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의 고난과 순교
선지자선교회
일제의 신사참배 강요와 박해
1.기독교학교에 대한 참배와 요구
1930년 일본은 대륙 침략의 제일보를 만주사변을 일으켰으며 부의를 황제로 세워 괴뢰 만주국을 건설하였다. 1936년에는 노구교 사건을 유발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전쟁을 수행하였다.
일제는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하여 어떤 정신적인 통일이 필요했던 모양으로, 이러한 정신적인 지주를 신사 참배에서 찾으려고 했다.신사란 일본 역대의 천황들의 영과 국가를 위한 유공자 특히 전쟁에 참가하여 전사한 군인들의 영을 모신 곳이라 하면서, 한국 기독교인들을 향해서도 여기에 머리 숙여 절하라고 강요하였다.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러한 행동이야말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기는 크나 큰 범죄가 되며,더우기 한국 민족의 긍지와 애국심을 상실 당하는 결과가 된다고 판단하여 한사코 이를 거부하였다. 그러나 일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한국 기독교인들을 자기들의 종교에 끌어 넣어 신에게 머리 숙이게 하여 굴복케 하기 위하여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강요를 거듭하였다.
1935년 가을, 평안남도 일본인 야스다께 지사는 도내에 있는 중고등학교의 교장 회의를 소집하였고 그 자리에서 교장 일동은 평양신사에 참배하여야 한다고 명령하였다. 이때에 숭실학교 교장 윤산온(G.s.McCune)을 비롯하여 숭의여학교와 안식교 계통의 의명학교 교장 등은 종교의 교리상 그렇게 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야스다께 지사는 정식으로 공문을 방송하기를 '신사참배는 국민 교육상의 요건임으로 불응시에는 단호한 조치가 있을 것'이라고 하면서 답변을 요구하였다.
사태 추이의 중대성을 느낀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신사참배 문제에 대한 대책을 수립하기 위하여 1935년 12월 23일 윤산온 교장 댁에서 실행위원회를 소집하였다. 문제의 심각성에 비추어 회의는 심야까지 계속되었으나 결국 신사참배는 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하였다. 야스다께 지사는 이 사건의 보고를 총독에게 올리면서 총독부 학무국에서 처리해 줄 것을 의뢰하였다. 총독부에서는 곧 전국의 도지사와 경찰부장, 경찰서장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기독교 학교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기로 결정하고 불응 시에는 교장을 교체할 것과 학교 폐쇄의 두 가지 방법으로 탄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러한 험악한 사태 하에서 윤산은 교장은 학교를 살린다는 명분 하에 학교 대표자 개인의 자격으로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내용의 답서를 발송하려고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는 답서 제출에 앞서 신사참배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는 평양 신학교 교수 박형룡 목사와 산정현교회의 주기철 목사를 만나 의견을 타진하였다. 그랬더니 그들은 개인의 참배라고 학교 대표자이니 만큼 불가하다고 의결을 표시하였다. 이에 윤산온 교장은 단호한 결심을 갖게 되어 신사참배를 거부한다고 회신하였다.
이를 계기로 숭실,숭 의의 두 학교는 교장직 인가가 취소되었고 뒤이어 학교가 폐쇄되고 말았다. 윤산온 교장은 파면된지 2개월이 지나 1936년 3월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그는 미국에서도 계속 신사참배의 부당성을 강조하였다. 한국 주재 북장로회 선교사 가운데는 신사참배 문제는 개인의 신앙 야심에 맡기고 학교는 교육사업이니 만큼 계속하여야 한다는 의견도 없은 것이 아니었다.
미국 남장로회 선교회에서는 시종 강경한 태도로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다. 그것은 미국 남장로회 외지 선교국의 태도가 강경하였기 때문이다. 당시 외지선교국의 총무로 있은 훌튼(C.Darly Fulton)박사는 신사참배는 종교 해우이라고 엄격히 규정하여 남장로회 경영의 학교는 폐교하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았다.
1938년 2월까지 미국 북장로회 경영의 8개 학교와 남장로회 경영의 10개 학교가 모두 문을 닫어야 하는 수난을 만났다.
2.교회를 향한 신사참배 박해 개시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기독교 학교를 폐교케 한 총독 당국은 이제는 제2차 단계로서 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할 계획을 세웠다.
드디어 조선 총독은 한국교회에 대하여 신사참배를 강요하여 한국교회의 목을 졸라 질식케 하는 살인마적 작업에 돌입하였다. 이러한 때에 문제가 된 것은 교회 지도자들 가운데 차차로 신사참배를 국가 의식으로 인정하려는 기운이 일어나 의견의 불통일을 가져오게 된 것이었다. 이는 교히의 큰 비극이오 유간이 아닐 수 없었다.
안식교 계통의 의명중학교는 처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였으나 1936년 1월 교장 이희명은 신사참배 하기로 굴복함으로서 안식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일단락을 고하였다. 천주교에서는 1918년 '신사는 다른 신들을 위하는 곳이므로 참배할 수 없다'라는 한국 천주교회의 장정을 작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세정서 하에서 이탈리아와 일본과의 친선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취한 로마 교황청 포교성의 '신사참배하는 종교적 행사가 아니고 애국적 행사에 지나지 않으므로 그 참배를 허용한다'라는 1936년 5월 25일의 성명으로 말미암아 신사에 참배하게 되었다. 감리교에서 있어서도 지도자의 대부분이 신사참배가 국가의식이라고 하는 일본 당국의 언명을 그대로 받아들였으므로 감리교 계통의 학교는 폐쇄를 면하여 존속할 수 있었다. 감리교에서는 1936년 6월에 신사참배 요구에 순응하기로 대략 방침을 세웠고,1938년 9월 3일에는 총독 당국에 그렇게 하겠다고 통고문을 올렸다.
