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25 18:38
구원의 터 6가지
1986. 6. 1. 주일오후
본문:히브리서 5장 13절∼6장 2절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 데 나아갈지니라
우리 서부 교인들은 알아 듣는지 못 알아 듣는지 모르나 참 어째 보면 싱겁고 재미가 없습니다. 그저 백 목사 설교하면 뭐 옳으나 그르나 말할 것 없고 뭐, 그렇다 하고서 들어 둬 버리니 그거 참 애터지는 일입니다.
여러분들이 여게서 배운 말씀을 듣고 모든 도서실에나 가 가지고 모든 주석들을 좀 찾아서 보십시오. 그래 보면 ‘이거 바른 해석이다. 이 모든 주석과 다른 해석인데 이거 어찌 되나? 이게 옳다.’ 뭐 좀 평가를 할 건데 그래 놓으니까 아예 행할라고도 생각지 안하고 옳은가 그른가 한번 대조해 볼라고도 하지 안하고 그래 놓으니 아무 맛이 없습니다.
제가 이 말씀을 증거하고 그래 오전 예배 보고 나가서 오층에서 한국에 제일 유력한 분의 주석을 내가 찾아봤고, 세계에 제일 유력한 분의 주석이 마침 거게 있어서 찾아봤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해석과 제 해석은 정반대입니다.
이런 거 여러분들 보고 이거 틀렸다든지 옳다든지 뭐 이래야 될 터인데 그뭐 이래도 저래도 아무 말 없이 그만 그냥 뚱뚱 따라오고, 따라오며 행하며 따라오면 하지마는서도 하거나 말거나 이래 가지고 있으니까 이것 참 애가 터지는 일이라 그거요.
교역자들도 그래요. 인간말은 잘 듣는데 하나님 말씀은 듣는 귀가 영 없어.
이번에 교역자회 모이면 좀 그걸 좀 말할라고 하는데 너무 사람들이 지혜가 좁아요. 지혜의 그 시야가 좁아. 그래 놓으니까 그만 좀 큰 함정 속에서는 몇백 년이고 몇천 년이고 파묻혀 삽니다.
○○ 교인들이 그 ○○교 지금 우상 종교에 파묻혀 가지고서 오늘까지 있지 않소? ○○교는 우리 큰집이라 하고서 안심하고 살고 있습니다. 그거는 기독교는 아닙니다. 우상 종교입니다. 우상 종교가 되고 말았어요. 파묻히고 그만 그래 살고 맙니다.
이거는 어떻게 해서 이 믿는 사람들이 신앙이 자라지를 못하고, 교리가 자라지 못하고, 신조가 자라지 못하고, 신앙 지식이 자라지를 못하고, 신앙 행위가 자라지를 못해서 뭐 얼마 있다가도 또 어떤 시험 오면 다 넘어지고, 이거는, 지금도 아마 6 5 같은 일이 온다든지 그리 안 하면 무슨 왜정 말년 같은 그런 시험이 오면은 그만 어찌 될란지 모르겠어. 그 시험이 한번 오기는 와야 되겠어.
와야 진가를 알지. 진짜와 가짜를 알지. 오기 전에는 어떤 것이 진짜요 어떤 것이 가짜인지 몰라요.
금을 불에다 넣어놓고 구워 봐야 잡철인지 금인지, 그 금은 참 순금은 몇냥쭝이고 나머지기는 전부 은이니 뭐 구리쇠니 뭐 이런 것이 잡철이 들어 있고 순금은 얼마라 하는 걸 알 수 있는 터인데 그런 시험이 없어 놓으니까 전부, 순금을 가진 자는 속지 안하지만, 순금 가진 자는 ‘저거 참 잡철 가지고 있으면서 저래 속고 있으니까 안타깝다’ 싶으지마는 잡철 가진 사람은 잡철인 줄을 몰라. 순금을 가진 사람들도 순금의 가치를 몰라요, 뭐. ‘저것도 저렇게 대우하고 다 저러니까 뭐 순금 순금 뭐 그럴 게 뭐 있나? 참 참된 신앙, 참된 신앙 그럴 필요가 없다.’ 해 가지고서 믿는 사람들도 그만 그 신앙 생활이 멈춤 해 가지고서 흐려지고 맙니다.
신앙이 그래 흐려지는 거는 뭣 때문에 흐려지느냐? 여게 말하기를 13절에, 5장 13절에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이거 비유입니다.
젖을 먹는 자라 말은 그 전에 보면은 말했습니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그러니까 그만, 말하자면 단단한 식물이라 말은 참 예수님 믿기에 지키기에 힘드는 교훈, 지키기에 힘드는 교훈, 소화하기에 힘드는 교훈,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제일 견디기 어려운 문제라도 싹싹 소화해서 내고, 또 이기지 못할 어떤 세상이 다 지는 문제라도 닥치는 대로 싹싹 이겨 내고 하는 이런 장성한 신앙이 돼야 될 터인데 항상 어린 아이 신앙을 가지고 있다 그거요.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은 못 먹을 자들이 되었도다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젖 먹는 자마다’ 어린 신앙 말이요, 어린 신앙마다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젖 먹는 거 그거 어린 아이 아닙니까? 그 신앙이 어린 아이라 말이오.
「어린 아이니」 왜 어린 아이가 되느냐? 고다음에 말해 놨어.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 그말이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
요것도,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다 하는 요것도 해석이 뭐 백도 넘습니다.
여러분들이 주석을 좀 가 봐서 요거 요게는 해석을 요래 하고 요래 하는데 요게 요게 맞나 요게 맞나 성경을 가지고 따져 보면 알 터인데, 따져 보면 이게 맞다 이걸 알 터인데 이걸 따져보지 않기 때문에 뭐 금덩이인지 똥떵이인지 흙덩이인지 이거 구별 없이 그냥 뭐 아무거나따나, 이래 놓으니 참 마귀란 놈은 아주 수입을 보지마는 하나님은 탄식입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의의 말씀이 뭐이 의의 말씀인가? 의의 말씀은 예수님이 대속해 놓으신 하나님의 의의 말씀인데 신인 양성 일위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대속으로 대형으로 사죄, 대행으로 칭의, 대화친으로 생명 이 세 가지 큰 대속을 주셨는데 이 대속이 지금 어데 있습니까? 대속이 어데 있습니까? 대속이 어데 있지요? 하늘에 있소 땅에 있소 정통 교파에 있소 어데 있습니까? 사죄, 칭의, 화친의 이 대속이 어디에 있습니까? 어데 지금 담겨 가지고 있습니까? 예, 성령님에게 담겨 있습니다. 영감에 담겨 있습니다. 영감에. 영감은 이거 담아 가지고 왔소. 영감은 이거 가지고 왔습니다. 영감에는 우리 대속의 그 실상, 대속의 그 실상이 영감에 담겨 가지고 우리에게 왔습니다. 우리에게 온 영감은 전부 이 대속의 실상이오.
그 대속의 실상인데 그 실상이 또 우리에게 어떻게 와서 있습니까? 예? 어떻게 와 있습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이 바로 이 대속 자체요 본체입니다. 실상입니다.
이 말을 뭐 들어도 그저 기억도 잘 못 하고 있으니까 그 뜻을 깨닫는 것은 그리 쉽게 깨닫는 게 아니라.
의의 말씀이라 그말은 예수님의 대속하신 의를 담아 가져 온 말씀이니까 이 말씀은 곧 예수님의 대속하신 의입니다. 예수님의 대속하신 의요. 대속하신 의.
