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6 08:42
성전
1980. 5. 3. 토새.
본문 : 고린도전서 3장 16절-17절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지난밤에 이 목사님이 설교를 하셨는데 아주 그 표현이 자연스럽고 은혜롭게 잘했습니다. 그런 설교는 다 세계적인 설교입니다. 어디가도 그 설교가 목회 못하지는 안 할 것입니다. 마지막에 가면 조금의 3분 가량 이해하는 되풀이하는 그런 것이 없었으면 더 좋을 뻔했습니다.
또 그러고 설교를 듣는 교인들은 그 소리에 피동을 되지 아니하려고 애를 써야되고 소리를 크게 하고 작게 하는 데에 피동되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되고 또 장소에 그 피동을 받지 않으려고 애를 써야되고 또 그 분위기에 피동을 받지 아니하도록 애를 써야하고 그 수나 양에 대해서 피동을 받지 아니하도록 애를 써야 됩니다.
다만 그 믿는 이치, 그 이치에 외부적 피동을 받고 또 그 이치 안에 영감의 피동을 내적으로 받도록 그렇게 노력을 해야 됩니다. 이 두 가지를 중심하고 나머지기를 다 제거하도록 노력하지 안하면 그 사람은 그만 외식 신자가 됩니다.
그 외부에 피동되면 그런 사람은 고함을 지르는 큰 소리에, 큰 소리하면 은혜되고 작은 소리로 하면 은혜가 안되고 큰 소리에 그 사람은 충동을 받는 사람입니다. 큰 소리면 크게 고함을 질러서 소리가 크면 권위가 있고 또 소리가 작으면 권위가 없고, 이렇게 큰 소리에 피동되는 이런 습성을 들여놓으면 아무리 틀린 일이라도 소리만 크게 나면 그 사람은 권위있는 소린 줄 알고 거기에 복종을 해야 되겠고 또 아무리 권위있는 우주보다 큰 소리라도 음성만 작고 작은 소리로 나면 그것은 무시하는 그런 사람이 되어지면 그 사람은 소리에 피동되는 사람이 됩니다.
이러니까 어떤 환난이 일어나 가지고 고함을 지르고 책상을 두드리고 고함을 지르면 그만 그 소리에 기압되어 가지고서 거기에 피동되어서 다 신앙 팔 수밖에 없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평소부터 소리에 피동되지도 안하고 장소에 피동되지도 안하고 분위기에 피동되지도 안하고 그 양이 많고 적은 그 양에 피동되지 안하고 그 이치에, 참 이치에 피동되는 이 일을 숙달해 놓으면 아무리 공산주의가 와가지고서 고함을 지르고 총부리를 들여대고 뭐라고 한다 할지라도 그런 분위기, 그 소리, 그 장소, 그들의 세력의 양, 거기에 피동되지 아니하고 그들이 하는 말을 이치적으로 따져볼 때 저거는 사망의 말이요, 저거는 아무 뼈없는 말이요, 힘없는 말이라. 그것은 그저 아무 가치없고 권위 없는 말이라. 그까짓 말이야 우주에 가득차도 그까짓 발로 발라 문때버리면 다 문때지고 아무 가치없는 말이라. 이것을 알게되기 때문에 그런데에 눈도 깜짝거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소리에 피동되는 그런 설교를 상대한 그런 사람은 큰 소리해서 내지르는 사람은 큰 소리면 그 앞에 굴복하고, 이제 하는 말을 여러분들이 이해가 되는지 몰라도 요것을 꼭 구별해야 됩니다. 그 소리가 크고 작은데 그 물론 그걸 다 구별 못하는 어린 교인들이니까 크게 하는 것도 좋습니다. 그러나 늘 크게만 해서 그만 그 사람이 큰 소리면 좀 정신이 차려지고 마음에 충격을 받고 조그만한 소리로 하면 충격 안받는 그 사람 되어놓으면 그 교회는 아무짝도 못씁니다. 그것은 천 명, 만 명이 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판판히 세상을 당할 때는 다 패전하고 맙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지진 속에도 계시지 안 했고, 불 속에도 계시지 안 했고, 바람 속에도 계시지 안 했고, 어디에 계셨지요? 아주 자세히 들으면 들릴까 말까하는 그 가는 음성 속에 계셨습니다. 가는 말 속에 계셨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그런 교인들이라 이러니까 여기서 될 수 있는대로 이게 이치에 맞나 안 맞나? 이치에 맞는 소리라면 모기 소리같이 와도, 이치에 맞는 진리라면 이는 세계보다도 크고 우주보다도 큽니다. 그 이치가 우주를 지었어. 이렇지마는 이치에 맞지 않는 그런 것이야 아무리 뇌성 벽력을 한다고 해도 그거는 문제 할 것이 없다 그거요.