천주교나 감리교회 등의 큰 교파들이 자진 형식으로 신사참배를 허용하였기 때문에 이를 반대하는 장로교회가 지극히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되었음은 사실이었다. 일제에게는 이것이 신사참배 요구의 좋은 구실이 되었다. 다른 교파에서는 국가 의식이라고 하는데 왜 당신들은 아니라고 하느냐 이었다. 이리하여 한국 개신교 여러 교파 중에서도 신도 수가 가장 많은 최대 교파요, 가장 보수적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장로교회 안에서도 신앙의 방파제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굴욕의 날은 다가오고 있었다. 1938년 9월 9일 평양 서문밖 교회에서 제27회 총회가 회집되었다. 총독 당국은 신사참배 결의안을 총회 석상에서 통과시키도록 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손을 뻗쳐 공작하였다. 총회 개회 전에 주기철 목사를 비롯하여 이기선, 채정민, 김선두 등 여러 목사와 박관준 장로 같은 신사참배 반대자들을 구금하였다. 각 지방 경찰서는 전국 23개 노회의 총회 총대가 결정되는 대로 호별 방문을 하여 신사참배 찬동을 다짐하는 확답을 받았다.
총회 당일에는 교회당 안팎에 수 백명의 경찰관이 동원되어 교회당을 완전 포위한 상태이었다. 교회당 안에 정면에는 평안남도 경찰부장과 고위 경찰관들이 긴 검을 번쩍이면서 앉아 있었다. 총대들의 좌우에는 경찰관이 끼어 앉았고 당내의 후면과 좌우에는 무술경관 1백여명이 눈을 부라리고 지켜 서 있었다. 이는 너무나 살벌한 광경이었다. 조작된 각본대로 신사참배 안은 가결되었다. 총회장 홍택기목사는 전신을 떨면서 "신사참배가 가하면 '예'하시오"라고 묻고 '부'는 묻지도 않은채 그냥 만장일치의 가결로 선포하고 말았다. 봉천노회 소속인 한부선 목사는 불법이라고 외쳤으나 무술경관에 의하여 밖으로 축출 당하였다. 이러한 모양으로 마지막까지 버티고 버티던 장로교회 마저 일본 태양신 앞에 머리 숙이고 말았다.
1905년 11월 일본의 이또오란 자가 대한제국의 대신들을 위협하여 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한 이래, 국가의 주권을 하나하나 빼앗은 일제는 이제는 가장 악랄한 방법으로 교회마저 유린하고 말았다. 일본 귀신에게 신앙의 지조를 빼앗긴 한국교회는 아직껏 그때의 상처로 인한 진통이 가시지 않고 있으며 교회의 삼분오열의 파상을 이를 악물로 참고 견디는 중에 있다.
신사 불참배운동의 궐기 파급
1. 주기철 목사 시무한 산정현교회의 투쟁
한국교회가 교단적으로 일제의 신사참배에 항복하게 되자 개별적으로 반대하여 일어난 교회들이 있었다. 그중에 끝까지 신사참배를 항거한 교회로 평양의 산정현교회가 있다.
산정현교회에는 민족의 거두라고 할만한 수다한 인물들이 모여있었다. 당회원으로 '한국의 간디'로 통하는 고당 조만식장로를 비롯하여 유계준,김동원,방계성,오윤선,김찬두,박정익 등의 장로들이 기라성 같은 존재로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버티고 있었다. 제직원들로는 한원준,김정익,양재연,김경진,황병철,임이걸,김정식 등 비범한 인물들이 있었으며 백인숙 전도사와 오정모여사와 같은 훌륭한 여성들이 역시 신살암배에 거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주기철목사는 1926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하여 부산 초량교회를 첫 목회지로 하여 시무하였으며 1931년에 마산 문창교회로 임지를 옮겼다가 1936년 평양 산정현교회로 부임한 것이다. 조만식 장로가 직접 마산으로 내려가 주목사를 모셔왔다. 때는 바야흐로 평안남도 지사 야스다께가 기독교학교에 대해 신사참배를 강요한 이듬해이어서 그는 일제와의 투쟁을 각오하고 평야성에 들어선 감이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가 평양 교회에 나타나므로 산정현교회는 민족주의 총본산으로 더욱 무장하게 되었고 신앙 진리의 사수를 위하여 한국교회가 크게 단합하는 구심점의 역할을 수행하게 만들었다.
그가 부임한 다음 해인 1937년 9월5일에 250평 새 교회당을 완공하여 입당예배를 드릴 때 그는 설교하면서 이 교회는 일본우상을 대항하여 신사참배를 절대로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그 당시의 시국은 교회당 안에 일본 국기를 달게 하였고 일본 귀신이 들어 있는 가미다나(神棚)를 벽에 걸라고 강요하기 시작하던 때였다. 주기철 목사는 이 강단에 어떠한 간판도 달지 못하며 못자국 하나도 낼 수 없다고 교회당의 절대 신성을 강조하였다.
1938년 2월 8일 산정현교회 헌당식이 거행된지 얼마 후에 주목사는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때 평북노회가 신사참배를 가결하는 일이 있어 이에 흥분한 평양신학교 학생 만명이 평북노회장의 기념식수를 도끼로 찍어 버린 사건이 발행하였는데 여기에 관련시켜 주기철 목사를 검거한 것이었다.
주목사는 얼마 후 석방되기는 하였으나 그해 9월에 일제는 총회적으로 신사참배를 가결시키고야 말았다. 제27회 장로회 총회의 신사참배 결의는 주기철 목사와 산정현교회로 하여금 본격적인 신앙 투쟁으로 돌입케 하였다 주목사는 그해 가을에 제2차로 검속되었고 1939년 8월에는 농우회 사건과 연관시켜 경북 의성 경찰서에 9개월간 구금되었다.
