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1 23:14
믿음이 자라는 방법
본문 : 누가복음 17장 5절∼10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 주께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도리어 저더러 내 먹을 것을 예비하고 띠를 띠고 나의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명한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사례하겠느냐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 뿐이라 할지니라
믿음이 자라는 것을 처음에 말씀하셨고 그 다음에는 자란 믿음의 능력을 가르쳐서 말씀하셨습니다. 그 다음에는 또 믿음 생활을 해 나가는데 믿음 생활 해 나가면서 믿음이 점점 자라는 것을 또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여기 '뽕나무더러 명하여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또 그대로 너희 말에 순종하였으리라' 그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신구약 성경에 기록 해 가지고 우리에게 주신 것은 간추려 말하면 세 가지입니다. 하나는 모든 죄와 사망과 불의에 속한 것, 우리에게 화가 되는 모든 것, 그런 것들을 모조리 다 뿌리를 뽑아서 조그만한 뿌리 하나도 남아 있지 않도록 완전히 근절시키라 하는 것이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구약에도 그러하고 신약도 그러하고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구원 역사에서 처음에 타락을 하나님이 예정하시고 허락하셨습니다. 타락을 허락하신 것은 타락으로 우리들이 하나님을 떠난 그 결과가 어떠한가 하는 것을 우리들로 하여금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처음에 좋은 것을 가르쳐 가지고 결과가 나빠지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처음에 실패되는 길을 가르쳐 가지고 뒤에 성공하는 길을 가르친 것이 기독교입니다. 처음에는 해가 되는 것을 주셔 가지고 그 다음에는 유익된 것을 주시는 하나님의 구원 방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경은 우리들이 어떻게 해서 타락을 했다, 그러면, 타락을 한 것, 어떻게 해서 타락이 되었으며 타락된 것은 무엇 무엇이 타락이 된 것인가.
어떻게 해서 타락이 되었으며 타락된 것은 무엇 무엇이 타락이 된 것인가.
타락의 그 결과는 어떠한가 이것을 가르치는 것이 성경의 일부분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는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해야 되나. 이것을 차차차차 제거해서 뿌리 하나도 남기지 안 하도록 완전히 뿌리를 뽑아서 근절시키라, 뿌리를 완전히 뽑아서 없애 버려라 '너희들이 조심하여, 쓴 뿌리가 한 개 남아 있어 가지고 조그만한 뿌리 한 개 남아 가지고 그 뿌리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더러워질까 두려워하라' 그러면, 뿌리는 하나도 남기지 말고 모조리 쏵 뽑으라 말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교역자는 어떤 것이 교역자인가? 뽑는 능력 있는 것이 교역자입니다.
평신도는 어떤 것이 평신도인가? 자기에게 있는 못 쓸 것을 뽑아 버리는 것이 그것이 평신도의 신앙생활입니다. 교역자는 먼저 자신이 뽑고 자기에게 하나님 맡겨 준 모든 사람들의 뽑을 것을 남김 없이 모조리 다 뽑아서 근절하는 것이 교역자의 능력입니다.
그 다음에 하나로 말하면 사망에 있는 것을 다 생명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교역자가 하는 일은 사망에 있는 것을 생명으로 옮기고 마귀에게 붙들려 있는 것을 구출해서 하나님 안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것을 하늘나라로 옮기는 것입니다. 돼지가 구렁텅이에 있는 거와 같이 이런 저런 모든 지저분한 더럽고 추한 가운데에 머무는 것을 거기서 이끌어서 깨끗한 곳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생각을 옮겨야 되겠고, 또 욕심도 옮겨야 되겠고, 모든 취미들도 옮겨야 되겠고, 모든 것을 다 거기 있는 것을 하늘로 옮겨서 하늘에 있는 것으로 다 가지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교역자 일이요 또 평신도의 일입니다. 자기의 마음의 모든 요소 몸의 요소, 그 사람의 마음이 항상 세상에 붙어 있는 것을 하늘나라로 옮기고 그 사람의 모든 취미가 세상에 붙은 것을 하늘나라로 옮기고, 그 사람의 소망과 계획이 땅에 붙어 있는, 세상에 붙어 있는 것을 하늘나라로 옮기고, 그 옮기는 그것은 그 수를 우리가 헤아려 보면 닥치는 거마다 이거는 옮겨야 될 것인지 뽑아야 될 것인지 알겠습니다. 우리 앞에 닥치는 수많은 종류의 모든 것은 다 우리가 뽑을 것이 아니면 옮길 것이요 뽑고 옮길 것이 아니면 심어야 할 것입니다. 이 세 가지가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기독자들이 성공하는 것은 뽑는 일 옮기는 일 심는 일 이 세 가지를 성공하면 그 개인이 성공 한 사람이요 또 교역자가 성공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설교하는 것도 매일 설교하면서 우리는 그저 그냥 성경에 있는 것만 그저 자기 생각대로 깨달은 대로 이래 설교를 하나 실은 그 큰 뜻과 또 성경이 우리에게 소원하시고 목적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을 두고 우리가 성경도 연구해야 되겠고 설교도 해야 되겠습니다. 만일 그렇지 안하면 다 땅의 것을 땅의 것으로 이렇게 뒤비면서 사람에게 구경하고 저렇게 뒤비면서 사람들에게 구경해서 아무리 엎었든지 뒤쳤든지 내나 세상 가지고 이리 뒤적거리고 저리 뒤적거리고 평생 거기서 그 놀음 하다가 맙니다. 그러면 교회는 절대 성장 안 됩니다. 그 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될런지를 모릅니다. 이래 보면 세상 같고 저래 보면 천국 같으니까 어떻게 해야 될지? 그러기 때문에, 모든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치시기를 이 세 가지를 가르치신다 하는 것을 우리가 강령적으로 잡고 있어야 합니다.
뽑는 거, 자리를 옮기는 거, 심는 거 그러면, 우리가 설교 준비를 할 때에 오늘 설교에는 뽑는 것이 여기 있느냐. 뽑는 것도 없고 옮기는 것도 없고 심는 것도 없고 그거 없으면 그 설교는 공연히 세상을 자꾸 이렇게 저렇게 해서 복잡하게만 만들고, 공연히 시간만 허비하고 생명이 없는 울리는 괭과리가 되고 맙니다.
심겨 있던 것을 뽑아서 옮기는 것은 그것이 바꾸는 것이요, 그것이 옮기는 것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뭣 때문에 못 박히셨는가? 첫째 아담의 것을 다 뽑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또 첫째 아담의 것을 다 그 자리에서 구출해서 옮기기 위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은 영원히 멸망치 안하고 요동치 않는 완전한 불변의 그 생명 세계에 심기 위해서 우리를, 이민시키기 위해서 우리를 구출할라고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를 베푸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도 법적으로 이렇게 해 놓으신 것을 실질적으로 당신이 이렇게 실상을 이루어 가지고 그 실상을 영원히 누리고 그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주님이 다시 신인 양성 일위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 교역자들은 이것을 단단히 자기가 깊이 가서 깨닫고, 누구의 설교를 듣든지 뭘 해도 이거는 뽑는 일이라 뽑는 것도 없고 옮기는 것도 없고 심는 것도 없으면 그 설교는 다 허탕하는 못 쓸 설교라 그렇게 평가를 하고 정죄를 해야 되겠습니다.
이 뽕나무로 말씀하신 거는 비유하신 것입니다. 여기 비유에 말씀하시기를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 믿음이 있었으면 말이오 이 믿음이 있었으면, '있었더면' 하는 것은 이 믿음이 있어서 이 겨자씨 믿음은 이제 공부한 대로 점점 자라가는 것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 한 믿음이 있었더면' 하는 그 말은 이 겨자씨 비유로 가르치시는 대로 자라가는 믿음이 있었더면, 있었더면 뽕나무더러 명하여 뽑혀서 바다에 심기우라 하는 그런 것을 명령할 수 있다 그말입니다.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하는 이것은 미래사입니까 과거사입니까? 과거사입니다. 있었더면 벌써 변화가 됐습니다.
있었더면 변화가 됐습니다. 변화가 어떻게 됐느냐? '뽕나무를 뽑혀서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명령한다 말입니다.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명령도 하고 명령한 그대로 딱딱 순종하였으리라 말씀합니다.
우리가 겨자씨 믿음으로 자라가는 이 방편 외에는 개인이나 교역자나 이 세 가지 권위가 자랄 수 없습니다. 이 겨자씨 믿음으로 자라가는 여기서 이 세 가지 권위가 있고 또 이 세 가지 권위를 쓸 수 있고, 믿음이 있어야만 이 세 가지 권위를 쓰고, 쓸 때에 그 권위를 쓰는 그것을 대항하지 못하고 항거하지 못하고 그 권위에 복종하였으리라 그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설교를 해도, 뽑으라고 아무리 책상을 두드리면서 우리가 야단을 지기기를. 뭐 매일 새벽마다 설교하는 것이 그와 같은 비슷한 설교요, 또 대예배 때마다 그렇게 설교하는데 우리는 뽑으라는 소리도 힘차게 못 합니다. '네게 악령이 지금 자리잡고 있으니까 그 악령을 들어내라 그게 뽑는 건데, '악령을 들어 내라' 우리가 그런 명령을 못 합니다. 만일 장로에게 그거 있는 것을 그래 했다가는 장로가 반발해서 목사 쫓아낼 터이니까 쫓겨나면 밥통 떨어지니까 못합니다. 어떤 유력한 집사에게 그것을 뽑으라고 호령을 못칩니다. 호령을 치면 큰 반발과 부작용이 일어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권위있는 사람이 되지를 못했습니다.
또 우리가 부모가 돼 가지고 자녀에게 대해서도 이런 권위가 없습니다. 뽑을 것을 뽑으라고 할 권위가 없습니다. 간이 작아서 그렇게 명령을 하지 못합니다.
