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적 아가서 주석 (서문)
선지자선교회
● 집필 前記
2010년 새해에 들어 교계 신문을 보니 아가서에 대해서 망령되이 해석하는 자가 있었고, 또 그 책이 출간되므로 그 책을 망령되게 활용하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신문 기사를 통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그 내용인즉 아가서를 육체적으로 해석하였고 또 그 출간된 책을 가정 사역에 활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가서는 예루살렘 왕 솔로몬과 예루살렘 여자들 곧 우리를 구속하신 주님과 구속 받은 성도들의 관계와 또한 구속 받은 성도들에 대한 주님의 심정을 우리의 구원에 필요해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아1:1에 ‘솔로몬의 아가라’고 나타내셔서 아가서에 대해서 오해 하지 않도록 말씀의 성격을 1장 1절 서두에 분명하게 나타내셨습니다.
그러한데도 이 시대의 교회가 속화 되어 심령이 어두워진 틈을 타서 아가서를 신령적으로 나타내지 않고 육체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극히 일부이지만 이를 용납하는 저들이 책으로 출간 하였고 또한 이 책을 전파하는 저들이 있습니다.
그리하여 요한계시록을 성경적으로 주석을 한 바 있기 때문에 이런 위태한 상황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는 심정과 또 그동안 성경을 성경적으로 주석할 수 있는 과정을 주셨기 때문에 아가서에 대한 주석을 하지 않고 관망만하는 것은 맡겨주신 직분을 피하는 것밖에 안 되는 일로 여겼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할 일 중에 우선순위를 두고 아가서 주석을 시작하려고 합니다.
아가서 주석을 통해서 하나님께는 영광이 되고 우리들에게는 구원에 유익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이 주석 사역이 잘 이루어져서 좋은 결실이 있도록 주의 몸 된 교회들의 동역적 기도를 부탁드립니다.
(잠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 집필 과정
아가서를 주석하는 일은 요한계시록을 주석하는 것보다 어렵고 힘든 것 같습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은 그 범위가 넓어서 이 땅에 있는 교회에 주시는 구원도리와 함께 말세와 재림과 심판과 영원무궁의 하늘나라까지 그 전부의 구원도리를 함축적이면서도 계시적으로 주셨기 때문에 이를 주석 하려면 무척 어렵고 힘든 일이지만 말입니다.
아가서는 우리 성도에 대한 주님의 사랑을 나타낸 구원도리의 범위이기 때문에 그 주석하는 것이 요한계시록 보다 주석하기가 쉽고 힘이 덜 들 것이라 여겼습니다. 그러나 요한계시록 주석을 집필한 후 지금 아가서 주석을 집필하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요한계시록 주석과 아가서 주석에 대해서 비교를 해보면 아가서 주석이 더 어렵고 힘들게 여겨집니다.
물론 요한계시록 주석도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집필자는 그저 기록하는 쓰임만 받았을 뿐이며, 아가서 주석도 요한계시록과 마찬가지로 특별한 은혜를 주셔서 쓰임을 받았기 때문에 집필자 자신이 어렵다거나 쉽다하는 그 말 자체가 주관적인 말일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요한계시록을 주석하는 순서를 가지지 않았다면 아가서 주석은 집필 할 엄두도 못 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가서 주석을 할 수 있기까지 과정을 소개한다면, 성경적 조직신학> 성경요절편람> 성경적 성경사전> 성경적 요한계시록 주석> 아가서 주석>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순차적 가르쳐 주시는 과정을 통해서 점차적 성경 주석하게 된 것입니다.
● 집필 中紀
현재 아가서 주석은 1장부터 8장까지 주석을 마쳤습니다. 아가서 주석을 하기 위해서 아가서 성경을 펼쳤을 때 할 수만 있다면 피했으면 하는 마음이었습니다. 아가서 주석하는 그 성경적 원리는 요한계시록 주석을 하면서 어느 정도 밝히 알고 있었지만 그 원리 방편을 안다고 해서 주석을 할 수 있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마치 산악 등산가가 해발 몇 천 미터 되는 그 높은 산을 보았을 때 그 정상에 올랐다가 내려오는 그 과정이 어떨 것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잘 알기 때문에 성큼 대할 수 없을 터입니다. 이와 같이 요한계시록 주석을 마치고 바로 이어서 아가서 주석을 하는 것은 마치 눈 덮인 고봉을 등정하고 내려오자마자 곧바로 또 다른 고봉을 등정하는 것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아가서 주석 집필을 피했으면 좋겠지만 요한계시록 주석을 하게 하셨을 때는 아가서 주석을 하기 위한 준비 단계로 주셨기 때문에 아가서 주석은 할 수 밖에 없는 인도였습니다. 그러나 집필하는 자신에게는 그 어떤 의미도 두지 않는 것은 저작성 집필이 아니라 기록성 집필이기 때문입니다. 의미를 부여한다면 다만 기록성 집필에 쓰임 받는 그 정도의 의미는 둘 수 있다 하겠습니다.
