죄를 이길 수 있소, 모든 피조물 복종시킬 수 있소, 이라면 이거 하나님이 되는데 하나님이 될 수 있소? 제가, 제가 소원하고 목적하는 것은 이 네 가지를 대항해서 이길라는, 이겨서 만물을 복종시킬라는 이 다섯 가지를 할라는 것인데. 이 싸움이요, 이래. 가지고 제가 그것을 하고 이 모든 것을 복종해 대항할라 하는 그 싸움인데 실은 저는 누구의 종입니까? 실은 누구의 종이오? 제가 지금 소원하고 있는 소원은 무엇을 소원하고 있습니까? 요게 구별 안 되면 안돼. 심령이 어두우면 자꾸 못 알아들어.
자기가 소원하는 것은 어짜든지 내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야 되겠다. 내가 순교를 해야 되겠다, 내가 진리로 승리를 해야 되겠다. 죽음 앞에서 도 나는 요동치 않겠다, 독침 앞에서도 나는 신앙을 지키겠다. 그 소원은 좋은 것을 소원합니다. 소원하는데 그 소원이. 그 소원이 누구하고 싸우는 소원입니까? 그 소원이 누구하고 싸우는 소원이오? 마귀하고 싸우는 소원 아니오? 아닙니까? 이거 이해가 돼야 돼. 마귀하고 싸우는 소원이요 원죄 하고 싸우는 소원이요, 본죄하고 싸우는 소원이요, 이 모든 피조물을 복종시킬라는 소원이오. 이러니까, 자기가 하나님 될라는 소원이라 말이오.
이 소원인데, 그러니까, 소원은 큰 걸 소원합니다. 소원인데, 실은 제가 누구의 것이 돼 가지고 지금 그렇게 하고 있습니까? 마귀의 것이 돼 가지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의 것. 또 자기중심의 것이 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제까지 습성으로 모든 범죄했던 그 모든 습관 버릇 이것의 종이 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 환경에 있는 모든 피조물들에게 피동돼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자체도 자기 생각만 그렇지, 다시 말하면 자기 소원만 그러하고 생각만 그러하고 성경에 이런 것을 소원해라 하니까 요걸 말을 알아들어야 하는 데 성경이 이런 것을 소원하라 하시니까 성경이 소원하라는 소원만 하고 성경이 말해 주는 이치만 가지고, 이치만 가지고 소원만 가지고 하곳 있는 것이지 실은 자체도 순전히 마귀와 사망과 죄악의 것이 되어 있고, 그것의 것이 되어 있고, 또 그것의 지배를 받아 있으면서 마음과 말만 그와 같이 하고 있는 것이니까 그 결과는 뭣 되느냐? 그 결과는 하나님의 나라에 암초가 되고 맙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암초가 되고 말고 하나님의 나라에 스파이가 되고 만다 말이오. 간첩이 되고 만다 그말이오. 저는 하나님을 위하는데 결국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한다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가장 진리를 지키고, 진리를 지키고 주님의 뜻대로 살라고 하는 그 믿는 자가, 믿는 자라도 이 외식하는 믿는 자가 하나님의 진리를 파괴시키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것입니다. 제사장과 서기관들이 왜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느냐? 그들이 이런 자들이 됐기 때문에 그리 됐습니다.
이러니까, 그것이 어디서냐? 이 마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안하고, 마음에 작용하지 안하고 마음은 다 비워 놓고. 마음이 그 순서인데. 마음을 통해야 영이 건너오고, 마음을 통해야 진리가 건너오고. 마음을 통해야 산 영이 건너오고, 마음을 통해야 주님이 건너오는데 이 건너오는 다리를 다 잡아 떼 버려서 없애 놓고 난 다음에 이것들이 일어나니까 적들, 원수들의 운동이니까 이거는 악령과 악성과 악습과 이 모든 사망과 죄 이런 것들 그것들이 합해 가지고 이름만 대외명분으로 하나님을 섬긴다. 하나님 믿는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기를 원한다 이랬으니까, 자, 속은 통통 공산주의로 탄탄하게 전체가 공산주의 사람, 진짜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나는 민주주의를 소원한다.' 하는 그것은 뭡니까? 그게 뭐이요? 간첩. 간첩이니까 그 간첩은 저는 몰라도 결과적으로는 민주주의 적중의 대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외식하는 자를 두려워하라 했고 주님이 외식하는 자를 이렇게 화 있을지라고 이렇게 말씀하신 것은, 우리는 외식 자를 두려워해야 됩니다. 외식자가 기독교의 적입니다. 적기독이 뭐이냐 하면 외식자요. 적기독이 기독자 아닌 게 아니라 기독자인데 외식자라 그말이오. 외식자 외식자가 뭐이 외식자인가? 마음에 이루어지지 안한 믿음, 마음에 없는 믿음을 이제 몸뚱이에 있게 하려고 말로만 하는 자가 그 자가, 자기가 마음에 모든 것을 갖추지 아니하고 행동할라 하는 자가 외식자요. 그보다도 더 외식자는 행동도 할라 하지 안하고 말만 가지고 다 되리라고 하는 그 자는 외식자 중에 외식자인 것입니다.
