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2 14:43
속화 변질되지 않는 것이 정직
1984. 7. 10. 화새벽
본문 : 이사야 26장 1절∼7절 그 날에 유다 땅에서 이 노래를 부르리라 우리에게 견고한 성읍이 있음이여 여호와께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시리로다 너희는 문들을 열고 신을 지키는 의로운 나라로 들어오게 할지어다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너희는 여호와를 영원히 의뢰하라 주 여호와는 영원한 반석이심 이로다 높은 데 거하는 자를 낮추시며 솟은 성을 헐어 땅에 엎으시되 진토에 미치게 하셨도다 발이 그것을 밟으리니 곧 빈궁한 자의 발과 곤핍한 자의 걸음이리로다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원종으로 돌아가지 안한 것 그것을 사람들이 사용하기에 편리하고 아주 좋고 그러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좋다는 것이 식물이라면 맛이 좋고. 또 그 물품이라면 그것이 보기에 아름답고, 또 우리가 우리 지식으로 연구할 때에 그것이 사람이 의학적으로 연구하고 무슨 식물학적으로 영양적으로 연구할 때에 이것이 사람에게 영양이 많다 이렇게 하는데, 우리가 그렇게 모두 다 반종들을 만들어서 잡종이 된, 변질시킨 것이 우리에게 좋은지 안 좋은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좋다 하지만 반드시 그것이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느냐 그렇게 생각됩니다.
사람이 어떤 한 물건이라도 그 물건이나 무엇이든지, 일이든지 여러 각 도가 있습니다. 이런 면도 있고 저런 면도 있는데, 사람은 그 전면을 다 보지도 알지도 못하고 부분적으로 알고 또 이리 저리 치우쳐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는 어떤 사물이든지 그것이 하나님에게 대한 면도 있고 또 사람에게 대한 면도 있고, 또 육체에 대한 면도 있고 영에 대한 면도 있고, 영양에 대한 면도 있고, 그것이 교훈에 대한 면도 있고, 또 도덕에 대한 면도 있고, 우리가 그것에서 하나님이 그걸 통해서 가르쳐 주시는, '만물을 보아 알지니라' 하는 가르쳐 주시는 그 계시 면도 있고 여러 면이 있습니다. 있는데, 어쨌든지 그것이 하나님이 지으신 원종에서 변질은 되기는 변질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 하나 둘 변질을 시키고, 요새는 뭐 복합이라는 말도 많이 쓰고 입체라는 말도 많이 쓰는데 이것을 잘못 편벽되게 생각하므로 사람들이 잡종이 되지 않느냐 그런 생각을 가져 봤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사람을 교훈하실 때에, 그때는 농사짓는 이스라엘들이니까 농사를 지을 때에 농사짓는 모든 방법을 다 각 종류대로 구별한다는 것을, 하나님은 이렇게 모든 역사에 대해서 구별을 하신다, 또 종류가 따로 있다, 또 바른 길 곧은길이 있다, 또 소속이 있다, 자기의 계통이 있다, 그런 것을 많이 찾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래서, 어제 아침에 정직에 대해서 말씀했는데, 곧은길은 어떤 것이 곧은길인가? 첫째는 변질되지 안하는 것이 곧은길입니다. 할 수 있으면 그 모양도 변하지 안하고, 변형도 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또 이름도 변명이 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또 행위도 한갖된 것이 좋고, 어디든지 계통이 있고 소속이 있고 종류가 있기 때문에 그 소속을 변동해도 안 되고 또 계통을 자기가 변해도 안 됩니다. 어제 아침에 거기에 대해서 조금 구체적으로 말했는데 오늘 아침은 그런 시간은 없고, 무엇이든지 자기는 정직하기를 힘을 써야 할 것입니다. 일본 사람들 말에는 정직은 일생의 보배라 그렇게 말했는데, 그분들 정직이라고 말하는 것은 물질 취급에 대해서 정직을 주로 말을 했습니다. 물질 취급할 때에 정직하게 해라 그렇게 말했고, 또 이 중국에서는 정직을 가리켜서 '중용지도(中庸之道)라' 무엇이든지 중용을 취해라 또 그렇게 말한 것은 사람에게 대한 정직을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기에 "의인의 길은 정직함이여 정직하신 주께서 의인의 첩경을 평탄케 하시도다" 하나님도 사람에게 대해서 정직하시고 사람도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정직하고 모든 피조물에게 대해서도 정직해야 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정직하면 정직의 걸음을 걸어가는 것이 어리석은 걸음과 같이 되어지는 것도 보고 또 정직한 걸음을 걸어가는 것이 탈선되는 거와 같이 그렇게 보여질 때도 있고. 그것이 오히려 삐뚤어져서 미련한 길을 걷는 거와 같이 그렇게 보여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도가 멸망 받을 사람들이 볼 때에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 얻은 사람들이 볼 때에는 참 그거는 하나님의 권능의 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권능을 자기가 쓰는 길이요 그 권능의 혜택을 입은 길입니다. 