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18:30
목회자의 소원
본문 : 창세기 15장 1절∼11절 이 후에 여호와의 말씀이 이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아브람아 두려워 말라 나는 너의 방패요 너의 지극히 큰 상급이니라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가라사대 그 사람은 너의 후사가 아니라 네 몸에서 날 자가 네 후사가 되리라 하시고 그를 이끌고 밖으로 나가 가라사대 하늘을 우러러 뭇 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또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이 땅을 네게 주어 업을 삼게 하려고 너를 갈대아 우르에서 이끌어 낸 여호와로라 그가 가로되 주 여호와여 내가 이 땅으로 업을 삼을 줄을 무엇으로 알리이까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위하여 삼 년 된 암소와 삼 년 된 암염소와 삼 년 된 숫양과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취할지니라 아브람이 그 모든 것을 취하여 그 중간을 쪼개고 그 쪼갠 것을 마주 대하여 놓고 그 새는 쪼개지 아니하였으며 솔개가 그 사체 위에 내릴 때에는 아브람이 쫓았더라
17절-18절 해가 져서 어둘 때에 연기 나는 풀무가 보이며 타는 횃불이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더라 그날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으로 더불어 언약을 세워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애굽 강에서부터 그 큰 강 유브라테까지 네 자손에게 주노니
아브라함 이전에도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모형으로 짐승을 잡아서 제사를 드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이 약속이 그들에게도 이루어졌습니다. 아벨에게도 이 일이 이루어졌고 에녹에게도 이루어졌고 노아에게도 이루어졌습니다.
하나님께서 방패가 되어 주시고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주시는 이 일이 예수님의 대속의 공로의 예표인 짐승으로 대속의 제사를 드리는 그 개인들에게 이 역사가 있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자들에게는 이 약속이 있었으나 일반적으로는 있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참 하나님이 '나는 아벨의 하나님이라 노아의 하나님이라 에녹의 하나님이라' 이렇게 하시지 아니하시고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 이렇게 늘 많이 말씀을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아브라함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고 기뻐하셔서 내가 네 방패와 상급이 되겠다' 하신 이 약속을 선포했습니다.
그때에 아브라함은 2절에 보면 무엇을 내게 주시겠습니까? 하나님에게 이렇게 묻고 지금 나는 이 상속자가 없으니 다메섹에 있는 이 족속이 내 상속자가 되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 집에서 같이사는 이 모든 목자들과 종들과 이런 사람들이 상속자가 되겠습니까? 이래 물을 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에셀도 아니요. 너희집에서 기른 사람들도 아니요. 네 몸에서 난 씨가 네 상속을 할 것이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서 아브라함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 가지고 하늘에 별을 보이면서 '네가 이 별을 셀 수 있느냐 이별을 헤아릴 수 없는 것 같이 네 자손도 이렇게 많게 되어 너를 상속하리라' 그렇게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럴 때에 아브라함이 그 사실을 믿고 기뻐했습니다.
이러니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이 사실에 대해서 확신하는 그 확신을 기뻐하셔서 의로 정하셨습니다. 로마서 4장 18절에 보면 도무지 바랄 수 없는, 바랄수 없는 그 일을 확실히 믿고 자기는 소망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이것을 의로 여기시고 그 자손을 심히 많게 하셔서 참 바다의 모래수와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이 그렇게 하셨다 말씀했습니다.
거기 보면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었다' 그렇게 로마서 4장 18절에 말씀했습니다.
그러면 이것은 아브라함의 혈육의 자손이 아니고 믿음을 쫓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됐다고 로마서 4장 11절에 말씀을 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 이전에는 미래에 있는 예수님의 공로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 중에 개별적으로 독실한 신앙을 가진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방패 역사와 상급 역사를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인 하나님의 사람들에게는 이런일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이 큰 구원을 받고 이 구원을 자기가 어떻게 구원을 잘 보수해서 감당을 하며 또 이 구원을 내 당대만 보수하고 감당할 것이 아니라 계대를 해서 이 큰 구원을 상속을 시켜야 될터인데 이 상속을 어떻게 시켜야 되겠습니까? 이 지방민 엘리에셀에게 상속시키겠습니까? '집에서 기른 그 모든 사람들에게 상속을 시키겠습니까? 할때에 하나님께서 이것이 아니고 '네 몸에서 난 그씨에게 상속을 할터인데 그 수가 헬수 없을만키치 극히 많으리라' 이렇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실 때에 아브라함이 이 큰 축복의 구원이 수많은 자손들에게 계대될 그것을 확신할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의로 여기셨습니다.
그것을 신약성경 로마서 4장 18절에 보면 우리가 이 창세기 15장만 보면 이해를 못하지마는 그후 4장 18절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와 같이 말씀을 하실때에 아브라함은 자기와 같은 신앙 계대 자들에게 이 구원을 계대 시켜 주셔서 자기의 받은 이 구원이 천하 모든 민족들에게 이 구원이 전하여 갈 것을 아브라함은 믿었습니다. 그걸 하나님이 그때 의로 여기시고 모든 민족의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려고 했다. 그렇게 로마서 4장 18절에 '모든 많은 민족에 조상이되게 하려 함이라' 했습니다.