그러므로 자꾸 습성을 들어야 됩니다. 사람의 습관이라는 것은 그것이 자기의 본능이 됩니다. 그러기 때문에 습관은 제 이의 천성이라 그렇게 하는 것이 세상이 말합니다. 그래 엊저녁에 조용 조용히 했는데, 아주 자연스럽게 표현을 했고 본인이 깨닫고 또 표현을 했습니다. 또 영감이 안에서 역사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소리는 귀에 쏙쏙 들어오지 안하고 고함을 질러야 되는 그 사람은 빨리 고쳐야 되지 그걸 안 고치면 껍데기 신자됩니다.
그러기에 소리에 피동되지 말고, 소리 안에 진리에 피동되어야 됩니다. 아무리 큰소리를 해도 속에 진리가 없으면 그까짓 소리야 소리가 아닙니다. 그런거는 뭐 상대할 것도 없고 눈도 깜짝할 것도 없습니다. 또 아무리 그 장소가 엄격하고 어떻게 하다 할지라도 그 속에 진리가 없으면 그까짓 장소, 그까짓 뭐 태평양 바다면 더 엄격하지. 또 분위기야 어떤 분위기야 됐던 또 진리 없으면 미꿈미꿈한 사람들이 아주 고관 대작들이, 아주 유명한 사람들이 꽉 즐비해서 뭉쳐가지고서 뭐 한다고 야단을 지기고 해도 속에 진리가 주장하지 않으면 그까짓 뭉텅이야 그 뭐 다 똥뭉텅이 한가지이지. 그까짓 뭉텅이는 다 흙뭉텅이 한가지지 무슨 힘이 있습니까? 또 그 숫자가 아주 뭐 오십만 명, 백만 명, 몇 백 만 명, 몇 천 만 명이면 뭐할건고? 그렇게 많은 숫자가 움직여도 그 속에 진리가 없으면 그것은 죽은 거야. 그까짓거. 어린아이 하나가 움직이는 데에 그 안에 진리가 주장하는 그것은 시시하게 보지 못해. 그걸 멸하면 자기가 절단납니다.
그건 절단 나지 않아.
이러니까 이렇게 평가하는 이것을 꼭 여러분들이 자꾸 힘을 써야 됩니다.
공중에다가 뭐 무거운걸 놓으면 이것을 들어올리는데는 역부러 힘이 있어 이놈을 들어올려야 되고 그대로 유지하는 것도 당그라 매야되고, 자 떨어지는 것은 크다고 떨어지는 것이 어렵습니까? 무겁다고 떨어지기 어렵습니까? 무거울수록 잘 떨어져. 공중에서 떨어지는 이것을 힘을 들여야 됩니까? 힘을 안 써야 됩니까? 힘 안 써도 저절로 떨어지지. 저절로 떨어집니다. 들어올리는 것도 역부러 힘을 들여야 되지마는 떨어지는 것은 저절로 떨어지는 거라.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껍데기로 나오는 것은 저절로 나옵니다. 외식은 저절로 되어져. 외식은 저절로 되어지고 타락은 저절로 되어지고 세상화 되는 것은 저절로 되어져. 힘 안써도 속화는 저절로 되어져. 힘 안써도 속화되어져요. 힘 안써도 타락되어져요. 힘 안써도 외식되어져요. 저 껍데기 나온다 말이요. 자 소리 안에, 그 장소 안에, 그 분위기 안에, 그 뭉텅이 숫자 안에, 그 속에 진리가 있어야지 진리가 없으면 그까짓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진리 없으면 그거는 다 없는 거 한가진데. 없는 한가진데. 그것을 보였느냐? 조금 있다 보면 없어졌어. 그 속에 진리가 있어야 돼. 진리만 있으면 또 무슨 소용이야? 진리 속에 하나님이 계셔야 돼.
