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8 19:37
세상의 소금
본문 : 마태복음 5장 13절∼16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13절로 16절까지의 말씀인데, 이런 말씀도 우리가 요절로 외우는 게 좋습니다.
이런 말씀의 교훈은 항시 우리가 기억하고 생각하면서 범사를 살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하는 이 소금에 대해서 여러 가지 해석을 하지 만 소금은 간이 있는 것이고 소금의 그 간은 뭐 세상에서 이런 거 저런 거 작용들을 많이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대체로 소금을 사용하는 것은 뭣 때문에 사용하느냐 하면 소금은 하나의 조미료입니다. 하나의 맛을 갖추는 것입니다. 또 소금은 이렇게 방부제로, 썩는 것을 방1하는 방부제로 우리가 일반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생선 같은 것도 가져와서 그만 간을 안해 놓으면 상하니까 옛날은 간으로 방부했습니다. 요새는 냉동시켜 가지고 하지만. 또 소금은 우리에게 힘을 일으키는 그런 소생시키는 기운을 소생시키는 그런 데 작용합니다. 그런 거 뭐 여러 가지로 다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다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이말은 소금은 다른 물질보다도, 짠 간을 가지고 았는 것이 소금입니다. 그래서 우리 기독자들은 세상이 가지고 있지 않는 특수성을 가지고 있는 그것을 가리켜서 특별히 간이라 이렇게, 소금이라 이렇게 말한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자는 무슨 특수성을 가졌는가? 세상이 하나도 가지지 못한 걸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이 뭐 다문 조그만치라도 가지고 있는 것을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세상은 먼지만치도 가지지 못한 그런 것을 우리가 가진 것이 그게 있습니다. 그것은 뭐인고 하니 예수님의 이 세 가지 대속을 우리가 입고 있습니다. 이거는 세상 사람은 뭐 털끝만치도 입지 못한 것이요 우리만 입고 있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대속을 우리가 입고 있습니다. 세 가지 대속을 특별히 우리만 입고 있습니다. 또 세상이 하나도 가지지 못한 영감을 우리가 입고 있습니다. 또, 세상이 하나도 가지지 못한 진리를 우리가 입고 있습니다. 그러면 세상이 모르는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 이 세 가지를 가진 것이 너희들이다 하는 말입니다.
또 한 가지는 소금은 이것은 녹는 성질이 있어서 녹아집니다. 녹아지면 그 간이 다른 것에게 배어 들어가기 마련입니다. 소금이 간을 가지고 이렇게 녹아지면 그 간이 다른 것에게 배어 들어가서 참 방부도 하고, 또 맛도 내고, 또 동물에게는 소생도 시키고 뭐 여러 가지 작용을 합니다. 이래서 그것을 대체해 가지고 하기는 하지만 짐승도 기르면 그 간을 못 먹으면 안 됩니다. 간을 먹여야 됩니다. 소도 간을 먹고 다 이거 간을 먹어야 그 제대로 됩니다.
이래서, 우리 믿는 사람들은 이 세 가지 간을 가졌는데,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 이 세 가지를 가진 것이 기독자인데, 이 세 가지를 가지고 '녹아지면' 말입니다. 녹아지는 것은 별스럽게 뭐 녹아질려고 혹 생각 하기를 우리가 기독자들은 꼭 희생을 해야 된다 그렇게 생각을 하면 좀 편벽됩니다. 희생할라고 하지 말고, 그 희생하면 자기가 무슨 다른 사람을 위해서 무슨 희생을 해 가지고 어떻게 하는 것처럼 그렇게 교만해지기 쉽고 자기가 스스로 자긍하기 쉽습니다.
녹아지는 것은 이것은 안 녹아지는 사람이 없습니다.
벌써 아이들도 한 달 되면 그 아이가, 자세히 못 봐 그렇지 자세히 보면 한 달 되면 그만치 늙었습니다. 요 아이를 보면 '아, 요거는 한 보름 됐겠다.' 대개 압니다. '요거 한 보름 됐다. 요거는 한 달 됐다. 요거는 한 살쯤 됐네.' 한 살짜리하고 한 육 개월 된 아이하고 보면 한 살 짜리는 그만치 늙어져 버렸습니다. 그만치 늙어 있어 또 육 개월 된 아이와 이제 나 가지고 한 일 주일 된 아이와 비교해 보면 벌써 한 오 륙 개월 된 아이는 늙어졌습니다. 늙어 있어.
