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2:03
성찬
1984. 7. 8. 주일 오전
본문 : 고린도전서 11장 23절∼26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주님이 그때에 떡을 떼어 주시면서, 유월절 떡을 떼어 주시면서 말씀하시기를 '이 떡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니 이 떡을 떼어 먹는 일을 할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또 식후에 잔을 가지시고 축사하시고 주시면서 '너희끼리 나누라 이 잔은 너희들을 위해서 나의 흘리는 피라 내가 오실 때까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시면서 나를 기념하라' 이렇게 주님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26절에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렇게, 그 후 고린도전서 11장에는 그렇게 해석을 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유월절을 지킨 그 유래는 장차 유월절 양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 받을 것을 표징해서 그들이 미래에 있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기념했던 것이요 그 유월절이 이제는 마지막으로, 예표했던 유월절 제도가 실상으로 이루어질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님께서, 예수님이 대속의 제물이 되실 것을 마지막 유월절 지키는 때에 예수님께서 그것을 표시했습니다. 구약의 유월절 지킨 것은 신약 시작의 유월절 한가윗날에,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시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실 것을 예표한 것이요, 또 이 예표될 것을 예수님께서 유월절 잔치를 하시면서 떡과 포도주로 성찬을 시작하시면서 이는 내 몸과 내 피를 표시하는 것이라. 표시하는 의식이라.
그러기 때문에 너희들이 이 표시하는 의식도 행해서 성찬 예식을 할 것이 요 성찬 예식은 하나의 의식이요, 그 실상은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까지 구속 받은 성도들은 땅위에서 예수님의 대속의 살을 기념하고 피를 기념하여. 주님이 어떻게 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는가 하는 것을 우리들 이 똑똑히 깨닫고 모든 사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는 것이 예수님의 피와 살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 살을 기념하라 내 피를 기념하라' 하는 이 말씀의 뜻을 증거하려고 합니다.
기념이라는 것은 어떤 한때에, 있은 그 일을 그 후에 그 일을 기억하고 그 일이 있을 때의 실상과 같이 나타내서 전에 이루어진 그 실상을 그 뒤에 나타내는 것이 그것이 기념인 것입니다. 기념의 뜻은 다 같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도 기념품이니, 뭐 기념이니 하는 그런 것을 많이 행하고 말을 많이 쓰는데.
기념이라 하는 것은 한번 있었던 일을 지나간 그 후에 있었을 때의 그 당시의 실상을 나타내서 모든 사람들이 기억하게 하고 또 전파 하는 것이, 그것이 기념입니다. 기념의 범위가 커든지 적든지 다 그러한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라고 하신 그 기념에 대해서 증거하려 합니다.
간단하게 말해서 이 주님의 살과 피를 기념하는 것은, 주님의 살을 어떻게 찢겼으며 어떻게 피를 흘리셨는가 하는 그것은 예수님의 피와 살의 외형이요, 그러면, 그 살을 찢고 피를 흘리신 그 이유는 무엇이었던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내부적 기념이요, 또 그 살과 피가 아니면 어떠한 처지와 또 어떠한 영원한 결과가 이루어질 것을 주님의 살과 피로써 어떻게 그 모든 것이 다 전복되고 해결되어서 현재와 영원에 어떻게 변화하게 된 그 변화시키신 대속인 것인 것을 나타내서 자타가 알고 전하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의 외형과 또 그 안에 하나님의 심판으로 이루어지 그 심판의 내용과 또 심판 안에 하나님의 영원한 그 해결이 그 속에 들어 있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 안팎을 다 기념하는 일이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세 가지로 증거하려고 합니다. 간단하게 그저 증거만 합니다.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하신 그 대속과 그 범위를 잠깐 생각하려고 하고, 하나는 이 대속을 위해서 이 대속을 나타내는 그 보조 역사를 하는 그 역사들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또 증거하려고 합니다. 셋째로는, 그러면 우리가 이 대속하심을 어떻게 하는 것이 기념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간단하게 증거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예수님의 대속에 대한 첫째는 대속하신 그 사랑이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대속하신 그 사랑이 어떠한가? 예수님은 자존자시요 창조주시요 주권자시요 주재자이십니다. 그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되,' 당신의 모든 창조하신 것과 당신의 온갖 지능과 온갖 속성과 당신의 그 전부는 다 무한한 것이요, 영원한 것이요, 완전한 것이요, 다 불변의 것이요, 주재의 것이니 그 지혜와 능력과 영광과 존귀와 권세가 무한하시고 무궁하신 것입니다. 이 전부를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남김없이 다 기울여 사랑하셨고, 또 영원히 사랑하시기 위해서 부활하셨습니다.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속하신 이 사랑을 우리는 일생을 바쳐서 명상한다고 궁구한다고 해도 그는 영원히 영원히 미달이 될 것이고 또 거기에는 그저 시작하고 어디까지 갔을지라도 차차 성장되어 가는 것뿐이지 끝은 우리가 보지를 못합니다. 무한한 사랑이십니다.
