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2.13 07:45
우리의 구원
본문 : 딤후 1:13-14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기도회에는 전주와 비해서 남반도 여반도 기도하는 사람의 그 기록한 수가 올라서 687명이 전보다 기도하는 그 기록한 수가 올랐습니다. 여기에는 기록을 안 했을지라도 집에서는 계속 모두 기도하고 있는 줄 압니다.
지금은 기도할 때입니다. 이북에서 어려움으로 우리를 자꾸 억누르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 소생을 위함이요, 참 이를 하나님께 부탁해서 기도하는 자에게만 하나님이 구원하시기를 노아 홍수 때와 같이 그렇게 구별하실 것을 지금 재촉하고 있습니다.
주일날 밤, 삼일날 밤, 금요일날 밤은 보일러 불을 피워 놓고 그저 옷만 따시게 입고 와도 그냥 지낼 만큼 피워 놓고 남녀반이 철야기도를 합니다. 그러면 피곤하면 자기도 하고 또 기도도 하고 한 두 번 녹음 테이프를 들어서 자기가 똑똑히 깨닫지 못한 것도 재인식을 하도록 그렇게 하니까 많이 기도회에 참석을 해서 자기의 미래를 잘 준비하는 것이 지혜로운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고 투표한 결과는 모두 2천표 이상을 득표를 했습니다. 장로님으로 선배되고 형이 되시는 분들도 더욱 책임이 무겁겠지만 이번에 장로 되실 분들도 참 좀 짐이 무겁겠습니다. 그래도 우리 교회서 2천여명이 다 소망을 가지고 이분을 장로로 세우면 우리 교회에 복음 역사에 크게 도움이 되리라 이래 기대를 하니까 아마 그 기대가 대단히 무거운 짐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짐은 많이 질수록 좋습니다. 그저 잘 지고 가서 모두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그렇게 잘 감당하리라 생각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셀수 없을 만큼 수가 많습니다. 또 사상도 주의도 많고 별별 철학자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외에는 모든 것이 그 근원이 사람입니다. 사람으로 시작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천하에 다른 이름으로서는 구원얻는 길이 없습니다. 수많은 종교가 있지만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으로 통하여만 구원이 있지 다른 데는 구원이 없다고 했습니다.
기독교 가운데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기독교도 있고 인간이 주장이 되어 가지고 인간으로 시작된 그런 기독교도 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들이 지금도 들어 보면 대개 정통에서 이단이라고 정죄한 것은 다 근본이 사람으로 시작된 그런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의 근원은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하면, 아무것도 없는데 하나님 홀로 계셨습니다. 이분은 무엇으로 인해서 계시지 않았고 아무것도 없는데 홀로 영원 전에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이 우리의 이 구원을 작정하신 것입니다. 또 이분의 사랑이 작정을 하셨습니다. 이분의 사랑도 아무것도 없을 때에 홀로 계신 이분의 홀로의 사랑입니다. 또 홀로 계신 이분의 기쁨이 우리 구원을 작정을 했습니다. 뭐 누구로 말미암지 않고 이분이, 이분의 사랑이, 이분의 기쁨이, 이분의 원하시는 뜻이 우리 구원을 작정하신 구원입니다.
이 구원을 작정하시고, 그러면 작정하신 것, 홀로 계신 이 하나님이,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기쁨이, 하나님의 소원이 제일 처음 일하신 일이 우리 구원을 작정한 일입니다. 우리 구원이 작정된 것은 홀로 스스로 계시는 하나님이 계신 그 다음으로 존재하게 된 것이 우리의 구원의 시작입니다.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하나님이 당신의 완전하시고 영원하신 지혜를 가지고 이 구원을 이룰려고 하면 어떤 순서로 이루어 가야 되느냐 하는 그 순서를 단번에 작정했습니다. 이것을 가리켜서 예정이라 그렇게, 미리 정했다, 미리 계획했다 하는 것으로 예정이라 그렇게 말합니다.
단번에 작정한 이 작정은 몇해까지나 작정했느냐? 영원까지를 다 작정했습니다.
무궁세계의 영원도 단번에 작정하신 그 작정 그 순서대로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헬수 없는, 그거는 뭐 측량도 못할 수많은 순서들이 있지만 이렇게 이 우리의 구원주이신 하나님이 미리 정하신 것 외에 하나도 있는 일이 없습니다.
전부 정하신 그 순서대로 있지 그 순서에 들지 않은 것이 있는 그런 일이 없습니다. 만일 그런 일이 있다고 하면 하나님이 둘이 되는 셈이요 그런 것이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정하신 대로 하나님이, 정하기만 해 가지고도 안 되니까 이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서 정하신 그대로 하나 둘 순서적으로 당신의 능력으로 이루어 가는 이 순서를 이루는 첫 순서가 창조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창조 전이요 예정 전입니다.
이제 존재의 순서로 말하면 하나님이 자존하셨고 그 다음에는 우리 구원을 하나님께서 작정을 하셨고 셋째로는 하나님이 예정을 하셨고 넷째로는 하나님이 예정한 대로 모든 것을 창조하신 그때부터 영계도 있었고 물질계도 있었고 사람도 만물도 비로소 있기 시작했습니다. 그 전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떤 움직임이 생겨 나오든지 그것이 영훤 전 하나님이 작정하신 그 예정하신 그 속에 든 것인데 그것은 막바로 우리 구원을 위해서 예정된 이 사실을 우리가 믿어야 합니다.
무신론이 예수믿는 것을 핍박을 하고 믿는다고 총을 대고 칼을 대고 죽이고 죽이려고 달려드는 그것도 하나님의 예정대로 되는 것이니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있는 것이며, 그때에 움직이는 그 모든 도구같이 되어 있는 사람이든지 짐승이든지 어떤 물질이든지 그것도, 성도를 찌르는 칼도 그것이 존재하게 된 것은 구원을 작정하신 주님이 창조하신 것입니다.
주님이 짓지 아니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구원에 필요없는 존재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 구원을 위하지 아니한 순서도 움직임도 하나도 없습니다.