또 12절에 보면 아브라함의 이 믿음의 발자취를 좇는 자들에게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되고 '이 축복의 구원을 네 자손들에게 계대해 주겠다' 하는 그 계대를 상속받게 되는 것을 말씀해 놨습니다.
그러면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계대한 예수님의 구속의 공로를 믿고 바라는 모든 자를 가리켜서 잘 믿든지 못 믿든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그렇게 말씀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믿는 그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 할례받은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할례받지 아니한 이방인들에게도 아브라함이 믿는 그 하나님을 믿고 아브라함이 의지한 그 공로를 의지하는 모든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이 큰 구원을 상속시켜 주시겠다고 약속한 그 상속이 다 와서 있습니다. 요것을 성경 본문을 가지고 우리는 굳게 잡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오늘 예수님의 대속을 믿는 택함을 입고 사죄와 칭의와 새생명을 받아 중생된 자는 잘 믿든지 못 믿든지 이제 믿든지 오래 믿었든지 어쨌든지 택함을 받고 속죄받아 중생된 사람에게는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 주겠다 하신 이 큰 구원의 계약 축복이 다 자기의 것이 되어가지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해야 됩니다.
그저 우리가 아브라함에게 이 두 가지 큰 구원의 축복을 주셨는데 이것이 믿는 우리에게도 해당된다. 이렇게 띄어 놓고 말할게 아니고 성경 로마서 4장에 죽 내려보면 거기 밝히 증거를 해놨습니다.
거기서 아브라함에게 이 두 가지 구원이요 축복이 되는 이 두 가지를 오늘 믿는자들에게는 다 상속이 된 것을 확신해야 됩니다. 15장 2절 이하를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해석도 가집니다. 사람들은 다 자기 대 잇기를 원하고 있는데 동양에서도 대를 못 이으면 양자라도 하고 또 어떻게 이중결혼을 해서라도 꼭 자손 계대를 하려고 하는 것이 그 인간의 본능적 욕심입니다.
이러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이렇게 여호와 하나님이여 나에게 무엇을 주실랍니까? 하고 난 다음에 나는 자녀가 없습니다. 누구에게 상속을 해줄까요. 이렇게 말하는 이 본문을 여기만 본다면 아브라함도 일반적 사람과 같이 자기 혈육자손에 계대자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라 그렇게 해석을 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로마서 4장 이하에 성신이 증거한 것을 보면 아브라함은 혈육의 자손 그 계대자를 찾은 것이 아닙니다. 아니고 하나님께서 친히 아브라함의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 주겠다고 이렇게 하실때에 이 큰 구원을 자기가 받고 이 큰 구원을 자기 자신도 있는걸 다 기울여서 잘 보수하고 보존을 하지마는 이 큰 구원을 어디다가 상속을 시키며 계대를 시킬까하는 이 구원계대를 그가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이 별의 수효와 같이 네 자손이 많게 되며 너는 모든 민족들에게 이 구원을 네가 상속시켜 주리라 하는 그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을 하나님께서 해주실 때에 아브라함은 거기 대해서 확신을 가졌습니다. 확신을 가지니까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롭다. 이렇게 인정을 해 줬습니다. 이것을 보면 아브라함이 육체의 계대자를 하나님 앞에 요구했던 것이 아니고 이 구원의 계대자 이 신앙 계대자를 요구한 것이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요구한 것입니다.
이럴 때에 하나님은 그 요구를 만족히 여기시고 기뻐하셔서 그를 데리고 나가 가지고 네 자손이 이렇게 많게 천하의 만민이 너의 계대자가 되리라 '모든 족속이 너로 인하여서 다 복을 받으리라' 창세기 12장에도 참 역사에 없는 그런 하나님의 그 언질을 받았고 이 15장에 와서는 확고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약속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이 두 가지 축복을 받을 때에 여기 기록한 것은 간단한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떠난것 롯으로 더불어 시비한 것 소돔왕으로 더불어 서로 대화한 것 이런것 몇 가지가 기록 되어 있고 그 나머지의 아브라함에게 '내가 네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주겠다' 하는 이 약속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이 두 가지 구원을 받는데 까지는 그 공로가 심히 큼니다. 그 공로가 심히 커 이 두 가지 큰 구원을 하나님 앞에 허락 받았고 또 이 허락 받았으면 자기만 이 구원을 가질 것인데 이 구원이 아브라함 이전에 사람들도 아벨같은 사람은 개적으로 받았습니다. 또 에녹같은 사람도 받았습니다. 노아같은 사람도 받았습니다. 받았지만 자기만 받았지 이것을 그 다음 사람들에게 계대해 주지를 못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 축복을 받고 난 다음에 계대할 계대할 자를 하나님앞에 간구했습니다. 껍데기로 보면 하나님께서 내가 '너는 두려워 하지마라 모든 면에 부족할까 염려하지마라 나는 너의 방패요 지극히 큰 상급이 이제 됐다' 할때에 참 이 축복이 굉장한 축복인데 아브라함은 그러고 난 다음에 다른 말없이 여기 성경에 기록하기를 하나님이여 내게 무엇을 줄랍니까? 자식이 없습니다.
