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22 14:36
속사람으로 자라가라
1989. 1. 3. 화새.
본문: 고후 4:16-18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그러므로' 한 말씀은 위에 4장 전체에 말씀한 것을 두고 '이렇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그러면 그 위에 어떤 말이 있는고 하니 모든 것이 안팎이 있고 또,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고, 점점 천한 것이 귀한 것으로 개조돼 나가는 이런 일들이 있다, 우리의 죽을 자의 생활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와서 살면, 죽은 자로 사는 그 생활 이면에 산 자로 살게 될 때에는 여러 가지로 마찰이 있다 그런 것을 여게 말씀해 놨기 때문에 그것을 두고 '그러므로' 말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낙심하지 아니하는 것은 이 다음에 이유를 말하면서 '이렇기 때문에 우리가 낙심 안 한다' 말한 것입니다.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낙심하지 아니할 그 아니하는 이유를 그 다음에 말씀을 합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 겉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곧 우리의 이 심신의 사람으로 나타난 이 보여지는 이 사람을 가리켜서 겉사람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옛사람이라는 것은 다릅니다.
옛사람은 순전히 악령 악성 악습이 우리의 심신을 사로잡고 작용할 때를 가리켜서, 중생된 자에게 한하여 옛사람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여게 겉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믿는 이 중생된 사람들의 심신의 사람을 가리켜서 겉사람이라 그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면 옛사람이라는 말과 겉사람이라는 말의 아주 판이한 이것을 우리가 또 구별해야 하겠습니다.
'겉사람은 후패하나' 심신으로 되어 있는 이 사람은 후패한다, 자꾸 어그러지가 찌그러지고 부숴져서 못 쓰게 된다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부패한다는 말과는 아주 딴 말입니다.
부패는 썩어졌다는 말이고, 이거 후패라는 것은 우리나라 말로는 같은 글자 비슷하기 때문에 그것도 부패나 같은 것으로 이래 보기 쉬운데 그런 것이 아니고, 이것은 아주 무슨 기계가 이제는 낡아져서 못쓰게 된다, 그러면 썩어지는 것과 낡아지는 것 아주 어그러져서 부숴져서 못 쓴다. 부숴진 것은, 부숴진 것과 썩어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이래서 '겉사람은 이렇게 후패하나' 그러면 나이가 많으면 차차 차차 껍데기 외형은 다 그대로 있지마는, 속에 내부에 있는 정력은 그것은 못쓰게 됩니다. 정력은 왜? 다 빠져 나가 버리고 이제 없기 때문에 다 낡아지고 쇠해지고 또 어그러지고 이렇게 되기 때문에 차차 못 쓰게 된다.
이래서 겉사람은 아주 못 쓰게 될 때, 쓰다 쓰다가 마지막에는 못 쓰게 돼서 숨도 옳게 쉬지 못하고 숨쉴 힘도 없게 되면 그때는 이제 그것은 겉사람의 생활은 끝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겉사람은 후패하나 이렇게 말씀합니다.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이 겉사람이 늙어져 가는 가운데에 속이 새로와지는 사람도 있고, 겉사람이 후패하는 동시에 다 그만 속도 새로와지지 않고 절단나는 그런 사람도 있다. 겉사람이 후패해짐으로 속사람이 새로와지고 점점 좋아질 수 있다 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게 '우리의 속은' 말했는데, 그전에 우리가 성경을 처음에 사서 읽을 때에, 왜정 때에 번역된 것은 전부 속사람이라 이렇게 번역이 됐는데, 해방 후에 번역된 것은 '속은' 이렇게 번역이 됐습니다. 그것은 내가 똑똑히는 모르나 내 짐작에는, 해방 전에는 모든 원어학자들이 그 원어를 공부할 때에 각각 여러 나라의 말로 그렇게 그것을 공부를 했고, 또 가르치고 배우기도 했고 이래서 모든 나라의 말을 거의 동등으로 삼아서 이렇게 헬라어를 연구했지마는 그후에 차차 영어가 공통어의, 세계 공통어로서의 이 세력을 가짐에 따라서 영어로 다 치우치고 기울어져 가지고 사람들은 영어가 권위 있고 다른 나라의 말이 권위가 있지 않기 때문에, 그 영어 권위를 과중히 이렇게 삼아서 기울어진 사람들의 헬라어 학자와 또 그전에 이렇게 영어가 득세하기 전에의 모든 어학들을 가지고 헬라어를 연구한 그 학자들과의 차이가 있지 않느냐? 그래서 그때의 번역은 우리나라 번역도 그러하고 일본 나라 번역도 그러하고 저 중국 나라의 번역도 그러하고 그런데 지금 번역은 달라져 있습니다.
