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구원
선지자선교회
1980년 8월 31일 주후

 

본문: 딤후 1: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이 구원의 시작은 하나님만이  홀로 계시고 영계도 이 우주도 창조하시기전 하나님의 마음 안에서 의지안에서  당신이 목적을 정하신 그 목적 안에 우리는 든자입니다. 우리가 있기도 전에 그  목적 안에 있는 그 구원을 우리가 받은 것입니다. 시작은 영원한 때 전부터  앞으로는 영원후까지 영원한 구원을 받은 우리들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두 가지 역사하시는 것을 가르쳐서 말하심인데  우리에게 모든 좋지 못한 것, 해로운 것들을 다 제거하시고 치료하시는 은혜와  또 우리에게 있어 필요한 모든 것을 구비하시는 은혜 이 두 가지 은혜가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이러한 이렇게 측량도 못할 지극히 큰 구원을 우리는  받아가진 자입니다.

 주일학교 반사 선생님들이든지 중간반 반사 선생님이든지 지권찰님들이든지  원권찰님들이든지 집사님들이나 장로님들이나 목사님들이 다 자기가 아무리  예배당에 왔다 갔다하고 또 예수님믿은 그 햇수가 오래됐다 할지라도 이 그것만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진리가 자기 속에 있어서 자기 지식이 되야 된 것만치 자기는  미혹이 많은 이 세상에서 벗어날 수가 있고 또 자기가 택해야 할 자기 길을  자기가 바로 택할 수 있습니다. 또 영감과 진리를 가져 자기 길이 아닌 것을  알아서 피하고 자기 길을 찾는다 할지라도 이길을 이것만가지고는 걸어가지  못합니다. 능력을 받아 가져야 비로서 아니라 하는 것을 안할 수 있고 또 자신이  걸어가야 할길을 걸어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성령과 진리라  하는데 성령은 하나님을 가라쳐 말하고 진리는 하나님의 뜻이인 참된 이치를  가르쳐서 말씀합니다. 이 두가지만이 영원성을 가졌고 불변성을 가졌고 완전성을  가졌습니다.

 그러기에 자신도 자기 속에 성령과 진리가 내주하는 것만치 구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자기를 위해서도 이점에 전심전력을 다 기울여야하고 또  어떤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인도해다가 놓고 자기는 깰줄을 모르고 그렇게 남의  인도만하고 자기 구원은 이루지 못하는 그런 사람있습니다. 자기 구원이  이루어진 것만치 다른 사람에게 구원을 전해줄 수가 있지 자기 구원을 이루지  못한 사람이 자기가 이루지 못한 그 이상 구원을 다른 사람에게 줄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우리의 구원은 점점 이루어 충만해져 가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믿은지 일년동안 구원을 잘 이루었다고 하면 다가 아닙니다. 그 다음에  이년, 삼년, 십년 점점 이루어가야 되는데 어떤 사람은 일년동안 이루어논 그  구원만 가지고 고대로만 현상유지를 하고 그 다음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닥쳐오는  현실 현실을 통해서 주시는 구원은 받아 충만해지질 안하고 자라가지를 아니하고  그대로 있는 사람있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언제든지 과거에 현상 그대로만 가지고 있고 성장을 안하는  그런 신앙을 가르쳐서 젊은이의 신앙이라 그렇게 상중했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보면은 있습니다. 또 자기가 이매 이루어 가지고 있는 신앙도 게을리해서 점점  게을리 해 가지고 파묻어 둡니다. 이러면 그 신앙이 마치 늙어서 키도 줄어지고  체중도 줄어지고 모든 지능도 줄어지는 것처럼 이런 신앙되는 것을 가르쳐서  늙은 신앙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 두 가지 종류의 신앙은 다 못쓸것입니다. 다 실패자를 말하고 아이의  신앙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장하고 계속 발달되고 이루어 나가는 구원자를  가르쳐서 아이같은 믿음을 가진 사람이라 그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사람을 구원할라고 참 물질도 애끼지 안하고 몸도 애끼지 안하고 시간도 애끼지  아니하고 자기의 사업하는 것을 애낌없이 다 기울여서 인간 구원에 기울이는  사람들 많이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어떤 사람은 자기가 혹 비가 와서 하루 놀라고 해도 의식주가  문제가 아니고 '오늘 하루 놀면 내가 지금 구원해야 될 이 생명들 구원하는  차비가 모자라니까 안되겠다. 오늘 어떻게 하든지 일터를 만나 가지고 일을 해야  될터인데 이기 문제다.' 그라면서 그렇게 성의 있게 하는 분들 있습니다. 그점에  대해서도 말들이 있습니다.

 '자꾸 이렇게 확대해 나가면 인간의 힘은 유한한 것인데 자꾸 이렇게 열이  스물되고 스물이 서른되고 이래서 차비를 대서 이래 해 나가게 되면 마지막에는  어찌 되느냐? 아무래도 이것을 어떻게 조절해야 되겠다' 하는 그런 말들이 많이  있습니다. 네, 조절을 해야 됩니다. 조절해야 되는데 하는 방식은 이렇게 하는  것을 하나님이 기뻐하실 줄로 압니다.

 자기는 뒤돌아보지 말고 어쩌든지 인간 구원에 자기의 심신과 자기 소유를 다  기울입시다. 다 기울이고 기울여서 그 상대방이 어떻게 되는 거기 대해서는  자기가 감당한 것만 감당하고 하나님께 맡길 것은 맡기고 다 기울여서 우리는  구원해서 우리가 차비를 준다고 해 가지고 그 학생들이 요새 토큰하나 그것만큼  그런 것은 아주 우리 나라 경제에서도 그렇게 돈으로 별로 여기지 않습니다. 아  자기 한 사람이 많은 학생들의 토큰을 감당하는 것은 힘이 들지만은 그 아이들이  그것을 그렇게 거액으로 여기지를 아니합니다. 그것때문에 끌려서 많은 시간을  거쳐 오기 싫은 것을 오는 것이 아니고 또 그렇게 교회오는 것 아닙니다. 그것이  다 하나님께서 시기가 가까왔고 구원이 때가 가까왔기 때문에 하나님이  역사하셔서 그래하는 것이지 결코 돈가지고 오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교회들은  토건뿐아니라 다른 매일 매일의 그 매주일 매주일마다 선물이 있는 교회들도  있습니다. 그렇게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해도 학생들이 안 모이는 곳은 안  모입니다. 그곳에 가 가지고 구원이 되지 안할 그런 곳은 하나님이 보내시지를  아니하십니다. 이런데 오는 것을 우리가 그렇게 깨닫지 못하고 헐하게 여겨서  값없게 여겨서 돈 몇십원가지고 하루 그 학생을 사서 이끌어 온다고 그런 잘못된  생각을 우리가 가지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그 역사하는 시기기 때문에 애낌없이  자기에게 있는 심신을 기울이고 자기에게 이매 적재되어 있는어 물질있으면 다  헐어서 인간 구원에 기울이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것이고 우리의  할 일입니다. 또 그럴때에 하나님께서 심으는 자에게는 심을 씨를 주고 양식을  준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하늘 나라와 하나님의 그 뒤에 대면할 그것을  생각하면서 장래를 위해서 무궁 세계를 위해서 만인간을 대할때에 미안코  부끄럽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쨎든 하나님과 영원을 위해서 하는 그런 것을  가르쳐서 심은다 그렇게 비유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런 기회를 놓지 말고  어떻게 되든지 자기에게 있는 것을 다 기울여서 안되면 뭐 만일 그렇게만 된다면  집을 팔아서 그저 근근 생활하고 있는대로 다 기울여서 인간 구원에 기울이는  것이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뜻입니다.