명령하면 부작용 생길까도 걱정이 되고 명령하면 '나한테 명령할 게 아니라. 내 눈에 티를 뽑으라고 할 게 아니라 네 눈에 들보부터 뽑아라 이럴 터이니까 또 못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아서 뽑을 것을 대략 압니다. 잘 압니다. 아나 그 뽑으라는 것을 뽑으라고 명령도 못 합니다. 옮기라는 명령도 못 합니다. 아무리 너는 이것을 네 심령에 심어서 다시는 변동하지 말아라 하는 것을 평생 심어 줄라 해도 명령도 못 하고 심어 두라고 말해 봤자 다 비쭉거리고 말지 효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뽑을 것을 뽑으라고 할 담력도 없고 또 뽑으라고 해도 그것이 실상에 옮겨지지도 아니하고, 또 이렇게 뽑으라고 명령하면 되겠다는 그런 확신도 없고 우리는 참 병신들입니다.
성경에 모든 교훈은 다 뽑을 거 옮길 거 심길 거 이 세 가지인데 뽑을 것을 몰라서 뽑으라 소리도 못 하는 거 있고, 뽑으라고 할라 하니까 뒤에 후유증 이 생길까 싶어서 뽑으라고 할 만한 담력이 없어서 하지 못하는 것도 있고 또 암만 말해 봤자, 저 목이 째지도록 말해 봤자 눈도 꼼작거리지 안합니다. 그 실상이 이루어지지를 안합니다. 뽑는 것도 옮기는 것도 심는 것도 여기 대해서 우리가 몰라서 못 하는 거, 알아도 겁이 나서 못 하는 거, 알아서 해도 효력이 없는 것.
우리가 개인이든지 교역자든지 자신에게도 뽑을 거 쏵 다, 뽑아 버리고 옮길 거 딱 다 옮겨 버렸고 심을 거 다 심었으면 그는 천사입니다. 그는 온전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권위 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자기가 목회하는 교인들, 만일, 이거 참 기가 막히는 것이 저도 서부 교회 있으면서 서부 교회 있는 유치반 중간반 장년반의 그 모든 재적을 말하면 오만 명이 넘는데, 그 사람들에게 내가 뽑을 걸 명령할 때 쏵 뽑히고 옮기라고 명령할 때 쏵 옮겨지고 심기워지라 할 때 꽉 심기워지고 만일 이렇게 한다고 하면 오만 명이 한국뿐 아니라 세계를 완전히 점령하고도 남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지극히 큰 계약을 받았는데 우리가 여기 대해서 예사롭게 우리가 생각하고 있습니다.
악령과 악성과 악습과 또 모든 무지 무능. 온갖 잘못 된 거 이런 거 다 쏵 뽑아서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런 것이 하나도 없다면 그 사람이 온전한 사람 아닙니까? 온전한 사람 하나는 천인 만인도 더 당합니다. 또 그 사람이 옮길 것을 쏵 다 옮겨서 벌써 옮겨 가지고 자신도 옮겼고 비록 땅에 사나 그 사람은 옮겨서 하늘에서 살고 있고, 그 모든 땅의 소망에서 살고 있으나 그 사람은 하늘의 소망으로 딱 옮겨 가지고 살고 있고 그 사람은 땅의 것을 힘입어 사나 이제는 옮겨서 완전 영원 무궁만 힘입어서 살고 그 사람이 진리에 요동치 않게 심기워졌고 영감에 심기워졌고 예수님의 공로에 심기워져서 예수님의 공로를 다 빨아먹고 영감을 빨아먹고 진리를 빨아먹고 그렇게 자라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이 어떠한 사람이겠습니까? 여기는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이거 명령사입니다. '믿음이 있었더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명령입니다. 뽑혀라 옮기라 명령할 권위가 있는 걸 말합니다 뽑혀라 옮기라, 뭐 어떤 게 보이면 뽑혀라 옮기라 또 네가 거기 심겨져라 한 그 명령대로 그것들이 다 순종하였으리라 말씀했습니다.
뭐 우리는 수많은 진리가 아니고 한 진리를 이 각도로 말해 놓고 저 각도로 말해 놓고 어쨌든지 사람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 도를 받아서 도인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 이래 하는 것인데, 사람이 자기가 어떤 능력을 가졌느냐? 자타에게 있는 것을 뽑으라 명할 때에 뽑히고 옮기라 할 때에 옮겨지고 심기라 할 때에 심기워지는 이 능력, 그러면 이 능력. 여기서는 두 가지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신구약 성경에 뽑기 어려운 일이 있고 옮기기 어려운 일이 있고 심겨지기 어려운 일이 있고, 그것을 뽑을라고 달라 들만한 그런 용기도 낼 수 없는 천부당 만부당 이는 참으로 역사와 온 세계를 다 부인해야 되는, 온 세계에 거슬리고 역사에 거슬리고 모든 존재에 대해서 거슬려지는, 인정이 안 되는, 거슬려지는, 우리는 믿는다는 것이 자기 한 사람 속에 부인되는 것도 이것을 꺾지를 못합니다. 자기 단체, 주변의 자기 사회의 수십 명이 있으면 수십 명의 그 모든 주장과 의견과 사상과 통계를 부인하고 꺾지를 못합니다. 더우기 세계의 역사에 통계에 있는 그런 것들은, 의례히 꺾을려고 생각지도 못하기 때문에 성경 가운데에 기록된 말씀은 '다 누가 성경대로 행할 수 있느냐? 성경대로는 다 하지 못한다.' 이래서 사람마다 자기와 세상에게 일치되는, 일치되는 성경만 지키는 사람 있고, 자기와 세상에게 일치되는 거, 자기와 세상에게 대립이 되지 않고 일치되는 것만 자기가 지키는 거 있고. 조금 신앙 낫다는 사람이 자기와 세상에게 조금 배치되는 것을 지킬 수 있고,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명할 때에 이 일이 이루어지리라 하는 그런 소망을 가지고 달라들어서 한번 해 보고, 해 봐도 그 일이 잘못 되기 때문에 목회 수십 년을 해도 내나 그 꼬라지고 그뿐이지 별게 없다 그거요.
이런데, 그렇게 큰 뽕나무를 손도 대지 안하고 뽕나무 저더러 뽑히라 명령할 때에 뽑혀지는 거 이것은 도무지 인정할 수 없고 믿을 수 없는 일들입니다.
뽕나무가 뽑히는 것이 뽕나무 제가 뽑히겠습니까? 제가 뽑히는 것 아닙니다.
제가 옮겨지는 것 아닙니다. 출출 내려가는 물에 뽕나무 심겨라 하는데 뽕나무 제가 심기는 것입니까? 명령은 했지만 뽕나무 저는 뽑힐 수도 없고 옮겨질 수도 없고 심겨질 수도 없는 것입니다. '명하였을 것이요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명령한다' 말은 없어도 명령하는 것입니다. '바다에 심기워져라' 명령하니까 '그대로 순종하였으리라'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명하는 능력이 어떤 능력입니까? 명하는 것이 무슨 능력으로 뽕나무가 뽑혔으며 뽕나무가 옮겨졌으며 뽕나무가 순종해서 그렇게 심기워졌겠습니까? 이것이 무슨 능력이겠습니까? 겨자씨에서 나온 능력입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궁창이 생기라 하니까 생겨졌습니다. 궁창 제가 스스로 생겨진 거 아닙니다. 공중에 명하기를 '공중에 모든 각종 공중에서 사는 그런 생명 있는 모든 날짐승들을 다 생겨라' 이라니까 나왔습니다.
생겨졌습니다. 땅에다가 명하기를 '너는 땅에서 각종 식물을 내라' 하니까 냈습니다. 그러면, 그 식물들이 모두 다 나고 벌어지고 합해지고 하는 그것을 말한 대로 됐으니까 그 말 한 것이, 말한 대로 된 것이 말한 대로 되어진 그것들의 힘입니까? 그것들의 힘 아닙니다. 말한 대로 되어지라 하는 그 되어지라고 말한 그 말 읽힘으로써 그대로 다 됐습니다. 말의 힘으로 그대로 됐습니다. 이게 이해됩니까? 그 땅이 힘이 있어서, 바다가 힘이 있어서, '바다야, 네 속에서 모든 생명 있는 어류들을 내라' 했으니까 당장 냈습니다.
바닷물이 힘이 있습니까? 그 고기들이 힘이 있어 저거대로 생겨졌습니까? 바다에 땅에 공중에 이렇게 '그렇게 하라' 했을 때에, "뽑히라, 옮기우라, 심기우라 하였을 때에 순종하였을 것이요" '땅아 바다야 공중아 이런 것을 내라' 할 때에 순종됐습니다.
