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18:39
목회충성
본문: 빌립보서 3장 8절 - 11절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이것은 본문 설교 아닙니다. 설교 아니니까 이거는 필기하지 마십시오.
부흥사와 목회자가 다릅니다. 부흥사와 목회자가 다릅니다. 부흥사는 퍼뜩 지내 가면서 그 시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서 흥분하게 하는 것이 대개는 부흥사고 목회자는 일시 그 사람의 사람들의 마음을 흥분시켜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고 그 사람들이 실제로 자기의 실생활에서 하나 하나 고쳐나가는 이 일을 하는 것이 목회자입니다.
부홍사는 목회자가 안됩니다. 일주간 동안에는 크게 역사를 했는데 그 역사가 차차 목회에 가서 첫 달보다 고 다음달에 교인들에게 아무런 새로워지는 기 없고 석 달되면 더 적고 일 년 되면 더 적고 이 년 되면 더 적고 삼 년 되면 더 적어.
교인도 안 늘고 교인들의 그 변화도 없고 결국은 그 자리에서 배척당해서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또 신학자들이 목회자가 안됩니다. 신학자들도 목회 못합니다. 신학자들이 목회를 시작해 봤자 많이 나가면 그저 일 년도 채 안 갑니다. 일년도 안 가서 그만 그 신학자에게 받을 거 다 받았고 또 들어봐야 교인들 자체에게 아무런 새로워짐이 없고 이러니까 아무 거게 대해서 맛이 없으니까 그냥 견디다 견뎌도 삼 년이 안 돼서 그 신학자는 그 교회에서 사면을 해야 됩니다. 안하고 못 견딥니다.
아마 여러분들이 멀리 있는 신학자들을 모르면 가까이 아는 대로의 신학자를 들추어보면 알 것입니다. 그거는 왜 그런고 하니 자기가 예수 믿는 일에 교리와 신조는 그것은 하나의 예수 믿는 벼릿줄입니다. 벼릿줄 강령입니다. 벼릿줄이요.
원 이 집을 짓자면 마치 뼈대 하는 거와 같은 그 예수 믿는 이치의 뼈대와 같은 것입니다. 뼈대가 안 실하면 안되지마는 뼈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생활의 뼈대와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처음에 들을 때는 그것을 못 가졌던 사람들은 듣고 좋아하지마는 실제의 자기가 생활하는 데에는 그것이 관련이 있지마는 자기 생활이 난제 도와 가지고 거게 관련이 있는 것이고 다만 방편만 가르쳐 주는 기라 그거요.
예를 들면은 '이거는 남으로 가야 된다 북으로 가야 된다' 그것만 가르쳐 주는데 남으로 가는 거기에는 강도 있고 바다도 있고 개울도 있고 태산도 있고 뭐도 있는데 남으로만 간다고 했는데 남으로 갈라 하니까 막상 안되겠다 그거요.
이러니까 그 사람이 가다가 가는 걸음이 그만 중단 돼 버렸습니다.
이제 목회자는 어떤 기 목회자인고 하니 남으로 가야된다는 그것을 말을 해 주고 내가 남으로 갈라 하면은 이런 일이 있고 요게 좀 가면은 호수가 있고 호수가 있을 때에는 내가 그때는 왼편으로 돌아가야 되지 오른편으로 돌아가면 거게는 다시 더 갈 수 없는 한 길이 된다. 왼편으로 돌아가라 오른편으로 돌아가라 거기는 내가 가면은 큰 덤불이 있는데 네가 그것을 뚫고 나갈라 하면은 그거는 밀림의 그 광야와 같기 때문에 들어가면 죽는다 그걸 만나거든 거기 들어가지 말고 요리 돌려서 요 덤불 요리 가라 고리 가면은 어떤 나무 하나 있으니까 고 나무 있는 데로 통과해 가지고 또 조금 가서 보면은 거게 조그마한 소로길이 나는데 그 소로길이 나오거들랑 고 길로 나서 거 가면은 갈래길이 세 개가 있다.
세 개가 있는데 네가 그 오른쪽으로 가도 안되고 왼쪽으로도 안되고 가운데로 가거라 고렇게 가면은 고 다음에 또 갈래길이 둘이 있다 둘이 있으면은 그때는 네가 오른 길로 가야 되지 왼 길로 가서는 안 된다.
자꾸 요렇게 요것을 가르쳤는데 그것을 자기가 남쪽을 향해서 가보니까 과연 그 길이 있습니다. '아이구, 이 길이 있구나 이럴 때는 이리 가야 된다 했지' 고리 갑니다. 그리 가면은 또 거 가서 보니까 아 그 형통하게 갔습니다. 그 다음 보니까 과연 또 그 셋째 길입니다. 세 가지로 갈라지는 길이 나옵니다. 두 가지로 갈라지는 길이 나옵니다. 덤불이 나옵니다. '아, 거기는 가면 큰 내가 바다와 같은 강이 있을 터이니까 거게 가거든 거기서 어느 쪽으로 가면 거기서 이제 배를 건네 주고 있는 그 사공이 있으니까 그 배를 내가 선가를 얼마를 주고 건너면 네가 건너갈 수 있을 것이다' 그 말을 듣고서 가보니까 그 큰 바다 같은 호수가 있고 강이 있고 거기 보니까 그대로 가라 하는 데로 왼쪽으로 조금 나가니까 어떤 사람이 배를 가지고서 그리 있어서 물으니까 고 돈을 딱 얼마 선가를 내라 하기 때문에 주니까 탔다 말이요.
이러니까 갈수록 이제 그 목회자에게 신임을 합니다. '아, 그 분이 말하는 대로 하니 되더라. 과연 말할 때는 도무지 그렇지 않다고 그 이치에 맞지 않는 말을 한다고 했는데 보니까 가보니 겪어보니까 세월을 지내보니까 맞더라.' 이제 이것을 가리키는 것이 이것이 목회자입니다.
여러분들이 이미 알기는 알 겁니다마는 ○○○ 조사님이라고 하는 그분이 이 경남 지방서는 그때 개혁 운동을 하는데 경남 지방에서는 개혁 운동을 제일 많이 한 사람입니다. ○○○ 목사님이니 이런 분들은 교리를 말했고 그분은 교리뿐만 아니라 참 실제로 그 부흥 운동을 했고 목회 운동을 했고 개혁 운동을 아주 힘있게 했습니다. 그래서 ○○○ 목사님이 지금 ○○에서는 제일 머리되는 목사님인데 그분이 영도 제일 교회에 시무할 때입니다.
시무할 때인데 그 ○○○ 조사님을 청해 가지고서 거듭 세 번을 집회를 했는데 또 집회하고 난 다음에 좀 얼마 있다가서 또 청해 집회를 하고 얼마 있다가 또 세 번 거듭 집회를 합니다. 그때에 그분이 뭐 참 은혜가 있었고 불이 떨어졌습니다. 제가 진주 성경학교 가서도 만나 보니까 사람들이 조금 은혜 받은 사람들이 있는데 그분들 보니까 한 무리는 그 ○○○ 조사 님한테서 은혜 받은 사람 또 한 무리는 ○○○ 목사님한테서 은혜 받은 사람 그 다음은 다른 데서 온 그 학생들 예수 믿는 냄새가 안 납니다. 향기가 안나요. 그 두 군데서 제일 인기 있었습니다.
그때는 그분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는 그 가르쳐 주심을 따라서 자기가 이르는 곳곳마다 설교를 할 때 실제로 자기가 실생활을 하면 어떻게 된다는 그것을 자기가 신앙 생활을 했고 또 거게 대해서 하나님이 깨닫게 해주시니까 자기가 깨달았으니까 또 그것을 노정을 알고 신앙 생활했으니 노정을 알아서 아, 목회자의 말한 대로 네가 지금 동으로 가는 이것이 그리 갈 때는 동으로 가야 된다 남으로 가야 된다 가는 데는 네가 가면은 요런 길이 나올 것이고 요런 길이 나올 것이고 네가 요것은 요 계명을 지킬라 하면은 요런 형편 요런 형편이 나올 것이고 말씀 하나 지킬라 하면은 요런 그 형편이 나올 터이고 할 터이기 때문에 요럴 때는 조리 하면 실지로 시공 설계를 하는 설교를 했단 말이요.
했는데 이걸 오랫동안 다니니까 이제 그분의 원고가 있습니다. 있어 가지고서 그것을 처음에 자기가 할 때에는 그 시공 설계 설교로 했는데 얼마 동안하고 나니까 차차 차차 간추렸어. 간추렸어. 일본말로 야마가끼 한다는 말과 같이 간추렸단 말이요. 위에 대가리만 성금 성금 지었단 말이요. 아 고기서 요 아주 세부 요거 위에 소지는 무엇이다. 소지 다음에 대지는 뭐이다. 대지 위에 제목은 뭐이다 요렇게 간추려 지었단 말이요. 간추려 지어 가지고서 이제는 자기가 그것을 할 때에 자기가 환하게 알고 있고 이러니까 그것을 하면은 자기가 보기에는 먹기가 그 성미에 안 맞다 그 말이요. 자기는 벌써 장성해졌는데 이걸 뭐 어린아이 처음에 밥 먹일 때는 밥띠기 한 알씩 또 어머니가 입에 씹어서 그 다음에 이래 또 뭉개 가지고 밥띠기 하나 밥알 하나씩 요래 집어넣는데 나중에 커지니까 장성한 사람이야 한 알 그까짓 거야 먹고 됩니까? 이러니까 그만 한 숟가락 푹 떠서 이래 먹어야 돼지지 안 된다 그 말이요.
이래 저는 그래 먹을 수 있게 자랐지마는 그 밑에 있는 그 어린 아이는 이거는 한 숟가락 떠 먹이면 그만 목 막혀서 죽습니다. 이럴 줄 알고 이것을 한 낱씩 이 죽을 썩어서 먹이고 어쩌고 이라는데 자기 요랑 하고 그만 한 숟가락씩 폭폭 떠서 덤비기 이리 안기니까 이제 그 강령만 들어서 말하고 자꾸 축소 축소 자꾸 해 가지고서 거기서 더 간추리고 간추리고 이 간추려 지어 놓으니까 자기는 맛이 있어서 그걸 설교를 하지마는 처음에 닥칠 때는 간추려 이래 말하니까 교인들이 그 제목을 이 전부 흩트려 놓은 걸 간추려 이래 말하니까 그 듣기를 좋아한다 말이요. 처음에는 좋아하지마는 그게 간추리면 간추린 그까짓 몇 개 됩니까? 안되니까 몇 개 듣고 난 다음에는 그 다음에 새로 들을 기 없어. 장 간추린 그런 거만 말하니 그 구경만 하지 실제 먹지는 못하겠다 말이요. 이러니까 나중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그분들이 처음에는 목회를 했는데 나중에는 목회 해봐야 교인들이 은혜를 못 받고 이러니까 자기 딴에는 그걸 오해를 해 가지고서 이 교인들이 이것이 전부 이런 그 아무데 가서 하면은 한 시간이면 은혜를 받는데 일주 간이면 큰 은혜를 받아 가지고서 뒤비지고 야단인데 이거는 요 선지자가 고향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거 같이 이 본 교회 교인들은 은혜를 못 받는다 이래 가지고서 이제 할 수 없어 목회를 못하고 그분이 이제 부흥사로만 돌아다니기 위해서 제가 그걸 벌써 앉아서 들었었습니다.