 그러고 그 다음에 우리가 할 일은 무엇인가? 할 일은 둘째 할 일은 우리가  그렇게 학생들을 인도해 오지만은 그 속에 진리가 들지 안하면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 어떤 사람 말 들으니까 몇해동안 그 사람을 위해서 기도도 했고  비가 오든지 춥든지 권면도 신방도 했고 이렇게 늘 방문해서 참 진액을  기울였지만은 그 사람이 예배당에 와가지고 예배드릴때에 하나님의 진리를  하나씩 둘씩 깨닫는 이면에는 귀를 열어주지 안했고 신령의 눈을 열어 주지  안하고 진리의 눈을 뜨고 진리의 소망을 가지고 이면을 하나씩 둘씩 그 마음속에  진리가 담기도록 마치 그릇에 기름준비하는 것처럼 그 마음에 진리가 담기고  그의 몸의 기능에 진리와 그 능력이 담기도록 이렇게 하는 일을 전혀 생각도  안하고 오면 다로만 이렇게 생각했는데 막상 그 사람이 몇해동안 교회다니다가  그만 형편을 따라서 할 수 없어 그 사람이 낙심하게 되고 교회 못나오게 되고 또  이사를 가게 되고 할때에 그때에 자기가 말하기를 '내가 이렇게 여러 해동안  수고를 하고 이랬는데 너거가 이사하게 된다고 해서 이사를 가야 되겠느냐. 또  형편이 어렵다고 해서 안 나와 되겠느냐.' 그런말로 암만해도 그 사람에게는  위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람이 몇해동안 그렇게 해도 교회와서 아주 진리를  배우지 못했는데 이 사람에게 그래 말하면 그러면 이분이 '날갖다가 몇해동안  협조해 주고 이렇게 사랑해 주고 한거기 내가 팔린 사람이냐. 그러면 내가  그것을 어떻게 뭘로 갚을 수 있으면 갚고라도 자유해야 되겠다. 아무 소용없이  거기 내가 붙들리고 내가 그렇게 할 수가 있겠느냐. 내 형편을 돌보지 안하고'  그 사람은 가야합니다. 낙심을 해야 됩니다. 그러나 평소에 하나님의 진리를  가르쳐서 진리가 그 속에 들어 있습니다. 그러면 자기에게 해당이 안된 진리는  남에게 대한 진리와 한가지기 때문에 그때는 잘 받아 드립니다. 그때는  정평정가가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자기 현실에 딱 당면되면 자기가  철통같이 '이거는 진리다. 이렇게 해야된다. 해야된다' 다짐을 한 그것도 현실에  봉착되 놓으면 '아이구 그렇게 해가지고는 안되겠는데 이면이 염려인데 저면이  염려인데' 해가지고 평소에 자기가 인정해서 기억했던 진리도 그 진리대로 해야  될 현실을 당해 어려울때에는 그 진리를 배반하기가 쉬운 것이 인생인 것입니다.

이런데 평소에 그 진리를 너놓지 안했으니까 뭘로 가지고 붙들겠습니까? 예.

그것은 이것입니다. 그러면 그 진리와 네가 지금하는 행동은 어찌되느냐? 먼저  진리와 배치되는 자기행위와 자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렇지만은 할 수가  없습니다. 할때에는 그러면 그것은 알고 그렇게 하지 못하는데 대해서는 어떻게  할 수가 있겠느냐? 나는 기도하고 너도 생각해 봐라. 그 진리가 속에서 역사해  가지고 그 사람이 그 진리의 돕는 힘으로 아무래도 이래서는 안되겠다 하는 그  마음을 작정하고 그렇게 할라고 자기가 힘을 쓸때에 인간으로 해결할 수 없는 그  모든 어려운 걱도 박차고 해결을 짓고 이기고 남음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또 주일학교 반사들도 꼭 같습니다. 자기네들이 붙들어 6년동안을 6학년  졸업하기까지 아무리 붙들어 봐도 그 속에 진리가 들어있지 안하면은 다 그거는  헛일입니다. 속에 생명이 들지 안했으니까 생명이 안들어 있는 알은 요만밖에  안되지만 생명이 들어 있기 때문에 거기서 부화가 되서 새끼가 나옵니다. 여  벌거지 알을 낳아 놓은걸 보면은 눈에 안보이는 알도 그 속에 생명이 들어  있으면 그게 부화가 됩니다. 아무리 큰 오리알이라도 속에 생명이 없으면 그거는  진리가 그 속에 들어 있지 안하면 졸업맞는거와 함께 그 아이도 어짤수 없어 다  세상으로 나가고야 맙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심신이나 물질이나 있는대로 애낌없이 투자하십시오. 우리가  오늘 떠날지 내일 떠날지 모르는데 우리가 가진 것 언제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인간 구원에 애낌없이 투자하는 이 사람이 막쥐먹지 안하고 도덕맞지 안하고  심으는 사람입니다. 심으는 자에게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을 계속 준다  했습니다. 이거는 의의 열매를 많이 맺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하신다고  했습니다. 주시는데 이것을 바로 써서 의롭게 쓰고 나니까 또 하나님이 주시니  의롭게 쓰고 이래서 의의 열매를 많이 맺도록 주니까 의롭게 쓰지 안하고 자기  사욕과 사리만 위해서 쓰기 때문에 하나님이 다시 주지 안하니 그 사람은 의의  열매를 맺을만한 그것을 실수하고 맺지안할때 그 다음에 더 주지 아니하니까  의의 열매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니까 있는대로 다 기울여서 인도하는데  어쨎든지 뭐 토건을 한번 주든지 두번 주든지 해서 다 인도하십시오. 하고 그것  뿐이라면 다 허공을 치는 것입니다. 헛일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인도해 놓고 그  사람의 심정 속에 하나님의 진리와 하나님과 이 영감과 진리를 그 속에 넣어서  심으도록 노력만하면 우리의 투자가 결단코 헛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해서 6년  동안에 그 속에 진리가 아 내주해서 그 진리가 그 아이를 도와서 그 아이를  깨우쳐서 그 아이가 깜깜한 어두운 세상에 어떤 세력이 와서 덮어도 일시동안  덮히서 넘어졌지 그 속에 있는 생명으로 다시 떠들고 일어 날 수 있는 다시 거서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설 수 있는 인간의 비참을 알고 인간의 영원을 알고 인간의  허물을 알고 이렇게 그 속에 생명이 들어 역사하도록만 했으면 결단코 그 일은  헛되지 않습니다. 이렇게 하면 차차 진리가 자라면 그 아이는 한 밀알이 썩었을  때에 거기서 움이 나가지고 백개도 육십개도 삼십개도 더 맺는 것처럼 나 하나가  그렇게 해서 했다면 그 학생이 또 진리를 깨닫아 자기도 자기의 미약한 힘이지  마는서도 자기와 자기있는 힘 다 기울여서 주님이 피흘려 구속하려는 이 역사에  동참해서 자기도 인간을 참된 사람 만들기 위해서 인간을 옳은 길로 돌아오게  해서 인간이 진리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양심대로 살도록 하기 위해서 당장  현실만 볼기 아니라 인간의 영원 부궁을 생각하면서 살기 위해서 자기는 모든  하나님과 모든 만물을 상대할 영원한 장래를 생각할 줄 아는 이 사람이 되어  자기도 자기 나름대로 차차차차 여로분들이 하는 그 걸음을 뒤따라 올 것입니다.

