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10.13 01:07
“할렐루야. 예수보혈의 능력입니다”...반공포로 출신 94세 김창식 목사의 이야기
국민일보 김수연 기자 2024년 10월 10일
김창식(94) 목사가 지난 7일 서울시 은평구 하늘교회(김재동 목사)에서 거제포로수용소 시절 자신의 생명을 살렸다는 성경책을 들고 "할렐루야"를 외치고 있다.
© Copyright@국민일보
한국전쟁 당시 반공포로로 수용됐던 김창식(94) 목사는 평생 예수 보혈을 의지하며 신앙의 길을 걸어왔다. 지난 7일 서울 은평구 하늘교회(담임 김재동 목사)에서 만난 김 목사는 “포로 생활과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예수 보혈의 은혜를 체험했다”며 “후대에 믿음의 유산을 전하는 것이 내 사명”이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평생 동안 ‘예수 보혈의 능력’을 연구하고 전하는 일에 헌신해왔다.
김 목사는 황해도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최초 교회인 소래교회에서 분리 개척된 이도교회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기독교 신앙을 지켜온 그는 공산주의 유물론에 반감을 품었고 자연스럽게 반공의식을 키워갔다. 그러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시 20세였던 그는 공산군에 징집돼 참전했고 그해 겨울 거제도 73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 이후 1952년 6월, 논산포로수용소로 이송된 김 목사는 휴전협정 협의 과정에서 포로교환 문제가 논의되면서 북송될 위기에 처했다. 이때 김 목사는 수용소 내 천막교회 예배위원 27명과 함께 ‘포로 교환 결사반대’와 ‘결사반공’이라는 혈서를 쓰는 것을 주도하며 북송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옥호열 선교사가 1952년 논산 포로수용소에서 찬송가를 지휘하고 있는 모습. 출처 호주전쟁기념관
© Copyright@국민일보
수용소 군목이었던 옥호열(헤롤드 보켈) 선교사가 이 혈서를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달했고 이에 감동한 이승만 대통령은 2만 7천 명의 반공포로 석방을 결정했다. 김 목사는 당시 상황을 회상하며 “유엔군 사령관이 이승만 대통령에게 ‘누구의 명령으로 이런 일을 했는가’라고 묻자 대통령이 ‘하나님이 시켜서 했다’고 답했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들었다”고 말했다.
이 사건은 그에게 보혈 신앙을 깊이 새기는 계기가 됐다. 김 목사는 “포로수용소에서 기독교인 27명이 결사반공을 외쳤고, 그 결과 4만여 명의 포로 중 3분의 2가 자유를 얻었다”며 “이 사건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의 속박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사실을 깊이 깨달았다”고 강조했다.
1954년 휴전협정 후 김 목사는 대한민국 국민으로 정식 인정받았고 포로생활이 끝나기까지 세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며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했다. 첫 번째는 공산군과 이동 중 기적적으로 포격에서 살아남은 일, 두 번째는 1950년 성탄절 전날 수용소 쿠데타가 유엔군에 의해 저지된 사건이었다. 그는 “그날 무릎 꿇고 하나님께 ‘왜 또 살려 주셨습니까’라고 기도하자, 하나님께서 ‘너를 쓰려고’라는 응답을 주셨다”며 “그 순간 주님의 길을 따르는 목회자가 되기로 했다”고 밝혔다.
논산 포로수용소 예배를 마치고 성경책을 들어올려 사진을 찍는 반공포로들의 모습. 출처 호주전쟁기념관
© Copyright@국민일보
세 번째 기적은 1952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의 비밀 지령으로 수용소 철조망이 뚫리고 탈출이 시작된 날이었다. 김 목사는 성경책을 지키기 위해 철조망을 넘지 않았고 나중에 이 선택이 자신의 목숨을 구했음을 깨달았다. 그는 “성경책을 버리고 탈출할 수도 있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버릴 수 없었다”고 말했다. 이후 탈출한 친구로부터 포로들이 탈출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 친구는 다리에 총상을 입어 절단 수술을 받았다. 김 목사는 “그때 ‘성경책이 나를 살렸다’고 깨달았다”며 지금도 당시 성경책을 가보로 간직하고 있다. 그는 자녀들에게 “이 성경책이 너희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것이니, 예수를 잘 믿어라”고 당부한다고 전했다.
1951년 6월 4일 거제포로수용소 7구역에 설치된 천막교회의 모습. 출처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 Copyright@국민일보
김 목사는 후대에 남기고 싶은 기도 제목으로 “다시는 6·25전쟁과 같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고 통일이 이루어지길 바란다”고 밝혔다. 그는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6·25전쟁의 참상을 모르고 있다”며 “한국교회가 통일을 소망하며 기도로 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고향인 황해도를 언급하며 “북한에서 부흥과 교회가 가장 왕성했던 황해도가 그립다. (내가) 조금이라도 건강할 때 하나님께서 통일시켜주셔서 북한에 돌아가 복음 전할 날이 오길 기도한다”며 복음통일에 대한 소원을 전했다.
석방 후 김 목사는 옥호열 선교사의 도움으로 대전고등성경학교(대전신학교 전신)와 서울신학대학교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1961년 졸업 후 서울 답십리교회에서 15년간, 미국 LA 선랜드한인교회에서 25년간 담임목회를 했다. 그는 미국 인터내셔널 리폼드 신학교에서 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고 은퇴 후에는 캘리포니아 센트럴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은 히브리서 9장 11~14절을 주제로 한 ‘단번에 드려진 영원한 속죄의 피’에 관한 연구인 ‘보혈의 신학’을 집필했다.
현재 김 목사는 LA한미장로교회(김영모 목사)의 은퇴목사로 지내면서 신학교와 한인교포교회에서 계속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이 죄를 사하고 구원을 허락하는 능력을 전하고 있다.
김수연 기자 pro1111@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