아, 가죽 가방을 그때는 가죽 가방이 참 귀한 때입니다. 뭐 그러니 은혜를 끼쳐 싸니 돈 많습니다. 이래서 자기 가정은 사례 가지고서 살도록 내둬 버리고 가죽 가방을 큰걸 둘을 만들었어. 둘을 만들어 가지고서 하나는 자기 의복을 챙겨 넣어 가지고, 하나는 원고를 챙겨 넣고 이래 가지고서 다닙니다. 그래 가지고 했는데 처음에는 또 그 부흥회도 한 번 듣고 두 번 듣고 세 번 들을 기 없다 그거요. 왜 실지의 그것은 하나 구경만 하고 윤곽만 들었지 자기 실생활에는 실지로 하려고 달라 들어 보니까 그 상관이 없는 일이거든. 이래서 나중에는 그만 그래 가지고 다니면 얼마든지 세월 날 줄 알았는데 나중에는 부홍사로 청하는 사람이 없어. 할 수 없어 모두 말하기를 ○ 조사님 그래 자꾸 뭐 그래 다녀도 인제 한 달 내 가야 청하는 사람 없다 말이요. 없으니 자기가 가선 지금 부흥회 해 줄라하고 이래도 찾아다니면서 이래도 나중에 가 사람이 안 모인다 그거요.
이러니까 할 수 없어서 그 목회를 해야 되지 그러면 안됩니다. 맡아 가지고 목회를 하십시오. 목회 하겠다고 몇 번 달라 들었습니다. 달라 들어야 목회가 돼야지. 나중에 목회 안됐습니다. 딴 데서 인자 그 다음에는 어데든지 그분이 말이 강단에만 세워 주기를 원해서 지금 그래 다녀도 어데 가면 지금 강단에 세워 줄까 해서이래 다니는데 한두 번이지 그 다음에는 없어 그만 자기도 그만 나중에 가서 그 습성이 돼 가지고서 간추려서 그 강령만 가지고 이래 해 버렸지 그 밑에 세밀한 그거는 안 된다 그 말이요.
이 강령은 쭉 빼 가지고 있으니까 마구 이래 고함을 지르고 외치고 이럴 수 있지마는 그 밑에 잔뿌리는 말하기가 안 된다. 잔뿌리는 잔뿌리는 은혜가 있어야 잔뿌리가 나오지 그리 아니면 잔뿌리가 나오는 기 아니라. 그게 또 자기가 실지로 신앙 생활을 해 가지고 그 생활 가운데서 자기가 경험하고 체험한 거기서 그 잔뿌리가 나오고 또 그 교인들도 거게서 깨달아지는데 그기 자기가 안 된다 말이요.
그것은 자기가 참 엎드려 기름을 짜 다 바쳐서 생각하고 생각하는 그 생각에서 자기가 실지로 생활할라 하면은 그때는 어떤 그 사람의 형편이 되느냐 실제로 설교 말씀대로 살라고 하면은 실상이 닥친 그 현실 실지로 닥친 현실 그것을 자기가 미리 깨닫고 느끼고 해 가지고서 그 현실을 인해서 거게 대비를 하고 그 현실에 방편을 생각하고 이런 그것이 그게 예비적 영감인데 그 영감을 받아 가지고 자기가 미리부터 그것을 알고 요럴 때는 요렇다 조럴 때는 조렇게 해야 된다 고런 것이 나올 것이라. 이것을 똑똑히 알았다 그 말이요. 이것을 알아 가지고 미리 준비하고 실지로 생활할라 하니까 그 일이 인자 현실이 닥쳤다 말이요. 현실이 닥치고 보니까 자기가 연구한 것보다는 연구한 거 보다는 허무합니다. 자기는 그렇게까지 되리라 연구했는데 오히려 상대방들은 준비되어 있는 것이 나는 열 개가 오리라 하고서 준비했는데 온 것이 기껏 다섯 개 밖에 안 왔다 그 말이요. 이러니까 이것은 뭐 놀며 해도 그까짓 기야 싸워 이기지.
이래서 자기가 미래의 현실이 닥치는 그 현실보다 예비적 영감에서 더 이런 면이 있으리라 이런 면이 있으리라 이랬는데 그분들이 그걸 챙기지를 못해 가지고서 오히려 자기 생각하고 미리 연구해서 대비한 것보다는 허무하다 그 말이요. 이 사람이 다 승리했어.
이러나 자기가 미래에 대해서 뭐 이렇다 이렇게 생각했는데 턱 닥치고 보니까 그것은 윤곽 말한 거 그것은 참 꿈에 본 거 같고 그 하나 말하자면 원리 같고 원리는 그 이치 있으니까 이치는 있지마는 실지로 닥쳐 보니까 생각도 못했고 느끼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했고 거게 대해서는 아무 관심도 없는 이런 일을 턱 닥치니까 제까짓 기 패전 안하고 어쩌겠소. 이것이 어떤 사람이냐? 이 사람이 현재적 영감을 받은 사람입니다. 현재 닥치고 보니까 아니라 말이요. 성경 말씀은 이리 하라했는데 거기 대해서 자기는 하지를 못하겠어.
그러니까 현재적 영감을 가진 사람들은 뭐라고 말했지요? 내가 말하기를 그 사람은 어떻다 했습니까? 네, 누가 고통이라 했노? 누가 고통이라 했소? 녜, 고통 벌판이라. 헛일이라. 고통 자기가 현재를 닥쳤는데 하나님 말씀대로 살기는 살아야 되겠는데 이기 안되니 죽을 지경이라 그 말이요. 자, 말씀대로 하자니 죽을 지경이고 말씀대로 안 하자니 하나님이 두렵고 하나님과 떨어질까 두렵고 하려고 하니 세상이 두렵고 이거 죽을 지경이라 안 된다 그 말이요.
아무리 자기는 뭐 그까짓 기야 없는 이렇게 말했지마는 실지로 가죽을 벗기고 거꾸로 달아 가지고서 마구 불로 지지고 이라는데 아, 아무리 없다고 생각해도 안 된다 그거요. 이러니까 두려움에서 거꾸러지고 맙니다.
어떤 사람은 회고적 영감은 뭐 어떤 게 된다고 했지요? 후회, 회고적 영감은 그때 닥칠 때 하나님 말씀이고 뭐이고 하자하는 대로 다 해서 아무 거석이 없이 그 세상과 타협이 돼. 제 딴에는 이긴 줄 알았는데 실상은 다 져버렸어.
이러니까 이겼는 줄 알고 평안하게 그 뭐 어려워서 이랬는데 지내 보내고 난 다음에 그 후에 곰곰이 생각하니까 그것이 잘못됐다 그거요. 후회가 소용 있습니까? 회고적 영감은 후회로서 망하고, 현재적 영감은 두렵고 떨림으로 망하고, 미래적 영감은 환난이 오기 전에 그 사람이 환난 왔을 때의 두려움을 가지고 그때 떨던 떪을 가지고서 예비하고 나니까 다른 사람이 떠는 그 환난이 현재 닥쳐왔을 때에는 그 오는지 가는지 상관없이 그 사람은 이겨 나갔더라 이기야.
이래서 기도라는 것은 뭐가 기도인고 하니 자기가 하나님 말씀과 자기와 하나님 말씀대로 생활할 때에 자기의 그 생활되는 그 현실과 이런 것을 실상으로 이 말로들은 것을 실상화 시키는 것이 기도요. 실상화 할 수 있는 이 모든 그 중심의 대비가 기도요. 그래 가지고 행동이라는 거는 뭐이냐? 그래 했던 거 실상을 닥쳤을 때 그대로 행해 나가는 것이 돼지기 때문에 기도 없는 자기 신앙 생활 승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도의 실패는 신앙의 실패입니다. 그분이 이래 가지고서 간추려 이래 놓으니까 저는 그게 아니면 또 그 뭐 그걸 듣고서 다 은혜 받는다 싶어서 아무리 나중에 외쳐도 이제 효력이 없다 말이요. 그 자기가 그때에 저 세밀한 잔뿌리 그걸 거게서 그래 가지고서 잔뿌리 그것을 말하다가 잔뿌리 그걸 이래 가지고 나중에 간추려 나오다 보니까 이제 그 한 제목이 돼 버렸고 이제 위에 벼릿줄을 찾았지 그 실은 저런 잔뿌리에서 시작했단 말이요. 이랬는데 이것을 노력하지 안하고 간추리고 간추리고 추려 버리니까 나중에 강령만 추려져 가지고서 그것만 하니까 그것은 일시에는 사람들에게 흥분을 주지마는 그 사람이 실제로 생활하는 데는 안 된다 그거요.
그러니 그 설교하는 법을 하지 마라. 여러분들이 노트를 가져 가 가지고 또 이제 읽고 읽고 여기서 무엇을 간추릴까 또 그것을 위에 우두머리 뭘 간추려 거머쥐고 모든 것 간추려 아, 요것만 쏘옥 간추려 거머쥐면 요거 된다. 요것 가지고서 그 하는 사람은 거게 배운 교인들이 허영과 허욕으로 헛되이 담대하고 헛되이 교만하고 안심하고 이렇지 실지로 생활한 그게 없다 그 말이요.
이러니까 자기가 설교라 하는 것은 자기가 앞장 서 걸어가니까 뒤에 오는 사람들에게‘네가 너 지금 있는 곳은 어데로구나. 네가 지금 어데 와있구나.
그런데 네가 지금 보이는 것은 이런 거 저런 거 보이지. 이제 아는 구만 보이는데 내가 요거는 요렇게 하고 싶고 요렇게 하고 싶고 또 요런 기 나와서 꼬우지.’그걸 말하는데 응당히 맞는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자기가 걸어와 봤기 때문에 안다 그거요. 이러면서‘오 네가 그래 오려면은 요렇게 와야 된다.
요렇게 와야 된다.’고것을 실지로 걸어오는 노선을 가르칩니다. 고 길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복음 10장에 목자는 자기가 앞서 가면 뒤에 따라 온다고 자기가 경험 없는 것을 교인들에게 어떻게 가르칩니까? 체험 없는 거 어떻게 가르칩니까? 경험 없고 체험 없는 거 자기가 실행이 없고 생활이 없는데 그 교인들에게 어떻게 바로 가르칠 수가 있습니까? 아무리 명철한 사람이라도 그 논리 연구로 한 논리 연구를 실험 연구에 걸어 놓으면은 이것이 오십 프로 맞으면 다행입니다. 논리해서 연구한 것을 실험할라 하면 안 된다 그 말입니다.