자세히 들여다보면 늙었다 말이오 또, 열 살이고 스무 살이고 뭐 오십 살이고 그 나이를 못 속입니다. 아이들을 이래 보면 아이도 보면 나이를 못 속이고 어른도 보면 못 속여요. 보면 언뜩 보면 '참 젊다' 이래도 자세히 보면 다 늙은 표가 다 나고 있습니다. 볼 줄을 몰라 그렇지, 뻐뜩 이거 뭐, 요새는 원청 색칠을 많이 하니까, 색깔을 많이 칠하니까 잘 몰라도 자세히 보면 암만 색깔 칠해 놔도 안다 그 말이오. 또 아는 데를 모르게 하기 위해서 주름 잡힌 것을 또 주름을 못 잡구로 또 그만 뭐 야단을 지기지만 그래도 압니다. 어디 보고라도 압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대로 칠십 년 만에 다 녹는 사람 있고, 팔십 년 만에 녹는 사람 있고, 오십 년 만에 녹는 사람 있고, 요새는 뭐 환갑 셋이 지냈다든가, 그러니까 삼 육 십팔, 팔십 년 지나서 다 녹는 사람 있고, 사람이 녹는 것이 다 하나님이, 정해져 가지고 있고, 또 사람이 좀 잘하고 잘못한 데 따라서 그렇게 조금 가감은 있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잘못하면 기한 전에 생명이 끝 난다고 말했고, 또 네가 잘 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좋은 양약이요 또 장수 법이라 그렇게 했습니다. 이러니까, 물론 사람이, 사람이 세상에서도 오래 살고 또 짧게 사는 그런 차이는 있으나 어쨌든지 늙습니다.
어쨌든지 늙으니까 녹기는 녹는데, 소금이 맛을 잃으면, 간을 가지고 녹으면 참 존귀해지지만 간을 가지지 안하고 녹아 놓으면 참 가련한 것입니다. 사람이 하루 살면 저는 하루 동안에 안 늙을라고 오만 방편을 쓰고 이래 하지만 늙습니다.
그런 노래가 있어. '육국 대왕 진시황이 실이 목지 소우하고 궁심지기소라해서 장생 불사 할라고 했었는데 여산에 고혼이 돼 가지고 있다. 여산에 묻혀서 다 외로운 혼이 돼 가지고 있다.' 그런 노래가 있어. 이와같이 사람이라는 것은 하루 지내면 하루 지낸 것 만치 녹아지는 것입니다.
그뭐 희생한다 그만 이렇게 생각하지 말고 사람은 하루 지내면 그만치 녹고, 십 년 지내면 그만치 녹았고, 칠십 년 지내면 그만치 녹았고, 하루 하루 살면 그만치 녹는데, 네가 소금이 맛이 변치 안하고 네가 녹는데, 주의 대속의 공로로 녹고 영감으로 녹고 진리로 녹고, 영감과 진리와 대속으로 하루 생활을 하면서 하루 생활에 하루 모가치가 녹아지고 이리하면 너는 가치있어서 쓸데 없는 것 반대로 쓸데 있는 사람된다. 언제든지 성경에 하지 말라 했으면 반드시 하라는 것과, 외쪽 말이 아니고 양 면을 같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 전체는 다 상대적인 그런 말씀입니다. 하라고 했으면 하지 말라는 것이 있고 하라 했으면 요거는 하고 요거는 하지 말아라. 하지 말라 했으면 요 반대로 요거 하지 말고 요거 하라 그런 상대성으로 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참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 가지를 잊어버리고 녹아지신 예수님의 대속과 영감과 진리 이 세 가지를 버리고 제가 뭐 어떻게 존귀' 게 살았든지 영광스럽게 살았든지 권세 있게 살았든지 아주 돈벌이를 많이 하는 생활했든지 어떻게 살았든지 맛을 잃으면, 어떻게 살았든지 이 세 가지를 잃고 네가 한 시간 하루 이렇게 살아서 녹아졌으면, 녹아지는 것은 모든 사람이 꼭 같이 녹아집니다.
