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소망과 연성

 

1980. 3. 21. 금새

 

본문: 빌 1 :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과 만물과 모든 움직임의 사건 속에 심기어 사는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무엇에 뿌리를 박고 무엇으로 자라는지 그것을 항상  비판하고 심사하여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기 전에 스스로 자기를  심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피면 하나님처럼은 모르지마는 대게 알 수 있게 돼  있습니다.

 이제까지 인간으로서 자기의 하나님 심판을 자기의 하나님 심판을 살펴 안 자도  없었고 알 자도 없었지마는 주님의 구속으로 인해서 우리는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우심을 받은 우리들이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자기를 스스로 심판하는 이 생활을 힘쓰는 사람은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에 가서 정죄 받을 것이 적겠고 또 모든 사람의 판단을 받아  자기의 판단으로 이용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심판에 정죄 되는 것에 대해서  예비하고 면제되는 일에 크게 도움이 됩니다.

 남의 심판이 자기 심판만 못하고 자기 심판이 하나님 심판만 못하기 때문에  바울이 늘 두려워하면서 자기의 무지 무능한 것을 정죄한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양심이라는 빛이 있기 때문에 구속받은 자가 이 빛을 사용하면 거의 다 잘 알 수  있습니다. 빛이라고 하는 이 양심은 첫째가 자기를 떠난 마음입니다. 자기에게  붙들린 마음은 양심이 아닙니다. 자기를 떠난 비판의 그 지혜의 마음을 가르쳐서  양심이라 합니다.

 또 양심은 시간의 제한을 벗어난 마음입니다. 자기에게 가까운 시간과 먼  시간에 차이가 없이 활동하는 마음 또 공간을 초월한 마음을 양심이라 말합니다.

이 자리에서 가진 마음이나 저 자리에서 가진 마음이나 다 같은 것을 말합니다.

가까운 장소와 먼 장소에 대해서 차이점을 주는 그것이 가까운 데에 어두워졌고  먼 데에 어두워져서 빛이 가리어지게 된 것입니다.

 자기를 떠나지 못한 자기 중심 자기 위주의 마음은 그것은 악한 마음이요  시간도 백년후의 시간을 생각하는 것과 지금 생각하는 것 백년 전에 것을  생각하는 것과 지금 생각하는 것이 같지 아니한 그것은 다 어두운 마음이요  양심이 아닙니다. 양심보다 더 밝은 것은 영감의 마음인데 하나님의 심판 앞에  가서 생각하는 것이나 지금 생각하는 것이나 꼭 같은 것이 영감의 마음입니다.

영감입니다. 영감만은 못하지만은 냉정스럽게 하나님의 공평 된 심판에 대해서  자기에게 제재 받지 않는 그 공정성을 가지고 생각하는 마음이 양심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양심을 가지지 아니한 증거는 다 자기에게로 집중된 결과를 맺는  것이요 양심을 가졌을 때에는 자타가 공평 되고 자기에게 대해서 지나친 동정이  없는 마음입니다. 영감에 마음 영감은 하늘나라에 가 가지고 세상을 돌아보면서  생각할 그때의 비판과 평가와 오늘에 같은 비판과 평가를 꼭 같이 가지게 되는  것이 영감입니다.

 우리는 이 네 가지 속에 살고 있으니 내가 어느 것을 자주 접하고 마음으로써  접하고 내게 있는 기능으로 접하고 소원으로 접해서 그것에게 뿌리를 박아  받아다가 그것으로 점점 크게 가는 것인지 우리는 생각지 않으면 헛일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으로 자라 가는 것을 전혀 모릅니다. 그들은 물질로 자라 가는 것  제일 저급의 사람들이 이것을 잘 보고 크게 여깁니다. 물질로 자라 가는 것,  그보다 조금 발달된 사람들은 사건으로 자라 가는 것을 귀중히 여깁니다.

인인관계 사물관계 이것으로서 자라 가는 그것을 위대하게 봅니다. 그보다도  높은 도덕가 철학가 또 오랜 후에 역사에 남아 있는 역사 이것은 인간으로 자라  가는 것을 크다 여깁니다. 이것이 세상의 전부입니다.