그러면 그들이 애터지지 마는서도 지금은 그렇지만은 나중에 토건을 안할라고  하는 때도 올것이요. 또 자기가 힘껏해서 다른 그 못쓸 모든 불의의 그 남용을  다 절제해서 자기 감당하고난 다음에는 다만 한 학생이라도 감당할라고  할것이요. 그것이 자라서 장성하여 사회인이 되어서 사업가가 되면은 자기의  전사업은 표본운동이에서 주를 위해서 인간 구원을 위해서 기울이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이런고로 우리는 영원성을 가진 우리기 때문에 우리는 일시만 보고 그렇게  근시자와같이 단편의 생활을 단편의 그 견해를 단편의 평가를 가지지 말고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얻은 사람이기 때문에 영원한 사람입니다.

우리는 영원히 산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도우심을 받을 우리들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우리는 생명도 죽지 안하는 영생하는 생명을 우리가 받았고  우리가 이 몸을 가지고 있지마는서도 이 몸도 앞으로 영원 무궁토록 살아도  늙거나 쇠해지거나 낡아지지 않는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변화를 받아서 우리가  부활을 할 것이고 그때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능 마음의 기능이나 마음의  기술, 몸의 기술, 마음의 지혜, 몸의 지혜, 마음의 능력, 몸의 능력 이 기능 이  기능은 다 죽은 것입니다. 이것 다 썩은 것입니다. 다 없어질 것들이요. 망할  것들입니다.

 이러나 이것을 이것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영생의 기능을 만들었습니다. 영생의  기능을 우리에게 예수님께서 대신해서 영생의 기능을 만들어주어 우리의 심신은  영생의 기능을 가졌습니다. 영생의 기능을 가졌습니다. 영생의 기능을 가진  이것이 우리의 기능입니다. 영생의 기능을 똑똑히 기억하십시오.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기능을 을 우리가 가진것이 우리 기능이요. 우리  기능은 영생의 기능을 가졌는데 안죽으면 됩니다. 안죽으면 됩니다. 둘째  사망으로 안죽으면 됩니다. 우리가 이 영생을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입혀주셔 영생을 입은 우리의 기능이 있는데 이 기능이 현실 현실을 당할때에  우리의 기능이 우리의 기능이 진리를 배반 안하면 됩니다. 우리가 진리를 배반  안하면 이 기능은 벌써 영생가진 기능이 자기로서는 자기 전투를 이겼습니다.

자기 분담의 십자가를 지고 이겼습니다. 우리가 현실에서 우리의 기능이 진리를  배반치 아니하고 하나님을 배반치 아니하면 예수님이 구속으로 영생을 입은 우리  기능을 아무도 죽일 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실에서 영생입은 기능이지만은 제가 첫째 에덴동산에서 죽은  것처럼 제가 그 기능이 진리를 배반하면 둘째 사망으로 죽습니다. 하나님을  배반하면 둘째 사망으로 죽습니다. 우리가 죽은 것이 살아난다고도 성경에  말씀했고 산것이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한다고도 말씀했습니다. 이것은 다  같은 말입니다. 예수님이 대속하셔가지고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은 이것은  미완성이 아닙니다. 완전한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주셨는데 이 완전한  영생을 받아 가지고 자기 현실에서 영생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시험이라 말합니다. 영생 생활을 하는 것입데 현실에서 영생 생활을 하는 것이  자기 생활인데 자기 생활인데 이것을 가르쳐서 구별해 두십시오. 요것을  가르쳐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라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의 자유하기를  만물이 탄식하면서 고대한다. 자유라는 것은 제 마음대로 사는 것이 자유요. 제  소원대로 사는 것이 자유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의  기능이 진리를 배반치 아니하고 영감을 배반치 아니하고 하나님과 진리대로 우리  기능이 사는 것이 이기 자유입니다. 이기 자유요. 이런데 이 자유를 하지  아니하고 그 옛사람에게 미혹받아 가지고 자기 아닌 자기에게 자기를 착각해  가지고 그놈이 자기인줄 알고 그놈대로의 몸. 그놈대로의 마음. 이래가지고  그놈대로의 마음인줄 알고 그놈대로의 몸인줄 알고 그놈하자는 대로 몸과 마음이  함으로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해서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은  자유를 뺏긴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영원은 하나님이 영원하시고 진리만이 영원합니다. 하나님과  진리만이 영원합니다. 영생은 하나님의 것이요. 영존은 진리의 것입니다.

 이러기에 진리와 하나가 되어 진리와 하나되어 진리를 떠나지 안하면은 그  영존성을 해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떠나지 않하여 하나님과 결합되서  있으면 그 생명을 아무도 뺏았을 자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하나님께로 난자가 우리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만지지도 못하고 영원히  사망하지 않는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난자라 말은 진리를 가르쳐서 말하고  하나님께로서 난자는 신인 양성 일위의 우리의 구속을 가르쳐서 말합니다.

이것을 성령과 피와 물이라 이 세 가지는 하나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진리와 결합되면 그 존재성을 아무도 변동 못시킵니다. 하나님과  결합되면 그 생명성을 아무도 변동 못합니다.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그  말은 자기의 가진 소유를 말합니다. 자기의 가진 소유. 그 소유를 진리와 영감으  ㄹ배반치 안하고 진리와 영감대로 그 소유가 움직였다면 그 소유가 활동을  했다면 이는 벌써 천국의 것이 되어져 이것은 세상이 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그는 동록 슬지를 안한다. 동록이라 하는 것은 주변의 썩은 것을 인해서  그것이 곰팡이 펴 가지고 썩는 것을 가르쳐서 동록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주변에  부패를 인해서 부패해지는 것을 가르쳐서 동록이라고 하는 것인데 동록 쓸지  않는다 그말은 이 역사 세계와 영계에서 죄악이 들어서 많은 것들을 썩였는데 이  죄악으로 말미암아 다시는 상해함을 받지 않는다. 그것을 가르쳐서 동록 쓸지  않는다. 좀먹지 않는다. 그말은 시간이 가면 모든 것이 다 좀이 나가 다  썩어지는 것인데 좀이 안썩어도 그게 삭아지는 것인데 그 다 쇠퇴해져되는  것인데 그것을 가르쳐서 좀먹는다. 영원무궁토록 가도 시간이 지나감에 따라서  조그만치라도 쇠해지지 않는다 하는 것을 가르쳐서 동록쓸지 않는다. 아 좀먹지  않는다. 죄악으로 말미암아 부유하지 않는 것을 가르쳐서 동록 슬지 않는다.