그것을 잘 구분을 해서, 우리야 물론 우리의 감정이 세상의 물이 들어가지고서 가라 앉아가지고 있으니까 이것을 좀 요동을 시켜서 충격을 주기 위해서 산에도 가보고 들에도 가보고 어떨 때는 위험한데도 가고 이래 가지고서 자기의 심령을 좀 요동 시켜가지고 진리와 하나님을 연결시켜 보려고 하는 그런 노력으로서 소리도, 분위기도 잡고 이렇게 합니다. 그러니까 목회하는 자가 어떨때에는 가라앉아가지고 있으니까 고함을 질러서라도 그래 가지고라도, 미국에서 어떤 부흥자가 설교를 해도 안되니까 부흥회 때에 널을 하나 만들어 가지고서 거기에다가 지금 그 사람을 하나 넣어 가지고 부흥회가서 저리 갔다가 사람이 하나 죽었으니까 출상을 매보라고, 그 널을 매보니까 모든 사람이 '아 그 사람이 언제 죽었노? 금방 살았더마는.' 이러다가 그 갖다놓으니까 속에서 고함을 지르면서 널 속에서 고함을 지르고 툭 튀어나오니까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면서 '아 이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그래가지고 교인들이 정신이 좀 우쭐 해가지고서 조금 정신이 바짝 들었을 때에 이제 설교를 해서 가르쳤다는 그런 말을 내가 어떤 선교사에게 들었습니다.
그래 너무 가라앉았고 너무 세상에 취해가지고 있으니까 그것을 깨우치기 위해서 지금 대구 같은 데도 가고 이러는 것이고 또 산에도 가고 들에도 가고 이래하는 것이지마는 그것이 우리를 살리는 것은 아닙니다. 진리가 우리를 살리고 하나님이 우리를 살리지, 또 우리가 진리와 하나님으로 살아났지 그런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니니까 그것을 잘 구별을 해야되지 껍데기로 항상 있으면 안됩니다. 설교를 여러분들이 들을 때에 꼭 이치를 들어야 됩니다.
'아, 보자 그 이치가 어떤 이치를 말하는고?' 그 이치를 자기네들이 이치를 들어 깨달으면서 그 이치를 못 깨들으면 소용없어. 이치를 깨달으면서 이 이치가 정말로 성경대로의 이치냐? 성경 이치 외에 인간이 조작배기로 만든 이치냐? 나는 그걸 몰랐는데 그 이치를 말하는데 그 이치가 성경대로의 이치인가? 그것을 제가 대조해서 그것은 성경이 말하는 이치로구나. 성경이 말하는 이치로구나.
성경이 말하는 이치는 절대성입니다. 그것은 깨뜨릴 자가 없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이치와 하나되어 있는 요 이치 속에 있는 것은 죽일 수가 없습니다. 면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치 뿐이가? 이치 안에 하나님이 계시느냐? 그것으로 구별하는 것이 그것이 성도의 생애입니다.
오늘 아침에 본 말씀도 그런 말씀입니다. 말씀에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예수님의 사죄와 칭의 새생명의 대속을 받아 가지고 이로 인해서 하나님이 우리 안에 계시게 되었습니다. 우리 안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우리가 영생합니다. 하나님이 계시니까 하나님이 영생하시니 하나님이 계시는 것도 영생하게 됩니다. 우리 말 안에도 하나님이 계셨으면 우리말이, 우리 행동이, 우리 몸이, 우리 마음이, 우리 영이, 내가 하나님이 안에 내주 해 계시는,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보좌가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 가지고 있으면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있으면 이는 아무도 해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계시지 안하는 마음 그까짓 거 암만 아름다워야, 하나님이 계시지 안하는 그 행위 암만 커봤자 하나님이 계셔야 하나님이 내주하시지 안하는 그 사람이 아무리 유명해져봤자 그까짓거 수를 헤아릴 것 없다. 아무리 그 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천대받는 존재라 할지라도 그의 언행심사에 하나님이 계시고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면 장차 그는 우주와 세계는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영계는 그 사람의 것이 됩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이는 우리말로 알아듣기 쉽게 했는데 하나님이 그 속에 계신다는 그말입니다. 하나님이 알맹이가 되어 있다 말입니다. 하나님이 알맹이가 되어 가지고 있어. 껍데기는 사람 같지마는 실은 그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오. 겉은 사람같지마는 그 속에는 하나님이 계시오. 이러니까 그 사람 멸할라 하는 것은 하나님 멸하려고 달라드는 것입니다. 그 사람 환영하는 것은 하나님 환영하는 거, 그 사람 환영하다보니까 하나님 환영했어. 하나님과 그 사람을 함께 동하고 정하셔.