그래서 이 정직한 그 길이, 그것이 둘러가는 것도 아니고 탈선되는 것도 아니고 그것이 바로 자기 찾아가는 자기 목적 달성하는 자기 성공을 달성하는 데에 첩경이다, 지름길이 된다, 가속도의 길이 된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이 정직이라는 것은 무엇이든지 곧은길이라는 말인데, 종류적으로 곧은 것은 그 종류를 다른 종류로 이렇게 변질시키지 않는 것. 화합시키지 않는 것, 그러기에, 변질시키지 안하고 그 정직을 지키는, 정직을 지키는 변질되지 안하고 아주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의 그 모든 것, 또 하나님께서 모든 피조물들에게 가르쳐 주신 모든 법칙 그대로 법칙도 변하지 안 하고 또 사람의 질도 변하지 안하고 사람의 소망도 변하지 안하고 사람의 비판이나 평가나 그런 것도 변하지 안하고 모든 것이 다 본질 본성 그대로 있는 것이 있고 그것을 얼마든지 변해 가는 그런 것이 있는데, 세상이 자꾸 변해 갑니다. 변해 가는 그것을 사람들은 과학 발달이라 이래 가지고 대단히 높이 평가해서 이제 그런 것은 의심 없이 그 걸음을 달려서 앞서 가야 되지 뒤떨어지면 안 된다 그래 사람들은 생각을 가집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은 다 망하고 맙니다. 아무리 중간에서 아름답고 좋다 할지라도 그것이 결말이 멸망이라면 그것은 다 손해지 유익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 토막 이 세상 생활에서 사람들은 오히려 자기는 물질이나 이 세상에서 무슨 어서 속히 모든 것이 변질 되어서, 변질되고 변성되기를 원하고 그것을 노력해서 거기에 대해서 능숙한 자면 다 선진자요 복된 자로 이렇게 알고 있지만 세상뿐이라면 그것이 맞는 듯합니다. 그러나 세상뿐이 아니고 내세, 심판, 영원이 있기 때문에 그것이 실패가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은 다 이렇게 저렇게 변질되고 변형되고 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원종대로 또 원질대로 그렇게 있는 것을 다 싫어하고 변해 가기를 좋아하는 그 속에 사람들은 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원종, 원질, 원성 그것을 원하고 찾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세히 가만히 생각해 보면 자가가 더러워진 거나 자기가 상한 것이나 망한 것이나 한 것은 다 변질해서 망해졌고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세상에서 건강이 있을 때에는 이런 것 저런 것 다 원해서 변해지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약해질 때에는 원질을 찾습니다. 또 사람이 마지막 죽을 때에는 원종, 원질, 원성, 잡것이 섞이지 않는 그것을 원합니다. 그것을 원해서 모든 자기 밖에 있는 삼라만상도 이렇게 원종 원질대로 있는, 천연, 자연 그것을 사람들이 높이 평가하고 원하고 있고 사람들도 그걸 원합니다.
그러기에 문화의 어떤 뭐 굉장한 배합을 하고 화합을 해 가지고 한 세계에서 위대한 그 사람에 대한 어미를 느끼고 그 마음에 매력을 느끼는 것보다도 그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원종대로 있는 그것이 조금 발달될 대로 발달되지 못하고 미달되고 미개해 있어도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하고 거기에 무엇이 깊은 얻을 것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들을 가집니다.
그러기에 예술가들이 그 모든 예술을 만들어 놓을 때에 변질되지 않는 그 원종, 원질, 원색, 원성 그것을 자기가 내다가 그려 놓은 것이라든지 만들어 놓든지 할 때에 그것은 사람들이 보고 봐도 권태성이 나지 안하고 매력이 있지만 이렇게 저렇게 꾸며 놓은 그것은 사람이 건강할 때에는 좋은 것 같지만 차차 차차 사람이 자기가 모든 것을 마치고 종말에 이제 알든지 모르든지 절대자의 심판 앞을 찾아가는 그때에는 그런 것이 다 귀찮고 그런 것이 다 더럽고,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나이가 많아 갈수록 자연을 찾아가고 천연을 찾아가고 또 자기라는 사람도 그런 사람이 되려고 해서 마지막에는 못났든지 잘났든지 자기대로는 원종 사람 그것만 남는 것이 그것이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마지막에, 심리학자들이 아마 결론을 지우면 마지막에는 양심밖에 안 남았더라, 마음에는 양심밖에 안 남았더라 할 것이고, 또 자기의 몸에 대해서도 그 모든 것 가공한 것 다 치워 버리고 하나님께서 만든 본질, 원성, 원질 그것만 남아 있다 그렇게 결론을 맺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사람이 자꾸 이렇게 변해지는 그것을 원하기 때문에 이제 기독교도 무엇이든지 변하는 것을 원합니다.