의인데, 「경험하지 못한 자요」 경험하지 못했다 말은 예수님의 대속을 경험하지 못했다 말입니다. 이 대속하신 말씀이 우리 현실 현실에 성신의 감화를 네가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하는 대로 해 보니까 과연 신인 양성 일위이신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 내 죄의 형을 대신해서 주님이 형을 받으셨다 하는 것을 자기가 실제로 경험하게 됩니다. 실제로 경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내 대신 행한 이 대행하신 이 칭의가 내가 말씀을 요대로 행해 볼 때에 직접 칭의를 내가 만나게 됩니다. 칭의를 만나게 되고, 칭의를 붙잡게 되고, 그 칭의를 내가 가지고 있고, 내 속에 그 칭의가 내 속에 있는 것을 자기가 알 거라 말이오.
그러니까, 그 말씀을 경험한다는 것은 그 말씀을 제가 그대로 행해야 경험이 되지 안 하고 경험이 됩니까? 그 말씀대로 행하고 보니까 경험이 되는데 경험해 보니까 막바로 이 말씀이 하나님의 대속의 의요, 바로 영감이 하나님의 대속의 의라.
영감과 하나님 말씀이 예수님의 대속하신 그 대속의 그 실상이라 하는 그것은 자기가 들어 가지고 이해가 잘 안 될 것이고, 행해 본 사람은 들으면 이해될 것이고, 행해 보지 안한 사람은 들어도 이해가 안 되고,ㅡ이해가 안 됩니다. 제가 박사라도 이해 절대 못 합니다. 행해야 알지, 행해야. 이러기 때문에 경험을 말했습니다.
「경험하지 못한 자요」 어떤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자입니까? 어떤 사람이 경험하지 못한 자이지요? 「어린 아이니」 이 어린 아이가 경험하지 못한 사람 아니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무리 목사 장로가 되고 유명한 부흥사가 됐다 할지라도 그 사람이 의의 이 말씀을 경험해서 ‘이게 의의 실상이로구나, 주님이 과연 나를 이렇게 대형하셨고 대행하셨고 대화친하셨구나.’ 하는 것을 자기가 실제로 맛을 보고 실제로 접선하고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하고 요렇게 실험하는 일이 되는 건데 요 실행하지 안하는 자는 요런 실험이 안 돼요. 그러니까 항상 그는 어린 아이를 면치 못합니다.
예수 믿는 도는 실행에서 알아지지 실행이 아니면 알아지지 않습니다. 실행은 뭐이 실행인가? 실행은 실상 믿는 것과 믿으니까 고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그 믿음과 행함은 두 가지입니까? 아니오. 행할 수 없는 믿음은 거짓부리 믿음이오.
참 믿음은 안 행하고는 못 견뎌. 참 믿음은 필연적으로 행하게 됩니다. 믿음과 행함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이렇게, 행한 이 사람은 그 경험이 있게 된다 그말이오. 경험, 이런 경험, 행함으로 경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항상 예수 믿어도 항상 어린 아이라. 장로라도 어린 아이고, 목사라도 어린 아이라.
이러니까, 뭐 대하면 뚱딴지같이 말이요, 성낼 거는 안 내고 안 낼 거는 성내고, 좋아할 거는 안 좋아하고 안 좋아할 거는 좋아하고, 막 주먹을 내댈 거는 안 내대고 공연히 안 내댈 거는 내대고, 한번 자기가 강하게 날뛰어야 될 거는 강하게 날뛰지 안하고 가만히 죽은 듯이 있어야 될 것은 또 강하게 날뛰고 이거 순전히, 이제 도를 행해 본 사람은 알게 된다 말이오. ‘저 참 저거’ 경험하는 것 `저거 보니까 아주 어린 아이로구나’ 어린 아이노릇을 하니까 거게 대해서 뭐 대항해서 할 것도 없고, 그저 마음에 어린 아이들이 벌고 날뛰어 쌓으니까 우습고 마음에 좀 애처롭고, 하는 걸 보면은 안타깝기는 하지마는서도 또 귀여운 점도 있다 그거야.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것은 예수님이 나 위해서 대형으로, 사죄의 대형을 하셨는지 대행을 하셨는지 대화친을 하셨는지, 하나님이 이 세 가지 때문에 죽으셨는지 안 죽으셨는지, 이 죽음으로써 사죄, 칭의, 화친을 나에게 주셨는지 안 주셨는지, 말로 가지고는 주셨다 하지마는서도 그 실상으로 자기가 인정이 안 된다 그말이오. 인정이 안 돼요.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죽었다는 것이 인정이 안 돼.
인정하기야 하지요. 하지마는서도 실상 따져 보면 마음에 그라면 저 대신 죽었으니까 감사함도 있을 것이고, 잘못한 미안함도 있을 건데 그런 것 하나도 없어.
예수 믿는 것은 경험으로 믿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야 자라게 된다 그말이오. ‘경험하지 못한 자는 어린 아이다.’ 예수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험해야 자라게 된다. 하나님 말씀을 경험해야 자라게 된다.
경험해야 자라게 되는데, 하나님 말씀이 무슨 말씀인가? 의의 말씀이라. 의의 말씀이라. ‘옳은 말씀이라 말이지’ 아니오. 다 이렇게 해석합니다. 좀전에 제가 본 것도 한국 제일 가는 학자의 주석이요, 세계 제일 가는 학자의 주석인데 보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거와는 그 아주 판이합니다.
이라니까 ‘저거 또 제 자랑한다’ 여러분들이 바보같이 말이오. 바보라 말이오.
사실 바보라. ‘우리 모욕 준다’ 바보지 바보, 확실히 바보지. 생명을 내놓고도 바꿀 수 없는 이런 보배로운 진리를 말해 주지마는 그 진리로 알지를 못한다 그말이오. ‘의례히 설교면 설교다. 뭐 자꾸 하는 소리 하고 하니까 재미 없다.’ 네 귀에는 땅에 속한 배암의 말이라야 ‘아이까 아이까’ 하고서 놀래고 재미가 있지, 너는 테레비를 봐야 재미가 있지 하나님의 말씀은 들으면 너는 잠 온다.
성경은 마음대로 읽지 못해. 그만 잠이 와서 읽지를 못해.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은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면 어린 아이 됩니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다 요 뜻이,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다. 의 자는 옳을 의자이거든, 옳을 의자. 옳을 의 자이니까 성경 말씀은 옳은 말이니까 옳은 말씀을 경험하지 못하면 어린 아이다. 옳은 말씀은 어째 경험해? 옳은 말씀대로 행했으면 행했고 못 행했으면 못 했지.
여게 경험한다는 요 경험에 대해서 요걸 모른다 그말이오. 하나님의 이 말씀은 주님의 대속하신 그 의가 실상으로 담겨 왔기 때문에 요 말씀을 자기 현실에서 영감이 가르쳐 주시는 대로 고대로 딱 복종하고 보면은 경험이 생겨집니다.
경험이 생겨져요. 경험이라 말은 체험이라 말이오.