이렇게 창조하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 주님이 사람되어 오시기 전에 창세기 1장에 흑암과 물위에 걸어 다니시고, 에덴동산에서 범죄한 아담 하와를 찾으시고, 아벨의 제사를 받으시고, 노아 때에 노아에게 120년 동안 방주를 모으라고 말씀하시고, 이삭을 번제로 드리라고 말씀을 하시고, 아브라함을 벗이라, 다윗에게 엘리사에게 이사야에게 모든 선지자들에게 나타나서 역사하시던 이 구원의 하나님이 때가 되매 동정녀 마리아의 몸을 통하여 사람으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십자가에 못박히신 이 예수님의 신성이 창조하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세상도 그분이 지으셨고 모든 것은 그분의 것입니다. 이런데 그분이 일찍부터 당신의 목적인 우리 구원을 위해서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섭리하시고 보존하시고 이러다가 때가 되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무래도 대속해야 되기 때문에 사람되어서 십자가에서 대속의 공로를 베풀어 우리를 영원히 죄없는 자로, 영원히 의로운 자로, 영원히 하나님과 화친한 자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렇게 지극히 크신 분이 이 구원을 홀로 작정하셨기 때문에-우리로 인해서 작정했으면 우리 잘하고 못하는 이것으로 변해지지 만 우리가 없을 때 당신의 사랑으로, 당신의 기쁨으로, 당신의 소원으로 시발되고 작정한 구원이기 때문에 우리의 어떤 것에 대하여 충격을 받지 않습니다. 거기 대하여 피동을 받지 않으십니다.
이렇게 크신 분이 모든 것을 예정하시고 창조하시고 우리를 구원 하시기로 하셨으니, 이렇게 지극히 크신 분이 우리를 구원하시기로 우리와 관계를 맺은 이 일은 참 인간의 소원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얼마나 큰일인지 모릅니다. 얼마나 큰일인지 모릅니다.
강대국에 잠깐동안 정권을 가진 그런 사람과 서로 교제를 하고 친교를 맺어도 사람들이 크다 하거든 하물며 이 지극히 크신 하나님 이분과 우리와의 이 친교가 맺어져 있다는 것, 이분이 조사하고 심사하는 데에 어데 가도 거리낄 게 없는 사죄의 이 공로를 우리에게 입혀 주셨다는 것, 아무리 의로운 자를 등용하려고 해도 예수님의 공로로 우리는 의로운 자로 그 자리에 참석할 수 있다는 것, 이것을 하시기 위해서 이렇게 크신 분이 우리가 무엇이관대 우리 위해서 모든 것이 예정되었고, 우리 위해서 창조되었고, 창조된 것이 둘이 합해서 하나되었다가 또 나뉘었다가 없는 가운데 있어졌다가 있는 것이 없어졌다가 많아졌다가 적어졌다가 모든 이 섭리하시는 이 섭리가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섭리하고 계시는 이 지극히 큰 것, 측량 못할 지극히 큰 것, 이 구원을 이루시고 우리가 감당 못하니까 감당하도록 하시기 위해서 창조주가 피조물 사람되어 오셔 가지고, 사람되어 오신 것도 이거는 참, 아무리 우리가 주님을 위해서 형제 구원을 위해서 실컷 낮아져 봤자 내가 인간만큼 낮아졌는데 주님이 나 위해서 낮아지신 이것을 생각할 때에 아무도 여기에 머리를 들지 못하고 죽자껏 낮아진 그 자리에서 '주여 나는 주님 앞에 무익한 자입니다.' 낮아진 것을 나타내지 못하고 희생한 것을 자랑하지를 못하는 것이 그것이 다 주님의 크심과 주님의 사랑에 대해서 깨달은 연고입니다.
이렇게 크신 분이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낮아지실 때도 우리를 사랑하심으로 우리에게 유익된 낮아짐도 거리끼지 아니하고 단마음으로 낮아졌고, 우리 위해서 가난해져야 될 때에는 다 내놓을 때는 아낌없이 다 내놔서 하나님의 지성과 지공법을 만족하도록 우리 위해서 있는 것 다 희생해서 가난해졌고, 우리 위해서 온갖 곤욕과 온갖 박해 온갖 조롱 온갖 천대 온갖 멸시 다 받아도 우리 구원을 위해서 끝까지 참으셨습니다. 우리의 죽음은 당신의 죽음으로 대신하지 않으면 안될 때에 당신이 단 마음으로 원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대신해서 당신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죽음에서 벗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이 사랑, 눈에 보이는 것 안 보이는 것 모든 것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존재케 해 왔고, 이것들이 기다리고 있다가 우리 구원에 필요한 대로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다 이용해서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질 수 있는 환경을 현실을 만들어 가지고 우리에게 딱 주어서 요 현실에서 믿음만 지키면 지극히 큰 구원이 이루어지도록 이렇게 현실을 만들어 주셨고, 거기에 나타나는 이루어지는 일 중에 하나라도 우리 구원을 위하지 아니한 그런 일이 하나도 없이 우리야 알든지 모르든지 그 전체의 움직임이 우리 구원을 위해서 움직이는 이 사실, 이렇게 광대한 주님의 이 구원 역사의 존재 속에, 이 구원 역사의 움직임의 순서 속에, 주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담뿍 입어 사죄와 칭의와 화친의 생명을 얻어 우리가 걸어갈 때에 우리의 모자라는 것을 책임지고 이 구원을 우리 각자들에게 이루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이신 성령이 이 일을 책임지고 나섰고 하나님인 이 진리 가지고 만물을 지었습니다. 하나님은 명령했고 진리는 만물을 지었습니다.
만물을 지은 이 진리가 우리의 구원을 책임을 졌고 주님이 십자가에서 대속하신 이 공로가 우리를 책임져서 우리 구원을 이루어가고 있는 이 사실을 우리는 밤낮 명상해야 되고 밤낮 찬송해야 되고 밤낮 우리는 연구해야 되겠습니다.