이래서, 지금은 영어가 세계의 공통어가 돼 가지고 있고 이런 권위를 가지고 있지마는 그런 것도 치우치게 되면, 다 장단점이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의 언어들도 장단점이 있고 영어도 장단점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원어를 가지고 성경을 말하는 사람들도 그 사람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어떤 사람의 지식을 배워서 어느 사람이 저술한 사전을 그 사람이 사용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몇몇 원어를 사용할 때에 대략 짐작을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주 번역이 이래도 되고 저래도 되고 다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많이 읽고 성경의 전체를 알아서 그 뜻을 깨달아 나가는 사람에게는 뭐 이 말이나 저 말이나 어떤 말로 했다 할지라도 상관이 없습니다.
그 성경 자체에 명백성이 있기 때문에 성경 자체에 성경을 바로 알수 있도록 하는, 바로 알게 하는 그런 성질이 들어 안에 있고 또, 그 안에는 내재적 영감이 있습니다. 성경 안에는, 성령의 감화가 이 성경 안에 있기 때문에 그 감화는 성경을 바로 알도록 하려고 애를 쓰는, 누구 사람이 아니고 성경 자체 속에 바로 알게 하는 영감이 있는 것을 사람들이 발견하고 그것을 말하기를 내재적 영감이라 그렇게 말을 합니다.
또 우리 안에도 내적 조명의 영감이라고 우리 안에서 환하게 성경을 보고 알려 주는 그런 영감이 또 우리 안에서 또 역사를 합니다.
또 우리에게는 굉장한 기관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래 가지고 모든 접촉하는 데에서 전체를 종합해 가지고 이것 저것 비교도 해 보고 비판도 하는 그런 또 심리 요소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모든 것을 종합 작용하는 그런 영감이 있습니다.
또 그것을 우리들로 하여금 깨달아 받아들이게 하는 또 영감이 있습니다. 우리 속에는 영감의 많은 영감들이 역사를 해 가지고 이렇게 전면적으로 짜여 들어와서 우리에게 이 구원 도리를 알게 하는 것입니다.
이래서 자기가 성경을 보고 싶다고 척 볼 때에는 보고 싶.으면 보는 줄 알아도 거게까지에 나오는 과정에서는 성령이 역사했고, 중생된 영이 역사했고, 또 주위, 환경에 중생된 영들과 성령들과 또 하나님께서 모든 자연의 만물들의 운영을, 당신이 섭리하시는 이 운영을 통해서 모든 만물들을 우리에게 들리게 하고 보이게 하고 접촉하게 하고 그렇게 광범위한 그런 작용을 해 가지고 비로소 이 성경 보고 싶은 마음이 나오게 하는 것입니다. 뭐 그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역사에는 얼마나 우리를 상하지 않도록 해 가지고 역사를 하는지 모르는 그런 역사를 통해 가지고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보게 하고 또 깨닫게 하고 합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성경을 보고 싶을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나에게 직접 역사해 주시는 것이라 하는 것을 믿으면 그게 바로 믿는 것입니다. 또 자기가 성경을 읽어서 깨달을 때 깨닫게 하는, 깨닫게 하는 역사가 콘 하나님의 역사요, 그리스도의 역사요, 성령의 역사요, 그것이 진리의 역사요, 사람이 그리 했으면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붙들고 당신의 그 은혜 시은의 기관으로 써서 이용해서 그리 흘러 나오는 은혜의 기관이라 그렇게 우리는 보면 됩니다.
