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0.30 11:54
목자와 절도와 강도를 구별
1981. 1. 30. 밤 (금)
본문:요한복음 10장 1절∼18절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양은 그의 음성을 듣나니 그가 자기 양의 이름을 각각 불러 인도하여 내느니라 자기 양을 다 내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오되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도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늑탈하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 할 터이니 저희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6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 비유로 저희에게 말씀하셨으나 저희는 그 하신 말씀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니라” 그 당시도 예수님이 이 비유로 가르치셨지마는 하신 이 비유가 무슨 말씀인지 사람들이 모르고 그저 지나갔습니다. 오늘도 우리가 모르고 지나가기 쉽습니다. 참 큰 말씀인데 이 말씀을 예사롭게 그만 듣고 지나가기 쉽습니다.
여기 예수님께서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말했습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여기 목자와 절도와 강도가 여기에 구별되어 나타났습니다. 문으로 들어가는 자는 목자요 문으로 들어가지 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또 다 절도요 강도라 이렇게 밝혔습니다.
목자는 양을 기르는 것이 목자요 절도요 강도는, 10절에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이랬습니다. 절도는 모르게 숨어서 훔쳐 가는 것이 절도요 강도는 주인 알게 주인을 꺾어놓고 가지고 가는 것이 강도입니다. 그러면 둘 다 합해서 도적인데 “도적은 양을 도적질해 가고 양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요” 이랬습니다. 목자는 양을 구원하고 양을 보호하고 양을 인도하고 먹이는 자입니다. 양을 기르고 보호하고 인도하고 잘 관리해서 양이 평안히 잘 자라도록 그렇게 하는 것이 목자입니다. 절도 강도는 양을 도적해 가고 양을 죽이고 양을 멸망시키는 것뿐이다 여기에 그렇게 밝혔습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살 때에 자기를 보호하고 자기를 바로 인도하고 자기를 점점 구원시켜서 성장하고 좋도록 한다는 것이 세상에 많습니다. 자기를 좋도록 복되게 잘 인도하고 보호하고 유익되게 구원한다는 것이 세상에는 많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이렇게 하면 좋다 저렇게 하면 좋다’ 하는 그것이 다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요, 또 이런 책이 저런 책이 ‘사람은 이래 살아야 된다 저래 살아야 된다’ 하는 그것도 우리를 인도하는 것이요, 또 이 사회에서, 나라에서, 모든 세상 사상과 도덕에서, 또 우리에 가까운 사람 먼 사람, 반드시 사람이나 사람이 만들어 놓은 그 책이나 또 이런 종교 저런 종교의 경전들 그런 경전들이나 이런 것들은, 자기 속에, 자기 속에도 ‘아무래도 내가 이래 해야 되겠다. 저래 해야 되겠다. 이게 옳겠다. 저게 옳겠다.’ 그것도 자기 딴에는 자기가 자기를 복된 데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기가 자기의 모든 생활을 인도하는 것, 다른 사람이 나를 인도하는 것, 어떤 그 책들이 나를 인도하는 것, 이 사회가, 국가가, 이런 세상 사상이, 주의가, 도덕이 뭐 우리를 이래야 된다 저래야 된다 하는 인도하는 것들은 참 많습니다. 또 성경은 또 이래라 저래라 또, 성신의 감화도 이래라 저래라, 또 교인도 목사도 권찰도 이렇게 해야 된다 저렇게 해야 된다 해서 우리를 이렇게 하라 저렇게 하라, 이러는 것이 옳고 복되고 유익되다, 저렇게 하는 것이 복되고 유익되다 하는 그 인도하는 참 인도하는 선생은 많습니다. 인도자는 많습니다.
그것이 다 목자입니다, 목자. 양을 기르는 것처럼, 목자가 양을 기를 때에 ‘요 골짝으로 가자. 저 만당으로 가자. 이 만당을 넘자. 저 밑에 바닥에 물 있는 데로 가자.’ 이렇게 목자가 인도하는 것처럼, 목자가 그 인도합니다.