이러니까 아주 위에 있는 이 축복을 아브라함도 그렇게 높이 평가하지 아니했고 또 아브라함의 소망은 거기 있지 아니하고 이 자기의 육적 계대의 여기 욕망이 있었다. 이렇게 보기 쉽습니다. 이렇게 보는데에서 아브라함이 받은 이 두 가지 큰 구원의 축복도 사람들이 그만 예사롭게 생각하고 무가치한 것으로 생각해서 창세기 15장 1절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선포한 이 말씀이 어떤 말씀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궁구하고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얼마나 크다는 것을 사람들이 느끼고 한번 측량해 보려고 달려든 사람들이 별로 없습니다.
왜? 아브라함이 뒤에 말한 것 보면은 아주 그거 뭐 사소한 일로 여겨 이 말이 말이오. 안들어가는 자에게는 안들어갑니다. 놀랠자에게는 놀래도, 이 축복이 사소한 것으로 여기는 것 같이 보여졌고 그가 아들만 구하니까 내나 육적으로 자손 계대같이 이렇게 생각을 해서 이 두 가지 구원을 그만 수박 겉 할듯이 거뜨머리만 숙 핥고 지나가 버리도록 이렇게 마귀가 만들어서 이것이 우리에게 얼마나 큰 사실인 것을 사람들에게 가리고 있습니다. 마귀라는 놈이 가리웠습니다.
그러나 그때 아브라함이 그가 이 축복을 받기까지의 하나님 한 분에게 대한 전 소망을 가지고 아무것도 돌아보지 안했습니다. 자기의 전부를 다 기울여 가지고 하나님을 자기 하나님 삼으려고 이렇게 하는 지나간 일로 볼 때에 우리가 그러하지 신구약 성경 같은 이런 이 문서가 있을 때도 아니고 그저 영감만 있을 그땐데 아브라함이 감정의 사람인데 롯하고 된 것이라든지 정실 문제를 떠난 것이라든지 이런것을 우리가 알고 지금 일생동안 정실 이 문제를 초월하려고 해도 정실 문제을 초월한 사람이 여기 지금 몇 사람이 있는지 모릅니다.
이 상고 때에 지금 그래도 어려운데 그 상고 때에 또 그 감정 문제 의례히 자기가 취할 수 있는 그 물질 문제 또 승리했으니까 바람이 나서 우쭐해 그럴 그때에 척 왔는데, 언제 그때 하나님만을 생각하고 실낱끈 하나도 취하지 않겠다고 이렇게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해서 내가 네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 되겠다.
이 축복을 주셨고, 이 축복을 주셨을 때에 아브라함이 그것을 예사로 여기고 그 다음에 자기의 혈육의 자손을 구했다. 그것은 그 위에도 보면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대한 욕망을 그렇게 가졌는데 하나님이 '내가 네 방패와 상급이 되어 주시겠다고' 이렇게 말씀을 했는데 아브라함이 그것을 예사로 지내 보내 버리고 거기 대해서는 아무말이 없이 내게 뭣 줄랍니까? 이땅에 있는 이 지방인을 상속자로 줄랍니까? 내 집에 기른 사람을 상속자로 줄랍니까? 이렇게 물었을 때에 아브라함이 어떤 심정을 가지고 물었고 하나님 보실 때에 아브라함이 이 축복의 구원을 어떻게 얼마나 고귀하게 얼마나 보배롭게 여기고 내야 소유와 몸과 생명을 다 기울여서 이 큰 구원을 주셨으니 잘 보수하고 보관하지만 이 큰 구원을 누구에게다가 상속하겠습니까 하는 이 말을 아브라함이 하나님에게 구했을 때에 하나님이 그 구하는 그 아브라함의 깊은 속 알지 못하심이 없으신 그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실 때에 얼마나 만족했기에 '네 씨로 될터인데 낳아 봐라. 하늘에 별의 수와 같은 이런 많은 수의 천하 있는 모든 민족들에게 족속들에게 이 구원을 내가 네가 상속하도록 해 주겠다.' 하나님이 이렇게 큰 약속을 허락해 주셨겠으며 또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그대로 솔박 확신을 가질 때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의로 여기셨다. 이렇게 하셨습니다.
그런고로 우리에게 이 두 가지 큰 구원이 오게된 이 구원을 과거에 사람들도 마련해서 가졌지마는 자기만 가지고 아무에게도 계대해 주지 못하고 그대로 떠나버렸는데 아브라함은 이 구원을 마련해 가지고 자기만 가졌을 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계대해 주시기 위해서 전능하신 지성하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실 때에 만족히 여기시고 우리에게 계대해 주셨으니 아브라함의 그때 그 심정이 이 구원을 어떻게 존귀히 여기시며 이 구원을 어떻게 보수하고 대대로 보수해서 이 구원을 상속시킬까 하는 그 어떠한 마음이였기에 하나님께서 만족히 여기시고 천하에 있는 모든 바다의 모래수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은 이런 많은 수를 아브라함에게 허락하셔서 우리에게 이 구원이 상속되어 온 것입니다. 그저 쉽게 상속되어 온 것 아니오.