우리는 죽는 날까지 이 일을 연구하고 찬양한다고 해도 참 부족하다 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그의 실상의 뭐 몇 억억만분의 일도 안됩니다. 우리가 믿되 하나님이 내 구원을 작정한 이것을 우리가 입으로도 믿고 지식으로도 믿고 또 행동으로도 하지만 그분의 크심이 무한하고 그분이 작정하신 이 구원이 영원한데 이 구원의 억만 분의 일도 모릅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구원을 항상 명상해야 됩니다. 제가 오늘 이 설교를 또 다시 해야 되겠다 하는 그 생각이 난 것은 제가 아침에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할 때에 영원 자존하신 지극히 크신 하나님이 내 구원을 작정했다는 걸 생각할 때에 어떻게 크고 두렵고 측량할 수 없는 이 감사, 이분이 이분의 사랑으로, 이분의 기쁨으로, 이분의 소원으로 이 구원이 작정돼 놨으니 이 구원을 누가 어떻게 손을 대겠소? 누가 이 구원을 어떻게 간섭을 하겠소? 이 구원을 누가 방해를 하겠소? 하늘의 것이나 땅의 것이나 모든 것이 이 구원을 위하여 이용은 될지언정 이 구원 방해할 자 아무도 없다. 크다, 크다! 이 구원을 시작하시고 작정하신 분 무한히 크고 그분 다음으로 이 구원이 참 크다, 크다! 이 하나님의 크심과 이분이 작정한 이 구원이 어떻게 큰 것을 생각할 때에 그 크심에 나는 거기에서 평안하면서 꺼꾸러졌습니다. 이 큰 하나님, 오 주여! 주의 크심이 얼마나 크신지 주의 크심을 나와 모든 성도들에게 알게 해주옵소서. 주님이 우리에게 시작하신 이 구원의 지극히 큼도 알게 해 주시옵소서. 영원 자존하신 주님! 주의 기쁨, 주의 사랑, 주의 소원으로 이 구원이 작정되었으니 이 구원은 모든 천상천하의 피조물은 이 구원 위해서 있기 때문에 이 구원을 위할 자는 있어도 이 구원을 방해할 자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악령을 만들어 악령조차도 이 구원을 기묘하게 기묘하게, 모순 같으나 일치되는 이 역사로 이 구원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이 구원, 모든 움직임이 이 구원 위한 예정, 모든 존재가 이 구원 위한 창조, 이렇게 지극히 큰 넓고 큰 주의 대속 지극히 큰 이 소망, 우리를 보증하신 지극히 크신 분의 보증, 기대하고 있는 대기하고 있는 모든 만물 속에서 주님의 작정대로 내 구원이 필요한 대로 사람을 쓰고 나라를 쓰고 시대를 쓰고 하늘의 것 땅의 것을 다 움직여 내 현실을 만들어 이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주의 이 광대하신 사랑의 이 구원 역사, 이 광대한 구원 역사 이 속에 우리라는 존재가 들어 가지고 있다는 것, 어떻게 뭐라고 찬양하며 뭐라고 감사하며 어떻게 해야 될는지! 이 광대한 주의 사랑 속에, 역사 속에 있으면서 이렇게 힘들여 큰 자본 들여서 만들어 준 이 현실을 이해 못하고, 이 현실을 이해 못하고 이 현실을 어떨 때는 이해 못해 불만이나 불평이나 원망으로, 이해를 한다고 해도 이렇게 큰힘 들여서 만들어 준 이 현실을 이렇게 가치있게 쓰지 못하고 어리석은 내가 들어서 그 현실을 그렇게 효력있게 쓰지 못하고 그저, 그만 믿음을 지키는 듯 하고 어리석게 인색이나 안일이나 이런 미련함에서 현실을 값있게 이용하지 못한 그런 것을 생각할 때에 어떻게 마음에 아픈지, 어찌 보면 참 굉장히 교만도 나오고, 어찌 보면 너무 내 자신이 밉고 저주스럽고, 어찌 보면 이렇게 큰 기대를 가지고 당신이 만들었는데, 내가 내것 아닌데, 내가 내것 아닌데 내가 내게 대해서 이렇다 저렇다 하는 그 입술도 가증스럽다. 참 그 입술도 가증스러워. 어떻게, 어찌 보면 참 울어야 될런지 웃어야 될런지 뛰어야 될런지 떨어야 될런지 측량못할 이 지극히 큰 구원 이 구원 속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세상에 다른 이 종교에서 그는 다 이 구원을 위해서 있습니다. 모든 이종교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이용하시기 위해서 만드신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아직 이 구원을 이루는 세상에 있어서는 상속을 받을 주인의 장자이지만 어릴 때에는 그 집 주인의 보호도 받고 주인의 인도도 다스림을 받는 것처럼 세상 이런 것 저런 것한테 우리가 다스림 받지만 조만간에 하나님의 교회는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 다음으로 대리주인 하나님의 상속자 하나님에게 유업으로 받아 천상 천하의 것을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서 중보의 위치를 가지고 살 자들이 하나님의 교회인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을 직접 대하지 못하고 천군 천사도 직접 대하지 못하고 음부에 있는 것도 하늘나라에 있는 것도 직접 대하지 못하고 하나님이 영원 전 원하셔서 작정한 그 목적 곧 우리의 구원 구원이 된 하나님의 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에게 관계를 가지고 하나님은 모든 피조물에게 교회를 통하여 관계를 가지는 지극히 크고 영화로운 이 위치를 우리가 이루어 나아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이 사실을 믿는지 안 믿는지 어떨 때는 놀랄 만한 큰 움직임이 우리 앞에 부딪힐 때에 우리는, 분명히 그 움직임이 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예정하신 대로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을 이용해서 하나님이 섭리하셔서 그걸 만들어 내 구원을 위해서 내 앞에 그 어떤 큰 두려움이라는 현실이 올 때에 우리는 그것을 주님이 지으신 것 주님이 예정하신 대로 주님이 내 구원 위해서 섭리해 주신 내 구원을 이룰 현실이로구나 하는 요것을 우리가 지식해서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받아 그것을 이용하지 못하고 그럴 때에 두려워 떠는 그런 일들이 우리에게 많이 지나갑니다.
그래도 주님은 우리의 부족으로 낙심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떨 때에 '주여, 나는 부족합니다.' 이것을 당신이 원하시고 또 한번 겪게 하시고 또 두번 겪게 하시고 이래서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내 구원 위하여 주의 사랑의 섭리로 이루어지니 주님의 사랑 속에서 이 세상에서는 살고 있다.