그러기에, 그 색깔이 아름답다 하는 것도, 아름답다 하는 것도 요새 사람들은 아름다운 색깔을 모릅니다. 모르게 됐습니다. 어떤 게 아름다운가? 이런 것 저런 것 전부 배합을 해 가지고 별스러운 그런 변질된 색을 그걸 아름답다고 이렇게 말을 하지만 실은 아름다운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의 그때 원종, 원종 그대로의 그것이 아름답습니다. 그것이 깨끗한 것이요 그게 아름다운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무슨 짐승 한마리라도 여러 가지로 이렇게 배합을 시켜 가지고 별종을 만들어서 좋은 것 같지만 얼마 내비두면 그대로 원종으로 돌아가고 말고 그것으로 인해서 사람이 얼마나 더러워지고 얼마나 부패해지고 얼마나 타락이 되고 얼마나 사람 마음은 흔들려서 순진이라 하는 순도 진도 다 잊어 버렸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를 들어서 숯이 깨끗하다, 숯이 깨끗한 것은 숯은 본질대로 본성대로 본 색깔을 가지고 있는 것이 그것이 깨끗한 것입니다. 그것이 변색됐으면 깨끗하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사람이 타락을 해서 몰라 그렇지 무슨 물건도 그게 벌써 변색이 됐으면, 만일 먹을 음식이라고 하면 변색이 됐으면 그거 먹을 마음이 없습니다. 또 변색된 그 물건은 취급하기가 싫습니다.
변질된 것도 그러합니다. 눈을 밝게 뜨고 보는 사람은 이런 것 저런 것 과학으로 인공적으로 이렇게 많이 화합을 시켜 가지고 만들어 놓은 그런 거는 추접하게 보고 더럽게 보여지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고 원종 그대로 있는 것을 볼 때에 아름답고 취미 있고 깨끗한 것으로 그렇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은 그런 길로 자꾸 돌아가려고 애를 씁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떤 사람 보니까 내나 아주 원종은 아니지만 사람이 그 지방성이 있고 또 민족성이 있고 모든 생활성이 각각 달라 있기 때문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닭이라 하나 할지라도 그 닭도 지방에 따라서 달라집니다. 자꾸 달라서 변해지고 이렇게, 변해졌는데, 하나님이 이 자연을 줘서 변해진 그것은 좀 덜 추접한데 사람들이 만들어서 변화시킨 것은 참 추접합니다.
그래서 그 나라의 원종이 뭐이냐? 원종을 찾는 그것이 아마, 좀 있으면 사람들이 원종에 대해서 간급을 가지는 그런 시대가 올 것입니다. 일본에서 그 지방에서 무슨, 대만에서, 미국에서 거기서 닭의 원종은 무엇이며 그 새 원종이 무엇인가? 원종이 다 종류는 같지만 오래 동안 각 작 다른 지역에서 그 모든 풍토와 풍토를 접해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그게 차차 차차 지방성을 가해 가지고 변해진 것이 있습니다. 있으나, 그것을 사람들이 찾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저 사람이 욕심으로서는 자꾸 변화시키는 것을 원하고, 사람들이 미로, 매력적으로 한다면 지방에 따라서 각각 변해져도 자연적으로 천연적으로 변해진 그걸 원하고, 그것보다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근본 창조할 때의 그 원종이 뭐이냐 하는 그것을 찾고, 찾아보면 거기에 매력이 있고 거기에 각각 이 종류와 저 종류와 뚜렷이 종류가 있는 것이 매력이 있지 그걸 한데 해 놓으니까 이것도 저것 같고 저것도 이것 같아서, 그래 세상은 자꾸 타기를 원하고 구별하기를 싫어합니다.
이러기 때문에, 기독교도 알지 못하는 가운데에 세상이 이렇게 자꾸 혼합하는 이 일을 여러 면으로 하니까 그 혼합이라는 것은 결국 사람도 혼합의 물건이 돼 가지고 사람인지 짐승인지 무엇인지 그것이 자기의 원종도 없고, 하나님이 주신 각자의 자기의 하나님이 주신 그 하나님의 법칙대로 자연생 천연생 그 생의 법칙도 다 잊어 버려 버리고 지금 다 변종이 돼서 원종을 찾아보지 못하고 원리를 찾아보지 못하도록 그렇게 됐습니다. 그것이 들어서 사람을 완전히 썩혀 버리고 더럽게 해 버렸고 사람은 그만 참 구별해서, 무슨 교육이 없었고 수양이 없었지만 에덴동산에 처음에 창조하고 창조함을 받았을 때에 하나님께서 아담이 어떤가 보자하고, 모든 것 들을 이름을 어떻게 짓나 하고 그 앞에다가 주 모아 놓으니까 아담이 이름을 척척 말하는데 그 이름을 오늘까지 유지하고 있고 또 그 이름을 하나님이 보실 때에 잘 됐다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그랬는데, 그것이 에덴동산 뱀이 들어옴으로써 변질돼서 타락해서, 타락에 타락해 가지고 하나 타락하고 백 타락하고 요새는 지금 천도만도 타락을 더했습니다. 이러니까, 사람이라는 것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어디 있는지 사람의 원종을 찾아보지 못합니다. 원종을 찾아보지 못하는데. 원종 그것이 이렇게 변종된 것이 권위 있는 것 같지만 원종은 모든 만물을 다 복종시킬 수 있고 만물이 다 거기에, 존대해서 만물의 영장이 되어졌었고 권위가 있었는데.
