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중선 번호 : 34
선지자선교회
게시일 : 2003/03/03 (월) PM 05:58:20 조회 : 338
■ 손양원 목사님 신앙적 배경
<손양원 목사님 순교기념관>
손 목사의 청년기는 한국 사회는 물론 교회도 혼란한 상태가 계속되던 때였다. 국가적으로는 일본의 간악한 식민지 학정에 온 국민이 시달리고 있었고,교회는 교회대로 신사 참배 문제가 교회의 존립 자체를 뒤흔드는 무서운 힘으로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때 손 목사는 부산에 있는 나환자들이 모인 감만동 교회에서 봉사하고 있었으나, 타의에 의해서 사임을 하고, 평 양 신학교에 입학하기까지 부민정 교회에서 목회를 하면서 순교 자의 길을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손 목사는 1934년 1월 4일, "십자가 생활에 불충한 나를 위하 여"라는 글을 썼다. 그 글에서는 십자가의 고배가 체험되어지는 삶을 살기를 원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그리고 십자가의 길을 가야 하리라는 각오를 말하고 있다.
"행복(幸福)하여지기를 원(顧)하면서 의(義)를 위하여 신고 (辛苦)당하기를 꺼리는 자, 땀도 흘리지 않고, 눈물도 뿌리지 않고 피도 쏟지 않고, 그러나 많은 행복을 절탐(切貪)하는 어리석은 이를 많이 만나는 중 그 중에도 나는 첫째로 꼽히는 자인가 한다‥‥‥‥ 세인 (世人)이 체험치 못하는 진정(眞正)한 부귀 영화(富貴榮華)의 안락(安樂)은 고난 역경(苦難逆境)에서 기쁜 찬송을 부르는 자가 아니겠느냐:‥‥ 빈(貧)은 애처(妥妻)로 삼고 고(普)를 선생(先生)으로 삼고 자연(自然)은 친구로 삼는 생활 에 진정 미(味)의 쾌락을 직감(直感)하리라.
양원(良源)아! ‥‥‥ 너는 무겁고 괴로운 십자가를 지고 좁고도 험한 갈보리 형곡(荊谷)을 향하는 노선에 있음을 깨닫지 못하느냐? 밭 갈기를 예비한 암소가 어찌 멍에를 끌겠으며 전쟁에 나간 군인이 어찌 죽음을 무서워하겠느냐 내 몫에 매인 십자가 내 어이하리 있까? 기쁘게 지고 나아가리라. 너는 십자가 지기를 꺼리지 말라.다시는 세상에 돌아오지 못할지니라."
이 글 속에서는 순교자의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해야만 순교를 위한 것인지를 밝히고 있다. 그는 예수의 내용에 생명을 다던져 사는 것이 순교의 삶이라고 했다. 그리고 순교의 길이 쉬운 이유는 좁고도 험하나 평안이 있기 때문이며, 다시는 세상을 돌아보지 않고 이 길만 가야겠다는 강한 의지를 밝히고 있다.
예수의 내용에 생명 다 던지니
성령에 강한 위로 내 맘에 충만해
주님께 가는 길 좁고도 험하나
생명과 평안 있으니 내 어찌 사양하리요
다정한 고향과 진애한 벗들을
당연히 부정한 나는 천극을 봄이라
예수의 내용에 생명을 다 던져 살도록 영향을 끼친 사람들은 그의 아버지 손종일 장로와 동경에서 만난 성결 교회 나카다(中 田重治)목사, 그리고 경남 성경 학교에서 만난 주기철 목사, 김교신 등을 들 수 있다.
아버지 손종일 장로에게 받은 신앙심과 민족애
1)신앙적 측면
손종일 장로는 나이 38세에 이웃으로부터 전도를 받아 신앙에 입문하게 된다. 주님께서는 손 장로의 가족을 하나님의 일꾼들로 쓰시기 위해서 그가 처음 교회에 나갔을 때,단 한 순간에 그의 영혼을 사로잡아 버렸다.