조금 옆으로 나가는 말이라 뒤에 하려고 했지마는 여러분들이 또 잊어버릴까 해서 말을 합니다. 오늘도 교회 부흥은 어디 있느냐? 여기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심정에 교회 부흥이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무리 온갖 수단 방법을 목회 방법을 쓰고 활동을 아무리 하고 또 투자를 하고 수단 방법과 세상에 있는 온갖 것을 정치나 권세나 모든 기술이나 모든 술책을 다 사용한다고 해도 교회 부흥은 그것 가지고 되는 것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천하에 있는 아브라함 이후에 예수님 재림때까지의 모든 신자는 아브라함의 자손의 됐습니다. 아브라함의 교회가 됐습니다. 아브라함의 양떼가 됐습니다. 아브라함의 교인이 됐습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많은 그 계대자를 상속자를 허락해 주시기를 주저하지 않으셨고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네게 대해서 이 주는 것은 너무 지나치다. 이렇게 주저하시지 아니하셨고 애끼지 아니하셨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대한 그 요구와 심정만 가졌는데 그 요구와 심정을 보시고 하나님이 솔선적으로 이렇게 주시면서 이렇게 많게 해 주겠다 할 때에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자기가 확실히 받은 것으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아브라함은 이를 믿었다 이랬습니다. 확신을 가졌어, 가졌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또 기뻐하면서 의로 여기셨습니다.
이러니까 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이는 참 너무도 그저 간추려서 강령만 뜨문 뜨문 말 했기 때문에 껍데기 움싹만 움싹만 말했기 때문에 그 움싹을 타고 들어가면 그안에 인간이 측량할 수 없는 무한한 것이 속에 들었는데 삼각의 이 여러 억 만리의 긴 삼각이 끝트머리 삼각 절정만 나타난 거와 같은 것을 요게 기록한 것이고 그 속에는 이렇게 무한한 아브라함의 진실과, 아브라함의 신앙과 ,아브라함의 사랑과,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대해서 어떻게 대한 이브라함의 신관과, 하나님의 축복의 이 축복관이 이,안에 들어 있는 것을 우리가 로마서 4장에서 찾아 볼때에 참 이 축복에 대해서 우리가 너무도 경솔히 등한히 여겼던 이런 죄를 회개를 안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 구원의 계대자를 세워 주시는 것은 그 구원 받은 자가 이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며 또 이 구원을 얼마나 애껴서 자기도 생명 기울여 보존하지마는 이 큰 구원을 어떻게 하면 대대로 보존시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원을 상속받을까 하는 요 아브라함의 심정, 아브라함의 요 심정, 아브라함의 요 간구, 요 두 가지에서만 목회의 성공은 있는 것입니다. 다른데에서 목회 성공있는 것 아닙니다.
요 두 가지가 있을 때에 그는 설교가 부족해도 행정이 부족해도 방편이 부족해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 요 방패와 상급이 되시겠다는 요 구원을 참 인간으로서는 그 이상 이 가치를 정상에 가깝게 깨달았고 깨닫고 인정한자가 없을만치 하나님이 만족할만치 아브라함이 이 구원의 가치를 그가 깨달아 느꼈고 또 이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하면 보존하며 자기 죽고 난 다음에라도 이 구원을 잘 보존해서 상속할까 하는 요 구원을 보수하려는 고 심정 요 심정을 아브라함이 가졌을 때에 요 두 가지 마음을 하나님이 보시고 만족히 여기셔서 천하 모든 족속들로 하여금 이 계대자가 되게 하겠다 하는 이 선포를 하나님이 하셨습니다.하나님은 선포 하시면 거두지를 못하십니다.
그럴 때에 아브라함은 또 그 사실을 껍데기로 믿습니다. 하는게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때에 만족할만치 아브라함은 그 사실을 확신했습니다. 이러니까 이를 의로 여기셨다 이랬습니다. 6절에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것을 우리가 좀 찾아서 가져야 되겠습니다.
오늘에는 우리가 너무 외식적으로 자꾸 흘러가고 있습니다. 외식으로 흘러서 성경도 전부 껍데기요. 신앙 행위도 껍데기요. 신앙 사상도 껍데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해서 이 축복을 받았는가 하는 그것을 우리는 그 위에서 연구해야 합니다. 이렇게 힘드려서 얻은 축복입니다. 이 축복은 아브라함의 이 댓가로 받은 축복이요. 아브라함이 이렇게 행위한 이 행위에 댓가로 받은 이 축복입니다.
아브라함의 이 공로로 받은 축복이요. 궁극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예정이지만 요 범위에서는 아브라함의 공로로 인해서 아브라함에게 이 축복이 왔고 이 축복을 아브라함이 어떻게 귀중히 여겼기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 주신 것을 만족히 여기시고 귀중히 여긴 그 아브라함이 이 축복을 어떻게 보존하고 보수하고 자기가 죽고 난 다음에라도 상속시켜서 이 큰 축복을 잘 보수할까 하는 이 축복의 평가에 대해서 축복의 이 보수의 그 성의에 대해서 하나님이 얼마나 만족하셨기에 아브라함에게 이렇게 하늘의 별의 수와 같은 많은 계대자를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시고 허락하셨을까? 이것을 우리가 찾아서 우리도 아브라함이 이렇게 이 구원을 높이 참 평가한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확실히 깨달아 평가하는 사람이 되도록 궁구해야 되겠습니다.