안 맞으니까 이것을 실험해보고 또 고쳤다 또 실험만 가지고 자꾸 하니까 또 이기 발전이 없단 말이요 자꾸 자기 상상으로 논리해서 앞서 가고 그것을 실험해 가지고서 뒤따라 고치고 수정해 가면서 논리 연구가 앞서고 실험 연구가 뒤따라가야 이것 실지 연구가 완성이 된다 그거요.
우리는 목회 할 때에 고 한 말씀을 가르치는 요 말씀을 실행하려고 하면은 그 배경이 어떤 배경이 있겠다 그 배경에는 어떻게 어떻게 거게서 운전을 해 가지고 가야 그것을 통과가 된다 하는 요것을 가르쳐 주는 자가 목회자입니다. 그 목회자는 10년이고 20년이고 40년이고 50년이고 해도 항상 그 교인들은 새로 배우는 겁니다.
왜 그 사람 생활하는 것이 그 잡것이라 그렇습니까? 자기가 가는 대로 이래 다 말하니까 걸어가면 말하는 것이니까 항상 자기가 걸어가면서 말하는 것이니까 위에 가는 사람이 이제 10미터 올라가고 난 다음에 뭐이 보인다 여게서는 뭐 있다 뭐 있다 하는데 밑에 사람이 1미터 올라오면 저 거짓말한다 이랬지마는 따라서 10미터 올라가 보니까 그기 보여. 과연 보인단 말이요. '과연 옳습니다 내가 그때는 부인했지마는 지나고 보니까 이제 다 맞습니다. 내가 자복을 합니다.' 또 올라가면서 이제 50미터 올라가 가지고 말하니까 또 못 들은 못 들은 소리입니다. 이제 그 또 듣고 이래 자꾸 뒤따라 올라가 보니까 아, 그 말이 맞거든 또 그 다음에 50미터 그거만 장 있으면 다 보이고 동등이지 뭐 뭐 있습니까? 또 백 미터 올라가니까 참 처음 듣는 거 이백 미터 처음 듣는 거.
이러니까 몇 십 년을 가르치고 몇 십 년을 배워도 항상 처음이요. 그러니까 늘 새로 배울 거고 새로 가르칠 거고 또 알아도 또 알아야 되는 것이 그것이 뭐이냐? 자기의 생활에서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한 말씀을 가르치면 고 말씀을 그 수많은 그 논리가 있고 고 이치가 논리는 이치인데 논리가 있고 그것을 간추리면 이것이 된다 하는 결론 고 결론만 자꾸 주 대니까 사람들은 쉽다 그 말이요. 아, 이러면 이런 결론이다 이런 결론이다 아, 결론만 하니까 '자, 이러면 이런 번질번질한 집이 된다 또 여 번질번질한 집이 된다' '하, 좋지요. 얼마나 수월하고 집짓기 좋고 좋겠습니까?' 이러니까 마음은 좋지마는 실지로 집을 지을라 하니 안 된다 그거요. 좋은 거는 한번만 봐야 되지 좋다 이리 좋은데 이 좋은 것을 이루는 데에는 네가 이 집을 짓는데는 이렇게 이렇게 해 가지고서 그 참 실지로 애로가 얼마 있다는 거 돈이 얼마나 든다는 요것을 말해 놓으면 고것과 이 좋은 거와 둘을 견제해 가지고 요렇게 자본이 들었고 애로가 들어도 요 좋은 것을 네가 취하겠느냐? 요 사람을 만들어야 된다 그 말이요. 그렇지 않겠소? '이 건축에 애로라든지 건축 자금이라든지 이 자금이 들어 가지고 이런 집이 돼지니까 이 집만 좋을 게 아니라 이 자금을 네가 댈 생각이 있느냐' 이래 가지고 '아, 그 자금을 들여 가지고도 그 집을 취하겠습니다.' 이래 가지고 나서도 나중에 자금들이고 애로가 있다 보니까 '아이구, 그놈의 집만 그만 치워 버리고 말면 싶다'고 그 집 짓는 사람이 치워 버리면 싶은 그 마음이 몇 번이 드나 또 새로 이제 그 자치를 보고서 이 결말을 보고서 또 이거 돌아보고 이 일이 이 시공을 하다 보니까 이 결말이 그만 싫고 이렇게 돼 가지고 나가는 것이기 때문에 이렇게 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런고로 목회라는 것은 자기가 꼭 실천해야 됩니다. 세밀이 어데 있습니까? 세밀이 뭐입니까? 세밀은 지나친 세밀은 죄입니다. 세밀이 어떤 세밀인가? 자기가 실제로 고 계명을 지켜서 행하려고 할 때에 그때에 일어나는 모든 문제 그때에 생겨지는 문제 그때에 있는 것들 고것을 빠짐없이 다 말하면 세밀입니다.
공연히 짜다라 말만 많이 하면 된다고 압니까? 실제로 고 계명대로 살 때에 그 실지의 현실이 자기에게 닥쳐지는 거, 또 교인이 고렇게 살라 하면 고 실제가 자기에게 당면되어지는 거 고것을 빠짐없이 다 말했으면 고거는 참 그 바른 그 길을 인도한 그 진리로 인도한 진리가 되겠고, 아무나 까다롭기만 하면 된다 해서 자기가 그 걸음 걸어가 보니까 상관도 없는 소용도 없는 막 어려운 것 말한다. 그러면 이런 거 이런 것 아, 가보니까 그런 거는 하나도 관계없고 어만 어려움이 있단 말이요. 어만 어려움이 있는데 쓸데없는 어려움 말했으니까 머리만 아팠지 무슨 소용 있습니까? 이러니까 실지로 자기가 걸어 갈려고 할 때에 어려움 있는 고것을 지금 말해야 된다 그 말이요.
이러니까 여러분들이 여기서 들어 가지고서 노트를 가지고 그 기도실에 앉아서 자꾸 이래 가지고 읽고 자꾸 간추리고 간추리고 이래 가지고 이래 놓으면 실제 자기가 생활을 하지 안하고 간추려 가지고서 그것만 말하면은 교인들이 아 그까짓 거 집짓기 아 나도 이런 집 한 채 짓고 이런 집 백지 하나도 짓지 못하고서 이상하게 그만 붕 떠 가지고서 마음이 좋아하지마는 그 사람이 실지 신앙생활에도 아무것도 없다 그 말이요.
그 교인들이 그러니까 그 노트 가지고서 얼마든지 하면 고 얼마든지 그 증거 하는 거 하라 그 말은 어떤 한 목표를 향해서 가는 그 목표라면 고 강령이라면 고 강령대로 살라고 할 때에는 농부에게는 농부가 고 계명대로 살라 하면은 농부의 애로가 있고, 어부가 고 계명대로 사는 데는 어부의 애로가 있고, 사장이 고 계명대로 살라하면 사장의 애로가 있고, 평신도가 고 계명대로 살라면 평신도의 애로가 있고, 고게서 재산가가 가난한 사람의 그 천층 만층의 사람이 다 그 계명을 지켜가야 돼. 천층 만층의 사람이 그 계명을 지켜 나갈라고 하면은 이런 사람에게는 이기 있다 저런 사람에게는 저기 있다 천층 만층 그러니까 같은 계명을 지켜 나가는 데 그 종류가 천층 만층의 천 가지 만 가지의 그 현실을 당면하게 되니까 그런 현실들을 많이 말해 주는 그것으로서 얼마든지 많이 말해줘도 좋다 이기야. 이것은 깜깜하게 하나도 없으면서 그 강령만 들고 자꾸 이렇게 하니까 사람들을 버린다 나중에 가서는 버림당합니다. 체험의 신앙 체험의 설교를 하십시오. 경험의 설교를 하십시오. ○○○ 목사님이 설교하는 데에 고 체험의 설교 경험의 설교 나왔는데 전도하고 심방하러 갔다가 자기가 느껴진 고거는 체험과 경험의 설교입니다. 그게 나오니까 거기 대해서는 맛이 있다 그거요. 녜, 그 다른 거는 다 허풍이 설교라 안 돼 그러면.
어쩌든지 자기가 실제로 그 생활을 할 때 해 봐서 경험하고 체험한 그것이 참 좋고 그 자기가 아무리 해 봤자 교역자가 교인을 자기보다 낫게 못 만듭니다.
자기 뒤따라 오요. 자기보다 나으면 그 사람이 제 교역자지 그 사람은 교역자 아니요. 자기가 먼저 걸어가면서 그 뒤 사람들 따라와야 된다 말이요. 그런 것이 아닌 것은 자기가 기도하고 거게 대해서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해서 앞으로 두고 생각하고 연구했는데 실지로 걸어서 당면을 하고 보니까 실지로 걸어가서 당면을 하고 보니까 자기가 예상했던 거와는 다르면 헛일입니다. 예상했던 거와 다르면 헛일이요. 예상했던 고대로의 예상했던 고대로 그 당면해 보니까 실지가 같아야 됩니다. 고걸 자기가 시험하십시오.
자기가 예상하고서 '미리는 요렇다'고 예상을 미리 생각했는데 예상을 했는데 실지로 당하고 보니까 그렇거든 자기 예상이 그것이 80프로 맞으면 자기 예상이 80프로 정확성이 있다. 100프로 맞으면 100프로 정확성이 있다. 자기가 가서 그 실상을 만나보니까 예상과는 100프로 틀린다. 자기의 예상은 100프로 틀렸다는 것을 알고 거기서 고치려고 애를 써야 된다 말이요. 그러면 예상한 그것을 말해 줘야 돼.
이러니까 그저 거게 대해서 강령을 바로 알고 있다 보면 아, 저 사람이 조거 깨닫기는 조걸 바로 깨달았다 조걸 잡기는 잡았다 잡기는 잡았으면 조만 간에 됩니다. 잡기는 잡은 것을 그 나는 규정해야 됩니다. 잡기는 잡았다 그걸 칭찬하는 것이요 그러나 시공 설계는 아니라 말이요. 그리 되면 그 자신도 공연히 영의 사람 그 교만의 사람 그 사람이 됩니다. 겸손을 제가 겸손할라 하는 그것은 교만 중의 교만입니다. '아, 이거 내가 겸손해야지' 하는 그것은 그 겸손을 이용해 먹는 교만자의 아주 교만자의 교만자입니다.
자기가 실제로 말씀대로 살라고 해보니 뭐 교만할 게 어데 있습니까? 해 보니까 그러니까 자기가 해 보고 하는 것을 말하는 사람과 경험의 설교하는 것과 체험의 설교하는 것과 공연히 훈풍에 남의 말 안 듣고 제가 하는 설교가 다르다 그거야.
목회자는 어짜든지 자기가 그 실행하는 체험 경험을 간증입니다. 그 설교는 간증이라야 돼요. 설교는 간증이라야 됩니다. 자기가 만나 본 것을 증거 해.
내가 보니 이렇더라 증거하는 간증이라야 그것이 산 설교입니다.
