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12:04
성찬
1984. 3. 11.주일오전
본문: 고린도전서 11장 23절-32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와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우리가 우리를 살폈으면 판단을 받지 아니하려니와 우리가 판단을 받는 것은 주께 징계를 받는 것이니 이는 우리로 생각과 함께 죄 정함을 받지 않게 하려 하심이라
오늘 주일은 우리 본교회서는 성례를 행하기로 그렇게 광고되고 또 그렇게 행할 것입니다. 이 성례는 주님께서 정해 주신 명령이요 또 계약이요 또 우리들의 의무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성찬을 먹고 마시는 데는 만물을 복종케 하시는 주님의 그 능력이, 없는 가운데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그 능력이 우리에게 명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찬으로 인하여 지극히 큰 자의 그 능력이 이 성찬에 역사 하시게 됩니다. 그런고로, 이 성찬을 먹는 대로 그 몸이 이루어지는 것이 어 성찬의 결과 입니다.
고린도전서 11장 23절로 25절에는, 이 성찬을 먹을 때에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주님의 몸을 먹고 피를 마심으로 내 몸과 피와 생명이 주님의 몸과 피와 생명과 연합이 되는 그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하나의 그런 의식으로 이루어진다 함이 아니고 실상으로 이루어집니다. 주님의 피와 살과 생명이 되어집니다. 주님의 피와 살과 생명과 내 피와 살과 생명이 연합해서 예수님의 피와 살과 생명과 연합한 것이 되어집니다.
이런고로, 초대 교회에서는 이 성찬을 먹음으로 먹는 자의 그 피와 살이 주님의 피와 살과 연합이 되어지고 또 생명이 연합되어지는 이 실상을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데에서 '아, 이러니까 성찬 먹는 이 성찬의 포도즙과 떡은 예수님의 그 피의 실상이 되어지는 것이라' 그렇게들 주장한 것이 천주교에서 그렇게까지 그들운 담대히 말을 했습니다. 그것을 가리켜서 그 설을, 그 주장을 화육설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실상으로 되어진다, 없는 가운데에서 모든 걸 창조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우리가 먹코 마시는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실상의 피와 살이 실상으로 되어진다 이렇게 생각을 하고, 예수님의 피와 살이 이 포도주와 떡이 실상으로 되어진다는 것으로 이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그 피와 살인 예수님의 육체화된다 해서 화육설을 주장을 했던 것입니다. 그 교리가 천주교와 함께 오랫동안 계속해서 내려왔었습니다.
그라다가 개혁교 때에 그 떡과 포도주가 예수님의 실상의 피와 살이 되는 것은 아니고 다만 주님이 우리 위해서 흘려주신 그 피와 살을 기념하는 일을 하고 기념하는 그 행사에서 우리의 피와 살은 예수님의 피와 살과 연합되는 그 실상의 능력을 얻어 가지게 된다 하는 것을 구별해서 교리로 정한 것이 개혁교 교리입니다. 처음에 천주교에서는 그 성찬으로 인해서 성찬에 참예한 사람들이 그 사는 것이 참 예수님의 피로 살고 예수님의 살로 살고, 예수님의 피와 살로 사는 그 권위있는 그 결과를 보고, 먹을 때에 우리 먹는 구속받은 자들만 그렇게 변화되는 것이 아니고 그 떡과 포도주까지도 그렇게 예수님의 피와 살로 변화된다 하는 것을, 거기에까지 나가서 좀 지나치게 치우치게 나가서 화육설까지 주장을 했습니다. 화육설을 지금 증거하는 것은. 이렇게 성찬은 중요한 의식입니다. 우리의 피와 살이 예수님의 피와 살과 연합이 되어, 그 물질적으로는 실상에 연합이 되는 것은 아니지마는서도 예수님의 피와 살이 땅 위에서 사신 그 생애의 권능적으로 본질과 본질적으로서의 그 성질적으로는 화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결과를 보고 그때 사람들은 그렇게들 많이 말했습니다. 지금도 천주교에서는 화육설을 주장합니다. 또 개혁교에서도 화육설을 왜정 때에는 주장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양산에 있는 ○ 조사라고 하는 사람이 아주 지식이나 모든 면이 탁월한 사람인데 그 사람이 화육설이 맞다는 것을 다시 재개시켜서 개혁교 가운데에 많이 퍼쳤었습니다. 