 세상이 알지 못한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하나님으로 자라 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일 많이 사모하고 생각하고 원하고 접하고 하므로  하나님에게 대해서 유식케 해지고 하나님께 대해서 넓어지고 깊어지고 높아져서  이제는 하나님으로 점점 커지는 것, 하나님으로 점점 부요해지는 것, 이것은  세상이 모르는데 우리는 이것만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이것만 우리의 일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외에 세 가지를 접하는 그것은 하나님께 뿌리를 박아 하나님으로  자라 가는 데에 보조로 이용되는 것이지 우리가 거기에 뿌리박을 곳도 못됩니다.

왜? 그것은 허공과 같고 허무하기 때문에 거기에 뿌리박은 것마다 결과는  결말에는 썩습니다. 그것으로 자란 것도 결국은 말라버립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에게만은 뿌리를 박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만이 사모하고  사모해서 그 사모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연구한 그 연구가 없어지지  아니하고 하나님만을 안 그것이 삭제되지 안하고 하나님으로 인한 것만이  불변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에게 뿌리를 박은 것이요 하나님으로 자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심사해서 자기가 어떻게 하든지 기억해서 항상 이런 것은  자기의 표어처럼 가지는 것이 좋습니다.

 지금은 내가 무엇을 의지하고, 바래보고, 목적하고 무엇을 인하여 위하여  힘입어 무엇에게 피동으로 살고 있느냐 하는 그것이 어데 뿌리박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면 내가 무엇으로 커지고 무엇으로 많아지고 무엇으로도  강해지고 충만해지는가 잘 알 수 있습니다.

 돈으로는 많아지고 커져도 하나님으로는 점점 쇠약해질 수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런 사업 저런 사업 이런 저런 움직임은 위대해져도 그것 위해서 그 사람이  있고 거기에 속했고 그것 바래봤고, 하나님과는 아주 관계가 그로 인해서 더  끊어질 수가 있습니다.

 천하 인간에게 다 유명을 점령하고 환영을 점령했다 할지라도 자기가 하나님  대신 돼 버리고 하나님과는 완전히 상관없는 자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것을  가르쳐서 성공 같으나 실패가 있고 실패 같으나 성공이 있는 이 두 세계를 가진  옛 사람, 새 사람, 첫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 둘째 아담에게 속한 사람으로  우리는 삽니다.

 둘째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우리는 세상에서 모으는 사람이 아니고 보관하는  사람이 아니고 우리는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쓰는 사람.

 그러면 예배당 없는데 예배당 하나를 마련했으니까 그거는 모으는 것이 아니며  있게 하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하나님이 있게 하고 하나님이 모았지 우리는  쓰는 일 했습니다. 어떻게? 우리는 가진 물질을 거기에다가 하나님의 뜻대로  썼습니다. 정력을 썼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우리의 가진 것을 소유, 정신, 힘,  마음, 몸 드리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가지시고 당신이 인간을 구원 할려고저  하시는 당신 뜻대로 이룬 것이 예배당입니다.

 우리는 당신 뜻대로 바쳐 쓴 것이요 쓰니까 이루어진 것은 하나님이 그것을  이루어지게 하신 것이요 하나님이 당신의 뜻을 이룬 것입니다. 뜻을 이루시는데  우리는 이용당한 것이요.

 그러기에 이 말을 왜 하는고 하니 쓴다는 쓰는 것만이 우리 할 일이라는 것을  이해를 못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나 예를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든지 가진 것을, 것을 주를 기쁘시게 영화롭게 어쨌든지 우리는 쓰기  위해서 있다. 쓰는 것이 나 할 일이라. 쓰는 것이 나 할 일이요, 없어지게 하는  것이 나 할 일이요, 적어지게 작아지게 하는 것이 나 할 일이라.

 보관은, 보존은 하나님이 보존하시든지 없애든지 당신이 할 일이지 나 할 일은  아니라. 보존도 나 할 일은 아니라. 보관도 나 할 일은 아니라. 있게 하고, 많게  하고 크게 하는 것도 나 할 일은 아니라 나 할 일은, 나 할 일은 많든지,  적든지, 크든지, 작든지 이것을 쓰는 것이 나 할 일이라 요것을 단정지어야  됩니다.