이것처럼 이 세상에는 우리가 평소에도 ‘이렇게 살아야 된다 저렇게 살아야 된다.’ 또 무슨 일을 닥치면 ‘이 사건을 이렇게 처리해야 된다 저렇게 처리해야 된다.’우리를 인도하는 것들이 교회 안에도 많이 있고, 교회 밖에도 많이 있고, 이 사회도 많이 있고, 국가도 많이 있고, 책도 많이 있고, 인간도 많이 있고, 이런 경전 저런 경전 경전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 것을 여기에 비유로 목자라 했습니다.
또 ‘이렇게 해야 네 보호가 된다’ 해서 우리를 이런 것들이 우리를 보호하고 저런 것이 보호하고 우리를 보호해서 우리 위해 준다고, 우리를 위해 준다는 것도 참 많습니다. 우리를 위해 준다는 것이 사람도 많고, 위해 준다는 일도 많고, 위해 준다는 물건도 많고, 위해 준다는 사회도 국가도 뭐 이 문화도 많이 있습니다.
또 우리를 양을 이렇게 보호하는 것처럼 목자가 보호하는 것처럼 우리를 이렇게 보호한다. 물건이 우리를 보호한다고 ‘이 물건이 있어야 내가 보호를 받겠다.’ 물건에게 보호를 받으려고, 인간의 보호를, 나라의 보호를, 사회의 보호를, 이 문화의 보호를, 국가의 보호를, 가정의 보호를, 모든 보호를 해 준다는 그런 것도 많습니다. 또 우리를 구원한다는 그런 것도 아주 많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찾는 것이 ‘어느 길을 따라가야 될 건가? 어떻게 해야 될 건가?’ 하는 그것은 어느 인도를 따를까 하는 그것입니다.
‘어떻게 해야 나에게 유익이 될까?’ 하는 그것은, 무엇을 내가 수입을 할까? 목자가 양을 먹이는 것처럼 우리를 먹여주는 것이요, 유익되게 해 주는 것.
‘어떻게 해야 내가 튼튼히 안심하고 잘 살 수 있겠느냐?’해서 강대국으로 찾아가는 사람도 많고, 또 제각각 전부 자기의 피난하고 평안히 살 수 있는 그런 보금자리를 마련하려고, 집을 마련하고, 사업을 마련하고, 뭐 물질을 마련하고, 별걸 다 마련합니다. 이런 전부를 다 비유로 해서 목자라 이렇게 말했습니다.
했는데, 이렇게 우리를 보호한다는 게 많이 있지마는 실은 목자가 있고 절도 강도가 있다. 절도 강도가 있다. 여기에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 목자지 다른 데로 넘어오는 것은 다 절도요 강도다 이랬습니다.
이 절도와 강도도 와 가지고 ‘내가 목자다.’ 또 목자도 와 가지고 `내가 목자다.' 이 목자와 절도와 강도를 구별 못 하겠다 그말이오.
이러니까 이 세상에는 어떤 것이 너를 유익되게 하며, 너를 보호하며, 너를 참 길러주며, 너를 구원하며, 너를 잘 인도하는 자냐? 그게 참 목자인데, 이런 목자도 있지마는 목자라고 말하지마는 실상은 절도 강도가 와 가지고 목자라고 이렇게 말하는 그런 것들도 많이 있다 그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망하고 죽는 것은 이 밑에 보니까 절도 강도가 오는 것은 양을 도적질하고, 잡아 가지고 가 잡아먹으려고.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인 것이 절도요 강도인데 절도 이것도 와 가지고서 목자처럼 하기 때문에 우리가 거기 속아 가지고 목자인 줄 알고 거기에 속하는데 그것이 죽이고 멸망시키고 잡아 가지고 가 버립니다.
이러기 때문에 참 목자와 절도와 강도 이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되지 이것을 구별 못 하면 인간의 일생 생활이라 하는 건 전부 헛일입니다.
실은 우리를 멸망시키고, 우리를 죽이고, 우리를 완전히 도적질해서 제것을 만들려고 이렇게 실상은 그런 것이지마는 우리 눈이 어두워서 이것도 목자인가 해 가지고서 그 시키는 대로 하고, 주는 것이면 널펑널펑 받아 하고, 그걸 의지해서 그 보호를 받을 것이라고 이렇게 하고 있어 멸망받는 것을 주님이 안타깝게 여기시고 이 비유로 깨우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목자며 어떤 것이 절도요 강도냐 그걸 여기 밝혔습니다.