그러나 개혁교는 성령이 주장하기 때문에 그것이 이단이라는 것을 다 깨달아서 정죄함을 받아서 용납되지를 안했고, 천주교는 그 교리에 성령이 떠났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어두워져서 그것을 잘못된 이단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계속해서 내려왔고 지금도 내려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고로 이만치 이 떡과 포도주를 먹고 하시는 것은 내 피와 살과 생명이 예수님의 피와 살과 생명에 연합되는 이 의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연합되는 그 의식, 연합되는 그 결성식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람으로서만 그렇게 논리하는 것이 아니고 실상으로 연합되어, 예수님의 피가 사심같이, 살이 사심같이, 예수님이 사심같이 사상도 변해지고 정신도 변해지고 권능도 변해지고 소원도 변해지고, 마치 예수님의 피와 살의 본질, 본성. 소원, 방편, 능력같이 그렇게 변화되는 그런 능력을 우리가 받게 됩니다. 그걸 보고서 화육설이라고 그런 지나친 오해를 하기까지 그렇게 했습니다. 지금도 그때와 꼭 같이 그렇게 능력은 역사합니다.
그러기에 이 성찬을 먹는 것은 이 성찬식으로 하나님이 베푸신 거기에서 무엇을 먹든지 그대로 그 사람이 화해집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1장 29절에는 자기가 성찬에 참예하면서 자기를 살펴서 죄되는 것을 예수님의 피에 고해서 사죄받고 칭의를 받아서 죄를 완전히 자기가 아는 대로는 깨끗하게 다 고해서 사함 받고 죄없는 자기가 되어져 가지고 예수님의 피와 살로 먹는 사람은 그렇게 예수님의 피와 살의 능력화는 은혜화되고, 살되지 아니하고 죄를 가지고, 자기가 죄에 대해서 살펴서 깨끗하게, 회개치 아니하고 죄를 가지고 이 성찬을 먹으면 그 사람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 것이 되지 아니하고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됩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피와 살은 먹는 것이 되지 안하고 하나님이 먹어서 그 사람 되게 하시는, 먹어서 그 사람되게 하시는 이 의식에서 죄를 먹고 마셨기 때문에 그 사람이 죄가 되어집니다. 죄 뭉텅이가 되어집니다. 성찬에 참예하기 이전보다 죄의 사람이 되어집니다. 그러면, 죄의 사람이 되어지니까, 그 사람의 살과 피, 몸과 피는 고린도전서 11장 27절에. 죄를 먹고 마셔서 죄화됐기 때문에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자가 된다 이랬습니다. 주님의 몸과 피를 대항하는 자가 돼 버렸다, 성찬 참예하기 이전과 달리 그 사람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범해서 대적하는 사람으로 돼 버린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성찬을, 깨끗이 살펴서 자기가 비록 어제까지 오늘까지 몰라서 또 자기 부패성이 강해서, 자기의 못된 습성으로 또 자기 환경으로 인해서 자기가 더러워졌다 할지라도 이 시간이라도 성찬을 먹으면서 주님의 대속한 공로를 입어서 이 시간 빨리 자기를 깨끗게 하지 못 한 것이 있으면 깨끗게 해야 됩니다. 일단 자기를 깨끗게 해 가지고 깨끗한 자기로서 주님의 피와 살을 먹을 때에는 주님의 피와 살과 자기는 연결이 돼 버립니다.
연결이 되니까 자기의 피와 살은 주님의 피와 살의 그 능력이, 그 모든 본질과 본성이 자기에게 와서 자기화됩니다. 그러니까 자체는 주님의 피와 살화돼 버립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렇게 성찬을 먹기 이전과 이후가 그에게 달라지고, 만일 살펴서 자기를 깨끗게 하지 아니하고 죄 그대로 죄를 가지고 먹으면 결국은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음이 아니고 자기의 가진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 되기 때문에 그 사람은 죄화됩니다. 죄화되기 때문에 그 사람의 생애는 주님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주님의 대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의 대적이 되어집니다.