안 녹아지는 사람 하나도 없습니다. 전부 다 같이 녹아져요. 녹아지는 것은 한 사람도 안 녹아지는 사람 없고 전부 꼭 같이 다 녹아집니다. 안 녹아 질 줄 알아도 제가 뭐 안 늙을 줄 알고, 안 죽을 줄 알고, 없어지지 안할 줄 알아도 아무리 해 봤자 그렇습니다.
녹아지기는 다 같이 녹아지는데, 다만 기독자가 소금의 맛을 가지고 녹아지면 그것이 뭐 굉장히 쓸모 있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에게도 쓸모 있고 만물에게도 쓸모 있고 원수에게도 쓸모 있고, 기독자가 이 세 가지 요 생애, 세 가지 요것이 기독자의 생명인데, 요것을 가리켜서 기독자의 생명입니다. 예수님의 피와 성령과 진리는 우리를 살린 생명인데, 맛을 잃지 안하고 사는 것이 뭐이냐 하면 새사람으로 사는 것입니다. 새사람으로 사는 것, 참사람으로 사는 것, 새생명으로 사는 것, 피와 성령과 진리로 중생된 우리가 피와 성령과 진리에 중생된 사람으로 하루 살면 겉사 랍은 녹아지고 속사람은 자꾸 새로와집니다. 이래되면 굉장히 쓸모 있는 사람된다 그는 창조주에게도 쓸모 있고 피조물들에게도 쓸모 있고 만물에게도 쓸모 있고 굉장히 중요하고 요긴한, 그런 참 필요한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일을 이룬다. 하루 살았으면 그 하루 생활한 것은, 하루 산 것은 없어서는 안 될 그 생활을 이룬다. 만물들이 다 환영하고 존대하고 고대하는 그 가치를 이룬다. 쓸데 없는 게 아니고 아주 쓸모 있는 것이 된다 가치 있는, 아주 필요한 것이 되어진다.
'쓸데 없어 밖에 버리워' 그 반대로 밖에 내서 점점점점 폐물이 돼 가지고 이와같이 지금 나가는 게 아니고 점점 보배가 돼 가지고 안으로 점점 환영을 받아 가지고 이제 들어가게 된다. 점점 귀중하게 된다 그 말이오. 밖에 버렸다는 말은 이거는 점점 가치 없이 타락해진다 그말이고, 그 반대로 안으로 들어가는 거는 점점 높아진다 그 말이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도 제일, 모든 관리들로 말하면 어디가 더 높으느냐? 중앙청으로 들어가면 높으다고 하지 않습니까? 또 청와대로 들어가면 제일 높으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꾸 들어가는 것, 또 벌써 그것을 밖으로 자꾸 쫓겨나가면 좌천이라 하는데 자꾸 쫓겨나가 가지고 밖으로 나간다 그 말이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기독자들이 이 세 가지로 살면, 하루를 이 세 가지로 살았을 때에는 대단히 그는 모든 존재들에게 없어서는 안 될 필요 한 그런 보배가 된다. 아주 필요 있는 요긴한 그런 존재가 된다 밖으로 버리는 게 아니라 그는 점점 중앙으로 모셔서 점점 그는 존귀하게 모든 것이 점점 더 필요한 존재로서 환영해서 중앙으로 모시게 된다 위로 모시게 된다 자꾸 그는 올라간다. '밖에 버리워' 밖에 버리워 반대로 안으로 영접한다.
또, 사람에게 밟힌다. 사람에게 밟힌다 그러면 밟힌다 말은 아주 사람에게 천대받고 무용지물된다 사람에게 천대받고 무용지물된다.
