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6 16:08
인정-성화-행함
본문 : 막 9 : 23-24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 주소서 하더라
오늘 설교 말씀 가운데 인정이라는 말씀이 많이 사용되는데 여기에 인정이라는 말은 확실히 알고, 확실히 결정하고, 확실히 믿는 것을 가리킵니다.
기독교는 믿음의 도입니다. 믿음을 가지고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행하고 모든 것을 얻는 도입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은 귀신 들린 아이를 데리고 온 그 아버지와 주님이 서로 대화하신 것입니다.
그 아버지가 아이를 데리고 와서 아이의 병 증세를 말을 하고 '혹 주님이 하실 수 있거든 이 아이를 낫게 해 주옵소서' 그렇게 말을 했습니다. 그 말에 대한 대답을 예수님이 하실 때에 '할 수 있거든 이라는 그런 말을 네가 어찌 하느냐? 믿는 자의 그 믿음을 가지고는 못할 것이 없이 다 할 수 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이 말씀의 뜻을 잘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믿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 믿음이나 행동이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 말합니다. '믿는 자라' 하는 말은 '하나님을 따라서 마음도 몸도 움직이는 자에게는' 하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지 아니한 것을 자기 혼자 말하는 것은 하나님을 따라서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하나님이 구하라 하신 그것 외에 구하는 것은 제 마음대로 구하는 것이지 하나님을 따라서 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또 하나님께서 '이것 이것 이런 것을 네가 소망해라.' 하나님께서 '이런 것은 네가 나한테 소망해라. 내가 해 줄 것으로 네가 인정해라. 나에게 구하면 될 것으로 인정해라. 나에게 맡기면 될 것으로 인정해라.'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에 선포해 놓으신 그 범위 내의 것은 어떤 것이든지 순종하는 그 순종만 있으면 다 된다 하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에 약속하시지 아니한 그 약속 범위밖에 것은 그는 주님에게 구하는 것이, 바라보는 것이, 간청하는 것이 하나님 시키시는 대로 구하고 바라보고 간청하는 것이 아니고 제 마음대로 제 뜻대로 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거는 믿음이 아니고 하나님과 상관없는 독단 행위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믿는 자에게는' 그 말은,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에 여러 가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 약속을 하셨고 또 허락이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범위 내의 것을 하나님이 해 주시리라 바라는 것이나 또 구하는 것이나 의지하는 것이나 그 일을 이루려고 노력을 하는 것이나 그런 것은 전부 다 믿음이 됩니다. 그러나 그 범위를 떠나서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닙니다. 주님이 책임지지를 아니하십니다.
그러기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느니라' 하신 믿는 자라는 이것을 단단히 깨달아야 합니다. '믿는 자라' 말은 '하나님께서 신구약 성경에 선포해 놓으신 그 선포를 따라서 하는 자에게는' 하는 말씀입니다.
'따라서 움직이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 그 말은 그 선포해 놓은 범위 안에 것은 다 된다. 하나도 안 될 것이 없이 다 된다. 안 되는 것은 그 사람의 믿음이 모자라든지 믿지 않았든지 그것이지 거기에 범위내에 있는 그 종류를 자기가 인정하고 그 계약 조건대로 순종을 하면 다 된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신구약 성경에 우리에게 선포해 놓으신 모든 계약, 모든 조건, 그 모든 종류는 우리의 금생과 영원 무궁에 있어서 필요한 것은 다 그 안에 들었습니다.
그 안에 들지 아니한 것은 다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뿐입니다.
그런고로 주님이 우리에게-구약은 처음에 계약했다 하는 말이고, 신약은 그 다음에, 근경에 계약했다는 말인데-구약에 발표하고 신약에 발표하고, 신구약 성경에 발표해 놓으신 모든 종류와 조건들은 다 하나님께서 책임을 지시고 선포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이 안에 들어 있는 종류를 만일 우리가 인정 안 한다면 불신의 죄가 됩니다. 구하지 않아도 불신의 죄가 됩니다. 바라보지 않아도 불신의 죄가 됩니다. '암만 그렇지마는 어느 정도 되지 어느 정도는 안되지 않겠는가? 백 프로 다 되겠는가?' 이렇게 에누리하는 것도 죄가 됩니다.