그러면 그렇게 이루어지는 것은 뭣의 힘입니까? 바다의 힘입니까 땅의 힘입니까 공중의 힘입니까? 무엇의 힘입니까? 말씀의 힘, 명령의 힘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뽕나무더러 뽑히어 바다에 심기워져라 하였을 것이요 그대로 순종하였으리라' 그러면 뽕나무가 뽑히고 옮겨지고 심기워지는 그 능력은 무슨 능력입니까? 누구의 능력입니까? 겨자씨 믿음을 가졌던 사람, '겨자씨 한 알 같은 믿음이 있었더면' 했기 때문에 겨자씨 믿음을 가졌던 사람, "겨자씨 믿음이 있었더면" 그러면, 겨자씨 믿음이 있었으면 뭐 했는고? 겨자씨 믿음이 있었으니까 벌써 그것이 어디까지 자라왔느냐? '뽕나무를 뽑히고 옮기고 심기우라 그렇게 하였을 것이요 그대로 순종하였으리라' 여기 우리에게 기이한 계약을 선포해 주신 것을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거 말해야 참, 참으로 유력한 교역자가 될려면 이 진리를 우리가 깨달아야 됩니다. 왜 자꾸 배척당하는 교역자가 됩니까? 뭐 때문에 간사하게 아부하고 간교한 교역자가 됩니까? 그것은 뽑을 것을 뽑지 못했으니까 그놈이 들어서 자꾸 우리를 대항합니다. 옮길 것을 옮기지 못하고 있으니까 그것이 사고입니다. 심을 것을 심어 놓지 못하니까 그것이 사고입니다. 뽑을 것을 뽑고 옮길 것을 옮기고 심을 것을 심었으면 그것이, 사도 바울이 말하기를 '너희들이 나를 천사같이 나를 그리스도같이 너희들이 대우하지 안했느냐? 너거 눈이라도 빼 달라 하면 내게 빼 주지 안했겠느냐?' 이랬는데, 그거는 다, 뽑는 권위가 있었고 옮기는 권위가 있었고 심는 권위가 있고 이랬었는데 우리는 그런 권위가 없습니다.
알지도 못하고 할라고 하면 후유증이 있을까, 뒤에 일이 날까 싶어서 못하고, 그건 왜 못 합니까? 내가 겨자씨 믿음 생활하지 안했기 때문에 내게 흠점이 있습니다. 담력이 없습니다. 또 내가 그렇게 해 봤자 실효가 없습니다, 실행이 안 됩니다. 뽑히지도 안합니다. 옮겨지지를 안합니다. 심겨지지 안하니까 공연히 그 사람하고 대립이나 되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권위 없는 그런 불쌍한 교역자가 돼 있고 불쌍한 교인이 돼 있고 불쌍한 아버지 어머니가 되어 있는 이것은 우리가 겨자씨 믿음 생활을 하지 못하는 이것이 원인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우리가 이 권위 있어서 어디든지 내 안전에 뽑을 것은 이제 뽑으라고 명령하고, 옮기라고 명하고 심기라고 명하면 그것이 순종할 수 있는 그것은 순종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는 거 그것은 말의 능력입니다. 그 사람의 능력입니다. 겨자씨 믿음을 가졌던 그 사람의 능력입니다.
그러면, 겨자씨 믿음 생활했는데 그 사람의 가진 능력이 무엇인데? 그 능력이 피의 능력이요 영감의 능력이요 진리의 능력입니다. 우주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이요 만든 우주를 완전히 개조하는 능력이요 이것을 영원히 진동되지 안할 둘째 창조를 할 이 능력이기 때문에 이 능력은 무한한 능력입니다. 그 능력이 우리 능력으로 될 수 있는 거는 겨자씨 믿음 생활의 이 전투에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매일 현실의 전투 생활 승리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뽑히어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러면 그대로 순종하였으리라' 뽕나무가 능력이 있어 순종합니까? 하나님의 능력대로 내가, 능력을 배척하지 안하고 그 능력을 내가 환영하고 그 능력을 능력으로 대우해서 내가 완전히 그 능력의 것이 되니, 겨자씨 믿음에서 내가 완전히 그 능력의 것이 되고 보니 그 능력은 나를 붙들고, 내가 보는 것은 그분이 보는 것이요 내가 미워하는 것은 그분이 미워하는 것이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이 사랑하는 것이요 내가 원하는 것은 그분이 원하는 것이요, 내가 명령하는 것은 그분이 명령하는 것이라. 그분이 '바다야 거기 있는 모든 생물들을 내고 각종 생명 있는 것들을 내라' 하니까 바다도 순종했고 그것들도 생겨졌습니다. 그거는 명령하는 그분의 그 명령의 말의 능력입니다. 명령의 능력입니다.
우리가, 땅 위에 신구약 성경에 뽑을 것을 다 말해 놨고 옮길 것을 다 말해 놨고 심을 것을 다 말해 놨는데 말해 놓은 그 전부를 우리에게 말하는 것은 우리로 하여금 뽑을 능력을 줘서 우리에게 뽑으하고 옮기라고 심기라고 이렇게 했는데 우리가 암만 말해야 우리말이 능력이 없어서 안 됩니다. 말할 담력도 없습니다. 말을 해야 실효가 없습니다. 주님이 땅에게 명령한 그 명령과 같은 그런 능력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와 같은 능력자가 되어 가지고 성경에 있는 모든 것을 다, 여기 뽕나무를 비유한 젓은 그것은 역사에 비합리요 비통계요, 그거는 천부당 만부당한 일입니다. 성경에 제일 믿을 수 없고 인정할 수 없고 그렇게 되리라고 바랄 수 없는 그것 중에 제일 모든 최종적으로 제일 어려운 그것을 하나 표현해서 하기 위해서 뽕나무를 명하는 그것으로 말한 것입니다.
한 말로 말하면 인간이 하나님같이 된다는 이거, 어떻게 이것이 믿을 수 있습니까? 인간이 하나님같이 된다는 거, 하나님같이 완전하고 하나님같이 거룩하고 하나님같이 깨끗하고, 하늘과 땅에 있는 것과 모든 것들이 다 자기 것을 만들 수 있다는 거 이거 어떻게, 쉽습니까? 이게 그렇게 쉽게 되는 거 아니고 겨자씨 믿음을 하는 가운데에서 그 모든 것이 자동적으로 필연적으로 내 것이 될 수 있고 나는 그런 것을 통치할 수 있고 하나님이 아닌데 모든 것을 창조할 수 있고 모든 것을 활동하게 할 수 있고 이 세상이 다 인정 못 하는, 세상이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하는 비세상적인, 초세상적인, 초역사적인, 비역사적인, 성경에 말한 그런 것들도 명할 수 있고 다 할 수 있다, 그런 것도 믿을 수 있고 믿고 말하고 말할 때에 그 말의 권위로써 그 말에 닥치는 자들도 다 그와 같이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이 겨자씨 믿음으로 자라서 난 참 이 사람을 모신 시대가 복이 있겠고, 모신 교회가 복이 있겠고, 모신 그런 모든 만물들이 다 복이 있겠습니다. 이것이나 없는 가운데에서 어류가 생겨져라 어류를 내라, 금수를 내라 그 말이나 뽕나무를 명하여 바다에 심기우라 하는 그 명령이나 창조성만 다르지 어려움의 그 어려움의 성은 같습니다. 이것이 겨자씨 믿음에서 여기까지 장성해서 여기까지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인 것입니다.
이제 겨자씨 믿음에서 자라 가지고 교인이 하나 오면 뽑아라 옮기라 심기라 할 때에 그 교인이 그 교역자의 말의 권위로써 그 권위가 그 교인에게 가 가지고 뽑고 옮기고 심긴 사람이 하나 됐으면 그 한 사람은 한 사람이 천인도 더 당하고 만인도 더 당하고 그 사람은 여러 억만인도 더 당 할 수 있습니다. 또 하나 오니까 또 그렇고 또 그렇고 이렇게 해서 오는 사람마다 뽑을 걸 다 뽑아서 뽑을 것이 남아 있는 거 하나도 없고, 옮길 것이 옮겨지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고, 심을 것이 심겨지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 된다고 하면 그 한 사람은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그 한 사람이 하나님 같은 사람 아니오?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깨끗하고 거룩한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우리에게 오는 사람을 하나님같이 온전하고 거룩하고 깨끗한 사람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우리에게 허락된 권한이요, 그라는 데는 내가 먼저 그런 사람이 되어져야만 되는 것이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제가 누가복음 17장 5절에 있는 말씀을 본교회에서 지난 주일에 설교를 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고, 보는데 뭣인가 좀 큰 것이 있는데 이래서, 또 설교를 하고 또 설교를 하고 했는데, 오늘 여기 올라고 한 시간 전부터 기도를 하고 자꾸 이랬는데도, 이라다가 여기 오기 조금 전에 여기 대한 빛을 비춤 받았습니다. 나는 살길을 찾았습니다. 이제 권위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길을 나는 찾았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간증합니다. 내 목표는 여기대로 '뽕나무를 명하여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대로 순종하였으리라' 내가 이와 같이 명령할라 하는 데도 이제까지 명령대로 잘 안 되고, 명령해 봤자 백분지 일이나 효력이 있을란가, 아예 명령을 하면 이루어지지도 안 할뿐 아니라, 명령해서 뽑혀 버리면 그까짓 거 상관이 없는 것인데 명령하면 뽑혀지지 안하면, 진주를 던지면 개가 진주를 밟고 도로 와 가지고 문다는 격과 같이 뽑혀지지 안하면 그것은 나의 적이 되고 나를 대항할 것입니다. 나를 대항하는 것은 내가 겨자씨 믿음 생활을 하지 안했기 때문에 그들에게 대항을 받을 수 있는 그런 흠과 점이 있게 된 것입니다. 겨자씨 생활했으면 그런 것이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할 건가? 오늘부터 시작해서 할 것은 겨자씨 믿음 생활을 하는 데에 걸리는 것이 일 년을 걸릴란지 5년을 걸릴란지 몇 달이 걸릴란지 걸려서 겨자씨 믿음의 이 성장이 되는 데 따라서, 내가 소망하는 것은 뽕나무를 뽑히어 바다에 심기라고 할 수 있는 이런 명령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명령할 때 그대로 순종하는, 주님이 바다에 명령할 때 바다가 순종할 수 있는, 바다가 권위 있는 게 아니라 명령하는 그분의 명령으로 인해서 됐으니까 내가 명령할 때 명령하는 이 명령으로 인해서 모든 교인들이 뽑을 것이 뽑혀지고 심겨지고 할 수 있는 이런 사람이 되는 것이 나 갈 길이요 나 할 일이요 내가 애쓸 일이다.