 사람이 일생동안 어떤 사람은 있게 하기 위해서 이것이 없어지지 않도록 이것을  보존하기 위해서, 이것을 많게 크게 하기 위해서 일생을 바치는 것이 땅에 속한  사람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이루어지느냐 하면 한 사람도 그것을  이루고 간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지막에는 다 실패했습니다. 그것이 자기 중심의  생활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쓰고 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라고 하면 어데 다 대고 쓸  것인가 인류를 위해서 쓸 것인가 모든 세계의 문화를 위해서 쓸 것인가 어떤  물질을 위해서 쓸 것인가 어데 다가 쓸 것인가 우리가 쓸 곳은 주님이 모든 것을  다 드려 나에게 지극히 큰 것을 해 주신 것이 있는데 이것은 빠진 것 없이  전체를 구비해서 지극히 크고 영화로운 것을 나에게 해 주셨는데 이것을 내가  받아서 빼앗기지 아니하는 데는 이것을 가지는 데에는 이것을 써서 누리는  데에는 내게 있는 것을 다 해야 되지 내게 있는 것을 남기고는 이 지극히 큰  구원을 받을 수도 없습니다. 누릴 수도 없습니다. 또 볼 수도 없습니다. 알 수도  없습니다. 다 해야 들으면 알 수 있고 보면 알 수 있고 가질 수도 있고 누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땅에 속한 것은 쓰는 것이요 하늘에 속한 것을 취하는 것이요  누리는 것이요 이것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보관하는 것이요. 예수님의 구원인  지극히 큰 구원 이것을 위해서 다 이것 위한 것으로 다 되고 땅에 속한 내 것이  이것을 위하는 것이 되고, 이 구원 이 구원의 것이 되고, 구원을 위하는 것이  되고, 구원의 것이 되고, 이 구원에게 쓰여지고, 구원 때문에 없어지고 하는  이것이 땅에 속한 것을 우리가 쓰는 방편입니다.

 이러면 이것을 가르쳐서 썩을 것으로 심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사는 것이요,  약한 것으로 심어 강한 것으로 사는 것이요, 욕된 것으로 심어 영화로운 것으로  사는 것이요, 모든 물질의 것으로 심어 시공에 제한 받지 않는 신령한 것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세상에 있어 모든 자연에 속한 것은 땅 위에 더 있게 하려함이  아니요 이것을 없게 하는 것이 우리 할 일이라 땅위의 것을 없게 하는 이것이  없어질 것이 영원히 있게 하는 것이라, 없게 하는 이것이 죽은 것이 살아나는  것이라 이것이 시공에 제한 받은 심판 받을 것들이 시공을 초월한 심판 통과되는  것들이다. 이것이 옮기는 것들이다.

 그러기 때문에 없어지기는 다 같이 없어졌지마는 먹어 없어지는 것, 써서  없어지는 것, 불에 태워 없어지는 것과 자기에게 가진 것을 땅에 심어 없어지는  것은 그것은 몇 십 배나 큰 것처럼 비유한 것입니다.

 이렇게 구속을 위해서 구속을 인하여 구속 때문에 구속의 것이 되어지는 이것은  구속의 것이 되어지는 이것은 새 사람의 것이 되어지는 것은 옛 사람의 것이  새사람의 것으로 되어져 옛사람의 것이 없어지는 것은 이것은 죽는 것이 아니요  사는 것이 아니요 작아지는 것이 아니요 커지요 것이요 무가치해지는 것이  아니요 이것은 지극히 가치 있게 되는 것이기 때문에 한 알을 심어서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어떤 종자는 천 배 이렇게 많아지는 것이니 한 알이 이렇게  커지고 많아지는 것처럼 이거는 자기에게 더 큰 수입이 된다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연보를 바치는 것은 하나님에게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것을 자기가 잠깐 보관해 가지고 있는 이것을 보관시킨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쓰면 그것을 영원히 자기 것으로 상속시켜 줄라고 하는데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보관해 가지고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안하고 요것을 망령되게 제  욕심대로 제 뜻대로 쓰고 보관시켜 주신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안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안 하니까 '네가 불의의 것을 충성 안 하는데 누가 참된  것으로 주겠느냐' 하신 것입니다. 요것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요것을  하나님의 뜻대로 쓰면 요것을 영원히 우리 것을 만들어 주겠다 하시는 것입니다.

영원히 네 것을 만들어 주겠다.