지금은 그렇게 권위 있는 과학자가 없습니다. 아무리 과학으로서 발달된 자들이 권위 있다고 해도 만물은 그것에게 복종하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억지로 강제로 한 이것이 뒤에 가셔 탁 놓으면 이제 천리마가 외양간에 갇혀 앉았다가서 고삐가 떨어지니까 마음대로 몇 천리든지 막 뛰어가는 것처럼 이렇게 모든 깃이 다 억제 강제를 만났던 것이, 억제 강제를 만났던 것이 이제 하나님의 자유의 시대가 오면 이런 것들이 다 언권도 자유요 모든 또 자유성. 독립성, 자주성. 또 모두 개성 이 모두 개체 개권성 이런 것 있기 때문에 그것이 이제 퍼붓는 욕이 굉장할 것입니다. 그것이 다른 데 대해서는 원한이 없을 것이고 만물 중에 인간에게 대해서는 굉장한 시비가 있을 것입니다. 그 시비가 있어서 그것을, 그 욕 얻어먹는 그것이 무한한 지옥이요 거기에 대해서 변상과 청구를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영원히 빚진 자로서 월권 남용 침략한 그것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랬는데, 그것이 실은 약해졌습니다. 강해진 게 아니라 약해졌소. 사람들이 타락하는 것은 뭐 때문에 타락하느냐? 자기네들 연구대로 요게 낫다 저게 낫다, 타락한 그것을 전체를 한 마디로 말하면 과학이라 그렇게 할 수가 있고 모든 인본이라 그렇게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 좋아서, 그렇게 하니까 좋은 효력이 나왔고 그라니까 편리하고, 인간이 좋았지 하나님이 좋지 안하시기 때문에 그 마지막은 하나님에게로 돌아가기 때문에 인간은 그렇게 다 해서 하나님을 범한 것뿐이고 인간이 자주장으로 한 것뿐이기 때문에, 마치 사란이 변질되지 안하고 초에 생기를 불어 넣어서 산 영이 됐을 때에는 만물은 다 사람에게 복종을 했고 사람은 하나님 한 분에게 복종하니까 아주 미개한 야만적인 그런, 미개적이고 아주 쓰지 못할 그런 미개적인 것이었지만 그때가 최고의 권위입니다. 이래서, 아담이 타락하기 이전 그때 순간적으로 권위 가졌던 그 권위를 이 자연으로서는 과학 저거가 뭐 이제 남은 해가 있어서 몇 천 년 잊만 년을 간다 해도 과학 그거는 타락만 돼지지 그 권위는 절대 가지지 못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모든 원종을 만드시고 그 종류를 만드셨는데, 그 종류는 그 종류대로 이 종류도 사용하고 저 종류도 사용해서 종류와 종류를 그대로 변질시키지 안하고, 사용하는 데에서 거기서 모든 것이 생명이 되어지고 또 그 계통으로 바로 다 길이 있습니다. 진리가 있어요. 그러면, 짐승은 어떻게, 곡식은 어떻게, 하나님이 정한 원리 원칙이 있는데 그대로 나가는 그것이 사람들에게 유익한데, 그것을 전부 세상은 다 변질시키고 변화시킨 것이 세상인데, 이것이 뭘 변화시켰느냐? 인간에게 하나님이 도성인신 하셔 가지고 생명길을 내신 것이 십자의 도인데, 이 동의 하나인 도도 혼잡 혼합을 시켜가지고 잡것을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래서, 초대 교회에는 이 교리를 가지고 따져서 그것은 틀렸다, 교리 따졌다 그 말을 성경을 보고 깨달은 그 깨달음이 다르니 이거는 틀렸다 이렇게 성경을 원본으로 두고 그 성경을 기준해서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했는데 지금은 성경 가지고 고집하는 사람은 천치 바보고, 아주 세상에서 못 쓸 인간이고, 앞으로는 성경을 기준하고 표본으로 해 가지고 하는 사람은 몇 이든지 죽일 것입니다. 몇 이든지 죽일 터인데, 그렇게까지 세상 이 원리에서, 대적해 나가는 것입니다.