“목자는 양의 우리에 문으로 출입하는 것만이 목자요” 이것만이 참 우리를 복되게 인도하고 우리를 참 보호하고 우리를 참으로 기르고 우리를 바로 다스려서 우리가 구원되게 하는 자입니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지 아니한 자는 우리를 구원한다고 하지마는 실상은 절도요 강도입니다. 요것을 알아야 됩니다.
그러면 양의 우리에 문으로 출입한다는 것은 무엇을 비유한 것인가? 그 밑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양의 우리에 문이라” 이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양의 우리에 문이라” 말씀했습니다. “양의 우리에 문이라” 그러면 예수님으로 통과하는 것만이 목자라 그말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으로 인한 것 예수님으로 말미암는 것, 예수님으로 인한 것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예수님으로 인한 그 인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인도, 예수님으로 인한 보호, 예수님으로 인한 우리의 구원, 요 예수님으로 인한 것만 참 우리의 목자가 되지 예수님으로 인하지 아니한 다른 것은 다 우리를 위한다고 하지마는 우리를 망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이다.
예수님으로 시발된 것이 아닌,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그러면 자기 생각은 무엇입니까? 자기 생각 그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자기 생각, 자기 마음, 자기 해석, 인간으로 동한 것,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 시발된 것, 인간으로 말미암은 것, 자기로 말미암은 것, 이종교로 말미암은 것, 이 세상 어떤 지식으로 말미암은 것, 문화로 말미암은 것, 사회로 말미암은 것, 국가로 말미암은 것, 전인류로 말미암은 것, 무엇으로 말미암았든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닌 것은 그 사람을 죽이고 멸망시키고 완전히 멸망 구덩이로 도둑해 가는 것뿐이다 요것을 밝히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이 참 무서운 말씀이요 큰 말씀인데 그 당시도 들었지마는 무슨 말씀인지 사람들이 몰랐어.
그러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무엇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입니까?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행동은 사죄의 행동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행동입니다.
사죄의 행동. 예수님으로 인한 행동은 사죄 받았으니 사죄 받은 자로 사는 그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행동입니다.
칭의를 받았으니,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생활은 칭의를 받았으니 칭의로 사는 것이오. 칭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사는 게 아니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칭의로 살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죄로 살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친한 하나님과 동행으로 살고, 요것이 예수님의 피로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로 사는 것.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은 성경대로 사는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생활은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행동은 성경대로 하는 그 행동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행동입니다. 성령으로 성령의 감동대로 하는 그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행동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성령과 물과 피 이 셋이 증거한다” 그말은 이 셋이 '이렇게 살아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 외에는 전부 자타를 망치는 것뿐입니다.
아무리 제 생각이라도 이것은 절도 강도요, 자기를 어떻게 친하고 애끼는 어떤 잘난 사람의 주장이고, 행동이고, 지도고, 마음이라도 그것 절도요 강도요, 인간을 인류를 박애하는 박애자, 어떤 인류를 박애하는 그자의 쓴 글도, 책도, 주장도, 사상도, 말도 다 절도요 강도요, 인간을 어떻게 한다는 사회나 국가나 전인류나 자기나 부모나 형제나 어떤 책이나 사상이나 주의나 어떤 것이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은 다 절도요 강도라. 요것을 우리가 똑똑히 기억해야 됩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뭣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인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예수님이 원인이 돼 가지고, 예수님에게서 시발돼서, 예수님에게서 동기가 돼서, 예수님이 종자가 돼서, 예수님이 근원이 돼서, 근거가 돼서, 그러면 예수님이 근거되고 예수님이 발원되고 예수님이 근원돼 가지고 예수님으로 시발된 것, 거기에서 예수님이 기초된 것, 그게 뭣인가? 그것은 곧 성령의 행동이요 생활이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인도요. 성령의 인도대로 사는 것.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은 성령님의 역사요, 신구약 성경 말씀의 역사요, 피의 역사 예수님의 사죄의 역사요, 칭의의 역사요, 하나님과 화친한 하나님과 동거 동행하는 역사라. 요것이 예수님에게서 흘러나왔어. 예수님으로 인한 것.