아가서는 신구약 성경 육십육 권 중에서 가장 문장 독해가 난해한 성경이 아가서입니다. 요한계시록도 문장 독해가 난해한 부분이 있습니다만 아가서가 더 난해한 것 같습니다.
요한계시록에서 문장 독해를 했다 할지라도 주석에 맞는 독해가 되어야 하지 그렇지 않고 주석하기 전의 문장 독해는 아직 미완성에 그치는 독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요한계시록에 기록된 ‘육백육십육’이 무슨 말이라는 것을 독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육백육십육에 대한 말씀을 주석하려고 하면 주석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은 육백육십육은 ‘육백’과 ‘육십’과 ‘육’이 합성된 각각 별도의 도리가 있는데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석할 때는 육백과 육십과 육을 각각 별도로 주석을 해야 합니다.
아가서도 이와 같아서 문장 독해에 있어서 난해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신학자들은 독해를 하고 또 주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독해한 것이 주석할 수 있는 정확한 독해가 되어야 하는데 그 독해한 것으로 주석을 하려고 하면 주석이 되지 않은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문장적 독해는 되었지만 주석적 독해에는 이르지 못했다는 증표입니다. 즉 문장 독해가 바로 되지 못했다는 결론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서를 독해할 때는 주석 까지 되어야 정확한 문자 독해이지 그렇지 않고 주석이 되기 전의 독해는 아직 미완성의 독해라는 것을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석하기 전의 독해를 가지고 주석까지 마친 독해에 대해서 옳다 그르다 성급하게 판단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주석한 것을 볼 때는 성경적인데 주석에 앞선 문장 독해는 어떻게 그렇게 독해했는지 의아스럽게 여길 부분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앞에 언급한대로 문장 독해와 성경 주석에 있어서 그 차이점이 있으니 이점을 참고 하셔서 성경적 아가서 주석을 대하시기를 바라면서 이에 대한 안내 말씀을 드립니다.
● 성경 주석의 속성
오늘에 전자 제품의 발전은 급속도입니다. 그래서 어제 전자 제품을 샀는데 자고 일어나면 업그레이드 된 신형이 쏟아집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며칠 미루다가 살 것을 하고 후회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세탁기를 아주 오래 된 것을 쓰고 있었는데 몇 달 지나면 신형이 나오고 또 몇 달 지나면 신형이 나오니까 사면 바로 구형이 되므로 아예 사지 않다고 했습니다.
또 컴퓨터를 사거나 휴대폰을 사고 나면 며칠이 안가서 업그레이드된 신제품이 나옵니다. 그렇다고 구입하면 곧 바로 신제품이 나오고 그러면 구형이 된다고 구입하지 않는다면 그 발상이 옳지만은 않겠습니다. 그래서 제품을 구입하는 시기를 자기의 형편에 맞게 치우치지 않고 잘 조정해서 그 시기에 맞게 구입하여 바로 사용하면 되겠습니다.
전자 제품을 개발하고 제작하는 회사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품을 업그레이드해서 제작하고 출하 시키려고 하면 이어서 업그레이드된 제품이 개발됩니다. 그러면 더 업그레이드된 제품을 제작해서 출하시키면 좋았을 것이라 한다면 제품을 언제 생산하여 언제 출하할 수 있겠습니까.
성경주석 집필과 출간도 이와 마찬가지라 여깁니다. 성경을 주석하고 육 개월이나 일 년이 지나서 보면 수정 보완할 곳이 보입니다. 이미 출간된 책에서 수정 보완할 곳이 보이면 출간을 미뤘다가 수정 보완된 것으로 출간을 했더라면 더 좋았을 텐데 하는 그 아쉬운 마음이 더합니다.
그동안 미루어 보건데 성경 주석한 것을 얼마 시일이 지나서 살펴보면 반드시 수정 보완할 부분이 보입니다. 그리하여 수정 보완을 하고 또 얼마 지나서 수정 보완을 하고 그렇게 계속 수정 보완하는 것으로만 지낸다면 그 주석은 원고로만 쌓여 있게 될 것입니다. 성경 주석하는 것도 인도를 따라서 또 출간하는 것도 인도를 따라서 하는 것이라면 그 인도를 따라야 할 것입니다.