이래서 '우리의 속은' 했는데 '속은'해도 좋지마는 속사람이라 그래 하는 그 옛날 번역이 그것이 좀 치우치지 않고, '속을' 하는 것은 영문학을 주로 하는 사람들의 그 헬라어 공부고, 속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그 외에 각국의 말을 종합해 가지고 공부한 그 언어학자들이라 그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속은 어떤 게 속인고 하니 곧 네 가지로 우리가 중생했는데 중생한 그 기운이 우리의 이 심신 속에 들어와서 작용하는데, 이 속사람이라는 것은 곧 영이 중생되는 동시에 중생된 영과 법적으로 구원을 받은 우리의 이 심신과 합작된 그것을 가리켜서 속사람이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이래서, 여게는 속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무슨 뜻을 가지고 했는지 모르지마는 그것은,사람이라는 것은 영육이 합해져야 사람이기 때문에 여게는 영은 아니고 육뿐이라는 육에 대해서 육의 기관, 육의 기관 이것이 변화돼서 썩어질 그 정력이, 썩어질 정력이 썩지 아니할 그 기능으로, 신령한 것.으로,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이 모든 시공에 제한을 받지 않는 참 영생할 수 있는 이건 기능으로, 그 힘으로, 영육의 힘으로 이렇게 변화되어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거는 육에만 한한 것이기 때문에 이것은 속으로 번역하는 게 낫다 하는 그런 뜻으로 하지 않았나? 그런데 실은 하면 그것이, 내나 속에 영의 작용과 연결되고 관련된 이 관련을 가진 그 육이기 때문에 속사람이라고. 그렇게 번역되는 것이 그것이 더 바른 번역이 되겠다 그렇게 생각이 되어집니다.
그래서, '우리의 속은'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롭도다 그러면 속사람은 어떤 게 속사람인가? 우리의 이 중생된 영과 우리의 심신이 관련이 되어 있을 때에 그것이 속사람이라, 그것이 법적으로 우리가 이 육체는, 육체의 속사람은 법적으로 구속을 받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 심신은 법적으로 구속을 받아 가지고 있으나 법적으로만 받아 있지 이것이 실상은 가지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이 심신도 완전 구원을 법적으로는 얻어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법적으로만 되어 있는 그것은 순전히 객관 역사지 자기 주관에는 상관이 없는 것인데, 객관의 역사인 하나님 편에서 법적으로 이렇게 대속해서 구속 입은 이 심신이 이것이 지식으로 새로와져야 됩니다.
지식으로 새로와져서 '나는 하나님의 이 대속을 법적으로 입고 있다' 하는 그것을 자기의 지식으로 알아서 지식이 새로와지고 또, 그러고 난 다음에는 '나는 이 법적으로 대속을 입은 자이니 나는 지금 대속 입은 자로 살아야 되겠다' 할 때에 이것이 자기가 행하려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이럴 때에 우리에게는 마찰이 있습니다.
우리가 법적 구원을 얻은 것 가지고는 아무런 세상에서 거리낄 게 없고 마찰될 것이 없으나 법적으로 이거 구속받은 이것이 자기 지식으로 이것을 자기가 가지려고 그 지식의, 지식이 이 법적 구속을 받은, 받았다 하는 그 지식이 새로와질 때에, 법적 구원을 받았다는 그 지식을 가지게 될 때에 이제는 그 지식이 지식과 서로 마찰이 옵니다.