죽일 터인데, 그때 변질되지 아니 한, 성경을 기준해 가지고 모든 것을 비판하고 평가하는 그자는 세상을 다 버리고 저거 생각대로 전부 잡것을 만든 그것이 전부 단체입니다. 열 뿔이 하나가 되어 있는데 그것은 세상에 있는 모든 힘이 전체가 한 덩어리가 될 것입니다. 그럴 때에 어린 양만이 그에 섞이지 안하고, 어린 양은 원종입니다.
하나님께서, 타락하기 전 아담과 같은 사람이 예수님이십니다. 타락하기 전에는 아담은 죄가 없었습니다. 만일 아담이 범죄하지 안했다고 하면 아담은 그대로 영생합니다. 아담을 죽일 자는 없는 것입니다. 모든, 만물을 통치합니다. 그러나 그때에 그것이 변질될 수 있는 것들이기 때문에 변질 됐습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은 이제 그와 같은데 변질될 수 없는 것입니다. 변질될 수 없는 것이 둘째 아담입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하나님이 도성인신 해 가지고 이제는 타락한 거기서 사람을 하나님이 소원하신 대로 '원종으로 돌아가라' 원종으로 돌아가게 이렇게 하시는 이것을, 원종으로 돌아가는 데에는 어떤 법칙을 준해서 가야 되느냐? 신구약 성경 법칙을 준해서 가야 되는데 이것도 전부 혼잡을 다 시켜 놨습니다. 시켜 놔서. 요한계시록 13장에 보면 사람에 대해서 성경에 기준해 놨는데, 그대로 하는 사람은, 감염되지 안하고 속화되지 안한 사람은 명이든지 죽인다고 했습니다. 이래서, 그렇게 감염되지 안한 사람과 어린 양이 이기는데, 감염되지 안한 그 사람은 진실한 사람이라, 택함을 입어도 안 되고 부름만 입어도 안 되고 택함 입고 부름 입고 진실한 사람들이라야 이기게 된다.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진실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사람이 변질되지 안하고 하나님이 창조한 원종대로 된 근본으로 돌아가게 하는 이것이 성경인데, 그대로의 사람, 그대로 지식, 그대로의 행위가 그것이 진실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거 좀 어려운 말이지만 변질되지 안하려고 애를 써야 되고, 변질되는 그것이 마치 성경에 말하기를 음행의 포도주라, 음녀라 하는 이런 것이 다 변질성을 가리켜서 말하는 것입니다. 성도에게도 성도의 본질과 본성이 있는데 그 본질과 본성이 변질되는 그 변질성을 가리켜서 말합니다.
성경 번역이라면 그 나라의 말이 있는 대로 그대로 번역해야 될 터인데 이제 번역이 변질됐습니다. 변질된 것은 자기네들 힘 있는 대로는 이 나라 말로 하면 성경은 이 말은 무슨 말로 번역을 해야 된다 요런 마음이 있지 안하고 그 속에 잡것이 생겼습니다. 그 속에 딴 종자가 생겼습니다. 딴 종자가 생겨서, 딴 종자가 무슨 종자가 생겼는고 하니 제가 지금 걷고 있는 저거 교파, 이거 하나님의 교파가 아닙니다. 모세에게 하나님이 조금만 섭섭하셨을 때에는 '모세야, 네 백성이라'고 이랬지 내 백성이라고 하지 안했습니다. 하나님이 내 백성이라 하지 안하고 네 백성이라고 말했는데, '네 교회'가 있습니다. 각각 인간 제 교회가 있어요. 인간, 하나님의 교회가 있고 인간 제 교회가 있습니다.
인간 저거 교파가 있고 하나님의 교회 교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교파는 하나뿐이요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뿐인데, 이래 가지고 저거 교회에 유리하도록 그렇게 지금 성경 변역도 하려고 하기 때문에 천주교 하고 개혁교하고 이렇게 나뉘어져 있다가서 지금은 인제 합해진 것은 천주교는 천주교대로 저거를 위해서 그렇게 번역할 길이 있고 또 개혁교는 개혁교대로 번역할 길이 있었는데, 각각 그라니까 서로 투쟁이 있고 싸움이 있고 뭐 수많은 사람이 순교도 하고 이렇게 했는데, 지금은 인제 그게 또 둘이 합해져서, 처음에는 하나님의 성경을 저거를 위해서 있도록, 저거를 위해서 이용하려고 그렇게, 저거를 위해서 이용하려고 이렇게 하다가 그것이 지금은 저거를 위할 게 아니라 이제는 둘이 합해서 이용하자 하니까 그게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 가는 것 같으나 하나님 한 분을 향하던 것이 여러 가지 다 각자 개별로서 이렇게 갈라지고 타락했으니까 이게 타락한 것인데, 개별로 타락한 그것이 이제 뚤뚤 뭉치기를 왜 뭉치느냐? 뭉치는 것은 하나님 한 분을 대항하기 위해서 뭉친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 전체를 좀 보는 눈이 있어야 됩니다. 전체를 보는 눈이 있어야 되는데 벌써, 그러기에, 뭐라고 그래 쌓아도 제가 하나님을 믿지 안하고 하나님에게서 타락했으면 저는 큰 것 같지만 망할 일만 자꾸 합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하나님이, 마귀란 놈이 묘하게 해서 명예와 영광이라는 것을 딱 붙여 가지고 붙여 놓으니까 명예 영광심, 허영 허욕이라는 요 명예심이 있지 영광심이 있지 또 그 욕심이 있지 또 자기라는 자주성이 있지 묘하게 요런 것 요런 것 전부 종합해 가지고 하나님을 대항하는 별걸 만드는 것이 이 세상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엇이든지, 어떤 사람들은 벌써 그런 변질되는 것을 싫어합니다.