내가 주님의 사랑의 태속에서 살고 있는데 자랄 대로 다 자라면 이 제한된 세상을 벗어나고 무한한 세계로 내가 탄생하게 된다. 무한한 세계에 내가 그때에 비로소 영원으로 탄생되어서 참 하나님의 아들의 노릇을 똑똑히 하게 될 것이다' 하는 이 소망 중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떨 때는 극히 극단으로 우리를 해하는 존재들이 나올 때에 우리는 그만 착각합니다. '아이구, 이것은 내 구원 위해서 있는 것 아니다. 내 구원을 방해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 가지고 기독자들이 이원론 삼원론 사원론까지도 말하는 그런 어두운 주장을 하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죽기 전에 어떤 존재가 나타나도 이것도 내 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내 구원을 위해서 그것이 기다리고 있다는 이 사실을 믿는 사람으로 세상을 떠나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앞에 어떤 변동스러운 어떤 변사의, 어떤 무섭고 어떻게 위험하고 의외의 일이 생겨져도 우리는 온유함으로 '주여! 감사합니다. 내가 몰랐던 이런 또 순서도 내 구원 위해서 예정하시고 섭리하셔서 이렇게 주의 창조와 섭리가 주의 예정대로 역사하셔서 또 하나를 세상에서 구경하고, 또 이 하나로 말미암은 영양을 취해 가지고 내가 그 요소에 결핍된 것을 보충해서 건강체가 되어 가지고 떠나도록, 이렇게 주님께서 이모 저모 이 부분 저 부분을 구비케 나를 길러 내 지식을 온전케 하고, 내 소망을 온전케 하고, 당신을 의지함을 온전케 하고, 당신을 바라봄을 온전케 하고, 당신에게 따라 움직이는 이 움직임을 온전케 해 가지고 어머니의 태속과 같은 이 세상 생활, 연단 준비 정비 정돈의 기간을 다 잘 끝마치고 무궁세계의 입문인 부활의 심판 그리스도의 심판대를 통과하도록 하시는 이 일을 우리는 감사하면서 여기에 대한 충분한 지식과 충분한 우리의 관련과 충분한 우리의 주관과 넉넉한 우리의 모든 풍성한 행동으로 하나도 모자라는 것이 없이, 하나님의 크심에 대한 지식이나 태도나 행동이나 소망이나 내 평안이나 담력이나 내 뼈골까지, 골수까지, 내 마음 속, 내 고깃덩어리 속, 내 영 속, 내라는 영육의 내 자체 속에 하나님의 크심이 우리 속에 가득 차고, 그의 사랑이, 그의 기쁨이, 그의 소원이 내라는 것을, 그분의 소원이 내요 그분의 기쁨이 내요 그분의 사랑이 내요, 그 크신 분이 첫째로 날 사랑하시고 나를 좋아하시고 나를 당신같은 온전자로 만드시려고 하신 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과 하나님의 예정과 하나님의 창조 하나님의 이 섭리가 영육으로 된 우리 속에 가득 차서, 가득 차서 마치 흰 베쪼가리에 붉은 물을 들이니까 속속들이 전부 붉은 물 뿐이지 흰 것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처럼 이렇게 하나님을 알고 바라보고 의지하는 지식이 우리 영육에 가득 차서 가득히 베어서 우리에게 이것이 본능이 되고 주관이 되고 이 사람이 되어진 이 사람이 되는 것으로 얼마든지 힘입어서 우리는 충만한 사람으로 이렇게 떠나기 전에 우리가 성화되어야 되겠고, 그저 평생 처음 보는 것, 큰 것, 천하 사람이 다 보고 깜짝 놀라 무서워하는 것도 주님이 내 구원 위해서 지으신 내게 필요한, 나 위해 지으신 나의 보배 나의 선물인 것을 깨닫고 그를 기쁨으로 즐거움으로 나의 유산으로, 소유로, 주님이 나 위해서 창조하신 것을 인식하되 요동치 않는 인식, 이래서 아무리 큰 것이 와도 두려운 것이 와도 기묘한 것이 와도 우리의 욕심도 그것이 움직이지 못하고, 우리의 감정도 움직이지 못하고, 우리에게 두려움도 절망도 움직이지 못하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못하고, 그저 그걸 볼 때에 기쁘고 즐겁고 감사하고, '이 선물로 어떻게 활용해서 주를 기쁘시게 할까' 하는 이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자, 그것이 와서 나를 두렵게 하려 해도 두려워 할 그런 요소가 하나도 없어집니다. 그것이 뜻밖의 것이라 내것이 아니라는 그런 인식이 내 속에 하나도 없는 자, 그것이 주의 선물이요 내 구원 위해서 있는 이 사실을 인식하고 그대로 사용하고 그대로 상대하는 이것이 우리 속에 가득히 찬 사람, 모든 순서에 대해서도 이와같이 어떤 순서라도 이것이 나 위해서 예정하신 것, 아무리 외롭고 절망을 세상이 어떻게 갖다 준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나를 돕는 자시다. 주님은 나를 책임지고 있다. 죄를 들고 오느냐? 주님이 나를 사죄의 대속을 주셨다. 네가 의의 문제를 들고 오느냐? 주님이 나 위해서 대속의 의의 공로를 베푸셨다.' '얘, 너 이런 것 이런 것 가지고 하나님과 너 멀다.' '잔소리 말아라. 주님이 나 위해서 하나님과 화친한 주의 피가 있다. 주의 피가 있다.
죄를 가지고 나를 흔들지 마라. 주의 피가 있다. 불의를 가지고 나에게 흔들지 마라. 주의 피가 있다. 하나님과 관계에 대해서 흔들지 마라. 주의 피가 있다.
사람과 피조물은 나를 위해서 존재한 것이오니 피조물과 사람들이 나를 유익되게 할 것뿐이지 나를 어떻게 하겠느냐? 오직 나의 소망은 하나님 한 분뿐이시며 그분의 전부가 나의 전부요 그분 한 분으로서 나는 나의 소망 전부가 되노라' 하는 이 사람으로 세상을 걸어갈 때에, 참 동남풍 서북풍 같은, 가시밭 같은 별일이 와도 주님이 '세상 왕이 오겠으나 내게는 상관이 없다. 그는 나를 어떻게 박해하고 어떻게 가로막고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면 내가 어떻게 아버지를 사랑하며 그 계명을 지키는 것이 드러날 것뿐이지 아무것도 없다' 한 말같이, 세상에 어떤 무엇이 와도 주님이 날 사랑하시는 것, 내가 주를 주의 사랑을 인정하고 그 사랑을 믿는 것, 그분이 나를 책임지신 것 내가 믿는 것, 그분이 나 위해서 역사하시는 것을 내가 믿는 것 이것으로써 어떤 일에나 놀라지 아니하고 온유하고 겸손하고, 내가 한 것 하나도 없고 그분이 날 없는 그때부터 시작해서 공으로 줬는데 교만할 것이 뭐 있습니까? 언제나 그분 앞에 갈망과 갈급과 사모와 겸손과 담대와 평강과 욕망을 가지고 원하고 단마음으로 어떻게 하면 순생하며 어떻게 하면 순교할까 어떻게 하면 그분이 날 위해 죽었으니 나도 그분 위해 죽으며 그분이 날 위해 가난해졌으니 나도 그분 위해 가난해지며 그분이 날 위해 고난받았으니 나도 그분 위해 고난받아 고난의 주님을 나도 고난으로 그분을 사랑하고 갈까 하는 이 마음만 있는 것이 우리의 정상의 마음입니다.