석방된 주목사는 1940년 2월 첫 주일 평양역에 도착하였다. 마중나온 교인들의 환영은 열광적이었고 그는 곧장 산정현교회로 들어가 입은 옷 그대로 강대에 엎드려 기도 올렸다. 예배 시간이 되자 오랫만에 목사님을 만나고저 교인들은 운집하여 교회당은 입추의 여지없이 꽉 메워졌다. 일본 경찰들은 교회당을 두겹 세겹으로 포위하고 그 일대는 교회당 안에까지 들어박혀 있었다.
주기철목사는 기도를 마치고 강대에 섰다. 흰 두루마기에 까만 머리 모습에 꼿꼿한 몸가짐으로 똑바로 정립한 그는 강대의 탁종을 두세번 누르고 "예배 드립시다"라고 선포하였다. '내주는 강한 성이오 방패와 병기되시니... '의 찬송을 부르므로 예배를 시작하고 나서,성경 본문은 마태복음 5장 11절-12절("11절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12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과, 로마서 8장 31절-39절("31절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32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겠느뇨 33절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34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35절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36절 기록된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함과 같으니라 37절 그러나 이는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38절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일이나 능력이나 39절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을 읽고 '다섯가지 나의 기원'이란 제목으로 설교하였다.
첫째...사망의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나는 바야흐로 사망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들의 손에 몇번째 체포되었다가 나와서 이 강단에 다시 섰으나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 있는 만물은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봅니다. 죽음을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사도 베드로도 죽음을 두려워 예수를 부인하기를 계집 종 앞에서 세번씩이나 하였으니 누가 감히 죽음이 무섭지 않다고 장담하겠습니까.
아담의 범죄 후에 사람은 모두 죽습니다. 제왕 장상 재사도 다 죽었고 성현 군자 위인 걸사도 다 북망산에 갔습니다. 죄 없이 억울하게 죽은 약자도 불쌍하지만 아내를 두고 죽는 사람 아이를 두고 가는 어머니 모두가 다 비참한 죽음입니다. 폐결핵 환자로 요양원에 눕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종으로 감옥에 들어가는 것이 그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자동차에 치어 죽는 사람도 있는데 예수의 이름으로 사형장에 나가는 것은 그리스도인 최대의 영광인줄 압니다. 주님을 위하여라면 열 백번 죽어도 좋지만 주님을 버리고 백년 천년 산다한들 그 무슨 삶이 되겠습니까. 오! 주님이시여! 이 목숨을 아꼈다가 주님을 욕되게 아니하도록 성신이어 붙들어 주시옵소서. 이몸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도 주님의 계명을 지키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은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머리에는 가시관 두손과 두 발에는 쇠못에 찢어져 최후의 피 한방울까지 다 쏟으셨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죽으셨거늘 나 어찌 죽음을 무서워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할 수 있겠습니까. 오직 일사각오 있을 따름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시고 무덤 속에서 사흘만에 부활하신 주님 예수여, 사망 권세를 이기신 예수님이시여, 나도 부활을 믿사오니 사망 권세를 내 발 아래 짖밟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죽음아 네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나는 부활하신 예수를 믿습니다. 나도 예수님과 같이 부활하리로다. 할렐루야 아멘!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그리스도인은 살아도 그리스도인답게 살고 죽어도 그리스도인 답게 죽읍시다. 죽음을 무서워 예수를 저버리지 맙시다. 풀의 꽃과 같이 시들어 떨어지는 목숨을 아꼈다가 지옥에 떨어지면 그 아니 두렵습니까. 그러나 한번 죽어 영원한 천국 복락 그 아니 즐겁습니까. 이 주목사가 죽는다고 슬퍼하지 마십시오. 나는 내 주님 외에 다른 신 앞에 무릎을 꿇고는 살 수가 없습니다. 더럽게 사느니 보다는 차라리 죽고 또 죽어서라도 주님 향한 정절을 지키려고 합니다. 오! 주님을 따라서,나의 주님 뒤를 따라서 죽는다는 것은 나의 평생 소원입니다. 나에게는 일사각오 있을 뿐입니다.
둘째... 오랜 고난을 견디게 하여 주시옵소서!!
단번에 받는 고난은 견딜 수 있으나 오래 오래 끄는 장기 고난은 참기 어렵습니다. 칼로 베고 불로 지지는 형벌이라도 한 두번에 죽어진다면 그래도 이길 수 있으나 한달 두달씩 1년 2년 10년이나 계속되는 고난은 도저히 견뎌내기 어렵습니다. 그것도 절대로 변하지 못한다고 하면 모르거니와 한걸음만 뒤로 물러서면 고통도 면하고 오히려 후한 상을 준다고 하였는데,그런고로 많은 사람이 넘어집니다. 하물며 나 같은 약졸이 어떻게 오랜 고난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다만 주님께만 의지합니다.
주님도 십자가에 직면하시면서 그 받으실 고난으로 게세마네에서 피땀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고난을 참음으로 승리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주님의 십자가, 십자가만을 바라보고 나아갑니다. 처음에는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만 나중에는 주님께서 나의 십자가를 지어줍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이제 받는 고난과 장차 받을 영광을 비교하면 족히 비교할 수 없으리로다'이제 받는 고난은 오래야 70년 80년이지만 장차 받을 영광은 천년 만년 영원 무궁합니다. 이제 받는 고난은 죽을 몸이 죽는 것 뿐이지만 장차 받을 영광은 예수의 부활하신 몸과 같이 영원 무궁 영화의 몸이 됩니다.
주님을 위하여 이제 오는 십자가를 내가 피하였다가 이 다음 주님께서 '너는 내가 준 유일의 유산인 십자가를 어찌하였느냐'물으시면 나는 그 무슨 말로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그런고로 나에게는 일사각오 있을 따름입니다.
셋째... 어머니와 처자와 교우를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80이넘은 어머님이 계시고 병든 아내가 있고 어린 자식들이 있습니다.