개인별로 하나님께서 각각 다르기 때문에 그것은 개인의 현실이라는 것을 가지고 조정하십니다. 마치 운전 기사가 운전대 가지고 방향을 조정하는 것처럼 그 사람에게 해당되지 아니한 그런 종류의 것은 그 사람이 그것을 구할 수도 없고 얻을 수도 없도록 그 사람의 현실을 그렇게 만드십니다.
이렇게 계약을 선포해 놓으시고 이 계약된 것을 실상으로 이루기 위하셔서 우리의 현실 현실에 크고 작은 그 개별 개별의 모든 것을 주님이 주권적으로 섭리를 하십니다. 지극히 작은 것도 당신의 섭리 아니고는 움직여지는 일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신구약 성경에 약속되어 있는 것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그 약속이 그이에게는 해당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해당될 때에는 그것이 이루어지는 그 현실과 순서는 그 사람에게 닥치지 아니하도록 현실을 가지고 조정을 하십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신구약 성경에 계약되어 있는 것이라면 그것을 주님이 내게 해당된 구원으로 약속이 된 것인지 안 된 것인지 우리는 모르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믿어야 합니다. 전반적으로 바라봐야 됩니다.
믿고 바라보는 그것을 실상으로 만드는 데에는 현실을 통해 가지고 만들어지기 때문에 그것이 만들어질 수 있는, 계약이 실상으로 만들어질 수 있는 그런 현실을 주님이 만들어 주시지 아니하시면 그것은 만들어지지를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어떤 사람은 그 실상이 만들어지도록 현실을 만들어 주셔서 그 계약이.
만들어지고, 어떤 사람은 성경에 계약되어 있는 그 계약을 만들 수 있는 현실을 하나님이 주시지 않아서 그것이 만들어지지 않는 사람 있습니다. 그것이 이제 신구약 성경은 한 성경이지마는 각자의 구원의 요소와 분량과 종류와 형태는 각각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 것이 내게 합당된지 모르기 때문에 신구약 성경에 약속된 소망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인정하고 바라봐야 됩니다. 바라보면 주님께서 그 실상이 되게 하시는, 현실 조정을 하시는 거기 따라서 그것이 빨리 이루어지기도 하고 늦게 이루어지기도 하고, 구경만 하고 이루어지지 아니하고 해당되지 않는 것도 있고 그것이 하나님의 섭리 의지라 그럽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봐서 '아무래도 나는 목사로 세우지는 아니하시고 하나님이 장로님으로 세우셔서 일하게 하신 모양이다. 나는 외국에 가서 선교를 할려고 했는데 그 길이 열려지지 아니하는 것 보니까 선교로 일하는 것은 내게는 해당되지 아니한 모양이다, 하나님의 섭리를 보니.' 또 '나는 모든 것을 다 버리고 단신으로 집집마다 다니면서 일생을 예수님의 구원을 전하다가 주 앞에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이 섭리 하시는 것 보니까 이것이 내 길이 아니고 내가 가정에서, 한 교회에서 이렇게 주 앞에 헌신해서 사는 것이 내 길인가 보다' 이렇게 하나님의 섭리를 가지고 우리에게 전반적으로 계약된 계약을 개별 조절하는 것을 우리가 볼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다는 이 말씀은 그 말씀입니다.
주님이 이걸 바라라 할 때에 바라고, 이걸 구하라 할 때에 구하고, 이것을 소망하라 할 때에 소망하고, 네가 이것이 된다 할 때에 된다고 바라고, 그만 신구약 성경에 발표돼 있는 것은 우리는 전부 다 바라는 것이 든든하겠습니다.