무슨 경험이 생겨집니까? 말씀대로 행하는 경험이 생겨집니까 요 말씀 속에 들어있는 대형, 대행, 대화친의 예수님의 대속이 체험되어집니까? 예? 대속이 체험되어 집니까 대속이 이제 경험되어집니까? 요 대속이 자기에게 경험되고 체험되고 실험됩니다.이것도 무슨 말인지 모를 거라. ‘그 무슨 말인고? 경험하고 체험하고.’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생명을 버리신 요 사랑을 알라면 요 의의 말씀, 내 현실에서 주님이 나를 대속하셨고 요 대속을 나에게 입혀 주셨으니 내가 사죄를 입었고 칭의를 입었고 화친을 입어서 예수님의 이 대속하신 하나님의 의를 내가 입었으니, 입은 자이니, 이 대속을 입은 자이니 현실에 내가 대속을 입은 자의 생활은 요렇게 하는 것이라. 이거 무슨 말인지 모르는 거라. 전혀 몰라요. 그만 듣고 있어. 대속을 입은 자의 생활은 요렇게 하는 것이라.
대속을 입은 자의 생활은 요렇게 하는 것이라. 대속을 입은 자의 행동은 요렇게 하는 것이라. 이렇게 하는 것인데, 대속을 입은 자는 요 현실에서 행동을 요렇게 해야 되는 것인데 고렇게 행동을 할라고 하니까 그 행동하는 것이 엉망진창이고, 영 아주 그만 쓰고 고통이고, 뭐 아주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그렇게 할 수가 없어.
할 수가 없는데, 내가 예수님의 대속을 버리든지 그리 안 하면 고때 현실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든지, 하든지 버리든지 둘 중에 하나인데 대속을 벗을 수 없으니까 대속을 입은 자의 생활을 하기 위해서 현실에서 영감이 나에게 알려 주신 그대로 실행을 할라 하고 보니까, 실행을 하고 보니까 주님이 날 사랑함으로 대형의 고난 받은 것도 내가 실험을 하게 되고, 대행의 고난 받은 것도 실험을 하게 되고, 대화친의 고난 받은 것도 실험하게 되고, 주님이 나 대신 낮아진 것도, 죽어진 것도, 고통한 것도 내가 실지로 체험하게 된다 그말이오. 체험하게 된다.
체험하게 된다. 이것은 해봐야 알지 하는 자가 아니면 모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을 아는 자는 땅 위에서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걸어감으로 자신이 다른 사람을 위해서 조금 해를 볼 때에, 대형의 해를 볼 때에, 대행의 수고를 할 때에, 대화친의 그 모든 어려움을 당할 때에 고때에 경험하고 체험하기 때문에 그 말을 뚜웅해서 그만 다 겉어머리로 뚝 해서 말하기를 사람을 사랑해 보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모른다 그렇게 말하는 거는 이 껍데기만 들어서 말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까? 형제를 사랑함으로 죽어 보지 못한 사람은 주님의 죽으심의 그 심정을 알지 못한다. 과연 그가 날 사랑하셨으면 주님이 나를 위해서 생명을 버릴 수밖에 없겠다 하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기 때문에, 이 목회자가 아니고는 예수의 심정을 많이 보는 사람이 없고 권찰들 주일학교 반사들도 진실한 반사 한 사람은 예수님이 자기를 사랑해서 어떻게 했다는 것이 거짓말로 듣기지 안하고 과연 주님이 나를 사랑했다는 것이 경험되어지고 체험되어지고 확실히 믿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현실 현실에서 성령님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대로 고대로 현실에서 주의 말씀에게 순종을 해 보면 예수님의 대속이 과연 이거로구나 하는 것을 경험하고 체험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실상으로 자기가 누리게 됩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실상으로 누리고 보니까 하나님이 나를 위해서 모든 것을 다 희생하신 그 사랑을 내가 독점하고 있는 자인데 땅 위에 뭐 욕심낼 게 뭐 있겠소, 있기를? 그분이 나 위해서 모든 것 다 주실 뿐 아니라 자신까지 주시고, 하늘에서 모든 것 다 가난해지고 낮아지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시고 또 인간으로 부활한 거, 뭐 부활이라 하니까 모두 다 주님이 부활하신 데 막 좋아서 기뻐 뛰지마는 그 사람들이, 오늘 우리 한국 교회가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 부활날은 좋다고 뛰고 굴리고 야단만 지기지 부활에 대해서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과 예수님의 부활이 말할 수 없는 감사는 감사지마는 말할 수 없는 고통이라 하는 이것을 느끼는 설교는 한국에 없습니다. 없어, 아직까지. 자고 있다 말이요, 자고 있어.
십자가에 못 박혀서 피흘린 것이나 예수님께서 사흘 만에 부활하신 것이나 예수님의 고생의 공로와 감사의 그 가치가 같애. 두 가지 중량이 꼭 같애.
죽으심이나 부활하심이나 사랑의 중량도 같고 고통의 중량도 같고 희생의 중량도 같고 우리에게 효력의 중량도 같애.
이러나 이제 부활했으니까 우리의 소망 있다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은 인제 그전에 없었어요. 그전에는 성탄만 축하했고 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만 기념했고, 이라다가 이제는 또 부활 축하를 하고, 부활 축하하는데 부활로 말하면 기쁘고 즐겁다고 하는 그 축하만 있지 예수님이 부활하신 그 사랑이 얼마나 우리에게 참 우리가 잊을 수 없는 그 사랑, 끊임없는 그 예수님의 고난의 사랑을 우리가 아직까지 느끼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교회입니다.
세계 교회는 내가 모르겠어요. 세계 교회. 세계 교회 뭐 미국에든지 영국에든지 그런 교리가 나왔으면 이까지 퍼져 나왔을 터인데 아직까지 없어.
○○○씨 뭐 논문 쓰면서 그런 것 몇 마디만 써 넣어도 자기네들 뭐 작대기를 그으면 작대기 그을, 뭐뭐 박사들이 교수들이 다 작대기 그을 사람들 있고, 이런 것만 해 놔도 깜짝 깜짝하고 놀랜 건데 뭐 그까짓 거 박사 논문 그까짓 거 뭐 거석할 게 있어 그라고 있어.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젖먹는 자는 말이오. 젖먹는 자는 뭐이야? 예수님을 믿되 이 세상적인 소망, 세상적인 기쁨, 세상적인 모든 행복 이것만 먹는 자들이 젖 먹는 자입니다.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어린 아이라 말이오. 「어린 아이니」 왜 어린 아이가 됐느냐? 왜 어린 아이가 됐느냐?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 아이가 됐다 그거요.
의의 말씀을 경험하는 것. 예수님의 대형 사죄, 대행 칭의, 대화친 생명 이게 예수님의 대속인데 이 대속을, 예수님을 뭐 수십 년 믿고 목사 장로가 돼도 예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대속이 무엇이 대속입니까 물으면 깜깜하게 모르는 사람들 많습니다.
또, 예수님의 대속이 어데 있습니까? 대속이 어데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을 우리가, 영은 하나님이 객관 역사로 입혀 주시니까 영은 입지마는서도 예수님의 대속의 이 하나님의 의를 우리가 이 심신이 입어야 될 터인데, 심신이 입어야 될 터인데 이 의가 어데 있는지를 알아야 입지요.
여기 우리 교회 결혼식할 때 보니까 뭐 저 드레스인가 뭐 있는데 그 신부가 드레스 입으러 왔다 하는데 ‘드레스가 어데 있는데?’ 이라니까 `모르겠습니다.
드레스가 어데 있는지 어데 드레스 입으러 가라 해 왔는데요?’ ‘어데 있는고?’ 누가 있다가 ‘그뭐 별관에 그 방에 들어 있습니다' `거게 들어 있어? 문이 잠겨 있는데 어째 문을 빼는가, 그러면?’ 어데 있는지 몰라도 못 입고 자물쇠가 잠겨 있어도 못 입고, 그러니까 나중에 시간 늦게 되니까 떡 책임자 그때 와 가지고서 뭐 입어 보고 이래 해. 어데 있는 줄 알아야 입지요.