그는 술과 담배를 멀리하는 것을 시작으로 매사에 경건한 신 앙인이 되어 갔다. 밤새워 성경을 통독하였고, 만나는 사람마다 예수님을 전하였다. 그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예수님만 입 에 오르내렸다.
그는 명절이나 제사 때에 묘에 절하는 것을 우상이라 하여 절을 하지 않고, 제사상에 올려놓은 제기들까지고 불태워 버렸다. 이것을 분명하게 하기 위해서 설날 묘 앞에서 온 문중이 모여서 절을 하고 있는데 손종일이 차례상을 엎어 버렸다.여기 저기서 조상도 모르는 톰. 미친 놈이라며 두들겨 패고, 발로 짓밟고 난리가 났다. 만신창이가 되게 매를 맞은 손종일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여보시오, 어르신들 내 말 좀 들어보시오. 하나님은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니 그 어떤 것도 숭배해서는 안 되오. 죽은 무덤에 절하지 마시오. 하나님이 싫어한단 말이오."
이렇게 손종일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신앙 생활을 했었다. 가족 모두가 예수를 믿게 된 후부터는 새벽 기도와 아침 저녁 가정 예배, 십일조 헌금과 주일 성수는 어길 수 없는 가정의 규칙이 되 었다.
손종일은 그가 다니는 교회를 통해서도 하나님의 일에 충성을 다했다. 그가 다녔던 칠원 교회에 가보면 교회 모든 장부들이 그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이로 보아 교회에서는 중추적인 인물로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충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권찰, 집사, 조사, 장로로 교회에 충성, 봉사했으며 그가 장로로 봉직 중에 있을 때에는 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는데 재산 전부를 바쳐서 교회를 세웠다. 당시 전 재산이 논 다섯 마지기 였는데 부져 도구만 남기고 가진 것을 몽땅 바쳐서 교회를 세웠다. 처음에는 그가 세 마지기만 바치기로 했는데 그의 부인 김은주 집사가 나머지 두 마지기를 추가로 바쳤다고 한다
그렇게 손종일 장로는 철저하게 말씀 중심의 신앙 생활을 했었다.
그가 섬겼던 교회의 당회록을 살펴보면, 1919년 2월에 모인 제2회 당회록에 "삼 인이 주일을 지키지 아니하므로 책벌 하였으되‥‥‥‥"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제5회 당회록 1항에"‥ 장자를 외방에(안 믿는 자에게) 장가들임으로써 교회 법대로 책벌하기로 회중이 동의 가결하다. "로 되어 있고, 1929년 12월에 모인 제41회 당회록 1항에 보면 "‥‥ 불신자와 결혼하므로 7월 24일에 두 달 동안을 모자와 같이 책벌 하였더라."고 되어 있다.
또한 그는 사랑을 실천하는데 힘쓴 사람이었다. 회계로 17년동안 봉사한 그의 회계 기록을 보면 나환자 구제뿐 아니라 어려운 사람들을 구제하는데도 힘썼음을 볼 수 있다. 그는 자손들 에게 토지나 값비싼 보석 대신에 이러한 '믿음'을 귀한 유산으로 남겨 주었다. 이러한 믿음의 유산을 물려받아 손양원,손의원, 손문준이 목사가 되었다.
후에 교회가 혼란기에 빠져 분열이 가속화되어 가고 있을 때, 손양원 목사는 아우 목사님들에게 하나님 중심, 말씀 중심,사랑의 실천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신 아버지의 신앙에 굳게 서서 신앙의 절개를 굳게 지키자는 권고로 "우리는 아버지가 섬기던 본 장로 교회를 섬기자"고 했다.
2) 민 족 애
손종일은 한일 합방 당시에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국가를 몹시 염려했다. 그래서 국가에 대해서 염려했던 사람들과 자주 만나 얼굴을 맞대고 울분과 한탄을 토로했다. 비록 가난하고 배운것은 없는 농사꾼이었지만 강제로 외교권을 박탈해 간 일본을 용납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손종일은 항상 "한일합병은 한민족의 본의 아닌 일본의 강탈 이며, 세계의 전 약소국은 자체적으로 총귈기하여 자주 독립을 쟁취해야 한다. "고 주장하면서 독립 만세 운동 때 교회를 중심으로 칠원 장터에서 만세 시위를 주도하기도 했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8개월간을 마산 형무소에서 복역하게 되었다. 이 때에 손양원은 서을 중동 학교에 다니고 있었으나 아버지 독림 만세 사건으로 투옥되자 학업을 더 계속할 수 없는 처지 가 되 었다.