교회사에서 성경 주석은 시대마다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시대와 교회사에서 유명한 그 성경 주석도 이 시대의 우리들이 살펴보면 오류 된 부분들이 보입니다. 그 시대는 그 시대에 주의 종을 세워서 그 시대를 감당하게 하셨고, 이 시대는 이 시대에 주의 종을 세워서 이 시대를 감당하게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교리 신조에 있어서 그 뿌리에 속한 둥치이며 그 둥치에 속한 그 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 주석은 그 시간 해놓았을 때는 최고로 해 놓았는데 불과 몇 날이 안가서 수정 보완 할 곳이 보이는 그 당연성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교회사에서 그 어떤 유명한 성경 주석가의 주석이라 할지라도 그 주석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참조 그 이상으로 삼으면 안 됩니다.
조직신학과 성경사전과 요한계시록 주석을 집필했고 그리고 아가서 주석 중입니다만 살펴보면 불과 몇 개월 안 가서 수정 보완 할 곳이 보입니다. 그리하여 안내와 당부 드리는 것은 주석은 성경이 아니고 어디까지나 성경 주석이므로 그 주석으로만 상대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정확무오의 성경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주석을 근거하는데 머물지 말고 반드시 성경을 근거해서 성경해석에 이르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성경 주석은 할 줄은 몰라도 그 해석이 바로 되었나? 안되었나? 하는 것은 분별할 수 있습니다. 마치 요리는 할 줄 몰라도 맛은 분별하는 것처럼, 그림은 그릴 줄 몰라도 예술성은 분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경 주석과 해석한 것을 참조해서 그 주석과 해석이 성경 말씀에 확고히 맞으면 심령에서 인정이 되고, 그리되면 전할 때도 인정되는 것만큼 담대히 전하게 됩니다.
거듭 말씀드리면 성경 주석은 그 집필자가 볼 때에도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수정 보완 할 곳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또 수정 보완할 곳이 계속 있게 된다고 집필을 아예 하지 않거나 또 출간을 보류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각자에게 주시는 주님의 인도는 각각 다를 줄 믿습니다.
성경 주석을 집필하고 출간하는데 미약하나마 쓰임 받고 있는 집필자가 그 안고 있는 마음의 부담과 소원이 어떤 것이라는 것을 간략하게 피력해 봅니다.
● 성경해석 성경적 원리
성경은 성경이 자체적으로 성경을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해석에 있어서 성경 외에 그 어떤 것을 근거해서 해석하게 되면 비성경적 오류의 해석이 됩니다. 성경은 한 성구 한 구절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 없도록 하셨습니다. 우리 인간에게는 한 성구 한 구절의 성구라도 자의적으로 해석할 권위를 부여하지 않으셨습니다.
성경 난해절은 그 말씀 자체가 본래 난해절이어서 난해절인 것이 아니라 그 난해절로 보이는 것은 그만큼 성경을 자세히 읽지 않았다는 증표입니다. 난해절로 여기는 성구는 반드시 그 성구에 대해서 해석해 놓은 성구가 있습니다. 즉 난해절은 그 말씀에 대해 해석한 말씀을 해놓고 그와 연관된 말씀을 해놓았기 때문에 그 본래의 말씀이 어떤 말씀인지를 찾을 수가 없어서 난해절로 여기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신약성경에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그런데 만일 구약성경은 자세히 읽어보지 않았다면 신약에서 말씀한 아브라함의 믿음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에 난해절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약성경에서 아브람의 믿음에 대해서 말씀할지라도 난해절로 여기지 않는 것은 구약성경에서 아브라함의 믿음에 대해서 자세히 읽고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요한 계시록에서 ‘육백육십육’ ‘처음 사랑’ 등이나 아가서에서 ‘헤르몬산’ ‘마하나임’ 등의 경우 난해절로 여깁니다. 이렇게 난해절로 여기는 것은 이에 대해 말씀한 말씀이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자세하게 말씀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에 대한 말씀을 자세히 읽지 않으면 그 말씀의 도리를 지나쳐버리게 됩니다. 그리하여 지나쳐버린 말씀에 대해서 그 연관된 말씀이 나오면 그 말씀들은 전부 난해절이 되게 됩니다. 이것이 난해절로 여기는 까닭에 대한 정의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34:16에 ‘너희는 여호와의 책을 자세히 읽어 보라 이것들이 하나도 빠진 것이 없고 하나도 그 짝이 없는 것이 없으리니 이는 여호와의 입이 이를 명하셨고 그의 신이 이것들을 모으셨음이라’ 하셨으니, 성경의 모든 말씀에는 반드시 그 짝이 되는 성구가 있습니다. 즉 성경은 그 말씀에 대해서 그 뜻을 먼저 나타내시고 그 다음에는 그 뜻을 포함시킨 말씀을 나타내고 있으니 이것이 상호간 그 짝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리하여 한 말씀은 해석편이 되는 말씀이고 또 한 말씀은 그 해석편에 대한 그 짝이 되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신구약 성경 말씀에는 많은 말씀이 있는바 각각의 말씀에는 반드시 그 짝이 되는 말씀이 있으니 하나님의 말씀을 자세히 읽는 그 방편 외에는 성경을 해석할 길이 없습니다. 이것이 성경에서 가르쳐 주시는 성경해석 성경적 원리입니다.