그러면,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이 제가 돈을 위해서 살든지 권세를 위해 살든지 행락을 위해 살든지 명예를 위해 살든지 뭐 지위를 위해 살든지 온 세계가 저를 좋아하도록 노벨상을 위해서 살든지 노벨상 받은 그게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되는 저 아닙니다. 노벨상 받은 그게 큰일 한 줄 알지만 아무짝도 아닌 일 했습니다. 그 사람은 크게 속았습니다. 속았는데, 다만 우리가 할 일은 뭐인가 하면 예수님의 대속 입은 이 일을 우리가 할 일입니다. 대속 입은 것은 이거는, 사죄는 진리를 범하지 안하는 것이요, 영감을 범하지 안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범하지 안하는 것이 사죄를 입은 것이오. 칭의는 뭐이냐 하면 영감대로 진리대로 그 하나님에게 피동되는 이 복종하는 것이 그것이 칭의를 입고 사는 것이오 또 화 사람에게 밟히니까 화친의 새생명을 입은 것은 뭐이냐 하면 우리가 생명은 하나님과 연결이라 하는 것을 우리가 자주 들었고 또 배웠습니다. 하나님과 화친의 생명 얻는 그거는 뭐이냐 하면 이제 영감도 다 순종했고 진리도 다 순종했으니 이제 하나님 본체만 남았습니다. 본체와 이와같이 결합하는 것은 어떤 게 결합한 건가 하면 하나님은 원형이요, 하나님은 원형이신데 그 하나님의 모형을 자꾸 입는 것이 그것이 하나님가 결합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 세 가지로 사는 것, 하나님의 모형으로 살고, 영감과 진리 와 하나님께 순종하는 생활로 살고, 이 모든 영감파 진리와 하나님을 범 하지 않는, 거역하지 않는, 범하지 않는 생활하는 이 생활로 한 시간도 살았으면 그 한 시간 산 것은 참 천상 천하의 창조주도 그렇고 피조물도 그렇고 다 이거는 필요하다.
창조주와 되조물에게 아주 보배롭고 없어서는 안 될 요긴한 것이 되어진다.
이러니까, 점점 너는 중앙으로 모셔 들인다. 자꾸 너는 가치있으니까 점점 더 네가 중앙, 중용을 차지하게 된다. 한문에서는 '중용지도라' 중용지도라 하는데, 제일 제일 중추심, 제일 중추점, 네가 점점 중심 인물이 된다. 그러면 하나님 한 분이 중심인데, 하나님 한 분이 중심인데, 이 들 어붙어 가지고 제일 모든 존재에게 하나님 한 분과 가까이 붙어 가지고 중심 존재가 된다 그 말이오. 또 사람에게 밟힘 된다는 게 아니라 모든 존재들에게 다 이렇게 존대받는다. 이것을 가리켜서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 마태복음 5장 13절을, 요것을 늘 항상 잊어버리지 말고 생각해서, 우리가 뭐 다른 사람을 위해서 희생을 한다 그런 생각을 가지면 안 됩니다. 우리 할 일을 우리가 하는 것이지 뭐 희생하는 거 아니오 안 하면 우리가 망하고 죽는 것인데, 그러기 때문에 내가 생명으로 사는 생활하는 것이요, 나 사는 생활하는 것이요, 내가 생명으로 사는 거요 딴거 하지 말고, 피로 우리가 살아났고 영감으로 살아났고 진리로 살아났기 때문에 내가 살아난, 나를 살린 내 새생명 가지고 사는 생활하라 말이지 뭐 누구를 위해서 희생한다는 그런 것을 우리가 생각 가지면 안 됩니다. 세상에는 희생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 제일 제가 하는 데, 제일 제가 하고 제 생활 제가 하는 것인데 잘못하면 망하고, 잘하면 저 건강해지고 좋아집니다. 예수 안에 있는 새사람의 인격이 점점 장성해지고 강해지는 것이지 뭐 희생이라는 그런 말은, 사람들이 너무 이기주의로 살기 때문에 남을 위해서 살아라 하는 것 그런 것을 표시했지만 남을 위해서 살 자가 없습니다. 다 저 위해서 사는 것이오. 