그런고로, 그 사람은 하나님이 아들을 밟는 행위가 자꾸 되어지고, 주님의 피를 자꾸 부정한 것으로 인정하는 행위가 자꾸 되어지고, 성령을 근심되게 하는 행위가 되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 사람에게 대해서 정상적인 원수로 취급하고 대적으로 취급해서 그에게 대해서 소멸하는 그런 역사를 하나님이 이루신다고 했습니다. 다시는 속죄하는 제사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하신 것은 하나님의 지공 지성의 심판에서 대속을 했습니다. 그 심판에서는 우리가 면제했기 때문에 지옥가지 안하고 하늘나라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 대속함을 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심판 앞에는 다 서게 됩니다. 그리스도의 심판에서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불쌍히 여기실라면 불쌍히 여기시고 그 사람을 대적하려면 대적하고 그리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심판은 어떤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냐? 주님이 이렇게 대속 하셨으니, 자기가 어떤 죄와 어떤 형벌을 가졌었는데 그 죄를 주님이 다 대속하시느라고 어떤 죄를 정함을 받았으며, 또 어떤 고난을 당하셨으며, 또 그런 자를, 대속하시고 지극히 큰 지위를 주셔서 하나님과 화친의 자녀가 되고 하나님의 형상을 입는 지극히 큰 하늘나라의 영원한 소망을 주셨으니 그 소망을 그렇게, 나쁜 것을 당신이 어떻게 고난 당해서 대신했는가 여기에 대해서 연구해서 깨닫고, 어떻게 힘들여서 우리를 이렇게 천한 자를 존귀케 했는가 하는 그 사랑의 수고에 대해서 우리가 느끼는 것 그 느끼는 것이 우리가 세상에 있는 동안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참 자기의 그 죄와 형벌을, 우리는 모르는데 신구약 성경 말씀에는 다 기록했기 때문에 성경 말씀으로 자기의 죄와 허물을 깨달아 주님 앞에는 물론 머리 들지 못하는 자이지마는서도 땅 위에 어떤 사람에게도 머리들고 다른 어떤 죄인이라도 멸시하고 천대하고 그렇게 자랑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는 것이 주님 앞에 합당한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자기가 되는 것 만치. 되는 것 만치 주님은 자기에게 필요하신 주님이 됩니다. 주님이 자기에게 이런 데에서 대속하시느라고 얼마나 큰 참 멸시와 천대와 고난과 가난과 낮아지심과 모든 곤욕 모욕을 그분이 당하심으로 내가 구원된 이 점을 생각해서 마음에 주님 앞에 감사할 뿐더러 미안하고 죄송하고 감사하고 부끄럽고 어쩔 줄을 모르는, 주님 앞에 어쩔 줄을 모르는, 이 깨달아서 이런 사람이 되어지는 것과, 그분이 이렇게 대행하셔서 우리 이것을 다 거기에서 해방시켜서 면제해서 죄와 형벌이 없는 자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하나님과 화친을 이루어 지극히 큰 만물 위에 뛰어난 이 소망을 주신 이 일을 하시느라고 수고하신 데 대해서 감사해서, 이제 주님이 나 위해서 어려움 당하신 그를 위해서 내가 어려움을 당할 때에 그 어려움을 내가 개의할 수가 없고 또 나를 이와 같이 구원하기 위해서 큰 힘을 들여 어려움을 들여서 구원했기 때문에 내가 이 구원을 보존하고 또 이 구원으로 내가 살고 이 구원의 의무와 행사를 하는 그 일에 내가 어떤 그 어려움이 있어도 그 어려움을 인해서 이것을 멈추거나 주저하거나 할 수 없는 그런 사람, 자기 죄와 형벌과 주님의 대속하신 그 큰 희생과, 자기의, 희망 없는 자를 지극히 큰 소망을 주어서 존영하게 하신 것과, 그 일을 하시기 위해서 주님이 수고하신 이 주심의 순전히 대속 이 실상을 깨달아 자기를 알고 주님을 알고. 