하나님이 내주하시는 것과 하나님이 전인 것과 하나님이 성령이 너희 안에, 또 한번 더 해서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은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의 밑바탕이 제일 사죄가 껍데기요, 그 다음에는 칭의가 그 속에 속껍데기요, 그 속의 알맹이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해 가지고서 하나님과 결합되어 있는 것이 알맹이라. 이래가지고 성전됐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어떤 것이 더럽히는고 하니, 사죄를 잃어버리면 더럽히는 것입니다. 사죄를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요, 칭의를 잃어버렸으면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요, 하나님과의 결합을 잃어버렸으면 성전을 더럽히는 것이요. 그것은 뭐 일생을 살았어도 일생을 다 죽었어. 한시간 살았으면 한시간 그거 죽은 거야. 아침에 설교하면 가만히 말하면 좋을 텐데 고함을 지르며 증언을 해. 그 외식이야. 외식.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것은 어떤 게 더럽히는 것인가? 사죄를 벗으면 더러워져. 칭의를 벗으면 더러워져. 새 생명을 벗으면 더러워져. 새 생명이 뭐입니까? 하나님과 결합된 그것이 새 생명입니다. 그것을 버리면 더러워집니다.
그것을 버린 것은 한시간을 버리고 있었으면 한시간 그 소모된 정력은 다 죽었고, 기능도 다 죽었고, 일생을 잊어버리고 있었으면 다 죽었고, 하나님과 자기가 사죄와 칭의와 요 세 가지가 합해서 하나인데, 그 순위가 하나인데 이와 함께 동하고 정하시는 그것은 영생입니다. 그것은 그 시간이 지나가도 영생입니다. 영원히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해가지고서 옳은 것을 찾는 것이 거룩입니다. 성전이 거룩하면 아무도 멸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나라가 강하고 약한 것이 상관이 없었어.
강하면 뭐하고 강하면 무슨 소용있어. 아무리 강해도 부요해도 소용없고 약해도 상관없어. 성전만 거룩하면 이스라엘을 해할 자들이 없었어. 성전이 거룩지 못할 때에 그때에 이스라엘은 졸망해야 합니다. 성전, 이스라엘의 흥망은 성전에 있었어. 성전이 거룩하면 이스라엘은 아무도 해하지 못하고 성전이 더러우면 이스라엘은 아무도 도와줄 자가 없었어. 이스라엘 열두 지파가 그 망하는 것을 원인을 찾아보면 다 성전을 더럽혀서 성전이 더러워서 다 망했습니다.
홍해 바다에 건너갈 때에도 그 성전, 곧 그 법궤는 성전 속에 법궤가 있기 때문에 성전이라. 집이 그다지 커서 그러는 것도 아니요, 또 법궤 위에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에 그 법궤가 그것이 크지 하나님이 안 계신다고 하며는 그는 하나의 이치로서 만물을 죽이는 것 뿐입니다. 그 이치니까 그 이치를 범하면 죽지 별거 뭐 있습니까? 율법이니까 정죄밖에 안된다 말이오.
이러니까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거룩을 가졌을 때에는 하나님이 지키시니 아무도 해할 자가 없고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멸하시기 때문에 아무도 구원할 자가 없습니다. 거룩이라는 것은 구별해가지고서 깨끗해지는 것인데, 요거 구별할 것. 천하에 수많은 집이 있지마는 성전은 한 개뿐입니다. 이스라엘 당시에 온 세계에 집이 얼마나 많고 큽니까? 그렇지만 성전은 한 채뿐입니다. 그것이 구별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과 교회를 구별할 것, 교회는 사죄와 칭의와 새 생명으로 되어진 것이 교회입니다. 세상과 교회를 구별하는 것. 세상과 함께 살지마는 세상과 교회를 구별하는 이 구별을 가지면 그 교회는 못 망칩니다. 또 요것이 온 세계에 성전은 하나뿐이라는 것, 세상과 교회를 구별할 것, 넓고 큰 세상이 있지만 교회는 하나뿐입니다. 세상과 교회를 구별할 것. 이제 성전 울타리안에는 무엇이 있습니까? 그 안에는 이방인의 마당이라고도 하고 성전 밖마당이라고도 합니다.
성전 밖마당. 그것은 신자와 이방인들이 같이 섞여서 들어올 수 있는 곳입니다.