남을 위해서 사는 게 아니라 저를 위해서 사는데, 저를 위해 사는 것이 인간들이 타락해 가지고 완전히 사망법을 알고 있기 때문에 희생하는 그것이 네 생활 네가 하는 것이고 너를 유익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그저 알아 듣도록하기 위해서 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소금 그 특수한 간을 가지고, 짠 간을 가지고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세상이 가지고 있지 않는 특수성을 우리 기독자들이 세 가지 가지고 있으니 이 세 가지는 우리의 생명이요 우리의 지능입니다. 이 세 가지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요, 또 무한한 지능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뭐 굉장한 지혜요 굉장한 능력이요, 무한한 지능입니다. 그러면 영생과 무한한 지능으로 한 시간 살았으면 그만치 장성해졌습니다. 또 두 시간 살았으먼 그만치 장성했습니다. 그만치 가치있습니다. 이렇게 기독자야, 너희는 이 세 가지 복수성으로 살고 있는 특수의 존재니까 예수님의 대속의 피와 영감과 진리 이 세 가지로 대속되어 있는 이거는 천민이요 특수 창조물이니까 네가 이렇게 이 세 가지로 살면 너는 쓸 데 없는 거 반대의 너는 참 쓸모 있는 것이 되어진다. 모든 존재에게 네가 없어서는 안 될 그런 존재가 된다. 또 점점 밖에 버리우는 게 아니라 안으로 점점 중앙으로 영접해서 점점 네가 만물의 중심이 된다. 그러면 우리는 만물의 중심이 되고 우리 중심은 하나님이 되고, 이러니까 이렇게 다 되어지는 것이 이것이 무궁세계 가 가지고 하나님 계시고 하나님께 옆에 붙어 가지고 하나닙의 수족으로 지체같이 되게 돼 가지고 모든 만가지를 통치하는 거, 이라니까 사람에게 밟히는 게 아니고 모든 존재에게 이렇게 다 존대를 받게 된다. 존대를 받는 것은 자기들에게 필요하기 때문에 존대받는 것입니다.
이래서, 만물들이 탄식하면서 고대하는 것은 하나님의 뭇 자녀들의 자 유함에 이르는 것이라. 자유함에 이르는 것이라 말은 그거 무슨 말이냐? 영감과 진리와 예수님의 피공로로 이렇게 잘아난 자가 고걸로 살면 제가 자유하는 자요, 피로 살고 영감으로 진리로 살면 제가 참 자유로 사는 것이고, 이 세 가지로 살지 안하는 이것은 원수에게 꺾여서 지금 감옥 생활하는 것이요, 자유 생활이 아니고 이거는 강제에 끌려서 종노릇으로 사는 것이지 자유 생활이 아니라 말이오.
그러니까 그런 것을 원하고 있다.
그래서 이것을 버리면 우리 기독자들이 이 세 가지를 버리고 살면 제가 어떤 고관 대작이나 어떤 부귀 영화나 어떻게 세상 지식을 다 차지했다 할지라도 이 세 가지를 버리면 너는 한 시간 살았으면 한 시간 삶으로 인해서 그만치 쓸모 없는 인간 됐고, 쓸모 없는 인간 됐고, 그만치 너는 타락해서 밖으로 버림 됐고, 그만큼 모든 존재에게 너는 짓밟히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당신이 만들어 놓은 입법이요 제도입니다.
그라고 난 다음에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하는 건 말씀했는데. 빛이라는 말씀은, 이 빛이라는 거는 뭐이냐 하면 세상은 어두운 것은. 어두운 것은 이 조물주가 절대 조물주요, 주권자요, 또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요, 주권 개별 십리자시오, 창조주시인데, 이분인데 이분이 지금 뚜렷이 해 가지고 모든 걸 일 분 일 초라도 이분의 혜택이 아니면 죽습니다. 그러면, 숨쉬는 것도 그런 것도 이분이 아니면 그만 숨 쉴 수 없습니다. 공기 없어. 이러니까, 이분 아니면 일 분 일 초도 살 수 없고 존재 할 수 없는 것이요, 또 근본 처음에 존재된 것도 이분으로 말미암아 존재 된, 이분이 이렇게 뚜렷한데, 이분의 법을 하나도 모르고 이분이 지금 모든 피조물 너희들은 이렇게 살아라 하는, 입법을 해서 법칙을 주셨는데, 이 생의 법칙을 줬는데 이 법칙은 하나도 하지 안하고 이와같이 살면 것은 전부 자멸하는 것이요 자살하는 행위기 때문에 한 시간 살았으면 한 시간 자멸했고 두 시간 살았으면 두 시간 자멸했기 때문에 이것을 가리켜서 어두운 세상이라 그렇게 말했습니다. 이 조물주의 법을 모르는 세상이라 말이라. 어두운 세상은 조물주의 생의 법칙을 모르는 세상이라.