시간으로 말미암아 쇠해지지 않는 것을 가리쳐서 좀먹지 않는다. 도적이  구멍뚫고 도적질 하지 못한다. 그는 그 존재를 아무도 해하지 못한다. 그것을  가르쳐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것이 다 영원성의  것입니다. 우리는 단단히 기억합시다. 껍데기로서 우리의 몸도 예수님이  구름타고 오시면 살아 있는 사람이든지 죽은 사람이든지 영원한 몸을 입습니다.

영원히 가도 쇠하지도 낡아지지도 더러워지지도 썩어지지도 늙어지지도 죽지도  않는 이 몸을 우리가 입습니다. 이걸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영원한  구원으로 구원하셔서 우리의 이 몸이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영원한 몸으로 부활을  받습니다. 지금과 같은 이 피와 살이 아닙니다. 영원한 몸으로 우리가 부활을  받습니다. 우리 늙지 아니할 몸, 쇠하지 아니할 몸, 더러워지지 아니할 몸,  병들지 아니할 몸, 죽지 아니할 몸, 이 시공에 제한을 빧지 아니하는 몸. 이  몸으로 우리가 부활합니다. 우리가 지금은 이 몸은 썩는 몸이요. 주는 몸입니다.

쇠할 몸입니다. 이러나 지금은 이 몸 가지고 썩지 않는 것을 마련하고 쇠하지  않는 것을 마련합니다. 늙어지지 않는 것을 마련합니다. 마련하는 것은 이 고기  덩어리가 마련이 아닙니다. 이 속에 기능 마련입니다. 이 속에 기능을 썩지  안하고 쇠하지 안하고 낡아지지 안하고 더러워지지 않는 그 기능만 지금 영원한  것을 마련합니다. 영생하는 것을 마련합니다. 마련하고 이다음에 예수님이  재림하시면 우리의 몸은 영생하는 몸으로 다 부활합니다. 이것을 택한 자면  믿든지 안 믿든지 받습니다. 그러나 기능 구원은 이 기능 구원은 이것을 믿지  안하면 기능 구원에 해서 미혹 받아 가지고 둘째 사망의 해를 받게 됩니다.

 우리의 마음도 영원한 마음입니다. 영원한 마음으로 세상을 뜰 때에 영과 함께  갑니다. 영원한 마음. 이 마음이라는 이 심체. 마음이라는 이 형체. 이것은  우리가 죽을때에 우리 영이 이 마음이라는 이 형체를 입고 영계로 갑니다.

 그러기에 이 마음은 죽을 때에 이 마음이 영원히 죽지 아니하는 노쇠하지  안하는 변하지 안하는 마음으로 변화를 입어기지고 하늘나라 갑니다. 아 그러나  가되 그 기능을 자기가 현실 현실에서 주님이 구속해 주신 이 구속을 입은  기능이 이 기능이 현실에서 다시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치 아니하고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치 아니하고 하나님과 진리를 떨어지지 안하면 그 기능은 영생을  가졌습니다. 다시는 그 단번입니다. 단번에 이겼기 때문에 다시는 그 기능을  시험할 자도 없고 그 기능을 싸울자도 없습니다. 그 기능으로 더불어 싸울  상대는 완전히 정복했습니다. 아 그러나 그 현실에서 이 기능이 예수님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영생의 이 은총을 입었는데 이것이 다시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하면 범죄하여서 다시 죽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둘째 사망의 해라고  말합니다. 이러기에 이 현실은 죽을 것을 살려내는 죽을 것을 살려내는 것이요.

우리가 이 죽은 이것이 갖다가 다시 살아난 것이라. 죽은 것이 살아난 것이 다시  죽지 아니하고 영생한다는 것은 내부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 성경에는 우리를 알아듣기 쉽도록 그 "좁은 길로 들어가라 거는 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고 사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평탄하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인간 말로 말하는 것입니다. 사망으로 인도하는 그 길은 그 길이 인간이 볼때에  평탄하고 가는 사람 많지만은 실상 그 길이 험하기가 일보도 걸어갈 수 없는  험한 길이요. 좁은 길입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인간이 볼때에는 좁지만은  그 길은 구불러가도 됩니다. 생병으로 가는 길은 거는 사망이 없습니다. 그 길은  넓기가 끝이 없는 무한의 길입니다. 넓기가 인간 말로 하는 그런 것을 우리가 또  깨닫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현실은 이 죽은 것이 생명으로 옮겨진다 하는  것은 외부를 말합니다. 이매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살아난 것이 살아난  것이 다시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안하면 된다하는 이것은 내부를 또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 이 모든 심신이 살아났기  때문에 이 다음에 몸이 부활하고 마음은 죽을때에 부활해 가지고 가고 이 기능은  현실 현실에서 이 죽은 이 기능으로 작용하고 있는 이것이 자신이 모르게 오묘한  은밀한 법칙에서 하나님의 대속으로 인해서 하나님의 법적으로 살았고 실상은  살았으나 이 외부적은 죽어있는데 이 생명인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은 진리와  영감의 이 힘은 이매 얻은 이것이 이것을 이기면 완전히 살아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아 영원한 것으로 갖추어 있습니다. 우리가  지식도 영원한 지식이 이것이 우리의 지식입니다. 우리의 지식인데 영원한 지식  이 지식을 내 지식으로 삼지 아니하고 이 거짓된 지식을 내 지식으로 삼아 있기  때문에 이것은 일종의 미혹이요. 옛사람에게 속해서 자기 생활 아닌 이 자기  생활 아닌 헛생활, 자기 지식 아닌 남의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깨라 말은 깨어 있으라 말은 이것은 그 영생하는 그 참된 것을 갖추어  가지라 그말이요. 잔다말은 이것은 영생의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이것이 영생의  것을 가지지 못하고 사망의 것을 가진 자와 같이 되어 있다. 생명은 있는데  일어나면 되는데 이기 일어나지 안하고 자니까 죽은 자와 꼭 같은 그 행위를  하고 있다 하는 그것을 가르쳐서 자는 자라 그렇게 말씀한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지식도 영원한 지식이 우리 지식입니다. 이 지식이 우리  지식이 되어 있습니다. 영감의 지식, 진리의 지식, 하나님의 지식 다시말하면 이  지식이 중생된 영의 지식이 되어 있습니다. 또 구속받은 우리의 지식이 되가지고  있습니다. 이런데 이 지식을 우리 지식으로 쓰지 안할때에 이 지식과는 그 쓰지  안한 부분은 상관이 없습니다. 이 지식을 우리 지식으로 쓸때에 쓸때에 새로  받는기 아니고 우리 지식으로 쓸때에 우리 지식으로 쓰니까 미혹을 버려서 그  지식은 미혹시키는 지식은 물러가고 이 지식이 우리의 지식으로서 허락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받은 사람이요. 영원한 생명을 가졌고 영원한  몸을 가졌고 영원한 마음을 가졌고 영원한 기능을 가졌고 영원한 지식을 가졌고  영원한 나라를 가졌고 영원한 능력을 가졌고 영원한 지혜를 가졌고 영원한  행복을 영원한 평강을 영원한 처소를 영원한 영광을 영원한 직책을 가진 것이  우리들입니다. 다 영원성을 가진 것이 우리들인데 이것을 가지고 이 세상을  시험하는 세상입니다. 이 세상은 시험하는 세상인데 자기가 이 영원성을 가지고  영원성의 것을 가지고 현실을 살때에 영원성의 모든 것을 가지고 있는 이것으로  살 수도 있고 이것을 배반할 수도 있습니다. 마치 에덴동산에서 아담, 해와가  하나님을 배반한 것처럽 우리도 배반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강이요. 육체의 생각은 사망이라" 그말은 죽은  자에게 사망이 무슨 필요가 있습니까? 죽은 자에게 사망이 필요없습니다. 죽은  자는 사망이 살았기 때문에 사망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것을 가졌기  때문에 우리에게 사망이 해당되지 죽은 자들에게는 그들에게는 벌써 죽었기  때문에 사망의 것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우리만이 지금 사망합니다.