요것 외에는 전부 우리를 삼키고 망치려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그것은 인류 시조를 망친 사탄, 마귀, 마귀에게서 발원된 것입니다. 마귀에게서 발원돼서 전인류를 삼켜 망치는 것인데 이 가운데서 예수님이 오셔 가지고 구원하신 요 구원이 멸망 속에 있는 우리들을 여기에서 예수님이 구원하시는 이 구원을 당신으로 인해서 시발됐습니다.
그러면 당신이 주는 구원만이 우리의 구원이지 당신이 주지 안한 다른 것은 내 속에서 나왔든지, 어떤 사랑하는 자의 속에서 나왔든지, 세상이 말하는 도덕 군자 속에서 나왔든지, 철인 속에 나왔든지, 이종교 속에서 나왔든지, 사회주의자 속에서 나왔든지, 애민족주의자에게서 나왔든지, 애국자에게서 나왔든지, 전인류 박애하는 자에게서 나왔든지 어데서 나왔든지, 어데서 나왔든지 절도요 강도라. 요걸 확정지워야 됩니다! 이게 기독교입니다. 요것을 확정지워야 됩니다.
다만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 예수님으로 인한 것,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 예수님에게서 뭣이 나왔는데? “내가 보혜사 성령을 너희에게 보내겠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은 보혜사 성령님이십니다.
성신의 감화 감동만이 우리 목자입니다. 성신의 감동으로 기록되어 있는 육십육 권 이 정경 성경만이 우리의 구원의 도입니다. 예수님의 피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예수님의 사죄만이 우리를 구원하고, 예수님의 칭의만이 우리를 구원하고, 예수님의 이 화평의 제물이 되어서 하나님과 모든 존재와 화평을 일으키게 하는 요것만이 우리의 구원입니다.
이 외에는 다 절도요 강도라. 이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오”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오” 섞인 게 없다 그말이오. “멸망시키는 것뿐이오”예수님으로 인한 사죄 운동이 아니면, 사죄의 역사가 아니면, 네가 사죄 받았기 때문에 이제는 죽기까지 피 흘리기까지 너는 죄로 더불어 대적해서 죄를 범하지 안해야 된다. 죄를 국법을 범한 것은 국법에 범죄요 하나님의 법도를 범하지 안한 것이 하나님에게 범죄입니다. 하나님의 법도를 범하는 네가 죄를 짓지 안해야 된다. 예수님이 너를 사죄했으니, 네가 그냥 도덕 군자가 되기 위해서 죄 안 짓는다는 게 아니라 예수님이 사죄해 줬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죄가 나왔기 때문에 너는 사죄받은 이 사죄로 사는 것이라. 이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라.
예수님으로 사죄를 받았으니 나는 죄짓지 않고 살아야 된다. 소유와 몸과 생명이 절단나도 사죄받은 것은 이것은 내 주지 안하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게 온 이 사죄로 사는 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요 인하여 사는 것이니 사죄로 사는 것, 자기에게 괴롭든지 어렵든지 평안하든지 좋든지 자기의 소유나 몸이나 생명이 절단이 나든지 말든지 칭의로 사는 것, 의로 사는 그것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이라.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 사죄가 나왔고 칭의가 나왔고 하나님과 화평이 나왔습니다.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 성령이 나왔고 예수님에게서 나온 것이 육십 육 권 진리가 나왔어.
이러기 때문에 성령으로 사는 것 요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요, 성경 말씀으로 사는 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요, 사죄로 사는 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요, 칭의로 사는 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요, 하나님과 화친으로 동거 동행으로 사는 것이 요것이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입니다.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를 인하여 살리라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처럼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께서 아버지로 인하여 살지 안한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아버지로 인하여, 순전히 아버지로 인하여 아버지에게 피동된 생활 외에는 딴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아버지로 말미암은 생활이 아닌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내 피와 살을 먹는 자는 나로 인하여 살리라” 예수님으로 인하여 사는 것이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는 것이라.
“내가 양의 우리에 문이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 예수님으로 인한 것 요것만 우리의 목자입니다. 요것만 우리를 구원합니다. 요것만 우리를 바로 인도합니다. 우리를 길러줍니다. 우리를 보호합니다. 우리를 유익되게 합니다.