 그러면 없어질 자연에 속한 것을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셨는데 나에게 주신  이것을 영원히 내가 도둑 맞지 안하고 영원히 빼앗기지 아니하고 영원히 나에게  필요하도록 영원무궁토록 완전히 영원무궁토록 내 것을 만드는 그것이 무엇이냐  영원무궁토록 이것을 내가 사용할 수 있고 내가 가지고 내가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이 이동권이 뭐이냐, 이동법이 뭐이냐, 상속법이 뭐이냐, 이것을 완전히  내가 만드는 수속이 뭐이냐? 요것이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는 것인데 그것이  예수님의 구속의 것이 되는 것이요 구속을 위해서 쓰는 것이요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명령대로 그것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상속받는 것이요 그것이  이전 수속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전부를 하나님에게 다 드려 하나님의  뜻대로 써 놓고 예를 들면 말이오 뜻대로 써 놓고 하나님 당신이 나를 위하는  것처럼 나도 당신을 위함으로써 다 썼습니다. 이러는 사람 있고 이렇게 깨달은  사람 있고 하나님이 나에게 보관시켜 주신 것을 영원히 내 것으로 취급해서 상속  넘겨 주심을 감사합니다. 일시에 보관의 것으로 나에게 주셨던 것을 영원히 내  것으로 아주 영원한 내 것으로 상속시켜 주시니 감사합니다. 이렇게 자기가 쓴  것을 받은 것인 것을 깨닫고 감사하는 사람 있고 두 종류의 사람 있습니다.

 그러면 먼저 사람이 그것이 바로 깨달은 것입니까 뒤의 사람이 바로 깨달은  것입니까? 어느 것이 바로 안 것입니까? 먼저 사람이 바로 깨달은 것이라고 아는  사람 손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뒤에 사람이 그렇게 깨달은 것이라고 아는 사람  손 한 번 들어 보십시오. 네 잘 압니다. 예 여러분들이 잘 아요 모르는 것  아니라 잘 압니다. 이러니까 왜 양심 쓰면 우리 가는 걸음을 무엇 때문에  서성이고 더듬을 이유가 뭐 있겠습니까? 잘 압니다.

 그러면 오늘 아침에 다시 하나 더 그러면 여기에 '하나님을 존귀케 하려  하나니'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을 존귀케 하려 하나니' 그 말은 사는 것도  하나님을 존귀케 하기 위해서 살고 죽는 것도 하나님을 존귀케 위해서 죽는 것,  그러면 있어지는 것이나 없어지는 것이나 어쨌든지 자기 할 일은 하나님을  존귀케 하는 것만이 자기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의 전부는 죽는 것도 자기 것이요 사는 것도 자기 것인데 자기의 것  전부는 죽는 것이요 없어지는 것이요. 사는 것은 보존되어 있는 것이요. 하는  것이니까 여기에 다 포함됐습니다. 이것을 다 가지고 주를 위하는 그것만이 자기  할 일이라는 말을 밝혔습니다.

 그러면 주님을 존귀케 한다, 주님을 존귀케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주님을 존귀케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을 존귀케 하는 것인가? 주님을  존귀케 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주님을 존귀케  하는 것입니다. 또 주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이 영화롭게 하는 것이 존귀케  하는 것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다니,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어떻게 하면은 주님을  기쁘시게 할까?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세상 법칙과 좀 다릅니다.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사람의 법과 다릅니다. 사람은 사람을 기쁘게 할려고 하면  내가 그에게 도움이 되어야 되고 필요가 되어야 되고 유익이 되어야 되고 그를  위함이 되어야 되고 그를 더 튼튼하게 내가 다소라도 도움이 되어야 기쁘게 하는  일이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완전자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당신에게 드려 필요할 수가 없습니다. 당신에게 드려 필요할 수가 없습니다.

무엇을 드리면 당신에게 필요하며 무엇을 드리면 당신에게 도움이 되며, 무엇을  드리면 당신에게 효력이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당신은 완전자요 우리는 그에게 지음을 받은 존재이기 때문에 다 불완전한 것이  지금 완전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뿐이지 다 불완전한 것이기 때문에 불완전한  것이 당신의 완전에게 붙지를 못합니다.