이것은 내게 있는 현실 전투에서 이루어지겠다, 참 생명의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우리가 과거에 신앙생활 한 것을 더듬어 보면 너무도 얽배기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저 그물이라 하는 것이 전부 다 고가 다 터져 가지고 고기 잡을라고 그물 거석한 것이. 그물 간의 구멍이 요렇츰 소물어야 되는 데 막 구멍이 이렇게 떨어진 거 이렇게 떨어진 이런 거 가지고 이런 거와 같은 그런 신앙생활을, 우리가 뻐꿈뻐꿈하게 이런 신앙생활 했지 철두철미한 그런 신앙생활을 하지를 못했습니다.
과거의 신앙생활에 제가 하나를 간증한다고 하면 6.25 때에 그때는 모두 다 교회들이 다 강단을 지키지를 못했습니다. 그들이 다 예배당을 다 빼앗았습니다.
언제든지 그들이 죽일라고 하기 때문에 예배를 바로 드리지 못하는 때입니다.
그때 소고 뭐이고 짐승은 그 사람들이 다 잡아서 자유로 다 먹어 버리고 없을 때입니다.
이런데, 여기 농산 교회에 황보유한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그 교인들이 돼지 한 마리를 그들에게 안 주고 요리 조리 숨겨 가지고 숨겨 가루어 가지고 어떻게 길러서 그 사람들에게 보이지 안하고 하나 있었는데 이거 암만해도 더 숨길 수 없으니까 이제는 '하나님의 종들이 오래 동안 이거 다 고생하고 이랬으니까 마지막으로 돼지 한 마리 잡아먹고 잔치하고 우리 다 순교합시다' 그라면서 그 기별이 왔습니다. 저는 위천 있고 농산에서 그래 기별이 왔습니다. 그래 와서 갔습니다.
간 것은 그 자리에 있으니까 여기도 보도 연맹에 가 가지고 죽었다고. 보도 연맹에 공산주의라고 잡아다 죽였으니까 그 사람들이 복수는 전부 내게로 옵니다. 여기도 그 집. 또 이 뒷집에도 그거, 세 군데 다 보도 연맹에 잡혀간 그 사람들이 꽉 즐비해 가지고 있습니다. 밤낮으로 곡성을 하면서 인민군에게 저거는 이러니까 잡아죽이라고 자꾸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앞에는 뭐이 있었는고 하니 그때에 일자무식꾼인데 그게 반장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인민군들의 반장이 돼 가지고 날마다 잡으러 다니는 반장입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농산 교회의 조사님이랑 모두 그래 오라고 하니까 마음에 그만 '에이, 그 핑계 대고 한번 가자' 해 가지고, 가면 평안하다 말이오. 거기 있으니까 만날 죽인다 살린다 만날 쫄려 가지고 있는데 다문 며칠이라도, 하루라도 가서 있으면 좀 낫겠다 싶어서 갔습니다.
가니까, 돼지를 잡아 가지고 저 산골짜기 가 가지고 그래 거기서 모여 가지고 먹으면서, 그때는 뭐. 요새는 고기가 흔하지만 그때는 없었다 말이오. 인민군 때문에 하나도 없이 다 뭐 고기라 하는 것은 시장이고 뭐이고 하나도 없습니다.
그라고 그날 밤에 자기를, ○○목사님이 농산교인인데 그 농산 교회 옆에 집이 있었습니다. 거기 그날 밤에 잤습니다. 자는데, 왜 그날 밤에 거기 자게 됐는고 하니, 토요일인데, 저거 집에 아내가 왔습니다. 와 가지고 '내일은' 주일인데, '내일은 지금 인민 재판이 있는데 첫째는 그곳에 있는 뭐 주임인가? 지서 소장인가 그게 일호이고, 그 다음에는 내가 이호로 인민 재판에 착취자라고 지금 둘째번에 사형자고 이렇다고 '내일은 인민 재판 하니까 오지 말라'고 이래 하고, 또 뭐 집사들이 뭐 그래 오지 말라고 이라고, 또 농산 교회서도 그만 내일 여기 한 주일 좀 설교 한번 해 주고 가라고 자꾸 이랍니다. 그래 슬그머니, 그라니까 거기 주저 앉았었습니다.
주저 앉았었는데, 그날 밤엔 거기 잤는데 뉘하고 나하고 둘이 잤느냐 하면 ○○, 지금 목사 됐습니다. ○○목사하고 나하고 둘이 잤는데, 그때 꼬마 요만한 거하고 둘이 누워 잤는데 자고 일어나니까 오줌을 쌌습니다. 오줌을 싸서 내 옷이 젖었습니다. 내가 생각할 때 '오줌은 이거 배설물, 이거 거름인데, 썩은 것인데, 내가 여기서 엊저녁에 갔으면 이거 안 거석할 건데 이거 여기 있으면 썩는다는 것이니까 내가 여기서 만일 오늘 주일을 지키는 날이면 나는 완전히 썩어 버리고 만다' 이래서 그래 그때 그만 나서 가지고 거기서 한 이십리 되는데 죽자하고 달음질을 쳐 가지고 갔습니다. 가니까 예배 십분 전인데 교인들이 보고 깜짝 놀랍니다. 어짤라고 이래 왔느냐고. 막 이런 소리 저런 소리 뭐 주댑니다.
이래서 나는 그만 어쩌든지 얼른 강단으로 기어 올라갔습니다. 강단으로 기어올라가 가지고 거기서 그날, 이제 뭐 요번 설교 이제 마지막 설교라 하고 생각하고 설교하니까 그날 은혜가 막 불이 떨어졌습니다. 그래 설교를 하고 그러고 이제 그래 지나왔는데, 그게 현실에 이긴 건데, 오늘도 이 말 하니까 내가 힘이 납니다. '그 다행스러웠다'
그런 생활로 그 현실에서 양보하지 안하고 겨자씨 믿음 생활로, 겨자씨 그 생명이 잠시라도 죽었으면 다시 살아나겠습니까? 그 겨자씨가 잠깐 깜박 죽었더라면 죽었으면 썩어 버리고 말지, 그러면, 겨자씨는 그 생명이 죽지 안하고 그대로 계속해서 자꾸 자랐으니 주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의 이 은혜가 나와 계속된 이 계속이 끊김이 없이 불변으로 계속으로 자라면 우리가 얼마나 자랄까, 어디까지 자라겠는가? 네가 명하는 것은 하나님이 명하는 거와 같이 역사에 없는 어떤 것이라도 명하면 다 된다. 무슨 명령? 네 뽑음의 권위가 있기 때문에 천하 인간이 다 달려들어서 그거 안 된다 하는 것도 명령하면 다 뽑히고 명령하면 옮겨지고 명령하면 심겨진다. 이런 권위의 사람으로 네가 자라게 된다, 네가 겨자씨 생명, 우리의 생명은 피와 성령과 진리가 우리의 생명이 됐는데 그 현실 현실에서 배반하지 안하고 현실로 더불어 싸워서 현실을 내가 먹고 현실로 인해서 내 믿음이, 이 세 가지를 믿는 믿음이 자랐지 손해 보지 안했으면 그 자란 거는 뭘로 자랐는가? 주님의 피로 자랐고 성령으로 자랐고 진리로 자랐으니까, 피에 대해서 해석한 대로, 피는 뭐인가? 피는 이 우주를 없는 가운데서 창조한 것이 피요 창조하고 난 다음에 타락된 그것을 영원히 다시 변동되지 아니할 완전의 것으로 다시 재창조하기 위해서 이차 창조하기 위해 가지고 이렇게 역사하신 그 승리가 예수님의 피공로이니 이는 모든 존재 위에 있고 위에 있고 이런 능력으로 또 하나님이신 성령의 능력으로. 진리인 모든 만물을 창조한 전능의 능력의 진리 참된 이치로. 이것이 현시간 시간마다 이 세 가지를 내놓으라고 하는 현실에, 이 세 가지를 내놓으라고 하는 현실에 이 세 가지를 내어놓으라고 하는 현실에 그때에 내가, 이 현실에서 내놓으라고 하는데, 위협으로 내놓으라 하고 강제로 내어 놓으라 하고 유혹으로 내놓으라 하고 미혹으로 내놓으라 하고 나를 꾀워서 내놓으라 하고 강제로 억압해서 내놓으라 하고 할 때에. 그때에 만물들은 탄식하면서 내 주변에 우 둘러섰을 것이고 그럴 때에 이 셋을 내어 놓느냐 안 내어 놓느냐, 내놓아라 내놓아라 할 때에. 이 셋은 지극히 큰 능력인데, 지극히 큰 능력인데, 진리도 지극히 큰 능력이요 영감도 지극히 큰 능력이요 전지 전능의 능력이요, 또 예수님의 대속은 지극히 큰 능력이, 근본 일차 창조도 이가 했고 일차 창조로 타락한 것을 이것을 다시 이차 창조로 완전케 만드는 이 모든 것을 완성해 놓은 이 능력인데, 이 능력이 내게 와 가지고 이들이 일할 때에 그때에, 자, 세상이냐 이 셋이냐 네가 어느 것이냐, 나에게 유한된 자유성이나마 자유성을 주고 이 둘은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다리고 있을 때에 내가 이제 세상이 나를 죽인다 어떻게 한다고 해도 '내 소유보다 내 몸보다 내 생명보다 진리가 낮습니다.
영감이 낫습니다. 대속의 피가 낫습니다 하며 환영해서 이것을 물리쳤을 때에 이 진리와 영감과 피는 아낌없이 쏵 내게 와 가지고, 다 와 가지고 내것이 되어져 주시고 나는 또 그의 것이 되어졌고, 이러니까, 그러그러 해 가지고 한 현실 한 현실에서 얻고 모우고, 얻고 모우고, 점점 커지고, 이래서, 한 현실에서 그 현실에 해당된 진리를 내가 이제 영접해서 그 진리를 차지했고, 진리는 하나이나 진리는 여러 가지입니다 여기 대한 진리.