또 아브라함이 이 축복을 그 보존하려는 여기 대해서 하나님이 만족한 그 성심성의 그것을 우리도 가져야 겠습니다. 그것이 여기만 보면 그게 잘 보이지 않습니다. 여기만 보고 로마서 4장을 보지 안하고 여기만 보고 이 사실을 이렇게 깨닫는 사람은 만일 깨달아 로마서를 보지 안하고 깨닫는다면 그는 굉장한 사람일 것입니다.
이 로마서에서 증거하지 안하면 지금 여기서 내가 해석하는 이 해석은 다 억설 해석이라 억지 해석이라 공연히 아브라함을 지나치게 과대 평가해서 하는 말이라 그렇게 사람들이 말할 것입니다. 왜? 이 본문만 보면 잘 나타나지 안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4장에 보면 '모든 족속의 믿음의 조상이 되게 하기 위해서 이렇게 하셨고' 아브라함은 대답했다 했습니다.
그런고로 여기서 목회를 하는 사람이나 권찰일을 보는 사람이나 전도를 하는 사람이나 자기가 전도하는 자기가 가진 도를 전할 때에 받을 사람을 하나님이 정해 주셔야 되고 받을 사람을 하나님이 허락해 주셔야 받지 하나님이 받을 사람을 주시지 안하면 받을자 아무도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주님 말씀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보내지 아니한 자는 아무도 올 수 없다. 이랬습니다.
이러니까 아무리 자기가 열심히 전도를 하고 목회를 하고 온갖 방편과 수단을 다 부려도 하나님이 자기가 정하는 도를 받는 자가 있도록 하나님이 해주시지 아니하시면 도를 받을 자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 전하는 도를 받을 자는 하나님이 정해 주시는 것이지 자기가 정하는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정해 주셔야 됩니다. 신약 성경에는 보면 네게 대해서 온갖 그 은혜를 감사치 아니하고 배은하고 패역을 부린다 할지라도 네가 끝까지 견뎌라. 하나님이 네게 대해서 인정하면 그 다음에는 하나님이 그 사람을 돌아보실 때에 그 사람이 회개하고 돌아오리라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그 말씀이 무슨 말씀이냐? 이 말씀과 연관성있는 말씀입니다. 내가 그 사람에게 전도를 해서 믿지 않는 네 남편에게 믿도록 믿지 않는 자녀에게 믿도록 아무리 네가 하려고 네가 사방으로 다니면서 전도를 해서 교인을 주 모아가지고 교인 교회로 모아들이려고 네가 아무리 하려고 해도 네가 그들을 이제 권고해서 네 앞으로 인도해야 그들이 오지 인도하지 않으면 아무도 올 자가 없다. 내가 네게 붙여줘야 온다 하는 것이 성경 전도에 대한 전부입니다.
지중해 풍랑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에게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지금 네게 준다. 네게 준다 하시고 난 다음 반대하던 배안에 있는 사람들은 바울의 복음을 듣고 다 바울의 도를 받아가지고 바울의 교인이 됐습니다. 사도 바울의 교인이 되고 그의 사람이 됐다 했습니다.
그러면 거기서 풍랑에서 풍랑당했다고 그런게 아니라. 천사가 와 가지고 사도 바울을 보고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오늘밤에 하나님께서 네게 줬다. 네게 준다. 이러고 난 다음에 그들이 도를 받아서 구원 얻었습니다. 그것도 바울의 그 어떤점을 보고 그랬을까 하나님이 이백일흔여섯 사람을 사도 바울에게 주는 것이 공의요 정의요. 줄만하고, 주고 싶고, 주어 감당할 수 있다고 인정이 되기 때문에 당신이 사도 바울에게 줬습니다.
네가 믿지 않는 남편에게 오만 전도를 해도 안되는데 네가 이리 이리 되어서 사라 같이 되어지면 네 말로써 남편이 회개는 안해도 네 모든 네 자체와 행위로 인해서 그 남편이 회개하게 된다. 그러면 전도는 입으로도 전도하고 이래 하지마는 전도하는 사람의 그 사람의 여하에 따라서 하나님이 허락해 주시고 허락해 주시지 않는다는 것을 성경 전부는 말하고 있습니다.
(최권능) 목사가 옹기에 거름 실고가는 그 농부의 뒤에 따라가면서 자기가 집고 다니던 작지로 소를 때려 주면서 '이놈의 소야 예수를 믿었으면 좋지' 이 말하고 그만 소가 뛰니까 다 짐다 쳐박아버리니까 그만 도망을 쳐버렸습니다. 쳤는데 삼년만에 돌아오니까 그 사람이 교회 설립자가 되어가지고 교회가 섰더랍니다.