 붙는다면 완전이 더러워졌습니다. 완전이 불완전이 됐습니다. 불완전한 것은  완전에게 붙을 수 없습니다. 완전에게 섞일 수 없습니다. 완전은 도울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요것을 똑똑히 요 기쁘시게  하는 정의를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창조주에게 창조를 받는 것이 기쁘시게 하는 것이요 시은자에게 은혜를 베푸는  시은자에게 은혜를 받는 것이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또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것 지도를 받는 것, 가르침을 받는 거, 당신의 모든  완전의 것을 우리에게 주실 때에 내가 받는 그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 외에 딴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받는 거.

 당신이 나를 크게 해 주실 때에 크게 해 주심을 받는 거 크게 해 주는 것을  받고, 완전케 해 주시는 그것을 받고, 전지전능의 것이 되게 하는 그 지능을  내가 받고 당신의 깨끗을 줄 때에 그 깨끗을 내가 받고, 당신에게 받는 것만이  당신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요 정의를 깨달아야 합니다. 요런 것이 아직까지  잘 나오지 안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에게 있는 것을 하나님에게 드려 기쁘시게 드려서 하나님에게  줘서 하나님에게 드려서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정의하고 있는 이렇게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하나님의 것을 받는 것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적기 때문에 교회라는 것이  혼탁해져 있습니다. 혼돈 되어있습니다. 이 교회와 저 교회가 깨달음이 다르고  사상이 다르고 방편이 다르고 욕망이 다르기 때문에 이렇게 충돌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만이 우리의 할 일이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내게 있는 것을 다 드리는 것이라. 아, 다 드리니까 하나님께 드리는 것  아닌가? 아니야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데에 이용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데에 이용되는 내 건강이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데에  내 심신이요, 내 기능이요, 내 총명이요, 내 움직임이요, 내 몸이요, 내  재물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는 데에 이용된 것 이걸 다 드려야 받을 걸  다 받는다 그 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땅의 말로 안 하면 전연히 모르기 때문에 땅의 말로 해야 되지  하늘의 말로 해야 되지 이러니까 땅의 말로 하면은 이렇고 하늘의 말은 이러니까  어찌 모순되게 뭐 이랬다저랬다 한다. 이랬다가 저랬다가 말이 한갓 되지 안하고  이랬다가 저랬다가 한다. 둘이기 때문에 두 가지 말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리해서 이 말을 함으로 좀 깨달아 가지고 이 말과 같은 말에다 연결시키고  해서 결국은 이 말을 내비두고 하늘의 말을 들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것만하면  쉬운데 이걸 모르기 때문에 시간이 걸리고 문제가 됩니다.

 이 조화를 맞추려고 하니까 이제 주일날은 그런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들이 많이  있기 때문에 두 가지 말로 범벅되게 하니까 저거 딴에는 지금 말을 어떻게 한갓  되게 하지 안하고 두 가지로 한다. 말이 까끌까끌 엔간이 말도 못한다 말이  무수히 안 나오는가 보다. 애가 터지고 답답하다 애가 터지고 답답한 것은 죽을  놈이 애가 터지고 답답하기 때문에 그놈을 지금 죽이기 위해서 하기 때문에 애가  터지고 답답한 그것도 효력입니다. 그것도 도움이 됐소 효력이요 그만치 고놈이  시들고 죽소.

 주일날 오니까 애가 터지지 안하고 답답하지 안하고 시원한 그놈은 내나 옛날  사람 그놈 북돋우고 그놈 물 주어서 지금 시들시들한 놈 이 세상 일 하다가 시들  시들한 것 물을 줘 가지고 더 생기 얻으니까 그 이튿날부터 월요일부터 세상생활  용기 있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참 오묘하고 참 어렵고 참 쉽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면 어린아이라도 당장  듣지마는 자기가 들어서 가리워서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당신에게 받는 외에는 기쁘시게 하는 길이 없다는  이것을 이해를 못해도 정의를 가지고 자꾸 알라고 노력을 하면 자기 머리 속에  머리를 먹으면 정신을 먹으면 시간을 먹으면 길을 가다가서 문뜩 어떤 일을 당할  때에 아이쿠! 이러기 때문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받는 것이로구나 하는  것을 그때 알 때에 주관지식이 됩니다. 그것이 경험에서 얻고 체험에서 얻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지식을 자기가 경험지식으로 체험지식으로 돼져야 자기 주관  지식이 됩니다. 그래야 그 지식이 자기 주관이기 때문에 자기하고 싶은 대로하는  것이 의가 되어지지요.