하늘나라는 주님을 위해서 수고하는 일은 영원히 있습니다. 주를 섬겨 기쁘게 하는 일은 영원히 있습니다. 주님을 인하여 고난을 받는 일, 주님을 인하여 욕 얻어 먹는 일, 주님을 위하여 억울함을 당하는 일, 모르고 감사치 못하는 형제를 위해서 형제가 모르는 그를 위해서 수고하는 사랑의 일 이것은 이 세상에서 못하면 다시 못합니다. 영원한 세계는 그것이 없습니다.
주를 위해서 억울함을 암만 받고 싶어도 받지 못합니다. 손해를 암만 보고 싶어도 보지 못합니다. 주를 위해서 매를 암만 맞고 싶어도 맞지 못합니다. 주를 위해서 눈 빼임을 당하고 가죽 벗김을 당하고 주를 위해서 혀를 빼이고 주를 위해서 모진 고난 이 고난 세상에서 안 받으면 다시 못 받습니다.
이렇게 주를 사랑하는 자들 주님이, 그가 당신을 사랑하기를 눈을 빠져도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 때문에 혀를 빼여도 주님을 사랑하고, 그가 불 가운데 태워서 태이면서도 주를 사랑하고 그 사랑에 감격해서 부족하다고 느끼는 그런 사랑을 가진 자에게 그자를 주님이 세상을 지나서 오게 하면 무슨 영광이 되겠습니까? 그 사랑을 봐서 그 사랑에 가득찬 그 사랑을 드러내기 위해서 환경을 만들어 눈을 빼여도 주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표현되도록, 발표되도록, 드러나도록, 광고가 되도록, 자타에게 보여지도록 하기 위해서 이런 저런의 참 측량 못할 순교의 환경들을 사랑하는 자의 이 사랑을 담뿍, 마음껏 네가 날 한번 사랑해 봐라. 네가 날 사랑하고 싶음에 병이 들고 불이 타는 걸 알기 때문에 만족히 사랑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고 있으니까 만족히 사랑해 봐라 하면서 만들어 주는 그 환경 속에서 단 마음으로 주를 위해서 다 순교로 바치고 가는 것이 성도들인 것입니다. 주님이 억지로 우리에게 강제로 섬기라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이 주님을 섬기는 데에는 성결이 없으면 안됩니다.
이분을 생각하여, 이분을 생각하면서 자기 속에 모든 부정을 이것을 청소해서 자기를 성결케, 성결하게 만드는 이것이 이 분을 아는 사람입니다. 이분을 위하여 자기를 성결케 하는 것이 이 분을 섬기는 것입니다. 또 성결을 가지고라야 이분을 섬길 수 있습니다.
자기 양심을 꺾지 않는 것이 이분의 안면을 보는 사람이요, 이것을 길러서 이대로 하는 것이 이분을 알고 대접하는 것이요, 우리는 주를 섬긴다고 하면서 자기를 더럽힌 그것이 주님을 배반하는 것이요 주님을 모욕주는 것이요 이 구속의 사랑을 인하여 참 그 크신 분이 내가 뭐인데 나를 당신같이 만드시려고 작정하신 이 크심, 나를 사랑하셔서 아낌없이 희생해 주신, 내가 뭐인데 나 위해서 이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순서로 예정하시고 섭리하시고 십자가의 대속까지 하신 이 은혜를 생각할 때에 감사해서 못 견뎌 나는 눈물, 이분을 생각하고 나를 생각하니 이분 앞에 너무 나는 부족한 데 대해서 과거에 대해서 원통한 눈물, 이분이 이래도 버리지 아니하고 앞으로도 같이 해 주실 이 은혜에 대한 눈물 이것이 우리에게는 참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저 뒤에 와서 앉았습니다. 어떤 분이 그런 말 합니다. 왜정말년에 일본이 있으면서 신사참배 때문에 어려움 당하는 속에서 주님의 구속의 사랑을 생각하니까 어떻게 마음에 감사하고 감격하고 주를 위해서 죽고 싶은 마음 없고 주를 위해서 고생을 피하려고 하는 그것이 어떻게 마음에 가책이 되든지 마음에 원통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는데, 그때에 자기는 그렇게 강퍅해도 눈물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나는 왜 이리 강퍅합니까? 울어도 울어도 평생 울어도 눈물로서 못 갚겠는데 왜 내가 이리 강퍅합니까?' 하나님께 기도했더니만 하나님께서 참 그 사랑을 깨닫게 해 주는데 못 견뎌서 눈물 흘리면서 그저 밥을 먹어도 눈물, 길을 가도 눈물, 어디 가도 눈물을 주체 못 해서, 차를 타려고 전차를 타려고 올라탔다가도 그만 눈물이 앞을 가려서 다른 사람이 보면 '저 사람 저 왜 저러는고?' 할 만큼 방 안에 들어가도 혼자 있어도 여럿 있어도 그 눈물을 3년 동안을 흘렸다고. 네. 다 그것은 공동고백입니다. 성도들마다 다, 여러분들도 그럴 것입니다.
참 어떤 사람이 그래서 말하기를 '눈물은 천국을 가는 노자이다.' 노자가 자기에게 넉넉히 있으면 밤이 와도 거처할 염려가 없고 때가 와도 먹을 염려가 없습니다. 먹고 싶으면 먹고 자고 싶으면 노자가 넉넉하니까 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주님의 이 사랑과 이 권능과 지극히 큰 소망과 모든 것이 주님의 사랑의 이 조성의 분위기 속이라는 이 은혜에 감사하는 눈물, 자기를 돌아보는 원통의 눈물, 앞으로 욕망에 대한 감사의 눈물 이 눈물이 있는 사람은 그의 처소는 평안합니다. 분명히 그는 옥중에 있어도 평안할 것이요, 가난 속에 있어도 평안할 것이요, 사형선고를 받고 억울하게 사형장에 들어가도 그는 그 자리가 평안할 것입니다. 이 눈물이 있는 사람은 언제나 그의 심령은 갈급하지 않습니다. 그 심령이 주리지를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눈물이 없는 어떤 용감이라도, 어떤 담력이라도, 어떤 뜨거움이라도 눈물 없는 곳에는 반드시 그 심령이 목마름이 있을 것이고 굶주림이 있을 것입니다. 눈물 없는 거기에는 그의 처소가 정말로 평안하지를 못할 것입니다.