자식을 아끼지 아니하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부모를 생각지 아니하는 자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금지옥엽으로 길러주신 어머님께서 이 몸이 남의 발길에 채이고 매를 맞아 몸이 상할 때 그 가슴이 얼마나 아프시겠습니까. 어머님 생각하여 불효자식이 눈물 뿌리며 기도를 여러번 올렸습니다. 그러나 어머님을 봉양한다는 구실로 하나님의 계명을 어길 수도 없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실 때 사랑하는 어머님을 제자 요한에게 부탁하였습니다. 오! 어머님을 요한에게 부탁하신 예수님께 지금 내 어머님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주님의 뒤를 따르려고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가 남편을 사모함은 인지상정입니다. 내 아내는 병약한 몸으로 일생을 내게 맡겼지마는 나는 남편된 의무를 감당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아내를 버려 두고 잡혀 다니는 이 내 마음 괴롭기 그지없습니다. 병약한 내 아내도 주님께 부탁합니다.
세상에 제 자식을 돌보지 않는 부모가 어디 있으며 자기 아버지를 의지하지 않는 자식이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나도 네명의 아들 어린것이 있습니다. 아버지가 역적으로 죽으면 그 자시들이 어떻게 살 수 있겠습니까. 어떤 자식 떼어두고 죽음의 길을 가는 이 내 마음 끝없이 비감합니다. 어미 죽은 어린것들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나는 주님께서 맡기신 내 사랑하는 교우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저들을 뒤에 두고 죽음의 길을 떠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험한 세상 이리 떼 쭝에 내 양들을 두고 갑니다.맡깁니다. 이 양들을 대목자장이신 예수님께 부탁합니다. 그리고 나는 산정재 이 강단을 떠나서 주님 뒤를 따라가려 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나는 내 어머니 내 아내 내 자식들을 여러분에게 짐되게 할 마음은 없습니다. 무소불능 하신 하나님께 부탁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이 제 몸의 고통을 이기지마는 부모와 처자를 생각하다가 철석 같은 마음이 변절한 경우가 허다합니다. 어린 자식의 우는 소리에 순교의 길에서 배교한 자가 많이 있습니다. 인간의 얽힌 인정이 나를 얽어매어서 부모나 처자를 예수보다 더 사랑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넷째... 의에 살고 의에 죽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의가 있습니다. 나라의 백성이 되어서는 충절의 의가 있고 여자가 되어서는 정절의 의가 있고 그리스도인 되어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의가 있습니다. 백이(伯夷) 숙제 (叔齊)두 형제는 은나라의 신민으로서 주(周)에서 살 수가 없어서 수양산에 숨어 서산의 고사리를 뜯어 먹었지마는 그로 인해 백세청풍이 불고 있습니다. 정몽주는 망하는 고려를 위하여 선죽교에서 피를 뿌리고 죽었습니다. 이는 우리 선인들이 나라를 사랑한 충절 대의의 훌륭한 모습니다.
하물며 그리스도인 되어서 그 어떻게 주님 향한 일편 단심을 변할 수 있아오리까.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는 신앙의 대의를 붙잡고 풀무불에 뛰어 들었습니다. 다니엘도 이스라엘의 정신을 가슴에 품고 사자굴 속에 서슴없이 들어갔습니다.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풀무불이나 사자굴이 그 무엇이 두려울 것이 있겠습니까.예수를 사랑하여 스데반이 돌에 맞아죽고 베드로도 두려움없이 십자가에 꺼꾸로 달려 죽지 아니했습니까. 그리스도의 신부된 우리는 그리스도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향한 정절을 그 어떻게 변할 수 있겠습니까. 못합니다. 그리스도의 신부는 다른 신에게 정절을 깨트리지 못합니다.
아! 내 주 예수의 이름이 땅에 떨어지는구나, 평양아 평양아 예의 동방 한국의 예루살렘아! 영광이 너에게서 떠났도다. 우뚝 솟은 모란봉아 통곡하여라, 대동강아! 대동강아! 나와 같이 울자 울자,드리리다 드리리다 이 미천한 목숨이나마 주님 위하여 제물로 드리리다. 칼날이 나를 기다리느냐 '누가 능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다른 아무것도 주님 향한 일편 단심을 변하게 못하리로다. 나는 죽고 또 죽어 열 백번 다시 죽어도 주님을 사랑합니다. 십자가! 십자가! 주님 지신 십자가앞에 이 몸을 드립니다. 인생은 초로와 같이 짧고 의는 영원 무궁합니다. 나의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의에 죽고 의에 삽시다.의를 버리고 예수님을 향한 의를 버리고 산다는 것은 개 짐승만도 못합니다. 예수로 같이 죽고 예수로 같이 삽니다.
다섯째...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오! 주님 예수여!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십자가를 붙잡고 쓰러질 때 주님,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옥중에서 혹은 사형장에서 그 어디에서든지 내 목숨 끊어질 때 꼭 내 영혼 받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집은 나의 집, 하나님의 나라는 나의 영원한 고향집이 됩니다. 더러운 땅을 밟던 내 발을 씻겨서 하늘나라 황금길을 걷게 하옵시고 죄악 세상에서 죄로 물든 내 영혼을 깨끗케 하셔서 하나님 존전에 부끄럼 없이 서게 하여 주시옵소서,오! 주님이시어, 내 영혼을 주님께 부탁합니다. 내 영혼, 내 영혼 주님 받아 주시옵소서, 아멘.
주기철 목사는 이러한 구구 절절에 불을 뿜는 설교를 힘차게 하면서 마지막에는 그 자신이 감격에 넘쳐 두 손을 번쩍 쳐들고 마루바닥을 발로 퉁퉁 구르면서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이 세상 험하고 내 비록 약하나 늘 기도 힘쓰면 큰 권능 얻겠네' 만당의 예배자들은 다 같이 눈물을 흘리면서 흐느끼며 찬송을 불렀다. 주목사의 가슴 속에서 타오르고 있는 신앙의 불길은 산정현교회 온 교인들의 가슴속에 퍼져 더욱 불타게 만들었다.