그러므로 이 사랑을, 첫째 그분이 어떻게 크신 분이신지 그 크신 분이 그 모든 것을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함지에서 건지시고 영원히 복되도록 하시기 위해서 모든 것을 투자해서 구원을 하셨으니 그분의 사랑이 어떠한가 하는 것을 우리가 늘 궁구하고 연구하고 차차 지식으로 자라가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생에게는 감사와 기쁨이 있게 하셨습니다.
사람들은 피조물 이런 형편 저런 형편에서 감사하다고 기뻐하기도 하지만 실은 그것들은 다 불완전한 것이요 일시의 것이기 때문에 전체적을 말하면 속이고 속는 것뿐이지 하나도 기뻐할 것도 없고 감사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이의 근시의 안병이 치료돼서 영원을 보는 그 시력을. 지혜력을 차차 가지게 될 때에는 인생은 하나님의 그 사랑에서와 하나님의 사랑의 그 희생에서와 하나님의 사랑의 그 소망을 인하여 인생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것을 깨닫고 그 사랑을 간직하고 그 사랑을 내가 받았으니 나도 하나님을 사랑하는 여기에서만 인생은 기쁨과 평강을 누리게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딴 데서는 없도록 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왜? 다른 것들은 다 여기에 비해서 무능한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 다 접할 때에 그런 것들은 다 소멸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시간을 거쳐서 주님의 대속의 사랑을 우리가 알아 가는 그 지식으로 우리가 자라 가야 할 것입니다. 그 지식이 자라 가는 것만치 자기는 감사의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고. 평강의 사람으로 변화될 것이고, 그분이 나를 이렇게 사랑하시니 평안하고 담대하고 온유하고 부요한 사람으로 변화돼 나가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인하여서만 인생은 참되게 성화돼 나가고 또 만물의 영장의 위치를 가질 만치 광대해지고 또 부강해지고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 사랑을 깨닫는 데는 그분이 어떤 분이신데 나에게 어떻게 하셨으며 어디까지 이 일이 계속되는가 하는 이 세 가지로 궁구하면 점차적으로 깨달아지는 것입니다.
또 그 대속의 범위는 어떠한가? 대속의 범위는 천상천하에 있는 모든 피조물이 전지자의. 완전자의 지성과 지공법, 지성법과 지공법. 이 법칙은 창조주와 모든 피조물이 다 자유하는 법칙이요, 모든 존재들은 다 이 법칙에 속하여 이 법칙을 어기면 사망되고 이 법칙에 일치되면 생명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이요, 하나님이 현시 현시 모든 섭리 운영하는 법이요. 또 영원히 관리하고 영원을 작정하고 판단하는 심판법입니다. 이 법은 현실의 다 자유법이요, 하나님의 심판법이요, 다 영멸과 영생법입니다. 하나님의 지공법은 미치지 아니한 물건이 없고, 공간이 없고, 움직임이 없고, 전체는 이 법에 다 관련되고 귀속되어서 날마다 모든 존재는 이 법으로 인해서 사망하고 이 법으로 인해서 성장되고 존영해져 가고 있는 이 법입니다.