이러한 손종일의 애국심이 손양원 목사에게까지 영향을 미쳤으며 결국에는 복음으로까지 승화시키는 역사를 일으키게 되 었다.
일본 나카다 주지 목사에게 받은 신앙의의 체득
손양원 목사의 체형 조서인 제1회 피의자 심문 조서에 보면 그는 기독교 입교 사항과 신앙 경력을 묻는 사법 경찰관에게 "20세 때 내지(일본)에 도항하여 동경 판교 성결 교회에서 목사 중전중치의 설교를 듣고 참된 신앙의 의의를 체득했다."고 답했다.
손 목사에게 영향을 끼친 나카다 목사는 당시 일본 동경의 판교 성결교회 목사였다. 그는 또한 일본 성결 교회의 감독으로 정치 권력뿐만 아니라 강렬한 개성과 카리스마적인 종교적 권위를 가지고 이 교파를 통솔한 지도자였다.
그는 미국 북감리 교회 전도사로 있다가 미국 무디 성서 학원에서 공부한 후 새로운 종교적 확신을 갖고 일본으로 돌아왔다.일본에 돌아온 그는 성서 학원에서 그와 함께 공부하고 일본 선교를 지원하여 일본에 왔던 카우만(C . E. COWMAN)과 함께 동양 선교회 성결 교회를 조직하여 일본 각지를 다니면서 노방 전도에 전력을 다하였다.
그들은 기성 교회를 비판하면서 "성서에 기록된 대로의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하면서 그리스도 십자가 구원에 의한 신생,성령의 완전한 성결에 의해 씻음 받는 성화, 신앙에 의한 신유,그리스도의 천년 왕국에 의한 재림을 말했는데 그들은 이를 사중 복음이라 불렀다.
이들은 죄로부터 구원, 그리고 성결을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체험으로 사람들에게 호소하였으며, 집회의 분위기는 열광적인 찬송과 춤,설교, 기도. 간증으로 가득차 있어서 참가자는 기쁨과 눈물, 승리를 부르짖었다.
또한 그들은 신사를 종교로 인정하여 신사 참배 거부를 공공연하게 부르짖었으며, 특히 나카다 목사는 부홍 운동에서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년 왕국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나카다 목사의 신앙이 손 목사에게 얼마나 영향을 끼쳤는가 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자신의 고백처럼 나카다 목사를 만남으로 "신앙의 의의"를 체득케 되었다는 것뿐이다.
손 목사는 당시 황순덕 전도사에게 그가 나카다 목사의 설교를 통해서 중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고 중생의 확신을 얻게 되었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간증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가 일본에 있을 때 판교 성결 교회의 성도들이 펼친 노방 전도는 그에게 죽어가는 영혼을 사랑하게 했으며 전도의 열정을 갖게 했다. 그래서 그는 중생의 체험과 전도에 대한 열정을 가지고 한국에서 죽아가는 사람들에게 전도하기 위해서 귀국했다고 했다.
손 목사는 1924년 3월 23일에 재차 도일하여 보다 많은 신앙적인 성숙과 자기 발전을 기하려 했으나 여러 가지 형평의 어려움으로 오래 머물지 못하고 같은 해 10월에 귀국하여 일본에서 받은 신앙의 열정을 한국의 복음화를 위해서 수고하는 전도자의 삶을 헤쳐 나가게 되었다.
주기철목사에게 받은 말씀과 삶의 일치
손목사가 중생케 되어 일본에서 돌아 왔으나 막상 무엇을 어떻게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한동안 방황하는 시간을 가져야 했다. 그가 고민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어떠한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과 삶이 일치된 생활을 보내야 하는데 그것이 뜻대로 되어지지 않을 때 생기는 영성 생활을 고민하는 최고 경지의 행복한 고민이기도 했다.