그래서 생전에 일흔 몇 교회를 (최권능) 목사 혼자 세웠습니다. 어떻게 그럴까? 그것이 아브라함이 가진 이 구원의 평가관 도수의 그 심정 아브라함의 이 심정을 가지고 그가 이 보배로운 구원을 어떻게 하면 줄까하는 그 하나님 보시기에 만족이 되어 하나님께서 그 농부에게 이 도를 최권능 목사의 이 보배로운 받은 구원을 상속받는자 되게 해버리니까 그 사람이 그 말하고 지나갔는데 회개를 하고 예수를 믿어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서리 아침에 지나가면서 그때는 남녀 이야기를 남녀 말을 하면은 벌을 받는 때인데 지나가면서 명따는 그 처녀를 보고 여자를 부를 수는 없고 지나가면서 '예수를 믿었으면 좋을걸' 이러면서 갔는데 그 명타레 따던 처녀가 그 말 듣고 난 다음부터 병이 나가지고 백약이 무효라. 그 부근에 예수 믿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 저 먼데 있는 사람이 하나 와 가지고 아프다 하니까 '혹 교회나 좀 예수나 좀 믿어보지요.' 이러니까 그 처녀가 아팠던 사람이 벌떡 일어나면서 '그 무슨 새로 한번 말해 달라고 그 소리가 무슨 소리인데 그 소리 때문에 병이 났는데 그 무슨 소리 한번 말해 달라'고서. '예수를 믿어보라' 이러니까 '아, 그말이라'고 그만 그러니 병이 나았어. 그래 가지고 예수를 믿었어.
그것이 이 아브라함이 하나님 보실때에 하나님께서 "내가 네 방패와 지극히 큰 상급이 되겠다' 하는 이 약속의 구원을 주셨을 때에 아브라함이 얼마나 그를 보배롭게 여겼든지 하나님께서는 무한한 보배를 줬는데 받은 자는 금덩이 만치도 여기지 안하고 오히려 세상 학식만치도 귀중히 여기지 안하고 부자집에 가면 부끄럽고, 돈 많은자 앞에 돈 많은 자 앞에 가면 머리가 숙여지고, 권세 있는자 한테 가면은 예수 믿는 소리를 말하기가 부끄러워 하는 이렇게 이 구원의 가치를 모르는 그 자가 천 마디 만 마디 전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네.
또 이 구원에 대해서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가 평가했기에 하나님이 만족히 여기시고 이 구원에 대해서 어떻게 보수할까? 내야 소유와 몸과 생명 다 기울여 보수하지마는 나만이 보수해 안되겠고 이 보수를 어디다가 상속해서 계속해서 보수할까?
이렇게 원하는 그 소원이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만족했든지 데리고 나가서 '야 하늘에 별의 수를 네가 셀 수 없는 것처럼 이렇게 이 계대자를 나는 너에게 많이 주겠다' 이렇게 말씀을 하실 때에 아브라함은 또 그 사실을 확실히 믿으니까 하나님이 또 어떻게 재미 있는지 아브라함을 의로 인정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으로 더불어 이렇게 상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오늘 교회 부흥시키는 것도 목회자가 이 구원을 어느 정도 평가하느냐 거기 달렸고 이 구원을 어떻게 하면 보수하며 어떻게 하면 이 구원을 내 당대만 보수할게 아니라 나만 보수할게 아니라 이것을 상속할까 하는 그 소원하는 심정의 어떠함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사람을 붙여 주십니다. 계대받을 자를 붙여 주십니다. 또 붙여 주실 때에 계대할 수 있는 실력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목회자가 자기가 가진바의 그 구원이 어떤 구원인지 거기에 가치에 교회 부흥은 있고, 또 그 구원을 자기가 어떻게 보수하려는 자기의 성심 성의 거기에 교회의 부흥이 있고, 또 이 구원을 어떻게 상속해서 계대 해줄까 하는 그 심정에 교회 부흥은 있는 것입니다. 구역 부흥도 여기에 달린 것입니다. 제가 동역자를 보든지 교회안에 권찰을 보든지 해도 그것이 명확합니다.
이제 다른 말을 하려 하다가 여러분들이 또 지나가면 나중에 이것을 증거하면 그 밑에 해석을 다해 또 해야 되기 때문에 이제 복음이 전파해 가는 것이 어떤 능력에서 전파해가며 또 그 전파는 하나님 한분의 권능에 매였는데 하나님의 권능을 끌어 올수 있는 전도자의 도를 받은 수도자의 전도자의 그 도에 대한 평가와 정도에 대한 그 애착과 성심성의의 어떠함에 따라 있다는 것을 지금 증거했습니다. 이것이 없이는 헛일입니다. 며칠전에도 중간반 반사들에게 제가 그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들이 이 여름 더위에 전도하러 땀 흘리면서 가도 헛걸음 걷기 쉽습니다. 여러분들이 빈깡통 같이 아무 것도 없으면 가 가지고 깡통이나 주지 뭘 줄게 있습니까? 아무것도 없는 깡통 가지고 가면 그들에게는 마귀가 수두룩하니까 마귀나 한깡통 받아가지고 돌아오지 뭐 줄게 뭐있겠소?
