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선교사님 14인

2016.01.28 05:26

김반석 조회 수:

호주선교사님 14인

  선지자선교회

부경교회사연구 Vol.30

 

호주선교님들.jpg

 

 

맹호은

p.81-83

프레더릭 존 매크레이 목사(Rev. Frederick John Macrae, 孟皓恩, 1994.5.14~1973.1.6)

진주 1910-1913, 거창 1913-1915, 마산 1915-1940/ 목사 선교사

 

프레더릭 존 매크레이 목사(Rev. Frederick John Macrae, 孟皓恩)의 가문은 강력한 자유 교회(Free Kirk) 전통을 지닌 집안이었다. 그의 조부 도널드 매크레이 목사(Rev. Donald Macrae, 1801-1866)1843년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대분열 당시 자유교회의 지도자였다. 그의 부친 존 매크레이(Rev. John F. Macrae, 1852~1914)는 에딘버러대학과 뉴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빅토리아의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한 이후, 존 매크레이는 1891년 타계한 존 이윙 목사의 후임으로 헨리 데이비드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였던 투락 장로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했다. 그는 1914년 아들을 만나기 위해 한국으로 여행하던 중 사망했다.

프레더릭은 콕펜(Cockpen)의 목사관에서 존 매크레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스카치 칼리지와 멜번대학에서 공부했다. 그리고 SCM에 활동적으로 참여했고 빈민지역 선교를 위해 봉사했다. 그는 1907년 자원자 선언에 서명했다. 1년 동안 오몬드 칼리지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1910년 글래스고의 트리니티 대학(연합자유교회 신학교)에서 신학 공부를 계속했다. 그는 글래스고에 머무는 3년 동안 가장 열악한 환경의 빈민 지역에서 봉사 활동을 했다. 그리고 19097월에 옥스퍼드에서 열린 WSCF 대회에 호주 SCM 대표로 참석했다. 호주로 돌아와서 그는 한국에 선교사로 자원했고 1910920일 안수를 받았다. 그의 안수식에 멜번대학의 자원 학생들이 성가를 불렀고 이 성가대를 훗날의 한국 선교사 알렌(A. W. Allen)이 지휘했다.

매크레이는 1910112일에 한국에 도착하여 진주 지방에 와서 산청, 삼가 등지를 선교하다가 1913-14년에 거창, 안의, 함양 지역의 9개 교회를 보살피도록 배정받고 거창 지부를 설립하여 켈리목사 부부와 1913618일 거창으로 옮겼다. 그는 코넷(cornet)을 연주하면서 찬송가를 가르쳐 장터에서 군중을 모으는데 유용했다. 191519일 일본에서 온 마가레트 홀(Margaret Hall)과 결혼하고 10월에 마산 지방으로 가서 선교하였다. 그의 딸 캐서린(Kathleen)1927년 생후 2년 반 만에 한국에서 죽었으나 두 아들 파구하(Farquhar)와 노만(Norman)은 선교사로 아프리카와 중국에서 살았고 딸 마가레트는 간호사가 되었다. 독특한 열심가요, 또한 기능적 호기심이 많았다. 매크레이 목사는 경남 5개 처 교회, 함안 구성교회, 함안 평림교회, 거창 성기교회, 의령 백야교회, 합천 구원동교회 설립을 도왔다. 라이얼이 휴가 간 1916-18년과 1920-1938년에는 창신학교 교장으로 섬겼다. 학교에서 신사참배를 강요하는 정부의 강력한 압력에도 저항하였다. 부인의 건강 악화로 호주로 돌아갔다.