대속 받은 후의 자기를 알고 대속해 주신 또 주님을 알고 이래서 알아서 여기에서 원인이 되어, 요 감각에서 요 깨달음에서 요게서 원인이 돼 가지고 겸손한 것, 주님 앞에 머리들지 못하는 것, 주님 앞에 감사하는 것, 주님으로 인해서 기뻐하는 것 이래서, 죄에 대해서도 의에 대해서도 하나님과 화친을 보수하는 데에 자기의 것부를 다 기울이고 보수할 뿐 아니라 그 생활을 자기가 받아서 그 사람으로 사는 그 생애를 하는 데에 자기가 모든 것을 애낌없이 다 기울여 사는 요것을 하나님이 대접으로 받으시고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말로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노를 풀고 감사하고, 그의 은혜에 감격해서 사는 고 생애가 그것이 가치 있지, 고 무슨 어떤 위대한 일을 했다 어떤 생애를 했다 해서 생애가 가치있는 것이 아니고, 어떤 위대한 일을 했다 해서. 위대한 일 그것이 가치 있는게 아니고, 그분의 구속에 대해서 우리가 깨닫고 느끼고 감격해서 그로 인하여서 우리의 모든 언행 심사의 행동이 되어지는, 그로 인한 것, 그의 대속으로 인한 것, 그 인한 것에 대한 그 인함이 우리에게 가치 있는 것이고 주님이 그것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찬도. 이 성찬에서 그 일이 이루어집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성찬에서 죄를 먹고 마심으로 주님의 대적이 되는 자도 있고 참 깨끗이 하여서 주님의 피와 살을 먹고 마심으로써 주님의 몸이 참 되어서 주님의 몸으로 승리의 그 생애를 이루는 그 사람도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6장 2절로 11절에 보면 지금 읽을 시간 없는데 거기에 보면, 로마서 6장 4절에는 우리가 이렇게 세례받고 성찬에 참예하는 것은 주님과 함께 죽어 장사하는 예식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세례가 성찬보다 앞서 있습니다. 세례를 베풀고 그 다음에 성찬 있는 것인데, 세례는 무엇인고 하니 주님과 함께 죽어 장사하는 장례식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주님과 함께 장례하는 장례식이요, 또 세례는 로마 6장 5절로 6절에 보면 주님이 죽음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부활과 연합한 부활식입니다. 세례라는 것은 주님의 죽으심에 같이 연합해서 장례 지내는 장례식이요 또 주님의 부활하심에 연합해 가지고서 내가 다시 부활하는 부활의 그 연합식입니다. 이리하여 로마 6장 6절로부러 11절에 보면 주님과 함께 죄짓던 옛사람은 죽고, 예수님의 부활에 대하여 다시 예수님의 부활과 연합해서 하나님을 향하여 영원히 사는 자로 발족하는 것, 사는 자로 출발하는 것이 그것이 세례를 받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는 나는 주님과 함께 옛사람 죄짓던 자는 주님이 내 대신 죽었기 때문에 내가 죽은 것이니 옛사람은 내가 세례 받으므로 죽은 것을 지금 증거하는 그 의식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침례교에서는 죽은 표를 나타내기 위해서 땅속에 묻으면 안 되겠고 이러니까 물속에다가 숨쉬지 않게 물속에다가 잠가서 얼마 동안 아주 숨쉬지 안하고 물속에 파묻혀서 죽은 장례 지낸 것을 하나, 물속에 장례되는 것으로서 그렇게 하나의 의식을 행하고, 또 그렇게 죽고 예수님의 부활에 연합해 가지고서 다시 하나님을 향하여서 영생하는 그 산자로 이렇게 출발하는 그 식이 세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는 한번만 받지 두 번을 받지 못합니다.