우리가 잠깐 동안 살고 가는 사람들도 나라마다 민족마다 단체마다 거기에 다 법이 정해져 있고 또 사람들에게도 세계에는 여러 가지 그 제법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그 법은 거의 대동소이합니다. 거의 같고 조금씩 차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 법을 공부하라 하는 것은 이 법을 공부해서 아는 사람은 이 법의 권위와 법의 한계, 또 법의 그 역사. 법의 활동, 법이 그 모든 것을 규정지우는 그런 것을 그저 하나님의 법의 몇 억억만분의 일이라도 성질적으로 사람들이 그 면을 알게 되기 때문에 법을 공부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이나 가르치는 사람이나 배우는 사람을 볼 때에 인간의 온갖 그 법을 공부한 사람은 진리를 깨닫는 데에 다소 도움이 됩니다. 기독자들이 인간이 입법해 놓은 그 모든 법을 예사롭게 생각하고 지 내왔기 때문에 이 성경 말씀은 법을 모르는 무식에서 많이 묻혀져 있습니다. 진리가 하나님의 법이요 인간들에게도 자연의 빛인 다 양심들이 있기 때문에 그것들이 다 통계되어 가지고 그대로라도 좀 인간에 대해서 옳은 모든 면의 이치를 생각해서 제정해 놓은 것이 인간의 법이기 때문에 그 법에서 지극히 큰 무한하신 하나님의 법칙을 배우고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법은 다 자연계시요 하나님의 말씀은 특별계시의 법입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범위가 어떠한가? 하나님의 지공법이라고 하면 지극히 작은 어떤 존재, 요새는 바이러스균이라는 그 균이 작다 이라는데, 지극히 작은 바이러스균도 자유가 있고 주장이 있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오늘은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에 다 제정을 해서 원치 안하는 것들에게 다 매여서 제재를 받고 통치를 받게 해서 그렇지 앞으로 영원한 세계는 그런 것들이 다 자유성을 가지고 다 등장합니다. 자유성을 가지고. 등장해서 그 어느 한 존재에게도 불법을 행했으면 반드시 불법 행한 것을 자기는 틀림없이 그만치 받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의 입법자는. 그 배후에 법을 권위 있게 하는 이는 자존자이신 전능자시요, 입법자는 전지의 지혜이기 때문에 그 법에 조그마치라도, 조그만한 세균 하나에라도 내가 잘못된 그것은 그만한 댓가를 치러야 하고 그에게 그만한 배상을, 배상 청구를 내가 받아야 되고 그만치 보상을 해야 되는 것이 하나님의 공심판이신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은 만물에게 대해서 인간이 무례하게, 인간 인간끼리도 강자가 약자에게 무례하게 이와 같이 하지만 앞으로 이 연습 시기. 하나님의 자녀들을 연습하고 연성하고 여러 가지 모양으로 교육하고 있는 이 시기가 일단 지나서 하나님의 심판을 만나게 될 때에 그때는 하나님께서 모든 것에 대해서 다 자유성을 허락하기 때문에 그것을 가리켜서 만물 심판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만물 심판.