 

 

거트루드 나피어 양(Miss Gertrude Napier, 南性眞, 1872~1936.8.30) p.90-91

마산 1912-1920, 진주 1920-1935, 동래 1935-1936/ 간호 선교사, 간호부장

 

거트루드 나피어 양(Miss Gertrude Napier, 南性眞)1872년 스코틀랜드 에딘버러에서 태어나고 교육을 받았다. 성 조지 사범학교(St. George's Training School)를 마쳤다. 그리고 대학입학자격을 얻은 후에 에딘버러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했고, 그 후 18개월 동안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녀는 선교사가 되기 위해 에딘버러 왕립병원(Edinburgh Royal Infirmary)에 들어갔고 간호사로 훈련을 받았다. 그녀에게 교육은 후천적인 재능이었던 반면, 간호는 타고난 재능이었다.

1905년 내피어는 동생과 제부(弟夫) 앤드류 길리슨 목사(Rev. Andrew Gillison)dhki 함께 브리즈번으로 와서 2년 동안 브리즈번 어린이 병원에서 일했다. 1909년 그녀는 멜버른의 여성병원에서 산파학 과정을 이수했다. 그 과정 중에 그녀는 여선교연합회의 호손(Hawthorn) 지부와 연결되었다. 1912년 디커니스 훈련소의 소장이었던 플레트(Miss Flett)가 영국 방문차 자리를 비우게 되어, 내피어는 소장 대리로 1년간 일했다. 당시 전진 정책은 잘 훈련된 간호사를 필요로 했고, 내피어는 전도 간호사로 자원했다. 그녀는 호손지부와 멜버른 북노회의 지원을 받아 19119월에 한국을 향해 떠나 1030일 도착했다. 내피어의 선교 동기는 오랫 동안 그녀의 마음 속에 간직되어 있었다. 그러나 디커니스 훈련소 안에서 한국 선교사로 자원한 에버리와 래잉과 같은 선교사 후보자들을 만났고, 또 한국을 향한 전진 정책이 그녀의 선교 동기에 불을 붙였다.

내피어는 처음 마산에서 선교하다가 1920년에 진주로 와서 배돈병원 간호 부장과 여전도회 회장, 영아 부장 등을 겸무하였다. 옥봉리교회에도 많은 공헌을 하여 유익함이 많았고 남성교회가 설립된 이후 열심히 도우고 가난한 환자를 많이 도왔다. 전 일생을 주의 사업을 위하여 희생할 목적으로 자기가 받은 사명과 책임과 권리를 중요시하며 관철케 하는 열심히 많았고 모든 일을 주선함에 지혜롭고 동역자를 감독하는 수단도 능하였다. 열렬한 성품은 장부의 위풍이 있고 부드러운 심성은 자애로운 어머니 같았다. 내피어는 휴가를 다녀온 후 농업실수학교를 돕기 위해 동래로 옮겨와서 1936년 대구에서 심장병으로 사망하고 진주에 묻혔다.

 

 

커닝햄, 권임함

p.97-98

프랭크 윌리엄 커닝햄 목사(Rev. Frank William Cunningham, 權任咸, 1887.12.19~1981. 8.18)

진주 1913-1941, 거창 1923-1941. 부산 1947-1950/ 목사 선교사, 학교장

 

프랭크 윌리엄 커닝햄 목사(Rev. Frank William Cunningham, 權任咸)는 윌리엄 리처드 커닝햄 목사(Rev. William Richard Cunningham)의 장남으로 킬모어(Kilmore)에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은 이전에는 감리교 목사였으나 빅토리아 장로교단으로 이적했다. 그의 모친도 감리교 목사의 딸이었다. 그들은 자녀 교육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의 둘째 아들 케네스 스튜어트 커닝햄(Kenneth Stewart Cunningham)은 훗날 유명한 교육학 학자로 멜버른대학의 교수가 되었다. 프랭크 커닝햄은 멜번대학에서 공부했고, 1908년 그가 21세가 되던 해, 고전어에서 우등 성적으로 석사 학위(M.A.)를 받았다. 그의 고전어 능력은 후에 그로 하여금 한국어 성경 번역자가 되게 했다. 그는 오몬드 대학을 졸업하고, 1912117일에 말번교회(Malvern Church)에서 안수를 받고 그 교회의 지원을 받아 전진 정책의 영향 아래서 한국으로 자원했다.