● 성경해석 원리와 성령 충만
우리가 성경에 기록된 단어 어휘의 뜻이 무엇인지 해석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 사전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 사전에서는 세상적 용어 해석은 구할 수 있겠지만 결코 성경적 해석은 구하지 못합니다. 그러함이 당연한 것은 세상 것은 세상에 속한 것을 말하고, 하늘 것은 하늘에 속한 것은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단어 어휘는 반드시 성경을 근거해서 성경적으로 해석해야 합니다. 그러함은 성경 단어 어휘는 그 단어 어휘가 기록된 첫 성구에서 대부분 해석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그 단어 어휘를 제일 첫 번째 기록된 성구에서 그 단어 어휘에 대한 뜻과 도리와 그 쓰임새의 용도를 총체적으로 나타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 단어 어휘를 해석하기 위해서 그 단어 어휘가 기록된 첫 성구를 찾으면 그 해석에 사용된 또 다른 단어 어휘들이 나타나게 되는데 그 단어 어휘 또한 그 단어 어휘가 나오는 첫 성구에서 찾으면 그 단어 어휘에 대한 뜻과 도리와 그 쓰임새의 용도를 알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단어 어휘들에 대한 연결적 해석을 가지는 것이 성경해석의 성경적 원리입니다.
아가서을 주석하는데 있어서 위의 성경주석 원리를 적용하면 성경에 난해절은 결코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 성경주석 원리를 적용하고서도 난해절이 된다면 아직 성경주석 원리 적용에 있어서 미숙하기 때문이지 이 원리가 맞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하나 첨부해서 알려드리는 것은 이런 성경주석 성경적 원리를 터득했다고 할지라도 영감 충만의 역사가 없으면 문자적 도리는 나타낸다 할지라도 그 문자 속에 진리적 도리는 나타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주석하는데 있어서는 성령의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고로 성경주석 원리에 대해서 먼저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성령을 충만히 받는 준비가 먼저 되어야 하기 때문에 영감의 갑절로 충만케 하여 주시기를 늘 간구하고 있습니다.
● 솔로몬의 아가
아가서는 아가서1:1에서 말씀한대로 솔로몬의 아가입니다. 그렇기에 솔로몬의 아가 외에 그 어떤 것으로도 주석을 하게 되면 비성경적입니다. 아가서1:1절 해석을 살펴서 그 도리에 맞게 주석해야합니다.
○‘솔로몬’
전1:1에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하셨으니,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로서 예루살렘 왕입니다.
‘예루살렘 왕’
슥9:9에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하셨고 또 마21:4-9에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일렀으되 *시온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 나귀, 곧 멍에 메는 짐승의 새끼를 탔도다 하라 하였느니라 *제자들이 가서 예수의 명하신 대로 하여 *나귀와 나귀 새끼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그 위에 얹으매 예수께서 그 위에 타시니 *무리의 대부분은 그 겉옷을 길에 펴며 다른 이는 나뭇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무리가 소리질러 가로되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하셨으므로, 만주의 주시오 만왕의 왕 되시는 구주 예수님을 나타냅니다.