그러나 더 이상 이렇게 고민과 의욕만 가지고 있을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결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안 손 목사는 모든 것을 정리한 후 경남 성경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고 그 곳에서 주기철 목사의 로마서 강의를 통해서 그의 고민을 해결하게 되었다.
손 목사는 1926∼1929년, 24살에서 27살까지 경남 성경 학교에 다니면서 주기철 목사를 만나 말씀과 삶의 일치를 이루게 된 것이다. 그는 순교적 신앙이 말씀과 삶의 일치라고 했다. 순교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다가 주를 위해서 죽을 기회가 와서 죽는 것이며, 따라서 단순히 죽는 것 그 자체보다는 말씀과 삶의 일치가 순교 신앙이라고 했다.
그는 이러한 신앙을 주기철 목사에게서 받았음을 1950년 6월 김린서 저 "주기철 목사의 순교와 설교집"이란 책 서문에 밝히고 있다.
"주기철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우리 나라에 보내신 분입니다.그 분은 하나님의 사람이요, 우리 앞에 세우셨던 의인이십니다. 나는 이 어른에게 직접 신앙 감화를 받은 사람 중 한 사람이 된 것을 감사드립니다.
일찍이 주 목사님은 경남 성경 학원의 선생이시고 나는 학생 이었는데 목사님의 로마 서신 강의 시간은 언제나 은혜의 부흥 회였고 간절한 정서와 열렬한 사명감인 '신앙의 정서, 소명감의 치열'은 당시의 일대 표어였습니다. 나에게 부탁하시되 '우리 나라는 작은 나라이나 종교의 위대한 인물이 날 터이니 군은 성자들의 전기를 많이 읽어 그 사람되기를 준비하라:고 말씀하시더니 목사님 자신이 그 사랍이었습니다.
주 목사님은 산정현 교회에서, 나는 평양 신학교에 있을 때에도 목사님께 가까이하여 배을 기회가 많았습니다. 당시에 간증하시되, '신사 참배 문제 이후로 설교할 때에 우상죄를 공격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고 말씀하시던 것을 생각하면 목사님은 싸움을 위하여 싸운 것이 아니라 견딜 수 없는 신앙의 불길이 당신 마음 속에서 불타 올랐던 것입니다.
한번은 한상동 목사와 나를 향하여, '나는 북에서 싸을 터이니 제군들은 남에서 싸우라'고 백만 군중에 돌격하는 장군처럼 지령하던 그 때를 생각하면 목사님은 의의 싸움의 참용사였습니다.
언젠가 많은 청중에게 '오늘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도 백년 후에는 다 죽을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잘 죽은 사람은 누구인가? 주를 높이다가 죽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 14:13),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가 가장 잘 죽은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신 예언을 이제 생각하건대 이는 당신의 결심이었고 또한 실천이었습니다"
주기철 목사를 만남으로 손 목사의 삶은 그가 말한 대로 "오직 예수의 내용에 생명을 다 던진 삶"을 살게 된 것이다. 특히 신사 참배 반대에 순교의 각오로 임할 수 있게 된 데는 주기철목사의 가르침을 통하여 "신사 참배 문제 이후로 설교할 때에 우상죄를 공격하지 않으면 마음이 괴로워 견딜 수 없다."는 교훈을 자주 가르쳐 주었고 "가장 잘 죽는 사람은 누구인가? 주를 높이다가 죽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계 14:13), 예수님을 위하여 목숨을 버린 자가 가장 잘 죽는 사람일 것이다. 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임을 알 수 있다.
성경공부와 김교신의 성서조선을 통한 영적성장
"나는 예수를 믿게 된 이후 벌써 25년이나 되었다. 나는 그 동안 천태 만상의 신앙으로 복잡하였다. 여러 가지 각 신앙 방면에서 오는 신앙 관념에서 헤매기도 하고, 나의 내적 실생활에 있어서 많은 의심과 고민 중에 헤매었다. 그러다가 30세 되던 해부터 정통의 기독자가 된 것 같다."라고 손 목사는 고백하고 있다.