1913226일에 함께 신학교를 입학하여 월등하게 공부하고 함께 최우등을 하였던 알렌 목사와 같이 한국에 도착하여 진주에 왔다. 한국 말을 공부할 때 어학 재주가 탁월하게 능숙했다.

흥미롭게도 커닝햄은 그의 부모가 그러했듯이 감리교와 깊은 관계를 맺게 된다. 그는 한국 선교사로 활동하던 중에, 휴가 기간에 일본의 후지산에서 미국 감리교 선교사로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던 케서린 안나 트레시먼(Miss Catherine Anna Treishman)과 만나 19171116일 결혼했다.

1914년 겨울부터 선교를 시작하여 1923년까지 진주 서북편 구역과 단성, 산청, 삼가, 의령 등지 교회를 순시하며 선교에 열중했다. 옥봉리교회 당회장도 여러 해 맡고 광림학교 교장도 여러 해 겸무하였다. 1923년 이후는 거창 지역도 보살피게 되었다. 진주에서 커닝햄이 감독하던 한국인 권서는 문충원, 오형선, 이봉은, 황성욱, 황원석 등이었다. 1925년까지 있다가 마산에서 3년을 보내고 다시 와서 1940년까지 진주에서 시무하였다. 그는 1928년에서 1937년까지 성서 개정 작업에 참여하였고 남자성경학원 원장을 맡았고 엥겔 박사가 은퇴한 1938년에 평양신학교가 신사참배 반대 운동으로 무기한 휴교하기 전 한 학기동안 가르쳤다.

결혼 후 생남을 감사하여 본 교회에 강도상을 기증하기도 했다. 경건함이 신자들의 사표가 되고 그의 겸양과 이해심을 모두 칭송하였다. 알렌 목사는 의령 지방 정련교회, 분계실교회, 마장교회, 이목정교회, 마산교회 등 5개 처 교회와 진주 천곡교회, 하동 대산교회, 산청 단계교회를 전도하여 설립하였다. 그는 1941년 다른 선교사들과 함께 추방되었다가 광복 후 1947618일에 다시 한국에 와서 1950년에 선교사를 은퇴하기까지 3년간 선교회 의장으로 섬겼다. 그는 19509월 한국 전쟁이 나고 나서 한국에서 철수하였다.

 

p.98-99

캐서린 앤 커닝햄 목사 부인(Mrs. Cunningham, 케서린 안나 트레시먼 양, Miss Catherrine Anna Treischman, 1886.2.1~1976.11.18)

진주 1918-1941/ 여 선교사, 유치원 원장

 

커닝햄 목사 부인(Mrs. Cunningham)이 된 캐서린 안나 트레시먼(Miss Catherrine Anna Treischman)양은 미국의 아이오와주의 웰먼(Wellman, Iowa)출신으로 1910년 코넬 대학을 졸업했다. 그녀는 미감리교 선교사로 일본 히로시마 여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던 미국 북 감리교회 선교사로 활동하고 있었다. 트레시먼 양은 프랭크 커닝햄을 후지산 등반 때 처음 만나 19171116일에 히로시마에서 결혼하고 진주를 방문했다. 그녀는 선교회 소속 유치원을 관리하고 일본어 지식으로 지역 일본인들과 관계를 잘 가졌고 미국 시민권을 유지한 채 19761118일 멜번에서 죽었다.

 

 

테일러

p.100-102

윌리엄 테일러 의사(Dr. William Taylor, 魏太淵, 魏太仁, 1877.6.14~1938.9.23)

통영 1913-1921, 진주 1921-1938/ 의료 선교사, 배돈병원 원장, 목사 선교사

 