내가 하는 것 이 말에 있지 안하고 지혜 있는 말에 있지 안하고 권능에 있게 하라는 권능에 있게 하라는 그 무슨 말입니까? 지혜 있는 말에 있지 안하고 권능에 있게 하려는 그 말은 권능이라는 말은 그 실행을 말합니다. 실행. 네 믿음이 말에 있지 않고 권능에 있기를 원한다 하는 그 말은 너거 믿는 그것이 실행으로 의가 이루어지는 결실을 한 그 심신의 행함으로 완성되는 거게 있는 걸 원한다. 네가 말쟁이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그 말이요.
고것은 본문의 설교가 아니고 이제 오늘 아침 시간이 많이 지내갔는데 하나만 말, 그 시간이 없으니까 고 배설물로 여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 알지 못하심이 없고 능치 못하심이 없는 그렇게 광대하신 분이신 데 그 광대하신 분이 모든 광대한 것 가운데 뭐 선택했느냐 광대한 것 가운데에 선택한 것이 그것이 뭘 선택했느냐? 그리스도를 선택했습니다.
오늘 아침에 말한 거 목회자들이 잘 들어야 됩니다. 내가 과거에 그 ○ 목사님이 벌써 한 팔구 년 전에 그때 처음으로 그분이 집회에 나간 첫 집회입니다. 집회를 하고 난 다음에 ○○○ 목사님 ○○ 목사님 ○○ 목사님이 ○○ 목사님 이분들이 내게 왔습니다. 와 가지고서 '아무래도 저 신 목사님 좀 가르치는 것이 다른 데 그걸 좀 우리가 말하면 안되겠고 좀 목사님이 주의를 주셔서 하나도 섞인 것 없고 꼭 우리가 하나잘못 되면 우리 나가는 길이 잘못된 길이 되어지는데 요 말해서 고런 길이 되지 안 하도록' 참 요 단체를 아끼고 아끼는 고 마음에서 그분들이 걱정하므로 말하는 것을 나한테 말하려 왔습니다.
그랬는데 그때에 여게 남아있는 그 조사들은 은혜를 많이 받고 지금 그랬습니다.
그랬는데 나중에 그분의 집회가 다니는 그 끝에 교인들이 어찌 됐으며 또 그 뒤에 집회에 따라 다니는 사람들이 나중에 따라 다니는 기 뭐 있었느냐 뒤에 몇 번 다니면 없었다 그 말이요. 고기 뭐이냐? 내가 그걸 말해 줬소. 지금 이 가르치는 것을 그걸 보니까 전부 이 노트 필기한 것을 간추리고 간추려서 강령 강령 대가리만 추려 가지고 자꾸 이리 하니까 그만 자기도 그만 그 사람이 요거 요 요지는 요기다 요기 요지는 요기다 요기 강령은 요기다 요게 제일 중점은 요기다 요거 머리는 요기 있다 요거 제목은 요거다 이 제목만 가지고서 이렇게 하는 이것을 하다 보면은 나중에 세근을 잊어버렸다.
나무가 사는 것은 세근으로 살지 위에 둥치 가지고 사는 것 아니다 이러기 때문에 이러니까 그리하지 말고 고것을 그 이거 저거 종합해 가지고서 그 설교 종합설교라 말이요. 이거 저거 주한테 모아 가지고 이라니까 그 참 빛 좋은 개살구지. 아, 이거 저거 막 좋은 거만 주 뜯어 모아 가지고 이러니까 사람들이 일시는 그 가르쳐 주면 좋지마는 실지로 자기가 사는 데는 아무 효력이 없다 말이요.
이러니까 그리하지 말고 고 하나를 먼저 요게서 말한 고것을 똑똑히 달성하도록 하고 고것을 자기가 생각하고는 고대로의 실지로 살아보면은 고게서 나오는 거 있고 또 고걸 자꾸 연구하고 자꾸 고대로 고 현실이 닥치면 고라면 그 어떤 배경이 어떤 환경이며 어떤 그 뭐 그때에 내가 요 계명대로 살아서 지켜 나갈라고 하면은 그때 대적들은 몇 종류가 있으며 사이비한 것들은 몇 종류가 있으며 막는 것은 몇 종류가 있으며 갈래 길은 몇 종류가 있느냐 그것을 자꾸 알아 가지고서 그것을 연구해 가지고 그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쳐 주도록 그것을 아는 것은 제일 잘 아는 방편은 자기가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거는 섞임 없이 다 알아져요 해 볼라하면 돼요. 해 보니 안되거든 허 그 참 요 여러분들이 그걸 느끼지 못하면 헛일입니다.
어떤 사람이 단술 한다 합니다. 단술 할라 했는데 단술 한다 말 들으니까 일차 지식으로 들었습니다. 그때들은 것과 자기가 실제로 단술 하려고 보니까 모르는 기 많습니다. '하이구, 그걸 물어볼걸 그걸 물어볼걸' 단술을 하려고 하니까 그때는 다 늦었는데 단술을 하려고 달라 드니까 '아이구, 요걸 못 들었다 요걸 물어볼까 요걸 물어볼까 물어볼 게 많다 그 말이요.' 하려고 달라 들어 해보니까 그것을 그 미비 된 그런 지식이 많이 있습니다. 또 그거 미비 된 지식이 없이 다 구비해 가지고서 단술을 했는데 그 고대로 꼭 하는 대로 눈에 보이는 거 말로 할 수 있는 거는 그대로 했는데 단술이 잘못됐다 말이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속에 말해 줄 수 없는 속에 지식이 속에 있다 그 말이요. 나중에 그놈을 알고 난 다음에 라야 단술 됩니다. 그거는 어찌됩니까? 한 번 해보고 두 번 해보고 자꾸 해보니까 본인도 뭐인지도 모르게 그 속에 되어지는 그것이 있는 그기라 말이요.
어떤 사람이 앞집에 잘 삽니다. 앞집에 잘 사니까 뒷집에서 조 사람들대로만 꼭 하면 될 것이 아니가 조 사람들은 상점이 잘되고 이라니까 고 사람들 잘되니까 고 사람들만 꼭 따라하면 될 것 아니냐 고 사람들 말하는 거 성질 쓰는 거 태도 하는 거 일어나는 거 자는 거 손님 올 때 영접하는 거 오만 거 전부 하나도 인간의 말로 할 수 있는 거 인간의 말로 할 수 있는 거는 꼭 다 따라해요.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거는 다 따라했소. 이런데 하나는 되고 하나는 안되거든.
왜 안되겠소? 다 했는데 왜 안되겠소? 여러분들 인간의 말로 표시할 수 없는 거 인간 눈으로 볼 수 없는 고기 요 속에 들었습니다. 말로 할 수 있고 눈으로 볼 수 있는 고것을 자기가 닮고 고 속에는 말로 눈으로 볼 수 없는 고것이 고 속에 있는데 고것을 가져야 됩니다. 그것을 말해서 사주 불여 상 불여 심이라 이랬습니다. 그것이 그 마음이요. 마음 속에 그 사람의 인격이요. 녜? 그것이 일시에 되어집니까? 세상일도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그래 가지고 돼지겠습니까? 이러니까 이라는 사람은 그 말에 대해서 배운 말에 대해서 자기도 다 됐습니다.
아, 그까짓 거 일 년 내 가르쳐 봤자 노트 간추리고 있는 며칠만 가르치고 확 다 가르치고 그거면 다 돼. 뭐 더 알게 뭐 있겠소. 실제로 자기가 실행하지 안 하는 사람은 교만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은 교만해요 안하무인입니다. 또 자기 앞서 걸어 나가면서 가르쳐 준 그것은 자기가 거게까지 와야 다 알지 그 전에는 모릅니다. 그래서 그것을 고치도록 말을 했는데 그 뒤에 들어보면은 별로 고친 게 없어. 여게서 서부교회에서 있다가 거서 벌써 대학에 가 가지고 공부하는 사람들은 여기서 어릴 때 주일학교 배웠으니까 얼마나 그것이 능하겠습니까? 가서 받는 고 모든 학생들이 다 말해. 공통으로 가다가 만다는 거야. 설교 말씀에 가다말고 자기도 모르는 설교를 한다는 거야 고 실지에 해당되는 것은 해줘야 될 때 고걸 해 주지 안 하기 때문에 영 뭐 그만 답답함만 느끼지 처음 듣는 사람은 그렇지마는 그것을 아는 사람은 조게는 조기 있어야 되는데 조 말이 있어야 그 말 안 한답니다. 조걸 가르쳐야 교인들이 실지로 생활할라 하면 조걸 알고 조걸 해야 될 건데 조걸 말하지 않는다 그거요.
외나 필요 있는 거 잔뿌리를 다 빼버린다 그거요. 잔뿌리가 없다 그거요.
원뿌리만 말하고 있다 그거요. 실제로 도를 가르치는 데에 이 참 여러분들이 실지의 세근을 말해 잔뿌리를 말한 이걸 말하면은 그 큰소리 못합니다.
큰소리하는 사람은 큰소리할 때는 그 사람이 설교할 때 큰소리 할 때는 그거는 줄기를 말할 때요. 세밀한 잔뿌리를 말할 때 큰소리 말하면 그걸 상대방이 듣습니까? 그것 또 발표를 할 수가 있습니까? 안 듣는다 그 말이요.
왜 이것은 여러분들이 껍데기 교역자가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이라면 요것을 달게 듣고 자기가 깨달으면 아멘으로 될 건데 이것을 말하면 달게 듣지 안하고 도리어 시기한다 질투한다 이런 썩은 생각을 가지고서 헛일한다 말이요.
내 ○○ 목사한테 몇 번 말했지만 ○○ 목사는 '저 공연히 형님이 지금 시기해서 한다' 이렇게 오해를 하고 받지 안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래 나갔습니다. 제야 나가봤자 결국 여기서 지금 어떻게 받아다 지금 그라는데 모른다 이거야. 벌써 나타나지 않습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걸 이런 것은 누가 다른 사람에게 말해줍니까? 안 말해줍니다. 말해 줄 필요가 뭐 있겠소? 이러니까 잔뿌리 없는 설교하지 말란 말입니다. 체험 없는 설교하지 말라. 경험 없는 설교하지 말라. 실지로 자기가 신앙생활 하려고 할 때에 당면된 고 현실을 가르쳐 줘 가지고 미리 가르쳐 줘서 그 사람들이 그 일을 닥쳤을 때 '아이쿠, 그래 말해 주더니마는 이렇구나' 그 설교를 듣고 자랐는데 자기가 환난이 오면은 환난을 닥쳐 가지고 보니까 '아이구, 과연 말씀한 그대로 이런 일이 닥치는구나 이렇구나 이렇구나' 그러니까 미리 닥쳐서 그런 데는 이리해라 저런 데는 저리하라 했으니까 환한 길이니까 알고 있는 길에 닥쳤으니까 문제가 뭐 있겠소 다 승리하게 되지.