그 지식이 지식과 세상에 있는 이 법적으로 구속을 받지 못한 인간들의 지식과 법혀으로 구속을 받았다는 것을 믿는 자의 그 지식과 거게서 마찰이 오고, 또 자기 안에도 벌써 이럴 때에는 두 지식이 돼서 법적으로 구원 얻었다는 이 지식은 차차 점령을 해서 전체의 지식이 법적으로 구속받은 자라는 것을 자인하도록 하려고 이와 같이 하고, 또 옛사람에게 속한 것은 이것을 부인해서 예수 믿기 전과 같은 그런 자기의 그 심신으로 이렇게 인정을 하려고 자꾸 이제 인정 분쟁이 나고 투쟁이 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나 우리 안에 싸움이 있다는 그 싸움인 것입니다.
이래 가지고 법적으로 얻은 이 구원의 심신이 지식으로 이것이 새로와져서 얻게 되고 지식으로 얻고 끝나 버리면 그걸로 끝나 버리는데, 지식으로 얻는 그거는 실상이 아니기 때문에 지식으로 얻은 것이 실지로 그 행함을 통해서 실상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법이 이것이 자기의 지식화되고 지식이 행위를 통해서 실상화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 가지고 날마다 겉사람, 심신으로 되어 있는 이 심신이 이것이 영생할 수 있는 이 심신으로 점점 자꾸 성화돼 가고 있다. 변화돼 가고 있다.
변화돼 가고 있는 것, 변화돼 가고 성화돼 가고 있는 것을 가리켜서 이거 날로 새로와진다.
새로와진다 그 말은 없는 존재가 새로 생겨진다는 말이 아니고 있는 것인데 그것이 때묻은 것이 때가 없어진다, 깨끗해진다, 그것이 또 완전하게 된다, 객관성 있는 것이 주관성으로 자꾸 이래 변화된다. 또 법적으로 된 것이, 객관 법적으로 된 것이 내 주관의 지식으로 이와 같이 변화된다. 지식으로 변화된 것이 그 행위로 변화된다. 행위로 변화될 때에 그때에 무엇이 있느냐? 잠시 환난의 경한 것이 환난이 되게 된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환난이 된다. 그러면 그 환난을 통해서, 환난을 통해서 법적으로 구원 얻은 그것이 실상으로 이제 예수님이 대속한 것이 이와 같은 완전한 그 육체가 된다. 이러니까 껍데기가 이거 썩는 껍데기 가지고 썩지 아니하는 그 실력을 만들어 낸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이냐? 썩을 것으로 심어 가지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살아나게 된다. 둔한 혈육의 이 모든 정력이, 정력 이것이 이제 신비한 기능이 되어진다. 이 정력이 변하여서 기능이 되어진다.
그러면 기능이 되어지는데 그 기능은 썩어진 것도 있고, 썩어진 것. 썩어질 게 아니라 썩어진 것, 썩어진 것이라 말은 어데다가 말하는고 하니 하나님의 이 정죄에서 원죄와 본죄, 원죄 정죄에서 벌써 사망된 것을 가리켜석 썩어진 것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썩어진 것이 다시 재생돼 가지고 썩지 아니할 것이 됐는데, 영은 단번에 됐고 우리의 이 심신이라 하는 것은 법적으로는 됐지마는 실상으로는 되지를 않았습니다.
그러면 법적으로 된 이것이 지식으로, 이제 지식으로 새로와지고, 그것이 행위로 새로와지고, 이리 될 때에는 나중에 그것이 기능으로 새로와진다. 그게 뭐이냐? 부활한 자의 능력이다.
그래서 빌립보 3장에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이제 이전에 가치로 삼았던 것은 다 똥오줌과 같이 배설물로 이제 다 여기게 됐다.' 이거는 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얻어지는 그것이 참 가치 있고 진짜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다 알려고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것으로 내가 지식하려 하고 있다. 그 외의 거는 다 잘못 아는 거 소용 없다. 그 안에서 이렇다 저렇다 하면 이렇다 하면 이렇고, 저렇다 하면 저렇고 그 안에 있는 지식으로 나는 정평 정가로 알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어떻게 하든지 그리스도의 고난에 내가 참여해서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권능에 내가 참여할려고 하고 있다.' 그러면 그리스도가 그 고난을 절정으로 말하면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것이 절정인데, 죽은 것이 절정 그 죽음은 일면적으로는 우리의 형을 담당한 그것도 있지마는 일면적으로는 하나님의 전지의 입법의 그 공심판을 통과한 완전한 율법의 요구를 완전히 응해 드리는 이 역사도 있다.