전부 다 바라보고, 그리고 난 다음에 바라는 그것을 또 내가 행함으로 그 실상이 이루어지는데, 바라는 그것을 실상으로 만드는 거기 대한 행함을 아무리 할려고 해도 그런 기회파 형편과 사정과 현실을 주지 아니하시니 나 혼자 마음뿐이지 안 되는 일들도 있겠습니다.
그러면 '누구는 주고 나는 어찌 안 주는가?' 불평하지 말고, 하나님의 영원 전.
뜻이 눈도 있고, 귀도 있고, 입도 있는 것처럼 우리의 은혜도 각각 다르니, 내게 대한 은혜가 따로 있고 저 사람에게 대한 은혜가 따로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예정하신, 정하신 그대로의 구원이 이루어져야 되지 '저 사람 되는 것같이 나도 꼭 됐으면 좋겠다.' 하는 이것은 내 욕심이지 하나님 욕심은 아니니 그저 약속된 것을 다 믿되 '당신이 섭리하시는 현실을 따라서 내가 하나 둘 믿음을 지킴으로 약속된 구원이 내게 다 이루어지도록 이렇게 해야 되겠다' 하고 겸손히 주의 뜻을 찾아서 복종하는 사람이 복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이래서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약속으로 선포해 놓으신 그것을 인정하고 소망하고 또 현실에서 하나님을 따라서 움직이는 그자에게는 그자에게 대한 하나님의 예정과 하나님의 선포해 놓으신 구원은 그 사람의 모가치는 다 이루어진다. 그 사랑의 모가치는 이루어지지 아니할 것이 하나도 없다. 다 이루어진다 하는 그것을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이 약속해 놓은 것도 그것을 내 사욕 대로 고집하기 쉽습니다. 거기에 내 사욕을 버리고, 선포한 종류를 소망하는 것도 당신이 선포했기 때문에 다 우리는 소망을 해야 되겠습니다. 거기까지는 전부 다 소망해야 되겠습니다. 그 다음에 실상으로 이루는 데에는 당신이 섭리를 따라서 이리 가라 하면 암만 이리 가야 내가 원하는 구원이 이루어지겠는데 하나님이 이리 가라 하면 이리 가야 되겠고 그 당신의 섭리를 따라서 하나님의 법도를 순종 할 때에 그 사람에게는 그 사람에게 해당된 구원은 무엇이든지 못 이루어질 것이 없다, 다 이루어진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첫째로 하나님이 신구약 성경에 선포해 놓은 이 영육 금생과 내세에 있는 모든 하나님의 축복 모든 은혜 이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우리는 다 소망해야 됩니다. 다 소망해야 돼요. 이게 믿음입니다.
저 먼저 한번 보니까 O목사님 설교할 때에 '신구약 성경에 약속 돼 있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소망해야 이게 믿음이다. 이게 제일 큰 믿음이라.' 하는 것을 증거했습니다. 아주 권위있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 믿어야 됩니다. 다 소망해야 됩니다. 이러면 이런 계약을 신구약 성경에 계약해 놨으니까 그거 하나라도 '내가 약하니, 내가 죄인이니, 내가 부족하니, 내가 무식하니 되겠느냐?' 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따라서 자기가 움직이는 인정이 아니고 자기를 근본으로 해서 자기를 근거해서 '내가 이렇기 때문에 되겠느냐?' 자기를 근거하기 때문에 믿음이 아니요 그건 불신의 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가 아무리 무식해도 제일 유식한 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을 시킬 수 있습니다. 아무리 병신이라도 건강한 사람이 하는 일을 시킬 수 있어. 당신은 능치 못하심이 없습니다. 모든 걸 다 소망하고, 이거는 다 소망해야, 하나님이 소망하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예' 하고 소망을 하고, '나도 하나님이 주신 이거 다 될 수 있다.' 인정을 하는 그것이 첫째 믿음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는 실상으로 만드는 데에는 현실이 필요하고, 그 현실에 대해서 내가 어떻게 행할 것인가 하는 영감의 인도의 바른 깨달음이 필요하고 고 다음에는 내 행동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요 셋이 합할 때에 이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 말합니다. 이 믿음이면 모든 것이 이루어집니다.