예수님의 대속의 의가 어데 있는지 알아야 입지요. 어데 있습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의가 유대 나라에 있소, 미국에 있소, 우리 한국에 있소, 서울에 있습니까? 고신에 있습니까, 총신에 있습니까, 합동에 있습니까, 감리교에 있습니까, 성결교에 있소, 어데 있습니까, 대체 어데 있소? 대속의 의가 어데 있소? 어데 있어요? 있는 데만 알면 입으면 되지, 뭐. 소매 끼라 할 때 소매 푹 끼면 되고, 발 끼라 할 때 발 푹 끼면 될 것이고, 머리에 쓰라하면 머리에 쓰면 되지 않아요? 대속의 의가 어데 있소? 신구약 성경 말씀에 있지. 말씀에 이라라 할 때에 이라니까 팔뚝에 입혀지, 이라니까 왼팔도 입어지고 이라니까 다리가 쑥 들어가고, 이라니까 위에 머리에 너울이 씌워지고, 하나님의 의의 말씀.
이래서,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났다. 복음은 뭐 기쁜 소식이라 말인데 신구약 성경 말씀이 무슨 복음이야? 뭣 때문에 복음이라 신구약 성경이, 복음은? 복음은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들어 있기 때문에 복음입니다.
여러분들 단단히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의 의는 어데 담겼습니까? 영감에 담겼습니다. 영감에 담긴 하나님의 의는 어데 담겼습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에 담겼습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입을라면 어째야 됩니까? 이 말씀대로 하면 대속이 입혀집니다.
이래서, 말씀대로 하니까 하나님의 의가 경험이 됩니다. 경험이 된다는 거는 자기가 해본 게 경험 아닙니까? 지낼 경자 경험할 험자, 그 말은, 경험이라면 자기가 실제로 한번 해 보니까 과연 그렇고 하는 것을 그걸 가리켜서 경험이라 그렇게 한다 말이오.
의의 말씀에 경험을 하지 못한 자가 어린 아이라 그말이오. 어린 아이. 이거 못 하면 어린 아이 벗지 못합니다.
요거는 말로는 하니까 여러분들이 다 기억할 줄 알지마는서도 속에 아멘, 고 속에 느껴져야 돼.
이거 우리는, 이거 뭐 얄궂은 걸 배워 놔서 그뭐 틀린 말이라도 음, 옳은 말이라도 음, 우리 경상도 사람은 그만 입만 뿡 하고 있으면 됩니다. 그게 무슨 주의냐 하면은 ‘무언은 무상의 웅변이라’ 말하지 안하는 사람은 무상의 웅변가가 된다.
이러니까 틀린 말 해도 음, 옳은 말 해도 음, 그러면 저게 뭐 아는갑다 싶어 그렇다 하지마는 그거 가지고 안돼요. 틀렸다, 옳다, 틀렸다 옳다 해야 돼. 틀렸다 옳다.
이래서, 이래 듣다가 자기 속에, 그 말 안 해도, 안 그럴 수가 없어. 이래 딱 듣다 그러면 ‘아멘’ 크게 못 하면 ‘주여, 믿습니다. 아멘.’ 이래야 되는 건데 `하거나 말거나 그러면 그렇고 뭐 저러면 저렇지’ 우리도 그거 합시다. 그거 해야 돼요. 좋은 거는 따라 가야 되지 그까짓 나쁜 것 따라갈 필요가 없어. 뭐 초대 교회 그 사도 시대에도 옳을 걸 보고서 아멘! 아멘! 이래 했다 말이오. 이 되지 못하고 백지 점잔 뺀다는 말이지.
또, 박사들은 그럴 만한 용기가 없어요. 믿음이 없어요. 다른 사람 학자들 말해 놓은 그 서적 가지고 이래 줄줄 가르치니까 제 속에는 믿음이 하나도 없어.
하나도 없으니까 이러나 저런데, 다른 사람 설교 듣는 걸 봐야 ‘과연 그렇다.
아멘. 참 과연 그렇다.’ 이게 느껴지지 안하니까 아멘 소리를 못 하는데, 주일 학생들이 듣고 ‘아멘, 과연 옳습니다’ 이리 쌓는데 이 박사가 들어서 가만히 있으면 안 될 터이니까 ‘그거는 어린 것들 철부지한 것들이 그라는 것이지 장성한 사람은 그 소리 못 한다. 그런 소리 안 한다. 그저 그런 거 알고 그래 있는 것이지.’ 그만 이 참 되지 못한 교만쟁이, 점잔이 나와 가지고서 영 교회를 다 버려 놨어.
여러분들, 옳은 것은 아멘 하십시오. 기도할 때도 기도할 때 은혜가 되면은 그랄 때는 막 크게 아멘 안 해도 속으로 ‘아멘! 주여 옳습니다. 아멘! 옳습니다. 아멘! 결심합니다. 아멘! 작정합니다. 아멘!’ 이게 돼야 된다 그말이오.
교훈이라 하는 것은 마치 이 북에다가, 이 북에다가 콩을 한 내끼 놓고 요게서 똥 때리면 콩이 폴딱 뛰고 또 두 번 때리면 콩이 두 번 뛰고, 동동동동 때리면 콩이 톡톡톡톡톡톡 뛰어 올라서, 이거 때리는 데 반응이 이래 있는 것처럼 설교하면 교인들이 거기 반응이 있어야 될 건데, 뭐 이거는 암만 옳은 증거를 해도 음! 틀린 증거를 해도 음! 이거는, 표정이 없는 것, 희로 애락의 표정이 없는 거는 뭐이요? ‘희로 애락의 미발은 중이요’ 이라지만 희로 애락의 미발은 시체요, 그거 시체.
뭐 중은 무슨 중? 희로 애락의 미발이면 참말로 그거는 시체지.
외나 유교에서 중이라고 말하는 그거는 희로 애락을 말에 표시하지 안하고 속에 전신에 그렇게 되는 것이니까, 전신이 그렇게 되니까 입으로만 표시할 수 없다 그말이오. 전신이 그와 같이 되니까.
이런데, 껍데기만 글 배워 가지고서 모두 다, 뭐 전부이 한문도 다 모두 죽었고 다 썩었어, 다.
옳지 안하면 말이요, 애매하든지 옳지 안하면 ‘그거 내 모르겠는데’ 딱 적어 놔.
이거 내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믿어지지를 않는데.’ 믿어지지 않으면 요래 딱 그래 가지고서 적어 놓고, 또 기도하고 또 기도하고 기도하다가 다 나중에 기도해 보면 알면 ‘주여, 옳습니다!. 이제 깨달았습니다!’ 막 그때 뛸 거라 말이오. 이게 있어야 뭐 산 작용이 있는 것이지.
그래도 아무래도 모르면은 고민돼 못 견디겠어. 이러면 할 수 없이 목사님에게 가 ‘이렇고 이렇고 이러니 어찌 됩니까, 이거 ?’ `네가 기도해 봤나? 네가 이 면으로 생각해 봤나 저 면으로 생각해 봤나?’ 떡 그러면 ‘그 면은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 면도 생각해 봐야지. 한번 생각해 보람.' 이러니까 나중에 가서 ‘아, 옳습니다. 옳습니다.’ 이래 뭐 이래야 산 작용이 있고 이거 뭐 성장되는 뭐이 있는 것이지 도무지 그런 게 없어 놓으니까 아무 성장이 없어.