 이러기에 이 사망을 가르쳐서 둘째 사망의 해라. 예수님의 구속을 입지 안한  사람은 벌써 사망한 자들입니다. 죽은 자들이요. 너희는 죄와 허물로 죽었던  자라 했습니다. 우리는 다 죽었던 자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으로 다시  살리우심을 받았느니라 했습니다. 또 너희들을 생명에 속하였느니라고 했습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져 있다고 했습니다. 이러기에 있는 힘을 다쓰면 뭐라 그  했습니까? 마음과 생명과 힘과 뜻을 다하면 죽도록 충성하면 있는 힘을 다쓰면  네가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않는다.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않는다. 또 이걸  다하면 뭐라 했습니까? 영생한다. 영생한다. 산 자에게 영생있지 죽은 자는  부활입니다. 죽은 자는 부활이요. 산 자에게 영생있소. 산 자가 영생한다. 산  자가 영생한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 살았기 때문에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산 자에게 사망의 해가 있지 죽은 자에게는 사망의  해가 될 거 없습니다. 사망의 해가 이미 받았기 때문에 사망의 해를 다시 받을게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구속으로 사죄를 입었습니다. 사죄는 영만 입은 것  아닙니다. 몸도 입고 있고 마음도 입고 있고 칭의도 입고 있고 하나님과 결합도  입고 있는데 있는데 이것이 현실 생활에서 죽도록 충성한 요것으로서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준다. 생명의 면류관이라. 면류관이라 말이 무슨 말이요?  면류관이라 말은 이겼을때에 저 구라파 지역에서는 이겼을때에 이 풀로 만든  면류관을 씌워줍니다. 상을 주지 아니하고 풀로 만든 면류관을 씌어 주요.

이러기 때문에 면류이라 말은 이겼다 그말이요. 이긴 표를 면류관으로 쓰입니다.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시리라 그말은 생명이 승리하는 승리를 네게 주시리라.

생명은 뭐입니까? 우리 안에 있는 생명입니다. 이러니까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살았습니다. 우리는 살았는데 안 죽으면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치 아니하면 됩니다. 이랄라면 있는 것 다해야  됩니다. 무엇이든지 하나라도 가지고는 이 생명이 승리하는 승리를 못합니다.

이러기에 "사로잡는 자는 사로잡을 것이라" 무엇이 잡으면 그것으로 인해서 잡혀  들어간다. 뭣이든지 잡으면 그것으로서 매겨 들어간다. 매겨들어간다.

 그러기에 우리는 영원한 구원을 얻은 자입니다. 인적 요소 전부가 다 영생성을  얻었고 영원한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우리에게 주셔서 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 구원을 받았는데 우리가 이 구원을 가진 자 되야 됩니다. 이  구원을 가진 자 되야 되는 데 이 구원을 우리가 가지고 뺏기지 안할라고 하면  모든 것을 다 해야 뺏기지 안하고 죽도록 충성해야 이 구원을 뺏기지 아니하고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다 생명에 속한 것인데 산 것인데 우리가 받은 구원은 다 산  것에 생명에 속한 것인데. 생명의 면류관 너희들에게 주시리라. 너희들이 생명이  승리한 그 승리를 얻게 되리라. 생명의 면류관은 언제 얻습니까? 생명의  면류관은 현실 현실에서 얻습니다. 어째가지고 얻습니까? 죽도록 충성해서  얻습니다. 그게 뭐입니까? 그게 영생입니다. 자기에 있는 것을 다해서 다 하지  안하면 이 구속을 빼앗기게 됩니다. 왜 그런고 하니. 왜 그런고 하니. 이것이  예를 들면은 이 하나인데 이 하나인데 이것이 이 사망에게 사망에게 반치  물려있으면 반은 사망에게 물려 있습니다. 반은 사망에게 물려 있습니다. 반치  사망에게 물려 있으면 이것은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살았든지 죽었는지  저리가면 죽을 것이고 이리오면 삽니다. 응. 완전히 살았다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만일 사망에게 죄악에게 반이 삼켜 있어도 반이 의롭게 되가 있으면 이거  아주 죽었다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사망에 조그만치라도 조그만치라도 사망에  물리가지고 있으면 이것은 완전히 살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아직까지 완전히  살지 못했습니다. 이러기에 아 사망에서 완전히 빠져 나와야 완전히 사는  것입니다. 사망에서 완전히 빠져 나와야 다시는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않습니다. 사망에 완전히 나와야 사망에게 무려있고  사망의 것이 되어 있는데 생명에게 속한 것이 연결되어서 연결되어서 이것이 살  수 있고 산 것이 외어 있지만은 죽음에도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이 사망을  완전히 작별해야 완전히 산 것이 되어지지 그렇지 안하면 아직까지 사망에 물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명은 있지 마는서도 깔딱거리니까 또 죽을 수도 있다  그말이요.

 이러기 때문에 이것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하다하고 뜻을 다하는  것이 어따 다한다 말입니까? 하나님과 진리에 다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과  진리의 이것이 다 연결되어서 하나님의 것이 되고 진리의 것이 되고 하나님과  진리와 연결이 다 되버리고 남는 것이 없어야 사망의 연결이 끊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가 아니고는 안됩니다. 다가 아니고는 될 수가 없소.