공산주의에 대한 진리 돈에 대한 진리 오만 거 다, 현실에 그때 해당되는 진리도 있고 현실에 해당되는 영감도 있고 현실에 해당되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도 있는데, 그 현실에 해당된 그 세 가지, 나에게 나타난 생명의 능력인데 이 세 가지는 내가 현실에서 이것을 취했으면 내 기능은 죽어 버렸고 현실에서 이 세상을 따라가지 안하고 이 셋을 취했으면 내 기능은 이 셋으로서의 기능이 됐습니다. 진리의 기능이 됐고 영감의 기능이 됐고 예수님의 대속의 기능이 됐는데 고랬다고 해서 다 되는 게 아니라 그때에 해당된 것만 돼.
그러기 때문에. 진리는 우리가 언제 소유할 수 있느냐 하면 현재에서 이거냐 저거냐 하는 거기서 이제 모든 거보다 진리를 낫다고 할 때에 진리를 소유하는 것이지 다른 때에 '진리를 소유하겠습니다' 암만 해도 진리는 우리에게 소유되어지지를 안합니다.
그때에, 이거냐 저거냐 할 때에 그때에 그걸 부인할라 하면 나를 부인하는 것이고 나를 부인하고 내 모든 것보다 이 진리를 영감을 예수님의 대속을 중하게 여길 때에 그 진리와 영감과 대속은 이제 그 시간에 해당된 내 심신의 기능의 것이 됐습니다.
이렇게 해서 이 겨자씨 믿음으로 자라니까 현실 현실에서 이제 이 진리와 영감과 예수님의 대속을 차지한 기능, 차지한 기능은 지나가 버렸으니까 그 기능은 다 살아났습니다. 그 기능은 또 내게 존재하면서 나와 함께 합니다. 내게 산 생명으로 역사합니다. 또 새로 시험 볼라고 또 새로 새 기능이 또 왔습니다.
새 기능이 또 그 현실에서 물리치고 이 셋을 영접해 가지고 또 기능이 이제 이 셋을 법적으로 영접한 것이 실상으로 영접한 기능으로 또 이 현실을 지냈습니다.
이래 가지고 기능이 하나 모이고 둘 모이고 셋 모이고, 한 현실에서 이 현실에서 모이고 조 현실에서 모이고 자꾸 현실에서, 현실에서 이제 우리의 기능이 진리화되고 우리의 기능이 진리를 소유해서 진리의 기능이 됐고 진리는 우리의 기능의 진리가 됐고, 우리의 기능은 진리의 것이 됐고 우리의 기능은 영감의 것이 됐고 우리의 기능은 예수님의 대속의 것이 됐고 예수님의 대속은 내 기능의 것이 됐고 진리는 내 기능의 진리가 됐고 영감은 내 지능의 영감이 돼서 이제 내 기능하고 진리하고 합하고, 합하고 이렇게 합해졌는데, 마지막에 최종에는 '뽕나무를 뽑혀서 바다에 심기우라' 이것은, 만일 그 능력이 없는데 '산이 생기라' 또 '산 있는 거 저 바다에 또 옮겨서 바다에 빠져라' 이렇게 했을 때에 순종한다, 그렇게 명할 때에 명할 수 있고 명할 때에 순종하는 그것은 뭐이냐 하면, 그 명령이 무슨 명령이 그렇츰 엄한 명령이고 그 명령대로 절대 다 이루어지느냐? 그 명령이 뭣 때문에 그 명령이 무소불능의 명령이요 그 명령이 절대 다 완성의 명령이냐? 그 명령이 무슨 명령이기 때문에 그렇습니까? ○조사님, 그 명령이 무슨 명령이 그렇게 절대 명령이라? 그 명령이 무슨 명령인데? '이래라' 이래 하니까, 그 마음이 말하고 몸뚱이가 입을 떡 벌려 가지고 '이래라' 하라 하니까 그 몸의 기능과 마음의 기능이 무슨 기능인데 말하는 대로 다 돼? 무슨 기능인데? 피의 기능, 영감의 기능, 진리의 기능. 그 기능이 뭐 그 사람 입이 그 사람이 말하는데 무슨 그 기능이라? 그 기능을 현실 현실에서 영접하고 영접해서 현실에서 내 기능은 진리의 기능이 됐고 진리는 이제 내 기능의 진리가 됐고 이래 가지고 하나 돼서 자라고 자라고 자랐기 때문에 이제 그 다음에는 어디까지 자라느냐? 뽕나무를 명해서 바다에 심기라고 명령하니까 그대로 명령할 수 있고 명령에 순종을 합니다.
이거는 하나님의 뜻을 어겨서 뭐이든지 명령하면 다 된다는 말이 아니고, 그러니까, 자, 영감과 하나 됐으니까 그 기능의 그 마음의 그 기능의 생각과 영감의 생각이 조금 차이가 있을까요? 저 ○조사님인가, 저 뭐 ○○○교회인가? 예? 차이가 없어? 차이가 없어. 진리와는 차이가 있어요? 예수님의 피와는 뭐 조금 좀 틀리겠어요? 하나야. 그러기 때문에, 그 기능자의 소원이 곧 진리의 소원이요 영감의 소원이요 피의 소원이기 때문에 그 기능이 말하는 그 말이 그 기능이 말하는 그것이 진리가 말하는 것이요 영감이 말하는 것이요 하늘과 땅의 것을 다 차지한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가 말하는 것이라, 예수님의 공로는 하늘과 땅의 것을 다 차지했습니다. 이러니까 그대로 돼. 우리의 겨자씨 믿음에서 이렇게 성공하는 이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확정을 지읍시다. 우리가 겨자씨 믿음 생활을 할라 하면 현실에서, 현실마다 내가 낭파당해서 죽었는데 살았고 죽었는데 살았고, 실패했는데 성공했고, 손해갔는데 유익됐고, 깨졌는데 더 새로 완전히 조성됐고 이러니까 전부 날마다, 날마다, 날마다 십자가의 걸음, 날마다 십자가로써 이제 진리와 영감과 하나님으로 인해서 죽고 진리로 인해서 죽으니까 살았는데 여러배로 백배로 살아났어. 이것이 우리의 생애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이제 목회하는 거 오늘부터 여러분들 우리 시작합시다. 목회 권위, 뽑는 권위. 교인이 하나 왔는데 뽑을 걸 그에게 명해 가지고 뽑으라 명령하니까 쑥 뽑혀 버리고. 옮기라 하니까 쑥 옮겨져 버렸고. 심기우라 하니까 꾹 심기워졌고 그라면 그 교인이 그 교역자 있는 그 교회서 딴 데 갈 수 있어요 없어요? 있어요 없어요? 못 가. 못 가. 자, 그러면 그 한 교인은 현실 교회들의 교인의 몇 명이면 당하겠습니까? 몇 명이나 당할 수 있어? ○○조사님 몇 명이나 당할 성싶어? 한 댓 명 당할 까? ○목사님 몇 명이나 당하겠소? 만 명도 더 당하지.
한국 교인 다 당할란지도 몰라. 없어. 그런 권위 있는 목사가 없어. 왜 우리가 그런 권위가 있다고 하나님이 약속하셨는데 왜 우리가 그런 권위 있는 목사가 되지 못했는가? 이것은 우리가 겨자씨 믿음 생활을 못한 연고라 그거요. 우리가 여기서 일어섭시다.
그라고 그 다음에 덧붙여서 말씀을 했습니다. 7절에 "너희 중에 뉘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저더러 앉아서 먹으라 할 자가 있느냐 먼저 나 먹을 거 준비하고 띠 띠고 섬기고 난 다음에 먹으라.
그렇게 했다고 칭찬하겠느냐 우리는 할 것을 했다 그렇게 할 것이니라" 그것이 믿음 자라는 것을 말했습니다. 그것은 쉬워. 그것은 뭣을 가리켜서 말하는고 하니, 밭을 갈든지 양을 치든지 하는 그 말은, 밭가는 것은 회개 운동을 가리켜 말하고, 양치는 것은 복음 운동을 가리켜 말합니다. 복음 운동, 회개 운동. 무슨 운동이든지, 이 둘만 말했지만 예를 들어 말한 것이기 때문에 그 외에 다 모든 그런 종류와 같은 수많은 것들을 다 여기 포함시켜서 말하는 것이니까 그런 것을 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하나 둘이라 말해 해서, 해당될 때에 너는 지금 발 갈고 있다 너는 양치고 있다 그렇게 말해 줄 수 있습니다. 너는 지금 양을 치고 있다 밭을 갈고 있다.
이랬는데 그라고 난 다음에 이제 밭을 다 갈고 양을 치고 나니까 집에 돌아옵니다. 집에 돌아왔을 때에 앉아서 먹으라 이렇게, 이만치 네가 수고를 했으니까 앉아 먹으라 그렇게 기대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일했으니까 이제 내 한 일을 알아주겠지' 하고 알아주기를 바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나를 대접해 주겠지' 하는 대접을 바라도 안 된다는 것입니다.