윌리엄 테일러 의사(Dr. William Taylor, 魏太淵, 魏太仁)는 북아일랜드의 울스터의 밸리메나(Ballymena, Ulster)에서 태어났다. 그는 에딘버러와 아일랜드 왕립대학(Royal College)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내과와 외과 의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1908년 테일러는 존 패튼의 강연을 듣고 감동을 받아 뉴헤브리데스에 선교사로 자원했다. 19106월 테일러는 노블 제임스 맥켄지의 후임자로 노구구(Nogugu)에 임명을 받았다. 1912410일 테일러 부인은 심각한 병에 걸려서 빌라(Villa)에서 빅토리아로 가는 후송선을 기다리다 죽었다. 테일러는 호주에서 간단한 요양을 한 후, 뉴헤브리데스의 새로운 선교지 빌라(Villa)로 임명을 받아서 존 패튼 기념병원에서 일했다. 그러다가 19139월 테일러는 한국에 도착하고 12월에 상해로 가서 뉴헤브리데스 시절에 알고 지내던 간호 선교사 앨리스 메인(Alice Main)과 결혼했다. 그 해 제3의 선교지부가 통영에서 시작되었다. 통영은 많은 섬으로 이루어진 곳으로 의료 선교사가 시급하게 필요하여 프랭크 패튼은 테일러를 통영으로 파송했고, 수간호사 엘리스 메인은 홀로 2년 동안 빌라병원을 운영하다가 통영에서 합류했다.

테일러 의사 부부는 1921년까지 통영 지방에서 선교하다가 19223월 부인과 딸을 데리고 진주로 와서 1938년 사망할 때까지 배돈병원 원장으로 시무하였다. 의사의 직무를 최후까지 봉사적으로 헌신할 결심을 하고 낙관적으로 기쁨을 선물하였다. 일에 당하여서는 정중하고, 진찰하고 치료할 때는 성실하였다. 친근하여 사절하는 자가 없고 인정이 많아 물리치지도 않았다. 진주 배돈 병원에서 치료할 때 나환자 공동체가 그의 친절에 감사를 새긴 기념비를 세웠다. 테일러 의사는 또한 안수 받은 목사였다. 진주와 인근 마을에 복음을 설교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3892361세의 나이로 일본 요코하마에서 갑자기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

 

 

p.102-103

엘리스 테일러 의사 부인(Mrs. Taylor, 엘리스 메인 양(디커니스), Miss Alice Main, 1879. 12.31~1950.6.9)

통영 1915-1921, 진주 1921-1938/ 간호 선교사, 유치원 원장

 

테일러 의사 부인(Mrs. Taylor)이 된 엘리스 메인(Miss Alice Main)양은 늘 선구자인 선교사였다. 시골에서 태어난 그녀는 꽃과 모든 성장하는 것들을 사랑했다. 그녀는 잘 훈련받은 디커니스와 간호사로서, 호주내지 선교회(AIM)가 생기기 훨씬 전인 1908년에 호주 대륙의 중심부인 사우스오스트레일리아 오드나다타(Oodnadatta)의 진료소에 간호사로 파송을 받았다. 그녀는 호주 중앙에 흩어져 있는 거주자들을 위한 간호 업무를 감당했다. 존 플린(Mr. John Flynn)이 내지 선교회의 설립 책임자로 임명된 후, 그녀는 다시 선구자로 뉴헤브리데스의 빌라(Vila)의 이리리키(Iririki)에 세워진 패튼기념병원의 수간호사로 임명을 받았다. 여기서 엘리스는 의사 윌리엄 테일러(Dr. W. Taylor)와 만나게 된다. 테일러는 1913년 한국으로 떠나게 되어 약혼하고 먼저 떠났었지만 엘리스는 빌라의 병원을 지키기 위해 뒤에 한국으로 가다가 상해에서 만나 191312월에 결혼했다. 1921년까지 통영에서 합류하여 같이 일했다. 그곳에서 딸 진(Jean)도 태어났다. 진주에서 테일러 부인은 유치원을 운영했고 정원을 잘 가꾸었다. 남편이 사망한 이후 호주로 돌아가 195069일에 세상을 떠났다.