그러니까 목회는 자기가 체험을 간증한 게 그 설교가 돼야 됩니다. 자기는 하나도 행동에는 아무것도 해보지도 안하고 이 노트 몇 권만 해 가지고 그 강령만 자꾸 간 큰 소리해서 이렇게 하는 그것은 어리석은 교인은 늘었지만 교회가 크지 않습니다. 또 그렇게 크려거든 그렇게 크려거든 정치성을 가지십시오. 그렇게 키우려면 교회를 키우는 것이 정치성으로 키우는 거 있고, 사업성을 가지고서 키우는 것이 있고, 진리로 키우는 것이 있고 종류가 각각 다릅니다.
진리로 키워야 금과 은과 보석으로 지은 집이지 다른 건 풀과 짚으로 지은 그 집입니다. 아무리 많아도 정치성으로 키워놓은 그거는 아무리 주일에 많이 모아도 그 정치가 휘딱 뒤벼지고 정치 깨지면 다 없습니다. 그 정치 없어지고 공산정치 오면은 하나도 없어. 그 교인 없습니다. 모이나 보십시오. 사업 그 성을 가지고서 교회를 키우는 그것은 그 사업이 절단 나면 없어집니다. 먼데서 잘 알아요. 미국에서 논평이 있답니다. 그곳에서 이곳을 더 잘 알아요. 한국에 큰 교회를 덜컹거려 가지고 아무 교회는 무엇으로 커지고 아무 교회에는 무엇으로 커지고 아무교회는 무엇으로 커지고 아무교회는 무엇으로 커지고 아, 그분들이 건너다보면서 자기 이마에 있는 흉은 모르지마는 다른 사람이 보면 환하이 그 뭐이 묻었는지 알지 않습니까? 그분들이 건너다보면서 그 평하는 걸 내가 보고서 놀랬습니다. 그렇게 지금 보고 있습니다. 어떻게 정확하게 봤는지.
이러니까 목회자는 자기가 그 실행 없이는 안됩니다. 그러면 자기가 농부 아닌데 농부가 어찌 할 건고 아, 그 농부 생활 그 농사짓는데 안 가도 자기는 자기로서 하나 실행하면 농사짓는 사람이 농사짓는데 계명 지킨 사람이라면 어부로서 계명 지킬 수 있습니다. 농사지으면서 어부로서 계명 지킨 사람이면 공무원 노릇하면서 계명 지킬 수 있어. 내나 같은 이치고 같더라 그 말이요. 시간이 많이 지내갔는데 다음에 계속 하겠습니다. 아, 요것을 잊어버려.
배설물로 여겼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도 모든 것 중에 선택한 것이 그리스도입니다. 목적이 그리스도요 그 목적을 택한 것이 그리스도요 또 그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그리스도 만들라고 달성했습니다.
하늘나라는 그리스도의 나라입니다. 제사장의 나라란 말이요. 선지자의 나라란 말이요. 왕의 나라라 말이요. 죽은 자 가운데 부활한다 그 말은 자기가 형제를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만물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 그 말인데 목숨만 이거 목숨 안 버려 자기를 희생하지 안 하면 안 돼.
목숨을 버린다니. 자기가 그 상대방에게 제사장 노릇에 제사장 노릇을 위해서 제사장으로 목숨 버린다 그 말입니다. 제사장으로 목숨 버린다 말은 상대방의 자체를 그 상대방의 자체를 선지자는 상대방의 그이의 지혜 지식을 상대방의 활동을 그 힘을 이것을 하나님과 일치시키는 그거 위해서 자기는 제물 된다 그 말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녹아진다 말이요. 그것을 위해서 그거 위해서 다 투자하기를 원하고 그것을 위해서 다 투자, 말하자면 그 자기 아닌 다른 거 왜 아버지가 그걸 원해. 하나님이 그거 원했기 때문에 이 건설되고 천국이 됩니다.
상대방이 그 자체라는 자체 상대방의 그 지능 그러면 상대방의 지능이면 상대방의 전 생활 전체 아니요. 자체가 자기의 상대방의 생활 전체 상대방의 자체와 생활 자체를 완전케 하기 위해서 완전케 하기 위한 비용으로 자기는 다 쓴다 그 말이요. 완전케 하기 위한 비용으로 이것이 그 자기 현실에 자기 현실에서는 자기 현실에서는 여기서 상대방의 자체를 완전케 제사장 선지자 왕 노릇 그러면 이것을 상대방을 사랑하는 사랑에 상대방을 행복 되게 하려는 사랑에서 사랑이 실현되어 사랑을 상대방을 복되게 하려는 요것으로서 자기가 쓰여지는 요것이 그리스도의 죽음입니다. 요것이 형제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요.
이러니까 이것의 본질은 뭐이냐? 이것의 본질은 고 진리이요 본성은 뭐이냐? 사랑입니다. 진리와 사랑을 어떻게?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그 소원을 인해서 진리와 사랑으로 자기 아닌 상대방 그 자체와 그의 행위까지를 그를 사랑하므로 그를 사랑하므로 참된 이치대로 그걸 구원하기 위해서 그럴 라고 하니까 자기가 쓰여진다 말이요. 자기 있고 는 안 돼. 그게 녹는 소금이라 그 말이요. 그걸 위해서 다시 말하면 하나님과 이웃을 좋기 위해서 진정 그거 위한 것이 아닌 것은 자기에게 하나도 없고 그걸 위하는 뭉텅이로 되어있는 그 위하는 그 뭉텅이가 세상에서 남김 없이 그 뭉텅이가 거게 다 쓰여지기를 원하는 요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어야 요 생활 요거는 끝날 기 아니라 그것이 요 밑천이 다 됐는데 요 밑천이 다 되지 안한 밑천을 준다면 영원히 가지고서 요거 하겠다 하는 고것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는 것이란 것입니다.
배설물이라 하는 것은 고게서 고 일했다 그 말이요. 자기 현실에서 아내가 이것을 나 아닌 다른 것을 그 속건하기 위해서 속죄하기 위해서 화목하기 위해서 번제 위해서 그 상대방의 죽은 완전성 아니요? 속죄제 속건제 이 둘은 잘못된 것을 말하는 것이고 화목제는 불목된 것 화목 양면을 말하는 것이고 번제라는 것은 하나님께 완전히 바치는 일면을 말하는 것이고 이제 그것은 자체들을 말하는 것이고 그 다음에 요제 소제하는 것은 소유물이라 그 곡식으로 지내 곡식으로 지내지마는 그 속죄제 속건제 번제 화목제 이 피 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이라야 그 제사를 드리는 그 피 없이 지내지만 피 제사를 지내고 난 다음이라야 되지 그게 아니면 안 된다 그 말이요. 이것을 하고 난 다음에 그이의 소유까지 완전케 하기 위해서 하는 노릇이 제사장 노릇이란 말이요. 그이 위해서 다 쓰여진다는 거 이런데 여게서 벌써 여러 날 암만해도 교인들이 안 알아듣는단 말이요. 교인들이 못 알아들어. 자기네들이 왜 못 알아들어. 말은 다 아는데 말만 알면 되는 기 아니라.
그런데 그 자기가 알라면 그 실제로 행하지 안 하면 환경에 가 봐도 가 봐야 돼.
마음으로 가 봐도 가 봐야 돼. 상상으로 가 봐도 가 봐야 돼. 이것을 가지고 자기가 연구하고 연구해서 아는 거와 또 다릅니다. 그 이 성질의 말씀 자기가 실제의 생활에서 '아, 내가 이 생활이 내가 요 현실에서 속죄제가 되어지나 속건제가 되어지나 화목제가 되어지나 번제가 되어지나' 요 정말 요 제사되는 것인데 요기 내나 고기 돼야 되는데 요기 돼야 되는데 요기 되려고 하면은 하나님 사랑하고 이웃 사랑 그게 자기에게 있어야지 그게 발동돼 가지고 이 작용되는 것인데 그게 전제로 돼 가지고 있는 것인데 고게 없으면 자기 생활은 암만 계명 순종해야 헛일이라 그 말이요. 제사장의 심정으로 제사장 선지자의 심정으로 왕의 심정으로 자기가 몫이 되어 죽으면서도 순교를 사형을 당하면서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전해 준 것이 선지자란 그 말이요. 일면을 말하면 그것이 없이 계명 지켜 봤자 그거는 생명 없는 생활입니다. 탄환 없는 총이요.
뒤에 시간 있으면 남은 때 지금 여게 있는 사람들 다시 계속 하겠는데 고걸 잘 새겨서 공연히 그 허영과 허욕에 있지 말고 실질적인 사람이 돼야 됩니다.
자기가 거게서 고걸 마음을 가져 보고 고 행동을 할라 하면은 어데 서든지 제사장 노릇할 수 있어. 목회자라도 할 수가 있고 어데 서든지 할 수 있어.
자기의 전 생활은 제사장 생활이냐 선지 생활이냐 제사장 심정이냐 선지자 심정이냐 왕의 심정이냐 목표가 그것이냐 그 실지의 효력이 이루어지는 것이냐 자기 이미 쏟아지는 것이고 이미 소모되기는 소모되는 것인데 이 소모되는 것이 어떻게 소모가 되어지느냐 얼마나 그분들이 절제하고 아끼는 분인지 모릅니다.
바울이 푹푹 생명 내어놓으니까 그렇게 자기를 허무하게 쓴 게 아니라 자기의 털끝만한 것도 얼마나 아끼고 아끼고 귀중히 아껴서 털끝만한 것도 허비 안한 분들입니다. 얼마나 절약한 분들입니까? 공연히 아무나 따나 그까짓 목숨 내놓으면 되지. 아니요 어림도 없습니다. 목숨 이까짓 내놓는 게 한꺼번에 여러 수십만 명도 죽는 전쟁도 있고 이런 건데 그 무슨 가치가 있습니까 가치가 있기를 그게 가치가 아니라 목숨 내 놓는 게 가치가 아니란 그 말이요. 거기서 그리스도의 심정으로 그리스도의 목적으로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그리스도의 그 본질과 본성으로 고것이 소비되는 고기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걸 말하니까 뭐 마음을 다하고 다해서 사랑하라 하는 그게 내나 그 계명이라.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 가입시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그렇게 날뛰면 나중에 가서 다 나가요. 여 붙어 안 있습니다. 다 나갑니다. 왜 그렇게 하니까 그렇게 하니까 자기도 다 왕 노릇 할 수 있고 얼마든지 다 될 수가 있는데 나갈 거 아니겠소. 실지로 하면은 자기는 여기에 붙어 있다는 기 아니고 어데든지 자기 있는 데에서 자기 있는 데에서 거기서 얼마든지 세계라도 살릴 수가 있는데 하필 다른 태도나 딴 길을 낼 필요가 없다 그거요. 또 거기 못 있으면 밀어내면 할 수 없이 나가는 거지. 나는 밀어내 나온 사람입니다. 안 나올라 그래 밀어내 나온 사람이요. 상회 불복종으로 치리해서 제명을 해서 제명을 해서 거게 가담할라 해야 안 해 주고 제명을 해서 나왔다 말이요. 내가 나온 거와 달라요. 어데든지 자기가 예를 들면 어데 있어도 말이지 자기가 어데 가 있어도 예를 들면 여호와의 증인에 있다 하입시다. 여호와의 증인에 있어도 거게서 교파 아닌 행동 할 수 있습니다.