대구에서 평양에 돌아와서도 조금도 굽힘이 없는 주목사의 태도를 본 일본 경찰은 3개월 내에 목사를 사면하라고 엄명하였다. 목사를 사명하면 신사참배를 강요하지 않겠다는 타협 조건도 내놓았다. 주목사는 이때부터 목사를 사면하고 평안히 사느냐 그렇지 않으면 끝까지 싸우다가 죽느냐의 중대한 갈림길에 섰다. 그러나 이 때의 이러한 결정은 이미 한국교회의 중심 인물이 된 그에게 있어서 한국교회사 상 중요한 결정이 아닐 수 없었다. 주기철 목사는 평안히가 아니라 끝까지 싸우다가 죽기로 결심하였다. 그런고로 그는 단호히 이를 거절하였다.
1940년 5월 일본 경찰은 주목사에게 설교하지 말라고 협박하였다. 주목사는 나의 설교권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지 경찰서에서 하지 말란다고 해서 아니할 수 없다고 이것도 거절하였다. 경찰관은 노발 대발하여 위협을 가했으나 그는 등단을 만류하는 손을 물리치고 강단에 올라섰다. 며칠 후 그는 다시 검속되었으니 이것이 그의 산정현교회를 떠난 마지막이 되었다.
악독한 일제 당국은 주목사를 투옥하고 나서도 무엇이 부족하였던지 목사 사면서를 쓰라고 장작 패듯이 마구 두들겼다. 그러나 주목사는 불응하였다. 이에 궁한 저들은 평양노회장 최지화 목사를 불러 주목사를 파면하라고 요구하였다. 최목사는 하는 수 없이 옥중의 주목사를 면회하고 "주목사가 사면하면 주목사도 살게되고 산정현교회도 평안하게 되고 평양노회도 말썽이 없어지니 제발 사면해 주시오"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주목사는 "내 목사 직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니 하나님이 그만 두라고 하시기 전에는 사면 못하겠오"라고 대답하여 거절하였다.
평양노회가 남문밖 교회에서 소집되었다. 여기에서 주기철 목사의 파면 결의가 단행되었다. 이때에 우성옥 목사가 "아니오"라고 소리쳤으나 그는 형사에게 끌려나가 검속당하였고 편하설 선교사가 불법 노회라고 몇번이고 항의하였으나 묵살되었으며 산정현교회의 총대인 방적익 장로는 "이것은 노회가 아니오"라고 하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퇴장하였다.
1940년 4월 16일부터 한 주간은 고난주간이었는데 방계성장로는 옥중에 계신 주목사를 생각하여 남녀 제직 전원에게 일주간의 금식기도를 선포하였다. 그리고 다음 주일에는 주목사를 파면 결의한 평양노회의 전권위원 7인이 예배를 인도하기 위하여 교회에 올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제직원 일동은 곧 긴급회의를 소집하여 결사 투쟁으로 대항할 것을 결의하였다. 4월 23일 부활주일에 장운경 이인식 박응률 목사 등 전권위원이 산정현교회에 도착하여 강대에 올라서려 했다. 양재연집사 외 여러 사람은 장운경 목사의 앞을 가로막았다. 이들 30여명은 경찰에 의하여 연행되어 갔다. 사태가 이쯤 되자 주목사의 부인 오정모 집사가 강대 상 앞에 엎드려 소리높여 기도하더니 이어서 "내 주는 강한 성이오 방패와 병기되시니" 의 찬송을 힘차게 불렀다. 교인 일동은 모두가 다 목이 터져라고 박장을 치고 몸부림하면서 따라서 불렀다. 찬송은 '십자가 군병들아 주 위해 일어나'와 '믿는 사람들아 군병 같으니'를 연속적으로 불러대어 끄칠줄을 몰랐다. 전권위원들도 할 수 없었고 경찰들도 어떻게 손을 쓸 도리가 없었다.
평양경찰서의 고등계 주임 시미즈는 광분하여 고함을 지르면서 '해산...'을 명령했으나 교인들은 더욱 더 굳게 뭉쳐 찬송을 끄치려 하지 않았다. 얼마 후에 달려온 정사복 경찰 40여명이 힘으로 교인들을 밖으로 내밀었으며, 이 때 편하설 선교사 부인은 형사에게 밀쳐져 넘어지면서 다리가 상하고 손목에 피가 흐르는 불상사를 일으켰다. 장운경 목사는 출입문에 지켜서서 교인들이 다시 교회당에 못들어 오게 막고 서 있었다. 평양경찰서 형사들은 산정현교회 출입문에 횡 십자가로 나무를 대고 못을 박아 완전히 폐쇄하였다.
그후 교인들은 지하교회를 형성하였고 낮에는 채정민 목사 댁에 모여 예배드렸고 밤에는 이인재 전도사 방에 모여들어 예배 드렸다. 유년부 어린이들은 정낙선 집사의 집이 집회 장소가 되었으며 백인숙 여전도사는 부지런히 교인 가정을 심방하여 격려하였다. 목사를 잃고 교회당을 빼앗긴 교인들은 불안과 공포에 빠지기 쉬웠으나 미소 띠운 백 전도사의 안정된 모습을 볼 때 마다 위로와 힘을 얻었다. 백 전도사는 교인 가정을 일곱 구역으로 나누어 매일 하루도 쉬지 않고 한 구역씩 찾아가 예배를 인도하였다.
교회당을 폐쇄한 일본 경찰은 그 다음에는 주목사의 사택을 폐쇄하였다. 주목사의 어머니인 80노인이 사택에서 나가지 않는다고 사흘간이나 창고에 가두었고 오정모 부인은 경찰서 유치장으로 연행되어 갔다. 오 부인은 물 한모금 밥 한술을 먹지 않고 소리높여 기도만 하니 경찰서에서는 놀래어 며칠이 지나 밖으로 내 보냈다.