우리를 먹여줍니다. 우리를 기릅니다. 요것 외에는 다 절도요 강도라.
이러기 때문에 사람이 오든지 네 속에서 나오든지 세상에 무엇이 닥치든지 너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아니한 것이면 다 너를 죽이고 망치고 지옥으로 도둑질해 가려 하는 것뿐인 것을 네가 알아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지 안한 것이면 너를 멸망시키는 것이기 때문에 네 속에서 나왔든지, 어떤 인간에서 나왔든지, 도덕 군자에서 나왔든지, 나라에서 나왔든지, 민족에서 나왔든지, 전인류에서 나왔든지, 전인류가 좋다고 해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면 네게는 절도요 강도다. 요것을 우리가 단정을 짓고 있어야 됩니다! 이러면 오늘 기독교가 속화되지 안하고, 더러워지지 안하고, 부패하지 안할 터인데 요것을 분별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영감이 와도 ‘이럴 때에는 영감대로 하면 내가 망하고 죽겠는데’ 제 속에 그런 생각이 나옵니다. 그놈이 절도요 강도입니다. 네가 성경 말씀이 요렇게 살아야 된다 하는데 성경 말씀대로 이렇게 살면 네가 절단난다고 말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그 사회가 바로, 그 국가가 바로, 그 인류가 바로, 그 사상이 주의가 바로 그것이 내게 대한 절도요 강도인 것입니다. 요걸 우리가 명심해야 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것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온 것은 성령과 물과 피 이 세 가지만 우리에게 왔습니다. 성령님은 성신님의 감화 감동을 가리켜 말하는 것이고, 물은 육십육 권 도리의 진리 말씀을 가리킨 것이고, 피는 사죄와 칭의와 하나님과 화친된 이 세 가지 대속 가리켜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 이것만이 우리의 구원자요 우리의 목자입니다.
이 세 가지만이 우리의 목자입니다. 이 세 가지만 우리를 구원해 줍니다. 우리를 길러줍니다. 우리를 보호해 줍니다. 우리를 바로 인도합니다. 하나님과 모든 피조물과 화평을 이루어 줍니다. 이 외에는 전부가 절도요 강도라.
그러면 우리는 양의 입장도 가지고 있고 목자의 입장도 가지고 있습니다. 내가 내 후배에게는 목자 입장을 가졌고 내 선배에게는 양의 입장을 가졌습니다.
그러면 목자가 돼야 되겠어. 내가 목자가 돼야, 목자가 돼야 내게 대해서도 목자가 돼서 내 구원도 이루고 후배에 대해서도 목자가 돼서 후배의 구원도 이루고 원수에게도 목자가 돼서 원수에게도 구원을 이루어 주고 할 수 있으니 우리가 첫째는 내가 목자가 돼야 되겠고 목자를 바로 찾아야 되겠습니다.
아무리 나를 인도해서 청산유수로 막 웃으면서 웃으면서 마구 들추겨서 간을 녹혀서 이렇게 좋게 제게 암만 해 주고 얼굴이 예뻐서 막 보면 반하고 눈이 쏠려지고 그만 사람이 평생 환장이 되고 이렇게 뒤벼지고 이렇게 해 줘도 소용없어.
돈을 뭉텅이로 주고 뭐 취직을 어떻게 해 줘도 소용이 없어. 양의 우리에 문을 통과한 그것이 아니면 내게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절도요 강도입니다!“정과 욕을 십자가에 못박으라” 인정을 가지고서 목회를 하고, 감언이설을 가지고 하고, 달콤한 것으로 하고, 취직을 가지고, 돈을 가지고서, 출세를 시키고, 저를 마구 치켜들어 주고, 보호해 주고, 세상에 찬란한 별별 많은 말들이 서적들이 가득히 있어. 어떻게, 평생 파도 다 못 파. 인간들 대갈빼기서 자꾸 말한 그걸 어떻게 평생 파도 파겠어? 이 사람은 이래 하고 저 사람은 저래 하고 만 명 하는 것이라면 만 명이 다 각각 다른데 어떻게 파겠어? 귀는 들어도 차지 아니합니다.
암만 들어도 또 들어가. 눈은 보아도 끝이 없어.