제가 어제 어디 갔는데, 보니까 그 사람은 무슨 예술가인데, 예술은 언제든지 가치로 두는 것이 그 본질, 본성, 원종대로의 것을 그것을 놓아야 맛이 있고 볼 것이 있지 이 변질되는 것은 암만 많아도 머리 아프지 그러기 때문에, 이 화려한 세상에 가 가지고는 볼 게 없고, 잔부 더러워져서 전부 사람들이 망쳐 놔서, 전부 구석구석 보면 사람 저거 취미대로 저거 욕심대로 저거를 위해서 전부 다 했지 하나님이 해 놓은 것 하나도 그대로 둔 게 없고 전부 망쳐 놨소.
이러기 때문에, 이제 어디 첩첩 산중에나 가 가지고 어디 뭐 그래도 사람이 하나. 나는 가보지 안했지만 무슨 산이라 하더라? 설악산이라든가? 설악산 그런데도 그럴 것입니다. 그런데도 가 가지고 벌써 사람들이 올라가기 편리하도록 길을 만들어 놓고 쇠줄을 만들어 놓고 하면 더러워져서 맛이 없습니다. 사람이 손대지 안한 그게 좋습니다. 사람이 손대지 안한 그것을 사람들이 좋아하고 그것을, 너무 세상이 이러니까 그게 없으니까 그걸 한 조각, 하나의 예술로 하나 제품을 해서라도, 그림이라도 하나 그런 것을 보고 그런 것을 사람들이 찾고 그리워하는 것이 이것이 사람의 본성이요, 거기에 가면 시원하고 재미가 있는데 이 타락한 거는 복잡해서 재미가 없는데, 이렇게, 사람들은 참 감염과 타락과 속화되어지는 그 속화가 하나님 편에, 근본 창조하신 그 원종에서 보일 때에 속화라 하는 것이 더럽다 이러지, 속화가 문화요, 속화가 과학이요, 속화가 이제 세상 건설인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정직한 자의 그 길은 첩경이 된다. 정직을 찾아가는 것이 그것이 인생으로서 지름길을 걸어가는, 가속도로 자기 소망을 달성하는 길이 된다 이랬는데, 그러면, 사람은 곧은길을 걸어가야 되는데 곧은길을 걸어가는 것이 어떤 것이 곧은길을 걸어가는 것이냐? 곧은길을 걸어가는 것이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 의뢰하는 것이 곧은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여호와 하나님 한 분만을 의지해서는 뭐한다 말이냐?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았으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 하시는, 우리에게 타락했기 때문에, 타락한 우리들이 타락에서 구출돼 가지고 구원 얻는 길을 주었으니 이 구원 이것만이 인생들에게 모든 해독을 방어할 수 있고 이것만이 모든 원수를 승리할 수 있고, 이것만이 모든 것을 회복해서 인간의 본지위를 회복할 수 있고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을 선물로 받아서 다 취득할 수 있다 하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면,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았다.' 구원이 뭐인가? 구원은 곧 하나님의 의요. 하나님의 의인데, 구원이 뭐인가? 구원은 우리가 받는 이구원이요 예수님 믿는 구원입니다. 이 구원 뭐이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속해 주신 것이 대형으로써 사죄를 주셨고, 대행으로써 칭의를 주셨고 대화친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 된 이 친교를 맺어준 이것이 이 세 가지 대속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그러면. 이 우리 구원이니까 우리는 이 세 가지만 하는 것이 정직한 걸음입니다.
사람은 이 세상 사람들 아주 민첩한 사람 있지만 그 사람이 정직이 없으면 변질될 사람, 그 사람은 계통도 없고 소속도 없고 혼합시켜서 그저 이랬다가 저랬다가 길가 가다 이래 변질되는 그 사람은 아예 취급하기를 저거는 위험한 물건으로 취급하고 위험한 인물로 취급하고. 아무 쓸모 있는 가치 있는 물건으로 취급하지 않습니다. 날쌔게 해서 이것도 퍼뜩퍼뜩 시야가 아주 빠르고 이렇게 하지만 사람이 변질되는 그 사람은 무가치하고 결국은 자기 꾀에 자기가 빠져서 자기가 판 함정에 차져서 죽는 것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오히려 미개를 원합니다.