 

 

데이비스

p.104-105

엘리스 진 데이비스 의사(Dr. Elice Jean Davis, 代至安, 1889.3.9~1981.6.15)

진주 1918-1941/ 여의사, 배돈병원 원장

 

진 데이비스 의사(Dr. Elice Jean Davis, 代至安)는 마가렛 데이비스의 자매로서 1918126일에 진주에 와서 배돈병원 의사로 시무하며 부인병과 소아과를 진찰, 치료함에 여성 병자가 많이 오고 어린이의 건강을 위하여 힘쓰므로 사회의 신임을 받았다. 데이비스 의사는 침착하고 단정하여 심성이 예민하고 태도가 분명하였다. 그녀의 부모이신 존 데이비스 부부는 노년에 사랑하는 딸들이 있는 한국의 진주를 자주 방문하여 그 사랑을 짐작하였다. 데이비스 의사는 진주에는 1918년부터 1941년 선교부가 철수할 때까지 24년간 진주에서만 활동하고 매클라렌 의사가 의료 장교로 프랑스 전선에 간 동안 배돈병원 원장을 맡기도 하였다.

한국에서 의료 행위를 하기 위해서 일본 의료 시험을 통과하였다. 안과와 이()과의 경험과 멜번의 부인병원과 아동병원에서 레지던트로 일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배돈병원에서 여의사로서 여성 환자를 살피는 책임을 맡았고 1921년 말에는 여성 입원 환자들도 돌보았다.

데이비스 의사는 해방 후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빌라의 패튼기념병원의 원장 제미슨과 교대하고 원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업무를 수행했다. 1981615일 멜번에서 사망했다.

 

부경교회사연구 Vol.31

 

p.53-54

에셀 빅토리아 딕슨 양(Miss Ethel. V. Dixon, 德順伊, 1889-1975.7.5)

거창과 서울 1922-1927, 진주 1928-1928, 거창과 진주 1933-1941/간호선교사, 간호부장

 

에셀 딕슨(Miss Ethel. V. Dixon, 德順伊)양은 멜번의 카스터튼(Casterton)에서 태어났다. 16세 되던 해 노스코트(Northcote)에 정착했다. 딕슨은 한동안 칼튼의 어스킨 교회의 여선교회 총무를 맡았다. 그녀는 오스틴 불치 환자 병원(the Austin Hospital for Incurable)과 여성 병원에서 간호사 훈련을 받았다. 이러한 의료 지식과 간호 기술, 그리고 따뜻한 인간성을 가지고 그녀는 디커니스 훈련소에 입학했다. 1922916일 그녀는 여선교연합회 산하 여학생 선교 연합회(Senior Girl's Missionary Union)가 후원하는 선교사로 한국에 파송되었다. 맥켄지 선교사 부인과 아들을 비롯하여 멘지스 선교사, 매클라렌 부인의 병도 간호하였다. 1927년 휴가 중 유아 복지 클리닉분야의 공부를 마치고 약혼을 발표하고 사임키로 했으나 192861년 동안 한국에 돌아와 진주에서 일했다. 1932년 한국선교협의회가 딕슨양을 다시 초빙을 건의하여 19339월 한국에 돌아왔다. 앨시 에드거가 휴가간 사이 진주에서 193611월에서 19383월까지 지내며 배돈병원 간호부장을 맡았다. 진주에서 지낼 때에도 일주일에 한 번 거창에 가서 유아 복지 클리닉을 지도했다. 에드거가 돌아온 후 딕슨은 10개월 휴가를 가지고 19393월 거창으로 돌아왔다. 1941년 다른 여 선교사들과 함께 철수할 때까지 그곳에서 사역하고 197575일 멜번에서 사망했다.