주님이 가라는 현실을 주는데 오면 그거 어기는 것이 되겠습니다. '네가 죽어도 이 말은 해라' 하는데 말 안 해도 안 되겠고 하지 말라는 말 해도 안 되겠습니다. 그러면 현실마다 우리의 행할 것은 다릅니다. 하나님 법도는 다릅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섭리로 현실을 주실 때에 그 현실에 대한 깨달음과 행동을 할 때에 고것을 가리켜서 믿음이라 또 말합니다.
먼저 인정하는 믿음 가지고, 그 다음에는 고것을 실상으로 이루는 데에 현실에서 우리의 움직이는 그 행동의 믿음을 가지면 우리 각자에게 해당된 것은 못할 것이 없다, 다 이루어진다 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믿음에 대해서 간단하게 몇 가지만 좀 말을 할려고 합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 거기 귀신 들린 그 아이의 아버지가 와서 아이를 데려다 놓고 '귀신이 들려서 불에도 들어가고, 경련도 일으키고, 그저 죽을 고비를 자주 자주 하고 있습니다.' '몇 해나 됐느냐?' '벌써 오래 됐습니다. 이렇지마는 주님이 하실 수 있거든 해 주십시오.' 이렇게 말을 할 때에 주님이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능치 못할 것이 없는데 할 수 있거든이라는 말이 무슨 말이냐?' 그 환자의 아버지가 즉시 회개하고 '믿습니다. 내 믿음이 부족했던 것을 도와 주시옵소서. 내가 믿습니다. 믿습니다.' 그러면 그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그 믿음은 주님이 낫아 주실 수 있다 하는 것을 인정하는 믿읍입니다. 그 믿음은 인정하는 믿음입니다. 인정하는 믿음을 가졌을 때에 주님이 그 귀신을 나오라고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러면 귀신들린 아이의 아버지는 무슨 믿음 가지고 고쳐 주심을 받았는가? 인정하는 그 믿음 가지고 고쳐 주심을 받았습니다. 주님에게는 능치 못하심이 없지마는 본인이 인정 안 하면, 주님이 고쳐 주실 것을 인정하지 아니하면 주님은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인정을 할 때에 그 인정을 가지고 당신이 그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가 신구약 성경에 선포해 놓은 모든 소망 중에 우리가 인정만 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제일 많습니다. 내 행동을 가하지 아니하고 '아, 주님이 이 일을 이루어 주신다고 약속했으니 틀림없이 이루어 주시리라.' 이렇게 인정하는 믿음으로 인해서 이루어 주시는 그 종류와 양이 제일 많습니다. 우리가 인정하지 아니하면 당신은 일할 수 없습니다. 이거 인정한다는 거.
지난 주일날 '다섯 가지 젖을 빨아라.' 했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크신 분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인정은 천층만층입니다. 인정하는 것만치 그 사람에게 대해서는 심신의 정신과 태도와 행동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아무리 제가 옆에 사람이 '네가 일국의 대왕의 아들이다.' 이리 해도 인정이 안 되면 거기 대한 고자세가 안 나올 것이오. 정말로 대왕의 아들이라는 것이 인정되는 것만치 자꾸 자기는 커지고, 높아지고, 강하고, 담대해지고 그럴 것입니다.
그러기에 인정이라는 이것은 참 큰 힘을 가진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대해서 인정하는 것. 인정만 할 때에 그 인정 하나 가지고 하나님이 해 주시는 일이 많아.