그러기에 '눈물은 천국 가는 노비라, 천국 가는 노비라' 하는 그런 말을 성도들이 간증을 하고 있는 것을 봤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눈물 없는 이 강퍅을 우리가 회개를 합시다. 눈물이 없는 데에는 평강이 없는 것입니다. 눈물이 없는 데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기이합니다. 예수 안에서는 눈물로 노자를 삼아 가지고 하늘나라 갑니다. 눈물 없는 사람에게는 참 희망이 없고 눈물 없는 사람에게는 생명이 넘치지를 않습니다. 눈물 있는 거기에 생명이 넘칩니다. 거기에 평안이 넘칩니다. 거기에 욕망이 넘칩니다. 그의 있는 처소는 정말로 천국입니다.
어떤 성도가 말합디다. 자기 일생동안 그리운 자리가 어디냐? 과거를 반성하면서 어디가 제일 그리우냐? 눈물이 많았던 그 자리가 그립다고. 눈물이 많았던 그 굴속이 그립다. 눈물이 많았던 어떤 감옥 속이 그립다. 눈물이 많았던 그 강변이 그립다. 옛날 눈물 많았던 그곳이 사모가 된다고 말을 합디다.
과연 그러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참 늘 울어도 눈물로써 갚을 수 없는 이 큰 은총을 입은 우리들이 눈물 없이 주를 대하고 눈물 없이 우리가 이 세상 걸음을 그저 마음에 고민 번민 마음에 갈급 근심 걱정으로 지나간다는 것은 너무도 주님 앞에 이것 죄송하고 황송한 일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단번에 되는 것 아닙니다. 믿음이 이거 계대가 됩니다. 믿음이 계대됩니다. '네 외조모 로이스의 안에 있던 그 믿음이 너의 어머니 유니게 속에 전달되어 있더니만 디모데야 네 속에 그 믿음이 전하여 갔구나!' 믿음은 당장 되는 것 아니고 하나님의 교회는 당장 되는 것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다 믿음의 선배들의 믿음을 믿음의 접붙임을 받아서 그 믿음을 유업으로 받을 우리들이요 또 우리의 믿음을 우리의 후손에게 자기의 혈육 후손에게 교훈 후손에게 신앙 후손에게 넘겨줄 다 넘겨줄 믿음의 어머니요 믿음의 조모들입니다. 우리 하나 믿음이 잘못되면 우리 대대손손의 믿음이 그만큼 영향을 받습니다. 우리 믿음이 바로 되면 천대까지 그 혜택을 입는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주님이 이렇게 주신 큰 구원을 물론 감사함으로 기쁨으로 받을 뿐만 아니라 우리도 주를 위해서, 주님이 하시는 이 복음 역사를 위해서 우리도 고난을 함께 받고 가야 할 것입니다. '십자가 십자가 무한 영광일세 요단강을 건너 무한 영광일세' 주님을 사랑함으로 고난의 주를 내가, 이 복음 위해서 고난으로 주를 기념하고 주님이 생명까지 다 희생해서 구원하고자 하시는 이 생명들을 나도 내 무엇을 바쳐 이를 위해서 고난받아 이 고난에 참여하는 이것으로 우리가 세상살이를 살고 주님 앞에 가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조만간에 주님 앞에 설 사람들입니다. 주의 사랑의 이 은혜에 우리가 점점 알아 가는 데서 자라가야 되겠고 주님의 이 참 사랑을 기념하는, 주와 복음을 위해서 고난받는 이 일을 땅에서만 할 수 있지 다시 못합니다. 주를 위해서 뺨 한번 맞는 것도 영원히 못 맞습니다. 땅에서 맞지. 뭐 고난의 주님 당신을 위해서, 당신 위해서 욕 한번 얻어먹는 것도 세상에서 얻어먹지 다시는 못 얻어먹습니다. 뺨 한번 맞는 것도 세상에서 맞지 다시는 못 맞습니다.
주를 위해서 발길로 차이고 주를 위해서 몽둥이를 맞고 주를 위해서 쫓겨나고 주를 위해서 배척을 당하고 주를 위해서 이런 박해 저런 박해 이런 고문 저런 고문 이것 여러분들 귀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날 위해서 모든 희생 다 해 준신 그 사랑의 주님 그분 앞에 가서 영원히 살 터인데 그분을 위해서 이미 죽을 몸뚱이, 버리고 갈 몸뚱이, 이미 없어질 몸뚱이 이 몸뚱이 가지고 주를 위해서 고난 받는다는 것이야 이보다 더 기쁜 일이 어디 있습니까? 이보다 더 요긴하게 쓰이는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잠시 잠깐 후면 당신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친 자, 모든 고난을 단 마음으로 받아 십자가 지고 간 사람들이 주님과 함께 영광중에 나타날 것을 우리가 볼 것입니다. 그때 암만 후회해야 소용없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섬길 수는 있습니다. 섬길 수는 있지만 그분을 위해서 고난을 받을 수 없습니다.
무궁세계는 고난주는 일이 없습니다. 박해 주는 일이 없습니다. 칭찬만 하지 욕하는 일이 없습니다. 왜? 하늘과 땅의 것이 그리스도의 그 속성으로 다 통일됐기 때문에. 거기는 진리에 거슬림이 없어. 우리가 주를 위해 섬기는 일은 영원 세계에서도 할 수 있지만 주를 위해서 손해보고 고난당하고 욕 얻어먹고 박해당하는 이 일은 참 세상에서만 하지 세상 딱 지나가면 다시 못합니다.
그러기에 어떤 분이 말하기를, 이 길을 걸어가면서 사람 보기에 이 십자가 걸음 걷는 이 길이 참 주를 위한 일이기 때문에 가치는 있다마는 고생은 고생스럽다 다 그렇게 보는데 이 십자가를 걸어간 분들은 그렇게 말했다 합니다. '나는 하늘나라 가 가지고 하늘나라 가 암만 좋아도 주를 위해서 고난받는 것보다도 더 재미있고 더 좋지는 않을 것이다. 하늘나라에 가서 만일 십자가가 없으면 나는 주님에게 기도해서 십자가 있는 데로 나를 보내 주십시오. 주님 위해서 고난당하고 욕보고 수고하고 애쓸 수 있는 그런 자리로 보내 주십시오.' 하고 기도하겠다고 말들을 하는 것을 들어 봤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한번 지나가면 다시 못 만납니다. 하룻밤 나그네와 같은 이 세상에서 우리가 어떻게 살았든지 그대로 다 갚아 주시고 그대로 주님이 상대해 주실 것입니다.