이거는 적중의 적이오. 이게 적이요 외식자요 적기독입니다.
그런데, 이 믿는 사람들이 마음 문제를 생각지 아니하고, 그러니까, 자기 몸 밖에 싸우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자기 안에 있는 자기 마음 정비 정돈이 문제입니다. 여기에서 승리를 해 가지고, 대내전을 승리해 가지고 대 내전에서 완전 정복과 정리를 하고 난 다음에 해야 될 터인데 이거는 착수하지 안하고 껍데기, '나도 순교하기를 원합니다. 주여. 나도 순교하기를 원합니다. 나도 주를 위해서' 진정 원한다 말이오. 원하지만, 제가 원하는 것은 진정 원하지만 제가 마귀에게 속해서 마귀에게 미혹이 돼 가지고 마귀의 소원을 제가 마귀의 종 노릇 하느라고 그렇게 간첩 되기 위해 가지고 그렇게 소원하는 것이지 진정 저의 주격인 영이 소원하는 그 소원이 아니라 그거요. 이 문제를 사람들이 모르기 때문에 다 환난을 준다 말이오.
왜정 말년에 그렇게 조선에 믿는 신자들이 많았지만 신사참배를 이긴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얼마나 됩니까? 신사참배 안 하기 위해서 도망 간, 망명 간 도망 간 그거는 패전이오. 물론 그것도 거기서 자 원해 가지고 그 종들이 되는 것 그것보다는 낫지요. 거기서 정조를 팔아서 마귀의 계집이 된 그것보다는 낫기는 났습니다. 도망친 것은. 낫기는 낫지만 그는 자기의 정조를 원수 앞에서 지킨 것은 아니라 그말이오. 패했기 때문에. 망명한 것은 승리는 아닙니다.
승리에는 못 들어요. 패전은 패전인데, 패전은 패전인데, 승리는 못 했으니까 패전은 패전이지만 그 사람은 싸움을 피했기 때문에 아직까지 패전 안 하고, 전쟁을 피했기 때문에 전쟁을 안한 사람이라 그말이오. 이긴 사람은 아니라.
전쟁 안한 사람이지 전쟁이긴 사람은 아니라. 전쟁이긴 사람은 신사 참배를 반대하고 그들과 대항하면서 반대를 하고 반대하면서 옥에 갇혔든지 또 옥에 갇히지 안하고 반대하면서도, 하나님의 능력으로 뭐 반대하면서도 자유로 돌아다니고 반대하고 그런 사람이든지 어쨌든지 그 사람은 싸워서 이긴 사람입니다. 그러면, 자유로 다닌 사람이나 투쟁한 사람은 이긴 사람인데 그 어느 것이 나은지 그것은 주님이 판단할 것이지만. 그거는 투쟁을 이긴 사람이지만 나머지 망명한 사람은 이긴 사람이 아니라 그말이오.