 그런고로 우리는 네가 모든 걸 다해야 영생을 얻는다. 죽도록 생명까지 돌라면  생명을 다 기울여 해야 생명이 승리하는 승리를 한다. 그러면 자기 현실에서  자기 현실에서 자기를 대적하는 것을 그것을 다 이기야 얻습니다. 그거는  하나님께서 어릴때에는 약한 것을 그의 투쟁의 대상으로 삼으시고 장성하면 점점  큰 것으로 삼으시는데 어쨌든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투쟁의 대상으로 만들어준  적은 자기에게 해당된 적은 다 이겨서 완전히 거기서 탈피해가지고 거서 완전히  그것을 배반하고 완전히 그 진리와 하나님에게 소속이 되야 그때 살아 납니다.

이것이 그래 가지고 점점 강해져서 마지막에는 자기가 노력해가지고 온 세상것을  다 이겼다면 그는 다 승리한 것이요. 자기에게 있는 요소가 다 살아났지마는서도  이것을 이기다가 지다가 하기 때문에 그 기능이 영생을 얻은 것도 있고 영생을  얻지 못한 것도 있습니다. 이것을 가르쳐서 풀과 나무와 짚으로 지은 집은  건설은 했지마는서도 난중에 진리로 심사할 때에 세상은 떠날 때에 모래위에  지은 집은 여러 가지 대적에 마찰이 있을 때에 거기 피해를 당한다. 이 반석위에  지은 것은 피해를 당하지 않는다 하는 것으로 비유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영생을 가진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나와 내 요소는  다 영생을 가졌습니다. 영생을 우리가 새로 얻을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영생을  가졌는데 영생을 빼앗기지 않으면 됩니다. 영생을 빼앗기지 않으면 됩니다. 영은  영원히 빼앗기지 아니할 것으로서 완전히 영생으로 승리했고 우리의 이  심신이라는 것은 이것은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가졌지만은 이것이  영생가진 자로 자유를 못하기 때문에 자유 못하고 다시 꺼꾸러진다 그말이요.

이러기 때문에 만물이 하나님 아들들의 자유하는 것을 고대하고 있어. 이 심신이  영생을 가졌지마는 영생 가진 대로 살지를 못하고 원수에게 미혹받아 가지고  다시 영생을 배반하고 스스로 제가 사망을 자취할 수 있는 자유성이 있기 때문에  이것을 인해서 만물들이 탄식을 하면서 고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영생을 가진 자라는 것을 알아야겠고 또 영생을 가졌으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우리가 며칠 살림이라도 우리가 거창집회갈 때에는 한  사오일동안 그 가운데서 생활할터인데 우리가 준비한 것은 하루 산줄 알고 하루  생활할 것을 준비 해놨다가 만일 그 돈이 떨어지든지 양식이 떨어지든지 뭐  식물이 떨어지면 어짜겠습니까? 꼭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을 얻었습니다. 영원한 구원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다  영원성을 가진 것이라야 무엇이 조그만한 지극히 작은 것도 내게 필요한 것은  그것은 천년 있다가 없어질 것도 안됩니다. 만 년 있다가 없어질 것도 안됩니다.

영원성을 가진 것이라야 내게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내가 영원한 구원을 가진 자라. 나는 영원자라. 나는 영생을  가진 자라. 나는 영원히 살았어. 안죽으면 되. 아무도 죽일 자 없어. 내가  스스로 죽지 스스로 죽이지 자멸하는 것뿐입니다. 자멸케 하는 것은 유혹을 받는  것 뿐입니다. 이렇게 살고자 하는 자는 생명을 뺏겨.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가  이것을 자꾸 익혀야 되겠습니다. 나는 영생을 가진 자라. 나는 영원한 자라.

하나님의 구원은 내게 영원하다. 하나님의 구원은 내게 영원하다. 나는 영생을  가진 자라. 나는 영생하는 몸도 가졌고 영생하는 기능도 가졌고 나는 영생하는  몸도 가졌고 영생하는 기능도 가졌고 영생하는 모든 것을 가졌습니다. 영생하는  것은 영생을 가진 영생하는 것을 가졌는데 내가 어리석어서 이 썩을 것으로 다시  되돌아가고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해서 다시 사망하게 되는 이런 일을 하지  안하도록 우리가 명확하게 알고 우리 자신을 언제나 똑똑히 알고 그러고 난  다음에는 이제 자기의 처소도 알아야 되겠고 자기의 소지품도 알아야 되겠고  자기의 필수의 것도 알아야 되겠습니다. 이래서 우리가 좀 다른 사람이 미친  사람같이 볼지라도 우리는 이것을 똑똑히 우리 마음에 배나야 되겠고 우리 몸에  배나야 됩니다. 이것은 아무리 죽음이 와도 자기는 그 죽음이라는 죽음이 영생을  가진 자기를 그 해할 수 없는 예수님이 그랬습니다. 몸을 그들이 토막토막  어떻게 한다해도 자기의 생명은 그들이 해하지 못합니다. 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의 마음의 기능 속에 가득히 담아 있어야 됩니다. 우리의 몸의 기능 속에  가득히 담아 있어야 됩니다. 우리는 영생을 가졌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그래도  죽이지 못합니다.

 여러분들 혹 봤는지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인데 자기가 한번 보니까  자기가 죽었다가 그 이웃 사람들이 오디만은 우는 사람도 있고 또 이렇게 옷을  입히 가지고 묵으더니 마는서도 널에다 넣어 가지고 여 가지거서 메고 와서  구덩이를 파고 묻는데 그 자기는 따라 다니며 구경을 했다 말이요. 자기는 여게  있는데 보니까 자기를 죽었다고서 묵고 어짜고 하는데 분명히 자기라 하고  자기는 자기인데 묻는데 자기는 여게 살아있어. 살아있어. 그것을 다 묻고 다른  사람은 다 가는데 자기는 그걸 보고서 그 나는 살아 있는데 죽었다고 저래 묻고  모두 저래 간다. 이렇게 하다가서 그 환성을 끝냈다고. 응. 자 그런 환상 본  사람 여 없습니까? 본 사람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그런 꿈꾼 사람 없습니까?  그런 꿈꾼 사람 있으면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까? 없습니까? 아닐긴데 거의 다  봤을긴데 안봤소. 나도 봤소. 안봤습니까? 안봤습니까? 정말로 우리는 평소에  익혀야 합니다. 평소에 자기 이 마음에 기능 속에 작용 속에 감각 속에 기억  속에 이 몸에 감각 속에 기능 속에 기억 속에 나는 영생하는 영생을 가진 나는  영생자라는 것을 우리는 가득 담아놔야 됩니다.