주를 외면한 것도 그대로, 주를 위해서 수고하고 고생하고 주를 아낀 것도 그대로, 주를 사랑함으로 견디지 못한 것도 그대로 영원한 보응이 그대로 계속됩니다.
오늘은 영원을 결정하는 오늘입니다.
(550) 1982년 3월 1일 월새 본문 : 마 5:17-20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다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계명 중에 지극히 작은 것 하나라도 버리고 또 그같이 사람을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지극히 작다 일컬음을 받을 것이요 누구든지 이를 행하며 가르치는 자는 천국에서 크다 일컬음을 받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 신구약 성경 말씀은 다 생명과 평강을 얻는 유일한 법칙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사람들이 이 말씀 안에서만 영생하는 이 생명에 속한 것과 영원한 평강에 속한 것을 얻을 수 있지 이 밖에서는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그 모든 죽음이나 또 실패나 고통스러운 것에 속한 그 모든 것들은 다 이 말씀을 에누리하는 데에서 생겨진 것들입니다.
이 말씀을 에누리하는 데에서 사람들은 모든 지혜를 잊어버리게 되고 능력도 잊어버리게 되고 평강도 잊어버리게 되고 모든 기쁨도 잊어버리게 됩니다. 이 말씀을 에누리하는 데에서부터 모든 좋은 것은 내게서 떠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에게 있어야 할 모든 좋은 것은 이 말씀을 한 절을 믿든지 두 절을 믿든지 이 말씀을 천지는 없앨 수 있으나 이 말씀은 없앨 수 없는 이 권위있는 말씀으로 인정하는 거기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조금 믿으면 자기에게 조그만한 지혜와 능력이 오게 되고 많이 믿으면 많은 지혜와 능력과 평강이 오게 되고, 조금 에누리하면 그만큼 자기에게 좋은 것은 부서지고, 마치 몸의 병과 같은 자기의 생명과 행복에 속한 것들이 하나씩 차차 병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제일 사람 중에 위대한 사람이 누구냐, 행복된 사람이 누구냐, 제일 성공할 실력있는 사람이 누구냐? 그것은 육체로서 되어지는 것 아닙니다. 육체가 선천적으로 후천적으로 어떻게 구비하다 할지라도 그것도 좋지만 그것은 최종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다 무너질 장막집에 속한 것들입니다. 정죄의 선 이하에 있고 저주와 사망선 이하에 있는 것이지 그것이 그선을 꿰뚫고 올라오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좋아 봤자 망하고 죽는 그 선 이하의 것이지 그 이상의 것은 하나도 아닙니다. 그 이상은 어데서부터 시작되는고 하니 하나님이 내신 신구약성경 말씀을 참되다 인정하는 거기에서부터 움트기 시작합니다. 많이 믿으면 많이, 많이 의심하게 되면 많이 여기에서 생사와 승패는 고락은 결정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기준으로 해서 이 말씀을 떠난 데서부터 인간에게 망하고 죽고 고통스러운 것이 오지 이것이 없는 데에는 아무도 이것을 줄 수가 없습니다.
이것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이것 떠나는 것 없이 인간을 해할 자 없고 이 말씀을 지키지 않는 데에 행복을 줄 자도 없는 것입니다. 주는 것 같이 보여지나 그것은 다 속이고 속는 것뿐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이 먹으라 하는 거는 먹어야 하고 또 먹지 말라는 것은 안 먹어야 됩니다. 먹지 말라는 것 하나 먹었을 때에 전 인류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그대로 다 사망하게 됐습니다.
그러기에 가지라는 것은 내가 보기에 아무리 흉해도 가져야 되고, 버리라는 것은 아무리 내가 필요해도 버려야 되고, 가지 말라는 것은 가지 말아야 되고 가라는 데는 가야 되고, 말을 하라는 것은 해야 하고, 하지 말라는 말은 안 해야 되고, 요 말씀을 누구든지 믿는 것만치 그에게는 권위가 되고 지혜가 되고 행복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이 자기에게 무슨 충격주는 그런 어떤 말씀에 대해서만 한정해 가지고 '우리는 크다 강하다' 믿고 인정하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말씀하시기를 한점 한획이라도, 글자를 쓸려 하면 점도 찍고 이래 획도 건너긋지 않습니까? 건너긋거나 내리긋거나 하는 것은 획이요 또 그 점찍는 것은 점이오. 한점 한획이라는 말은 이 말씀에 대한 그 세부의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에 세부적인 한 말씀도 에누리하면 에누리한 것만치 자기에게는 실패와 불행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인간의 원치 아니하는 것은 이 말씀을 에누리하는 데에서 시작하고 또 이 말씀을 어기는 거기에서부터 나온 다 산물입니다. 또 사람들이 자기의 행복이나 사는 것은, 참 자기가 행복되고 참 사는 것, 이것은 이 말씀을 인정하는 데에서부터 움터 가지고 이 말씀대로 행하는 거기에서부터 그것이 나온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가져야 할 지혜 중에, 지식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이 신구약 성경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우리가 다 지식해야 자기에게 오는 화를 다 방어할 수 있다는 것이 되고 이 말씀을 다 지식해야 자기에게 올 수 있는 행복을 다 끌어올 수 있다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말씀을 우리는 에누리할 것이 아니라 모조리, 우리는 확신을 가지고 이 말씀을 읽어야 할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에 별스럽게 그 안에 있는 어떤 깊은 뜻을 생각할려고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이 성경 말씀에는 이 안에 성신의 감화 감동의 영감이 이 말씀 안에 있기 때문에 이 말씀은 누구든지 다 깨달을 수 있도록 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신학자들이 다 공통되어 가지고 있습니다. 성경에 명백성이 있다 하는 그 말은 성경은 누구든지 바로 깨달을 수 있다 하는 말입니다.
다만 자기가 성경을 볼 때에 아는 것을 하나씩 둘씩 의심하고 에누리하고 저버리는 거기에서부터 어두움이 오는 것이지 이 말씀을 한 절 한 절 읽으면서 확신하는 거기에는 이 말씀에 나타난 전부를 다 통달할 수 있는 것이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주신 방편이요 또 우리 사람들인 것입니다.