 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어떤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인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도 있지마는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하고 나로  인해서 다른 사람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이 하나님은 좋다 아이쿠!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로구나 이렇게 존귀한 분이구나 이렇게 사랑의 분이구나 이렇게 자비의  분이로구나 이렇게 깨끗한 분이시로구나 이렇게 건설의 분이시구나 이렇게  축복의 분이시로구나 하는 인정을 다른 것들이 하나님을 좋게 인정하는 것이  인정하게 하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다른 것들이  하나님을 좋게 여기도록 하나님에게 소망을 가지도록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도 없는 무인도에 가 가지고 두 부부 산다 합시다. 살면 그 남편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제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지 못합니다.

거기는 제가 자기 남편이나 아내 자기 아닌 자에게 자기로 인해서 그자가 우리  남편 보니까 참 하나님 이런 분이구나 우리 아내 보니까 참 하나님은 이런  분이로구나 아내로 인해서 남편의 그 아내가 남편으로 인해서 남편이 섬기는  하나님 그 남편의 언행심사와 그 사람을 보고 우리 남편이 섬기는 하나님은  이러하신 분이시로구나 그분이 참 제일 고맙고 제일 위대하고 제일 존경하고  제일 권위 있는 분이시로구나 이렇게 그 아내가 알 때에 하나님을 그 남편이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알아듣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소? 못 알아들으면  헛일이라 쉬운 것이 아니라 말만 암만 알아들어도 실행 없으면 소용없습니다.

 또 아내가 하나님을 믿고 남편이 안 믿습니다. 그러면 아내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됩니까? 아내는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못합니다. 아내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할려고 하면 잘못하면 남편이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아내가  들어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다. 주여, 주여 하면서 만날 이래 가지고서 이렇게  기도나 하고 성경이나 보고 자꾸 이래 가지고 있으니까 하나님은 어떤 존잰지  하나님이라는 귀신만 들어가면 저런 인간이 돼 놓으니까 저런 인간이 되니  천하에 악한 게 뭐이냐? 하나님이라는 신이라 천하에 못 쓸 신이 뭐이냐?  하나님이란 신이라. 왜? 그 아내로 인해서 남편이 자꾸 손해를 보니까 그렇지  않겠소? 아내로 인해서 남편이 손해를 보는데 아내와 남편이 손해 보는 그  원인이 뭐이냐 하면 하나님이란 존재 때문에,   그러니까 남편의 원수는 하나님이 되지 않겠소? 그 뭣이 영광스럽겠소 욕이  되어지지 욕만 해지지 그 남편은 하나님 욕만 할 것입니다. 이라면 하나님을  그에게 하나님에게 욕을 돌리는 것이고 모욕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아내가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게 뭐인가? 그 아내가 하나님으로  인하여 그 하나님을 상대하는 그 모든 것으로 그 남편에게 유익이 옵니다.

남편이 볼 때에 좋은 것이 보여집니다. 위대한 것이 보여집니다. 깨끗한 것이  보여집니다. 거룩한 것이 보여집니다. 진실이 보여집니다. 사랑이 보여집니다.

의가 보여집니다. 경건이 보여집니다. 신실의 신이 보여집니다. 책임의 완수가  보여집니다. 인내가 보여집니다.

 이러니까 그 아내가 남편이 볼 때에 아무래도 자기보다는 말할 수 없이 뛰어난  사람이요 자기가 그 아내에게 감화 감동 받을 수밖에 없는 아내의, 아내의  온전으로 인해서 남편이 덕을 많이 보니까 유익을 많이 보니까 감화 감동을  받으니까 그때에 저 사람이 나보다 탁월한 것은 나는 저 사람이 섬기는 하나님은  참 어떠한 분일까 어떠한 분이기 때문에 저분이 저리 될까  저분 보니까 저분이 섬기는 하나님은 굉장히 깨끗하신 분이시고 깨끗케 하시는  하나님이라 의로운 분이시며 의롭게 하는 하나님이시라 저 분 보니까 저분이  섬기는 저분의 사랑을 보니까 저분이 섬기는 그 하나님은 사랑의 원 뭉텅이고  원천이 되는구나 아, 그분 좀 만나 봤으면 좋겠다 나도 그분 섬겼으면 좋겠다  그분을 사모하게 되어질 때에 그 아내로서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습니다.