이래서, 속사람으로 이거 죽지 아니할 그 사람으로 사니까 여러 가지 이 죽은 사람들만 가득 찬 세상에서는 마찰이 되어졌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신 것은 우리의 죄값으로 못박히신 동시에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를 대행할라고 하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행할라고 하니까 여러 가지 마찰들이 많이 오게 됐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그 죽음에 동참해서' 그 말은 주님이 이 모든 죄악과 사망에 마찰이 되고 정반대가 되는 영감과 진리대로의 이 생활을 함으로 여러 가지 고난당하는 그 고난을 나도 그 고난을 지금 참예해서 그 고난을 당할라고 한다. 내가 예수님이 대속했으나 나도 죄의 댓가로 당하는 그 고난 당하고, 예수님은 공심판에 해결하는 죄의 형이지마는 우리들은 대속해 놓은 그 죄의 형을 내 속에 있는 죄되는 그런 것을 죽여 멸하기 위해서 우리는 죄의 값을 받게 된다. 또 의를 행하기 위한 그런 어려움을 받게 된다.
이래서 어짜든지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예, 그 죽음의 그 고난에, 죽음의 고난에 참예해 가지고 내가 나도 그리스도의 그 부활의 권능에 참예할라고 하고 있다.
그러면 주님이 이렇게 이 전투를 최고 최후의 완전 승리를 한 것처럼 나도 승리해서 이제 완전히 모든 것을 이기는, 나를 이기고 내 밖에 있는 모든 세상과 피조물들을 다 이기는 이 승리를 완성할라고 나도 지금 노력하고 있다 하는 그것을 가리켜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새롭도다' 17절에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라, 잠시라는 것은 이 시간이 긴 시간이 아니고 짧은 시간인데 이 시간은 무슨 시간인가? 이 시간은 이 겉 사람이 속사람으로 변화되는 기간입니다.
그러면 죽음의 법 이 법대로 사는 악령 악성 악습으로 사는 이것을 죽이는 기간이요 또, 이것이 바꾸어지는 기간이라. 그러면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바꾸어지는 기간이요, 욕된 것이 영광스러운 것으로 바꾸어질 기간이라, 이 혈육의 것이 신령한 것으로 바꾸어질 기간이라, 온전치 못한 것이 온전한 것으로 바꾸어질 기간이라. 그러면 바꾸어 지다는 것이 말하자면 죽는 날까지 바꾸어지는 그 역사가 있는 것인데, 바꾸어지는 그것이 토막 토막에 있게 된다.
그러면 잠시라고 말하는 것은 크게 말하면 우리는 영원에다 비추어서 한 뭐 백 년 산다 할지라도 그까짓 거야 하룻밤 나그네에 지나지 못하기 때문에 잠시라고 할 수도 있고, 또 우리가 개별적으로 말하면 그 바꾸어지는 그 작업이 될 때에 그 개별적으로 그 작업이 끝나면 그 모든 환난도 없어진다. 또, 그 다음에 또 얼마 또 준비해 가지고 또 환난을 통해서 또 그 변화. 작업이 또 시작된다. 이러기 때문에 이거는 잠시, 잠시 환난이 이르는 것이다. 그러면 이 환난이라 하는 것은 자체 속에 병 든다는 것보다도 환경의 그 세력에 밀려 가지고 마찰의 어려움 당하는 것을 가리켜서 환난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환난과 고난과 다릅니다. 고난이라는 것은 순전히 자체의 어려움을 말하고, 환난이라 하는 것은 환경으로 말미암아 오는 그 어려움을 가리켜서 말을 합니다.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그 어려움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라' 이것은 우리가 오랫 동안 시간을 두고 죽는 날까지 명상을 해도 할 수 있는 그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면 환난은 왜 환난을 받느냐? 환난을 받는 것은, 그것은 법적으로 받은 것이 지식으로 받올라고 하니까 거게 마찰이 있고, 지식으로 받은 것을 그 행함을 통해 가지고 실상을 받을라 하니까 그 어려움이 있다.