 우리가 이것을 익히고 익혀서 세상이 아무리 죽여도 죽지 않한 그 자가  영생합니다. 영생한 자는 죽지 않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였지만은  당신은 지금 우리 위해서 기도하고 계셨다고 했습니다. 이사야 50장에 있지  않소. 죽였지만은 당신은 지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있어 죽는 자는 따로 산  자는 따로라. 겉사람은 죽고 속사람은 살아있어. 우리가 아 자기 혼자든지  고함을 지르든지 할 수 있으면 고함지르는 것도 좋고 우리가 이것은 평소에  익혀놔야 됩니다.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구원자시라.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구원.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 천번 만번 억만 번 익혀서 자기 이 기능 속에 가득 배도록 나는  영생을 가졌어. 나는 영생이라. 나는 영생이라 나는 영생이라. 영생을 가진 나.

영생을 가진 나. 영생을 가진 나. 영생하는 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자기가  영생을 가진 걸 확실히 알기 때문에 그가 확실히 영생을 자기가 가진 것을 알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는 모든 만물들에게 수명적으로 수명적으로 다 그를 통치할  수 있어. 이 높은 태산에 큰 한 덩어리 큰 바위로 있는 그 바위를 향하여 바위를  향하여 '너는 수명이 얼마나 가지? 얼마나 살겠나? 일억 년 일억 년은 살겠느냐?  그러나 영생은 못하지.' 어떤 사람이 인생이 짧다는데 대해서 많이 운 사람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영생을 얻고 난 다음에 그는 만물을 대해서 예수를 믿기  전에 만물의 그 생명과 나무의 생명도 인간 생명보다 길고 암석의 생명도 인간  생명보다 긴기 있는데 인생은 너무 짧고 비참한 것을 오랫동안 울고 울다가  예수님의 구속을 알고 난다음에 그 사람은 모든 만물을 대해서 그들의 생명이  짧고 그들의 생명이 간단하고 그들이 존재 너무도 그 허약하데 대해서 마음에  동정을 하고 주로 말미암아 자기 영원성의 모든 것을 가진 것을 인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면서 자랑을 했다고 합디다.

 우리는 이것을 기억합시다. 나는 영생을 가졌다. 내 생명은 영원하다. 내  생명은 나는 영원을 가졌다. 나는 영원하다. 하나님은 나의 영원한 구원자시다.

이것을 우리가 몇천 번 몇만 번 몇만 번이라도 되풀이해서 우리의 이 마음의  기능 속에 충만하게 합시다. 우리의 몸의 기능 속에 충만하게 합시다.

 우리의 기억 속에 충만하게 합시다. 무엇이 와서 죽여도 그 죽이는 것이 내  감각 안에 이 영생을 조금도 해하지 못하도록. 그리하여 먼저 내 자신이  영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크신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산소망을 입었나니 썩지도 안하고  쇠하지도 안하고 더럽지 아니하는 산소망을 우리가 가졌습니다.

 우리는 지금 썩어질 것, 쇠할 것, 낡아질 것, 이것입니다. 우리는 약한 것이요.

우리는 썩을 것이요. 우리는 욕된 것이요. 우리는 혈육의 것입니다. 이것을  가졌습니다. 이러나 하나님 편에서 깊은 이면에서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여게 썩지 아니할 것, 더러워지지 아니할 것, 영원한 것, 강한 것,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것, 영생성 완전성을 가진 이 생명의 씨가 우리에게 와가지고  접해 있습니다. 접선이 됐습니다. 접선이 되가지고 있습니다.

 이러기에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산다 그말은 썩을 것  이것가지고 썩을 것 이것 가지고 썩지 아니할 것을 위하여 내놓는다 그말입니다.

심으는 것은 자기에게 있는 걸 내놓는 것 심는 것 아닙니까? 이 주머니 안에 든  것을 심을라면 내놓지 않고 어찌 심을 수 있습니까? 자기에게 있는 이 썩을 것  이것을 하나님과 진리로 영생을 가졌는데 이것이 영원한 사망을 가지지 아니하고  영생을 가진 이대로의 사람 위해서는 내놔야 된다. 내놔야 사망적으로 가진 것을  내놔야 된다. 세상적으로 가진 것을 내놔야 된다.

 이것이 심으는 것이라. 내놓으면 영생으로 살았습니다. 내놓지 않으면 영원한  멸망입니다. "살고저 하는 자는 죽을 것이요. 나와 내 도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  자는 살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아직도 사망에 속하고 저주 아래에 속한 이 관련  이 습성, 이 악성, 이것으로 가득차 있는 이것이기 때문에 역서 악성에서 내놔야  됩니다. 악성에서 내놔야 되고 악습에서 내놔야 되고 악령에서 내놔야 됩니다.

내놔야 됩니다. 내놓은 이것이 심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영생으로 바꿔지는 것입니다. 아직까지도 옛사람, 새사람 이 둘이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인간의 말로 이렇게 표시를 한 것이요. 악령의  악령으로된 자기를 내놔야 된다 그말은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배반해도 된다  하는 고것을 물리치고 하나님 말씀 어겨서 행하면 더 잘된다 고거 물리치고  하나님 말씀 어기면 죽는다. 하나님 말씀대로 하는 것으로만 산다. 하나님 말씀  어겨 잘 될줄 알고 하나님 말씀 어겨도 괜찮고 잘 될 줄 아는 요 모든 것을  하나님 말씀 어기면 죽고 하나님 말씀대로 해야 산다 하는 요 자기를 내놓으라  그말이요. 몸도 내놓고 마음도 내놓고 행동도 다 내놓라 그말이요. 요기 심으는  것입니다. 자기 중심, 피조물 중심, 요 중심으로 해도 괜찮고 잘됩니다. 요래야  내게에 좋다 하는 요것을 요 자기인데 오늘까지 우리가 요 자기인데  자기중심으로 인간 중심으로 사회 중심으로 가정 중심으로 어떤 피조물 중심으로  국가 중심으로 뭘로 위주로 요렇게 해야 잘 될줄로 알고 있는 우리인데 여기서  말이요. 여기서 여기서 내놔라. 하나님 중심, 하나님 위주로라야 영생을 하고  잘된다 하는 요것으로서 너를 내놔라. 요기 심으는 것입니다. 내놓은 것.

옛사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이니까 중복같아서 본론 되어서 알기  어려우나 그렇게 말하지 않으면 말이 안됩니다.

 악습이 뭐입니까? 이제까지 종전에 하나님을 배반하고 인간 중심으로 천국을  모르고 이 세상 위주로 과거에 하나님도 진리도 모르는 모든 사람같이 나도  하나님도 진리도 상관없는 과거에 생활로 사는 생활로 살던 그 생활을 그 생활로  살던 그 생활을 그 생활로 살던 나를 이제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하나님과 진리에로의 행동으로 내놔라. 행동으로 네가 투자해라. 이것이 심으는  것입니다. 이것 심으는 것. 그거 뭐이냐? 예수님의 구속으로 산 자가 이제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지 아니하고 영생을 가졌습니다. 영생이 됐습니다.