 

p.55

엘리자베스 와이트 (베스) 던 양(디커니스(全恩惠, 1896.6.6-1986.12)

통영 1923-1928, 거창 1929-1941, 부산 1947-1953, 마산 1953-1957, 진주 1년간 시기?/ 여 선교사

 

베스 던(Dunn)양은 스코틀랜드 커크살디에서 태어났다. 디커니스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몬태그 선교회에서 봉사한 후 전도 선교사로 승인되어 19238월 한국으로 떠났다. 서울에서 한국어 공부를 하다가 12월 통영에 스키너와 합류하였다. 1929년 휴가에서 돌아온 베스 던양은 거창에 배치되었다. 그곳의 12년 가운데 진주에서의 1년을 제외하고 그곳이 거주지였다. 2차 대전 이후 한국을 떠나 194797일에 한국에 도착했다. 부산에 근거지를 두고 통영, 거창, 진주 등을 방문했다. 19506월 한국 전쟁이 일어나 한국을 떠났다가 195310월 베스 던과 아이린 와킨스는 마산 선교회를 다시 열었다. 거창 진주를 순회하기도 하고 순회 활동의 피로와 교회 분열의 긴장을 느끼고 195863일 한국을 떠났다. 그녀는 198612월에 사망했다.

 

 

고도열

p.59-60

아서 토마스 코트렐 목사(Rev. Arthur Thomas Cottrell, 高道悅, 1903.1.4~1982.1.4)

진주 1933-1936, 거창 1936-1938/ 목사 선교사

 

호주에서 코티’(Cottie)로 알려진 아서 토마스 코트렐 목사(Rev. Arthur Thomas Cottrell, 高道悅)는 그 부친이 대장간을 하던 윌리안스타운에서 자라며 아버지에게 도제교육을 받다가 목회에 소명을 느끼고 장로교회 목회를 위한 선교훈련과정에 참여하였다. 1932년 오몬든 칼리지를 졸업하고 미틀포드(Myrtleford)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에 한국에 사람이 필요하다는 도전이 그에게 다가왔다. 1930년대부터 한국 교회는 급성장을 했고 더욱 많은 선교 인력이 요구되었으나 경제 공황으로 인해 해외선교위원회는 더 이상의 인력을 파송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 당시 알렌 선교사가 죽고 그의 후임이 급하게 필요하게 되었다. 코트렐 목사는 이때 강한 소명을 느끼고 멜번으로 와서, 휴가 중인 엥겔 목사, 왓슨 목사, 디키리스 딕슨 선교사들을 만났다. 그는 19336월 한국에 가기를 결심했다. 726일 멜번 서노회는 그를 선교사 목사로 안수했다. 진주에는 19339월에 도착하여 그 때부터 진주와 거창에서 복음 전도 사역을 하며 시골 교회 목회적 책임을 감당하였다. 1938년 휴가 때 호주로 와서 부인의 건강과 딸 제니퍼의 출산으로 19401월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애들레읻드 굳우드 교회 목회를 하였다. 호주 공군의 군목으로 일하고 호주내지선교회와 함께 순찰대를 위한 경목(Patrol Padre)으로 일했다. 후에 암으로 투병하다가 1982년에 세상을 떠났다.

 

 

p.60

제시() 코트렐 목사 사모(Mrs. Cottrell, 맥아서 양, Miss McArthur, 1903.7.25-1984. 8.3)

진주 1933-1936, 1936-1938/ 여 선교사

 

코트렐 목사 사모(Mrs. Cottrell)가 된 맥아서 양(Miss McArthur)은 푸츠크래이에 있는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나 디커니스 훈련을 받고 첫 임지는 아폴로 베이였고 두 번째는 깁슬랜드에 있는 소년들을 위한 킬매니 파크홈이었다. 그곳에서 아서 코트렐을 만나 193316일 결혼했다. 딸 제니퍼(Jennifer)를 휴가 중인 1939년에 호주에서 낳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어릴 때 당했던 교통사고로 인해 심한 관절염으로 고생을 했다.