그러나 그 왜 그것을 환난의 경한 것이라, 경하다 말은 가벼울 경(經)자 얼마 안 된다는 아주 쉽고 가벼운 것을 가리켜 말하는데, 그 경한 것은 왜 경하다고 이렇게 말했는가? 그것은 이 겉사람이 속사람화 되어지는 이것이 어려움이 있지마는 그 어려움과, 그 어려움과 그 실상이 이루어지는 거와 비교하면 조그만한 어려움 가지고 큰 내용이 이루어진다.
이러기 때문에 닥치는 어려움 그런 것이 그 속에서 변화되는 큰 변화의 이 작업을 하는 데에 겉어머리 뭐 파동이 일어나고 비용이 들지마는 비용드는 거, 이거 다시 말하면 유한한 것을 투자애 가지고 무한한 것을 지금 이것을 건설하게 된다. 이 불완전한 것, 없어질 것, 썩어진 것, 다 죽음에 속한 이런 게 다 겉사람의 것인데, 이런 것을 썩어질 것이 영원히 썩지 아니할 것으로, 약한 것이 참 무한한 것으로, 이렇게 피조물들에게 저만 좋아하지,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모두 다 저주거리요 다 원망거리요 불평거리요, 그런 더러운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라, 모든 존재들이 다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그런 걸로 화해지기 때문에, 참 껍데기 작은 파동으로 큰 내용이 이루어진다. 아주 조그만한 아주 작고 적은 그 투자를 가지고 무한한 큰 건설이 이루어진다 하는 것을 가리켜서 여게 말씀합니다. 이래서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지극히 크고' 지극히 진다는 것은 이제 우리가 새로와지는, '속은 날로 새롭도다' 하는 새로와지는, 새로와진 그 자체의 가치를 두고 '지극히 크다' 그렇게 말합니다. 이 새로와지는 것, 우리가 말하자면 진리로 우리가 생활하고, 영감으로 생활하고, 사죄로 생활하고, 칭의, 죄가 없는 의로 생활하고, 전체 우리 생활은 하나님의 공심판에 자유로 출입할 수 있는 의로 생활하고 또,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고, 이제 다 인간들이 자기 향하고 파조물 향해서, 향한다 말은 소망한다는 것인데, 향하고, 이런 걸 향해서 가는데 하나님을 향해서, 어데까지든지 하나님의 무한하심을 전부 자기가 다 할라고, 무한을 향해서 소망해서 가는 이런 것이 지극히 큰 것입니다. 지극히 큰 것.
OOO 목사님이 나한테 편지한 걸 내가 어제 읽어 봤는데 그 편지의 강령을 간추려 말하면, 모든 것 다 감사하다는 그런 인사를 다 하고 난 다음에 내게 대해서 또 좋은 그런 충고의 말을 해 주는 것을 내가 봤습니다.
그 충고의 말은 무슨 충고의 말이냐 하면 '권위보다 사랑이요, 두려움보다 사랑입니다.' 어찌 됐든간에 사랑이 내가 모자라는 것과 모든 것보다도 사랑이 제일 원하니 그 사랑을 해 달라는, 그 사랑이 없어서 그렇다는 그런 말을 해 준 데 대해서 내가 대단히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말이 그 사랑에 대해서 사랑의 그 정의를 아는 것이, 또 나와 아는 데 대해서 조금 차이가 있지 않았나 그런 것도 생각합니다. 저는 사람을 달리 압니다.