이북에서는 저희들이 정권자 사욕대로 심판을 하면서 표현하기는 인민재판이라 해 가지고 '이 사람은 어떻게 해야 됩니까?' 이라면 모든 사람이 있다가 다 '그는 어떻게 처리하십시오.' 하면 그대로 처리하는 체, 저거끼리 속으로 다 비밀 지하 합작을 해서 결정 지워 놓고 그렇게 발표하는 그거는 참 악에 악을 가하는 큰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만물 심판에는 만물이 다 자유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공이라면 작고 큰 모든 존재들이 자기의 존재의 다 자유성과 다 권위성과 자존성을 다 가지고, 얼마든지 의사 발표의 자유, 시비판단의 자유 그 자유성을 가지는 그것이 하나님의 지공법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공법. 하나님의 지공법도 그 끝이 없는 무한입니다. 하나님의 지공법. 하나님의 지성법은 보다 참되고 보다 참되고 보다 참되고 보다 참되고 보다 참되고 참되어서 그 자존하신 모든 존재의 원인이 되는 완전, 영원 무결의 지극히 완전하신 것을 가리켜서 지성이라 그렇게 말씀하는데 철학에서는 사람들이 추측해서 철학에 이데아주의라 하는 그 주의가 있습니다. 이데아주의라 말은 요것보다 나은 것이 이데아라, 그것보다 '나은 것이 있다, 나은 거 나은 거 이라면 하나님께 대해서도 하나님보다 그 위에 나은 것이 있지 않겠느냐?' 그들은 그렇게 말하고 있는데, 하나님은 영원 자존자시요 근본이신 하나님이시요 모든 것을 하나님이 다 창조하셨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피조물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 그분은 자존하신 분이신데, 예수님이 대속하신 것은 우리는 그 지공에 무슨 관련이 있으며 무슨 존재들이 있으며 그 존재들과 무슨 관련이 있는가 그거 모릅니다. 모르는데, 모든 지공에 대한 법적 문제를 다 해결을 지운 것이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그 지성에도. 지극히 거룩에도 다 해결을 지우신 것이 예수님의 대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대속은 옆으로 우리의 이웃이 되는 모든 사람, 피조물, 이 옆으로 모든 피조물들을 향하여 끝이 없다고 할 만한 그 무한의 끝까지 주님이 다 지공의 대속을 베푸신 것이 주님의 대속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언제 증거하기를, 그 사람이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억억억만 년을 지나면서 억 억억억만 존재를 접촉을 했고. 구경을 했고, 자기가 또 그래도 새로 처음 만나는 곳도 있고 처음 만나는 존재도 있는데 그 수는 끝이 없더라. 이랬는데, 억억만 년 후에 처음으로 가는 그곳에 처음으로 만난 존재를 만났는데 만나니까 그 존재가 나를 환영을 하더라. 환영을 하더라. '나는 처음 보고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러느냐?' '아, 자기가 나와의 이런 이런 이것을 이렇게 원만하게 해결되어서 나는 자기에게 불평이 하나도 없고 환영과 고대뿐이다. 자기가 내게 대해서 하나도 불만스럽게 침노한 일이 없고 침해한 일이 없고 나에게 대해서 다 감사하게 했고 내가 원하는 대로 만족하게 했기 때문에 나는 자기를 기다리고 있고 나는 자기를 찬송하고 환영하고 자기를 나는 칭찬하고 자기를 나는 영접하고 찬성 하고 찬양한다.' '내가 언제 그랬기에 그러냐?' '당신이 나에게 얼마, 억억 몇 억억억만 년 전에 어디서 어떻게 그렇게 하셨다.' 할 때에 진리가 나서서 변호하기를, 그 모은 것은 다 참된 진리에 소속해 가지고 진리대로 움직이는데 진리가 증거하고 영감이 증거하기를 '어린 양이 십자가에서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대속의 공로는 지성법과 지공법을 만족케 하는 대속인데 너는 안 했지만 예수님이 대신해서 이들에게 잘못 된 거다 값 받았고 값을 다 받아서 형을 받았고, 이분들에게 있어야 필요한 자기 의무와 책임을 다 해서 줬다.' 하는 것을 억억억억만 년 후에 자기는 처음 만나는 그 존재에게 가 보니까 예수님의 대속이 거기에까지 발 뻗치고 거기에 까지 다 구비되어 있더라 하는 것을 깨닫고 말하는 그런 소리를 제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분의 대속이 위로, 위로 모든 것보다 보다 크시고 크시고 영원 완전하시고 영원 자존하신 지극히 크신 창조주시요 모든 존재 의 주재시요 주권자시요 승리자이신 그분 그분. 한 사람의 머리에 천억 컴퓨터를 만들어 놨다고, 그렇게 무한하신 분, 그분, 그 지극히 큰 분 그분에게까지 도달하여 그분과 관계에 털끝만치도 잘못된 점이 없이 완전히 모든 것을 다 정리해서 해결하고 그분이 만족하고, 그분이 우리를 환영하고 그분이 우리에 대해서 털끝만치 불만이나, 요구의 불만이나 부담의 불만이 하나도 없이 완전히 해결을 지우셔서 지성과 지공의 완전 대속을 하신 것이 예수님의 대속인 것입니다. 