이래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거든 절도요 강도인 줄 알고 우리는 대적해야 됩니다. 아무리 내게 대해서 어떻게 해도 그에게서, 그에게서 성령의 감화가 아니면 우리는 절도요 강도인 줄 알아야 됩니다. 육십육 권 진리의 성경 말씀대로가 아니면 우리의 절도요 강도인 줄 알고서 도망쳐야 됩니다. 여기에 말하기를 양은 목자가 아닌 그 절도요 강도의 말은 듣지 안하고 도망을 친다 했습니다. 도망을 쳐야 됩니다.
성신의 감동이 아니면 양의 우리에 문으로 나온 목자가 아니다. 이러니까 우리는 도망쳐야 되고 배척하고 반대해야 되겠고, 또 육십육 권 도리의 진리가 아니면 어떤 감언이설의 말이든지 인간이 뭐라고 말하든지 뭐 돈이든지 뭣이든지 이것은 절도요 강도이기 때문에 우리는 도망쳐야 됩니다. 따르면 안 됩니다. 환영하면 죽습니다.
예수님의 피의 운동 사죄 운동이 아니면, 죄를 멸하는 운동이 아니면 내게는 절도요 강도입니다. 죄를 멸하는 운동이라면 내게는 목자이기 때문에 내가 거기, 죄를 멸하는 운동이면 나는 거기 따라야 됩니다. 죄를 멸하는 운동이면 나는 그 운동에 따라야 됩니다. 의를 보수하고 의를 건설하는 운동이면 나는 거기 따라야 됩니다.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이루는 하나님으로 더불어 동거하는, 하나님을 함께 하는, 하나님을 배반하고, 하나님 배반하고 돈으로 따라가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권세로 나가고, 하나님을 배반하고 어떤 인정에 끌려나가고, 하나님 배반하고 딱한 사정에 끌려나가고 해도 그것은 강도 절도에게 끌려나갔으니까 죽는 것입니다. 필연적으로 그뒤는 죽었을 것입니다.
이러기에 우리는 내게 오는 그 모든 것이 인간이든지, 사상이든지, 지식이든지, 주의든지, 주장이든지, 문화든지, 물질이든지, 사업이든지, 평안이든지, 영광이든지, 존귀든지 무엇이든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지 안한 것이라면 이는 내게 대해서 절도요 강도라. 나를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멸망으로 끌고 가려고, 나를 죽이려고, 나를 멸망시키려고 하는 것이라.
“도적이 오는 것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뿐이요” 섞인 게 없어.
이러니까 우리는 목자와 절도를 구별해야 되겠고, 다음에는 내가 목자가 돼야 내가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멸망시키고 지옥으로 끌어다 붙이지 안하지, 내가 목자가 돼야.
내가 예수님으로 인한 자가 돼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자가 돼야, 문을 통과해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자라니? 내가 성령의 사람이라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자요, 내가 육십육 권 도리의 진리대로의 사람과 행위라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자요, 내가 사죄받아 죄짓지 않는 자라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자요, 내가 의롭게 살면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자요, 하나님으로 더불어 동거 동행하면 나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자요.
이것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이 생활을 누가 할 수 있습니까? 이 생활을 누가 할 수가 있습니까? 인간으로는 아무도 못 합니다. 인간으로는 이것을 아무도 못 합니다.
그러나 2절에 “문으로 들어가는 이가 양의 목자라 문지기가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문지기가 그를 위하여서 문을 열고, 이 사람이 ‘아무래도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야 되지 다른 데로 가면 나 망하고 다른 사람 망하고 다 망친다.
내가 절도와 강도 된다.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야 되겠다. 내가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아야 되겠다. 내가 영감으로 살아야 되겠고, 진리로 살아야 되겠고, 사죄로 받은 자로 사죄로 살아야 되겠고, 칭의로 살아야 되겠고, 하나님과 결합으로 살아야 되겠다.’ 하는 자에게는 “문지기가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문지기는 성령님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성령님이 그를 위하여”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사람이 되도록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생애가 되도록 이렇게 해 주신다 하는 것을 보증으로 계약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할 일입니다.
목자가 오면 양이 평안해서 평안해집니다. 살이 찝니다. 꼴 맛이 있습니다.