이러는 동안에도 산정현 교회 당회원들은 목사 주택을 따로 마련해 드렸으며 주목사의 생활비를 매달 꼭꼭 지불하였다. 악착스러운 일본 경찰은 유계준 장로를 호출하여 주목사의 가족에게 생활비를 주지 말라고 협박하였다. 유장로는 반문하였다. "일본의 예의 도덕은 어떻게 되어 있오? 자기 선생이 어려움을 당할 때 도와주지 않고 굶어 죽게 버려두게 되어 있습니까. 우리 한국인의 도덕은 어려울 때 도와주게 되어 있오." 과연 산정현교회 당회는 훌륭하였다. 비록 교호당은 폐쇄 당했으나 앞 날을 바라보는 소망으로 백 전도사에게도 생활비를 틀림없이 지불하였다.
영오의 몸이 된 주목사는 안질이 악화되어 고통이 심하였고 폐와 심장이 아주 약해졌다. 모진 고문에 몸은 지칠대로 지치고 상할대로 상하였다. 그래도 그는 다시 정신을 가다듬고 힘써 기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언제나 평화로운 얼굴로서 주위의 사람들에게 인자하게 대하였으며 특별히 성경 암송에 힘썼다. 옥중에서 7년이나 고난을 계속하는 주목사에게 그 마음은 더욱 거룩하여졌으나 몸은 날로 쇠약해 갔다. 마침내 1944년 4월 13일에는 병감으로 옮겼다. 생명이 끊어질 날이 가까와 오고 있음을 예감한 그는 한층 주님 향한 일편단심으로 사랑의 정이 뜨거워졌고 일본 우상을 대하는 반항 기세는 아주 강렬해졌다. 주목사는 말하기를 "일본은 반드시 망하고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라고 하면서 "4,5년 내에 일본은 틀림없이 패전한다"라고 예언하였다.
1944년 4월 21일 오후 9시,이는 주기철 목사의 최후 운명을 고하는 시간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시여 나를 붙드시옵소서"외치는 소리에 방안이 진동하므로 사람들이 깜짝 놀라 가까이 와서 보니 그 얼굴은 천사와 같이 미소를 띠우고 숨을 거두고 있었다.
이와같이 하여 주기철 목사는 나이 49세에, 태양신과 싸워 승리를 거두었고 주님계신 영원한 나라로 개선한 것이다. 그 다음날, 오정모 집사는 평양형무소에 나타나 대뜸 간수를 보고 "주목사의 시체를 찾으러 왔습니다"라고 말하자 그들은 깜짝 놀랐다. "어떻게 아십니까""예!벌써 다 압니다"라고 하면서 안으로 들어갔다. 밤에 오집사의 꿈에 낙화생(落花生)을 뿌리채 뽑아서 보니 낙화생이 주렁주렁 결실이 되어 있더라는 것이었다.이 낙화생 꿈으로 오정모 집사는 남편이 순교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일제 당국은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게 주목사의 장례식을 경계하였다. 모자가 유체를 받아서 손수레에 모시고 돌아와 보니 주목사의 얼굴은 희고 빛나며 평화로왔다. 주목사의 어머님은 그 얼굴을 만지며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교인들은 사방에서 모여들었고 어떻게 알았는지 불신자들도 사방에서 운집하여 장례식은 성대하였다. 그의 시체는 유언에 따라 평양 돌박산 기독교인 묘지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이 끝난 뒤에 경찰서에서 오부인을 호출하여 돈이 어디서 나서 장례식을 하였는가고 힐문하였다. "나도 모릅니다. 아침에 나가 보니 누가 보낸 돈인지 마당에 있어 그 돈으로 장례식을 치뤘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경찰은 다시 다구쳐 물었다. "배급쌀 밖에 없는 시기에 쌀은 어디서 몰래 사다가 음식을 차렸는가"그의 대답은 "아침에 나가보니 누가 보낸 쌀인지 마당에 있어서 그 쌀로 밥을 지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돈과 쌀은 유게준 장로가 갔다 놓은 것이었다. 이렇게 장례식은 전혀 부족없이 잘 치러졌다.
주기철 목사! 그 목사에 그 장로, 그 목사에 그 교인, 참으로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산정현 교회의 신사참배를 항거하고 그 모습은 확실히 한국교회의 영광이 되었으며 그 찬란한 순교적 신앙의 빛은 영원히 한국교인들 마음속에 아로새겨져 살아질 날이 없을 것이다.
2.항거자들의 결사 반대운동 전개
한국교회 평신도 중에서도 신사참배를 반대한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 인물이 박관준장로이다. 그는 의사이면서 전도에 열중한 신앙인이었다.
1937년 어느 날, 밤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는 중에 생명을 바쳐 일하겠다고 서약을 올렸는데, 아침에 신문 보도를 보는대로 숭실학교와 숭의여학교가 신사참배 문제로 폐교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었다. 그는 이로부터 신사참배 저지를 위해 일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이라고 깨닫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박관준 장로는 조선 총독에게 신사참배를 포기하도록 권고하기 위하여 13회나 총독부를 방문하였다. 그동안 박장로는 두 차례나 투옥되었다.
제27회 장로회 총회에서의 신사참배 가결을 막기 위하여 그는 십자가 깃빨을 만들어 들고 또 경고문을 배포하기 위하여 총회에 임석하려 하였다. 그러나 기미를 알아차린 일본 경찰에 의하여 사전에 감금되어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는 그 후에 신사 참배 하는 것이 옳치 않다는 장문의 진정서를 작성하여 니시모도 평안남도 지사를 위시하여 우가끼 총독과 아라기 문교부장관에게 발송하여 한국 기독교인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함은 불가하다는 뜻을 전달하였다.
1939년 박관준 장로는 일본 국회에서 종교단체법이 상정 통과될 것이라는 소문을 들었다. 이는 일본 국내의 모든 종교를 정부의 승인하에 신봉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이것이 통과되면 기독교인 신앙 생활에 타격을 줄 것임은 명약 관하하였다. 그런고로 그는 이를 저지하려는 의도를 갖고 원본 도오꾜로 향발하였다.