이는 피조물이 할 수 없는, 이는 피조물이 영원히 가도 알지도 못할 대속을 하신 예수님의 대속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의 범위가 어떠한지 우리는 시간을 걸쳐서, 주님의 대속의 범위가 어떠한지, 자기에게 성경 진리가 가르쳐 주고 또 영감이 가르쳐 줘서 그 대속의 범위가 얼마나 넓다는 걸 자기가 깨달아 가는 가운데에서 우리는 주님의 대속의 사랑의 태속에서 자라가고 있다, 주님의 사랑은 우리 전후좌우에 가득 차서 주님의 우리는 사랑 안에서 헤엄치고 살고 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 자라고 자라면 그의 완전하심에까지 그의 거룩하심에까지, 그의 깨끗하심에까지, 그의 형상을 온전히 입는 데까지 자라 갈 수 있는 주님의 대속의 범위를 우리가 연구하고 아는 가운데서 자라 가고, 이 대속의 범위를 알 때에 원수는 없어집니다. 대속의 범위를 알 때에 조브랍게 시기심, 쟁투심, 모든 질투심 이런 것들은 다 없어지고 우리는 당신이 키워 주시는 대로 넓어져서 그분이 지공 지성법에 대속하신 크 대속을 입은 자에게는 이제 무궁세계에 가 가지고 억억억만 년토록 무궁세계의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지만 우리가 구경할 곳도 방문할 곳도 무한입니다. 방문할 곳도 무한이요 구경할 곳도 무한이라.
그래도 궁극적으로 말하면 피조물 세계이기 때문에 끝은 있기는 있지만 억억억 억러억억만 년에서 우리의 시찰이나 우리의 관경이나 우리의 관광이나 우리의 모든 순회나 우리의 면접이나 우리의 방문이나 그것이 끝나지는 못합니다. 이런 지극히 크신 대속을 우리에게 입혀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대속으로 우리에게 소망이 온 것은 어떤 소망이 왔는가? 첫째로 지극히 크신 분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지극히 크신 분의 아들이 됐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 됐습니다. 공연이 아니고 우리는 아버지를 부를 때에 평안하고, 아버지를 불러서 의논할 때에 그는 참 무한한 자비를 가지고 우리의 지식이 생각도 못 하는 데까지 우리에게 완비시키고 우리를 단속시키시고 우리를 깨끗케 하시고 우리를 목욕시키시고 우리를 깨끗으로 갈아입히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부족함이 없이 넘치게 미리 미리 준비해서 갖추어 가지고 우리에게 주셔서 모자람이 없는 것을 우리가 다 체험하고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이래서, 우리는 영생하는 생명을 얻어서 우리의 소망은 영생입니다. 영원히 살 것입니다. 영원히 산다는 것은 존재하니까 좋다는 말이 아니오. 영원히 사는 영생한다 말은, 하나님의 지공법 지성법이 있기 때문에 털끝만치라도 삐뚤어지면 사망됩니다. 삐뚤어지면 사망됩니다. 영생이라는 말은 영원히 영원히 지공법과 지성법에 거리낌이 없는 깨끗으로 깨끗으로 완전으로 완전으로 영원히 산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생하는 생명을 가졌고 영원히 삽니다. 하늘나라를 우리의 보좌 삼고, 모든 우주를 발등상 삼고, 주님을 우리의 머리로 모시고. 우리의 선생님으로 모시고. 우리의 목자로 모시고. 우리의 제사장으로 선지자로 왕으로 모시고, 우리의 남편으로 모시고. 우리의 주로 모시고, 우리의 모든 소망으로 모셔서 이렇게 사는 이 소망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또 하늘의 것은 영계 것을 말하는데 영계 것과 물질계의 수많은 것, 우리는 그 모든 것을 사랑해야 됩니다. 그 모든 것이 장차 주님 앞에 기업으로 받을 우리의 것들입니다. 누구야 비웃든지 말든지 영계의 천군 천사와 모든 것과 이 우주의 수많은 항성. 수많은 위성. 유성. 수많은 존재. 지구상에 크고 작은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방언과 모든 것, 다 이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 것으로 주어 그로 우리가 소유의 기쁨을 가지고, 그를 행복 되게 함으로 우리의 평강의 기쁨을 가지고, 소유. 소유의 행복이라 하는 것은. 참된 것은 무한합니다. 자기 소유 그것이 잘됨으로 자기가 행복, 소유 그것의 미로 인해서 자기가 기쁨의 행복, 소유 그것을 복되게 해 줌으로써 행복, 그 소유로 말미암아 자기를 섬기는 그 모든 숭배와 존대를 받음으로 행복, 그런데, 이 세상 것은 너무 껍데기요, 너무 껍데기요 썩은 것이요 너무 거짓부리입니다.