이래서, '들에 있는 백합화를 봐라. 이 들풀을 봐라.' 이렇게 말씀을 하신 것은, 또 새도 말하고 이런 거 다 말했습니다. 그러면 그런 게 뭐이냐? 하나님의 볍칙이 자, 마치 '식물은 네가 땅에서 흙과 수분을 먹고 살아라. 고기 너는 물 속에서 살아라. 새는 너는 또 공간에서 살아라' 이게 하나님이 주신 법칙입니다. 법칙인데, 이 법칙을 따라서 살지 안하고 새가, 아주 잉어가 물 속에서 풀풀 뛰면서 아주 헤엄치며 사니까 좋다 싶어서 '아이구 나도 물 속에 가서 살겠다' 하고 제가, 아주 날음 잘 나는 연자가 있다가서 '내가 저게 들어갈진대야 내가 더 맵시 있게 잘 살겠다' 하고 연자가 물 속에 들어가면 저는 죽습니다. 왜 죽습니까? 하나님이 지으실때 너는 공간에서 살라 했는데 물 속에 들어가니까 하니님이 주신 법칙을 어기니까 죽는다 그 말이오. 또 아주 잉어가 힘 있게 풀 한번 뛰어 보니까 공중에 뛰어 보니까 기분 좋으니까 '나도 지금 공중에 나는 새 모양으로 한번 공중에 한번 살아봐야 되겠다' 공중에 올라오면 저는 죽는다 그 말이오. 죽어. '아, 이 식물 저런 게 나는 무슨 팔자로 한 군데 꼭 꼽혀 가지고 내가 이와같이 살 거고? 나도 지금 자유로 이래 한번 돌아다녀 보겠다' 하고 식물이 이리 저리 돌아다니면 빠짝 말라 죽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모든 만물이 하나님이 주신 그 법칙을 떠나지 안하고 법칙대로 살아야 그것이 무성하고 하나님이 주신 그 생명대로 제가 제 구실을 하지 그 법칙을 떠나면 죽는 것처럼 인간도 법칙 떠나면 죽는다.
그런데, 성도는 성도의 법칙이 따로 있으니까 너는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면 그 나라 백성으로 살라 말이 그 또 그 의를 구하라 말은 예수님의 대속으로 살라 말입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지고, 하나님과 벌어진 것이 연결된 것이 의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로마서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의가 있는 걸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있고 인간의 의가 있는 걸 말했는데,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과 하나님 본체와 그 본체의 역사인 영감과 영감이 우리에게 부딪친 그 진리, 이 세 가지와 연결 돼서 연합되는 것이 의인데, 이 절단된 것을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하나님이 사람 입고 오셔 가지고 이 연결을 시켰습니다. 이 연결이 하나님의 의요. 이 의를 우리에게 우리 대신한 의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주셨으니까 이 의를 우리가 믿음으로 입고 벗지만 안하면 사람들의 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라 말이 내나 소금으로 살아라 하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너희들은 세상이 모르는 특수성으로, 세상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그거 해야 사는 줄 알지만 너희들의 생의 법칙은 그 나라와 그의다. 그 나라라 말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통치받는 그 생애를 말하고, 의는 하나님과 친합된 것을 말하니까 하나님과 결합돼 가지고 하나님과 결합된 것이 그분에 따라서 움직여라, 그게 너거 생활이다, 그렇게 말했어.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믿는 사람들이 이 세 가지를 벗으면 그만치 천 해집니다.