거기서 안 될 것 셋을 말했습니다. 하나는 뭐이냐? 자기가 양치고 밭 매고, 밭 갈고 양 치고, 자기가 한 거, 자기가 한 일이 자기 감상에 떠오르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한 일이 자기에게 기억돼지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어떤 사람은 보면 그 사람이 하루 종일 뭘 하고도, 주를 위해서 하루 종일 뭘 하고도 뭘 했는지 모릅니다. 뭘 했는지 한 거는 하나도 기억이 안 납니다. 남아 있는 거는 뭐이냐 하면 '아이구, 내가 오늘 아무것도 못했네. 이것도 못 했네, 저것도 못 했네' 만날 못 한 것만 생각했지. 오늘 그러니까 계산하면 참 불충한 종이라 '주님이여 이 게을한' 그거 실상 탄식을 하고, 자기가 어떤 일해도 자기 한 그것이 자기에게 생각나지 않는 것이 그것이 믿음이 자라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디까지 했든지 자기 한 것이. '내가 이런 일을 했다' 자기 한 것이 자기 기억에 떠오르는 것이 자기 믿음을 박멸하는 역사입니다. 마귀가 그렇게 우리에게 줘 가지고 믿음을 없이 할라고, 자기 한 공로를 자기가 자기에게 알려지고 자기 공로가 자기에게 보여지고 자기 공로를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악령이 믿음을 깨트릴라고 그와같이 생각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을 생각 안 해야 된다는 것을 여기서 가르쳐 말합니다. 그 생각이 오면 그 생각을 물리쳐 죽여 버리고 그런 것을 생각 말라는 것을 가르쳐서 여기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는 자기가 이렇게 했으니까 내 일 한 것을 알아주리라, 주님이 알아주리라, 사람들이 알아주리라, 제직들이 알아주리라 목사가 알아주리라, 교인들이 알아주리라, 자기 한 그것을, 자기 눈에 보이는 것도 자살 행위, 다른 사람이 알아주기를 기다리는 것도 다 자살 행위입니다. 그로 인해서 '주님이 이만치 했으니까 나에게 후대해 줄 것이다. 교인들이 나에게 후대해 줄 것이다' 이것이 자살 행위입니다.
내가 먼저 아플 때에 꼭 두 달을 내가 이 자살 행위를 해 가지고 고통을 했습니다. 두 달을 진통 당했었습니다. 왜 나는 내가 이렇게 이렇게 내가 첨에 예수 믿은 이후로 죽자살자하고 이렇게 이렇게 내가 예수 믿어. 다를 때는 그런 거야 생각 안 났는데 그때 아프기 시작하고 나니 그게 자꾸 생각이 납니다.
'내가 이렇게 이렇게 했는데 왜 이것을 교인들도 몰라주는가?' 이상하게 그것도 나옵니다. 내 공로를 몰라준다고 이제, 그러니까 그게 나오니까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그 다음에는 하나님에게 대해서도 원망과 불평이 나옵니다. '하나님은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 할까? 참 이상하네. 왜 나한테 이렇게 할까?' 그래 가지고 '다른 사람도 이러냐? 다른 사람은 암만 내가 보기에는 내 충성의 반도 안 되는 데도 하나님이 족하게 후대를 해 주고 이라는데 왜 내게는 이렇게 할까? 왜 하나님이 내게는 이렇게 할까? 내 공로를 왜 못 알아주는고? 내게 왜 후대를 안 해 주는고?' 이것이 있어 가지고 그것이 두 달을 떠나지 안하고 두 달을 고통 가운데서 고통을 했습니다.
그라다가 나중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알려 줘서 그때는 마지막에 이제 무익한 종인 것을 깨닫고 참 안 죽였으니 다행이라 하는 것으로서 이제 무익한 종이라 하는 것을 깨달았고, 이제 그렇게 내 공로를 표창 안 해 준다 그 교인들도 알아주지 않는다고, 뭐 나 그때 닥친 사람에게는 내가 다 원망하고 불평입니다.
여기 권사님들 집사님들 다 아는데 그때 내가 원망 불평이오. 왜 이렇게 안 알아주나 이랬어. 이랬는데, 주님이 와서 내 눈을 띄워 주니까 알아주면 커녕 이제 이것도 보니까 거짓부리? 저것도 보니까 거짓부리 모두 다 거짓부리 거짓부리 다 거짓부리니까 '이거 나를 죽일 터인데 안 죽이고 살려 뒀으니 참 하나님 이상하다. 나는 분명히 사형을 당해도 남을 사람이요 매장을 당해도 남을 사람이요 남을 사람인데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와같이 살려 두시는가?' 이제는, 나를 공로를 안 알아 준다고 내게 공로가 뚜렷이 보여서 안 알아 준다고 원망 불평이었었는데 나중에 눈을 뜨고 보니까 공로커녕 지금 벌을 받아야 될 터인데 벌을 그렇게, 크게 안 주니까 앞으로 지금 벌이 오지 싶어서 자꾸 벌이 오지 싶어서 겁이 납디다. 그래 가지고 벌이 오지 싶어서 겁이 나는 것으로서 한 달 동안 계속했습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벌이 오지, 벌이 오지' 자꾸 기다리고 있었는데 한 달을 지내고 나니까 석 달이 지났습니다. 석달이 지나고 나니까 벌이 올 줄 아니까 벌이 오는 게 아니라 주님이 나에게 긍휼을 베풀어서 이제 긍휼을 베풀어주십니다. 긍휼을 베풀어 주셔서 몸뚱이도 차차차차 좀 건강이 돼지고 이제 좀 출입을 할 수가 있고 출입해서 근근히 이래 짚고 강단에 가 가지고 이래 겨우 가는데, 그때 하나님께서 나대로 뒀으면 '저거 병들었고 늙었고 저러니까 그만, 어라. 그만 은퇴시키고 그만 명예 목사를 세워 가지고. 원로 목사로 세우고 있으면 우리 교회서 월급을 그래도 한 사오십만 원 줄 터이니까 줘서 그래 그만 그저 은퇴하고 있으라'고 그렇게 자꾸 사람들이 한쪽머리는 말하고 그렇게 한다고 막 그 운동들이 들이 밀고 장로들 중에서도 지금 뭐 그렇게 하라고 속으로 운동하고 이래 가지고 있는데, 근근히, 병신이 근근히 나갑니다.
나가면 하나님께서 나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영감이 나에게 같이 합니다.
영감이 같이 하고 진리가 같이 하니까 모기 소리같이 쪼그만하게 해도 모든 사람들이, 보니까 영감이 나오고 진리가 나오니까 모든 사람들이 기대를 가지고 '야, 그 폐물로 버릴 게 아니라' 저 보니까 영감과 진리가 나오니까 나에게 대해서 기대를 가지고 나를 용납을 했습니다. 나에게 기대를 가졌습니다. '아, 저 안 된다. 안 된다. 은퇴하면 안 되고 하니까 아무래도 강단에 서야 된다.
서야 되는데, 이제 자주 설 것이 아니라 뭐 일주일에 한 번만 설교해 줘도 되고 한 달에 한 번만 설교해 줘도 그만 이 설교면 된다' 이라면서 영감 진리 때문에 모든 사람이 내게 기대를 가지고 이제 나를 지지하게 됐습니다. 영감과 진리 없으면 나를 지지 안 하고 나를 그만 은퇴해서 그만 송장으로 뒤로 밀어붙이고 이제 한 달에 월급이나 돈을 얼마씩 줘서 그만 송장으로 밀어붙였을 터인데 보니까 '영감과 진리가 내게 있으니까 그들이 소망을 가지고 기대를 가지고 나를 지지를 하고 나를 협조를 하고 환영을 했습니다. 내가 지금 지지 받는 거 순전히 영감 지지이지 영감 지지 아니면 나는 못 살고 진리 지지 아니면 못 삽니다.
주님으로 인해서 살고 주님으로 인해서 이제 이렇습니다. 이 자리에 온 것도 이래 하는 것도 영감 진리 때문에 내가 그렇지 내가 딴거는 하나도 없는 줄 내가 확실히 압니다.
이렇게 해서 내가 과거를 회고해 볼 때에 겨자씨 믿음 생활을 떰벅떰벅 했어.
그렇게 촐촐하지 못하고 겨자씨 믿음 생활을 그저 가끔가다 한 번씩 했어 가끔 가다 한 번 했는데 가끔 가다 한번 그것이 어떻게 효력이 있는지 지금 내가 오늘 내가 가만히 생각하고 깨닫고 나니까 '야, 겨자씨 믿음 생활을 몇 번이나 했노? 보자.' 뜨문뜨문하게 했어. 뜨문뜨문하게 그래 했는데 만일 겨자씨 믿음 생활을 이와 같이 계속했더라면 내가 날아갈 것이고, 지금 여기 당장에 여러 설교 그만 짜다라 많이 할 것 없이 뽑아라 하면 쏵 뽑힐 것이고 옮기라 하면 쏵 옮겨질 것이고 심기라 하면 다 심겨지고 그만 전부 다 성자 성녀 다 될 거라.
산다씽은, 그러기 때문에, 산다씽이 서장에서 전도할 때에 어떤 큰 공장에 갔는데 그 직공이 한 사십 명 되는데 거기 가 가지고 이래 입고 가 가지고 '예수 믿으시오' 이라니까 그만 뭐 전부 공장도 정지 다 되고 전기도 정지 다 되고 직공들도 일이고 뭐고 집어던져 버리고 쏵 다 나왔어. 다 나와 가지고 그 설교하는 것을 들었는데 설교하는 것을 듣고 그 사십 명이 솔박 다 믿도록 돼 버렸어. 솔박 다 믿고 그만 그 사람들이, 뭐 전도야. 뭐 이라니까 전도도 안 했는데 뭐 모두 공장 다 집어던져 버리고 쏵 사십 명이 다 나와서. 한 사람도 안 빠지고 다 나 와 가지고 한 시간 증거하는 데에서 다 전부 뽑을 거 뽑았고 옮길 거 옮겼고 심을 거 심어 놓으니까 전부 독실한 신자로 그 시간에 다 성자들이 다 돼 버렸어.