요 귀신 들린 요 아이 나은 것은 '믿습니다.' 하는, '믿습니다.' 하는 그 믿음은 '인정합니다. 주님이 낫게 해 주실 것을 내가 인정합니다.' 그 말이오.
'인정합니다.' 그럴 때에 주님은 이 일을 하셔서 귀신을 쫓아내 주셨습니다.
또 요한복음 9장 6절로 7절까지에 보면 나면서 눈먼 자를 가지고 힐난이 있었습니다. 시비가 있었습니다. 주님이, 나면서 눈먼 자에 대해서 아무도 이러니 저러니 말하는 사람 없었는데 주님이 그 소경을 앞에 세우고 말씀을 마치시고 땅에 침을 뱉어서 진흙을 이겨 가지고 그 아이의 눈에 발랐습니다. 발라도 눈은 뜨지 아니했습니다. 주님이 그 아이에게 대해서 먼저 착수하시고 일을 하셨습니다. 이 일 해도 눈은 안 뜨입니다. 그 다음에 말씀하시기를 '네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할 때에 '예' 하고 가서 씻었습니다. '씻고 밝은 눈으로 돌아왔다.'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것은 주님이 진흙을 바르셔도 그것 가지고 안 되고 주님이 그 아이의, 그 사람에게 대해서 일하시고, 또 그 다음에 '네가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면 볼 터이니 가서 씻어라' 그 말씀을 듣고 인정하고 가서 씻었습니다. 그러니까 나았습니다. 이것은 인정하고 행동할 때에 그 일이 이루어졌다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처음에는 인정만 하면 나았는데 나면서 눈먼 자는 주님이 먼저 착수하시고 그 다음에 하필 실로암 못에 가서 씻어라 이렇게 명령하실 때에, '그러면 네가 보리라.' '예' 하고 가서 인정하고 씻으니까 보였습니다.
주님이 먼저 우리에게 대해서 일을 하시고 그리고 난 다음에 인정을 요구하시고, 인정을 요구하실 때에 인정하고, 그러고 난 다음에 행해라 할 때에 가서 행하고 이러니까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이 일하시고, 그 다음에 인정하고, 행동할 때에 그 일이 이루어졌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아무리 내게 대해서 무슨 착수나 간섭이나 은혜를 베푸신다 할지라도 그것 가지고 되는 게 아니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반드시 당신과 당신의 계약을 인정해 달라는 요청이 있습니다. 인정해 달라는 요청이 계실 때에 우리는 인정해야 됩니다.
인정하지 아니함으로 암만 주님이 '야곱아 안심하고 가라.' '안 됩니다.' 에서가, '형이 죽이려 하는데 가면 죽입니다. 안 됩니다.' '괜찮다. 가라' '안 됩니다.' '봐라.
저기 천군 천사가 저렇게 지금 옹호하고 있지 않느냐? 하늘 군대를 봐라.' '아이구, 그래도 안 됩니다' 인정을 안 하니까 주님이 그에게 평강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다가 마지막에 환도뼈를 맞아 가지고 병신이 됐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인정했습니다. 인정했을 때에에서는 인정을 했는지 안 했는지 모르지마는 인간의 심리계를 주권하시는 주님이 그 심리를 팩 틀어 버리니까 에서는 돌변해서 야곱을 대환영하는 사람으로 변화됐습니다.
그런고로 인정을 안 해서 낭파를 당했고 인정을 할때에 하나님의 능력이 역사할 수 있어서 에서는 야곱을 대환영했던 것입니다.
나면서 눈먼 자는 하나님이 먼저 착수하셔서 이래도 소용이 없어. 진흙을 발랐지마는 눈이 떨어지는 것 아니라. 그러고 난 다음에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면 볼 터이니까 가 씻어라' '예' 주님이 시키시는 데 가서 씻으면 낫을 것을 인정하고, 아무리 인정해도 또 안 가면 안 돼. 인정하고 인정한 대로 가서 씻으니까 봤습니다.