이래서 '네 몸을 주어서 네게 있는 것을 다 구제하고 네 몸과 생명을 주어서 희생한다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네게도 소용 없고 남에게도 소용 없다' 하는, 그래서 사랑과 사랑의 아주 이질적인 것, 그래서 참 사랑은 하나님이 가지신 사랑이 있고 배암의 사랑이 있는데, 이 하나님의 사랑 그 사랑은 그것은 무한이요 영원이요, 하나님의 사랑에는 끝이 없고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랑은 오늘 사랑하지만 내일 원수가 되면 무슨 소용 있습니까? 오늘 사랑해서 좋은 것 준다고 했는데 그 다음에 그에게 사망이 되면 무슨 사랑이 되겠습니까? 이러기 때문에 사랑은 전지자만 가질 수 있교 전능자만 가질 수 있고 완전자만 가잘 수 있기 때문에 그분만이 가질 수 있는데, 그분의 사랑을 우리가 받아 가지고 이 사랑 가지고 서로 주고 받고 나누면 그것은 영원합니다.
이래서 여게서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라 하는 이것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이 무엇인가? 그것은 새사람으로 참사람으로 사는 것,속으로 사는 것, 속 사는 것, 속으로 사는 것, 이건 다시 말하면 껍데기 속에, 네 가지로 우리가 살아났습니다. 영은 네 가지로 살아났는데 우리의 육은 아직까지 네 가지로 살아 나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진리와 영감과 피와 영생으로 우리의 육은 살아나지 못하고 영은 단번에 살아났습니다.
그러면 육이 이게 법적으로 살아났기 때문에 이것을 합해서 속사람이라, 영은 살아났고 아직까지 이 심신으로 돼 있는 육은 완전치 못하지마는 이와 연결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날로 새롭도다' 그러면 이 속사람으로 사는 것, 우리가 현실에서 모든 언행심사가 진리로 되는 것, 그보다도 더 나은 성신의 감화로 되는 것, 그보다도 나은 것은 예수님의 사죄 칭의 화친 안에서 되는 것, 이제 이런 것은 다 자본이요 그보다도 거게서 움싹으로 되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서 진리와 영감으로 살아 영생으로 사는 거, 영생으로 사는 거, 이것이 참사랑이지 그 외에 다 제한되어 있는 사랑은 그것이 끝날 때에는 다 소용이 없어지고 다 속고 마는 것이라.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저는 양산동 갈 때에 그 공동 묘지를 통해 가는데 공동 묘지 통해 갈 때에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어떨 때는 '이거는 모두 눈물 박지기나 흘렸겠다. 눈물 박지기의 다 무덤이라' 그렇게도 생각을 해 보는데 그거는 뭐이냐? 그것은 다 믿었던 인간 사랑의 만들어 놓은 비극입니다.
인간 사랑이 만들어 놓은 모든 상대방을 해친 것들이오. 인간 사랑 으로 다른 것들에게 가해 준 것, 해를 가해 준 것, 가해 준 것들이라 그렇게 생각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래서 우리는 그러나 또 이 속에 알맹이만 그럴 뿐 아니라 겉어머리도 사랑이 돼야 되는데, 겉어머리 사랑이 모자라서 그렇다는 그 면에 대해서 나는 반가이 그래 충고를 받았습니다. 그랬는데 그래 또 전화할 그런 마음이 있습니다.
그전에도 제가 그러고 난 다음에 진화를 제가 먼저 했었습니다. 먼저 하고 내가 끝에 그러기를 '너 이래도 어찌 됐든간에 전화를 자주 하고 교제를 자주 하자, 끊치 말자' 하는 그 말을 했고, OOO 목사님도 며칠 전에, 인제 연말이 되니까 그런가 그 또 나한테. 전화를 해서 내가 어떻게 반가운지? 반가워서 그래 피차 반가움으로 이렇게 그래 서로 맞이하고 전화하고, '자주 전화하라' 내가 이렇게 말하고 서로 기쁨으로 나뉘어졌습니다.