이제 우리도 옳은 때는 아멘 하십시오. 기도할 때 은혜 있는 기도하면은 아멘.
오늘 이층에서 어떤 여선생님이 기도 인도했는고 아주 기도 잘하더라. 똑똑히 하더라. 이층에 그 기도 인도한 여선생 손 들어 봐. 그래? 시집 안 갔지? 그거 참, 나는 누가 했는지 모르는데 아주 기도를 하는 것 보니까 똑똑히 기도해. 믿음을 가지고 기도해요.
그래서, 나는 그걸 기억을 못 해. 요럴 때는 조거는 체크해 놨다가 조놈은 지금 어데 지금 제일 믿음 있는 요지에 해서 참 하나님께 영광을 많이 돌려야 되겠다 자꾸 이렇게 해도 그라고 나면 또 잊어 버리고 잊어 버리고 이래 놓으니까 중매할 때에 소개할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만. 소개할 사람이. 전부이 다 좋지.
그래, 나는 오층에서 그래요. 기도할 때에 ‘아멘 아멘’ 나 혼자 `아멘 아멘'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 의의 말씀을 경험해야 장성해집니다. 의의 말씀을, 예수님의 대형을 경험해야 되고 대행을 경험해야 되고, 대화친을 경험해야 되고, 이래서 신구약 성경은 다 이걸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경험하게 한 것이오.
고대로 하면은 대형 경험될 때 있고, 대행 경험될 때 있고, 대화친 경험될 때도 있고, 사랑 경험할 때도 있고, 이렇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는 그말을 나는 한국 교회 ○○ 교파에 내가 졸업은 했지마는 암만 들어도 그런 소리 한 마디도 못 들었소. 한 마디 못 들었는데 언제 누가 김 현봉 목사님에게 한번 갖다 오더니마는서도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합디다’ 그런 말 해.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합디다’ 고때 고 말을 나한테 전달해 준 사람이 ○○○ 집사님인지 모르겠어. 그래, 내가 고 말 내가 잊어 버리지 안해요.
그러니까,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이라’ 가만히 생각해 봐 ‘과연 하나님의 사랑이라’ 이라다 보니까 나중에 고게서 차차차차,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나님의 지혜지, 신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능력이지, 하나님의 계약이지, 신구약 성경은 신인 양성 일위의 대속이지, 영감은 대속이지, 자꾸 그래 알아나가는 거라 말이요, 나가기를.
이러기 때문에, 제일 처음에 조그매 그 비지 껍데기만 해도 처음에 하나 눈 똑 떼서 처음에 하나 처음에 첫 구멍 발견하는 것이 그게 굉장히 큰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분은, 백 목사 설교하는 데 듣고 자기는 벌써 설교 서른 개 생각한다고서. 그거 그렇지. 이거 자꾸 지금 딱 발라 놓은 데 구멍을 하나 뚫는 거니까 하나 뚫으니까 고거 하나 구멍 딱 뚫고 보니까 고대로 구멍만 뚫어 나가면 설교가 오십 개라도 됩니다. 뭐 백 개라도 돼요. 이런데 이 가치를 도무지 모른다 그말이오.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는 어린 아이다 그말이오. 어린 아이다. 「못한 자요」
또, 14절에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단단한 식물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이 단단한 식물은 소화하기 어렵다 그말이오. 실행하기 어렵다 그말이오. 실행하기 어려운 말씀은 단단한 식물입니다. 이 실행하기 어려운 말씀은 단단한 식물인데 이거는 신앙 장성한 사람들이라야 이 도리를 자기가 소화할 수가 있고 새길 수가 있지 그리 안 하면 새기지 못합니다.
「장성한 자의 것이니 저희는」 어떻게 해서 장성한 사람이 됐는가? 장성한 사람이 어떻게 해 가지고 이렇게 신앙의 장성한 사람이 됐는가? 「저희는 지각을 사용하므로」 「지각을 사용하므로」 신구약 성경에 기록된 말씀을 아는 것이 지요, 알 지자, 각은 거기서 깨달은 것이 각이요, 지각이라.
그러면, 지각이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에 아는 것 깨달은 것, 이 신구약 성경 말씀에 기록한 것을 알고 깨달은 것은 뭘 알고 깨달은 것이지요? 뭘 알고 깨달은 것입니까? 하나님의 의를 알고 깨달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를 알고 깨닫다니? 하나님이 사람되어 오신 도성 인신하신 것과, 신성과 인성이 둘이 한 격위를 이루신 것과, 신인 양성 일위가 세 가지로 죽기까지 하셔 가지고서 세 가지 의를 건설한 것이 이것이 하나님의 의인데 이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알고 깨닫고, 「지각을 사용하므로」 알고 깨달은 것을 사용하므로, 알고 깨달은 것을 사용하므로, 알고 깨달은 것을 사용하니까 신구약 성경 말씀대로 행했다는 말이요, 또 자기가 신구약 성경에서 깊이 영감 받아 깨달은 대로 했다는 말이지요 「사용하므로」 사용한다 하니까, 지각한 것을 자기가 사용한다고 하니까 사람들 듣기 쉽도록, 사용한다는 그 지각을 자기가 그대로, 그대로 한번 써먹어 봤다 그말이지. 그대로 써먹어 봤는데 실상은 그 지각, 알고 깨달은 것을 자기가 써먹습니까 알고 깨달은 그 앎에 깨달음에 자기가 복종을 하는 것입니까? 어떻습니까? 사용하는 것입니까 복종하는 것입니까? 사용입니까 복종입니까? 이것도 시시하게 말하면 안 돼요. 다 사용이라 해요. 사용이라 하면 우선은 들어맞지마는, 사용이라고 하면은 우선은 들어맞지마는서도 조금 지나가면은 사용이라 했다가 다 암흑을 만납니다. 암흑을 만나 가지고 나중에 가서는 회의에 빠져 버려요. 의심에 들어 빠져 버리고 말아요.
‘지각에’ 주님이 나에게 알려 주시고 나에게 깨닫게 해 주시는 고대로 복종을 한다 그말이오. 알겠소? 이래야 돼요.
그냥, 사용하라는 말은 어린 아이들에게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인데 거게 시종하라, 모시고 복종해라 하는 그것은 벌써 많이 깨달아 보고 경험해 가지고서 끝까지 끝까지 그것을 다 계산해 가지고서 그렇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쉽게 가르치는 게 아니고. 이래도 너무 거리 멀어 놓으니까 무슨 말인지를 몰라.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연단 받는 것은 어떤 것이 연단 받느냐 하면은 연단이라 말은 이 쇠를 불에다가 달궈 가지고서 연단하는 그걸 다 인용을 했습니다.
연단이라 말은 요 쇠를 말이요, 요 쇠를 풀무에다 갖다 넣습니다. 풀무에다 갖다 넣으면 처음에는 주먹덩이만한 쇠를 넣었는데 이래 갖다 넣어 놓으면 벌거이 달으면은 쇠똥이라고 그 끄트머리 이래 껍데기 있습니다. 껍데기 그놈은 위에 쇠꼬쟁이 가지고 툴툴툴 털면 이래 다 나갑니다. 떨어져 버립니다. 그거 쇠 똥이라 해. 쇠 그거 썩은 건데. 다 그라고 나면은 나중에 속에 깨끗한 쇠는 조그만합니다. 그 쇠를 또 구으면 쇠똥이 또 나와요. 구으면 또 나와요. 구으면 또 나와요. 나중에 쇠도, 이 쇠도 한 여남은 번 구워 가지고 쇠똥을 다 버리고 나서 칼을 치면 그 칼이 무슨 칼이냐? 비수검이라 합니다. 비수검. 비수검을 만들 때에는, 비수검을 만들 때에는 그렇게 연단해 가지고, 그라면 쇠의 나쁜 것을 다 타고 속에 진짜 진짜 좋은 것만 쏙 남아 있어요.