어제까지 지난해 성경 읽는 것은 끝을 맺었습니다. 어떤 사람 내가 말 들으니까 자기가 성경을 어쩌든지 몇독을 하기 위해서 새벽 기도도 나오지 못하고 열심히 읽는다 말 들었는데 이 말씀은 이상합니다. 욕심으로 봐 가지고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신 것은 이 말씀대로의 사람이 되고 행위가 되어 그 사람과 행위가 다 하나님과의 밀접한 관계간 맺어지는 이 결과를 맺기 위해서 말씀을 주신 것이지 이 말씀을 자기 욕심대로 이 말씀을 많이 연구해 가지고 자기의 인기를 끌겠다. 또 연구해 가지고 자기가 아주 가치있게 써먹겠다 하는 그 사욕을 가지고 이 말씀을 보면, 이 말씀을 보는 가운데에서 이 사욕이라는 이 모든 것은 제거해야 되지 제거되지 않으면 오히려 이 말씀이 나에게 복음이 되지 않고 정죄하는 율법이 된다 하는 그것을 반드시 보게 될 것입니다. 볼 때에 에누리를 하지 않으면 그런 것을 다 회개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을 때에 자기는 이 말씀대로 행동하는 데에서 이 말씀대로의 사람이 되고 일이 되어지는 이것을 목적으로 두고 하나님이 하신 것이기 때문에 이 말씀을 읽고 행하지 않고 행하는 것을 뒤로 돌리면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만나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성공은 이 말씀을 에누리하지 않고 자기가 아는 대로 그대로 실행하면 거기에 모든 행복이 그 구멍에서 다 나옵니다. 이 말씀을 읽고 듣되 에누리하고 또 자기 마음대로 뒤로 미루고 에누리하고 지키지 아니하는 그 구덩이에 자기의 모든 행복은 다 매장됐습니다. 자기의 모든 행복은 영육의 행복은 다 매장이 됐습니다. 또 자기가 원치 아니하는 모든 좋지 못한 것은 누가 준 것 아닙니다. 전부 그 구멍에서 다 나왔습니다.
그러기에 자기가 이 말씀을 읽고 인정하고 행하는 그 줄기에서 거기에서 자기에게 행복된 것은 고게서만 나옵니다. 딴데 나오는 데 없습니다. 자기에게 불행스러운 그것은 거기에서만 치료되고 제거되어지지 다른 데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말씀은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요 행복의 근원인 이 사실을 믿고 이 말씀에게 달려 드는 사람마다 다 부끄럼을 당하지 않을 것이고 반드시 조만간에 성공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외에 다른 길에서는 아무리 저 보기에 백프로 성공같이 보여지지만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그 속임에 빠져서 귀한 세월을 허송하고 된 줄 알았는데 안되는 그런 어리석은 길을 걷는 것이지 되는 길은 천지를 없애기보다도 그거 이길 외에는 되는 길은 없는 것입니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
○○○권찰 구역 오전 열시 장례차 교회로 옵니다. 남권찰님이 많이 있어야 되겠사오니 많이 오실 것을 부탁드립니다. 이거 뭐 뉘가 많이 가 주는가, 다른 구역에 장례가 났는데? ○○○권찰님 구역, 작은 구역은 몇 구역이 결혼식이나 장례식에 있어서 서로 연합하기로 그렇게 작정이 다 안되어 있습니까? 네.
작정이 되어 있으면 그 작정된 구역은, ○○○권찰 구역과 연합된 그런 구역은 장례 차가 교회로 열시에 온답니다. 그러니까 그때 가서 같이 참석해서 그 일을 잘 감당하도록 그렇게 하셔야 할 것입니다.
저 시골에 가면 상포계라 하는 계가 있어, 상포계. 상포계는 초상 나는 초상계인데, 누가 남 초상났는데 뭐 갈 마음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평소에 계를 모아 가지고 그때 쓸 돈도 모으고 그때에 참여하는 사람들도 모으고 수고할 사람들도 이래 서로 품앗이를 해 가지고, '내 집에 내가 당상을 당했을 때에 이렇게 와 달라. 그러면 너거 당상 당했을 때에 내가 가서 도와 준다.' 그 몇이 모아 가지고, 그러면 누가 앞에 죽을는지 모르지만 먼저 당상되는 그집에는 약속한 대로 쌀 얼마 또 뭐 얼마 사람이 사흘이면 사흘 한정해서 그렇게 서로 품앗이로 합니다.
우리 교회도 이거 우리 식구가 많으니까 부득이 이런 방편을 취해야 되지, 그저 장례 출상났을 때에 사람이 적으니까 남권찰님들 가야 된다 이래 되면 남권찰님들이 심방할 시간 없습니다. 장 거기 나다녀야 되지. 그러니까 서로 이렇게 연합시킨 그런 구역은 이런 일을 위해서 한 것이니까 그 구역들이 책임을 지도록 하십시오.
○○○권찰님 구역과 연합된 그 구역은 한번 손 한번 들어 보십시오. 하나 또 둘뿐입니까? 두 구역이 연합입니까? 네. 두 구역이 연합해서 좀 식구가 적다 싶으면 마음대로입니다. 세 구역도 연합할 수 있습니다. 세 구역이 연합되면 차례 횟수가 자주 돌아옵니다. 편리하지만 자주 돌아올 것이고 또 네 구역도 연합할 수 있습니다. 자유로. 네 구역이 연합하면 횟수가 더 자주 돌아올 터이니까 그만큼 그것을 생각하면서 연합을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두 구역이 적으면 세 구역도 연합할 수가 있습니다.
또 '우리는 아예 식구가 적어도 적은 것만침 우리는 힘이 들지만 횟수는 덜 돌아오겠다.' 그런 분은 또 그래도 또 자유로 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있던 그 개명교회는, 거기에는 개명 농산 봉산 봉계 이 세 교회를 제가 있을 때에 연합을 시켰습니다. 연합을 시켜서 지금도, 하나는 고신이고 하나는 우리 개교회로 나가는 교회들이지만 이 장례 지내는 데에는 지금도 연합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까? 저 박집사님, 지금도 그래 하고 있습니까? 그래 하고 있어요? 지금도 그래 하고 있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서로 돕도록 하고 남권찰님들이 이렇게 자꾸 가서 수고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