소유에 대한 행복도. '천상천하의 모든 것은 다 너희 것이니라' 성경에 말했습니다. 하늘의 것과 땅의 것과 이제 것과 장래 것과 사망과 생명과 바울과 게바와 아볼로와 이 모든 것이 다 너희 것인데, 너희는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것이 되면 너희들이 하나님이 욕구하시는 제사장 선지자 왕으로 변화되면 모든 천상천하의 피조물은 너희들을 바라보고 너희들을 의지하고 너희들에게 소망 두고 너희들로 인하여 살고자 하고 너희들로 인하여 오는 하나님의 충만을 덧입고자 하려 하는 것이 모든 피조물의 소망이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그 대속의 사랑의 그 무한함, 예수님의 대속이 어디까지 세밀한가? 조그만한 그 바이러스균 한 마리에게까지 세밀하고 거기에 하나에게도 거리낌이 없고 그 지공의 모든 존재가, 모든 존재가 가지고 있는 그 자유성 자유권 그 지공법에 거리낀 것을 다 해결 지웠고, 영원 자존자이신 지성자의 지성법의 모든 것을 다 해결 지워서 대속해 주신 것이 우리의 대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속은 변치 안하니 이 대속을 지금 우리가 알려 하는 것이오, 이 대속을 입고 이 대속을 누리려 하는 것이요, 오늘에 그 대속을 부인하면 그 대속이 오래 가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그 면에서 그 대속을 제 대속이 돼 있지만 누리지를 못합니다. 누리지를 못하니까, 이제 영원히 누리게 하기 위해서 예수님이 다시 삼 일 만에, 창조주가 피조물을 입은 몸으로 다시 부활하신 것은 영원한 예수님의 사랑의 희생인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죽으심은 단번에 죽으심이요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영원한 희생인 것입니다.
이렇게 지극히 큰 대속을, 지극히 큰 이 대속을 뒷받침 하고 있는, 이 대속을 수종들고 있는. 이 대속을 위해서 거기서 지금 종노릇 하고 있는. 이 대속을 위해서 수종들고 있는, 이 대속에 뒷받침, 이 대속을 끝까지 완료하도록 보조 역할을 하는 것이 둘이 있으니. 무엇인가? 하나님이신 성령이십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주님의 대속을 뒷받침해서 대속을 우리들에게. 대속 자체를 우리에게 알게 해서 여기에 알게 하는 데에 성령님이 거기에 협조해서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가 알아, 이 무한하신 대속을 알아. 대속의 사랑을 알고, 대속의 범위를 알고, 대속의 소망을 알아, 이 대속을 알아, 대속을 알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성령님이 이 대속을 뒷받침 하는, 대속을 위해서, 대속을 위해서, 대속을 위하여 협조 하는, 대속을 봉사하는, 대속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대속에 수종드는, 대속을 이루기 위해서 거기서 온갖 수종을 하는, 지극히 큰 성령이 대속을 수종하고 있는 이것을 우리가 알아야 됩니다.