이제 금을 연단하는 거는 어떻고 금을 연단하느냐 하면은 금 연단하는 것은, 저는 다른 데는 내가 모르고 그 금광에 가서 보면은 모래에서 캐는 금도 있고, 이 바위돌에서 캐는 금도 있고 금이 두 가지 있는데 모래에서 캔 금은 보면은 이게 뚤뚤 이래 뭉쳐서 주먹덩이만합니다. 이 모래 일어 가지고, 모래 일어 가지고서 거게서 이래 해 놓은 것 주먹덩이만한데 이놈을 또 구워요. 청강수에 대 놓고 이래 대고 구으면는 나중에 이만한 걸 구으면은 요만한 것 남아요.
거게 은도 타고, 은도 들어 있었는데 은도 타고, 납도 타고, 또 뭐꼬? 구리쇠도 타고, 주석도 타고 그런 것 다 타고 순전히 금만 남아요. 금만 남았는데, 요만큼 남았는데 요거는 이십 사금이라. 요거는 순금이라 하는 순금. 이러니까 잡것을 태우면은 자꾸 작아져요. 또 돌에서 캔 금도 다 그래요.
그래 금광에 가 가지고서, 저는 그때 내가 믿을 때던가 안 믿을 때던가 모르겠어.
한번 가서, 금광에 가 가지고 금을 그래 어떤 게 있노 이라니까 모두 요만씩 요만씩 한 거 한개 얼마씩이라 하는데 그놈을 사 가지고 자꾸 이래 꿍꿍 찧고 이래 가지고 나중에 보면은 금이 얼마 나온대요. 자꾸 구으면, 연단이라는 거는 불에 구우면 자꾸 줄어져요. 잡것은 줄어지고 외나 순금만 남아요.
그 모양으로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지각을 사용하므로」 예수님의 대속에 대해서 신구약 성경이 가르쳐 주는 대로 알고 깨닫고, 알고 깨달은 고대로 순종해서 사니까, 순종해서 살아 보니까, 순종해서 살아 보니까 자기가 알고 깨달은 것이, 알고 깨달은 것이, 알고 깨달은 그 양이 그것이 좀 정확합니까 고것이 좀 잘못된 게 더러 있습니까, 어떻습니까? 알고 깨달은 대로 자꾸 자기가 실지로 실행을 해 보니까 알고 깨달은 것이 그게 자꾸 정확한 양이 많아집니까 점점 줄어집니까? 자기 마음에는 꼭 요렇다 요렇게 깨닫고, 깨닫고 실행을 해 보니까 요렇게 이거는 백 프로 맞다, 백 프로 맞다 요렇게 깨달았는데 알고 실행을 해 보니까 나중에 실행한 뒤에는 백 프로 맞습니까, 백 십 프로 맞습니까, 오십 프로 맞습니까? 예? 어찌 됩니까? 줄어져요 많아져요? 줄어져. 줄어져. 자꾸 줄어져.
말씀을 요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를 깨닫고 이라니까, 대속의 공로를 기록한 요 신구약 성경 말씀을 보고 깨닫고 자기가 실행해 보니까 또 잘못 깨달았어. 잘못 깨달았고 또 잘못 깨달았고 자꾸 잘못 깨달았고 점점 그라면, 자꾸 그래 실행을 해 보면 점점 잘못 깨달아집니까 점점 바로 깨달아집니까? 어찌 돼요? 점점 바로 깨달아져요. 점점 바로 깨달아져.
점점 바로 깨달아지니까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셔서 대속하신 것은, 그 연단을 받은 사람이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신 그 사랑에 대해서, 예수님의 사랑관이, 열 명이 있는데, 예수님의 사랑관이 어떤 사람이 제일 정확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사랑관을 열 명이 예수님의 사랑을 다 보고 예수님의 사랑관을 다 말하고 있는데 그 사랑관 말하는 것이 어떤 사람이 제일 정확하겠습니까? 어떤 사람이 제일 정확하겠소? ○ 집사, 연단 받아 본 사람은 점점 정확해져요.
‘주님 날 사랑하셨으니 나도 주님을 사랑하겠습니다. 나도 주를 위해서 죽겠습니다.’ 이랬는데 나중에 보니까 그게 아니라. 주님 위해 죽을라 했는데 뭐 죽음의 십분지 일도 안 와도 도망을 쳐 버리고 야단을 지겨놨다 말이오. 이러니까, 아이고 이게 틀렸다. 또 고다음에는 십분지 이쯤은 사랑합니다. 이랬는데 나중에 여러번 그라고 나니까 이제 주님이 날 사랑하셔서 생명 바친 대로 나도 주님을 사랑함으로 생명을 바칠 수 있다 말이오.
생명을 바쳤는데 생명을 바쳤으니까 주님이 나 사랑한 거와 내가 주님 사랑한 거와 같다 싶었는데 또 생명 바쳐서 사는 그런 일을, 바친다고 죽습니까, 어데? 바쳐서 살았는데 안 죽고 뒤에 살아나 보니까 ‘아이구, 내가 주님 사랑하는 거는 가짜다, 가짜다.’ 자꾸 가짜가 나오는 거라. 이렇게 해 가지고서 우리 신앙이 장성한 신앙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을 믿는다는 믿음이 바로 되는 게 아니라 주님을 믿는다는 믿음이 또 실행해 보니까 ‘아이고, 이거 아무것도 아니다.’ 주님을 믿는 그 믿음을 자기가 현실을 여러번 자꾸 많이 닥쳐 본 사람이라야 주님을 사랑하는 사랑이 그것이 점점 정확해지겠습니까 경험을 한 번 하면 정확해지겠습니까? 몇 번 하면정확해지겠소? 여러번 해야 정확해진다 그거요.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이 대속에 대해서 알고 깨달은, 알고 깨달은 걸 가지고서 이제 현실에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나에게 알려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대로 고대로 내가 실행을 점점 해 보니까, 주님이 나에게 깨닫게 해 주시고 알게 해 주시는 그 주님의 대속의 사랑에 대해서 알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시는 고대로 내가 실제로 현실에서 알게 해 주시고 깨닫게 해 주신 그대로 내가 실행을 했다 말이오. 실행을 했어.
실행을 하고 보니까, 실행을 점점 실행을 하고 보니 주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그 사랑에 대해서 내가 주님을 사랑한 그 사랑이 점점 커집니까 작아집니까? 예? 커집니까 작아집니까? 이제 이것도 대답 못 할 거야. 주님이 나를 대속하신 그 사랑에 대해서 나에게 깨닫게 해 주셔서, 현실에서 깨닫게 해 주셔서 깨닫는 대로 또 내가 사랑했습니다. 또 깨닫는 대로 또 현실에서 사랑했습니다. 자꾸 이렇게 사랑을 하니 주님 사랑하는 사랑이 점점 커집니까 작아집니까? 예? 작아진다, 커진다. 작아진다 커진다 두 말 다 맞아요. 두 말 다 맞아요.