그런고로, 이 세례 받음으로 죽고 다시 살아난 우리들이 이제는 예수님의 피와 연합을 해서 예수님의 피가 땅 위에서 어떻게 사심같이, 예수님의 피와 살은 악령과 죄악과 사망을 멸하신, 그것을 다 멸하신 피와 살이십니다. 그러면, 이 성찬을 먹으므로 우리의 남은 생애는, 우리는 죄를 멸하는 것이 우리 생애요, 악령의 역사를 멸하는 것이 우리 생애요, 사망을 멸해서 사망이 삼키고 있는 그 사람을 사망을 깨트리고 사망에서 건져내서 살리는 것, 죄에 매여 있는 사람을 죄를 깨트려서 죄에서 해방시키는 것, 악령에게 붙들린 사람을 악령에게서 해방시키는 그 일이 예수님의 남으신 역사요 예수님의 남은 십자가, 주의 남은 십자가를 우리가 자는 생애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성찬에서 죄를 먹고 마셔서 주님의 피와 몸을 대적하는 그 대적의 자체로 화해지든지, 또 주님의 피와 살로 우리가 화해져 가지고서 예수님의 피와 살의 그 능력과 그 역사를 그대로 계속해서 영원히 사는 그 일이 되든지 그런 것입니다.
그런고로, 알지 못하고 먹는 사람은 이 시간이라도 잘 살펴서, 자기가 죄라고 있는 데에는 그것을 다 정리할라 하면 사람 만나야 되고 뭣도 해야 되고 하니까 다 정리 못하나 이 시간이라도 예수님의 피공로. 예수님은 이걸 위해서 피 흘렸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공로에서 다 사죄함을 받고, 자기가 또 다 같은 죄지만 말입니다. 다 같은 죄지마는 이 죄가 예수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죄가 될 수 있고 이 죄가 예수님이 섭섭해 하시는 죄가 될 수 있고 이 죄가 주님이 불쌍히 여겨서 내가 어쩌든지 너를 동정해서 너와 함께 하겠다 하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끌어오는 죄가 될 수 있고, 이 죄가 주님와 섭섭하게 하다가 나중에는 좀 분하게 하다가 마지막에는 주님이 '이놈' 하고서 대적이 될 수 있는 이 죄도 되어지는 것입니다. 죄는 꼭 같은 죄인데 이 죄가 주님을 섭섭게 하는 죄도 될 수 있고, 또 주님을 노엽게 하는 죄도 될 수 있고, 또 주님의 대적이 되어지는 주님의 원수가 되어지는 죄가 될 수도 있고, 이 죄가 주님이 마음에 애처롭게 여기는, 주님이 불쌍히 여기시는 그 죄도 될 수 있고, 주님이 동정하려 하시는, 주님이 동정하시는 죄도 될 수 있고, 주님이 '내가 책임지겠다' 하시고 주님이 그 죄를 다 책임지시고 주님의 그 전부의 그 도우심의 은총을 끌어을 수 있는 죄도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서 다 같은 죄인데 그렇게 되어지느냐? 되어지는 것은, 자기가 죄된 거기에 대해서 느낀 것과 죄의 형벌에 대해서 느끼는 것과 주님이 그걸 대속할 때에 하시느라고 얼마나 큰 힘 들이고 어떻게 큰 희생을 해서 모든 것 다 내놓고. 모든 부도 다 내어 놓고 뭐 옷 한 벌도 없는 그런 천인 천인이 되어지기까지 가지고 하신 그 주님의 대속을 자기가 느껴서, 자기가 죄에 대해서 마음에 깊이 느껴 원통하기 짝이 없고, 주님이 대속함에 대해서 참 감사하지마는서도 부끄럽고 죄송하고 미안해서 견딜 수 없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는. 그렇게 우리가 이 대속을 깨닫고, 자체가 지식으로 깨닫고 그 실감으로 깨닫고 그 행동으로 깨달은 행동을 하고 하는 거기에서 주님의 긍휼과 주님의 동정과 주님의 애처러움과 주님이 책임지시고 하는 그런 은혜가 될 수도 있고, 자기가 거기에 대해서 아주 무시하고 멸시하고 무심히 여기고 뭐 그것을 예사롭게 여기고 이래서 아주 그 죄를 아무 감각없이 뭐 주님이 피로 대속했다 해도 그거야 그런 것 생각지도 안하고 주님이 고난받은 것도 생각지도 안하고 그 죄를 상습적으로 예사로 그라면서, 자기의 행동 여하에 주님이 노여울 수도 있고 동정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요것이 그리스도의 심판입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든지. 