이러니까, 그때도 그렇게 많았지만 실상 그 시험이 오니까 다 꺼 꾸러졌지 이긴 사람이 없어. 뭐 이북에 있는 선천 고을이라는 선천 고을은 거기에는 넷 집이 안 믿는다고 내가 그래 말을 들었는데, 해방 후에, 그 목사님 또 이름을 또 잊어버렸다. 우리 개척 교회 세운 그 사람, 그 목사 이름 이 뭐이요? 저 중앙 교회 우리 개척 교회 세운 데? 그 형제분이 목사인데 다 잊어 버렸어? 그 목사님 동생도 목사님인데 거기 가서 집회할 때, 선천 사람이라요. 내가 '선천 고을에서는 신사참배 어찌 됐습니까?' 한 번 물었어. '아이구 전부 다 졌습니다.' '그 선천은 네 집 안 믿고 다 믿는 다면서요?' '아닙니다. 그거는 좀 오래 된 소식이지 안 믿는 집은 한 집도 없습니다.' 그 고을에는 시장이 안 나.
시장이 안돼. 그렇게 믿었지만, 잘 믿는 것같이 경제 부흥도 되고 모두 잘 믿는 것 같았지만 신사참배에서 일계명을 딱 지키는, 일계명과 이계명이 딱 봉착되니까 전부 패전이라.
그게 뭐이냐? 껍데기만 흉내내서 이래 했지 속에 심령 문제를 해결하지 안했기 때문에 그렇다 말이오. 심령 문제를 해결 안 했기 때문에. 지금도 우리가 심령 문제를 중하게 여겨서 먼저, 영은 됐기 때문에 우리 심령 문제가 첫째 문제요, 그 다음에는 우리 몸의 문제가 둘째 문제요 그 다음에는 우리 행동 문제가 셋째 문제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이번에 대구 집회 한 거와 같이 바라보고 의지하고 복종하는 이것은 셋은 하나인데, 이 셋이 마음에 이루어져 가지고, 그 다음에 그것이 몸에 나와 가지고 행동으로 나와야 되지 마음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몸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 사람 속여 먹을라고 겉으머리 행동만, 행동도 아무것도 없는 것이 말만, 이라니까 말로도 거짓말을 해 가지고 전부 예수를 팔고 예수를 이용하고, 하나님이 교인 떡 만들어 놓으면 그걸 거짓말로 꼬아 가지고 교인들 끌어 가지고 교회 세울라고, 교회 다 됐는데 저 교회를 훔쳐서 내 양을 만들어야겠다는 요런 흉측한 욕심을 가지고 하는 그자는 하나님의 적입니다! 회개 안 하면 망합니다! 어떻게 망하는가? 일생 동안 제가 예수님 믿어야 저도 망하고 다른 사람도 망하고 마지막에 시험하면 다 시험에 다 낙제돼 버리면 그만이지.
그 부자가 얼마나 예수를 잘 믿었습니까? 잘 믿었기 때문에 주님이 사랑했소.
칭찬을 했소. 이랬는데 주님이, 딱 하나 지금 거기에 걸렸는데 그것 때문에 구원은 이루어지지 안하고 있어. 구원을 이룰 준비는 다 했지만 서도 '오히려 너에게 하나 부족한 것이 있다.' 그걸 꼭 집어서 '네가' 그 재물을 의지하고, 재물을 팔아야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고 재물을 의지하고 바라고 그거 힘으로써, 그것으로써 희로애락을 누리고 그것으로 든든하고 전부 하나님 대신 재물이 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고놈이 우상이니까 그것을 뽑아 버려야 되는데 '오히려 부족한 것이 있으니 있는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 주라' 하니까 당장 예수님도 배반하고 영생도 배반하고 다 배반하고 근심하면서 돌아가지 안했습니까?
이러니까, 기독교는 영에서 심령으로, 심령에서 몸으로, 몸에서 행동으로 그렇게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심령 문제를 중하게 다루지 안하는 사람들은 다 외식자입니다. 외식자는, 옛날부터 의인들이 예루살렘 밖에서 죽임을 당한 데는 없습니다. 성경에 그래 놨소,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임을 받은 일이 없어. 다 예루살렘 안에서 죽임 받았지. 이러니까, 믿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받았다 그말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죽임을 받았다 그 말은, 왜 믿는 사람에게 죽임을 받았습니까? 외식자들에게 진실한 신자들이 죽임을 받았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심령 문제를 중하게 다루지 아니하는 사람은 다 외식자입니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마음에 소망이 단일 소망이 되어지는 데는 얼마나 어려우냐 여기서 싸워야 됩니다. 단일 소망, 그런고로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어라 말한 것입니다. 그 소망. 의지. 복종 그 셋은 하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