작아지기는 왜 작아져? 작아지기는 그러면 다른 사람이 보기에 작아져요 제가 보기에 작아져요? 제가 보기에는 작아져요. 점점 작아져요. 작아지고 또 커지기는 뭐이 커져요? 커지기는 자기가 보기에 커져요 다른 사람 보기에 커져요? 다른 사람 보기에 커져요.
다른 사람 보기에는 커져서 이는 참 사랑의 사도다, 이는 참 주님을 사랑한다 하는데 저는 자꾸 이렇게 이 지각의 말씀을 자기가 사용하고 보니까 점점 연단받으니까 작아집니다. 연단받으니까 작아져. 큰 게 작아져요.
왜? 잡철이 없거든, 주님을 사랑한다 하지마는 실상 사랑치 않는 것 거짓부리 거짓부리 이런 게 다 타고 보니까 아주 사랑하는 것이 조그맨하이 자꾸 작아집니다.
작아지는데 이것은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볼 때에 주님 사랑하는 사랑이, 주님을 믿는 믿음이 작아져요 제가 자신을 볼 때에 작아져요?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작아진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한번 들어 봐요. 제 자신이 자신을 볼 때에 작아진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이제 알기는 아는구먼. 녜, 자신이 자신을 볼 때에 점점 작아져요. 그런데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커집니까 작아집니까 어찌 됩니까? 다른 사람이 볼 때에 커진다고 생각하는 분들 손 들어 봐요?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커져요.
그러니까, ‘저 사람은 참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라. 주님은 저 사람을 참 사랑하는 사람이라. 저 사람은 사랑의 사람이라.’ 이리 쌓는데 다른 사람은 그리 쌓는데 그 본인은 그 말을 들을 때에 ‘그래, 내가 그렇지.’ 이렇게 긍정이 됩니까 그럴수록 구석으로 파고 들어가야 됩니까? 구석으로 파고 들어가.
이 예수 믿는 사람은 점점 이제 바로 믿어 갈수록이, 바로 믿어 갈수록이, 믿어갈수록 자기가 죄인됩니까 의인됩니까? 죄인돼. 죄인되는데 다른 사람은 보고 그 사람을 다른 사람 보기에는 의인됩니까 죄인됩니까? 의인 돼.
이러기 때문에, 정말 예수 믿는 사람은 교만할 수가 없어. 예수 믿는 사람은 자기가 공연히 겸손을 부릴라 하는 게 아니라 교만할 수가 없어, 교만할 수가 없어. 이것이 있어야 장성해 간다 그말이오.
「지각을 사용하므로 연단을 받아」 연단을 점점 받으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는 크지마는서도 자기 보기에는 점점 작은 자가 되어짐으로 「선악을 분변하는 자들이니라」 이러니까 그 사람이 옳고 바른 것을 환하게 분변하게 된다 말이오.
알겠습니까? 요것도 또 모르면 안 돼. 옳고 그런 것을.
그 사람이 점점 이렇게 지각을 사용하므로 그 사람이 연단 받으면, 연단 받으면 커져요 작아져요? 연단 받으면 커져요 작아져요? 작아져요. 질은 좋아져요 나빠져요? 질은 좋아져요.
이러니까, 점점 질이 좋아져서 자기가 참 진짜가 되어지니까, 진짜가 되어지니까 그 사람이 아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이나 계획하는 것이나 경영하는 것이나 평가하는 것이나 비판하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이 점점 발라지겠어요 틀려지겠어요? 점점 발라져요. 이래야 장성한 사람이 되는 거라.
이렇게 해야 장성한 사람이 되는 것인데, 예수 믿으며 세월만 지나가면 장성된 줄 알고, 또 무슨 뭐 집사되고 장로되면 장성된 줄 알고, 우리 교회는 집사 하나도 없어요, 우리 교회는 집사 금년에는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사표 다 내놨는 걸, 뭐 사표 다 내놨어. ‘나는 집사 자격이 없습니다’ 다 사표 다 내놨어. 사표 다 내놨는데 이제 그거 고친 사람은 어서 와서 말해요. 정말 인제 집사 좀 세우도록.
다 뭐 사표 다 냈어.
‘아이고 나는 이면이 틀려서 나는 사표 내놨습니다, 이 면이 틀려서 사표 내 놓습니다, 내가 이거 다 이거 다 고치고 난 다음에는 목사님한테 가겠습니다.’ 이라는데 아직까지 고치고 나서는 내가 말을 안 하니까 안 오는가 안 와.
그러니까, 서부교회는 칠백 명 집사가 지금 금년에는 집사 하나도 없어요. 집사 하나만 떼 놓으면 삐꿔서 뭐 용골때기를 치고, 그만 또 구렁이 구불때기 치듯이 구불때기 쳐 가지고 야단을 지기는데 칠백 명 집사를 다 떼, 다 떨어져 버리고 누가 뗐어요, 누가 떨어졌어요? 칠백 명 집사 제가 저를 뗐습니까, 다른 사람이 뗐습니까, 목사가 뗐습니까? 전부 제가 자진 사표했어,자진 사표. 이게 이제 되어져 가는 거라. 알고 보니까 ‘아이구, 내가 무슨 집사직이? 내가 무슨 집사직이?’ 요면을 보니까 틀렸고, 또 고치고 나서 보니까 또 요면 보면 틀렸고, 또 요 면 보면 틀렸고.
떡 와 가지고서 ‘인제 이거 뭐 이랬습니다.’ 그래, 내가 있다가 요 면은 어찌 되지?' 이라니까 그만 있다가 ‘아이고 아이고 안 됐습니다. 녜, 그 면 내가 참 못 생각했습니다.’ 또 가져 간다 말이오. 가져 가 가지고 또 좀 있다가 언제 가지고 올란지? 이렇게 해서 「지각을 사용하므로」 이 예수님의 대속의 의에 대해서 깨닫고 아는 것을 자기가 고대로, 성신이 가르쳐 주는 그대로 순종해서 사용을 하고 보니까 점점 연단이 되어서 점점 잡철은 없어지고 점점 참되고 온전한 사람이 되어지고 보니까 자꾸 죄인된다 말이라.
보니까 또 ‘아이고 나는 죄인이라’ 다른 사람이 있다가 ‘아이구 성자님' 그 성자님 할 때에 `예, 뭐 그런 소리 해, 뭐 성자는 내가 성자라?’ 그랍니까? 성자라 할 때에 깜짝 놀래며 ‘그 무슨 소리요?’ 그런 소리하지 말라고.
‘성자는 무슨 성자요?' 나중에 뭐뭐 거석하면 ‘나는 이런 죄인입니다’ 자꾸만 속을 폭로를 시키며 `나 이런 죄 더러운 지금 나같은 더러운 게 어데 있습니까? 뭐 성자라고 남을 자꾸 그라면 못 써요. 나는 이런 자라요.’ 막 내색을 합니다.
속으로 진정 죄인 중에 괴수 죄인인 것을 깨달아. 이게 예수 믿는 법이라. 이래 가지고 점점 온전한 데 나아가서 장성한 사람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런데, 여기 6장 1절 이하에 이제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버리고 하니까 이 위에도 쭉 해석하기를, 8절까지 해석하기를 「초보를 버리고」 이라니까, 초보를 버리는데 초보는 어떤 게 초보냐? 초보는 어떤 게 초보냐? 초보는 그다음에 기록되어 있다. 초보를 버리라 했는데, 이거 초보를 버리라 했는데 초보는 어떤 게 초보냐? 그 초보가 어떤 게 초보냐?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이라’ 이것이 초보의 교훈이기 때문에 버리라고 하신 것이다 그렇게 주석을 해 놨어. 그래 주석을 해 놨어.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이런 거는 다 버리고, 버리라 말은 이런 거는 다 내버리라는 말이 아니고 이런 것은 다 냅두고 장성한 데 나아가야 된다 이랬어.