 

 

p.62-63

비다 메리 오맨 양(Miss Vida M. Aumann, 吳偉多, 1909.8.30-)

마산 1938-1939, 진주와 거창 1939-1941/여 선교사

 

오만 양(Miss Vida M. Aumann, 吳偉多)은 빅토리아 드로우인(Drouin)에서 태어나 호필드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31년 비다는 멜번에서 공부하기 위해 머토아를 떠났고 1933년에 디커니스 훈련소에서 공부하였다. 그 후 대학교에 입학하여 다니면서 기독학생연합의 해외 봉사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1937년 말경 도저히 B. A.학위를 마칠 수 없어 연기하였다. 1938315일 한국에 도착하여 마산에 배치되었다. 그녀는 일본어 공부를 위해 일본으로 보내 줄 것을 요청하여 19389월부터 1년 간 일본 도쿄에서 보내고 돌아와 진주에 파견되어 와서 진주와 거창에서 1939년에서 1941년까지 선교사로 활동하였다. 1941416일에 철수가 극적으로 해외선교위원회와 PWMU에서 결정하여 그해 7월 호주로 돌아가 학사 학위를 마치고 밀두라 장로교회에서 디커니스로 섬겼고 1943728일 그녀는 오랜 펜팔이었던 코퍼럴 잭 로버츠와 결혼하면서 그 일을 그만 두었다.

-이후는 광복

 

 

p.61

제임스 메이틀렌드 스터키 목사(Rev. James M. Stuckey, 徐德基, 1911.4.14-2000.10.18)

진주 1935-1941, 부산 1958-1959/목사 선교사

 

스터키(James M. Stuckey)는 그의 부모가 북중국 런던 선교회 의료 선교사였으므로 베이징에서 태어났다. 멜번의 스카치 칼리지를 졸업한 후 오몬드 칼리지에 들어갔고 멜번대학에서 학사(B. A.)를 졸업했다. 그리고 오몬드 칼리지 신학부를 마치고 19341128일 장로교회 목사로 안수 받았다. 그리고 그 해 1222일 한나 진 제니 화이트만과 결혼하고 이듬해 한국으로 가서 3월에 도착했다. 진주에 배치를 받아 1935년부터 1941년까지 일제 말기 신사참배를 강요할 시기에 진주에 있으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였고 시골 교회를 순회하고 병원 원목 사역을 하였다. 그는 별명이 미스터 해결사로 행정과 사무용품에 유익을 남겼다. 그들 부부는 세 명의 자녀들, 테드, 마기, 리즈를 데리고 19409월 호주로 가서 아라랏에서 셋째 딸 자네트를 낳았다. 12년 동안 아라랏, 파크빌, 푸츠크래이의 교회들을 섬기다가 1953년부터 빅토리아 해외 선교 위원회 총무로 열정을 쏟았다. 19587월 경험 있는 호주 선교사들이 없을 때 한국에 가서 17개월 동안 부인은 호주에 두고 가서 선교회 재건을 도왔다. 자신이 호주장로교 선교부 상임총무로 선임된 것을 알고 195911월 호주로 돌아와 12년 동안 수고하고 1973년 빅토리아로 돌아와 교회를 섬겼다.

 

 

p.62

한나 진(제니) 스터키 목사 부인(Mrs. Stuckey, 제니 화이트만 양, Miss Janie 쨔호스무, 1912.1.31-)

진주 1935-1941/ 여 선교사

 

한나 진 화이트만은 발라랏레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광산 엔지니어였는데 제니가 다섯 살 때 멜번으로 이사하여 어머니는 곧 유방암으로 운명했다. 그녀가 틴턴 그래머스쿨(Tintern Girls' Grammar School) 학생 때 스카치 칼리지 학생인 남편 된 짐을 만나 193412월에 결혼했다. 제니는 큐(Kew)에 있는 유치원 훈련대학을 졸업했다. 남편과 진주에서 지낼 때 자녀를 키우며 마지막 해에는 유치원 책임을 맡았다. 호주로 돌아와서 PWMU의 적극적인 회원이 되고 원주민 선교 후원회 회장을 역임했다. 짐이 한국에 다시 갔을 때나 장로교 선교부 상임총무를 했을 때 가정을 떠나 있어 줄곧 남편 없는 결혼 생활을 보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