그러고 OOO 목사님은 내가 전화를 하려고 그뒤에 다른 사람을 통해서 또 이렇게 노력을 해도 그 전화가 통화 안 됐고, 여러 번 전화할 때는 그 밑에 조사님들이 그 전화를 들어서 '어쩌든지 좀 전해 달라, 여게 가도 안 받고 저게 가도 안 받으니까 내가 좀 통화하자' 하더라고, 이렇게 몇 번 그 밑에 조사님들에게 전화를 했지만 그분들이 전했는지 안 전했는지 그 뒤에 아무리 통화를 하려 해도 통화가 안 돼서, 서로 다 갈라서고 난 다음입니다. 갈라서기 전에도 그랬고 갈라서고 난 다 음에도 해도 통화를 못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잠시,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루게 함이니라.' 영광이라 하는 것은 자기 잘난 것 가지고는 영광이 안 됩니다. 자기 잘사는 것 가지고는 영광이 안 됩니다. 영광이라 하는 것은 자기 아닌 타에서 오는 것이 영광인데, 자기 아닌 타가 자기로 인해서 덕을 많이 봤어야 그것이 영광을 보지 덕 안 보면 영광을 볼 리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영원한 영광이라 말은 영원토록 자기 아닌 다른 것에게 자기의 언행심사의 행동이 그에게 유익을 끼쳐서 그가 나중에 가서 알고 보니까 '아이구 감사합니다.' 이렇게 영원히 감사해도 감사가 그칠 수 없고, 그거 그 행사가 영원하니까, 효력이 영원하니까 감사도 영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영원한 영광이라 말은 영원한 감사라는 말인데, 이것은 영원토록 자기 아닌 타를 돕고 위하고 섬겨서 유익되게 해 준 것이라 그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속사람으로 사는 것, 속사람은 이 네 가지로 지금, 법적으로 살아난 것이 이것이 실상으로 살아나려 하는 이 과정의 희망을 가지고 있는 것들이 다 속사람인데, 이 속사람으로 사는 이것은 다 그런 것들이라.
그러기 때문에 모든 만물이, 만물이 탄식하면서 고대하기를 하나님의 뭇 자녀들의 자유함에 이르는 것이라 하는, 자유함에 이르는 것이 뭐이 자유함에 이르는 것인가? 곧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과 영생으로 사는 그것이 중생된 우리들의 자유이기 때문에 이 생활 하는 것을 원한다 그말이오.
왜? 이 생활 하는 것이 그들에게 영원한 봉사가 되고, 그들에게, 영원히 그들에게 은혜 베푼 것이 되고, 그들을 영원히 구원한 것이 되기 때문에 그것이, 영원한 영광이, 그들에게 칭찬받고 환영받고 감사를 받을 수 있는 이것이 우리가 이 현실에서 새사람으로 사는 이 생애의 결과요 가치인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광고합니다.
오늘 저녁 일곱시부터 증간반 사경회가 시작됩니다. 그래서 반사 선생님들과 구역장님들 또 부형님들 그분들은, 특별히 중학생 고등학생 대학생들을 상대로 해서 모이는 집회이기 때문에 여게 와서 자신들도, 이 청소년 시기를 지나갔으니까 뭐 상관 없다 이렇게 보지 말고, 왜? 청소년 시기에 있는 사람들을 다 지도해야 되고 관 리해야 되고 이들을 다 잘 보호할 그런 후견인적인 그런 책임이 있기 때문에, 와서 참석을 해 가지고 다 좀 은혜도 지혜도 받도록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서로 전화로나 연락을 해 가지고 어짜든지 이 방학기에 방종하지 아니하도록, 자꾸 부모네들이 자기가 하지는 않고 욕심은 도둑놈 되는 욕심을 자꾸 내 가지고 밤낮 가르치기를 '도둑놈 되라, 도둑놈 돼라, 이놈아, 너 사기꾼 돼라, 사기꾼 돼라.' 자꾸 이렇게 가르쳐 놓고, 뒤에 사기꾼이 돼 가지고 도둑놈이 돼 가지고 감옥에 들어가게 되면 그때는 자꾸 후회를 하고, 하니까 됩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알아야 되기 때문에 다 참석을 해서 좀 우리의 상식으로 가지고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