○‘아가’
습3:14에 ‘시온의 딸아 노래할지어다 이스라엘아 기쁘게 부를지어다 예루살렘 딸아 전심으로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하셨으니, 노래하여 기쁘게 부를 지어다 하는 말입니다./ 또 엡5:19에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하셨으니,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을 말씀합니다.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
슥2:10에 ‘여호와의 말씀에 시온의 딸아 노래하고 기뻐하라 이는 내가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니라’ 하셨으니, 여호와께서 임하여 네 가운데 거할 것임이기 때문입니다./ 계15:3에 ‘하나님의 종 모세의 노래, 어린 양의 노래를 불러 가로되 주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시여 하시는 일이 크고 기이하시도다 만국의 왕이시여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도다’ 하셨으니, 주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며, 일이 기이하시고, 만국의 왕이시며, 주의 길이 의롭고 참되시므로 그 주님께 노래하며 찬송하는 것을 가리켜서 아가라 합니다.
● 아가서와 요한계시록의 연관성
솔로몬은 구주 되시는 주님을 상징하고, 예루살렘 여자들과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와 나의 신부와 술람미 여자는 구속받은 성도를 상징합니다. 그리하여 주님께서 구속 받은 성도에 대한 관계성과 심정을 나타낸 말씀이 아가서입니다.
1. 예루살렘 여자들아
(아1:5) 예루살렘 여자들아 내가 비록 검으나 아름다우니 게달의 장막 같을지라도 솔로몬의 휘장과도 같구나
계14:1에 ‘또 내가 보니 보라 어린 양이 시온 산에 섰고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이 섰는데 그 이마에 어린 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을 쓴 것이 있도다’ 하셨으니, 예루살렘 여자들은 어린 양과 함께 시온 산에 섰는 십사만 사천을 말씀합니다. 즉 이기는 자를 말씀합니다.
2.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아1:7) 내 마음에 사랑하는 자야 너의 양 떼 먹이는 곳과 오정에 쉬게 하는 곳을 내게 고하라 내가 네 동무 양 떼 곁에서 어찌 얼굴을 가리운 자같이 되랴
계14:12에 ‘성도들의 인내가 여기 있나니 저희는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니라’ 하셨으니,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 믿음을 지키는 자들이 주님의 마음에 사랑하는 자입니다. 즉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를 말씀합니다.
3. 나의 신부야
(아4:8) 나의 신부야 너는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하고 레바논에서부터 나와 함께 가자 아마나와 스닐과 헤르몬 꼭대기에서 사자 굴과 표범 산에서 내려다보아라
계21:2에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예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하셨으니, 어린 양의 신부되는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을 말씀합니다./ 계19:7-8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크게 기뻐하여 그에게 영광을 돌리세 어린 양의 혼인 기약이 이르렀고 그 아내가 예비하였으니 *그에게 허락하사 빛나고 깨끗한 세마포를 입게 하셨은즉 이 세마포는 성도들의 옳은 행실이로다 하더라’ 하셨으니, 주님의 대속공로를 힘입어서 옳은 행실을 한 성도를 말씀합니다.
4. 술람미 여자야
(아6:1)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돌아오고 돌아오라 우리로 너를 보게 하라
계2:5에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하셨으니,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진 자가 술람미 여자입니다. 즉 예수님의 피 공로 곧 1)사죄의 공로를 힘입어서 죄 없는 자로 살고 2)칭의의 공로를 힘입어 의로운 자로 살고 3)화친의 공로를 힘입어서 하나님과 화목 하는 자로 사는 전 생활과 전 생애로 사는 그 처음 사랑이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그 처음 행위를 가지는 자를 말씀합니다.
우리를 구속하신 신랑 되신 주님께서 신부되는 성도와의 관계를 말씀하신 것이 아가서입니다. 주님이 사랑하는 자는 저가 주 안에 주는 저안에 거하는 주님과 동행하는 자를 말씀합니다. 그리고 그 주님과 동행의 신앙이 어떠한 신앙이며 그 신앙을 지킬 때의 성도의 신앙이 어떠함과 또 주님의 심정이 어떠한지를 상징적으로 나타낸 말이 아가서입니다.
● 집필 후기
아가서 주석을 2010년 2월에 시작해서 2010년 11월에 1차 집필본이 완료 되고, 2차 수정 보완본이 2010년 12월에 완료되고, 3차 출간본이 2011년 1월에 완료되었습니다.
아가서 주석을 하게 된 동기를 말씀드린바가 있습니다. ‘성경적 요한계시록 주석’을 교계에 소개하고자 세미나를 할 때에 그때 교계 기독교신문사 중 하나가 아가서를 육체적으로 대하는 단체를 비판하는 기사를 연속해서 1면 기사에 대서특필하였습니다. 그에 대한 소식을 그 신문사 기자를 통해서 알게 되었고 또 그에 대한 기사와 논평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기자가 자문을 구했습니다.