이러니까 가다가 만일 그들에게 육덩이 살리러 가는 것도 참 아주 권위가 있고 자세를 부리는데 하물며 이 말할 수 없는 영육의 이 큰 구원과 축복을 여러분들이 가지고 있고 이 가치있는 것을 가지고 있어. 이 보배를 이 보배의 가치를 여러분들이 가진것만치 그들에게 자세를 참 부리면 안될 것이라. 안 부리지 자기들 속에는 한없는 자세에 있을 것이고 어떤 세상의 높은 자에게라도 가련하기가 짝이 없고 이 보배를 줄 때에 참 자세를 부리면서 줄만한 자기 속에 가치있는 그 어떤 가치있는 것인지 그것이 상대방에게 있는 것보다 뛰어난 보배라 그에게 받으라 할 수가 있고, 큰 소리 칠수가 있고, 또 확신을 가지고 줄수가 있고, 그럴 때에 그들이 받을수도 있고 줄 것도 있지. 그게 없으면 안되니까 가다가도 없으면 멈춰 가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이 대속에 대한 모든 구원을 생각하고 생각하면 속에 불이 일어나서 이제 하. 이 보배를 참 이 보배를 이 모르는 이 보배없는 사람은 전체 멸망받은 멸망할 인간인데 이 보배를 어떻게 이걸 하나 이거 더 주며 이 보배를 또 그들에게 줄까하는 이것이 자기들 속에 불이 붙고 난 다음에 가서 말을 해야 효력이 있다 하는 그런 말을 했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를 상대할 때에 외식으로 상대하지 안하고 하나님이 왜 아브라함을 좋아 했으면 왜 이삭을 좋아하셨으며 왜 야곱은 죄 투성인데 왜 하나님이 좋아하셨는가? 그는 외식이 아니고 속에 깊은 하나님 보실때에 만족할 수 있는 참 깊음의 그 신앙과 인격을 기울이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 두 가지 큰 축복을 어떻게 해서 하나님에게 받았으며 어떤 공로로 하나님 만족시켜서 이 구원을 받았으며 또 이 구원을 얼마나 소중히 여겨 이 구원을 보존할 때에 어떤 심정을 가지고 했기에 아브라함을 보시고 천하 만민에게 이 구원을 상속시켜 주실 것을 하나님이 약속하시고 그이에게 허락하셨을 때에 아브라함은 또 그 사실을 참 믿을 수 없는건데 그 사실을 확실히 인정할 때에 하나님은 만족히 여겼습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로마서 4장 18절에 말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일에 바랐기 때문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대해서 만족히 여겼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구원에 대해서 우리가 이 가치성을 연구해서 피상적으로 이 구원을 등한히 여기는 이런 죄를 회개해야 되겠고 또 이 큰 구원을 우리가 보존하는데에 너무도 무성의 하는 이것도 회개 해야 되겠고 또 이것을 나도 가치도 모르면서 나도 이 구원을 생명만 못해서 생명을 기울여 이 구원을 보수할 형편이면 구원 내놓고 생명가질만한 이런 우리가 되어 있으면서 이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준다 하는 이것도 다 외식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이 구원을 어떻게 받았으며 이 구원을 어떻게 보수했으며 어떻게 전달하려고 상속시키려고 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렇게 해 주셨는가 하는 그것을 우리가 깊이 명상하고 생각해서 그 아브라함의 그 신앙사상과 인격과 같은 그런 것을 우리도 본받아 가지도록 해야 이것이 아브라함의 참 믿음의 자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이 두 가지 축복은 암만 잘 못믿어도 그의 것은 돼 있습니디. 이 계약은 받았습니다. 계약은 받았지마는 이 계약이 이루어지는 것은 믿음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로마서 4장 12절에 그 믿음의 자취를 믿음의 자취를 따라 가는 자들에게 이것이 약속 됐다고 허락됐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들에게만 조상이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런고로 우리는 이 보배로운 둘을 우리가 믿음으로 실상을 만들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 준다는 것은 이것은 모든 해를 막는다는 것입니다. 모든 해를 막는다는 것 해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의 해도 있고 또 무궁세계의 해도 있습니다.
그러면 무궁세계의 해를 영적해라. 하면 이 세상에 있는 해를 육적해라 하겠습니다. 그러면 여기 방패되어 주시는 것은 아브라함 그 자손으로서 믿음을 지킬 때에 그 믿음은 육적 해도 다 방어했고 영적 해도 다 방어했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이 방패된다는 방패는 막는다 말이오. 저 화살이 오면 이 받아내 막는다 말입니다. 이게 방패입니다. 막는 것, 받아내 막는 것, 하나님께서 영적 해도 방패가 돼 주신다. 육적 해도 방패가 되어 주신다 하는 것은 우리가 예를 들면은 만일 어떤 사람이 예수 믿는 사람이 범죄해 가지고 범죄해 가지고 그 죄값으로 사형을 받습니다. 사형을 받습니다. 사형을 받으면 그것은 자기에게 죄 지어서 사형받는 사람 아닙니까? 그 사형은 자기에게 육적 해요. 영적 해가 아닙니까? 육적 해요 영적 해입니다. 죄지어서 사형 받으니 자기 구원 이루지 못해서 영적 손해요 육적 손해인데, 그기서도 요 좀 어려운 말이오. 그기서도 그 사람이 믿음만 가지면 하나님은 나의 방패시라 하는 이 사실을 자기가 믿고 그 때에 믿음만 가지면 하나님이 믿음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도 하시는 그 인도를 순종 하는 것인데 하나님이 자기의 방패가 되신다는 요 계약을 믿고 고 현실에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고 인도를 고 사람이 따라 고 자리에서 지킬 믿음을 지키면, 고 자리에서 지킬 믿음을 지키면 그 사람은 순교와 같은 순교자와 같은 그런 영적 구원도 얻습니다. 네, 순교자와 같은 그런 영적 큰 상급의 구원도 얻습니다. 지극히 큰 상급이 되어 버립니다. 또 그 사람을 죄값으로 사형시켜서 멸하려고 했는데 그 사람 멸망이 하나도 그 사람을 멸하지 못했습니다. 그 사람이 죽으면 일종의 순교의 죽음이 됩니다.