그만 한 시간 벗었으면 당장 천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시간 벗으면 당장 천해지요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세 가지를 벗어도 우사를 당하지 안하고 이 세 가지를 벗어도 당장 냉면(冷面)을 먹지 안하고 이 세 가지를 벗어도 천대를 받지 않는 그런 사람은 벌써 다, 세상 사람 이 된 사람이오. 세상 사람이 된 사람입니다. 그거 뭐, 누운 것이 말이 야, 자, 누운 게 자빠지면 무슨 표가 나요? 누운 게, 뭐 누운 게 자빠져 가지고 있는데 뭐 더 자빠질 게 뭐 있소? 이 천해져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이 세 가지를 벗교 살아도 표 없고 이렇지만, 요 세 가지를 입고 사는 사람은 만일 말 한 마더에 요 세 가지를 벗었으면 벗은 그 자리에서 당장 냉면(冷面)을 먹게 됩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십니다. 그만 큰 수치를 당하고 당장, 하, 저거는 나한테 농담을 매일 만나면 하루 종일 나한테는 농담 말만 하면서 농담하니까 나도 한번 농담할라고 농담해. 내가 한번 농담 척 하면 당장 딱 끊어 버립니다. 딱 끊고 큰 코방을 주고 크게 그만 절단을 내버립니다. 그게 기독자입니다.
제가 제 체험인데, 제가 고제면에 있을 때에 그면 서기들이 오면 날 만나면 떨어지지 안해. 떨어지지 안하고 자꾸 농담합니다. 농담하면 자꾸 이래 농담하는데, 그래 농담하기 때문에 나도 농담을 한 마디 했다 그 말이오 내가 그걸 모르고. 농담하기를 뭐라고 농담한 게 아니라 '야, 너 뭐 잘 먹을라고 그라는데 잘 먹으나 못 먹으나 사람은 다 같지 뭐 별거 없다 요새 많이 좀 번질번질 하구나.' 이래 놨다 말이오. '번질번질 하구나' 친구기 때문에 '번질번질 하구나' 요라니까 저거는 뭐 십 배 뭐 십 배도 더 되는 그런 말 하루 종일 하면서 아, 그말 한 마디 했더니만 그만 딱 걸어 가지고 '자네가 날 얼마나 무시하고 멸시해서 하는 말이냐?' 아, 이래 가지고 그만 어떻게 노를 해 가지고 달라붙는지, 그래 내가 그만 '아, 이거 내가 하나님 앞에서 이거 농담을 해서 그렇다. 그 사람에게 그저 진실되이 말하지 안하고 비꼬우는 이런 말을 했으니 내가 죄를 지었다.' 그래 내가 자복을 했습니다. '아, 내가 잘못했다. 나는 하도 자네들은 나한테 자꾸 그렇게 농담하기 때문에 나도 한번 친하게 받아 준다고 해 가지고 그런 내가 농담을 한번 했는데 내가 잘못했다.' 그라니까 '자네는 농담이 아니다.
날 멸시해 그렇지. 자네가 언제 농담하나? 어찌 그렇게 사람을 멸시하노?' 그래 가지고 내가 싹싹 빌어 올렸소. 뭐 얼마나 내가 빌었는지. 그래 내가 그때 회개를 많이 했어. 다른 세상 사람은 믿는 사람에게 이렇게 저렇게 해도 믿는 사람은 세상 사람에게 그래 하지 못합니다. 그들이 빛인 줄 알고 있습니다. 빛인 줄 알기 때문에 '암만해도 저거는 실수하지 않는다' 이랬는데, 그 실수에서 만일 더하면 뺨맞습니다. 하나님이 그와같이 하시는 것이오.
그러기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 이 소금의 간을 잊어버리면, 이 세 가지를 잊어버리고 살면 당장 천물 돼. 여러분 가만히 생각해 보십시오. 이 세 가지, 벗고 살면 말 한 마디에 그만 천물돼 버리고 행동 하나에 아주 천물 돼 버립니다. 천물 되고, 또 안 믿는 사람이나 믿는 사람도 그만 천물이 돼 가지고 있는 것은 더 천물될 게 뭐 있습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쓸 데 없어 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하는 요 말씀을 단단히 기억하고, 요 말씀은 평생 생각하고 살아야 돼요. 말씀도 어떤 말씀은 쓰일 때도 있고 안 쓰일 때도 있지만 이런 말씀은 항시, 스물네 시간 항시 계속해서 우리에게 쓰여지는 말씀인 것입니다.
네,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