거게서 하면 여호와의 증인이 깨집니다. 안 깨지면 자기가 쫓겨 나오요 그럴 거 아니겠소. 왜 어데로 옮겨 거게서 하면 그 자체가 틀렸으면 자체가 틀렸으니까 고쳐지고 안되면 그게 깨어지고 어디서든지 빛 노릇할 수 있고 어디든지 이 제사장 노릇할 수 있고 선지자 노릇할 수가 있는 긴데 뭐 여기 가서 해야 된다 저 간다 그것이 막 바로 사욕이라 그 말이요. 그게 당파라 그거요. 이 말 알아듣겠소? 자,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증인의 거게서는 예수님같이 사도 바울같이 거게서 외치면은 여호와의 증인이 그게 깨지겠소 제가 깨지겠소? 그것들이 깨지기 겁이 나니까 아야 안됐다 쫓아내면 나와서 또 하지요. 어데 서든지 할 수가 있어. 왜 그 빛을 발하지 못합니까? 여게서는 빛을 발하지 못하니까 나가서 발하지 제가 나가는 거 아닙니다. 빛을 발하면 그들이 밀어냈지. 예수님이 나간 일 없어 밀어내면 예수님도 나갔지.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진실한 목회자가 되려고 하면은 실행자가 되어져야 되지 실행 없이 말만 가지고 이 말만 팔아먹는 장사꾼이 되어지면 죄 중의 죄요.
목회자가 교인들에게 설교해서 무엇을 말하든지 저는 경험 없는데 체험 없는데 남의 말은 식은 죽 먹기 보다 쉽다는 말로 턱턱하는 그거 사람 죽입니다. 자기가 실제로 그것을 다 느껴봤고 알아 봤고 아파 봤고 경험해 봤고 신앙으로 그렇게 해서 그 사람에게 말하는데 그 사람이 들을 때에 자기의 당면한 것을 그분이 환하니 그 목회자가 환하이 다 알고 하니까 참 위로가 되고 참 동정이 자기를 동정함이 되고 알아줌이 되고 다 됐다 그 말이요.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가 가지고 몇 번 말해도 안 되는데 그 사람이 가면 담박이면 해결이 돼. 왜 그거는 아니까 위로가 되지. 너 이럴 때에 이 네가 닥쳐서 이 네가 이래서 지금 이 하고 있지 이렇고 이런데 그보다 나가면 더 이런 일이 있다 이렇게 다 네가 이리 오니까 이리 오지 않느냐 고런 것은 요리 요리 하면 되어진다. 이라니까 아이쿠 이분은 모르고 하는 말이 아니라 알고 하는 말이고 이제 참 이 내게 대해서 이거 알고 동정을 하고 나에게 대해서 바로 지도하는구나 이러니까 위로가 된다 말이요.
어떤 예를 비유컨대 어떤 기사가 하나 와 가지고서 고걸 고치는데 요거 과학도 그래 요거 세밀한 기계라 하는 것은 요놈이 요게 걸리고 요리 할라하면 요게 걸리고 조리 하면 조게 속 썩이고 그렇단 말이요. 고걸 하나 하는데는 굉장한 요리하면 시원하게 탁 돌릴 것 획 돌리면 안되고 돌리면 쬐끔 요리하고 요래 또 걸리고 요 속을 썩혀 가지고서 요렇게 하는 고걸 딱 아는 경험한 사람은 고거 할 때 고걸 보고서 아따 속 엔간히 썩이네 와 획 돌려보지 또 거 걸리지 또 그라고 보니 또 짧아서 안되지. 아, 그라고 길어서 안되지 실제로 제가 하면서 애로 느끼는 고것을 다 알아 벌써 애로를 겪고 느끼고 한 고 사람이 와 가지고 고 알아주니까 뭐 어떻습니까 괜찮습니다. 고 사람이 고 한마디로 위로가 되지 그것도 모르고 척 가 가지고서 그까짓 걸 못해 뭐 뭐 뭐인지도 모르고 말이지 그 어떤 애로가 있다는 거 모르고 아 그까짓 걸 못해 그 기사라 하면서 이래 퉁퉁 걷는데는 화가 난단 말이요. 사람이라는 것은 감정이기 때문에 돈을 받고 해도 부아난다 이기요.
그러기에 체험 없는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위로가 안됩니다. 경험 없는 목회자는 교인들에게 위로가 안돼요. 체험 경험을 자기가 하고 어데 서든지 같은 것이기 때문에 목회자는 목회자로서 그거 다 체험 할 수가 있단 말이요. 고와 같은 종류 다 겪을 수 있어. 자기가 실천해서 경험하고 체험한 고것을 그 교인들에게 간증해 줘야 그들이 실제의 실행하는 교인들이 생겨지고 할 때 그들에게 위로가 되고 힘이 되어집니다. 그러기에 설교도 실천하는 자가 듣는 설교 있고 말 구경하는 자가 듣는 설교 있고 허영의 허욕자가 듣는 설교 있고 다릅니다.
진실한 교인은 진실치 않은 설교는 못 듣습니다. 처음에는 듣지만 며칠 듣고 난 다음에는 안 듣소. 공연이로구나.
그러기 때문에 교역자와 교인들의 그 사이는 일곱 촛대와 일곱 별의 비밀이라는 그것은 그 비밀이 그 뭐이요. 깊이 들었다 깊이 든 그 비밀이 뭐이요? 그 비밀은 뭐이라고 배웠습니까? 하나라. 그 비밀이 하나라. 내가 교역자가 세모잡이면 교인이 세모잡이 됩니다. 교역자가 네모잡이면 교인이 내모잡이됩니다. 그거라 그 말이요. 딴 게 아니라 이렇게 중요하다 그 말이요.
이러니까 목회자들이 목회 하는 데에 자기가 실천하는 것은 목회를 참 심신을 기울이는 이것이 목회자 그 실천이고 실행인데 그것도 하지 안하고서 기도실 지어 놨다 가서 누워 자고 거기서 노트만 들고 읽어 가지고 그것만 큰 소리만 뻥뻥 치고서 목회에 성심성의를 다 기울이지 안 하는 그 사람이 그거는 기울여 봤자 심신을 다 기울여 봤자 그거는 뭐 교회 되고 나면 나는 뭐 언제 이동 될지 모르는데 그것보다도 내 실속을 차리는 게 났다. 앉아서 자기 실력이나 기르고 뭐 하자 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이 주신 그 직책인데 하나님이 주신 그 직책을 당면한 그 직책도 지금 자기가 충성 안 하는데 충성 안 하는데 뭘 실행하겠소? 목회자가 실행할 것은 그 목회에 대해서 모든 것보다도 주님이 원시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을 말을 해야 되겠고 또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그 양떼를 길러야지 불러 구원할 자를 구원하여야 되겠고 그들에게 대해서 주님이 기뻐하시는 대로의 사람으로 자꾸 이래 변화시켜 나가는 이것이 자기의 생애 목회에 전심전력을 다 기울이는 것이라. 모두 보니까 실력은 있어 가면은 한 달 두 달에는 막 교회들이 은혜를 받는데 아, 내가 가서 ○○○ 목사님 어데 있습니까? 손들어 보이소? 손들어 보소? 저 목사님 말이요 그때 여게서 교역자로서 목회 하다가 헛일이요.
그래 가지고 할 수 없어. 이제 목회 안하고 이제는 누가 오라 해야지 가 봤자 교회가 안 되는데 그 동생이 요새 부산으로 장사하러 부산으로 장사하러 올라치면 다 손떼고 그 인자 오기는 오기로 작정하고 이랬는데 이제는 딴 데 갈 데가 없으니까 어짜든지 그래도 나섰다 뒤로 돌아서면 안 된다 양혜원으로 가자 양혜원으로 가 양혜원에 보냈는데 뒤에 가서 내가 보내 놓고 소문을 들으니까 그 ○○ 교회 읍 교회 가서 있다가‘하이구, 그 조사님 우리 교회로 보냈으면 좋을 건데’어짜든지 한 서너 달 얼마를 은혜를 끼쳐놨든지 그 ○○ 교회 교인들이 막 양혜원으로 막 은혜 받으러 가고 이래 가지고 '하, 그 조사님 우리 ○○ 교회 보내줬으면 거창읍 교회 말이요 읍 교회 보냈으면 좋겠다'고 그렇게 말한 사람이 나한테 뭐 그 저 원장 ○○○ 집사 뭐 또 그 수 집사들이 다 와서 나한테 와서 그걸 말해. 그 실력 있다 말이요.
이랬는데 그 계속해야지? 그 다음에 게을 부리는데 왜 그때에 힘쓰는 그것이 내나 농부로서 신앙 생활하는 거 한 가지입니다. 농부로서 계명 지키는 거 한 가지 고것이 목회자라. 고기 그때 그렇게 하는 것이 목회자로서 믿음을 지키는 것이라. 고라면 거게 다 나옵니다. 심방 가면서 설교 얻고 그 사람 만나서 권면 하는 가운데서 진리를 깨닫고 목회자는 그래 되는 것입니다. 또 그 사람 모르게 그 문제를 거머쥐고 자기 혼자 본인도 모르게 그 사람의 교인의 문제를 들고 은밀히 가 가지고서 하룻밤 이틀 밤 사흘 밤 며칠 동안 그 기도를 하고 이럴 때에 하나님의 사랑이 믿어진다 자기도 더러운 인간이지마는 그 사람에게 대해서 진정 섞임 없이 그의 행복을 진정 원하고 이라는 데 하나님이 내게 어떠하겠느냐 자기가 인간을 사랑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한다는 것을 체험하고 느끼고 확신이 드는 것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실행 안 하는 인간은 이거 껍데기요 아무 것도 못 받습니다. 그런 열심하고 있는데 나중에 좀 있으면 뭐 양혜원에서도 안 보려고 퇴짜 놨는데 그 요새는 좀 나아요. 이제 어데 가면 보니까 이번에 간 데서는 보니까 그 인자 퇴짜를 안 만나고 오랫동안 보니 꾀가 있어 가지고서 처음에 가 가지고 왈칵 부흥도 안되고 왈칵 좋다 나쁘고 그 조절해 쓰는 모양이야 계속해서 써야 되겠다 하는 고거는 좋은데 처음에 있던 불붙음 그게 없는 거는 손해입니다.
그걸 가지고서 그저 내일 죽을지 모래 죽을지 모르기 때문에 박윤선 목사님이 하는 말이 그 말을 나는 자꾸 명심이 되어집니다. 그분이 말하기를 설교를 하거들랑 요거는 뒷날하고 뭐 그래 하지 마라 고 시간에 자기로서 제일 은혜 있는 설교를 해라 제일 은혜 있는 설교를 해라 그분도 체험했어. 제일 은혜 있는 설교해라. 그 설교하고 뒤에 죽을지 모르니까 제일 은혜 있는 설교를 해라. 그 내가 그 여 시키면 그랍니다. 자기로서 제일 은혜 받은 설교해라. 은혜 있는 설교해라. 은혜 있는 설교는 은혜 있는 설교는 하나님 주신 설교입니다.