그것이 겨자씨 믿음 생활 한 데서 나왔다 하는 것을 제가 오늘 깨닫고 '이거 참 우리에게 큰 비결이 있다.' 이제 나는 겨자씨 믿음 생활하는 이것으로써 이제 뽑는 권위 옮기는 권위 심는 권위, 이 권위자 되어서,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께서 명하니까 그대로 다 됐으니까, 창조할 때 명하시니 다 됐는데 왜 나는 안 될 것입니까? 창조할 때 명한 대로 다 됐는데 나는 왜 안 되겠습니까? ○○○ 조사님, 왜 안될 까요? 안 해서 안돼? 그러면 또 내가 그렇게 명하면 된다면 내가 하나님이오? 하나님은 그때 명하는 대로 됐지만 내가 하나님이오. 명하는 대로 다 되구로? 내가 하나님입니까? 겨자씨 믿음 생활하면 내가 하나님 됩니까 그때는 하나님이 명하니까 전부 명한 대로 다 됐는데, 바다야 고기 내라 하니까 다 됐고, 땅아 모든 식물 내라 하니까 다 됐고, 공중아 새를 내라 하니 다 됐는데, 그러면, 그때는 하나님이 그라니까 됐지만 나는 그렇게 말한다고 그게 된다면 내가 하나님이라 됩니까? 내가 하나님이라 그와 같이 명한다고 되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이라 됩니까? 내가 하나님입니까? 대답해 보이소.
○조사님 대답해 봐. 옳지, 하나님은 아니지만 내 말하는 건 내 말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나를 붙들고 말하기 때문에 껍데기는 백 목사지만 속은 하나님이요 진리요 영감이요 이제 예수님의 대속의 지극히 큰 공로라 그 말이오. 속에 말하는 이는 이 셋이요 껍데기는 백 목사지. 이러기 때문에 말한 대로 다 된다 그거요. 이것이 우리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믿음이 이렇게 겨자씨 믿음으로 자라가면 여기까지 자라간다 하는 것을 말씀해 주셨으니,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이거 과거사입니까 현재사입니까? 과거사, 겨자씨 한알만한 믿음이 있었더면 벌써 이 자가 될 때까지 자라 갔다 말이오. 이 자까지 벌써 성장 됐다 그말이오.
뽕나무를 명하여 바다에 심기우라고 하였을 것이요 그대로 순종하였으리라 하는 이 사람이 벌써 되어졌다 그말이오. 이런데 왜, 우리는 겨자씨 믿음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겨자씨 믿음 생활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되지를 못했으니까 지금부터도 늦지 안해요.
우리가 생활해 보면 만일. 하루도 그래 할라 하면 힘이 드는데, 어쨌든 내가 하루, 일 년도 안 갈 거라. 일 년도 안 갈 거고, 그렇게만. 그렇게 일 년이면 기회가, 일 년이면 삼백 육십 오 일인데 하루 만일 열 번씩이라고. 열 번 현실이 있다고 하면 삼천 육백 오십 번, 하루 열 번이 아니라 한 아마 삼십번 기회가 있을라. 우리가 보면 요리 조리 바꾸어지는 것이 한 삼십번 기회 있어. 삼십번 기회 있는데 한 시간에 한 기회 더 있지 안해요? 한 시간에, 한 시간에 우리 진리로 살고 진리로 안 살고, 한 시간 살고 보면 진리로 살지 안하고 엉뚱한 것으로 살고 한 시간 살고 보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잊어버리고 살고 엉뚱한 것으로 살고. 이런데, 하루가 아마 백 번은 될 거야. 하루 백 번 잡으면 일 년이면 삼만 육천 오백 번만 내 기능하고 진리하고 영감하고 피하고 바꾼 것이 내게 기능이 삼만 육천 오백 기능만 진리하고 합작된 기능이 이렇게 삼만 육천 오백 개만 있었으면 굉장할 것이오. 안 그렇겠습니까? 이렇게 참 우리에게는 예수님의 피공로로 굉장한 거니까 이걸 들어 가지고 꼭 오늘부터는 여러분들이 작정해 가지고 요래 가지고 해 보십시오. 해 보면 우리 교역자들, 요렇게 하면 이제 한 석주 안남았습니까? 요번 주간 지나고 나면 한 두 주간이나 석주간 있으면 만날 건데 아마 그동안만 해도 굉장히 놀랄만치 변화가 됐을 것이라. 뽑는 능력 옮기는 능력 이제 심는 능력. 굉장한 능력자가 됐을 거라. 이제, 자. 이와 같이 이렇게 겨자씨 믿음 생활로 한번 해 볼 사람 손들어 봅시다. 주여! 할렐루야? 할렐루야! 할렐루야! 아멘! 됐어, 됐어. 마귀 이놈은 죽어요. 요번에 하나님께서 이 사람병 다 고칠라고 작정했는데 고쳐지는 거 같아요. 고쳐지는 거 같애
이런데, 고라고 난 다음에 덧붙여서 주의시키는 것은, 밭 갈고 양 먹이고 했는데 이제 그거 다 했으니까 집으로 돌아갈 것 아닙니까? 고거 다 하고 난 다음에는 주님 만나게 된다 말이오. 그라고 나면 주님 만나지 않습니까? 우리 사명 다 하고 난 다음에는 주님 만났을 때에 그때에 우리에게 적이 셋이 있어.
자기 공로가 자기에게 보여지는 그게 첫째라. 자기 공로가 자기에게 보이지 안하고 자꾸 못한 거만 보여져. '아이구. 이것도 못 했네 저것도 못 했네.
이것도 미진이네 저것도 미진이네 이것도 팔푼이 네 저것도 팔푼이네.
백점짜리는 하나도 없네' 자꾸 못 한 거만 보여지는 데 '이것도 됐다' 그거 자기 한 공로가 보여지는 것이 적이니까 이것을 다 없애 버려라. 자기 공로를 주님이 알아주리라 기다리는 이것을 완전히 없애 버리라 '이것을 주님이, 사람들이 알아주지 못하느냐 하는 그것이 자살 행위다.
그라고 난 다음에 '앉아 먹으라' 그라고 난 다음에는 주님이 나를 좀 대우해 주지 않느냐, 사람들이 나를 대우해 주지 않느냐 주님이 대우하는 것이 사람들이 대우하는 거니까 사람 대우하는 것이 주님이 사람들을 통해서 대우하게 하는 것 아닙니까? 이러니까, 대우를 바라지 말아라, 대우 바라는 것이 그것이 자살 행위다.
그러면, 뭘 하라 말이냐? 주인이 먹을 것을 예비하라. 주인이 먹는 것은 나를 통해서 하나님이 하시는 것을 가리켜서 먹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나는 너로 더불어 먹고 너는 나로 더불어 먹는다' 먹는 것은 '보내신 자의 뜻을 행하는 것과 그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 주님의 양식이라' 이렇게 했습니다. 이거는 인격의 양식이라. 우리 양식도 다 그렇습니다. 고기덩어리 양식은 입으로 먹지만 인격의 양식은 자기의 지식으로 먹고 인정으로 먹고 행함으로 먹고 그렇게 먹는 것입니다. '주인 먹을 양식을, 먹을 것을 예비하고 그 말은, 주님이 또 나한테 시킬 것이 무엇인가, 나로 통해서 이룰 것이 무엇인가, 주인 먹을 것은 주인이 나를 통해서 하실 일이 뭐인가. 주님이 내게 대해 명할 것이 뭐인가? 주님이 내게 대해서 명령하실 뜻이 뭐인가 그거 찾는 것이 우리 할 일이라.
어데까지 공로를 베풀어서 순교당할 지경에, 순생 지경에서 죽을 고비를 많이 넘기고 왔다 할지라도, 그것이 밭가는 운동이요 양 먹이는 운동인데, 어떤 애로의 고통의 수고를 많이 하고 왔을지라도 셋을 용납지 못하도록 막고, 그라고 난 다음에 할 일은 뭐이냐? 주님이 내게 명할 것이 뭐이냐, '주님이여, 내게 명할 것이 뭐입니까? 뭐, 잡수실 것을 예비하고 '주님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나에게 지금 명할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을 찾는 것이 주님 잡수실 거, 주님 식물, 나를 통해서 주님이 하실 것을 발견하는 것이 주님이 잡수실 것을 발견하는 것이지.
그 먹을 것을 예비하고, 먹는 동안에 띠를 띠고 섬기다가, 주님 잡수실 때에 띠를 띠고 섬기고, 나를 통해서 하실 주님의 그 뜻을 주님이 잡수시도록, 주님이 행하시도록, 나를 통해서 주님이 하실 일을 주님이 하시도록, 주님이 어떻게 합니까? '아, 주님, 이것이 내게 대한 뜻입니까? 이것이 내가 할 명령입니까?' '명령입니까' 하고 주님이 잡수시도록 하는 것은 주님이 행하시도록 하고.
주님의 행하시는 것이 뭡니까? 어떻게 행합니까? 내가 주님에게 기도합니다.
'주님이 나에게 이거 하라고 하셨는데 내가 이 일을 할 터인데 주님이 해 주십시오. 주님이 해 주십시오.' 내가 주님에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니까 주님이 다 했습니다. '기도하고 난 다음에 구하는 것은 다 받은 줄로 믿으라' 이제 주님께 기도 하니까 주님이 다 이루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고 난 다음에는 '이제 자고 쉬라 다 됐다' 때가 되니까 또 '일어나라 가자' 하심 같이 주님이 내게 대한 뜻을 내가 발견하는 것이 나 할 일이요,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주님이 그 일을 먼저 해 주시도록 내가. 그라고 난 다음에는 기도할 일이요. '주님이 내게 대해서는 뜻이 이것인데 나는 이를 할 만한 능력이 없으니까 주님이 이를 해 주십시오' 간구해서 기도했으니까, 내가 기도하니까 당신이 다 먹었다 했으니까, '다 먹은 후에' 했으니까 주님이 뭐 했다 말이오? 나를 통해 다 했다 말 아니오? 다 먹었으니까 다 했다 말 아니오? 이해가 돼요? 다 잡수셨으니까, 잡수시는 것은 나를 통해서 하는 것이 잡수시는 것이니까 다 잡수셨으니까 다 행했다 그말이오.