그 다음에 둘째로는 신자와 신자를 구별할 것. 세상과 교회를 구별하고 신자와 신자를 구별하고 그 다음에는 성소입니다. 성소에는 제사장들만 들어갑니다.
신앙지도자와 지도자를 구별할 것. 그 안에는 지성소입니다. 지지성소에는 법궤와 그룹과 속죄소, 주님인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 안에는 성경과 영감을 구별할 것. 성경과 영감을 구별하고 그 밖에는 지도자와 지도자를 구별하고 그 밖에는 믿는 사람과 안 믿는 사람을 구별하고 그 밖에는 세상과 교회를 구별하고 이 네 가지 구별을 가진 자는 망칠수 없습니다. 이 네 가지 구별을 가졌을 때에는 이것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그 안에 계시니까, 그의 움직임은 다 하나님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아무도 해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는 사람이 요 네 가지 구별을 잊어버렸을 때에는 멸망합니다. 제가 살아있어도 망했어. 살아있어도 생활한 그것은 망했습니다. 하루살았으면 하루 산 것 다 망해버렸어. 일년 살았으면 일년 산 것 다 망해버렸어. 믿는 사람은 자기가 이렇게 저렇게 어떤 그 행동이나 경영에 살고 성공이 있다고 생각지를 말고,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거룩만 하면 아무도 해하지 못해. 세상과 교회를 구별할 것, 믿는 사람과 믿는 사람을 구별할 것, 신앙지도자와 지도자를 구별할 것, 진리와 하나님을 구별할 것. 이래서 진리와 하나님이 있는데 진리에 속하지 말고 하나님께 속할 것. 지도자와 지도자가 있는데 삐뚤어진 지도자 말고 옳은 지도자에게 자기가 속할 것, 신자와 신자가 구별되어 있는데 이제 구별된, 거룩이라는 것은 이 구별해 가지고 바름을 찾는 것이 구별입니다.
옳은 신자에게 속할 것, 세상과 교회가 구별하는 구별되어 있는데 세상에 속하지 말고 교회에 속할 것, 세상에 속하지 말고 교회에 속하고, 이 속화된 신자에게 속하지 말고 신자중에 참신자가 있는데 이 참신자에게 속하고 지도자와 지도자가 구별되어 있는데 옳은 지도자에게 속하고, 진리와 성령이 구별되어 있는데 성령에게 속하고, 하나님께 대한 외식은 뭐입니까? 이제 조는 사람들에게 내가 물을 터이니까, 하나님의 외식은 뭐이지요? 하나님의 껍데기는 무엇입니까? ○○○, 한번 대답해봐. 하나님의 껍데기가 뭐이지? 그 가족 다 이제 절단 나는군.
○○○집사. 하나님의 껍데기는 뭐이지? 하나님의 외식은 뭐이지? 둘 다 모르니까 둘다 모르면 그 가정은 전멸이지 뭐할거라. 하나님의 외식은 무어이지? ○○○선생님. 하나님의 외식은 진리요, 미안하지만, 한 자리에서 배웠는데 몰라? 하나님의 외식은 진리. 고함을 지르는데만 갔다가 자꾸 갔다 취미를 붙이면 못써. 하나님의 외식은 진리. 이스라엘 백성이 이 당시에 성경 진리만 그들이 환영을 하고 '안식을 범하니까 이거는 순전히 마귀당이다. 귀신들렸다.' 이랬는데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에 관련을 가지지 못했다 그말입니다. 그러니까 아, 하나님이 오셨는데, 신인양성인 하나님이요, 참사람이신 중보자 메시야가 왔는데 메시야를 귀신들렸답니다. 그래가지고 정죄하지 안했습니까? 그들이 뭘로 정죄했어? 성경가지고 정죄했어.
성경 진리만 입을 까가지고 입을 쫑알쫑알거리고 영감이 속에 없는 그것이 큰 탈입니다. 그게 큰 탈이요. 여러분들이 못 알아듣는 것은 말이 커서 좁아서 들어갈 때가 없어. 지도자의 외식은 무엇니까? 지도자의 외식은 사죄, 칭의, 새생명. 사죄 없고 칭의 없고 하나님 안 계시는 그 지도자가 외식 지도자입니다.
지도자의 외식을 알아야 됩니다. 또 신자의 외식은 무엇입니까? 속화된 신자, 외식 신자, 말 신자, 이름 신자. 그것다 외식 신자지요. 더러워진 것이지.