박관준 장로는 그때 신사참배 문제로 선천 보성여학교의 교사를 사임한 안이숙 선생을 대동하였다. 도오꾜에 도착한 박장로는 일본신학교에 재학 중인 아들 박영창을 만나 공동투쟁을 전개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들은 1939년 3월 22일 국회 의사당 안으로 들어갔다. 박관준 장로는 2층 방청석에 자리를 잡고 기회만 노리고 있다가 종교법안이 상정되자."여호와 하나님의 사명자이다"라고 크게 외치면서 진정서가 들어 있는 큰 봉투를 단상을 향해 힘껏 내던졌다. 의사당은 순식간에 수라장으로 화하였으며 의원들은 이 무서움을 모르는 한국인의 행동에 가슴이 서늘해졌다. 박장로는 즉석에서 체포되어 한국으로 송치되었다.그는 계속하여 신사참배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마침내 그는 1941년 봄에 치안유지법 위반 및 황실 불경죄의 죄목으로 평양형무소에 투옥되었다. 박관준 장로는 6년에 걸친 옥고를 격으면서 끝내 지조를 굽히지 않고 옥중 투쟁을 계속하다고 마침내 순교의 영관을 썼다.
교직자 중에도 끝까지 신사참배를 반대한 분이 많이 있었찌만 그중에서 손양원 목사는 참으로 위대하였다. 그는 평양신학교를 졸업하면서 여수에 있는 나병환자 애양원교회에 부임하였다. 그는 신사참배를 극도로 미워하여 강대에서 그 부당성을 통열히 공격하였다. 그는 각처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면서 우상을 섬기는 일본은 반드시 망한다고 절규하였다.
1940년 9월 25일 손양원 목사는 여수경찰서에 검속되었다. 고등계형사주임이 하는 그 말이 신사참배는 국민 의례이지 종교가 아니며 노회장과 총회장도 국민의례로 다 시인하고 신학교 교수 신학박사도 모두 신사참배 하는데 왜 당신은 반대하느냐고 신랄하게 심문하였다. 그의 대답은 진정한 기독교인이라면 절대로 신사에 절하지 않으며 기독교는 지식적 종교가 아니고 체험적 종교이기 때문에 박사가 못믿는 그 진리를 무식한 노인이나 부인들이 잘 믿으며 기독교는 유일신 종교이니만큼 다른 신을 섬기지 못한다고 잘라 말하였다.
이리하여 손목사는 1년 6개월의 징역 언도를 받았다. 그의 옥중 생활의 대부분은 기도와 성경 읽기로 시종하엿으며 감방 안에 있는 죄수들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하여 전도하였다. 사랑의 마음을 가진 그에게 어느 사이에 '옥중성자'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는 혹독한 고난과 온갖 유혹과 회유를 당하면서도 끝내 신사참배를 반대하여 우상숭배 거절의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였다. 손양원 목사는 광주형무소,서울형무소,청주형무소를 전전하면서 만 5년이란 긴 세월을 모진 옥고를 치루면서 지냈다.
3. 신사 불참배로 인한 순교자 속출
1938년 2월에서 9월 사이에 한국교회의 공적 기관의 대부분이 신사에 참배할 것을 언명하였으나 개교회나 교직자 또는 신도들이 개별적으로 반대하는 것은 막을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1939년 초에 이르러 평북,평남,경남,만주 등지에서 신사 불참배 운동이 점차 조직화되어 확대되는 기운이 팽배히 일어났다.
신사 불참배 운동의 본거지는 물론 평양의 산정현교회이었다. 주기철 목사의 옥중고와 산정현교회의 강력한 불참배 태도는 확실히 전 한국교회의 신사 불참배 운동의 상징이었고 지주가 되어 있었다.
신사 불참배 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기 위하여 생명을 내걸고 활동한 주도 인물로 평안북도의 이기선 목사와 경상남도의 한상동 목사 그리고 평안남도의 이주원 전도사등을 말할 수 있다. 이기선 목사는 1938년 장로회 총회가 신사참배를 결의하자 신사 불참배 운동을 일으키기 위하여 채정민 목사를 만나 신사참배를 결사 반대하는 동지를 전국적으로 규합하여 신사참배를 아니하기로 태도를 취하는 새로운 교회를 설립하기로 합의하였다.
그는 김의창 목사와 함께 평안남북도와 황해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김형락 박의흠 계성수 김성심 오영은 김창인 김화준 심일철 등의 신앙 동지를 규합하였다. 이때로부터 만주와 평남,경남 등지에서 신사 불참배 신도들이 현 교회를 이탈하여 그룹예배를 드리는 일이 성행하기 시작하였다.
경남에서의 신사 불참배 운동의 개시는 1938년 10월 24일 한상동목사가 부산 초량교회에서 신사참배 항거 설교를 한데서 비롯되었다. 1939년 12월 평양의 이주원 전도사로부터 연락을 받고 그는 거창의 최남고 목사와 남해의 최상림목사,마산의 최덕지 전도사,함안 진주의 이현속 전도사,부산의 손명복 전도사와 조수옥 전도사 등의 신사참배 결사 반대동지들을 흡수하여 이 운동을 확대해 나갔다.
신사 불참배 운동을 진행하는데 있어서 선교사들의 지원은 큰 힘이 되었다. 평양 주재의 하밀톤(F.E. Hamilton,)과 말스버러(D.R.Malsbury,馬斗元)
선교사 등은 운동자금을 제공하였다. 만주 흥경 주재의 한부선(B.F.Hunt 韓富善)선교사는 신사참배 반대 이유서를 인쇄 반포하여 만주 방면에서의 신사 불참배 운동을 지도하였다.