그리하여 성경 말씀을 육체적으로 대하는 것은 당연히 비성경적이요 또한 비성경적 오류를 넘어서 이단이 될 수도 있는 점을 강력히 분명하게 나타내려면 상식적 말로 논평할 것이 아니라 아가서를 성경적으로 해석을 하게 되면 아가서를 육체적으로 해석하는 저들은 자동적으로 비성경적임을 증거가 되기 때문에 요한계시록을 주석한 집필자로서 아가서 주석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가서 주석을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아가서 주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로 인도하셨기 때문에 그 인도를 따른 쓰임이라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복음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 아가서를 육체적으로 적용시킨다면 구원과 상관없는 말씀으로 나타냈기 때문에 이는 이단적 오류라 정죄할 수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주석할 때는 성경사전을 집필하다가 요한계시록의 난해절 말씀이 어떤 말씀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보여서 시작하게 되었지만, 아가서는 요한계시록을 주석하는 성경적 방편 그것 하나만 믿고 또한 맡기셨으면 감당할 은혜를 주실 줄 믿고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태산을 오르는 심정이었지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그날에 주시는 그 앞만 보고 떼었습니다.
아가서는 먼저 문장 독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솔로몬 왕을 예루살렘 여자들로 또 그와 반대로 예루살렘 여자들을 솔로몬 왕으로 거꾸로 적용해서 주석하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는 난해한 성경이 아가서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주석 하지 않는 상태에서 문자 독해한 것은 그런 경우가 생겨지게 됩니다.
그러나 문자 독해를 1차로 하고 나서 2차로 주석을 시도하게 되면 그 문자 독해가 오류 된 독해인지 성경적 독해인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 1차 독해된 문자로 2차 주석을 하게 되면 그 결과물로써 독해가 바로 되었는지 바로 되지 않았는지 알게 된다는 말입니다. 문자 독해한 것으로 성경 주석이 되어야 하는데 만약 성경 주석이 되지 않는다면 문자 독해에 오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1차로 문자 독해를 하고 그 다음 2차로 그 독해한 문자로 주석을 하여서 그 주석이 성경적으로 주석이 되었다면 문자 독해가 바로 되었다는 증표이고, 성경적 주석이 되지 못하면 문자 독해가 오류라는 증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가서 주석을 하는데 있어서 문자 독해를 성경적 주석이 되는 독해가 되도록 면밀하게 성경을 근거해서 몇 번이든지 상고하고 연구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서 ‘성경적 아가서 주석’을 대하고 문자 독해면에 대해서 의문을 가질 수 있는 부분이 있는 것은 아가서는 이러한 난해절로 된 성경이기 때문에 당연하다고 봅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사전지식을 가지도록 하기 위해서 안내를 하는 바입니다.
얼마 전 신학 교수 목사님을 만났는데 주석에 해석을 더 붙였으면 좋겠다는 건의를 주셨습니다. 전적 동감이며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자세한 해석을 붙이려고 하면 진도가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에 부득이 뼈대만 제공하고 그에 대한 살을 입히는 것은 뒤로 미루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건물을 시공할 때 설계하고 기초 놓고 철골과 콘크리트를 치고 기본 골조를 세웠으면 그 내부 공사는 나중에 하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을 연구하는 목회자시라면 목회에 필요한 말씀으로 얼마든지 해석을 보충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에 각자 목회들께 그 부분은 위임하는 성격도 있습니다.
이제 아가서 집필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그 다음 순서로는 예수님 비유 말씀에 대한 주석을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성경 말씀으로만 된 조직신학을 집필을 하려고 합니다. 주 하나님의 무한하신 긍휼과 크신 은혜를 간정히 바라올 뿐입니다.
오늘까지 성경 주석이나 목회 자료를 집필한 것은 선교지 목회자 분들께 전하는 그 성경공부 과정에서 나타난 은혜입니다. 집필 한 자료들은 선교지에서 목회자분들께 전하고 있으며 한국교회에도 시간을 주시는 대로 목회자 세미나로 전하고 있습니다. 요사이는 인터넷 시대라서 집필된 자료를 홈페이지에 올리면 목회 자료 제공과 함께 간접적 강의가 되고 있습니다.
(계7:12) 가로되 아멘 찬송과 영광과 지혜와 감사와 존귀와 능력과 힘이 우리 하나님께 세세토록 있을지로다 아멘 하더라
(눅17: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의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2011. 1. 8. 선교지 연구실에서
무익한 종 김반석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