그 설교를 말이요 하나님이 주실 때에 그 설교를 하면은 은혜가 있어요. 은혜 있는 설교니까 이거는 아무데나 하면 될 줄 알아도 하나님 안 주실 때 하면은 공연히 그때 말하듯이 손도 그래 치고 책상도 그래 치고 고함도 그래 질러 봤자 영감은 없습니다. 그 밑에 반응이 아무것도 없어. 그 인제 무대에서는 배우 모양으로 배우가 속에 없으니까 전부 뭐 눈물이라도 속에 든 건 줄 압니까? 이런 거 모양으로 이거 한 가지.
그러니까 모두 충성하면 일등 교역자입니다. 여러분들이 벌써 꾀만 내 가지고서 안일주의의 그 귀신에게 홀켜 그렇지 어짜든지 충성만 할 그 마음 가지고 충성하면은 여러분들은 벌써 일류 교역자로 참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있는 종이 될 수 있는 터전은 마련돼 가지고 있습니다. 그게 벌써 요소 중에는 요소 중에는 다 돼 가지고서 얼마든지 연구하라면 연구할 수 있는 그 벌써 그 자료는 돼 가지고 있다 그거요. 어데 서든지 충성해 거기서 충성하면 뭐 딴 일하는 그것이 마귀라. 거게서 어데든지 충성해. 자, 이 교회를 가라 하거들랑 그 교회 나쁘다 좋다 하지 마라 아, 내 가고 안 가는 건 내게 책임 없으니까 나를 여게 붙였기 때문에 우리 상부에서 가라 하니까 나는 가는 것이다 가는 것을 하나님이 보내서 가는지 안 가는지 나는 지금 내가 이거는 위에서 책임을 맡겨 놓고 지금 나는 갑니다. 잘못 보낸 거는 그분에게 위에 지도하는 분들에게 책임 지우고 나는 상관없습니다. 나는 거게서 나 할 일 할 것 뿐이라 그 충성입니다. 어데 충성하면 그 빛이 안 나타납니까?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십니다.
감옥에 있지마는 애굽에 충만한 빛을 그 나타낼 수 있었습니다. 아무도 모르고 감옥에 있었지마는 하나님은 그를 애굽 총리대신으로 세울 수 있는 권리가 있는 분이 그분이요 아, 심심산곡에 있어서 아버지도 형제들도 '아, 그까짓 거야 말째 꼬마 하나 있는 거 그거는 어릴 때부터 양이나 먹이고 우리 그저 막 마지막 머슴같이 고용살이 같이 그런 긴데 그까짓 기야 있으나 없으나 한가지인데 데리고 올게 뭐 있냐고'서 그렇게 모든 사람이 몰랐지만 하나님은 그를 기어코 들어서 이스라엘의 다윗의 자손 하는 이런 다윗 왕으로 세웠다 그 말이요.
이분이 계시는데 이분이 계시는데 뭐 이 교회 저 교회가 무슨 상관이 있어요. 뭐 이분이 계시는데 아무데 가서 하면은 하나님께서 거게서 얼마든지 나타낼 수 있고 어데 가 있어도 당신이 얼마든지 들라면 들 수 있는데 당신이 드느냐 안 드느냐 떨어트리느냐 그게 문제지. 모두 인본주의라 그 말이요. 말로는 하는데 자기가 실행으로 실제로 하지 안 하기 때문에 힘이 안나. 뭐 나는 완전자가 돼서 말하는 거 아닙니다. 이거는 다 나는 경험하고 이거는 요 정도는 다 체험을 했습니다.
내가 거창 있을 때에 ○○ 교회는 허무한 교회요 마산은 도시라고 신마산 교회는 아주 큰 교회입니다. 신마산 교회 두 군데서 오라 하는데 고 위천교회 있는 지금 ○○○ 조사님 장모입니다. ○○ 집회하고 내려오는데 그 ○ 집사님 있다가 말하기를 그때 '아, 그때 내가 조사입니다' 아, 웅양 교회 첫해 조사로 할 그때입니다. ‘조사님 아, 우리 위천교회 오십시오.’이랄 때에 내가 암말도 안하고 있다가‘위천교회?’요 말했다 말이요. ‘위천교회?’말했는데 고때 고 말할 때 내 속에는 무슨 사람이었더냐 날 위천교회 그리 오라고 내가 큰데 해석은 다 그렇게 그렇게는 다 안됐지마는 해석을 하면 나는 큰데 쪼그만한 위천교회로 오라고 하는 고것이 내가 파고 들어가 보니 고기 내 속에 있었다 말이요. 그것이 내 속에 들었어. 아, 그라고 그냥 예사로 그라고 지내 갔는데 와 가지고서 어디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가 그 못 견디겠어. 고기 나오는데 내가 이런데 주님이 임마 내가 뭐 얼마나 큰데 위천교회는 어떤 긴데 위천교회를 뉘가 세워서 너는 뭐인데 도무지 못 견디겠어. 그 이튿날 내가 쫓아갔어. 쫓아가 가지고 자복을 했습니다. 하고 그리 간다 소리는 안 해도 고걸 자복하고 나는 작정을 하고서 얼마 동안 기도하니까 그때 그 묘산교회 집회 땐데 이인제 목사님이 와 가지고서 거게 집회 와 가지고서 안 된다고 신마산 가야 된다고 마구 디리 조우고 세게 조우고 이거 뭐 안 된다고 일주일간 내 붙들고 조웁니다.
신마산 가야 된다고 내가 그때에 말했습니다. 저는 이렇고 이래서 나는 위천교회 안가면 하나님 앞에 내가 버림을 당합니다. 나는 큰 화를 받습니다. 그래 가지고 내 그때 위천교회 갔습니다. 위천교회 가 가지고서 또 시험을 받았습니다.
무슨 시험이냐? 내가 위천교회 왔는데 이만한 보배 덩어리가 요렇츰 사소한데 왔으니까 온 것만 해도 희생인데 온 것만 해도 희생인데 그 뭐 여서 아이구, 자기가 우러러 볼 수 없는 이 자리를 차지했어 이렇게 생각지를 못하고 이러츰 큰 기 요렇게 작은 자리에 왔다는 고 시험을 또 받아 가지고서 내가 얼마 동안 또 고통을 했습니다. 고 잠깐 동안 고 마음 든 그게 말입니다. 어떻게 가증스러운지 주님의 교회가 뭐인데 제가 뭐인데 이래 가지고서 거게서 참 얼마동안 뒷산에 가서 기도를 하면서 고통을 느끼고 거게서 6.25를 치렀습니다.
6.25때 그 둘째로 내가 그 착취자로 둘째로 사형에 대해서 사형수로서 제 2호가 저입니다. 이래도 그곳은 인민군 나라요 사택이 요 집에도 보수 보도연맹에 가 가지고 죽은 사람 요 집에 동서남북에 전부 보도연맹에 죽은 사람이 즐비해 가지고 있는데 보도연맹 여러분들 모르지? 공산주의라고 민주주의가 죽인 것이 보도연맹 아닙니까? 그러니까 저 거 가족들을 민주주의에서 죽였으니까 공산주의가 됐으니 그분들이 얼마나 복수를 할라 하겠소? 요렇게 끼어 가지고 있는데 고 사이 있어도 제가 새벽기도, 수요일 예배, 주일 오전 오후 예배 그 강단에서 꼭 두 번 뺐습니다. 수요일 두 번 꼭 두 번 뺐습니다.
한 번은 본 그 농산 교회서 이제 우리는 다 죽는 거니까 마지막으로 그 소도 다 뺏어 가고 돼지 한 마리 숨겨 놓은 게 있으니까 도야지 이거 한 마리 우리가 잡아다 잔치하겠으니까 그 조사님 오이소. 그래 가지고 하도 오라 해서 그 가 가지고서 얘기하다 보니까 그만 저물어 버렸어. 늦어서 못 와서 그 수요일 금요일 지켰고 한 주일은 웅양에서는 그 먼데 백 목사님이 그 시무 할 때에 그 아이가 그때 거게서 세상을 떠서 이래서 그 기별이 왔다 말이요 기별이 왔는데 그때는 뭐 모두 산중 옷 입고 삿갓 쓰고 다녔어. 양복 입은 사람들은 그 인민군에 그 내무서원들 뿐이지 딴 사람은 하나도 없었어. 양복 입은 사람 하나도 없었어. 손에는 모두다 못이 배겨 이래 가지고서 그 양복만 입고 가면 안 돼.
그러나 그들 왔다고 변장하기가 싫어서 변장 안하고 양복을 입고 가니까 또 성경 들고 가지 이래놓으니까 가는데 곧 항상 목숨 안 내 놓으면 불안해. 그 사람 만나 놓으면 그 사람 만나서 '아, 수고합니다.' 하면 다 돼 버리지마는 그 사람들 말하는데 성경대로 말하고 자기네들이 하는 거는 틀렸다고 말해야 될 판이니까 만나면 죽는 기라 말이요. 그럴 거 아니겠소? 이래서 거기서 걸어서 저 가는데 다른 게 없으니까 도평으로 해 가지고 길을 걸어가니까 돌아다니는 거는 내려오는 거는 인민군뿐이라. 그 내무서원들이라. 모두 저 오면은 기도하고 가슴이 도근거리고 생명 내놓으면 그 평안하게 그 인자 만나고 그리 아니면 못 만나, 그래 가지고 가서 그 장례를 지내고 그날밤 수요일 밤 거게서 예배 보면서 설교하고 고 두 주간 외에는 위천교회 거기서 한 시간도 예배 인도 뺀 일이 없습니다. 한번 안한 일이 없어.
그것이 내가 처음에 가 가지고 망령된 생각 아 그런 해석이야 안됐지요.
안됐지만 분석해 보니 그기라. 내가 이러츰 큰 기 요만 쪼만한 교회 그 좋은 교회 큰 교회 가라 하는데 안 가고 여 왔으니까 그만 해도 희생인데 뭐 그만하면 됐지 이렇게 생각을 하고 그 교회에 감히 내가 여기 부임할 수 없는 그 어떤 교회인데 하나님의 교회인데 이런데 내가 왔다는 그것을 느끼지 못한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꾸중을 당하고 마음이 안됐는지. 그래서 인자 그것 때문에 참 산에도 많이 갔었고 또 그게 늘 마음에 안 됐어 서 그 6.25때에 그것을 지키고 그라고 나서 마음이 좀 평안했습니다.