1940년 4월 3일에는 평양에서 신사 불참배운동자 연합회가 모였다. 이 회는 후일에 총회로 발전시킬 예정으로 있었다. 이렇게 신사 불참배 운동이 표면화 확대되자,경찰은 신경을 곤두세워 불참배 운동의 내용을 조사하기 시작하였고, 1940년 5월에 주기철 목사를 재검거하고 전국의 불참배 운동자를 일제히 체포하였다. 1945년 5월 18일부터는 치안유지법과 보안법 위반 또는 불경죄 등을 적용하여 중형으로 처벌하였다.
일제에 의한 신사참배 강요로 장로회신학교가 폐쇄되었고 2백여의 교회가 해체되었으며 2천여 신도가 투옥되었고 50여의 교역자가 순교하였다. 실로 한국교회가 일본의 태양신 앞에 허리 굽혔음은 엄연한 사실로서 부인할 길이 없다. 그러나 비록 절대적 수는 아니었지만 이에 항거하여 진리를 사수한 교역자가 있고 순교자의 정화가 있어 한국교회를 향해 오늘도 빛나는 생명력을 던져주고 있음을 간과하지 못한다. 이 순교정신의 발로야말로 금자탑적 존재로서 한국 민족교회의 부흥과 발전을 기약하면서 영원히 빛을 발하고 있다.
일제의 단말마적 교회 탄압
1. 전시하 기독교인들의 일대고난
아시아 전토를 장악하려는 야망을 품은 일제는 1931년에 만주에서의 전쟁을 일으킨 것에 두이어 1937년에는 중일전쟁을,1941년에는 미국을 대결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장기간의 전쟁을 수행하면서 일제가 느낀 것은 한국교회야말로 이러한 침략 정책 수행에 일대 암적 존재라는 것이었다.
일제는 한국교회의 굴복을 받기 위해 온갖 박해의 수단 방법을 다하였다. 1938년에 전국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한 뒤에는 교회의 특별 집회가 있을 때마다 신사참배를 강행시켰다. 물론 불응시에는 가차없이 투옥하였다. 1942년 3월에는 한국교회를 하여금 일본기독교 조선혁신교단을 조직케 하였다. 모세 5경과 요한계시록은 민족사상 또는 내세 사상이 강하게 표현되었다는 이유로 삭제하였으며, 찬송가도 여러 장을 삭젝하였다. 이것도 일보날 성경을 읽고 일본말 설교를 하고 찬송가도 모두 그렇게 하라고 요구하였다. 성직자는 강대에 올라설 때마다 까운이 아닌 일본식 전투복을 입도록 했으며 일본 국기에 대한 배례,궁성 요배,출정 장병을 위한 무운 장구의 기원과 황국신민의 서사 제창등이 반드시 시행되어야 했다. 1943년 9월부터는 주일 저녁예배와 삼일기도회가 폐지되었다.
교파의 해체 명령을 받기도 했다. 침례교는 재림 사상 때문에 1942년 6월과 10월 사이에 전치규,김용해목사를 비롯하여 32인의 교역자가 체포되었고 1944년 5월 10일 교회의 해산 명령을 받았다. 성결교는 그 이전인 1943년 5월에 재림 사상 강조와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이 있었다. 하여 2백여명의 교역자가 구금되었고 12월 29일에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수난 속에서 일제의 패망이 올 것을 굳게 믿고 지하에 숨어서 끈질기게 신앙운동과 민족운동을 수행한 개별적인 신앙 투쟁의 인물들이 많이 있었다. 이것을 알아차린 일제 당국자는 1945년 8월 17일을 기하여 전국의 교회 지도자들을 무조건 대량으로 살해할 계획을 세웠다. 하나님의 은혜는 이 죽음의 날에서 며칠을 앞당겨 8.15의 해방을 한국 민족에게 허락하시므로 한국 교회는 일제의 쇠사슬에서 벗어나 살아나게 되었다.
2. '한국교회' 명칭의 박탈 소멸
신사참배를 가결한 다음 해인 1939년 9월에 신의주 제2교회에서 회집한 장로회 제28회 총회는, 그 자리에서 '국민정신 총동원 조선예수교장로회 연맹'이란 것을 만들어, 소위 시국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이제는 총회 안에도 일제의 앞잡이들이 들어앉아 그 추태상을 차마 눈뜨고 보기 어려울 지경이 되었다.
1941년 제30회 총회시에는 헌법과 교리를 아주 바꾸어 일제의 어용 기구화 되었다.
1942년 3월에는 서울의 친일 기독교 목사들이 '조선혁신교단'이란 것을 조직하여 일제의 장단에 놀아났다. 여기에서는 구약성서와 요한계시록을 성경에서 빼라고 지시 하는 등 찬송가의 여러 부분을 먹칠하게 하여 교인들의 마음을 얼마나 섭섭하게 하였는지 모른다. 1943년 5월 5일에 장로회에서는 '일본기독교 조선장로교단'이라고 이름을 고쳤다. 감리교에서는 이미 1938년 10월 10일에 일본 감리교와 합동할 것을 결의한 바 있었다.
1945년 7월 19일 장로회, 감리교, 구세군 그리고 소교파 다섯 군데의 대표들이 서울 정동교회에서 회집하여 각 교파가 합동하여 '조선교단'을 설립하였다. 1945년 8월 1일에는 이를 '일본기독교 조선교단'이라고 이름하였다. 이의 초대 통리로는 조선총독이 김관식 목사를 임명 발표하였다. 이렇게 해서 '한국교회'란 명칭은 완전히 살아졌고 이제부터는 친일 분자들이 행동마저도 일제의 철저한 감시가 뒤따르게 되었다. 교회는 완전히 유명 무실화되었다.
그러나 교회의 구루터기는 타도 타도 아주 타버리지 아니하였다. 한국교회의 일제 탄압으로 인한 수난의 흑암은 바야흐로 새아침의 동틀 녘이 다가오는 조짐으로서 하나님의 섭리는 진행되고 있었다.
출처 : 한국민족기독교백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