번들번들 윤택해집니다. 참으로 성령으로, 진리로, 예수님의 피로 인도하는 그 인도를 받아 온 세상에 모든 허욕이 다 없어지고, 더러운 모든 사욕이 없어지고, 세상에 얽매인 게 없어지고,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내 전부가 어떻게 하면 예수님의 것이 되며, 내 소유나 몸과 생명도 내가 예수님의 것 되는 데에 이용하기 위해서 내가 생명도 가지고 있고, 소유도 가지고 있고, 몸도 가지고 있고. 내것은 예수님만 내 주님이 되어 예수님만 내 전부, 예수님은 내 재물도 되고, 내 권세도 되고, 내 기쁨도 되고, 내 생명도 되고, 영광도 되고, 지혜도 되고, 예수님만 내 주님으로 모시려는 이것 위하여 사용하려고 소유도 가지고 있고 몸도 가지고 있고 생명도 가지고 있으니, 요렇게 살 때에 이 양은 기뻐 뛰놀고 꼴 맛있고 윤택하고 재미있지마는 요게 아닌 요 흉측한 인간의 것이 들어오면 우리는 당장 진리가 맛이 없습니다. 영감이 맛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요 생활이 달고 꼬시고 맛있지를 아니합니다. 이러면 속에는 근심 걱정이 찼지. 병이 들었지. 뻐쩍 말랐지.
그런고로 우리는 이 큰 말씀,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오는 자가 양의 목자라 다른 데로 넘어오는 자는 절도요 강도라”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려고 할 때에 문지기가 그를 위해서 문 열어준다” “절도가 오는 것은 양을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오” “문으로 들어가고 나올 때에 구원을 얻는다” 문으로 들어갈 때에 구원을 얻는다.
9절에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양식을 얻으리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살려고 할 때에 우리에게는 내게 대한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깨달아지고 요 뜻대로 실행할 수 있는 요 능력이 와. 요것이 꼴 얻는 것입니다. 요것이 꼴이오.
이렇게 큰 말씀을 했지마는 당시에 있는 자들이 하나도 알아듣지를 못했어.
엉뚱하게 지나보내 버렸어. 오늘도 이 말씀을 엉뚱하게 지나버리기 때문에 절도요 강도는 자기를 위하는 자인 줄 압니다. 교회에 절도요 강도로 목회하는 자는, 절도요 강도로 목회하는 자는 좋아서 있는 걸 애낌없이 다 들이고 참 목자는 배척해 버립니다. 왜? 자기에게 옛사람 그것을 죽이고 해치려 하니까. 참 불쌍하고 가련한 것입니다.
다 같이 통성으로 기도합시다.
오늘밤에는 이 죄를 우리가 회개하고 일어섭시다.
내가 절도와 강도에 몇 해나 속았으며 뭣뭣을 속아서 내가 망쳐졌는지? 절도와 강도로 인해서 내가 얼마나 죽고 망하고 지옥에게 다 뺏겼는지? 양의 우리에 문으로 통과한 목자가 누구인지? 나는 절도와 강도는 영접하고 목자는 물리치고, 내가 절도와 강도가 되어서 나와 양을 죽인 일이 얼마나 많은지? 내가 정말로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가려고 애를 써서 문지기의 도움을 받아서 양의 우리에 문으로 들어간 목자인지? 우리가 똑똑히 회개합시다.
<기도> 목자와 절도와 강도를 구별하는 지혜를 주신 주님 앞에 감사를 드립니다. 과거를 경험삼아 이제는 목자와 절도와 강도를 똑똑히 구별하여 강도에게서 피해 도망치고 목자에게로 몰려들어 여생은 온전한 구원을 이루어 갈 수 있도록 은총을 주시고, 이제는 과거에 형제에게 절도 강도 노릇한 이 일을 다시는 거듭 하지 않게 하시고 어떻게 하든지 문지기의 도움을 입을 수 있는 목자되기를 힘써 목자가 됨으로 여생은 나와 다른 이를 구원하고 모든 목자에게서 구원을 받는 이 여생으로만 살 수 있도록 성령님으로 감화 감동시켜 깨닫게 하시고 확정을 짓게 하시고 단행하는 여생이 되도록 성령님으로 도와 주시옵소서.
주 예수님 이름을 간절히 기도드리나이다. 아멘.