사람이 다 심리가 있소. 재판소 판사가 판결할 때도. 판사가 판결할 때도 딱 보고 그 사람이 '아, 조 사람은 변질이 많다. 저 사람은 저 말이 다 변질에서 나왔다. 저게 조화에서 나왔다. 감염에서 나왔다. 저게 원리 원칙에서 나온 게 아니다.' 그 사람부터 먼저 해서 어느 사람이 변하지 안 하고 원질대로 있는 사람이냐 그것을 알라고 하는 것이 아주 대법원의 판사입니다.
지금은 세상에는 다 더러워졌기 때문에 다 한가지이지만 사람을 볼라 하면 이 사람 말 저 사람 말 이래 듣고 말로만 가지고 판단하려 하지 안하고 사람 보고 요 사람이 본질로 되어 있는 사람이냐, 저 사람이 변질한 사람이냐, 요 사람은 요거 아주 속화되지 안하고 요거 본질로 되어 있기 때문에 요 말 하는 것으로도 요것은 자기 본성에서 나왔고 요게 참에서 나왔고, 그렇게 조화되고 변화되지 안한 사람을 판정을 딱 하고 난 다음에는 그 사람이 그걸 판사가 딱 결정 지우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변호사가 나든지 뭣을 하든지 그 사람은 그 사람의 편이 돼 가지고 자꾸 변호해 나갑니다. 그 사람 편이 돼 가지고 결국은 그 본질의 사람 이 사람 본질 본성대로 사는 그 사람을 승리케 하려는 것이 그것이 올바른 판사의 지혜입니다. 그러나 요새는 거의 다 썩어서 없어.
그러기에 이 여라 가지 말하는 것은 뭐이냐? 사람이 사죄를, 자기가 사죄 주심을 벗지 안하려고 하는 것, 사죄를 벗지 안하고 칭의를 벗지 안 하고 화친을 벗지 안하고 이 세 가지 대속을 안 벗으려고 하는 것이 이것이 사람으로서는 정직한 길입니다. 이 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이것 다른 뭐 조화도 아무것도 없소. 아무것도 없어.
그러면, 신구약 성경이 무엇을 증거하고 있느냐? 이 세 가지 구원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구원만 보고는 우리가 모르기 때문에 구원을 문서로 증거해서 이 세 가지 구원 이것이 너의 갈 길이라 하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 문서 계시 진리요, 진리요, 또 하나는 이 성령님인데, 성령님도 뭐 하느냐? 성령님도 딴 거 가르치지 않습니다. 성령님이 하는 일은 우리에게 사죄와 칭의와 화친 이 세 가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우리가 가지도록 하고, 알고 깨닫고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이 대속을 우리에게 알려 주고 또 보여 주고 이렇게 가르쳐서 가지게 해주고 이 대속을 가지게 해 주고 이 대속으로 살게 해주고 이 대속을, 세 가지 대속을 위하는 것 외에는 성령이 와서 하는 일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신구약 성경도 털끝만치도 없습니다. 요것만 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으면 될 것인데 너무 범위가 넓으니까 사람은 자기 욕심으로, 무엇으로 사람이 축소해졌느냐? 사람이 뭐 때문에 작아졌고 뭐 때문에 함정 속에 들어갔느냐? 뭐 때문에 감옥 속에 들어갔느냐? 무엇 때문에 자유하지 못하고 보자기 속에 자루 속에 볼끈 파묻혀 가지고 쥐 잡을 때에 나 여기 서부교회 와 가지고 쥐 한번 잡았는데, 뭐 어떻게 쥐가 많은지. 이 딱 자루를 커다란 걸 만들어 가지고 구멍에 딱 대고 저기서 투닥 투닥 하니까 막 들어오는데 나중에 보니까 자루에 이만치 쌓였어. 이만치 쌓였어. 그놈이 그러니까 그걸 거석 할 수가 있어야지? 이걸 달리 못하고 그래 가지고 볼끈 조아 매가지고 물속에 딱 담아 놨다 나중에 보니까 그 뭐 굉장히 많이 잡혔어. 이거 모양으로 사람이 자루 속에 들어 가지고 정신 못 차려. 자루 속에 들었기 때문에, 인간이 어디까지 나왔느냐?, '모든 존재는 자연히 생겨졌다. 또 이 창조하신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인정하는 것은 등신 중의 등신이다.' 그게 어리석은 것이라.
이러기 때문에 '제가 묘사하기를 하나님을 부인하는 모든 지식은 모가지 끊긴 짐승과 같기 때문에 그게 뛰고 굴릴 때는 힘이 굉장히 많은 것 같지만 죽으려고 뛰고 죽으려고 날뛰는 것이다, 아무 지척을 분별하지 못해.