어짜든지 목회자 여러분들이 아무데 가도 상관없어요. 다윗을 뽑아 쓰지 안 했습니까? 요셉이를 뽑아 쓰지 안 했습니까? 하나님은 다 아십니다. 아무데 가도 상관없어. 이동은 자기가 택해서 갈라면 큰 교회 작은 교회하면은 작은 교회 아주 평안한 교회 고통스러운 교회 고통스러운 교회 고것을 무지한 우리들이 택하는 데에는 고기 하나님 앞에 그래도 그 벌받지 안 할 일입니다. 내가 모르기 때문에 이것은 아 이놈은 네가 그러니까 모르기는 모르지만 제가 저 좋을 라고 한 거는 아니다. 요거 하나 가책의 문제가 해결이 된다 그거요. 그래 가지고 어데 가든지 하면은 됩니다. 지금 봉산 교회 다른 사람이 다 가도 그 만날 열둘 열 서이 이래 있었는데 지금 이번에 간 사람은 약 사십 명이 된다 하니까 대부분 이거 예사로 듣는다 말이요. 아이구, 그 갔다 온 사람들도 사십 명 되는데 나는 그 가 가서 열아홉 요래 밖에 안됐는데 사십 명이 됐으니 그와 나와는 내 네 배다. 나는 그의 그 신 벗는데도 따라가지 못할 사람이다 그분의 똥 덩어리 같은 인간이다. 이거를 왜 못 느끼느냐 못 느끼길.
그러니까 도무지 입술은 정평 정가 정평정가가 뭐인데? 거게도 은혜가 있을 때에는 고 조그마한 거게 사백 명 앉았습니다. 봉산예배당에 사백 명이 앉았소.
그때는 그 협천 함양은 막은 분이 있었어. 이성옥 목사님이 그랬지마는 협천 거창 거게는 거의 그 함양 여게서는 거석한 사람들은 그 심심산곡에 봉산교회로 찾아옵니다. 답답하면 봉산교회 가자 그러니까 그저 어데든지 딴 데서 봉산교회로 찾아오는 사람이 떨어지지 안 했습니다. 언제든지 그 답답하면 그리 오고 이러니까 몰리다 보면 몇 십 명 그만 몇 백 명되고 그러다 보면 산에도 가고 이래 가지고서 그곳이 참 예루살렘이라. 그곳이 그 삼 고을 삼군 중에 제일 집합소라. 우리가 사모하고 있는 어떤 은혜 있는 참 은혜를 끼치는 은혜 있는 그런 분이 지리산 꼭대기 있다 하면 다 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이러니까 어느 교회가 상관이 없다 그 말이요. 어데든지 거게 가서 빛을 내면 얼마든지 할 수 있게 가서 거게 서라도 세계를 울릴 수가 있습니다.
이러니까 공연히 미혹 받아 가지고서 허영에 날뛰지 말고 어짜든지 알뜰히 목회를 해서 있는 힘 다하면 돼요. 지낸 주 ○○○ 목사님의 설교 중에 중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우리 힘 다하면 된다. 다하면 된다. 다해야 이제 주님이 다해라 내가 도와 주마 다하라 해도 다하지 안하고 있으면 평생 시비하다가 만다 고걸 가르쳤다 그 말이요. 몇 십 번 가르쳤어. 고 좋은 말입니다. 또 고거 기억하고 있어. 이런데 이제 고 설교대로 그런데 뭐이냐? 다하는 사람이 돼야 됩니다. 다하는 사람이 돼야 다하는 사람이 되고 설교하는 거와 다하는 사람이 안되고 설교하는 거와 다르다 그 말이요. 다하는 사람이 되자. 되면 돼요. 그 성경 이거 배울 것이 없어. 아는 대로 충성하면 저절로 다 알아지는데 뭐 배울라 합니까? 여러분들이 배울 필요가 없는데 아는 대로 충성하면 배울게 그래 성경 배우는 기 제일 진짜입니다. 뭐 외국에 다니면서 성경 배우는 사람들은 참 진짜가 별로 없습니다. 모두 가짜이기 쉽지마는 제가 아는 대로 실행하고 아는 대로 실행함으로 또 가르치고 요대로 배운 이것을 지금 앞으로 이 세계를 살릴 사람이 어데 있느냐? 세계를 살릴 사람은 심심산곡에서든지 어데 서든지 자기가 배우지 안하고 이 속화되지 안하고 자기가 성경보고 고대로 있는 전심전력 실행하고 또 그리 하니까 또 하나 깨닫고 요래서 이 세상 것이 아닌 완전한 새순으로 완전한 깨끗한 새순으로 나는 요 새순이 어데서 나오는가 새순 요것이 세계에 필요합니다. 아, 인간보다 좋은 선생님이 계시지 않습니까? 이 선생님한테 그 배우는 거는 그 방식이라.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 "네가 내 말에 거하면 내 제자가 되고 참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그러면 그 그기라 그거요. 우리 목회자들이 충성이 없어요. 없으니까 교회가 부흥이 안 돼. 그래 목회 안 합니다.
그래 가지고서 그 인자 그거만 잡아서 들어서 교인들 때리 잡아서 때리 잡아 보지 얼마동안 잡히지마는 일 대 일로 대결하면은 그 사람들은 때리 잡는 것이 우리보다는 위에 갑니다. 왜 세상에 속했기 때문에 세상적으로 그런 그 마귀적인 방편은 우리보다 강하요. 선봉이요. 그 사람들은 처음에는 그렇지만 좀 있으면 나중에 가서는 안 돼. 아무리 해 봤자 그거 수습을 되는가 자꾸 일이 나는데 일 나는 고 사태를 어떻게 수습할 거라 안되면 나중에 그 사람은 고만 병신 만들어 가지고 그만 등신 만들었든지 그리 아니면 구원이 안되든지 구원이 그만 수습을 못하든지 안됩니다. 그 내가 이래 말하는 것을 오해나 곡해를 하지말고 나는 이렇게 말해 주는 사람이 없는 것이 지금 불행입니다. 인자 없어. 아무 이렇게 말해 주는 사람이 없어.
내가 며칠 전에는 내게 대해서 그 좋은 충격이거나 나쁜 충격이거나 충격 된 그런 사람을 지금 찾을라 하니까 송상석 목사님 하나 남았어. 그분을 내가 얼마 후에 찾아가야 되겠는데 내가 또 그만 복잡해 잊어버리기 쉬우니까 요걸 누한테 맡겼어. 송상석 목사님 찾아가 안 봅니까? 이걸 종종 말을 해라 ○○○ 권찰 집사님에게 요걸 부담을 시켜 놨습니다. 아, 목사님 송 목사님 만나러 간다 하더니마는 안 가십니까? 요것을 내가 잊어 버려도 종종 깨우쳐라. 왜 그분과 예배당 시비 때문에 마찰해 마찰된 것이 그리워 마찰됐던 것이 그리워 그분과 나와는 마찰이 없어. 그분과 나와는 지금 하나가 됐습니다. 저 아레도 내가 전화를 하니까 받더니마는 아마 뭐 누웠던지 이래 받더니마는 생기가 나 '아이구, 백 목사님입니까?' 뭐 속에서 그 못 견디는 반가움이 나와. 올 때마다 찾아 올 때는 피차 자주 만납니다. 성인은 희문가라 거룩한 사람 안 믿는 사람들 말입니다. 거룩한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그 성인은 우리가 구별하는 그 거룩은 아닙니다. 그런데 그 자기가 참 성인이 되려고 하면은 다른 사람이 책망하는 희문가라 허물 가자 허물 듣기를 기뻐하는 기뻐할 희(喜) 들을 문(聞)자 허물 가자 자기의 허물 말하는 거 듣기를 기뻐하는 그 사람이라야 성인이 되지 그거 아니면 안 됩니다.
어떤 목회자가 나한테 와서 말해. 새사람 옛사람을 가르쳐 놓지 안 했소. 이것은 옛사람을 꾸중하는 것도 저 꾸중하는 줄 알고 그만 발칵거리며 달라 들고 새사람에게 말하는 것도 옛사람에게 말하는 줄로 알고 기뻐하고 옛사람은 죽어야 되는데 아, 새사람에게 말하는 거 옛사람은 죽이라는 말인데 옛사람이 기뻐합니다. 이거 뭐인지도 모르고 새사람 옛사람을 가르쳐 주지 안하고 이래 붕 떠놓으니까 교인들이 바보라 강단에서 보면 알아 그 강단에 서 보면 압니다.
가서 떡 강단에 서 보면 이 강단에 성신이 어느 정도 같이 하는 걸 압니다.
가보면 깜깜한 곳이 있어. 저 뭐이 개 교회로 나온 그 세계의 개 교회에서 파송 해 가지고서 한국에 개 교회 있다니까 이 개 교회를 가서 한번 방문해야 되겠다고 그 미국에서 파송을 해서 그때 그 왔는데 그분이 그 한국에서 개교회로서는 어데를 찾아야 되느냐 해 가지고서 부산에 절 찾아 왔어. 그래 가지고 사직동 교회에서 집회설교 한번하고 여서도 한번 설교하고 했는데 그분이 그 뒤에 가서 말을 해 그 강단에 서 보니까 성신이 역사 하는 것이 자기에게 느껴졌다고 그래 가지고서 우리를 그분이 좋아하고서 자꾸 손잡기를 많이 말을 했는데 그분은 그분들은 돕는 것은 돈이나 돕는데 우리는 돈 도울 것은 필요 없고 좀 진리로 도와달라 하니까 그 뭐 그분 만났습니다. 그때 여 ○○ 목사 거 있었어. 만났는데 어떻게 하는 기 아니라 그분들 하는 것과 우리 하는 것이 길은 같은 길인데 다르다 그 말이요. 그때 참여한 사람들은 다 알았을 겁니다. 다른 데 그분들은 요래하는데 우리는 이리 한다는 거. '아이구, 그게 더 좋습니다.' 그분들 하는 거 우리 하는 거 이 차이가 있었어. 우리 하는 것이 훨씬 앞섰어.
앞으로 목회 하는데 어찌 되는가 그 해 나오는 걸 그 전부다 이리 말할 때 말이요 우리는 실지로 하고 있는 것이라 말이요. 자기가 그때 감탄을 하면서 그 참 자기네들 이렇게 하겠다고 하는 그런 것을 한 서너 개인가 말하는 가운데서 말하고 갔습니다.
어짜든지 주님의 재림도 가까웠습니다. 그 뭐 이런 거 저런 거 공연히 헛된 준비하지 말고 어짜든지 내일 죽을지 모르니까 그 날 충성하고 그래 볼일이지 뒤에 어찌될지 모릅니다. 그 헛된 장담 힘 가지지 말고 그저 목회자는 하나님 힘과 진리 힘 둘밖에는 없습니다. 그 힘 뿐이요. 다른 힘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거는 충성에 하나님이 주시지 충성하지 않는 자에게는 주어도 받을 수가 없어.
받는 방편이 충성입니다. 그 충성이 대가 아니요. 받는 준비요. 그러기에 공으로 받아라 했어. 공으로 받으나 대가를 값을 내고 받아라. 값은 내나 자기라 그 말이오.
녜, 통성으로 기도하다가 자유로 돌아 가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