성령님은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지금 수종들고 이 대속이 이렇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리고 모든 피조물에게 알려서, 모든 피조물이 창조주를 알고 창조주로 말미암아, 피조물들이 창조주를 잠깐 떠남으로 영원히 멸망 받은 그것을 다시 하나님이 대속으로 말미암아 완전히 구출해서 모든 피조물이 영생하게 하는 이 사실을, 하나님은 자존자시요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생겨진 것들이 그분으로 말미암아서만 보존되고 그분으로 말미암아서만 생명과 평강을 가질 수 있다는 이 사실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이 중보자로 알게 하셔서 이것이 바다에 물이 넘침같이 하늘나라에서는. 하나님은 다 모든 존재가 우리의 생명이라. 우리의 행복이라. 우리의 전부라, 우리의 근원이라. 그분에게 우리의 좋은 것이 다 있다. 그분을 위함이 자기를 유일로 위함이요 그분을 바라봄이 자기를 희망 있게 만드는 것이요, 그 분에게 복종하는 그것이 그분으로 모든 면에 부강하게 되어진다는 이 사실을 알리려 하는 것이 이것이 두 보증입니다.
이래서, 요한 1서 5장 8절에 보면 '증거하는 이가 셋이 있으니 성령과' '물과' 하는 것은 진리를 말하고, 홰는 주님의 대속을 말합니다. 이 세 가지 역사가 합해 가지고 하나로서. 예수님의 대속이 우리에게 어떤 대속인가? 우리에게 어떤 효력을 줬는가? 이 대속은 우리에게 얼마나, 어느 정도 필요한가? 예수님의 대속 외에는 우리에게는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만이 우리에게 전부입니다. 이 대속을 위해서 수종자로 성령이 역사하고 진리가 역사하고 있으니 진리는 신구약 성경 문서로 기록한 것은 책자요, 검은 것은 먹이요 횐 것은 종이요 글자이지만 이 신구약 성경이 가르치고 있는 성경 안에 진리가 있으니 이 진리는 뭘 가르치고 있는가? 주님은 어떠한 분이시며, 주의 대속이 우리에게 어떤 대속으로 완전을 주셨으며.
그 대속을 입은 자로서의 행복을 걷는 길이 어떤 것이 행복을 걷는 길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신구약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 문서 계시 안에 들어 있는 진리요 이 진리 안에 보충하고 있는 성신의 감화 감동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이것이 우리에게 증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이 우리 중생된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 아버지 아들 된 것을 증거 하고 있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가지 증거를 우리가 받아서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가 입고 있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입고 있는 것을 알아서, 이 대속을 입고 있는 걸 알아 이 대속을 입은 자로 살아 이 대속을 누려서, 이 대속을 입은 것을 알아 이 대속을 누리는 것은 뭐이냐? 모든 피조물에게 하나님의 생명과 평강으로 충만케 해 주는 것이요, 만물을 사랑하는 것이요, 만물에게 다 환영 받는 것이요, 만물이 나 아니면 살 수 없는 고 초점의, 그 진리의 길을 걷고 있는 것이 그것이 대속을 우리가 입고 벗지 않는 것입니다.
셋째로 우리가 이 대속을 나타냅니다. 기념하는, 대속을 기념하는 것은 사죄를 기념하고 칭의를 기념합니다. 우리가 입으로, 우리는 하나님 율법에서 이런 이런 자기 지식의 범위대로 우리는 이런 범위에 정죄 받은 죄인인데. 이런 지식, 자기 지식대로 이런 율법에 정죄 받은 죄인인데, 이 법에는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가 상고해서 아는 대로 이런 형들이 있는데, 이 법도 무한한 정죄요 무한한 형인데 이 형을 예수님이 대형하셔서 우리에게 사죄를 주셨다 하는 것을 우리가 입으로 증거를 하고, 입으로 증거를 하고, 또 우리가 입은 사죄를 벗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생활하는, 다시는 죄짓지 않는 그 생활로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를 하고, 우리가 병이 들든지 어떤 벌을 받든지 모든 그런 것을 향할 때에 '주님이 내가 범한 죄의 벌을 받으시는 데에 얼마나 고통스러웠는가?' 