신자는 신자인데 사죄와 상관없고 칭의와 상관없고 새 생명과 상관없으니까 외식 신자지. 모든 순교자를 누가 순교시켰습니까? 외식 신자들이 다 잡아죽였습니다.
얼마나 큰 벌이 있을 겁니까? 외식신자. 신자의 껍데기와 알맹이라고. 신자라고 다 같은 신자가 아니라. 껍데기 신자, 알맹이 신자가 있어. 내가 껍데기 신자라면 빨리 알맹이 신자에게 내가 지금 소속해. 알맹이 신자편으로 어서 옮겨서야 돼.
교회 껍데기는 무엇입니까? 전재수 조사님. 교회 껍데기는 세상이라. 우리가 세상에 살지마는 우리는 교회에 속해야 된다. 다 같이 믿지마는 진실한 신자에게 나는 속해야 된다. 다 같은 지도자지마는 참된 지도자에게 속해야 된다. 나는 진리를 지키지마는 영감과 동행하는 진리를 지켜야 된다. 진리면 다입니까? 진리는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 가지 구별. 첫째는 세상과 교회의 구별. 그 다음에는 이방인의 마당, 신자와 신자의 구별. 교회는 다니지마는 여러분들이 구별할 줄 알아야 돼.
남을 봐서 깨달으라고 다른 사람을 보면서 깨달아져. 저는 보고 깨닫지 못하지만 남을 보면 깨달아져. '야 저 사람은 진실한 신자인데, 저 사람은 껍데기 신자다.' 알 수 있다 말입니다. 남을 정죄할려고 한 것이 아니라 내가 나를 알기 위해서, 나는 누구와 같은 신자인지 알 수 있지. 한번 비판해 봐요. 자기를, 나는 누구와 같은 신자인고 보자. 저를 모르거든 남을 보면 저를 알 수 있다.
신자와 신자를 구별하고 그 다음에는 지도자와 지도자를 구별하고 그 다음에는 진리와 성령을 구별하고 이 네 가지 구별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의 성전이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니라" 거룩한 사람, 거룩한 신자.
이 네 가지를 구별함으로써 껍데기 네 가지를 벗고 알맹이 네 가지에 속했으면 이것이 거룩한 신자입니다. 이 사람은 멸하지를 못해요. 이 사람은 곧 하나님.
그 사람이 하나님이 아니라 그 속에 하나님이 계셔 가지고 그 사람을 움직이는 것 전부가 하나님이기 때문에 이 등은 종이로 만든 이 등, 뭐 그전에는 우리는 보름에만 등불을 켭니까? 보름에 등불 켜지? 아, 섣달에 그믐날인가? 그믐날에는 전부 등 다 만들어서 등불켜놓지 않습니까? 그런데 등을 만들어놓은 등 그거야 뭐 백개 달아놓아도 새까맣습니다. 이렇지만 거기다가 속에 촛불을 떡 켜놓으면 그 등 그게 뭐입니까? 등 그게 불덩어리 아니요? 속에 불이 켜있으니까 등 그게 불덩어리라. 속에 있는 빛이 등에 나오니까 등 그게 파란 불덩어리라. 사월 초팔일날 중들 보면 그 모두 불덩어리가 막 덩그렇게 켜가지고 있어. 보면 그것이 속에 불이 들어가 있으니까 불만 탁 끄면 아무것도 없어. 새카맣지만 푸른게 불덩어리라.
이 모양으로 이렇게 네 가지 구별을 가지고 있는 신자 속에는 하나님이 속에 내주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러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 전부 비추어 나오니까 그 사람의 말도 하나님의 말, 그 사람의 생각도 하나님의 생각, 그 사람의 뜻도 하나님의 뜻, 그 사람의 욕심도 하나님의 욕심, 그 사람의 움직임도 하나님의 움직임, 이것이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이리 되면 하나님이 그를 보호하시기 때문에 멸할 자가 없습니다.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십니다.
이러니까 성전이 이 성전을 벗어버리면 사죄·칭의·새 생명으로 하나님이 자기 안에 계셔서 역사하는, 이러니까 자기가 죽었다. 사는 것이 자기가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그리스도가 사시는 것이라. 이러면 그를 해할 자가 없어.
신자는 요것을 벗어나면 죽습니다. 이것이 신자들의 행위입니다. 이러니까 자꾸 새김질을 해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멸하십니다.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