십자가에 달린 강도는 제 죄 값으로 죽는 강도인데 그 강도가 그 시간에 가지는 믿음을 가졌을 때에는 '너는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고' 구원만 얻었을 뿐만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 달렸을 때에 좌우편에 달린 강도는 하나는 죽을때까지 예수님을 저주하고 반대하다가 인간으로 인간의 혜택 입어서 인간으로 구원 얻을라 하다가 숨져버리고 말았고 이 한편 강도는 십자가 달린 이 강도로서 그 시간에 회개하고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두 강도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두고 멸망할 죄인과 구원얻을 이 죄인, 죄인으로서 구원얻은 죄인, 멸망 받은 죄인 이 두 죄인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두 쪽으로 갈리워졌다는 것을 하나의 예표 보이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순교자는 이 한편의 십자가 상에서 달려서 주님을 증거한 고 사람 단일 속에 들어있는 다 순교자입니다. 이러기에 이 강도는 순교적 구원 얻었습니다. 이것은 해석이 좀 깊어서 이 시간에 할 수 없는데 여러분들이 종목만 들어가지고 가십시오.
자기가 범죄해 가지고 그 사형선고를 받고 지금 사형대에서 사형을 받을 그때도 하나님은 나의 방패다. 여기서 죄 값으로 사형받아 나는 선고 받아 사형받는 이 사형의 해도 내게 오지 못하게 나라를 방패해 주실 방패의 하나님이시라. 여기서도 지극히 큰 상급을 나에게 베푸실 지극히 큰 상급이 되실 하나님이시다. 요 계약을 믿고 믿음을 지키면 고 사람은 하나님이 방패 되어서 그는 사형이 결단코 그에게 해를 하나도 주지 못했습니다. 또 그는 그 사형으로 인해서 지극히 큰 상급이 그에게 된 순교자도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셉이 같은 그런 사람들도 다 하나님이 방패된다는 걸 믿었기 때문에 그는 어떤 궁지에 빠져도 이것도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서 내가 믿기만 믿으면 나에게 해되지 않도록 해 주신다. 여기서도 내가 하나님께 순종만 하면 이것도 변해서 지극히 큰 상급이 된다. 요 계약을 믿고 감옥에서도 따랐고 형제들에게도 따랐고 다니엘도 그러했고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 그런 사람들도 그러했고 뭐 선지 사도가 다 그랬습니다.
자기가 어떤 그 세상이 해하는 해가 와도 내가 믿음만 지키면 이 해는 절대로 나에게 해하지 못한다. 왜? 하나님이 방패가 되어서 막는다. 믿음만 지키면 이것도 나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 된다. 요 두 가지 계약을 고대로 믿고 믿음을 지켰을 때에 그 믿음 지키는 사람을 해한 세상 역사가 없고 믿음 지켰을 때에 어떤 그 해나 사건이나 그것이 그에게 지극히 큰 상급이 되지 않은 일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제 것 만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제 것 다 만드는 거라. 이것을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상속해 줬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우리에게 상속해 줬습니다.
이러기에 우리는 아무 공로가 없지마는 이 아브라함이 받은 이 상으로 준 이 두 가지 큰 구원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이 모든 역사 이것은 우리가 받도록 약속되어 있습니다. 믿음만 지키면 어디서든지 실효를 나타냅니다. 믿음만 지키면 어디서든지 실효를 나타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이러기에 이 비밀을 아는 자는 어떤 것이 와도 나에게는 큰 계약 두 계약이 있다. 방패와 상급의 계약이 있다. 어떤 자라도 동남풍아 불어라 서남풍아 불어라 공산주의야 오라 독침아 오라 아무것이라도 오라 다만 나는 믿음만 지키면 하나님이 내 방패되시고 상급되신다. 이것을 해는 막고 지극히 크신 상급으로 변화시켜 주신다 하는 요것을 가지고 나가는 믿음의 사람에게는 세상이 감당치 못하고 세상은 완전히 그에게 정복을 당하고 자기의 구원이 되고야 마는 것이 이것이 믿음의 비밀이요.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입니다. 내일 아침에 계속하겠습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아 광고 하나 하겠습니다. 예배후 삼십분 기도하고 4층 회의실에서 교역자 회의가 있사오니 교역자 및 장로님들은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교학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