우리는 모든 질병, 모든 어떤 그 애매한 벌로 받든지, 모든 고문이나 고행이나 벌을 받을 때에, 고통을 받을 때에 모든 고통의 우리가 잘못이 없을지라도 모든 사람들이 우리가 고통을 받을 때에 우리는 범죄하지 아니함으로써 당한 그 고통을 받는 그 고통은 예수님이 나를 대형하신 그 대형을 내가 체험하는 것이요 그 대형을 내가 기념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형벌의 고난에서 주님의 대형을 기념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라고, 의를 건설하기 위해서. 진리를 위해서 의를 위해서, 주를 위해서. 주님을 생각하고 모든 건설의 어려움의 애로를 당하는 그것이 주님이 나를 대행하시는 대행의 그 대행이 얼마나 어렵든지 대행하다가 당신은 죽으셨습니다. 신인양성일위이지만 대행하시는데 죽지 않고는 그 대행이 다 되지 못하고 끝나지 못했기 때문에 그 대행의 어려움에서 죽으셨고, 대행의 어려움에서 죽으셨으니 우리는 이 어려움을 당할 때에 주님의 그 대형을 우리 몸에서 기념하고, 대행을 우리 몸에서 기념하고, 우리가 하나님을 배반치 안하고 하나님을 내가 제일로 모시고 내 안에 모시고 이제는 하나님을 떠나지 안하고 하나님 모시고 살라고 할 때에 제일 어려운 적이 내 안에서 있는. 내 안에 있는 이런 심리 요소 이런 그 감정 요소, 내 안에 있는 수많은 범해 놓은 죄악들이, 이것이 악습인데 악습이 들어서, 주를 내가 내 왕으로, 내 지극히 높은 심령 보좌 위에, 보좌에 주님을 모시려고 할 때에 주님을 보좌에 모시지 못하도록 요런 모든 감정이, 요런 욕심이, 요런 모든 정서가, 요런, 모든 복수성이 요런 것들이 들어서 자꾸 이제. 이제까지 습관 들여 놓은 모든 버릇, 또 내 중심이라는 옛사람 그것, 원죄. 본죄 이런 것이 들어서, 이제 주님을 우리의 생의 주로 우리 안에 모셔서 주님이 우리 안에 주가 되셔 가지고 주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시는 그 역사가 나를 주관하여 나는 그 역사에게 피동되어 역사에게 피동된 나로 인하여서 내게 피동된 내 말이 나오고 내 행동이 나오고 내 생각이 나와서, 주님이 분명히 내 안에 주로 계시면서 주님은 나를 주장하시고 나는 그분에게 주관을 받아 그분으로 인한 그것이 내 언행심사로 발표되고 언행심사는 나와 접선하는 모든 만물에게 다 이르기까지 발표되어 있는 이것이 마땅한 생활인데, 이것이 우리가 기념하는 것인데 우리가 이 일을 하는 데에는 '있는 것을 다 버리지 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자기를 부인치 안하면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한다. 무엇이든지 하나든지 사로잡으면 사로잡는 사람은 거기에 붙들려서 내 제자가 되지 못하다.'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대속의 그 사랑이 어떠하며, 그 대속의 사랑이 어떠하며, 대속의 범위가 어떠하며, 대속의 소망이 어떠하며, 이 대속을 증거 하는 증거가 누가 증거하는가? 이 증거는 신구약 성경에 나타난 이 진리가 증거하고 있고, 또 그 안에 있는 영감이 증거하고 있고, 피의 능력이 증거하고 있으니 이 증거를 우리가 받는 것이 현실이요 이 증거를 나타내는 것이 현실이니 현실은 다 완전을 입었다는 그 확정을 짓는 것이요 이 현실은 주님의 완전을 입은 자가 완전을 누리는 그 권세를 받는 것이 우리의 현실인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현실에서 이 세 가지를 기념하는 이 기념 생활을 우리가 우리의 생활인 것을 알고, 먼저 기념은 주님의 십자가에 못 박힌 대형. 대행.
대화친의 죽으심이요, 그 다음에는 하나님의 지성. 지공법의 해결이요 그 안에는 모든 피조물. 모든 그 실존과 창조주 그분의 실상과 우리와의 완전히 화친을 이루어 영생으로 적이 없는 세계에서, 환영만이 있는 세계에서, 찬양만이 있는 세계에서, 내가 그들에게 필요만 있는 세계에서 사는 것이 이것이 영원한 자유요 영생인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지극히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우리의 어두움을 물리쳐야 됩니다. 우리의 짧은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이 짧은 기간은 영원무궁의 모든 존재의 무한을 해결짓는 우리의 구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