주님이 먼저 행하시든지 뒤에 행하시든지 우리 인정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귀신 들린 자도 그 본인이 믿는 인정, 인정은 믿는 거 아니오? 부정은 불신 아닙니까? 인정하는 인정을 가지고야 일했지 인정 없으면 뭘 못 하요. 인성이 없으면 안 됩니다.
또 요한복음 11장 39로 44절에 보면 나사로 살린 것이 기록돼 있습니다. 거기도 예수님께서 '돌을 옮겨 놔라' 마르다가 있다가 '죽은 지가 나흘이 돼서 이미 썩어서 냄새가 납니다. 냄새나는 송장을 열어 봤자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썩어 냄새가 납니다.' 주님은 더 일하지 못합니다.
이러니까 인정을 하도록 주님이 노력을 하십니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할 때에 마르다가 인정하지 않았던, 주님은 죽은 자라도 살릴 수 있는 이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회개하고 인정을 하면서 돌을 옮겨 놨습니다.
인정을 하면서 돌을 옮겨 놓을 때에 주님이 나사로를 불러서 살려 냈습니다. 또 살려내고 난 다음에 그냥, 뭐 살리신 분이 수건 그까짓 거야 무슨 문제가 있겠습니까마는 '수건을 풀어 주어라. 걸어다니도록 풀어 놔라.' 풀어 놓으니까 걸어다녔습니다.
거기는 주님이 말씀하실 때에 인정을 안 하니 일이 중단됐고, 인정을 하도록 주님이 여러 가지로 증거로 힘을 주실 때에 인정을 했고, 인정을 함으로 돌을 옮겨 놓는 행동이 생겨졌고, 거기는 인정만 해도 안 됩니다. 왜? '주님이 썩어 냄새나는 자라도 살려 줄 것을 인정합니다. 믿습니다. 틀림없이 소망합니다.' 암만 해 봤자 나사로는 살려내지 않습니다. 인정만 할 게 아니라 인정하고 네가 인정하는 그 행위 '돌을 옮겨 놔라' 돌을 옮겨 놨습니다. 인정하고 인정을 함으로서의 행동을 할 때에 주의 능력이 거기 왔습니다. 주의 은총이 왔습니다.
먼저 지존자,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의 대속, 하나님의 보증 이 다섯 가지를 한목 이것도 인정하고 저것도 인정하고 이 인정해서 이 다섯 가지가 한테 합해질 때는 폭발이 나옵니다. 다섯 가지가 합해질 때는 우리에게는 지극히 큰 욕망과 담력과 거기에 평강이 거기서 나옵니다. 그게 젖입니다.
마르다는 불신했다가 주의 말씀 듣고 인정하고 인정함으로 돌을 옮겨 놨습니다.
처음에는 거부하다가 지존하신 하나님을 인정함으로서의 합당한 행동, 지존자가 내 아버지 되심을 인정함으로서의 합당한 행동.
세계의 제일 큰 자가 나와 상대가 됐습니다. 그자가 나로 하여금 하나님 법을 어기라고 말합니다. 이럴때 나는 거기서 두려워 떨며 못 견디겠습니다. 지존자, 주권자 이분을 인정할 때에, 인정을 참 하면 인정한 결과는 그것이 작은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내게 두려움은 물러갈 것입니다. 주권을 인정할 때에, 요거 주님이 요렇게 하시는 것이라는 것이 인정될 때에, 사랑하는 주님의 손길이라 하는 것을 자기가 인정할 때에 기쁘고 즐겁고 반가울 것입니다.
행동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인정, 인정하고 행동할 때에 죽음을 살리는 능력이 와서 나사로는 살아났습니다. 그러고 난 다음에 또 인간 네가 할 것은 네가 해라.