 그러나 다시 거기서 배반하고 억매이고 지면 네가 죄를 범하면은 마귀의 자식이  되고 의를 행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속지 마라. 네가 당장에 의를 행할때에  하나님의 자녀다가 죄를 지으면 당장 마귀 자식이 된다. 이렇게 네 찰라 찰라에  네 언행심사에 행동으로 이렇게 바꾸어진다. 이런데 뭐 하나님의 자녀됐으면  자녀됐지 마귀의 자녀되면 됐지 당장에 그렇게 갖다가 일초 일초에 고렇게  하나님의 자녀됐다가 마귀됐다가 요렇게 갖다가 그럴 수가 있겠느냐? 그거는  하나의 하나의 구변에 지나지 못하고 괴변에 지나지 못하고 논리에 지나지  못하지 실은 아이다. 고말에 속지 말아라. 고걸 똑똑히 말해놨습니다. 응.

너희는 속지 말아라.

 그런고로 우리는 내가 영생가진 내요 내 요소가 전부 다 영생성으로 구속을  받았는데 우리가 죽지 안하면 됩니다. 죽지 안하면 됩니다. 죽지 안하면 되요.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치 안하면 안죽습니다. 칼로 끊고 불로 태워 아무래도 죽일  자 없습니다. 못 죽입니다. 하나님과 진리로 산 우리를 누가 죽이겠소? 내가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할 때에는 둘째 사망의 해를 받는 것입니다. 이런고로  이것을 우리 백 번이든지 천 번이든지 연습해서 이것을 우리 이 세포 속에 꽉  차야 되고 마음의 기능 속에 꽉차야 되고 마음과 몸의 기능 속에 가득차서  우리의 마음과 몸의 기능의 작용은 이 영생 작용 밖에 할 수 없는 사람으로  만들어야 됩니다. 이것이 명상이요. 이것이 기도입니다. 이것이 되면 그  다음으로 영생할 우리들이니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 영원한 것입니다.

영원성을 가진기 아니면 안됩니다.

 우리의 가서 살 나라는 하늘 나라이기 때문에 하늘 나라는 완전성의 것만 가지  모든 불완전한 것은 못 갑니다. 그런 것은 암만 좋아도 우리 것 아닙니다.

불완전한 것은 우리 것 아니요. 진리의 것이 아니면 우리 것 아니요. 영원한  것이 아니면 우리 것 아니요. 변할 것은 우리의 것 아니요.

 그러기에 우리는 변하고 낡아지고 없어질 이것을 애끼고 좋아하고 이것을  탐하다가는 이제 영원한 것이 된 것을 빼앗기기 쉽기 때문에 이것을 탐하지  마라. 이것을 탐하지 마라. 그것을 탐함으로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살았던  것이 다시 죽습니다. 다시 더러워집니다. "의롭게 된 것이 다시 더러워지면  속량하는 제사가 없느니라" 히브리서 6장에 말씀했습니다. 다시 속량하는 제사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 자체의 모든 요소가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이제  영생의 구속을 받았는데 받았는데 이것이 현실 현실에서 구속받은 이 구속을  빼앗기지 아니하고 이 구속을 간직하면 영생인데 이 구속을 간직할라하면 죽도록  충성해야 됩니다.

 이 구속을 간직할라하면 있는 것을 다해야 합니다. 사람을 구원하면 그것  때문에 이 구속은 아직까지 얼켜 가지고 있고 그것 때문에 끌려갑니다. 이렇게  하면 예수님의 구속으로 영생얻은 것이 다시 죽지 않는다. 다시 죽지 않는다.

인류시조의 원죄와 본죄로 죽었던 그것이 첫사망이요. 예수님의 구속받은 것이  다시 두 번 째 사망하는 걸 가르쳐서 둘째 사망이라 말씀한 것입니다. 우리가 뭐  이다음에 가가지고 영생얻는 것 아니요. 이래서 그 기능 속에 영생이 가득차서  그의 마음은 그의 비판은 그의 지식은 그의 평가는 그의 관념은 그의 주관은  그의 본능은 영생을 가졌기 때문에 불에 태워도 죽는다는 것은 없어. 죽는 거는  죽는다는 것은 없어. 죽는 걸 몰라. 저한테 죽을 요것만 죽어. 안죽었어. 그의  마음이 안죽었어. 그의 기능이 안주었어. 그의 감각이 안죽었어.

 어떤 성자들의 전기를 보니까 이렇게 영원한 생명으로 충만해서 그의 생명은  아무도 죽이지 못해 다른 사람은 죽이는데 자기는 죽는다는 죽음이 없어. 그에게  죽는다는 감을 줄라고 죽는다는 그것을 인식하게 할라고 암만해야 그는 죽는다는  인식이 그에게 가지를 안해. 그는 끝까지 살았어. 사도 요한이 기름가마 속에  삶겨도 삶기지 안한 그것이 그는 모든 기능과 몸의 모든 기능이 다 그가 어떻게  성화된 것이 아니었던가고 생각이 됩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자꾸 연습합시다. 좀 익히요. 아 나는 영생한다. 나는 영생을  가졌다. 영원한 구원을 나는 받았다. 나는 받는다. 나는 영원히 살았다. 나는  영원히 살았다. 나는 영생했다. 나는 영원히 살았다. 나는 영생했다. 이것을  천번이나 말해서 이제 어떤 것이 죽여도 그 내가 죽는 그 나는 죽음이 없는  죽음의 감이 없는 죽음의 인식이 없는 영생가진 내 기능으로 영생 가진자로만  이렇게 우리에게 역사하고 우리 속에 영생이 가득차야 합니다. 녜. 마음의 기능  속에 영생이 가득차야 되고 몸의 기능 속에 영생이 가득차야 됩니다.

 이래야 이 사람이 제지. 이래야 이 사람이 자기에게 필요한 것을 취하지. 응.

아무걸 봐야 살지 안하고 죽었는데 그걸 취할 걸 탐할게 없어. 좋아할 것,  부러워할 것 없어. 이러니까 땅위에 모든 것은 이것을 예수 안에 뿐이지.

이러니까 땅위에 모든 것은 이것을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다 영원한  생명이 와서 있기 때문에 이 생명으로 구원하고 몸밖에 있는 것을 생명으로  구원해서 영원한 내것을 삼고 이 구속을 받은 자기가 다시는 사망에게 얽매이고  지지를 아니하고 이것이 우리의 생애가 돼야 사망의 것과 생명의 것을 구별해서  사망의 것을 탐해서 생명의 것을 팔고 버리지를 안하지요. 그런 미혹을 받지를  안하지요.

다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우리는 영원히 살았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빼앗을 자 없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가졌습니다. 우리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우리는 영원한 기능을 가졌는데 이 기능을 빼앗기지 안해야 됩니다. 배반하면 죽습니다. 이 시험은 단번에 주신 도리 단번 뿐입니다. 한번만 딱 빼앗기지 안하면 다시는 없습니다. 시험은 한번뿐입니다. 개별전투는 한번뿐이요. 개별섭리도 한번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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