존귀케 했습니다.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했다 그 말이오. 영광스럽게 한 것은  제가 한 것이 아니라 저로 인해서 제 삼자 저 아닌 것이 저로 인해서 하나님을  좋다고 이렇게 하고 외치면서 찬성하고 사모하게 할 때에 영광스러워지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받는 거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받는 거 영광스럽게  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사람에게 보여 주고 알려  주고 전해 주고 끼쳐 주고 쓰도록 이용해 주고 이용돼지고 이럴 때에 그분이  하나님에게 받은 것을 제가 그에게 주니까 그분이 받아 보고 난 다음에는  '아이구 이분에게 받아 보니까 이분의 하나님이 이분에게 이걸 준 것 보니까  그분은 참 좋겠다' 비로소 영광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받는 데에 있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 데는 어데 있습니까? 녜, 주는 데에 있고 쉽습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받는데 있고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는 주는데 있고, 뭘 줘?  하나님에게 받은 거 주지. 딴 것 주면 안 돼.

 하나님에게 받은 말을 주고, 받은 뜻을 주고, 받은 마음을 주고, 받은 사랑을  주고, 받은 지혜를 주고, 받은 능력을 주고, 받은 진실을 주고, 받은 거룩은  주고, 받은 의를 주고, 받은 인내를 주고, 받은 관영을 주고 하나님에게 받은  모든 것을 그에게 주니까 자기가 받아보고 난 다음에 구경하고 처음에 하지는 안  하지만 구경해 보고 들어 보고 접해 보고 만져 보고 가까이 해 보고 그걸 받아  가져 보고 난 다음에는 비로소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됩니다.

 요런 것을 알면 이제는 성경을 깨달아서 모든 성경을 차차 이것을 알면 잘  깨달을 수 있고 혼자 얼마든지 이런 부분을 다 알게 되면 성경을 혼자 해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번에 졸업한 학생들은 이제는 너거 자유대로 성경을 해석해 봐라 하나  주의할 것은 이에 배운 말씀을 잣대로 삼고 토대를 삼아서 이 교리와 신조  아래에서 깨닫도록 하고  그러면 거기서 자꾸 확대해 나갈 것이라 깨닫고 난 다음에는 하나 깨달으면 더  예수님 믿을 것이 더 강해지고 둘 깨달으면 더 강해지고 셋이 깨달으면 더 잘  믿어야 되는 믿음이 강해지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깨닫게 되고 깨닫게 되고  나거들랑 그게 바로 깨달은 지 모르기 때문에 이제 배운 교리와 신조에 맞춰보고  그 다음에는 사람들이 말한 정통 주석에 맞춰 봐라 먼저 정통 주석을 보면 고만  그것이 돼 버리기 때문에 새로 자기 깨달음이 나오지 안 해 버려요  이러니까 성경 안 보고 성경을 읽으면 성경이 뭐라 했는고 그거는 주석  공부하는 사람이라 주석 공부하라 하니까 주석이 자기 속에 들어가 버렸기  때문에 다시 자기 깨달음이 없는 것입니다. 항상 거기요.

 그러기 때문에 주석을 보지 말라는 것인데 이 곡해 오해가 보지 말라는 것은  자기 깨달음 자기 지식만 배우고 다른 사람의 알려주는 지식은 못 배우게 한다  요렇게 망령을 부려서 싸우고 패역을 부리다가 지금은 좀 나았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의 부모네들이 가 가지고서 주석을 모르게 가져 와 가지고서  불에 태워 버린 사람도 있소. 숨겨놓고 주지 안 하는 사람도 있소. 왜? 요것  배우지 못하게 하기 때문에 그것 배우면 그게 들어가 놓으면 그거 들어가 놓으면  새것이 들어가지 못해. 이 새움이 들어가지 못해. 이 세대는 새로운 깨달음이  나와야 되지 지난번에 깨달은 그 깨달음은 묵은 둥치에는 꽃이 안 펴 그  둥치에다가 새로운 깨달음이 움이 나와야 돼. 새로운 깨달음.

 지금 이십세기의 세계 문화도 옛날 문화에 자꾸 새움이 나 가지고 지금  이십세기의 문화가 된 것이지 옛날 문화 없이 새로 나온 것 아닙니다. 그것  간단하게 쉬운데 고집을 피우기 때문에 모르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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