이게 초보로 이것 버리라 했는데 나는 해석하기를 버리는 게 아니고 요것을 평생 계속해 가지고서 완전함에 나아가라 했으니까 이 해석이 정반대 아니요? 이거는 초보기 때문에 버리라 했는데 나는 버리지 말고 이걸 평생 힘써 가지고서 이것을 완성해라 했으니까 정반대 아니요? 여러분들이 이런 걸 알아야 이게 틀렸나 저게 틀렸나, 이 가르침이 옳으냐 저 가르침이 옳으냐 어떤 게 틀렸나 이래 알아야 뭐 가치를 알 건데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칼빈도 그말을 그래 하기는 했습니다마는서도 조금 다르기는 조금 다르게 했읍디다. 다른 거는 뭐이냐 하면은, ‘회개와 신앙은 일생 동안 가지기 때문에 그것을 아주 버리는 것은 아니지마는서도’ 고 조금, 이제 우리 한국에 제일 신학 박사 주석보다는 훨씬 위에 있어. 그래도 그게 다 초보라고 했어요.
초보가 아니라. 고다음에 보면은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다시 닦지 말라 하니까,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라 하니까, 「도의 초보를 버리고」 하는 초보를 버리라는 요 말이 말하자면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라, 터를 다시 닦지 말라 하는 것으로서 고렇게 말해 놨다. 칼빈도 그래 말해 놨어.
그게 틀렸다 말이요. 그게 아니라.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라 말은 터를 없애라 말이요 다시는 이 터를 새로 닦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 터를 영원히 사용하라 말이요, 뭡니까? 영원히 사용하라 말이오. 듣고 보니까 쉽지마는서도 얼마나 차이 있습니까? 무슨 말인지.
이러니까,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이제 새로 시작하지 말고 이 시작한 이 터 위에다가 완전한 데까지 건설하라 그말이오. 완전한 데까지 건설하라. 왜? 이거는 평생 우리가 해야 됩니다. 뭘 해야 돼요? 죽은 행실을 회개하는 것도 평생 해야 되고, 또 하나님께 대한 신앙도 평생 해야 되고, 점점 더해야 돼요. 또 세례도 평생 해야 돼요. ‘세례는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니라’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 그러면 하나님을 향해서 찾아가는 것을 그만 중단해야 됩니까 죽는 날까지 자꾸 가까이 가까이 가야 됩니까? 이 평생해야 될 일을 그만 하고 버려라 해 놨으니 이거 기가 찬다 말이오.
「안수와」 안수는 하나님이 지금 이제 우리에게 축복해 주기를 시작한 것이 안수인데 이 축복을 계속 죽는 날까지 자꾸 받고 받아야 될 터인데 이 안수를 자꾸 그만 다 이제는 끝내 버려라. 이래도 이래도 그만 저래도 뭐뭐뭐 먹통이야 이래도 그만 저래도 그만, 뭐 틀린 거야 이래도 그래도 다 같지요.
또, 「죽은 자의 부활과」 죽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도 이거 평생 해야 돼. 평생 우리는 죽는 연습해야 돼요. 알겠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는 것은, 사는 것은 요 살면서 이 사는 것이 산다고 사는 자는 어리석은 자라. 산다고 사는 자는 헛일이라.
이 사는 것이 분명히 죽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살면 오늘 하루 죽는 것입니다.
오늘 하루 죽는데 하루 죽는 이것을 지금, 하루 사는 이것은 오늘 죽는데, 오늘 하루 살았으면 오늘 산 거는 죽는데 오늘 하루 사는 이것이 죽는 생활하지 안하고 이것이 지금 영원한 부활을 말이요, 부활을 위해서 지금 마련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종일 살았는데 어떤 사람은 죽는 일 해서 죽었고 어떤 사람은 영원한 부활 그거 만들어서 지금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안해. 전부 부활만 다 해 버렸어. 전부 부활할 부활 재료를 다 만들었다 말이오. 이 일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우리가 해야 돼요. 이게 중요한 일이라.
그러니까, 뭐 기도도, 성경 보는 것도, 또 뭐 설교 듣는 것도, 목회하는 것도, 전도도, 심방도 전부 이런 것을 위해서 하는 것이라 그말이오. 이러기 때문에 벼릿줄이고 이 토대라 그말이오.
또, ‘영원한 심판이라’ 「영원한 심판」이 하나님의 심판도, 이 심판도, 이 세상 심판은 그거 뭐, 어떤 심판은, 직결이라 하더나? 직결 그거는 나흘이면 끝나 버리고, 또 어떤 심판은 삼 년이면 끝나고, 오 년이면 끝나고, 십 년이면 끝나는 것 있고 그 평생 징역 해도 죽으면 끝나 버리지마는서도 하나님의 심판은 죽으면 끝납니까? 영원히 끝나지 안해. 이 심판에서 어떻다 결정해 버렸으면 그 결정은 영원 무궁토록 그대로입니다.
내 하루 하루의 생활이 이거 영원한 심판에서 영원한 결정이 되어지기 때문에 내 오늘 하루 생활이 영원히 비참하냐 영원히 승리냐, 영원히 망하느냐 영원히 흥하느냐, 이 오늘 하루 생활이 영원 문제라는 요걸 깨닫고 죽는 날까지 힘써야 될 터인데, ‘이거는 초보니까’ 성경을 잘못 깨달아 가지고 `이거는 다 버려야 된다, 이거는 힘쓸 필요가 없다.’ 이게 얼마나 기막힌 소리요? 이러니까, 요 여섯 가지는 여러분들이 매일 계속해서 힘써야 됩니다. 매일 계속해서. 죽은 행실 회개하는 것, 하나님께 대한 신앙, 또 뭐입니까? 또 뭐이요? ‘세례들’ 세례들과, 또? 안수, 또? 죽은 자 부활, 또? 영원한 심판.
요 여섯 가지는 매일 생각해서 요 여섯 가지를 완성하라 그말이요, 완성을.
하나님의 심판에 하나도 영원한 심판에 걸릴 것이 없고 잘못된 게 없이 요것을 완성해라. 이제, 죽고 부활한 요 죽음의 완성 부활의 완성, 요 부활의 완성을 해라, 하나님의 안수의 완성을 해라, 세례의 완성을 해라, 하나님께 대한 신앙의 완성을 해라, 생명 없는 모든 생애의 회개하는 완성을 해라. 이거는 평생 해야 돼요.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바로 듣고 깨닫고 꼭 실행해야 됩니다. 여러분들 내가 설교하는 거 아니요.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지금 하고 있소. 이거 사람한테 들은 것, 내가 그런 것 아니오. 내가 이 설교를 뭐 생각한 것도 아닙니다. 아무 생각한 것 아니야.
하나님이 이렇게 알게 해 줘서 요렇게 하라 해서 하는 것뿐이야.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배우면 하나님께 직접 배우는 것이라. 그 어리석게 예사로 여기고 그렇게 강퍅을 부리지 말아요.
작정합시다. 경험하고 연단하고, 경험해야 어린 아이를 버리고 장성해지고, 연단 받아야 장성해져요. 경험과 연단이라야 장성해지지 경험과 연단 없이는 장성해지지를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