이러니까, 사람이 이 사죄와 칭의 화친 요 세 가지 요것만이 저들의 가는 길이요, 곧은길이요, 요것이 모든 원수를 피하는 길이요, 요것이 모든 대적을 정복해서 이기는 길이요 요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마고 하신 그 모든 것을 취득하는 것이라. 이것이 취득의 유일의 길이요, 승리의 유일의 길이요 이것이 방어의 유일의 길이라 이것을 가리켜서 구원으로 성과 곽을 삼으셨다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전부 자기 때문에 어두워졌습니다. 자기에게, 자기에게 어두워졌소.
자기 가진 돈 때문에 어두워졌고, 자기 가진 지위 때문에 어두워졌고, 자기 가진 권세 때문에 어두워졌고, 자기 가진 자기 위신 때문에 어두워졌고, 자기 모든 영광 명예 때문에 어두워졌고, 가진 지식 때문에 어두워졌고 이래서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보다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이 더 쉬우리라' 이렇게 말씀해 놨소. 이러니까, 사람들은 그거 가지면 좋은 줄로 알지만 가진 그것을 없애기가 이렇게 어렵습니다. 가지기가 어려운 게 아니라 없애기가 어렵다 말이오. 없애면 하나님으로 전부 돼. 어리석지를 말아요. 예수 믿는 것은 염려 없이 믿어야 됩니다. 염려하는 게 아니오. 모든 것 가든지 오든지 무슨 상관이 있소? 그것이 마지막은 하나님의 것이 된 사람의 것이 되고 맙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곧은길을 줬기 때문에 속화되지 마십시오. 속화되지 말아야 됩니다. 뭐 이것 저것 하루도 소식통이 얼마나 오는지 모릅니다. 이것 저것.
무슨 회, 저 회 뭐 뭐 하는데 어떻게, 그 돈이 상당히 많은데 그 돈 하나도 주도 안하는데 막 달려들어요. 그거는 뭐이냐 하면 자기 사다리이기 때문에 그 사다리에 들어와 가지고 자기 사다리 돼 달라 하기 때문에 사다리 값을 내는 것입니다. 남의 사다리 될 필요가 뭐 있소? 그 사다리 될 필요가 뭐 있소? 또 사다리를 만들 필요가 없어. 하나님께서 들고 이래 가속도로 들고 공중으로 날아 올라가는데, 엘리야가 바람 타고 올라간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 형식계시입니다.
우리가 사죄와 칭의 이 믿음으로 날아올라가는 길은 무한하신 주님에게까지 도달하고 마는 것입니다. 이런데, 그것도 보니까 바람 타고 아니라 뭐 타고 올라간다 하더라? 병거 타고 올라간다 하더나? 자꾸 속화해서.
그러기 때문에, 그저 참 사람들은 광문다학을 해야 되지만 아예 음행의 포도주인 줄 알고, 그것을 하나님의 선물로 먹을 수 있느냐 포도주로 마실 수 있느냐 그걸 알고 해야 되지 포도주로 마실 자는 아예 토해 내야 돼. 포도주로 마신 것은 전부 토해 내야 그 지식이 저를 살리지 그리 안 하면 못 살려. 딴 데 가면 그것만 자꾸 존대하지 토해 내트리라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거 짜다라 어디든지 가면 듣는 줄 아요? 아니오.
그러기 때문에, 지금도 무슨 운동, 또 인제 선교 백 주년 운동이라는 이거는 뭐 누구든지 말해야 그 사람이 성도고 가치 있는 사람이지, 거기에 대해서 반대하면 별사람이라 이래 보지만 그게 무슨 필요가 있소, 있기를? 사람을 요래 가지고 사람 마음을 쪽 끌어 가지고 혹 둘러 마시고 저래 가지고 혹 둘러 마시고 이래 가지고 잔에 가득 찬 것으로서 다 둘러 마셨다, 이래 놓으니까 사람이 외통목으로 자기 갈 희생의 길, 자기 길 고 길을 만든 것을 다 그만 변질시켰다 말이오.
그러니까, 사람이 예수 믿기에 마찰될 거나 어려울 것이 하나도 없어. 세상과 오늘 교회와 다른 것이 뭐 있습니까? 다른 것 없어. 세상보다 세상을 점령하는 데에 교회가 더 앞섰습니다. 교묘합니다. 교묘하요. 이러기 때문에, 전부 음행의 포도주를 마셔서 취한게 아니라 음녀가 다 돼 버렸어. 음녀가 다 됐어.
그러므로 우리가 조심해야 합니다. 마지막에는 합하는 병이 제일 큰 병이오.
사랑하는 병이 제일 큰 병이오. 왜? 사랑이 좋지만, 제일인데, 그러나 뱀의 사랑과 하나님의 사랑이 다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