자녀에게도, 부모가 자녀에게 대하든지 부모가, 자기 참 남편이 아내에게 대해서라도 아내에게 무엇이 그 어려움을, 병이 들어서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병이 들었는데 자기가 어떻게 해서 참 그거 병 낫우기 위해서 한없는 고생을 해 가지고 어떻게 어떻게 해서 돈을 벌고 벌고 뭐 이렇게 공고해 가지고 그것을 병을 낫우었더니마는서도 그 아내가 평생 거기에 대해서 감격하면서 그저 늘 남편에게 머리를 들지 못하고 감사하면서 아, 내가 남편을 이렇게 고생을 시켰다는, 너무 그 마음을 아프게 생각하고 참 미안하게 생각하고 죄송하게 생각하고, 남편이 고생 당한 것이 아까와서 견디지 못하는 그 마음씀에 따라서 그 남편이 오히려 그 아내에게 위로를 해 주고 그저 마음에 만족할 뿐만 아니라 오히려 위로를 해 주고 너무 그렇게 하지 말라고서 그렇게 해서 그럴수록이 그 남편은 아내를 위해서 다 기울이고 싶은 그런 남편이 될 수도 있고, 그렇게 했는데 그래 가지고 죄짓고 돌아다니면서, 다 죽어 가는 걸 건강으로 병치료 해 놨더니마는 죄짓고 돌아다니며 망령부리고 이래 몇 번 말해도 거기에 대해서 아무 효력없이 이렇게 하면 그 남편이 처음에는 섭섭하다가 나중에는 괘씸하다가 나중에는 분하다가 마지막에는 이제 마음에 분개해서 대적으로 삼아 가지고서 그를 어떻게 그 병이 들기를 원하고 그래 되기를 원하고 하나도 동정하는 마음이 없고 괘씸하고 분개한 마음만 생겨지는 것이 우리 인격성의 본성입니다. 인격성의 본성이요. 이것이 하나님이 만들어 놓은 것인데 꼭 그와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 이 성찬식이 베풀어질 것인데, 죄를 먹고 마시면 내가 죄화돼 버립니다. 죄화되니까 나는 마음에 안 그런데 그만 자꾸 우연히 필연히 주님의 대적의 사람이 됩니다. 주님의 대적자가 자꾸 되어집니다. 대적자가 되어지고, 또 내가 이 시간이라도 모든 잘못된 것을 깨끗이 주님 앞에 회개하고, 이 시간에 회개하고. 또 '요 시간에 회개 우선 하고서 내가 그 모든 정리할 것 내가 회개하고 고대로 정리하겠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작정을 하고 깨끗하게 해 가지고 깨끗한 것으로, 주님의 대속으로 깨끗한 걸 가지고서 주님의 피와 살을 연합할 때에는 자기는 주님의 피와 살화 됩니다. 그래 가지고서 의의 병기가 될 것입니다. 그런고로, 깨끗이 해 가지고. 먹고, 죄를 먹고 마시는 자가 되면 주님의 대적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성찬에 참예하는 것은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받은 것, 세례 받은 것은 같이, 주님의 죽으심에 연합한 그 장례식이요, 또 주님의 부활에 연합한 이제 부활식입니다. 부활식이요. 또 죽고 부활한 자로서 하나님을 향하여 영생하는, 영원히 사는 영생의 출발식이 그것이 세례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세례는 착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이런 세례를 우리가 세례받은 걸 기억하고 성찬에 참예하면서 다른 사람은 아직까지 성찬에, 세례 받지 안하면 참예 못 하는데 나는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성찬에 참예하는 것이니 세례를 어떤 세례를 받았는가 그것을 잘 생각하면서 자기를 구별해 가지고서 이렇게 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지 안하고, 자기를 구별치 안하고 그리 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