풀어 놔라. 안 풀어 놓으면 그 나사로는 그대로 뭉쳐 가지고 못 나옵니다. 풀어 놓았으니까 다녔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계약된 이 계약은 참 지극히 큰 소망인데, 빠짐이 없이 구비한 소망이요 우리 각자들의 영원히 후회할 것이 없는 적당하고 합당한 제일 좋은 양이나 종류의 모든 구원인데, 이 지극히 큰 구원이 우리에게 이루어지는 데는 선포해 놓은 이 구원을 우리가 바라봐야 됩니다.
아무리 여기에 원수가 와 가지고 나를 대항할 때도 '하나님이 나를 돕는 자시니 네가 나를 죽이고 살릴 권리가 없다' 하는 것을 인정할 때에 그대로 됩니다.
다니엘이 인정하는 그 인정을 인해서 사자는 먹지를 못했습니다. 인정한 인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걸 입과 발톱을 막아 버렸습니다. 다니엘이 의심했으면 하나님은 그것을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꼭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지극히 큰 영육의 소망의 구원이 빠짐없이 다 어떻게 신구약 성경에 선포돼 있는데, 이것은 제일 중요한 것이 우리가 이 계약을 인정해야 됩니다. 인정하는 것이 제일 중요합니다.
인정하고 난 다음에는 하나님이 또 요렇게 행동하라 조렇게 행동하라 하는 것을 우리 몸으로 행동합니다. 행동할 때에 고것으로 끝나는 것도 있고, 인정하고 행동하고 나니까 또 인정하고 행동해야 되고, 인정 행동이 한 차례로 되는 것도 있고, 인정 행동이 두 차례 가지고 되는 것도 있고, 인정 행동이 세 차례 가지고 되는 것 있고, 여러 종류 있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모든 구원은 우리가 마음으로 사실로 인정하는, 확신하는 그 인정의 믿음과 또 당신이 시키시는 대로 움직이는 그 행동의 믿음 요 두 가지 믿음이라야 되어지지 믿음이 아니면 안 됩니다. 지극히 큰 능력이 우리의 인정이 없으면 일 못 합니다.
인정만 있으면 우리에게 행당된 거는 다 하십니다. 지금도 우리에게 해당되지 아니한 것, 우리 모가치가 아닌 것 그거는 내가 사욕을 가지고 월권적으로 하는 건 안 되지마는 하나님께서 내 몫으로 주신 것은 다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인정을 해야 하나님의 능력이 와서 일하실 수 있다 인정만 가지고 되는 것이 제일 많다. 내가 인정할 때에, 믿을 때에 인정할 때에 하나님이 우리에게 이루어 주실 구원이 제일 많습니다.
인정하고 내가 또 그 다음에 '요렇게 해라.' 두 번 순종하는 것, 인정은 하나님이 '이렇다.' 할 때에 우리 마음이 '예 그렇습니다.' 마음이 따라가는 것이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에 순종하는 것이 그것이 인정이요, 두번째는 우리 몸이 '이래라' 할 때에 그대로 시킨대로 하는 것이 두번째 믿음인 것입니다. 그런고로 이 두 믿음으로 능치 못할 것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기도) 인정의 믿음이 우리에게 없어지도록 의심을 갖다가 넣어 주어 과거 모든 좋은 기회에 지극히 귀한 구원을 다 빼앗긴 저희들입니다. 영계의 주께서 믿음은 능치 못하심이 없는 것을 다시 한 번 재인식시켜 주시는 주님! 주님의 약속하신 모든 약속을, 주님이 어떠하신 분이시며 어떤 것을 하신 것을 인정함으로 우리 자신들이 변화되는 실상이 증거되기까지 진실한 인성을 가지는 저희들 되게 하시고, 진실한 인정을 가짐으로 하나님의 그 광대한 계약의 상대자의 지극히 존귀함이 이루어지고, 약간 부분의 행동 순종은 필연적으로 이루어지도록 금년에 인정하는 마음의 믿음과 몸의 믿음과 믿음의 축복을 저희 식구들에게 더욱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