그는 또한 "나는 소학 시는 맹목적 신앙자였고, 중학 시까지는 미분명의 말세자로 준비적 신앙자였고, 너무나 지옥 형벌이 무섭고 천당의 향락이 하도 탐스러워 신앙 생활하는 자였고, 지옥 형벌을 피하기보다도 천당의 행복이 탐스럽기보다도,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께서 내게 행하신 크신 사랑을 감히 떠나 버릴 수 없고 섭섭히 여기실까 해서 신앙 생활을 했다. 30세 이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을 받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움직이게 하시는 대로 영적 인간, 기독자의 생활을 하는 자 가 되었다."라고 고백하였다.
또한 김교신의 영향을 언제부터 받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기에서 그가 참된 기독자가 되었다고 한 30세는 1932년에 성조지(聖朝誌)를 가지고 교회에서 사경회 공부처럼 한 주간을 가르쳤던 해 이다.
성조지를 가지고 손 목사의 가르침을 받았던 문신활이란 성도가 손 목사와 같은 신앙 고백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그가 30세 이후에 비로소 참 기독자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김교신의 성조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성조지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았던 당시 성도였던 문신활도 "아! 모든 법과 의식에 결박되어 고통과 번민으로 예수를 뜻없이 믿은 소생은 날로 새로 생명적으로 자라는 참 진리로 해방을 받아 한없는 희열이 넘쳤나이다. "라고 고백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시 손 목사에게 전도를 받아 교인이 되었다고 고백한 김수남 권사도 증언에서 이 때 당시를 회상하기를 문신활처럼 김교신의 성조지를 가지고 집회를 인도했다는 것은 기억을 못하고 있으나 손 목사님께서 집회를 인도할 때 감만동 교회에 나타난 엄청난 역사에 대해서는 증언을 하고 있다.
문신활이나 김수남의 증언에 의하면 그 때 당시에 "암흑에 잠겨 있던 감만동 교회는 광명을 맞이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의무나 의식에 의한 신앙 생활이 아니라 손 목사님이 고백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영적 생명을 받아 내 안에 그리스도가 움직이게 하시는 대로 살아가려는 결단이 있는 영적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을 체험할 수 있었고, 참여한 사람들마다 지난 날을 회개하면서 앞으로는 예수 안에서, 예수를 위해서, 예수와 함께 기독자의 생활을 하는 자가 되어야겠다는 결단을 하는 분들이 많았다고 한다.
당시 성도였던 문신활은 그 때에 생명적으로 자라는 참 진리로 해방을 받아 한없는 희열이 넘쳤다고 간증했다. 이러한 영적 운동이 문제가 되어 이 집회 후 1932년에 손 목사는 성조지를 사용하여 성경 공부를 인도하고 집회를 한 사건으로 이단시되어 감만동 교회를 쫓겨나게 된 것이다.
타의에 의하여 사임을 하고 부민정 교회로 옮겨간 후에도 성조지를 통해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부민정 교회를 찾아가 손목사의 가르침을 계속 받았으며 손 목사가 감만동 교회를 떠나게 된 것을 무척 안타깝게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손 목사는 이미 한센병자들을 위해서 일생을 바칠 각오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손 목사가 성조지를 통해서 영적인 면은 영향을 받았으나 김교신의 무교회주의는 영향을 받지 않았다.
문신활이 신앙 생활 제5권 3호, 권말에 "무교회지의 폭언"이란 제목을 읽고서 쓴 글에 의하면 손 목사가 무교회주의 사상을 철저하게 반대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문신활의 단편적인 글들을 통해서 보면 손 목사가 성조지를 통해서 영적 생명을 받아 그리스도가 움직이게 하시는 대로 움직이는 영적 인간, 한센병자들에 대한 사랑, 진리 사수에 대한 신앙 등의 영향은 받은 듯하나 무교회주의는 받아들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