주님이 뭐 닥치지도 안했는데 뮐 다 해? 이제 당신에게 내가 기도하니까, 내가 기도하니 당신이 해 놨다 말이오. 내가 기도하니까 당신이 해 놨어. 당신이 해 놓은 것 우리가 뒤에 그것을 나타내게 하는 것뿐입니다. 뉘가 하나님의 의를 이룹니까? 하나님이 해 놓으신 그것을 자기가 간구하면 하나님이 해 주셔서 하나님이 해 놓은 그것을 나타낸 거, 표현하는 것 뿐이라. 그러니까, 하기는 주님이 하셨는데 제가 했다고 사람들에게는 인정받기 쉽지. 그러니까 영광을 주님에게 돌릴 것을 그 영광을 제가 차지하기 쉽다 그 말이오.
'띠 띠고 섬기다가' 띠 띠는 자기 마음을 단속하는 게 띠 띠는 거 아닙니까? 주님에게 이제 띠 띠는 것이 뭐이냐 하면 기도하는 것이라. 주님에게 해 달라고, 띠를 띠고 하는 것이 내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이제 힘을 다하고 목숨을 다해서, 내가 그걸 행하는 게 아니라 먼저 내가 기도를 해요. 기도하면, 기도하면 하나님이 하시오. 기도하니 하나님이 하시도록, 그 일을 다 하시도록 내가 띠 띠고 수종들어 띠 띠고 수종들어. 주님이 다 하시도록 띠 띠고 수종들어. 다 하시도록 띠 띠고 수종들어. 주님이 다 행하시도록, 내게 대한 명령을 당신이 먼저 다 해 놓도록 내가 그렇게 띠 띠고 수종들어. 띠 띠고 수종드는 게 뭐이냐? 나는 거기서 간절한 마음과 간절한 소원 가지고 기도하는 그것이 띠 띠고 이제 수종드는 거라. 수종들어서, 주님이 다 해 놨어. 이제 기도해서 주님이 다 이루셨어 이루어 놨으니까 나는 표시만 하면 돼. 이루어 놓은 것 표시만 하면 된다 말이오.
여기 '띠 띠고 그라고 난 다음에 네가 먹어야 되지 않느냐' 그라고 난 다음에 내가 먹습니다. 내가 먹는 거는 뭐요? 내가 먹는 거는 뭐하는 겁니까? ○목사님, 내가 먹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 내가 먹는 거는 뭐하는 거지? ○○○장로님, 내가 먹는 거는 뭐하는 거지? 예? 받는 거, 그래 받는 거요. 받는 건데 받는 게 어떻게 받는 것이지? 주님이 해 놓은 거를 내가 다 받는 건데 받는 게 뭐 받는 건데? 그거 받는 건데 내가 껍데기 형용을 해야지? 당신이 해 놓은 것을 내가 껍데기로 행색을 하는데, 알맹이는 하나님이 했고 내가 껍데기로 하는 행색은 내가 한다 말이오.
이제 그렇게 주님의 뜻을 발견하고 난 다음에 내가 간절히 기도하면 주님이 다 이루실 때까지 나는 띠 띠고 섬기고 간절히 기도하고 주님이 다 이루시고 난 그것을 이제 껍데기를 내가 장식을 하는 거라. 껍데기를 내가 하는 거라. 내가 행한 거라. 내가 먹는 거는 내가 하는 게 내가 먹는 거 아닙니까? 내가 먹는 거는 내가 이루는 게 내가 먹는 거 아닙니까? 내가 행한 거는 내가 먹는 거라.
'이렇게 했다고' 이제 그라고 난 다음에 '칭찬하겠느냐' 또 칭찬을 기대 하지 말아요. 칭찬 기대하면 죽습니다. 우리가 대개는 여기서 시험에 듭니다.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를 이기고 난 다음에도 이 시험에 들어 가지고 실패한 사람들 많습니다. 알아주기를 기다리고 대우를 기다리고, 알아주기를 기다리고 대우를 기다리는 것이 어디서 움싹이 텄을까? 대우를 기다리기 전에 알아주기를 기다렸고, 알아주기를 기다리기 전에 무엇이 들어서 알아주기를 기다렸을까? 그 뿌럭지가 뭐이지? 밭 갈고 양치는 거? 자기 한 것을 자기가, 공로를 자기가 이제 기억하는 것이라. 자기가 양 먹이고 양 치고 이래 한 그 공로를 자기가 기억하는 거, '내가 이런 일 했다' 자기 한 공로가 자기 생각에 떠오르는 것이 그것이 알아주기를 원하는 원인이요, 알아주기를 원하는 그것이 대접해 주기를 바라는 원인이요. 그것이 믿음 박살시키는 원인들인 것입니다.
이래서, 그것 때문에 왜정 말년에 자기 한 공로를 안 사람들, 자기 공로로 '내가 왜정 말년에 신사 참배 이렇게 저렇게 이겼다' 이겼다는 것을 자기에게 기억있는 사람은 반드시 실패했습니다. 이겼다는 것을 기억한 사람. 제가 옥중에 나온 사람들 중에서도 몇 사람 만나 봤는데, 여러 사람을 만나 봤는데 만나는 가운데에 어떤 사람은 '아이구 옥중에서 수고했습니다. 고생했습니다. 낯을 못 들어. '아이구, 말하지 마이소. 부끄러워 말 못 하겠습니다.' 왜? 진정 옥중에서 이긴 게 하나도 없다 말이오. 이긴 게 하나도 없어. '아이구, 껍데기는 옥중에 있다 나왔지만 속으로는 엉망진창입니다. 밖에 있는 사람이 더 의인입니다.
엉망진창입니다.
이래서, 이긴 게 하나도 없다고. 엉망진창이라고 부끄러워 못 견디는 사람은 교만하지 안하고 그 뒤에 끝까지 빛을 나타냈습니다. 그러나 그걸 옥중에 이렇게 이렇게 해서 이런 고난을 당했고 이럴 때는 이렇게 승리했고 어쩌고 하는 그 사람들은 그거 팔아먹기를 한 이삼십 년 팔아먹고 난 다음에는 영능이 다 떠나갔습니다. 영능이 떠나가고 그 뒤에는 참 노망한 거 모양으로 수치스러운 그런 일들을 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손양원 목사님은, 그때 신사 참배 안 한 사람들만 모여 가지고 그때 이제 신사 참배 반대하는 깨끗한 사람들로 개혁한다고 해 가지고 고신으로 개혁했는데, 손양원 목사님이 개혁한 고신에 있다가서 자기가 합동도 아니고 칼칙으로 기어 들어갔습니다. 칼칙으로 기어 들어간 손양원 목사님 내가 물어보지도 안하고 알아보지도 안했지만 손양원 목사님이 뭣 때문에 칼칙으로 기어 들어갔느냐? 기어 들어간 이유는 내가 딱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지만, 백프로 맞는지 안 맞는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알고 있습니다, 만나지 안했어도. '하, 내가 무슨 개혁이며 내가 뭘 승리며 이제 옥중 성도라? 나는 이 자리에 들만한 자격이 없고 나는 승리한 게 없어. 나는 뭐 유별스레 깨끗한 그런 게 없어. 나는 더럽기 때문에 이 한국 교회에서 제일 더러운 거는 칼칙이 제일 더럽기 때문에 나는 칼칙으로 들어가서 파묻혀야 되겠어. 나는 깨끗지 못해.' 그 깊은 각오가 있어 가지고, 모든 사람이 '뭣 때문에 저 칼칙으로 들어가는가?' 다른 사람이 노망했다고 할 만했지만 그는 꼭 만류해도 뿌리치고 암말도 안하고 그 가운데서 들어가 있다가서 이제 이 겨자씨 믿음 생활 그대로 하다가서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참으로 인간들이 알지 못한 그 세계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우리 최덕지 선생 재건파는 참 이긴 중에 이겼습니다. 이겼는데, 이제 만일 자기네들의 공로가 보인다면 문제입니다. 알아주기를 기다린다면 문제입니다. 대우를 바란다면 문제입니다.
할 일은 그것이 아니고 또 내가 주를 위해서 할 일이 뭐인가, 주님은 내게 대해서 명령하는 게 뭐인가, 또 나 죽을 곳이 뭐인가, 내가 십자가 질 곳이 뭐인가 내 할 것이 뭐인가 그거 발견하고 난 다음에는 주님이 해 주지 않으면 안 된다고 애걸복걸 주님에게 간절히 기도하고 난 다음에 하나님이 이제 기도하고 응답 받아서 이루어 주신 이루어 주신 것 그거 자기가 몸으로 행하고 행하고 난 다음에 그라고 난 다음에 '이만치 했으니까 됐지'가 아니라 그라고 난 다음에 이제 '나는 무익한 종이라. 주님의 십자가의 대속의 공로의 지극히 큰 것을 보니 죽고도 나는 무익한 종이라 어디까지 충성해도 무익한 종이라.' 왜? 큰 값에 팔렸는데 나는 도무지 그 값에 비해서는 너무도 허무한 것입니다. 너무도 그 값의 백분지 일도 하지 못하는 무익한 종입니다. "마땅히 하여야 할 것이라" 내가 이와 같이 살아야 되기는 살아야 될 것인데 실상 대가에 비해서 무익한 종이라 할 것이니라, 이것이 신앙이 더해지는 유일한 방편을 우리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